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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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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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문을 일으킨 이천서씨 부인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에서 전해 내려오는 눌재 박상과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  눌재(訥齋) 박상(朴祥)[1474~1530]이 태어날 수 있었던 배경과 박상의 강직함에 관한 이야기이다. 박상의 어머니는 18세에 처녀로 50세인 박상의 아버지와 혼인하여 박상을 낳았다. 박상의 어머니인 이천서씨(利川徐氏) 부인의 혜안 덕분에 큰선비인 박상을 낳았다고 한다.   [채록/수집 상황]  1989년 2월 19일 『무등일보』 「호남여인열전(10)」에 수록되었다.  1990년 광주직할시에서 간행한 『광주의 전설』에 수록되었다.   눌재 박상의 아버지 박지흥(朴智興)은 충주박씨(忠州朴氏)로 세조(世祖)[재위 1455~1468]의 왕위 찬탈에 통분하여 부인 하동정씨(河東鄭氏)와 함께 처가인 전라도 광주를 향하고 있었다. 장성 입암새재를 넘어가는데 날이 저물어 주막에서 하루를 묵기로 하였다. 밤에 주막 주인인 노파가 찾아와 박지흥에게 이곳에 머물려면 입암산 산신령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빌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박지흥은 자신이 임금을 버리고 자신만 살겠다고 길을 떠난 사실을 깨닫고 산신령에게 용서를 빌었다. 그날 밤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앞으로 살 곳을 정해 주겠다고 하였다. 산신령은 밖에 있는 말 두 마리를 타고 가다가 말이 멈추는 곳에 한 마리를 매어 두고 다시 돌아오라고 하였다.  다음 날 꿈에서 깬 박지흥은 꿈에 갔던 곳으로 갔다. 그곳이 바로 지금의 서창동 절골로 지금도 충주박씨 후손들이 살고 있다. 박지흥이 자리를 잡은 지 2년 후, 부인 하동정씨가 자식 하나 없이 세상을 떠났다. 마을 사람들은 혼자된 박지흥을 위해 서종하의 집에 혼사를 넣었다. 서종하는 오십 세가 넘은 홀아비 박지흥에게 자신의 딸을 보낼 수 없다며 화를 냈다. 이를 지켜본 서종하의 딸이 간청을 하여 결국 혼사가 이루어졌다. 박지흥과 서씨 부인 사이에서 큰아들이 태어나고 6년 후, 박지흥은 입암새재를 넘다가 주막에서 또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이날 밤 서씨 부인은 큰 바위가 굴러와 치마폭에 들어오는 태몽을 꾸었다. 다음 해 둘째 아들 박상(朴祥)이 태어났고, 2년 뒤에는 막내아들 박우(朴祐)[1476~1574]가 태어났다.   [모티프 분석] 「가문을 일으킨 이천서씨 부인」의 주요 모티프는 ‘비범한 인물의 출생과 행적’이다. 이 설화에서는 역사적으로 비범한 인물인 '박상'이 출생할 수 있었던 배경과 태몽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박상의 어머니인 서씨 부인의 큰 결심으로 박상이 태어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이처럼 비범한 인물은 하늘이 돌보아준다고 여겨지는데, 이는 고양이가 박상의 목숨을 구해 준 사건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전설은 구체적인 증거물을 통해 사실성을 강조하면서 전승되는데, 자연물이나 인공물 같은 구체적 대상 대신 인물 자체가 증거가 되는 것이 인물전설이다. 특정 인물이 역사상 실재하여 활동하였다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인지되고, 그 인물이 남긴 업적이 널리 알려져 있을 때 별도의 증거물 없이 인물전설이 형성된다. 인물전설은 지역적 증거물과 긴밀히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자연전설 등에 비해 전설적 정체성은 약한 편이며, 흥미 중심으로 서사가 이어질 경우 민담과의 결합과 변이가 발생하기도 한다. 인물이 출생하거나 성장한 지역, 주로 활동한 연고지 등에서는 지역적 증거물과 결합되어 전설의 정체성과 생명력이 이어진다.   [참고문헌] 장덕순, 『구비문학개설』(일조각, 1971) 『광주의 전설』(광주직할시, 1990) 『한국민속문학사전』설화 1-2(국립민속박물관, 2012)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7-31 | NO.87
  • 가장살과 처녀 무덤
