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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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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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학경奇學敬(1741~1809)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중심(仲心). 호는 겸재(謙齋). 대승(大升)의 7세손이며, 아버지는 참의 언관(彦觀), 어머니는 여흥민씨이다. 나면서부터 초매하여 학문에 힘썼으며, 1783년(정조 7) 사마시에 합격하고 1797년 문학사에 선임되어 '대학연의 大學衍義'를 교정하였다. 1801년(순조 1) 문과에 급제한 뒤 곧 정자(正字)를 거쳐 사간원정언에 임명되었다. 이때 국정에 관한 칠조소(七條疏)를 올렸으며, 그뒤 무장현감(茂長縣監)을 거쳐 홍문관수찬, 교리에 이르렀다. 기학경은 기대승의 후손으로 수신과 세상에 쓰임이 된 인물로서 그의「칠조소(七條疏)」나 「퇴율량선생사칠리기전말(退栗兩先生四七理氣顚末)」, 「회퇴량선생자의변(晦退兩先生疵議辨)」은 전인들이 미처 발명하지 못한 것이라고 칭송하였다. 권1은 시(詩)로서 모두 41수가 수록되어 있다. 시체(詩體)의 구분 없이 친구 간에 경사가 있거나 송별, 별세하였을 때 보낸 글, 한가로이 자신을 돌이켜보는 시, 선현들의 유적지나 글을 보고 느낀 시 등을 수록하였다. 기학경은 자신이 사는 곳을 노래한 「겸재(謙齋)」를 남겼는데, 만년에 강호에 은퇴하여 선현들의 가르침을 겸손하게 따라 풍월과 자연을 일삼으니 그지없는 낙이라고 읊조리고 있다. 저서로는 《겸재집謙齋集》이 있다.
    2020-09-23 | NO.241
  • 기회성(奇會性)
    기회성(奇會性, 1889~1943)의 본관은 행주, 자는 연술(然述),성술(成述)이고 호는 연파(蓮波)이다.부 : 奇世國조 : 奇景燮증조 : 奇東燁외조 : 尹泰浩, 鄭鼎鉉처부1 : 朴魯術송사 기우만에게 수학하였다.1916년 송사 선생 襄禮 때 참석하였다.
    2020-08-08 | NO.240
  • 기효증(1550~1616)
    기효증(奇孝曾), 湖節2上-066-2, 光州, 壬辰, 義穀將 -《호남절의록》(1799)기효증奇孝曾(1550~1616)의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백로(伯魯), 호는 함재(涵齋).  청백리 기건의 후손이며 할아버지는 기진(奇進)이고, 아버지는 고봉 기대승(奇大升)이며, 어머니는 충순위(忠順衛) 이임(李任)의 딸이다. 1550(명종5년)년 임곡 용동마을에서 기대승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호를 함재라고 한 것은 '넣고 들이며 가라앉히고 쌓아 두어라'라는 아버지 기대승의 훈계를 따르기 위해 지은 그의 좌우명이기도 하다. 일찍이 진사시에 합격하고, 현감에 이르렀으나 1572년에 기대승이 별세하자 광주시 광산구 광곡마을 백우산 아래에 정자를 짓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이후 그는 벼슬에는 큰 뜻이 없이 초야에 묻혀 살았다.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덕령(金德齡)이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킬 때 6월 10일 도유사(都有司)로 격문을 짓고 군사와 의곡을 모집하였다. 이어서 그는 8월1일에 선조가 압록강 끝 의주로 피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근왕병모집격문'을 써서 각 고을에 돌린다. 1592년 8월 19일, 광주의 선비 기효증은 용진산 가학정의 주인 박경과 함께 장성 남문 의병청에서 김경수, 기효간, 윤진 등을 만나 그들은 양곡을 보으고 운반하는 일에 기효증은 의곡장으로 임명되고, 박경은 기효증의 종사관으로 활동하였다. 선유사 윤승훈이 도내에 내려와서 선조의 전지(傳旨)를 가져온 것에 크게 고무되어 격문을 쓴 것이다. 그 결과 의병 1,000인과 군량미 3,000여 석을 확보하였다.그 뒤 휘하 의병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용만에 이르러 왕의 행재소에 나아가 시위하였는데 왕의 총애를 크게 받아 형조정랑에 발탁되었고 이어서 군기시첨정에 올랐다.'호남절의록'에는 기효증과 함께 의곡을 모은 이는 영광의 이굉중·이용중 형제, 오귀영, 이희룡, 송약선, 이헌, 임수춘, 이안현, 최희윤, 이곤과 이분, 김재택이고, 광주의 이운홍, 남평의 송기원, 무장의 오희량, 순천의 이안현, 고창의 김홍우, 무안의 윤황 등이다. 특히 전 참봉 이굉중은 고봉 기대승의 문인이어서 기효증을 적극 지원하여 영광 도유사가 되었고 영광출신들의 많은 참여를 유도하였다. 