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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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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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곽해 郭海
    곽해 郭海의 처음이름은 桓이고 호는 乾止堂이다.  고려 중반의 대문호 進賢館大提學 文憲公 元振(八世)의 玄孫으로 공민왕조에 벼슬이 사온동정좌우보승중랑장으로 麗史備略에 이르기를, 공민왕조에 좌우보승랑장 郭海는 나이23세에 아버지의 벼슬을 세습하여 총관중랑장이 되었다.  신사 거란(哈丹)의 난에 조지린과 함께 영안도 용진에 나아가 싸움에 이기고 조정에 승첩을 고하니, 이 때 나이 25세였다.  왕이 크게 기이하게 여겨 金袍와 玉帶를 하사하며 이르기를 “너는 아직 장가가지 않았으니, 이제 혼인하여 훌륭한 자식을 낳고, 대대로 왕실에 힘을 다하기를 네가 짐에게 하는 것 같이하라.”하였다.  병신년 仲孚의 난에 명을 받아 도총사부령직을 제수 받았다. 조소생, 임원거, 조천주와 쌍성 화주 화북 九月山사이에 출전하여, 적을 크게 이기고, 西京에 계속 머물면서 12城鎭의 紅巾잔적을 소탕하였다. 그 군공으로 초수수사구밀직사주국삼중의 직책을 제수 받았다.  圃隱 鄭선생과 함께 국맥을 도모하다가, 圃隱이 태조의 龍興에 반대하다 목숨을 잃으니, 끝내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뜻을 품고 광주의 소고룡방이라 불리는 곳에 숨어서 산에 막을 치고 살았다.  일편단심 舊國의 은혜를 잊지 않고 산정상 부근 건지(西北方을 등진 방향)에 집을 얽고 살았으며 乾之는 부지런하여 쉬지 않는 다는 것을 말함이니 건지라 칭한 뜻을 알겠다. 매일 산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고 사모하기를 죽을 때까지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때 당시 주위의 사람들이 배우기를 원했으나 그는 항상 겸손하여 말하기를 “나는 망국의 대부이니 남의 자녀를 가르칠 수가 없다.” 하였다. 후인 고경지가 그 산을 이름하여 건지라 하였고, 그 마을을 산막이라 하였다.  건지는 공의 집이 산의 건지방향인 뜻이고 산막은 공이 와서 처음 산에 막을 지은 뜻을 가리킨다.(衣山爲幕) 그 산과 마을의 명칭이 모두 공의 유적으로 말미암아 지금까지 끊어지지 않으니 가히 공의 절행이 백세에 이르기까지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묘는 광산군 임곡면 산막동 건지산 갑좌이고, 배는 郡夫人제주고씨(司온直長 坪 女)로 합장되어 있으며 비갈과 床石이 있다.  후손 孟奎가 갈명하고 撰하였다. 아들은 思安, 思寧 형제분이며 큰딸은 李自寶(함풍인 정룡랑장)에게 시집보냈다. 외손은 이극명, 이극해 이며 둘째사위 함성군 林碩住(나주인)는 군기사정에 추증 되었고, 외손 임귀연은 호조참판에 추증 되었다. 