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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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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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야금병창 이영애/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8호(2014. 1. 19.)
    무형문화재 가야금병창 이영애는 스승 박귀희 선생을 사사했다. 스승으로부터 가야금병창과 판소리를 익혔다. 그가 국악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10살 때 국악을 좋아했던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가야금을 배우게 된 것이 시작이었다. 그가 무형문화재로 인정받은 가야금 병창은 민요나 단가短歌, 판소리 일부 대목을 가야금으로 연주하면서 그 반주에 맞춰 부르는 음악이다. 19세기 후반 남도에서 가야금 산조가 발생할 무렵 함께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 후기 명창인 신만엽申萬葉과 김제철金濟哲이 민요나 단가, 판소리의 한 대목을 가야금의 기악 특성에 실어 가야금 병창제를 창안했다. 이후 김창조, 오수관 등 초기의 가야금 산조 명인들에 의해 다듬어지고 심상건, 강태홍, 오태석, 정남희, 박귀희 등 명인들에 의해 크게 발전했다.이영애 예능보유자는 10살 때 1년 이상 가야금을 익혀 눈을 뜨자 아버지에 의해 동네 어르신들을 관객으로 연주 겸 연습을 하면서 실력을 뽐내곤 했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가야금산조에 빠져 지냈다. 이때 기초를 다잡을 수 있는 기회로 활용했다고 한다. 3년간 피나는 연습을 한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77년KBS 민속백일장에 광주. 전남 대표로 출전, 10월 첫째 주에 도전한데 이어 연말에 가야금산조로 대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를 계기로 향사 박귀희 및 안숙선과 함께 방송에 출연, 선후배로 연주하는 행운까지 잡을 수 있었다.이후 박귀희의 제자가 돼 일주일에 1∼2회씩 서울로 가야금병창을 배우기 위해 분주하게 오갔다. 하지만 이영애는 1년 정도 가야금을 멀리하는 일이 생긴다. 정신적 지주이자 영원한 지원자 역할을 자처했던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시련이 찾아왔고, 이는 깊은 슬럼프로 연결됐다. 이 일로 인해 그는 자신의 운명과도 같았던 가야금을 1년 정도 멀리했다. 1년여를 보낸 뒤 어렵게 한 귀퉁이에 두었던 가야금을 꺼내 조율하고 어루만지면서 다시 예전의 자신으로 되돌아갔다. 20대 성년이 되어서는 광주시립국악원의 가야금 강사 활동을 시작했고, 그 후 1986년 전남도립국악단이 창단되자 창단멤버로 5년 동안 활동했다. 이어 광주시립국극단 단원으로도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전주대사습에 7전8기 도전 끝에 장원을 일궈냈다. 그의 도전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전주대사습 장원의 기운을 이어 4년 만에 우륵전국가야금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다. 그는 화순에 (사)한.얼가야금병창보존회를 설립, ‘제1회 향사 가야금병창대회’를 열어 화제를 모았다. 2008년 5월 순천시가 낙안읍성에서 열린 축제에서 가야금병창대회를 열어줄 것을 요청한 것이 계기가 돼 (사)낙안읍성가야금병창보존회를 설립했다. (사)낙안읍성가야금병창보존회 이사장을 맡아 다양한 활동을 펼쳐왔고, 가야금병창의 최고봉인 전남 낙안 출신 오태석 명인(1895∼1953)의 현창사업을 위해 힘을 쏟아왔다. 임방울국악진흥회와 광주민속박물관회 이사를 역임했다.이영애 예능보유자는 제자 양성에도 많은 관심을 표명해 우수한 인재들을 배출해왔다. 그 터전이 된 광주송원초등학교는 지난 2006년 남구로 옮겨갔으나 그 이전에는 서구 광천동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가 25년간 꾸준한 애정을 갖고 인재를 배출해낸 곳이다. 2019.6.14. 수정
    2018-05-24 | NO.42
  • 강산제 심청가 이임례/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4호(1998. 2. 21.)
    무형문화재 강산제岡山制 예능보유자 이임례는 이병규(판소리)와 춘향가 김상용(춘향가), 생전 목포시립국악원에서 강산제 소리를 했던 김흥남을 사사했다. 전형적으로 강산제 소리를 이어받은 이임례 예능보유자는 소리의 고장으로 불리는 1941년 전남 진도 출생으로 국악 집안에서 태어나 자연스럽게 소리를 접할 수 있었다. 일찍부터 음악적인 재능을 키울 수 있었던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조선 헌종. 철종. 고종 때의 판소리 명창 박유전朴裕全(1835~1906)으로부터 비롯된 강산제 소리를 전승한 그는 이병규에게 처음 판소리를 배운 뒤 김상용에게 춘향가를, 목포시립국악원에서 강산제 소리를 하는 김흥남에게 흥보가와 심청가를 각각 배웠다. 박유전-정재근-정응민-성창순으로 이어지는 판소리 강산제(심청가)를 보다 체계적으로 연마한 것이다. 그가 물려받은 성창순 창본 심청가는 대단히 정교한 기교가 요구되는 소리로 알려져 있다. 판소리 강산제는 전남 보성 지역을 중심으로 발달한 판소리의 유파로, 서편제에 속하지만 그 기교가 뛰어나고 부침새가 정교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계면조 창법에 있어 남자가 흐느껴 우는 듯한 처절하고 숙연한 ‘그늘진 목소리’로 판소리 주인공들의 소리마디 마디에 심력을 다해 갖가지 한을 표현, 고통 받는 서민들을 대신해 희로애락을 드러내는 민중 예술로 인식되고 있다.판소리는 소리하는 사람(창唱.노래) 한 명과 북치는 사람 한 명, 그리고 판을 이루는 구경꾼으로 이뤄지는 무대예술을 말한다. 소리하는 사람은 소리와 대사(아니리.백白.말), 몸짓(발림)을 하며, 북을 치는 사람은 소리하는 사람의 가락에 따라 북을 쳐서 장단을 맞추며 신명난 분위기를 이끌어 간다. 판소리는 지역적 특성과 전승 계보에 따라 전라도 동북지역의 동편제東便制를 비롯해 전라도 서남 지역의 서편제西便制, 그리고 경기도와 충청도의 중고제中高制로 나뉜다. 이중 강산제는 서편제의 명창 박유전의 소리를 이어받은 것으로, 서편제의 일종을 말한다.판소리는 원래 열두 마당이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거의 사라졌고, 춘향가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의 다섯 마당만 현재 남아있다. 심청가는 판소리 다섯마당 가운데 하나로 심봉사의 딸 심청이 공양미에 몸이 팔려 인당수에 빠졌으나 옥황상제의 도움으로 환생해 황후가 되고,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해 효도한다는 내용이다. 심청가는 부르는 사람마다 짜임새가 다르나 보통은 초앞, 심청탄생, 심청어미 출상, 동냥을 다니는데 장승상댁, 공양미 삼백석, 범피중류, 인당수, 용궁, 심황후 자탄가, 뺑덕어미, 황성길, 부녀상봉, 뒤풀이의 순서로 짜여진다. 이임례 예능보유자는 그 소리를 제대로 물려받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84년 제10회 전주대사습놀이 일반부 장원을 차지한 뒤 1993년에는 제19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명창부에서 장원(대통령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1989년 심청가 완창발표회를 가졌으며, 1990년 성옥문화상 예술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1994년 이임례 원작소설 ‘휘모리’를 발간했으며, 이임례 심청가 ‘만가’ CD음반을 제작, 발표했다. 1990년 광주시립국극단 단무장을 역임했고, 1994년 전라남도립국악단 수석을 맡아 활동을 펼쳤다. 1993년 6월 그는 전주대사습 판소리 장원을 수상할 당시 서구 관할이었던 방림2동에 주소를 두고 있었다. 아쟁연주자 이태백 씨가 그의 장남이다.
