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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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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공준공정려각
    광주시 북구 일곡로 41번길 41-8(일곡동)1398년이 노공준공정려각은 일곡마을 내 절효사 왼편에 있다. 효자 노준공(盧俊恭, 1340∼1397)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398년 국가에서 명정하여 광주 동구 학동에 정려각을 세우고 1701년, 1787년, 1889년 중수를 하였으며 1978년 도시계획에 따라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정려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박공벽에 풍판(風板)을 갖추고 있다. 일단의 낮은 기단 위에는 덤벙 주초를 놓고 그 위에 두리기둥을 세웠다. 정려각 내부에는 비는 없고 정려 중수록 등 4개의 편액이 걸려 있다.
    2018-11-12 | NO.224
  • 농암집 제28권 / 신도비명(神道碑銘) ; 오두인
    형조 판서 증 영의정 시호 충정공(忠貞公) 오공(吳公)의 신도비명 병서금상 15년 기사년(1689)에 중궁이 손위(遜位)하자 판서 양곡(陽谷) 오공 두인(吳公斗寅)이 참판 이공 세화(李公世華), 응교 박공 태보(朴公泰輔) 등 80여 인과 함께 대궐에 나아가 글을 올려 극간(極諫)을 하였는데, 오공이 실로 소두(疏頭)였다. 이에 상이 진노하여 세 사람이 모두 형장을 맞고 먼 곳으로 유배되었는데, 오공은 파주(坡州)에 이르러, 박공은 노량강(露梁江)에 이르러 모두 도중에 별세하였고 오직 이공만이 죽지 않았다. 6년 뒤인 갑술년(1694, 숙종20)에 상이 과거의 일을 크게 뉘우쳐 즉시 중궁(中宮)을 맞이하여 돌아오게 하고 복위시켰다. 그러고는 맨 처음에 두 공의 충성스러운 죽음을 생각하여 각별히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오공에게는 의정부 영의정을 증작(贈爵)하고 충정공(忠貞公)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박공에게는 이조 판서를 증작하고 정려문을 세워 ‘충신지문(忠臣之門)’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사당을 세워 두 공에게 제사를 올리자는 청을 모두 들어주니, 나라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여 베 짜는 여인이나 꼴 베는 남자들까지 하나같이 감탄하고 눈물을 흘리며 천도(天道)가 올바로 정해진 것을 경사로 여겼다.혹자는 두 공이 이공처럼 죽지 않고 살아남아 중궁의 복위를 통쾌하게 보지 못한 것을 슬퍼하자, 군자가 이르기를, “그렇지 않다. 신하가 국모를 위해 죽는 것은 대의이다. 예로부터 그 일을 실천한 자가 거의 없었는데, 두 공이 극간하다가 죽음으로써 그 의리가 비로소 밝아졌다. 간언을 하다가 죽거나 죽지 않는 것은 천명이다. 그러나 죽지 않으면 그 장렬함이 드러나지 않아 사람들을 깊이 감동시키지 못한다. 따라서 두 공의 입장으로서는 반드시 죽어야 하니, 그런 뒤에 당시의 조정 신하들에게 부끄러운 줄을 알게 하고 화를 일으키려는 간인(奸人)의 마음을 막을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당시의 화가 어찌 그 정도에 그쳤겠는가. 그리고 성인(聖人)이 허물을 짓는 것이 비록 일식, 월식과 같다고는 하나 오늘날처럼 속히 고친 경우는 없었으니, 이 또한 두 공의 죽음이 성상의 마음을 감동시켰기 때문이 아니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오늘날이 있게 된 것은 실로 두 공이 한번 죽음으로 인한 효과이니, 이제 와서 슬퍼하는 것은 말단적인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오공의 자는 원징(元徵),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사람됨이 침착하고 고요하며 대범하고 중후하여 겉치레를 일삼지 않았는데,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문장력이 있었다. 10세에 황고(皇考) 천파공(天坡公 오숙(吳䎘))을 따라 해서(海西)에 갔었는데, 명나라 부총(副摠) 정룡(程龍)이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왔다가 공을 보고 기특하게 여겨 운(韻)을 명하고 시를 짓게 하였다. 공이 이에 붓을 잡고 즉시 한(漢)나라 명장 정불식(程不識)을 가지고 정공에 빗대자, 정공은 크게 놀라 감탄하고 진기한 재물을 후하게 주었다. 그러나 공이 모두 사양하고 부채 하나만 받으니, 정공은 더욱 공경하고 중하게 여겨 “훗날의 발전을 예측할 수가 없다.”라고 말하고는 그 시를 《황화집(皇華集)》에 실었다. 이리하여 공의 이름이 중국에 알려지게 되었다.무자년(1648, 인조26)에 진사시(進士試) 초시에 장원으로 입격하여 마침내 성균관 유생으로 들어가고, 기축년(1649, 인조27)에는 별시(別試)에 장원하여 규례대로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과 병조, 이조 두 조의 낭청에 제수되었으며, 사헌부의 지평(持平)ㆍ장령(掌令)ㆍ집의(執義), 사간원의 정언(正言)ㆍ헌납(獻納)ㆍ사간(司諫), 홍문관의 수찬(修撰)ㆍ교리(校理)에 누차 제수되었다.효묘(孝廟) 때에 각 도에서 노비를 추쇄(推刷)하느라 독찰이 엄중하고 삼남(三南)에 영장(營將)을 두어 훈련을 자주 행하며 또 동조(東朝 효종의 어머니인 조 대비(趙大妃))를 위해 궁전을 수리하려고 하자, 공이 정언으로 있으면서 재앙을 인하여 상소해서 그 폐단을 낱낱이 거론하였다. 이윽고 또 동료와 함께 상차(上箚)하여 노비 추쇄를 늦추고 형옥(刑獄)을 돌보며 간쟁을 받아들이고 신료들을 분발시키라는 뜻으로 요청하자, 상은 공이 충직하여 간신(諫臣)으로서의 자질을 갖추었다고 칭찬하였다. 얼마 뒤에 형옥에 관한 일로 인해 상이 약간 온당치 못하다는 뜻을 보이자 공이 상소하여 자신을 탄핵하였는데, 며칠 뒤에 상이 간관들을 소견(召見)하여 위로함과 동시에 자신이 실언한 데 대해 자책하였다. 공은 즉시 나아가 사례하고 시폐(時弊)를 진술하였는데, 그 내용이 지난번 차자에서 지적한 것과 같았다.그리고 내구마(內廐馬)를 조련하는 장소에 친림(親臨)한 잘못을 말씀드리자 상이 가납하였다. 또한 대사간 유철(兪㯙)의 언사소(言事疏)가 상의 노여움을 사 형을 받고 멀리 유배되었을 때에, 공은 지평으로 있으면서 여러 차례 간쟁하다가 상의 노여움을 사 직책을 면직당하였다. 정언으로 있을 때에는 궁노(宮奴)가 형장을 맞다 죽는 일이 있었는데, 내수사(內需司)에서 형조의 관리를 처벌하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공이 “내관이 형조의 관리에 대한 처벌을 요청하다니, 이러한 조짐을 키워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며 처벌을 계청(啓請)하자 상이 따랐다.현종조(顯宗朝)에는 헌납으로 있으면서 동료와 함께 상차하여 몸을 닦고 반성하며 절검하고 학문을 닦고 현자를 예우할 것을 청하고 아울러 시폐 몇 가지를 진술하였는데, 모두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상이 몸소 군대를 사열하려고 하자 공은 옥당에 있으면서 “하늘의 재앙이 거듭 나타나 기근이 들고 역병이 돌고 있으니, 출입하는 일을 삼감으로써 몸을 닦고 반성하는 마음을 다해야 합니다.”라고 상소하였는데, 상이 관대한 답을 내렸다. 또한 수감된 죄수를 심리하여 올린 의금부의 죄안(罪案)에 대해 상이 특지(特旨)로 영향력을 행사하자, 당시에 사간(司諫)으로 있던 공이 그것의 불가함을 말씀드림과 동시에 의금부가 불가함을 상주하지 못하여 유사(有司)의 체통을 잃었다고 탄핵하였는데, 상은 이에 노하여 공을 면직시켰다.뒤에 또 집의로 있으면서 무지개가 나타난 변고를 인하여 상소하여 극력 말하기를, “재변이 매우 심한데 상하가 안일하게 지내어 정령(政令)이 구태를 벗지 못하고 있으니, 먼저 학문에 힘쓰고 심성을 수양하여 실천함으로써 몸을 닦고 반성하는 근본으로 삼고 신하들을 불러 자문했던 조종조의 부지런함을 본받아 상하의 마음이 통하게 해야 합니다. 노비를 허위로 기록하여 친족과 이웃까지 침탈하는 일이 오늘날 팔도의 가장 큰 폐단이니, 속히 조사하여 바로잡아 백성의 고통을 덜어 주소서. 동조(東朝)의 진연(進宴)과 온천에 거둥하는 일이 비록 모두 부득이한 것이기는 하나 그 또한 일에 따라 줄여 민력(民力)을 돌보소서.”라고 하고, 또 “지체된 옥사를 빨리 처결하여 억울함을 풀어 주고 언로(言路)를 열어 충직한 말이 올라오게 하소서.”라고 청하였는데, 반복하여 간곡하게 올리는 수백 마디의 말에 상도 너그러운 비답을 내렸다.청(淸)나라에서 우리가 약조를 어겼다는 이유로 사신을 보내어 문책하고 마침내 속죄금을 물라고 요구하자, 양사(兩司)는 모두 대신(大臣)이 사력을 다해 그들의 횡포를 막아 내지 못하여 모욕이 상에게 미치게 했다고 탄핵하였다. 상은 이에 대로하여 간언을 올린 자들을 모두 내쫓았는데, 승지가 하명의 부당함을 지적하여 상주하자 그들마저 처벌하게 하였다. 마침 옥당에 입직하고 있던 공은 그날 밤에 당장 상차하여 간쟁하고 이튿날 다시 동료와 함께 청대(請對)하여 극론하였으나 상이 듣지 않았다. 그러나 공은 뜻이 사그라지지 않아, 물러나서 다시 상차하여 말하고 뒤에 또 여러 신하들을 복관(復官)할 것을 청하였는데 말이 더욱 간절하였으나 상이 응하지 않았다.공은 전후로 삼사(三司)의 여러 관직에 오랫동안 있었는데, 일을 당하면 임금의 비위를 거스르는 것도 피하지 않고 논열하였으며 그렇다고 남의 잘못을 들추어내어 비난하는 것을 능사로 삼지 않고 오직 잘못된 일을 바로잡는 데에 주력할 뿐이었다.중간에는 시강원의 사서(司書)ㆍ문학(文學), 성균관의 직강(直講)ㆍ사성(司成), 상의원(尙衣院)과 제용감(濟用監)의 정(正)이 되었고, 다시 사국(史局)의 관직을 겸하여 인묘(仁廟), 효묘(孝廟)의 실록 편수에 참가하였으며, 삼자함(三字銜 지제교(知製敎)의 별칭)을 띠고 지방에 나가 경상도 도사(慶尙道都事), 고산도 찰방(高山道察訪), 해운 판관(海運判官), 북청 판관(北靑判官), 홍주 목사(洪州牧使)를 지내고 중간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에 다녀오고 또 어사(御史)로 호남에 나가기도 하였다.공이 도사로 나간 것은, 영남 유생이 과거 시험장을 어지럽히는 일이 두 번 발생하자 각별히 공을 보내어 진정시키게 한 것인데, 결국 그로 인해 무사하게 되었다. 그리고 공이 고산도 찰방이 된 것은, 일찍이 부화하고 망녕된 고관 한 사람을 배척한 일이 있었는데, 전관(銓官)들이 그 사람을 옹호하고 도리어 공을 내쫓아 공을 억압하는 뜻을 보인 것이다.또한 공이 북청 판관으로 나간 것은, 사실 공이 장령으로 있을 때의 일이 발단이 된 것이었다. 당시에 서울에서 무뢰배들이 서로 파당을 만들어 칼을 끼고 난투를 벌이자 공이 관리를 시켜 체포하게 하였다. 왕손(王孫) 집안의 종도 그들과 함께 체포할 대상에 들어 있어 공에게 봐 달라고 하였으나 공은 듣지 않고 체포를 더욱 급히 독촉하였다. 하루는 지평 민공 유중(閔公維重)과 함께 조정에서 물러 나오는데 어떤 사람이 민공의 어자(御者)를 피가 나도록 구타하였다. 공은 왕손 집안의 종이 공에게 원한을 품고 해코지를 하려다가 엉뚱한 사람을 해친 것임을 알고, 즉시 민공과 함께 부중(府中)에 들어가 그를 신속히 잡아다가 신문하고 다스렸는데 형장을 치다가 그만 죽이고 말았다. 이 일이 알려지자 상이 노하여 두 사람 모두에게 체직(遞職)을 명하였다가 이내 승정원의 말을 따라 복직시켰다. 그러나 얼마 뒤에는 또 동료 대관(臺官)이 상의 노여움을 격발한 일로 인하여 두 사람까지 아울러 체직시키고 지방의 고을로 좌천시켰는데, 대신과 삼사가 연달아 극구 간쟁하였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공은 그날 당장 부임해 가서 마음을 다해 봉직하고 좌천된 것을 괘념치 않았다.공이 어사가 되었을 적에는 명을 받들고 여러 진(鎭)의 군수품을 점검하였다. 그때 도신(道臣)이 어떤 한 고을의 수령을 편애해서 전에도 이미 무기에 대한 일로 칭찬하는 보고를 하여 작질(爵秩)을 높여 준 적이 있었는데 공에게도 그를 잘 봐 달라고 청탁하였다. 그러나 공은 고을에 이르러 도리어 심각하게 피폐한 상황을 보고는 즉시 상부에 보고하여 처벌하게 하였다. 간관들이 공이 도신까지 탄핵하지 않은 점을 지적하여 논파(論罷)하였으나 이내 다시 서용되었다.정미년(1667, 현종8) 겨울에는 영녕전(永寧殿)의 수리를 맡은 도청랑(都廳郞)으로 공로를 표창받아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되고 즉시 승정원 동부승지에 제수되었으며, 이후 차례로 올라가 우승지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상소하여, 고을 수령으로 부임하여 어미를 봉양하는 데에 이바지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함과 동시에 자신의 잘못을 탄핵한 결과 마침내 광주 목사(光州牧使)에 제수되었다. 공은 부임하여 세력가를 누르고 외로운 사람들을 구휼하고 자제들을 가르치고 학교를 부흥시켰으며, 자신의 생활을 더욱 검약하게 하고 소비를 절약함으로써 고을의 재정을 넉넉하게 하였다. 그러다가 마침 신해년(1671, 현종12)의 큰 기근을 만나자 창고의 재물을 풀어 백성을 진휼하였는데, 백성들이 그 덕에 굶어 죽지 않았다. 