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공간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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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눌재로
    눌재로는 남구 압촌동에서 서구 서창동과 벽진동에 걸쳐 있는 도로다. 눌재로는 남구 압촌동 지석제 부근의 회재로와 맞닿는 부근에서 시작하여, 벽진동의 벽진고가교까지 6,224m의 도로로, ‘우부리 격살 사건’, ‘신비복위소’ 등으로 의로움을 몸소 실천한 눌재 박상(1474~1530)을 기린 도로다. 눌재로를 통해 서구에서 선정한 서구 팔경인 용두동지석묘와 만귀정(晩歸亭)을 둘러볼 수 있다. 또한 근처 서창둑길은 영산강을 따라 자전거를 타는 즐거움도 맛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눌재로는 영산강이 흐르고 봉황산, 송학산, 백마산이 있으며, 지석제와 봉황제 등 저수지가 있어 한적한 시골 풍경이지만, 멋진 경관을 자아낸다. 서구 8경 중 ‘서창 들녘의 낙조’와 송학산 기슭의 ‘용두동 고인돌’ 세하동 동하마을의 ‘만귀정’도 눌재로에 있다. 따라서 2차선의 좁고 구불구불한 길이 대부분이지만, 눌재로는 서구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다. 눌재로가 시작하는 지석제를 지나면 좌.우측 가까이에 봉황산(168m)과 송학산(212m)이 보이고, 서창교 근처에서는 영산강과 만난다. 서창교를 지나면 오른쪽에 백마산과 산자락에 위치한 송학초등학교, 서창동 주민센터, 한옥문화관이 있다.눌재로의 ‘눌재(訥齋)’는 조선 중기 문인이었던 박상(朴祥)의 호다. 박상은 1474년(성종5년)에 광주에서 태어났다.박상의 아버지 박지흥(朴智興)은 세조가 계유정란(1453)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포기하고 처가인 지금의 서창동으로 내려왔다.박상은 28세 되던 해 식년시(조선시대 식년(式年)에 시행된 과거시험-정기적으로 3년에 한 번씩 열렸다)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 승문원교검(承文院校檢), 병조좌랑(兵曹佐郞) 등을 거쳐 전라도 도사(都事)를 지냈다.박상이 전라도 도사를 지낼 때에 나주에 남의 논밭을 빼앗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등 몹쓸 짓을 서슴지 않는 우부리(牛夫里)라는 자가 있었다. 우부리의 딸은 연산군이 예뻐하는 후궁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우부리에게 뭐라 하지 못하고 속만 태울 수밖에 없었다. 명색이 왕의 장인이기 때문이었다.하지만 박상은 우부리를 잡아 장살(杖殺. 죄지은 자를 때려죽이는 사형방법)시켰다. 이를 안 연산군은 자신의 장인을 사형시킨 박상을 체포할 것을 명한다.박상은 화를 피하지 못할 것을 예상하고 스스로 상경한다. 하지만 박상을 체포하기 위해 내려오던 금부도사(禁府都事)와 길이 엇갈렸고, 그 사이 중종반정(1506)이 일어나 화를 면할 수 있었다.박상은 바른 소리를 직언할 줄 아는 신하였다. 그는 담양부사로 부임할 적에 순창군수였던 김정(金淨)과 함께 중종반정 때 폐위된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의 복위를 간청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중종의 노여움을 사 나주로 유배되기도 했다.일부 학자들은 박상이 자신의 목숨이 날아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우부리를 사형시키거나, 단경왕후 복위를 간청하는 등 불의를 참지 않았기 때문에 그로부터 ‘의향(義鄕)’의 전통이 시작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이처럼 광주 출신의 훌륭한 위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잘 모르는 편이다. 또한 눌재로 구간의 대부분이 인도 없이 차도만 있어 걸어 다니기엔 굉장히 위험한 실정이다.서창동주민센터 바로 옆에 있는 서창향토문화마을을 지나, 서구 팔경 중 하나인 만귀정도 만나볼 수 있다. 하지만 눌재로 끝 벽진교에 다다를 때까지 눌재 박상과 관련된 표지판이나 그밖에 어떤 정보도 얻을 수 없다.광주시가 광주 출신으로서 업적을 남긴 선조들을 알리고 이를 통해 광주만의 새로운 문화를 재생산하기 위한 노력들이 더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2020년 2월 20일 수정
    2018-05-28 | NO.18
  • 다리의 역사
    광주에 다리가 언제부터 놓여 졌는지는 알 수 없다. 사람이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내나 강을 건너게 하는 다리는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옛 다리의 흔적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광주의 옛 다리는 광주의 교통로를 따라 만들어졌다. 광주는 옛 길이 별로 크지 않았고, 타 지역으로 가는 데는 광주읍성의 4대문을 통하여야 했다. 서울로 가는 역로驛路는 북문(현 충장로 파출소 자리)을 지나 공북루라는 누문을 거처 장성의 영신역을 지나 전주를 경유하여 서울에 이르렀다. 대구로 가는 역로는 동문(현 전남여고 부근)을 지나 경양역을 거쳐 담양.순창을 경유, 대구에 이르렀다. 목포.해남.강진 방면은 서문(현 황금동 사거리)을 지나 광주천의 노지다리(부동교)와 백운동 진다리를 지나가야 했다. 화순.보성.순천 방면은 남문(현 광산동 지하철 도청 역 부근)을 통하여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앞들을 지나 화순 너릿재를 넘게 되어 있다. 이 도로를 따라 하천이 있는 곳에 다리가 있었다.광주의 옛 다리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옛 책들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광주의 다리를 기록하고 있는 옛 책으로는 1650년대 간행의 『광주읍지』, 숙종 25년(1699)에 작성된 『광주목지』와 영조 36년(1760)에 발행한 『여지도서』, 정조 16년(1792) 발행의 『광주읍지』, 고종 20년(1879) 발행의 『광주읍지』, 고종 35년(1894) 발행의 『광주읍지』와 1924년에 발행한 『광주읍지』그리고 1966년에 발행한 『광주시사』와 1986년에 한글학회에 발간한 『한국지명총람』등이 있다.1650년대 간행 광주읍지光州邑誌1650년대에 간행한 광주읍지에는 4개의 교량이 기록되어 있다.. 