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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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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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상(朴祥)의 『눌재선생집(訥齋先生集)』
    『訥齋先生集』은 16권 7책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문집이다. 본집에는 먼저 범례와 서문 등이 있고, 권1에 부 3편, 오언고시 16수, 권2에는 칠언고시 18수, 권3~7까지는 근체시 305수 등이 수록되어 있다.또한 속집 권1~3까지는 시 292수, 제문 1편, 권4에는 序 3편, 기 2편, 발 2편, 제문 1편 등이 있으며, 별집에는 부 9편, 시 9수, 碑辭 3편 등이, 부록에는 권1에 행장, 권2에 「請復故妃愼氏疏」 등이 모아져 있다. 또한 마지막으로 부집 권1과 2에서는 박상 형제들의 시문을 모아두었다. 『눌재선생집』은 그동안 한문학에서 지대한 관심을 보여왔다. 그만큼 박상의 문학적 성과가 우수하며, 당시 문단에 끼친 그의 영향이 지대했기 때문이다. 박상이 살았던 당시 문단은 송시풍에서 唐詩風으로 변모해가던 때로 그가 문단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였다. 이런 점에서 박상에 대한 연구는 지속적으로 있어왔고, 앞으로 깊이 있는 후속 연구가 필요하다.
    2020-08-02 | NO.27
  • 박정휴(朴鼎休)의 『둔고집(芚皐集)』
    『芚皐集』은 朴鼎休(1805~1865)의 시문집으로 1913년 박정휴의 손자인 朴用柱 등에 의해 18권 9책의 목활자본으로 간행되었다. 권말에 고동주(高東柱)와 손자 박용주의 발문이 있다.박용주는 16세기 중엽 호남사림의 대표적이니 인물인 눌재 박상의 후예로서 송준길의 후손인 금곡 송래희의 문인이 되었던 인물이다.권1은 시 303수, 부 1편, 권2∼7은 서(書) 206편, 권8은 잡저로 서(序) 1편, 기 2편, 명 2편, 잠 2편, 사(辭) 3편, 소 4편, 발 1편, 권9는 제문 1편, 묘갈 1편, 행장 3편, 권10∼12는 경의집요(經義輯要) 상·중·하, 권13은 심경분류집략(心經分類輯略), 권14∼16은 가례정전집해(家禮正傳集解) 상·중·하, 권17은 상제례기견(喪祭禮記見), 권18은 부록으로 제문·행장·묘지명·만, 별책 부록 1권으로 아들 원홍(源弘)의 유고인 『서서유고(瑞西遺稿)』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시는 대부분 이학(理學)의 요체와 의의를 천명하고, 선현(先賢)과 사우(師友), 그리고 말년에 『대학』·『심경(心經)』 등을 강론하며 지은 것이다. 「성(性)」·「이(理)」·「이기음(理氣吟)」 등은 이학의 요체를, 「치지격물물격지지(致知格物物格知至)」·「신독(愼獨)」·「혈구음(絜矩吟)」·「조문도석사가의(朝聞道夕死可矣)」·「부동심(不動心)」 등은 경전의 문구를 그대로 시제(詩題)로 하여 그 의의를 밝히고 있다.「행향음례계지이운(行鄕飮禮繼之以韻)」은 59세 때 동곡에서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한 뒤 지은 것이다. 「몽배선생행향음례미반이오부위지지(夢陪先生行鄕飮禮未半而寤賦爲之識)」는 꿈속에서 스승 송내희(宋來熙)를 모시고 향음주례를 행하다가 깬 뒤 지은 것이다.문장은 선진풍(先秦風)의 문체로 서(書)가 대부분이다. 그 중에서도 송내희와 주고받은 것이 많으며, 이학에 관한 문답체가 다수이다.「오행명(五行銘)」·「직재잠(直齋箴)」 등 잠명류는 존양성찰(存養省察)하는 선비로서의 도학자적 풍모와 법도가 보인다. 「경의집요」·「심경분류집략」·「가례정전집해」 등은 경전과 『심경』, 그리고 『가례』 등에 관한 해박한 식견이 체계적으로 정리, 표현된 문장이다. 그는 송래희의 문인들의 결집체인 관선계의 계장을 역임할 정도로 송래희와 그의 문인들의 존중을 받았으며, 경학과 성리학, 예학에 뛰어나서 서간문이나 독립된 저서로 관련 글을 많이 남겼는데, 『芚皐集』에 대부분 수록되어 있다. 따라서 『芚皐集』은 박용주를 비롯한 송래희의 경학이나 성리철학, 호남지방 사림들의 정치적 경향이나 학문 수준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
    2020-08-02 | NO.26