송약선은 중종 때 청백리인 지지당 송흠의 4대손으로 영광에서 군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고봉의 장남 함재 기효증(1550~1616)의 <근왕록>(勤王錄)은 귀중한 사료적 가치가 높은데도 시 문화재로 지정되지도 않았고 한글 번역도 되지 않았다. 기씨 문중에서 보관하고 있는 '함재근왕록'에는 의곡을 모은 사람으로 이굉중, 민근, 이영립, 임업, 이운홍, 이천룡, 기효분, 기효민, 박경, 이한, 이녕 등의 이름이 나오고, 무안생원 김충수가 쌀 2백석, 순천 낙안 유생이 3백석, 태인 유생 안광주가 2백석을 보낸 것으로 적혀 있다. 여기에서 기효민은 기효증의 동생이고 기효분은 기효증의 사촌이다.<근왕록>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기효증이 군량미 3200석을 모아 바닷길로 임금이 있던 용만(龍灣) 의주까지 수송했던 내역 등이 기록돼 있다. 기효증은 의곡과 의병을 배에 싣고 서해안을 따라 의주로 향한다. 맨 먼저 9월16일에 영광군 의곡도유사인 이굉중과 생원 이용중, 유학 이홍종, 생원 이극부 등이 함께 모은 의곡 1.200석이 영광 법성포에서 출발하였다. 9월21일에는 나주에서 양곡을 실은 배 3척이 출항한다. 기효증은 이 나주 배를 타고 간 것으로 보인다. 배들은 서해안을 거치면서 점점 늘어났다.함재근왕록에 의하면 의곡을 실은 배는 모두 24척으로서, 강진 1척, 영암 2척, 나주 3척, 무안 1, 임치 1척, 함평 1척, 영광 2, 무장 2, 흥덕 1, 고부 1, 금모포1, 부안 2, 임피 1, 옥구 1, 태안 2, 근포 2척이다.쌀과 의병을 실은 배들은 10월15일에 고부에 도착하고, 11월6일에는 군산포(羣山浦) , 11월10일 충청도의 람포(藍浦), 12월3일에 태안(泰安)에 도착한다. 그리고 12월6일에 근포진, 12월10일 독진을 거쳐서 1593년 1월19일 강화도에 도착한다. 포구에 이를 때마다 배가 안전 운항을 할 수 있도록 제문을 올리고 해신에게 제사를 드리었다. 이를테면 11월6일 군산포에 도착하였을 때 수행원 임업이 제문을 지은 제서해신문祭西海神文이 '함재근왕록'에 실려있다.1592년 겨울은 너무 추웠나 보다. 의병선 5척이 풍랑에 표류되기도 하였고 바다가 얼어서 제대로 운항을 못하였다. 의주의 행재소는 기효증이 의병과 의곡을 싣고 온다는 소식을 미리 들었던 것 같다. 1592년 12월17일 선조실록을 보면 윤두수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기효증이 정병 1백 명을 거느리고 올라오고 있는데 삼화도가 얼어붙어 건너지 못하고 있다 합니다. 그가 올라오기를 기다려서 또 이곳 정군을 뽑아 이빈(李薲)에게 주어 싸움터로 보내면, 그는 그곳의 형세를 잘 알고 있고 또 전에 이미 오래 머물면서 공을 세우지 못했으니 이번에는 반드시 스스로 공을 세우려 할 것입니다” 라는 구절이 나온다.배는 1593년 1월말 경에 평안도 의주에 도착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기효증이 2월1일에 벼슬을 사양하는 상소문을 썼기 때문이다. 기효증은 의주 거련관에서 선조 임금을 뵈었다. 임금께서 불러보시고 따뜻하게 말씀하시길 “고통을 무릅쓰고 먼 곳에서 이곳에 이르니 내가 매우 기쁘도다. 또한 풍랑이 심한 엄동설한에 천리 길을 무사히 도착한 것은 참으로 가상한 일이다”라고 위로하였다.이 때 임금의 호위가 허술하였는데 호남에서 정예 근왕병 460명이 오자 비로소 호위병의 모양새를 갖추었으며, 양곡은 주로 명나라 군사들의 식량으로 쓰였다.조정에서는 도체찰사가 포상을 청하는 보고서를 올려 기효증은 형조정랑 및 군기시 첨정 의 벼슬을 제수 받았다. 군기시는 병참 업무를 담당하는 기관이다. 그런데 그는 신하로서 할 도리를 다한 것이지 별다른 공로가 없으니 4품 벼슬을 사양한다는 사직상소를 올린다. 선조임금은 기효증의 사직 상소를 보고는 “천리 길을 달려와 임금을 도왔으니 그 충의정신이 장하다”고 하였다.이 상소문에는 의병과 의곡의 내역과 각지에서 차출된 배, 그리고 종사자 명단이 상세히 나와 있다. 의곡종사 감수관 전몽성, 참모 최지남, 군량 선물 참모 강형, 주사장(舟師將) 김몽일, 해남의 의곡유사 윤광계, 백진남 이름 등이 나온다. 백진남은 삼당시인 중 한 사람인 옥봉 백광훈의 아들이다.기효증은 나중에 동복현감에 제수되었으나 1593년 3월에 대간들의 논박을 받고 파직된다. 한편 종사관 박경(朴璟 1559-1633)은 평시서 직장에 제수하였으나 그 또한 벼슬을 사양하였다 이에 임금이 궤장과 죽림처사라는 호칭을 내리었다.선조임금은 '천리길을 마다않고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한 충의가 참으로 가상하다'고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함재 선생이 이곳에 7그루의 소나무를 심어 사계절 불변의 지조를 지닌 소나무의 청고한 절개를 본받았다.고봉의 아들 기효증이 시묘살이하던 위치에 건립된 현재 칠송정의 초건은 1651년 경으로 추정되지만 그 후 누차의 중수를 거쳤다. 정자 내에는 한말의 거유였던 윤용구의 현판 글씨를  비롯하여 1905년 10대손 기동준이 쓴 칠송정 중건기, 호산승처필명정 8세손 기봉국이 쓴 칠송운이 걸려 있다.
