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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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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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들은 호남(湖南) 사람에게 장가보내고, 딸은 영남(嶺南) 사람에게 시집보내라"
    선비 숙부인 고씨의 세계와 행적〔先妣淑夫人高氏世系行蹟〕 - 목재집 제8권 / 행장(行狀) : 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선비(先妣)의 성은 고씨(高氏)로 그 선대는 제주(濟州) 고씨에서 나왔다. 고려 말에 이르러 장택(長澤)을 관향으로 하사받았기 때문에 장흥(長興) 고씨가 되었는데, 지금의 광산(光山) 고씨이다. 나라의 기초를 닦고 업적을 쇄신한 일은 역사에 실려 있으며, 대대로 집안을 빛낸 일은 보첩(譜牒)에 수록되어 있다. 5대조 자검(自儉)은 증 참의(贈參議)이며, 비(妣)는 남양 홍씨(南陽洪氏) 도헌(都憲) 자아(自阿)의 딸이다. 도헌공이 영남 도사(嶺南都事)가 되었을 때 우리 문광공(文匡公)이 시를 주었는데, 양친(兩親)의 안부를 시에 가탁(假託)한 것이다. 고조부 운(雲)은 형조 정랑이고, 기묘사류(己卯士流)였으며, 증 예조 참판(贈禮曹參判)이다. 비(妣)는 광주 이씨(光州李氏) 제학(提學) 선제(先齊)의 증손녀이다. 증조부 휘 맹영(孟英)은 사간원 대사간이고, 증 좌의정(贈左議政)이다. 비(妣)는 남평 서씨(南平徐氏) 진사(進士) 걸(傑)의 딸이다. 조부 휘 경명(敬命)은 공조 참의(工曹參議) 지제교(知製敎) 겸 초토사(兼招討使)이고, 증 의정부 좌찬성(贈議政府左贊成) 겸 홍문관 대제학(兼弘文館大提學)이며, 시호는 문열공(文烈公)이다. 비(妣)는 울산 김씨(蔚山金氏) 부제학(副提學) 백균(百匀)의 딸이다. 고(考) 휘 종후(從厚)는 임피 현령(臨陂縣令)이고, 증 이조 참판(贈吏曹參判)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이다. 비(妣)는 철성 이씨(鐵城李氏) 충의(忠義) 복원(復元)의 딸이자 부원군(府院君) 원(原)의 후손이며, 부제학(副提學) 박승임(朴承任)의 외손녀이다.선비(先妣)는 만력(萬曆) 계미년(1583, 선조16) 11월 무신일(戊申日)에 태어났는데, 문열공과 태어난 날이 같기에 문열공이 기특해하며 사랑했다. 임진년(1592, 선조25)에 문열공이 전쟁에서 죽자 참판공은 의병을 일으켜 원한을 갚으려 했다. 당시 이부인은 안동에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선비(先妣)를 박씨 집에 머무르게 했다. 계사년(1593, 선조26) 봄에 두 어린 아이를 데리고 낮에는 숨고 밤에 달리는데, 여러 번 위태로움을 겪은 뒤에야 광주(光州)에 이를 수 있었다. 참판공은 군중(軍中)으로 나간 지 겨우 며칠밖에 되지 않았기에 의리상 가솔들과 얼굴을 대면할 수 없었다. 두 아들을 데려오게 해서 만나보고 작별인사하기를 “두 아들은 호남(湖南) 사람에게 장가보내고, 딸은 영남(嶺南) 사람에게 시집보내라.”라고 하면서 결국 떠났다. 진주성(晉州城)이 함락되어 그곳에서 죽자, 이부인은 유명(遺命)을 따랐다.갑진년(1604, 선조37)에 선비가 선군에게 시집오니, 선군은 문광공(文匡公)의 현손이다. 선비는 시부모를 섬기면서 시부모를 매우 기쁘게 했고, 초상을 당해서는 슬픔을 다하였고, 제사를 지낼 때는 정성을 다하였다. 남편을 섬기면서 부드럽고 상냥하며 공경하고 순종하여 남편의 뜻을 어기는 모습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고, 자기만 안일하고 편안하려는 뜻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친척들에게 화목하였고, 비복(婢僕)들에게 자애로웠다.집이 가난하여 옷가지와 음식이 넉넉하지 못했지만 집안일 처리가 매우 여유로웠으며, 선군이 벼슬하는 데 같이 있어도 정숙하면서 자신을 지킬 뿐이었다. 안음(安陰) 고을살이에서 돌아온 뒤로 읍인(邑人)들이 선군의 맑은 덕을 사모하여 많은 전별금을 주려고 했지만 선비께서 모두 사양했다. 일찍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데 힘을 다하지 못함을 애통하게 여겼으니, 왜화(倭貨)나 기이한 장신구를 물리치고 가까이 하지 않았다.숭정(崇禎) 임신년(1632, 인조10)에 선군(先君)께서 주청사 서장관(奏請使書狀官)이 되어 가묘(家廟)에 하직 인사를 드렸다. 한 달이 지나 선비께서 문득 개연(慨然)히 말씀하시길, “남편이 만 리 길을 배를 타고 떠났으니, 살아서 서로 만남을 기필(期必)할 수 있으랴.”라고 하며 즉시 행장(行裝)을 꾸려 서울로 달려가 작별 인사를 하고 돌아왔다. 이로부터 근심과 연민이 병이 되어 이듬해 계유년 4월 4일에 세상을 떠났으며, 다음 달에 선군이 돌아왔다. 갑술년(1634, 인조12) 1월에 안동부 남쪽 10리에 장례 지냈으며, 숙부인(淑夫人)에 추증되었다. 갑신년(1644, 인조22) 4월에 상주(尙州) 의곡(蟻谷) 을향지원(乙向之原)으로 이장했다.선비는 일찍이 2남 1녀를 낳았지만 모두 어릴 때 죽고, 뒤에 2녀 2남을 낳았다. 딸은 김벽(金璧)과 김섭(金燮)에게 시집갔다. 장남 여렴(汝濂)은 선비가 돌아가신 뒤에 죽었다. 차남은 여하(汝河)이며, 내외손은 10여인이다. 선비의 평소 아녀자로서의 모범과 아름다운 행실은 마땅히 여기에 그치지 않겠지만, 내가 어려서 잘 알지 못하기에 선군에게 들은 것을 근거로 해 오른쪽처럼 대략 기록한다. 특별히 외가 고씨(高氏)를 상세히 기록함은 후손들로 하여금 내외로 쌓인 선비의 덕이 그 유래가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이다. 슬픈 마음 하늘과 같아 다할 길 없으니, 오호 통재라.[주-D001] 도헌공이 …… 것이다 : 문광공(文匡公)은 홍귀달(洪貴達, 1438~1504)을 가리킨다. 홍귀달이 홍자아에게 보낸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함창 서편 푸른 산모퉁이에, 세 칸 낡은 건물이 바로 우리집이로다. 집 안에는 두 어버이 모두 백발이시니, 오늘의 안부는 정히 어떠하신지.〔咸昌西面碧山阿 老屋三間是我家 堂上兩親皆白髮 卽今安否定如何〕” 《虛白亭集 卷1 寄慶尙道都事洪君自阿》*홍여하는 영남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 외증조부가 임진왜란 때 의병장 제봉 고경명이다.
    2020-10-08 | NO.460
  • (김장생과 김집) 액호를 청하는 상소의 사연을 시행하지 않는 건-서원등록(書院謄錄)
    액호를 청하는 상소의 사연을 시행하지 않는 건 예조(禮曹)에서 상고(相考)하는 일. “광주(光州)의 생원(生員) 박상진(朴尙眞) 등이 올린 정문(呈文)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선생과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선생은 도덕과 학문이 온 세상의 종사(宗師)가 되는 만큼, 그분의 영향이 미친 곳에서는 모두가 그분께 보향(報享)하기를 숭상합니다. 더구나 본주(本州)는 바로 선생의 향관(鄕貫)으로서, 휘주(徽州)의 여러 사우(祠宇)에서 주자(朱子)를 향사하는 일과 비교됩니다. 우리나라를 상고해 보더라도 퇴계(退溪) 선생을 진보(眞寶)에서, 율곡(栗谷) 선생을 덕수(德水)에서 모두 향관인 이유로 향사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본주만은 왜 그렇게 하지 않는 것입니까? 본주의 서원은 일찍이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과 눌재(訥齋) 박상(朴祥), 사암(思菴) 박순(朴淳) 세 선생을 향사하여, 이미 은액(恩額)을 받은 곳이어서, 감히 조정에 아뢰지 않고 사사로이 향사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렇게 청합니다.’고 하였습니다. 정문에 의거하여 본조(本曹)에 있는 문서를 가져다 상고해 보니, 병술년(丙戌年, 1646, 인조24)에 숭현서원(崇賢書院)과 기유년(己酉年, 1669, 현종10)에 창주서원(滄洲書院)에 합향할 때, 모두 공문(公文)을 점련(粘連)하여 임금의 재결을 받은 뒤에 시행하였습니다. 지금 본주는 이미 두 선생의 향관으로서, 많은 선비들이 존경하고 흠모하는 도리가 있어 합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전례를 살펴보니, 이미 병술년과 기유년 두 해에 숭현서원과 창주서원에 합향한 전례가 있으므로, 정문에 따라 거행하되, 이 뜻을 알리어 시행하소서.”라고 하였다.
    2020-12-17 | NO.459
  • 〈양파정〉 시에 차운하다〔次揚波亭韵〕- 운양속집
    〈양파정〉 시에 차운하다〔次揚波亭韵〕 학산화상(鶴傘和尙)이 서석산(瑞石山) 약사암(藥師庵)으로부터 와서 방문하여 〈양파정〉 시를 내게 보여주면서 화답을 요청했다. 이 정자의 주인은 광주(光州)의 시인인 정낙교(鄭洛敎)인데 또한 아정한 선비이다.  :김윤식(金允植, 1835~1922)이런 유명한 정자 있어 돌아갈 곳 얻을 수 있으니 / 有此名亭得所歸자진이 어찌 세상과 서로 등지려 했겠나 / 子眞豈欲世相違거울 같은 봄 호수에 물고기의 즐거움 구경하고 / 鏡湖春水觀魚樂버드나무 정자 가을안개에 학이 날도록 놓아주네 / 柳墅秋烟放鶴飛꿈속의 공명 모두 환상이니 / 夢裡功名都是幻가슴 속의 산과 골짝을 의지할만하리 / 胸中邱壑可堪依은거의 좋은 점 아는 사람 없으니 / 幽居勝事無人識오직 이웃 승려 대사립 문 두드림을 허락하리 / 惟許隣僧欵竹扉[주-D001] 학산화상(鶴傘和尙) : 1912년 11월 22일 《조선총독부 관보》 제95호에 ‘주지취직인가(住持就職認可)’라는 제목의 기사에 전라남도 장흥군(長興郡) 보림사(寶林寺)의 주지로 김학산(金鶴傘)이란 이름이 있다. 1915년 8월 20일자 《조선총독부 관보》 제915호에 ‘주지이동(住持異動)’이라는 기사에도 동일한 내용이 보인다.[주-D002] 서석산(瑞石山) : 호남 광주 무등산의 옛 이름이다.[주-D003] 자진(子眞) : 서한(西漢) 때 인물 정박(鄭璞)으로, 자는 자진이다. 성제(成帝) 때에 외척대신(外戚大臣) 왕봉(王鳳)이 예의를 다해 초빙해도 응하지 않고 곡구에서 살면서 호를 곡구자진(谷口子眞)이라고 했다. 《漢書 卷72 高士傳中》[주-D004] 물고기의 즐거움 : 장자(莊子)가 친구인 혜자(惠子)와 호량 위에서 함께 노닐 적에 장자가 말하기를, “피라미가 나와서 조용히 놀고 있으니, 이는 저 물고기의 낙(樂)이네.” 하자, 혜자가 말하기를, “자네는 물고기가 아닌데, 어떻게 물고기의 낙을 안단 말인가.” 하니, 장자가 다시 말하기를, “자네는 내가 아닌데, 어떻게 내가 물고기의 낙을 모른다는 것을 안단 말인가?”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莊子 秋水》[주-D005] 학이 날도록 놓아주네 : 동진의 명승 지둔(支遁)이 어린 학 한 쌍을 선물 받았다. 날개가 조금 자라 날아가려고 하니 날갯죽지를 조금 잘라 날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자 학이 늘 날개를 흔들며 괴로워하는 빛이 있었다. 지둔이 말하기를 “이미 하늘로 솟구치려는 뜻이 있는데 어찌 사람의 노리개가 되겠는가.” 하고 날개를 자라게 하여 놓아주었다. 《世說新語 卷2 言語》
    2020-12-31 | NO.458
  • 《고갑신편》의 서문〔蠱甲新編序〕 - 동강유집 제10권
    《고갑신편》의 서문〔蠱甲新編序〕 - 동강유집 제10권 : 동강(東江) 신익전(申翊全, 1605~1660)《주역》 〈고괘(蠱卦)〉 효사(爻辭)에 ‘선갑삼일 후갑삼일(先甲三日, 後甲三日)’이라고 하였는데, 고(蠱)는 일이고, 갑(甲)은 때이니, 앞의 3일은 시작하는 것이고 뒤의 3일은 마치는 것이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번번이 일을 만나는데 일은 천만 가지가 있다. 평상시에나 변화를 만났을 때나 그 중도를 지킬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것은 성현도 어렵게 여기신 것인데 하물며 난세의 끝에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이라면 어떠하겠는가. 제갈무후(諸葛武侯 제갈량)는 왕좌(王佐)의 재주를 가진 사람이다. 주군에게 “다스리기 어려운 것이 일입니다.〔難平者事也〕”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선갑삼일 후갑삼일’의 은미한 뜻을 알았던 것이 아니겠는가.내가 태어난 지 겨우 43년인데, 참으로 천지가 뒤바뀐 때를 만나 내우외환(內憂外患)을 겪느라 전후로 근 천년 동안 만나기 어려운 일이 모두 목전에 모여 어떻게 해결할 방도가 없다. 이러한 때 나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야 할 책임이 어떠하겠는가. 하지만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뜻이 약해져 마치 장님에게 도와주는 사람이 없는 것과 같으니 큰 길에서도 쉬이 길을 잃을 판인데 태항산(太行山) 험한 길에 수레가 부서진 이러한 상황에서야 어떠하겠는가.이 때문에 우울해서 누구와도 말을 나누지 않고, 그저 옛 책을 가져다 옛사람이 먼저 얻은 것을 찾았다. 그러나 주공(周公) 이후로 더 이상 선정이 없었고 사변이 일어나는 것은 후대로 내려올수록 더욱 심해져서, 무지한 나로서는 늦게 태어났다는 한탄만 더할 뿐이었다. 매번 책에서 위기를 볼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리지 않은 적이 없어서 마치 묵은 병을 가진 사람이 의서(醫書)를 보고 또 보고 하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나는 본래 어리석어서 잘 기억하지 못한다. 방금 덮은 책도 읽지 않은 것 같을 정도이니, 마음에 드는 글을 볼 때마다 쪽지에 적어 잊어버릴 것에 대비한 지가 몇 년이나 되었다.아들 정(晸)이 옆에 있다가 깨끗이 써서 책으로 엮을 것을 청하고 또 표제를 써 달라고 청하였다. 그래서 ‘고갑신편(蠱甲新編)’이라고 제목을 달았으니 고괘(蠱卦)의 뜻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기록한 것은 모두 전국 시대 칠웅(七雄) 이후 쇠퇴한 말세의 문헌이니 고(蠱)를 만나 고괘의 도에 어긋나지 않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그러나 10월은 모두 음효(陰爻)인데 선유들이 도리어 양월(陽月)이라고 부른 것은 양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표제를 지은 의도는 음(陰)을 억제하는 뜻을 담은 것이고 또 일을 다스리기 어려움이 이와 같다는 것을 보여 스스로 힘쓰고자 한 것이다. 뒤에 보는 사람들이 나의 이 뜻을 참람하게 여기지 않고 안타깝게 여겨줄지 모르겠다.정해년(1647, 인조25) 겨울, 일헌도인(一軒道人)은 광산(光山)에서 이 글을 쓴다.[주-D001] 고갑신편의 서문 : 1647년(인조25), 저자 나이 43세에 쓴 글이다. 이때 저자는 광주 목사(光州牧使)를 지내고 있었다.[주-D002] 다스리기 …… 일입니다 : 제갈량(諸葛亮)의 〈출사표(出師表)〉에 나오는 말이다.[주-D003] 태항산(太行山) …… 부서진 : 태항산은 중국 하남성(河南省)에 있는 산으로 매우 험준하기로 유명하다. 백낙천(白樂天)의 〈태항로(太行路)〉란 시에, “태항산 길이 능히 수레를 부수지만 임금의 마음에 비긴다면 평탄한 길이요, 무협의 물이 능히 배를 전복시키지만 임금의 마음에 비긴다면 안온한 흐름이다.〔太行之路能摧車, 若比君心是坦途. 巫峽之水能覆舟, 若比君心是安流.〕” 하였다.