황룡교黃龍橋 : 소지면(현 서봉 인암 운수 소촌 송정동)에 있는데 관문에서 40리이다.. 생압교生鴨橋 : 당부면(현 마륵 금호 풍암동)에 있는데 관문에서 20리이다.. 공량교孔樑橋 : 마지면(현 신창 신가 운남동)에 있는데 관문에서 30리이다.. 극락교極樂橋 : 방하동면(현 송대 용두 서창동)에 있는데 관문에서 30리이다.1699년 간행 광주목지光州牧誌1699년에 간행한 광주목지에는 5개의 교량이 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 황룡교黃龍橋 : 주의 서쪽 40리에 있다.. 생압교生鴨橋 : 주의 서쪽 20리에 있다.. 공량교孔樑橋 : 주의 서쪽 30리에 있다.. 극락교極樂橋 : 주의 서쪽 30리에 있다.. 선창교仙艙橋 : 주의 서쪽 20리 풍영정 앞에 있다.1650년 간행된 광주읍지에는 황룡교.생압교.공량교.극락교 등 4개의 다리가 있었다. 그런데 50여년 뒤인 1699년 간행된 광주목지에는 여기에 선창교가 새로 추가되어 있다. 당시 선창교는 칠계 김언거가 만든 극락강 변의 풍영정 앞에 있었다.1760년 발행 여지도서輿地圖書영조 36년(1760)에 간행한 여지도서 광주편 교량조에는 7개의 교량이 기록되어 있다. . 선암교仙巖橋 : 주의 서쪽 40리에 있다.. 생압교生鴨橋 : 주의 서쪽 21리에 있다.. 공량교孔樑橋 : 주의 북쪽 20리에 있다.. 극락교極樂橋 : 주의 서쪽 30리에 있다.. 풍영정교風詠亭橋 : 주의 북쪽 25리에 있다.. 대량교大樑橋 : 주의 북쪽 10리에 있다.. 학교鶴橋 : 주의 북쪽 5리에 있다.1699년 간행의 광주목지의 5개 교량에 비해 70여년 뒤의 여지도서는 7개의 교량 이름이 보인다. 황룡교 대신 선암교가 같은 거리에 있는 것으로 보아, 황룡교가 선암교로 이름이 바뀐 것 같다. 선창교가 없어지고 풍영정교가 새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 역시 선창교가 풍영정교로 이름이 바뀌었음도 알 수 있다. 그 무렵 새로 만들어진 2개의 다리는 주의 북쪽에 가설된 대량교와 학교다.1879년 발행 광주읍지光州邑誌1879년에 간행한 광주읍지에는 5개의 교량을 기록하고 있다.. 선창교仙滄橋 : 주의 서북쪽 20리 풍영정 앞에 있다.. 생압교生鴨橋 : 주의 서쪽 30리에 있다.. 공량교孔樑橋 : 주의 서쪽 30리에 있다.. 황룡교黃龍橋 : 주의 서쪽 40리에 있다.. 극락교極樂橋 : 주의 서쪽 30리에 있다.여지도서에 기록된 대량교와 학교는 다시 생략되고 없다. 다리가 없어졌기 때문에 생략된 것인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선암교와 황룡교, 선창교와 풍영정교는 다시 이름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1894년 발행 광주읍지光州邑誌1894년에 발행한 광주읍지에도 5개의 교량을 기록하고 있다.. 선창교仙滄橋 : 주의 서쪽 20리 풍영정 앞에 있다.. 생압교生鴨橋 : 주의 서쪽 20리에 있다.. 공량교孔樑橋 : 주의 서쪽 30리에 있다.. 황룡교黃龍橋 : 주의 서쪽 40리에 있다.. 극락교極樂橋 : 주의 서쪽 30리에 있다.1879년 발행 광주읍지와는 변동이 없지만 선창교의 방위가 서북쪽에서 서쪽으로, 생압교의 거리가 주의 서쪽 30리에서 20리로 바뀌어 있다. 1924년도 발행 광주읍지光州邑誌일제 강점기인 1924년 발행의 광주읍지에는 18개의 교량을 기록하고 있다. . 황룡교黃龍橋 : 주의 서쪽 40리에 있다.. 생압교生鴨橋 : 주의 서쪽 30리에 있다.. 선창교仙滄橋 : 주의 서북쪽 20리 풍영정 앞에 있다.. 공량교孔樑橋 : 주의 서쪽 30리에 있다.. 극락교極樂橋 : 주의 서쪽 30리에 있다. . 광주교光州橋 : 화원정에 있다.. 부동교不動橋 : 부동정에 있다.. 성저교城底橋 : 성저리에 있다.. 장우교長牛橋 : 주의 서쪽 30리의 거리에 있다.. 서창교西倉橋 : 주의 서쪽 30리의 거리에 있다.. 월봉교月峰橋 : 주의 북서쪽 20리의 거리에 있다.. 이교泥橋 : 주의 남쪽 5리의 거리에 있다.. 군분교軍盆橋 : 주의 서쪽 5리의 거리에 있다.. 대강교大江橋 : 주에서 북쪽 5리의 거리에 있다.. 소태교所台橋 : 주에서 남쪽 5리의 거리에 있다.. 철도교鐵道橋 : 하나는 풍영정 앞에 있다.. 철도교鐵道橋 : 하나는 송정리에 있다.. 철도교鐵道橋 : 하나는 하남면 산정리에 있다. 1924년 발행의 광주읍지에는 총 18개의 교량이 기록되어 있어,20년 사이에 13개나 증가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1916년 10,860명이던 광주 인구가 1925년 23,597명으로 늘어나 강과 내를 건너야 할 수요의 증가 때문으로 보인다. 생활형 다리가 많이 만들어졌음은 황룡강이나 극락강이 아닌 광주천에 광주교, 부동교, 성저교 등이 만들어졌음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당시 호남선이 개통되면서 세 군데의 철도교도 만들어졌다.1966년 발행 광주시사 중 서구 부분명칭위치구조 계수교桂樹橋 유덕동철근콘크리트 태평교泰平橋양동   광천교光川橋 광천동철혼T형구조형극락교極樂橋 서호동철혼T형조대백교大白橋 유덕동철혼조덕림교德林橋 농성동철혼구주식鐵混構柱式덕흥교德興橋     쌍촌교雙村橋 상무동   양유교良柳橋 양 동 궤도교천 교泉 橋양동   천월교泉月橋 양동목조식효사교孝司橋상무동철혼조1966년 간행된 광주시사에 나타난 교량은 총 85개소다. 이는 1924 광주읍지에 실린 18개보다 67개나 늘어났음을 보여준다. 1925년 23,957명이던 광주의 인구는 1960년 30만 명이 넘게 되고 1970년이 되면 50만 명이 된다. 인구의 증가와 교통량의 증대는 강과 내를 건너는 다리를 대량으로 필요하게 만들었다.당시 만들어진 교량의 재료를 보면 목조 31개소, 철혼조 36개소, 철혼 T형조 12개소, 궤도교 3개소, 세월식 2개소, 콘크리트조 2개소 등으로 되어있어 철과 나무로 만든 다리가 대종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있었던 다리는 오늘 큰 천변을 제외하고는 다수가 보이지 않는다. 이는 도시계획에 의해 파괴되었거나 복개 또는 도로 밑 암거暗渠형태로 되었기 때문이다.