    2020-03-30 | NO.239
  • 김국광(1415~1480)
    성종실록 123권, 성종 11년 11월 11일 정해 5번째기사 1480년 명 성화(成化) 16년 광산 부원군 김국광의 졸기광산 부원군(光山府院君)김국광(金國光)이 졸(卒)하였는데, 철조(轍朝)·조제(弔祭)·예장(禮葬)을 예(例)대로 하였다. 김국광은 자(字)가 관경(觀卿)인데, 광주인(光州人)으로 증 영의정(贈領議政) 김철산(金鐵山)의 아들이다. 정통(正統) 신유년 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뽑혀서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보임(補任)되었다가 천전(遷轉)되어 박사(博士)에 이르렀다. 을축년 에 의영고 부사(義盈庫副使)에 승직(陞職)되고, 황해도 도사(黃海道都事)·성균 주부(成均主簿)·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봉상시 판관(奉常寺判官)을 역임(歷任)하였다. 경태(景泰) 을해년 에 조모(祖母)의 상(喪)으로 복(服)을 입었는데, 세조(世祖)가 ‘김국광이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고 물으니, 좌우에서 상을 당했다고 대답하였다. 삼년상을 마치자,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제수되었다가, 이어서 부지승문원사(副知承文院事)에 승직되었으며,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역임하고, 성균 사예(成均司藝)·종친부 전첨(宗親府典籤)으로 천전(遷轉)되었었다. 경진년 에 특별히 중훈 대부(中訓大夫) 사섬시 윤(司贍寺尹)을 더하였는데, 얼마 있지 아니하여 승정원(承政院)의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가,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천전되었으며, 신사년 에는 가선 대부(嘉善大夫) 병조 참판(兵曹參判)으로 승계되었다. 세조가 항상 그의 암련(?鍊) 을 칭찬하여 ‘사지제일(事知第一)’이라는 네 글자를 손수 써서 내려 주었다. 그때 승지(承旨)들이 일로 인하여 견책(譴責)을 받으니, 김국광에게 명하여 승정원(承政院)의 출납(出納)을 관장하게 하였다. 갑신년에 자헌 대부(資憲大夫)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초배(超拜)되고 성화(成化) 을유년에 정헌 대부(正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승계되었으며, 병술년에는 숭정 대부(崇政大夫)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승계되었다. 정해년에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 겸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천전되었다가, 이어서 우찬성(右贊成)에 승직되었는데, 그때 역적(逆賊) 이시애(李施愛)의 주벌(誅伐)로 정충 출기 적개 공신(精忠出氣敵愾功臣)의 호(號)를 내리고, 숭록 대부(崇祿大夫) 좌찬성(左贊成)으로 승계시켰으며, 광산군(光山君)으로 봉하였다. 한때 김국광을 비방(誹謗)하는 익명서(匿名書)가 붙은 적이 있었는데, 간관(諫官)이 이것에 의거하여 죄를 청하니, 세조가 크게 노(怒)하여 간관을 저촉시켜 대죄(待罪)하게 하였으며, 김국광이 일찍이 의정(議政)을 역임한 적이 있다 하여 원상(院相)을 삼으니, 김국광이 찬성(贊成)으로서 또한 참여하였다. 기축년에는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우의정(議政府右議政)으로 승계되었는데, 주상(主上)이 즉위하여 좌의정(左議政)으로 진배(進拜)하였다. 신묘년에는 순성 명량 경제 홍화 좌리 공신(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의 호를 내리고, 광산 부원군(光山府院君)으로 봉하였다. 계사년에 어미의 상을 당했는데, 을미년에 삼년상을 마치니, 광산 부원군(光山府院君)을 제수하고, 정유년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제수하였으며, 무술년에 도로 부원군으로 봉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 66세였다. 시호(諡號)가 정정(丁靖)인데, 뜻을 펴되 성취하지 못하는 것이 정(丁)이요, 공손하여 말을 적게 하는 것이 정(靖)이다.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김국광(金國光)은 이간(吏幹)이 있어서 일을 처리하는 데 치밀하고도 명료하였다. 