또 조정에서는 다른 고을의 유민(流民)을 받아들이지 말도록 명하였으나 공은 움집을 더욱 많이 설치하고 그들을 먹여 주었는데, 이로써 목숨을 부지한 사람이 매우 많았다. 도신과 어사가 칭찬하는 보고를 하자, 조정에서는 공에게 말을 하사하고 계속 유임할 것을 명하여 백성들의 소원을 따라 주었다.서울로 들어와서는 병조의 참지와 참의, 승지가 되었다가, 병진년(1676, 숙종2)에 명성대비(明聖大妃)의 병이 낫자 약시중을 든 공로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 겸 부총관에 승서(陞敍)되고 한성부 우윤, 호조와 형조의 참판, 행 판결사(行判決事)를 거쳤으며, 중간에는 부사(副使)에 충원되어 연경에 가기도 하였다. 경신년(1680, 숙종6)에는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로서 역옥(逆獄)의 국문에 참여한 공로로 한 자급이 올라 도승지, 병조와 예조의 참판을 거치고 중간에는 경기 감사로 나가기도 하였다. 계해년(1683, 숙종9) 겨울에는 특별히 공조 판서에 제수되고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나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체직되었으며, 명성왕후의 상에 산릉(山陵) 공사를 감독한 공로로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승품되어 한성부판윤 겸 지의금도총관에 제수되었다. 병인년(1686, 숙종12)에는 평안 감사로 나가 부지런히 정사를 보았는데 은혜로우면서도 위엄이 있고 공식적으로 봉납(捧納)하는 것 이외에는 실 한 오라기도 사사로이 더 거두지 않았으니, 평안도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공의 청렴함을 칭송하고 있다.이보다 앞서 공의 중자(中子) 태주(泰周)가 현종대왕의 딸 명안공주(明安公主)에게 장가들었는데 정묘년(1687, 숙종13) 여름에 공주가 별세하자, 상이 공에게 각별히 관직을 벗고 돌아가서 장례를 돌보라고 명하였다. 공은 마침내 지중추부사가 되고 기사년(1689, 숙종15) 봄에 형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공은 젊을 적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조정에 올라 청현직(淸顯職)을 두루 거쳤는데, 평소 성품이 겸손한 데다 붕당을 이루어 나라를 병들게 하는 것을 싫어하여 항상 꼿꼿이 자신을 지켰다. 그리하여 당인(黨人)들과 겨루어 밀고 당기며 명론(名論)을 세워 중요 인사가 되려고 하지 않고, 오직 매일 문을 닫고 들어앉아 글을 볼 따름이었다. 그 때문에 통정대부 이상의 품계에서는 대부분 한산직(閑散職)에 처하였고, 아들이 부마(駙馬)가 되어서는 조정에서 더욱 겸손하게 처신하여, 조정의 정사와 당시의 논의에 관해서는 하나도 간여하는 일이 없었다.이때에 이르러 소인배들이 정권을 잡고 큰 옥사를 연달아 일으켰는데, 지의금부사인 공은 세 번을 불러도 나가지 않는 바람에 옥리(獄吏)에게 내려지고 삭직(削職)되었다. 4월에 상이 하교하여 중궁을 폐위하자 공은 그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나는 네 임금의 후한 은혜를 받아 재상의 반열에 올랐으니, 국사가 이 지경에 이른 지금 어찌 죄를 받아 버려졌다는 것을 핑계로 한마디 말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글을 띄워 동지 몇 사람을 모아서 함께 상소하자고 논의하였다. 박공(朴公)도 명사들과 모여 이 일에 대해 의논하다가 공이 있는 곳을 듣고는 즉시 와서 참가하였다. 혹자가 염려하기를, “상소의 내용이 너무 준엄하면 이로움은 없고 해만 있을 것입니다.” 하자, 공은,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죽음을 어찌 돌아볼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고 저녁이 되도록 비답이 내려지지 않자 여러 공들이 모두 궐 밖에서 명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때 이공(李公)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비록 파산(罷散) 중에 있기는 하나 그래도 외조정(外朝廷)이라고 할 수 있으니, 한 번의 소로 그칠 수는 없습니다. 기필코 청이 받아들여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자, 공이 미소를 지으며 말하기를, “아마도 공의 말처럼 되지 못할 것 같습니다.” 하였다. 밤 2경에 상이 갑자기 보여(步輿)로 인정문(仁政門)에 나와 정국(庭鞫)을 설치하라고 재촉하여 명하자, 유사들이 황급히 형틀을 준비하고 궐 내외가 크게 놀랐다. 공과 이공이 먼저 체포되어 들어가고 박공이 그 뒤를 이어 잡혀가자 좌우에서 보는 사람들이 모두들 놀랍고 두려워 실색하였다. 공은 또 노병으로 몸이 야윈 상태라 사람들이 더욱 위태롭게 여겼으나 공의 동작을 보면 평상시와 다름없이 태연하였다. 당시에 상의 노여움이 매우 심하여 화를 예측할 수 없었으므로 조정 신하들은 빙 둘러서서 보면서 묵묵히 입을 다문 채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하였고, 대사헌 목창명(睦昌明)은 공의 상소를 도리어 흉측한 것으로 지목하였다. 공은 이때에 문초를 받느라 숨이 거의 끊길 지경이었으나 말은 끝까지 흔들리지 않았다. 이튿날 사형을 감하여 의주(義州)에 안치시키는 처분을 받고 옥을 나오자 서울의 사녀(士女)들이 시끌시끌 길을 메우고 앞 다투어 가마 앞으로 와서 충신의 면모를 보았다. 그리고 공이 별세하자 공을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할 것 없이 모두들 눈물을 흘렸다.공은 신장이 6척이 못되었고 얼굴 모습은 온화하며 입은 마치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 같았는데, 하루아침에 변란을 당하자 충절을 세워 신하의 도리를 표방하고 인륜을 부지하였으니, 후손 백대에 전할 만한 분이다. 군자들은 이 일을 보고 공이 평소에 뭔가 지키는 것이 있었다고 믿는다. 상소하는 일을 논의할 때에 혹자는 공에게 처지가 다른 사람과 다르므로 소두(疏頭)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고, 자제들도 눈물을 흘리며 그렇게 간하였으나 공은 모두 물리치고 듣지 않았다. 세상에서는 간혹 공이 그저 벼슬이 높았기 때문에 앞 대열에 섰던 것뿐이라고 보기도 하니, 어찌 비분강개한 마음으로 분발하여 스스로 그처럼 죽음을 각오했음을 알 수 있겠는가.공의 증조는 휘 정방(定邦)으로,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를 지냈다. 광해(光海)가 모후(母后)를 폐위하려 할 적에 백관을 위협하여 조정의 논의를 끌어내려 하자, 그가 광해와 대면하여 말하기를, “신은 무부(武夫)라서 《사략(史畧)》 제1권의 ‘순 임금이 끊임없이 선(善)으로 자신을 다스려 어버이로 하여금 간악한 데에 이르지 않게 하였다.’는 한 구절만 읽었습니다.” 하니, 듣는 사람들이 장하게 여겼다.공의 조고는 휘 사겸(士謙)으로, 종친부 전적을 지냈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는데, 효성으로 이름이 났다. 천파공(天坡公)은 휘 숙(䎘)으로, 벼슬이 경상 감사에 이르렀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는데, 문장과 정사로 이름이 났으나 젊은 나이에 별세하여 재능이 다 쓰이지 못하였다. 비(妣)는 증 정경부인(貞敬夫人) 고성 이씨(固城李氏)로, 병조 참판 휘 성길(成吉)의 딸이다. 공은 사실 천파공의 아우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 증 이조 판서 휘 상(翔)의 아들인데, 이 부인(李夫人)이 아들이 없어 데려다가 후사로 삼은 것이다.공은 모두 세 번 장가를 들었는데, 여흥 민씨(驪興閔氏)는 판서 성휘(聖徽)의 딸이고, 원주 김씨(原州金氏)는 학생 숭문(崇文)의 딸로 이들은 모두 정경부인에 추증되었고, 상주 황씨(尙州黃氏)는 부사 연(埏)의 딸로 정경부인에 봉작되었다. 5남 6녀를 두었다. 생원으로 재주와 덕행이 있었으나 일찍 죽은 아들 관주(觀周)와 군수 남택하(南宅夏)에게 시집간 딸은 민씨 소생이다. 직장(直長)인 아들 정주(鼎周)와 시집가기 전에 요절한 딸은 김씨 소생이다. 아들 태주(泰周), 진주(晉周), 이주(履周)와 현감 김창열(金昌說), 수찬 최창대(崔昌大), 김영행(金令行), 이재(李縡) 등에게 시집간 딸들은 황씨 소생이다. 남택하는 진사 도규(道揆)와 도진(道振) 등 2남과 민승수(閔承洙)에게 출가한 딸 하나를 두었다. 김창열은 2남 2녀를 두었고, 김영행은 2녀를 두었는데 모두 아직 어리다.공은 어려서 부친을 여의었고 효성이 돈독하여 대부인(大夫人)을 모시는 50년 동안 조금도 대부인의 뜻을 거스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늙어서는 중부(仲父) 지사공(知事公)을 섬기되 예절을 매우 잘 갖추었다. 공은 평생 가산에 대해 묻지 않았고 뇌물을 받지 않았으며, 집안에 기식(寄食)하는 일가친척이 늘 10여 인에 이르렀고 관직의 규율을 엄격히 지켜 사람들이 감히 사사로운 일을 청탁하지 못하였다. 공은 늘 국조(國朝)의 전고(典故)와 선배들의 좋은 일을 이야기하길 좋아하였는데, 듣는 사람들은 피곤한 줄도 모른 채 듣곤 하였다.공은 5월 7일에 별세하여 그해 7월 9일에 양성(陽城) 천덕산(天德山)에 있는 선영 안의 손향(巽向 남동향)의 언덕에 묻혔다. 나 창협은 어려서는 공을 알지 못하다가 공이 별세한 뒤에 비로소 딸을 공의 아들 진주(晉周)에게 시집보냈다. 지금 도위공(都尉公)이 묘 앞에 비석을 세우려고 하면서 나에게 이르기를, “평소에 당신이 사람들에게 묘지명을 써 주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일가에 대해서까지 모두 거절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제 아우가 당신의 사위이므로 감히 그 인연을 빙자하여 청하는 바입니다.” 하였다. 창협은 누차 사양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못하여 삼가 서문을 쓰고 다음과 같이 명(銘)하는 바이다.예로부터 사람을 관찰할 때는 / 惟古觀人반드시 말년 절개 살펴보았네 / 必觀末節선비들이 평소에 지낼 적에는 / 士方平居의기 높지 않은 자 어디 있으랴 / 罔不揭揭허나 변고 갑자기 앞에 닥치면 / 變故臨之지조를 지키는 자 드물고말고 / 鮮能自立공 오직 공손하고 진실했기에 / 公惟恂恂내면의 마음가짐 굳게 지키어 / 內篤操執자랑도 겉치레도 하지를 않고 / 不矜不飾세상길 앞 다투어 아니 달리며 / 不競而馳물러나 겸손하게 지내노라니 / 退然而居알아보는 사람이 하나 없었네 / 衆莫之知그러나 의를 떨쳐 일어날 적엔 / 及其奮義저 옛날 맹분(孟賁) 전저(專諸) 무색했으니 / 勇奪賁諸세우고자 한 의리 무엇이었나 / 其義伊何국모의 바른 자리 부지함일레 / 坤極之扶조정 안에 가득한 많은 신하들 / 有臣盈庭나라의 화 오히려 다행스러워 / 幸國之禍바로잡지 아니하고 조장을 하니 / 匪匡伊助불에다가 기름을 붓는 격이라 / 如膏於火공은 그 불길 속에 뛰어들어가 / 公犯其焰죽음으로 충절을 세움으로써 / 以死易忠사람 도리 인륜을 높이 드러내 / 揭是彝常저 간흉 무리들을 징계하였네 / 懲彼奸凶이리하여 나라가 유지되었고 / 國與有立하늘 이치 마침내 아니 어긋나 / 理罔終忒성상께서 옛 잘못 뉘우치시자 / 宸心悔悟태양이 찬란하여 세상이 밝듯 / 如日斯爀꿩 그림 왕비 옷이 환히 빛나고 / 煌煌褕翟우리 중궁 위의를 되찾았다네 / 復我壼儀왕께서 감탄하여 이르시기를 / 王曰噫歟내 마음에 충신을 잊지 못하니 / 忠臣予思무엇을 줘야 하나 / 何以贈之상공의 벼슬이요 / 上公之尊어떻게 표창할꼬 / 何以旌之정려문을 세워야지 / 棹楔于門추후에 내린 은전 크게 갖춰져 / 追典大備영광이 구천까지 미쳐갔다네 / 榮施九幽흐른 세월 얼마인고 / 自初幾時목성 운행 반 바퀴라 / 木行半周그 누가 말했는가 밝은 천도는 / 孰云皓天천추에 틀림없이 돌아온다고 / 必千秋反충신이 되려는 자 / 有欲爲忠마땅히 분발하리 / 尙宜知勉적성의 언덕 위에 / 豐碑屹屹큰 비석이 우뚝하니 / 赤城之岡시 짓고 깊이 새겨 / 作詩深刻길이길이 전하노라 / 用昭無疆[주-D001] 흐른 …… 바퀴라 : 오두인(吳斗寅)이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위를 반대하다 죽은 1689년부터 갑술정변이 일어나 그가 신원된 1694년까지 햇수로 6년이 지났다는 말이다. 목성은 12년에 천체를 한 바퀴 돈다고 한다.
    2022-05-06 | NO.223
  • 대치사(대치서원) 유허비
    전남 담양군1920년대치사(大峙祠) 유허비 (遺墟碑) <광주읍지>에 따르면 간석(艮石) 이중철(李中轍)의 명문(銘文)이 있다.담양군 대전면 평장리 화암마을 영천이씨 문중에서는 문중내 8賢을 배향한 대치서원을 1754년에 담양 대치 중부촌에 건립하였으나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20년 이석지의 후손에 의해 옛 터에 유허비가 건립되었다.대치사에 배향된 인물 중 효암 이정실, 묵은 이정신, 야은 이정태는 병자호란시 의병을 이끌고 진군하기도 하였으며, 인근 척서정에는 야은 이정태의 원운 2수가 전해지고 있다.
    2018-06-18 | NO.222
  • 덕암허공효행비
    광주시 북구 월출동 (해산마을 앞)1974년이 덕암허공효행비(德巖許公孝行碑)는 최윤환崔允煥 짓고 이창헌李昌憲 쓰다.