    2018-05-24 | NO.41
  • 고광선(高光善)의 『현와유고(弦窩遺稿)』
    『弦窩遺稿』는 석판본 16권 8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1에는 시 247수, 권2~3에는 서 442편, 권4에는 잡저 107편, 권5에는 序 99편, 권6~7에는 記 283편, 권8에는 발 37편, 銘 4편, 贊 5편, 辭 5편, 혼서 1편, 상량문 22편, 축문 11편, 제문 6편, 권9에는 碑 57편, 권10~11까지는 묘갈명 109편, 권12에는 묘지명 5편, 묘표 52편, 권13~15까지는 행장 103편, 권16에는 實蹟 26편, 전 14편 등이 수록되어 있고, 마지막 부록으로서 언행록ㆍ가장ㆍ행장 등 高光善에 대한 인물 정보를 알 수 있는 자료들이 모아져 있다. 이렇게 보면, 『현와유고』는 어떤 문집보다도 방대한 분량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권1에는 247수의 시문이 수록되어 있다. 시문의 특징은 증시와 차운시가 대다수를 차지한다는 점이다. 증시와 차운시가 많다는 것은 시문의 제작이 인간관계 속에서 지어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즉, 전체 시문을 두고 보면, 예술적인 미감을 추구했다기 보다는 관계망을 중요하게 생각한 흔적이 역력하다. 또한 시문의 내용이 교훈적이다. 이는 고광선의 평소 성격이 드러난 것이기도 하겠지만, 奇正鎭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익힌 학도로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교훈적인 면은 가령, 옛 선인을 들어 보여주는 식으로도 나타났는데, 「謹次益齋李先生影幀韻」과 같은 작품이 이에 해당한다. 이 시에서 고광선은 고려 때의 성리학자인 益齋 李齊賢의 영정을 소재로 살아생전 그의 업적을 찬양하고 있다. 권2~3까지는 편지글로 총 442편이 수록되어 있다. 스승인 기정진과 羅燾圭에게 올린 편지가 각각 2편과 1편씩, 최익현에게 올린 편지가 1편, 기우만에게 올린 편지가 1편 등이다. 그리고 교유 인물인 鄭義林, 吳繼洙, 朴魯述, 吳駿善 등에게 보낸 편지가 각각 1편씩 있다. 고광선은 이들 편지를 통하여 스승과 학문적인 문답을 했을 것인데, 특히 기정진에게 올린 「上蘆沙奇先生」에서는 자신의 학문적 성취가 매우 힘듦을 토로하고 있다. 권4에는 107편의 잡저가 실려 있다. 잡저도 편지글이 대부분으로 교훈적인 내용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권5의 서는 문집의 서문이나 契案의 것이 많다. 그 외 기ㆍ발문ㆍ비ㆍ묘갈명 등 다수의 글이 있는데, 대체로 당대 유림들의 동태를 살필 수 있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문집 간행은 1962년 제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서문은 宋在直이, 발문은 崔允煥이 작성하였다. 이렇게 보면, 『현와유고』는 어떤 문집보다도 방대한 분량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이는 고광선의 필력이 그만큼 우수했음을 입증하는 것으로 당대 호남유림들의 동향을 읽을 수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2020-08-04 | NO.40
  • 광주 영산재/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제23호(2014. 7. 28.)
    광주광역시 서구 화개1로 53 광주전통불교영산회불교 전통 천도의식으로 불교문화의 정수로 꼽히고 있다. 영산재는 사람이 죽은 지 49일이 되는 날 영가를 극락으로 천도하는 의식으로 이해하면 된다. 불교의 윤회사상에 따른 죄업을 소멸하게 하는 불교의식인 영산재는 부처님이 영취산에서 중생들에게 법화경을 설법할 때의 모습을 재현한 것으로부터 유래됐다. 광주 영산재靈山齋는 사단법인 광주전통불교영산회 주최로 서구 금호동 소재 태고종 법륜사 경내에서 주로 열려 왔다. 광주전통불교영산회는 1992년 창립된 이후 2018년 현재 태고종 광주 법륜사 주지 월인 스님이 회장직을 맡고 있다. 우리의 귀중한 전통 문화유산인 영산재 의식을 가꾸고 보존하기 위해 젊은 후학 발굴과 육성은 물론, 음과 무의 종합예술인 영산재를 보존하고 후세에 전하기 위해 전수관 건립 등에 힘쓰고 있다. 영산회는 그동안 5.18민주항쟁 희생자 위령대재를 비롯해 종교음악제, 노무현 대통령 서거 위령제, 백제불교 최초도래지 수륙대재 등을 봉행해 왔다. 특히 영산재 전승과 보전에 힘쓰는 한편, 후진 양성을 위한 교육과 전수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매년 일반 시민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영산작법 시연 발표회를 개최하고 있다. 시연행사는 범음범패와 바라춤, 그리고 작법 분야의 전문 스님이 각각 시연자로 나와 시련, 상단권공, 관음시식, 대령관욕, 중단퇴공, 봉송 등 주요 영산재 의식을 선보였다.대령관욕은 목탁을 치는 스님을 선두로 소라, 북, 좌발, 호적으로 구성된 취타대에 맞춰 연輦에 모신 영가를 도량으로 인도하는 시련과 부처님의 위신력과 감로의 법으로 깨끗이 씻는 의식의 하나이고, 중단퇴공은 신중단 기도를 위한 것이다. 시연회의 백미로 꼽히는 관음시식은 불법을 옹호하는 신중을 청해 모시는 의식이다. 고문헌에 따르면 본래 3일 동안 열리지만, 시연회는 3시간으로 간소화됐다. 이중 범음범패 분야의 혜령 스님과 바라춤 분야의 호산 스님, 그리고 작법분야의 월인 스님이 문화재 기능보유자로 각각 지정됐다. 영산재는 1973년 11월 5일 중요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문화재) 제50호로 등록됐고, 2009년 9월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다만 문화재청 누리집에 내용이 등록되지 않아 전국에서 관심 있는 사람들의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는 만큼 이에 대한 조치가 시급하게 요구되고 있다. 광주영산재를 이끌며 보급 활동을 펼치는 월인 스님(광주 법륜사 주지, 광주전통불교영산회 회장)이 전승관 건립을 위해 광주 서구 벽진동 일대에 2000평의 대지를 구입하고, 지하 1층, 지상 2층 건물의 전수관 건립을 추진 중이다.