세조조(世祖朝)에 함안(咸安) 사람 최옥산(崔玉山)이 그 아비를 죽였다 하여 옥사(獄事)가 거의 이루어지자, 세조가 놀라서 말하기를, ‘어떻게 이같은 일이 있는가?’ 하고, 김국광을 보내어 다시 국문하게 하였는데, 김국광이 그 옥사를 모두 뒤집으니, 최옥산은 마침내 죄를 면하게 되고, 추문(推問)하던 관리들이 모두 중죄(重罪)를 받았다. 이로 말미암아 자못 임금에게 사랑받게 되었었다. 상정국관(詳定局官)이 되어서는 주대(奏對)하는 것이 임금의 뜻에 맞으니, 세조가 사리(事理)를 아는 것이 제일이라고 지목하였다. 몇 년이 되지 아니하여 판서(判書)에 발탁되고, 의정부(議政府)에 들어가니, 총애(寵愛)를 받아 임명된 것이 견줄 데가 없었다. 오랫동안 무선(武選)543) 을 관장하니, 문정(門庭)이 저자[市]와 같았고, 집안이 크게 부유하게 되었으며, 아우 김정광(金庭光)과 사위 이한(李?)이 모두 장죄(贓罪)로 패몰(敗沒)하였다. 재상(宰相)이 되어 대간(臺諫)에게 두 번이나 논박(論駁)을 받았는데, 주상 또한 그 간악(奸惡)함을 알았다. 무릇 대신(大臣)으로서 졸하면 으레 특별한 부의(賻儀)가 있으므로, 승정원(承政院)에서 구례(舊例)를 써서 바치니, 명하여 정지시켰으며, 봉상시(奉常寺)에서 시호(諡號)를 정(丁)으로 의정(議定)하자, 아들 김극유(金克?)가 여러 번 글을 고칠 것을 논하였으나, 끝내 윤허(允許)하지 아니하였다." 하였다.【태백산사고본】 18책 123권 4장 A면【국편영인본】 10책 173면【분류】왕실-의식(儀式) / 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2020-05-08 | NO.238
  • 김귀인
    김귀인(金貴仁), 湖節2下-131-1, 光州, 壬辰, 一道殉節-《호남절의록》(1799)
    2020-04-01 | NO.237
  • 김극추金克秋(1552~1610)
    김극추(金克秋), 湖節1上-084-2, 光州, 壬辰, 高敬命同倡 -《호남절의록》(1799)본관은 김해이며 자는 여직汝直, 호는 절봉節峰이다.  탁영 김일손의 증손으로 알려져 있다. 김극추金克秋(1552~1610)는 어렸을 때부터 용감했을 뿐 아니라 학문도 깊어 주변의 부러움을 샀으며 의병장군 권율과 인연으로 의병에 투신했던 의로운 선비이다. 1552년 4월 8일 광주시 서구 서창동 사동 절골마을에서 참봉을 지낸 김필金弼의 아들로 태어났다. 보기 드물게 문무를 두루 갖춰 권율과 인연으로 의병에 투신했던 의로운 선비였다.당시 광주 목사로 부임했던 권율은 그의 명성을 듣고 만나기를 청해 그의 역량이 소문과 같은 것을 확인한 후 지근거리에 두고 친교를 나눴다. 학문을 논했을 뿐 아니라 무예 겨루기를 즐겨했다. 의기를 갖춘 권율이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키자 그는 권율의 막하에 들어가 앞장서서 왜군과 싸웠다.권율이 피로써 맹세하고 있는 힘을 다해 왜군을 함께 무찌르자고 호소하자 1천 5백여명의 의병이 모였다. 광주관내 5백명 전라도 인근 1천명이었다. 광주공원에서 광주 향교 가는 길 오른 편 기슭 철제계단을 올라가면 비석 스무개가 있다. 이 중 맨 앞줄 은행나무 바로 앞에 광주 목사 권율과 관련된 비가 하나 있다. 도원수충장권공창의비都元帥忠莊權公倡碑이다. 이 비의 옆면 두 곳에 권율과 같이 전투에 참여한 인사의 명단이 적혀 있다. 김극추의 이름이 올려 있는 것은 당연하다.『호남절의록』에는 1592년 7월 전북 금산 근처의 이치梨峙 전투에 참가해 큰 전과를 올렸다. 그 훈상으로 훈련원주부에 임명되었다고 했다. 『충의사록』에서는 자세하게 이치전투에서 고을장정들을 인솔하여 영정곡永貞谷에 복병하였다가 큰 전과를 올려 훈련원 주부에 임명된 뒤 행주전투에 참전하여 끝까지 싸워 큰 공을 세웠다고 기록했다. 그 뒤에 한성참군이 되었다가 정우위별무사로 선별되었다. 권율 막하에 다시 들어가 활약할 때 정충신, 이충립, 고성후, 이완근, 이세환, 박대수, 김치원 등과 광주 8장사의 한사람으로 꼽혔다.그는 행주전투 이후 특진하여 내직으로 병조좌랑, 군기첨정을 지냈고 외직으로 경성판관, 해미현감을 거쳐 영천군수로 있을 때 그를 시기하는 자들의 모함으로 파면을 당했다. 그를 따르던 군민들의 탄원으로 다시 군자감정이 되었다. 1605년에 선무후종3등공신에 책록되었다.그러나 임진왜란 때 입은 상처가 회복되지 않아 1610년 1월 9일에 향년 59세로 세상을 떠났다. 후에 좌승지로 중직정려를 명하여 광산구 우산동에 있는 삼강정려에 모셔졌으나 주택단지에 편입됨에 따라 현재는 이설되었다. 충남 금산 금곡사에 배향되었다.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1464~1498)의 증손으로 알려져 있다.