  • 박치화의 주곡유고舟谷遺稿
    박치화의 주곡유고舟谷遺稿주곡(舟谷) 박치화(朴致和)의 박명사(博命辭)와 망미인사(望美人辭)주곡공(舟谷公)이 칩거하며 지은 박명사(博命辭)와 망미인사(望美人辭)가 당대에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전하니, 이를 소개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하다. 박명사(博命辭)와 망미인사(望美人辭)는 박종우(朴鍾宇) 역 ‘국역 주곡유고(舟谷遺稿)’에 원문이 실려 있으나 너무 길어서, 여기에서는 장흥 후인 고재붕이 쓴 주곡행장에 간추려 실린 일부를 소개한다. 박명사(博命辭)顧素心之不阿兮(고소심지불아혜) 돌아보건대 본디 아부하는 마음이 없어故俯仰而無怍(고부앙이무작) 짐짓 우러러보고 굽어보아도 부끄러움 없네.名連登於解額兮(명연등어해액혜) 이름은 해액(解額)에 오르고聲大譟于騷壘(성대조우소루) 명성은 문단에서 크게 드날렸도다.從伯氏而頡頑兮(종백씨이힐완혜) 백씨(伯氏)를 좇아 서로 겨루며步雁塔而踵武(보안탑이종무) 안탑(雁塔)을 밟고 따라다녔네.心無倦於樂善兮(심무권어낙선혜) 마음이 선행을 즐기는 데 게으름이 없었고,服忠信而制行(복충신이제행) 충신을 품에 두고 행실을 바르게 하였네.任經訓之菑畬兮(임경훈지치여혜) 경훈(經訓)을 치여(菑畬)로 삼았는데,怕兀兀以窮年(파올올이궁년) 어찌하여 평생토록 위태롭기만 하느뇨.*해액(解額) : 향시(鄕試) *백씨(伯氏) : 상사(上舍) 백미공(白眉公) *안탑(雁塔) : 과거 급제* 경훈(經訓) : 경서의 뜻풀이 *치여(蓄審) : 글공부의 비유망미인사(望美人辭)表獨立乎船之中兮(표독립호선지중혜) 나 홀로 배 가운데 우뚝 서서搴芙蓉兮徒延佇(건부용혜도연저) 연꽃을 들고 우두커니 서있네.北極遠以雲深兮(북극원이운심혜) 북쪽 끝 멀리 구름이 깊은지라恐玉顏之不可覩(공옥안지불가도) 옥안을 뵐 수 없을까 근심하네.期黃昏之已違兮(기황혼지이위혜) 황혼(黃昏)의 기약은 벌써 어긋났고,惜中塗而改路(석중도이개로) 중도에 길 바꿈이 애석하도다.顧余情其信芳兮(고여정기신방혜) 돌아보건대 내 마음은 정녕 꽃다우니苟得列乎下陳(구득렬호하진) 실로 아래 사람들 줄지어 따르네.水有芷兮山有桂(수유지혜산유계) 강에 지초(芝草)가 있고 산에 계수나무 있는데懷佳人兮不可忘(회가인혜불가망) 고운 사람 생각하니 잊을 수 없도다.​*지초(芝草) : 지칫과에 속한 여러해살이풀
    2020-08-08 | NO.25
  • 병천사 존심당/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1호(1979. 8. 3.)
    서구 금호운천길 31(금호동) 병천사秉天祠는 지방 세력가로 알려진 지응현池應鉉(1868∼1957)이 일제강점기에 지은 사당으로 충주 지씨들의 사우이다. 고려 말의 충신인 정몽주(1337∼1392)를 비롯해 전라도도원수를 지냈던 지용기(1330∼1392), 고려 명장 정지의 9대손인 정충신(1576∼1636), 서흥부사를 지냈던 지계최(?∼1636), 지용기의 8대손이자 우암 송시열의 외조부인 지여해(1591∼1636)등 5명을 모시는 배향 공간이다. 이 사당은 경내는 사당.영당.동재.서재.강당.전사실.내삼문.원직사 등으로 구성돼 있다. 건물 가운데 강당인 존심당 1동만이 문화재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는 가운데 강당은 앞면 5칸, 옆면 2칸 규모로 가운데 3칸에는 대청마루를 두었고, 양쪽에는 방을 만든 것이 특징이다. 존심당은 병천사와 마주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존심存心의 의미는 맹자 진심盡心편 1장 첫 머리글로 나온 ‘그 마음을 보존하여 그 본성을 키우는 것은 하늘을 섬기는 것’[存其心養其性所以事天也]에서 비롯됐다. 존심당에 또 다른 한송죽寒松竹이라는 현판이 있었다고 기록에는 있다. ‘혹독한 추위가 왔을 때도 소나무와 대나무만이 변함없는 푸름을 간직하고 있다’는 의미다. 이는 논어 자한子罕 편에 나온 구절 ‘겨울이 온 후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歲寒然後知松柏之後彫]에서 따른 것이다. 하지만 현재는 이 현판은 없다.광주 부자로 소문 난 지응현이 이 마을에 사당을 짓기 시작해 1930년대에 마무리 할 무렵 심곡재가 금호동 564번지로 이전해 일신당日新堂과 함께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일부 자료에는 병천사가 1924년에 완공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2018-05-24 | NO.24