    2020-10-07 | NO.457
  • 《금호집》 발문〔錦湖集拔〕 -문곡집
    《금호집》 발문〔錦湖集拔〕 -문곡집 제26권 / 제발(題跋) : 김수항(金壽恒, 1629~1689)금호(錦湖) 임공(林公)께서 재앙을 만난 지 지금으로부터 130여 년이 되었다. 그러나 학사대부(學士大夫)들은 공의 죽음을 언급할 적마다, 여전히 기가 막히고 목이 메어 심지어 눈물을 줄줄 흘리는 사람도 있다. 이 어찌 그 앙화가 애통하고 그 사람이 애석해서가 아니겠는가. 이 때문에 공이 남긴 작품들을 사람들이 아끼고 보배로 여김 또한 위대한 걸작 정도일 뿐만 아니었으니, 비록 자투리 문장이나 쪼가리 원고라도 반드시 세상에 전해지도록 하였다. 그렇지만 공의 후손들은 영락하고, 세상에는 더 이상 의리를 사모하고 현인을 좋아하여 공을 위해 힘을 기울이는 선비가 없이 오늘에 이르렀으니, 상론(尙論)하는 사람조차 한탄하였다.내가 남쪽 땅에 죄인의 몸으로 거처하는데 유생 응수(柳生應壽)가 찾아왔으니, 그는 공의 외손이었다. 그는 소매에 넣어 온 시문 1책을 내보이며 내게 뒤섞이거나 잘못된 걸 바로잡고, 또한 공의 유사(遺事)를 엮어 권말에 첨부해 주기를 부탁하였다. 나는 적임자가 아니라서 부끄러웠지만, 또한 끝내 사양할 수가 없었다. 마침 이공 민서(李公敏敍)가 외직을 맡아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나왔는데, 얼른 이를 가져다 목판에 새기고 또 서문을 지어 책머리를 장식해서 세상에 드러냈다. 참으로 이공 같은 사람은 이른바 의리를 사모하고 현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하겠다.일을 마치자 유생(柳生)은 또 내게 한마디 말을 요청하였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이공의 글에서 이미 다 해 버렸으니, 어찌 내가 췌언을 하겠는가. 그렇지만 내게는 남몰래 가슴속에 감동을 받은 것이 있었다.공의 호탕한 재주와 곧은 기상은 당대에 우뚝 빼어났는데, 세상에서 공을 아끼고 중시하던 사람들이 모두 명현이나 승류(勝流 명사(名士))들이었음은 부록의 여러 시문을 보면 알 수가 있으니, 공의 죽음에 대해 애석해하는 것은 참으로 까닭이 있다. 심지어 오랑캐 부락의 추한 무리들까지 오히려 공의 은혜를 가슴에 품고 공의 죽음을 탄식할 줄 알았으니, 또한 우뚝하고 더욱 기이하지 않은가. 하물며 공께서 세상을 뜨신 지 백 수십 년의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오히려 목이 메어 눈물을 흘리며 심지어 자투리 문장이나 쪼가리 원고라도 또한 아끼고 완미(玩味)해서 반드시 세상에 전하고자 하기에 이르렀으니, 그 또한 누가 시켜서 그러하겠는가?이는 다름이 아니다. 사람이라면 양심을 지키고 덕을 좋아하는 것이 똑같기에, 풍속이 다르거나 시대가 뚝 떨어졌다고 하더라도, 전혀 차이 없음이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저들은 같은 조정에 나란히 서서 의관을 차려입고 시서(詩書)를 암송하다가, 도리어 원수처럼 여기고 물여우처럼 엿보아 필연코 베어 죽이고서야 유쾌하게 여겼으니, 유독 무슨 마음인가.아, 구양수(歐陽脩)의 말에 “선비의 삶과 죽음이 어찌 그 한 몸의 일이겠는가?〔士之生死, 豈其一身之事哉?〕”라고 하였다. 공의 삶과 죽음은 참으로 세도(世道)와 관련이 있다고 말할 수 있으니, 살아서 사랑을 받고 죽어서도 아깝다고 여긴 것은 또한 공 혼자만의 몸 때문만은 아니었다.현인을 원수처럼 여기고 앙화를 즐거워하는 무리들의 경우, 호오(好惡)의 천성이 어찌 여느 사람과 유독 다르겠는가. 오로지 자기 한 몸의 사욕을 만족시키는 데 급급하여 다른 데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하나의 생각이 털끝만큼이라도 어긋나게 되면, 말류(末流)의 앙화가 마침내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니, 뒷날 이 문집을 보는 사람은 또한 경계해야 할 바를 알 수 있으리라. 나도 이로 인해 거듭 탄식하노라.공의 묘소는 금강 가에 있지만, 아직까지 두어 자 정도의 묘갈문도 묘도(墓道)에 세워져 있지 않으니, 이 길을 지나는 사람들이 탄식하고 슬퍼하는 바이다. 혹시라도 이공처럼 의리를 사모하고 현인을 좋아하는 사람이 다시금 나와 묘갈 세울 방도를 도모해서, 백 세대의 후인들로 하여금 충성을 다하다가 돌아가신 공의 몸이 이곳에 묻혔음을 알게 한다면, 어찌 더욱 내세에 풍성(風聲 풍교(風敎))을 세우고 후세에 덕을 밝힘이 아니겠는가. 이공이 벌써 앞에서 이끌었으니, 그 뒤를 이을 사람으로 어찌 적임자가 없으랴? 나는 장차 그를 기다리노라.[주-D001] 금호(錦湖) 임공(林公) : 임형수(林亨秀, 1504~1547)로,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사수(士遂), 호는 금호이다. 임준(林畯)의 아들이다.[주-D002] 걸작 : 원문의 ‘길광지우(吉光之羽)’에서 길광은 신마(神馬)라고 한다. 《십주기(十洲記)》에 “한 무제(漢武帝) 천한(天漢) 3년에 서국왕(西國王)이 길광의 모구(毛裘)를 바쳤는데, 색이 황백으로 대개 신마의 일종이다. 그 모구가 물에 들어가서 여러 날이 되어도 가라앉지 아니하고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는다.” 하였다. 그 후 문인(文人)의 시장(詩章) 가운데 잔여(殘餘)에서 겨우 발견된 진품이나 걸작을 길광편우(吉光片羽)라고 일컬었다.[주-D003] 상론(尙論) : 고인(古人)의 언행이나 인격을 논하는 것을 뜻한다.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천하의 훌륭한 학자들과 벗하는 것만으로는 아직 만족스럽지 못하여 다시 위로 옛사람을 논의한다.〔以友天下之善士, 爲未足, 又尙論古之人.〕”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주-D004] 이공 민서(李公敏敍)가 …… 드러냈다 : 이민서의 서문은 《서하집(西河集)》 권12에 〈금호유고서(錦湖遺稿序)〉로 남아 있다.[주-D005] 오랑캐 …… 알았으니 : 임형수가 회령 판관으로 있을 때의 치적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국역 중종실록》 34년(1539) 7월 13일 회령 판관에 임형수를 임명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주-D006] 물여우 : 물여우는 물속에 사는 독충(毒蟲)으로, 사람 몰래 그림자를 보고서 독기를 쏘아 병들게 한다는데, 보통 음모를 꾸며 남을 해치는 자를 비유한다. 《시경》 〈하인사(何人斯)〉에 “귀신이나 물여우는 볼 수가 없다고 하지만, 너는 뻔뻔스럽게 얼굴을 들고서, 끝없이 사람을 보는구나.〔爲鬼爲蜮, 則不可得. 有靦面目, 視人罔極.〕”라는 말이 나온다.[주-D007] 선비의 …… 일이겠는가〔士之生死, 豈其一身之事哉?〕 : 이 말은 《당송팔대가문초(唐宋八大家文鈔)》 권44 〈오대사당육신전론1(五代史唐六臣傳論一)〉에 나온다.[주-D008] 충성을 다하다가 돌아가신 : 원문의 ‘화벽(化碧)’은 충성을 다하다가 살신(殺身)함을 이르는 말이다. 주(周)나라 경왕(敬王) 때의 대부(大夫)인 장홍(萇弘)이 충간(忠諫)을 하다가 왕이 들어주지 않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그 피를 보관한 지 3년 만에 푸른 옥으로 변하여 오랫동안 없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莊子 外物》
    2020-12-14 | NO.456
  • 《손재집》 발문〔遜齋集跋〕 [이민보(李敏輔)]
    《손재집》 발문〔遜齋集跋〕 [이민보(李敏輔)] 호남(湖南)의 학문은 하서(河西)와 고봉(高峯)에게서 말미암아 백여 년이 되었는데, 고(故) 징사(徵士) 손재(遜齋) 박공(朴公)이 일어났다. 공은 우헌공(寓軒公)의 아들로 나이 겨우 약관의 나이에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의 호(號)) 노선생을 사사(師事)하여 오가며 질문을 하니, 벌써 영특하기가 남달랐고, 만년에 이르러서는 더욱 깊고 은미한 이치를 탐색하고 연구하여 정밀하게 사유하고 자세히 논하였다.저술이 모두 이십 편으로, 성명(性命)의 오묘함과 괘상(卦象)의 이치에서부터 의문(儀文)과 도수(度數)의 세밀함에 이르기까지, 그 견해가 분명하였기 때문에 말이 물샐틈없는데, 대부분 질박(質朴)하여 문식(文飾)을 가함이 없고, 광범위하면서도 연원이 있었다. 요컨대 경(經)과 예(禮)의 본지(本旨)를 천명하고자 함이었으니, 문사(文辭)는 애초부터 달가워하지 않았다.답문(答問)이나 소(疏)ㆍ변(辨) 등은 또한 장중하면서도 바르고 넉넉하면서도 무성해서, 사문(斯文)의 흥망(興亡)과 크게 관련이 있었기에, 당시 동문(同門)의 제공(諸公)들도 마음으로 허락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호남의 선비들도 우르르 그를 따르면서 노선생의 도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편파적인 말에 현혹되지 않았으니, 공(公)의 공(功)이 많았도다. 오호라! 비록 하서와 고봉의 뒤를 이은 한 사람이라고 말해도 어찌 지나치다 하겠는가?공의 손자 하진(夏鎭)이 공께서 남긴 글을 장차 인쇄하고자 하면서, 다듬고 손보는 역할을 내게 맡겼다. 삼가 9편으로 거칠게나마 정하고 나서, 외람되이 그 아래에다 한마디 말을 붙인다.“문(文)의 전승(傳乘)은 적을수록 더욱 오래 전해지는 법이지만, 공(公)에 관해 전할 만한 실상(實相)은 또한 문(文)에 있지 않도다. 공의 글이 귀한 까닭은 공허한 말[虛言]이 아니기 때문이다.”연안(延安) 이민보(李敏輔)는 삼가 쓰다.[주-D001] 하서(河西)와 고봉(高峯) : 하서는 김인후(金麟厚, 1510~1560)의 호이다. 본관은 울산(蔚山),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ㆍ담재(湛齋),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이황(李滉) 등과 교우가 두터웠으며, 제자로 정철(鄭澈), 변성온(卞成溫), 기효간(奇孝諫), 조희문(趙希文), 오건(吳健) 등이 있다. 1796년(정조20)에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장성(長城)의 필암서원(筆巖書院)과 옥과(玉果)의 영귀서원(詠歸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하서집》ㆍ《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ㆍ《서명사천도(西銘事天圖)》ㆍ《백련초해(百聯抄解)》 등이 있다. 고봉은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의 호이다.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ㆍ존재(存齋),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이황의 문인이다. 저서에 《고봉집(高峯集)》 등이 있다.[주-D002] 징사(徵士) : 학문과 도학이 높아, 조정의 천거로 부름을 받은 선비를 가리키는 말이다.[주-D003] 우헌공(寓軒公) : 박상현(朴尙玄, 1629~1693)을 가리킨다. 자는 경초(景初), 호는 우헌, 본관은 순천(順天)이며, 전라도 광주(光州)에서 학문에만 전념한 학자이다. 아들 박광일(朴光一)을 송시열에게 보내 학문을 배우게 하였고, 그의 문집인 《우헌집(寓軒集)》에 송시열과 주고받은 편지가 여러 편 있으며, 송시열은 그를 모년지기(暮年知己)로 허여하였다고 한다. 《韓國文集叢刊解題 4輯 寓軒集, 遜齋集》
    2020-12-28 | NO.455
  • 《오산동 향약》 서문〔鰲山洞鄕約序〕 -손재집