    광주광역시 효령동 종방마을에서 전해 내려오는 가장살과 처녀귀신에 관한 이야기. '가장살과 처녀 무덤'은 효령동 종방마을에 있는 가장살에 관한 지명설화와 처녀귀신을 달래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이다.[채록/수집 상황] 2018년 1월 30일 광주광역시 북구 효령동 종방마을에 거주하는 주민 기봉주[남, 76세]의 이야기를 채록하였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주관하는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에 수록되었다. [내용] 종방마을에 가장살이라는 곳이 있는데, 야산의 비탈길에 죽은 아이들을 묻은 곳이라 한다. 또한, 길 가운데에 죽은 처녀를 엎어서 묻기도 하는데, 이는 죽은 처녀를 달래면서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가지 말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모티프 분석] '가장살과 처녀 무덤'의 주요 모티프는 '어린아이와 처녀귀신의 원혼으로 인한 해 방지'이다. 가장(假葬)은 어린아이의 시체를 묻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때문에 종방마을의 가장살이란 지명 또한 '가장'의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귀신은 세 가지 기준인 충족한 삶과 충족한 죽음, 소속감과 유대감의 분명함, 신원 증명의 가능성 중에서 한 가지 기준이 결여된 경우 원귀(冤鬼)라고 한다. 더욱이 사람들은 처녀와 아이와 같이 성년이 되지 못하고 사망한 미성년 귀신의 경우, 그 원한이 더욱 각별하다고 생각하였다. 때문에 처녀의 시신을 엎어서 길 가운데에 묻었다는 내용은 원귀가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7-31 | NO.86
  • 갈처사가 쓴 풍영정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창동에서 전해 내려오는 풍영정의 유래에 관한 이야기.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창동에 있는 풍영정(風詠亭) 이름의 유래와 현판 글씨에 대한 이야기이다. 풍영정 현판의 글씨체가 다른 이유와 임진왜란 때 불에 탈 뻔하였으나 현판 글씨가 오리로 변해서 화재를 막았다는 이야기이다. [채록/수집 상황] 1987년에 전라남도에서 간행한 『전남의 전설』에 수록되어 있다. 1990년에 광주직할시에서 간행한 『광주의 전설』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풍영정은 광산김씨(光山鄭氏) 칠계(漆溪) 김언거(金彦据)[1503~1584]가 지은 것이다. 김언거는 승정원판교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현재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창동 매결마을에서 살았다. 김언거가 낙향을 하자 김언거를 아끼던 사람들이 앞다투어 정각(亭閣)을 지어 줘서 당시에는 열두 채나 되는 정각이 들어섰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명종(明宗)[재위 1545~1567]이 칠계의 정각 현판을 당시의 기인(奇人)인 갈처사(葛處士)에게 받아다 걸라고 하였다. 김언거는 많은 선물을 들고 무주 구천동에 산다는 갈처사를 찾아갔다. 김언거는 갈처사를 찾아갔으나 만날 수가 없었다. 이후 김언거는 3~4년간 갈처사를 찾아 13차례 무주 구천동을 찾아갔다. 그러다가 14번째에 담배밭에서 담뱃잎을 따고 있던 갈처사를 겨우 만날 수 있었다. 갈처사는 그동안의 고생에 미안해하며 주머니에서 먹을 꺼내고 낫으로 칡넝쿨을 베어 붓을 만들어 ‘풍영정(風詠亭)’이라고 써 주었다. 갈처사는 돌아가려는 김언거에게 집에 가는 길에 절대 글씨를 펴 보지 말고, 현판에 새기기 전까지는 누구에게도 보여 주지 말라고 하였다. 김언거는 칡넝쿨로 대충 써 준 글씨가 영 탐탁지 않았던 터라 돌아오는 길에 현판 글씨를 가만히 열어 보았다. 그런데 그 순간, ‘풍(風)’ 자가 훨훨 날아 달아나 버렸다. 김언거는 황급히 놀라 글씨를 접어 넣었다. 김언거는 다시 되돌아가서 갈처사에게 사죄하고 다시 써 줄 것을 요청하였다. 갈처사는 자신은 성의 없이 쓴 것이 아니라, 이 세 글자를 쓰기 위해 몸을 숨기고 정성을 들인 것이라 하였다. 다시 ‘풍’ 자 한 자를 쓰려면 많은 세월이 필요하니, 자신의 제자인 황처사를 찾아가라 하였다. 김언거는 반성하면서 황처사를 찾아가 ‘풍’ 자를 받아와서 ‘풍영정’ 현판을 새겼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왜군이 이곳에 불을 질렀다. 12채의 정각 중 11채가 다 타고, 마지막 풍영정이 불에 휩싸이자 풍영정 현판의 글씨가 물오리가 되어 극락강에 떠올랐다. 이를 기이하게 여긴 왜군 장수는 불을 끄라고 명령하였다. 그랬더니 오리들이 현판으로 날아와 다시 글씨가 되살아났다. 풍영정 현판에는 이러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지금도 풍영정 현판의 글씨를 보면 ‘풍’ 자와 ‘영정’의 글씨체가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모티프 분석]'갈처사가 쓴 풍영정'의 주요 모티프는 ‘기인이 써 준 현판 글씨’이다. 설화에 도사나 승려 등은 기이한 능력으로 도술을 부리는 신이한 존재로 등장한다. 그리고 도사나 승려는 설화의 주인공에게 기이한 물건을 주거나 예언 등으로 주인공을 도와주는 조력자의 역할을 한다. '갈처사가 쓴 풍영정'에서도 마찬가지로 갈처사는 주인공 김언거가 풍영정을 완성할 수 있도록 돕는 조력자이다. 