入鄕顯祖 郭  海 先生  (1958년 戊戌普 수록 내용) 初諱桓號乾止堂 文憲公 元振 玄孫 恭愍王朝 官司온同正左右保勝中郞將 麗史備略曰 恭愍王朝 左右保勝郞將郭海年二十三 襲父爵爲摠管中郞將 辛巳 哈丹之亂 與趙之璘同進于永安道龍津 勝捷獻 於朝 時年二十五 王大奇之 賜金袍玉帶曰 汝未有室服 此歸娶生嘉子 世世致力於王室 如汝之於朕也 及丙申 仲孚之亂召命拜都摠司部領 趙小生林原巨趙天住 出戰于雙城和州和北 九月之間 擊走勝捷 仍留西京 掃蕩紅巾殘賊十二城鎭 以軍功超授守司寇密直使柱國三重 封海美君 麗運告訖 與圃隱鄭先生 圖扶國맥 圃隱立槿太祖龍興 遂懷不二之志 遯于光州之召古龍坊 依山爲幕而居之 一片丹心不忘舊國之恩 遇且구一堂于附近山上扁之以乾之乾之盖取諸乾乾不息 知其所止之義 日日登臨望北號慕 終身不懈 時有人來請學子 公常自謙而言曰 余亡國之大夫不可以訓 迪人子弟云 後人高景之名其山曰 乾止號其洞曰 山幕乾止稱其公之肯堂于山扁之以乾止之義 山幕指其公之來胥始依山爲幕之意 其山與洞之稱名 皆由於公之遺蹟而至今不切於此可以知公之節行 白世而不朽 墓 光山郡林谷面山幕洞乾止山甲座 配郡夫人濟州高氏父司온直長坪 墓合不부有碣床石 後孫孟奎撰碣銘 子思安見下 思寧見夜 女李自寶咸豊人 精勇郞將 子李克明李克諧 咸城君林碩住羅州人 贈軍器寺正 子林貴椽贈戶曹參議    十二世 諱 海의 長子, 思安은 孫 謙山 曾孫 益晋, 滋貞으로 이어지고          益晋은 中郞將公派의 派祖 諱          奉訓郞行禮賓侍主簿를 지낸 主簿公派의派祖 諱 儀를 낳고          滋貞은 星州목사를 지내고 牧使公派의 派祖 諱 保君을 낳았다. 次男 思寧은 孫 宜山 曾孫 茂貞으로 이어져서          參奉公派 派祖 諱 球          참봉벼슬을 지낸 敬隱公派 派祖 諱 琳          효행으로 계공랑 광릉참봉에 제수된 啓功郞公派 派祖 諱 三兄弟를 낳아 山幕洞 五代문중을 거느리게 되었다.
    2020-08-11 | NO.8
  • 김원국
    김원국金元國(1873~1909)은 일제강점기에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 맞서 싸우며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한 애국지인이다. 본명은 창섭昌燮, 호는 석포石浦, 일명 원국元局이다. 서창동 북촌마을 출신이며 의병이었던 김원범의 형이다.일제의 한반도 침략을 못 마땅하게 여겨오던 김원국은 1905년 9월 광주군 송정리시장에서 일본 군인을 타살한 뒤 피신하게 되었다. 이 때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을 규합해 의병활동의 초석을 다졌다. 그러던 1906년 3월 원범과 광주 무등산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의병장이 되어 3백병의 부하를 거느리고 일본군과 맞서 싸우게 되었다. 1907년 6월 광주 우암면牛岩面에서 적과 교전 중 붙잡혀 목포로 압송되었으나 도중에 탈출, 함평 먹굴산으로 피신하였다.여러 차례의 교전으로 일제를 혼란스럽게 하였으나 1908년 3월 영광 토산에서 패전, 불갑산으로 후퇴, 광주 어등산에서 참패를 당하였다. 그 후 12월 19일 무등산에서 적의 기습을 받아 잡혀갔던 김원범이 1909년 2월 취조받던 중 자결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격문을 발송, 동지를 규합하여 의병장에 취임하였다.일제가 의병 대토벌전을 펼치자 게릴라전으로 대응하며, 함평을 근거지로 광주.나주.능주.동복.창평.담양.장성.영광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그 뒤 나주 관동에서 일본군 4명 사살, 함평 오산면에서 일군과 접전 등으로 큰 전과를 올렸다.그 때 입은 부상으로 더 이상의 활동이 어렵게 되자 군사지휘권을 곽진일에게 위임하고, 광주 우산면 향악리에서 병을 치료하였다. 1909년 6월 일본군에게 붙잡혀 광주감옥에서 복역하다가 대구감옥으로 이송된 뒤 총살, 순국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 되었다.