    2018-05-28 | NO.236
  • 김남주
    김남주(金南柱, 1946∼1994) 시인은 전남 해남군 삼산면 봉학리 태생으로 전남대학교 영문과에서 수학했다. 대학 재학 시절부터 3선 개헌과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학생 운동을 적극적으로 주도했다. 1973년 국가보안법 혐의로 복역하고 대학에서 제적당했다. 이후 「진혼가」 등 7편의 시를 《창작과비평》에 발표하여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이러한 문학 활동 이외에도 전남‧광주 지역에서 활발한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다. 1980년 남민전 사건으로 다시 징역 15년을 언도받고 복역 중 1984년 첫 시집 《진혼가》를 출판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석방되어 민족문학작가회의 상임 이사를 맡으면서 활발한 문학 활동과 사회참여 활동을 병행했다. 창작 이외에도 프란츠 파농, 파블로 네루다 등의 외국의 진보적인 문학을 번역해 소개하기도 했다. 수감 후유증과 과로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어 1994년 2월 13일 췌장암으로 운명했다. 광주 망월동 5‧18 묘역에 안장되었다. 그는 1974년 《창작과비평》에 「잿더미」 등 7편의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1991년 제9회 「신동엽창작기금」, 1992년 제6회 단재상 문학부문상, 1993년 제3회 윤상원상, 1994년 제4회 민족예술상을 수상했다.시집으로 《진혼가》(1984), 《나의 칼 나의 피》(1987), 《조국은 하나다》(1988), 《솔직히 말하자》(1989), 《사상의 거처》(1991),《이 좋은 세상에》(1992),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1995)이 있다. 시선집으로 《학살》(1988), 《사랑의 무기》(1989),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1991), 《꽃 속에 피가 흐른다》(2004)으며, 번역서로 프란츠 파농 《자기의 땅에서 유배당한 자들》(1978), 하이네‧브레히트‧네루다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1988), 하이네 《아타 트롤》(1991)가 있다.
    2020-03-24 | NO.235
  • 김달생(金達生)
    풍영정 주인 김언거의 9대손 거이당(居易堂) 김달생(金達生 1745~1791)은 대를 이어 풍영정을 운영하며 거이(居易)하며 지냈다.이곳에 김달생과 유유상종했던 시기에 서유승(徐有升), 정기정(朴基正), 이복영(李復永), 윤치용(尹致容), 심의복(沈宜復) 등이 들려 시문을 남겼다.여기에서 읊은 시들은 모두 풍영정의 정취를 읊고 있으며, 55수 가량이나 된다. 
    2020-03-11 | NO.234
  • 김덕령(金德齡)
    임란 최후 의병장이자 조선의병 총수인 김덕령(1568∼1596)의 자는 경수(景樹)로 광산이다. 양녕대군의 장인인 한로(漢老)의 12세손이며 1470년 무렵 광주 서구 금호동에서 충효마을(당시, 석저촌)로 터를 옮긴 문손(文孫)은 그의 고조부이다. 1568년 12월 29일 붕변(鵬變)과 남평 반씨 3남 3녀 중 둘째아들로 석저촌(石底村)에서 태어났다. 종조인 사촌(沙村) 김윤제(金允悌)로부터 공부를 시작하여 17세에 향해(鄕解, 초시)에 합격하고, 18세 때 담양에 사는 흥양이씨 부인과 혼인하였다. 20세 되던 해에는 형 덕홍과 자부(姊夫) 김응회(金應會)와 함께 우계 (牛溪)  성혼(成渾) 문하에서 수학하였다.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6월 형 덕홍과 함께 고경명 막하에 들어가지만 어머님 봉양을 위해 다시 광주로 귀향 후, 주검동(鑄劒洞)에서 무기를 만들어 전쟁터로 보급하는 등 후방에서 관․의병 지원활동을 하였다. 김덕령(金德齡), 湖節2上-001-1, 光州, 壬辰, 忠勇將 -《호남절의록》(1799)1593년 6월,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조선군이 대패함에 따라, 조정에서 호남에서 유능한 장수를 뽑아 경상도로 보내기로 하여 김덕령을 담양부사 이경린(李景麟)과 장성현감 이귀(李貴)가 추천하고, 전라도순찰사 이정암(李廷馣, 1541∼1600)의 조정에 천거가 있은 뒤, 12월 27일 분조인 전주 무과시험장에서 수많은 수험생들 앞에서 무예 시범을 보임으로써 국가와 백성들이 인정하는 장수가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곧바로 세자(광해군)로부터 익호장군(翼虎將軍)의 군호를 받고, 왕(선조)으로부터 충용군(忠勇軍)이란 호칭을 받게 된다.1594년 1월 22일 담양을 출발하여 남원에서 도착하여 남원사람 최담령(崔聃齡)을 별장으로 삼고, 군사훈련을 시킨 다음, 함양, 산청을 거쳐 4월 초 진주 대곡면 대곡리에 도착하여 이곳에 진을 치고 있을 무렵, 왕의 특명으로 제도의 의병을 혁파하여 장군에게 예속시킴에 따라 조선의병의 총수가 된다. 