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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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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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희창
    강희창(姜熙昌), 湖節2下-210-1, 光州, 임진왜란 一道擧義《호남절의록》(1799)
    2020-03-31 | NO.244
  • 고경신
    고경신(高敬身), 湖節1下-173-1, 光州, 壬辰, 高從厚 同殉《호남절의록》(1799)
    2020-03-31 | NO.243
  • 고경형
    고경형(高敬兄), 고경명의 동생이다. 湖節1下-173-2, 光州, 壬辰, 高從厚 同殉《호남절의록》(1799)
    2020-03-31 | NO.242
  • 고광련(高光璉)
    고광련(高光璉, 1872~1949)의 본간은 장흥이며 자는  호기(瑚器), 호는 침천(枕泉)이다. 남구 압촌동에 거주했다. 부 : 高馹柱조 : 高濟尤증조 : 高鳳鎭외조 : 李基彬처부1 : 申文休1929년 羅燾圭 문인들의 昭義契에 참여했다.
    2020-08-06 | NO.241
  • 고광문 고광인 고광룡
    남구 이장동 고광문(高光文, 1860~1898), 고광인(高光寅, 1862~1936), 고광룡(高光龍, 1867~1938) 형제는 부농 집안에서 학문에 전념하고 가사에 근면하였다. 동학군에 종군한 뒤 집안의 수많은 전답을 동학군자에 헌납하고 목숨 걸고 싸웠다. 결국 일본군에게 동학군이 밀리면서 타향 객지로 피신 전전하며 세월을 보냈다. 통탄 비분의 세월을 보내다가 3형제의 행적이 110년이 지난 뒤로도 잘 알려지지 않아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에서 <동학 3형제기> 비석이 2004년 10월 세워졌다.후손인 고영두(高永斗. 1930~2006)씨의 450평방미터 부지 희사로 이장동 216에 2016년 6월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이 조성되었다.
    2020-03-06 | NO.240
  • 고광선
    고광선(高光善, 1855~1934)의 본관은 장흥(탐라)이며 장흥고씨(長興高氏)이다. 자는 원여(元汝) 호는 현와(弦窩)이다.  서창면 용두리에 살았다. 1855년(哲宗 6) 光州 復村에서 湖隱 高璞柱와 행주기씨 禹鎭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선조 기묘명현의 한 사람인 霞川 高雲과 忠烈公 高敬命의 직계후손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행동이 비범하여 아이들과 함부로 섞여 놀지 않았으며, 스스로 글을 깨쳐 경서와 제자서를 읽을 줄 알았다. 10세에 모친을 여의었는데, 어린 나이임에도 상례를 어른처럼 행하니 주위 사람들이 놀라워했다. 이러한 고광선을 두고 부친의 친구들이 앞으로 큰 인물이 될 것이라 하여 자못 기대하는 바가 컸다.그때 마침 德岩 羅燾圭가 이웃 石亭里에 와서 강의를 함으로 나아가 학문을 닦는다. 또한 蘆沙 奇正鎭 문하에 들어가 지금까지 듣지 못한 바를 듣고서 기뻐했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기정진에게서 성리학을 익혀 깊이 있는 학문의 세계를 이룬다. 또한 기정진의 문하에 있으면서 여러 문인들과 교유하는데, 吳繼洙, 朴魯述, 奇宇萬 등이 그들이다. 고광선의 나이 40세 무렵에 갑오농민운동이 발발하여 혼란스러운 상황을 맞이하였다. 고광선은 그 어지러움을 매우 걱정하며 거동을 바르게 하여 흔들리지 않아 안전할 수 있었다. 그는 이처럼 성격이 조용하고 담박하여 세상과 그리 어울리지를 않았다. 더군다나 당시는 을사조약(1905년), 경술국치(1910년), 고종의 승하(1919년) 등 국내적으로 굵직한 일들이 계속 벌어지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일들을 목도한 고광선은 적과 함께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고 하여 光山 西倉 鳳山(봉황산)으로 숨어들어 掩耳齋를 짓고 살았다. 그곳에서 세상과의 모든 인연을 끊고 생을 마감하고자 했으나 원근에서 많은 이들이 학문을 닦으러 찾아옴으로 막지 못하고 봉산정사를 지어 제자들을 길러내었다. 1934년 생을 마감하니 향년 80세였다. 훗날 제자들이 그를 기리는 鳳山祠를 지어 배향했으나 시간이 오래되어 찾는 이가 없어지면서 2017년을 전후해 멸실되었다. 남긴 문집으로는 『현와유고』가 있다. 부 : 高璞柱 조 : 高濟說 증조 : 高公鎭 외조 : 奇禹鎭 처부1 : 李周洪 처부2 : 金運錫노사 기정진에게 수학하였고 1880년 노사선생 襄禮 때 참석하였다. 1906년 12월 12일에 奇宇萬에게 편지를 보냈다. 1924년 담대헌의 중건시 454냥을 성금으로 내었다. 1929년 羅燾圭 문인들의 契에 참여했다. 