    《오산동 향약》 서문〔鰲山洞鄕約序〕 -손재집 제8권 / 서(序) : 박광일(朴光一, 1655~1723)옛날에는 향약(鄕約)을 모두 한 나라에 시행하였기 때문에 폭넓게 시행되고 멀리까지 파급되었으니, 국가에서 백성을 교화하여 풍속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도 이것으로 말미암았다. 후대로 내려와 말세가 되면서 교화가 쇠퇴하고 풍속이 무너지자 남전(藍田)에 남긴 법이 쓸쓸히 사라졌으니, 옛날의 이른바 ‘풍속이 깨끗하고 아름다워서 위에서 편안하고 아래에서 순종한다’는 것을 오늘날 다시 볼 수 없으니, 아, 슬퍼할 만하다.지금 마을의 부로(父老)들이 서로 상의하여 향약의 법(法)을 정하는데, 다만 우리 광주(光州)는 면적이 커서 하루아침에 일제히 옛것을 회복할 수 없으니, 그렇다면 우선 우리 오산동(鰲山洞)에만 시행하여 주변의 본보기가 되게 하는 것도 간혹 시의(時宜)를 따르는 한 방도가 될 것이다. 이에 나에게 향약의 조항을 수정하여 보완하라고 부탁하니, 내가 감히 《여씨향약(呂氏鄕約)》과 율곡(栗谷) 선생이 가감한 향약을 참고해서 수정하였다.대개 그 규모의 큰 틀은 《여씨향약》을 본받았고, 절목(節目)과 조례(條例)는 율곡 선생이 가감한 향약을 대부분 취하였지만, 또한 내가 가감한 부분도 없지 않다. 이는 번잡한 부분은 간략히 하고 소략한 부분은 자세히 만들며, 시대와 맞지 않는 것은 없애고 오늘날에도 적합한 것은 남겨 두어 마침내 고쳐서 한때의 법을 만든 것이다. 주제넘은 행동에 죄를 피할 수 없음을 잘 알지만, 우리 주부자(朱夫子 주희(朱熹))는 진실로 《여씨향약》을 가감할 적에 단지 고금의 마땅한 것을 헤아려 그 중도를 얻게 하였을 뿐이었고, 율곡 선생이 가감한 향약도 대체로 이런 뜻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오늘날 가감한 것이 중도를 얻었다고 내가 감히 말할 수는 없지만,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해서 풍속을 아름답게 만드는 방도에 있어서는 아마도 큰 하자는 없을 듯하다.[주-D001] 남전(藍田)에 남긴 법 : ‘남전’은 중국 섬서성(陝西省)의 고을 이름이다. 송(宋)나라 때 남전에 살던 여대충(呂大忠), 여대방(呂大防), 여대균(呂大鈞), 여대림(呂大臨) 등 형제 네 사람이 고을 사람들과 서로 지키기로 약속한 자치 규범으로, “덕과 업을 서로 권하고[德業相勸], 과실을 서로 바로잡아 주고[過失相規], 예의 바른 풍속으로 서로 사귀고[禮俗相交], 근심스럽고 어려울 때 서로 구휼한다[患難相卹].”라는 등 네 조목인데, 후세 향약의 기준이 되었다. 《小學 卷6 善行》 본문에 보이는 《여씨향약》은 이를 가리킨 것이다.[주-D002] 주부자(朱夫子)는 …… 않았다 : 향약의 발단은 송대(宋代)의 〈남전여씨향약〉으로부터 비롯되었고, 주희(朱熹)에 의해 〈증손여씨향약(增損呂氏鄕約)〉이 제정되어 향약을 보급하는 계기가 되었다. 주희의 〈증손여씨향약〉은 조선조에 들어와서 통치이데올로기였던 성명의리지학(性命義理之學)의 실천 모형이 되었다. 1571년(선조4) 이이(李珥)는 〈여씨향약〉 및 〈예안향약〉을 근거로 〈서원향약(西原鄕約)〉과 이를 자신이 수정 증보하여 1577년에 〈해주향약(海州鄕約)〉을 재편성하였다. 《유성선, 율곡 향약에 나타난 사회사상 연구, 철학탐구 제18집, 중앙대 중앙철학연구소, 2005, 9쪽》 우리나라에는 주자의 향약이 고려 말 이래 성리학의 수용과 더불어 전래되었다. 그러나 이것에 대한 관심이 본격화한 것은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어 가던 조선 시대 16세기 이후였다. 또한 이 시기에는 각 향촌사회에서 재지사족들이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여 중앙 정계에서 사림파를 형성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즉, 향약에 대한 관심은 성리학에 대한 이해의 심화와 그 주체인 재지사족층이 정치적으로 성장하여 사림세력을 형성하는 16세기에 이르러서 본격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정진영, 향약, 퇴계가 꿈꾼 이상사회, 안동학연구 제12집, 한국국학진흥원, 2013, 58쪽》
    2020-12-28 | NO.454
  • 武珍遺俗故凶奸 - 점필재집 시집 제21권
    광주 사람이 그곳 판관 우윤공을 쏘아서 팔뚝을 맞혔는데, 윤공은 화순으로 달아났다[光州人射其判官禹允功中臂允功奔和順] - 점필재집 시집 제21권 : 김종직(金宗直, 1431~1492)무진의 남긴 풍속은 본디 흉하고 간악하여 / 武珍遺俗故凶奸어린아이가 능히 적백환을 더듬어 취했네 / 童子能探赤白丸태평시에도 분수를 범할 줄 어찌 알았으랴 / 豈意治朝猶犯分처음 들으매 쇠한 머리털이 관을 찌르누나 / 初聞衰髮尙衝冠창랑은 스스로 군저의 노염을 불렀거니와 / 滄浪自致群狙怒매질은 장차 백 가호의 해독을 이루겠네 / 箠楚將成百室殘봉생정 아래 길에서 부절 멈추고 있노라니 / 弭節鳳笙亭下路풍속 바꿀 꾀 없어 왕관 된 게 부끄럽구나 / 轉移無術愧王官[주-D001] 적백환을 더듬어 취했네 : 한 성제(漢成帝) 때에 장안(長安)의 소년들이 암살단(暗殺團)을 조직하여 적(赤)ㆍ백(白)ㆍ흑(黑) 삼색(三色)의 탄환(彈丸)을 만들어 놓고 서로 더듬어서 적환(赤丸)을 취한 자는 무리(武吏)를 죽이고, 백환(白丸)을 취한 자는 문리(文吏)를 죽이고, 흑환(黑丸)을 취한 자는 장사(葬事)를 주관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漢書 卷九十》[주-D002] 창랑은……불렀거니와 : 저격을 받은 장본인이 스스로 저격받을 짓을 했음을 비유한 말. 군저(群狙)는 뭇 원숭이인데, 저(狙)는 곧 저격(狙擊)의 뜻을 취한 것이다. 유자(孺子)가 노래하기를 “창랑(滄浪)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을 수 있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을 수 있다.”고 하니,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소자(小子)들아, 들어 보아라. 맑으면 갓끈을 씻고, 흐리면 발을 씻게 되니, 물이 스스로 취한 것이다.” 한 데서 온 말이다. 《孟子 離婁上》
    2020-09-26 | NO.453
  • 莫向春風賦式微- 점필재집 시집 제22권
    광주 목사 유양이 판관의 화살 맞은 사건으로 재차 형신을 받고 지금 남평현으로 옮겨져 수감되어 있으므로 시 두 수를 부치다[光州柳牧使壤以判官中箭事再被刑訊今移繫南平縣寄詩二首]  - 점필재집 시집 제22권봄바람을 향하여 식미를 짓지 마소 / 莫向春風賦式微강매는 눈송이 같고 버들은 무성하구려 / 江梅如雪柳依依내일 아침 천묘에 빈아를 연주하거든 / 明朝千畝吹豳雅응당 사면령 받고 한번 웃으며 돌아가리 / 應逐金雞一笑歸봄 경치 화창하니 술이나 사서 마셔야지 / 春光淡蕩酒須賒고르지 못한 세상일에 서두를 것 없어라 / 世事參差莫畫蛇한 조각 시 생각을 좋이 수습했다가 / 一段吟魂好收拾목란의 배를 장차 한강 물결에 띄우자꾸나 / 蘭舟將泛漢江波[주-D001] 식미 : 《시경(詩經)》 패풍(邶風)의 편명인데, 내용은 국운(國運)이 쇠함을 슬퍼한 노래이다.[주-D002] 빈아를 연주하거든 : 빈아는 《시경(詩經)》 빈풍(豳風) 칠월(七月)을 이르는데, 《주례(周禮)》 춘관(春官) 약장(籥章)에 의하면 “무릇 나라에서 신농씨(神農氏)에게 풍년을 기원할 적에는 빈아를 피리로 연주한다.” 하였다.
    2020-09-26 | NO.452
  • 賀趙侯(雲漢) 晬宴(조후의 생신을 축하하다)
    성   명 :장태경(張泰慶)자       :자화(子華)호       :우잠(愚岑)생몰년 :1809~1887문집명 :우잠만고(愚岑漫稿)葭籥云暮 桃符更新 伏念我侯遐祺 卽仰希七之華甲 微民賤跡 亦幸順五之同庚 桑門煉丹 自切壽鄕之祝 梅閣依斗 尤倍京華之望 玆將菲薄之儀 敢陳忻忭之意 伏望同抱之澤 無物不容 用蘄遐齡 願享熙熙之樂 務察窮巷 俾副區區之忱가약이 저물어 도부가 다시 새롭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우리 조후께서는 복이 많아 칠순을 바라보는 화갑이 되셨습니다. 미천한 백성인 저의 삶도 또한 다행히 쉰 살 생일이 되었습니다. 사찰이나 도관에서나 장수를 기원하는 축수가 절절하고, 매화 핀 관청에서는 더욱 서울 인사들의 존경이 배가됩니다. 이에 별 것 아닌 선물로 감히 기쁨의 뜻을 전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함께 품어안는 은택으로 어떤 존재라도 용납하십시오. 천수를 누리시길 기원하고 화락한 즐거움을 누리십시오. 곤궁한 동네를 힘써 살피셔서 작은 저의 마음에 부응해주십시오.¹ 조운한(趙雲漢) : 고종 9년(1872년) 8월 25일 광주목사에 임명
    2021-04-09 | NO.451
  • 강남간사록〔江南幹事錄〕 - 미산집
    강남간사록〔江南幹事錄〕 직무 수행 기록 - 미산집 제8권 / 기(記) : 한장석(韓章錫, 1832~1894)갑술년(1874) 2월에 나라에 원자(元子) 탄생의 경사가 있어 증광시를 시행하였으므로 내가 왕명을 받고 호남좌도에 가게 되었다. 3월 상순 임자일에 대궐에 이르러 하직인사를 올리고 계판(啓板) 앞에서 별도로 분부를 받들었다. 또 특명(特命)으로 중희당(重煕堂)에 입대(入對)하여 직접 하유(下諭)를 받들었는데, 공정함을 갖추도록 힘쓰고 주선을 편리하게 하도록 노력하라는 말씀이었다. 그리고 여정의 원근과 왕복에 걸리는 시간을 물어보셨는데 말씀이 간곡하고 근엄하셨다. 은혜로이 돌아봐주시고 정중히 접대해주신 것은 대개 특별한 대우이다. 물러나 가만히 스스로 생각해보니 천신(賤臣)이 수십 년간 문필에 종사하면서 과거장에서 고생하며 대양(對揚)하리라는 일념을 일찍이 마음에 맹세했었다. 하물며 이제 지척에서 임금의 말씀을 들으매 돈어(豚魚)를 감읍시킬 만한데, 어찌 감히 털끝만큼이라도 사사로운 뜻을 품겠으며, 두려운 마음으로 분발하여 정성과 노력을 다해 우러러 선발하여 보내시는 지극한 뜻에 부응할 생각을 하지 않겠는가? 시 한 수를 지어 뜻을 나타내고 절을 올리고 대궐을 물러나와 노량진을 건너는데, 청지기 김희상(金煕祥)ㆍ최경순(崔景淳)과 하인 김원길(金元吉)이 따라왔다. 고리(故吏) 오용묵(吳容默)이 일 때문에 남쪽으로 내려가게 되어 또한 함께 하였다. 해 질 녘에 문성동(文星洞) 선영에 두루 참배하고 시흥현(始興縣)에서 묵는데 수령 이근집(李根集)이 나와서 만나 보았다.계축일에 일찍 출발하여 부곡(富谷)의 여러 선조들 묘소에 성묘하고 점사(店舍)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광주(廣州) 주전(厨傳)이었다. 율전(栗田)에 있는 할아버지 묘소에 들러 참배하고 저녁에 화성부(華城府)에 이르렀다. 명령을 전하여 거쳐 가게 되는 여러 고을의 모든 친지와 인사들에게 만나러 오지 말도록 했다. 문지기에게 경계하여 편지나 명함을 통하지 말도록 하니 이르는 곳마다 엄숙하였다.갑인일 한낮에 진위현(振威縣)에 이르니 현령 목양석(睦養錫)이 나와서 만나보았다. 저녁에 성환역(成歡驛)에서 묵었는데 직산(稷山) 주전(厨傳)이었다.을묘일 한낮에 천안군(天安郡)에서 쉬는데, 군수 이민성(李敏性)이 나와서 만나보았다. 저녁에 광정역(廣亭驛 공주목에 속함)에서 묵었다. 병진일 한낮에 금강(錦江)에서 밥을 먹고 저녁에 노성현(魯城縣)에서 잤다.정사일 한낮에 은진현(恩津縣)에서 쉬는데, 현령 조종필(趙鍾弼)이 나와서 만나 보았다. 황화정(皇華亭)에 이르렀는데 호남의 첫 경계이다. 영읍(營邑)에서 맞이하는 의식이 이곳부터 점차 성대해졌다. 저녁에 여산부(礪山府)에 머물며 근민헌(近民軒)에서 묵는데 부사(府使) 권인병(權寅秉)이 들어와 만나보고 묵은 회포를 풀었다.무오일에 시읍(試邑) 화순현(和順縣)에 공문을 보내 많은 선비들에게 포고하기를 각기 마음을 다해 공부에 정진하고 부정한 방법을 쓰지 말도록 하였다. 낮에 삼례역원(參禮驛院)을 거쳐 저녁에 전주부에 이르렀다. 판관 김계진(金啓鎭)이 하루 전에 와 있어서 반갑게 만나 즐거움을 다하였다.기미일에 안찰사 조성교(趙性敎)가 나와서 만나보고 선화당(宣化堂)으로 맞아 들여 술자리를 마련하고 기악(妓樂)을 베풀어 대접해주었다. 비에 막혀 그대로 머물렀다.경신일에 비가 그치자 늦게 출발하여 유점(鍮店)에서 점심밥을 먹었는데, 전주 관주(官厨)에서 제공한 것이었다. 산길로 6, 7리를 가서 운암강(雲巖江)에서 배를 타고 가니 골짜기 여울이 매우 세찼는데 비가 온 뒤라 더욱 기세가 강했다. 배는 작고 사람은 많은데다 해 질 녘이 되자 바람이 높아져 건너기를 다투는데 날이 저물어서야 비로소 뭍으로 오를 수 있었다. 여기서부터 이 강물을 끼고 고개를 넘으니 잔로(棧路)는 매우 좁았지만 바위 틈 골짜기의 농장이며 밭과 촌락이 서로 바라보이고 뽕나무와 대나무며 가시나무 사립문이 은은히 그림과 같아서 닭과 개를 이끌고 가서 살고 싶을 지경이었다. 밤이 깊어 갈담점(葛覃店)에 이르렀고 임실(任實)에서 묵었다.신유일에 또 배를 타고 운암강 하류를 건너 정오에 순창군(淳昌郡)에서 쉬었다. 군수 조태영(趙台永)이 만나러 나와서 기녀를 대동하여 풍악을 울리고 함께 응향각(凝香閣)에 올랐다. 응향각은 군문(軍門) 안의 큰 못 가에 있는데, 붉은 기둥은 거울 같은 수면에 어리고 푸른 연잎이 바람을 부채질하며 아름다운 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며 고운 놀잇배를 마주해 있어 시원하게 트였으면서도 맑고 그윽하고 온갖 형상이 모두 잠겨 있으니 그곳을 호남의 명루라 일컫는데, 기녀와 관현의 성대함 역시 한 도의 으뜸이라고 할 만하다. 