그리고 갈처사가 써 준 풍영정 글씨 덕분에 풍영정은 임진왜란의 피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글씨가 다른 것도 아닌 오리로 변하였고, 그 덕에 화재를 피할 수 있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정각은 나무로 지어졌기에 화재에 취약하다. 그런데 새 중에서도 물과 가깝고 하늘도 날 수 있는 오리를 통해 화재를 막은 것이다. 실제로 풍영정 현판의 글씨가 다르게 써진 것은 지금도 확인할 수가 있다. 이 연유에 대한 고민으로 전설이 생겨났을 것으로 여겨진다. [참고문헌] 장덕순, 『구비문학개설』(일조각, 1971) 『전남의 전설』(전라남도, 1990) 『광주의 전설』(광주직할시, 1991) 『한국민속문학사전』설화 1-2(국립민속박물관, 2012)[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7-31 | NO.85
  • 개금산 도깨비 방망이
    옛날, 서구 매월동 개금산 동쪽 산골마을에 두 형제가 살고 있었어요. 동생은 착하고 선량했지만 형은 부자이면서도 늙은 부모를 가난한 동생에게 떠맡기고도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지독한 욕심쟁이었어요. 하루는 동생이 산에 땔나무를 하러 산에 가서 나뭇잎을 긁어모으고 있었는데 개암나무 열매 한 알이 툭 굴러 떨어졌습니다. 아우는 이것을 주워 "이건 아버지 갖다 드려야지" 하며 호주머니에 넣었어요. 개암이 또 떨어지자 "이것은 어머니 갖다 드려야지" 생각하며 주워 호주머니에 넣었어요. 주머니에 넣고 나자마자 서너 개가 연거푸 굴러 떨어졌습니다. 동생은 "이건 마누라 것", "이건 아들 것", "이건 딸 것" 그리고 "이건 내가 먹어야겠다"하고 생각하며 모두 주워 담고 있을 때 비가 내렸어요. 동생은 비를 피하기 위해 산속 다 쓰러져 가는 빈집에 들어갔습니다.비가 그치면 그 집에서 나오려 했으나 비가 그치기는커녕 갈수록 심하게 쏟아져 밤을 그곳에서 날 수 밖에 없었어요. 숲속의 어둠은 빨리 찾아왔고 더 짙게 깔렸습니다. 으슥한 밤이 찾아오자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들려 내다보니 난데없이 도깨비들 한 무리가 몰려오는 것이 보였어요. 동생은 무서워 대들보 위에 숨어 도깨비들을 지켜봤지요. 도깨비들은 방망이를 두드리며 ‘술과 고기, 밥과 떡 나와라 뚝딱’ 하며 순식간에 음식들을 푸짐하게 차렸어요. 그들은 그것을 먹으며 놀았습니다. 동생은 그 음식들을 보자 침이 고여 배고픔을 더 느껴야 했어요. 배고픔을 달래려고 호주머니에 든 개암나무 열매 하나를 입에 넣고 무심결에 깨물었는데 단단한 껍질이 으깨어지면서 ‘딱!’ 하고 큰 소리가 나자 도깨비들은 그 집 대들보가 부러지는 소리로 잘못 알고 모두가 혼비백산 달아나고 말았어요. 도깨비가 빠져나간 것을 확인한 동생은 대들보 위에서 내려와 도깨비들이 버리고 간 술과 고기, 밥과 떡, 그리고 도깨비 방망이까지 함께 들고 집에 돌아와 부자가 됐습니다. 동생은 그 도깨비 방망이를 두들겨 원하는 것을 모두 나오게 했어요. 그렇게 해서 집도, 논밭도 생기고 해서 부자로 잘 살게 됐지요. 욕심쟁이 형은 그 소식을 들은 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동생에게 "너는 어떻게 해서 그렇게 벼락부자가 되었느냐?"고 따지듯 물었습니다. 자초지종 이야기를 들은 형은 나무지게를 들쳐 메고 동생이 말한 산으로 갔습니다. 마침 산 속에 들어가자 개암 한 알이 형의 발 앞에 툭 굴러 떨어졌지요. 형은 첫 마디부터 "이건 내가 먹어야지" 하고 주머니에 넣었어요. 또 한 개가 떨어지자 "이것도 내가 먹어야지" 하고 혼잣말을 내뱉어요. 형은 떨어지는 개암나무 열매마다 모두 다 자신이 먹겠다면서 호주머니에 주워 담았습니다. 그리고 비도 오지 않는데 그 빈집에 들어가 대들보 위로 숨었어요. 마침내 으슥한 밤이 되자 도깨비들이 몰려와 지난번 동생 때처럼 ‘술과 고기, 밥과 떡 나와라 뚝딱’ 하며 순식간에 음식들을 푸짐하게 차려놓고는 그것을 먹으며 놀았습니다. 도깨비들이 정신없이 먹으며 놀고 있을 때 대들보 위에 숨었던 형이 개암 한 알을 딱 깨물었어요.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도깨비들이 그 소리를 듣고 놀라 도망가야 하는데 도망은커녕 "저번에 우리 방망이를 훔쳐간 놈이 또 왔구나. 이놈을 혼내 주자"하며 대들보 위에서 형을 끌어 내렸어요. 도깨비들은 형의 아랫도리만 홀랑 벗겨 ‘사타구니에 달린 귀중한 물건’을 붙잡고 늘이면서 "한발 늘어져라" 뚝딱, "두발 늘어져라" 뚝딱하며 방망이를 자꾸만 두들겨댔습니다. 그러자 형의 물건이 너무 커져버렸지요. 형은 그렇게 커져버린 자신의 물건을 보며 제발 원래대로 돌려달라고 도깨비들에게 청했지만 아무도 그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어요. 결국 형은 그 모습으로 집에 돌아올 수 없어 계속 산에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개금산 도깨비 방망이는 주제넘게 너무 욕심을 부리면 패가망신할 수 있는 만큼 누구나 분수에 맞게 살 때 복과 행운이 따른다는 점을 상기시켜준다.
