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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집(高峯集)》 해제(解題) 2- 생애와 학문

기대승(奇大升, 1527~1572), 사단칠정(四端七情)의 논()을 씀


1. 머리말

이 책은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1527~1572)의 문집과 저술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4책으로 출판한 것이다. 《고봉집(高峯集)》은 1989년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국역하여 펴낸 바 있다. 1970년에 간행된 석인본을 대본으로 한 기왕의 국역서는 부분적으로 누락된 자료가 있었고 국역한 시기가 18년 저편의 일로 그동안 맞춤법이나 문체 역시 얼마간 달라졌다. 여기에 새로운 자료를 수습하여 번역하고 각주를 보충한 다음 역문(譯文)을 전체적으로 윤문, 교정하여 《국역 고봉전서(國譯高峯全書)》로 펴내게 되었다. 이 사업의 배경에는 후손가의 열의와 후원도 적지 않았다.


고봉은 주자학에 조예가 깊었던 학자로서 퇴계와 함께 사단(四端)ㆍ칠정(七情)에 관한 논변을 주고받으며 조선 성리학의 심화를 가져온 인물로 평가받는다. 고봉이 포은(圃隱)에서 정암(靜庵)으로 이어지는 조선의 도통(道統)을 경연에서 언급한 적이 있거니와, 조선 초기의 주자학은 학문으로서의 체계와 깊이를 엄밀하게 갖춘 편은 못 되었다. 주자 문집의 경우만 하더라도 문종조에 이르기까지 3차례 부분적으로 중국에서 들여온 기록이 있을 뿐 국내에서 간행되고 배포되었다는 사실을 단 한 차례도 발견할 수가 없다. 몇 차례의 구체적 간행 사실이 확인되는 《성리군서구해(性理群書句解)》와 《성리대전(性理大全)》 및 《근사록(近思錄)》이 주자학을 이해하는 데 주요한 저작이었던 셈인데, 그에 대한 연구도 그나마 철저하지 못했던 듯하다.


조선에 있어서 주자학의 본격화는 중종 계미년(1523)에 교서관에서 《주자대전(朱子大全)》을 간행ㆍ반포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겠으며, 퇴계와 고봉의 논쟁을 통해 비로소 본격적인 학문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요컨대 고봉은 주자학을 체계화하고 심화한 학자로서 조선 전기 학술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이에 본고는 《국역 고봉전서》를 펴내면서 그 서지 사항 및 고봉의 생애와 학술에 대해 개략적인 정보를 제공하고자 한다.



2. 고봉의 생애와 학문


1) 생애

고봉의 자는 명언(明彦),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중종(中宗) 22년 정해년(1527) 11월 18일에 광주(光州) 소고룡리(召古龍里) 송현동(松峴洞)에서 태어났다. 고봉의 선친 물재(勿齋) 기진(奇進)은 아우 복재(服齋) 기준(奇遵)과 함께 유학하였다. 그러나 복재가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어 죄를 받는 것을 보고 세상에 대한 마음을 끊은 데다 모부인마저 돌아가시자 복제(服制)가 끝난 뒤 광주로 내려와 살았다.

고봉은 7세 때부터 가정에서 수학(受學)하였다. 9세에 《효경(孝經)》을 읽고 손수 베꼈다. 10세 때 선친을 따라 산사에 가서 글을 익혔다. 이로부터 13세에 이르기까지 《대학(大學)》을 비롯하여 사서를 익히고, 《고문진보(古文眞寶)》와 《사략(史略)》, 《한서(漢書)》를 읽었다. 고봉은 당시를 회상하며 늘 동료들과 더불어 연구(聯句)를 짓거나 문장을 지었다고 술회했다.

14세 때부터는 《강목(綱目)》에 잠심하였으며, 여기에서 쌓은 문리를 바탕으로 《논어(論語)》와 《서전(書傳)》을 모두 외웠다고 한다. 이어서 《시전(詩傳)》과 《주역(周易)》을 읽었다. 16세 무렵에는 130구(句)가 되는 〈서경부(西京賦)〉를 지었다고 스스로 회고하는데, 이것으로 볼 때 이 시절의 고봉은 과거를 염두에 두고 과부(科賦)에도 힘을 쏟은 듯하다.

17세에 《전한서(前漢書)》, 《후한서(後漢書)》 및 《여지승람(輿地勝覽)》을 읽었으며, 곧 과거를 보리란 기대를 갖고 시부(詩賦) 창작에 한동안 열을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 성과가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을뿐더러 과거 공부에 그다지 재미를 붙이지도 못했던 것 같다. 가을에 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을 한다. 과거 공부를 지향하던 고봉의 공부는 이 어름에서 조금 방향을 틀게 된다. 과부 수업에 끝을 맺고 성리학에 눈을 뜬 것이다.

고봉은 나이 18세에 《심경(心經)》을 읽는다. 이때를 기점으로 그의 문장에서 과문의 투식은 배제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여전히 송순(宋純:1493~1582)을 찾아가 《맹자》와 한유(韓愈)의 글을 읽고 용산(龍山) 정희렴(鄭希廉:1495~1554)을 찾아가 부를 짓는 등 과거에 대한 지향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로 인해 20세에 향시(鄕試) 진사과(進士科)에 응시하여 2등으로 합격하고 21세 되던 해 정월에 성균관(成均館)에 유학하였다.

23세에 일재(一齋) 이항(李恒:1499~1576)을 배알하고, 사마 양시(司馬兩試)에서 모두 2등을 하였다. 25세에 알성시(謁聖試)에 응시하여 급제할 수 있었는데 윤원형(尹元衡)이 그의 이름을 꺼려 하등의 점수를 주는 바람에 낙제하였다. 하지만 28세에 동당 향시(東堂鄕試)에 응시하여 장원을 하였다. 29세에는 선친인 물재공(勿齋公)의 상을 당하였다.

표면적으로만 보자면 이 시기를 과거에 대한 지향 시기로 볼 수도 있겠다. 다섯 차례 전후로 치른 과거시험과 몇 차례의 장원은 고봉이 분명 이 시기 동안 일정 부분 과거에 노력을 경주하였고, 그에 상당하는 가시적 성과를 거두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10대 말에서 30대 초반에 이르는 10여 년의 이 시기에 고봉의 관심을 끌었던 것이 과거공부보다는 성리학이었다는 점이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주자대전》에 관심을 가졌을 터인데, 고봉의 나이 31세에 《주자문록(朱子文錄)》을 완성했다는 것을 보면 20대의 고봉이 주자학에 얼마만큼 잠심하였는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주자대전》 가운데 시편(詩篇)을 제외한 여타의 부분에서 학문과 출처에 관한 중요한 글을 꼼꼼하게 가려 뽑은 이 저작은 《주자대전》에 깊이 정통하지 않고는 이루어 내지 못할 업적물이기 때문이다.

30대의 고봉은 본격적으로 도학 선배들과 교유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퇴계(退溪)와 사칠이기(四七理氣)에 관한 논변을 통해 조선 주자학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고 심화하는 데 획기적인 공로를 이룩했다. 먼저 고봉은 32세인 1558년 7월에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1510~1560)를 배알하였다. 8월에 추만(秋巒) 정지운(鄭之雲:1509~1561)이 고봉을 찾아와 〈천명도설(天命圖說)〉에 대해 강론하였는데, 정론이 될 수 없다는 이유로 고봉이 논쟁하였다.

이때 퇴계는 고향에 있었다. 10월에 문과 을과(乙科)에 1등으로 급제한 고봉은 그달에 서울에서 퇴계를 배알하고, 처음으로 사단ㆍ칠정을 발론하였다. 이때의 토론을 바탕으로 이듬해인 33세에 〈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을 지었다. 11월에 태극과 음양에 대해 일재 이항, 하서 김인후와 토론을 벌였다. 12월에 박순(朴淳:1523~1589) 편에 편지를 보내 추만의 〈천명도〉에 퇴계가 “사단은 이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다.[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라고 정정한 것에 반론을 제기하였다.