    2018-05-28 | NO.17
  • 대남대로
    대남대로는 1968년 대만 타이난(台南)시와 광주시가 최초로 자매결연을 맺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 명명됐다. 대만 타이난시에도 광저우 루(光州路)라는 지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서로 도로명을 주고받은 것으로 보인다.대남대로는 남광주역 부근에서 1번지를 시작해 푸른길과 나란히 달리다가 백운광장 고가를 넘어 농성광장까지 이어진 4.61km의 도로다. 대남로로 불리다가 2009년 7월 27일자로 대남대로가 됐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길에 주광주중국총영사관이 있다.타이난시는 대만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이자 가장 먼저 개발된 도시로 인구 185만명의 남부에 위치한 도시다. 네덜란드가 대만을 지배하던 시절 이미 상당한 규모로 개발이 되었다. 네덜란드인들은 여기에 자기들 근거지인 질란디아 요새를 두기도 했다. 명나라의 부활을 외쳤던 정성공의 근거지이기도 했고, 청나라가 대만을 지배할 때에는 수도 역할을 했다.타이난시는 17세기부터 200여년 동안 대만의 수도 역할을 해와 도시 곳곳에 많은 문화유적이 산재해 있다. 주요 명승고적으로는 네덜란드인이 세운 질란디아 요새, 정성공 사원, 공자묘 등이 있다.이러한 유래를 가진 대남대로는 광주의 부도심을 고리 모양으로 잇고 있는 제1순환도로의 일부 구간이기도 하다. 제1순환도로는 4개 도로(필문대로, 서암대로, 죽봉대로, 대남대로)의 총칭이다.제1순환도로는 광주가 대단위 택지개발로 인해 첨단, 일곡, 수완지구 등으로 넓이가 커지기 전까지 주요 교통로였다. 지금은 제2순환도로가 이 기능을 담당하고 있지만 이전까지는 제1순환도로가 가장 넓고 빠른 교통로였다.남광주역 4거리에서 학동방향을 바라보고 서면 좌로는 필문대로, 앞쪽으로는 남문로, 우로는 대남대로라고 적힌 안내판을 볼 수 있다. 바로 여기서 대남대로는 시작한다. 그 시작점에는 1930년 문을 열었다가 2000년 폐역이 되어버린 옛 남광주역의 숨결과 남광주시장의 새벽을 깨우는 외침이 함께 흐른다.이곳에서부터 잘 정돈된 푸른길과 나란히 달리는 대남대로는 남광교를 사이에 두고 천변좌・우로와 만났다가 헤어진다. 이어 방림길과 양림길을 좌우로 두고 지난다. 이곳에서 양림길로 조금만 들어가면 ‘연안송’을 작곡한 정율성 거리와 생가를 볼 수 있다.대남대로는 다시 좌로는 봉선시장, 우로는 기독병원으로 가는 4거리에 이른다. 여기서 기독병원 방향으로 들어가면 양림교회, 어비슨 기념관, 오기원 기념각, 이장우 가옥, 우월순선교사사택, 수피아홀 등 광주 근대 역사 문화에 취해 볼 수 있다.대남대로는 백운광장에 이르러 봉선로 1번지인 남구청을 왼편에 두고 백운고가도로를 타고 넘는다. 백운고가 오른쪽 도로는 독립로다.백운고가를 넘은 대남대로는 1970년대 광주 아파트의 상징이었던 신우아파트(대남대로 294번길 7)를 지나 화정동 수박밭에서 수박을 등에 지고 가다가 쉬어갔다는 유래를 담고 있는 수박등에서 이름을 따온 수박등로, 월드컵경기장으로 가는 금화로, 경열로와 이어지는 화정로와 만난다.또 이 길에서는 2007년 3월 23일 광주 최초 외국 공관인 주(駐)광주중국총영사관(대남대로 413번지), 시민들의 건강검진을 주로 담당하고 있는 광주건강관리협회(대남대로 432번지), 1936년 12월 조선상공회의소령에 의해 설립되어 현재는 지역 기업인들이 활동하고 있는 광주상공회의소(대남대로 465번지) 건물 등도 만날 수 있다.회재로에 비해 비교적 짧은 이 대남대로는 농성광장 앞에서 상무대로와 만나면서 4,610m의 8차선 도로의 이름을 내려놓는다.
    2020-02-20 | NO.16
  • 덕풍나루
    덕풍나루의 존재는 오횡묵의 『지도군총쇄록』에 등장한다. 덕풍진德豊津으로 일컫는 이곳은 1896년 전남관찰부에 업무 보고를 위해 광주를 방문하던 당시 지도군수 오횡묵이 지금의 나주시 노안면과 광주시 광산구 동곡동을 지나 이곳에서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 서창마을 쪽으로 향했다고 한다.『세종실록』에는 황룡강의 흐름을 전하면서 생압도가 영산강과 황룡강의 합류 지점 일대에 있는 것으로 묘사했다. 이는 현재의 광주공항 남쪽인 극락교에 해당하는데 덕풍나루가 있었던 곳을 말한다. 조선 후기에 덕풍나루라 불리기 전에는 생압도라고 불렀을 가능성도 있다.덕풍나루 자리에 해당하는 곳, 즉 광산구 동곡동에서 서구 서창마을 쪽을 잇는 지점에는 특별한 도강시설이 눈에 띄지 않는다. 영산강과 황룡강의 합류부 주변에 넓은 강변 저지대만을 만날 뿐이다. 다만 만귀정이 있는 곳이 동하마을이 형성되어 있어 만약 덕풍나루가 이 근방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과거에는 덕풍나루를 이용해 동곡동과 서창동이 바로 이어졌다. 현재 덕풍나루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4대강 사업으로 이 구간의 원래 지형이 바뀌어 인근 주민들조차 옛 나루터 자리를 가리켜 주기 곤란할 정도가 됐다.
    2018-05-28 | NO.15
  • 덕흥나루
    덕흥나루는 광주광역시 서구 유덕동 덕흥마을에 있었다. 덕흥마을이 들어선 언덕은 전형적인 도상구릉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주변 지역의 암석이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대부분 풍화침식으로 들이 되었음에도 이곳만은 그것을 견뎌내고 여전히 언덕 형태로 남아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영락없이 산처럼 보이기에 사람들이 아예 ‘덕산’이라 불렀다.나루터는 덕산이 영산강과 접하는 벼랑 아래에 있었다. 지금의 덕호재와 덕흥대교가 있는 근방이다. 이곳 강변은 1970년대까지도 드넓은 백사장이 일품이라 광주지역 학생들이 소풍 장소로 애용됐다. 당시 광주에서 학교를 다녔던 많은 사람들이 한번쯤은 소풍을 다녀온 장소로 이곳 나루터를 기억하고 있다. 이 나루터가 정확히 언제부터 운영을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주민들이 생생하게 기억하는 나루터의 모습은 대략 1960~1970년대이다. 그리고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덕흥나루는 좀 더 현실적인 이유에서 운영됐다.나루는 덕흥마을에서 강 너머에 있는 농토에 일을 하러 오갈 때 주로 이용했다. 그 외에 틈틈이 건너편 극락강역을 오고갈 때도 이용했다. 주 이용자가 덕흥마을 주민들이었던 탓에 나루의 운영규모는 크지 않았다.당시 나룻배는 강 양안에 밧줄을 걸어 놓고 뱃사공이 이 줄을 잡아당겨 나룻배를 움직이게 하는 세칭 ‘줄나루’였다. 배는 목선이었으며 승선인원은 대략 10~20명 안팎이었다. 덕흥나루는 1970년대 중반까지 근근이 운영되다가 중단됐다.
