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마을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최경회와 김덕령을 증직하라는 상소 - 영조 1년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킨 좌찬성 최경회(崔慶會) 등에게 시호와 포상의 은전을 내려 주기를 청하는 전라도 생원 이만영(李萬榮) 등의 상소 - 영조 1년 을사(1725) 9월 10일(갑진) 맑음        


전라도 생원 이만영(李萬榮) 등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예로부터 제왕이 절의를 위해 죽는 사람에 대해 포상(褒賞)하여 높이고 권장한 것은 비단 충성스러운 혼과 꿋꿋한 넋을 위로하여 답할 뿐만이 아니라 불쌍하게 여기고 도와주려는 뜻을 보여 주기 위해서이니, 실은 나라를 위하여 풍교를 세우고 강상을 부지하는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임진년(1592, 선조25)의 변란을 당하여 충성을 바치고 절개를 지키다 죽은 사람이 한두 사람으로 헤아릴 수 없지마는 열성조에서 훈공을 기록하고 충성을 포상하고 시호를 내려 주고 작위를 증직해 주는 은전도 갖추어 주었으니, 죽은 사람이나 산 사람이나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이에 공적은 서로 비슷하나 포상이 고르지 못한 경우가 있다면 나라에서 베푸는 은전에 얼마나 흠이 되는 일이며 공의(公議)가 얼마나 애석해하고 탄식할 일이겠습니까.
섬 오랑캐가 침범하여 열읍(列邑)이 와해될 즈음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순절(殉節)한 선비들이 호남에서 많이 나왔는데, 만약 그중 가장 이름난 이를 말한다면 증(贈) 영의정 김천일(金千鎰), 증 좌찬성 고경명(高敬命), 증 좌찬성 최경회(崔慶會)가 이들입니다. 세 신하는 모두 백수(白手)로 의병을 일으켜 칼을 뽑아 들고 목숨을 바쳐 적과 싸워 후일에 수복하는 기초가 되었으니, 그 공과 그 절개가 어찌 참으로 우뚝하고 빛나지 않겠습니까. 선묘(宣廟)께서 즉시 훈공을 기록하라 맹부(盟府)에 명하시고 또 사원(祠院)에 편액을 반사하라 명하시어 높이고 장려하는 은전을 일체 균등하게 시행하였으니, 증시(贈諡)하는 은전에 이르러서도 마땅히 세 사람이 차이가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난번 성고(聖考)께서 임어하시던 날에 김천일과 고경명 두 신하는 증시의 은전을 받았는데 유독 최경회만 고르게 은전을 받지 못했습니다. 대개 최경회의 후손이 영체하여 김천일이나 고경명 두 신하와 같이 억울함을 말하지 못하여서 성상께서 두루 살펴 주지 못해서 그렇다고 합니다.
신들이 삼가 엎드려 생각해 보니, 최경회는 문헌공(文憲公) 최충(崔沖)의 후손으로 성품은 충과 효를 온전히 지키고 학문은 밝은 스승의 질정을 받았으며 한 번 벼슬길에 나온 후에는 문무의 재주를 온전히 해서 명성과 덕망을 쌓았습니다. 왜구가 처음 쳐들어왔을 때 이광(李洸)의 군대가 공주(公州)에서 무너지고 황영(黃永)의 적이 금산(錦山)으로 들어 왔는데 김천일은 멀리 기보(畿輔)를 향하고 있고 고경명은 금산에서 죽었으니 호남 백성의 목숨이 거의 어육이 되었습니다. 