    2018-05-28 | NO.84
  • 갱피 훑는 부인
    [정의] 광주광역시 남구 지산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강피를 훑어 밥을 지었던 부인과 남편에 대한 이야기.[개설] 「갱피 훑는 부인」은 가난한 선비와 강피를 모아 밥을 지었던 부인에 관한 이야기이다. [채록/수집 상황] 2018년 4월 12일 광주광역시 남구 양과동 지산마을에 거주하는 주민 윤정이[여, 82세]의 이야기를 채록하였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주관하는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에 수록되었다. [내용] 한 선비가 있었다. 그 선비는 집안이 가난하여 먹을 것이 없었지만 계속 공부만 하였다. 아내는 피를 훑고 밥을 지어 그를 먹였지만, 이내 견디지 못하여 선비가 시험을 보러 간 사이 집을 나갔다. 이후, 남편은 벼슬을 하여 다시 집에 돌아왔지만 아내는 여전히 갱피를 훑고 있었다. 이를 본 남편이 아직도 그 신세를 면하지 못했냐고 한탄하였다고 한다.[모티프 분석] 「갱피 훑는 부인」의 주요 모티프는 '신세 탈출에 대한 좌절'이다. 여기서 갱피는 강피[稗]의 사투리로, 곡식의 한 종류이다. 이야기에서 아내가 지었던 강피밥은 피만으로 지은 밥으로 흉년이 들 때 어쩔 수 없이 먹는 음식이었다. 가난 때문에 떠났던 아내가 남편이 벼슬을 얻어 다시 돌아왔을 때에도 여전히 갱피를 훑고 있는 이야기는 강태공과 생활고로 강태공을 떠난 전 부인 마씨의 이야기와 비슷하다. 다만, 강태공의 이야기에서는 다시 돌아온 아내에게 한 번 떠난 마음은 다시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지만, 「갱피 훑는 부인」이야기에서는 더 나은 형편을 위해 남편을 떠난 아내가 이전과 똑같은 형편에 놓인 모습에 대한 안타까움이 드러나고 있다. [참고문헌]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 표준국어대사전(https://stdict.korean.go.kr)[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7-31 | NO.83
  • 견훤과 생용마을
    광주광역시 북구 생용동 생용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마을 이름의 유래와 견훤에 관한 이야기. '견훤과 생용마을'은 생용마을에 태어난 후백제의 견훤(甄萱)[재위 892~935]과 관련된 지명의 유래에 관한 이야기이다.2018년 1월 30일 광주광역시 북구 생용동 생용마을에 거주하는 주민 범희인(남, 82세)의 이야기를 채록하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주관하는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에 수록되었다.생용동은 말 그대로 용이 태어난 곳으로, 예전에 견훤이 탄생한 곳으로 알려졌다. 『광주읍지(光州邑誌)』에 따르면, 광주에 8㎞ 떨어진 부락이 생용동이었는데, 이는 임금이 태어난 마을이라는 의미이다. 견훤이 태어난 곳을 생용동이라 하고, 견훤이 글을 배운 곳을 서당골이라 불렀다. 또한, 성안에 성지골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견훤이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이때 견훤이 훈련한 성안은 흙으로 만들었지만, 현재 유적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견훤과 생용마을'의 주요 모티프는 '왕의 탄생으로 인한 지명 유래'이다. 용은 상상 속의 동물로서 각 동물들의 뛰어난 능력과 성격을 모은 동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뛰어남으로 인해 용은 제왕을 상징하는 동물로 인식되었다. 견훤은 후백제의 왕이었기 때문에, 왕의 상징인 용이 생용동에서 태어났다는 지명이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광주읍지(光州邑誌)』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7-31 | NO.82
  • 경양방죽에서 고기 잡다
    광주광역시 동구 용산동 화산마을에서 전해 내려오는 경양방죽에 관한 경험담. '경양방죽에서 고기 잡다'는 당시 경양방죽의 모습과 고기를 잡고 놀았다는 이야기이다.2018년 2월 21일 광주광역시 동구 용산동 화산마을 경로당에서 주민 최복연(남, 87세)의 이야기를 채록하였으며, 한국학중앙연구소에서 주관하는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에 수록되었다. '경양방죽에서 고기 잡다'는 최복연이 어렸을 때 경양방죽 근처에 살았을 때 겪은 일이다. 경양방죽은 큰 연못이어서 수로가 마을까지 나올 정도였다. 최복연이 살았던 옛날 신안동은 '재뫼'라 불렀는데, 신안동에 있는 전남방직 앞 들이 커서 '들재뫼'라고도 불렀다. 비가 오면, 경양방죽이 범람하여 수로로 팔뚝만 한 물고기가 내려왔다. 