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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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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보육이 아비 이의저의 무고를 올리는 상소 - 영조 3년
    그동안 자신과 아비가 무함을 받았던 전말을 진달하고, 염치없이 직임에 나아갈 수 없으므로 삭직해 줄 것을 청하는 집의 이보욱의 상소 - 영조 3년 정미(1727) 9월 2일(을묘) 맑음. 묘시에 안개가 끼었다가 진시에 우이(右珥)가 있었음         집의 이보욱(李普昱)이 상소하기를,“삼가 아룁니다. 신은 지난날 망녕되이 많은 사람들의 노여움을 범하여 가장 심하게 음해를 받았으나 오히려 도배(島配)를 면하여 마침내 가볍게 찬배(竄配)에 그쳤던 것은 모두 우리 성상께서 곡진히 살려 주시고 잘 용서하시는 지극한 어짊과 후중한 은혜 덕분이었습니다. 때문에 적소에 있었던 3년 동안 남쪽을 바라보고 감축하지 않은 날이 없었는데 홀연 천만뜻밖에 석방하라는 명을 들었고 이어서 은지(恩旨)가 연이어 날아와 한 달 내에 세 번이나 청요직(淸要職)을 맡게 되었으니, 백 명에 가까운 유배된 사람을 두루 헤아려 보건대 신처럼 치우치게 은혜를 받은 자가 없습니다. 신이 비록 지극히 어리석지만 그래도 촌심(寸心)은 있는데 어찌 이러한 고금에 없는 은혜를 받고서 감격하여 스스로 면려하는 뜻을 더욱 생각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지금 궐문을 다시 들어와 성상 가까이에 있고 보니, 마치 굶주린 듯이 성상을 뵙고 싶었습니다. 그런데도 첫 번째 패초에 감히 명을 어기었고 두 번째 패초에도 감히 공경히 받들지 못하면서 여러 날이 되도록 계속 명을 어겼던 것은 진실로 만부득이한 정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신이 어찌 계속 잠자코 있으면서 스스로 아뢸 방도를 생각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대저 신이 옛날에 한 차례 계사를 올렸던 것은 대체로 이만성(李晩成)을 지레 먼저 참작하여 처분하였기 때문이었으니, 이것은 대각(臺閣)의 직임을 맡고 있으면서 옥사의 체례에 의거하여 논하였던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그가 중간에 옥에서 병들어 죽은 것과 신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도 ‘구살(構殺)’ 2자로 억지로 죄안을 만들어 반드시 사지(死地)에 몰아넣고서도 오히려 스스로 만족할 줄을 몰랐습니다. 아, 애통합니다. 저 사람은 유독 무슨 마음이었단 말입니까. 그러나 을사년(1725, 영조1) 이후 시비(是非)가 바뀌고 충역(忠逆)이 도치되어 전후로 토복(討復)을 청하였던 사람이 모조리 흉당(凶黨)으로 내몰렸으니, 신이 원찬(遠竄)을 당한 것도 진실로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니 어찌 감히 이것을 가지고 오늘날 경화(更化)를 맞이한 초기에 구구하게 스스로 인혐하겠습니까. 다만 신에게는 대단히 통분스러운 사적인 정리가 있으므로 이에 감히 외람됨을 피하지 않고 일일이 조목조목 아뢰니 성명께서는 불쌍히 여겨 살펴 주소서.신의 아비인 전 광주 목사(光州牧使) 이의저(李宜著)는 번갈아 가면서 참혹한 무함을 받았고 마침내는 도신(道臣)의 날조된 무함을 받고 의금부 옥에 갇힌 지가 어느덧 3년이 지났습니다. 대저 남에게 무함을 받는 경우가 예로부터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마는 신의 아비가 지난날 당한 것처럼 대단히 원통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억지로 날조한 것을 개괄해 보면 재결(災結)과 미석(米石) 두 가지 일에 불과합니다. 이른바 재결은 당초 재결을 인정해 줄 때에 별도로 쪽지를 작성하여 명백하게 배분한 상황은 비록 수령의 명에 순종하는 하리들의 마음으로도 또한 감히 속이지 못하여 일일이 분명하게 사장(査狀)에 기재되어 있습니다. 또 재결을 배분할 때 답인(踏印)한 문서를 이미 의금부에서 가져다 조사해 본 결과 끝내 차이가 없었으니, 맹랑하게 날조한 정상이 여기에서 남김없이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미석의 경우는 본디 월름(月廩)에서 남은 것인데 중기(重記)를 작성할 때에는 전보다 갑절이 되고도 오히려 남은 것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이웃 고을에 흘러 들어온 지친과 근처의 귀양 온 친구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그 수량도 수십 여 포(包)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이것은 인정상 그만둘 수 없는 것이었고 또한 공곡(公穀)을 멋대로 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신관(新官)이 된 자가 일일이 되돌려 받기를 마치 사채(私債)를 받는 것처럼 하였으니, 이는 다른 까닭이 아니라 단지 신이 당인(黨人)에게 가장 심하게 질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또 이익명(李益命)이 일찍이 광주(光州)에 유배를 왔을 때에 종을 풀어 교만하게 굴며 해괴한 행동을 한 것이 여러 가지였습니다. 신의 아비가 그 고을의 수령으로 어쩔 수 없이 조금 금지하여 억제하였는데 이래저래 원망을 하여 무한한 유감을 쌓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사우(祠宇)를 헐어 마구간을 지었다는 등의 맹랑한 설로 대관(臺官)을 사주하여 신의 아비를 탄핵하게 하였고, 교체되기를 도모하여 백방으로 하자를 찾았으나 끝내 한 가지 일도 죄로 걸 수 있는 것이 없자 도리어 터무니없이 무함하는 계책을 만들어 내어 이에 전결(田結) 일로 하리를 위협하여 못하는 짓이 없었습니다. 하리가 처음에는 차마 공공연히 무고를 할 수 없자 이익명이 자기의 뜻을 어긴 것을 화내어 가혹하게 부당한 형벌을 가하여 마침내 거짓 자복을 받아 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당시 감사인 김조택(金祖澤)의 편비(褊裨) 나상규(羅尙奎)라는 자에게 암암리에 부탁하여 반드시 영문(營門)으로 하여금 장계로 청하여 죄를 엮도록 하였는데, 당시 도신이 그 말을 곡진히 따라서 문서의 유무도 묻지 않고 위협을 받고 작성한 구초(口招)에만 의거하여 거짓으로 죄안을 만들어 하고 싶은 대로 하였습니다. 아, 통탄스럽습니다.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단 말입니까.의금부에서 조사를 진행하면서 최초로 능주 목사(綾州牧使)를 사관(査官)으로 정하였는데 목사 채성윤(蔡成胤)이 문서를 가져다가 엄명하게 조사하였습니다. 이익명이 그 서로 바꿔 가며 무함한 정상이 이에 탄로가 날까 두려워하여 관에 있는 상고할 만한 문서를 모조리 감추고서 강제로 하리로 하여금 구관(舊官)을 무함하는 글을 만들도록 하고 ‘성급입지(成給立旨)’ 4자로 스스로 제목을 붙인 뒤에 사관에게 증거로 바치게 하였는데, 사관이 ‘이는 신관이 와서 붙인 것이니 이것으로 구관에게 죄를 돌릴 수는 없다.’라고 하여 엄한 말로 물리쳤습니다. 그러자 이익명이 또 순영(巡營)에 청탁하여 이미 정해진 사관을 이유 없이 다른 고을로 옮기도록 하였습니다.그리고 이관하여 조사하기 위해 심문해야 할 각 사람들을 올려보낼 즈음에 미쳐서는 이익명이 그들이 말을 바꾸어 이실직고할 것을 염려하여 각 사람들의 부모와 처자를 형구를 채워 가두고서 감히 한 마디도 혹 어기지 말게 하였습니다. 그러니 저 각 사람들이 어찌 감히 이미 체차된 구관을 위하여 사생을 돌보지 않고 이실직고하여 현재 재임 중인 저 신관으로 하여금 터무니없이 사람을 무함한 죄과를 지은 자로 만들 수가 있겠습니까. 그 음험한 발상과 치밀한 계획은 온 세상 사람이 놀라고 한탄하면서 전하여 말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저 전후 의금부 당상도 어찌 들어서 알고 있지 않겠습니까.그러나 만일 공정하게 의처(議處)하고자 하면 이익명 무리에게 거스를까 두렵고, 그렇다고 만일 억지로 죄안을 만들려고 하면 원래 꾸며 댈 만한 내용이 없으므로 1년, 2년 하다가 3년에 이르도록 오로지 시일을 끄는 것만을 일삼았습니다. 심지어 재차 조사한 의계(議啓)에서는 ‘단지 그 문서만을 근거하여 곧바로 재결하여 처분한다면 도신이 장계로 보고한 것이 장차 실상을 어긴 죄과를 짓는 데 귀결됩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과연 그 말과 같다면 도신이 장계로 보고하면서 사리의 곡직과 문서의 유무를 따지지 않고 감히 어기지 못하였던 것이 과연 그 옥사를 처리하는 체통이 되겠습니까.또 재차 조사한 보고서가 올라온 것이 작년 8월이었는데 계속 덮어 두고서 끝내 거론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신이 작년 겨울에 연석에서 진달하여 속히 의처하라는 하교가 있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또 반년이 지나도록 끝내 봉행하지 않아 통탄스럽고 절박한 사사로운 마음을 하소연할 데가 없었습니다. 다행히 성상께서 연(輦)을 멈추고 소결(疏決)하여 풀어 주시는 천고에 드문 은전에 힘입어 옥문(獄門)을 나와 원통함이 쾌히 펴지게 되었습니다. 신 또한 은혜를 받아 북쪽에서 돌아오게 되어 부자가 서로 대면하여 성상의 은혜를 송축(頌祝)하면서 너무도 감격하여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그런데 홀연 이 즈음에 삼가 들으니, 유신(儒臣)이 신의 아비가 공북루(拱北樓)를 다시 세우는 일에 재결(災結)을 멋대로 사용하였다고 비난하고 심지어 ‘비록 공용(公用)이더라도 이미 적발된 뒤에는 징계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라고 하였는데 그 또한 심하였습니다. 대저 9결(結)은 문서를 마감한 뒤에 하리가 훔쳐서 숨겨 둔 것 중에서 찾아낸 것으로 귀속될 곳이 없었기 때문에 부득이 공역(公役)에 보태어 쓰게 된 것입니다. 그 실상에 대해서는 이미 신의 아비가 전일에 바친 원사(爰辭)에서 다 밝히었는데, 저 유신은 결수가 적은 것은 말하지 않고 멋대로 많이 쓴 것처럼 하였습니다. 9결을 공적으로 쓴 것이 이미 큰 문제가 아니었다면 지금 은택이 널리 베풀어진 뒤에 뒤미처 논박하는 것은 시기하고 배척하여 갖은 고초를 겪은 나머지 어찌 전혀 뜻밖의 일이 아니겠습니까.아, 지난날 원한을 산 집안에서 신을 원수처럼 미워함이 타인보다 치우치게 심하였던 것은 실로 신이 우둔한 자질로 삼사(三司)에 오래 있으면서 일을 만나면 격앙하여 회피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악독을 장차 풀기 위해 음모를 감추고는 앞에서 안세갑(安世甲)이 추악하고 패려궂은 설을 하고 뒤에서 이의천(李倚天)이 찬배(竄配)하기를 계청하여 수개월을 쟁론한 끝에 찬배되기에 이르렀는데, 이것도 오히려 부족하여 백방으로 무함하여 3년 동안 옥에 갇히는 화가 나이 칠십의 늙은 아비에게 미쳤습니다. 신은 멀리 2천 리 새외(塞外)에 있으면서 소식이 믿기 어려워 마음이 타들어가 밤낮으로 속을 썩여 잠자리와 먹는 것도 모두 잊었습니다. 그러나 살아서 돌아온 오늘날도 여전히 지극히 완고하니, 신이 만일 다시 영화로운 벼슬에 거처하여 더욱 뭇사람들의 유감을 산다면 이는 신의 불효하고 한심한 죄를 사람들에게 더욱 스스로 해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신이 어찌 감히 다시 벼슬을 할 생각을 하여 자정(自靖)하는 도리를 완전히 잊겠습니까.이것이 신의 구구한 사사로운 의리가 다른 사람과 다른 바인데, 은혜롭게 부르심에 감히 명을 어길 수 없어 삼가 궐문 밖에 달려 나와서 상소하고 절하여 지레 돌아가니, 신의 죄는 이에 이르러 만번 죽어도 속죄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신의 절박한 마음은 진실로 격고(擊鼓)하여 원통함을 호소해야 마땅하겠으나 대직(臺職)에 몸담고 있어 체통에 구애를 받아 하지 못하고 당돌하게 상소의 말미에 덧붙어 진달하니 더욱 죽을죄를 더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천지 부모와 같은 성상께서는 신의 위태로운 정리를 불쌍히 여기고 신의 간절한 말을 살피시어 속히 신의 직임을 삭직하여 뭇사람들의 노여움에 사례하고 사사로운 본분을 편안하게 해 주소서. 그렇게 된다면 이보다 다행함이 없겠습니다. 신은 두렵고 간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하니, 답하기를,“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아비를 위하여 변론한 것은 정리로 볼 때 진실로 당연한 것이기는 하나 변론할 즈음에 지난날의 흔단을 억지로 끌어다 써서 상대가 날조하고 무함하였다는 단서를 만든 것은 나는 옳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대는 사직하지 말고 속히 직임을 살피라.”하였다.[주-D001] 어찌 …… 받고서 : 원문은 ‘豈不知斯恩之之曠絶今古’인데, ‘之’ 1자는 연문으로 보아 번역하지 않았다.[주-D002] 계사 : 경종 2년 7월 14일 지평 이보욱(李普昱)은 이만성(李晩成)을 참작하여 처분한다는 소식을 듣고서 다시 국문(鞫問)하기를 청하였는데, 영조 1년 4월 이후 장령 이의천(李倚天)이 이보욱이 이만성을 구살(構殺)하였다는 죄목으로 계속해서 처분하기를 청하여 5월 11일에 결국 극변에 원찬하였다. 《承政院日記 景宗 2年 7月 14日》 《承政院日記 英祖 1年 5月 11日》[주-D003] 성상께서 …… 은전 : 이해 7월 27일 사직(社稷)에서 친히 기우제를 지내고 환궁하면서 혜정교(惠政橋)에 연(輦)을 멈추고 의금부의 경수(輕囚)를 소결하여 풀어 주는 조처를 하였는데, 이의저(李宜著)가 그 가운데에 포함되었다. 《承政院日記 英祖 3年 7月 27日》[주-D004] 유신(儒臣)이 …… 하였는데 : 이해 8월 1일 소대(召對)하는 자리에서 교리 이광덕(李匡德)이 이의저가 재결을 멋대로 사용한 죄를 징계하기를 청하였다. 《承政院日記 英祖 3年 8月 1日》
    2021-05-24 | NO.426
  • 조태기를 광주 목사로 삼다 - 영조 3년