최경회는 그때 어미의 상중에 있었는데 군중들이 추대하니 상복을 입고 시의를 좇아 변통하여 소매를 걷어붙이고 싸움에 임하며 말하기를 ‘임금이 근심하면 신하는 그것을 치욕으로 여기고 임금이 치욕을 당하면 신하는 치욕을 씻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 구구한 사정과 예는 돌아볼 것이 없다.’라고 하며 궤연(几筵)에 절하고 동남으로 격문을 전하니, 달포 안에 갑자기 큰 진을 이루게 되어 밤낮으로 군사를 움직여 장수(長水)에 나아가 주둔하니 왜노(倭奴)가 듣고 영남으로 물러나 의거하였습니다. 최경회가 의병들과 힘을 합쳐 싸워서 개령(開寧)의 적을 막아 냈습니다. 선묘(宣廟)께서 전교하시기를 ‘영남의 우계(右界)와 호남 한 도가 지금까지 보전된 것은 이 사람의 공 아닌 것이 없다.’라고 하고 특별히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에 제수하였습니다. 적병이 진주(晉州)를 포위하자 어떤 이가 그 형세를 보고 진퇴하여 후일의 공적을 도모하기를 권하였는데, 최경회는 주먹을 불끈 쥐고 성난 소리로 말하기를 ‘성이 보존되면 내가 존재하고 성이 없어지면 나도 죽는다. 참으로 이렇게 구차하게 삶을 도모하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니다.’라고 하며 이에 9일 밤낮을 적과 대항하며 적병을 여러 번 물리쳤는데 외부에서 구원병이 끊어지고 내부에서는 병기와 군량이 다하여 일이 이미 글러지자 북쪽으로 향하여 재배하고 이르기를 ‘형세가 궁하고 힘이 다하여 한 번 죽음으로 보답합니다.’라고 하고 드디어 의연히 목숨을 바쳤습니다.
대개 의병을 일으킨 이래 도처에서 이겨서 우리 군사에게 사기를 더해주고 적을 좌절하게 한 것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무주(茂州)의 전투에서 한 적장이 등에는 족자 한 개를 짊어지고 손에는 8척의 언월도(偃月刀)를 잡고 앞길을 막고 있자 최경회가 활시위를 힘껏 당겨 활을 쏘자마자 거꾸러졌습니다. 그런데 그가 등에 지고 있던 것은 바로 공민왕(恭愍王)이 그린 〈청산백운도(靑山白雲圖)〉에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이 손수 제하고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이 그 위에 시를 쓴 것으로 바로 그 왜노가 우리나라에서 얻은 것이었습니다. 최경회가 죽을 때에 신임하던 막료에게 그 칼과 그림을 손수 주며 그 형인 최경장(崔慶長)에게 전해 주라고 하면서 이르기를 ‘우리 형님이 내가 죽었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마땅히 의병을 일으킬 것이니 이것으로 표지를 삼으라.’라고 하였습니다. 그 칼과 그림은 지금까지도 최경장의 후손 집에 보관되어 있으니 그 한결같은 충성과 장한 공렬은 혁혁하여 마치 어제의 일과 같아서 천백년이 지난 후대에도 사람으로 하여금 머리털이 곤두서게 할 것입니다. 성이 함락된 후에 천장(天將) 오종도(吳宗道)가 전쟁에서 죽은 장사들을 위해 지은 제문에 ‘최공이 군사를 벌이고 병기를 빛내 위엄을 보이니 왜노들이 더욱 어렵게 여기고 꺼리게 되었다.……’라고 하였는데, 선묘께서 듣고서 전교하시기를 ‘천장이 칭찬하고 왜노가 어렵게 여기고 꺼리었으니 이름이 삼국을 진동시킬 만하다고 할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드디어 이조 판서를 증직하고 또 문려(門閭)를 정표해 주셨으며 관리를 보내 치제하고 그 사당에 포충(褒忠)이라는 편액을 내려 주셨고, 인조조(仁祖朝)에 이르러 좌찬성을 더 증직하고 숭정대부(崇政大夫)의 품계를 더해 주셨습니다.
