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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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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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양방죽에서 고기 잡다
    광주광역시 동구 용산동 화산마을에서 전해 내려오는 경양방죽에 관한 경험담. '경양방죽에서 고기 잡다'는 당시 경양방죽의 모습과 고기를 잡고 놀았다는 이야기이다.2018년 2월 21일 광주광역시 동구 용산동 화산마을 경로당에서 주민 최복연(남, 87세)의 이야기를 채록하였으며, 한국학중앙연구소에서 주관하는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에 수록되었다. '경양방죽에서 고기 잡다'는 최복연이 어렸을 때 경양방죽 근처에 살았을 때 겪은 일이다. 경양방죽은 큰 연못이어서 수로가 마을까지 나올 정도였다. 최복연이 살았던 옛날 신안동은 '재뫼'라 불렀는데, 신안동에 있는 전남방직 앞 들이 커서 '들재뫼'라고도 불렀다. 비가 오면, 경양방죽이 범람하여 수로로 팔뚝만 한 물고기가 내려왔다. 그곳에 최복연의 아버지와 친구들이 시누대[신우대]로 발을 엮고, 수문으로 넘어온 고기를 잡았다. 그래서 고기를 잡은 날 저녁에 최복연은 석유로 호롱불을 켜고 잡은 고기를 같이 먹었다고 회상하였다. 경양방죽은 1967년 광주시에서 태봉산을 헐어 방죽을 메워 현재 남아 있지 않다.'경양방죽에서 고기 잡다'의 주요 모티프는 '특정 장소에 관한 경험담'이다. 경양방죽은 현재 남아 있지 않지만, 최복연이 어렸을 때 살았던 마을과 경양방죽과 관련된 이야기를 통해서 당시 경양방죽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 광주시청각자료실(http://gjarchive.kr)[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7-31 | NO.660
  • 경혜공주의 묘지명- 삼탄집 제14권
    경혜공주의 묘지명〔敬惠公主墓誌銘〕 - 삼탄집 제14권 : 삼탄 이승소(李承召, 1422~1484)  경혜공주는 문종 공순대왕(文宗恭順大王)의 따님이다. 어머니 권씨(權氏)는 바로 현덕왕후(顯德王后)이며 뒤에 폐위(廢位)되었다. 안동(安東)의 대성(大姓)인 고려 태사(太師) 권행(權幸)의 후손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 중추원사(中樞院使)를 지낸 권전(權專)이 태부(太傅) 문헌공(文憲公) 최충(崔冲)의 12대손인 부정(副正) 최용(崔鄘)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영락(永樂) 무술년(1418, 태종18)에 왕후를 낳았다. 선덕(宣德) 신해년(1431, 세종13)에 궁궐로 선발되어 들어가 문종(文宗)을 저궁(儲宮)에서 모시었으며, 을묘년(1435)에 공주를 낳았다.공주는 경오년(1450)에 정종(鄭悰)에게 시집갔는데, 정종은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된 정도공(貞度公) 정역(鄭易)의 손자이며, 형조 참판 정충경(鄭忠敬)의 아들이다. 경태(景泰) 을해년(1455, 세조1)에 정종이 죄를 지어 광주(光州)에 유배되자, 공주가 따라가 있으면서 온갖 곤욕을 다 치렀는데, 일반 사람들도 감당해 내지 못할 바였다. 그런데도 조금도 원망하거나 불평하는 기색이 없이 아침저녁으로 아녀자로서 도리를 다하면서 더욱더 경건하게 하며 해이하지 않았다. 정종이 마침내 죽음에 이르자 공주는 애통해하기를 예법대로 다하였으며, 어린아이들을 잘 어루만져 길렀다. 이에 기구한 운수를 만난 데 대해 슬퍼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아녀자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데 대해 흠앙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천순(天順) 신사년(1461, 세조7)에 세조께서 중관(中官)을 보내어 경사(京師)로 소환하고는 특별히 노비 50구(口)를 하사하고 종신토록 1품관의 녹봉을 지급하라고 명하였다. 성화(成化) 을유년(1465)에 집 한 채를 하사하였다. 기축년(1469, 예종1)에 예종께서 또 노비 50구를 하사하였으며, 대왕대비(大王大妃)께서 더욱더 사랑을 쏟아 때때로 대궐 안으로 불러들여 여러 날 동안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계사년(1473, 성종4) 동12월에 병에 걸리자 상께서 내의(內醫)를 보내어 진찰하게 하였으며, 아울러 약(藥)을 하사하여 치료하게 하였으나 효험을 보지 못하였다. 28일 아무 갑자에 집에서 졸하니, 향년은 40세였다. 부음을 아뢰자 상께서 유사에게 명하여 조문하는 제사를 지내게 하였으며, 부의를 하사하고 관가에서 장사를 돌보아 주게 하였다. 다음 해인 갑오년(1474) 3월 아무 날에 고양(高陽)에 있는 아무 산 아무 향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공주는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정미수(鄭眉壽)로 지금 돈녕부 참봉(敦寧府參奉)으로 있으며, 딸은 어리다.명(銘)은 다음과 같다.무릇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장수하고 요절하며 궁박하고 통달함에는 운수가 있는 법으로, 저 푸른 하늘은 아무런 단서가 없어서 기필할 수 없다. 무릇 귀한 왕녀(王女)의 신분인데도 그 복록을 누리지 못하였으며, 정숙하고 화락한 덕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장수를 누리지 못한 것은 어째서인가? 비록 그렇지만 하늘이 보답하는 것은 소홀하면서도 잊지 않는 법이니, 흐르는 광채와 남은 경사가 장차 후세를 기다려서 더욱더 크게 빛날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천명이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을 징험할 것이다.
    2020-09-21 | NO.659
  • 계미동사일기(癸未東槎日記)
    계미년(癸未年), 즉 서기 1643년은 우리나라 인조(仁祖) 21년이다. 이때 우리나라는 국제적으로 청(淸) 나라와의 관계가 미묘해서 그 문제 해결의 일단으로 일본에 통신사(通信使)를 보내게 되었다.이때 상사(上使)는 윤순지(尹順之), 부사(副使)는 조경(趙絅), 종사관(從事官)은 신유(申濡)였다. 이들은 2월 20일에 길을 떠나서 4월 10일에 부산에 도착하고, 동 24일에 부산을 떠나 뱃길로 5월 1일에 대마도(對馬島)에 도착했다. 대마도까지 가는 동안에도 이미 일행은 풍랑에 시달려 허다한 위험을 겪어야 했다.대마도에서 오래 머물러 순풍을 기다리다가 5월 14일에 길을 떠나, 6월 초 7일에 대판성(大坂城)에 도착했다. 이리하여 사신 일행은 7월 8일에야 강호(江戶)에 도착하여 일을 마치고, 23일에 떠나 또다시 험난한 수로에서 온갖 위험을 겪고 10월 27일에 부산에 도착하게 되었다.이 글은 저자를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글 내용으로 보아 삼사(三使) 중의 하나가 쓴 글은 아니고 그밖에 딴 사람의 손으로 씌어진 일기로 보인다.8월 큼 24일(을유)비가 내림. 왜경에 머물렀다. 포로된 여자 대춘(大春)ㆍ묘운(妙雲)등은 광주(光州) 사람인데, 와서 뵙고 고국에 돌아가기를 원하므로 상통사(上通事)를 시켜서 데려가도록 했다. 삼선(三船)의 선장(船將) 전운서(全雲瑞)가 보고한 조목을 보니, 7월 초에 사공 세 사람이 죽었다 한다.