    2018-11-13 | NO.221
  • 덕촌집 제10권 / 비장(碑狀)-죽곡 묘지명〔竹谷墓誌銘〕 이장영
    덕촌집 제10권 / 비장(碑狀)-죽곡 묘지명〔竹谷墓誌銘〕옛날 중종 때 호남에 죽곡(竹谷) 이 선생 형제가 있었다. 덕행(德行)과 문장(文章)으로 일세 유림의 긍식(矜式)이 되었으나, 매양 낭서(郞署)와 주군(州郡)을 전전하다가 끝내 그 뜻과 공업을 밝은 시대에 펼치지 못하고 은둔하다가 세상을 떠나 길이 당세에 애석해 하는 바 되었고 후인들이 송모(誦慕)하는 바 되었다. 지금 선생이 작고하신 지 백여 년이 되어가고 병란을 겪은 나머지 집에 소장된 문적(文籍)이 거의 다 산실되었다. 지난번에 선생의 5세손 병(苪)이 유당(幽堂)에 묘지가 없어 세월이 오래될수록 징험할 길이 없음을 매우 두렵게 여겨 용암(龍庵) 처사 박공 태구(台耈)가 쓴 행장을 가지고 내게 와서 묘지명을 간청하므로 나는 사양하지 못하였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선생 형제는 실로 우리 집안의 선대와 정의가 매우 두터워 이미 그 유풍(流風)을 익숙히 듣고 있었다. 이에 감히 그 행장을 보고 사실을 차례로 서술하였다.삼가 살펴보니 선생의 휘는 장영(長榮), 자는 수경(壽卿), 세계(世系)는 함풍(咸豐)에서 나왔다. 고려 광종(光宗) 때 상호군(上護軍) 언(彦)이 바로 비조(鼻祖)이며 5세를 지나 휘 광봉(光逢)은 벽상삼중좌명(壁上三重佐命)에 책훈(策勳)되고 함풍군(咸豐君)에 봉해져 자손은 이로 인하여 관향을 삼아 대대로 벼슬하였다. 또 6세를 지나 휘 희림(煕林)에 이르러 본조에 들어와 청주 판관(淸州判官)이 되었는데 선생의 5세조이다. 고조의 휘는 유(瑈)로, 경복궁 제거(景福宮提擧)였고, 증조의 휘는 안(岸)으로 참봉(參奉)을 지냈으며, 조부 계형(桂亨)은 부사직(副司直)을 역임하였고, 아버지 석(碩)은 생원(生員)이었다. 어머니는 나주 나씨(羅州羅氏)인 진사 윤(贇)의 딸이다. 선생의 형제는 7명으로, 장남 대영(大榮)은 문재(文才)가 있었으나 일찍 작고하고, 차남 백영(百榮)은 참봉, 그 다음은 천영(千榮)으로 생원, 그 다음은 만영(萬榮)으로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대시(臺侍)를 역임하였고 호는 죽음(竹陰)이며, 그 다음 억영(億榮)은 진사이고, 그 다음은 조영(兆榮)으로 통덕랑(通德郞)을 지냈고, 형제 중 막내가 바로 선생이다.선생은 나주(羅州) 죽곡(竹谷)에서 태어나 이로 인하여 호를 죽곡(竹谷)이라 하였다. 이에 세상에서는 죽음(竹陰)과 죽곡 두 선생을 난형난제(難兄難弟)라 칭하였다. 선생은 정덕(正德) 신사년(1521, 중종16) 11월 30일에 태어났다. 나이 20세인 가정(嘉靖) 경자년(1540, 중종35)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고 무오년(1558, 명종13)에 명경(明經)으로 을과(乙科)에 발탁되었다. 경신년(1560, 명종15)에는 승문원에 선발되어 들어가 정자(正字)가 되었고, 신유년(1561, 명종16)에 북평사(北評事)에 제수되었으나 모부인이 연로하여 사직하고 돌아와 뵈었고, 임술년(1562, 명종17)에는 모친의 봉양을 위하여 수령으로 나가기를 청하여 함평(咸平) 현감(縣監)에 제수되었다. 계해년(癸亥年)에는 모친상을 당하여 3년간 여묘(廬墓)살이 하였고, 정묘년(丁卯年) 황해 도사(黃海都事)에 제수되었다. 무진년(戊辰年)에는 사간원(司諫院) 사간(司諫)에 제수되고, 기사년(己巳年)에는 장흥 부사(長興府使)로 제수되었다가 임기가 차서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제수되었으며, 임오년(壬午年)에는 함평 군수(咸陽郡守)로 제수되고 갑신년(甲申年)에는 성주 목사(星州牧使)에 제수되었으며, 을유년(乙酉年) 관직을 버리고 귀가(歸家)하였다. 병술년(丙戌年)에는 중시(重試)에 장원으로 발탁되어 전례에 따라 통정(通政)의 품계를 더해주고 승정원 우부승지(承政院右副承旨)에 제수되었다. 정해년(丁亥年)에는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에 제수되었으며, 무자년(戊子年)에는 양양 부사(襄陽府使)에 제수되었다. 기축년(1589, 선조22) 4월 21일 관직에 있을 때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69세였다.대개 조정에 계신 지 32년 동안 내외직을 역임한 이력이 마땅히 이 정도에 그치지는 않을 것이나 오직 남아있는 교지(敎旨)에 의거하여 그 경개(梗槩)를 볼 수 있는 것이 이와 같을 뿐이다. 생원공(生員公)은 타고난 자질이 매우 높아 이미 성균관에 올랐으나 과거 공부를 폐하고 학문 탐구에 전념하여 예학(禮學)을 강명(講明)하고 자제들을 가르침에 한결같이 옳은 방도로 하였다. 모부인 나씨(羅氏)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후원(後園)에 세 개의 작은 서재를 나란히 두고 자제들을 나누어 거처하게 하면서 경학(經學)을 과업(課業)으로 하였다.하루는 선생 형제가 앞개울에 나가 목욕을 하고 돌아와서 잡은 물고기를 드리니 모부인이 좋아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물고기는 내가 바라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고, 물리치고 회초리로 쳤으니 그 가법(家法)의 바름과 교도(敎導)의 엄함이 이와 같았다. 선생은 이미 예법이 있는 가문에서 태어나서 훈도에 젖어 습관이 본성과 더불어 이루어졌고 타고난 자질이 수연(粹然)하고 총명함이 남달라 막 말을 배울 때에 이미 스스로 말을 뱉으면 문장이 이루어졌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왕발(王勃)이라 칭찬하였다. 그리고 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효는 지성(至性)에서 나와서, 8세에 부친의 상을 당하여 능히 몸을 상할 정도로 슬퍼하고 정성을 다하였으니 대개 나이는 아직 성동(成童)이 되지 않았으나 문행(文行)이 병진(並進)하여 또래들이 따르고 복종하였다. 방백(方伯)이 그 명성을 듣고 본읍을 순행하다가 그 집을 방문하여 그 행동거지가 공순(恭順)하고 응대함이 예절에 맞아 엄연히 노숙한 성인과 같음을 보고 크게 칭탄(稱歎)하며 신동(神童)이라 지목하여 이로부터 성예(聲譽)가 더욱 파다하였다. 매일 새벽이면 모부인의 안부를 살피고 나와서는 서실로 나아가 종일 단정히 앉아 우러러 생각하고 고개 숙여 책을 읽되 힘써 노력하여 게으름을 잊었으니, 대개 일찍부터 양지(養志)의 효에서 스스로 터득하고 덕과 학문을 갈고 닦는 방도에 실제로 힘을 쓴 것이다.성품는 본래 담박(淡泊)하여 사물에 대하여 좋아하는 것이 없었으나 오직 옛 서적을 탐독하기를 맛있는 음식이 입을 즐겁게 하는 것처럼 하였다. 평생 질병이나 사고가 아니면 일찍이 잠시라도 흘려보내지 않고 깊이 사색하고 탐구하느라 혹 음식을 먹어도 맛을 모르기까지 하였다. 비록 관직에 있으며 백성들을 다스리는 때라도 조금의 여가가 있으면 그때마다 책상을 대하여 송독(誦讀)하였다. 역학(易學)에 더욱 정밀하여 상수(象數)의 변화와 소장(消長)의 운행을 연구하여 관통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초연히 밝고 드넓은 근원을 홀로 보았고, 여사로 익힌 문장은 전중(典重)ㆍ온아(溫雅)하여 우뚝하게 일대의 통유(通儒)가 되었다. 일시의 선류(善類)들이 추중(推重)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조남명(曺南冥)ㆍ유미암(柳眉巖)ㆍ기고봉(奇高峯)ㆍ오덕계(吳德溪)ㆍ양송천(梁松川) 등 여러 선생들이 서로 따르며 강마(講劘)하여 늙도록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 연원(淵源)과 이택(麗澤)의 성대함이 이와 같았다.성품이 꼿꼿하여 세상과 어울리지 않고 도(道)와 더불어 이웃하여 즐기며 근심을 잊고 단표누공(簞瓢屢空)의 상황에서도 대처함이 태연하였다. 전후로 역임하였던 주읍(州邑)은 웅부(雄府)와 대읍(大邑)이 아닌 경우가 없었으나 집에는 조금의 양식도 없었고 상자에는 여벌의 옷이 없었다. 평생의 저술은 겨우 시문(詩文) 각 수십 편이 집에 소장되어 있다. 필법은 또 힘이 굳세어 고인의 경지에 핍진하였으나 전해진 것은 더욱 많지 않다.아, 이것은 모두 여러 명현가(名賢家)에 대대로 전해진 말과 본군(本郡)의 선행록(善行錄)에서 근근이 주워 모은 것이다. 언론과 사업은 그 상세함을 알 수 없지만 그 입심(立心)과 제행(制行)에 대해서는 그 본말을 볼 수 있다. 계해년 여묘살이 하던 시절에 원근에서 학문에 뜻을 둔 선비들이 모여들어 수업을 청하니 선생은 과업을 엄히 하여 가르치고 차근차근 잘 이끌어주었다. 또 학계(學誡)를 써서 일깨웠으니 대략 이르기를, “크게는 삼강오상(三綱五常)의 도이며, 세세하게는 일사일물(一事一物)의 은미함이 모두 내 마음 속에 갖춰지지 않음이 없으니, 곧 《대학》에서 말한 명덕(明德)이며, 《중용》에서 말한 천명(天命)이 이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한 가지라도 혹 은미한 중에 삼가지 않으면 한 터럭만큼의 차이가 끝내 천 리나 어그러지게 된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대개 정부자(程夫子)가 말한 천덕(天德)과 왕도(王道)는 그 요체가 다만 근독(謹獨)에 있다는 뜻이니 그 말의 뜻을 완미(玩味)하면 그것이 깊은 경지에 나아가 스스로 터득한 나머지에서 나온 것이며 전인(前人)의 말을 도습(蹈襲)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함양(咸陽)을 다스릴 때 방백(方伯)이 그 평가에 쓰기를, “청백은 백이(伯夷)와 같다.”고 하였고, 성주(星州)를 다스릴 때는 “추호도 어김이 없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전례를 따라 칭찬하여 등한(等閑)하게 품평한 것이 아니었다.또 제봉(霽峯) 고 선생(高先生)이 그 장례에 지은 만사에 이르기를, “문자는 장산공(藏山公)의 후세요, 아손(兒孫)에게 남은 재물을 기탁할 곳이 없네.”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덕에 훈도되었던 이 생애 어찌 그런 날이 다시 올까, 노산(魯山)의 용모는 그림으로 그리기 어렵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또한 그 마음으로 기뻐하여 진심으로 복종하는 뜻을 볼 수 있다. 이 몇 가지 일로 논하면 바로 이른바 한 점의 고기로 솥 안의 고기 전부의 맛을 알 수 있다는 것이며, 봉의 깃털 하나로 오색의 갖춤을 안다는 것이니, 또한 족히 이것으로 후세에게 믿음을 주어 의심이 없을 것이다.부인은 해주 오씨(海州吳氏)로 습독(習讀) 윤필(允弼)의 딸이며, 병조 참지(兵曹參知) 보(堡)의 손녀이다. 선생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 영광(靈光) 오개산(筽開山) □향의 자리에 부장(祔葬)하였다. 자녀는 4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곤(琨), 차남은 유(瑜), 그 다음은 선(璇)과 진(瑨)이다. 맏딸은 현감 정운룡(鄭雲龍)에게 출가하고, 둘째 딸은 생원 김경일(金敬一)에게 출가하였다. 곤은 아들이 둘인데 장남은 홍심(弘諶), 차남은 홍겸(弘謙)이다. 유는 3남2녀를 두었는데, 장남 홍순(弘詢)은 생원이고, 차남은 홍의(弘誼), 막내는 홍원(弘謜)이다. 첫째딸은 이형(李逈)에게 출가하였고, 둘째딸은 생원 송후옥(宋後玉)에게 출가하였다. 선은 아들이 둘인데, 홍기(弘記)와 홍식(弘識)이다. 진은 자식이 없어서 홍원을 후사로 삼았다. 정운룡은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두었는데, 아들은 성일(聖一), 첫째 사위는 군수 정홍록(丁弘祿)이고 둘째 사위는 김극순(金克純)이다. 김경일은 1남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기갑(奇甲)이며 딸은 김정길(金鼎吉)에게 출가하였다. 내외증현손(內外曾玄孫)이 몇 백 명 된다. 선생에게는 젊은 첩이 있었는데, 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 정신자수(貞信自守)하였다. 국상을 만나 이에 말하기를, “첩은 일찍이 대부(大夫)를 섬겨 늠록(廩祿)을 외람되이 먹었습니다.”라고 하고, 마침내 소복(素服)과 소식(素食)으로 석 달을 마쳤다. 측실에서 둔 딸이 하나 있는데 또 절행(節行)으로 정려(㫌閭)를 하사받았다. 이것으로 선생이 집안을 다스리는 일단을 볼 수 있을 것이다.다음과 같이 명(銘)한다.“행(行)을 근본으로 삼고, 문(文)은 화려한 외식으로 여겼으며, 위(位)는 덕에 어울리지 않았으니, 하늘이 하는 것을 어찌할까. 높은 산과 큰 길과 같으니 불후(不朽)함이 이미 많았다. 오직 이 좋은 언덕의 진택(眞宅)은 길이 후인들의 찬탄을 받으리라.”[주-D001] 옳은 방도 : 의방(義方)은 일을 행함에 응당 준수해야 할 규범과 도리를 말한다. 《춘추좌씨전》은공(隱公) 3년 기사에 “석작이 간언하여 말하기를, 신이 듣건대 ‘아들을 사랑함에는 바른 길을 가르치어 나쁜 데로 들지 않게 하는 것이다.’고 합니다.〔石碏諫曰 臣聞愛子教之以義方 弗納於邪〕”라고 하였다.[주-D002] 습관이 …… 이루어졌고 : 《서경》 〈태갑 상(太甲上)〉에 “이 의롭지 못함은 습관이 본성과 더불어 이루어진 것이니, 나는 의리를 따르지 않는 자들과 가까이 하지 않겠다.〔茲乃不義 習與性成 予弗狎于弗順〕”라고 하였다.[주-D003] 왕발(王勃) : 650~676. 중국 당나라 초기의 시인으로, 자는 자안(子安)이다. 수나라 말의 유학자 왕통(王通)의 손자이다. 6세 때부터 문장을 짓는데 뛰어났으며, 9세 때에는 안사고(顔師古)가 주를 단 《한서(漢書)》를 읽고 그 오류를 지적하였다고 한다. 양형(楊炯)ㆍ노조린(盧照隣)ㆍ낙빈왕(駱賓王)과 함께 초당사걸(初唐四傑)로 일컬어진다. 저서로 《왕자안집(王子安集)》이 있다.[주-D004]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 인심(因心)은 마음에서 우러나와 억지로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시경》 〈황의(皇矣)〉에 “이 왕계가 마음으로부터 우애하시다.〔維此王季 因心則友〕”라고 하였다.[주-D005] 양지(養志) : 부모를 봉양함에 그 뜻에 순종하고 기쁘게 해드리는 효를 행한다는 말이다.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증자와 같이 하면 뜻을 봉양한다고 이를 만하다. 어버이 섬김을 증자와 같이 해야 한다.〔若曾子 則可謂養志也 事親若曾子者 可也〕”라고 하였다.[주-D006] 옛 서적을 : 분전(墳典)은 삼분오전(三墳五典)으로, 고대 전적을 통칭하는 말이다.[주-D007] 맛있는 …… 것 : 추환(芻豢)은 소ㆍ양ㆍ돼지 따위의 가축으로, 육류 식품을 두루 이른다.