    2018-05-24 | NO.39
  • 괴암일고 槐庵逸稿
    문병일文炳日(1877~1948)의 괴암일고 槐庵逸稿는 序-南光鎭(1968), 跋-朴壎植(1968), 小識-文武在(1968) 쓰고 1968년에 간행되었다.광주 북구 금곡동에 1900년 괴암槐庵 문병일文炳日(1877~1948)이 부친 삼괴三愧 문유식文愉植의 뜻을 받들어 삼괴정을 건립하였다.
    2020-08-11 | NO.38
  • 금호유고(錦湖遺稿)
    임형수林亨秀(1514~1547)는 본관이 평택이며 자는 사수(士遂), 호는 금호이다.  <금호유고>는 목판본으로 1677년에 간행된 원집과 부록의 합 1책이며 판심제는 <금호집>이다. 시문은 대부분 丁酉亂에 佚失되고 저자의 후사가 끊기는 바람에 본가에는 전해지지 못하였다. 뒤에 저자의 둘째 사위 柳景進의 아들 參奉 柳玶이 權韠을 통해 「동차록東槎錄」에 수록된 저자의 詩 약간 수를 얻고 見聞을 통해 얻은 글들을 수습, 1책으로 편차하여 보관해 두었다. 여기서 말하는 「東槎錄」은 「동차집東槎集」을 말하니, 1539년 華察과 薛廷寵 두 사신이 나왔을 때 遠接使 일행이 迎送을 위해 왕래하면서 서로 酬唱한 시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蘇世讓, 陽谷集 序)그 뒤 柳玶의 從孫 柳應壽가 柳玶의 수습본을 가지고 간행을 도모, 文谷 金壽恒에게 교정을 받고 또 遺事 성격의 〈行蹟紀略〉을 부탁하여 받아 부록에 추가해서 定稿本을 만들었다. 이를 光州 牧使 李敏敍의 협조를 받아 1677년 光州에서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1677년 李敏敍가 쓴 序文이 있고, 目錄은 없다. 原集에는 詩 110제, 冊文 1편, 誌 1편, 雜著 2편이 실려 있다. 1681년 宋時烈이 쓴 跋文, 1678년에 金壽恒이 쓴 跋文이 있다.1907년에 와서 저자의 조카 松坡公 林植의 후손이 光州 校堂에 보관되어 있던 舊板을 집으로 옮겨와 殘缺된 부분을 보충하여 重刊하였다.
    2020-08-12 | NO.37
  • 기대승(奇大升)의 고봉집(高峯集)
    『고봉집』은 3권의 시문과 「논사록」 2권 등 모두 5권 5책으로 되어 있다. 서문은 張維와 張顯光이 썼는데, 장유는 기대승이 처음에는 김인후를 종유하다가 이황의 수제자가 되었다고 하였고, 장현광은 퇴계가 斂藏謙退‚ 淸修高節하다면 기대승은 超揚發越‚ 直截峻特하다고 평하였다. 기대승의 일생이 연도별로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권1은 詩인데, 336수의 시가 詩體의 구분 없이 1550년부터 1568년경까지의 작품이 연대순으로 편찬되어 있다. 주 내용은 敍景詩, 次韻詩, 贈別詩, 挽詩이며, 朴孝伯, 奇大恒, 朴淳, 鄭琢, 吳謙, 李後白, 李山海, 鄭澈, 鄭之雲, 金麟厚, 許曄, 盧禛, 成守琛, 尙震, 盧守愼, 崔慶昌, 梁楊應鼎, 蘇世讓 등 사림출신의 당대의 정치가나 학자, 그리고 호남지방의 많은 문인과도 많은 시를 주고 받았다. 권2는 雜著이다. 表 10편, 祭文 9편, 記 7편, 辭狀 6편, 疏 4편, 論 3편을 비롯해서 2편의 , 奏文과 說, 그리고 箋, 上樑文, 書契修答, 擬批, 箚, 樂章, 祝文 등이 각각 1편씩 수록되어 있다. 여러 차례 知製敎 등을 역임하였기 때문에 중국에 보내는 외교문서인 표나 제수된 관직을 사양하는 소가 많고, 기타 소, 론, 전, 비의, 차, 악장, 축사 등 다양한 작품들이 만들어졌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1572년 宗系辨誣를 위해 지은 「辨誣奏」,「二主說」, 仁宗과 明宗의 文昭殿 祔廟를 위한「文昭殿議」와 「論文昭殿箚」, 羅整菴의 학문이 禪學에서 나왔음을 논한 「論困知記」, 송순의 면앙정의 유래와 풍광을 노래한 「俛仰亭記」, 그리고 穆宗皇帝, 明宗, 기대승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 鄭校理와 李滉 등에 대한 제문 등을 들 수 있다. 권3은 碑誌 14편과 書 9편을 비롯해서 行狀 3편, 跋은 1편이 수록되어 있다. 碑誌는 이황, 李彥迪, 成守琛, 行狀은 奇大恒, 金宏弼 등 기대승 생전이나 당대의 저명한 사림을 위해 지어진 것이고, 書는 이황을 비롯해서 金啓, 李楨, 鄭澈 등과 주고받은 나눈 편지가 수록되어 있다. 특히 이황과의 편지는 家廟, 나정암과 노수신의 학설, 太極動靜說, 心性說, 喪服에 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어서 기대승의 예학과 성리학을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발문은 이황이 지은 「朱子書節要序」에 대하여 지어진 것이다. 발문은 1629년 『고봉집』을 간행한 기정진의 손서인 趙纘韓이 지었다. 그리고 「論思錄」은 上, 下 2권으로 明宗 19년(1564), 22년, 宣祖 1년, 2년, 5년에 기대승이 經筵에서 四書, 「近思錄」 등을 강론한 내용을 모아서 간행한 것이다. 서문은 1787년 趙儆이 발문은 1786년 金鍾秀가 지었다. 「논사록」의 내용은 堯舜부터 程朱에 이르기까지의 道學淵源과 帝王의 王道政治를 말하고, 誠意 正心 등의 수양을 하여 군왕의 至治를 이루게 하는 것들이다. 기대승은 국가의 安危는 宰相에게 달려 있고 군주의 덕이 성취됨은 經筵에 달려 있음을 강조하였고, 또 言路를 열고, 財用을 절약하고, 예의를 숭상할 것 등을 역설하였다.