연주가 끝나기도 전에 〈여구(驪駒)〉가 이미 불리니 구점(口占)으로 시 한수를 짓고 작별하였다. 밤 2고(二鼓 10시 경)에 담양부(潭陽府)에 당도하니 부사 이승경(李承敬) 어른이 나오셔서 만났고 또한 노래하는 기녀들이 술자리를 도왔다.임술일에 5십 리를 가서 광주목에 이르러 잤다. 고을에 당도하기 5리쯤 전에 큰 도랑과 긴 숲이 길 왼편을 끼고 있었는데 연꽃이 필 때여서 서호(西湖)의 멋진 풍광보다 못하지 않았다. 목사 박봉하(朴鳳夏) 어른은 아버지의 친구이신데 만나 뵙자 매우 기뻐하셨다. 남평(南平) 사또인 벗 이위재(李渭在)는 부시관(副試官)으로 부안 사또인 벗 이영(李永)과 함께 와서 만났는데 천리 길에 부평초처럼 만나니 참으로 즐거워할 만하였다.계해일에 화순현을 향해 출발하는데 비가 갑자기 쏟아졌다. 험준한 절벽인 판치(板峙)를 넘어 10여 리를 말달려 읍에 당도하였다. 높은 가마를 타고 공복을 갖춰 입고 서양관(瑞陽館)으로 들어가 망궐례(望闕禮)를 행했다. 극위(棘圍) 밖에서 스물다섯 고을에서 책 상자를 지고 온 선비들이 길을 끼고 비를 맞으며 담처럼 둘러서서 보았다. 동청(東廳)으로 들어가 부시관 및 참시관인 동복(同福) 현감 이학래(李鶴來) 및 참시관인 본 고을 현감 강문영(姜文永)과 더불어 상견례를 하고 관리와 선비들을 호령하니 부서(部署)가 이윽고 엄숙해졌다.이튿날인 갑자일 아침 해가 돋을 무렵에 여러 유생들이 과거장에 모이기를 마쳤다. 글제를 게시하고 시권을 거두니 눈처럼 쌓이고 물결치듯 펄럭여 순식간에 웅이산(熊耳山)과 나란해졌다. 시필(試筆)의 흔적이 흥건한 것을 주의(朱衣)에게 일임하여 저울처럼 공정한 마음을 지니고 거울에 비추듯 주목하니 천군(天君 마음)이 환히 트여 온갖 사특함이 스스로 달아났다. 한낮부터 새벽에 이르기까지 고정(考定)을 다 마치고 그 다음날을 지나 병인일에 종장(終場)을 시험보이기를 역시 초장(初場)과 같이 하였다. 정묘일에 탁호(坼號)하여 방을 게시하였다. 무진일에 수계(修啓)했다. 기사일에 봉서(封書)를 보내고 비를 무릅쓰고 동복현(同福縣)에 이르러 잤으니 적벽(赤壁)을 보기 위해서였다.경오일에 동복 현감 이청전(李靑田)과 함께 무진루(無盡樓)에 올랐는데 무진루 위에 외조부이신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 선생의 시판(詩板)이 있었다. 옛날 순조 계해년(1803, 순조3) 봄에 선생이 경시관으로 이곳에 들리셨는데, 지금 72년이 지나 내가 또 이 임무로 마침 이곳에 왔으니 이 일은 우연이 아니다. 둘러보고 감회가 일어 시판의 시를 차운하여 그 아래에 새겨 걸었다. 수령과 함께 적벽(赤壁)에서 노닐었는데 고개 너머 10리 밖 저 멀리 붉은 벼랑이 가파르게 들쑥날쑥 솟았고 절벽이 병풍을 이루어 우뚝한 봉우리는 조각해 놓은 듯한데 무성한 녹음이 덮고 있었다. 한 줄기 맑은 계곡 물이 그 아래를 띠처럼 감돌아 배를 띄울 만했다. 붉은 산 푸른 물이 멀리까지 젖어들어 잠겨 있었다. 산꼭대기에 학소대(鶴巢臺)와 지기석(支機石)이 있고, 절벽 아래 조금 넓은 곳에는 ‘강선대(降仙臺)’며 ‘적벽동천(赤壁洞天)’이라고 새겨놓았는데 푸른 이끼 속에 붉은 글자라 물 건너편에서도 볼 수 있었다. 북쪽 벼랑의 몇 그루 반송(盤松)이 물에 임해 일산을 드리운 듯, 규룡이 서리고 용이 엎드린 듯한데 그 수령을 알 수 없었다. 조그만 집이 날개를 편 듯 절벽과 서로 마주보는데 편액에 ‘망미(望美)’라고 되어 있지만 옛 이름은 ‘환선(喚仙)’이었다. 숭정(崇禎) 정축년(1637)에 정지준(丁之儁)씨가 재난을 듣고 의병을 일으켰다가 얼마 후 산으로 들어가 은거하며 노년을 마치고자 하였는데 정자는 그때에 건립되었다. 자손들이 대대로 지켜오다가 여러 번 흥폐를 겪었으나 지금은 완전히 새로 수리하였다. 선현들의 제영(題詠)이 자못 많았는데, 외할아버지께서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의 시에 차운한 것도 있었다. 공경히 그 운자를 따라 지어서 수령에게 판에 새겨 달라고 부탁하여 흔적 없이 사라질 수도 있는 자취를 의탁하였다.술이 깨기도 전에 다시 물염정(勿染亭)으로 향했다. 물길을 따라 산을 둘러 물굽이를 돌아 6, 7리를 가니, 문득 조그만 골짜기가 열렸다. 기이한 봉우리가 둥글게 에워싸서 마치 성벽 같은데 조그만 언덕이 돌출하여 가운데 있고 맑은 냇물이 띠처럼 둘렀으며 푸른 솔이 이어졌는데 나는 듯한 용마루가 그 위에 우뚝하니, 깊으면서도 실은 트여 있고 맑으면서도 실은 화려하였다. 그 속에 들어간 사람은 마치 호중구화(壺中九華)에 노니는 것 같았다. 정자를 지은 사람은 창주옹(滄洲翁)으로 지금도 나씨(羅氏)의 소유이다. 택당(澤堂 이식(李植))의 시를 차운하여 시를 짓고, 동복(同福) 수령과 작별하였다. 30리를 가서 광주 무등산에 당도하였고 산길로 들어가 10리를 가서 원효암(元曉庵)에 닿았는데 산길은 매우 험했고 날도 저물어 어두워졌다. 사또 박 어른께서 주방 아전과 가기(歌妓)를 보내어 산행을 도와주었다.신미일에 간편한 가마를 타고 승경을 찾아갔다. 산승이 알려주기를, “오른편으로 산발치를 따라 10여 리쯤 가면 입석대(立石臺)이고, 수백 보를 더 가면 서석대(瑞石臺)입니다. 또 5, 6리를 더 가서 상봉에 오르면 그곳이 이 산의 가장 높은 곳입니다. 또 10리를 가다가 내려가면서 풍혈(風穴)을 보고, 광석대(廣石臺)에서 쉬면 관람이 끝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승려의 말대로 차례차례 올라가 구경하였다. 입석대는 색이 검푸르고 네 모서리가 먹줄을 대고 깎은 듯했으며 우뚝하게 산등성이 위에 나란히 버티고 서 있었다. 높이는 10여 장(丈)이고 병풍처럼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는데, 관악기가 옥처럼 쌓이고 기둥이 금빛 죽순처럼 솟은 것 같아 사람으로 하여금 폐부가 모두 맑아지게 했다. 북을 치고 피리를 부는데 소리가 어디로부터 나는지 알 수 없더니 한참 후에 그쳤다.서석대는 얽힌 바위가 큰 언덕을 이루었고 흙이 덮여 평평한 대(臺)를 이룬 것이 여러 층이어서 아래에서 올려다보아야만 비로소 그 높이를 깨닫게 된다. 상봉(上峯)은 특히 우뚝 높고 커서 수만 떨기를 묶어 평지에서 솟구쳐 올라 있었다. 그 모양이 마치 용이 헤엄치며 바다로 가는 듯, 비늘과 지느러미가 노여워 뻗친 듯, 빽빽이 모이고 삐쭉삐쭉 솟아 있었다. 높다랗게 세 봉우리를 이룬 것은 천(天), 지(地), 인(人) 삼황봉(三皇峯)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그 정상에 올라보니 돌이 가지런하여 나막신을 수용할 만했지만 좌우로 여유 공간이 없어 말에 걸터앉듯이 하였다. 바다 위를 굽어보니 늘어선 고을이 빽빽하여 바둑돌을 늘어놓은 듯하고 끝자락의 산기슭과 단절된 항구들이 높았다 낮았다 하였다. 하늘 끝 구름 안개 아득한 곳을 가리켜 보이며 아마도 남해일 것이라 했다.붉은 해가 뜨겁게 내리쬐는데 일산에 의지해 술을 마시고 술을 마신 후에는 노래를 부르라고 명하여 푸른 벼랑이 떠나갈 듯하니 호탕하여 한문(寒門)에 날아오르고 홍애(洪崖)를 치는 듯한 생각이 들어 배회하며 한참을 있다가 떠났다. 이 길을 따라 조금씩 내려오는데 참대나무와 오래된 등나무 덩굴이 옷과 띠를 갈고리 마냥 걸리게 하여 허리를 구부리고 땅을 골라 디디며 지나왔다. 거의 산허리쯤 이르자 큰 바위가 빽빽이 늘어서서 칼을 뽑은 듯 중첩한 봉우리를 이루고 있었는데 꼭대기에 구멍이 있어 햇빛이 새어들기에 바라보니 문과 같았다. 운근(雲根)을 밟고 월굴(月窟)을 더듬으며 거의 사람이 통할 수 없는 길을 까치걸음으로 더위잡고 올라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크고 작은 바위들이 눕기도 하고 서기도 한 채 뒤섞여 있었다. 그 틈새가 봉합되지 못한 곳이 저절로 깊숙한 구멍을 이루었는데 그 넓이가 가로 세로 두어 개의 홀(笏)만 하여 고개를 숙여 들어갔다가 빠져 나와 그 꼭대기로 올라가니 심히 위태로웠으며 또 기이한 경관도 없었다. 정송강(鄭松江 정철(鄭澈))의 발길이 닿은 곳인 까닭에 유명한 것이다. 이곳이 이른바 풍혈(風穴)이다.그 밑은 광석대(廣石臺)로 어지러운 바위가 사방으로 둘러 서 있는데 높이가 모두 수십 길이었다. 대가 그 가운데 자리하여 수십 인이 앉을 만하였고 금강산 명경대(明鏡臺)와 같았는데, 움푹 깊은 것은 그보다 심했으나 깨끗하게 솟은 것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 바위틈으로 흐르는 물과 숲 속 꽃송이가 짙푸르고 붉게 빛나 술을 마시며 노래를 하는데 바람이 세차 벽락동(碧落洞)에 들어선 듯 떨려서 오래 머물수가 없었다. 호남의 산은 기묘함이 적은데 오직 바다를 둘러싼 여러 산들은 자못 우뚝하고 훌륭하다고 하나 지대는 더욱 낮다. 오직 이 산만 높이 솟아 남방의 으뜸이 되었으니 무등(無等)이라는 이름이 이런 이유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나무와 맑은 샘은 없고 웅장한 하나의 산일뿐인데 특별히 바위로써 그 변화를 다했다. 다만 그 드러내 보임이 일정치 않아 나머지 땅에는 소홀하였고 조각을 하는 데는 너무 기교를 부리다가 천진함에서 멀어졌다. 사람에게 비유하자면 평소에 녹녹하여 빼어난 절조가 없던 사람이 출세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는 행동이 있는 것과 같다. 《시경》에 이르기를 “위의가 매우 성대하여 가려낼 수가 없다.〔威儀棣棣, 不可選也.〕”하였으니, 가려낼 수 있다면 어찌 훌륭한 선비이겠는가? 저녁에 증심사(證心寺)에 이르러 묵었다. 절이 산문(山門)에 있어 대숲과 시내와 골짜기의 승경을 갖추고 있었다.임신일 새벽에 비가 오다가 아침에 갰다. 광주(光州)에 들러 박 어른께 인사드리고 동창(東倉)에 당도하여 오찬을 먹었다. 저녁에 장성부(長城府)에 도착했는데 18년 전 아버님께서 부임하셨던 곳이다. 소자가 모시고 따라 온 적이 없어서 일찍이 기징사(奇徵士)와 백양산(白羊山)을 보지 못한 것이 매우 유감이었다. 징사는 이름이 정진(正鎭)인데 남방의 유종(儒宗)이며, 백양도 역시 남방의 명산이다. 이번 걸음에 오래 묵은 소원을 풀게 되었다. 제민헌(濟民軒) 관아에서 묵으니 이졸(吏卒)이 모두 구면인 듯이 기뻐하였으며 그 이름을 들어보니 종종 예전 근무자도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늙었다. 기징사가 사는 곳을 물어보니 이미 지나쳐 왔다.이튿날 계유일에 하인을 물리치고 혼자 먼 길을 말을 타고 가서 장성부 하사(下沙)에 이르러 찾아뵈었다. 큰 체격에 용모가 훌륭하고 훤칠하여 존경할 만하였다. 연세가 지금 연세 70여 세에 늙고 또 병들었으나 낙천적이고 장중하여 도(道)를 지닌 자임을 알 수 있었다. 한참 동안 더불어 이야기하였는데 의논이 순정(醇正)하고 심성이 소탈하였다. 작별에 임하여 “저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시겠습니까?” 물으니, 이렇게 답하였다. “ 일명지사(一命之士)가 마음을 보존하고 사물을 사랑한다면 반드시 백성을 구제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그대는 이미 벼슬길에 나가 임금을 섬기니 나랏일에 힘을 쏟으시길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또, “근세의 유자(儒者)들은 입만 열면 문득 심성(心性)과 이기(理氣)를 말하며 일생을 애쓰지만 일에 무슨 보탬이 있겠습니까? 마땅히 삼가 정주(程朱)의 서언(緖言)을 지켜 궁행 실천할 뿐입니다. 장점을 겨루고 단점을 끌어내어 송사하듯 설이 분분한 것과 같은 것은 저는 귀를 막고 듣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들어보면 대개 뜻이 독실하고 지키는 바가 간략한 것이 노년에 이르기까지 변함없는 선비였으니, 지금 세상에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이겠는가?장성부로 돌아오는 길에 백양산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아형(雅兄)인 이재국(李在國)은 오랜 친구인데, 상을 당하여 집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집이 큰길 곁에 있으므로 조문하려고 들렀다. 청암역(靑巖驛)을 지나 백양산 아래에 이르니 길은 평탄하나 궁벽한 곳이라 나무숲 그늘이 짙었으며 초가집이 나란히 어우러져서 매우 그윽한 운치가 있었다. 