그해 여름 진지를 대곡리에서 대여촌(현, 금산면 가방리)으로 진을 옮기고 군사 훈련에 박차를 가하면서 진주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월아산(482m) 정상에 목책을 설치하여 왜군의 침입에 대비하는가 하면 정상부근에 제무소를 두어 무기를 직접 만들기까지 하였다.김덕령이 의병을 일으킨 시기는 강화교섭기로서 큰 전과는 없었지만, 고성․창원․정암진 전투의 전과를 통해 왜군이 진주 일원의 지역에 다시는 출현할 수 없도록 하여 결국 전라도를 온전히 보전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1594년 9월, 곽재우․이순신․원균과 함께 참전한 수륙연합 장문포 해전에서의 별 전과를 거두지 못하자 도체찰사 윤두수가 체직되고, 김덕령 장군 또한 조정과 여러 사람들로부터 기대를 잃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1595년 12월, 김덕령은 엄격한 군율 적용하였다하여 살인죄로 체포 구금되지만 무고가 드러나, 왕의 특명으로 이듬해 2월 말 석방된다. 하지만 1596년 7월, 충청도에서 일어난 ‘이몽학의 난’에 연루되었다는 무고로 다시 잡혀가 옥에 갇혀 혹독한 고문을 당한 장군은 “충효로서 죽음을 삼은 죄밖에 없습니다.”라는 말을 남긴 채, 1596년 8월 21일 여섯 차례의 고문을 받은 끝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만다. 당시 장군의 나이는 겨우 29세였다. 장군이 죽기 직전 옥중 생활의 심정을 한탄하면서 춘산곡 을 노래했는데 현대어로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봄철의 산에 불이 나니 피지도 못한 꽃들이 불이 붙어 다 타는구나.저 산에 일어난 불은 물을 뿌려 끌 수 있지만이 몸에 연기도 없는 불이 일어나니 이 불은 끌 물조차 없는 것을 한탄하노라.이 노래는 억울한 누명을 내(연기)없는 불에 비유해 산불은 끌 수 있으나 자기의 몸속에 붙어 타오르고 있는 억울한 마음의 불은 끌 수 없음을 비유하여 한탄하는 의기가라 하겠다.김덕령 장군이 억울하게 죽은 지 65년이 지난 1661년(현종 2) 왕의 특명으로 신원(伸寃)되었다. 이후 1668년(현종 9) 병조참의에 증직되고, 1681년(숙종 7) 병조판서로 가증되었다.1785년(정조 9) 충장(忠壯)이란 시호(諡號)가 내려지고, 3년 뒤인 1788년(정조 12) ‘정려비와 충효리’를 하사한다.1789년(정조 13) 또다시 종1품 관직인 좌찬성(左贊成)에 가증되었다. *《광주읍지(1879)》, 《국역 김충장공유사(1979)》, 《김덕령 평전(2006)》
    2020-03-06 | NO.233
  • 김덕보
    김덕보(金德普), 湖節4下-127-1, 光州, 丁卯, 高循厚同倡-《호남절의록》(1799)김덕보(金德普)의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자룡(子龍), 호는 풍암(楓巖). 아버지는 김붕섭(金鵬燮)이며, 어머니는 남평박씨(南平朴氏)로 직장 박계종(朴繼宗)의 딸이다. 형이 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이다. 광주(光州) 석저촌(石底村), 지금의 충효동에 살았다.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담양부사 이경린(李景麟), 장성현감 이귀(李貴) 등의 권고로 형 김덕홍(金德弘)·김덕령(金德齡) 등과 함께 의병을 규합하여 왜군을 전라도 곳곳에서 격파하였다. 그 뒤 김덕홍이 고경명(高敬命)과 함께 금산에서 전사한 데다가 김덕령이 무고에 의해 옥사하자 향리에 돌아가 세상의 일에는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연구에만 힘을 기울였다.1626년(인조4) 2월 3일에 김덕보가 안방준에게 보낸 편지에는 자신을 장원서별좌(掌苑署別坐)에 추천해준 일은 감사하지만 병으로 부임할 수 없음을 밝히고, 안방준과 함께 산방(山房)에서 지내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이는 안방준의 교유관계를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안방준(安邦俊)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나 노병이므로 전장에는 나가지 못하고 죽었다.  1785년(정조 9) 전라도 유생 기석주(奇錫周) 등의 상소에 의해 큰형 김덕홍과 함께 포상, 추증되었다.