    이비와 병비의 관원 현황과 계 및 관직 제수 내용 - 영조 3년 정미(1727) 8월 25일(무신) 맑음       정사가 있었다.이비(吏批)에, 판서 오명항(吳命恒)은 나왔고, 참판 정제두(鄭齊斗)는 지방에 있고, 참의 조문명(趙文命)은 패초에 나오지 않았고, 행 도승지 김동필은 나왔다.이비가 아뢰기를,“좌의정 조태억이 이미 체차되었으니 치처해야 할 바입니다만 본조(本曹)에는 상당하는 자리가 없으니 규례대로 송서(送西)하도록 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또 아뢰기를,“방금 동부(東部)의 첩정(牒呈)을 보니, ‘주부 이시휘(李時輝)가 신병이 매우 중하여 직임을 살필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개차(改差)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또 아뢰기를,“경상 좌도 경차관(慶尙左道敬差官) 이정응(李挺膺)의 정장(呈狀)에 ‘노모의 올해 나이가 칠십인데 이질 증세까지 겹쳐 현재 시름시름 앓고 있으니, 이런 정리로는 결코 천리 영외(嶺外)로 곁을 떠나 있을 수 없습니다. 속히 입계(入啓)하여 처치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부모의 병이 이와 같이 위중하니, 억지로 멀리 부임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조태기(趙泰耆)를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최창민(崔昌敏)을 능주 목사(綾州牧使)로, 윤혜교(尹惠敎)를 홍주 목사(洪州牧使)로, 민기(閔圻)를 남평 현감(南平縣監)으로, 조덕린(趙德鄰)을 사간으로, 강현(姜鋧)을 예문관 제학으로, 이세주(李世柱)를 서천 군수(舒川郡守)로, 이정빈(李廷彬)을 태안 군수(泰安郡守)로, 이경백(李景白)을 비인 현감(庇仁縣監)으로, 이두삼(李斗三)을 결성 현감(結城縣監)으로, 김익겸(金益謙)을 남포 현감(藍浦縣監)으로, 양성시(梁聖時)를 화순 현감(和順縣監)으로, 조상강(趙尙綱)을 임실 현감(任實縣監)으로, 유업기(兪業基)를 동복 현감(同福縣監)으로, 이한좌(李漢佐)를 창평 현령(昌平縣令)으로, 신벽(申璧)을 구례 현감(求禮縣監)으로, 이동필(李東弼)을 곡성 현감(谷城縣監)으로, 유득장(柳得章)을 예조 좌랑으로, 신치운(申致雲)을 부교리로, 임수적(任守迪)을 병조 좌랑으로, 이정수(李廷秀)를 동부 주부(東部主簿)로 삼았다. 이일서(李日瑞)를 학유(學諭)에 단부하였다. 연천 현감(漣川縣監) 권성징(權聖徵)과 과천 현감(果川縣監) 유우기(兪宇基)를 서로 바꾸었다.병비(兵批)에, 행 판서 심수현(沈壽賢)은 병이고, 참판 이익한(李翊漢)은 병이고, 참의 서명연(徐命淵)은 말미를 받아 지방에 있고, 참지 김계환(金啓煥)은 나왔고, 좌부승지 조최수는 나왔다.병비가 아뢰기를,“방금 수문장청(守門將廳)의 첩보(牒報)를 받아 보니, ‘수문장 최태항(崔太恒)이 본청(本廳)의 허참례(許參禮) 때에 가부(可否)를 묻는 절차에서 연이어 세 번 통과하지 못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최태항을 전례대로 태거(汰去)하고, 그의 천주(薦主)인 수문장 정진복(鄭震復) 또한 파직하여 잘못 천거한 죄를 징계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또 아뢰기를,“의정부 좌의정 조태억을 송서하도록 명을 내리셨습니다. 품계대로 치처해야 할 바입니다만 영중추부사 한 자리를 다른 대신이 현재 맡고 있으니, 전례대로 좌목(座目)에 따라 판중추부사에 하비(下批)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병비가 조태억을 판중추부사로 삼았다. 양정호(梁廷虎)ㆍ정필령(鄭必寧)을 부호군에, 이저(李著)를 부사직에, 성덕윤(成德潤)을 부사과에 단부하였다.
    2021-05-24 | NO.425
  • 재결을 멋대로 하지 못하도록 하다 - 영조 3년
    희정당(熙政堂)에서 소대를 행하는 자리에 참찬관 김상규(金尙奎) 등이 입시하여 《황명통기(皇明通紀)》를 진강하고, 충청 감사 조정만(趙正萬)을 패초하는 문제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 영조 3년 정미(1727) 8월 1일(갑신) 맑음        신시(申時)에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갔다. 소대(召對)를 행하러 신하들이 입시한 자리이다. 참찬관 김상규(金尙奎), 시독관 이광덕(李匡德), 검토관(檢討官) 윤광익(尹光益), 가주서 이재후(李載厚), 편수관 홍상빈(洪尙賓), 기주관 김성발(金聲發)이 입시하였다. 이광덕이 나아와 《황명통기(皇明通紀)》 제16권 하편(下編)의 ‘계해가정사십이년(癸亥嘉靖四十二年)’부터 일곱 판(板)까지를 읽었다.<중략>이광덕이 아뢰기를,“지난날 어가(御駕) 앞에서 죄수들을 소결(疏決)하여 풀어 주실 때 신은 뒤늦게 도착하여 미처 아뢰지 못한 것이 있어 지금에야 아룁니다. 전 광주 목사(光州牧使) 이의저(李宜著)는 유지(宥旨)가 내리기 전 일이라 하여 석방하였습니다. 재결(災結)을 멋대로 사용한 일을 두고 공북루(拱北樓)를 개수하는 역에 썼다고 말했다 하니, 개인적인 일에 사용한 잘못을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공무로 썼든 개인적으로 썼든 수령이 어찌 재결을 멋대로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대체로 요사이 수령이 재결을 사용하는 일은 이미 고질적인 폐단이 되었는데 그 근원을 따져 보면 꼭 고의적으로 탐욕을 부려서 그렇게 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감사나 도사는 수령이 갖가지 방법으로 숨겨서 누락하지나 않을까 하여 매번 철저하게 찾아내고, 수령은 상부의 관사에서 끝도 없이 더 내놓으라고 요구할 것을 염려하여 미리 더 남겨 두는 것입니다. 이렇게 저마다 대치하는 과정에서 수령이 세력이 있는 자일 경우는 상부의 관사에서 다 찾지 못하고 가기도 하는데, 이럴 경우 생긴 여결(餘結)이 마침내 개인적 용도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경우가 수도 없이 많으니 별도로 방비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의저의 경우는 비록 공무로 사용하였다고 말하지만 이미 탄로가 난 뒤이니 멋대로 쓴 죄를 처벌하지 않아서는 안 될 듯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재결을 멋대로 사용한 일은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없지만 이미 석방된 뒤인데 어찌 굳이 다시 논하겠는가.”하였다. 이광덕이 아뢰기를,“그렇다면 이후로 수령이 재결을 멋대로 사용한 일에 대해서는 각별히 처단하여 너그럽게 용서해 주지 않도록 거조에 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좋은 말을 하였다. 그리하라.”하였다. - 이 단락은 거조에 내었다. -<중략>[주-D001] 김성발이 …… 저질렀다 : 숙종의 이름은 이순(李焞)인데 정이순(鄭履淳)의 ‘淳’이 숙종의 이름과 글자는 달라도 소리가 같다. 여기서 김성발(金聲發)이 정이순의 이름을 그대로 다 읽었으므로 이런 내용이 있는 듯하다.[주-D002] 그대의 아비 : 이광덕(李匡德)의 아버지인 이진망(李眞望)을 가리킨다.[주-D003] 진면목을 …… 때문이네 : 산속에 살아서 산의 진면목을 모르듯이 이 나라에 살아서 나라의 절박한 문제점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소식(蘇軾)의 시 〈제서림벽(題西林壁)〉에 “옆으로 보면 잿마루요 비스듬히 보면 봉우리라, 원근과 고저에 따라 모습이 같지 않구나. 여산의 진면목을 알 수 없으니, 이 몸이 이 산 속에 있기 때문이로세.[橫看成嶺側成峯 遠近高低各不同 不識廬山眞面目 只緣身在此山中]” 하였다.[주-D004] 배 …… 있다 : 임금이 덕을 닦아야 백성의 마음을 얻고 나라가 지켜진다는 말이다. 전국 시대에 위 문후(魏文侯)가 오기(吳起)와 배를 타고 가면서 산하(山河)가 험고(險固)하다고 자랑을 하자, 오기가 “임금의 덕이 나라를 지켜 주는 것이지, 산하의 험고함이 지켜 주는 것이 아닙니다. 임금이 덕을 닦지 않는다면, 지금 배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도 모두 적국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라고 한 말에서 인용하였다. 《史記 卷65 吳起列傳》[주-D005] 바탕과 문채가 조화롭다 : 바탕과 문채 즉 내용과 형식이 어느 한곳으로 치우치지 않고 잘 조화되었다는 의미이다. 《논어》 〈옹야(雍也)〉에 “바탕이 문채보다 지나치면 촌스럽게 되고, 문채가 바탕보다 지나치면 겉치레에 흐르게 되나니, 문채와 바탕이 조화를 이룬 뒤에야 군자라고 할 수 있다.[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 文質彬彬然後君子]” 하였다.[주-D006] 황패(黃霸) : 《한서(漢書)》 권89 〈순리전(循吏傳)〉에 나오는 사람으로, 영천 태수(穎川太守)로 있으면서 백성들에게 선정을 많이 베풀어 치적이 천하제일로 뽑히기까지 했는데 태수를 거쳐 승상이 되었다.[주-D007] 융경황제(隆慶皇帝)가 …… 일 : 명나라 목종(穆宗)이 환관 풍보(馮保)에게 고명(顧命)을 맡긴 일을 말한다. 목종의 유지에 세 명의 각신(閣臣)은 사례감(司禮監)과 함께 보좌하고 인도하라고 되어 있는데, 세 명의 각신은 고공(高拱), 장거정(張居正), 고의(高儀)이고 사례감은 풍보이다. 이 일에 대해 《황명통기》에는 풍보가 목종의 유지(遺旨)를 위조하였다고 기재되어 있다. 《皇明通紀 卷17》 융경은 명나라 목종의 연호이다.[주-D008] 천한 환관으로 하여금 : 원문은 ‘至使刀餘之賤’인데, 문맥이 통하지 않아 ‘餘’를 ‘鋸’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주-D009] 정청(庭請)에 …… 일 : 이해 7월 1일에, 전후로 정청이나 청대(請對)에 참여했던 신하들은 모두 파직하라는 비망기가 내렸는데, 같은 날 입시에서 다시 그중 음관(蔭官)은 구별하라는 하교가 내렸다. 이 일로 조정만(趙正萬)은 현고(現告) 대상에 들지는 않았지만 정청에 참여한 이상 중벌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충청 감사의 직임에 그대로 있을 수 없다며 체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承政院日記 英祖 3年 7月 1日, 8日》 정청과 청대는 민진원(閔鎭遠)과 이관명(李觀命) 등이 백관을 거느리고서 정청하고 청대하여 유봉휘(柳鳳輝) 등 오적(五賊)을 토죄할 것을 청한 일을 말한다. 《承政院日記 英祖 1年 6月 23日, 7月 3日ㆍ4日》
    2021-05-24 | NO.424
  • 김일경의 상소로 김동칠이 광주 목사로 갔다 - 영조 3년
    희정당(熙政堂)에서 삼사가 청대한 자리에 좌승지 홍용조 등이 입시하여 이광좌(李光佐), 조태억(趙泰億) 등을 처벌하는 문제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 영조 3년 정미(1727) 6월 9일(갑오) 맑음        오시(午時)에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갔다. 삼사가 청대하여 인견한 자리이다. 좌승지 홍용조(洪龍祚), 가주서 정홍상(鄭弘祥), 기사관 송국경(宋國經)ㆍ신근(申????), 사간 신처수(申處洙), 장령 강일규(姜一珪), 지평 조정순(趙正純)ㆍ안상휘(安相徽), 교리 신로(申魯), 부교리 윤섭(尹涉)ㆍ조명택(趙明澤), 정언 송수형(宋秀衡)ㆍ정홍제(鄭弘濟), 수찬 조명익(趙明翼), 부수찬 이도원(李度遠)이 차례로 나아와서 엎드렸다. 신처수가 이광좌(李光佐)의 일, 조태억(趙泰億)의 일, 조태구(趙泰耈)의 일, 최석항(崔錫恒)의 일, 유봉휘(柳鳳輝)의 자식을 노비로 삼고 가산(家産)을 몰수하는 일로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속히 정지하고 번거롭게 하지 말라.”하였다. <중략>홍용조가 아뢰기를,“이도원이 아뢴 것이 옳습니다. 왕망(王莽)이나 동탁(董卓) 같은 대역적은 임금이 힘으로 주벌할 수가 없었지만 간혹 역심을 몰라서 끝내 주벌을 가하지 않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지금 이 오적의 죄를 전하께서 아주 잘 아신다는 것은 차대 때의 하교가 아니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알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행하기가 어렵다.’라고 하였으니, 알면서도 잘 행하는 것만 한 것이 없습니다.김일경의 상소에 참가한 역적들의 흉악한 심보는 조금도 차이가 없으니 그들을 모두 죽이는 법을 어찌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중에서도 이진유와 박필몽 두 역적이 가장 괴수가 되어 흉계를 꾸며서 충직한 신하들을 해쳤으니 뚜렷이 드러난 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김동필(金東弼)이 상소로 역적 김일경을 배척하자 이진유가 김동필을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외직에 좌천하여 보임하였습니다. 신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김동필을 칭찬하고 인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계책이 참으로 흉악하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 고(故) 판서 신임(申銋)이 상소를 올려서 백망(白望)이 고한 것에 대하여 내버려 두고 묻지 말자고 말하고서 결국은 동궁을 보호하는 것으로 말하였는데, 이진유와 박필몽 무리가 청대하여 극력으로 쟁집(爭執)하여 궁벽한 바닷가로 유배 보냈습니다. 심지어 김창집(金昌集)과 이이명(李頤命)을 조시(朝市)에서 처형하자고 청하기까지 하였으니, 그에 비하면 이 일은 다만 대수롭지 않은 일입니다. 이 역적들의 죄가 이처럼 많아서 결코 하루도 용서하기 어려우니 삼가 결단을 내려서 윤허하여 주소서.”하니, 상이 이르기를,“승지의 말이 옳다. 그 당시에 역적 김일경의 상소에 연명한 사람 중에 간혹 그 이름을 뺀 사람도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차마 할 수 없었던 뜻에서 나온 것이니 이런 부류는 허용할 수 있다. 김일경의 기세가 충천할 때에 오직 김동필과 윤순(尹淳)의 상소만이 나왔고 김동필은 단망으로 외직으로 좌천되어 보직되었으니, 김동필 같은 사람은 칭찬하고 인정할 만하다. 그런데도 ‘칭찬하고 인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다.’라고 말하니 내가 참으로 유감스럽게 여긴다. 이진유 무리가 조조(曹操)처럼 청의(淸議)를 두려워했기에 끝내 그 계책을 행하지 못하였으니, 김동필의 힘이 크다고 하겠다.”하자, 홍용조가 아뢰기를,“김동필의 상소는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 분발시켰지만, 신은 의사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이런 사람은 인정해야 한다.”하였다. 윤섭이 아뢰기를,“김동필이 결국 김일경을 구하였으니, 이것이 칭찬하고 인정하기에 부족한 까닭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사람이 요순(堯舜)이 아닌 이상에 어찌 매사를 모두 잘하겠는가. 선유(先儒)들의 양웅(揚雄)에 대한 말에서도 그의 말이 좋으면 양자(揚子)라고 칭하면서 그의 말을 썼으니 김동필의 상소는 취해도 된다.”하였다. <중략>[주-D001] 오적(五賊) : 세자 책봉 문제와 신임사화로 노론의 지탄을 받은 소론 측 인물인 유봉휘(柳鳳輝), 이광좌(李光佐), 조태억(趙泰億), 조태구(趙泰耈), 최석항(崔錫恒)을 말한다.