《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이와 의가 우리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은 마치 고기 음식이 우리의 입을 즐겁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理義之悅我心 猶芻豢之悅我口〕”라고 하였다.[주-D008] 상수(象數) : 《주역》의 상(象)과 수(數)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천(天)ㆍ일(日)ㆍ산(山)ㆍ택(澤) 등을 상이라 하고, 초(初)ㆍ상(上)ㆍ구(九)ㆍ육(六) 등을 수라 한다. 《춘추좌씨전》희공(僖公) 15년 기사에, “거북점은 형상으로 길흉을 나타내고 시초점은 수로 나타낸다. 만물이 생겨난 뒤에 형상이 있고, 형상이 있은 뒤에 점점 많아지고, 많아진 이후에 수가 있게 되었다.〔龜 象也 筮 數也 物生而後有象 象而後有滋 滋而後有數〕”라고 하였다.[주-D009] 통유(通儒) : 고금에 통달하여 학식이 깊고 넓은 유자를 말한다.[주-D010] 조남명(曺南冥) : 조식(曺植, 1501~1572)으로,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健中), 호는 남명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연구하여 대학자로 추앙받았으며 벼슬을 거절하고 은둔하며 학문에만 힘썼다. 그의 문하에서 정구(鄭逑)ㆍ정인홍(鄭仁弘)ㆍ곽재우(郭再祐) 등이 배출되었다. 대사간에 추증되고, 1615년(광해군7) 영의정에 증직되었으며 진주의 덕천서원(德川書院), 김해의 신산서원(新山書院), 삼가의 용암서원(龍巖書院) 등에 제향 되었다. 저서로는 《남명집》ㆍ《남명학기유편(南冥學記類編)》 등이 있다.[주-D011] 유미암(柳眉巖) : 유희춘(柳希春, 1513~1577)으로,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인중(仁仲), 호는 미암이다. 경전에 널리 통했고 제자(諸子)와 역사에도 능하였다.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 부제학, 전라도 관찰사, 대사헌, 형조ㆍ예조ㆍ공조ㆍ이조 참판 등 청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담양의 의암서원(義巖書院), 무장의 충현사(忠賢祠), 종성의 종산서원(鍾山書院)에 제향 되었다. 저서로는 《미암집》ㆍ《속몽구(續蒙求)》ㆍ《주자어류전해(朱子語類箋解)》 등이 있다.[주-D012] 기고봉(奇高峯) : 기대승(奇大升, 1527~1572)으로,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ㆍ존재(存齋)이다. 이황과의 서신 교환을 통하여 사칠논변(四七論辨)을 전개하였다. 성균관 대사성, 대사간, 공조 참의를 역임하였다. 광주의 월봉서원(月峰書院)에 제향 되었으며,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저서로는 《고봉집》ㆍ《논사록(論思錄)》ㆍ《이기왕복서(理氣往復書)》 등이 있다.[주-D013] 오덕계(吳德溪) : 오건(吳健, 1521~1574)으로,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자강(子强), 호는 덕계이다. 조식이 덕산동(德山洞)에서 강론하자 문인으로 수학했으며, 이황도 그의 학문이 정밀하고 심오함을 칭찬하였다. 정언, 교리, 이조 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산천의 서계서원(西溪書院)에 제향 되었다. 저서로는 《덕계문집》ㆍ《정묘일기(丁卯日記)》 등이 있다.[주-D014] 양송천(梁松川) : 양응정(梁應鼎, 1519~1581)으로,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공섭(公燮), 호는 송천이다. 시문에 능하여 선조 때 8문장의 한 사람으로 뽑혔으며 효행으로 정문이 세워졌다. 공조 좌랑, 진주 목사, 공조 참판, 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송천집》ㆍ《용성창수록(龍城唱酬錄)》 등이 있다.[주-D015] 이택(麗澤) : 두 못이 서로 붙어 있어 서로 불어나는 것처럼, 붕우 간에 서로 절차탁마한다는 말이다. 《주역》 〈태괘(兌卦) 상(象)〉에 “못이 연결된 것이 태이니 군자가 그 이치를 살펴 붕우들과 강습한다.〔麗澤兌 君子以朋友講習〕”라고 하였다.[주-D016] 단표누공(簞瓢屢空) : 《논어》 〈옹야(雍也)〉에 “한 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로 누추한 시골에 사는 것을 사람들은 그 근심을 견디지 못하는데 안회는 그 즐거움이 변치 않으니 어질구나, 안회여.〔一簞食 一瓢飲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 賢哉回也〕”라고 하였다. 《논어》 〈선진(先進)〉에 “안회는 도에 가까웠으나, 자주 끼니를 굶었다.〔回也其庶乎 屢空〕”라고 하였다.[주-D017] 제행(制行) : 도덕에 맞는 행위. 도덕과 행위의 준칙을 규정한다는 말이다. 《예기》 〈표기(表記)〉에 “성인이 백성들의 행동을 제어함에 자기가 능한 바로써 하지 않고, 백성으로 하여금 권면하고 부끄러워하는 바가 있게 하여 그 말을 행하게 한다.〔聖人之制行也 不制以己 使民有所勸勉愧恥 以行其言〕”라고 하였다.[주-D018] 한 …… 된다 : 《예기》 〈경해(經解)〉에 “역에 이르기를 ‘군자는 처음을 삼가야 하니, 처음에 호리의 차이가 나면 어그러지는 것은 천 리가 된다.’고 하였다.〔易曰 君子愼始 差若毫釐 繆以千里〕”라고 하였다.[주-D019] 노산(魯山) : 노산은 당나라 때 노산 영(魯山令)을 지낸 원덕수(元德秀, 696~754)를 말한다. 자는 자지(紫芝)이며 하남(河南) 사람이다. 사람됨이 청결하고 순박하며 청빈하게 삶을 살았다. 만년에 육혼산(陸渾山)에 은거하다 세상을 떠났다.[주-D020] 마음으로 …… 복종하는 :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덕으로 사람을 복종시키는 자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기뻐하여 진실로 복종하는 것이니, 70제자가 공자에게 심복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以德服人者 中心悅而誠服也 如七十子之服孔子也〕”라고 하였다.[주-D021] 한 …… 있다 : 《회남자(淮南子)》 〈설림훈(說林訓)〉에 “한 점의 고기를 맛보면 솥 안의 고기 전부의 맛을 알 수 있다.〔嘗一臠肉而知一鑊之味〕”라고 하였다.[주-D022] 봉의 …… 안다 : 《주자어류(朱子語類)》 권48에 “봉의 깃털 하나만 보면 그 오색이 갖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觀鳳一羽 則知五色之備〕”라고 하였다.[주-D023] 높은 …… 길 : 《시경》 〈거할(車舝)〉에 “높은 산을 바라보며 큰 길을 가는구나.〔高山仰止 景行行止〕”라고 하였다.[주-D024] 진택(眞宅) : 사람이 죽은 뒤에 돌아가는 진정한 집이라는 말이다.
    2023-12-04 | NO.220
  • 도원수 권공 신도비명 - 상촌선생집 제28권
    도원수 권공 신도비명(都元帥權公神道碑銘) - 상촌선생집 제28권 : 상촌(象村) 신흠(申欽 : 1566~1628) 증 효충장의협력선무공신(效忠仗義協力宣武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ㆍ홍문관ㆍ예문관ㆍ춘추관ㆍ관상감사 세자사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 자헌대부 의정부우참찬 팔도도원수 권공(權公)의 묘도에 비석이 갖추어지자 우의정 신흠은 말을 다듬어 다음과 같이 새긴다.공이 적을 쳐부순 공적은 간이(簡易) 최공 입(崔公岦)이 행주(幸州)의 비석에다 기록하였고 공의 아름다운 사적은 공의 사위 오성 상국(鰲城相國) 이공 항복(李公恒福)이 묘지(墓誌)에다 기록하였으므로 더 이상 추가할 것은 없겠으나, 옛날의 제도를 상고해 볼 때 공과 같이 위대한 분에 대해서는 신도비명을 짓는 것이 합당하니 마땅히 대로변에 세워 후세 사람에게 알려야 하지 않겠는가. 공의 휘는 율(慄), 자는 언신(彦愼)이다. 시조는 행(幸)으로 신라의 종성(宗姓)인데 견훤(甄萱)을 토벌하여 공을 세웠으므로 고려 태조가 권씨 성을 하사하고 안동(安東)에다 봉해주어 그대로 본관이 되었다. 13대를 내려와 부(溥)는 정승을 지내고 수복(壽福)으로 일생을 마쳤으며 한 가문에서 군(君)에 봉해진 자가 아홉 사람이나 되었다. 3대를 지나 근(近)은 벼슬이 찬성인데 곧 공의 6대조이다. 증조 교(僑)는 양근군수(楊根郡守)이고 조부 적(勣)은 강화 부사(江華府使)이고 선조 철(轍)은 의정부 영의정을 지냈는데 네 조정을 내리섬겨 태평 시대의 재상이 되었다. 선비 조씨(曹氏)는 적순부위(迪順副尉) 승현(承睍)의 따님으로 하성부원군(夏城府院君) 익청(益淸)의 후손이다.가정(嘉靖) 정유년(1537, 중종32)에 공을 낳았는데 공은 어릴 적에 소꿉놀이를 좋아하지 않았고 장성해서도 부귀 자제의 호사를 즐기는 버릇이 없자 의정공이 기특하게 여겨 말하기를 “우리 가문에 인재가 나왔다.” 하였다. 경학(經學)을 열심히 공부하였으나 어릴 적에 불운하여 과거에 급제를 못하다가 만력 임오년(1582, 선조15)에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당시 나이는 46세로서 식자들 중에는 혹 장상(將相)의 그릇임을 아는 자도 있었다. 승문원의 정자ㆍ저작ㆍ박사로부터 성균관 전적으로 오른 뒤에 사헌부 감찰, 예조 좌랑, 호조 정랑, 전라도사(全羅道事), 경성판관(鏡城判官)으로 옮겼다. 신묘년에 다시 호조 정랑에 제수되고 승진하여 의주 목사(義州牧使)에 제수되었다가 임진년 봄에 사건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그해 여름에 일본 괴수 수길(秀吉)이 우리나라를 정복할 심산으로 수가(秀嘉)와 행장(行長)등을 위시한 60만 대군을 보내 침략을 감행하여 온 나라가 안절부절 혼란에 빠졌다. 선묘께서 하교하기를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권율의 재주는 시험해 볼 만하다 하였다.” 하고,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제수하니, 공은 그날로 임금을 하직하였다. 적이 문경 새재를 넘어 충주(忠州)를 함몰시키고 순변사(巡邊使) 신립(申砬)이 전사하였다. 적이 승승장구하여 경성에 바싹 다가오자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파천하였다. 전라도 관찰사 이광(李洸)이 충청도 관찰사 윤국형(尹國馨), 경상도 관찰사 김수(金睟)와 함께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진위(振威)에 당도하여 장수들에게 계책을 묻자, 공이 말하기를 “주공(主公)께서 온 지방의 군사들을 다 쓸어 거느리고 왔으니 나라의 존망이 이 한 번의 거사에 달렸습니다. 이제 마땅히 대군을 거느리고 곧장 수원(水原)으로 가 통진(通津)을 거쳐서 조강(祖江)을 건너 임진(臨津)을 차단하고 행재소에서 왕명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그 세력을 얻어 큰 공을 꾀할 수있을 것입니다.” 하였으나, 광은 그 말을 따르지 않아 적의 꼴을 보기도 전에 무너지고 말았다.공은 광주(光州)로 돌아가 의기에 넘쳐 말하기를 “종묘사직이 폐허가 되고 주상께서 파천한 마당에 신하된 자로서 어찌 나라가 망하는 것을 앉아서 기다릴 수 있겠는가.” 하고, 주변의 고을에 격문을 돌려 군사 1천 5백 명을 모아 이치(梨峙)로 나아가 진을 치고 양남(兩南)의 목을 쥐었다. 영남의 적이 금산(錦山)의 적과 힘을 합쳐 공격해오자 공은 장검을 빼들고 뛰쳐나가 앞장서서 적의 칼날과 대항하니, 제장(諸將)이 서로 말하기를 “유자(儒者)도 이럴 수있단 말인가.” 하고, 사기가 백배하여 그들을 산기슭에서 무찔렀다.조정에서는 공에게 거진(巨鎭)을 맡겨볼 생각으로 가을에 벼슬을 옮겨 나주(羅州)를 지키게 하였다가 임소에 부임하기 전에 승진시켜 전라관찰사 겸 순찰사를 제수하니, 공은 명을 받고 통곡하였다. 전주(全州)에서 대대적으로 군사를 모아 1만 명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올라갈 계책을 세우고서 수원(水原) 독성(禿城)을 점거, 근거지로 삼아 경성의 적을 위협하고 곧장 서로(西路)를 노리자 수가(秀嘉)는 빈틈을 찔릴까 두려워하고 행장(行長)은 후방을 공격받을까 염려하였으니, 마치 제방이 물을 막는 것처럼 앉아서 관서의 인심을 결집시켰다. 선묘께서는 상방검(尙方劍)을 풀어 보내주며 이르기를 “장수들 가운데 군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이것으로 처단하라.” 하고, 또 여러 진영의 의병을 전부 공의 통솔을 받도록 하였다. 경성의 적은 공의 위세에 눌려 예봉이 꺾였으며 수만 명의 군사를 출동하여 세 진영으로 짜 계속 싸움을 걸었으나 공은 성벽을 굳게 지키고 응전하지 않았으며 이따금 기병(奇兵)을 내보내 무찔렀다.계사년에 독성으로부터 양천(陽川)으로 진영을 옮기고 군사를 나누어 각 지방을 지원하였으며, 곧장 양천강(陽川江)을 건너 성 서쪽 안현(鞍峴)으로 나아가 진을 치려고 하였으나 제장들이 극력 반대하여 고양(高陽) 행주산(幸州山)에 진을 쳤다. 경성의 적은 이때 세력이 한창 불어났는데 공이 적은 군사로 깊이 들어간 것을 보고 2월 12일에 그들의 정병을 전부 동원하여 두 길로 나누어서 밤중에 행주성을 공격해왔다. 공이 일어나 내려다 보니, 적의 총칼이 온 들판을 뒤덮고 성을 몇 겹으로 포의한 상황이었다. 공은 즉시 사졸들에게 주먹밥을 돌려 먹게 한 뒤에 활을 잘 쏘는 자를 뽑아 성가퀴에 배치시켜 화살을 빗발처럼 쏟아붓고 또 힘센 사람을 뽑아 돌을 던져 내리치며 뒤이어 차자화(車子火)를 쏘았다. 아침부터 날이 저물 때까지 적은 아홉 번 진격해 들어왔다가 아홉 번 퇴각하였다. 급기야는 적이 풀단[束草] 가지고 불을 지르며 크게 소리치면서 성을 올라오자, 공은 상방검을 뽑아들고 서서 장수들을 독려하니 장수들이 앞을 다투어 접전하여 적이 마침내 물러갔다. 적의 장졸은 죽은 자가 부지기수였고 군수 물자를 버려두고 도망갔으며 적의 머리 1백 30여 급을 거두어 베었다.조정에 승전보가 들어가자 특지로 자헌대부에 가자하고 장사(將士)들에게도 차등을 두어 상을 내렸다. 황조의 유격대장 사대수(査大受)가 찾아와 공을 보고 감탄하기를 “외국에도 진짜 장수가 있구나.” 하였으며,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은 이자(移咨)하여 칭찬하기를 “권 포정(權佈政)은 국난 속의 충신이요 중흥을 이룩한 명장이라 이를 만하다.” 하고, 채단과 백금 등 물품을 상으로 주었다. 병부 상서 석성(石星)은 천자에게 아뢰기를 “배신(陪臣) 권율은 홀로 외로운 성을 지켜 막강한 적과 대항하였다.” 하였고, 천자도 가상히 여겨 말하기를 “전라도에서 적을 참획한 수효가 많아 그 나라의 인민이 그런대로 진작될 수 있었다.” 하였다.공은 행주의 적을 무찌른 뒤에 진영을 파주(坡州)로 옮겼다. 