    2018-05-28 | NO.14
  • 무진대로
    무진대로는 서구 농성동 광천1교에서 광산구 운수동 운수 IC까지 이어지는 9,270미터 길이의 도로다. 무진대로 구간 중 광주 시청 가까이의 무진교에서 신세계 백화점 앞 광천사거리까지는 16차선 도로로, 전국에서 가장 넓다. 무진대로변은 광주종합버스터미날이 있고 광주여대를 지나 무안 광주고속도로와 연결되고 있어 교통의 요충지이다.도로명 ‘무진’은 광주광역시의 옛 이름 ‘무진주’에서 취해 붙인 이름이다. 백제시대 처음 광주는 무진주로 불리었고, 이후 신라시대에는 무주라 불렸다. 오늘의 이름인 광주는 고려 태조 23년(940)에 처음으로 불리게 된다. 광주가 백제 시대 무진주로 불렸음을 알려주는 것이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조의 “(二十年)八月王以耽羅不修貢賦親征至武珍州耽羅聞之遣使乞罪乃止”라는 구절이다. “동성왕 28년(498) 탐라(국)이 공납을 바치지 않자, 왕(동성왕)이 친히 정벌하여 무진주武珍州에 이르렀다. 탐라가 이를 듣고 사신을 파견하여 죄를 비니 이내 멈추었다”는 내용이다.무등산을 무진악武珍岳이라고 불렀거나, 광주의 한 청각장애인 학교에서 벌어졌던 성폭력 사건을 다룬 공지영 작가의 소설 ‘도가니’에서 무진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는 것도 광주의 옛 명칭 무진에서 따온 것이다. 무진주의 ‘무’는 물둑의 의미이고, ‘진’은 들/벌판의 의미를 가진다. 한자어의 뜻 보다는 우리말의 발음과 뜻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무진의 원래 발음은 ‘물들’에 가까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물들은 ‘물이 많은 들판’을 뜻하기 때문에 광주천 주변 일대가 늪지대였을 가능성이 높다. 무진대로를 따라가 보자. 광주천변의 광천1교에서 출발하여 광천사거리에 이르면서 무진로는 대로가 된다. 그리고 신세계 백화점, U스퀘어 광주버스터미널, 기아자동차 공장 등을 차례로 만난다. 기아 자동차 공장을 지나면 주공2단지 아파트 등을 지나게 되고 버들교와 광주천을 통과하면 드넓은 평야가 전개된다. 유덕 IC를 지나면 곧바로 극락강을 가로지르는 어등대교가 나오는데, 여기서부터가 광산구다. 유니버시아드 수영장이 있었던 광주여대를 지나 무안 광주고속도로와 연결되면서 무진대로는 끝이 난다.무진대로의 최대 인기 장소는 무진대로 940번지에 위치한 U스퀘어 광주버스터미널이다. 영화관, 서점, 갤러리, 레스토랑, 카페 등이 밀집해 있어 젊은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도 적격이다. 또한 터미널 앞 광장에서는 공연도 자주 열려 문화놀이 공간의 역할도 하고 있다.16차선이나 되는 무진대로, 그러나 출퇴근 시간의 러시아워는 피할 순 없다. 최근까지 우미아파트에서 기아자동차 방면 3개 차로를 막고 저지대 상습 침수지역의 피해를 예방하기 위한 공사가 진행되어 교통대란이 발생하기도 했다.광주의 도로명 중 광주의 옛 이름인 ‘무진대로’와 현재 이름인 광주의 애칭 ‘빛고을’을 사용한 ‘빛고을대로’는 어떤 도로명보다 광주의 정체성을 담고 있는 도로가 아닐 수 없다.
    2018-05-28 | NO.13
  • 벽진나루
    『세종실록』에는 광주의 나루터로 북구 용두동의 거진巨津과 함께 서구의 벽진碧津을 이야기한다. 벽진나루가 『세종실록』151권 지리지 편에 광주 옛 무진군을 설명하는 내용 중에 무등산은 진산이며 벽진도와 거진도가 있다고 했다.군의 서쪽에 있는 벽진나루는 영산강을 기준으로 그 동쪽에 위치한 광주 관아와 그 서쪽의 전라병영을 연결하는 기능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전략적인 중요성 때문에 세종실록지리지에 언급됐던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현재의 극락교 아래에 벽진나루가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벽진나루는 생압도生鴨渡 또는 생압진生鴨津으로도 불렀을 가능성이 있다. 『광주읍지』를 보면 벽진과 생압도는 거의 같은 위치에 있는 것으로 묘사됐고 하나의 나루터를 다르게 불렀을 가능성마저 있다. 벽진과 다리 생압도의 위치에 대해서는 약간의 이견이 있다. 이견은 크게 두 가지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황룡강의 유로를 설명하면서 옛 내상성 남쪽을 거쳐 생압도에서 영산강과 합류한다고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장성에서 흘러든 황룡강이 광주에 이르러 생압진으로 유입한다고 했다. 이 기록으로 보면 생압진은 황룡강가, 광주와 장성 경계선의 어느 지점으로 해석된다. 19세기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생압도가 지금의 장성군과 광주광역시 경계를 지난 어느 지점에 있는 나루터로 묘사했다. 대동여지도가 묘사한 생압도의 위치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것을 따른 결과로 보인다. 그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잘못 해석했을 가능성이 있다. 대동여지도와 달리 대다수의 기록들은 오히려 벽진과 생압진이 거의 같은 지점에 있었고 그 위치를 광주 관아로부터 서쪽 20리 혹은 30리에 있다고 했다. 황룡강가의 나루로 보기에는 거리상 큰 차이가 있다. 이 나루와 똑같은 이름의 동네가 지금까지 사월산 주변에 있다.이런 의견들에도 불구하고 생압도는 영산강 본류 구간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16세기 서구 매월동 전평제를 만든 만든 회재 박광옥의 시를 근거로 들 수 있다. 박광옥은 풍영정의 건립자인 김언거와 교분이 두터웠다. 둘의 관계를 언급하며 “생압진과 칠수가 잘 통했으며 좋겠다.”는 시 구절을 남기기도 했다. “다정했던 옛 친구들을 풍영정에서 만난다는 기쁨이 커서일까 / 생압진에서 칠계로 가는 길이 멀게만 느껴지네.” 이 시에서 생압진은 박광옥 자신을, 칠계는 풍영정 일대에서 영산강을 부르던 이름인데 이는 동시에 김언거를 빗대어 표현한 것이기도 했다. 어떻든 이 시는 벽진의 또 다른 이름이 생압진이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생압진은 생압도와 같은 말이고 칠수는 칠계의 별칭이다. 