그리고 고봉의 나이 33세 되던 1559년 3월 퇴계가 답장을 해옴으로써 논쟁이 발발한다. 고봉은 이어 34세에 퇴계에게 편지를 올려 사단ㆍ칠정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논하였으며, 이 논쟁은 고봉이 마흔이 되는 1566년까지 지속된다. 39세 되던 1565년 12월에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1515~1590)이 양이(量移)되어 진국원(鎭國院)을 지나갈 때 고봉은 그를 찾아가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에 대해 논하였는데, 이때 소재는 정암(整菴)의 소견이 적확하다고 하였다. 뒤에 고봉은 〈곤지기론(困知記論)〉을 지어 이기일물(理氣一物)을 주장한 정암의 논리에 반박하였다.

한편 이 시기는 고봉이 여러 선배들과 끊임없이 논변에 열을 올리는 한편 출사하여 자신의 경세관을 펴던 출사기에 해당한다. 35세에 통사랑 권지승문원부정자(通仕郞權知承文院副正字),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藝文館檢閱兼春秋館記事官), 37세 4월에 예문관 봉교(藝文館奉敎)에 제수되었는데 병으로 정사(呈辭)하여 체직되고 주서로 옮겨 제수되었다. 8월에 이량(李樑)이 헌부를 사주하여 고봉과 박소립(朴素立), 윤두수(尹斗壽), 윤근수(尹根壽), 이문형(李文馨), 허엽(許曄)을 논박하였는데, 고봉을 수괴로 지목하여 문외출송(門外出送)하였다. 19일에 남쪽으로 귀향간 고봉은 10월에 다시 조정에 들어와 11월에 홍문관부수찬 겸 경연검토관 춘추관기사관(弘文館副修撰兼經筵檢討官春秋館記事官)에 배수되었다.

40세 되던 1566년에 통덕랑(通德郞)에 제수되고, 또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과 지제교에 배수되었다. 고봉은 이때 은둔하여 고향에 있으면서 조정에 나가지 않았으나, 재차 소명(召命)이 있었으므로 조정으로 돌아와 사은하였다. 이어 41세 되던 1567년에 원접사 종사관(遠接使從事官)으로 관서(關西)에 나갔다. 돌아오자 공의전(恭懿殿 명종의 형인 인종의 왕비)의 복제에 관한 논의가 있었다.

당시에 “공의전(恭懿殿)은 명종과 서로 수숙(嫂叔)의 사이이니 의당 복(服)이 없어야 한다.”는 견해가 있었고 퇴계도 이에 찬동하였다. 이때 고봉이 “형제가 왕통을 계승하여 군신 관계가 성립되었으면 곧 부자간과 같으니 의당 기년복(朞年服)을 입어야 한다.” 하니, 퇴계가 크게 잘못을 깨닫고 기명언 덕분에 천고의 죄인이 되는 것을 면했노라고 했다.

42세 되던 1568년에 승정원동부승지 지제교 겸 경연참찬관(承政院同副承旨知製敎兼經筵參贊官)에 배수되었고,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배수되었다. 이 무렵 고봉은 경연의 강의에서 인사(人事), 시무(時務), 교육(敎育) 등에 관하여 평소 자신의 마음속에 있던 경세관을 편다. 명종 19년인 1564년에서 선조 2년인 1569년까지 경연에서 강연한 이 내용은 뒤에 《논사록(論思錄)》 상편으로 묶이게 된다.

43세 되던 1569년 3월에 고봉은 배 위에서 송별시를 주고받으며 저자도(楮子島)까지 따라 나와 퇴계를 송별하였다. 이달에 대사간(大司諫)에 배수되었다. 4월에 차자를 올려 문소전(文昭殿)에 대해 논하였다. 8월에 성균관 대사성에 배수되었으나 9월에 병으로 체직되었다.

고봉은 44세 되던 1570년 2월에 남쪽으로 귀향하였다. 돌아오자마자 5월에 고마산(顧馬山) 남쪽에 낙암(樂庵)을 짓고 신진 학자들을 맞아 학문 세계로 침잠한다. 낙암의 ‘낙(樂)’은 ‘가난할수록 더욱 도를 즐길 수 있다[貧當益可樂]’는 퇴계의 말에서 따온 것이다. 이 무렵의 고봉이 지향하던 정신세계가 암자의 이름에 상징적으로 집약되어 있다고 하겠다. 6월에 부경사(赴京使)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12월에 퇴계의 부음(訃音)을 듣고는 곡읍의 예를 행하였다.

45세 되던 1571년 2월 무렵 귀전암(歸全庵)에 유람하였는데, 이때 자제 효증(孝曾)에게 장례지를 일러주었다. 4월에 홍문관부제학 겸 경연수찬관 예문관직제학(弘文館副提學兼經筵修撰官藝文館直提學)에 배수되었으며 소명이 있었으나 5월에 소장을 올려 해직을 청하였고, 문인들과 〈태극도(太極圖)〉에 대해 강론하였다. 선조 2년(1568) 5월부터 선조 5년까지 조정에서 강론한 내용은 《논사록》 하편에 묶인다.

46세 되던 융경 6년 임신년(1572) 주청사(奏請使)에 충원되어 상경하였다가 대사간(大司諫)에 배수되었다. 5월에 병으로 대사간에서 체직되었다가 9월에 다시 대사간에 배수되었는데, 그날 곧바로 병으로 정사(呈辭)하였다. 10월 3일에 남쪽으로 귀향하여 10일 천안(天安)에 도착하여 병을 앓기 시작했다. 15일에 태인(泰仁)에 도착하였는데, 병이 더욱 악화되어 그대로 머물며 조리하였다. 25일에 병이 위중하여 사돈인 매당(梅堂) 김점(金坫)의 집으로 자리를 옮기고는 11월 1일 4경에 졸하였다. 계유년(1573) 2월 8일에 나주(羅州)의 치소(治所) 북쪽 오산리(烏山里) 통현산(通峴山) 광곡(廣谷) 묘좌유향(卯坐酉向)의 언덕에 안장되었다.

1578년(선조11)에 호남의 유생들이 낙암 아래에 사당을 세워 위패(位牌)를 모시고는 석채례(釋菜禮)를 행하였다. 1590년 광국공신(光國功臣)에 녹훈(錄勳)되고 수충익모광국공신(輸忠翼謨光國功臣)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지경연의금부춘추관성균관사(吏曹判書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에 추증되었으며, 덕원군(德原君)에 봉해졌다.

그리고 문헌(文憲)이란 시호가 하사되었는데, ‘문(文)’은 도덕과 박학을 상징한 것이고 ‘헌(憲)’은 기록할 만한 선행의 표상을 상징한 것이다. 임진왜란 후에 서원을 망월봉(望月峯) 아래 동천(桐川)가로 옮겼는데, 낙암과는 20리 떨어진 곳이다. 1654년(효종5) 월봉서원(月峯書院)이라 사액(賜額)하였다.


2) 학문

고봉이 퇴계에게 질문을 시작하여 주고받은 〈사칠왕복서(四七往復書)〉는 사칠이기론(四七理氣論)의 쟁단(爭端)을 제공하여 한국 사상사의 가장 큰 흐름의 시원(始源)이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 고봉과 퇴계 이전에 사단과 칠정에 관한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본격적으로 논의되고 체계화된 것은 아무래도 두 사람 간의 논변에서 출발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어 율곡(栗谷)과 우계(牛溪) 사이에 논쟁이 벌어져 이것이 《사칠서변(四七書辨)》으로 묶였으며, 성호(星湖)의 《사칠신편(四七新編)》, 우담(愚潭)의 《사칠이기변(四七理氣辨)》, 한수재(寒水齋)의 《사칠이기변》, 대산(大山)의 《사칠설(四七說)》, 한주(寒州)의 《사칠원위설(四七原委說)》 등 내로라하는 학자들의 관련 저술이 조선 후기까지 족출(簇出)하였다. 고봉과 퇴계의 논쟁은 조선 지성사에서 차지하는 이런 중요성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다각도의 연구가 요구되고 있다.