    2020-02-05 | NO.239
  • 고광수
    고광수(高光洙), 1870~1937의 본관은 장흥으로 장흥고씨(長興高氏)이다. 자는 도일(道一)이고 호는  송파(松坡)이다. 부 : 高德柱 조 : 高濟乙 증조 : 高性鎭 외조 : 李志容 처부1 : 光州 李秉一1929년 羅燾圭 문인들의 契에 참여하였다. 1935년 4월에 秉天祠의 일로 鳳山精舍에서 회합을 갖자는 통문을 내는 데 동참하였다.
    2020-02-05 | NO.238
  • 고광익(高光益)
    고광익(高光益, 1858~?)의 본관은 장흥이며 자는 성오(省五), 호는 우정(愚汀)이다. 남구 양과동에 거주했다. 부 : 高儀相조 : 高濟憲증조 : 高厚民외조 : 朴齊莞처부1 : 李基彬처부2 : 具元模처부3 : 鄭大彦1929년 羅燾圭 문인들의 昭義契에 참여하였다
    2020-08-06 | NO.237
  • 고광준(高光俊)
    고광준(高光俊, 1853~1939)의 본관은 장흥이며 자는 치삼(致三), 호는 인암(忍菴) 이다. 남구 양과동에 거주했다.부 : 高儀相조 : 高濟憲증조 : 高厚民외조 : 朴齊莞처부1 : 尹柱興       1929년 나도규羅燾圭 문인들의 소의계昭義契에 참여하였다.
    2020-08-06 | NO.236
  • 고규상(高奎相)
    고규상(高奎相, 1878~1959)의 본관은 장흥이며 자는 윤화(允和), 호는 덕봉(德峰) 이다. 남구 니장동에 거주하였다.부 : 高濟國조 : 高宜鎭증조 : 高時興외조 : 昌寧 曺처부1 : 李謙緖       1929년 나도규羅燾圭 문인들의 契에 참여하였다.