두 산이 바짝 좁아져 골짜기를 이루었고 골짜기 입구에는 단청한 들보가 시내에 걸터앉아 있었는데 이곳이 쌍계루(雙溪樓)였다. 노승 인정(印正)이 시를 청하기에 포옹(圃翁)의 판상(板上) 시를 차운하여 주었다. 견여(肩輿)를 갖추도록 명하여 숲길을 뚫고 냇물을 건너 구불구불 돌아 올라갔다. 울창한 숲 속에 석봉(石峰)이 빼어남을 다투며 종종 반쯤 드러나 보여 흰 구름처럼 하얗게 푸른 하늘에 솟아 있었다. 백련암(白蓮庵)에 투숙하였는데 산꼭대기 높은 절벽이라 진세를 벗어난 듯한 뜻이 있었다. 난간 밖으로 몇몇 봉우리가 엄연히 다가와 손을 맞잡고 읍하는 듯하였다. 한밤중 경쇠와 범패 소리에 뭇 산들이 모두 메아리쳐서 충분히 사람에게 깊은 반성을 일으켰다.갑술일에 운문사(雲門寺)를 방문했다. 스님 한 사람이 앞장서고 푸르름이 싸인 하늘 속으로 사람의 그림자가 오르내리는데 바라보니 흰 새가 오가는 것 같았다. 빽빽한 숲은 햇빛을 가리고 그윽한 샘은 답하듯 울리는데 잔도와 비탈길을 꺾어 돌며 누차 멋진 경치를 만났다. 비온 후라 더욱 선명하고 윤기 나는 데다 맑게 내달리는 것이 즐길 만하였다. 절에 당도하니 높고 널찍하여 조망이 탁 트였다. 경담(鏡潭)이라고 부르는 산인(山人)은 총명하여 불경에 능통하고 자못 계행(戒行)이 있었다. 앞길을 찾아 가다가 왼쪽으로 가니 돌길이 갑자기 끊겼으므로 남여를 버리고 걸어서 한 등성이를 올라가니 제단처럼 넓고 평평한데 그 위에 큰 소나무가 솟아있고 햇빛이 땅에 닿지 못하며 바람이 불어 옥구슬 소리를 냈다. 물외암(物外庵)과 약사암(藥師庵) 두 암자를 굽어보며 영천암(靈泉庵)에 이르니 모두 절벽 밑에 깃들어 있었다. 지난번에 보았던 푸른 산 중 석봉(石峰)의 중턱인데, 그 배 부분을 불룩하게 하여 처마를 토해내고 있어 바라보니 학의 둥지나 호랑이굴과 같았다. 그런데 영천굴(靈泉窟)은 더욱 기이하여 속은 넓고 밖은 좁게 오므라져 휑하니 문이 되었고 사찰이 깊이 감추어져 비바람을 가릴 수 있었다. 그 속으로 들어서니 매우 어둡고 차가웠으며 맑은 물방울이 바위 구멍으로부터 방울방울 떨어지는 것을 대를 쪼개 받아내는데 물맛이 차가워 품평할 만했다. 굴 문을 나서서 오른쪽으로 가니 연이은 산봉우리의 정상이 홀연히 갈라져 길쭉하게 뻗어 마치 문틀에서 들보가 삐져나온 듯, 한 점의 흙도 없이 가파르게 솟아 있었다. 사다리를 부여잡고 올라가 보니 그 밖은 바로 백련암 경내였다. 풀ㆍ나무ㆍ산봉우리ㆍ골짜기가 모두 전에 두루 지나온 곳이었으나, 굴속의 풍광은 별세계 같았다. 쌍계루에 돌아와 밥을 재촉해 먹고 산을 나서서 갈현(葛峴)을 넘어 내장산(內藏山)으로 들어서니 정읍(井邑) 땅이다. 고갯길이 구불구불해서 물고기를 꿴 듯 줄지어 개미가 쳇바퀴 돌 듯 돌아서 겨우 평지에 도착했다. 맑은 샘과 흰 바위, 빽빽한 숲과 겹겹한 산등성이로 그 경내가 매우 그윽하였다. 산길을 여러 번 구비 돌아 그 열고 닫히는 비경을 이루 다 감당할 수 없었는데 온통 푸른색이어서 원근을 구별하지 못했다. 사찰 대여섯 곳은 지금은 모두 영락했고, 오직 벽련암(碧蓮菴)이 쉴 만했다. 이번 걸음에 명산을 구경한 것이 셋인데, 서석산(瑞石山 무등산)은 우뚝 솟았으나 벌거숭이 산이고, 내장산은 그윽하지만 속되고, 물과 바위와 숲과 산봉우리가 승경을 아우른 것으로는 마땅히 백양산이 최고라 하겠다. 각각 시 한편을 지어 승경을 기록하였다.을해일 한낮에 입비촌(立碑村)에서 쉬고, 저녁에 담양부(潭陽府)에서 잤다. 병자일에 비가 심하게 내렸다. 포시(晡時 오후 3~5시)에 순창군에 도착해서 머물러 잤다. 조 사또가 노래하고 춤추는 기녀를 선발해 풍악을 울려 즐겁게 해주었다.정축일에 여전히 비가 내렸다. 느지막이 밥을 먹고 조 사또와 응향각(凝香閣)에서 작별한 다음 적성강(赤城江)을 건넜는데 강가의 산이 맑고 고와서 사랑스러웠다. 배 안에서 시를 지어 조 사또에게 부치고 남원에 도착하여 묵는데, 관사(館舍)며 성지(城池)가 가장 웅장하고 화려하다고 일컬었다. 남문밖에는 높다랗고 널찍한 누가 있는데 앞으로는 큰 못에 임했고 대숲 섬과 연못과 무지개다리며 붉은 사다리가 표연히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오를 것 같은 상상을 갖게 하였다. 오른쪽으로 교룡산성(蛟龍山城)을 바라보니 푸르름이 서로 얽혔고, 앞으로는 큰 들판이 있어 저 멀리까지 드넓고 맑고도 깨끗하였다. 여기가 예로부터 일컫던 광한루(廣寒樓)인데, 선현들의 시제 판이 벽에 가득하였다. 또 요선관(邀仙館), 영주각(瀛洲閣), 삼신산(三神山), 오작교(烏鵲橋)가 있어 좌우로 늘어서 있다. 모두 신선의 이름을 빌려 쓴 것이지만 시정(市井)과 너무 가까우니 진짜 신선을 불러오진 못할 듯 했다. 임백호(林白湖)의 시에 차운하여 시를 짓고, 비로소 화순에서 임실로 향했다. 직로(直路)를 취하면 이틀 만에 이를 수 있지만 시험 시기가 아직 멀었기 때문에 길을 우회하여 여기에 이른 것인데, 여전히 날짜에 여유가 있었다. 마침 서울에 있을 때는 만나지 못했던 벗인 부사(府使) 윤횡선(尹宖善)을 만났다. 며칠 머무를 흥취는 없었지만 일찍 남쪽으로 내려와 송광산(松廣山)과 월출산(月出山)의 승경을 맘껏 보지 못한 것이 유감스러웠다.무인일에 오수역(獒樹驛)에 도착하니 해가 아직 정오가 되기 전이었지만 머물러 그곳에서 묵었다. 관사(官舍) 동쪽 편에 조그만 누각은 득월루(得月樓)라고 불렀는데, 역시 맑고 탁 트여 바라볼 만하였다.기묘일에 30리를 가서 임실현(任實縣)에 도착해 교열루(敎閱樓)에 올라가 공복(公服)으로 바꿔 입고 운수관(雲水館)에서 망궐례(望闕禮)를 행했다. 운수관의 편액은 바로 종증조부이신 익정공(翼貞公)의 필적이었다. 동청(東廳)에 자리를 열고 현감 정준화(鄭駿和) 수령과 상견례를 하였다. 부안(扶安) 수령이 또 부시관(副試官)으로 왔고, 참시(參試)는 오수(獒樹) 승(丞) 왕경련(王景鍊)이었다.무인일에 유생들을 크게 모아 초장(初場)에서 논(論)과 의(疑)를 시험하였다. 기묘일에 도 전체에 부(賦)와 표(表)를 시험하였다. 경진일에 책(策)을 시험하여 삼장(三場)을 다 마쳤다. 답안을 고시(考試)하여 방을 내건 것이 바로 신사일 새벽이다. 근년에 조정의 명으로 매양 감영(監營)에서 동당시(東堂試)를 합설하였는데 도별로 나누어 옛 제도를 회복한 것은 금년부터 시작되었다.임오일에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20리쯤 가서 오원강(五黿江)을 건넜다. 한 줄기가 골짜기를 의지하여 흐르는데 맑고 투명하여 밑바닥이 보였으며 얕아서 옷을 걷고 건널 만했다. 또 20리를 가 만마관(萬馬關)에서 쉬었다. 관은 두 산이 협소해지는 곳이자 남쪽으로 가는 길의 요충지에 위치해 있다. 옛날부터 견훤(甄萱)이 웅거했다는 곳으로 전해오는데, 옛 성(城)은 훼손되고 무너져서 방어할 수는 없다. 전 관찰사 이호준(李鎬俊) 공이 처음 수리하여 보(堡)를 설치하고 남고진장(南固鎭將)으로 하여금 월별로 구분하여 지키게 하니 망루와 관아가 환하게 빛나 웅부(雄府)와 같았다. 시 2편을 지었다. 30리를 갔지만 전주성(全州城)에 이르지 못했다. 두 산이 마주 솟아 있고 여러 물줄기가 합쳐져 협곡에서 쏟아져 내리니 바위와 돌무더기에 부딪혀 금(琴)이며 축(筑) 소리를 이루었다. 한 굽이를 막 돌아들어 바라보니 붉은 기둥이 아스라이 건너편 벼랑에 나는 듯이 솟아 있었다. 하인이 “한벽당(寒碧堂)입니다.”라고 알려주더니 물을 건너 달려갔다. 높이 층층한 산봉우리를 베고 저 멀리 맑은 물결을 움키면서 비스듬히 남고산성(南固山城)을 마주하고 있는데, 성가퀴가 가려졌다가 보였다가 하고 그윽하면서도 시야가 넓고 평평하여 흉금을 펼칠 만하였다. 낭랑히 좌태충(左太冲)의 “천길 높은 산봉에 옷 먼지 털고, 만 리 흐르는 강물에 발을 씻노라.〔振衣千仞岡, 濯足萬里流.〕” 구절을 읊조리는데 시를 마치기도 전에 석양이 산에 걸렸으므로 누를 내려와 수레를 몰아 남성(南城)으로 들어왔다. 통판(通判)이 관소로 와서 만나보고 인근 지역의 인사 또한 찾아온 자가 있어 비로소 문을 활짝 열고 평소처럼 접대하니 모두들 시험에 탈락한 자도 원망이 없다고 말하였다. 아아, 한 치의 마음이 비록 은미하나 남을 속일 수 있겠는가? 스스로를 속이면서 남에게 믿음을 구하기는 어려우리라.계미일에 오랜 친구인 관찰 통판(觀察通判) 이우선(李禹善)군을 찾아갔다. 서울로부터 남쪽 지방에 와서 살고 있어 몇 해 동안 만나지 못했다. 운수관에서 게효(揭曉)하던 날 저녁에 시로써 풍자하며 손을 잡고 막혔던 회포를 풀었는데 전송을 위해 이곳에 뒤쫓아 왔다가 이곳에 이르러 작별하고 갔다. 이날 밤새도록 크게 비바람이 쳤다. 영부(營府)에서 가희(歌姬)를 보냈는데 거문고와 시(詩)와 그림에 능한 기녀였다.갑신일에 비가 오고 날이 개질 않으니 사또가 내가 가는 것을 만류했지만 가고 머무는 것에는 기한이 있으니 한번 어기면 여러 고을에 폐를 끼치게 됨을 생각하고 드디어 출발하여 공북루(拱北樓)를 지났다. 공북루와 만경대(萬景臺)와 승금호(勝金湖)는 모두 예전에 보았던 곳이므로 생략하고, 배를 타고 대천(大川)을 건너 낮에 삼례원(參禮院)에서 밥을 먹었다. 도랑물이 넘쳐 진창이 미끄럽고 비가 아직 개지 않았다. 마부와 하인이 고생하며 말을 몰아 황혼녘에 여산부(礪山府)에 닿았다.을유일은 쾌청하였다. 황화정(皇華亭)에 이르니 감영에서 나와 모시던 사람과 아전, 관노들이 모두 인사하고 떠났다. 이날 고시와 근체시 각 1편을 지었다. 저녁에 경천역(擎天驛)에서 잤다. 병술일은 광정역(廣亭驛)에서 잤다.정해(丁亥) 일에 목천(木川) 땅에 들러 산장으로 박영래(朴永來) 군을 방문하고 저녁에 성환역(成歡驛)에서 잤다. 일가 사람 한원교(韓元敎)가 만나러 왔기에 그가 사는 마을을 물어보니 큰길에서 5리 정도 거리였다. 무자일에 지나오다가 저녁에 오산점(五山店)에서 잤다. 기축일에 과천현에서 잤다. 경인일에 도성으로 들어와 복명(復命)하고 집으로 돌아가니 실로 4월 중순이었다. 날짜를 세어보니 41일이 지났고 다닌 길이 1,947리여서 기록해둔다.[주-D001] 직무 수행 : 원문은 우역(于役)으로, 《시경》 〈군자우역(君子于役)〉에서 나온 말이다. 왕명을 받아 직무를 수행하러 가는 것을 의미한다.[주-D002] 대양(對揚) : 임금의 명을 받들어 백성에게 널리 알리는 것을 의미한다. 《서경》〈열명 하(說命下)〉에, “감히 천자의 아름다운 명을 그대로 선양(宣揚)하겠습니다.〔敢對揚天子之休命.〕”라고 한 문장에서 나온 말이다. 대(對)는 답한다는 뜻이고, 양(揚)은 선양한다, 송양(頌揚)한다는 뜻이다.[주-D003] 돈어(豚魚) : 미물을 의미한다. 《주역》 〈중부괘(中孚卦) 단(彖)〉에 “괘사(卦辭)에서 돼지와 물고기에까지 미치게 되면 길하다고 한 것은 그 믿음이 돼지와 물고기에게까지 미치게 되기 때문이다.〔豚魚吉, 信及豚魚也.〕”라는 말이 나온다.[주-D004] 오용묵(吳容默) : 본관은 해주이다. 유학(幼學)으로 1883년 박문국 사사(博文局司事)로 근무하였으며, 다른 인적 사항은 자세히 알 수 없다.[주-D005] 문성동(文星洞) : 경기도 시흥현(始興縣)에 속한 마을이다.[주-D006] 이근집(李根集) : 1823~?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성여(成汝)이다. 1858년에 진사시에 합격, 음직으로 진출하여 하급 관직을 거쳐 1873년부터 시흥 현령으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었다는 평가를 받았다.[주-D007] 주전(廚傳) : 지방에 나가는 관원에게 경유하는 역참에서 음식과 거마를 제공하는 것을 말한다. 《역주 사직악기조성청의궤》[주-D008] 목양석(睦養錫) : 본관은 사천이며, 1872년 11월부터 1875년 7월까지 진위 현령을 지냈다.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가 전한다.[주-D009] 이민성(李敏性) : 자세한 인적 사항은 알 수 없다. 고종 때 현릉 영, 진잠 현감(鎭岑縣監)을 거쳐 1872년에 천안 군수로 부임했다.[주-D010] 조종필(趙鍾弼) : 1840~? 본관은 한양, 자는 은상(殷相)이다. 1867년(고종4) 진사시에 장원, 1874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선공감 주부 등 여러 관직을 거쳐 1872년에 은진 현감으로 부임했다.[주-D011] 황화정(皇華亭) : 충남 논산시 연무읍 고내리에 있던 정자이다. 조선 시대에는 충청도 땅이 아니라 전라도 여산읍 소속이었다. 이곳에서 전라도 관찰사가 임무를 교대하던 곳으로 우암 송시열이 지은 〈황화정기(皇華亭記)〉현판이 걸려 있었다.[주-D012] 권인병(權寅秉) : 자세한 인적 사항은 알 수 없다. 1873년에 여산 군수로 부임했다.[주-D013] 시읍(試邑) : 과거장을 여러 고을을 돌아가면서 설시(設施)하는데, 그해 과장을 설시한 곳을 시읍이라고 한다.[주-D014] 김계진(金啓鎭) : 인적 사항은 미상이며, 1864년(고종1)부터 장악원 주부, 청산(靑山) 현감, 남원 현감을 지냈고, 1874년(고종11) 전주 판관으로 부임하였다.