① 논변의 발단

계축년(1553) 가을, 추만(秋巒) 정지운(鄭之雲)은 자신이 작성한 〈천명도설〉을 가지고 퇴계에게 질정을 구했다. 이에 퇴계는 “사단은 이에서 발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한다.[四端發於理 七情發於氣]”라는 추만의 설을 “사단은 이의 발함이요 칠정은 기의 발함이다.[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라고 고쳐 주었다. 그 후 추만은 퇴계의 의견을 수렴하여 개정한 도설을 가지고 와서 퇴계에게 보여 주었고, 퇴계가 그것을 다시 교정하여 완전히 정리함으로써 〈천명도설〉은 새롭게 완성되었다. 12월에 퇴계는 〈천명도설 후서(天命圖說後敍)〉를 지어 추만에게 주었고, 이듬해 정월 추만은 〈천명도설서(天命圖說序)〉를 지었다. 고봉이 이 〈천명도설〉을 접한 것은 그의 나이 32세인 1558년 가을이다. 추만이 〈천명도설〉을 가지고 고봉을 찾아와 함께 토론한 것이다. 고봉은 이때 위에 언급한 퇴계의 의견에 이의를 제기하였다.

퇴계는 추만과 고봉의 논쟁 전말을 전해 듣고 논리를 정정해 편지를 보낸다. “사단이 발하는 것은 순리(純理)이기 때문에 선하지 않음이 없고, 칠정이 발하는 것은 겸기(兼氣)이기 때문에 선ㆍ악이 있다.[四端純理故無不善 七情兼氣故有善惡 如此則無病否]”는 것이 그 골자인데, 이것이 사칠 논변의 시발점이다. 1559년 고봉의 나이 33세 때의 일이다. 고봉은 퇴계의 편지를 받고 답장을 보내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요지만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 사단과 칠정은 모두 정(情)이다. 다만 사단은 칠정 가운데서 선한 일부분만 떼어낸 것으로 ‘발하여 절도에 맞는 것의 묘맥[發而中節者之苗脈也]’이다.

○ 사단과 칠정을 이(理)와 기(氣)에 분속시키면 이는 이와 기를 완전히 분리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기불상리(理氣不相離)의 논리에 어긋난다.

○ 이는 기의 주재이고 기는 이의 재료여서 본래 구분되지만 사물에 있어서는 혼륜(渾淪)하여 나눌 수가 없다.

○ 칠정의 발현은 기의 과불급(過不及)으로 인해 선악으로 갈라지므로 이가 기에서 벗어나지 않고, 기가 과불급 없이 자연히 발현되는 것은 마침내 이의 본체가 그러하다는 것이다.


고봉의 주장은 사단 역시 정(情)이고, 따라서 기가 배제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만 칠정이 발하여 중절(中節)한 것, 성이 발할 때 기가 아직 용사하지 않아 본연의 선이 곧바로 이루어진 것, 기가 자연스럽게 발하여 과불급이 없는 것, 기가 이에 순응하여 발하되 한 터럭이라도 장애가 없는 것으로 본 것이다. 퇴계는 이 편지를 받고 사단 역시 정이라는 고봉의 견해에 동의하면서도 사단과 칠정은 소종래(所從來)가 다르다고 한다. 사단은 본연지성(本然之性)에 근원하고 칠정은 기질지성(氣質之性)에 근원한다는 말이다.


고봉은 다시 편지를 보내 여기에 대해서도 이견을 제시한다. 사단과 칠정을 나누어 논의하는 것은 좋지만 도식화하여 대거(對擧)하면 마치 두 가지의 대별되는 정이 있는 것 같고, 정에 또 두 가지의 선이 있어 하나는 이에서 발원하고 하나는 기에서 근원하는 것처럼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는 주장이다. 퇴계의 주장에 반박하는 고봉의 견해는 이러하다. 먼저 기질지성은 그 자체로 이미 본연지성을 포함하고 있다. 둘째, ‘정은 성의 발함이다.’라는 논리대로 말하자면 칠정 역시 인의예지(仁義禮智)에서 발하는 것이다. 셋째, 사단의 정을 느끼는 것은 기(氣)이고, 그 소이연은 이(理)이다. 넷째, 사단 역시 중절하지 못하면 선하지 않다. 이런 이유들을 근거로 퇴계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고 하였다.


② 논변의 전개와 성격

고봉의 두 번째 편지를 받은 뒤 퇴계는 사단과 칠정의 관계를 사람과 말[馬]에 비유하여 설명하면서 대별하여 말하든 하나로 말하든 고봉이 지적한 ‘이기불상리(理氣不相離)’에는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하고, 여전히 사단과 칠정의 소종래는 다르다고 논박하였다. 이는 퇴계가 고봉의 문제 제기를 상당 부분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기본 논리를 굽히지 않은 것인데, 이때 퇴계가 내놓은 논리가 “사단은 이가 발하여 기가 따르고 칠정은 기가 발하여 이가 탄다.[四端理發氣隨之 七情氣發理乘之]”는 것이다.


[가] 대개 혼합하여 말할 경우 칠정이 이ㆍ기를 겸하였다는 것은 많은 말을 기다리지 않아도 분명하지만, 칠정을 사단과 대거(對擧)하여 각각 구분하여 말하면 칠정과 기의 관계가 마치 사단과 이의 관계와 같아 그 발하는 데 각각 혈맥이 있고, 그 이름에 모두 가리키는 바가 있기 때문에 그 주된 바에 따라 이ㆍ기에 분속할 수 있습니다. 나도 칠정이 이(理)와 관계없이 외물이 우연히 서로 모여 감동하는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단이 외물에 감응하여 움직이는 것은 진실로 칠정과 다르지 않지만, 사단은 이가 발하여 기가 따르고 칠정은 기가 발하여 이가 타는 것입니다.

[나]“사단은 이가 발하여 기가 따르고 칠정은 기가 발하여 이가 탄다.”는 두 글귀가 매우 정밀하지만, 저의 생각에는 이 두 구절의 뜻이 칠정은 이ㆍ기를 겸유(兼有)하고 사단은 이가 발한 한쪽만을 가진 것이 될 뿐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두 글귀를 “정이 발할 때는 혹 이가 움직여 기가 함께하기도 하고, 혹 기가 감응하여 이가 타기도 한다.”라고 고치고 싶은데, 이와 같이 말을 만드는 것이 또 선생의 생각에 어떠할지 모르겠습니다.


[가]는 퇴계가 고봉에게 답한 제2서이고, [나]는 이른바 제3서라고 하는 고봉의 답장이다.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고봉은 퇴계가 펴는 호발론(互發論)의 논리에 수긍하는 한편 ‘이발기수 기발이승(理發氣隨 氣發理乘)’을 ‘이동기구 기감이승(理動氣俱 氣感理乘)’으로 고치고 싶어 한다. 여기에 대해 퇴계는 답장을 썼으나 보내지 않았고, 고봉이 뒤에 〈후설(後說)〉과 〈총론(總論)〉을 지어 보냄으로써 논쟁은 마무리되었다.

간단하게 두 논리의 성격에 대해 그간 학계에서 논의되어 온 결과를 가지고 도식화해 보자면 이렇다.

퇴계의 이론:호발(互發)ㆍ불상잡(不相雜) 강조, 이원론적, 대거(對擧)ㆍ수평적, 횡간(橫看), 실천 지향적, 분개간(分開看).

고봉의 이론:상순(相循)ㆍ불상리(不相離) 강조, 일원론적, 인잉(因仍)ㆍ수직적, 수간(竪看), 논리 지향적, 혼륜간(渾淪看).


편지를 통한 논쟁은 8년 동안 진행되었다. 고봉은 퇴계의 주장을 수용하며 자신의 논리와 절충했고, 퇴계 역시 고봉의 주장을 수용하여 자신의 학설을 일정부분 수정 보완하였다. 그 결과 퇴계가 “처음에는 의견이 들쭉날쭉하여 달랐으나 끝내는 난만(爛慢)하게 의견이 같아졌다.”라는 말을 인용한 것처럼 논쟁은 마무리 되었다.