  • 삼우당유고 三友堂遺稿
    광산 출신의 삼우당 이제백의 <삼우당유고三友堂遺稿>가 있다. 노사 기정진 선생이 삼우당유고 서문을 써주었다. 蘆沙先生文集 卷28에 실린 서문은 다음과 같다. 情竅旣開。冰炭相攻。百年之內。好襟懷鮮一日有焉。幸而有之。則自外來而有不可必者三焉。曰時也地也人也。三者一有不遇。則襟懷蓄而不洩。終焉汩沒而已矣。若三友公之當日酬唱。可謂內有襟懷。外得其所遇者也。謹按公諱齊白。姓李氏。光山望族。文詞夙就。而無希世進取意。好遯考槃。以忠信篤敬自持。行之旣久。鄕黨服其行義。士友許其志操。顧其胷中所樂。公未嘗自語。世亦莫得以知也。蓋人之所腴。公之所淡。人之所淡。公之所腴。以此言之。公之百年。盡襟懷中日月歟。嘗與石柏梅三物。結無情遊。堂名三友。蓋取諸此。遠近多和其原韻者。又與執友韻士。酣暢山水。載唱載和。隨手成軸。摠之爲一小卷。子孫或有以平生文字散軼。未克合編爲慊者。正鎭曰。唯唯否否。公之爲公。不在於詞。苟公之襟懷托此而傳。雖多又奚以加焉。俾正鎭泚筆者。公之後承章銑其名。章銑固佳士。而雅淡修飭。泊於外慕。其家風爲然。公之遺敎爲未泯云。
    2020-08-10 | NO.23
  • 석문집(石門集)
    오이익(1618~1666)의 석문집(石門集)은  5권 2책으로 되어 있다. 卷首에 李景在가 지은 序와 목록이 있다. 序(李景在 撰), 跋(金炳學ㆍ奇正鎭ㆍ高時鴻ㆍ吳駿善 撰), 刊記, 吳恒圭行錄(吳駿善 撰, 後石遺稿 卷21) 등이다. 7대손 吳恒圭(1824~1872)가 가장초고를 바탕으로 수집하여 刪定 編次하고 李景在의 서문을 받고는 재원을 마련해서 匠人을 고용하여 印役을 시작하였으나 미처 완료하지 못한 채 죽었다. 이어 7대손 吳元圭가 鼓山 任憲晦(1811~1876)에게 부탁하여 1873년 행장을 받고 1874년에는 저자의 外裔 高時鴻에게 발문을 받았다. 이후, 오항규의 아들 8대손 吳駿善(1851~1931)이 부친의 뒤를 이어 계속 진행하여 인행 사업을 완료한 것으로 보이며, 1874년 3월 羅州 道林講堂에서 활자로 인행하였다. 《초간본》 이 본은 현재 국립중앙도서관(한46-가421), 규장각(古3428-668), 장서각(D3B-1320), 성균관대학교 존경각(D3B-506) 등에 소장되어 있다.저본은 저자의 7대손 오항규ㆍ오원규, 8대손 오준선 등이 1874년에 활자로 인행한 초간본으로 규장각장본이다. 영인저본 중 권4의 板次 ‘二十一ㆍ二十二’와 遺墨의 板次 ‘一’이 重複되어 있다. 권1~3의 앞부분은 詩(339題)이다. 권1은 五言絶句 50題, 五言四律 53題, 五言排律 18題이고, 권2는 七言絶句 164題이며, 권3의 앞부분은 七言四律 47題, 七言古詩 7題로 詩體別 분류를 해 놓았다. 편목의 각주에 간혹 石門錄, 離騷錄, 庚子錄, 箕城錄 등을 달아 놓은 것으로 보아 시 초고는 미리 정리되어 있었던 듯하다. 오언사율의 〈戊戌十月十七承拿命曉發長城〉과 〈卄六入京翌日就理又翌日決配井邑留別安孔明〉은 1658년 한양으로 잡혀 갈 때와 정읍으로 귀양이 결정되고 나서의 소회를 읽을 수 있고, 칠언절구의 〈感懷詩〉는 효종 승하 시 유배지에서 지은 10수의 시로 憂國忠君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으며, 〈送兒尤庵丈席〉은 학업을 위해 아들 吳朋錫을 尤庵 宋時烈에게 보내며 지어준 시이다.권3의 뒷부분은 賦(4), 頌(1), 箋文(1), 序(2)이다. 부 가운데 〈拊几作箴賦〉는 저자가 19세 때 지은 것으로 相公과 小子의 대화체 형식을 빌려 출사하지 않고 은거하는 이유를 읊고 있고, 〈仁義半載賦〉는 1646년 진사시 때 지은 것이며, 〈衣錦尙絅賦〉는 東堂試 때 지은 것이다. 서 중 〈千里面目序〉는 1650년 여름 성균관에서 함께 일하며 몇 개월을 보낸 崔尙虎, 安峑, 吳以翼, 高斗紀, 朴重輝, 韓養吾 등 6명이 8월 초 社稷署에서 다시 만나 성명, 나이, 거주지를 적은 小帖 6부를 나누어 가졌는데, 그 경위를 기록한 것으로 최상호의 跋文과 同苦錄이 뒤에 붙어 있다.권4는 疏(4), 雜著(8), 祭文(5), 墓誌銘(1), 書(8)이다. 소 중 〈時弊疏〉는 효종 승하 후 새로 즉위한 현종에게 올린 상소로 호남 지역 賦役의 폐해를 지적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제시하며 이를 바로잡아 줄 것을 요청한 것이고, 〈河西先生請額疏〉는 河西 金麟厚를 모신 祠宇에 사액을 청하는 상소이며, 〈德山書院請額疏〉는 유생들을 대신하여 지은 것으로 訥齋 朴祥을 제향한 덕산서원의 사액을 청하는 상소이다. 