    2021-05-24 | NO.423
  • 광주 목사 등이 보낸 산물이 썩었으니 엄하게 추고하라 - 영조 3년
    전라도의 5월분 산물로 봉진(封進)한 생죽순(生竹筍) 중 썩은 것을 도로 물려 보내고, 해당 봉진관 등을 엄하게 추고할 것 등을 청하는 사옹원의 계 - 영조 3년 정미(1727) 5월 2일(정사) 아침에는 비가 오고 저녁에는 맑음       김취로가 사옹원의 말로 아뢰기를,“오늘 전라도에서 5월분 제철의 산물로 기한을 물려 봉진(封進)한 진상용 생죽순(生竹筍)을 와서 바쳤는데, 대왕대비전에 진상한 죽순 50본(本) 안에 24본이 썩었고, 왕대비전에 진상한 죽순 100본 안에 52본이 썩었고, 대전에 진상한 100본 안에 35본이 썩었고, 세자궁에 진상한 60본 안에 10본이 썩었습니다. 왕래하는 데 폐단이 있기는 하지만 결코 봉입할 수 없기 때문에 그중에 썩은 것을 도로 물려 보내 다시 준비해 바치게 하였습니다만, 위에 올리는 막중한 물품을 이렇게 삼가지 않았으니 이보다 놀라운 일이 없습니다. 해당 봉진관(封進官)인 능주 목사(綾州牧使) 민치룡(閔致龍), 광주 목사(光州牧使) 이익명(李益命), 담양 부사(潭陽府使) 박창후(朴昌厚), 장성 부사(長城府使) 이의록(李宜祿), 순창 군수(淳昌郡守) 이굉(李浤), 평창 현령(平昌縣令) 이현경(李顯慶), 남평 현감(南平縣監) 권정성(權定性), 곡성 현감(谷城縣監) 송종석(宋宗錫), 구례 현감(求禮縣監) 이광보(李光輔), 옥과 현감(玉果縣監) 박성의(朴性毅), 화순 현감(和順縣監) 박필흥(朴弼興), 동복 현감(同福縣監) 안수상(安壽相)을 모두 엄하게 추고하고, 가지고 온 색리(色吏)는 담당 관사로 하여금 엄하게 죄를 다스리게 하고, 감사도 살피지 않은 잘못을 면하기 어려우니 추고하여 경책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전교하기를,“아뢴 대로 하라. 도로 보내면 폐해가 있으니 두 동조(東朝)께 진상하는 것 외에는 물려 보내지 말라.”하였다.
    2021-05-24 | NO.422
  • 호남의 농사가 재이를 초래하다 - 영조 3년
    희정당(熙政堂)에서 소대를 행하는 자리에 참찬관 정택하 등이 입시하여 《황명통기(皇明通紀)》를 진강하고, 재해로 세량(稅糧)을 감면해 주는 문제 등을 논의하였다 - 영조 3년 정미(1727) 4월 12일(무술) 맑음     사시에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갔다. 소대(召對)를 행하러 신하들이 입시한 자리이다. 참찬관 정택하(鄭宅河), 검토관 홍성보(洪聖輔), 가주서 유최기(兪㝡基), 기사관 권해(權賅)ㆍ정익하(鄭益河)가 입시하였다. 홍성보가 《황명통기(皇明通紀)》를 선종(宣宗) 경술(庚戌) 선덕(宣德)의 ‘산운평경운만(山雲平慶雲蠻)’부터 읽었다. 정택하가 ‘선덕 육년 이월(宣德六年二月)’부터 ‘시문정(諡文靖)’까지 읽었다. 유최기가 ‘선덕 칠년(宣德七年)’부터 ‘각견사래조공(各遣使來朝貢)’까지 읽었다. 권해가 ‘선덕 팔년 정월(宣德八年正月)’부터 ‘지명주지(至命周之)’까지 읽었다. 정익하가 ‘선덕 십년(宣德十年)’부터 ‘진수선부(鎭守宣府)’까지 읽었다. 홍성보가 34판(板)의 ‘득원조맹부소회빈풍지도(得元趙孟頫所繪豳風之圖)’까지 읽었다. 홍성보가 농사의 일과 섭이중(聶夷中)의 시(詩)를 가지고 권면하여 아뢰기를,“임금은 모름지기 농사의 어려움을 알아야합니다. 예로부터 친히 세 번 미는 일을 하였던 것도 농사가 중하다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선조(先朝) 때에도 〈빈풍(豳風) 칠월(七月)〉을 그림으로 그렸는데, 궁중에 아직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또 농사가 어렵다는 시를 지은 적도 있으니 ‘동짓달에 발꿈치를 들고 밭 갈러 가며 정월에 쟁기를 든다.[一之日擧趾 三之日擧耜]’라는 뜻을 어찌 깊이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연초에 기곡제(祈穀祭)를 지내고 또 별도로 윤음을 내리면서 매양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달지 않다.’라고까지 하셨으니, 선조께서 백성의 일을 진념하신 뜻이 이처럼 지극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성상께서는 더욱 깊이 생각하셔야 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선조의 일을 들으니 마음이 슬프다. 각별히 깊이 생각하겠다. 선조 때에 과연 농상도(農桑圖)를 그린 일이 있다. 춘방(春坊)에서 바친 일이 있기에 그 아래에 발문을 지었다. 영중추부사 민진원(閔鎭遠)이 진언한 일이 있어서 개조하여 들였더니 추모하는 마음이 갑절이나 더했다. 동궁에게 주어야 하겠다.”하였다. 홍성보가 아뢰기를,“민간의 병폐와 고통을 모름지기 어린 나이부터 일찍 알아야 합니다. 세자는 지금 어린 나이니, 붉고 푸른 고운 빛깔만으로 그저 즐기며 좋아하는 물건으로 여기게 된다면 전하께서 그려서 준 본뜻이 아닙니다. 그림을 보고 농사의 어려움을 알도록 세자에게 삼가 권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좋다. 그대로 시행하겠다.”하였다. 홍성보가 또 아뢰기를,“신이 글 뜻 중에 재상(災傷)으로 세량(稅糧)을 감면해 주는 일로 인하여 우러러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호남의 바닷가 7읍에 거듭하여 기근이 들었는데 올해 보리농사의 흉작이 또 매우 참혹합니다. 백성들이 모두 흩어져 유랑하니 장차 모두 죽게 될 지경이라, 말하자니 참으로 매우 애통합니다. 진휼(賑恤)하는 일은 바로 지금 급히 힘써야 할 일입니다. 전 감사 이유(李瑜)가 하직 인사를 할 때 진휼을 설행하는 것이 도리어 폐단이 된다는 뜻으로 진달한 바가 있기 때문에, 수령이 감영에서 진휼할 재원을 얻지 못하여 달리 구제할 방도가 없습니다. 일찍이 곡식을 옮기라는 뜻으로 경상 감영에 분부한 일이 있는데, 영남곡(嶺南穀)이 이전되지 않았고 광주(光州)와 나주(羅州)의 곡식도 이송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하니, 호남의 일이 참으로 매우 시급합니다. 신이 듣건대 지금 이 7읍이 작년에 우심재읍(尤甚災邑)에 포함되어 응당 납부해야 하는 각종 물건을 절반만 거두어들이도록 하였지만, 백성들이 모두 몹시 가난하여 또한 정해진 수량대로 거두지 못하여 못 거둔 양이 많다고 합니다. 경아문(京衙門)의 재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지만, 지금 이 호남 바닷가 7읍의 거두지 못한 각종 조세를 우선 특별히 정봉(停捧)하고 이미 거둔 것은 그 읍에 그대로 머물러 두도록 하여, 각각 그 읍으로 하여금 보리를 수확하기 전까지 진휼곡을 나누어 주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그 말이 좋다. 지난번에 연신(筵臣)이 아뢴 바에 따라 처분한 적이 있는데, 접때 경상 감사 유척기(兪拓基)의 장계를 보니 북곡(北穀)을 이미 모두 민간에 나누어 주었다고 하였으므로 다시 영남곡을 2만 섬(石)에 한하여 호남으로 이송하도록 하였다. 그 뒤에 핑계를 대며 보내지 않을 폐단이 염려되어 따로 하유하여 재촉하였는데, 어제 경상 감사의 장본(狀本)을 보니 별유가 내려가기 전에 이미 어떤 명색의 곡물을 변통하여 수량을 맞추어 보냈다고 하였다. 이로써 보건대 당초에 북곡을 모두 나누어 주었다는 이야기는 탈이 났다고 핑계를 대려는 데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바로 실상이니, 함께 협력하는 의리에 있어서 참으로 가상하다. 영남곡 2만 섬을 이미 이송했으니 비록 때에 맞추지 못할 걱정이 없지는 않지만, 또한 한때의 시급함을 구제할 수는 있을 것이니 진휼의 재원이 전혀 없는 것보다는 나을 듯하다. 바닷가의 재읍(災邑)이 이렇게 7읍인가? 호남에 여러 해 계속하여 흉년이 들었는데 올해 또다시 이러하니 백성의 일이 참으로 걱정스럽다. 한편으로 곡식을 옮겨 진휼하면서 한편으로 포흠(逋欠)을 거두어들이는 것은 불쌍히 여기는 본뜻이 아니니, 묘당으로 하여금 품의(稟議)하지 말고 특별히 도신에게 분부하여 일체 정봉하도록 하라.”하였다. 홍성보가 아뢰기를,“근래 외방의 진정(賑政)은 본래 실속이 없는 경우가 많아 그 효과가 백성에게 쉽게 미치지 못합니다. 지금 따로 관인 하나를 가려 뽑아 보내어 진휼을 전담하도록 한다면 필시 보탬이 있을 것입니다. 대신이 출사하기를 기다려 하문하여 처리하면 좋을 듯하므로 감히 아룁니다.”하고, 참찬관 정택하가 아뢰기를,“소신도 호남의 농사가 걷잡을 수 없는 상태라고 들었으며, 수령이 혹시 곡물을 구하더라도 진휼곡을 잘 나누어 주지 못하는 폐단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러한 일을 도신이 또 어떻게 모두 살피겠습니까. 따로 어사를 보낸다면 각별히 두려워하는 방도가 될 듯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호남의 바닷가 6, 7읍의 농사가 연달아 이와 같으니, 그 재이(災異)를 초래한 것이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필시 그리 된 까닭이 있을 것이다. 백성들을 생각하면 참으로 매우 가엾고 불쌍하니 조정에서 어찌 별도로 진념하는 방도가 없겠는가. 선왕 때부터 호남 백성들의 일을 염려하여 여러 차례 감진 어사(監賑御史)를 보냈지만, 그 실효는 어사에 마땅한 사람을 얻었는지 여부에 달렸다. 수령 또한 명목을 헛되이 부풀리며 과장하는 것만 일삼으므로 얻기를 청하는 바는 오직 공명첩(空名帖)처럼 긴요하지 않은 사안에 불과할 뿐이다. 이는 나라에게는 관직을 파는 데로 귀결됨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한 도(道)에는 헛되이 접대하는 폐단을 끼치게 한 것이니, 감진 어사를 차출하여 보내는 것이 굳이 실효가 있지 않으며 근본적으로 모두 수령을 가려 뽑는 것만 못하다. 지금 이 호남 6, 7읍의 수령은 더욱 각별히 가려 차임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 가운데 불법한 부류가 있으면 일반적인 격식에 구애받지 말고 각별히 장계로 보고하여 처치할 수 있도록 도신에게 분부하라.”하였다. 홍성보가 아뢰기를,“25판의 우리나라 해동청(海東靑)의 일은 연조(年條)를 살펴보니 이는 바로 우리 세종조(世宗朝) 때입니다. 세종은 바로 요순(堯舜)과 같은 임금인데, 특이한 물건을 바치지 않고 진귀한 날짐승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뜻을 어찌 몰랐겠습니까. 필시 전례가 있어서 해동청을 바친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선종(宣宗)이 하교한 바 또한 성대한 덕을 베푸는 일이었습니다. 《국조보감(國朝寶鑑)》 중에 세종조 때에 해동청을 구해서 길렀던 일이 있는데, 하루에 꿩 한 마리를 소비하다가 하루아침에 날아가 버렸으니 쓸모없음이 이와 같습니다. 지금 《명사(明史)》를 강독하는 즈음에 이렇게 해동청을 풀어 준 일이 있는데, 우리나라의 국사(國史)에 보이지 않는다면 필시 개탄스럽게 여길 일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그 까닭은 모르겠지만 이는 필시 바친 전례가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지금 유신(儒臣)의 말을 들으니 참으로 가상하다.”하였다. 홍성보가 또 아뢰기를,“26판 8월 그믐날 일식을 해야 하는 날 선종이 이르기를 ‘사방에 반드시 본 자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교한 것은 참으로 마음을 가다듬어 반성하는 요체이니 하늘의 뜻에 진심으로 응하는 도리는 마땅히 이러해야 합니다. 