③ 논변의 의의와 후대에 미친 영향

이 논쟁은 자체 정합성에 약간의 모순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서로의 의도를 오해한 부분도 없지 않다고 기왕의 연구에서 간간이 지적된 바 있다. 그럼에도 이 논쟁은 우리 철학사에서 이(理)ㆍ기(氣), 심(心)ㆍ성(性)ㆍ정(情), 본연지성(本然之性)ㆍ기질지성(氣質之性) 등 성리학에 관련된 핵심 용어의 개념 정립과 외연 설정이 가지는 중요성을 각성시켰고, 나아가 이기심성과 관련한 수많은 논쟁의 단서를 제기하였다는 데에 학술사적 의의가 있다.

고봉이 제기한 날카로운 문제의식이 퇴계에 의해 상당 부분 수용된 것도 사실이지만, 종국에 고봉이 전개하는 입론 방식이 또한 퇴계의 호발설(互發說) 구조와 닮아 있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이런 특성으로 말미암아 고봉의 학설이 퇴계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에 반대하는 기호학파 성리설의 근간이 되었음에도, 영남학파 학자들의 경우는 언제나 고봉이 결국 퇴계의 설에 승복하였다는 것으로만 결론을 내리는 독특한 현상이 일어나기도 했다.


율곡은 고봉의 논리를 계승 발전시켜 퇴계의 주장을 논파했다. 그 대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고봉과 율곡 모두 사단(四端)은 칠정(七情)에 포함된다고 하였으며, 이기(理氣)를 혼륜(渾淪)하여 보아야 한다고 했다.

○ 퇴계의 호발설은 마음 안에 두 가지의 근원이 있는 것처럼 곡해될 소지가 있다는 것도 고봉과 율곡의 공통된 주장이다.

○ 고봉은 사단도 칠정처럼 기의 작용이라 하였으며, 그 예로 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보고 감응하는 것을 들었다. 이런 사유 맥락과 예시 논증의 방법은 율곡에 의해 그대로 계승되었다.

○ 고봉의 입론 방식을 율곡이 계승하여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그 결과 ‘근원은 하나이나 흐름은 두 갈래[源一而流二]’라는 논리를 제기했다.


퇴계의 혼륜간(渾淪看)을 반박하는 고봉의 논리는 이후 기호학파에 전승되어 우암(尤庵), 남당(南塘)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고수되었고, 영남학파는 이와 기, 사단과 칠정을 나누어 보아야 한다는 퇴계의 분개간(分開看) 논리를 계승한다. 뒤에 조선 후기 성주(星州)의 학자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1818~1886)은 퇴계의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와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1711~1781)의 논리에 근거하여, 고봉이 대체로 퇴계의 주장에 승복했고 퇴계도 매우 중요한 쟁점에서 고봉의 설을 수용했다고 주장함으로써 〈사칠왕복서〉의 이해에서 기존 영남학파의 학자들 가운데서는 이례적으로 고봉의 견해가 가지는 논리적 우수성에 대해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3. 《고봉집》의 간행 경위와 내용


1) 간행 경위

《고봉집》은 1629년(인조7) 고봉의 손서(孫婿)이자 선산 부사인 조찬한(趙纘韓:1572~1631)이 선산에서 3권 3책의 목판(木板)으로 간행하였다. 초간본인 이 문집은 현재 국립중앙도서관과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에 앞서 고봉의 사망 직후인 1572년 12월에 선조(宣祖)의 명으로 검열 허봉(許篈)은 고봉이 경연에서 진계한 말을 《기거주일록(起居注日錄)》에서 초출ㆍ편집한 후 《논사록》 2부를 만들어 1부는 고봉의 집에 보내 주었다. 조찬한이 《고봉집》을 간행한 다음 해인 1630년(인조8)에 이를 선산에서 목판 2권 2책으로 간행하고 속집(續集)이라 하였다. 《고봉집》 원집과 《논사록》 속집을 모아 만든 5권 5책이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양 선생 왕복서》는 1558년부터 1570년까지 13년간 고봉이 퇴계와 서로 왕복한 편지를 모아 날짜순으로 편집한 것이다. 1570년 12월에 퇴계가 사망한 후 고봉은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퇴계의 편지와 자신의 편지 부본을 바탕으로 무오년(1558)부터 정묘년(1567)까지의 편지를 모아 2권의 책으로 만들고 《퇴계서척(退溪書尺)》이라 하였다. 2년 뒤 고봉이 별세하자, 고봉의 장자 기효증(奇孝曾)이 퇴계의 손자 이안도(李安道)의 도움을 받아 《퇴계서척》에 누락되었던 무진년(1568)에서 경오년(1570)까지 3년간의 편지를 정리하였으나 간행하지는 못하였다. 그후 기효증의 사위인 조찬한이 1612년 영암 군수로 부임하자, 이의 간행을 의논하여 1613년 10월에 간행을 시작하여 1614년(광해군6) 봄 영암에서 목판으로 3권 3책을 간행하고 《양 선생 왕복서》라 이름하였다.

이후 6대손 기언정(奇彦鼎)이 청주서원(淸州書院)에서 일찍이 간행되었으나 실전된 사칠이기변(四七理氣辨) 곧 《양 선생 사칠ㆍ이기 왕복서》와 《논사록》을 몽촌(夢村) 김종수(金鍾秀)의 교정을 거쳐 평안도 관찰사 조경(趙璥:1727~1789)의 협조로 1786년(정조10)에 중간하였고, 《양 선생 왕복서》는 전라도 관찰사 심이지(沈頤之)의 도움을 받아 1788년에 중간하였다.

1907년(순종1)에는 11대손 기동준(奇東準)이 고봉의 시문(詩文)과 잡저(雜著) 및 후현(後賢)의 글을 수집ㆍ편차한 속집(續集:속집 2권, 부록 1권) 3권 2책과 별집 부록(別集附錄) 2권 1책을 《고봉집》 원집, 《논사록》, 《양 선생 왕복서》, 《양 선생 사칠ㆍ이기 왕복서》와 합편하여 목판본 15권 11책으로 중간(重刊)하였다. 이 중간본은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과 성균관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또 1970년에 15대손 기영환(奇永桓), 기형섭(奇亨燮), 기세훈(奇世勳) 등 행주기씨(幸州奇氏) 종중(宗中)에서 중간본에 따라 석인(石印)으로 삼간(三刊)하였다. 이 간본은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 성균관대학교 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2) 《국역 고봉전서》의 내용

《고봉집》 본집은 원집 3권, 속집 2권, 부록 1권, 별집 부록 2권, 《논사록》 2권 합 10권 8책으로 되어 있다. 원집은 권수(卷首)에 1629년에 쓴 장유(張維:1587~1638)와 장현광(張顯光:1554~1637)의 서문이 있고, 그 뒤에 목록과 〈연보〉가 있다. 본집의 저본인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본에는 〈연보〉 뒤에 부록이 있으나 속집의 부록과 중복되기에 본집에서는 제외하였다. 이중 원집은 10행 18자이고, 〈연보〉ㆍ속집ㆍ별집 부록ㆍ《논사록》ㆍ《양 선생 왕복서》ㆍ《양 선생 사칠ㆍ이기 왕복서》 등은 10행 20자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원집

권수(卷首):고봉 연보(高峯年譜)

권1:시(詩) 원집 161제 273수, 외집 45제 59수, 보유 3제 4수, 도합 209제 336수

권2:표(表) 10편, 전(箋) 1편, 상량문(上樑文) 1편, 주(奏) 2편, 서계수답(書契修答) 1편, 의(議) 2편, 설(說) 2편, 소(疏) 4편, 장(狀) 6편, 비(碑) 1편, 차(箚) 1편, 논(論) 3편, 기(記) 7편, 제문(祭文) 9편, 악장(樂章) 1편, 축문(祝文) 1편 등

권3:묘갈명(墓碣銘) 6편, 신도비명(神道碑銘) 1편, 묘갈기(墓碣記) 1편, 묘지명(墓誌銘) 2편, 묘기(墓記) 1편, 천묘기(遷墓記) 1편, 광명(壙銘) 1편, 선정비(善政碑) 1편, 행장(行狀) 3편, 서(書) 9편, 발(跋) 2편 등

권미(卷尾):조찬한의 발(1629)