잡저 가운데 〈至樂堂記〉는 저자가 石門洞에 精舍를 짓고 당호를 ‘지락당’이라 한 내력을 설명한 것이고, 〈書九友堂記後〉는 친우 柳東淵이 南磵에 구우당을 짓고 梅, 柳, 楓, 菊, 松, 竹, 碧梧, 碧桃, 사계절 꽃을 벗으로 삼겠다며 당호를 붙인 이유를 설명한 기문를 읽고 지은 書後이며, 〈謾說〉은 詩 作法에 대한 것으로 절차탁마의 노력뿐만 아니라 올바른 방법을 찾아 그 요체를 알아 힘쓰는 것이 중요함을 말하고 있다. 제문은 柳東淑, 柳泰翊, 吳俊臣 등에 대한 것이고, 묘지명은 20여 년 교유했던 李滾에 대한 것이며, 서는 전라도 관찰사 趙龜錫, 朴增輝, 林㙔 등에게 보낸 것으로 주로 안부편지이다.권5는 附錄이다. 三淵 金昌翕이 지은 묘갈명, 任憲晦가 1873년에 지은 행장, 東湖 朴鼎元을 제향한 箕山祠에 저자를 배향할 때 지은 撰者 미상의 奉安祝文ㆍ兩丁祝文, 金聲五와 鄭涖가 지은 제문, 행장에 수록되지 않은 저자의 행적을 따로 정리한 實記가 실려 있다.卷末에 지은 연도가 기록되지 않은 金炳學의 跋, 奇正鎭ㆍ外裔 高時鴻ㆍ8대손 吳駿善이 1874년에 지은 跋과 “崇禎紀元後五甲戌季春道林講堂新刊”이라는 刊記가 있고 이어 遺墨이 실려 있다. 광해군 10 1618 무오 萬曆 46 1 1월 16일, 昌平 后山里에서 태어나다. 광해군 12 1620 경신 泰昌 1 3 羅州 道林의 季父 吳希有의 양자가 되다. 광해군 14 1622 임술 泰昌 2 5 5월, 부친상을 당하다. 인조 1 1623 계해 泰昌 3 6 11월, 생부상을 당하다. 인조 14 1636 병자 崇禎 9 19 12월, 장남 吳朋錫이 태어나다. 인조 24 1646 병술 順治 3 29 5월, 차남 吳玄錫이 태어나다. ○ 사마시에 합격하다. 효종 3 1652 임진 順治 9 35 增廣 文科에 丙科로 합격하다. ○ 승문원 정자가 되다. 효종 4 1653 계사 順治 10 36 윤7월, 주서가 되다. ○ 10월, 생모상을 당하다. 효종 7 1656 병신 順治 13 39 3월, 주서가 되다. ○ 10월, 전적이 되다. ○ 11월, 예조 좌랑이 되다. ○ 12월, 병조좌랑 겸 지제교가 되다. 효종 8 1657 정유 順治 14 40 2월, 모친 봉양을 위하여 咸平 縣監이 되다. 효종 9 1658 무술 順治 15 41 5월, 濫率衙眷한 죄로 파직되다. ○ 10월, 함평 현감 재직 시 송사를 벌이려다 도리어 刑杖을 받은 사람이 무고하여 楚山(井邑)으로 유배되다. 효종 10 1659 기해 順治 16 42 효종이 승하하자 〈感懷詩〉를 짓다. 현종 7 1666 병오 康熙 5 49 3월 7일, 졸하다. ○ 5월, 同福 先塋에 장사 지내다. ~ - ~ ~ ~ - ~ 咸平 箕山祠에 배향되다. 고종 10 1873 계유 同治 12 - 鼓山 任憲晦가 행장을 짓다. 고종 11 1874 갑술 同治 13 - 7대손 吳恒圭ㆍ吳元圭, 8대손 吳駿善 등이 활자로 문집을 인행하다. 石門集卷之四 / 疏 / 德山書院請額疏 代儒生作伏以國家右文興化。象賢崇德。夐出前古。至於近代。尤有大焉。凡賢臣立祠。賢祠賜號。一從士林公議。有號卽居。靡言不從。此是千古美事。三代以下。未有此擧。此臣等之所以裹足千里。仰瀆天聽者也。臣等伏見故牧使臣朴祥。中廟朝名臣也。生而神氣英爽。長而聰明過人。量峻心直。有壁立千仞底氣像也。持身則整肅而準繩有截。處心則莊栗而言笑不妄。溫然於接物。凜然於臨事。立朝則犯顔敢言。不訐不諱。勁直之言。秋霜也烈日也。正戚里越資之罪。陳中壼防微之道。風霜竄逐。屢阽危亡。而終不少撓。其天資之高。學力之深。槩可想矣。其三寸侄子故右議政朴淳。自齠齕已爲揖讓周旋之容。長而受業於先正臣徐敬德。得聞性理之說。精深透悟。人莫之及。貶議林百齡之諡。擧正尹元衡之罪。選六行之士。復枉死之官。先正臣李滉稱以泂如一條淸氷。神氣頓爽。先正臣奇大升亦言剖析精微。明辨剴切。其學問之功。造詣之極。從可知矣。是以宣廟奬之以松筠節操。水月精神。詔使稱之以宋人物唐詩調。其他所守之確。見道之高。雜出於諸賢之記。不暇臣等之一二談也。名世之士。五百年乃出。而詭論之士。猶以爲朝暮遇之。今一家之間。叔姪趾美。雖顯晦不同。施設有殊。而其高節卲德。輝耀一世。蔚然爲邦家之光。豈不偉歟。數十年前。因一道多士之公議。告于本道方伯。立祠於所居光州地。同堂幷享。歲歲俎豆之。獨不遑銜章籲呼。名賢祠宇。未蒙華額之賜。致國家崇奬之道未弘。使儒林尊奉之意有闕。此臣等之罪也。臣等之過也。抑臣等竊伏惟念朴祥。立朝未久。遊䆠亦小。雖無諸處立祠之事。而獨其德業傳於儒林。氣節載於國乘。朴淳則仁廟旣許立祠於永平。孝考又許刱院於羅州。二聖盛德。實非偶然。朴祥朴淳。幷美匹休。各有深德。難可甲乙。若使二聖得聞朴祥之風。則其必與朴淳同許者明矣。崇賢造士。爲國急務。奬一勸百。王政所先。伏願殿下追念二聖之意。深惟勸誘之道。特許賜額之請。以慰多士之心。則其有補於國家右文之化。豈淺淺也哉。臣等不勝惶悚屛營之至。謹昧死以聞。
    2020-08-11 | NO.22
  • 석아정 오방정 현판/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2호(1997. 7. 3.)