    2020-08-03 | NO.36
  • 기정룡(奇挺龍)의 『낙암유고(樂菴遺稿)』
    기정용의 『樂庵遺稿』는 5권 1책의 목활자본으로 1910년 후손 奇東斗 등에 의해서 간행되었다. 서문은 宋秉珣이 썼다. 서문은 宋秉珣이 썼다. 송병순은 기정룡이 기대승이 살았던 터에 암자를 짓고 살았기 때문에 樂菴이라고 일컬어졌으며, 遜齋 朴光一로부터 기대승 이후의 1인이라고 평가를 받았고, 陶庵 李縡로부터 독실하게 행하는 군자라는 평을 받았다고 칭송하고, 기정룡의 후손인 東斗와 重燮의 부탁을 받아 서문을 작성하게 되었다고 서문을 쓰게 된 경위를 밝혔다. 권1에는 5편의 賦가 수록되어 있다. 「次歸去來賦」는 陶淵明의「歸去來辭」를 본떠 지은 자신의 安貧樂道하는 삶을 노래한 것이고, 「次方丈幽棲賦」는 외삼촌 박상현이 지리산 아래에 있는 구례로 이주하면서 지은 「方丈幽棲賦」를 차운한 것이고, 「和睡翁思賦」는 고종 사촌인 李治에게 화답하는 글이고, 「次韓文公別賦別李友」는 친구인 李士樞와 작별하면서 준 글이다. 권2는 47제 53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시체(詩體)를 구분하지 않고 자신의 일상생활이나 독서하면서 느낀 생각, 사물이나 자연에 대한 묘사, 자신의 과거에 대해 술회하였으며, 선배들이나 친구들의 시에서 차운한 詩나 贈詩, 輓詞도 남겼다. 권3은 7통의 편지가 수록되어 있다. 杏亭 李士樞에게 보내는 편지 6통과 睡軒 李士治에게 보낸 1통의 편지가 수록되어 있는데, 서로간의 안부를 묻는 내용이다. 권4에는 序 2편, 記 2편, 跋 3편이 수록되어 있다. 序 가운데 「龍洞契約序」는 기정룡이 사는 龍洞의 향약을 다시 禊事를 중수하면서 法禁을 두는 등 향약을 다시 정한 과정에 대한 서문이며, 「龍湖鄕約序」는 烏山鄕에 사는 사람들이 龍湖에 모여 고을의 미풍양속과 어려울 때 돕기 위해 향약을 제정하는 과정에 대한 기록이다. 記 중에 「退求齋記」는 기정용이 親屬인 玄敬之가 은거하는 장소로 삼기 위해 지은 退求齋에 대한 기문이며, 「銀杏亭記」는 친구인 李士樞의 銀杏亭의 유래와 그곳에 심어져 있는 은행나무에 대한 감상문이다. 그리고 「移建鄕亭記」는 1713년(숙종 52)에 泉洞에 있었던 鄕亭을 복구하였으나 다시 비바람이 새자 다시 1728년(영조 4)에 기대승의 유허지인 杜洞의 白雲亭으로 옮기는 과정에 대한 글이다. 발문으로는 「書萍水錄後」나 「紫荊詩帖跋」은 같은 해에 태어나서 평생 시문을 주고 받았으나 먼저 세상을 떠난 淸窩 高泰重와 睡軒 李治의 시문집에 대한 발문이고, 「書李爭汝遺稿後」는 기정룡과 외손간인 李淨汝의 유고에 대한 발문이다. 권5는 附錄으로 1740년(영조 16)에 閔師夏가 기록한 家狀과 李縡가 撰한 行狀, 1910년 기우만이 찬한 墓碣銘, 기정룡의 사위인 星山玄氏 明直이 찬한 行蹟, 외종형 朴光元과 族姪 奇彦鼎이 올린 祭文, 동문인 閔師夏가 지은 輓詞가 있다. 말미에는 1910년 奇宇萬과 기정룡의 후손 奇東斗가 찬한 跋文이 수록되어 있다. 기정룡은 기대승이 태어났던 소고룡리에서 태어나 평생 그곳을 떠나지 않고 기대승의 유업을 계승하였던 인물이다. 기정룡은 마을의 미풍양속을 위해 향약을 다시 제정하고 정자를 기대승의 유허지로 옮기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17세기 중엽 송시열의 문인이었던 안청의 박상현의 외손으로서 그의 외삼촌이었던 손재 박광일이나 백야 박광원과 매우 관계가 깊었다. 또한 기정룡 사후 문집의 행장을 도암 이재에게서 받았는데, 당시 안청의 순천박씨는 호남의 핵심 노론세력들이며 이재는 노론산림이었다. 따라서 기정룡의 문집에 나타난 이들과의 관련 글 들을 통해 기대승 가문이 어떠한 정치적 입장을 취했으며, 기대승 가문의 향촌사회에서의 사회적 위상은 어떠하였는가를 개략적으로 엿볼 수 있다. 당시 기정룡의 글에 대해 송시열의 문인인 외삼촌 朴光一은 기대승 이후의 일인자라고 높이 평가하였으며, 기정룡의 행장은 노론 산림인 李縡가 찬할 정도로 기정룡의 가문이 노론과 밀착된 관계를 보이고 있었다. 따라서 기정룡의 문집은 당시 기대승 가문의 정치적 입장과 향촌사회에서의 사회적 위상, 학문적 수준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2020-08-04 | NO.35
  • 김문옥 효당문집 曉堂文集
    김문옥의 자는 성옥聖玉, 호는 효당曉堂,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김기추(金箕錘)의 아들이며 합천 출신이다. 정기(鄭琦)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효당문집은 서문과 발문이 없어 저자의 생애 및 편찬경위를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저자가 죽은 뒤 그가 강학(講學)하던 전남 화순군 남면 절산리에서 1962년경 후손과 문인 위계도(魏啓道) 등이 편집, 간행한 것으로 보인다. 木板本. 16卷8冊.目錄. 合9冊으로 29.8x20.6cm이다. 四周雙邊. 半匡 ; 22.6x16cm. 有界. 10行24字. 註雙行. 上下向二葉花紋魚尾이다. 시(詩)는 제영(題詠) 및 각처를 유람하며 승경(勝景)과 마주하며 지은 작품이 특히 많고, 문사적 기질이 짙은 낭만적 작품도 다수 있다. 「독두시(讀杜詩)」는 깊은 밤 불행하였던 두보(杜甫)의 생애를 떠올리며 그의 시를 읽다가 느낀 감회를 적은 것이고 「을유칠월칠일문일본항우연합국(乙酉七月七日聞日本降于聯合國)」은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접하고 기뻐 환호하며 지은 장편으로 일제치하의 수모를 잊지 말고 되찾은 나라의 기반을 반석과 같이 단단하게 하기 위하여 일치단결할 것을 호소한 내용이다. 「포상망춘(浦上望春)」에서는 끝없이 펼쳐진 쪽빛 바다 아득한 물결을 바라보는 호탕 황홀한 심회를 노래하였고, 「제호산벽상(題湖山壁上)」에서는 약초 캐고 글 읽으며 손자아이의 벗이 되기도 하고 학과 사슴을 짝하여 대화를 나누는 은일적 삶의 자세를 천명하기도 하였다. 서(書)는 벗들과 주고받은 안부편지 외에 학문적 내용으로 문답한 것이 많다. 「상율계정선생(上栗溪鄭先生)」에서는 스승 정기(鄭琦)의 편지를 받고 그 가르침에 감사하며 학문을 향한 자신의 다짐을 천명하였다. 곽기영(郭基永)과는 여러 차례 편지를 주고받으며 도학의 여러 문제를 토론하였다. 「답곽우헌(기영)별지(答郭愚軒(基永)別紙)」에서는 심(心)과 성(性)의 관계를 주자가 오봉(五峰)의 심(心)과 성(性)의 상대설을 비평하면서 제시한 심성대입부당론心性對立不當論)을 인용, 해설하고 심통성(心統性)이라는 말을 들어 어디까지나 마음속에 성이 포함되어 있음을 주장하였다. 잡저의 「대학척의(大學摭義)」는 《대학》의 서문에서 장구(章句) 또는 잔주에 이르기까지 긴요하척고 의문이 제기될만한 곳을 들어 문답형식을 빌려 해설한 것이다. 「강설(强說)」에서는 예로부터 어려움과 위험을 무릅쓰고 죽음으로써 도를 지킨 전현(前賢) 등의 위대한 업적을 예찬하였다. 김원여에게 주는 「이지설(二至說)」은 "지극한 즐거움은 글 읽는 것 만한 것이 없고, 지극히 중요한 것은 자식 가르치는 것 만한 것이 없다"라는 말이 천언만어(千言萬語)의 다른 말보다 중요하다 하여 일생 동안 실행에 옮기기에 힘쓸 것을 권면한 글이다.