    2020-03-30 | NO.232
  • 김덕홍(金德弘)
    김덕홍(1558∼1592)은 김덕령의 형이다. 호는 성암(省菴)으로 아우 덕령과 매형 김응회와 함께 우계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덕령과 덕보 두 동생과 함께 어머니를 모셨는데 효우가 지극하였다.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거의의 뜻을 가지고 어머니께 하직하고 아루 김덕령과 함께 의병을 불러 모아 전주에 이르렀을 때 적세가 매우 성함을 보고 금산으로 진격하기 전 덕령에게 말하기를 “노모가 집에 계시는데 아우만이 혼자 있으니 우리 형제가 모두 나선다면 어머님을 보호할 사람이 없게 되니, 나는 나라를 위해 죽을 것이니 너는 돌아가서 어머님을 봉양하여라.”고 당부하였다.그해 7월 10일 제1차 금산전투에서 고경명 장군과 함께 순절하였다.  김덕홍(金德弘), 湖節1上-046-1, 光州, 壬辰, 高敬命同殉 -《호남절의록》(1799)김덕보는 큰형 김덕홍이 금산전투에서 전사하고 작은형 김덕령이 무고죄로 옥사하자 무등산 계곡에 풍암정을 짓고 은둔했다.1785년(정조 9) 지평(持平)으로 증직하고 광주 ‘의열사’에 배향하였다. 슬하에 딸 2명을 두었다. * 《광주읍지(1879)》, 《국역 김충장공유사(1979)》, 《호남절의록(1799)》, 《김덕령 평전(2006)》
    2020-03-06 | NO.231
  • 김동수(金東洙)
    광주, 담양 등지에서 일제군경과 친일파를 응징한 김동수(1879∼1910)는 본관은 김해로 광주목 경양면景陽 병문리屛門 , 현 북구 우산동 283번지에서 태어났다. 처가는 중흥동 84-3번지이다.(후손 김홍두 증언) 그는 포목상과 농업에 종사하였다. 한말의 망국과정을 지켜보면서 의분을 품고 살다가 결국 의병을 주도한 전남의병이 도처에서 봉기하자 1907년 이원오(李元五)·조경환(曺京煥)·양상기(梁相基)·김현길(金玄吉) 등과 함께 광주에서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1908년 2월 광주 출신으로 의병을 일으킨 양진여 의병대에 합진하여 활약하였다.  2월 양진여 의병장의 지휘 아래 동료 의병 5~6명과 함께 전남 광주군 갑마보(甲馬保)면의 친일 면장(面長) 집에 들어가 군수품을 징발하였다.김동수 의병장은 뒤에 독립부대를 편성하여 광주․담양․장성 등지에서 일제 군경과 친일파를 응징하였다. 그의 의병대는 65명의 의병으로 편성되었고, 부관은 이기섭(李基燮, 서방면 모른거리(毛弄里) 출신), 선전병은 선덕현(宣德玄, 서방면 신나굴(溪川里) 출신), 도포사는 임윤팔(林允八)․임윤오(林允五, 오치면 외촌 출신) 형제, 도십장 김재민(金在珉, 천곡면 봉산리 출신)이었고, 의원(義員)은 양동골(梁東骨, 서방면 솔대거리(孝竹里) 출신), 백학선(白學善, 모른거리 출신), 그리고 박포대(朴砲大, 신나굴 출신)이었다.일제 측 기록인 전남폭도사와 의병항쟁 재판기록에 담겨 있는 장군의 활약상은 의병을 폭도라 하고 군자금 징수를 강도나 갈취로 친일분자를 양민으로, 침략자인 군경을 치안담당자로 표현하고 있어 내용을 잘 음미하여야 할 것이다.그런데 의병장 김동수와 그 예하부대들이 한 활동을 일제 측 기록에서 발췌하여 날짜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김동수 의병장은 양진여의 부하로 1908년 12월 25일 5∼6명의 부하들을 인솔하고 면장 집에 60원을 요구하였으나 돈이 없다고 거절당하자 그를 구타하고 그로부터 짚신 50켤레를 징수하였다.1909년 1월 12일에 광주군 갑마보면 복용리(伏龍里)  이장집에 들어가 총기로 위협하면서 20원을 강요하였으나 돈이 없어 백목 2필을 군수품을 수합하였다. 1909년 2월 하순에 광주 오치동의 동장집에 들어가 현금 20원과 백목 10필을 강요했으나 거절당하고 백목 3필만 군수품을 수합하였다. 1909년 2월 30일부터 15명과 함께 총기를 들고 5월까지 광주․화순․담양․창평․장성 등지를 돌아다녔다.1909년 3월 15일에 삼취지(三取旨)동에서 동장집에 들어가 백목 4필을 군수품을 수합하였다. 20일에는 장성군에 사는 최봉근 집에 2명과 함께 들어가 군도 1자루를 탈취했다. 1909년 3월 23일에는 광주군 동장집에 들어가 현금 5원을 갈취했으며 29일까지 광주를 무대로 계속 활동했다.또한 1909년 4월 1일부터 4월 29일까지 7차례에 걸쳐 현금과 백목 수합, 교전으로 인한 3명의 전사자와 총 9정을 빼앗기는 등의 피해를 입었다.특히 1909년 5월 19일에  50여 명의 의병을 지휘하여 광주군 덕산(德山)면 덕산에서 일본군 헌병대 광주분견소의 적군들과 접전을 벌였고, 화승총 10정을 빼앗아 갔고, 31일에 광주시 갑마보면 본촌(本村)동 김영조 집에서 광주경찰서 순사부장 외 11명과 교전하였다. 의병장 김동수는 이 전투에서  부상을 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광주 뿐만 아니라 담양(潭陽)·장성(長城)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그러다가 같은 해 9월 사창(社倉) 전투에서 오른쪽 다리에 총상을 입고 피체되어 1910년 2월 22일 경성공소원(京城控訴院)에서 징역 15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옥중에서 순국하였다.1995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김동수 의병실록(1986)》, 《광주시보》(이상식, 1985년 12월호)
    2020-03-06 | NO.230
  • 김만식(金晩植)
    김민식(1845~1922)의 본관은 광산이며 충효리에서 살았다. 자는 사성(司晟)이며 호는 난실(蘭室)이다. 부 : 金洪泰조 : 金琦鉉증조 : 金致儀외조 : 金學中처부1 : 高殷鎭1889년에 眉巖 柳希春을 기리는 모임에 참여하였다.취가정을 경영하였고 『蘭室遺稿』가 있다.