파주는 곧 서쪽으로 뻗은 큰길이 있어 적이 꺼려하였다. 다시 행주에서의 패배를 갚기 위해 피를 뽑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공을 공격하려 계획하였다가 끝내 감히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물러갔다. 4월에 경성의 적이 도망갈 때 공은 경무장한 군사로 그 뒤를 추격하려 했는데 때마침 제독 이여송(李如松)이 계책을 써 적의 퇴각을 추진하는 중이라서 공으로 하여금 남쪽으로 내려가지 못하게 하였다.6월에 제도 도원수(諸道都元帥)로 제배되어 영남에 머물러 있다가 겨울에 형조 판서가 되고 의정부 우참찬으로 전임되었다. 갑오년 봄에 신병으로 사직을 청하니, 선묘께서 염려한 나머지 의원을 잇달아 내보냈다. 무사 하나가 전장에 나가는 것을 피해 전주(全州)에 숨어 있으므로 공이 그를 참수하였는데 체찰사가 그 가족의 하소연을 곧이듣고 공을 문책할 것을 청하여 파직되자, 웃으며 말하기를 “몇 년 동안 장수로 있던 내가 군법으로 병졸 하나를 참수할 수 없단 말인가.” 하고서, 모든 일을 사절하고 고향 강화(江華)로 돌아갔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다시 한성 판윤(漢城判尹), 호조 판서, 지의금부사에 제수되고 비변사 당상관을 겸임하였다. 어전에 입시하였을 때 선묘께서 하교하기를 “경이 아니었더라면 국가가 어찌 오늘이 있었겠는가.” 하고, 내구마(內廐馬)를 하사하였다. 병신년에 충청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는데 선묘께서 다시 특명으로 도원수를 삼고 이르기를 “경은 충성과 공로가 크게 드러나고 용맹과 지략이 세상에 뛰어나 이름이 천하에 자자하고 위세가 적국을 떨게 하였으니, 경을 놓아두고 원수의 직책을 누구에게 맡기겠는가.” 하였다. 조정을 하직할 때 임금은 공을 불러 접견하고 술을 내려 마음을 달래줬으며 또다시 내구마를 하사하였다.7월에 호서(湖西)의 사인(士人) 이몽학(李夢鶴)이 모반하여 다섯 고을을 잇달아 함몰시키자 조정에서 공에게 그들을 토벌할 것을 명하였다. 공이 군사를 거느리고 급히 달려가 보니 적은 이미 홍주(洪州)에서 잡혀 죽은 뒤였는데, 그 도당의 죄를 다스리고 억울한 자는 재심하는 일을 매우 분명히 하여 호서 지방이 안정을 되찾았다.겨울에 일본에서 돌아온 우리나라 사람이, 청정(淸正)이 재차 침략하려 한다고 말을 전하여 조야가 술렁거리자 공은 말하기를 “설사 청정이 다시 쳐들어온다 하더라도 그에 대처할 방도가 있게 마련인데 머리를 맞대고서 걱정만 하고 있으니,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고 진영을 나누어 배치하여 적을 제압할 계책을 상주하였다. 정유년 가을에 과연 다시 침입하여 진주(晉州)와 남원(南原)을 함몰시키고 곧장 경기로 향해 올라오자 공은 일변 싸우고 일변 행군을 하면서 적의 수급을 베어 조정에 보고하였다. 그러다가 임금의 부름을 받고 조정으로 들어갔는데 공의 힘에 의해 한강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조정으로 돌아온 그 이튿날 중국의 장관(將官) 팽우덕(彭友德)과 한강을 도로 건너가 직산(稷山)에서 접전하여 크게 무찔렀다.겨울에 중국이 대군을 출동하여 제독(提督) 마귀(麻貴)와 경리(經理) 양호(楊鎬)를 보내 울산(蔚山)의 적을 공격하였는데, 공은 본국의 토병을 거느리고 선봉에 서서 맨 앞에 돌진하며 뒤처진 자를 참수하여 조리돌리자, 모든 군사가 사기 충천하여 적의 성벽을 개미떼처럼 달라붙어 올라가 그 외성(外城)을 함락하니, 제독과 경리가 입을 모아 칭찬하였다. 무술년 봄에 신병으로 면직을 청하자 선묘께서 위로하는 말로 달래주고 애써 만류하였다. 중국이 병부 상서 형개(邢玠)를 보내 세 제독을 독려하여 길을 나누어서 적을 칠 때 공은 유정(劉綎)을 따라 순천(順天)의 적을 공격하였는데, 유정은 심중에 싸울 뜻이 없어 머뭇거리며 진격하지 않으므로 공이 여러 번 계책을 건의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얼마 안 되어 적들은 수군도독(水軍都督) 진인(陳璘)에게 대패하고 또 그들의 괴수 수길이 죽었기 때문에 각도의 적이 모두 철수하여 돌아갔다.기해년(1599, 선조32) 여름에 공은 병세가 위독해져 사직하니 선묘께서 윤허하여 체직되었으며 7월 6일에 마침내 일어나지 못했으니, 향년 62세였다. 선묘는 크게 슬퍼하여 조회를 일시 중지하고 부의를 많이 내렸으며 관원을 보내 치제하고 찬성을 증직할 것을 명하였다. 9월에 양주(楊州) 홍복산(洪福山) 술좌(戌坐)의 자리에 장사지냈는데 선영이 있는 곳이다. 이듬해 을사년에 논공(論功)할 때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책록되고 영의정과 부원군에 추증되었다.공의 전부인은 창녕 조씨(昌寧曹氏)로 첨정(僉正) 휘원(輝遠)의 따님인데 따뜻하고 정중하며 부드럽고 후덕하여 내간의 규범이 있었다. 향년 24세에 별세하고 정경부인에 추증되었으며 딸 하나를 두었는데 곧 오성공(鰲城公)의 부인이다. 2남 1녀를 낳아 장남은 성남(星男)이고 차남은 정남(井男)인데 다 음직으로 벼슬하여 군수가 되었으며, 딸은 윤인옥(尹仁沃)에게 시집갔다. 성남은 처음에 판서 권징(權徵)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았고, 뒤에 주부 김계남(金繼男)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4녀를 낳았으며, 정남은 승지 윤의(尹顗)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았고, 윤인옥은 1남 1녀를 낳았다. 후부인 박씨(朴氏)는 죽산(竹山) 거족으로 현령 세형(世炯)의 따님인데 총명하고 자애로워 법도를 지켰으며 시어머니와 공을 잘 받들어 일체 뜻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 공이 별세한 뒤에는 미망인으로 자처하고 명절과 세시(歲時)의 제사를 예법대로 하지 않은 일이 없었으며, 이따금 의복을 지어 제물을 차리고서 태워드렸다. 공보다 10년 뒤에 별세하였으니 무신년 2월이었으며 향년은 62세였고 정경부인에 봉해졌다. 4월에 공의 묘역에 부장(祔葬)하였다.아들이 없어 공은 중씨(仲氏)의 아들 익경(益慶)을 데려다가 후사로 삼았는데 익경은 음직으로 벼슬하여 현감이 되었다. 처음에 이광륜(李光輪)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을 낳아 집(㠎)은 무과에 급제하여 현감이고, 다음은 입(岦)과 업(嶪)이며, 뒤에 이정(李淨)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3녀를 낳아 아들은 헌(巘)이고 딸은 이도기(李道基)에게 시집갔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집은 2남 1녀를 두고, 업은 1남을 두고, 도기는 1남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공은 팔척 장신으로 용모가 준수하였으며 풍채가 엄중하고 행실이 충직하였다. 부모 형제에 대해서는 유쾌하고 부드러우며 온화하고 너그러웠는가 하면 초상 때 슬퍼하고 제사 때 정성을 드리는 것이 한결같이 진정으로부터 우러나왔으며, 종족을 잘 대우하여 모두에게 환심을 얻었다. 천성이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여 집안에 귀한 물건이 없었으며 일을 주밀하고 신중히 처리하여 하는 일마다 반드시 만전을 기하였다. 적진과 대치하고 있을 때는 언행이 여유만만하였으며, 원수의 깃발을 세우고 원수부를 열고서는 재차 진영을 총괄할 때는 사졸의 선봉이 되어 위험을 무릅썼고 호령이 엄하고 분명하였으므로 장사(將士)가 잘 따라주어 계책이 행해지고 공이 뒤따랐다. 큰 적을 섬멸하여 적은 군사로 수많은 적을 대적한 것은 옛날의 명장이라도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 황조의 상서 석성(石星)은 우리나라의 사자를 만나 공의 안부를 물으며 말하기를 “그대의 나라에 권공과 같은 사람이 몇 명만 더 있다면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하였으며, 왜인도 우리나라 사람을 보면 반드시 권 원수는 지금 어디에 계시냐고 물었으니, 중국과 오랑캐가 다같이 이처럼 탄복하였다. 군중에 있을때 손수 성지(聖旨) 및 천조의 자문과 게첩을 베끼며 말하기를 “내가 죽으면 이 의정(李議政 이항복을 말함)이 반드시 내 묘지명을 지을 것인데 그 자료는 이것이면 충분하다.” 하였다. 큰 짐을 벗은 뒤에는 고향 강화도에 집 한 칸을 짓고 만취헌(晩翠軒)이라 자호하였으니, 은연중 자신의 뜻을 가탁한 것이다.아, 흠은 공이 원수로 계실 때 막좌(幕佐)로 있었는데 우경(虞卿)의 백벽(白璧) 같은 사랑을 받았으나 중랑(中郞)의 황견(黃絹) 같은 문장이 없다. 삼가 공에 대해 일찍이 평하기를 “높은 산 깊은 숲에 용호(龍虎)가 변화무쌍하다는 말이 공에게 적격이다. 분양(汾陽)의 공을 이루고서도 중서(中書)의 벼슬을 하지 못하고 진공(晉公)의 덕을 지니고서도 녹야(綠野)의 낙을 누리지 못했으니 이 점이 한탄스럽다. 충절을 지키며 심신을 다 바쳐 한 몸에 나라의 안위를 짊어지고 단서(丹書) 철권(鐵券)에 이름이 올라 그 명성이 영원히 전해지는 점에 있어서는 충분히 저 두 공과 짝을 이룰 만하다.” 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지난 과거 임진년에 / 若昔壬辰미련한 저 생물들이 / 蠢彼介鱗흉한 마음 지니고서 / 鞠頑裒兇침략하여 미쳐 뛰니 / 奔突跳躑무찌를 자 누구인가 / 孰獮孰剔널린 것이 적들일레 / 遍我箕封우리 임금 하문하길 / 惟上曰咨아군을 뉘 지휘할꼬 / 疇董我師적임자 곧 그대로다 / 繄爾其才공은 중책 받고나서 / 公膺其重조선 팔도 총괄하니 / 八路是總꺼진 재에 불붙었네 / 再燃于灰행주에서 적을 이겨 / 熸之于幸큰 세력을 깨부수며 / 大鋤其梗직산 울산 누비었고 / 于稷于蔚좌우 수륙 거침없이 / 左水右陸목을 잡고 등때리니 / 扼項批脊우릴 감히 넘볼쏘냐 / 莫我敢越북두 다시 높아지고 / 斗極更恢황도 또한 트였으니 / 黃道褰開이는 공의 업적이요 / 伊公之烈사람 모두 동조하고 / 人謀畢凝신도 재능 인정하니 / 鬼神與能이는 공의 계책이요 / 伊公之籌밝디 밝은 위광에다 / 赫赫厥靈높디 높은 명성이란 / 巍巍其名바로 공의 경사이고 / 伊公之休까마득히 솟은 산과 / 有山嶻峛헌거롭게 놓인 비석 / 有碑嵽嵲바로 공의 무덤일세 / 伊公之藏나는 공의 막좌로서 / 公有幕佐공의 사적 선양하여 / 載揚載播무덤 앞에 새긴다오 / 銘于墓陽[주-D001] 우경(虞卿)의 …… 없다 : 상촌 자신이 권율 생전에 권율로부터 각별한 사랑과 인정을 받았으나 권율이 작고하여 그 비문을 짓는 지금 평생의 사적을 훌륭하게 묘사할 문장을 지니지 못했다는 것임. 전국 시대 변설가 우경이 미천한 신분으로 조 효성왕(趙孝成王)을 유세하자, 왕은 한번 만나보고 황금 백 근과 백벽 한 쌍을 하사하였다고 함. 황견은 색사(色絲)로 절(絶)자의 은어임. 한 나라 채옹(蔡邕)이 효녀 조아(曹娥)의 비문을 잘 지어 어떤 사람이 그 비문을 읽고 비석 뒷면에 ‘황견유부외손제구(黃絹幼婦外孫齏臼)’라고 기록해 두었는데 재사(才士)인 조조(曹操)의 주부(主簿) 양수(楊修)에 의해 그곳이 ‘절묘호사(絶妙好辭)’의 은어임이 밝혀졌음.《史記 卷76 虞卿傳》《世說新語 捷悟》[주-D002] 높은 산 …… 말 : 《五百家注昌黎文集 卷33 唐故殿中少監 馬君 墓誌》에 “그 당시에 장무왕(莊武王 성명은 마수(馬燧))을 북정(北亭)에서 만났는데 마치 높은 산 깊은 숲에 용호가 변화무쌍한 듯하였으니, 걸출한 인물이었다.” 하였음.[주-D003] 분양(汾陽)의 …… 못하고 : 분양은 당 현종(唐玄宗) 때의 명장 곽자의(郭子儀)의 봉호. 삭방절도사(蒴方節度使)로 안록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의 난리를 평정하였고 토번(吐蕃)과 회흘(回紇)의 잦은 침입을 막아 20여 년간 국가의 안위를 책임졌으며, 벼슬이 중서령(中書令)에 이르고 분양군왕(汾陽郡王)에 봉해졌다. 권율이 임진왜란 때 왜적을 물리쳐 나라를 보전한 공이 곽자의의 그것에 비해 손색이 없는데도 충분한 보상을 받지 못했다는 것임. 《新唐書 卷137 郭子儀傳》[주-D004] 진공(晉公) …… 못했으니 : 진공은 당 헌종(唐憲宗) 때의 재상 배도(裵度)의 봉호. 회주(淮州)ㆍ채주(蔡州)가 조정에 반기를 들었을 때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각군을 지휘해 진군하여 채주 자사(蔡州刺史) 오원제(吳元濟)를 사로잡아 그 공으로 진국공(晉國公)에 봉해지고 재상이 되었으나 항상 겸손하였다. 문종(文宗) 때 동도 유수(東都留守)가 되어 녹야당(綠野堂)이란 별장을 세우고 백거이(白居易)ㆍ유우석(劉禹錫) 등 명사들과 즐겁게 나날을 보냈음.《新唐書 卷173 裵度傳》
    2020-09-21 | NO.219
  • 도은전주이공재철지배효부순천박귀순기행비
    광주시 광산구 본동로 94(명도동), 평림경로당 앞2002년도은전주이공재철지배효부순천박귀순기행비
    2018-11-30 | NO.218
  • 독립투사최현숙수향여사추모비
    광주시 남구 봉선동 산 127, 문성고 입구 건너편1987년이 독립투사최현숙수향여사추모비
    2018-12-01 | NO.217
  • 동강유집 제18권 / 부록 2(附錄二)- 묘표〔墓表〕 [이민서(李敏敍)]