    2020-08-06 | NO.235
  • 고봉 기대승(1527~1572)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 1527~1572)은 16세기 조선을 대표하는 성리학자로 스물여덟에 「주자대전」 100여 권을 탐독한 후 네 권의 「주자문록」을 남겼다. 경연에서 선조에게 전한 말을 묶은 「논사록」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본관은 행주.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峯)·존재(存齋). 아버지는 몰재 기진(奇進)이고, 어머니는 강영수의 딸 사이에서 1527년 光州 召古龍里 松峴洞에서 5남 1녀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났다. 기대승의 집안은 조선조에 서울 청파동에 세거하였는데, 기묘사화로 인해 복재 奇遵이 화를 당하자 기준의 형이자 기대승의 아버지인 기진이 광주의 소고룡리로 낙남하면서부터 줄곧 광주에서 세거하게 되었다. 기대승은 어린 시절부터 부친의 훈도와 주위 사람들의 기대로 사림정치에 대한 뜻을 키우고 매우 부지런하게 공부했다. 18세 되던 해에는 당시 조정의 훈구대신들에게 축출되어 향리에 은거하였던 龍山 鄭希濂로부터 문장을 지도받았다. 1549년(명종 4) 사마시에 합격하고 1551년 알성시(謁聖試)에 응해서 시험에 합격했으나, 준의 조카라는 사실을 안 당시의 시험관 윤원형(尹元衡)의 방해로 낙방했다. 29세에는 부친상을 당하여 삼년상을 치루면서 주자의 사상과 경륜에 깊이 침잠하였다. 1558년 문과에 응시하기 위하여 서울로 가던 도중 김인후·이항 등과 만나 태극설(太極說)을 논했고  정지운의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얻어 보았다. 그해 10월 이황을 처음으로 찾아가 태극도설(太極圖說)에 관한 의견을 나누었다. 이황과의 만남은 사상 형성의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그뒤 이황과 13년 동안(1558~70) 학문과 처세에 관한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 가운데 1559년에서 1566년까지 8년 동안에 이루어진 사칠논변(四七論辯)은 조선유학사상 깊은 영향을 끼친 논쟁이다. 32세에 넉넉히 과거에 급제할 수 있었고,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승문원부정자에 임명되었다.출사할 무렵 이미 金麟厚와 사상적인 교감을 하였고, 李恒과는 이기불상잡의 측면에서 토론을 벌였다. 과거에 급제한 뒤에는 李滉에게 성리학이나 출처의 의리를 묻는 등 거의 사제나 다름없는 관계로 가르침을 받게 되어 그의 사상이 더욱 성숙해졌다. 1562년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을 거쳐 1563년 3월 승정원주서에 임명되었다. 그해 8월 이량(李樑)과의 불화로 삭직되었으나, 종형 대항(大恒)의 상소로 복귀하여 홍문관부수찬 겸 경연검토관·춘추관기사관이 되어 청직(淸職)에 들어섰다. 이듬해 10월에 병조좌랑을 지내면서 지제교를 겸임했다.이어 1565년 이조정랑을 거쳐, 이듬해 사헌부지평·홍문관교리·사헌부헌납·의정부사인을 두루 지냈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사헌부 집의·전한(典翰)이 되어 기묘사화와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윤원형 세력이 반대파를 숙청한 사건)으로 죽음을 당한 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에 대한 추증을 건의했다.1568년(선조 1) 우부승지로 시독관(侍讀官)을 겸직했고, 이듬해 대사성에 올랐다.1570년 을사위훈(乙巳僞勳)을 논할 때, "을사(乙巳)의 녹훈(錄勳)이 위훈(僞勳)이 아닐 뿐더러 또 선왕이 이미 정한 것이니 삭탈할 수 없다"고 하여 삭탈을 주장한 사람들의 반발을 사 벼슬에서 물러났다. 1571년 홍문관부제학 겸 경연수찬관·예문관직제학으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72년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고, 이어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로 임명되었다. 공조참의를 지내다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그해 11월 고부에서 병으로 죽었다.그는 명종 말과 선조 초 사이에 경연을 맡아서 이황과 함께 사림정치로의 막을 올리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기묘사화 이후 시비를 가릴 것과 사화로 인해 피해를 받은 사람을 중용할 것과 도통을 계승한 인물들을 표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황이 낙향하고 점차 선조가 기대승을 견제함에 따라 기대승도 낙남하던 중 일생을 마치었다. 