호영(胡濙)이 명신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일식해야 하는데 일식하지 않았다고 진하(陳賀)를 청하였으니, 선종이 깨달아 알지 않았다면 진하를 받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부분은 마땅히 교훈 삼아 경계해야 할 곳이므로 감히 아룁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그 말이 좋다.”하였다. 홍성보가 또 아뢰기를,“진조(陳祚)가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독하기를 청한 일에 대해 선종은 불평한 기색을 드러내었고 끝내 체포해 감옥에 가두고 가산(家産)을 몰수하기에 이르렀으니, 임금이 자신을 대단하다고 여기는 데에 대한 경계를 전혀 몰랐던 것입니다. 경연에서 강독하는 《소학(小學)》과 《대학(大學)》은 바로 제왕이 차례로 배우는 것인데, 진조의 한 마디 말 때문에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성왕(聖王)이 부지런히 학문에 힘쓰는 도리에 있어서 어찌 이럴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곳은 바로 장차 교훈 삼아 경계해야 합니다. 선종황제의 처분에 온당치 못한 점이 있었으므로 감히 아룁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진조의 말은 별달리 황제의 심기를 거스른 바가 없는데 죄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 이러한 일을 후세에 살펴보자면 유감이 없을 수 없다.”하였다. 정택하가 아뢰기를,“옛일을 가지고 말해보겠습니다. 순(舜) 임금으로 말하자면 단주(丹朱)와 같은 오만함이 없었으니, 작은 행실을 삼가지 않는 일로 우(禹) 임금에게 권면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직언을 하더라도 거리낌이 없어야 합니다. 진조가 《대학연의》를 강독하기를 청한 것으로 죄를 입었으니 끝내 성인(聖人)이 되기에는 덕을 잃은 듯합니다.”하고, 홍성보가 아뢰기를,“그 아래 ‘나라를 다스리는데 재정이 없을 수는 없지만, 「생산하는 사람이 많다.[生之者衆]」라는 네 글자의 말을 행하면 굳이 조세를 마구 거둘 필요가 없이 나라의 재정에 여유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그 ‘생산하는 사람이 많다.’라는 것은 절약해 쓰는 것으로 재물을 늘리는 방도로 삼는 것만 못합니다. 이러한 부분은 성상께서 깊이 생각하셔야 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그 말이 좋다.”하였다. 홍성보가 또 아뢰기를,“선종 8년 양사기(楊士奇)가 학사(學士)가 되었을 때 그 문치(文治)의 성함을 알 수 있습니다. 선종이 지은 어제시(御製詩)가 매우 많은데, 임금과 신하가 모두 문장을 위주로 하였습니다. 무릇 제왕의 학문은 《대학》에서 이른 바 성의정심(誠意正心)과 격물치지(格物致知)가 귀중한 것인데, 시가(詩歌)를 짓고 오로지 칭송하는 것을 위주로 하였으니 어찌 서운하지 않겠습니까. 태조(太祖) 때 유기(劉基)의 서맥송(瑞麥頌)은 후세에 폐단이 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이러한 시가와 문장은 후세의 군주가 숭상할 만한 것은 아닙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그 말이 좋다. 서맥송과 평서촉송(平西蜀頌)은 좋지만, 전해지는 폐해는 다시 아첨하는 행태가 된다. 한(漢)나라의 일을 가지고 말하자면 적복부(赤伏符)와 같은 부류가 그러하다. 우리나라도 명(明)나라에서 전해지는 풍속을 이어받아 화려한 문장을 숭상하는 일이 있다. 신하가 잠(箴)과 송(頌)을 바치는 것이 굳이 해가 되지는 않겠지만 이것이 좋지는 않다.”하자, 정택하가 아뢰기를,“이 때문에 이 글의 아래 소주(小註)에서도 제왕이 문장을 숭상하는 것을 그르다고 하였습니다.”하였다. 홍성보가 또 아뢰기를,“40판에서 양진(兩晉)의 풍속을 논한 곳은 어찌 부박(浮薄)하고 청허(淸虛)한 것을 폐단으로 여긴 것이 아니겠습니까. 왕도(王導)와 주의(周顗) 같은 부류가 청담(淸談)을 숭상하여 세상만사를 내버려 두었으니 결국 나라가 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지금 밝으신 성상께서 즉위하시어 날마다 부지런히 힘쓰시는데, 인심과 세도를 가지고 살펴보면 믿을 만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조정에 위로는 삼공(三公)으로부터 아래로 백관(百官)에 이르기까지 현인이 포진해 있다면 무너진 기강을 조금이나마 떠받칠 수 있습니다. 지금 등용한 선비가 조정에 포진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산림과 초야의 선비를 모두 초치하여 등용한다면 어디에 보탬이 되지 않겠습니까. 초치하시는 별유(別諭)가 매양 빈번히 내렸고, 당시 상소에 대한 비답으로 살피자면 현인을 높이는 마음이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성상께서 더욱 유념하시어 정성스런 마음으로 조정에 초치하신다면 세도에 보탬이 될 뿐만 아니라, 경연에 입대(入對)했을 때 의리를 진달하면 어찌 보탬이 되지 않겠습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그 말이 좋다. 유념하겠다.”하였다. 홍성보가 아뢰기를,“그 아래 조단(曹端)의 일은, 그가 노자(老子)와 석가(釋迦)를 구분해 말한 곳이 매우 정밀하니 학술이 올바름을 볼 수 있는데, 세상에 알려지지 않아서 벼슬이 곽주 학정(霍州學正)에 그쳤습니다. 지금 조단과 같은 부류처럼 재주를 지니고 경서를 읽는 선비가 있더라도 어떻게 그 재주를 알아보고 등용하겠습니까. 조단 또한 연달아 만주(滿州)와 곽주의 학정이 되니 고을 사람들이 비로소 교화되었습니다. 지금 경술(經術)을 지닌 선비 또한 의당 점차 작은 곳에 써 보고 큰 곳에 써 본다면, 사람을 쓰는 도리를 다할 수 있을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그 말이 좋다. 유념하겠다.”하였다. 신하들이 마침내 파하고 나갔다.[주-D001] 선종(宣宗) 경술(庚戌) 선덕(宣德)의 산운평경운만(山雲平慶雲蠻) :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본 《황명통기집요(皇明通紀集要)》 권8의 선종 경술 선덕 5년의 마지막 기사에는 ‘山雲平慶遠蠻’으로 되어 있다.[주-D002] 섭이중(聶夷中)의 시(詩) : 섭이중은 당(唐)나라 하동(河東) 사람으로, 자는 탄지(坦之)이다. 함통(咸通) 연간의 진사(進士)로서 벼슬은 화음위(華陰尉)를 지냈다. 농가의 가난한 살림을 묘사한 그의 〈상전가(傷田家)〉에서 “2월에 새 실을 팔고, 5월에 새 곡식을 팔았네. 눈앞의 급한 불은 껐으나, 심장의 살점을 도려낸 듯하네. 바라노니 임금의 마음 밝은 촛불이 되어 화려한 잔치 자리 비추지 말고, 유랑하는 백성들 집 두루 비추었으면.[二月賣新絲 五月糶新穀 醫得眼前瘡 剜却心頭肉 我願君王心 化作光明燭 不照綺羅筵 徧照逃亡屋]”이라고 하였다. 《古文眞寶前集 卷1》 《資治通鑑 卷276 後唐紀》[주-D003] 친히 …… 일 : 천자가 친경(親耕)을 하면서 쟁기를 잡고 세 번 민다는 말이다. 《예기(禮記)》 〈월령(月令)〉에 “천자가 친히 쟁기와 보습을 수레에 싣고 들로 행차하는데 보개(保介)와 어자(御者) 사이에 둔다. 삼공(三公)과 구경(九卿)과 제후(諸侯)와 대부(大夫)를 거느리고 몸소 황제의 적전(籍田)에서 밭갈이를 한다. 천자는 세 번 밀고, 삼공은 다섯 번 밀고, 경과 제후는 아홉 번 민다.”라고 하였다.[주-D004] 빈풍(豳風) 칠월(七月) : 《시경(詩經)》 〈칠월〉을 가리키는데, 주공(周公)이 빈(豳)나라 농민의 세시 생활의 모습과 농가의 정경을 노래하였다.[주-D005] 선조 …… 지었다 : 숙종 때 동궁이던 경종에게 농상도(農桑圖)가 있었는데, 그림 속에 숙종의 어제(御製)인 칠언절구가 있었다. 뒤에 이를 보고 영조도 글을 지어 넣었다. 1725년(영조1)에 민진원(閔鎭遠)의 요청에 따라 장정을 다시 하여 바치도록 하였다. 《承政院日記 英祖 1年 6月 14日》[주-D006] 이유(李瑜)가 …… 바 : 1726년(영조2) 이유가 전라 감사로 내려가며 입시한 자리에서 수령들이 진휼을 계기로 그 재원을 많이 받아 사적으로 농락하는 폐단을 진달하여, 영조로부터 철저히 관리하라는 명을 받은 적이 있다. 《承政院日記 英祖 2年 8月 27日》[주-D007] 우리나라 해동청(海東靑)의 일 : 《황명통기집요(皇明通紀集要)》 권8, 경술년(1430, 세종12) 선덕(宣德) 5년 4월 조에 “조선 국왕이 사신을 보내어 해동응(海東鷹)을 바치니 왕에게 자기(磁器)를 회사(回賜)하면서 유시하기를 ‘나라에 진기한 짐승이 많지만, 짐이 바라는 것은 이러한 것이 아니니 이후로는 바치지 말라.’ 하였다.”라는 기사가 있다.[주-D008] 일식을 …… 것이다 : 1430년 8월 그믐은 일식에 해당하는 날인데 날이 흐리고 비가 와서 일식을 하지 않자 예부 상서(禮部尙書) 호영(胡濙) 등이 진하(陳賀)를 청하였는데, 선종(宣宗)은 “옛날의 군자들은 그 과실이 일식이나 월식과 같아서 백성들이 그것을 다 보았고, 과실을 고침에 미쳐서는 백성들이 다 우러러보았다.”라는 《맹자(孟子)》 〈공손추 하(公孫丑下)〉의 말을 인용하고 “경사(京師)에서 보지 못했다고 해도 사방에 반드시 본 자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진하를 하지 말도록 하였다. 《皇明通紀集要 卷8》[주-D009] 임금이 …… 경계 : 《서경》 〈함유일덕(咸有一德)〉에서 이윤(伊尹)이 치사(致仕)하고 떠나면서 태갑(太甲)에게 진계하기를 “임금은 백성이 아니면 부릴 사람이 없으며, 백성은 임금이 아니면 섬길 사람이 없으니, 스스로 크다 하여 남을 좁게 여기지 마소서.”라고 하였다.[주-D010] 순(舜) 임금으로 …… 때문입니다 : 《서경》 〈익직(益稷)〉에서 우(禹) 임금은 순 임금에게 요(堯) 임금의 아들인 단주(丹朱)처럼 오만하지 말 것을 요청하였고, 《서경》 〈여오(旅獒)〉에서 소공(召公)이 무왕(武王)에게 경계하기를 “작은 행실을 삼가지 않으면 끝내 큰 덕에 누가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주-D011] 서맥송(瑞麥頌) : 태평성대를 칭송하는 내용이다. 서맥(瑞麥)은 보리 한 대에 여러 이삭이 나오는 것을 말하는데, 송나라 진종(眞宗) 때 수주(壽州)에서 서맥을 올린 일이 있었다고 한다. 《增修附註資治通鑑節要續編 卷30》[주-D012] 적복부(赤伏符) : 예언이 쓰인 붉은 색깔의 부적을 말한다. 뒤에 광무제(光武帝)가 된 유수(劉秀)가 장안(長安)에 있을 때 강화(彊華)가 적복부를 바치며 “유수가 군사를 일으키니 사이(四夷)가 운집하고 사칠(四七) 즈음에 화(火)가 임금이 된다고 쓰여 있습니다.”라고 하자, 이것은 광무제가 천자가 된다는 것을 가리킨다고 신하들이 말하였다. 그러자 광무제는 유사(有司)에게 단장(壇場)을 설치하라고 명하였다. 《後漢書 卷1 光武帝紀》[주-D013] 왕도(王導)와 주의(周顗) : 모두 동진(東晉) 때의 명신이다. 왕도의 사촌인 왕돈(王敦)이 난을 일으켰을 때 주의는 왕도를 구하려고 크게 노력하였지만, 왕도에게는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뒤에 왕돈이 왕도에게 주의에 대해서 묻자 왕도가 대답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의는 죽임을 당하였다. 그 뒤 왕도가 중서(中書)의 서류를 조사하다가 주의가 자기를 위해 올린 글을 발견하고는 “내가 백인(伯仁)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백인은 나 때문에 죽은 것이다.”라고 하면서 슬퍼하였다고 한다. 《晉書 卷65 王導列傳, 卷69 周顗列傳》 백인은 주의의 자이다.