아, 최경회의 충절이 이미 저와 같고 열성조에서 높이 포창하신 것이 또 이와 같은데 시호를 추증하는 은전이 지금까지 거행되지 않고 있는 것은 다만 신들이 때에 맞춰 아뢰어 청하지 못한 죄입니다. 지금 밝으신 성상께서 즉위하신 초기에 충성을 포상하고 절개를 장려하는 은전을 더욱 급선무로 하시니 신들이 이에 서로의 기쁨을 이야기하며 발을 싸매고 천리 길을 와서 대궐 아래에서 호소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세 신하의 충성은 일체 공이 같다는 것을 믿어 살펴 주시고 또 신들의 말이 공적이고 사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채택하시어 속히 담당 관사에 명하여 은혜로운 시호를 특별히 내려 주시어 포상하고 높이는 은전으로 삼으소서.
그리고 신들은 여기에서 강개해 마지않는 것이 또 있습니다. 그 당시의 계의병장(繼義兵將) 최경장은 바로 최경회의 형입니다. 7세에 능히 ‘까마귀는 늙은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준다.’라는 시를 지어 향당에서 기이하게 여겼는데 연이어 대과(大科)와 소과(小科)에 급제하여 중외의 관직을 역임하였고 명성과 공적이 모두 드러났습니다. 임진년(1592, 선조25)의 변란이 일어났을 때 마침 상중이었는데 스스로 이르기를 ‘나라의 후한 은혜를 받았는데 몸에 상복을 입고 있어 임금의 행차를 호위할 수 없다.’라고 하며 곧 아우 최경회와 함께 뜻을 합쳐 향읍에 효유하여 의로운 군사를 불러 모아 조카인 지평 최홍재(崔弘載)를 시켜 고경명의 군대가 있는 금산으로 달려가게 하려고 했는데, 금산의 병사가 패하자 최경회는 슬픔을 참고 대장이 되고 최경장은 머물러 궤연을 지켰으니 그들이 책려하고 계획을 세워 적을 막고 저지하려는 계획은 조금도 늦춘 적이 없었습니다.
계사년(1593) 6월에 최경회가 진주에서 의롭게 죽자, 나라를 걱정하는 것과 개인적인 슬픔을 둘 다 차마 잊을 수 없어서 비록 나이가 많고 근력이 쇠진하지만 오히려 분연히 동생을 이어서 의병을 일으켜 그해 8월에 최경회의 남은 무리를 모아서 피눈물을 흘리며 군사들과 맹세하며 영남으로 향하였습니다. 그대로 행조(行朝)에 글을 올리고 도내에 격문을 전하니 몇 달이 되지 않아 주군(州郡)에서 향응하였습니다. 도원수 권율(權慄)이 조정에 장계로 보고하고 비변사에서 그 뜻을 아뢰기를 ‘아우는 나라를 위해 죽고 형이 또 뒤를 이어 의병을 일으키니 옛사람에게서도 그 짝을 찾기 드문 경우입니다.’라고 하니, 상께서 가상하게 여기고 장려하며 그날로 특별히 장악원 정에 제수하고 계의병장의 인수를 겸하여 주며 면려하셨습니다. 또 본도의 감사에게 전교하시어 마음을 함께하여 협력하라고 하였으며 또 해당 관사에 전교하시어 관문을 만들어 감영과 본진(本陣)에 나누어 보내라고 하셨습니다.