그의 관료 생활에 변화가 많았던 것은 그의 직설적인 성격과 당시의 불안정한 정치 상황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학문에 대한 의욕은 남보다 강하였다. 문과에 응시하기 위해 서울로 가던 중 김인후 이항 등과 만나 태극설을 논했고, 정지운의 천명도설을 얻어 보게 되자 이황을 찾아가 의견을 나눌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조선 유학의 전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주자학자이며, 지치주의적 이념으로 왕도정치를 펼치려 했다. 그의 주자학설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사단칠정론은 이황·정지운·이항 등과의 논쟁을 통하여 체계가 이루어졌다. 그는 조광조의 지치주의 사상을 이어받아, 전제주의 정치를 배격하고 민의에 따르고 민리를 쫓는 유교주의적 민본정치·왕도정치를 이상으로 삼았다.1558년 이황과의 만남은 사상 형성의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그뒤 이황과 학문과 처세에 관한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 가운데 1559년에서 1566년까지 8년 동안에 이루어진 사칠논변은 조선유학사상 깊은 영향을 끼친 논쟁이다.  특히 퇴계 이황과 나눈 12년간의 편지, 8년간의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은 역사에 길이 남을 조선 최고의 사상 로맨스로 유명하다.그는 이황의 이기이원론에 반대하고 단칠정이 모두 다 정이다 라고 하여 주정설을 주장했으며 이황의 이기호발설을 수정해 정발이동기감설을 강조하였다. 또한 이약기강설을 주장, 주기설을 제창함으로써 이황의 주리설과 맞섰다.기대승의 사상은 사단칠정이기론과 사림정치론, 예학사상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기대승은 이황과 8년간 논쟁을 통해 그의 성리학을 깊이 심화시켰는데, 그는 이기불상리를 중시하여 사단도 정이라고 봄으로서 사단과 칠정의 發을 다 같이 理와 氣의 共發로 보는데 비해, 이황은 이기불상잡의 측면을 존중하여 사단을 이의 발, 칠정을 기의 발로 각각 分對하여 설명한 것이다. 기대승의 이기공발설은 후일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로 발전되어갔다. 또한 기대승은 사림정치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是非’를 바르게 하여 정치 기강을 확립하고 정치 이념의 정통성을 확립하는 ‘道統’ 즉 정치운영론, 현인등용론, 위민경제론, 언로개방, 교화교육을 통해 사림정치를 실시하고자 하였다. 기대승은 예학에 조예가 깊어 각종 예서를 섭렵하고 예를 바로잡는 데 기여하였으며, 사림들의 지지를 받았던 인종의 지위를 높여 중종 - 인종- 명종으로 이어지는 왕의 계보를 확고히 하고, 사림들의 정통성을 굳건히 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기대승 등의 노력으로 선조대부터 본격적으로 사림정치가 시작될 수 있었다. 그의 인물됨은 기묘명현인 조광조의 후예답게 경세택민 위한 정열을 간직했고 정치적식견은 명종과 선조 두 왕에 대한 경연강론에 담겨 있다. 이 강론은 『논사록』으로 엮어 간행되었는데, 그 내용은 이재양민론, 숭례론, 언로통색론으로 되어 있다.그는 명종 말과 선조 초 사이에 경연을 맡아서 이황과 함께 사림정치로의 막을 올리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기묘사화 이후 시비를 가릴 것과 사화로 인해 피해를 받은 사람을 중용할 것과 도통을 계승한 인물들을 표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황이 낙향하고 점차 선조가 기대승을 견제함에 따라 기대승도 낙남하고 일생을 마치었다. 그는 학행이 겸비된 사유로서 학문에서는 그의 사칠이기설에서 이황과 쌍벽을 이루었고 행동에서는 지치주의적인 탁견을 진주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제자로는 정운룡, 고경명, 최경회, 최시망 등이 있다. 광주 임곡에 위치한 월봉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헌이다.문집으로 원집 3책, 속집 2책, 별집부록 1책, 『논사록』1책, 『왕복서』3책, 『이기왕복서』1책, 『주자문록』4책 등 모두 15책의 『고봉집』이 있다.
    2020-03-25 | NO.234
  • 고부량(高傅良)
    고부량(高傅良, 1583~1621)의 본관은 장흥이며 자는 군거(君擧)이다. 부 : 高處厚생부 : 高因厚조 : 高敬命증조 : 高孟英외조 : 咸平 李璥祖처부1 : 全州 李曄1606년(선조 39)에 식년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607년 9월 8일 義巖書院을 세울 때 광주유사로 참여하였다.