이 시는 평소 나룻배를 통해 생압도와 풍영정 나루를 오가던 박광옥이 부득이 한 사정으로 풍영정에서 열리던 모임에 불참한 일을 두고 애석해 하며 쓴 것이었다. 어떻든 생압도가 영산강변, 특히 벽진동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라 할 수 있다.생압진이 벽진동에 있던 나루터였을 가능성은 다른 기록에서도 보인다. 『광주읍지』(1879)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생압교生鴨橋는 광주 관아로부터 20리, 당부면當夫面에 있다.” 여기서 생압진을 생압교라 한 것은 조선시대에 나룻목의 수심이 낮아지면 다리를 놓는 관행에 맞춰 나룻목이 다릿목으로 바뀐 데서 비롯된 것이다. 무엇보다 당부면은 지금의 벽진동을 비롯한 마륵 금호 풍암 매월동을 포함한 옛 지명이었다. 생압진이 벽진동에 있었을 가능성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말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생압진은 조선시대에도 왕왕 장압진이나 장애비, 혹은 장암으로 발음되곤 했다. 또한 이 일대를 ‘장애비’ 또는 ‘장암’ 등으로 부르는 관행이 있고 지금도 일부 사람들은 극락교를 ‘장압교’ 또는 ‘장애비다리’라고 부른다. 이런 지명은 옛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된 19세기에 작성된 비변사인 방안지도에는 생압진을 장압도莊鴨渡로 표기하고 있다. 생압진, 장압도, 장애비는 같은 곳을 지칭했고 이는 지금의 벽진동 일대에 포함되는 곳이다. 이런 대목이 있다. “장압진은 술방(북서쪽) 20리에 있는 당부면에 있다.” 당부면은 지금의 벽진동, 마륵동, 금호동, 풍암동을 아우르던 조선시대의 행정구역이었다. 조선 후기 사람들이 생압도를 벽진동에 있는 나루로 여겼다는 또 다른 근거이다.마지막으로 벽진과 생압진이 거의 동일한 나루였음을 방증하는 자료가 있다. 사월산 근처 상촌마을은 옛날 역촌이었단 말이 구전으로 남아 있다. 상촌마을은 사월산의 동쪽, 즉 공군화약고와 인접한 마을이다. *위성지도로 본 사월산『세종실록』지리지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전라병영이 광주에 있었던 “예전에 진원역鎭原驛이 있었다. 태종 17년에 내상을 강진에 옮길 때 아울러 옮겼다.” 또 같은 책의 강진군 내용을 보면 “진원역은 본래 광주의 내상 북쪽에 있었는데 태종 17년에 내상을 도강현, 즉 강진으로 옮기면서 따라 이설했다.”고 적고 있다. 전라병영이 강진으로 이설되면서 역촌도 덩달아 따라 갔다는 얘기다. 한때 벽진이란 나루, 통신과 연락을 위한 기관인 역촌, 그리고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새였던 전라병영이 한 세트를 이루며 이 일대에 있었다는 뜻이다. 생압도의 역사가 사람들의 기억에서 희미해지고 지금처럼 오직 다리가 놓인 곳으로만 기억된 것은 20세기가 되면서부터였다. 1910년대 철도역을 근간으로 송정리가 광주의 관문으로 부상하면서 송정리와 광주 시내를 잇는 신작로가 놓였는데 이 때 어지간한 홍수에는 쉽게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을 만큼 튼튼한 다리가 가설됐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나루터의 오랜 전통은 사라졌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은 나루터가 아니라 그 기억을 딛고 선 다리인 극락교 뿐이다. 처음 이곳에 극락교의 전신이라 할 다리, 즉 차량이 통과할 만큼 큰 다리가 생긴 시기는 정확히 짚어 말하기 어렵다. 송정역이 영업을 시작한 1913년에 맞춰 광주~송정리 간 영업용 승용차가 처음 통행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대략 그 무렵부터 차량통행이 시작된 듯하다.
    2018-05-28 | NO.12
  • 상무대로
    상무대로는 북구와 서구의 경계선부터 광산구까지 이어지는 12.8km의 도로다. 북구 임동 오거리부터 시작해서 서구 양동교를 지나 광산구 송정1교 삼거리까지 쭉 이어지는 길이다. 상무대로에 위치한 양동교를 지나면 벚꽃이 만발한 봄이 되면 노점상과 차량으로 가득 차는 상록회관 거리가 나온다. 상록회관 일대는 광주시민들이 벚꽃 구경을 하기 위해 가깝게 찾는 곳이기도 하다. 광주시립미술관 상록전시관이 이곳에 위치해 서구에서 오래된 갤러리로써 유일하게 볼만할 전시회가 열리는 장소기도 하다. 상록도서관도 있다.상무대로의 지하로는 지하철 1호선이 다닌다. 농성역부터 시작해 화정역, 쌍촌역, 운천역, 상무역, 김대중컨벤션역(마륵역), 공항역, 송정공원역, 송정역, 도산역까지 길을 함께 한다. 상록회관을 따라 화정역으로 향하는 길에는 서부시장, 불고기 거리가 있다. 화정역을 지나 쌍촌역, 운천역에 다다르면 광주의 주요 중심지, 상권인 상무지구 입구가 나온다. 상무대로라는 명칭은 육군의 최대 군사교육 시설인 상무대가 있었던 위치에 있기 때문에 이름이 붙여졌다. 상무대는 이승만 대통령이 ‘무(武)를 숭상하는 배움의 터전’이라는 뜻으로 1952년 설립됐다.상무대는 지난 1994년 장성으로 옮겨졌다. 상무대는 장성으로 옮겨짐에 따라 도시개발로 아파트와 상업시설이 생기고, 시청까지 옮겨지게 되면서 광주의 중심 시가지인 상무지구가 형성됐다. 상무지구에 위치한 5.18자유공원을 찾는다면 80년대 옛 상무대 모습을 그대로 복원해 놓은 전시관과 건물을 살펴볼 수 있고, 5.18민주화운동 당시의 참담함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상무대로를 지나는 길목에 운천역을 지나 상무역을 가기 전에 상무대 옛터 사적비를 볼 수 있다. 실제로 상무대가 위치했던 곳은 사적비가 세워진 위치보다 차로 이동해야 할 정도로 훨씬 떨어져 있어 도대체 왜 이곳에 세웠나 의문이 들었다. 다시 사적비와 5.18자유공원을 뒤로한 채 상무대로로 운전대를 잡았다.상무역을 지나면 김대중컨벤션센터역이 있으며, 이곳을 지나면 광산구 지역이 나온다. 광산구에는 광주공항과 최근 약 1시간 30~40분대로 빨라진 호남선 KTX가 정차하는 광주송정역이 있다. 광주공항과 광주송정역은 모두 상무대로에 위치해있다.광주송정역을 지나 상무대로는 도산까지 이어져 황룡강이 흐르는 송정1교 삼거리에서 끝난다.