    2022-04-29 | NO.658
  • 고 장원(高壯元)이 경사(京師)에 조회하러 가는 것을 전송하다. - 잠곡유고 제1권
    고 장원(高壯元)이 경사(京師)에 조회하러 가는 것을 전송하다. 계축년(1613) - 잠곡유고 제1권 : 잠곡(潛谷) 김육(金堉, 1580~1658) 서석산 높고 높아 만 길이나 되는데 / 瑞石之山高萬仞천 봉우리 삐쭉삐쭉 하늘 속에 솟았어라 / 千峯束立天中央솟구치어 맺혀져서 맑은 기운 다 모음에 / 扶輿磅礴淑氣窮배인 정기 몇 차례나 나라 인재 배출했나 / 孕精幾作邦家光발흥하여 태헌공 그 분께서 태어남에 / 勃興得我苔軒公하늘 닿는 그 의기는 추상보다 더 하였네 / 摩天義氣凌秋霜그 정충과 그 위절이 우주를 비춤에 / 精忠偉節照宇宙남긴 풍모 흠앙하니 눈물 옷깃 적시어라 / 景仰餘韻猶沾裳내 평생에 한 되는 건 공 모시지 못한 걸로 / 吾生恨不擧公輿공의 유방 흠앙하여 자손 사귈 생각했네 / 思識子孫欽遺芳풍진 세상 문 나서서 한 차례 경개해서 / 風塵出門一傾盖어질고도 호걸찬 그댈 용케 보았네 / 何幸見此賢豪郞집안 명성 안 떨구고 청전을 보전해서 / 家聲不墜保靑氈나이 어려 과거장서 영명을 드날렸네 / 弱歲揚英翰墨場이태 사이 연방 계방 장원 되고 발탁됨에 / 魁蓮擢桂兩年間빛나는 그 명성이 팔도를 놀래켰네 / 赫赫聲名驚八方큰 어진이 후손 필시 일어나게 되는 법 / 大賢之後必有興머지않아 암랑에 오를 줄을 내 알겠네 / 分知不遠登巖廊이조와 병조 관직 훌쩍 뛰어 올라감에 / 民曹騎省歘聯翩밝은 임금 이미 벌써 강직한 맘 알아봤네 / 明主已識懷剛腸천추절을 하례 가는 사신 가려 뽑음에 / 千秋賀節選擇使만리 먼 연경 땅 가 황제 조알하게 됐네 / 萬里燕京朝玉皇멀고도 먼 이국 산천 사모 타고 날아감에 / 山川召遞四牡飛대장부라 꾸린 행장 쌍검만이 길다랗네 / 丈夫行裝雙劒長갈석산과 의무려산 눈 안에 들어오고 / 醫閭碣石入眼中난하와 요해 바다 파도는 망망하네 / 灤河遼海波茫茫이제묘 앞에 서서 두 분 영령 조문하고 / 夷齊廟中弔英靈화표주 가에서는 고향 하늘 바라보리 / 華表柱邊應望鄕이정에는 느티나무 그늘 한창 짙은데 / 離亭正値槐陰合역로에선 되레 매우 내릴까 봐 걱정이네 / 驛路還愁梅雨凉인간 세상 만남 이별 운수 있는 법이니 / 人間離合亦有數이번 이별 먼 헤어짐 슬퍼할 게 뭐 있겠나 / 此別何必悲參商견문 넓고 기이함에 심기가 장해지리 / 奇聞大觀壯心氣자장은 먼 유람에 명문장가 되었다오 / 子長遠遊能文章일 마치고 돌아올 땐 한가한 틈 많으리니 / 竣事廻轅想多暇시구 맑고 새로워서 남들 감당 못하리라 / 佳句淸新人莫當중국 땅의 경물 모두 거두어서 돌아옴에 / 收拾中華景物歸해노의 주머니가 가득 찬 것을 보리 / 佇看所富唯奚囊[주-D001] 서석산(瑞石山) : 광주(光州)에 있는 무등산(無等山)의 별칭이다.[주-D002] 태헌공(苔軒公) : 태헌은 고경명(高敬命)의 호이다.[주-D003] 유방(遺芳) : 선인(先人)이 남긴 성대한 덕과 아름다운 명예를 말한다.[주-D004] 경개(傾蓋) : 길을 가다가 서로 만나서 수레의 휘장을 기울이고서 잠시 이야기한다는 뜻으로, 잠깐 동안 서로 이야기한다는 뜻이다. 《공자가어(孔子家語)》 치사(致思)에, “공자가 담(郯)에 가서 정자(程子)를 길에서 만나서는 경개(傾蓋)하고서 종일토록 이야기하고는 서로 몹시 친해졌다.” 하였다.[주-D005] 청전(靑氈)을 보전해서 : 청전은 푸른색의 담요인데, 벼슬하는 집안에서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 물건이란 말로, 대대로 벼슬자리를 잃지 않았다는 뜻이다. 《태평어람(太平御覽)》 제70권에, “왕자경(王子敬)이 재실(齋室) 안에 누워 있을 적에 도둑이 들어 물건을 훔쳤는데, 온 방 안의 물건을 다 훔치도록 자경은 누운 채로 가만히 있다가 도둑이 탑(榻) 위로 올라가서 훔칠 물건을 찾으려고 하자 왕자경이 소리를 치면서 말하기를, ‘석염(石染)과 청전(靑氈)은 우리 집안에 대대로 전해져 오는 물건이니 특별히 놔둘 수 없겠는가?’ 하였다. 이에 도둑이 물건을 놓아둔 채 도망쳤다.” 하였다. 청전구물(靑氈舊物).[주-D006] 연방(蓮榜) 계방(桂榜) : 연방은 조선 왕조 때 사마시(司馬試)인 생원과(生員科)와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한 사람의 이름을 적은 방목(榜目)이며, 계방은 대과(大科)에 급제한 사람을 적은 방목이다.[주-D007] 암랑(巖廊) : 높고 큰 낭무(廊廡)로, 조정(朝廷)을 가리킨다.[주-D008] 사모(四牡) : 네 마리의 수말이라는 뜻으로, 《시경》 소아(小雅)의 편명(篇名)이기도 한데, 왕명을 봉행하는 사신이 타고 가는 말을 뜻한다.[주-D009] 화표주(華表柱) : 무덤 앞에 있는 망주석으로, 요동 사람 정영위(丁令威)가 학이 되어 날아와서 앉았던 곳이다. 한 나라 때 요동 사람 정영위가 영허산(靈虛山)에서 도를 닦아 신선이 되었다. 그 뒤에 학이 되어 요동에 돌아와 화표주에 앉아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새여, 새여, 정영위여, 집 떠난 지 천 년 만에 오늘에야 돌아왔네. 성곽은 의구한데 사람들이 아니로세. 어찌 신선 아니 배워 무덤이 총총하뇨.” 하였다. 《搜神後記》[주-D010] 이정(離亭) : 성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의 길 옆에 세워둔 정자로, 옛 사람들이 먼 길을 떠나는 사람들을 이곳에서 전송하였다.[주-D011] 매우(梅雨) : 매실이 누렇게 익는 계절인 초여름에 내리는 긴 장마비를 말한다.[주-D012] 자장(子長)은 …… 되었다오 : 자장은 《사기(史記)》를 지은 사마천(司馬遷)의 자이다. 사마천은 천성이 유람하기를 좋아하여 일찍이 남쪽으로 강수(江水), 회수(淮水)를 유람하고 회계(會稽)로 올라가서 우혈(禹穴)을 보고 구의산(九疑山)을 보았으며, 북쪽으로는 문수(汶水)와 사수(泗水)를 건너 제로(齊魯) 지방을 거쳐 양(梁)과 초(楚)지방까지 두루 유람하였다. 이때 얻은 산천에 대한 지식으로 인해 명문장가가 되었다고 한다. 《史記 卷一百三十 太史公自序》[주-D013] 해노(奚奴)의 주머니 : 해노는 수행하는 어린 종자(從者)를 가리키며, 주머니는 시고(詩稿)를 넣는 주머니를 말한다. 당(唐) 나라 이상은(李商隱)의 《이하소전(李賀小傳)》에, “이장길(李長吉)이 매일 아침 해가 뜨면 제공(諸公)들과 노닐면서 항상 어린 종자를 데리고 나귀를 타고 다녔는데, 어린 종자의 등에다가 오래 묵은 비단 주머니를 지고 따라다니게 하였다. 그리고는 우연히 좋은 시구를 얻으면 즉시 시구를 써서 그 주머니에 넣었다.” 하였다.