    2018-05-28 | NO.7
  • 김인연(金仁沇) - 급암시집 제3권 / 시(詩)
    급암(及菴) 민사평(閔思平, 1295~1359)의 급암시집 제3권 / 시(詩) 옛 은거지가 큰 바다를 누르는 곳 / 舊隱壓滄海신선을 찾아 자줏빛 구름을 넘어갔구려 / 仙游凌紫煙지금까지도 강좌의 명망 있는 가문 / 至今江左望오직 연연산에 비석 세우기를 기다린다네 / 唯待勒燕然성을 나와 백 리쯤 되는 곳 / 出城百里地바다 곁 한 층의 누각 / 傍海一層樓어진 재상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 賢相今何處신선의 학을 타고 표연히 노닐리라 / 飄然笙鶴游이상은 이상(二相) 김인연(金仁沇)의 청암장(靑嵒莊)에 대해 쓴 시이다.강좌는 양자강 하류의 동쪽 지역을 말한다. 진(晉)나라가 중원을 외적에게 빼앗기고 강좌 지역에 와서 동진(東晉)을 세웠는데, 이 나라에서 가장 명망 있는 가문〔江左望〕으로는 왕씨(王氏)와 사씨(謝氏)가 있었다. 당시 공경(公卿) 장상(將相) 열 명 가운데 일고여덟이 이 두 가문에서 나왔다고 한다. 여기에서는 이를 통해 김인연(金仁沇)의 가문을 광주(光州) 지역의 명망 있는 가문으로 칭송한 것이다.김인연(金仁沇) : 대본에는 ‘金仁衍’으로 되어 있는데, 고려 후기의 문신 ‘김인연(金仁沇)’으로 보인다. 김인연은 화평부(化平府) 즉 광주(光州) 출신으로, 밀직사로 있을 때 충숙왕이 원나라에 억류되자 왕의 환국을 원나라 황제에게 상소하였다. 이로 인해 왕과 적대 관계에 있던 심양왕(瀋陽王) 왕고(王暠)의 일파에게 미움을 받아 순군옥에 갇혔다. 충숙왕이 복위하자 다시 밀직사와 찬성사(贊成事) 등을 역임하였고, 충숙왕이 죽은 뒤 원나라에 가서 충혜왕의 복위를 청원하였다. 충혜왕 복위 시에 조적(曺頔)의 난을 토평한 공으로 일등공신이 되고 광산군(光山君)에 봉해졌다. 공민왕 즉위 초에 시종한 공으로 경렬(敬烈)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2022-05-03 | NO.6
  • 동국여지지 제3권; 양원준(梁元俊) 광주 감무(光州監務
    서리(胥吏)에서 시작하여 광주 감무(光州監務)가 되었다. 인종(仁宗) 때 누차 옮겨서 시어사(侍御史)가 되고 외직으로 나가 상주 부사(尙州副使)가 되었다가 문하시랑평장사로 승진하였다. 청렴하고 검소하며 순박하고 솔직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절개가 한결같았다. 생업을 일삼지 않고 접대나 선물을 받지 않아서 문 앞이 쓸쓸하였다.
    2022-05-06 | NO.5
  • 범세동(范世凍 : ?~?)
    복애 범세동(伏厓 范世凍 : ?~?)은 고려말 사람으로 정몽주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하고 문과에 급제하여 간쟁의 책임자인 간의대부가 되었다. 선생은 도덕과 의리가 뛰어났는데, 정도전, 조준, 남은 등의 신진사대부들이 이성계를 추대하여 새 왕조를 세우려 하자 이에 맞서 충절을 지켰다.선생은 고려왕조가 멸망하자 두문동에 들어가 절개를 지켰는데, 이성계가 이곳에 불을 지르자 고향 땅인 광산군 본량면 복만동에 내려와 은거하였다. 태종은 선생을 대사성(국립대총장)으로 임명하였으나 나가지 않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저술 활동에 힘썼다.원천석과 함께 《화해사전(華海師全)》을 저술하여 동방성리학의 근원을 살폈으며, 《화동인물총기(話東人物叢記)》를 저술하여 동방의 인물들을 소개하였고,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자손들이라는 허왕된 주장을 반박하기도 했다.《환단고기》에서는 범장(范樟) 혹은 휴애거사 범장(休崖居士 范樟)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그가 〈북부여기〉를 썼다고 언급되어 있다.선생의 충절은 조선시대의 사육신이나 퇴계 이황 그리고 상촌 신흠의 칭송을 받으며 선비정신의 지주가 되었고, 유림의 추천을 받아 광주 생룡동 복룡사(伏龍祠)에 모셔 매년 추모하고 있다.