    서구 풍암동 (개인 소장품)석아정石啞亭 오방정五放亭 현판은 일제강점기 광주를 상징하는 세 인물의 삶과 정신이 실타래처럼 얽혀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다. 현판에는 이들 세 인물의 자취가 그대로 서려 있어서다. 일제강점기인 1919년 일본 와세다 대학 유학시절 2.8독립선언을 이끌어내는 데 산파역할을 했던 애국지사이자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냈던 석아石啞 최원순崔原淳(1891~1936)과 광주 최초의 목사이자 광주YMCA 창설자 및 나환자와 빈민의 아버지로 일평생을 헌신했던 오방五放 최흥종崔興琮(1880~1966), 남종화의 거두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1891∼1977)의 남다른 사연이 양각돼 있다. 이 현판은 허백련 춘설헌春雪軒의 유래와 역사적 변천을 살필 수 있는 유물이다. 문화재 자료 제22호인 이 현판은 가로 94㎝×세로 46㎝이고, 두께는 3㎝이다. 앞면에는 석아정이 새겨졌고, 뒷면에는 오방정이라고 돋을새김 돼 있다. 최원순이 동아일보 편집국장 서리를 역임한 뒤 건강악화로 광주로 낙향, 춘설헌 자리에 석아정이라는 현판을 걸고 요양생활을 했다. 현판 글씨는 1919년 서화협회 창립 발기인이자 1923년 조선미술전람회(선전) 심사위원을 역임하고 팔분체八分體의 오른쪽이 올라가는 예서隸書에 능했던 일제강점기의 서예가 성당惺堂 김돈희金敦熙(1871~1936)가 맡았다. 이를 오방 최흥종 목사가 물려받아 오방정이라 이름 짓고, 기거하며 생활을 했다. 그 이후 1986년 다시 건물의 이름을 허백련 춘설헌이라고 명명, 현재에 이르고 있다. 최흥종이 석아정을 물려받았을 때 의재 허백련이 현판 뒷면에 오방정이라고 새겼으며, 오방정 글자 바로 윗부분에 매화그림을 음각으로 새겨 넣었다. 해방 이후 1946년 의재는 오방정을 물려받아 건물을 벽돌조로 고쳤다. 제주 서귀포 출신의 한국 근현대 서단書團을 이끈 거장으로 평가받는 소암素菴 현중화玄中和(1907~1997)가 춘설헌이라는 현판을 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의재는 벽돌조 개조와 관련해 1950년에 이르러 종래의 낡은 집을 허물고 다시 벽돌 조적식 구조의 건물을 지은 뒤 집의 이름을 춘설헌으로 바꾸었다. 춘설헌은 허백련이 타계한 1977년까지 30여 년 동안 머물며 활동했던 곳으로 남종화의 산실로 통했다. 석아정 오방정 현판의 소유자는 광주시 서구 풍암동 한 개인의 소장품으로 돼 있다. 현재 의재미술관이 보관, 전시 중에 있다.
    2018-05-24 | NO.21
  • 심재유고(心齋遺稿)
    심재心齋 범재준范再駿(1822~1857), 자는 인헌仁憲이며 심재유고(心齋遺稿)가 있다.