    2020-09-25 | NO.657
  • 고경명(高敬命)ㆍ유팽로(柳彭老) - 연려실기술 제16권
    고경명(高敬命)ㆍ유팽로(柳彭老) - 연려실기술 제16권 / 선조조 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 6월에 전라좌도 의병장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 고경명(高敬命)과 종사관 학유(學諭) 유팽로(柳彭老) 등이 담양(潭陽)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경명은, 자는 이순(而順)이며, 호는 제봉(霽峰) 또는 태헌(苔軒)태사(笞槎) 이요, 본관은 장흥(長興)시조(始祖)는 탐라(耽羅)에서 나왔으나, 그 뒤에 본관을 장택(長澤)으로 정하여 주었기 때문에 드디어 장흥 고씨가 되었다. 이다. 대간 맹영(孟英)의 아들로, 무오년에 과거에 장원급제하였다. 이때, 벼슬에서 물러나와 광주(光州) 시골에 있었는데, 임금이 서쪽으로 파천하고 서울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밤낮으로 통곡하다가 전라감사 이광(李洸)의 군사가 금강(錦江)에 이르러 해산해 돌아가니, 이광에게 글을 보내어 준절히 책망했다.팽로와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꾀하여 5월에 담양에 모였는데, 팽로 등이 경명을 추대하여 대표자로 하니, 경명이 단 위에 올라, 늙고 병들었음에도 사양하지 않았다. 글을 만들어 도내(道內)의 선비와 백성들에게 깨우쳐 일러 6월 11일을 군사 일으킬 기일로 정하였더니 선비와 백성들이 많이 응모하여서 군사 6천여 명을 얻었고, 또 각도에 격문을 돌리고, 또 제주 목사(濟州牧使) 양대수(楊大樹)에게 격문을 보내어 말[馬]을 수집하였는데, 격문의 사연이 격렬하고 간절하여 나라 사람들이 서로 전해가며 외었다.○ 경명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학유 유팽로(柳彭老)와 학관(學官) 양대박(梁大樸)을 종사로 하고 정랑 이대윤(李大胤)ㆍ정자(正字) 최상중(崔尙重)ㆍ양사형(楊士衡)ㆍ유학(幼學) 양희적(梁希迪) 등을 모량유사(募糧有司 군량 조달하는 직책)로 삼았다. 광주(光州)에 사는 정자 오자(吳玼)는 기개와 의리를 숭상하는 사람인데 항상 고씨(高氏) 집안의 충성스럽고 효도함을 사모하더니, 이제 달려와 종사가 되고, 진원(珍原) 사람 김인혼(金麟渾)인후(麟厚)의 종제 은 담력과 지략이 있었는데 경명의 막하(幕下)에서 참모 노릇을 하고, 보성(寶城) 사람 오유(吳宥)는 원래 원수(元帥)의 막하에 있었는데 의병을 모집해 와 경명의 부장(副將)이 되었다.○ 팽로는, 자는 군수(君壽)이며, 본관은 옥과(玉果)이다.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은 학유(學諭)였다. 서울이 함락하였다는 것을 듣고 울부짖으며 대박ㆍ회적 등과 더불어 경명에게 가서 향리의 의병을 일으킬 것을 의논하니 경명이 즐겁게 그 의견에 좇아 즉일로 격문을 발송하였다. 그때, 전라도에서 의병을 일으킨 것은 팽로 등이 맨 먼저 하였기 때문에 세상에서 호남의 삼창의(三倡義)라고 일컬었다.○ 그 격문에, “요즈음 나라 운수가 중도에 비색하여 섬 오랑캐가 밖에서 개떼 덤비듯 한다. 처음에는 역적 양(亮)이 맹약 어기듯이 하더니 마침내는 춘추 때 오 나라가 주 나라를 갉아먹던 짓을 함부로 한다. 우리에게 방비가 없음을 틈타 허를 찔러 몰려 와서 하늘도 속일 수 있다 하여 제멋대로 곧장 올라온다. 우리나라의 병사(兵使)ㆍ수사(水使)들은 갈림길에서 서성거리고 고을 맡은 수령들은 산골로 도망해 숨는다. 도적놈들을 임금이나 부모에게로 보내는 것은 이 어찌 차마 할 일이며, 임금에게 나라의 존망을 근심하게 함이 너희 마음에 편안하겠는가. 어찌하여 백 년 동안 길러 놓은 민생들로서 일찍이 한 개의 의기 있는 남자도 없단 말인가. 외로운 군사로 깊이 들어왔으니 여진(女眞)이 원래 병법을 알지 못함이 있으며 중행열(中行說)을 매치지 못한 것은 한(漢) 나라가 워낙 대책이 없었던 것이다. 장강(長江)이 갑자기 그 천참(天塹)의 가치를 잃게 되어 흉악한 칼날이 이미 수도에 육박하였다. 남조(南朝)에 사람이 없다는 비웃음은 진실로 마음 아픈 일이니, 북군(北軍)이 날아서 건넜다는 말이 불행히도 오늘에 근사하다. 우리 임금께서 옛날 주 나라 태왕(太王)이 빈(邠)을 떠나던 심경으로, 당 나라 명황(明皇)이 서촉(西蜀)으로 피난하듯 서북으로 행차하였다. 이 일은 대개 종묘 사직을 위한 지극한 계책에서 나온 것이니, 지방의 잠깐 동안의 노고쯤이야 꺼릴 것이 있으랴. 공(鞏)과 낙(洛)의 풍진(風塵)에 임금의 낯빛에 여러 번 깊은 근심이 나타났고 민산(岷山)과 아미산(峨眉山)의 험한 사다리 길에 당 나라 명황의 행차가 먼 길을 건너간 일과 같다. 하늘이 이성(李晟)을 낳았으니 난을 숙청한 것은 원로(元老)에게 힘입었고 육지(陸贄)가 기초한 애통조(哀痛詔)가 또 우리 조정에서 내렸다. 무릇 혈기(血氣)있고 목숨을 가진 자로서 누구인들 분통하여 죽고자 하지 않는 이가 있겠는가. 사람의 계책이 잘 되지 못하여 나라의 일이 어찌 이렇게 어렵게 되었는가. 봉천(奉天)으로 피난한 당 나라 덕종의 행차는 아직 돌아오지 못하고, 상주(相州)에서 싸우던 송 나라의 군사와 같이 우리 군사는 이미 무너졌다. 