    2020-06-18 | NO.34
  • 김석구(金錫龜)의 『대곡유고(大谷遺稿)』
    『大谷遺稿』는 김석구의 시문집으로 6권 3책의 목활자본이다. 序는 1901년 崔益鉉이 지었다. 최익현은 奇正鎭의 수제자로서 김석구의 학술상의 위치를 중국의 정명도와 정이천 형제에 비유하였다. 권1은 시이다. 모두 102수를 수록하였는데, 궁핍한 생활에 자족하면서 자신에 대한 성찰이나 자연이나 천리에 대한 이치를 노래하였다. 김석구는 시를 통해 궁핍한 삶을 자족하면서 학문에 대한 나태함을 자책하고 더욱 면려하는 계기로 삼았다. 또한 자연을 노래하되 자연속의 도를 추구하였으며, 천리와 인성이 일치되는 경지를 추구한 것이다. 권2는 書와 序, 記, 跋, 祭文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書에서는 가장 먼저 스승인 기정진에게 올린 편지를 수록하고 있다. 내용은 이황의 『성학십도』와 이이의 『격몽요결』의 차서가 君德과 蒙學이 필요한 바가 다르지만 학문에 들어가는 단서와 문로로 삼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기정진이 『성학십도』나 『격몽요결』의 차서는 간략하거나 절실하지 않기 때문에 적합하지 않다고 답한 내용이다. 학문에 뛰어난 그와 스승인 기정진 사이에 주고받은 편지가 1통 밖에 남아 있지 않아서 애석한 일이나, 두 사람간의 학문에 대한 문답이 「師門問答」으로 잡저편에 따로 실려 있어서 그의 사상적인 편린을 엿볼 수 있게 한다. 李崑壽에게는 5통의 글을 보냈는데, 자신의 근황을 전하기도 하고, 스승인 기정진이 돌아가서 애도하기도 하였으며, 학문은 시비를 잘 분별하고 실천함에 있으며, 기질이나 습관, 질병에도 불구하고 성인되는 공부를 멈춰서는 안 된다는 것이라든가 주자의 「中和後說」 등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히기도 하였다. 이 뒤에는 대체로 같은 노사문인 간에 왕래한 편지를 수록하였는데, 주로 기정진의 문인 중 성리학에 뛰어난 인물들이다. 강진의 金漢燮에게는 자신이 재주가 둔한데다가 학문을 궁구하지 못하고 존양성찰 공부에 게을리 하고 있으니, 자주 가르침을 달라고 부탁하였다. 보성의 鄭時林와는 주로 능주의 鄭義林를 통해 글을 주고받았다.스승이 돌아간 이후 자신의 재질이 부족하여 사문의 기대를 저버려 부끄럽지만 정시림은 궁핍한 가운데 뜻이 장하여 노사문인들에게 큰 힘이 되고 있으며, 기정진의 문집에 대한 看儉을 부탁하기도 하고, 오십이 되어 학문에 진척을 이루지도 못하건만 학질이 도져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과 스승이 돌아간 뒤 초심을 지닌 사람은 호남에서 鄭義林와 鄭時林 뿐이니 도를 위해 보중하라는 글이다. 또 노문삼자인 정의림에게는 스승이 돌아간 이후 서로 자주 만나지 못하는 쓸쓸함과 학문에 대한 기대, 心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기도 하였다. 스승의 손자 奇宇萬에게는 스승의 기대를 이룬 것도 없이 나이가 들어감을 한탄하고, 군부의 원수를 만났을 때 힘이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고 묻기도 하였다. 김석구는 특히 鄭載圭, 鄭冕圭, 權雲煥, 權基德, 陳樸, 金顯玉 등 영남의 노사문인들에게 많은 편지를 보냈다. 그 중에서도 노사문하의 삼대제자인 정재규와 가장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스승이 돌아가신 뒤에 멀리 떨어져 있어서 보고 싶은 마음이나 자신의 어머니가 아프시다는 것을 전하기도 하고, 정재규가 편찬하고 있는 『答問類編』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수정해달라고 하거나 그 두서와 규모가 적절하다든가, 스승의 문집은 어려운 중에도 기우만이 힘써 진행하고 있다는 것, 그 밖에 성리학이나 예학에 관해 서로 답문하기도 하고, 안부를 묻기도 하였다. 권운환에게는 整齊嚴肅해야 主一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 기정진의 喪에 조정에서 제관을 보내어 조문했다는 것, 자신이 학질에 걸려 고생하고 있다는 것과 기우만이 막내상을 당했다는 것을 전하기도 하고, 진주의 趙性家를 통해 편지를 받고 성인의 학문은 평생 공부해야 할 것이므로 너무 서두르지 말라고 당부하기도 하였다. 진박에게는 스승인 기정진이 돌아가신 뒤 매년 슬픔이 더하고, 자신에게 동문들이 기대하는 바가 크나 자신이 그러지 못해 부끄럽다고 하기도 하였다. 김현옥에게는 제천의 민기용을 통해『답문류편』을 베껴서 보내주어 감사하다는 것과 『노사집』 간행에 관해서는 자신이 쇠잔하여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그 밖에 鄭學仁, 沈魯綜 등 같은 동문이나 朴準基 등의 문인, 자신의 족속들에게 보낸 편지가 있는데, 주로 안부를 묻거나 독서를 권면하는 내용이다. 序로는 영남에서 공부하러 온 金秋槎翁이나 제주도에서 바다를 건너 북으로 공부하러 온 安行五, 자신을 찾아 왔다가 제천으로 떠나는 민중호, 기타 南俊西, 明洞主人과 작별하는 글이 수록되어 있다. 기문으로는 회나무가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지만 회나무가 자신의 천성을 잘 보존한다는 취지의 「雙槐堂記」, 湖狂者와 醉夢子의 대화를 통해 항상 취하고 광망함을 말한 「湖狂齋記」가 있다. 발문으로는 「書兩鄭奇遇說後」가 수록되어 있는데, 영남의 정재규와 호남의 정의림이 같은 정씨로서 마을 이름도 같은 墨洞에서 똑같이 古人의 학을 배우겠다고 기정진을 찾아오자, 이에 스승인 기정진이 가상하게 여기므로 김석구가 글을 지어 두 사람이 함께 열심히 공부하여 스승의 기대에 부응하라는 내용이다. 