    2021-04-08 | NO.4
  • 양원준 광주 수령- 고려사절요 제11권 / 의종 장효대왕(毅宗莊孝大王)
    무인 12년(1158), 송 소흥 28년ㆍ금 정융 3년 11월○ 문하시랑 평장사로 치사한 양원준(梁元俊)이 졸하였다. 원준은 서리 출신으로, 일찍이 간관이 되어서 정함을 탄핵할 때 고집을 꺾지 않아, 당시의 공론이 이를 중하여 여겼다. 성질이 청렴ㆍ검소하고 순진하고 정직하여 시종 한결같았으며, 집안 살림을 일삼지 않았고, 선사 받는 것을 멀리하여 문앞이 항상 쓸쓸했다. 일찍이 광주(光州)의 수령이 되었을 때, 아내가 시어머니 섬기기를 정성껏 하지 않는다 하여 내쫓았다. 처자가 울며 애걸하여도 끝내 허락지 않고 그 아내를 홀로 친정으로 돌아가게 하니, 사람들이 혹 그의 인자하지 못함을 기롱하기도 하였다.
    2022-04-29 | NO.3
  • 정세운(鄭世雲)
    정세운(鄭世雲, ?~1362)은 고려 말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광주(光州)이고 출신지는 장흥이다.공민왕 때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애쓰면서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을 물리치고 국난의 위기에서 고려를 구해낸 난세의 영웅이었으나 음모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인물이다. 정세운 장군의 본관은 광주이며 광산 출신으로 고려 공명왕 때의 충신이자 뛰어난 장군이다. 강릉대군(江陵大君, 공민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가 공훈을 세우고 돌아와서 대호군(大護軍)이 되었다. 공민왕이 왕위에 오르자 그 공적으로 이등공신에 책록되었고 공민왕 5년(1356년)에 역적 기철(奇轍)을 때려죽인 공으로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가 되었다.기철은 원나라 순종황후 기씨의 큰 오빠로 그 당시 기씨 형제들은 고려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며 무례하고 방자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공민왕이 이를 제거하기 위해 일부러 궁중에서 술잔치를 열어 불러들인 뒤 기철과 그 추종자를 없애고 서울에 계엄령을 내려 그 일당들을 모두 제거했다. 정세운 장군은 이때의 공로로 일등공신의 서열에 끼게 되면서 김용(金鏞)과 왕의 총애를 다투게 되었다.1361년(공민왕 10년) 겨울, 홍건적이 쳐들어와 서울은 함락당하고 만다. 정세운 장군은 왕을 호송하면서 임금에게 민심을 위로 하도록 하고 자신은 여러 고을의 군사를 독려하여 적을 치게 해줄 것을 주청하였다.1362년 1월 공민왕은 정세운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삼고 홍건적을 치도록 명령하였다. 왕명을 받고 20만 대군을 거느리고 나라 안에 침입한 정세운 장군은 홍건적을 압록강 밖으로 몰아내고 서울을 수복하여 1363년(공민왕 12년) 호종 일등공신이 되었다.항상 사이가 좋지 않던 김용의 계략으로 안우·이방실·김득배를 비밀히 꾀어 살해하였다. 뒤에 그 무고함이 밝혀져 그 당시의 최고 통치 기관의 으뜸 벼슬인 첨의정승이 추증 되었다.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일세의 영웅이자 비운의 무장인 정세운 장군은 후세에 남겨진 개인적 기록이 거의 없다. 정세운 장군은 광주 정씨 가문의 시조로 무량에 뛰어나고 문장에도 능하여 많은 유집을 남겼다고 전하나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은 없다고 한다.