○ 속집


권1:시 227제 340수


권2:서(書) 6편, 잡저(雜著) 4편, 서(序) 1편, 발 1편, 제문 1편, 논 1편, 책(策) 1편. 부록으로 정홍명(鄭弘溟)이 쓴 행장과 이식(李植)이 쓴 시장(諡狀) 등



○ 별집 부록

권1:제문 20편

권2:만장(挽章) 55편, 청향소(請享疏), 춘추 제향 축문(春秋祭享祝文) 등

권미:기동준(奇東準)의 후지(1907)


① 원집

권1에는 외집과 보유를 포함하여 209제(題)의 시가 시체의 구분 없이 수록되어 있다. 경술년(1550)인 24세 때의 작품부터 42세 때인 무진년(1568)경까지의 작품이 대체로 저작 연대순으로 편차되어 있고, 그 뒤로 1561년에 지은 〈추만을 애도하다(悼秋巒)〉부터 다시 연대순으로 편차하였다. 특히 후반부에는 1567년 이산해(李山海), 이후백(李後白)과 함께 원접사 종사관(遠接使從事官)이 되었을 때 주고받은 시들이 모여 있다. 또 외집과 보유가 권내에 함께 편차되어 있다. 외집은 《퇴계집》의 예에 따라 편차한 것으로 보이는데, 배열 원칙은 불분명하며 역시 종사관 시절 차운하여 지은 시가 다수 실려 있다. 보유는 조여심(曺汝諶), 김경우(金景愚)와 나눈 시 3수로서 원집 간행 뒤 1907년 이전에 추각(追刻)된 것으로 추측된다. 외집과 보유 부분 외에도 원집에서 포판(補板)된 곳은 글자체가 확연히 달라서 한눈에 알 수 있다.


고봉의 시는 내용상 시인의 감흥을 읊은 기흥시(記興詩), 교유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차운시(次韻詩)와 증별시(贈別詩), 이취를 읊은 이취시(理趣詩), 주변 인물에 대한 만시(挽詩) 등이 있다. 그의 시 〈녹음에 꾀꼬리 소리 유창하다[綠陰鶯語滑]〉에 “기후가 재촉하니 조화롭게 지저귀고, 천기가 움직이니 마음껏 노래하네.[氣候競催仍恰恰, 天機自動謾嚶嚶]” 한 것에서는 봄날의 흥취에 순수하게 감응하는 고봉의 모습을 잘 살펴볼 수 있다. 이와 함께 고봉이 차운한 시들을 통해 교유한 인물들에 대한 정보도 얻을 수 있는데, 송순(宋純), 오겸(吳謙:1496~1582), 박개(朴漑:1511~1586), 양응정(梁應鼎:1519~1581), 정탁(鄭琢:1526~1605) 등의 인물과 교분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음침한 비 갑자기 개니 / 陰雨忽云霽

석양이 창가에 들어온다 / 夕陽來入窓
옷깃을 여미고 스스로 살피며 / 斂襟獨自省
이 한 마음을 시험해 보았네 / 驗此一團腔



사암(思菴) 박순(朴淳)의 시에 차운하여 준 〈박화숙의 시에 차운하다[次朴和叔韻]〉라는 시이다. 1구와 2구는 궂은비가 개고 저녁 햇살이 창으로 비쳐 드는 풍경을 묘사했다. 맑고 깨끗한 저녁은 그 이미지만으로 서정적 시흥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소재이다. 그러나 고봉이 이 소재를 가지고 시적 구도 속에 포착한 내용은 ‘심(心)’에 대한 성찰이다. 궂은비라는 인욕을 걷어내어 발함이 중절(中節)이 될 때만 저녁 햇살이라는 본연의 성이 가려지지 않고 잘 발현될 수 있다는 그의 성리 철학이 시로 형상화된 것으로, 박순과의 교유가 어떠한 성격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시로서도 좋은 예라 하겠다.

권2는 잡저(雜著)로 표(表), 전(箋), 상량문(上樑文), 주(奏), 서계수답(書契修答), 의(議), 설(說), 소(疏), 장(狀), 비(碑), 차(箚), 논(論), 기(記), 제문(祭文), 악장(樂章), 축문(祝文) 등이다. 고봉은 여러 차례 지제교(知製敎) 등을 역임한 관계로 중국에 보내는 표(表)와 전(箋)을 다수 지었으며, 〈변무주(辨誣奏)〉는 1572년 종계 변무 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로 소명(召命)을 받았을 때 지은 것으로 보인다. 지제교를 지낼 무렵 문장에 대한 고봉의 자부심은 대단했는데, 《어우야담(於于野談)》의 한 대목을 들어 보면 “문학가의 경우 작품의 문제점을 지적받으면 기뻐하며 흔쾌히 받아들여 시원하게 개선하는 자가 있고, 벌컥 화를 내며 스스로 문제점을 알면서도 고치지 않는 자가 있다. 고봉 기대승은 자신의 문장을 자부하여 남들 아래에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래서 지제교로서 응교문(應敎文)을 올릴 때 승정원의 승지가 잘못된 부분에 부표를 붙여 지적하면 화를 내어 하리(下吏)를 꾸짖으며 한 글자도 고치지 못하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또 그 무렵 지은 것으로 〈왜국의 서계에 대한 답서[倭書契修答]〉라는 일본 관련 외교문서가 있다.


〈이주에 대한 설[二主說]〉은 순천 부사(順天府使) 김계(金啓)가 《가례(家禮)》 중 ‘이주(二主)’의 뜻을 물어 오자 그 뜻을 밝힌 것이다. 〈문소전에 대한 의[文昭殿議]〉와 〈문소전을 논한 차자[論文昭殿箚]〉는 선조 2년(1569)에 인종과 명종의 문소전 부묘(祔廟)와 관련한 방안을 제시한 글로서, 그 결과 의논이 정해져 명종대왕의 부묘 때 쓸 악장을 짓기까지 하였다. 이런 글에서 번잡하게 일을 만들지 않고 옛것을 따르면서 현실적 방안을 강구하는 고봉의 현실관을 볼 수 있다. 간단하게 고봉의 주장을 들어 보자.

의논하는 자들이 만일 “태조의 남향은 선왕 이래로 오래 지켜 온 규칙이니 가벼이 바꿀 수 없다.”고 주장한다면, 신의 뜻에는 전우(殿宇)를 트는 것도 사체가 지극히 중하옵고 경솔하게 가벼이 움직이는 것도 뒤에 후회가 있을까 두려우니, 북쪽 벽을 트고 뒤 퇴(退)를 전 안에 통하게 해서 현재 종묘(宗廟)의 제도와 같이 한다면, 태조의 신어(神御)가 바로 두 기둥 안에 있게 되고, 소목의 위차도 북쪽에 가까이 배열할 수가 있어서 명종의 부위(祔位)도 장차 용납할 공간이 없음을 염려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된다면 고쳐 만드는 시끄러움이 없고, 옛것을 그대로 따르는 편안함이 있어서 이치와 형편에 지극히 마땅하오니, 다시 의심스러울 만한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일설(一說)이오니, 이 역시 성명(聖明)께서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삼가 상께서는 재결하시기 바랍니다.

〈곤지기를 논하다[論困知記]〉는 기(氣)를 이(理)로 인식하고 심(心)을 성(性)이라고 논한 불교의 논리를 수용하고 양지(良知)는 천리(天理)가 아니라고 논했던 나정암(羅整菴)의 학문이 선학(禪學)의 말장난에서 나온 것이라고 논박한 글이다. 고봉은 이에 대해 “세속에서는 그의 학설의 신기(新奇)함을 좋아하고 그의 실상을 연구하지 않으니, 그를 높이고 숭상함은 당연하다 하겠다. 그러나 나의 얕은 소견에는 일찍이 ‘나씨(羅氏)의 학문은 실로 선학에서 나왔는데 얼굴을 바꾸어 성현의 말씀으로 문식(文飾)하였으니, 바로 피음사둔(詖淫邪遁)이 심한 경우이다. 가령 맹자(孟子)가 다시 태어나신다면 반드시 그의 죄를 성토하여 인심을 바로잡을 것이요 진실로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다.’라고 생각하였다.” 하고 성토하였다.