제문은 기정진 사후 스승의 높은 도학과 행실, 자신을 극진하게 가르쳐준 은혜에 감사하고 돌아가심을 슬퍼하는 글을 추모하는 글인데 세 번이나 글을 올려 자신의 존경하는 마음과 슬픈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祭金章汝文」은 동문으로서 선배인 金致熙의 죽음을 슬퍼하는 글이다. 권 3-5는 雜著인데, 권3은 「自敬說」이다. 김석구가 25세부터 35세까지 10년 동안 느낀 바가 있으면 기록한 것인데, 10년 뒤에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여 44세인 1878년 동지에 다시 경계한다는 것으로 학문에 대한 면려, 자신의 처신과 언행, 마음가짐에 대해 자신을 경계한 글이다. 권 4는 師門問答으로 김석구의 질문에 스승인 기정진이 답한 것으로, 태극동정이나 理氣, 陰陽, 道器, 이일분수, 인심·도심, 미발과 이발, 인물성동이 등 성리설을 비롯해서 군자의 처신, 상례나 제례 등 예학에 걸쳐 많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노사학파의 성리학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권 5는 「知舊問答」과 「沙上語錄」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구문답」은 동문들간에 유학 전반에 관해 논한 자료로서, 노사학파의 성리학이나 예학 등의 학문적 특성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정재규와 심성, 이기, 경서, 상복이나 제례에 관한 논의가 가장 많고, 그 다음은 정의림이나 정시림 사이에 논한 내용도 수록되어 있다. 사상어록은 노사 기정진이 장성 황룡강변의 下沙에서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데, 1853년 김석구가 기정진을 배알하여 수학하기 시작한 때부터 20년 이상 동안 기정진에게서 성리학이나 예학, 역사 등에 대해 들었는 말을 간략하게 적어 둔 것이다. 권6은 김석구의 글이 아니라 김석구와 관련된 스승과 동문들의 글을 모은 것이다. 기정진이 지은 「脫灑說」, 기우만이 지은 「大谷記」, 김석구의 문집을 편찬하기 위하여 영남에서 돈을 모아 김현옥을 보내자고 정재규가 권운환에게 보낸 편지, 그리고 김석구의 죽음을 애도하는 동문이나 제자들의 제문이 수록되어 있으며, 기우만의 행장, 정재규의 묘지명, 정의림의 傳, 최숙민의 발문으로 되어 있다. 노문삼자를 비롯한 영,호남의 학문적으로 훌륭한 노사문인들이 참여하였다. .
    2020-08-03 | NO.33
  • 난와유고難窩遺稿
    <난와유고難窩遺稿> 난와 오계수(1843∼1915)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916년에 간행된 시문집이다.유학자이며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이며 항일지사인 오계수는 본관은 나주. 자는 중함重涵, 호는 난와難窩. 아버지는 갑선甲善이며, 어머니는 나주 정시혁鄭時爀의 딸이다. 17권 8책. 목활자본. 1916년 오준선(吳駿善)·오정선(吳禎善)·오재수(吳在洙) 등 그의 문인들에 의해 편집, 간행되었다. 서문은 없고, 권말에 오재수의 발문이 있다.권1∼4에 시 505수, 권5·6에 소 2편, 서(書) 111편, 권7∼9에 기 79편, 서(序) 59편, 발 22편, 권10·11에 행장 34편, 전(傳) 7편, 권12∼14에 묘갈명 18편, 묘지명 4편, 권15·16에 논 2편, 설 7편, 잠 2편, 명 1편, 혼서(婚書) 3편, 표전(表箋) 2편, 제문 9편, 축문 7편, 상량문 23편, 여문(儷文) 3편, 권17은 부록으로 난와기(難窩記) 3편, 행장·묘갈명·제문·각금실기(却金實記) 각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잡저인 「정명분립기강론(正名分立紀綱論)」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명분을 바로 하고 기강을 세우는 것이 그 근본이 된다고 전제하고, 이 근본이 바로 서게 되면 나라가 안정되고 그렇지 못하면 나라가 혼란해지니, 한 나라의 인군(人君)이 이 근본을 세움에 힘쓰지 않을 수 없음을 주장한 글이다.「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 등 3편의 이기론에서는 이기설이 일상생활이나 학문을 익히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이를 전혀 모르면 심성의 근본과 기질의 변화마저 모르게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理)·기(氣)란 선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는 생물의 근본이자 성(性)이고 기는 생물의 그릇이자 형(形)이므로, 한 몸 속에 같이 존재하기 때문에 ‘불리부잡(不離不雜)’의 네 글자만으로도 이기설의 오묘한 뜻을 다 깨칠 수 있다는 지론을 폈다. 이 저서들은 화서일문(華西一門)의 이기지학(理氣之學)을 이해하는 데 좋은 참고가 된다.그는 이기론理氣論에 있어 이理는 본성本性이고, 기氣는 기형器形으로, 둘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표리와 같이 불리부잡不離不雜한 하나라는 일물론一物論을 주장하였다.이밖에 「시장성헌병분대장서(示長城憲兵分隊長書)」와 「시삼거리헌병소장(示三巨里憲兵所長)」 등은 헌병대 우두머리들에게 보낸 글들로, 1910년의 경술국치 후 일본이 이른바 은사금(恩賜金)을 나누어줄 때 이를 거절한 대가로 1911년 5월에 왜병에 끌려가 갖은 폭행과 고초를 겪으면서도 끝내 뜻을 굽히지 않은 그의 굳센 항일정신을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다.
    2020-08-10 | NO.32
  • 눌재집 목판각/유형문화재 제16호(1990.11.15.)