그곳에 최복연의 아버지와 친구들이 시누대[신우대]로 발을 엮고, 수문으로 넘어온 고기를 잡았다. 그래서 고기를 잡은 날 저녁에 최복연은 석유로 호롱불을 켜고 잡은 고기를 같이 먹었다고 회상하였다. 경양방죽은 1967년 광주시에서 태봉산을 헐어 방죽을 메워 현재 남아 있지 않다.'경양방죽에서 고기 잡다'의 주요 모티프는 '특정 장소에 관한 경험담'이다. 경양방죽은 현재 남아 있지 않지만, 최복연이 어렸을 때 살았던 마을과 경양방죽과 관련된 이야기를 통해서 당시 경양방죽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 광주시청각자료실(http://gjarchive.kr)[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7-31 | NO.81
  • 고려장과 지게
    광주광역시 북구 생용동 생용마을에서 전해 내려오는 고려장에 관한 이야기. '고려장과 지게'는 고려장(高麗葬)을 이행하려는 아버지와 아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2018년 1월 30일 광주광역시 북구 생용동 생용마을 마을회관에서 주민 이맹순(여, 80세)의 이야기를 채록하였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주관하는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에 수록되었다.어느 사람이 아버지를 고려장하기 위해 지게에 지고 갔다. 이때, 그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따라갔다. 그 사람은 아버지를 땅에 묻고 지게를 그곳에 두고 돌아가려고 했는데, 그 사람의 아들은 지게를 가지고 가자고 말하였다. "지게는 갖고 갑시다!" "뭣 헐라고 그냐?" 그 사람이 이유를 물으니, 아들은 이렇게 답하였다. "아부지도 죽으믄 이 지게에 지고 와서 여어다가 묻을랑게." 그 사람은 아들의 말에 잘못을 깨닫고, 아버지를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왔다.'고려장과 지게'의 주요 모티프는 '고려장이 없어진 계기'이다. 고려장은 늙은 부모를 산 채로 갖다 버리는 악습으로, 고려장을 폐지하는 계기에 관한 설화는 전국적으로 전승되는 광포전설(廣浦傳說)이다. 아버지는 악습에도 불구하고 따르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나, 아들은 지게를 통해 아버지의 불효를 깨닫게 하고 잘못을 고치도록 유도한다. 이 이야기는 아들의 지혜를 통해 효와 인간의 가치를 강조한다. [참고문헌]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7-31 | NO.80
  • 고목나무 속의 구렁이업
    광주광역시 서구 덕흥동 덕흥마을에서 전해 내려오는 구렁이업에 관한 이야기. '고목나무 속의 구렁이업'은 구렁이업으로 우환을 당한 본량댁에 대한 이야기이다. 2018년 3월 6일 광주광역시 서구 덕흥동 덕흥마을에 거주하는 주민 최현섭(남, 84세)의 이야기를 채록하였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주관하는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에 수록되었다. 본량댁이란 사람의 집 뒤에 할아버지당산이 있는데, 옆에 큰 나무 두 그루가 있었다. 동짓날에 죽을 쑤어 놔두었더니, 누군가 죽을 다 먹었다. 이후 나무가 고목이 되자, 집안 사람들은 나무를 베고 땅을 다지는 공사를 하였다. 그런데 나무를 베고 보니 그 속에 큰 구렁이 여러 마리가 죽어 있었다. 그 이후 본량댁에서는 큰아들을 비롯하여 여러 사람들이 연이어 죽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은 이를 보고 구렁이가 업이었는데 죽여서 본량댁 사람들이 화를 입었다고 보았다. '고목나무 속의 구렁이업'의 주요 모티프는 '구렁이업으로 인한 화'이다. 업은 말과 동작과 생각, 그리고 거기에 비롯한 인과를 통칭하는 불교 용어로, 인간 개인의 행동과 사회가 맞물려 돌아가는 장치로 작용된다. 본량댁은 고목을 제거하고 땅을 다지기 위해 고목 안에 있는 구렁이를 죽게 하였다. 이러한 행동이 이후의 일에 영향을 미쳐 집안 사람들이 연달아 죽는 비극으로 이어진 것이다. 「고목나무 속의 구렁이업」 이야기에서 마을 사람들은 구렁이업으로 본량댁이 화를 입게 되었다고 인식하고 있다. [참고문헌] 조용길, 「업(業)에 대한 고찰」(『한국불교학』 5집, 한국불교학회, 1987)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7-31 | NO.79