젊은 시절 문장 스승인 송순의 면앙정(俛仰亭)에 써 준 〈면앙정기(俛仰亭記)〉가 2편이 실려 있고, 〈광주향교 중수기(光州鄕校重修記)〉, 〈옥천서원기(玉川書院記)〉가 있다. 제문(祭文)은 목종황제(穆宗皇帝)와 퇴계 등에 대한 것이다. 또 〈죽수서원에 대한 축문[竹樹書院祝文]〉, 〈조 문정공에 대한 제문[祭趙文正公文]〉이 있어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1482~1519)에 대한 각별한 존경을 엿볼 수 있다.

권3은 묘갈명, 신도비명, 묘갈기, 묘지명, 묘기(墓記), 천묘기, 광명(壙銘), 선정비, 행장 3편, 서(書), 발 등이다. 퇴계의 부친 이식(李埴:1463~1502)에 대한 묘갈명과 퇴계에 대한 광명, 회재(晦齋) 이언적(李彥迪:1491~1553)을 위해 쓴 신도비명,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1493~1564)을 위해 쓴 묘지명 등이 있다. 행장은 기대항(奇大恒:1519~1564), 김굉필(金宏弼:1454~1504) 등에 대한 것이다. 서(書)는 김계(金啓), 이정(李楨), 정철(鄭澈) 등과 나눈 편지, 퇴계의 문목(問目)에 답하는 편지 등이 있다. 정철에게는 상제(喪制)에 관한 물음에 답한 것이고, 퇴계와의 편지는 《양 선생 왕복서》와 《양 선생 사칠ㆍ이기 왕복서》에 실리지 않았던 예제(禮制), 인물평(人物評), 심성설(心性說) 등이 주요 내용이다. 발(跋)은 퇴계의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와 〈주자서절요 서(朱子書節要序)〉에 대한 것이다. 보유(補遺)에 만년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효자(孝子) 정문손(鄭文孫)에 대해 읊은 시의 서(序) 및 서(書)가 실려 있다.

권미(卷尾)에는 조찬한의 발문(1629)이 있다. 조찬한은 이 글에서 “문장은 그 여사인데도 웅심하고 아건하여 한결같이 혼연천성(渾然天成)에서 나왔다. 그리하여 장편시는 한퇴지와 유사하고, 단편은 도연명에 가까우며, 변론한 것은 구양수ㆍ한퇴지와 같았다.”라고 평하였다. 다소 과장이 없지 않은 비평임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고봉의 문학이 결코 범범한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하게 하는 발언이다.


② 속집

《논사록》은 상ㆍ하 2권으로 명종 19년(1564)과 22년, 선조 1년과 2년 그리고 5년에 저자가 경연에서 사서(四書)와 《근사록(近思錄)》 등을 강론하며 임금에게 자신의 경세관을 피력한 내용을 모은 것으로, 고봉의 현실관과 정치관을 연구하는 데 가장 중요한 자료라 하겠다. 고봉은 경연의 강석을 통해 임금에게 학문에 힘을 쏟도록 권장하고 군덕의 수양을 당부하였으며 언로의 개방과 재용의 절약을 진달하였다. 《대학》과 《중용》의 핵심 내용인 성(誠)과 경(敬)을 강조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요순(堯舜)부터 정주(程朱)에 이르는 도학의 연원과 제왕(帝王)의 왕도정치(王道政治)를 말하는가 하면, 그 위에 정몽주(鄭夢周)에서 퇴계에 이르는 동방 도통의 연원을 말한 뒤 이들을 높여야 국가의 덕과 기강이 바로 선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예(禮)를 밝히고 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재삼 강조하였는데, 이는 앞에서 언급한 문소전의 논의와 관련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이다. 끝에 조찬한의 발문(1630)이 있다.

속집은 2권으로 각 권수에 목록이 실려 있다. 권1은 시 227제이다. 시체 구분 없이 편차되어 있으나 소주(小註)로 시체를 표시해 놓은 것이 많다. 속집의 간행이 늦어진 관계로 〈송별(送別)〉과 같이 결구(缺句)가 있는 시가 다수 있다. 〈관찰사에게 주다[贈道伯]〉처럼 증시 대상자의 성명을 고증할 수가 없는 경우도 있으며, 제목을 잃은 작품도 보인다. 〈화신풍(花信風)〉 등의 응제시(應製詩), 〈호당으로 향하다[向湖堂]〉 등 호당에 있을 때 지은 시, 〈삼강령 팔조목을 읊다[詠三綱八目]〉 등 《대학》, 《중용》 등의 내용을 읊은 시, 기타 차운시, 만시, 제시, 증시가 다수 실려 있다.

《존재만록(存齋謾錄)》은 저자 자신이 1569년(선조2)부터 기록을 시작하여 1572년에 첩(帖)으로 만든 것이다. 주로 퇴계, 정유일(鄭惟一), 노수신(盧守愼) 등과 주고받은 시를 모아 퇴계에게 올리려던 것인데, 고봉이 세상을 떠남으로써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퇴계의 〈매화시(梅花詩)〉에 대한 차운시가 있고, 예천(醴泉) 동헌에서 매화를 보고 ‘매화에게 묻다[問梅]’, ‘매화가 답하다[梅花答]’라고 하여 스스로 매화와 시를 주고받는 형식으로 시를 짓기도 했다. 도산서원(陶山書院)과 그 주위의 암서헌(巖棲軒), 탁영담(濯纓潭), 천연대(天淵臺), 반타석(盤陀石) 등 퇴계의 장구지소(杖屨之所)를 읊은 시도 있다.

고봉과 퇴계는 각별한 교분을 나누었다. 32세에 처음 만나 사단ㆍ칠정에 관해 논변을 주고받으며 고봉은 당대 어느 학자보다도 퇴계를 존경해 마지않았다. 그로부터 10년 뒤 43세 되던 해, 고봉은 낙향하는 퇴계를 봉은사(奉恩寺)까지 따라가 송별하며 다음과 같은 시로 전송한다.


한강수 도도히 만고에 흐르는데 / 江漢滔滔萬古流

선생의 이번 걸음 어찌하면 만류할꼬 / 先生此去若爲留
백사장 가 닻줄 잡고 머뭇거리는 곳 / 沙邊拽纜遲徊處
이별의 아픔에 만 섬의 시름 끝이 없어라 / 不盡離腸萬斛愁


퇴계 또한 이 시에 화운하여 답하고, 이어 여덟 수의 칠언절구로 된 〈매화시〉를 꺼내어 선생에게 보여 주며 화답을 구하기도 했다. 이듬해 2월 고봉은 남쪽으로 귀향하던 길에 한 해 전 퇴계와 이별하던 때를 그리며, “지난해 작별하며 가슴 아파하던 곳, 오늘 귀향길도 근심만 절로 나네.[年惜別傷心地 今日南歸亦自愁]” 하였다.


권2는 서(書), 잡저, 서(序), 발, 제문, 논, 책(策)이 실려 있다. 서(書)는 먼저 이태백이 두보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을 빌어 자신의 회포를 문학적으로 편 글이 제일 앞에 실려 있고, 종형 기대항, 미암(眉巖) 유희춘(枊希春) 등에게 보낸 편지 등이 있다. 특히 〈덕양유고를 보내 주신 데 사례하는 글[謝惠德陽遺稿書]〉은 종부 기준(奇遵)의 문집을 받아보고 기대항에게 감사의 뜻으로 보낸 편지이다. 잡저는 10대에 지은 〈과정기훈(過庭記訓)〉과 〈자경설(自警說)〉을 비롯하여 명나라 사신 허국(許國)과 위시량(魏時亮)이 질문한 우리나라의 역사와 학문 등에 답변한 〈천사 허국ㆍ위시량의 문목에 대해 조목조목 답함[天使許國魏時亮問目條對]〉 등이다. 이 외에 〈퇴계 선생의 도산기문에 대한 발[退溪先生陶山記文跋]〉과 하서 김인후에 대한 제문 등이 있다.


부록으로는 1630년대에 정홍명(鄭弘溟)이 쓴 행장(行狀)과 1646년경 이식(李植)이 쓴 시장(諡狀)이 있다.