    북구 용봉동 1004-4 광주시립민속박물관 보관 중눌재訥齋 박상朴祥(1474∼1530) 선생의 시문집의 목판각이다. 원래는 박상의 출생지인 서구 서창동 절골마을의 송호영당에 영정과 함께 보관되어 있었으나 송호영당을 1728년에 광산구 소촌동으로 이전 건립하면서 옮겼다가 현재는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눌재집訥齋集』은 원집 7권 속집 5권 동 모두 12권으로 되어 있다. 목판은 모두 370매이며 각 목판은 1판 2면의 양면판으로 가로 34㎝, 세로 20㎝, 두께 4㎝ 내외이다. 1판에 4면을 인쇄하도록 되어 있으며 크기는 모두 일정치 않다.초간은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1486~1568)이 금산군수로 재직하고 있던 1547년(명조 2)에 처음 간행되었으며, 그 후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1629~1689)이 속집 4권을 추록하였다. 이것은 원집과 함께 1684년(숙종 10)에 당시 호남방백이며 병조판서를 지내던 포암蒲菴 이사명李師命(1647~1689)과 녹천鹿川 이유李濡(1645~1721)에게 부탁하여 판각이 시작되어 1689년 기사사화로 일컫는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일시 중단되었다가 1694년 간재艮齋 최규서崔奎瑞(1650~1734)가 완간하였다.1795년(정조 19)에는 도백 서정수徐鼎修가 어명을 받들어 중간하였으며, 이 판본은 광주향교 명륜당에 보관되었다가 1841년(헌종 7)에는 판본이 불에 탔다. 2년 뒤에 광주목사 조철영趙徹永(1777~1853)이 다시 중각하고 이어 빠진 것을 다시 수습하여 도합 18편이 되었다. 유고는 시詩, 부賦, 서序, 기記, 발跋, 제문祭文, 문文으로 나누어지며 즉흥적, 직설적인 면보다 내면적 여과를 거친 차분하고 완곡한 서정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이 목판은 광주광역시 광주시립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6호로 지정되어 있다.
    2018-05-24 | NO.31
  • 만귀정/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5호(1984. 2. 29.)
    서구 동하길 10(세하동)만귀정晩歸亭은 흥성 장씨의 선조인 효우당孝友堂 장창우張昌雨(1704∼1774)가 학문을 가르쳤던 옛 터에 후손들이 그의 덕을 기리기 위해 지은 일제강점기 정자이다. 원래 건물은 소실됐으나 1934년에 다시 중건됐고, 1945년에 고쳐지었다. 앞면 2칸, 옆면 2칸 규모를 갖추고 있으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시문과 만귀정을 포함한 현판 23개가 걸려 있다. 만귀정은 큰 연못에 세운 정자로 다리를 사이에 두고 습향각襲香閣과 묵암정사墨庵精舍가 한 줄로 늘어서 있다. 중건상량문을 비롯해 중건기, 중수기, 만귀정원운晩歸亭原韻과 만귀팔경 등의 시문현판이 걸렸다. 그 중의 이곳 풍광을 이야기하는 효우당 장창의 시문 한편을 읖어본다만귀8경瑞石明月(무등산에는 밝은 달이 떠 있고) 龍江漁火(황룡강에는 어부들의 불빛이 있네)馬山淸風(백마산에는 맑은 바람 산들거리며) 樂浦農船(낙포 농장에는 농사를 위한 배가 오간다)漁燈暮雲(어부들의 등불에 저녁 구름 피어나고) 松汀夜雪(송정에는 흰눈이 밤을 밝히며)錦城落照(나주 금성산에는 아름다운 저녁 노을) 野外長江(들 밖에는 길고 긴 강물이 흐르네) 만귀의 유래는 효우당이 자신의 늙은 인생을 자연과 더불어 보내겠다는 영귀詠歸의 뜻에서 비롯된 것으로 풀이된다. 1934년 고광선이 쓴 중건기에는 ‘그 이름을 만귀라 한 것은 만년에 이곳에서 노닐며 한가히 풍류를 즐긴다’고 밝히고 있어 만귀의 정확한 어원을 짐작할 수 있다. 1750년경 극락강이 바라 보이는 곳에 초당이 있었다. 이곳에서 후학을 양성했으나 아쉽게도 소실됐다. 이것이 만귀정의 시초였다. 옛터에 후손들이 그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1934년에 연못(4600㎡)을 파고 인공적으로 동산을 만들어 중건했다. 고광선이 만귀정 중건기를 작성한데 이어 같은 해 이병수李炳壽가 상량문을 기록했다. 중수기는 1945년에 후손인 묵암默庵 장안섭張安燮이 기술했다. 특히 자연경관이 뛰어난 경내의 만귀정시사창립기념비晩歸亭詩社創立記念碑를 통해 당대 시인 묵객들이 방문해 시를 짓는 등 풍류와 한시 활동이 전개됐음을 알 수 있다. 일제 강점기 때 박장주를 중심으로 만귀정시회晩歸亭詩會라는 선비들의 모임 장소로도 활용된 곳이다. 습향각은 1940년 장창우의 7세손인 묵암 장안섭이 연못 중앙에 사방 1칸으로 지은 정자로 ‘연꽃향기가 엄습해 온다’는 뜻을 담고 있다. 마당에는 왕버들 나무가 우거져 있다.가장 안쪽에 있는 묵암정사는 사방 한 칸의 팔작지붕으로, 송정읍장을 지냈던 장안섭의 덕행을 기려 1960년 광산군민과 친척, 친지들이 성금을 모아 건립했다. 만귀정에서 습향각으로 건너가는 다리 옆에 한 쪽은 취석醉石이, 다른 쪽에는 성석醒石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석재가 놓여 있다. 이 글의 의미는 ‘들어갈 때는 술에 취하더라도 나올 때는 술에 깨어 나오라’는 것이다. 이곳 습향각의 의미에 따르면 들억달 때는 연꽃 향기에 취하고 나올 때는 연꽃 향기에서 깨어 나오라는 의미가 더 맞다고 하겠다.만귀정에서 습향각으로 들어가는 목교에는 큰 나무가 길을 가로막고 있어 허리를 숙여 통과해야 했다. 2020년 가을 광주 서구청에서 만귀정 환경정비사업을 하면서 세 개의 정자를 가로 지르는 두 개의 나무 다리를 석조로 새로 만들었다. 정자의 운치와 어울리지 않아 다소 안타까움이 있다.봄(벚꽃)과 여름(창포꽃), 가을(상사화), 겨울(설경) 등 사계절과 조화가 잘 이뤄져 서구 8경 중 한곳으로 꼽힌다. 작지만 아름다운 풍경 때문에 신성일 윤정희 허장강 등 한때 스크린을 호령했던 스타들이 총출동했던 영화 ‘꽃상여’와 ‘탈선 춘향전’이 이곳에서 촬영되었다.인동장씨 문중에서 소유, 관리하고 있으며 전 조선대 교수인 시인 김종金鍾(1948~ )은 만귀정을 이렇게 노래했다.그대 기다리는가세상의 불빛 모아호수가 손수 등불 걸어둔 자리늦은 밤 귀가하는 주인을 반색하며낭랑한 목소리로 글 읽는 물소리를.그대 듣는가손잡고 얼굴만 바라봐도꽃대궐 차려놓고 환하게 웃는 집집 하나를 악기처럼 껴안고 연주하면햇빛 푸른 등지느라미로 떠다니는 노래를.그대 보는가눈동자 맑은 연못의 몸구름 탄 하늘이 꽃을 달고 내려와허공의 갑사댕기 꼬리 사이로우리 사랑 쏟아지게 날아오르는 꽃그늘을.