    2020-08-10 | NO.20
  • 쌍석유고(雙石遺稿)
    이희용의 문집 《쌍석유고(雙石遺稿)》(1984)는 3권 1책의 석판본이다. 권1에는 20首의 詩와 松沙 奇宇萬, 勉菴 崔益鉉, 植齋 奇宰, 弦窩 高光善 등에게 보낸 70여 편의 편지글이 실려 있다. 권2에는 雜著, 序, 記, 祭文이 수록되어 있다. 권3에는 이희용의 「雙石亭原韻」에 차운했던 20여 인의 서문과 작품이 차례대로 수록되어 있다. 이어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 ~ 1916),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6), 식재(植齋) 이재(奇宰), 현와(弦窩) 고광선(高光善) 등에게 보낸 17편의 편지인 「長洞往復」 와 勉菴이 보낸 6편의 편지글 「長德徃復」가 차례대로 수록되어 있다. 월파(月波) 정시림(鄭時林 1839~1912)이  시(次雙石亭)를, 광주 서방 출신 운파(雲坡) 김진현(金珍鉉, 1878∼1966)이 행장(雙石處士李公(熙容)行狀)을 남겼다.  魏啓道와 李龍鎬가 쓴 발문이 있다. 또한 말년에 최기모(崔基模 1869∼1925)․ 윤석홍(尹錫泓)․박노술(朴魯述 185I∼1917)․박노춘(朴魯春)․김진현(金珍鉉 1878∼1966)․김도병(金道炳)․유창수(柳昌秀)․여방섭(呂邦燮)․ 제갈하백(諸葛夏帛)․최영조(崔永祚)․ 최영와(崔永窩)․ 정대현(鄭大鉉 1873~1946), 오계수(吳繼洙 1843∼1939)․ 오준선(吳駿善)․박노면(朴魯冕)․ 안병택(安秉宅 1861 철종 12 -?)․ 고계문(柳昌秀) 등이 그를 흠모하며 시를 남겼다.권호문(權好文)이 시에서 '술 취하니 시상이 곧 우주로구나 / 一醉詩懷卽太虛'라고 했듯이 그들은 그곳에서 술로 많은 시를 남겼다.
    2020-08-03 | NO.19
  • 안촌집(安村集) 안촌세고 安村世稿
    안촌집(安村集)은 박광후(朴光後1637~1678)의 문집으로 1908년에 嗣孫 朴元圭가 간행한 4권2책의 활자본이다. 박광후는 학문에 몰두하느라 책을 지어 후세에 전할 겨를이 없었으므로 유고가 많지 않았다고 한다. 1861년에 이르러 기정진이 저자의 유고를 「안촌집安村集」으로, 저자의 아들 박중회朴重繪의 유고를 「소은집素隱集」으로 정리하고 이 둘을 합쳐 「安村世稿」로 엮은 뒤 서문을 썼다.안촌세고 安村世稿에 관한 기록은 노사 기정진의 <노사집 권17~20 사이에 있다. 여기에 〈安村世稿序〉는 송시열의 문인이었던 朴光後와 그 아들인 朴重繪의 문집을 모은 「안촌세고」에 대한 서이다.  이는 기정진의 5대조 奇挺翼과 친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정진이 서문을 쓴 뒤로도 간행은 한동안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후 저자의 嗣孫 朴元圭가 부록을 추가하고, 族姪 朴魯術의 도움을 받아 간행을 추진하였다. 이들은 저자의 학문적 연원이라 할 수 있는 호서 지역 유림의 글을 받아 싣고자 하였으나, 간행을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기에 1908년 저자의 族孫 朴賢東의 발문만 실어 활자로 인행하였다. 《초간본》 이 본은 현재 국립중앙도서관(한46-가392), 규장각(古3428-236), 성균관대학교 존경각(D3B-679) 등에 소장되어 있다. 이때 간행된 「안촌세고」는 안촌집 4권 2책, 소은집 2권 1책, 총 6권 3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소장처에 따라 두 문집을 별도의 책으로 구분한 경우도 있다. 《안촌집(安村集)》말미에는 광주 안청리安淸里에 있는 저자의 집 외성당畏省堂에 대한 시문이 실려 있다. 〈외성당제영畏省堂題詠〉 10수 및 1888년 崔益鉉과 奇宇萬이 지은 〈외성당기畏省堂記〉가 있다.
    2020-08-11 | NO.18
  • 외당유고 畏堂遺稿
    <외당유고畏堂遺稿>는 외당 고한주의 문집으로 9권2책 석인본, 1968년에 간행됐다. 1책은 유실되어 그 내용을 알 수 없다.2책에 실린 권6의 내용은 「소쇄원기(瀟灑園記)」를 비롯하여 19편의 기(記)와 그밖에 발(跋), 명(銘), 사(辭), 가사(歌詞) 등이 수록되어 있다. 권7에는 「연재선생제문(淵齋先生祭文)」등 8편의 제문과 축문(祝文), 상량문(上樑文), 비문(碑文) 등이 다수 실려 있다. 권8에는 묘갈명(墓碣銘), 묘지(墓誌), 행장(行狀)이 수십 편 실려 있고, 권9는 부록(附錄)으로 가장(家狀)과 권순명權純命)이 쓴 행장(行狀), 송재성(宋在晟)이 쓴 묘갈명(墓碣銘)과 25인이 쓴 만장(挽章), 제문(祭文) 8편이 수록되어 있다. 서문은 누가 썼는지 미상이고, 발문은 없다.
    2020-08-14 | NO.17
  • 용두동 고인돌/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6호(1984. 2. 29.)