    2021-05-24 | NO.421
  • 생저를 적게 올린 광주 목사를 엄하게 추구하라 - 영조 2년
    대왕대비전 등에 척량(尺量)이 부족한 생저(生猪)를 봉진한 담양 부사(潭陽府使) 박창후(朴昌厚) 등을 파직할 것 등을 청하는 사옹원 감선 제조(監膳提調)의 계 - 영조 2년       임주국이 사옹원 관원이 전하는 감선 제조(監膳提調)의 뜻으로 아뢰기를,“전라도에서 각 전에 진상하는 납육(臘肉)이 지금 막 도착하였습니다. 그런데 대왕대비전에 담양(潭陽)에서 봉진하는 생저(生猪) 1구(口), 왕대비전에 광주(光州)와 순창(淳昌)에서 봉진하는 생저 2구, 대전에 운봉(雲峰)과 장수(長水)에서 봉진하는 생저 2구, 중궁전에 고산(高山)에서 봉진하는 생저 1구, 세자궁에 임실(任實)에서 봉진하는 생저 1구는 척량(尺量)이 대단히 부족하니 퇴짜를 놓아 돌려보내어 다시 마련해야 할 듯합니다만 납일이 머지않아 기한에 맞추어 봉진하기 어려운 형편이므로 부득이 봉입하였습니다. 그런데 위에 올리는 막중한 물건을 이처럼 조심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비록 전혀 봉진을 하지 않은 것과는 차이가 있으나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해당 봉진관인 담양 부사 박창후(朴昌厚), 광주 목사 이익명(李益命), 순창 군수 이굉(李浤), 운봉 현감 조령(趙昤), 장수 현감 권만두(權萬斗), 고산 현감 홍우해(洪禹諧), 임실 현감 이동익(李東益)을 모두 파직하고, 본도의 감사도 살피지 못한 잘못을 면하기 어려우니 추고하여 경책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전교하기를,“아뢴 대로 하라. 여러 읍의 수령은 모두 엄하게 추고하라.”하였다.
    2021-05-24 | NO.420
  • 민제장이 정우귀를 경솔하게 파직하다 - 영조 2년
    장우귀(張宇龜)를 잉임(仍任)하도록 청하여 엄한 하교를 받았으므로 체차해 줄 것을 청하는 전라도 관찰사 김조택(金祖澤)의 상소 - 영조 2년 병오(1726) 4월 4일(병인) 맑음        전라도 관찰사 김조택(金祖澤)이 상소하기를,“삼가 아룁니다. 신은 본디 용렬하여 백에 하나도 잘하는 것이 없는데도 함부로 큰 은혜를 입어 외람되이 중요한 직책을 맡아 하는 일마다 말썽을 만들며 어리석어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은 이미 성상께서 통촉하고 계시는 바입니다. 그러나 여러 번 사직 상소를 올렸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여 그대로 자리를 차지하고 밤낮으로 걱정하고 있지만 조금도 보답하지 못하여 한갓 봉록만 축내는 부끄러움만 깊어 갑니다. 앞으로 일을 그르치게 될 것임은 본디 스스로 기약하는 바이지만 오직 마음과 힘을 다하여 만에 하나라도 보답하기를 바라면서 억지로 병든 몸을 이끌고 진휼할 읍을 순심(巡審)하였습니다. 그런데 지나는 길마다 유랑하는 걸인들이 들판을 가득 메우고 다투어 수레바퀴를 붙잡고 살려 달라고 다급하게 호소하였는데, 말을 해도 소리가 나오지 않고 움직여도 발걸음을 떼지 못하였으니 처참한 광경은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었습니다. 신이 가진 것은 적은데 백성들이 신에게 바라는 것은 이렇게 많으며, 각 읍의 진휼 물자가 떨어졌다는 보고가 좌우에서 연이어 도착하니, 신도 계책이 다하고 힘이 소진되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단지 스스로 애만 태우고 있었습니다.이러한 때에 삼가 유지(有旨)를 보니, 신이 장우귀(張宇龜)를 잉임(仍任)하라고 청한 일에 대하여 말뜻이 지극히 엄하여 예사롭지 않았으며, 심지어 ‘대궐 밖의 일은 장군이 통제한다. 병사(兵使)가 계청(啓請)하여 파직한 것은 참으로 일의 체모에 합당한 것이지만 군율(軍律)을 청하지 않은 것은 또한 유약하였다고 하겠다. 똑같이 번병(藩屛)을 지키는 도리에 있어 「일개 수령에게 웃음거리가 되었다.」라는 등의 말로 비난하고 그대로 잉임하도록 청하는 것이 적절한지 모르겠다.’라고 하며 신을 나무라셨으니, 신은 참으로 황송하고 위축되어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 일의 곡절은 신이 전에 이미 그 줄거리를 대략 아뢰었으므로 지금 책망하는 하교가 내린 터에 감히 억지로 변명하여 죄를 더 보태서는 안 되지만, 또한 입을 다물고 있어서는 안 될 바가 있어 감히 이렇게 모두 토로하니 신은 더욱 죽을죄를 짓게 되었습니다.만약 민제장(閔濟章)이 당초 대단한 잘못이 없었다면 신이 어찌 감히 일개 수령을 위하여 법을 굽혀 일의 체모를 돌보지 않고 번거롭게 잉임하라고 청하기까지 하였겠습니까. 대체로 환곡은 본래 수령의 소관인데, 본현은 재해를 특히 심하게 입었기 때문에 작년 환자(還上)를 태반이나 줄여서 받았습니다. 그래서 읍의 창고에 있는 적은 곡식만으로는 수많은 굶주린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기 어려워 동창(東倉)의 곡식을 똑같이 고르게 나누어 주고자 감색(監色)으로 하여금 백성들을 데리고 동창으로 나아가도록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민제장은 그 창고가 성안에 있다는 이유로 자신의 물건으로 여기고 전부 차지하고자 강제로 물러가게 하였으니, 이것이 이미 불가한 일입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에 정우귀가 그와 만나서 의논하려고 백성들을 데리고 직접 나아갔더니, 민제장은 이미 광주(光州)로 길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죽어 가는 굶주린 백성들이 다시 헛되이 돌아가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여 한편으로는 급히 보고하고 한편으로는 나누어 주었으니, 이는 실로 일의 형세가 어쩔 수 없는 데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후(虞候)와 비장(裨將)이 문을 닫고 가로막았으며, 심지어 군교(軍校)와 나졸(羅卒)을 많이 풀어서 감색을 잡아 가두어 정우귀가 끝내 손을 쓰지 못하고 중도에 그만두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민제장은 시비의 소재를 따지지 않고 막하(幕下)의 고자질에만 의거하여 정우귀를 경솔하게 계청해서 파직하였습니다. 그간의 사실은 이와 같을 따름입니다.만약 수령이 범한 바가 융정(戎政)에 관계된다면 수신(帥臣)이 계청해서 파직할 뿐 아니라 그 경중에 따라 곧바로 군율을 시행한들 누가 불가하다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들이 서로 다툰 것은 환곡 한 가지 일에 불과하였고 이는 이미 정우귀가 관장하던 바인데, 더구나 자신의 소유로 차지하는 것이 충분히 온당한지 모르겠습니다. 문서로 보고하는 사이에 설혹 체례(體例)를 잃었더라도 신의 감영에 논하여 보고해서 조용히 처리해도 불가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급급하게 파직을 청하였으니 일 처리를 제멋대로 하여 영문(營門)을 경시하게 됨을 끝내 면하지 못하였습니다.또 신은 정우귀에 대해서도 완전히 옳다고 여기지는 않지만, 그가 잘못한 것을 비교해 보면 시비가 현격히 다릅니다. 그러니 지금 재해를 입은 읍의 수령 가운데 학정(虐政)으로 백성을 해친 자가 없는데도 빈번하게 교체하는 것은 백성들에게 큰 폐단이 될 뿐만이 아닙니다. 진휼하는 일이 한창 펼쳐지고 있어 자연히 많은 조치들을 시행해야 하니, 초보자에게 맡겨 두어서는 안 됩니다. 신이 논열하면서 잉임할 것을 청한 것은 이 때문이지 실로 정우귀의 처지를 생각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성상의 하교가 이에 이르렀으니 신은 참으로 황송합니다.다만 생각건대 환곡과 융정은 관계되는 바가 각각 다릅니다. 도신은 한 도의 사무를 총괄하여 살피지만, 수신이 관계하는 바는 융정뿐으로 다른 것은 간여하지 않습니다. 지금 민제장이 체례를 돌아보지 않고 이렇게 잘못된 조치를 취하였는데 ‘대궐 밖의 일은 장군이 통제한다.’라고 하며 신을 억누르고 저 민제장을 장려하셨으니, 신은 수신이 제 마음대로 하는 폐단이 이로부터 비롯될까 걱정됩니다. 도신은 장차 수신이 하는 대로 맡겨 둔 채 팔짱을 끼고 말없이 있어야만 합니까.‘한 번 웃을 거리도 되지 않는다.’라고 한 것에 대하여 아뢰겠습니다. 병사의 직장(職掌)은 단지 군대를 정비하고 방벽을 견고하게 하는 것입니다. 병영(兵營)의 성첩(城堞)이 이곳저곳 무너져 병영 주변의 백성들이 그곳으로 출입하며 평지를 밟듯 하여도 그대로 버려두고 괴이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유독 죽음을 면하려는 굶주린 백성들이 다투어 넘어 들어오는 것은 큰일로 간주하고 마치 기화(奇貨)를 얻은 양 이것으로 정우귀를 위협하여 제압하고자 그 말을 크게 떠벌려 사람을 사형에 해당하는 죄로 몰았는데, 임금에게 고하는 말이 본디 이와 같아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신이 논변하는 즈음에 무심코 변론하여 말한 것이지 터럭만큼이라도 조소하려는 뜻은 없었습니다.우후(虞候)가 함부로 문을 잠근 것은 더욱 기이한 점이 있습니다. 만약 우환이 생겼을 때를 만나, 잠가야 하는데 잠갔다면 참으로 성상께서 하교하신 것처럼 가상하게 여길 만한 것이지만, 이것도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정우귀가 백성들을 이끌고 성에 들어간 것이 누구인지 분간할 수 없는 저문 밤에 발생하였거나 명분이 없는 것이었다면 그가 문을 잠근 것은 본디 마땅합니다. 그러나 이번에 환곡을 받으려는 굶주린 백성들을 막을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피차 서로 다투는 것이 그에게 또 무슨 관계된 바가 있기에 주장(主將)의 명령도 없고 또 일도 없는 평상시에 잠그지 말아야 하는데 잠가서 이런 분란을 초래한 것입니까. 그와 같이 변통할 줄 모르는 자를 장차 어떻게 위급할 때 쓰겠습니까. 그동안의 일 처리 역시 도리에 어긋난 것이 많았으니, 신이 죄를 다스리겠다고 청한 것은 바르게 경계하려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적병이 틈입(闖入)하여도 문을 열고 받아들일 것인가.’라고 하교하시니, 이는 실로 신이 처음에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던 바라 더욱 황송하여 위축됩니다.성상께서 문관이 무관을 능멸하는 것을 병폐로 여기시어, 오늘날 정우귀가 다툰 바가 혹 이런 병폐에서 나왔고 신이 장계로 청한 것도 문관을 부식(扶植)하고 무관을 억제하려는 데서 나왔을까 염려하여 이렇게 질책하는 하교를 내리신 것으로 생각되지만, 이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정우귀는 먼 시골의 외로운 사람에 불과한데 무슨 기세가 있어 상사를 능멸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그가 다툰 것은 스스로 고집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며 또 부득이한 데서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이쪽과 저쪽에서 문서로 보고한 내용을 조사해서 시비를 정하여 장계로 청하였던 것이지 조금이라도 그를 도우려는 뜻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미천한 신의 정성이 믿음을 얻지 못하여 이런 뜻밖의 엄한 하교를 초래하였기에, 걱정스럽고 황송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순심을 그만두고 지레 돌아왔으니 신의 죄가 이에 이르러 더욱 큽니다. 더 이상 무슨 면목으로 다시 한 방면을 맡아 거듭 체통을 손상시키겠습니까. 감히 사실을 아뢰고 우러러 주벌을 청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 신의 직임을 속히 체차하고 이어 신의 죄를 다스리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하니, 답하기를,“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일전의 판부(判付)는 변방의 곤수(閫帥)를 중시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며, 경의 이번 상소를 보아도 정우귀는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그 곡식은 본관이 환곡으로 운용하는 물건이지만 수령은 영하(營下)에서 관할하는 관원이 아닌가. 평소에 진작한 뒤라야 어려울 때 의지할 수 있는 것이니, 어찌 평시와 어려울 때를 구분해서 말할 것이 있겠는가. 가르치고 깨우친 하교에 불과한데 대뜸 순심(巡審)을 그만두는 것은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경은 사직하지 말고 속히 직임을 살피라.”하였다.[주-D001] 유지(有旨) : 전라 병사(全羅兵使) 민제장(閔濟章)의 군관과 우후(虞候) 등에게 엄하게 곤장을 치고, 강진 현감(康津縣監) 장우귀(張宇龜)를 잉임(仍任)하겠다는 전라도 관찰사 김조택(金祖澤)의 장계에 대해, 장우귀를 잉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으며 군관 등에게는 곤장을 치지 말도록 회유(回諭)하라고 이해 3월 13일에 승지 조영세(趙榮世)에게 내린 전교를 말한다. 이에 앞서 민제장은 장우귀를 계청(啓請)하여 파직하였다. 《承政院日記 英祖 2年 3月 13日》[주-D002] 대궐 …… 통제한다 : 원문은 ‘閫以外 將軍制’인데, 동일 기사에 근거하여 ‘制’ 뒤에 ‘之’ 1자를 보충하여 번역하였다.[주-D003] 한 번 …… 않는다 : 이 말은 강진 현감 장우귀를 계청하여 파직한 전라 병사 민제장의 처사를 비판하여 전라도 관찰사 김조택이 당초 올렸던 장계에 나오는 말인 듯하다.[주-D004] 참으로 …… 것이지만 : 이해 3월 13일에 승지 조영세에게 내린 전교에 “우후가 문을 잠그고 받아들이지 않은 것에 대하여 나는 당초 가상하게 생각하였다. 그렇다면 만약 적이 틈입(闖入)하여도 문을 열고 받아들일 것인가. 곤장을 치지 말라고 회유(回諭)하라.”라고 하였다. 《承政院日記 英祖 2年 3月 13日》[주-D005] 영하(營下)에서 …… 아닌가 : 원문은 ‘非營下所關之官者乎’인데, 전사 과정의 오류로 보아 ‘關’을 ‘管’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2021-05-24 | NO.419