    2018-05-24 | NO.30
  • 매산시고 (梅山詩稿)
    송용만(宋用萬, 1888~1962)의 문집 『매산시고 (梅山詩稿)』는 2권 1책 석인본으로 1992년에 손자 송병대(宋炳大)가 발행하였다. 卷1詩 五言絶句 : 池洞慕賢亭韻, 吟庭桃, 聽鵑, 偶吟 三首, 和陳市隱, 贈文孝子, 偶吟, 寄林漢采, 偶吟 三首, 秋夜吟 二首. 五言四律 : 嘆世, 自笑, 自歎七言絶句 : 和鄭琫采, 與洪芳植共吟, 初夏 二首, 與李春馥相酬, 偶吟, 與鄭琫采 二首, 送友, 與居京韓仲植共吟, 春日卽事, 述懷, 與友人, 與吳俊洙 二首, 偶吟, 入南原, 偶吟, 入書齋, 夏日歎倭人幕兵, 挽鄭琫采, 挽梁志遠. 七言四律 : 謹次林桂隱原韻, 謹次鄭得采?宴韻, 謹次奇石村忠鉉?宴, 次鄭鶴亭韻, 謹次金梧軒韻洪凡, 梅山原韻, 舍伯?宴日吟, 述懷, 別洪芳植, 別高海柱, 與李春馥 共吟, 偶吟, 偕諸彦入多寶寺韻, 伏日與諸友共吟, 別吳俊洙, 除夕吟, 別洪芳植, 生日感詠, 呈池洞鄭丈盖仲, 入書齋, 至書堂, 與諸友共吟, 訪林漢錫, 逢洪承悔子旭, 題荷潭亭長城臥?, 與洪芳植吟, 與林漢錫吟, 寡婦吟, 春日?懷, 林竹軒見訪不可無詩, 與林漢錫吟, 與竹軒林暎相共吟 二首, 陪心山舍伯出遊前江, ?日吟, 餞春, 入京城, 還婚詩, 芙水齋詩會, 礪山永護齋重建韻, 與林漢錫會吟 二首, 春日吟, 登金安?溪亭, 偶吟, 與金錫興, 與林漢錫共吟, 與洪芳植會吟, 病中吟, 偶吟, 次不換亭煮伏韻, 次金?太書堂契韻, 與洪芳植共吟, 白踵, 別洪芳植, 七月旣望與洪芳植相詠 三首, 題金剛山?幅, 回甲, 除夕, 偶吟, 丙戌三月十日洞會李明沙金玄圃諸彦共吟, 古阜斗升寺與工人朱慶峰共吟, 聳珍續修契韻, 登?溪亭, 和鄭琫采, 偶吟, 餞春, 謹挽奇晦溪先生, 挽金錫奎, 挽李春馥, 挽李民厚(子吉), 挽林丈西允, 挽四從弟翼萬, 挽鄭鍾鉉, 挽林漢采, 謹挽謙山李先生, 挽申京植 居長城南面, 挽金判壽, 挽林官鎬, 挽洪山隱(子旭), 挽林化集, 挽吳仲彬, 挽羅明善, 金台煥, 挽金桂煥, 挽吳德述, 挽沈南一義兵將, 聞趙相國秉世閔輔國永煥乙巳殉節有感, 聞閔輔國永煥血守有感, 謹輓崔勉庵先生, 所懷賦歌謹呈李春馥, 朝鮮解放 ?小序, 贈陳市隱 ?小序卷2附錄 : 行狀, 記, 墓表, 跋, 詩稿編刊辭 권두에 나주의 나은균(羅殷均)이 1988년에 쓴 서문이 실려 있다. 권1에는 시 134수와 서(序) 2편, 노래 1편이 실려 있다. 권2은 부록(附錄)으로 족질 상욱(庠旭)이 쓴 행장과 오필선(吳弼善)이 쓴 매산기(梅山記), 그리고 이병학(李秉鶴)이 쓴 묘표가 실려 있다. 권말에 김상순(金商順)이 1983년에 쓴 발문이 실려 있다. 이 문집은 손자 우대(宇大가) 매산시고편간사(1991년)를 써서 1992년에 손자 송병대(宋炳大)가 발행하였다. 송용만은 이 문집에서 당시의 국난(國難)으로 우국의 아픔이나 산수 자연을 노래한 내용을 부나 시 속에 담아냈다. 송용만은 광산군(光山郡) 본량면(本良面) 매동리(梅洞里) 집에서 태어났다. 송용만의 자는 현중(賢仲), 호는 매산(梅山)이며, 본관은 여산이다. 아버지는 경(坰)이고, 어머니는 진주 강씨(姜氏) 익상(翊尙)의 딸이다.
    2020-08-13 | NO.29
  • 박노술(朴魯述)의 『석음유고(石陰遺稿)』
    朴魯述의 자는 公善, 호는 石陰, 본관은 順天으로, 1851년에 光州 安淸里에서 觀魚軒 陽東과 長興高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奇正鎭에게서 수학하였으며, 특히 性理學에 조예가 깊어 노사의 후손인 奇宇萬과 더불어 자주 논변이 있었다. 奇宇萬이 일으킨 의병활동에 참여하였으며, 이후 栗里田舍에 숨어 살면서 제자를 양성하였다. 『石陰遺稿』은 영인본 1책 6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1에는 모두 125제 231수의 시가 실려 있는데, 雙石亭, 晩悟亭, 湖隱亭, 晩翠亭 등 정자에서 차운한 시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또한 그의 시에서는 지사로서의 열정을 읽을 수 있는 곳이 많다. 권2에는 31명에게 보내는 書 40편이 실려 있는데, 여기에 宋秉璿에게 보낸 편지는 3편이 실려 있는 반면 奇正鎭에게 보낸 편지는 한 편도 실려 있지 않은 것이 특이하며, 이밖에 기우만에게 보낸 6편의 편지를 비롯하여 高光善, 吳駿善, 崔永祚 등 벗들에게 보낸 편지와 제자들에게 보낸 편지가 실려 있다. 권3은 序, 권4는 記․說․跋․傳, 권5는 祭文․上樑文․行狀․墓文, 권6은 부록이 실려 있다. 「石陰說」을 읽어보면 그의 호 ‘석음’이 의미가 몇 번 변했음을 알 수 있는데, 寸陰을 아낀다는 뜻의 惜陰을 쓰기도 하고, 저녁이 되면 悔한다는 의미를 가진 夕陰을 쓰기도 하였으며, 결국엔 瑞石山을 의미하는 石자를 써서 石陰으로 호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작품 중 주목할 것은 「辨田艮齋猥筆辨」이나 「辨田艮齋納凉私議疑目」이라고 할 수 있다. 스승인 기정진의 理氣論이 師承의 구애를 받지 않고 자유스럽게 전개되어, 기호학파에 속하면서도 다소 다른 점이 있자, 이에 田愚가 『猥筆辨』·『納凉私議辨』을 지어 기정진의 사상을 비판하여 사상계에 큰 논의를 일으켰다. 그러자 제자들도 그것에 대한 변론을 하였는데, 박노술도 그중 한 사람이다. 『石陰遺稿』는 1989년 전라남도에서 향토문화연구자료 제29집으로 영인․간행하였다. 기정진의 제자로서, 스승과 제자들의 사상을 알 수 있는 글 등이 수록되어 있어서 당시 호남 학자들의 동향과 사상을 파악할 수 있다.
    2020-08-03 | NO.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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