    동강유집 제18권 / 부록 2(附錄二)- 묘표〔墓表〕 [이민서(李敏敍)]동강(東江) 신공(申公)의 휘는 익전(翊全), 자는 여만(汝萬)이다. 계보는 고려 장절공(壯節公) 숭겸(崇謙)에게서 나왔다. 신씨(申氏)는 처음에 곡성(谷城)을 본적으로 삼았는데 장절공부터 평산(平山)으로 옮겼다.6대조 효(曉)는 우정언(右正言)을 지냈는데 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물러나 행주(幸州)에 은거하여 서호산인(西湖散人)이라 자호(自號)하였다. 고조 휘 세경(世卿)은 명망과 덕행이 있었는데 관직은 사직서 영에 그쳤다. 증조 휘 영(瑛)은 의정부 우참찬을 지냈으며 시호는 이간(夷簡)이다. 조부 휘 승서(承緖)는 문장과 덕행이 있었으나 단명하였다. 관직은 개성부 도사(開城府都事)에 그쳤는데, 훗날 공의 선친 문정공(文貞公)이 귀하게 되자 규례대로 추은(推恩)하여 증직되었다.문정공 휘 흠(欽)은 문장과 덕업으로 세상에 이름난 재상이 되어 인조(仁祖)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부인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절도사 제신(濟臣)의 따님으로, 만력(萬曆) 을사년(1605, 선조38) 8월 3일에 공을 낳았다.공은 자질이 돈후하고 기운이 순수하여 어려서부터 장난을 좋아하지 않았다. 겨우 10세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선생이 문정공의 자리 곁에 있는 공을 보고서 평범한 아이와 다르다고 칭찬하였다. 공 역시 이때부터 더욱 힘써 평소 반드시 몸가짐을 바로하고 강독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한번은 〈태극도(太極圖)〉의 두 번째 동그라미를 보고,“이것은 음(陰) 가운데 양(陽)이 있고 양 가운데 음이 있는 것이다.”하니, 문정공이 대단히 기특하게 여겼다. 조금 성장하자 여러 책을 널리 섭렵하고 문장을 지었다. 당시 세상이 갈수록 어지러워져 공은 과거를 단념하고 한가하게 지내면서 더욱 학업을 닦았다.병인년(1626, 인조4) 가을, 별시에 급제하였는데 대간이 근거 없는 논의를 가지고 논핵하여 파방(罷榜)하자 공론이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하였다.병자년(1636), 천거를 받아 참봉에 의망되었다. 예전에 공이 상소를 올려 장릉(章陵) 추숭에 대해 논한 적이 있었는데, 주상이 공의 지난 일로 진노하여 이조(吏曹)를 문책하였다. 당시 이조 판서였던 청음(淸陰) 김 문정공(金文正公)이 공에게 문재와 식견이 있다고 대답하였다. 겨울에 다시 별시에 급제하였으나 이때 병자호란이 일어나 이듬해 가을에 비로소 창방(唱榜)하여 승문원을 거쳐 추천을 받아 사국에 들어갔다.무인년(1638), 전적에 오르고 차례로 정언, 병조 좌랑, 지평에 임명되었다. 당시 큰 난리를 겪고 겨우 안정을 찾았는데 소인배가 이 틈을 타서 청음 김공을 거꾸러뜨리고자 자기편을 들지 않는 사람은 모두 축출하였다. 인사권을 쥔 자가 몰래 그 논의를 주도하였는데 그가 끌어들여 기용한 자는 대부분 교활하고 간사한 사람들이었다. 공이 처음 대각에 들어가자 제일 먼저 전조가 거리낌없이 사심을 따르는 실상을 논열하니 사론이 통쾌하게 여겼다.곧 옥당에 들어가 수찬이 되었다. 공이 병조에 있을 때 한 역졸(驛卒)에게 장(杖)을 쳤는데 오랜 뒤에 그가 병으로 죽었다. 전관(銓官)의 당파에 속한 헌관(憲官)이 중상모략할 의도로 탄핵하여 심리를 받게 되었으나 진상을 조사해 보니 사실이 아니므로 주상이 용서하라고 명하였다.기묘년(1639), 교리에 임명되어 지제교를 겸하고 헌납으로 옮겼다. 겨울에 서장관이 되어 금지한 물품을 사사로이 소지한 자를 대대적으로 수색하여 처벌하니 일행이 모두 숙연해졌다. 사행의 일에 주상의 뜻에 맞지 않는 점이 있었으므로 심리에 회부되어 도배(徒配)를 당했다가 이내 풀려났다.신사년(1641), 문학이 되었다. 겨울에 전관이 지난날의 유감 때문에 배척하여 거산도 찰방(居山道察訪)에 보임하였다. 이보다 앞서 공이 평소 이계(李烓)가 간사하다고 말하였는데, 이계가 변방 수령으로 있다가 청나라에 구속되자 우리나라의 비밀을 말해주고 살 길을 찾으려 하였다. 그래서 재신(宰臣) 5, 6명이 명나라를 보존하려는 뜻을 품고 있다고 무고하여 공의 형제와 여러 공들이 모두 심양으로 잡혀갔는데, 앞으로의 화를 예측할 수 없었으나 공은 동요하지 않고 태연자약하였다.계미년(1643) 봄, 비로소 돌아왔다. 그 뒤 계속 옥당에 있으면서 응교로 승진하였으며, 사인, 사간, 겸필선을 역임하였다.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죽자 궁료(宮僚)들과 함께 글을 올려 기년복을 입도록 청하였으며, 원묘(園墓)의 일을 처리한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랐다. 겨울에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나갔는데 공은 외직이야말로 역량을 발휘하여 공헌할 수 있다고 여겨 누락된 군액을 보충하고 포흠(逋欠)난 환곡을 채웠으며, 저축을 확대하고 궁핍한 백성을 구휼하며 유생들에게 강학을 권하니 온 경내가 잘 다스려졌다.무자년(1648), 체차되어 돌아와서 형조, 예조, 병조의 참의를 역임하였다.기축년(1649), 인조가 승하하자 시책문(諡冊文)을 쓰고 가선대부로 가자되었다. 승정원에서는 동부승지에서 도승지까지 지냈다.경인년(1650, 효종1), 부사로 청나라에 갔다. 그간 호조, 예조, 형조의 참판 및 한성부 좌윤과 우윤에 임명된 것이 두세 번에 이르기도 하였고, 금오와 총관을 겸한 것도 여러 번이었다.신묘년(1651), 《인조실록(仁祖實錄)》의 찬수에 참여하였다. 여름에 개성 유수(開城留守)에 임명되었다. 개성은 서로(西路)의 요충지에 있는데, 오랑캐 사신이 오면 요구하는 것이 다른 고을보다 갑절이나 되어 백성이 감당하지 못하였다. 공은 누적된 포흠을 탕감해 주고 밑천을 빌려주어 백성을 넉넉하게 해 주었다.돈이 쌓여 제때 유통되지 않아 백성이 몹시 고통스럽게 여기자 공은 세금으로 돈을 받아 쌓인 돈을 흩었다. 녹봉 외에는 관청의 물품을 하나도 손대지 않으니 몇 개월 만에 쌓이고 남아서 백성의 요역을 여러차례 대신하였다. 그리고 송사를 부지런히 판결하여 적체된 문서를 모두 없애니 백성이 몹시 기뻐하였다. 공이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돌아가게 되자 백성이 조정에 천금을 바치면서 유임시켜 달라고 청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비석에 사모하는 마음을 새겼다.이후 밀양 부사(密陽府使)에 임명되자 오로지 청정(淸靜)하기를 힘썼는데, 얼마 안 되어 면직되었다. 몇 년 동안 한직에서 한가롭게 지내다가 다시 개성 유수가 되었는데 공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고을 백성이 양손을 이마에 얹고서 영접하였다.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더욱 잘 다스려졌으므로 공이 개성에 선정을 베푼 것이 유독 많았다.병신년(1656), 체차되어 돌아왔다.기해년(1659), 효종대왕의 애책문(哀冊文)을 쓰고 가의대부에 올랐다. 공은 평소 병에 걸려 허약했는데, 국상을 당해 놀라고 애통해하며 소식(素食)하느라 더욱 초췌해졌다.경자년(1660, 현종1) 봄, 주상에게 환후가 있어 공은 대궐에 유숙하면서 문안하였는데, 귀가해서 감기에 걸려 2월 27일에 마침내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56세이다. 훗날 자녀들이 귀해지고 공신이 되어 여러 차례 추증을 받아 영의정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영평(永平)에 장사 지냈는데 묏자리가 좋지 않아 양주(楊州)에 임시로 매장했다가 무신년(1668) 8월 갑신일에 충주(忠州) 중방리(中房里) 유좌(酉坐)의 언덕에 안장했다.부인 조씨(趙氏)는 국구(國舅)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 창원(昌遠)의 딸이다. 14세에 공에게 시집왔는데 단정하고 순결하여 옛적 어진 여인의 지조가 있었다. 공을 섬기면서 절도를 어기지 않았고 자제들을 가르치는 데 법도가 있었다. 또 성품이 현명하고 감식안이 있어 온 집안 부녀자들이 모두 본받았다. 공이 세상을 떠나자 슬퍼하다가 몸을 상하여 신축년(1661, 현종2) 7월 24일에 뒤따라 돌아가셨다. 양주에 임시로 매장했다가 무신년(1668) 8월에 공과 합장하였다.공은 슬하에 5남 3녀를 두었다. 장남 정(晸)은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판서를 지냈다. 차남 섬(暹)은 빙고 별검을 지냈다. 삼남은 창(㫤)이다. 사남 엽(曅)은 문과에 급제하여 응교를 지냈다. 오남 앙(昂)은 요절했다. 장녀는 대사간 이혜(李嵇), 차녀는 왕자 숭선군(崇善君) 이징(李澂)에게, 삼녀는 사인(士人) 윤지빈(尹之贇)에게 출가했다. 서출 아들 하나가 있는데 온(昷)이다.정은 먼저 교리 심희세(沈煕世)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2녀를 낳았다. 장남은 징화(徵華)이다. 차남 서화(瑞華)는 현감을 지냈다. 삼남 계화(啓華)는 문과에 급제하여 교리를 지냈다. 장녀는 요절했고, 차녀는 참봉 이석형(李碩亨)에게 출가했다. 나중에 판관 허섬(許暹)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6남 3녀를 낳았다. 아들은 진화(鎭華), 상화(尙華), 석화(錫華), 택화(宅華), 종화(從華), 우화(遇華)이다. 딸은 사인 이익하(李翊夏)와 진사 홍중익(洪重益)에게 출가했고 나머지는 어리다.섬은 현감 유성오(柳誠吾)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을 낳았다. 장남은 지화(志華), 차남은 처화(處華), 삼남은 몽화(夢華)이다. 창은 시정(寺正) 이선(李䆄)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자식이 없어서 섬의 아들 처화를 후사로 삼았다. 엽은 생원 임후(任垕)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2녀를 낳았다. 아들은 채화(采華)이며, 딸은 사인 홍중성(洪重聖)에게 출가했고 나머지는 어리다. 이혜는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희유(喜濡)이다. 숭선군은 2남 4녀를 낳았다. 장남은 동평군(東平君) 이항(杭)이고 차남은 어리다. 딸은 사인 윤세정(尹世鼎), 윤정호(尹廷虎), 안수정(安壽鼎), 조명봉(趙鳴鳳)에게 출가했다. 온은 5남 1녀를 두었다.징화는 좌윤 이상(李翔)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서화는 봉사 권회(權誨)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1녀를 낳았다. 계화는 목사 이민장(李敏章)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3녀를 낳았다. 진화는 시정(寺正) 김수증(金壽增)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지화는 참의 유헌(兪櫶)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후사가 없다. 처화는 현감 송광순(宋光洵)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몽화는 유원(柳瑗)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희유는 서탄리(徐坦履)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동평군은 군수 박세장(朴世樟)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 하나를 낳았다.공은 효도와 우애가 돈독하였다. 어려서부터 항상 문정공의 곁에 있으면서 공손하고 신중하였기에 문정공이 매양 효성스럽다고 칭찬하였다. 거상할 때 곡하고 울며 전(奠)을 올렸는데 주위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형님 동양공을 섬기는 데 있어서 마치 문정공을 섬기는 것처럼 하여 매사를 반드시 여쭌 뒤에 행하였다. 막내 누이가 오랫동안 병마에 시달리자 당시 공은 이미 연로했는데도 날마다 가서 살펴보고 손수 약을 조제하였다.평소 몸가짐이 의젓하여 차근차근 법도를 따랐으며, 말을 삼가고 과묵하여 남의 과실을 말하지 않았다. 외물에 욕심이 없어 마음에 두지 않았으며, 어진 이와 간사한 이를 분별해야 할 때는 반드시 신중하였다. 관직을 맡았을 때는 조금도 물러나거나 피하지 않아 우뚝 솟은 산과 같았다. 항상 독서를 낙으로 삼아 퇴청하면 반드시 일과를 정해놓고 읽었다.평소 성품이 욕심없고 겸손하여 관직에 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항상 이르기를,“전조(銓曹)가 인사권을 쥐고 있어서 권세를 좋아하고 관작을 탐하는 세상 사람들이 몰려간다.”하였다. 비단 자신이 피했을 뿐만 아니라 자제들에게도 훈계하였으므로 공의 두 아들도 그 경계를 삼가 지켜서 전조의 관직을 받을 때마다 선친의 훈계를 이유로 사양하였으니, 여기에서 공이 스스로 지킨 원칙을 알 수 있다.공은 왕실과 인척을 맺었는데, 신묘년(1651, 효종2)의 옥사 때 화가 집안에 미치자 어느 곳이나 모두 지극히 위태로웠다. 그렇지만 공은 홀로 초연히 벗어나 사람들이 감히 터럭만큼도 공에게 조금도 누를 끼치지 못하여 마침내 스스로 명성을 지켰으니, 여기서 공의 충성과 신의가 평소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문장은 간결하고 자연히 규범에 맞아 어렸을 때 이미 문정공에게 칭찬을 받았다. 택당(澤堂) 이식(李植) 공과 낙정(樂靜) 조석윤(趙錫胤) 공이 모두 누차 칭찬하여,“관각(館閣)에 있어야 마땅하다.”하였다.세상의 대갓집 자제들을 보건대, 교만하면 낭패를 당하고 겸손하면 가문을 유지하는데 항상 그러하다. 공의 경우는 지조와 행실이 돈독하고 확고하니 원칙으로 세울 만하고, 절개를 지키고 겸손하였으니 퇴폐한 습속을 진작시킬 만하다. 문장과 행동은 대대로 지켜오던 것을 실추시키지 않았으나 지위가 그 덕에 걸맞지 않았다. 다 누리지 못한 것을 후손에게 영원히 물려줄 것이니 이 또한 도를 지녔던 옛사람에 가깝지 않겠는가.나는 공과 삼대에 걸친 우호가 있어 그런대로 공의 의리를 사모할 줄 알기에 마침내 그 유사(遺事)를 편차하여 묘표를 짓는다.정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이민서가 짓다.[주-D001] 추은(推恩) : 관원의 선조에게 관직을 추증(追贈)하는 것을 말한다. 신승서는 아들 신흠이 1품 관원이자 선조조(宣祖朝)의 원종공신(原從功臣)이라는 이유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象村稿 卷25 先府君墓表》[주-D002] 장릉(章陵) : 선조의 다섯째 아들이자 인조의 생부인 원종(元宗)과 그의 부인인 인헌왕후(仁獻王后) 구씨(具氏)의 능호(陵號)이다.[주-D003] 이계가 …… 잡혀갔는데 : 1641년(인조19) 이계가 선천 부사(宣川府使)로 있을 때 명나라 상선과 밀무역을 하다가 청나라에 발각되어 의주에 구금되었다. 청나라 장군 용골대(龍骨大)의 심문을 받고 처형을 당할 위기에 처한 그는 최명길(崔鳴吉), 이경여(李敬輿), 신익성(申翊聖), 이명한(李明漢) 등이 명나라와 밀통한다고 무고하였다.[주-D004] 경인년 …… 갔다 : 당시 저자는 의순공주(義順公主)의 호행 부사(護行副使)로 연경에 갔다. 《東江遺集 卷17 附錄1 家狀》[주-D005] 양손을 이마에 얹고서 : 두 손을 이마에 대는 것〔加額〕은 상대방에게 경의를 표하거나 축원하는 의식의 하나이다. 송나라 사마광(司馬光)이 낙양에 사는 15년 동안 입궐할 때마다 백성들이 모두 손을 이마에 얹고 공경스럽게 바라보면서 “이분이 사마 상공(司馬相公)이시다.”라고 하였다. 《宋史 卷336 司馬光列傳》[주-D006] 신묘년의 옥사 : 김자점의 옥(獄)과 조귀인(趙貴人)의 옥사(獄事)를 말한다. 이때에 사위인 숭선군(崇善君) 이징(李澂)과 조카 신면(申冕)이 연루되었으나 신익전은 화를 면하였다. 신면은 김자점의 일당으로 지목되어 국문 도중 장형을 받다가 쓰러져 죽었다. 김자점은 숭선군의 누이인 효명옹주(孝明翁主)의 시할아버지인데, 김자점의 역모사건이 일어나자 숭선군의 어머니인 조귀인(趙貴人)과 누이가 역모에 관련되었다 하여 조귀인은 사사되고 효명옹주는 서인이 되었고, 숭선군도 이에 연좌되어 강화도에 위리안치되었다.