  • 고봉 기대승 선생의 산소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산동에서 전해 내려오는 고봉 기대승에 관한 이야기.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1527~1572]이 자기가 묻힐 묏자리를 스스로 정했는데, 풍수설에 따라서 기대승의 후손이 끊겼다는 이야기이다. 1989년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산동에 거주하는 기세옥의 이야기를 채록하였으며, 1990년 광주직할시가 간행한 『광주의 전설』에 수록하였다.고봉 기대승이 여름 동안 광산동 청량산(淸凉山)에서 거처한 후에 제자와 함께 산을 내려오다가 자신이 죽은 뒤에 묻힐 묏자리를 정하였다. 제자는 기대승이 정한 자리가 길이 끊긴 절손지지(絶孫之地)로 후손이 끊어질 것이라며, 명당이 아니라고 하였다. 기대승은 제자가 본 풍수가 맞다고 하면서, 형님의 자손들도 자신의 자손이니 후에 양자를 삼아서 집안의 대를 계승하면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묻힐 곳은 백대 향화지지(百代香火之地)로 좋다고 하였다. 기대승은 죽은 뒤에 자신이 정한 자리에 묻혔고, 제자의 견해대로 증손 때 절손(絕孫)이 되어서 양자를 들여 대를 이었다. 기대승의 산소는 현재 광주광역시 광곡(廣谷)[너브실마을] 서북쪽에 있으며, 월봉서원에서 봄과 가을에 제향(祭享)을 지낸다.  「고봉 선생의 산소」는 고봉 기대승과 관련한 일화적 성격의 이야기이다. 고봉 기대승이 자신이 묻힐 묏자리를 직접 정했고, 풍수설로 제자와 논쟁을 벌였다는 내용이다. 기대승은 손이 끊길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사대부 집안의 명예를 잇기 위해서 자신의 묏자리를 정하였다. 이 이야기는 허구적 성격의 설화이기보다는 사실적 성격의 일화이며, 기대승 집안을 중심으로 전승된다. [참고문헌] 장덕순, 『구비문학개설』(일조각, 1971) 『광주의 전설』(광주직할시, 1990)[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7-31 | NO.78
  • 곳간에 도로 넣은 업구렁이
    광주광역시 광산구 본량동 평촌마을에서 전해 내려오는 업구렁이에 관한 이야기. 광주광역시 광산구 평촌마을에서 전해 내려오는 업구렁이와 집주인에 관한 이야기이다.2018년 4월 27일 광주광역시 광산구 본량동 평촌마을에 거주하는 주민 정선자[여, 77세]의 이야기를 채록하였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주관하는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에 수록되었다. 업(業)은 사람들이 집을 자꾸 뜨거나 팔 것이라는 말을 할 때 나오는데, 사람들 눈에 업이 보이면 집안이 망한다고 한다. 업은 주로 구렁이의 모습인데, 보통의 구렁이가 흑질백장(黑質白章)의 모양으로 등 색깔이 밤색이고 배가 하얀색인데, 업구렁이는 누런색이라고 한다. 옛날 정선자가 어렸을 때 살았던 옆 동네 어느 집에 업구렁이가 나타나서 집안이 망해 갔다고 한다. 이때 집주인이 울타리로 나가려고 하는 누런 구렁이를 보았는데, 구렁이를 다시 곳간으로 돌려놓았더니 집안이 다시 일어났다고 한다. 「곳간에 도로 넣은 업구렁이」의 주요 모티프는 '업신에 대한 믿음'이다. 업신은 집안의 재물을 관장하는 신으로, 주로 업구렁이나 업두꺼비, 업동자, 업족제비 등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민간에서는 업신을 함부로 내쫓거나 해하는 경우, 집안이 망한다고 알려져 있다. 「곳간에 도로 넣은 업구렁이」의 업에 관한 이야기와 옆 마을 집주인에 관한 업 이야기에는 업신이 집안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믿음이 드러나 있다. [참고문헌]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7-31 | NO.77
  • 광산이씨의 손(孫)을 지킨 종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 절골마을에서 전해 내려오는 광산이씨 일가에 관한 이야기. '광산이씨의 손(孫)을 지킨 종'은 광산이씨(光山李氏) 집안에서 살아남은 아이와 아이를 지켰던 종에 관한 이야기이다.  2018년 3월 6일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 절골마을에 거주하는 주민 이우춘[여, 80세]의 이야기를 채록하였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주관하는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에 수록되었다.예전 광산이씨 일가(一家)가 모략을 당해 집안의 사람들이 모두 죽는 사건이 있었다. 일가의 아들 한 명만 살아남았는데, 종이 일가의 그 아들은 등에 업고, 종의 아들은 걷게 하였다. 모략을 꾸민 사람들이 종에게 누가 그 일가의 아들이냐고 물었는데, 종은 걷고 있는 아들이 일가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종 덕분에 광산이씨 일가의 아들은 살아남았고, 종에게서 족보를 건네받았다. 살아남은 아들은 어느 부잣집에서 머슴살이를 하였다. 어느 날 부잣집 주인은 머슴이 족보를 몰래 펴보고, 처마 밑으로 족보를 숨기는 것을 보게 되었다. 주인이 머슴이 숨겼던 족보를 확인해 보니, 머슴이 이름 있는 성씨의 아들인 것을 알게 되었다. 이후, 주인은 광산이씨의 아들을 자신의 딸과 혼인시켰고, 광산이씨 가문은 그 자손이 퍼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광산이씨의 손(孫)을 지킨 종」의 모티프는 '가문의 후손을 지킨 종의 희생'이다. 