  • 최경회와 김덕령을 증직하라는 상소 - 영조 1년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킨 좌찬성 최경회(崔慶會) 등에게 시호와 포상의 은전을 내려 주기를 청하는 전라도 생원 이만영(李萬榮) 등의 상소 - 영조 1년 을사(1725) 9월 10일(갑진) 맑음         전라도 생원 이만영(李萬榮) 등이 상소하기를,“삼가 아룁니다. 예로부터 제왕이 절의를 위해 죽는 사람에 대해 포상(褒賞)하여 높이고 권장한 것은 비단 충성스러운 혼과 꿋꿋한 넋을 위로하여 답할 뿐만이 아니라 불쌍하게 여기고 도와주려는 뜻을 보여 주기 위해서이니, 실은 나라를 위하여 풍교를 세우고 강상을 부지하는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임진년(1592, 선조25)의 변란을 당하여 충성을 바치고 절개를 지키다 죽은 사람이 한두 사람으로 헤아릴 수 없지마는 열성조에서 훈공을 기록하고 충성을 포상하고 시호를 내려 주고 작위를 증직해 주는 은전도 갖추어 주었으니, 죽은 사람이나 산 사람이나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이에 공적은 서로 비슷하나 포상이 고르지 못한 경우가 있다면 나라에서 베푸는 은전에 얼마나 흠이 되는 일이며 공의(公議)가 얼마나 애석해하고 탄식할 일이겠습니까.섬 오랑캐가 침범하여 열읍(列邑)이 와해될 즈음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순절(殉節)한 선비들이 호남에서 많이 나왔는데, 만약 그중 가장 이름난 이를 말한다면 증(贈) 영의정 김천일(金千鎰), 증 좌찬성 고경명(高敬命), 증 좌찬성 최경회(崔慶會)가 이들입니다. 세 신하는 모두 백수(白手)로 의병을 일으켜 칼을 뽑아 들고 목숨을 바쳐 적과 싸워 후일에 수복하는 기초가 되었으니, 그 공과 그 절개가 어찌 참으로 우뚝하고 빛나지 않겠습니까. 선묘(宣廟)께서 즉시 훈공을 기록하라 맹부(盟府)에 명하시고 또 사원(祠院)에 편액을 반사하라 명하시어 높이고 장려하는 은전을 일체 균등하게 시행하였으니, 증시(贈諡)하는 은전에 이르러서도 마땅히 세 사람이 차이가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난번 성고(聖考)께서 임어하시던 날에 김천일과 고경명 두 신하는 증시의 은전을 받았는데 유독 최경회만 고르게 은전을 받지 못했습니다. 대개 최경회의 후손이 영체하여 김천일이나 고경명 두 신하와 같이 억울함을 말하지 못하여서 성상께서 두루 살펴 주지 못해서 그렇다고 합니다.신들이 삼가 엎드려 생각해 보니, 최경회는 문헌공(文憲公) 최충(崔沖)의 후손으로 성품은 충과 효를 온전히 지키고 학문은 밝은 스승의 질정을 받았으며 한 번 벼슬길에 나온 후에는 문무의 재주를 온전히 해서 명성과 덕망을 쌓았습니다. 왜구가 처음 쳐들어왔을 때 이광(李洸)의 군대가 공주(公州)에서 무너지고 황영(黃永)의 적이 금산(錦山)으로 들어 왔는데 김천일은 멀리 기보(畿輔)를 향하고 있고 고경명은 금산에서 죽었으니 호남 백성의 목숨이 거의 어육이 되었습니다. 최경회는 그때 어미의 상중에 있었는데 군중들이 추대하니 상복을 입고 시의를 좇아 변통하여 소매를 걷어붙이고 싸움에 임하며 말하기를 ‘임금이 근심하면 신하는 그것을 치욕으로 여기고 임금이 치욕을 당하면 신하는 치욕을 씻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 구구한 사정과 예는 돌아볼 것이 없다.’라고 하며 궤연(几筵)에 절하고 동남으로 격문을 전하니, 달포 안에 갑자기 큰 진을 이루게 되어 밤낮으로 군사를 움직여 장수(長水)에 나아가 주둔하니 왜노(倭奴)가 듣고 영남으로 물러나 의거하였습니다. 최경회가 의병들과 힘을 합쳐 싸워서 개령(開寧)의 적을 막아 냈습니다. 선묘(宣廟)께서 전교하시기를 ‘영남의 우계(右界)와 호남 한 도가 지금까지 보전된 것은 이 사람의 공 아닌 것이 없다.’라고 하고 특별히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에 제수하였습니다. 적병이 진주(晉州)를 포위하자 어떤 이가 그 형세를 보고 진퇴하여 후일의 공적을 도모하기를 권하였는데, 최경회는 주먹을 불끈 쥐고 성난 소리로 말하기를 ‘성이 보존되면 내가 존재하고 성이 없어지면 나도 죽는다. 참으로 이렇게 구차하게 삶을 도모하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니다.’라고 하며 이에 9일 밤낮을 적과 대항하며 적병을 여러 번 물리쳤는데 외부에서 구원병이 끊어지고 내부에서는 병기와 군량이 다하여 일이 이미 글러지자 북쪽으로 향하여 재배하고 이르기를 ‘형세가 궁하고 힘이 다하여 한 번 죽음으로 보답합니다.’라고 하고 드디어 의연히 목숨을 바쳤습니다.대개 의병을 일으킨 이래 도처에서 이겨서 우리 군사에게 사기를 더해주고 적을 좌절하게 한 것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무주(茂州)의 전투에서 한 적장이 등에는 족자 한 개를 짊어지고 손에는 8척의 언월도(偃月刀)를 잡고 앞길을 막고 있자 최경회가 활시위를 힘껏 당겨 활을 쏘자마자 거꾸러졌습니다. 그런데 그가 등에 지고 있던 것은 바로 공민왕(恭愍王)이 그린 〈청산백운도(靑山白雲圖)〉에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이 손수 제하고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이 그 위에 시를 쓴 것으로 바로 그 왜노가 우리나라에서 얻은 것이었습니다. 최경회가 죽을 때에 신임하던 막료에게 그 칼과 그림을 손수 주며 그 형인 최경장(崔慶長)에게 전해 주라고 하면서 이르기를 ‘우리 형님이 내가 죽었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마땅히 의병을 일으킬 것이니 이것으로 표지를 삼으라.’라고 하였습니다. 그 칼과 그림은 지금까지도 최경장의 후손 집에 보관되어 있으니 그 한결같은 충성과 장한 공렬은 혁혁하여 마치 어제의 일과 같아서 천백년이 지난 후대에도 사람으로 하여금 머리털이 곤두서게 할 것입니다. 성이 함락된 후에 천장(天將) 오종도(吳宗道)가 전쟁에서 죽은 장사들을 위해 지은 제문에 ‘최공이 군사를 벌이고 병기를 빛내 위엄을 보이니 왜노들이 더욱 어렵게 여기고 꺼리게 되었다.……’라고 하였는데, 선묘께서 듣고서 전교하시기를 ‘천장이 칭찬하고 왜노가 어렵게 여기고 꺼리었으니 이름이 삼국을 진동시킬 만하다고 할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드디어 이조 판서를 증직하고 또 문려(門閭)를 정표해 주셨으며 관리를 보내 치제하고 그 사당에 포충(褒忠)이라는 편액을 내려 주셨고, 인조조(仁祖朝)에 이르러 좌찬성을 더 증직하고 숭정대부(崇政大夫)의 품계를 더해 주셨습니다.아, 최경회의 충절이 이미 저와 같고 열성조에서 높이 포창하신 것이 또 이와 같은데 시호를 추증하는 은전이 지금까지 거행되지 않고 있는 것은 다만 신들이 때에 맞춰 아뢰어 청하지 못한 죄입니다. 지금 밝으신 성상께서 즉위하신 초기에 충성을 포상하고 절개를 장려하는 은전을 더욱 급선무로 하시니 신들이 이에 서로의 기쁨을 이야기하며 발을 싸매고 천리 길을 와서 대궐 아래에서 호소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세 신하의 충성은 일체 공이 같다는 것을 믿어 살펴 주시고 또 신들의 말이 공적이고 사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채택하시어 속히 담당 관사에 명하여 은혜로운 시호를 특별히 내려 주시어 포상하고 높이는 은전으로 삼으소서.그리고 신들은 여기에서 강개해 마지않는 것이 또 있습니다. 그 당시의 계의병장(繼義兵將) 최경장은 바로 최경회의 형입니다. 7세에 능히 ‘까마귀는 늙은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준다.’라는 시를 지어 향당에서 기이하게 여겼는데 연이어 대과(大科)와 소과(小科)에 급제하여 중외의 관직을 역임하였고 명성과 공적이 모두 드러났습니다. 임진년(1592, 선조25)의 변란이 일어났을 때 마침 상중이었는데 스스로 이르기를 ‘나라의 후한 은혜를 받았는데 몸에 상복을 입고 있어 임금의 행차를 호위할 수 없다.’라고 하며 곧 아우 최경회와 함께 뜻을 합쳐 향읍에 효유하여 의로운 군사를 불러 모아 조카인 지평 최홍재(崔弘載)를 시켜 고경명의 군대가 있는 금산으로 달려가게 하려고 했는데, 금산의 병사가 패하자 최경회는 슬픔을 참고 대장이 되고 최경장은 머물러 궤연을 지켰으니 그들이 책려하고 계획을 세워 적을 막고 저지하려는 계획은 조금도 늦춘 적이 없었습니다.계사년(1593) 6월에 최경회가 진주에서 의롭게 죽자, 나라를 걱정하는 것과 개인적인 슬픔을 둘 다 차마 잊을 수 없어서 비록 나이가 많고 근력이 쇠진하지만 오히려 분연히 동생을 이어서 의병을 일으켜 그해 8월에 최경회의 남은 무리를 모아서 피눈물을 흘리며 군사들과 맹세하며 영남으로 향하였습니다. 그대로 행조(行朝)에 글을 올리고 도내에 격문을 전하니 몇 달이 되지 않아 주군(州郡)에서 향응하였습니다. 도원수 권율(權慄)이 조정에 장계로 보고하고 비변사에서 그 뜻을 아뢰기를 ‘아우는 나라를 위해 죽고 형이 또 뒤를 이어 의병을 일으키니 옛사람에게서도 그 짝을 찾기 드문 경우입니다.’라고 하니, 상께서 가상하게 여기고 장려하며 그날로 특별히 장악원 정에 제수하고 계의병장의 인수를 겸하여 주며 면려하셨습니다. 또 본도의 감사에게 전교하시어 마음을 함께하여 협력하라고 하였으며 또 해당 관사에 전교하시어 관문을 만들어 감영과 본진(本陣)에 나누어 보내라고 하셨습니다.최경장은 명을 받들고 감격하여 더욱 한결같은 충정을 독려하여 옥과현(玉果縣)에 주둔하고 방책을 세워 훈련원 부정 선의문(宣義問)을 부장으로 삼고, 서천 군수(舒川郡守) 김윤명(金允明)을 종사관으로 삼아 의병들을 격려하여 이끌고 전진하여 고성(固城)의 견내량(見乃梁)을 막아 지켰습니다. 얼마 후에 원수(元帥)의 관문(關文)으로 인하여 군사를 석주(石柱)로 이동시키고 시설과 구획을 모두 알맞게 하니 기계와 병량이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미처 적을 만나지는 않았으나 휩쓸렸던 것을 회복하고 적을 베어 버린 공이 있었으며, 저 약탈을 일삼던 추한 오랑캐도 그가 최경회의 형인 것을 알고는 풍문을 듣고 겁을 먹어 무기를 거두고 물러가 피했습니다. 그해 12월에 왕세자가 분조(分朝)를 세우고 전주(全州)에서 무군(撫軍)하니 최경장이 즉시 달려 나아가 사은하였습니다. 그때 충용장(忠勇將) 김덕령(金德齡)이 담양(潭陽)에서 의병을 일으켰는데 아직 군졸이 없었습니다. 이에 무군사(撫軍司)에서 조정에 계문(啓聞)하여 계의병의 무기와 병량을 모두 김덕령에게 옮겨 주라고 하였으니, 대개 최경장의 나이가 이미 망칠(望七)이라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싸우기 어려울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에 최경장은 그 병량을 모두 수송해 주고 그 진호(陣號)를 파하고 돌아갔으니 이것이 최경장이 능히 한번 전공을 세울 수 없었던 까닭입니다. 