[주-D015] 조성교(趙性敎) : 1818~1876. 본관은 한양, 자는 성유(聖惟),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1859년(철종10) 문과에 급제, 1866년(고종3) 성균관 대사성ㆍ이조 참의 등을 역임하였고 이듬해 동지사 부사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71년(고종8)에 예조 판서에 올랐고, 동지사의 정사로 재차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1874년에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다.[주-D016] 조태영(趙台永) : 인적 사항은 자세히 알 수 없다. 1868년(고종5) 충훈부 봉조관을 지내는 것을 시작으로 노성 현감(魯城縣監), 안성 군수(安城郡守)를 지냈고, 1873년(고종10)에 순창 군수(淳昌郡守)로 부임했다.[주-D017] 여구(驪駒) : 《대대례기(大戴禮記)》에 나타나는 일시(逸詩)의 편명으로, 손님이 떠나려 하면서 이별의 정을 표시하는 노래이다. 손님이 “검정 망아지 문에 있고 마부 모두 대기하오. 검정 망아지 길 위에 있고 마부 멍에 올리었소.〔驪驅在門, 僕夫具存. 驪驅在路, 僕夫整駕.〕”라고 노래를 부르면, 주인은 ‘손님이여 돌아가지 마오’라는 뜻의 〈객무용귀곡(客無庸歸曲)〉을 불렀다 한다. 《漢書 卷88 王式傳》[주-D018] 이승경(李承敬) : 1815~? 인적 사항은 자세히 알 수 없다. 1866년(고종3)부터 문의 현령, 괴산 군수, 은율 현감 등을 지냈으며 1872년(고종9)에 담양 부사로 부임했다. 《경조부지(京兆府誌)》를 편찬하였으며, 문집으로 《여사난고(餘事亂藁)》를 남겼다.[주-D019] 서호(西湖) : 중국 절강성(浙江省) 항주(杭州)에 있는 호수로 풍광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주-D020] 박봉하(朴鳳夏) : 1809~1881. 본관은 밀양, 자는 성구(成九), 호는 동정(東井)이다. 1852년(철종3) 음사(蔭仕)로 은진 현감을 지냈으며, 장흥 부사ㆍ대구 판관ㆍ대흥 군수(大興郡守)ㆍ해주 판관을 거쳐 1873년 광주 목사로 부임했다. 경상북도 영천에 애민선정비(愛民善政碑)가 있다.[주-D021] 이위재(李渭在) : 인적 사항은 자세히 알 수 없다. 1866년 강릉 참봉(康陵參奉)을 지내고 그 이후로 의금부 도사, 장악원 주부를 거쳐 1873년에 남평 현감으로 부임하였다.[주-D022] 이영(李永) : 자세한 인적 사항을 알 수 없다.[주-D023] 극위(棘圍) : 경비가 삼엄한 과거 시험장을 가리키는 말이다. 극원(棘院)이라고도 한다. 합격자 발표를 하는 날 낙방한 응시자들의 난동을 방지하기 위하여 가시나무 울타리를 쳤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舊五代史 卷127 和凝列傳》[주-D024] 이학래(李鶴來) : 인적 사항은 자세히 알 수 없다. 1866년(고종3) 서부 도사(西部都事)를 지냈고, 그 이후 사재감 봉사, 화령전 수문장(華寧殿守門將), 희릉 영(禧陵令) 등을 거쳐 1874년에 보성 군수로 부임했다.[주-D025] 강문영(姜文永) : 인적 사항은 자세히 알 수 없다. 1873년(고종10)에 화순 현감(和順縣監)으로 부임했다가 이듬해 전라 감사 조성교(趙性敎)에 의해 파직되었다.[주-D026] 웅이산(熊耳山)과 나란해졌다 : 몹시 높은 것을 말한다. 웅이산(熊耳山)은 하남성(河南省) 의양현(宜陽縣)에 있는 산인 바, 한나라 때 광무제(光武帝)가 적미군(赤眉軍)을 진압하고서 그들에게서 노획한 병갑(兵甲)을 의양성 서쪽에 쌓아 놓았는데, 그 높이가 웅이산과 나란하였다고 한다. 《後漢書 卷11 劉盆子列傳》[주-D027] 주의(朱衣) : 주의사자(朱衣使者)를 줄인 말로 과거시험 고시관을 가리킨다.[주-D028] 종장(終場)을 …… 하였다 : 과거 시험을 초ㆍ중ㆍ종장이라 하여 3일 동안 보는데, 초장(初場)에는 사서(四書) 가운데 의심을 일으키게 할 만한 대목을 논하도록 하여 논(論)과 표(表)를 짓게 하고, 중장(中場)에는 부(賦)와 표(表)를 짓게 하고, 종장(終場)에는 책문(策文)을 짓도록 했다. 여기서 종장을 초장과 같이 했다는 말은 시험을 시행하고 관리하는 방식을 동일하게 했다는 의미이다.[주-D029] 탁호(坼號) : 과거 급제자 명단이 든 봉투를 뜯어보고 성명을 부르는 것을 말한다.[주-D030] 수계(修啓) : 보고할 내용을 정리하여 계문(啓文)을 작성하는 것을 말한다.[주-D031] 적벽(赤壁) : 현재 전남 화순군(和順郡) 이서면(二西面) 창랑천(滄浪川) 일대의 절벽을 말한다. 적벽이란 명칭은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동복으로 귀양 온 최산두(崔山斗)가 중국의 적벽에 버금간다 하여 붙였다고 한다.[주-D032] 이청전(李靑田) : 청전은 이학래(李鶴來)의 호이다. 인적 사항은 자세히 알 수 없다. 1866년(고종3) 서부 도사(西部都事)를 지냈고, 그 이후 사재감 봉사, 화령전 수문장(華寧殿守門將), 희릉 영(禧陵令) 등을 거쳐 1874년에 보성 군수로 부임했다.[주-D033] 무진루(無盡樓) : 동복현에 적벽 부근에 있었던 누정이다. 치헌(癡軒) 조효능(趙孝能)이 세운 것으로, 소동파의 《적벽부》 내용 가운데 맑은 바람과 밝은 달빛은 조물주가 무진장 허락한 것이니 누리는 사람이 주인이라는 뜻을 따서 정자의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豊墅集 無盡樓記》[주-D034] 망미(望美) : 망미정은 병자호란때 의병장으로 활동했던 정지준(丁之儁, 1592~1663)이 1646년(인조24)에 세운 정자로, 화순군 이서면 장학리의 적벽을 바라보는 곳에 있다.[주-D035] 정지준(丁之儁) : 1592~1663. 본관은 압해(押海), 자는 자웅(子雄), 호는 적송(赤松)이다. 준(儁)은 준(雋)으로 표기된 곳도 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양인용 등과 함께 호남 의병 100여 명을 이끌고 청주를 거쳐 남한산성에서 싸우던 중,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귀향하여 망미정을 짓고 학문에 전념했다.[주-D036] 물염정(勿染亭) : 전라남도 화순군의 경승지인 화순 적벽(和順赤壁) 상류에 있는 정자이다.[주-D037] 호중구화(壺中九華) : 돌이 매우 기이하고 아름다운 광경을 이룬 것을 의미한다. 송나라 때 호구(湖口) 사람 이정신(李正臣)이 괴이한 돌을 쌓아 구봉(九峯)을 만들었는데, 소동파(蘇東坡)가 호중구화(壺中九華)라 이름 짓고 시를 읊었다. 소식의 〈호중구화시서(壺中九華詩序)〉에 “호구 사람 이정신이 이석(異石)을 가졌는데 아홉 봉우리가 영롱하게 굽이져 창령(窓櫺)과 같았다. 그래서 나는 1백 금(金)으로 그것을 사서 구지석(仇池石)과 짝을 지으려 했는데 남쪽으로 옮기게 되어 미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름을 호중구화라 함과 동시에 시로써 기록한다.”라고 하였다.[주-D038] 창주옹(滄洲翁) : 나무송(羅茂松, 1577~1653)으로, 본관은 나주, 자는 수부(秀夫), 호는 창주(滄洲)ㆍ만취(晩翠)ㆍ물염정(勿染亭)이다. 1615년(광해군7) 문과에 급제하여 거산 찰방(居山察訪), 정언(正言), 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에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몽진(蒙塵)하자 병조 정랑으로 임금을 호종(扈從)하였으며, 강화가 이루어지자 관직에서 물러나 물염정(勿染亭)에서 학문을 닦으며 여생을 보냈다. 《창주문집(滄洲文集)》이 있다.[주-D039] 원효암(元曉庵) : 광주 무등산 원효 계곡에 있는 사찰로, 문무왕 때 원효(元曉)가 이곳에 머무르면서 절을 개축한 후부터 원효사ㆍ원효암ㆍ원효당 등으로 불렸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끌었던 영규(靈圭)가 이곳에서 수도하였다고 전한다.[주-D040] 한문(寒門)에 날아오르고 : 시원하다는 의미이다. 주자(朱子)가 공풍(鞏豐)에게 답한 편지에, “이 무더운 여름철을 당하여 한문에 날아올라 시원한 바람에 씻은 듯하다.〔當此炎燠, 灑然如羾寒門而濯淸風也.〕” 하였는데, 《초사(楚辭)》 〈왕일(王逸)〉의 주(注)에, “한문은 북극(北極)에 있는 차가운 곳이다.” 하였다. 《朱熹集 卷64 答鞏仲至》[주-D041] 홍애(洪崖)를 치는 : 신선이 된 듯하다는 의미이다. 홍애는 전설상 황제(黃帝)의 신하로서 신선이 된 영륜(伶倫)의 호이다. 요(堯) 임금 때 이미 나이가 삼천 살이었다 한다. 《神仙傳》 곽박(郭璞)의 〈유선시(游仙詩)〉에, “왼손으로는 부구의 소매를 당기고, 오른손으로는 홍애의 어깨를 친다.〔左相浮丘袖, 右拍洪崖肩.〕”는 표현이 보인다.[주-D042] 운근(雲根) : 벼랑이나 바윗돌을 뜻하는 시어(詩語)이다. 두보(杜甫)의 시에 “충주 고을은 삼협의 안에 있는지라, 마을 인가가 운근 아래 모여 있네.〔忠州三峽內, 井邑聚雲根.〕”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그 주(註)에 “오악(五岳)의 구름이 바위에 부딪쳐 일어나기 때문에, 구름의 뿌리라고 한 것이다.” 하였다. 《杜少陵詩集 卷14 題忠州龍興寺所居院壁》[주-D043] 월굴(月窟) : 전설에 달이 지면 들어가 쉰다는 굴로, 서쪽에 있다고 한다. 월굴을 더듬는다는 표현은 높이 올라갔다는 의미이다.[주-D044] 벽락동(碧落洞) : 풍광이 깨끗하고 좋은 곳의 대명사처럼 쓰이는 말이기도 하고, 구체적 지명을 일컫는 경우도 있다. 《계승(桂勝)》에는 벽락동을 막연한 숲이 깊고 그늘지며 물이 맑고 운치 있으며 바위가 높지만 밝고 트인 곳을 대개 벽락동과 같다고 설명하였고, 《강서통지(江西通志)》에는 익양현(弋陽縣) 관아 동북쪽에 산이 깊고 바위가 험한 곳이 있는데 그곳 석벽에 ‘벽락동천(碧落洞天)’이라는 넉자가 새겨져 있다고 하였으며, 소동파의 시에 언급된 벽락동은 영주(英州) 아래 14리에 있는 곳이라고 스스로 주석을 달았다.[주-D045] 위의가 …… 없다〔威儀棣棣, 不可選也.〕 : 《시경》 〈백주(柏舟)〉에서 인용한 구절이다.[주-D046] 증심사(證心寺) : 무등산에 있는 사찰이다. 860년에 철감선사(澈鑑禪師)가 창건하였고, 1094년에 혜조국사(慧照國師)가 중수하였으며, 1443년 전라도 관찰사 김방(金倣)이 자신의 녹봉으로 중창하였다. 그 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자 1609년(광해군1) 석경(釋經), 수장(修裝), 도광(道光) 등의 선사들이 중창하여 일제강점기 초기에는 임제종(臨濟宗) 운동의 본부가 되었다. 1951년 4월 50여 명의 무장공비들에 의하여 대부분의 건물이 불탔으며 1971년에 크게 증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주-D047] 기징사(奇徵士) : 기정진(奇正鎭, 1798~1879)으로,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대중(大中), 호는 노사(蘆沙),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학덕이 높아 조정의 부름을 받은 선비를 징사라고 하는데, 기정진은 1866년(고종3)에 조정에서 동부승지, 호조 참판 등에 임명하였으나 사양하였다. 학문에 전념하여 서경덕(徐敬德), 이황(李滉), 이이(李珥), 이진상(李震相), 임성주(任聖周)와 함께 성리학의 6대가(六大家)로 일컬어진다. 《노사문집(蘆沙文集)》이 있다.[주-D048] 일명지사(一命之士)가 …… 것입니다 : 일명지사는 처음 벼슬길에 나선 선비를 가리키는데, 벼슬하는 선비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와 대동소이한 말이 《근사록(近思錄)》 권10에, 정명도(程明道) 선생의 말로 있다. “처음 벼슬한 사가 진실로 만물을 사랑하는 데 마음을 두면 사람에게 반드시 구제해 주는 바가 있을 것이다.〔一命之士, 苟存心於愛物, 於人, 必有所濟.〕”라고 하였다.[주-D049] 이재국(李在國) : 1838~? 본관은 청안, 1885년(고종22) 사마시 증광시에 3등으로 합격, 1890년 무렵에 의령원 수봉관(懿寧園守奉官)을 지냈다. 그 외 인적 사항은 자세히 알 수 없다.[주-D050] 쌍계루(雙溪樓) : 백암산 백양사 입구에 있는 누각이다. 1370년에 무너진 뒤 1377년에 복구되었으며, 정도전ㆍ이색 등이 기문을 남겼다. 