이 꿈틀거리는 벌과 땅벌[蜂]같은 더러운 오랑캐들이 들끓고 있는데, 아직 흉한 고래를 잡아 죽이 듯하지 못하였다. 적이 성 안에서 아직 숨을 쉬고 있는 것은 장막 위에서 날고 있는 제비와 같고, 서울 부근을 점령한 것은 우리[檻] 안에서 날뛰는 원숭이와 같다. 비록 명 나라 군사가 소탕(掃蕩)할 날이 있을 것이나 흉악한 무리가 당장 흩어져 달아남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경명(敬命)은 만절(晩節)의 단심(丹心)이요, 흰 머리의 썩은 선비다. 밤중의 닭소리를 들으니 난리를 감당할 수 없으나 중류(中流)의 돛대를 치면서 외로운 충성을 다짐한다. 다만 개와 말이 주인을 생각하는 것과 같은 충성만을 품고, 모기나 등에가 태산을 짊어질 힘이 없음은 생각지 아니한다. 이에 드디어 의병을 규합하여 바로 서울을 향할 것이니, 소매를 떨치고 장단(將壇)에 올라 눈물을 뿌리어 여러 동지에게 맹세하노라. 곰을 치고 범을 잡는 장사들이 우레같이 일어나고 바람같이 달려오며, 말을 뛰어 타고 관문(關門)을 뛰어 넘는 무리들이 구름같이 모이고 비오듯 몰아온다. 대개 협박당하여 응하거나 강요하여서 쫓아온 것이 아니고, 오직 신자(臣子)로서 충의의 마음이 다같이 지성에서 나왔다.국가 존망이 달린 위급한 때에 있어서 어찌 감히 작은 제 몸을 아낄 수 있으랴. 군사를 의병이라고 이름지었으니 처음부터 직책상의 관직이나 지역에 상관이 없고 군사는 정의(正義)가 힘이니, 강하냐 약하냐는 논할 바가 아니다. 대소의 인사들이 의논하지 않고도 말이 같으며 원근의 지방에서 소문만 듣고도 다 같이 일어서니, 우리의 각 군 수령들과 각도의 선비와 백성들이 충성으로 어찌 임금을 잊겠는가. 의(義)로 마땅히 나라를 위하여 죽어야 한다. 혹은 병기로 돕고, 혹은 군량으로 구조하며 혹은 말을 달려 행진의 선두에 앞장서고, 혹은 쟁기를 놓고 농사터에서 일어서 나오라.힘이 미칠 수 있는 대로 오직 의로운 길로 나아갈 뿐이니, 능히 임금을 어려운 데 가서 구호할 이 있거든 나는 그대와 더불어 함께 일어나기를 원하노라. 가만히 생각하니, 임금께서는 멀리 서도에 가 계신데, 그곳 풍속의 아름다움은 멀리 기자(箕子) 때부터이며 군사가 강하기는 일찍이 수(隋) 나라ㆍ당 나라의 백만 대병을 꺾었던 곳이다. 조정의 계획도 장차 조처가 있을 터이며 국가가 어찌 한쪽 지방에서만 유지하겠는가. 잘 패하면 망하지 아니하는 것이니, 복덕성(福德星)이 바야흐로 오(吳)의 분야(分野)에 다달았으며, 큰 근심이 열렸으니 노래불러 한(漢) 나라를 더욱 생각하네. 여러 호걸들이 시국을 바로잡는데 신정(新亭)에서 우는 것을 왜 하랴. 백성들이 임금을 기다리니 서울로 돌아오는 행차를 곧 보게 될 것이다.” 하였다. 《일월록》 ○시장(諡狀) 이명한(李明漢)의 찬 ○ 6월에 연산(連山)에 나아가 진을 치고 방어사(防禦使) 곽영(郭嶸)에게 전령을 보내어 금산(錦山)에 남아 있는 적을 칠 것을 약속하였다. 이광(李洸)이 군사를 돌려 자기와 함께 전주를 지키기를 청하였으나 경명이 허락하지 아니하고 진산(珍山)으로 진군하였다.○ 처음에 경명 등이 군사를 일으킬 때 전 좌랑 양산숙(梁山璹)으로 하여금 직접 행재(行在)에 가서 임금 앞에서 남방의 사태를 아뢰니, 산숙이 돌아올 때 임금이 면대하여 타일러 이르기를, “돌아가 고경명ㆍ김천일(金千鎰)에게 말하라. 너희들이 빨리 수복하여 나로 하여금 너희들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하기를 원한다고 하여라.” 하고, 멀리서 경명을 공조참의 겸 초토사(工曹叅議兼招討使)에 임명하였다.이달 9일에 경명이 곽영과 더불어 군사를 합쳤다. 대개 경명의 두 아들 종후(從厚)ㆍ인후(因厚)가 각각 남원(南原)ㆍ김제(金堤)ㆍ임피(臨陂) 등 고을의 군량과 군사를 모아 여산(礪山)에 모여서 그대로 충청도ㆍ경기도를 진군하여 평양에 도달하기를 기약하였더니, 은진(恩津)에 이르러서 막하의 장수들이 황간(黃澗)ㆍ영동(永同)의 적병들이 금산(錦山)으로 넘어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는 되돌아가서 전라도 구하기를 굳이 청하고, 또한 전주의 형세가 위급하다는 것을 듣고서, 부득이 군사를 옮겨 진산(珍山)으로 들어가서 곽영과 더불어 좌ㆍ우익이 되어 금산의 10리 밖에서 주둔하였다.경명이 정예한 기병 수백 명을 내보내어 적을 치는데, 군관 김정욱(金廷昱)의 말이 부상함으로 물러나 달아나니 우리 군사가 약간 후퇴하였다. 저녁에 경명이 광대하는 사람 30명을 시켜 성 밑의 토성(土城)에 달려들어가 성 밖에 있는 관청 민가들을 불지르고, 진천뢰(震天雷)를 터뜨리어 성내의 창고와 노적을 연소시키니 적군의 사상자가 많았다. 날이 저물어서 각각 군사를 거두었다.○ 곽영이 사람을 보내 다음 날 합전(合戰)하기를 약속하였다. 아들 종후가 고하기를, “오늘 우리 군사가 승리하였으니 이 승리한 형세를 가지고 군사를 온전히 보전하여 돌아갔다가 기회를 봐서 다시 나오는 것이 좋겠습니다. 만약 적병과 진지를 마주 대하여 들에서 잔다면 밤중에 습격을 당할 우려가 없지 않습니다.” 하니, 경명이 말하기를, “네가 부자간의 정의로 내가 죽을까 걱정하느냐, 나는 나라를 위하여 한번 죽는 것이 직책이다.” 하므로, 종후가 감히 다시 말을 못하였다.10일 새벽에 성 밖으로 진군하는데, 경명이 먼저 기병 8백여 명을 보내어 싸움을 돋우었더니, 적병이 성벽을 비우고 나와서 먼저 관군(官軍)에게 덤벼들으니, 전봉장(前鋒將)인 영암 군수(靈巖郡守) 김성헌(金聲憲)이 먼저 달아났다. 