    2020-03-02 | NO.2
  • 정지(鄭地)
    정지(1347∼1391)의 초명은 준제(准提), 호는 퇴암(退庵), 본관은 하동으로 시호는 경렬(景烈)이다. 전라도 나주목 거평부곡, 현 나주시 문평면 안곡리 죽곡마을에서 태어나 1365년(공민왕 14) 무과에 급제한 뒤 관직에 진출하였다.말년에 나주로 낙향하지 않고 광주목 편방면, 현 동구 동명동으로 낙향하였다. 그가 광주에 살다가 생애를 마치고, 묘소 또한 북구 망월동 산 176번지에 있어 광주 인물로 분류하고 있다.정지는 고려 말 광주와 전남 지방에 침입한 왜구를 맞아 교전․격퇴시키는 데 가장 큰 활약을 하였던 인물이었다. 그는 1374년(공민왕 23) 중랑장(中郞將)으로서 국왕을 가까이 모시고 있을 때 왜구를 격퇴할 수 있는 좋은 계책을 올린 사람이 없다는 탄식을 듣고 왕에게 왜구토벌책을 올렸다. 이를 계기로 하여 전라도안무사에 발탁되어 왜인추포만호(倭人追捕萬戶)를 겸하면서 양광도안무사 이희(李禧)와 여러 차례 방왜책(防倭策)을 건의, 백성들의 부담 완화와 전략의 효율화에 노력하였다.특히 수군 양성을 강조한 그는 수군의 강화와 함께 전선(戰船)도 건조하였다. 전선은 수병과 함께 수군 활동에 필수적 요소였다. 자질이 있는 수군도 중요하지만 왜구를 해전에서 격퇴하는 데 전선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1382년 해도도원수가 되어 서남해에서 수차에 걸쳐 왜구를 소탕함으로써 많은 전공을 세우고 이듬해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서 제도(諸道)에 전선 건조를 건의하고, 수군사령관인 해도원수(海都元帥)겸 양광(楊廣)․전라․경상․강릉도 도지휘처치사(都指揮處置使)가 되어 수군을 지휘하였다. 1384년 문하평리(門下評理)에 임명되어 보다 근원적인 방왜책으로서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對馬島)와 이키시마(壹岐島)의 정벌을 건의하기도 하였다.1388년 최영(崔瑩) 등을 중심으로 요동정벌이 추진되자 우군도통사 이성계(李成桂)휘하에 예속되어 안주도도원수로 출전하였으나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시 함께 회군하였다. 이때 다시 왜구가 창궐하므로 양광전라경상도도절제체찰사가 되어 남원 등지에서 적을 대파하는 공을 세웠다. 주요 전과는 다음과 같다.⦁1377년(우왕 3) 여름, 예의판서․순천도병마사 : 순천․낙안의 왜구 격파, 18명 사살, 3명 생포⦁1377년(우왕 3) 겨울, 예의판서․순천도병마사 : 왜구 40여 명 사살, 2명 생포⦁1378년(우왕 4) 10월, 예의판서․순천도병마사 : 영광․광주․동복의 왜구 격토․말 100필 노획⦁1378년(우왕 4) 11월, 예의판서․순천도병마사 : 담양의 왜구 격퇴, 17명 사살⦁1383년(우왕 9)5월, 해도원수 : 남해의 왜선 120척 격파, 17척 불태움⦁1388년(우왕 14) 8월, 안주도원수 : 함양․운봉․남원의 왜구 격파, 58명 사살 말 60여 필 노획이듬해 우왕의 복위를 모의한 김저(金佇) 변안열(邊安烈)의 사건에 연좌되어 경주(慶州) 횡천(橫川)으로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 위화도회군의 공으로 2등공신에 봉해졌다.1391년에는 윤이(尹彛) 이초(李初)의 옥사에 연루되어 청주 옥에 갇혔으나 홍수로 풀려났다. 그 뒤 광주에 물러나 있던 중 판개성 부사로 부름을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1644년(인조 22)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둔 현 동명동에 경렬사를 세워 모셨으나 대원군의 1868년 서원철폐령에 따라 1871년(고종 8) 훼철되고, 일제 때인 1921년 나주 노안 금안동에 사당을 건립하고 위패를 모셨으나, 1981년 북구 망월동에 경렬사를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광주시사1>>(1992), <<정지장군>>(2002)* 2023.6.22. 수정
    2020-03-06 | N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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