    2020-02-24 | NO.229
  • 김방 金倣
    광산김씨 김방(金倣)의 아버지는 예조판서(禮曹判書) 승노(承魯)이며, 어머니는 경주이씨(慶州李氏) 민부상서(民部尙書) 복득(福得)의 딸이다. 고려 우왕(禑王) 때를 거쳐 조선(朝鮮)초에 좌찬성(左贊成)을 지내고 통훈대부, 김제(金堤)군사 겸 권농병마단련부사로 근무할 때 황폐해 가는 김제 땅 벽골제(金堤 碧骨堤= 저수지)를 확장 보수하여 김제 만경(萬頃) 평야를 옥토(沃土)로 만들었다. 그 후 광주 목사로 재임시 세종대왕(世宗大王)의 중농정책으로 경국제민하는 뜻을 받들어 공의 개인 소유지인 저습지(低濕地) 수만평(현 광주시 중흥동 효죽동 계림동의 일부)에 전천후(全天候) 사업으로 3년간에 걸쳐 경양제(光州 景陽堤) 방죽을 만들어 광주 일원의 농토를 옥답(沃畓)으로 만들어 국리민복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 후 좌찬성(左贊成)에 올랐다. 공이 죽은 후 공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향인(鄕人)이 광주 증심사(증心寺) 능주(綾州)의 쌍봉사(雙峰寺) 낙안(樂安)의 (증光寺)에 영정(影幀)을 봉안(奉安)하였다. 후손이 남면(南面) 재궁동(梓宮洞)에 재실을 지어 세일사를 봉행하고 있다. (見勝覽及兩郡誌) 배(配)는 원주원씨(原州元氏)이다.
    2020-05-17 | NO.228
  • 김석구金錫龜
    金錫龜의 자는 景範, 호는 大谷, 본관은 金海이다. 1835(헌종 1) 2월 남원 松洞面細田에서 金國賢의 아들로 출생했다. 김국현은 아들 김석구가 학문에 힘쓰자 그를 위하여 곡성으로 옮겨 글공부를 하게 하였다. 그는 隣里書塾에서 『小學』을 배우고 이어 맹자를 배우자 스스로 맹자를 자처하였다. 이후 그는 17․8세에 蘆沙 奇正鎭를 뵙고 사사한 지 몇 개월 만에 光州 大谷(現, 潭陽 大峙里 金谷)으로 옮겨서 기정진의 학문을 전수받았다. 이후 김석구는 학문에 더욱 전념하여 정진으로부터 자신의 문하 중 당세의 輔弼治澤을 맡길 만한 인물로 지목받았으며, 문인 중에서도 기정진의 철학과 사상을 가장 깊이 이해하여 스승인 기정진에 의해 김석구, 老栢軒 鄭載圭, 日新齋 鄭義林 등 蘆門三子 중에서도 첫 번째로 손꼽히게 되었다. 그는 평생 場屋(과거 보는 곳)에 드나들지 않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였으며, 집안이 가난하여 처는 베를 짜고 아들은 밭을 갈아 독서하면서 그를 봉양했다. 기정진의 喪에 三年持服하였고, 內難母喪을 만나 3년 상을 마치고 1885년 고종 22년 8월 8일 별세했다. 기정진은 김석구를 일컬어 ‘夫人不言 言必有中(말을 하지 않으나 말하면 반드시 이치에 맞는다)’이라 하여 공자의 제자 안자에 비유하였으며, 최익현은 스승인 기정진에 대한 관계를 주렴계와 정명도 형제와 비유하기도 하였다.
    2020-08-03 | NO.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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