적이 관군의 진이 약한 것을 알고 다시 광주(光州)ㆍ흥덕(興德) 두 고을의 관군에게 달려들었으나 방어사 곽영의 진에서는 멀리 바라만 보고 흩어져 버렸다. 경명이 혼자 담당할 생각으로 군사들로 하여금 활을 버티어 기다리게 하는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급한 소리로, “방어사의 진이 무너졌다.”고 외치니 의병(義兵)의 진도 따라 무너졌다.경명이 일찍이 말하기를, “나는 말 타는 데 숙달하지 못하니 불행히 싸움에 패하게 되면 오직 한번 죽음이 있을 뿐이다.” 하였는데, 이때를 당하여 좌우 사람들이 말을 타고 달아나기를 청하니, 경명이 말하기를, “내 어찌 구차스럽게 죽음을 모면하려 할 것이냐.” 하였다. 부하들이 붙들어 말에 태웠으나 금방 말에서 떨어지고 말이 달아나 버리니 부하인 유생 안영(安瑛)이 말에서 내려 경명에게 말을 주고 도보로 따라갔다. 적이 경명에게 급하게 달려들었다. 그때 유팽로는 말이 건장해서 먼저 나가다가 그 하인에게, “대장이 모면하였으냐?”고 물으니, “아직 못나왔습니다.” 하였다.팽로가 말을 채찍질하여 어지러운 군사들 속으로 되돌아 들어가니, 경명이 팽로를 보고, “나는 면치 못할 것이니, 너는 빨리 달려 나가거라.” 하였다. 팽로가 말하기를 “내 어찌 대장을 버리고 살기를 구하겠습니까. 남과 군사(軍事)를 도모하다가 군대가 패하면 거기에 죽는 것이 도리입니다.” 하였다.적의 칼이 드디어 다가오니 팽로가 자기 몸으로 막아 가리웠다. 경명이 드디어 팽로ㆍ영(瑛)등과 더불어 함께 죽었다. 인후(因厚)는 거기서 죽고 종후(從厚)는 무너진 군사들 속에서 나와 그 아버지의 시체를 거두었다. 가까운 고을의 선비와 백성들이 그의 죽음을 듣고 울음소리가 들판을 진동했다. 무너졌던 군사들은 그가 죽은 것을 알지 못하고 차츰 모여 왔으나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는 모두 부르짖어 울면서 흩어졌다. 《일월록》시장 ○ 처음에 종후 등이 시체를 가져다가 금산의 산 속에 가만히 묻었다가 무릇 40여 일이나 되어서 염습(歛襲)을 하였는데, 더위와 비를 겪었지만 얼굴빛이 살아 있는 것 같아서 보는 이들이 이상하게 여겼다. 장사한 다음 날 바람과 눈이 섞여 일어나고 긴 무지개가 무덤 왼쪽에서 생겨 무덤의 경내를 가로질러 수십 리에 뻗치고 이상한 광채가 달이 넘도록 사라지지 아니하니, 사람들이 충성과 분노의 감응이라고 하였다. 《명신록》시장 ○ 어떤 이의 말에는, 이때 우리나라 사람 남녀가 적진 속으로부터 와서, “우리는 도망쳐 돌아온 사람입니다.” 하니, 경명이 그들이 첩자인 줄을 모르고 드디어 진심으로 위무하여 주었더니, 이 날 밤에 적군이 어둠을 타서 습격하여 왔다고 한다. 《기재잡기》 ○ 시장에 복병을, “이 밤에 적이 습격하려고 가만히 나와서 복병을 설치하다가 군사에게 발각되었다.”고 하였다. ○ 경명이 의병을 일으킬 때 경기도 이남의 선비들이 모두 따랐으나 다만 충의의 마음으로 서로 힘썼을 뿐이요, 실상은 군사 쓸 줄은 알지 못하였었다. 경명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종묘와 사직이 지켜지지 못하고 임금이 피난하고 있으니 우리들이 죽어야 할 때다.” 하고 격문을 각도에 보내어 깨우쳐 이르니 뛰어 일어나지 않는 이는 없었다. 그러나 군사의 행진에 기율이 없고 이르는 곳에 진영의 설비가 없어서 마침내 패하게 되었던 것이다. 《기재잡기》 ○ 산숙이 도착하니 경명이 이미 죽었는지라, 받아온 교서(敎書)로서 남은 군사들에게 선포하니 억센 장수들과 무지한 백성들도 감격하여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 소문이 조정에 알려지니 임금이 크게 슬퍼하고 경명에게 예조 판서ㆍ대제학을 증직하고 뒤에 더 높여 좌찬성을 증직하였다. 인후에게는 예조 참의를, 팽로에게는 사간을, 영(瑛)에게는 장악 첨정(掌樂僉正)을 증직하였다.○ 계해년에 교리(校理)로서 파면되어 돌아와 집에서 지내기를 19년 동안이나 하다가 신사년에 김계휘(金繼輝)가 주청사(奏請使)로 북경에 갈 때 공을 서장관(書狀官)으로 하였고, 임오년에 이이(李珥)가 원접사(遠接使)가 되었을 때 공을 천거하여 종사관(從事官)을 삼았고, 경인년에는 승진하여 동래부사(東萊府使)에 임명되었다. 《명신록》 ○ 경명이 백수서생(白首書生)으로 전란을 당하여 의(義)를 들고 일어서니, 어리석은 부녀자도 사나운 사나이도 소문만 듣고 다투어 달려가 좇으므로, 열흘에서 달포 사이에 의병이 수천 명에 이르렀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의로운 기색이 지극한 정성에서 우러나 사람들을 감동시켰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공조참의 겸 초토사(工曹叅議兼招討使)의 임명장과 군중에 내린 교서가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죽고 일이 조정에 알려지니 좌찬성을 증직하였다.이광(李洸)이 경명에게 전일의 감정이 있어, “경명이 어둠을 타서 행군하다가 군사가 무너지므로 죽었습니다.” 하고 무함하여 아뢰었다. 이정복(李廷馥)이 순찰사가 되어 그의 전사한 실제 상황을 아뢰었다. 을미년 여름에 명을 내려 정려(旌閭)를 세우고, 신축년에 박지효(朴之孝) 등의 상소로 인하여 특히 광주에 사당을 짓게 하고, 포충사(褒忠祠)라고 사액(賜額)하였으며 제관을 보내어 제사를 지냈다. 