최경장은 명을 받들고 감격하여 더욱 한결같은 충정을 독려하여 옥과현(玉果縣)에 주둔하고 방책을 세워 훈련원 부정 선의문(宣義問)을 부장으로 삼고, 서천 군수(舒川郡守) 김윤명(金允明)을 종사관으로 삼아 의병들을 격려하여 이끌고 전진하여 고성(固城)의 견내량(見乃梁)을 막아 지켰습니다. 얼마 후에 원수(元帥)의 관문(關文)으로 인하여 군사를 석주(石柱)로 이동시키고 시설과 구획을 모두 알맞게 하니 기계와 병량이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미처 적을 만나지는 않았으나 휩쓸렸던 것을 회복하고 적을 베어 버린 공이 있었으며, 저 약탈을 일삼던 추한 오랑캐도 그가 최경회의 형인 것을 알고는 풍문을 듣고 겁을 먹어 무기를 거두고 물러가 피했습니다. 그해 12월에 왕세자가 분조(分朝)를 세우고 전주(全州)에서 무군(撫軍)하니 최경장이 즉시 달려 나아가 사은하였습니다. 그때 충용장(忠勇將) 김덕령(金德齡)이 담양(潭陽)에서 의병을 일으켰는데 아직 군졸이 없었습니다. 이에 무군사(撫軍司)에서 조정에 계문(啓聞)하여 계의병의 무기와 병량을 모두 김덕령에게 옮겨 주라고 하였으니, 대개 최경장의 나이가 이미 망칠(望七)이라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싸우기 어려울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에 최경장은 그 병량을 모두 수송해 주고 그 진호(陣號)를 파하고 돌아갔으니 이것이 최경장이 능히 한번 전공을 세울 수 없었던 까닭입니다. 의병을 일으킨 날에 죽지 못하여 당시에 의병을 일으킨 선비와 같이 포상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 어찌 충성과 효도가 다른 사람보다 못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아, 신하의 충성과 의로움은 본디 성패(成敗)와 사생(死生)을 가지고 단정 지을 수 없는 것이고 오직 그 당시에 의에 맞게 처신했느냐와 마음씀을 가지고 논하는 것이니, 지금 이 최경장이 동생이 죽은 뒤에 이어 떨쳐 일어나 노년의 나이에 의병을 일으킨 것이 어찌 늠름하게 대의를 우뚝 세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처음에는 조카를 시켜 금산으로 달려가 구원하게 하려 하고, 중간에는 동생을 진주에서 의롭게 죽게 했으며, 결국에는 자신도 이어서 일어나 의로운 군사를 불러 모아 충용장이 쓸 수 있도록 하였으니, 그 당당한 충의의 기개는 마땅히 죽었느냐 죽지 않았느냐를 가지고 차등을 두어 다르게 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만약 최경장에게 끝까지 무기를 들고 싸워 충성을 다하게 두었더라면 그 성패와 이둔(利鈍)을 비록 미리 예측할 수 없더라도 그가 장차 최경회가 죽은 자리로 달려 나가 목숨을 바칠 것이라는 것은 전혀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신들이 또 삼가 들으니 일찍이 숙묘조(肅廟朝) 때 본도의 유생들의 상소로 인하여 특별히 고 지평 박광옥(朴光玉)에게 증직을 더하고 시호를 내려 주는 은전을 베푸시고, 충용장 김덕령과 함께 광주(光州)의 의열사(義烈祠)에 같이 향사하라고 하셨다 합니다. 대개 박광옥은 창의하는 병사를 처음 일으켰으며 청을 설치하고 병사를 모집하여 의병에게 준 공이 있으나 죽음을 무릅쓰고 전투에 나가 죽은 절개가 있는 것이 아닌데도 성고(聖考)께서 오랜 뒤에 추가로 장려하여 포상하신 것이 오히려 저렇게 더욱 융숭합니다. 하물며 최경장이 전후로 힘을 다하여 주선하고 모은 군사를 위촉하여 최경회와 김덕령의 공적과 절개를 이루게 한 것이 어찌 박광옥보다 못하겠습니까. 포장하는 은전이 유독 미치지 않은 것을 신들이 강개하고 분통해한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최경회에 대해 올린 상소에 부득불 나란히 충성을 바친 형제의 아름다운 일을 진술하여 작질을 증직하고 포상의 은전을 내려 주기를 기대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특별히 굽어살피시고 모두 윤허하여 후생을 격려하고 권장하는 바탕이 되게 해 주신다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지금 그대들의 상소를 보니 두 신하의 충절이 위엄이 있고 당당하게 살아 있는 것만 같다. 해당 조로 하여금 내게 물어 처리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주-D001] 문정공(文靖公) : 