    2018-05-28 | NO.11
  • 서창나루
    서구 서창동 603-2 일대서창나루는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에 있었다. 현재 서창교라는 교량이 있었던 일대이다. 조선시대의 기록에 극락진이라 했던 나루가 바로 서창나루를 말한다.극락진은 현재 광주~송정리를 잇는 도로인 광송도로가 지나는‘극락교’라는 다리 때문에 극락교 자리에 극락진이 있었을 것이란 혼동을 일으킨다. 극락교에 있던 나루는 옛 문헌에서 벽진 또는 생압도로 소개된 나루를 의미하며 정작 극락진은 현재 서창교 일대에 있었던 나루였던 것이 명백하다. 극락진이란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이 일대에 극락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극락원은 그 명칭에서 불교와의 관련성을 짙게 풍긴다. 이는 초기 원의 기능이 불교도들의 순례와 관련이 깊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낳게 한다.극락원은 이후에도 이 일대의 지명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우선 이 일대 사람들은 영산강을 극락강이라고 불러왔다. 극락강 위를 가로지르는 교량 중 하나를 지금도 극락교라고 부르며 강변에 있는 철도정거장 역시 극락강역이라 한다. 이곳에는 광주 관아에서 운영하는 세곡보관창고인 서창西倉도 있었다. 조선 초 광주는 세곡의 중간집하장인 나주의 영산창까지 세곡을 운송했다. 그 출항지가 바로 지금의 서창동 산4번지 서창이었다. 말 그대로 광주의 서쪽에 있는 창고, 그 창고를 끼고 번창하던 포구 마을이었다. 창고가 있던 언덕을 주민들은‘창등’이라 부른다. 세 뜸으로 이루어진 서창마을 중 이곳만을 지칭할때‘창촌’이라 했던 것도 같은 이유다. 본래 극락진이라 했던 이곳이 점차 서창나루로 알려지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서창이 이곳에 설치된 것은 조운에 유리한 조건, 즉 영산강과 이웃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창고가 강변에 있는 점, 나주와 서창나루 사이에 배가 왕래했을 것을 암시하는 기록 등이 있다. 서창나루가 나주와 물길로 연결되었음을 보여주는 보다 명확한 기록도 있다. 1555년 노수신盧守愼이 극락진에 당도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노수신이 을묘왜변을 피해 광주 땅을 밟은 자리인 극락진은 곧 서창나루였다. 16세기에 중간 집하장이 영산창에서 영광의 법성포로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서창은 세곡을 갈무리하는 포구로서 여전히 중요했다. 당연히 이곳의 창고지기인 서창색西倉色도 가욋돈을 벌 수 있는 `목 좋은 자리’로 통했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의 『목민심서』(1818)의 일표이서에 보면 경오년에 김종인金宗仁이 서창색을 맡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 때의 색은 지금 행정 관청의 과 또는 계와 같은 것이다. 서창색의 채용 때는 늘 뒷거래가 많았는데, 고종 11년(1874) 광주를 다녀간 암행어사 여규익呂奎益이 낸 서계書啓를 보면 당시 서창색西倉色의 자릿값이 200냥이나 됐다고 한다. 이만한 거금을 내고서라도 서로 욕심을 내던, 꽤 쏠쏠한 직책이었던 셈이다. 그만큼 서창이 번창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서창나루가 영산강 하류지역과 뱃길을 연결하는 포구였다는 적극적인 증거는 많지 않다. 대체로 현존하는 기록이나 구전은 서창이 나루터였음을 더 보여준다. 서창엔 세곡이나 물건들만 모여드는 곳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발길도 붐볐다. 이곳에 광주와 나주를 오가는 사람들이 애용하는 나루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곳 나루는 나주 북문거리(현재의 나주시 노안면과 광산구 평동 일대)와 광주 서문거리의 사람들에게는 매우 중요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나루를 이용했던 탓에 배로는 그들을 다 실어 나르기 어려웠다. 또 강물이 줄어드는 가을이나 겨울철에는 아예 배 젓는 일 자체가 여의치 않았다. 그 때문에 이곳엔 다리가 놓였다. 물론 지금의 서창교처럼 시멘트를 부어 만든 짱짱한 다리는 아니었다. 다리는 강물이 줄어든 시기에 섶나무와 흙으로 얼기설기 이어 만들어 마치 제비집 같았다. 그래서 계절이 바뀔 때마다 뜯고 다시 짓기를 되풀이했다. 물과 뭍이 만나고 사람들이 뒤엉키는 포구라면 어김없이 시장이 서는 법일까. 이곳에도 예전엔 꽤 큰 장이 섰다. 『동국문헌비고』(1770년)에는 서창장의 장날이 5일과 10일이라고 했다. 그 때만 해도 광주 읍내 사람들이 소금이나 어물을 사려면 대개 이곳에 와서 장을 봤다. 영산강은 수심 등으로 인해 배의 종류나 크기에 따라 최종적으로 접안할 수 있는 종점, 즉 가항종점은 차이가 있었다. 20세기 초엽을 기준으로 소형 증기선이나 석유발동선은 대체로 영산포까지 소강했다. 대개 선체의 중량만 20~30톤에 달하는 이들 동력선은 빈 배인 경우라도 홀수(배가 물에 잠기는 깊이)가 깊어 일정한 수심 이하로는 항해와 접안이 곤란했다. 반면에 먼 바다를 오갈 정도의 비교적 큰 범선(외양범선)이나 전래의 우리 배(한선)는 영산포에서 1.5km 북쪽인 노향포까지는 그럭저럭 올라왔다. 특히 전래의 한선은 뱃바닥이 평평해 수십이 얕은 곳도 무난히 출입할 수 있었다. 아무리 선체 구조가 수심이 얕은 지형에 적합하도록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배 자체의 중량 때문에 수심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이처럼 우리가 큰 배라고 부를 만한 기준 아래의 거룻배나 뗏목만이 좀 더 내륙까지 출입이 가능했는데 그 최종 지점이 이곳 광주의 서창나루였다.서창은 20세기에 들면서 급격히 쇠락했다. 철도나 도로교통이 발달하고, 강물이 줄고 장마철이 아니면 강바닥이 거의 훤히 드러나 보이는 건천화乾川化 현상 등 자연환경의 변화가 그 몰락을 재촉했다.
    2018-05-28 | NO.10
  • 월드컵 4강로
    월드컵 4강로는 무진대로와 맞닿는 기아자동차 공장 서문에서 시작, 염주종합체육관 앞까지 2.9킬로미터의 도로다. 대한민국이 동아시아에 당당하게 존재하고 있는 나라, 올림픽까지도 유치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나라임을 보여 준 사건은 서울에서 개최된 ‘88올림픽’이었다. 식전 행사가 시작되고 굴렁쇠를 굴리는 초등학생에 이어 등장한 것은 남도인들의 기개를 한껏 뽐낸 남구 칠석동 고싸움이었다. 전 세계인들의 찬사를 받았던 칠석동 고싸움은 광주만이 아닌 대한민국의 힘을 전 세계에 보여주었다. 88올림픽이 한국의 존재를 전 세계에 과시한 사건이었다면, 2002년 한.일 월드컵은 한국이 여러 분야에서 세계 4강의 강국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전 세계인에게 보여준 놀라운 사건이었다. 2002년 6월 22일, 광주 월드컵 경기장에서 유럽의 전통 강호인 스페인과 8강전이 치러졌다. 연장 30분을 포함하여 120분의 혈투를 벌였지만, 양팀은 득점 없이 끝나고, 승부차기가 이어졌다. 한국은 황선홍, 박지성, 설기현, 안정환, 홍명보가 키커로 나섰고, 이운재 골키퍼가 골문을 지켰다. 스페인의 4번 키커의 공을 이운재 골기퍼가 막아내자, 월드컵 경기장은 엄청난 함성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전 세계 축구팬들이 주시하는 가운데 한국의 마지막 키커인 홍명보의 발을 떠난 공이 골망을 흔들었다. 한국이 스페인을 누르고 4강 신화를 이룬 극적인 순간이었다. 4강행이 확정된 순간 대한민국은 한동안 엄청난 함성에 파 묻혔다. 그 극적인 순간을 만들어 낸 곳이 바로 광주 월드컵 경기장이었다. 월드컵 4강로는 이를 기념하고 기리기 위해 이름 붙인 도로명이다. 히딩크 대표팀 감독과 태극 전사들이 묵었던 히딩크 호텔 입구에는 출전 선수의 친필 사인이 들어간 ‘2002 한.일 월드컵 4강 기념비’도 세워진다.월드컵 4강로를 따라가 보자. 기아자동차공장 서문을 지나면 광주 지하철도 1호선이 지나는 쌍촌역이다. 쌍촌역을 지나면 가파른 언덕을 넘어야 하는데, 오른쪽이 광주 카톨릭대교구청이다. 고개를 넘자마자 염주동 성당을 만나는데, 건너편이 화정초등학교와 최근 이전해 온 광주여고다. 쌍학로, 화정로와 만나는 사거리를 지나 염화로와 만나는 염주사거리를 지나면 염주 주공아파트와 현대아파트가 나오고, 금화로와 만나면서 끝이 난다. 금화로 주변에 염주종합체육관과 광주월드컵 경기장이 위치하고 있다.월드컵 4강로에서 염주사거리는 가장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장소 중 하나다. 한때 염주사거리 뒤 먹자골목은 밤새 불이 커질 줄 모를 정도로 사람들이 붐볐다.월드컵 4강로는 이름 자체만으로도 ‘오 필승 코리아’가 귓전을 때리면서 어깨를 들썩이게 하고, 새로운 4강의 꿈을 꾸게 하는 도로이다.