윤근수(尹根壽)가 지은 비문 ○ 시장 ○ 임진년 봄에 경명이 천문(天文)을 관찰하고 집안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금년에는 장성(將星)이 좋지 못하니 장수는 반드시 불리할 것이다.” 하였다. 금산(錦山)의 적을 토벌하기에 이르러 사위 박숙(朴橚)에게 편지를 부쳐 가족 일을 부탁하였다. 그가 스스로 죽기로 결심한 것은 평소에 정한 바 있었던 것이다. 《일월록》시장 ○ 신묘년 가을에 경명이 정탁(鄭琢)에게 편지를 보내, “경명의 한 집안은 명년에 마땅히 큰 화가 있어서 부자가 모두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대개 점쳐 보고 한 말이다. 《기재잡기》 ○ 인조반정(仁祖反正)한 처음에 예관을 파견하여 포충사에 제사하였는데, 제문에, “내가 왕위를 이어받아 백성의 인륜을 바로잡으려 하노라. 충신과 절사(節士)를 생각하니 나의 신하 안 된 것이 한스럽다. 남쪽 지방은 선비의 기북(冀北)이다. 국가의 표창하고 권면함이 없으면 무엇을 모범으로 할 것인가.” 하였다.○ 경명의 아들은 종후ㆍ인후이고 딸은 선비 노상룡(盧尙龍)의 아내가 되었더니 정유년 왜란 때 왜적을 꾸짖고 굽히지 않다가 죽었다.○ 12월에 경명의 맏아들 전 현령 종후(從厚) 등이 군사를 일으켜 원수를 갚으려 하였다. 먼저 통문을 돌리기를, “불행한 때를 만나 집안의 화변이 망극하다. 불초고(不肖孤)는 초토(草土 여기서는 상중(喪中)이란 말이다)에 앓고 누어 아직까지 이 왜적들과 함께 한 하늘을 이고 살아 있다. 이번에 첨지(僉知) 홍계남(洪季男)이 먼저 대의로서 각도에 통고하여 왜적에게 원한을 품고 통분함을 참고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적을 토벌하여 원수를 갚는 일을 함께 도모하려 하니 사람의 마음은 다 같은지라, 누군들 일어나지 않겠는가. 아사(亞使) 조헌(趙憲)의 아들 완도(完堵)는 반드시 그 아버지의 군사를 수습하여 충청도에서 깃발을 들고 일어설 것이다. 나는 비록 못났으나 어버이의 장사도 이미 마쳤으니 이 몸이 죽어도 유감이 없다. 상복을 무릅쓰고 병든 몸을 붙들고 본도의 동지들과 더불어 군사와 병기를 수습하여 북쪽으로 머리 돌려 적과 싸워 죽을 계획을 하고자 한다. 태인(泰仁)ㆍ진원(珍原)ㆍ장성(長城)ㆍ의 세 고을 수령들 또한 하늘에 사무친 통분을 품고 있는데, 도체찰사는 그들에게 군사를 합하여 원수를 갚도록 하고 법도와 규칙에 구애받지 않도록 허락하였다.아아, 다만 호남지방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경기 지방의 선비와 백성들로서 적을 피하여 남쪽으로 내려온 사람들도 어찌 부자 형제의 원수가 없겠는가. 비록 다행히 적의 칼날을 피할 수 있었더라도 서리와 이슬 속에서 병을 얻어 그로 인해 죽게 되었다면 또한 이 원수를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내 선친이 담양(潭陽)에서 의병을 일으켰을 때 남도의 여러분들이 나랏일에 같이 죽기를 기약하여 향불을 피우고 하늘에 맹세하고서 선친을 추대하여 대장으로 하였으니, 진실로 형제 같은 의가 있었던 것이다.불행히 공업을 끝까지 성취하지 못하였으니 여러분이 어찌 차마 길가는 사람의 일처럼 보고 있을 수 있겠는가. 그때의 부하 무사들은 이미 다 의병에 달려왔다. 원컨대 나를 불초하다고 생각지 말고 담양에서 피를 마셔 맹세하던 일을 회상하여 일제히 광주(光州)에 모여서 면대하여 맹약을 맺고 군사의 기일을 정하기 바란다.” 하였다. ‘복수(復讎)’를 군(軍)의 구호(口號)로 삼고 광주에서 군사를 일으켰는데, 때마침 군사 징발이 여러 갈래로 겹쳤기 때문에 민간에 있는 장정이 없어서 모집된 군사가 겨우 수백 명이었는데, 정철(鄭澈)이 사노(寺奴)와 내노(內奴 군중에 속한 종)들을 의병에 종속시켜 주어서, 드디어 천여 명을 뭉쳐 가지고 영남(嶺南)으로 향하였다.○ 조수준(趙守準)으로 계원장(繼援將)을 삼다.○ 계사년 6월에 진주(晉州)의 싸움에서 죽었다.○ 부자가 모두 사절(死節)을 같이 하였으니 의로움이 옛날 진(晉) 나라의 변씨(卞氏)의 문중과 같았다. 종후도 또한 문장에 능하여 말을 세워놓고 격문(檄文)을 기초하였는데 문장이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말을 수집하기 위하여 제주(濟州)에 보내는 격문 속에 이러한 구절이 있다. “바다 밖에서도 옷을 떨치고 일어날 사람이 있을 줄을 나는 안다. 채찍을 잡고 서서 천하에 말[馬]이 없다 하지 말라.” 이것이 깨우치는 절구로서 당시 사람들이 서로 전해 가며 외웠다. 이러한 인재로서 불우한 채 일생을 마치었다. 신묘년 봄에 지제교(知製敎)에 뽑혔으나 곧 사헌부의 탄핵을 입었다. 《상촌휘어》 [주-D001] 양(亮) : 금(金) 나라의 황제 양(亮)이 임금을 죽이고 임금의 자리를 빼앗았으므로 역적 양(亮)이라 하는데, 송 나라와의 맹약(盟約)을 배반하고 송 나라를 치다가 중도(中道)에서 자기의 부하에게 살해당하였다.[주-D002] 여진(女眞)이 …… 있으며 : 여진족이 고립된 군사로 송 나라에 깊이 쳐들어 갔을 때, 송 나라 장수가, “여진(女眞)이 본시 병법을 모르는구나.”한 말이 있다.