    서구 용두학동 길 15(용두동)용두동 고인돌[支石墓]은 광주 소재 청동시대의 대표적 지석묘이다. 이곳의 고인돌군은 남북 방향으로 3줄이 배치돼 있는데 현재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것은 10기에 불과하다. 주위에 덮개돌을 지탱하는 받침돌이 여러 개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2∼3기 정도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곳은 서창동주민센터에서 대촌동주민센터 방향으로 가다 그 중간쯤 왼쪽 송학산(208.9m)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반대편에는 봉황산과 봉학제가 보인다. 이곳은 약간 높은 지대로, 주변은 밭인데 묘역은 길이 40m, 너비 7m 정도의 긴 사각형의 잡종지다.용두동 고인돌은 군집형태를 이뤄 남북 방향으로 3줄이 배치돼 있는데 우측열의 보존상태가 가장 완전하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것은 10기로, 받침돌이 여러 개 흩어져 있는 만큼 이곳 고인돌에 대한 정밀한 연구를 진행하고 이를 보존할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10개의 고인돌 중에는 전라남도 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북방형 탁자식 고인돌이 1기가 있고, 3기는 남방형의 바둑판식이다. 나머지 6기는 굄돌이 없는 형식인 개석식蓋石式, 무지석식無支石式이다. 탁자식 고인돌의 덮개돌은 길이 1.5m, 너비 0.65m이며, 3개의 받침돌이 지탱하고 있다. 이들 고인돌의 덮개돌은 이곳에서 1㎞ 떨어진 송학산에서 가져온 것으로 추정된다.광주 지역에서는 모두 400기의 고인돌이 발견되었는데 매월동, 지석동 등의 17개 군집에 103기가 있다. 용두동에서 탁자식 고인돌 1기가 발견된 것이 특징적이다.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광주 전남지역은 고인돌이 전국에서도 가장 많이 분포돼 있다. 겉 형식에 따라 북방식과 남방식(개석식 포함)으로 나눠지고, 무덤 내부 형식에 따라 석관형, 석곽형, 위석형, 토광형으로 나누어진다.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놓은 탁자식과 땅 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다만 안내 이정표 확충이나 주차 공간 확보 등을 통해 방치된 문화유적이 아닌, 시민들과 함께 하는 문화유적으로 거듭나도록 체계적인 관리가 요구된다.
    2018-05-24 | NO.16
  • 운림동 석실고분
    광주 동구 운림동 산18에 있는 석실고분(光州 雲林洞 石室古墳)이다. 무등산 장원봉의 동남쪽으로 비탈진 곳에 위치한 무덤들이다. 1989년 3월 20일 광주광역시의 문화재자료 제9호로 지정되었다. 모두 6개의 무덤이 있으나 널(관)을 넣었던 돌방(석실)이 완전히 드러난 것은 2기 뿐이다. 1호와 2호 무덤은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바닥은 얇은 판돌들을 물이 잘 빠지도록 이중으로 깔고, 가장 밑바닥은 회갈색의 단단한 진흙을 냇돌과 섞어 기초를 다졌다. 올라가면서 무덤방의 너비를 줄인 후 정상부에 2매의 뚜껑돌을 올려 그 무게로 동서벽을 유지하게 한 맞조림식 돌방무덤이다. 운림동 돌방무덤은 이 고장의 백제사 연구가 문헌상 어려운 실정에서, 이 지방에서 보기드문 백제식 돌방무덤의 출토로 고고학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위키백과
    2021-06-17 | NO.15
  • 운천사마애여래좌상/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호(1986. 11. 1.)
    서구 금호운천길 85-15 운천사(쌍촌동) 운천사雲泉寺 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은 금호지구 푸르지오 아파트 뒤편에 자리한 운천사내 석불로 조성 연대는 고려 초기다. 불상 높이가 2.1m, 무릎 폭이 2.1m에 이른다. 광주에서는 보기 드문 실내 마애불이라는 점이 역사적인 가치를 높여준다. 높이가 4m, 길이가 5.6m에 이르는 자연 암벽에 불상을 양각하고 불상 외 나머지 부분을 깎아서 파냈는데 형상을 돌출시켜 만든, 일종의 석굴 불상像이다. 그 불상 위에 건물을 지었다. 이를 전각이라는 하는데, 불보살이 모셔진 곳을 의미한다.중국 운강석굴에 늘어선 대불 가운데 하나를 연상시키는 운천사마애여래좌상은 불상에 비해 법당의 규모가 작다. 보물 제48호인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北彌勒庵 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과 같은 고려시대 마애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공통된 특징을 유추할 수 있다. 신라불상에 비해 정제미나 예술미 대신, 다소 투박하고 서민적인 느낌이 다분하다. 조각양식은 32상 80종호의 특징을 따르고 있다. 이를테면 타원형의 넓적한 얼굴에 긴 눈과 우뚝 솟은 코, 두터운 입술, 길게 늘어진 귀 등을 통해 근엄한 얼굴 표정을 만들어내고 있다. 또 굵은 목과 벌어진 어깨, 결가부좌한 자세 등은 안정감이 있고, 당당한 모습이다. 전체적으로 얼굴에 비해 몸체가 지나치게 과장돼 있고, 어깨와 손이 크다. 눈은 선정에 든 듯 반쯤 뜨고 있다.머리에는 육계肉髻가 솟아 있고, 머리카락은 마애불에서 보기 드문 작은 소라 모양의 나발螺髮이다. 윗부분은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자리하고 있으며, 마모가 심하긴 하지만 이마에는 백호공이 얇게 보인다. 법의는 우견편단右肩偏袒을 한 옷 주름으로, 다소 이완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왼쪽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에는 평행계단식의 옷 주름을 형식적으로 표현했다.