광산이씨 일가의 멸문지화(滅門之禍)는 정여립(鄭汝立)[1546~1589]의 난에 연루되었던 필문(蓽門) 이선제(李先齊)[1390~1453] 선생의 5대손인 이발(李潑)[1544~1589]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이발은 1573년 문과에 급제하여 1584년 대사간에 올라 동인의 지도자가 되었는데, 당시 서인이었던 송강(松江) 정철(鄭澈)[1536~1593]과 크게 대립하였다. 결국 이발은 정여립의 모반(謀反) 사건인 기축옥사(己丑獄事)에 연루되어 동생 이길(李洁)을 비롯해 3대가 멸족되었다. 다만, 살아남은 일가 사람들이 진도로 피신하였는데, 현지인들의 도움으로 그곳에서 정착하여 가문의 대를 이었다고 한다. 「광산이씨의 손(孫)을 지킨 종」 이야기에서도 광산이씨 한 명이 살아남아 가문을 이을 수 있었는데, 이때 아들을 바친 종의 희생이 가문의 명맥에 크게 기여하였다는 내용과 연관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참고문헌]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 디지털진도문화대전(http://jindo.grandculture.net)[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수정 2023.11.21
    2023-07-31 | NO.76
  • 광주 경양지
    광주광역시 동구 계림동과 신안동 일대에 있었던 경양지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조선 시대 세종 때 만들어졌다는 전라도 광주 지역의 인공 못인 경양지의 이름과 축조(築造)에 관한 지명전설이다. 경양지(景陽池)는 조선 세종(世宗) 때 김방(金倣)이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경양지는 광주광역시의 계림동과 신안동 일대에 1967년까지 있었던 인공 못이다. 그런데 1968년에 태봉산(胎封山)[53m]을 허물고, 그 흙으로 경양지를 매립하면서 사라졌다. 경양지 축조에 얽힌 전설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전설은 다음과 같다. 광주 서방에 가난하지만 착한 이씨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큰비가 내려 물 위에 떠내려가는 개미집을 건져 주었다. 며칠 후 마당에 쌀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이상하게 여겨 아침 일찍 살펴보니 개미 떼가 쌀을 물어다 쌓고 있었다. 누군가 쌀을 잃어버린 사람이 있을 거라 생각해 찾아보았지만, 쌀을 잃어버린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이씨는 개미의 보은(報恩)으로 부자가 되었다. 몇 년 뒤, 광주에 가뭄이 들어 휼민창(恤民倉)인 동창(東倉)을 열어 보니 빈 가마니뿐이었다. 이씨가 일도 하지 않고, 돈을 벌어 부자가 되었다는 소문이 났고, 쌀도둑으로 지목되어 관가에 잡혀 왔다. 감사가 이씨에게 부자가 된 이유를 묻자, 이씨는 홍수 때 개미를 살려 준 이야기부터 개미 떼가 쌀을 물어 온 이야기까지 사실대로 말하였다. 감사는 이씨의 착한 마음과 개미 떼의 보은에 감동하여 이씨를 풀어 주었다. 풀려난 이씨는 개미 떼가 물어다 준 쌀이 가뭄이나 재난 때 백성들에게 주는 휼민창의 양곡임을 알고는 광주의 백성들을 위해 못을 파고 제방을 축조하기로 하였다. 이씨는 제방을 축조하는 백성들의 일당을 관청을 대신해 내주는 영세민 구호 사업을 했다. 두 번째 전설은 다음과 같다. 옛날 광주의 효천면에 김씨 부자가 살고 있었다. 김씨 부자는 큰 부자였으나 매우 인색했다. 김씨 부자가 인근 농민들에게 곡식을 빌려주고 몇 배로 받아 먹으니 주변의 농민들은 더욱 가난해져 갔다. 그러던 어느 해에 광주에 큰 흉년이 들었다. 김씨 부자는 주변 백성들의 어려움을 모른 체하며 창고의 문을 굳게 지켰다. 그런데 마을에 가난한 살림에 품팔이로 살아가는 박경양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흉년이 닥치자 홀어머니의 끼니조차 챙기지 못했다. 그러던 박경양은 김씨 부자를 찾아가 곡식을 빌려 달라며 간청하였다. 박경양이 통사정을 해도 김씨 부자가 곡식을 빌려주지 않자, 악담을 내뱉었다. 이에 화가 난 김씨 부자가 담뱃대로 박경양의 머리를 내리쳤고, 박경양이 죽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박경양의 노모도 통곡을 하다가 쓰러져 죽고 말았다. 박씨 모자(母子)가 죽자, 김씨 부자는 초상을 간략하게 치러 주었다. 그런데 다음 날 꿈에 박경양의 노모가 나타나 쥐 떼가 김씨 부자의 창고에 쌓인 쌀을 모조리 파먹을 것이라며 경고했다. 그 다음 날부터 김씨 부자의 창고에 쥐 떼가 나타나 곡식을 갉아 먹기 시작하였다. 도저히 손을 쓸 수 없었던 김씨 부자가 고양이를 구해 풀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날 밤 꿈에 또 박경양의 어머니가 나타나자 김씨 부자는 살려 달라며 빌었다. 