[주-D003] 중행열(中行說) : 한(漢) 나라 사람으로 흉노(匈奴)에게 항복하여 본국을 해쳤으므로 가의(賈誼)가 임금에게, “신이 흉노를 쳐서 중행열(中行說)의 등에 매를 치겠습니다.” 하였다.[주-D004] 남조(南朝)에 사람이 없다 : 금(金) 나라가 군사를 거느리고 송 나라를 침략하여 들어가서, “남조[宋]에 사람이 없구나, 이 지방을 지켰더라면 내가 강을 건너지 못하였을 것이다.” 하였다.[주-D005] 북군(北軍)이 …… 말 : 중국의 남북조 시대에, 진(陳) 나라에 수(隋) 나라 군사가 창졸간에 침입하는 것을 보고 북군이 강을 날아서 건넜다고 놀랐다.[주-D006] 빈(邠)을 떠나던 : 주(周) 나라 태왕(太王)이 적(狄)의 침입을 받자 수도인 빈(邠)을 버리고 도망친 일이 있었음을 말한다.[주-D007] 서촉(西蜀)으로 피난하듯 : 당 나라 명황(明皇)이 안록산(安祿山)의 난을 만나 서촉(西蜀)으로 도망한 것을 말한다.[주-D008] 이성(李晟) : 당 나라의 역적 주자(朱泚)가 장안(長安)을 함락시켜, 임금[德宗]이 봉천성(奉天城)으로 파천(播遷)하였을 때 이성(李晟)이 주자를 쳐부수고 회복시키니 임금이 기뻐하여, “하늘이 이성을 낳은 것은 사직을 위한 것이로다.” 하였다.[주-D009] 애통조(哀痛詔) : 난을 당하여 임금이 자기가 죄책을 책임지는 애통한 사연의 조서를 죄기조(罪己詔)ㆍ애통조라 하는데, 당 나라 덕종(德宗) 때에 육지(陸贄)가 기초한 조서는 가는 곳마다 장수와 군사들이 감동되어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한다.[주-D010] 봉천(奉天)으로 …… 덕종의 행차 : 당 나라 덕종(德宗)이 주자(朱泚)의 난을 피하여 봉천성(奉天城)으로 갔던 일이 있었음을 말한다. 여기서는 선조가 의주에 파천해 있는 것을 말한다.[주-D011] 밤중의 …… 들으니 : 진(晉) 나라의 조적(祖逖)이 잠을 자다가 새벽녘이 되기 전에 우는 닭소리를 듣고 같이 자던 유곤(劉琨)을 발로 차서 깨우며, “난리가 나겠구나. 공을 세워보세.” 하였다.[주-D012] 중류(中流)의 …… 치면서 : 조적(祖逖)이 군사를 거느리고 강을 건너면서 중류에서 돛대를 치며 말하기를, “중원(中原)을 회복하지 않고는 돌아오지 않겠다.” 하였다.[주-D013] 분야(分野) : 여기서의 분야는 천문학상의 술어인데, 천문(天文)에도 어느 지방에 행당되는 부분이 따로 있다. 옛날에 복덕성(福德星)이 있는 나라를 침범하면 침범한 나라가 망한다는 말이 있다. 복덕성이 오 나라의 분야에 있을 때에 진(秦) 나라가 침하였다가 몇 해 뒤에 오 나라는 회복되고 진 나라는 망하였다.[주-D014] 신정(新亭)에서 우는 것 : 진(晉) 나라가 외래 민족에게 중원(中原)을 잃고 강동(江東)으로 옮겨 갔을 때에 여러 사람들이 신정(新亭)에 모여서 서로 보며 울었다. 왕도(王導)가 말하기를, “힘을 다하여 회복할 생각은 하지 않고 울기만 하는가.” 하였다.[주-D015] 기북(冀北) : 기북(冀北)은 중국에 있는 지방의 이름으로 말[馬]이 많이 나는 곳이다. 여기서는 남방에 선비가 많다는 말이다.[주-D016] 함께 …… 있다 : 부모의 원수와는 한 하늘을 머리에 같이 이고 살아서는 안 된다는 옛 말이 있다.[주-D017] 진(晉) 나라의 변씨(卞氏) : 진(晉) 나라 변곤(卞壼)의 부자(父子)가 충효(忠孝)로 함께 죽었다.[주-D018] 천하에 …… 하지 말라 : 한유(韓愈)의 글에, “천리마(千里馬)가 세상에 없는 것은 아닌데,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하고 채찍을 들면서 세상에 말이 없다 한다.” 하는 말이 있다. 
    2020-09-24 | NO.656
  • 고경명- 觀牧令試士于公庭
    帀月絃歌化武城 庠橫媚學恥肥輕似聞諸子彈冠喜 應體賢侯愛士情雲幙靜隨簷影轉 粉袍寒映日華晴盱江諗衆文堪誦 愧把殘詩較病聲
    2018-07-10 | NO.655
  • 고경명- 題周道茅亭
    監務官淸愜素懷 公餘寄傲小茅齋琅玕擁壁堪驅瘴 簷宇憑高不受霾犀柄拉賓風入坐 鶩行麾吏月侵階陶腰暫折何妨事 終勝香塵走九街-제봉집(霽峯集) 권3
    2018-07-10 | NO.654
  • 고경명- 경양 모정에서 국보를 위해(景陽茅亭 國保請賦 時爲察訪)
    客久同吾土 떠도는 신세 어디고 다 고향같지官閑似馬曹 일 없는 관직 마조보다 한적하구나郊墟紆井邑 넓은 들판은 정읍으로 통했는데亭沼面林皐 한 모퉁이 모정이 아담하네頓覺襟靈爽 문득 기분이 상쾌함을 느끼고深嗟意匠高 구상의 높음을 깊이 감탄하네紛紛坐馳者 분분하게 저 좌치만 일삼는 이는 終歲不知勞 죽을 때까지 괴로움도 모른다오 -제봉집(霽峯集) 권2-이항복은 “남쪽지방에 시인이 많지만, 고제봉이 제일이다”라고 평가했던 가치를 한 감흥의 시다.광주 평야의 젖줄이었던 경양방죽은  계림1~2동에 해당되며 무등산에서 뻗어 내린 능선의 끝자리 매머리봉과 동계천 하류 무드리들이 만나는 곳이다. 조선시대 들어1440년(세종22) 경양방죽이 축조되어 별칭으로 ‘경양(景陽)’도 쓰였다. 2004년까지 광주광역시청이 있었다. 시청 터 일대는 조선시대 경양방죽이 있었다.  팽·왕버들나무 숲을 이루던 여제단(勵祭壇)과 경양방죽 주위를‘서(새)벌’이라 부르다가 1946년부터 계림동이라 칭했다. 조선시대 광주목 경양면(景陽面)에 속했으며, 저수지와 역둔수전(驛屯水田)지대였다. 1946년 경호동(鏡湖洞)과 계림동(鷄林洞)으로 개칭되면서 이때까지도 흔적이 남아 있었다. 경양방죽은 경호(鏡湖)라고도 불렸던 인공 호수로 광주의 무등산 보다 더 랜드마크였다.