    2020-08-06 | NO.233
  • 고부립
    고부립(高傅立), 湖節4下-129-1, 光州, 丁卯, 高循厚 同倡《호남절의록》(1799)
    2020-03-31 | NO.232
  • 고부민
    고부민(高傅敏, 1577~1642)의 호는 탄음(灘陰)이다. 湖節4下-130-1, 光州, 丁卯, 高循厚同倡 《호남절의록》(1799)강수은에게서 글을 배워서 일찍이 유학과 문예를 크게 성취했기 때문에 영광과의 인연이 깊다.그는 인조5년(1672),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종제인 고부필(高傅弼)과 삼종 고부립(高傅立)과 함께 의병에 참여하기로 결의하며 "금산의 순절과 진주성의 함몰은 비록 시변이라고는 하나, 그 국치를 아직 잊지 못하고, 원수를 갚지 못하고 있는데, 지금 북쪽 오랑캐가 다시 창궐하여 이 땅에 이르니, 이 나라 신하와 백성이 된 사람들은 마땅히 몸을 살피지 않고 적개심에 불타고 있다. 나는 마땅히 진주성과 금산에서의 억울함을 잊지 못하는 병사들을 모아, 오랑캐를 무찌르다가 죽어 천하에 대의를 밝혀 나라의 부끄러움을 씻으리라" 하고 의병을 모으기에 앞장섰다.이때, 탄음 고부민의 재종숙인 정헌공 고순후가 김장생의 추천을 받아 호남의병장이 되었는데, 탄음은 동지 수십명과 그 막부에 이르러 의병과 군량을 모으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기세를 얻어 북으로 행하던 중, 완산에 이르렀을 때, 강화가 되고 적이 물러났다는 소식을 듣고 통한을 머금고 물러나 두문불출했다.또, 병자호란 때에도 탄음은 동지 오천여명을 규합하고 군량을 모아 서울로 향하던 중, 청주에 이르렀을 때 강화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면서 "하늘의 강기가 해와 달을 떨어뜨리고, 시절의 뜻이 역사를 말살시키는가 (天綱墜日月 時義掃春秋)"라는 시를 짓고 자연에 묻혀서 일생을 마쳤다. 숨어지내는 감회를 읊은 시가 애절하다.(幽居述懷)탄음 고부민은 충절이나 덕망 학문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의 모범이 될 만했다. 그는 스승의 학설을 연구하고 펴서, 크게는 천인과 성명(性命)을 궁구하고, 작게는 아주 미세한 사물도 분석하였을 뿐 아니라, 문장에 이르러서는 나름대로의 독특한 체제를 갖추고 있어서, 그 이전의 다른 사람들의 진부한 말을 답습하지 아니 하였다. 방손인 고공진은 탄음의 행장에서 "고부민 선생은 호란이 강화를 하게 되어 공훈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그 의열은 충분히 기에 새기어 찬사할 만하다. 그 근원으로 말하면 사계의 학문을 바로 배워 정자와 주자를 쫓았고, 가정으로 말하면, 죽촌공의 문장과 행업을 백세에 떨칠 만하고 집안으로 말하면, 충열공의 충성심과 의정이 천고에 빛나니, 고부민 같은 사람은 그 충열을 이어 후통을 빛낸 사람이 아니겠는가?"탄음 고부민은 유평과도 가까이 지냈던 모양이다.
    2020-03-31 | NO.231
  • 고부민(高傅敏)
    고부민(高傅敏, 1577~1642)의 본관은 장흥이며 자는 무숙(務叔), 호는 탄음(灘陰) 이다.부 : 高成厚조 : 高敬祖증조 : 高仲英외조 : 咸陽 朴星精처부1 : 光山 金蘊德1607년 9월 8일 義巖書院을 세울 때 광주유사로 참여하였다.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의병을 일으켰다.
    2020-08-06 | NO.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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