③ 별집 부록

별집 부록은 권1에 유홍(兪泓) 등 주변 인물과 최경회(崔慶會) 등이 지은 제문, 그리고 이호민(李好閔)과 정철(鄭澈)이 지은 제문이 있다. 권2에 노진(盧禛)을 비롯하여 양사기(楊士奇), 구봉령(具鳳齡), 윤두수(尹斗壽), 정유일(鄭惟一), 허엽(許曄) 등 동년배의 학자들이 지은 만장과 이이(李珥), 정탁(鄭琢), 김성일(金誠一), 오건(吳健), 윤근수(尹根壽) 등 후배 학자들의 만장이 있다. 만가를 지은 이들의 면면만 보더라도 고봉의 교유 범위와 사림에서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겠다. 이어 월봉서원 사실(月峯書院事實)에 고용후(高用厚)와 정예환(鄭禮煥) 등이 종사 제향을 청하며 올린 〈청향소(請享疏)〉, 김집(金集)과 송시열(宋時烈)이 쓴 〈춘추 제향 축문(春秋祭享祝文)〉 등이 실려 있다. 퇴계를 비롯하여 유희춘, 박순, 장현광, 송시열 등이 고봉을 평한 글이 마지막 〈서술(敍述)〉에 실려 있다. 맨 끝에는 11대손 기동준(奇東準)이 지은 후지가 있다.


④ 《양 선생 왕복서》, 《양 선생 사칠ㆍ이기 왕복서》

《양 선생 왕복서》는 편지를 처음 교류하기 시작한 1558년부터 1570년까지 13년간 일상의 안부, 공부의 방법, 출처와 진퇴, 국상(國喪)의 의례, 학문의 교류, 그리움의 정회 등 다양한 주제로 주고받은 편지 114통을 순서에 따라 엮은 것이다. 《양 선생 사칠ㆍ이기 왕복서》는 그 가운데 사칠ㆍ이기 논변에 관한 글만 골라내어 따로 묶은 것으로, 고봉과 퇴계의 논변 과정을 명료하게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고봉은 〈사단ㆍ칠정 후설(四端七情後說)〉에서 “주자가 ‘사단은 이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이가 발한 것이다.’라고 한 말을 반복하여 참고해 보고서야 끝내 부합하지 않음이 있음을 깨달았고, 이어 다시 생각해 보고서야 곧 저의 전일의 설에 상고한 것이 자세하지 못하고 살핀 것이 극진하지 못함이 있음을 알았습니다.”라고 하여 최종적으로 퇴계의 설을 수긍하면서도, 칠정 가운데 발하여 절도에 맞는 것은 애당초 사단과 다르지 않다는 종래 자신의 주장을 확신하며 이점을 살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제까지의 논의를 집성하여 고봉은 결론을 내려 정리하였다. 이것이 바로 〈사단ㆍ칠정 총론(四端七情總論)〉인데, 중요 부분을 인용함으로써 고봉과 퇴계가 오랫동안 지속해 온 논변의 합의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주자가 또 말하기를 “사단은 바로 이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바로 기가 발한 것이다.” 하였는데, 대체로 사단은 이가 발하여 선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이가 발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 진실로 의심할 바 없겠으나, 칠정은 이ㆍ기를 겸하고 선ㆍ악이 있는 것이고 보면 그 발하는 것이 오로지 기만은 아니지만 기질(氣質)의 섞임이 없지 않기 때문에 기가 발한 것이라고 한 것이니, 이 말은 바로 기질의 성[氣質之性]의 설과 같습니다.

대체로 성이 본래 선하다 하더라도 기질 속에 떨어져 있으면 편벽되고 지나침이 없지 않기 때문에 ‘기질의 성’이라 하고, 칠정이 비록 이ㆍ기를 겸하였다고 하지만 이는 약하고 기가 강하여 이가 기를 통섭할 수 없어 쉽게 악으로 빠져들기 때문에 기가 발한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칠정 중에 발하여 절도에 맞는 것은 이에서 발하여 선하지 않음이 없으니, 그렇다면 사단과 애당초 다른 것이 아닙니다. 다만 사단은 오로지 이가 발하는 것이기 때문에 맹자의 생각은 사람들로 하여금 확충하도록 하고자 한 것이니, 학자가 사단의 발함에 대해 깊이 인식하여 확충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칠정은 이ㆍ기의 발함을 겸유(兼有)하였으나, 이의 발함이 기를 주재(主宰)하지 못하기도 하고 기의 유행이 도리어 이를 가릴 때도 있는 것이니, 학자가 칠정의 발함에 대해 성찰하여 잘 다스리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이것이 또 사단과 칠정의 명의(名義)에 각각 소이연(所以然)이 있는 것이니, 학자가 진실로 이로 말미암아 확충하기를 구한다면 도움이 많을 것입니다.

이번에 간행하는 《국역 고봉전서》는 1630년에 간행된 목판본을 번역대본으로 하여 총 5집으로 묶었다.(5집은 전체 원문) 1집에 원집을 실었는데, 권1 〈고봉 선생 연보〉에 〈자경설(自警說)〉의 내용을 보충하였고 석인본 〈고봉 선생 연보〉를 번역하여 함께 실었으며, 기영환(奇永桓)의 〈후지〉를 덧실었다. 2집에는 《논사록》과 속집 권1을 실었는데, 《논사록》의 경우 조경(趙璥)이 쓴 〈중간 고봉 선생 《논사록》 서(重刊高峯先生論思錄序)〉를 보충 번역하여 실었다. 또 1907년에 간행된 목판본의 〈효종대왕 치제문(孝宗大王致祭文)〉, 〈정종대왕 치제문(正宗大王致祭文)〉, 〈고봉 선생 《논사록》을 중간한 뒤의 전교[高峯先生論思錄重刊後傳敎]〉, 김종수(金鍾秀)의 〈고봉 선생 《논사록》 발(高峰先生論思錄跋)〉, 조찬한(趙纘韓)의 〈고봉 선생 《논사록》 소지(高峯先生論思錄小識)〉와 석인본에 있는 기세훈(奇世勳)의 〈후지(後識)〉를 추가로 실었다. 3집에는 속집 권2, 부록 권1, 별집 부록 권1과 권2를 실었다. 그리고 문집에 누락된 시 가운데 《명가필보(名家筆譜)》에 실린 2수와 《고봉 선생 유묵(高峯先生遺墨)》에 실린 5수, 〈고봉 선생 신도비명(高峯先生神道碑銘)〉, 〈월봉서원 묘정비명(月峯書院廟庭碑銘)〉을 추가 번역하여 실었다. 4집에는 《양 선생 왕복서》와 《양 선생 사칠ㆍ이기 왕복서》를 실었으며, 김종수의 〈사칠속편변 발(四七續編辨跋)〉을 추가로 실었다.


4. 맺음말

그간 고봉에 대한 연구는 사상과 철학을 중심으로 문학, 교육학, 경세론, 윤리관 등 여러 면모에 대해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고봉학술원에서 《전통과 현실》을 발간하면서 고봉에 대한 연구가 그 깊이와 넓이를 날로 더해 가고 있는 데다, 최근에는 서양의 철학자 및 심리학자의 논리와 연관 지어 연구한 서적까지 나왔다. 이런 연구 성과의 저변에는 1989년 민족문화추진회에서 펴낸 《국역 고봉집》이나 1998년 허경진 선생이 낸 《고봉 기대승 시선》, 2003년 김영두 선생이 낸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와 같은 관련 서적의 번역물이 큰 힘이 되었음은 췌언을 요하지 않는다.