의병을 일으킨 날에 죽지 못하여 당시에 의병을 일으킨 선비와 같이 포상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 어찌 충성과 효도가 다른 사람보다 못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아, 신하의 충성과 의로움은 본디 성패(成敗)와 사생(死生)을 가지고 단정 지을 수 없는 것이고 오직 그 당시에 의에 맞게 처신했느냐와 마음씀을 가지고 논하는 것이니, 지금 이 최경장이 동생이 죽은 뒤에 이어 떨쳐 일어나 노년의 나이에 의병을 일으킨 것이 어찌 늠름하게 대의를 우뚝 세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처음에는 조카를 시켜 금산으로 달려가 구원하게 하려 하고, 중간에는 동생을 진주에서 의롭게 죽게 했으며, 결국에는 자신도 이어서 일어나 의로운 군사를 불러 모아 충용장이 쓸 수 있도록 하였으니, 그 당당한 충의의 기개는 마땅히 죽었느냐 죽지 않았느냐를 가지고 차등을 두어 다르게 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만약 최경장에게 끝까지 무기를 들고 싸워 충성을 다하게 두었더라면 그 성패와 이둔(利鈍)을 비록 미리 예측할 수 없더라도 그가 장차 최경회가 죽은 자리로 달려 나가 목숨을 바칠 것이라는 것은 전혀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신들이 또 삼가 들으니 일찍이 숙묘조(肅廟朝) 때 본도의 유생들의 상소로 인하여 특별히 고 지평 박광옥(朴光玉)에게 증직을 더하고 시호를 내려 주는 은전을 베푸시고, 충용장 김덕령과 함께 광주(光州)의 의열사(義烈祠)에 같이 향사하라고 하셨다 합니다. 대개 박광옥은 창의하는 병사를 처음 일으켰으며 청을 설치하고 병사를 모집하여 의병에게 준 공이 있으나 죽음을 무릅쓰고 전투에 나가 죽은 절개가 있는 것이 아닌데도 성고(聖考)께서 오랜 뒤에 추가로 장려하여 포상하신 것이 오히려 저렇게 더욱 융숭합니다. 하물며 최경장이 전후로 힘을 다하여 주선하고 모은 군사를 위촉하여 최경회와 김덕령의 공적과 절개를 이루게 한 것이 어찌 박광옥보다 못하겠습니까. 포장하는 은전이 유독 미치지 않은 것을 신들이 강개하고 분통해한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최경회에 대해 올린 상소에 부득불 나란히 충성을 바친 형제의 아름다운 일을 진술하여 작질을 증직하고 포상의 은전을 내려 주기를 기대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특별히 굽어살피시고 모두 윤허하여 후생을 격려하고 권장하는 바탕이 되게 해 주신다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하니, 답하기를,“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지금 그대들의 상소를 보니 두 신하의 충절이 위엄이 있고 당당하게 살아 있는 것만 같다. 해당 조로 하여금 내게 물어 처리하도록 하겠다.”하였다.[주-D001] 문정공(文靖公) : 원문은 ‘文正公’인데, 《목은고(牧隱藁)》 〈조선목은선생이문정공행장(朝鮮牧隱先生李文靖公行狀)〉에 근거하여 ‘正’을 ‘靖’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주-D002] 본진(本陣) : 원문은 ‘本陳’인데, 전사하는 과정의 오류로 보아 ‘陳’을 ‘陣’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2021-05-24 | NO.418
  • 이익명(李益命)을 광주 목사로 제수하다 - 영조 1년
    이비와 병비의 관원 현황과 관직 제수 내용 - 영조 1년 을사(1725) 5월 26일(계해) 아침에는 흐리고 저녁에는 맑음        또 아뢰기를,“광주 목사(光州牧使)를 지금 차출해야 하는데, 광주는 물력이 풍부하고 지역이 광대하여 평소에 다스리기 어렵다고 일컬어지는 곳인 만큼 잘 골라서 보내지 않을 수 없으니, 아직 부임하지 않은 수령도 아울러 의망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정사가 있었다.이비에, 판서 이의현(李宜顯)은 나왔고, 참판 이재(李縡)는 지방에 있고, 참의 유척기(兪拓基)는 상소하여 말미를 받았고, 동부승지 홍용조(洪龍祚)는 나왔다.김진옥(金鎭玉)을 공조 참의로, 윤봉구(尹鳳九)를 청도 군수(淸道郡守)로, 권세칭(權世秤)을 보안 찰방(保安察訪)으로, 신택(申)을 강계 부사(江界府使)로, 이익명(李益命)을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박태휘(朴泰彙)를 오수 찰방(獒樹察訪)으로, 안윤중(安允中)을 장흥고 주부로, 심사성(沈師聖)을 선공감 주부로, 신로(申魯)를 대교로, 조관빈(趙觀彬)을 홍문관 제학으로 삼았다.병비에, 판서 홍치중(洪致中)은 병이고, 참판 권변(權忭)은 지방에 있어 아직 숙배하지 않았고, 참의 이정익(李禎翊)은 말미를 받아 지방에 있고, 참지 김고(金橰)는 나왔고, 동부승지 홍용조(洪龍祚)는 나왔다.홍우귀(洪禹龜)를 부사과로, 조태언(趙泰彦)을 부사정으로 삼았다.-----영조 1년 을사(1725) 6월 11일(정축) 잠깐 비가 옴 광주 목사(光州牧使) 이익명(李益命)이 하직하였다
    2021-05-24 | NO.417
  • 광주 목사 이의저의 파직을 청하다 - 영조 1년
    윤서교(尹恕敎)를 잡아다 국문할 것 등을 청하는 헌납 이의천(李倚天)의 계 - 영조 1년 을사(1725) 5월 25일(임술) 대우(大雨)가 옴        헌납 이의천(李倚天)이 아뢰기를,“<중략>광주 목사(光州牧使) 이의저(李宜著)는 타고난 성품이 간사하고 몸가짐이 형편없는데 권력자에게 아첨하여 여러 차례 수령의 직임을 맡았으나, 오로지 탐학을 일삼아 한 가지도 훌륭한 치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본직에 제수되어서도 옛 버릇을 고치지 않고 불법을 자행하였습니다. 우선 정도가 약한 것을 들어 말해 본다면, 부임한 초기에 하리를 엄히 신칙하여 주방 요리를 성대히 차리게 해서 관아에 묵던 손님 수십 명에게 모두 떡 벌어진 음식상을 제공하였는데 생선과 고기가 푸짐하였으며, 아래로 하인들에게까지도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며칠 후에 즉시 반찬 수를 줄이게 하고는 반찬거리를 계산하여 돈으로 값을 정하였는데, 반찬 한 가지 값으로 책정된 비용이 너무 많았는데도 반찬값이라고 칭하면서 날마다 거두어들여, 한 달 동안 거두어들인 것이 거의 수백 냥을 넘었습니다.광주가 평소에 풍요로운 고을로 일컬어진 것은 보민청(補民廳)이 있기 때문입니다. 관청의 비용에 관계된 것은 모두 여기에서 나오는데, 반찬값을 가져다가 쓴 뒤로는 창고가 텅 비어 다시는 남아 있는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 외에 백성을 못살게 굴고 자신의 욕심만 채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서 온 경내가 물과 불 속에 빠진 것처럼 떠들썩하니, 그의 탐욕스럽고 만족할 줄 모르는 실상은 이미 몹시 개탄스러운 지경입니다. 그리고 경내에 고 판서 문간공(文簡公) 이민서(李敏敍)의 사우(祠宇)가 있는데, 오랫동안 사림(士林)들이 제향을 하던 곳입니다. 그런데 이의저가 시세를 살펴 영합하고자 조정의 명령을 벗어나서 독기를 부려 뜻하지 않게 많은 군정을 동원하여 긴 끈으로 사당을 끌어당겨 헐어 버리자 선비 몇 사람이 온 힘을 다해 달려가 겨우 위판(位版)만 꺼내었고, 심지어 사우의 재목과 기와를 관청으로 실어 들여 마구간을 지었으므로, 보고 듣는 사람마다 서럽게 통곡하고 뭇사람이 분통을 터뜨리며 한탄하였습니다. 이렇게 탐욕스럽고 정인(正人)을 해치는 사람을 하루라도 수령의 자리에 두어서는 안 되니, 광주 목사 이의저는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하니, 답하기를,“(중략 부분을) 윤허하지 않는다. 마지막 일은 아뢴 대로 하라.”하였다.
    2021-05-21 | NO.416
  • 청풍 부사 이익명의 상소 - 영조 1년
    종손(從孫) 이봉상(李鳳祥)이 임인년에 노륙(孥戮)의 명이 내렸을 때 도망가서 살아 있으므로 처분을 기다린다는 청풍 부사(淸風府使) 이익명(李益命)의 상소 - 영조 1년 을사(1725) 4월 25일(임진) 맑음         청풍 부사(淸風府使) 이익명(李益命)이 상소하기를,“삼가 아룁니다. 세상이 빨리 제자리를 찾아 억울함이 모두 신원되었는데, 신의 형 영부사 이이명(李頤命)은 더욱 특별한 지우(知遇)를 받았으니, 가엾게 여겨 억울함을 씻어 주신 것은 다른 신하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이미 관작을 회복하고 제사를 지내 주고 시호를 추증하라고 명하셨으며, 또 방계 자손을 녹용(錄用)하라고 하교하시어 군수(郡守)에 제수되는 영광이 신의 부자에게도 미쳤습니다. 성은의 융성함이 천고에 듣지 못한 것이어서 참으로 돼지나 물고기 같은 미물도 감동시킬 수 있는데 하물며 실낱같은 숨이 붙어 있는 신의 마음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비록 몇 번을 다시 태어나서 분골쇄신하고 결초보은하더라도 만분의 일도 보답하지 못할 것이니, 신의 분의에 있어 즉시 달려가 은명(恩命)에 사은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신에게는 만 번 죽어 마땅한 죄가 있습니다. 신은 임인년(1722, 경종2) 6월에 광주(光州)의 적소(謫所)에서, 신의 종손(從孫) 이봉상(李鳳祥)이 그의 아비 이기지(李器之)를 노륙(孥戮)하라는 계사가 윤허되는 바람에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3대가 모두 죽게 된 것만 애통하게 여겼을 뿐 다른 것은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뒤에 북쪽 변방으로 이배(移配)되어서는 오직 빨리 죽어 세상일은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은혜로운 명을 받들어 넘어지고 엎어지며 길을 떠나 어제저녁에 비로소 서울에 도착하여 홀로된 형수의 편지를 볼 수 있었는데, 이봉상이 실은 죽지 않고 도망가 숨어 살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곡절은 형수가 멀리 있어서 미처 자세하게 듣지 못하였으나 그 말이 허언이 아닌 것은 분명하였습니다. 이에 신은 너무나 놀라 스스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들은 바가 이러하니, 즉시 임금께 아뢰지 않는다면 이는 성총(聖聰)을 속여 가리는 것입니다. 어찌 감히 일각이라도 지체하며 스스로 감추겠습니까. 다만 이봉상은 의당 즉시 자수해야 하지만 아직까지 있는 곳을 몰라 지금 가동(家僮)을 시켜 두루 추적하고 있으니, 조만간 자수하여 대죄하도록 할 것입니다. 그도 오늘 일을 보게 된다면 비록 내일 주륙을 당하더라도 필시 달갑게 여길 것입니다. 집안이 화를 당하던 날에 신은 이미 원배(遠配)되었고 이봉상은 우매하고 허약하였으며, 그의 조모와 어미는 가혹한 처사를 원통해하며 하늘에 부르짖을 때 단지 일점혈육을 보전하려고 옛날 조무(趙武)와 이섭(李燮) 및 본조(本朝)의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의 손자 김천석(金天錫)의 일과 같이 할 줄만 알았지 중대한 법을 범하게 되는 것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 실정과 그 죄상은 오직 성상께서 굽어 통촉하시는 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신이 일찍 알지 못한 죄는 만 번 죽어도 용서받기 어렵기에, 이에 감히 대궐 아래에서 거적을 깔고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며 삼가 부월(鈇鉞)의 주륙을 기다립니다. 신은 지극히 애타게 호소하고 두 손 모아 빌며 피눈물을 흘리면서 황공한 마음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하니, 답하기를,“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그대 형의 나라를 위한 단충(丹忠)은 내가 이미 훤히 알고 있다. 지난날 간사한 무리의 무함으로 인하여 속마음을 밝히지 못하고 갑자기 저승의 신하가 되었으니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슬퍼진다. 후사를 이을 사람이 없음을 탄식하였는데, 지금 그대의 상소를 보니 기쁘고 위안됨을 이기지 못하겠다. 이는 그대 형의 해를 꿰뚫을 듯한 충성심이 감동시킨 바가 아니겠는가. 이 일로 본다면 진(晉)나라 때 사람들이 ‘천도(天道)를 함부로 헤아렸다.’라고 한 말을 알 수 있겠다. 해당 조(曹)로 하여금 특별히 녹용하게 할 것이다. 그대는 대죄하지 말라.”하였다.[주-D001] 북쪽 변방으로 이배(移配)되어서는 : 이익명(李益命)은 1723년(경종3)에 전라도 광주(光州)에서 함경도 길주(吉州)로 이배되었다. 《景宗實錄 3年 11月 21日》[주-D002] 조무(趙武) : 춘추 시대 진 경공(晉景公) 3년에 대부 도안고(屠岸賈)가 대신 조삭(趙朔)의 집안을 멸족할 적에, 조삭의 친구 정영(程嬰)과 문객 공손저구(公孫杵臼)가 조삭의 고아 조무(趙武)를 보호하기로 합심하고는, 속임수를 써서 공손저구가 다른 아이와 함께 먼저 죽고, 정영은 목적을 달성한 뒤에 자결하여 의리를 지켰다. 《史記 卷43 趙世家》[주-D003] 이섭(李燮) : 이섭과 관련된 내용은 찾지 못하였다.[주-D004] 본조(本朝)의 …… 일 : 김제남(金悌男)의 손자 김천석(金天錫)은 온 가문이 죽음을 당할 때 한 족인(族人)이 몰래 데리고 나가 머리를 깎아 중이 되게 하였는데, 인목대비(仁穆大妃)가 복위된 뒤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仁祖實錄 3年 3月 8日》[주-D005] 진(晉)나라 …… 말 : 관련된 내용을 찾지 못하였다.