    2018-05-28 | NO.9
  • 죽봉대로
    죽봉대로는 대남로와 만나는 농성광장에서 시작하여 광천 4거리, 광천 제2교를 지나 동운고가도로까지 1,950m의 대로로, 한말 어등산에서 순국한 의병장 죽봉 김태원(1870~1908)을 기리는 도로명이다.죽봉로를 따라가 보자. 죽봉대로가 시작되는 농성역을 조금 지나면 왼쪽에 현대자동차 서광주정비소가 있고, 오른쪽에는 라페스타 예식장, 기아자동자 서비스센터가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사거리에는 교원공제회관, 공무원 연금공단이 있고, 사거리 왼편으로 쇼핑센터인 금호월드가 있다.신세계 백화점이 있는 사거리는 광주 교통의 요충지다. 가까이에 광주종합버스터미널이 위치하고 있어 광주를 들고 나는 사람들로 늘 붐비는 광주의 관문이기 때문이다. 이곳 사거리를 끼고 신세계백화점이 있고, 맞은편 3곳에는 각종 병원들이 밀집되어 있다. 특히 라식(근시, 원시, 난시 등의 시력 장애를 치료하는 굴절 수술 )과 라섹(굴절 교정 각막 절제술)을 잘한다는 병원이 모두 이곳에 몰려 있다. 그러나 어느 곳을 둘러봐도 도로의 주인공 죽봉 김태원의 호나 이름을 딴 상가는 한 군데도 없다.광천 제2교를 지나면 만나는 운암고가도로에서 끝이 난다. 운암고가도로 가까이에 기아 타이거즈 경기장인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도 있다. 그리고 이곳을 넘어가면 운암동이 나오고 광주시립미술관, 광주비엔날레, 광주시립민속박물관, 광주박물관 등 문화지구와 만나게 된다.죽봉로가 시작되는 농성광장에는 두 눈 부릅뜬 도로명의 주인공 김태원 의병장의 동상이 그가 순국한 어등산을 바라보며 서 있다.나주 시민공원에는 김태원 의병장이 죽기 두 달 전인 1908년 2월, 아우 김율에게 써 준 시가 새겨진 시비가 있다. “국가 안위가 경각에 달렸거늘 의기남아가 어찌 앉아 죽기를 기다리겠는가? 온 힘을 쏟아 충성을 다하는 것이 의에 마땅한 일이니 백성을 건지려는 뜻일 뿐 명예를 위하는 것은 아니라네. 전쟁은 죽으려는 것, 기꺼이 웃음을 머금고 지하에 가는 것이 옳으리라. 무신(1908)년 2월 19일 형 준이 쓰다.”
    2018-05-28 | NO.8
  • 지명총람의 다리
    한국지명총람은 1970년대에 전국적으로 조사된 땅이름으로 1986년에 발간되었다. 여기에 수록된 다리는 지명으로 남은 다리이다. 위치만 기록되어 있고 구조와 실물의 형태는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더 많다. 여기에 기록된 순수한 우리말로 되어 있는 이름의 다리는 역사가 아주 오래된 것으로, 큰 다리보다는 징검다리나 나무다리 등이 많이 있었다. 이 다리들은 옛 모습은 아니지만 현재 크고 작은 다리로 현대화되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중 서구에 해당하는 이렇다.광천-교光川橋 : 광주시-서구-광천동-→광천다리. 광천 앞에 있는 다리.극락-교 : 광주시-서구-마륵동-마륵 서남쪽에 있는 다리. 송정읍과 경계가 됨.금정-교金亭橋 : 광주시-서구-풍암동-쇠정이 앞에 있는 다리.유촌-교柳村橋 : 광주시-서구-유촌동-유촌 동쪽에 있는 다리. 광주천에 놓였음.자우라진-다리 : 광주시-서구-마륵동-마륵 남쪽에 있는 다리. 한쪽으로 자우라졌음(기울어졌음).제비-다리 : 광주시-서구-덕흥동-덕흥 서북쪽에 있던 흙다리. 제비집처럼 생겼다 함.조푼골-다리 : 광주시-서구-마륵동-조푼골에 있는 다리. 초분등 아래쪽이 됨.차독-다리 : 광주시-서구-유촌동-계수 서쪽에 있던 다리. 차돌로 놓았었음  금정교금정교金亭橋는 운리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던 쇠정釗亭마을에 있었던 다리로 쇠정다리라고도 한다. 풍암제(일명 신암방죽)와 운리마을 등 각기 두 방향에서 내려온 개천들이 만나 서창천西倉川을 이루는데, 금정교는 두 개천의 합류지점 아래에 있었다. 지금의 풍암마재우체국 앞 네거리에 해당된다. 본래는 통나무로 다리 몸체를 짜고 그 위에 섶나무를 덮고 흙으로 다져 만든 흙다리였는데, 해방 후에 콘크리트 다리로 바뀌었다고 한다. 지금은 그 위로 회재로와 송암로가 지나가 땅에 묻혀 다리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쇠정은 예로부터 서창과 광주 시내를 잇는 길목이었고, 인근 운리 마을의 들머리에 해당되어 사람들의 통행이 많았다. 한편, 金亭橋라는 한자표기는 쇠정교釗亭橋라 써야 옮은 것으로 보인다. 쇠정은 흔히 ‘쇠정이’, ‘시쟁이’ 등으로 불렀는데, 간혹 사람들은 쇠정을 금정의 잘못된 표기로 여기는 경우가 있었다. 금정교도 쇠정에 있는 다리를 한자로 잘못 표기한 결과로 보인다. 자우라진 다리마륵마을 남쪽에 있었다고 하는 다리. 한쪽으로 기울어진 모습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기우러진 것을 우리 지역 방언으로 ‘자우라졌다’고 하기 때문이다. 마륵동 일대가 개발되면서 이 다리를 기억하는 사람을 찾을 수 없어 그 위치를 확인할 수 없다.  제비다리 덕흥동 서북쪽에 있던 흙다리였다고 한다. 다리의 생김새가 제비집같이 생겼다고 하여 이런 이름이 붙은 것 같다. 흙다리는 나무를 베어 교각橋脚을 세우고 그 위에 얼기설기 섶나무를 깔고 흙을 덮어 마치 제비집처럼 엉성하게 만든 것이라서 이렇게 불렀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런 다리를 토교土橋.학교鶴橋 또는 흙다리라고 했다. 광주에도 흙다리라고 부르는 곳이 많았는데 이를 구별하기 위해 이곳의 다리를 제비다리라고 불렀던 것 같다. 다리가 있었다고 하는 덕흥동 서북쪽은 극락강변을 말하는 것으로 과거 나루터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이 나루는 덕흥동과 유촌동 사람들이 강 건너 지금의 극락강역 주변에 농사일을 할 때 이용했다고 한다. 따라서 제비다리는 갈수기渴水期에 강물이 줄어 나룻배를 이용할 수 없었을 때 임시로 가설된 다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푼골 다리 마륵동 조푼골에 있었다고 하는 다리. 초분골 아래쪽에 있었다고 하는데, 이 다리의 위치에 대해 알려줄 제보자를 찾을 길이 없다. 마륵동 주변의 지형 또한 상무지구 개발로 크게 변해 지형을 보고도 그 위치를 추측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차독다리계수마을 서쪽에 있었던 다리. 차돌로 놓은 징검다리였다고 한다. 남구 봉선동에서 발원해 서구 계수마을 앞을 지나 현재 광주시청사 앞에서 광주천과 합류하는 극락천極樂川(극락강과는 다른 개천임) 아래쯤에 있었다.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2018-05-28 | NO.7