고봉의 문학과 철학이 조선 문학사와 지성사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은 이미 위에서 언급했다. 누락된 자료를 수습하여 《국역 고봉전서》를 내는 지금, 이 국역서가 앞으로 전개될 고봉 연구에 일조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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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2월 일


[주-D001] 양이(量移) : 
섬이나 변지로 멀리 귀양 보냈던 사람의 죄를 참량(參量)하여 내지나 가까운 곳으로 옮기는 일을 말한다. 노수신이 진도(珍島)로 귀양 가 있다가 이때 괴산(槐山)으로 양이되는 길이었는데, 고봉이 진국원(鎭國院)까지 가서 그를 만났다.
[주-D002] 정암(整菴) : 
명나라 때의 학자인 나흠순(羅欽順)의 호이다. 자는 윤승(允升)이며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벼슬을 사양하고 20여 년간 시골에서 격물치지학(格物致知學)에 전념하고 《곤지기(困知記)》를 지었으며, 문집에 《정암존고(整菴存稿)》가 있다. 《明史 卷282 羅欽順列傳》
[주-D003] 소재(蘇齋)……반박하였다. : 
이 내용은 《미암일기(眉巖日記)》에 자세히 보인다.
[주-D004] 계축년(1553)……구했다 : 
퇴계가 추만을 만난 정황에 대해 퇴계의 〈천명도설 후서(天命圖說後敍)〉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황(滉)이 처음 벼슬한 뒤로부터 한양의 서쪽 성문 안에 우거(寓居)한 지가 전후에 걸쳐 20년이 되었는데, 아직도 이웃에 사는 정정이(鄭靜而 추만)와 서로 알고 왕래하지 못하였다. 하루는 조카인 교(㝯)가 어디에서인지 이른바 〈천명도(天命圖)〉라는 것을 얻어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 주었는데, 그 도식과 해설에 잘못된 부분이 꽤 있었다. 나는 교에게 누가 만든 것이냐고 물었으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그 뒤에 차츰 수소문하고서야 비로소 정이에게서 나온 것임을 알았다. 이에 나는 사람을 통하여 정이에게 본도(本圖)를 보여 줄 것을 요구하였으며, 얼마 후에는 정이를 직접 만나 볼 것을 요구하였는데 모두 편지를 두서너 차례 왕복한 뒤에야 허락받았으니, 내가 지난날에 궁벽하고 누추하여 남과 교제가 적었음이 부끄러울 만하였다.”
[주-D005] 사단이……선ㆍ악이 있다. : 
기대승, 《국역 고봉전서》 4집, 《양 선생 사칠ㆍ이기 왕복서》 〈퇴계가 고봉에게 준 편지〉, p. 313.
[주-D006] 대개……것입니다 : 
기대승, 《국역 고봉전서》, 4집, 《양 선생 사칠ㆍ이기 왕복서》 〈고봉이 사단ㆍ칠정을 이ㆍ기로 나누는 것을 그르다고 변론한 데 대해 퇴계가 답한 제2서〉, p. 356. “蓋渾淪而言 則七情兼理氣 不待多言而明矣 若以七情對四端 而各以其分言之 七情之於氣 猶四端之於理也 其發各有血脈 其名皆有所指 故可隨其所主而分屬之耳 雖滉亦非謂七情不干於理 外物偶相湊著而感動也 此四端感物而動 固不異於七情 但四則理發而氣隨之 七情氣發而理乘之耳.”
[주-D007] 사단은……모르겠습니다 : 
기대승, 《국역 고봉전서》, 4집, 《양 선생 사칠ㆍ이기 왕복서》, 〈퇴계가 사단ㆍ칠정을 재론한 것에 대해 고봉이 답한 편지〉, p. 385. “四則理發而氣隨之 七則氣發而理乘之 兩句亦甚精密 然鄙意以爲此二箇意思 七情則兼有 而四端則只有理發一邊爾 抑此兩句 大升欲改之 曰情之發也 或理動而氣俱 或氣感而理乘 如此下語 又未知於先生意如何.”
[주-D008] 퇴계의……계승한다 : 
이와 관련하여 이동희 교수는 그의 논문 〈율곡 성리학과 고봉 성리학 비교〉에서 “퇴계의 호발설과 율곡의 기발이승론이 부딪친 것 같지만, 그런 것이 아니고 율곡의 이기론은 존재론으로서 성립되고 퇴계의 호발설은 도덕론으로서 성립되는 것이며, 양자는 영역이 다른 데서 성립한 것인데 다만 ‘이-기’ 개념이 공통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충돌이 일어난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주-D009] 간행 경위와 내용 : 
이 부분은 신승운(辛承云) 선생이 작성한 《한국문집총간해제》 〈고봉집 해제〉의 내용을 골간으로 하여, 필요에 따라 중요 사항을 인용ㆍ보충하였음을 밝혀 둔다.
[주-D010] 문학가의……하였다 : 
유몽인, 《시화총림》, 《어우야담》, 아세아문화사, 1973, p. 282. “文章之士 或言其文之疵病 則有喜而樂聞 改之如流者 或咈然而怒 自知其病而不改者 奇高峯大升 自負其文章 不肯下人 以知製敎 進應敎之文 政院承旨 付標指其疵 怒叱下吏 不改一字.”
[주-D011] 의논하는……바랍니다 : 
기대승, 《국역 고봉전서》 1집, 〈문소전(文昭殿)에 대한 의(議)〉, p. 304. “若議者以爲太祖南向 自先正以來永久之規 不宜輕變 則臣意以爲 拆動殿宇 事體極重 率然輕擧 恐貽後悔, 不若拓展北壁 通後退于殿內 如今之宗廟之制 則太祖神御正在兩楹之內 而昭穆位次 可以近北 挨排明宗祔位 將不患於無地之可容矣 如此則無改作之擾 有仍舊之安 理勢至順 更無可疑 此一說也 亦願聖明之留意焉 伏惟上裁.”
[주-D012] 세속에서는……생각하였다 : 
기대승, 《국역 고봉전서》 1집, 〈곤지기(困知記)를 논하다〉, p. 337. “世俗悅其新奇 而不究其實 宜乎尊尙之也 然愚之淺見 竊嘗以爲羅氏之學 實出於禪學 而改頭換面 文以聖賢之語 乃詖淫邪遁之尤者 使孟子而復生 必當聲罪致討 以正人心 固不悠悠而已也.”
[주-D013] 〈곤지기를 논하다[論困知記]〉……성토하였다 : 
〈곤지기(困知記)를 논하다〉에 대해 미암(眉巖)은 “참으로 통쾌하다. 참으로 핵심을 찔렀다고 할 것이니, 전에 내가 변박한 것은 그저 지엽에 불과할 뿐이다.[快哉 眞所謂攻其心腹 向我所辨 特枝葉耳]”라고 극찬한 바 있다. 유희춘, 《국역 고봉전서》 3집, 〈서술(敍述)〉, p. 304.
[주-D014] 보유(補遺)에……있다 : 
효자(孝子) 정문손(鄭文孫)에 대해 읊은 시는 《국역 고봉전서》 1집 권1 p. 83에 실려 있다.
[주-D015] 문장은……같았다 : 
조찬한, 《국역 고봉전서》, 〈발(跋)〉, p. 534. “文章乃其餘事 而雄深雅健 一出於渾然 長詩逼韓 短篇近陶 辨論如歐韓.”
[주-D016] 주자가……알았습니다 : 
기대승, 《국역 고봉전집》 4집, 《양 선생 사칠ㆍ이기 왕복서》, 〈사단ㆍ칠정 후설(後說)〉, p. 416. “以朱子所謂 四端是理之發 七情是氣之發 參究反覆 終覺有未合者 因復思之 乃知前日之說 考之有未詳 而察之有未盡也.”
[주-D017] 주자가……것입니다 : 
기대승, 《국역 고봉전집》 4집, 《양 선생 사칠ㆍ이기 왕복서》, 〈사단ㆍ칠정 총론(總論)〉, p. 418. “朱子曰 四端是理之發 七情是氣之發 夫四端發於理而無不善 謂是理之發者 固可無疑矣 七情兼理氣有善惡 則其所發 雖不專是氣 而亦不無氣質之雜 故謂是氣之發 此正如氣質之說也……七情兼有理氣之發 而理之所發 或不能以宰乎氣 氣之所流 亦反有以蔽乎理 則學者於七情之發 可不省察以克治之乎 此又四端七情之名義 各有所以然者 學者苟能由是以求之 則亦可以思過半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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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역사민속박물관(2020) 1896광주여행기 광주역사민속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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