어깨는 넓은 편이나 앞가슴이 발달하지 못해 평범한 느낌을 준다. 팔이 유난히 긴데다 손.발의 표현이 크고, 손가락이 놓인 위치는 다소 어색하다. 불상의 손(수인手印)을 보면 다섯 손가락을 편 양손을 대일여래(비로자나불)가 자주 취하는 선정인禪定印처럼 보인다. 복부에 양손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불상 뒤로는 한 줄의 신광身光과 세 겹의 두광頭光이 있다. 가장 안쪽 두광에 연꽃무늬가 새겨있을 뿐 다른 장식은 없다. 세 겹의 두광은 부처님의 빛이 나와 부처님을 새겼다는 전설과도 일치되는 부분이다. 전반적으로 빛이 나오는 듯 외곽에 둥그런 선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이 약그릇이라면 약사여래불이다. 그런데 약그릇이 아니라고 치더라도 이에 대한 근거는 있다. 오래 전부터 많은 환자들이 이곳에 찾아와 기도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약사여래를 뒷받침하는 것은 또 있다. 운천사의 옛 이름은 정토사였다. 이 마애불을 약사여래라고 하는 것은 정토사라는 이름과 모순되지는 않는다. 병 치료에 영험하다는 약사여래가 동방만월세계라는 정토의 부처님이기 때문이다. 운천사마애여래좌상을 조성하게 된 데는 원효대사가 무등산 원효사에 머물던 어느 날, 서쪽 하늘에 상서로운 기가 가득함을 보고 제자 보광화상을 그곳에 보냈더니 뜻밖에 큰 바위에서 빛이 솟아 나오므로 그곳에 이 불상을 새겼다고 전해진다. 다만 고증할만한 기록이나 유물이 없어 아쉽다. 이처럼 불상의 가치가 작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를 퇴색시켰다는 점은 자성할 필요가 있다. 애초 불상을 만들 때 법당 문을 열면 예전에는 무등산이 한눈에 들어오도록 했을 것이지만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무등산도 가려지고, ‘백팔번뇌’를 상징했을 보호각 앞에서 절까지 108계단마저 사라져 안타까움을 더한다.
    2018-05-24 | NO.14
  • 유촌동 석조여래좌상/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1호(1996. 3. 19.)
    서구 유덕로 24 유덕동주민센터 마당(유덕동)유촌동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은 광주광역시 서구 유촌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불상으로 유덕동주민센터 앞 화단에 자리하고 있다. 이 불상은 불상이나 보살상을 안치하는 자리인 대좌臺座와 등 뒤에서 일어나는 빛인 배광背光을 갖추고 있는데 네모난 대좌는 연꽃무늬가 조각돼 있고, 광배는 심하게 훼손돼 본래의 형태와 무늬가 선명하지 않아 애초 불상이 보여줬던 조형미학의 근간은 많이 흐트러져 있다. 그나마 얼굴선이 선명한 점은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애초 원형이 보존되지 못하고 변형돼 모습이 파괴되면 가치가 훼손된다. 유촌동 석조여래좌상이 처한 현실이기도 하다. 눈 코 입의 형상을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 뿐더러 어깨와 허리, 무릎이 너무 크게 조각돼 불상의 위엄이 상당부문 상실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신체 균형이 맞지 않은 점과 광배의 무늬에 근거해 조선 말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원래 서구 쌍촌동 운천사에 있던 석불이었다 한다. 1939년 현 위치인 유덕동주민센터로 옮겨왔다. 다분히 기복적인 사람들의 마음이 동해 좌상의 거처가 바뀌게 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극락면이었던 유촌동은 사람의 왕래가 잦고 주민들이 많이 거주했다. 단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소원을 빌 만한 대상이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운천사 소재 불상을 옮겨 와 소원을 비는 쪽으로 사람들의 마음이 합해지면서 현재의 자리로 옮겨오게 됐다는 것이다. 앞서 눈 코 입이 선명하지 않다 했는데 거기에는 그만한 사연이 있다. 부처님의 코를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소문이 퍼져 주민뿐만 아니라 지나가는 행인들까지 코를 깎아가는 바람에 현재 얼굴 윤곽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화염무늬와 연꽃봉오리로 장식하고 있으나 통통한 얼굴은 훼손이 심해 윤곽만 남아있다.머리 뒤쪽에 일부 남아있는 무늬나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 그리고 목에는 굵은 세 줄로 삼도三道가 표현돼 있으며, 옷은 불상이나 승려의 옷 모양새 가운데 양어깨를 모두 덮은 통견通肩이다. 엄지와 검지를 가볍게 쥐고 있는 오른손의 모습 등은 뚜렷하게 남아 아미타불의 상생인上生印을 하고 있고, 왼손은 마모돼 모양을 판단하기 어려워 아쉽다. 신체는 당당한 어깨에 비해 팔이 짧고 허리가 가늘어 움츠려진 듯한 인상을 주며, 무릎은 지나치게 과장되어 표현됐다. 다리와 대청을 이루고 있는 양쪽 발바닥, 옷자락은 특이한 모습을 보여주며 직사각형의 연꽃잎이 새겨진 대좌가 있다. 이러한 신체 모습은 고려시대 양식을 계승하고 있는 조선 전기 불상의 특징으로 꼽힌다. 그래서 유촌동 석조여래좌상은 불교 조각 분야에서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다만 더 이상 파손되지 않은 상황에서 현 모습을 그대로 보존해야 하는 문제는 두고두고 숙제가 될 전망이다.
    2018-05-24 | NO.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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