이색의 〈백암산정토사쌍계루기〉에 의하면 이곳에서 두 계곡의 물이 합쳐지므로 ‘쌍계루’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주-D051] 포옹(圃翁) : 정몽주(鄭夢周)를 가리킨다. 《신증 동국여지승람》 〈장성현〉에, 백암사의 승려가 요청하여 포은 정몽주가 쌍계루에서 지어준 시가 전한다.[주-D052] 백련암(白蓮庵) : 백양산 중턱에 있었던 암자인데,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주-D053] 운문사(雲門寺) : 백양사(白羊寺)의 산내암자인 운문암을 가리킨다. 백암산 최고봉인 상왕봉(象王峰) 아래에 있다. 고려 충정왕(재위 1349~1351) 때 각진국사(覺眞國師) 복구(復丘, 1270~1355)가 개창하면서부터 고승들의 수도장으로 이름을 떨쳤다고 한다. 한국전쟁 때 소실되어 유적만 남아 있다가 1985년 복원되었다.[주-D054] 경담(鏡潭) : 1824~1904. 경담은 법명이며, 본명은 서관(瑞寬)이다. 어려서 장성 백양사(白羊寺)로 출가하였으며, 그 뒤 구암사(龜巖寺)의 백파(白波)로부터 불경과 외전(外典)을 배운 뒤 선암사(仙巖寺)의 침명(枕溟)으로부터 선법(禪法)을 공부하였다. 임종에 관해서는 전하지 않는다. 《東師列傳》[주-D055] 물외암(物外庵)과 …… 영천암(靈泉庵) : 물외암, 약사암, 영천굴은 모두 백양사의 산내암자이다. 영천암은 영천굴 속에 있다.[주-D056] 영천굴(靈泉窟) : 백양사 경내에 있다. 영천굴은 20평 남짓한 천연석굴로 단칸의 영천암이 있는 곳이다. 굴속의 바위틈에서 샘이 솟아나오는데 이를 영천이라 한다.[주-D057] 벽련암(碧蓮菴) : 내장산 서래봉 중턱에 있다. 한동안 내장사라 불리기도 하다가 근세에 와서 영은암을 내장사로 개칭하고 이곳은 다시 벽련암이라 칭한다.[주-D058] 입비촌(立碑村) : 정읍과 담양 사이의 길목에 있었던 마을인 듯한데, 구체적인 위치는 알 수 없다.[주-D059] 응향각(凝香閣) : 순창 관아 안의 동헌 옆 연못가에 있었던 누각이다.[주-D060] 적성강(赤城江) : 섬진강의 상류로서 순창군 적성면을 흐르는 구간을 적성강이라고 부르며 남원군 대강면에서부터 섬진강으로 불린다.[주-D061] 붉은 사다리 : 원문은 단제(丹梯)인데, 선경(仙境)으로 들어가는 길을 의미한다.[주-D062] 교룡산성(蛟龍山城) : 남원산성(南原山城)이라고도 불린다. 산성을 언제 쌓았는지는 기록이 없어서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성을 쌓은 입지나 형식으로 볼 때 백제 때 만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주-D063] 임백호(林白湖) : 임제(林悌, 1549~1587)로, 본관은 나주, 자는 자순(子順), 호는 백호ㆍ풍강(楓江)ㆍ소치(嘯癡)ㆍ벽산(碧山)ㆍ겸재(謙齋)이다. 1576년(선조9) 생원진사시에 합격, 이듬해 알성시에 급제한 뒤 흥양 현감, 북도 병마사, 예조 정랑을 거쳐 홍문관 지제교를 지냈다. 《임백호집》이 있다.[주-D064] 윤횡선(尹宖善) : 1832~?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경구(景搆)이다. 1872년에 남원 부사로 부임해 있었다. 1882년(고종19) 증광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임금의 특별 명령으로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임명되었다. 그 후 사간원 대사간, 성균관 대사성, 이조 참의 등을 역임하였다.[주-D065] 송광산(松廣山) : 전라남도 순천의 송광면 신평리에 있는 조계산(曹溪山)의 옛 이름이다.[주-D066] 월출산(月出山) :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과 강진군 성전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광주의 무등산(無等山), 순천의 조계산(曹溪山)과 함께 호남의 명산으로 손꼽힌다.[주-D067] 교열루(敎閱樓) : 임실현 관아 안에 있었던 누각이다.[주-D068] 운수관(雲水館) : 임실현 관아인 동헌이다.[주-D069] 익정공(翼貞公) : 한용귀(韓用龜, 1747~1828)로, 본관은 청주, 자는 계형(季亨), 호는 만오(晩悟), 시호는 익정이다. 1772년(영조48) 성균관 재학시 황감제(黃柑製)에서 장원급제하고, 이듬해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진하사(進賀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바 있으며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지냈다.[주-D070] 정준화(鄭駿和) : 인적 사항은 자세히 알 수 없다. 1866년부터 의릉 참봉, 선공감 봉사 등을 지내고 1872년 임실 현감으로 부임했다.[주-D071] 삼장(三場) : 과거(科擧)에서 초장(初場), 중장(中場), 종장(終場) 세 번의 시험을 치는 것을 가리킨다.[주-D072] 동당시(東堂試) : 대과(大科)나 문과(文科)의 속칭, 혹은 증광시(增廣試)를 말한다.[주-D073] 오원강(五黿江) : 임실 관촌면 일대를 흘러가는 섬진강 줄기를 부르는 명칭이다.[주-D074] 만마관(萬馬關) : 전주에서 남원(南原)으로 가는 길에 슬치재를 못 가서 있는 전주의 관문이다.[주-D075] 견훤(甄萱) : 867~936. 전주 견씨(全州甄氏)의 시조이고, 본성은 이(李)이며, 아자개(阿慈介)의 아들이다. 후백제의 초대 왕(재위 900~935)으로 관제를 정비하고 중국과의 국교를 맺고 궁예의 후고구려와 충돌하며 세력 확장에 힘썼다. 후에 고려 왕건에게 투항하여 신검 토벌을 요청해 후백제를 멸망시켰다.[주-D076] 이호준(李鎬俊) : 1821~1901.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충백(忠伯),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1864년(고종1) 경과 증광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 수찬, 홍문관 부제학을 거쳐 이조 참의에 임명되었다. 1867년에 친척의 자제인 이완용(李完用)을 양자(養子)로 입적, 당시 서자(庶子)로 이윤용(李允用)을 두고 있었다. 1870년 전라도 관찰사 재임 중 외침에 대비한 성의 수보(修補)와 군사훈련에 힘썼다.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중추원 의장, 궁내부 특진관, 의정부 참정을 지냈다.[주-D077] 전 …… 하니 : 《승정원일기》 고종 10년(1873) 4월 15일 기사에 보면, 전주부의 만마관은 육로(陸路)로 통하는 요해처이니 그 성을 완전히 축조하고 곁에 관아(官衙)를 설치하여 남고진장(南固鎭將)으로 하여금 봄가을로 돌아가며 지키도록 해 달라는 전라 감사 이호준(李鎬俊)의 장계에 대해 윤허하는 내용이 나온다.[주-D078] 좌태충(左太沖) : 태충은 진(晉)나라 좌사(左思)의 자이다. 인용한 시구는 그가 지은 〈영사시(詠史詩) 8수〉가운데 제5수에서 나온 구절이다. 《文選 卷21》[주-D079] 관찰 통판(觀察通判) : 관찰사의 감영에 소속된 판관(判官)을 가리킨다.[주-D080] 게효(揭曉) : 과거 시험 합격자 명단을 공포(公布)하는 것을 의미한다.[주-D081] 공북루(拱北樓) : 전주부의 공북루를 가리킨다. 지금의 전라북도 전주시 팔복동에 자리한 누각으로 조선 시대에는 조정에서 조령(朝令)을 받들고 사람이 내려올 때 부윤(府尹)이 나가 맞던 곳이기도 하다.[주-D082] 삼례원(參禮院) : 전라도 전주부(全州府) 삼례도(參禮道)로, 전주부 북쪽 35리에 있다. 지금의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면 지역이다.[주-D083] 여산부(礪山府) :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군 여산면에 해당하는 곳이다.[주-D084] 경천역(擎天驛) : 경천역(敬天驛)이라고 쓰기도 한다. 지금의 충남 공주시 계룡면 경천리 일대이다.[주-D085] 광정역(廣亭驛) : 광정역(廣程驛)이라고 쓰기도 한다. 지금의 충남 공주시에 속했던 지명이다.
    2020-12-14 | NO.450
  • 개금산 도깨비 방망이
    옛날, 서구 매월동 개금산 동쪽 산골마을에 두 형제가 살고 있었어요. 동생은 착하고 선량했지만 형은 부자이면서도 늙은 부모를 가난한 동생에게 떠맡기고도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지독한 욕심쟁이었어요. 하루는 동생이 산에 땔나무를 하러 산에 가서 나뭇잎을 긁어모으고 있었는데 개암나무 열매 한 알이 툭 굴러 떨어졌습니다. 아우는 이것을 주워 "이건 아버지 갖다 드려야지" 하며 호주머니에 넣었어요. 개암이 또 떨어지자 "이것은 어머니 갖다 드려야지" 생각하며 주워 호주머니에 넣었어요. 주머니에 넣고 나자마자 서너 개가 연거푸 굴러 떨어졌습니다. 동생은 "이건 마누라 것", "이건 아들 것", "이건 딸 것" 그리고 "이건 내가 먹어야겠다"하고 생각하며 모두 주워 담고 있을 때 비가 내렸어요. 동생은 비를 피하기 위해 산속 다 쓰러져 가는 빈집에 들어갔습니다.비가 그치면 그 집에서 나오려 했으나 비가 그치기는커녕 갈수록 심하게 쏟아져 밤을 그곳에서 날 수 밖에 없었어요. 숲속의 어둠은 빨리 찾아왔고 더 짙게 깔렸습니다. 으슥한 밤이 찾아오자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들려 내다보니 난데없이 도깨비들 한 무리가 몰려오는 것이 보였어요. 동생은 무서워 대들보 위에 숨어 도깨비들을 지켜봤지요. 도깨비들은 방망이를 두드리며 ‘술과 고기, 밥과 떡 나와라 뚝딱’ 하며 순식간에 음식들을 푸짐하게 차렸어요. 그들은 그것을 먹으며 놀았습니다. 동생은 그 음식들을 보자 침이 고여 배고픔을 더 느껴야 했어요. 배고픔을 달래려고 호주머니에 든 개암나무 열매 하나를 입에 넣고 무심결에 깨물었는데 단단한 껍질이 으깨어지면서 ‘딱!’ 하고 큰 소리가 나자 도깨비들은 그 집 대들보가 부러지는 소리로 잘못 알고 모두가 혼비백산 달아나고 말았어요. 도깨비가 빠져나간 것을 확인한 동생은 대들보 위에서 내려와 도깨비들이 버리고 간 술과 고기, 밥과 떡, 그리고 도깨비 방망이까지 함께 들고 집에 돌아와 부자가 됐습니다. 동생은 그 도깨비 방망이를 두들겨 원하는 것을 모두 나오게 했어요. 그렇게 해서 집도, 논밭도 생기고 해서 부자로 잘 살게 됐지요. 욕심쟁이 형은 그 소식을 들은 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동생에게 "너는 어떻게 해서 그렇게 벼락부자가 되었느냐?"고 따지듯 물었습니다. 자초지종 이야기를 들은 형은 나무지게를 들쳐 메고 동생이 말한 산으로 갔습니다. 마침 산 속에 들어가자 개암 한 알이 형의 발 앞에 툭 굴러 떨어졌지요. 형은 첫 마디부터 "이건 내가 먹어야지" 하고 주머니에 넣었어요. 또 한 개가 떨어지자 "이것도 내가 먹어야지" 하고 혼잣말을 내뱉어요. 형은 떨어지는 개암나무 열매마다 모두 다 자신이 먹겠다면서 호주머니에 주워 담았습니다. 그리고 비도 오지 않는데 그 빈집에 들어가 대들보 위로 숨었어요. 마침내 으슥한 밤이 되자 도깨비들이 몰려와 지난번 동생 때처럼 ‘술과 고기, 밥과 떡 나와라 뚝딱’ 하며 순식간에 음식들을 푸짐하게 차려놓고는 그것을 먹으며 놀았습니다. 도깨비들이 정신없이 먹으며 놀고 있을 때 대들보 위에 숨었던 형이 개암 한 알을 딱 깨물었어요.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도깨비들이 그 소리를 듣고 놀라 도망가야 하는데 도망은커녕 "저번에 우리 방망이를 훔쳐간 놈이 또 왔구나. 이놈을 혼내 주자"하며 대들보 위에서 형을 끌어 내렸어요. 도깨비들은 형의 아랫도리만 홀랑 벗겨 ‘사타구니에 달린 귀중한 물건’을 붙잡고 늘이면서 "한발 늘어져라" 뚝딱, "두발 늘어져라" 뚝딱하며 방망이를 자꾸만 두들겨댔습니다. 그러자 형의 물건이 너무 커져버렸지요. 형은 그렇게 커져버린 자신의 물건을 보며 제발 원래대로 돌려달라고 도깨비들에게 청했지만 아무도 그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어요. 결국 형은 그 모습으로 집에 돌아올 수 없어 계속 산에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개금산 도깨비 방망이는 주제넘게 너무 욕심을 부리면 패가망신할 수 있는 만큼 누구나 분수에 맞게 살 때 복과 행운이 따른다는 점을 상기시켜준다.