    2021-05-05 | NO.415
  • 동산서원의 향사를 회복해줄 것을 청하는 상소 - 영조 1년
    문정공(文正公) 이경여(李敬輿) 등에 대한 동산서원(東山書院)의 향사를 회복해 줄 것을 청하는 전라도 유생인 생원 이세추(李世樞) 등의 상소 - 영조 1년 을사(1725) 4월 10일(정축) 맑음        전라도 유생인 생원 이세추(李世樞) 등이 상소하기를,“삼가 아룁니다. 선정신 문정공(文正公) 이경여(李敬輿)와 그의 아들 문간공(文簡公) 이민서(李敏敍)는 덕업이 찬란하고 학술이 순정(純正)하여 모두 한 시대의 모범이 되고 백세의 사표가 될 만합니다. 그리고 이경여는 전라도 관찰사로 있을 적에 유학의 가르침을 창도하고 밝혀 풍화(風化)가 크게 행해졌으며, 이민서는 전후로 나주(羅州)와 광주(光州)를 다스리면서 부친의 성대한 업적을 추념하여 연이어 유학의 교화를 크게 펼쳤으니, 지금까지 남쪽 지방에서 집집마다 거문고를 타고 책을 읽는 것이 모두 두 현인의 영향이 아니겠습니까. 그 심오한 인덕과 두터운 은택을 사람들은 잊을 수 없습니다. 흥성(興城 지금의 고창(高昌))의 동산(東山)은 바로 문간공이 지팡이를 짚고 소요하던 곳입니다. 그래서 온 도의 유생이 함께 의논하여 사당을 세워,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과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을 한 서원에서 합향(合享)한 전례를 삼가 따르고, 선조(先朝)께 아뢰어 청하여 이미 은혜로운 편액을 받아 영원히 우러러 받들 장소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임인년(1722, 경종2)의 화변으로 이민서의 아들 고(故) 상신(相臣) 이건명(李健命)이 흉악한 무리의 무함을 입어 결국 적소(謫所)에서 참화를 당하였으며, 연좌의 형률이 마침내 그의 아비에게 미쳐서 출향(黜享)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아,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다행히도 이제 국운이 다시 평안해지고 하늘의 해가 연이어 밝아졌으며, 임금의 명령이 반포되어 뭇 억울한 자들이 모두 신원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건명에게도 이미 관직을 회복시키고 시호를 추증하여 억울함을 씻어 주도록 특별히 명을 내렸으니 문간공 이민서의 향사를 회복하는 은전은 바로 그다음 일입니다. 그래서 사림이 기뻐 날뛰면서 목을 빼고 기다렸으나 아직까지 조정의 처분이 내려지지 않았기에 신들은 답답한 심정을 금할 수 없어 이에 감히 발을 싸매고 와서 전하께 우러러 호소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특별히 유음(兪音)을 내리시어 향사를 회복하라는 은전을 속히 시행하신다면 세도(世道)에 큰 다행이며 사림의 큰 다행이겠습니다. 신들은 너무나 황공하고 간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어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하니, 답하기를,“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이미 관직을 회복시켰다면 향사를 회복하는 일은 그다음으로 거행해야 하니 해당 조(曹)로 하여금 속히 거행하도록 하라.”하였다.[주-D001] 임인년의 화변 : 1722년(경종2) 3월 27일에 목호룡(睦虎龍)이, 흉적이 칼이나 독약으로 경종을 시해하거나 폐출(廢黜)하려고 모의하고 있다고 고변한 것을 말한다. 《景宗實錄》
    2021-05-05 | NO.414
  • 광주 등의 전세를 영산강으로 수송케 청하는 상소 - 영조 1년
    탕평(蕩平) 등에 대한 소회를 진달하고, 정세 등을 이유로 체차해 줄 것 등을 청하는 헌납 정택하(鄭宅河)의 상소 - 영조 1년 을사(1725) 3월 25일(계해) 맑음        헌납 정택하(鄭宅河)가 상소하기를,“삼가 아룁니다. 신이 시종(侍從)의 자리에 서게 된 이래로 이제 16년이 되었습니다. 외람되이 성세(聖世)의 크나큰 은혜를 입었는데, 눈곱만큼도 보답하지 못하였으므로 항상 깊은 골짜기로 떨어질 듯이 두렵고 부끄러운 마음이었습니다. 최근 4, 5년 동안 궁벽한 시골에 버려져 있으면서 그럭저럭 분수에 맞는 편안함을 느꼈으니, 스스로를 전야의 폐기된 물건으로 여겼을 따름입니다. 그런데 뜻밖에 얼마 전 갑자기 제수의 명이 내려왔고 뒤이어 역마를 타고 빨리 올라오라는 하유가 이르렀으니, 신은 북쪽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면서도 당황스러운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습니다.<중략>신이 감히 참람함을 무릅쓰고 고향에 있을 때 보고 들은 것을 대략 진달하겠습니다. 호남의 능주(綾州), 광주(光州), 화순(和順), 동복(同福), 창평(昌平) 다섯 고을의 전세(田稅)를 포구(浦口)로 내갈 때 4, 5십 리 되는 나주(羅州) 영산강(榮山江)을 내버려 두고 멀리 3, 4일 걸리는 법성포(法聖浦)로 수송합니다. 백성이 고달프게 이고 지고 가는 모습을 말로 다할 수가 없고 먼 지역을 왕래하는 비용도 궁핍한 백성에게는 커다란 폐해가 되니, 가까운 곳을 놔두고 먼 곳으로 수송하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전에 본도에서 백성의 사정을 탐문해 장계로 보고하기까지 하였는데, 비국에 내려 의처(議處)하게 하셨으나 비국에서는 단지 곤란하다는 이유로 반대하였습니다. 처음 설치할 때에는 아마도 일시적인 폐단이 없지 않겠지만, 이는 적은 비용으로 큰 효과를 볼 수 있는 일입니다. 삼가 바라오니, 전하께서는 다시 비국과 본도로 하여금 편리한 쪽으로 의처하게 하소서.<중략>진실로 바라오니, 성명께서는 승지의 청을 속히 윤허하시어 그 죄를 징계하소서. 그리고 무릇 대계(臺啓)가 마무리되기 전에는 전지(傳旨)를 봉입할 수 없기 때문에 그중에 직책에 있으면서 논핵을 받는 사람의 수가 매우 많습니다. 시일이 경과되면서 공무(公務)가 방치되니, 정원에서 전부 하나하나 현고하게 하여 직책이 있는 자는 일단 먼저 체차하고 후임을 차출함으로써 직무가 방기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신은 면려하고 경계하는 뜻과 토죄하고 복수하는 의리에 대하여 사직 상소의 말미에 덧붙여 진달하였고, 또 간단한 몇 가지 이야기로 예람(睿覽)을 더럽혔습니다. 삼가 바라오니, 성상께서 굽어살펴 주소서. 신은 너무나 두렵고 간절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하니, 답하기를,“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조목조목 진달한 일이 참으로 합당하니,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근래의 일에 대하여 내가 윤허를 아끼는 것은 나 역시 견지하는 바가 있어서이니,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대각(臺閣)을 경시하고 조정 신하를 의심해서이겠는가. 그렇지만 공자(孔子)께서 이르기를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근심하지 말고 내가 남을 제대로 알지 못할까 근심하라.’라고 하셨다. 오늘날의 조정 신하가 먼저 탕평에 힘을 쏟는다면 위에 있는 사람이 어찌 조금이라도 붕당을 의심하겠는가. 상하가 서로의 성심을 믿고 싶다면 ‘공정하도록 힘쓴다〔務公〕’라는 2자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과거 옥사를 다스린 것이 참혹하였다지만 이제 와서 추탈(追奪)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생각한다. 두 고을 수령의 일과 상소 끝에 언급한 일은 논지가 합당하니, 모두 그대로 시행하라. 청대한 신하들의 일은 이미 승전에 유시하였다. 그대는 사직하지 말고 와서 직임을 살피라.”하였다.[주-D001] 괴수 : 김일경(金一鏡)을 가리킨다.[주-D002] 일전에 …… 하교하셨으니 : 장령 김담(金墰)이 유봉휘(柳鳳輝)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신임옥사 때에 수많이 이들이 처참한 일을 당하였으니 그 저지른 죄만큼 강한 처벌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자 이런 비답을 내렸다. 《承政院日記 英祖 1年 3月 12日》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자신에게 되돌아간다.〔出乎爾者 反乎爾者〕”라는 말은 《맹자》 〈양혜왕 하(梁惠王下)〉에 나온다.[주-D003] 사대부에서 그치지만 : 원문은 ‘至於搢紳’인데, 《회암집(晦庵集)》 권28 〈여유승상서(與留丞相書)〉에 근거하여 ‘至’를 ‘止’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주-D004] 숙원 : 원문은 ‘宿願’인데, 전사 과정의 오류로 보아 문맥을 살펴 ‘願’을 ‘怨’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주-D005] 군주가 : 원문은 ‘爲人者’인데, 문맥을 살펴 ‘者’ 앞에 ‘君’ 1자를 보충하여 번역하였다.[주-D006] 혐의를 …… 얘기 : 1721년(경종1) 노론 사대신이 세제에게 대리청정하라는 명을 받들겠다는 연명 차자를 올리자 당시 대간의 논박을 받고 있던 우의정 조태구가 창경궁의 협문(夾門)인 선인문(宣人門)으로 들어와 사알(司謁)을 통해 청대하여 명을 거두어들이도록 경종을 설득한 일을 말한다. 《景宗實錄 1年 10月 17日》[주-D007] 언교(諺敎)를 …… 일 : 환관 박상검(朴尙儉)의 세제 모해 사건으로 인해 자전(慈殿)이 세제가 위험하니 궐 밖으로 나가 살게 하라는 내용의 언문 하교를 내렸는데, 조태구가 소란스러워질 우려가 있다며 봉환(封還)한 일을 말한다. 《景宗實錄 1年 12月 23日》[주-D008] 징토하는 …… 해야 : 원문은 ‘掩懲討之典也’인데, 전사 과정의 오류로 보아 ‘掩’을 ‘嚴’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주-D009] 영덕 현령(盈德縣令) : 원문은 ‘盈德縣監’인데, 《영조실록(英祖實錄)》 1년 3월 25일 정택하(鄭宅河)의 상소에 근거하여 ‘監’을 ‘令’으로 고쳐 번역하였다.[주-D010] 전에 …… 것 : 《승정원일기》 영조 즉위년 9월 29일의 지평 이진수(李眞洙)의 계사에서 보인다.[주-D011] 승지가 …… 진달하였으나 : 이달 22일 정형익(鄭亨益)이 올린 상소를 가리킨다.
    2021-05-05 | NO.413
  • 이민서의 사우에 사액을 허락하지 않다 - 영조 1년 을사(1725)2월 25일(계사) 맑음
    진수당(進修堂)에서 예조 판서 민진원 등을 인견하는 자리에 승지 김상옥 등이 입시하여 국본(國本)을 정하는 문제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 영조 1년 을사(1725) 2월 25일(계사) 맑음 사시(巳時)에 상이 진수당(進修堂)에 나아갔다. 예조 판서 민진원(閔鎭遠), 예조 참판 허윤(許玧)이 청대하여 입시한 자리이다. 승지 김상옥(金相玉), 가주서 김정봉(金廷鳳), 기주관 최도문(崔道文), 기사관 이태징(李台徵)이 입시하였다. <중략>민진원이 아뢰기를,“고(故) 판서 이민서(李敏敍)는 광주 목사(光州牧使)와 나주 목사(羅州牧使)를 지낼 적에 치적이 가장 뛰어났고 유가(儒家)의 교화(敎化)를 성대하게 일으켰으므로 남방 사람들이 지금도 추모합니다. 옛날 숙종 때에 남방의 선비들이 상소를 올려 사우(祠宇)를 세워서 존경을 표하는 장소로 삼기를 청하였는데, 윤허를 받아 사우를 세웠습니다. 그 뒤에 또다시 사액(賜額)해 주기를 청하였는데 그 당시에 소신이, 사우를 세우는 것을 허락하였으니 사액을 허락하는 것이 옳다고 아뢰어서 또다시 허락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때 이대성(李大成)이 상소를 올려 사액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논하자 숙종께서는 이대성의 말이 옳다고 하교하셨으므로 일이 중지되고 거행되지 못하였습니다. 지난번에 이진유(李眞儒)가 다시 청하여 그 사우를 헐어 버렸는데 이번에 남방의 선비들이 또다시 상소하여 다시 세우고 사액해 주기를 청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사우는 서원과는 다르며 당초에 사우를 세우는 것을 숙종께서 특별히 허락하셨으니 지금 다시 세우는 것은 진실로 당연합니다만 사액해 주는 것은 숙종께서 허락하지 않으셨으니 어떻게 해야겠습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사우는 서원과 다르고 숙종께서 이대성의 말이 옳다고 하신 것에 뜻이 있으니, 사우를 세우는 것만 허락하고 사액하는 것은 허락하지 말라.”하였다. <중략>
    2021-05-05 | NO.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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