    2023-12-04 | NO.216
  • 동강유집 제18권 / 부록 2(附錄二)- 신익전
    동강유집 제18권 / 부록 2(附錄二)유명 조선국 가의대부 예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춘추관사 오위도총부부총관 신공 묘지명 병서 〔有明朝鮮國嘉義大夫禮曹參判兼同知義禁府春秋館事五衛都摠府副摠管申公墓誌銘 幷序〕 [김만기(金萬基)]인조조(仁祖朝)에 현헌(玄軒) 신 문정공(申文貞公)은 덕업과 문장으로 한 시대의 모범이 되었는데, 그분의 두 아들이 가르침을 받고 미덕을 계승하여 가문의 명성을 떨쳤다. 막내아들 참판공은 조용하고 겸손하게 처신하여 마침내 역경에 굴하지 않고 가주(家主)를 보호하였다고 한다.참판공의 휘는 익전(翊全), 자는 여만(汝萬), 자호(自號)는 동강(東江)이다. 시조 신숭겸(申崇謙)은 고려 태조를 도와 원훈(元勳)이 되어 평산(平山)을 본적으로 하사받았다. 그 후 본조(本朝 조선)에 들어와서 휘 효(曉)가 우정언을 지내고 용퇴(勇退)하였는데 조정에서 불러도 나아가지 않았다. 휘 세경(世卿)은 사직서 영을 지냈는데, 덕행으로 기묘 제현(己卯諸賢)에게 존중을 받았다. 이 분이 휘 영(瑛)을 낳았는데 의정부 우참찬을 지냈고 시호는 이간공(夷簡公)이다. 이 분이 휘 승서(承緖)를 낳았는데 개성부 도사(開城府都事)를 지냈다. 이 분이 휘 흠(欽)을 낳았는데 영의정을 지냈으니 바로 현헌 문정공이다. 부인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청강(淸江) 선생 제신(濟臣)의 따님인데, 만력(萬曆) 을사년(1605, 선조38)에 공을 낳았다.공은 어려서부터 온순하고 삼가서 장난을 좋아하지 않았다. 학문을 배우자 문장에 대한 이해력이 날로 진전되어 겨우 10세를 넘겼을 때 주자(周子 주돈이(周敦頤))의 〈태극도(太極圖)〉를 보고 두 번째 동그라미를 가리키며,“이것은 양(陽) 가운데 음(陰)이 있고 음 가운데 양이 있는 것이다.”하니, 문정공이 매우 기특하게 여겼다. 약관의 나이에 많은 책을 널리 섭렵하여 글재주가 뛰어났다.병인년(1626), 별시에 급제했는데 창방(唱榜)하기 전에 헌관(憲官)이 근거 없는 논의를 가지고 파방(罷榜)하니 사람들이 모두 공에 대해 탄식하고 애석하게 여겼다. 그러나 공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오직 몸을 삼가고 학문을 닦는데 더욱 힘썼다.병자년(1636), 조정의 신하들에게 어진 선비를 천거하도록 명하였는데 천거하는 문서에 공의 이름이 올랐다. 당시 청음(淸陰) 김 문정공(金文正公)이 인사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참봉의 첫 번째 후보자로 의망하였다. 그런데 주상께서 공이 예전 성균관에 있을 때 장릉(章陵)을 추숭(追崇)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상소하였다는 이유로 진노하여 김공을 문책하자, 김공은 문재(文才)와 식견으로는 후배들 중에서 얻기 어려운 인재라고 대답하였다.이해 다시 과거에 급제하고 이듬해 승문원에 보임되었으며, 곧 사국에 들어가 규례대로 봉교로 전임되고 성균관 전적으로 승진하였다. 사간원 정언, 병조 좌랑에 누차 임명되고, 얼마 후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다.이때 청음 김공이 간신들의 시기를 받아 심한 중상모략을 당하였다. 인사권을 장악한 자가 그 논의를 주도하고 기회를 틈타 독단하여 조금이라도 정도를 지키는 선비는 모두 배척하고 자기편 사람을 기용하는 데 혈안이 되어 친척조차 버젓이 피혐(避嫌)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 기세에 눌려 감히 말하지 못했지만 공은 사은숙배하는 날에 즉시 전관(銓官)이 거리낌없이 사정(私情)을 따르는 실상을 탄핵하자 주상이 가납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인사를 담당하는 자리가 점점 깨끗해지고 공론이 다시 시행되었으니 공은 참으로 군자와 소인이 나아가고 물러나는 데 기여한 것이다. 체차되어 전적에 임명되었다가 옥당에 들어가 부수찬이 되었다.공이 병조에 있을 때 한 역졸에게 장(杖)을 쳤는데 오랜 뒤에 그가 다른 병으로 죽었다. 이때 전관에게 붙은 헌관이 공에게 앙심을 품고 중상하였는데 심리에 부쳐 진상을 조사하자 결백이 밝혀져 주상이 온전히 석방하라고 특명을 내렸다. 패초에 나아가지 않아 파직되었다가 서용되어 직강에 임명되었다. 교리, 헌납, 수찬, 부교리를 두루 거치고 지제교(知製敎)를 겸하였다.서장관으로 심양(瀋陽)에 갔는데 당시는 겨우 난리를 겪은 뒤라 국법이 무너져 사행을 수행하는 하례(下隷)들이 공공연히 금지 물품을 소지하여 왕왕 큰소리로 다투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자 공이 개인 소지품을 샅샅이 뒤져 범법자를 다스렸는데, 오랑캐 정명수(鄭命壽)와 사이가 가까운 역관이 자기 죄를 알고 노관(虜館)으로 달아나 나오지 않았다. 공이 마침내 결박해 와서 처벌하니 일행이 두려워하며 숙연해졌다. 정명수가 깊은 원한을 품었지만 공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복명하고 나서 부사(副使)와 함께 심리를 받고 평구역(平丘驛)에 유배되었다. 이는 주상이 명을 내려 주선하게 한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고, 세자가 돌아가 주상을 뵙는 것을 허락받았는데 사신이 왕명을 따르지 않고 제멋대로 청했기 때문이라고 주상이 의심해서였다. 세자가 서울에 들어오자 즉시 풀어주라고 명하였다. 서용되어 교리에 임명되고, 헌납을 거쳐 시강원 문학에 임명되었다.심양에 들어가게 되자, 조정에서 공이 정명수와 원한을 맺었다는 이유로 체차하도록 명하였다. 평소 공을 시기하던 자가 갑자기 이조에 들어갔는데 공을 배척하여 거산도 찰방(居山道察訪)으로 삼았지만 공은 조금도 표정이나 말로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 임지로 가서 못가에 작은 집을 짓고 그곳에 거처하면서 글읽기를 그치지 않았다. 때때로 혼자 바닷가나 산골짜기에 가서 노래하고 읊조리며 스스로 즐겼다.임오년(1642), 청나라에 있던 적신(賊臣) 이계(李烓)가 공의 형제와 두세 재신(宰臣)이 명나라를 부지하려는 뜻을 품었다고 무고하였다. 그리하여 모두 심양관(瀋陽館)에 구류되어 앞일을 예측할 수 없었는데, 공은 동요하지 않고 태연자약하였다. 다행히 세자가 구명해 준 덕분에 석방되었다. 이에 앞서 공이 이계와 시험장에 들어갔다가 그의 부정행위를 발견하고는 그와 말을 섞지 않고 나와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이 작자는 장차 못할 짓이 없을 것이다.”하니, 이계가 이 말을 듣고 앙심을 품었다. 공이 명을 받들고 심양에 갈 때 기자묘(箕子廟)에 들러 제사 지냈는데 강개한 말을 많이 하였다. 이계가 마침내 오랑캐에게 고자질하여 사지(死地)에 빠뜨리려 한 것이니, 사람들이 공의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다시 옥당에 들어갔다가 천거를 받아 의정부 사인에 임명되고, 부응교, 사간으로 누차 옮기고 시강원 필선을 겸하였으며, 다시 사인에 임명되었다. 소현세자가 죽자 춘방의 동료들과 글을 올려 기년복을 입도록 청하였다. 묘소도감 도청(墓所都監都廳)으로 묘소의 일을 감독하고 일을 마치자 통정대부로 가자되었다.광주 목사(光州牧使)로 나가서는 외로운 충심으로 분발하여 누락된 군오(軍伍)를 보충하고 포흠(逋欠)난 환곡을 해결하였으며, 불필요한 비용을 절감하여 백성들의 요역을 도와주었다. 그리고 학교를 정비하고 유생들을 시험하니 고을 사람들이 추모하여 비석을 세워 덕을 칭송하였다. 임기가 만료되자 동부승지에 임명되고 체차되어 형조 참의에 임명되었으며 예조, 병조, 호조로 전임되었다. 중간에 다시 승정원에 들어가 차례대로 승진하여 우승지로 옮겼다.인조가 승하하자 시책문(諡冊文)을 써서 올려 가자를 받고 좌승지를 거쳐 도승지에 올랐다. 이때부터 기해년(1659, 효종10)까지 차례로 예조, 병조, 형조 등의 참판 및 한성부의 당상에 임명된 것이 많게는 서너 번이었고 승정원 도승지에 임명된 것도 세 번이었으며, 조정에 들어와서 도총부와 금오의 직임을 겸임한 것도 여러 번이었다.경인년(1650, 효종1), 부사(副使)로 연경에 갔다. 돌아온 뒤에 동지춘추관사를 겸하여 《인조실록》의 찬수에 참여하였다. 우윤을 지낼 적에 권세 있는 집안의 종이 법을 어기고는 숨어서 나오지 않는 일이 일어났는데, 공이 나졸을 풀어서 잡아 왔다. 그런데 중재하는 자가 공이 왕실과 인척이라는 혐의를 들어 위태로운 말로 충동질하였다. 공은 분개하여,“법관이 범법자를 다스리는데 어찌 혐의를 논하는가.”하고, 마침내 법대로 논죄하였다.송도 유수(松都留守)로 나갔는데, 백성이 청나라 사신의 요구로 고생하여 몹시 피폐한 데다 많은 폐단이 잇따라 생겼다. 공은 가장 먼저 노인들을 불러 고충을 물은 다음 완화하거나 없앴다. 그리고 호조의 동과 철을 지급해달라고 조정에 요청하여 시전 상인들의 밑천으로 빌려주고 이자를 받아 비용을 충당하니,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모두 도움이 되었다.개성부는 공납이 과중했는데 요행으로 면제받는 자가 많았다. 그러자 공이 모두 적발하여 균등하게 부과하였다. 마침 조정에서 화폐 사용을 돌연 폐지하자 개성부로 돈이 모이기만 하고 쓸 곳이 없어 많은 상인들이 생업을 잃었다. 공이 조와 쌀을 내는 자에게 돈으로 대납하게 하니 백성이 대단히 기뻐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훗날까지 바꾸지 않고 법으로 삼고 있다.예로부터 고을 관원의 사적인 비용이 공납에서 지출되었는데, 공이 말하기를,“이 법이 어찌 사적인 수요를 위해 만든 제도이겠는가.”하고, 털끝만큼도 사적인 용도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자 창고가 가득차서 백성의 공납을 여러 번 감면해주었는데도 관청의 비용은 풍족하였다. 풍속이 이익을 다투고 소송을 좋아하여 고을 관원이 시비곡직을 혼동하고 송사가 적체되어 비방을 초래하였다. 그런데 공이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 소송 문서가 씻은 듯 사라지고 모두 실정에 맞으니 백성들이 칭송하여,“합하께서 재직하시는 동안에는 이치에 닿지 않는 일을 요구할 수 없다.”하였다. 관직을 그만두고 돌아가게 되자 온 성의 백성이 수레를 붙잡고 차마 놓지 못하였으며, 비석에 새겨 떠난 분에 대한 그리움을 담았다.다시 힘써 외직을 구하여 밀양 부사(密陽府使)가 되었는데, 다스림이 청정하여 어지럽지 않았다. 날마다 고을의 자제들을 불러서 직접 가르치고, 읍내의 충신, 효자, 열녀들의 사적을 찾아서 새로 정표하고 그 후손들에게 양식을 지급하여 고을 백성을 진작하고 권면하였다. 그런데 관찰사가 친척이라는 이유로 피혐하여 체차되었다.을미년(1655), 다시 개성 유수로 부임하자 공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모두 환영하였고, 공 또한 백성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선정이 더욱 현저하였는데 백성들이 지금까지 잊지 못하고 있다. 공의 자손이 개성부를 지나게 되면 백성들이 너도나도 만나보러 와서는 공이 재직할 때의 일을 말하는데 간혹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이듬해에 체차되어 돌아갔다. 효종이 승하하자 명을 받들어 애책문(哀冊文)을 쓰고 가의대부의 품계에 올랐다.공은 몇 년 전부터 이미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는데, 경자년(1660, 현종1) 봄에 주상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듣고 병든 몸을 이끌고 대궐에 나아가 유숙하면서 하루에 세 번 문안하는 반열에 나아갔다. 이때부터 몸이 더욱 좋지 않았는데, 얼마 안 되어 감기에 걸려 2월 27일 자택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56세였다. 주상이 예법대로 조문하고 치제하며 부의하라고 명하였다. 처음에는 영평(永平) 거사동(居士洞)에 장사 지냈는데 묏자리가 좋지 않아 양주(楊州) 덕연(德淵) 가로 이장하였다가 무신년(1668) 8월에 충주(忠州) 관청 서쪽 앙암(仰巖) 중방동(中房洞) 묘향(卯向)에 안장하였다.공은 성품과 행실이 순수하고 돈독하였다. 문정공을 섬기면서 온화하고 기쁜 안색으로 뜻을 다르니, 문정공이 매양 칭찬하여,“우리 집안의 효자이다.”하였다. 거상할 때 몸이 수척해지자 보는 사람들이 측은하게 여겼지만 그럴수록 더욱 게을리 않고 예법을 지켰다. 제사 때는 마치 돌아가신 분을 뵐 듯이 오열하였으며, 간혹 지방으로 가서 제사에 참여하지 못하면 영위(靈位)를 설치하여 곡하였는데 늙어서까지 처음처럼 하였다. 효종의 대상(大喪) 때는 이미 연로하고 병들었는데도 6일 동안 죽을 먹고 몇 달 동안 소식(素食)을 했으며 선왕에 대해 언급하면 반드시 흐느끼며 눈물을 떨구었다.문정공을 섬기듯이 한결같이 형님 동양공(東陽公)을 섬겼는데, 일이 있으면 반드시 여쭌 뒤에 하였으며 날마다 찾아 뵙고 유시(酉時)가 지난 뒤에 물러나왔다. 