    2018-07-10 | NO.653
  • 고경명- 주관에서 술에 취해 안찰사 군망에게(州館醉吟 示君望按使)
    老向騷壇壯膽衰 나이 늙어 시 지을 근력 쇠해지니愁逢勍敵角雄雌 억센 이 만나서 대결하기 걱정이라.焉能賈勇嬰鋒鏑 무슨 용맹 가지고 잘 막아낼지只欲收兵偃鼓旗 그만 군사를 끌고서 달아나고 싶네.喜氣到君方奏凱 자네가 꼭 승리하려고 애를 쓴다면戒嚴如我費何誰 나도 하는 수 없이 계엄령 내려야지.書生事業眞堪笑 서생들 사업이란 참으로 우습지鍊得敲推鬢已絲 좋은 글귀 쓰려고 머리를 썩힌다오.寒力添多酒力衰 추위가 들어도 술 마실 힘이 없어孤城別樹怨羈雌 외로운 성 밑에서 찌푸리고 앉아 있었네.愁看短燭燒殘跋 짤막한 촛불은 어이 그리 잘 타는지怕聽嚴風獵凍旗 글 쓸 시간 닥쳐올까 겁이 났나봐.倦跡卽今成漫浪 아무렇게나 떠도는 이 나그네를舊遊寧復記伊誰 세상에 어느 친구 반갑게 여기랴.追思十載前時事 십년 전에 놀던 일 곰곰이 생각하니井底銀甁已斷絲 끈 떨어진 두레박처럼 되고 말았네.-제봉집*군망은 신응시의 자이다.
    2018-07-27 | NO.652
  • 고경명- 주관에서 하룻밤 쉬게 되자 군망에게 써서 드림(州館夜話 錄奉君望)
    宵旰憂南紀   밤낮으로 이 지방 일이 걱정이더니煩君試一陶   자네의 솜씨 한 번 시험하게 되었네珍烹麾楚膩   겉치레 하는 사치풍조 쓸어버리고荒瘴洗蠻臊  자욱한 악기도 걷히도록 해야겠지積縞攅峯凍  산 속에는 눈이 하얗게 쌓여 있는데窮陰朔吹饕  금년도 벌써 다 저물어가네.王程應少暇  왕정에 별로 조용한 겨를 없겠지만仲蔚在蓬蒿  봉고에 누운 중울을 잠깐 찾아주게.壓倒風騷將  뭇 시인들 압도시키던 이 늙은 선비長驅力破溟  긴 바람 안고서 바다를 건너갔지.跨壇推獨步  한 시대에서만 손꼽힐 뿐이겠는가方駕軼前靈  옛 사람도 넉넉히 능가할 만 한데恣韻摐瀟碧  소상강 대나무도 울리는 듯하고豪鋒掣海靑  동정호의 넓은 물도 일렁거리듯佇看文柄本  나중에는 이 시가 더욱 드날려揮翰掞天庭  천정으로 들어가서 번쩍일거야. - 제봉집(霽峯集) 권3- 제봉집(霽峯集) 권3
    2018-07-27 | NO.651
  • 고경명-‘주관에서 상사 성척지가 서울로 돌아감을 작별하다(州館 贈別成上舍惕之還京)
    庚戌年中夏課時  경술년 하과 때百人今日幾人奇  백명이던 그 사람들 오늘날 남은 사람 몇 명이나 되느냐江湖復對一床雨  강호에서 다시 만날 때 비 흠뻑 내렸고樽酒相逢兩鬢絲  동이 술로 마주보니 구레나룻 희어졌네垂老關心難作別  늘그막에 정이 깊어 작별하기 어려운데斜陽握手重臨岐  석양에 손 잡고서 다시 갈림길에 섰구나茂珍城外樓門道  무진성 바깥 누문 앞 길에서 折柳歌殘無限悲  이별가 불러 파하니 슬픔을 금할 길 없네 - 제봉집(霽峯集) 권4
    2018-07-27 | NO.650
  • 고경명-聞白麓上官 戲疊前韻
    按節當年識使君左轓重見入樓門粧臺喜色占蛾黛俠窟寒心屛鼠群車幔高褰瞻百里將壇雄跨壓諸軍公餘定理登山屐千丈圭峯翠掃雲光牧爲中衛大將 故第六及之이 때의 광주목사는 백록(白麓) 신응시(辛應時, 1532~1585), 재임 : 1581~1582년으로 《광주읍지》에 1581년 문과 통정대부로 부임하였다. 《광주향교지》 기록에도 있다. 신응시의 《백록유고(白麓遺稿)》 연보에는 1580년(선조13)에 광주목사가 되었다. 2년 뒤 1582년 선조는 광주목사 신응시를 도사영위사에 차임하여 역말을 타고 올라오게 하라고 했다.신응시의 본관은 영월, 자는 군망(君望), 호는 백록(白麓),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신석(辛奭)의 증손으로 조부는 신윤형(辛尹衡), 부친은 부사 신보상(辛輔商), 어머니 여흥 민씨(驪興閔氏)는 호분순위사 부위 민거(閔琚)의 딸이다. -제봉집(霽峯集)고경명(高敬命, 1533-1592)의 자는 이순(而順)이며 호는 제봉(霽峯)이다.2023.6.16. 수정
    2018-07-10 | NO.649
  • 고경명-蘆洲風颭雪漫空
    蘆洲風颭雪漫空  갈대 섬에 바람이니 눈 흩날리고沽酒歸來繫短蓬  술 사사서 돌아와 뜸집에 배 매놓았네橫笛數聲江月白  몇 가락 피리소리, 강물에 달빛 밝아오고宿鳥飛起渚煙中  잠자던 새도 물가 안개 속에서 날아오르네임진왜란 당시  전라도 의병장인 전 동래 부사(東萊府使) 고경명(高敬命 1533~1592)이 읊은 것이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지체없이 가장 먼저 광주(光州)의 의병 6천여 명을 이끌고 금산(錦山)에서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그의 나이 60세였다.
    2018-11-01 | NO.648
  • 고경명-극락정에서 성덕구로부터 ~을 듣다 (聞地主成德久在極樂亭)
    皀蓋行春到野亭 鶯花遲日鬧林埛 和風颺幙關三面 好雨隨車擁百靈繡畛滿添陂水白 螺鬟齊矗海山靑 遙知嘯傲登臨處 閱遍三農喜色形霽峯集 卷之三 詩 聞地主成德久在極樂亭 극락원 근처에 살았던 전라도 머슴아를 의리의 사나이라고 부르게 했던 인물 제봉 고경명도 서창나루를 오가면서 극락정에 자주 올랐음이 분명하다. 그의 싯구가 이를 알려준다.성수익(成壽益, 1528∼1598)의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덕구(德久), 호는 칠봉(七峯)이다. 1574년부터 1577년까지 광주목사로 있었다.
    2018-07-17 | NO.647
  • 고경명-동헌에서 서회하다(東軒敍懷)
    正坐乖慵不入城 이 내 몸 게을러져 입성하지 않았는데二天寧復意相輕 사또에 향한 정성 어이 소홀하여 그러하리蕭蕭霜鬢凋年恨 덧없는 백발 속에 모년 한탄 더해지고戀戀綈袍昔日情 제포 보내준 옛 정분 지금까지 못잊네車騎雍容侵雪夜 거마는 단란하게 눈 내리는 밤에 모였고樓臺次第眺春晴 번화한 누대는 봄날씨에 한결 아름답다降幡合向詩壇豎 갑을을 대결하는 시단에 흰 깃발 꽂았는데剛笑尊前吐款聲 술 항아리 앞에서도 항서 올린단 말인가 (暮年才盡酒戶亦減 故末句自嘆)- 제봉집(霽峯集) 권4
    2018-07-26 | NO.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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