그러자 박경양의 어머니는 곳간의 곡식을 풀어 연못을 만들라고 하였다. 김씨 부자가 연못을 만들기 위해 제방 축조 공사를 시작하자 김씨 부자의 병이 사라지고 곳간의 쥐 떼도 사라졌다. 마을 사람들은 제방 축조 공사의 품삯을 받아 흉년을 넘길 수 있었고, 큰 연못으로 농사 지을 물 걱정도 덜었다. 못이 완성되자 마을 사람들은 박경양의 넋을 기려 경양못, 경양방죽이라고 불렀다전라도 광주 지역의 경양지를 축조할 때 개미 떼의 도움으로 일꾼들을 먹일 식량을 충당하였다는 제방 축조와 관련된 전설이다. 김방이 무너진 개미집을 구해 줬고, 개미들이 김방에 보은한 이야기이다. 보은담은 거의 대부분이 동물담으로 동물에 빗대어 보은의 논리를 제공한다. 특히, 개미의 보은은 개미가 작지만 부지런하고 힘이 센 특성을 드러내어, 수많은 개미들이 작은 쌀알들을 옮겨 수북이 쌓은 것으로 이야기한다. [참고문헌] 『명소지명유래지』(전라남도, 1987) 『무등산』(광주직할시, 1988) 『광주의 전설』(광주직할시, 1990)[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1 | NO.75
  • 광주 서오층석탑의 유래
    광주광역시 남구 구동에서 전해 오는 서오층석탑에 관한 이야기.광주광역시 남구 구동에 있는 서오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 초기 사이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보물 제109호의 유형문화재이다. 이야기는 서오층석탑의 내력에 관한 전설이다. 서오층석탑이 있는 광주공원 일대는 옛날에 성거산이라 불렸고, 성거사가 있었다. 성거사는 언제 지어졌고, 언제 없어졌는지 기록이 없다. 전해 오는 말에 따르면, 성거사를 지을 때 완성 직전에 여러 번 무너졌다고 한다. 성거사는 처음에는 성거산에서 거북의 꼬리 쪽인 향교 주변에 짓고 있었다. 완성 직전이면 넘어지고 다시 세우면 또 무너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중에 이름 높은 도승이 지나가다 보니, 살아 있는 거북의 꼬리에 집을 짓고 있다고 하였다. 거북이 꼬리를 칠 때마다 집이 무너지는 것이니 거북을 죽여 못 움직이게 해야 한다고 했다. 이 말을 따라 거북의 목에 오층탑을 세우고 다시 절을 지었더니 절이 허물어지지 않았다.「광주 서오층석탑의 유래」의 주요 모티프는 '동물 형태의 지형'과 '풍수로 지은 사찰' 등이다. 서오층석탑이 있는 광주공원은 예부터 거북의 형상을 닮았다 하여 구강(龜岡)이라 불렸다. 현재는 절이 없고 탑만 남아 있다. 성거사 터로 추정되는 곳에 절을 지으려고 할 때 거북의 목 부분에 절과 탑을 지어 거북이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사찰을 지었다. 그래서 성스러운 거북의 기운이 광주와 이 지역을 떠나지 못한다는 인식이 반영되어 있다. [참고문헌] 『무등산』(삼화문화사, 1988) 『광주의 전설』(광주직할시, 1990)[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1 | NO.74
  • 광주목 강등과 노흥준
    광주광역시 동구에서 광주의 행정 명칭에 관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조선 세종 때 만호(萬戶) 노흥준(盧興俊)이 광주목사 신보안(辛保安)을 구타한 사건을 계기로 광주목(光州牧)이 군으로 강등되었다가 문종 때에 다시 복고되었다는 이야기이다. 1989년 7월 『무등일보』의 ‘사화비록’에 기고되었다. 1990년에 광주직할시에서 간행한 『광주의 전설』에 수록되어 있다. 1428년(세종 10)에 신보안이 광주목사로 부임하였다. 신보안은 관기인 소매에게 욕심이 있었으나, 만호인 노흥준의 애첩이란 것을 알고 주저하였으나 후에 정을 통하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노흥준이 목사 신보안을 찾아가 목사의 집무실인 선화당에서 구타하고 욕설을 하였다. 그리고 신보안은 얼마 후 사망하였다. 조정에서 감찰을 보내 신보안이 사망한 사건을 조사하였고, 노흥준이 미풍양속을 어기고 국법을 무시한 처사로 판정하고 처벌하였다. 그리고 노흥준의 가산을 몰수하고, 노흥준의 가족을 광주에서 추방하였다. 이 사건으로 1430년(세종 12)에 광주목은 무진군으로 격하되었다. 다시 광주목으로 복고된 것은 1451년(문종 1)으로 21년간 강등되어 있었다. 조선시대 호남의 거읍(巨邑)인 광주목이 무진군으로 강등된 사건과 다시 복고된 내력에 관한 이야기로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사화의 성격을 강하게 지닌 이야기이다. [참고문헌] 『광주의 전설』(광주직할시, 1990) 「광주목 강등과 노흥준」(『무등일보』, 1989. 7. 2.)[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1 | NO.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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