원문은 ‘文正公’인데, 《목은고(牧隱藁)》 〈조선목은선생이문정공행장(朝鮮牧隱先生李文靖公行狀)〉에 근거하여 ‘正’을 ‘靖’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2] 본진(本陣) : 
원문은 ‘本陳’인데, 전사하는 과정의 오류로 보아 ‘陳’을 ‘陣’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저자(연도) 제목 발행처
광주·전남향토사연구협의회(2003) 광주 향토사 연구 (사)광주·전남향토사연구협의회
광주광역시 동구청(2021) 동구의 인물2 광주광역시 동구청
광주시남구역사문화인물간행위원회(2015) 역사를 배우며 문화에 노닐다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01)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Ⅰ 인물과 문헌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01)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Ⅱ 문화유적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14) 광주 남구 마을(동)지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14) 광주 남구 민속지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21) 양림 인물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동구문화원(2014) 광주광역시 동구 마을문화총서 Ⅰ 광주동구문화원
광주문화관광탐험대(2011~16) 문화관광탐험대의 광주견문록Ⅰ~Ⅵ 누리집(2023.2
광주문화원연합회(2004) 광주의 다리 광주문화원연합회
광주문화원연합회(2020) 광주학 문헌과 현장이야기 광주문화원연합회
광주문화재단(2021) 근현대 광주 사람들 광주문화재단
광주북구문화원(2004) 북구의 문화유산 광주북구문화원
광주서구문화원(2014) 서구 마을이야기 광주서구문화원
광주시립민속박물관 옛 지도로 본 광주 광주시립민속박물관
광주시립민속박물관(2004) 국역 光州邑誌 광주시립민속박물관
광주시립민속박물관(2013) 영산강의 나루터 광주시립민속박물관
광주시립민속박물관(2018) 경양방죽과 태봉산 광주시립민속박물관
광주역사민속박물관(2020) 1896광주여행기 광주역사민속박물관
광주역사민속박물관(2021) 광주천 광주역사민속박물관
김경수(2005) 광주의 땅 이야기 향지사
김대현.정인서(2018) 광주금석문, 아름다운 이야기 광주문화원연합회
김정호(2014) 광주산책(상,하) 광주문화재단
김정호(2017) 100년 전 광주 향토지명 광주문화원연합회
김학휘(2013) 황룡강, 어등의맥 16집. 광산문화원
김학휘(2014) 광산의 노거수, 어등의맥 17집. 광산문화원
김학휘(2015) 광산나들이, 어등의맥 18집. 광산문화원
김학휘(2016) 설화와 전설, 어등골문화 21호. 광산문화원
김학휘(2018) 광산인물사, 어등의맥 21집. 광산문화원
김학휘(2019) 마을사이야기, 어등골문화. 광산문화원
남성숙(2017) 전라도 천년의 얼굴 광주매일신문
노성태(2016) 광주의 기억을 걷다 도서출판 살림터
노성테.신봉수(2014) 사진과 인물로 보는 광주학생독립운동 광주문화원연합회
박규상(2009) 광주연극사 문학들
박선홍(2015) 광주 1백년 광주문화재단
정인서(2016) 산 좋고 물 맑으니-광주의 정자 광주문화원연합회
정인서 외(2015) 광주의 옛길과 새길 시민의 소리
정인서(2011) 양림동 근대문화유산의 표정 대동문화재단
정인서(2011) 광주문화재이야기 대동문화재단
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2016) 광주 역사문화 자원 100(上,下) 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
천득염(2006) 광주건축100년 전남대학교출판부
한국학호남진흥원(2022) 광주향약 1,2,3. 한국학호남진흥원
  • 광주광역시
  • 한국학호남진흥원
  • 사이버광주읍성
  • 광주서구청
  • 광주동구청
  • 광주남구청
  • 광주북구청
  • 광주광산구청
  • 전남대학교
  • 조선대학교
  • 호남대학교
  • 광주대학교
  • 광주여자대학교
  • 남부대학교
  • 송원대학교
  • 동신대학교
  • 문화체육관광부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 국립아시아문화전당
  • 광주문화예술회관
  • 광주비엔날레
  • 광주시립미술관
  • 광주문화재단
  • 광주국립박물관
  • 광주시립민속박물관
  • 국민권익위원회
  • 국세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