  • 청류교
    한 걸음이면 뛰어넘을 앙증맞은 다리가 있다. 서구 세하동 동하마을 입구에 있는 만귀정 옆길이다. 그냥 지나치면 잘 보이지 않는 다리이다. 청류교(淸流橋)이다. 언제쯤 세웠을까 다른 쪽 교각을 유심히 들여다보니 ‘무인앙춘 묵암가설(戊寅仰春 黙菴架設)’이라는 글씨가 휘갈겨 있다. 만귀정을 중건한 묵암 장안섭이 1938년에 만들었다는 다리이다. 벌써 80년 된 다리이다. 사진에서는 다리 왼편 위에 만귀정이 있다.
    2018-07-02 | NO.6
  • 탁영로
    탁영로는 조선시대 사림파(士林派)의 대표적 인물인 탁영 김일손의 호를 따서 명명된 도로다. 길이는 424m에 불과한 짧은 도로로 2009년 11월 광주광역시 북구청장이 고시했다.탁영의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 또는 소미산인(少微山人)이라 불린다. 탁영의 할아버지는 김극일(金克一)이고, 아버지는 집의(執義) 김맹(金孟)이며, 어머니는 이 씨이다. 대대로 경상북도 청도에서 살았다.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토평리에 가면 탁영종택이 있는데 경상북도의 기념물 제161호로 지정되어 있다.탁영로 이름은 생뚱맞다. 이유는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과 이 지역과의 연관성을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도로명을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탁영이 광주 출신도 아닌데다가 여기서 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탁영 김일손은 1486년(성종 17) 생원에 수석으로 합격하면서 관직에 나갔다. 처음 승문원에 들어가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로, 곧 정자(正字)로서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했다. 이후 진주의 교수(敎授)로 나갔다가 곧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가 운계정사(雲溪精舍)를 열고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다. 이 시기에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들어가 평생 사사하였으며, 정여창(鄭汝昌)·강혼(姜渾) 등과 깊이 교유하였다.탁영은 1498년(연산군 4) 유자광(柳子光)·이극돈(李克墩) 등 훈구파가 일으킨 무오사화에서 조의제문(弔義帝文)의 사초화(史草化) 및 소릉 복위 상소 등으로 인해 처형을 당했다.조의제문(弔義帝文)의 사초화(史草化)는 세조의 즉위 사실 자체와 그로 인해 배출된 공신의 존재 명분을 간접적으로 부정한 것으로써, 당시로서는 극히 모험적인 일이었다. 이 같은 일련의 일들이 사림파의 잠정적인 세력을 잃게 한 표면적인 원인으로 작동하기도 했다.그 뒤 중종반정으로 복관되고, 중종 때 직제학(直提學), 현종 때 도승지, 순조 때 이조판서로 각각 추증되었다.저서로는 『탁영집(濯纓集)』이 있으며, 「회로당기(會老堂記)」, 「속두류록(續頭流錄」 등 26편이 『속동문선(續東文選)』에 수록되어 있다. 자계서원(紫溪書院)과 도동서원(道東書院), 두암사(斗巖祠) 등에 제향되었다.두암동에 있는 장열사(壯烈祠) 옆에 두암사(斗巖祠)란 사우가 있다. 이곳에 김해김씨 후손인 김목경(金牧卿), 김일손(金馹孫), 김광립(金光立)의 삼위가 모셔져 있다. 탁영로 이름을 정할 때는 이 중 김일손의 호를 따 명명한 것으로 보인다.
    2020-04-04 | NO.5
  • 필문대로
    필문대로(篳門大路)는 필문 이선제를 기리기 위한 도로명이다. 1988년 광주광역시에 의해 지정되었다. 총 길이는 6349m,. 2009년 7월 27일, 광주광역시장이 고시했다.북구 풍향동 서방사거리와 동구 학동 남광주 교차로를 잇는 광주광역시의 도로이다. 이 도로와 죽봉대로, 서암대로, 대남대로 4개 도로를 합쳐 제1순환로라 지칭한다. 필문대로 시작점 가까이에는 광주교육대학교가 있다. 교육대 안에는 2014년 3월에 개관한 풍향문화관이 있다. 좀 더 걸어가면 무등산 옛길을 오를 수 있는 산수오거리가 나온다.이를 지나서 500여m 더 가면 법원과 농장다리로 갈 수 있는 지산사거리가 나온다. 농장다리는 1908년 전남여고 옆 동계천 건너편에 ‘광주감옥’이 들어서면서 그 별칭으로 불리기 시작했다.광주감옥의 죄수들은 1970년대 이전까지 교도소에서 운영하는 채소농장에서 노역하며 농장과 교도소를 오갔다고 한다. 그때부터 이곳은 농장과 연결되는 다리라는 의미에서 농장다리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이다. 이 길은 다시 오지호 화백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지호로 입구와 만나며 지호로를 따라 올라가면 보물 제110호인 광주지산동오층석탑(光州芝山洞五層石塔)을 볼 수 있다. 석탑에서 도보로 2분 거리에는 광주지방·고등검찰청과 광주지방·고등법원이 있다. 필문대로는 조선대학교 후문과 정문을 지나고. 조선대 정문은 학생들 사이에서 ‘드라군’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게임 ‘스타크래프트’의 ‘드라군’이라는 유닛과 닮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달려온 필문대로는 남광주역에서 끝이 난다. 남광주역 인근엔 널리 알려진 남광주시장을 비롯해 전남대학교 병원, 병무청 등도 만날 수 있다.
    2020-03-31 | NO.4
  • 광주광역시
  • 한국학호남진흥원
  • 사이버광주읍성
  • 광주서구청
  • 광주동구청
  • 광주남구청
  • 광주북구청
  • 광주광산구청
  • 전남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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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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