    2018-05-28 | NO.449
  • 객지에 와서 사는 곳에 오두막집이 이루어졌는데, 꼭 서석산(瑞石山)을 대하였다 - 僑居地蝸廬成的對瑞石
    객지에 와서 사는 곳에 오두막집이 이루어졌는데, 꼭 서석산(瑞石山)을 대하였다. 이곳은 일찍이 가보려고 생각을 했던 곳인데 뜻대로 되지 않다가 지금에야 우연히 뜻대로 되니 나도 모르게 기이하고 다행스러워 한 수의 절구로 기쁨을 기록하다〔僑居地蝸廬成的對瑞石此是曾往結戀而不可得者今以邂逅得之不覺奇幸一絶志喜〕 - 노사집 제2권 위대하게 덕스런 모습 한 지방 종주 되니 / 偉然體德一方宗벗이라고 말할까, 스승이라면 너무 높도다 / 友敢云乎師則隆산을 이름 짓고서 자를 지을 수만 있다면 / 山若可名還可字문을 열고서 어르신이라 부르겠네 / 開門喚作丈人公[주-D001] 서석산(瑞石山) : 광주(光州)에 소재한 무등산(無等山)의 이칭(異稱)이다.
    2020-10-04 | NO.448
  • 경혜공주의 묘지명- 삼탄집 제14권
    경혜공주의 묘지명〔敬惠公主墓誌銘〕 - 삼탄집 제14권 : 삼탄 이승소(李承召, 1422~1484)  경혜공주는 문종 공순대왕(文宗恭順大王)의 따님이다. 어머니 권씨(權氏)는 바로 현덕왕후(顯德王后)이며 뒤에 폐위(廢位)되었다. 안동(安東)의 대성(大姓)인 고려 태사(太師) 권행(權幸)의 후손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 중추원사(中樞院使)를 지낸 권전(權專)이 태부(太傅) 문헌공(文憲公) 최충(崔冲)의 12대손인 부정(副正) 최용(崔鄘)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영락(永樂) 무술년(1418, 태종18)에 왕후를 낳았다. 선덕(宣德) 신해년(1431, 세종13)에 궁궐로 선발되어 들어가 문종(文宗)을 저궁(儲宮)에서 모시었으며, 을묘년(1435)에 공주를 낳았다.공주는 경오년(1450)에 정종(鄭悰)에게 시집갔는데, 정종은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된 정도공(貞度公) 정역(鄭易)의 손자이며, 형조 참판 정충경(鄭忠敬)의 아들이다. 경태(景泰) 을해년(1455, 세조1)에 정종이 죄를 지어 광주(光州)에 유배되자, 공주가 따라가 있으면서 온갖 곤욕을 다 치렀는데, 일반 사람들도 감당해 내지 못할 바였다. 그런데도 조금도 원망하거나 불평하는 기색이 없이 아침저녁으로 아녀자로서 도리를 다하면서 더욱더 경건하게 하며 해이하지 않았다. 정종이 마침내 죽음에 이르자 공주는 애통해하기를 예법대로 다하였으며, 어린아이들을 잘 어루만져 길렀다. 이에 기구한 운수를 만난 데 대해 슬퍼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아녀자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데 대해 흠앙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천순(天順) 신사년(1461, 세조7)에 세조께서 중관(中官)을 보내어 경사(京師)로 소환하고는 특별히 노비 50구(口)를 하사하고 종신토록 1품관의 녹봉을 지급하라고 명하였다. 성화(成化) 을유년(1465)에 집 한 채를 하사하였다. 기축년(1469, 예종1)에 예종께서 또 노비 50구를 하사하였으며, 대왕대비(大王大妃)께서 더욱더 사랑을 쏟아 때때로 대궐 안으로 불러들여 여러 날 동안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계사년(1473, 성종4) 동12월에 병에 걸리자 상께서 내의(內醫)를 보내어 진찰하게 하였으며, 아울러 약(藥)을 하사하여 치료하게 하였으나 효험을 보지 못하였다. 28일 아무 갑자에 집에서 졸하니, 향년은 40세였다. 부음을 아뢰자 상께서 유사에게 명하여 조문하는 제사를 지내게 하였으며, 부의를 하사하고 관가에서 장사를 돌보아 주게 하였다. 다음 해인 갑오년(1474) 3월 아무 날에 고양(高陽)에 있는 아무 산 아무 향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공주는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정미수(鄭眉壽)로 지금 돈녕부 참봉(敦寧府參奉)으로 있으며, 딸은 어리다.명(銘)은 다음과 같다.무릇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장수하고 요절하며 궁박하고 통달함에는 운수가 있는 법으로, 저 푸른 하늘은 아무런 단서가 없어서 기필할 수 없다. 무릇 귀한 왕녀(王女)의 신분인데도 그 복록을 누리지 못하였으며, 정숙하고 화락한 덕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장수를 누리지 못한 것은 어째서인가? 비록 그렇지만 하늘이 보답하는 것은 소홀하면서도 잊지 않는 법이니, 흐르는 광채와 남은 경사가 장차 후세를 기다려서 더욱더 크게 빛날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천명이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을 징험할 것이다.
    2020-09-21 | NO.447
  • 고 장원(高壯元)이 경사(京師)에 조회하러 가는 것을 전송하다. - 잠곡유고 제1권
    고 장원(高壯元)이 경사(京師)에 조회하러 가는 것을 전송하다. 계축년(1613) - 잠곡유고 제1권 : 잠곡(潛谷) 김육(金堉, 1580~1658) 서석산 높고 높아 만 길이나 되는데 / 瑞石之山高萬仞천 봉우리 삐쭉삐쭉 하늘 속에 솟았어라 / 千峯束立天中央솟구치어 맺혀져서 맑은 기운 다 모음에 / 扶輿磅礴淑氣窮배인 정기 몇 차례나 나라 인재 배출했나 / 孕精幾作邦家光발흥하여 태헌공 그 분께서 태어남에 / 勃興得我苔軒公하늘 닿는 그 의기는 추상보다 더 하였네 / 摩天義氣凌秋霜그 정충과 그 위절이 우주를 비춤에 / 精忠偉節照宇宙남긴 풍모 흠앙하니 눈물 옷깃 적시어라 / 景仰餘韻猶沾裳내 평생에 한 되는 건 공 모시지 못한 걸로 / 吾生恨不擧公輿공의 유방 흠앙하여 자손 사귈 생각했네 / 思識子孫欽遺芳풍진 세상 문 나서서 한 차례 경개해서 / 風塵出門一傾盖어질고도 호걸찬 그댈 용케 보았네 / 何幸見此賢豪郞집안 명성 안 떨구고 청전을 보전해서 / 家聲不墜保靑氈나이 어려 과거장서 영명을 드날렸네 / 弱歲揚英翰墨場이태 사이 연방 계방 장원 되고 발탁됨에 / 魁蓮擢桂兩年間빛나는 그 명성이 팔도를 놀래켰네 / 赫赫聲名驚八方큰 어진이 후손 필시 일어나게 되는 법 / 大賢之後必有興머지않아 암랑에 오를 줄을 내 알겠네 / 分知不遠登巖廊이조와 병조 관직 훌쩍 뛰어 올라감에 / 民曹騎省歘聯翩밝은 임금 이미 벌써 강직한 맘 알아봤네 / 明主已識懷剛腸천추절을 하례 가는 사신 가려 뽑음에 / 千秋賀節選擇使만리 먼 연경 땅 가 황제 조알하게 됐네 / 萬里燕京朝玉皇멀고도 먼 이국 산천 사모 타고 날아감에 / 山川召遞四牡飛대장부라 꾸린 행장 쌍검만이 길다랗네 / 丈夫行裝雙劒長갈석산과 의무려산 눈 안에 들어오고 / 醫閭碣石入眼中난하와 요해 바다 파도는 망망하네 / 灤河遼海波茫茫이제묘 앞에 서서 두 분 영령 조문하고 / 夷齊廟中弔英靈화표주 가에서는 고향 하늘 바라보리 / 華表柱邊應望鄕이정에는 느티나무 그늘 한창 짙은데 / 離亭正値槐陰合역로에선 되레 매우 내릴까 봐 걱정이네 / 驛路還愁梅雨凉인간 세상 만남 이별 운수 있는 법이니 / 人間離合亦有數이번 이별 먼 헤어짐 슬퍼할 게 뭐 있겠나 / 此別何必悲參商견문 넓고 기이함에 심기가 장해지리 / 奇聞大觀壯心氣자장은 먼 유람에 명문장가 되었다오 / 子長遠遊能文章일 마치고 돌아올 땐 한가한 틈 많으리니 / 竣事廻轅想多暇시구 맑고 새로워서 남들 감당 못하리라 / 佳句淸新人莫當중국 땅의 경물 모두 거두어서 돌아옴에 / 收拾中華景物歸해노의 주머니가 가득 찬 것을 보리 / 佇看所富唯奚囊[주-D001] 서석산(瑞石山) : 광주(光州)에 있는 무등산(無等山)의 별칭이다.[주-D002] 태헌공(苔軒公) : 태헌은 고경명(高敬命)의 호이다.[주-D003] 유방(遺芳) : 선인(先人)이 남긴 성대한 덕과 아름다운 명예를 말한다.[주-D004] 경개(傾蓋) : 길을 가다가 서로 만나서 수레의 휘장을 기울이고서 잠시 이야기한다는 뜻으로, 잠깐 동안 서로 이야기한다는 뜻이다. 《공자가어(孔子家語)》 치사(致思)에, “공자가 담(郯)에 가서 정자(程子)를 길에서 만나서는 경개(傾蓋)하고서 종일토록 이야기하고는 서로 몹시 친해졌다.” 하였다.[주-D005] 청전(靑氈)을 보전해서 : 청전은 푸른색의 담요인데, 벼슬하는 집안에서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 물건이란 말로, 대대로 벼슬자리를 잃지 않았다는 뜻이다. 《태평어람(太平御覽)》 제70권에, “왕자경(王子敬)이 재실(齋室) 안에 누워 있을 적에 도둑이 들어 물건을 훔쳤는데, 온 방 안의 물건을 다 훔치도록 자경은 누운 채로 가만히 있다가 도둑이 탑(榻) 위로 올라가서 훔칠 물건을 찾으려고 하자 왕자경이 소리를 치면서 말하기를, ‘석염(石染)과 청전(靑氈)은 우리 집안에 대대로 전해져 오는 물건이니 특별히 놔둘 수 없겠는가?’ 하였다. 이에 도둑이 물건을 놓아둔 채 도망쳤다.” 하였다. 청전구물(靑氈舊物).[주-D006] 연방(蓮榜) 계방(桂榜) : 연방은 조선 왕조 때 사마시(司馬試)인 생원과(生員科)와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한 사람의 이름을 적은 방목(榜目)이며, 계방은 대과(大科)에 급제한 사람을 적은 방목이다.[주-D007] 암랑(巖廊) : 높고 큰 낭무(廊廡)로, 조정(朝廷)을 가리킨다.[주-D008] 사모(四牡) : 네 마리의 수말이라는 뜻으로, 《시경》 소아(小雅)의 편명(篇名)이기도 한데, 왕명을 봉행하는 사신이 타고 가는 말을 뜻한다.[주-D009] 화표주(華表柱) : 무덤 앞에 있는 망주석으로, 요동 사람 정영위(丁令威)가 학이 되어 날아와서 앉았던 곳이다. 한 나라 때 요동 사람 정영위가 영허산(靈虛山)에서 도를 닦아 신선이 되었다. 그 뒤에 학이 되어 요동에 돌아와 화표주에 앉아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새여, 새여, 정영위여, 집 떠난 지 천 년 만에 오늘에야 돌아왔네. 성곽은 의구한데 사람들이 아니로세. 어찌 신선 아니 배워 무덤이 총총하뇨.” 하였다. 《搜神後記》[주-D010] 이정(離亭) : 성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의 길 옆에 세워둔 정자로, 옛 사람들이 먼 길을 떠나는 사람들을 이곳에서 전송하였다.[주-D011] 매우(梅雨) : 매실이 누렇게 익는 계절인 초여름에 내리는 긴 장마비를 말한다.[주-D012] 자장(子長)은 …… 되었다오 : 자장은 《사기(史記)》를 지은 사마천(司馬遷)의 자이다. 사마천은 천성이 유람하기를 좋아하여 일찍이 남쪽으로 강수(江水), 회수(淮水)를 유람하고 회계(會稽)로 올라가서 우혈(禹穴)을 보고 구의산(九疑山)을 보았으며, 북쪽으로는 문수(汶水)와 사수(泗水)를 건너 제로(齊魯) 지방을 거쳐 양(梁)과 초(楚)지방까지 두루 유람하였다. 이때 얻은 산천에 대한 지식으로 인해 명문장가가 되었다고 한다. 《史記 卷一百三十 太史公自序》[주-D013] 해노(奚奴)의 주머니 : 해노는 수행하는 어린 종자(從者)를 가리키며, 주머니는 시고(詩稿)를 넣는 주머니를 말한다. 당(唐) 나라 이상은(李商隱)의 《이하소전(李賀小傳)》에, “이장길(李長吉)이 매일 아침 해가 뜨면 제공(諸公)들과 노닐면서 항상 어린 종자를 데리고 나귀를 타고 다녔는데, 어린 종자의 등에다가 오래 묵은 비단 주머니를 지고 따라다니게 하였다. 그리고는 우연히 좋은 시구를 얻으면 즉시 시구를 써서 그 주머니에 넣었다.” 하였다.
    2020-09-25 | NO.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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