동양공의 상을 당하자 빈소 곁에서 거상하고 졸곡 뒤에야 돌아왔다.막내 누이가 중병에 걸려 일 년 내내 투병할 때는 날마다 몸소 보살피며 직접 약을 조제하였다. 어떤 사람이 노쇠한 나이에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만류하자 공이 말하기를,“내 형제자매가 여덟 명이었는데 누이만 살아 있다. 내가 어찌 차마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였다.공은 가정에서 훈도를 받아 평소 행동이 몹시 조심스러웠다. 예전 옥당에 입직하였을 때 설문청(薛文淸 설선(薛瑄))의 《독서록(讀書錄)》을 읽고 깨달음을 얻어 이때부터 선유(先儒)들의 성리학 서적들을 모두 가져다가 집중하여 사색하였다. 특히 《주역》 읽기를 좋아하여,“이것보다 즐거운 것은 없다.”하였다. 독서하는 데 날마다 일정한 분량을 정해 두어 외물이 마음을 어지럽히지 못하게 하니, 집에 양식이 떨어져도 몰랐다. 낙정(樂靜) 조석윤(趙錫胤) 공이 항상 공경하며,“침착하고 고요하며 선을 좋아하기로는 아무 공만한 사람이 없다.”하였다. 온화하고 자애로와 남을 대할 적에는 그저 상대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염려하여 잘못을 저지른 자제가 있어도 꾸짖지 않고 차근차근 타일렀다. 그러나 벼슬하여 직무를 맡았을 때는 의지가 확고하여 꺾을 수 없었다.어린 나이에 글을 지어 문정공의 칭찬을 받았는데 노년에도 더욱 부지런히 힘써 시는 당(唐)나라 두보(杜甫)를 배우고 문은 반고(班固)와 한유(韓愈)를 본받았으며 간간이 명(明)나라 대가들의 글을 참고하였는데, 오랫동안 힘을 기울여 조예가 깊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 수창하거나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문장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다만 택당(澤堂) 이식(李植)과 상국(相國) 홍서봉(洪瑞鳳)은 대단히 칭찬하였는데, 이공이 한번은 동양공(東陽公)에게 말하기를,“아우님의 문장으로 말하자면 기력은 비록 공보다 조금 못하지만 전아하기로는 더 나은 듯하오.”하였다. 서법도 단정하고 굳세어 옛사람의 필법을 터득하였는데, 조정의 전례에 관련된 책문과 이름난 인물들의 묘도문자는 대부분 공이 썼다.부인 양주 조씨(楊州趙氏)는 국구(國舅)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 창원(昌遠)의 따님이자 지돈녕부사 소민공(昭敏公) 존성(存性)의 손녀이다. 단정하고 정숙하여 어려서부터 법도를 따르니 소민공이 어질다고 칭찬하며 다른 손자들보다 특별히 사랑하였다. 공의 집안에 시집와서는 정성을 다하고 예의를 갖추어 시부모를 받드니, 문정공이 항상 훌륭한 며느리라고 칭찬하였다.공이 조정에 벼슬하여 현달한 뒤에도 더욱 청렴하고 검약하여 가산을 불리는 일을 하지 않았다. 부인은 가난한 상황에서 힘써 가정을 꾸려나갔는데 살림에 법도가 있어 공으로 하여금 가정 형편이 어떠한지 모르게 하였다. 성품이 검소하여 화려하고 사치스런 물건을 몸에 걸치지 않았으며 사양하고 받는 일을 조심하여 터럭만큼도 구차하지 않았다. 감식안이 있고 사리에 통달하여 공이 미덕을 이루도록 도운 일이 많았다.자의대비(慈懿大妃)가 중전이 되고 부인의 딸이 숭선군(崇善君) 이징(李澂)에게 시집가자 부인은 더욱 두려워하고 조심하여 극히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알아서 잘 처리하였다. 미망인이 되어서는 졸곡한 뒤에도 묽은 죽만 들었으며, 아침저녁으로 올리는 제전(祭奠)은 반드시 손수 차렸다. 슬픔으로 몸을 상하고 고생하다 병이 나서 공이 돌아가신 이듬해 7월에 돌아가시니 향년 55세이다. 공의 무덤에 부장(祔葬)하였다.슬하에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정(晸)은 문과에 급제하고 병조 참판을 지냈다. 섬(暹)은 진사에 급제하고 빙고 별검을 지냈다. 창(㫤)은 요절했다. 엽(曅)은 진사시에 장원급제했다. 앙(昂)은 장가들기 전에 요절했다. 딸 셋을 두었는데, 장녀는 대사간 이혜(李嵇)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바로 숭선군의 부인이며, 셋째 딸은 선비 윤지빈(尹之贇)에게 출가했다.정은 먼저 교리 심희세(沈煕世)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셋을 두었는데 징화(徵華), 서화(瑞華), 진사 계화(啓華)이다. 딸은 사인(士人) 이석형(李碩亨)에게 출가했다. 나중에 판관 허섬(許暹)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4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진화(鎭華)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섬은 현감 유성오(柳誠吾)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아들 셋을 두었는데 지화(志華)는 요절했고, 다음은 처화(處華), 몽화(夢華)이다. 창은 시정(寺正) 이선(李䆄)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자식이 없어서 처화를 후사로 삼았다. 엽은 생원 임후(任垕)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이혜는 희유(喜濡)라는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요절했다. 숭선군은 2남 4녀를 두었다. 아들은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이고 딸은 선비 윤세정(尹世鼎)에게 시집갔으며 나머지는 어리다.나는 예전에 선배와 어른들에게 다음과 같이 들었다. 공은 문정공을 아버지로, 동양위를 형으로 두었으니 그 가문이 든든한 배경이 될 만하였고, 훌륭한 재주도 남보다 뛰어났다. 하지만 도리어 겸손하여 이런 배경을 믿지 않았기에 과시하는 자들에게 조롱과 비웃음을 사기까지 했지만 이 역시 개의치 않았다. 권세를 추종하고 출세하는 데 안달하는 사람을 보면 반드시 이마를 찡그렸으며, 요직을 맡더라도 항상 핑계를 대고 물러날 생각만 하였다.인조 말엽에 조정의 논의가 갈라지자 더욱 조정에 있고 싶지 않아 외직을 구하여 광주 목사에 보임되었는데, 〈도연명의 귀거래사에 차운하다〔次陶淵明歸去來辭〕〉라는 글에가장 좋은 것은 세상을 피하는 것이고 / 太上避世그 다음은 땅을 피하는 것이다 / 其次避地하였으니, 그 말에 깊은 뜻이 있었다. 광주에서 돌아온 뒤에는 세상이 더욱 험악해지고 공의 처지가 더욱 위태로워 말하기 어려운 일이 있었다. 이에 두문불출하여 사람들과 접촉하는 일이 드물었으며 항상 괄낭지계(括囊之戒)를 지켰다.신묘년(1651, 효종2), 역적의 옥사가 일어나자 공의 일가에게까지 화가 미쳤지만 오직 공은 평소 사람들에게 충성스럽고 미덥기로 인정을 받았으므로 초연히 비방에서 벗어나 아름다운 명성을 보존할 수 있었다. 상국 정태화(鄭太和)가 지은 공의 만시(輓詩)에위태로운 처지에서 몸과 명예를 보존하고 / 身名自保危疑地공손과 신중이 결국 복록의 바탕이 되었네 / 恭謹終爲福祿基하였는데, 사람들이 공에 대해 잘 말하였다고 하였다.옛날 우리 선조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이 적소(謫所)에 있는 문정공을 방문하였을 때 공이 곁에서 모시고 있었는데, 열 살의 나이에 어른처럼 응대하자 우리 문원공께서 감탄하고 기특하게 여겨 훗날 큰 인물이 되리라 기대하였다. 우리 종대부(從大父)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이 효묘(孝廟 효종) 초에 어떤 사람의 말 때문에 조정을 떠나게 되었는데, 태학의 유생들이 주상께 글을 올려 만류하도록 청하였다. 그때 생각이 다른 사람이 있었는데, 공이 말하기를,“선군께서 예전에 ‘사강(士剛 김집)은 군자다운 사람이다’라고 하셨다. 군자다운 사람을 만류하도록 청하는 일이 옳지 않겠는가.”하고, 자제들에게 가서 참여하라고 명하였다.나는 공의 행실을 행실을 흠모하였으며 또 소싯적에 공에게 한마디 칭찬을 받은 적이 있다. 지금 공의 아들이 와서 묘지명을 청하는데 감히 글재주가 없다는 이유로 사양할 수 있겠는가. 마침내 선배들에게 들은 것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명(銘)을 짓는다.몸은 옷을 이기지 못하는 듯 유약하였고 / 退然身若不勝衣말은 입에서 나오지 않는 듯 어눌하였네 / 吶吶然言若不出諸口옛날에 그런 사람 있었는데 / 蓋古有其人공이 실로 옛사람 벗하였네 / 而公實尙友저 아첨하는 소인들은 / 彼夸毗子앞다투어 너도나도 달리지만 / 爭騖竝驟수레바퀴 부서진 적 없다가 / 曾不敝輪곧바로 기울어 전복된다네 / 旋卽傾踣공은 겸손한 덕에 힘써 / 公懋謙德홀로 하늘의 도움을 받아 / 獨受其祐명성 지켜 생을 마치고 / 旣克令終자손도 많이 두었다네 / 而孫子多有내가 공의 묘지명을 써서 / 我銘公之藏후세에 알리노라 / 維以詔後보국숭록대부 영돈녕부사 광성부원군 겸 오위도총부도총관 김만기가 짓다.[주-D001] 두 아들 : 장남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과 차남 신익전(申翊全)을 가리킨다.[주-D002] 기묘 제현(己卯諸賢) : 기묘사화 때 희생을 당한 조광조 등 신진 사류를 가리킨다. 1519년(중종14)에 유교의 왕도 정치를 실현하려다 남곤(南袞), 심정(沈貞)을 위시한 훈구 대신 일파에 의해 뜻이 좌절되어 참화를 입은 조광조(趙光祖), 김정(金淨), 김식(金湜) 등 신진 학자이자 정치가를 통틀어 기묘명현(己卯名賢)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우리나라 정통 성리학의 계승자로 일컬어지고 있다.[주-D003] 장릉(章陵) : 선조의 다섯째 아들이자 인조의 생부인 원종(元宗)과 그의 부인인 인헌왕후(仁獻王后)의 능호(陵號)이다.[주-D004] 오랑캐 정명수(鄭命壽) : 오랑캐에게 붙어 앞잡이 노릇을 한 정명수(鄭命壽, ?~1653)를 폄하하여 ‘정로(鄭虜)’라고 한 것이다. 평안도 은산(殷山)에서 태어난 천인 출신이다.[주-D005] 노관(虜館) : 청나라 사신이 머무는 객관(客館)을 가리킨다.[주-D006] 임오년 …… 무고하였다 : 1641년(인조19) 이계가 선천 부사(宣川府使)로 있을 때 명나라 상선과 밀무역을 하다가 청나라에 발각되어 의주에 구금되었다. 청나라 장군 용골대(龍骨大)의 심문을 받고 처형을 당할 위기에 처한 그는 최명길(崔鳴吉), 이경여(李敬輿), 신익성(申翊聖), 이명한(李明漢) 등이 명나라와 밀통한다고 무고하였다.[주-D007] 경인년 …… 갔다 : 당시 저자는 의순공주(義順公主)의 호행 부사(護行副使)로 연경에 갔다. 《東江遺集 卷17 附錄1 家狀》[주-D008] 왕실과 인척이라는 혐의 : 신익전의 둘째 딸이 왕자 숭선군(崇善君) 이징(李澂)에게 출가했다.[주-D009] 가장 …… 것이다 : 본서의 권1에 실려 있는 〈도연명의 귀거래사에 차운하다〉에는 “최선은 세상을 피하는 것이요, 차선은 땅을 피하는 것이라〔太上避世次避地〕”로 되어 있다. 《東江遺集 卷1 次陶淵明歸去來辭》[주-D010] 괄낭지계(括囊之戒) : 괄낭의 경계라는 뜻으로, 괄낭은 주머니를 묶는 것처럼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주역》 〈건괘(乾卦) 육사(六四)〉에 “주머니를 묶듯이 하면 허물도 없으며 칭찬도 없으리라.〔括囊, 无咎无譽.〕” 하였다.[주-D011] 역적의 옥사 : 김자점의 옥(獄)과 조귀인(趙貴人)의 옥사(獄事)를 말한다. 이때에 사위인 숭선군(崇善君) 이징(李澂)과 조카 신면(申冕)이 연루되었으나 신익전은 화를 면하였다. 신면은 김자점의 일당으로 지목되어 국문 도중 장형을 받다가 쓰러져 죽었다. 김자점은 숭선군의 누이인 효명옹주(孝明翁主)의 시할아버지인데, 김자점의 역모사건이 일어나자 숭선군의 어머니인 조귀인(趙貴人)과 누이가 역모에 관련되었다 하여 조귀인은 사사되고 효명옹주는 서인이 되었고, 숭선군도 이에 연좌되어 강화도에 위리안치되었다.
    2023-12-04 | NO.215
  • 동계집 제4권 / 묘갈(墓碣); 임훈
    갈천(葛川) 임 선생(林先生) 갈명(碣銘)생의 휘는 훈(薰)이요 자는 중성(仲成)이다. 그 선대는 은진현(恩津縣) 사람이다. 자이당(自怡堂)이라고 자호하였는데, 사람들은 갈천선생(葛川先生)이라고 불렀다. 고사옹(枯査翁)은 최후에 스스로 고친 호이다.고려조 태상박사(太常博士) 휘 성근(成槿)의 후예로, 우리 국조(國朝)에 들어와서 휘 정(梃)은 벼슬이 군사(郡事)에 이르렀으며, 아들 식(湜)은 별장(別將)을 지냈는데 함양(咸陽)으로 옮겨 가서 살았다. 그 아들 휘 천년(千年)은 현감을 지냈고 다시 안음현(安陰縣)으로 옮겼는데 바로 선생의 증왕부(曾王父)이다. 조(祖) 휘 자휴(自庥)는 사용(司勇)을 지냈다. 고(考) 휘 득번(得蕃)은 진사를 지냈는데, 성품이 단정하고 자상하였으며 지조가 고결하여 시골에서 생활하면서 문달(聞達)을 구하지 않았다. 진주 강씨(晉州姜氏)에게 장가들었는데, 구인재(求仁齋) 정우(貞祐)의 후손이자 참봉 수경(壽卿)의 딸이다. 홍치(弘治) 경신년(1500, 연산군6) 7월 15일에 선생을 낳았다.선생은 자질이 순수하고 아름다웠으며 착한 행실과 뛰어난 재능이 일찍부터 이루어졌다. 나이 5, 6세 때 큰형이 돌림병을 앓아 진사공(進士公)이 이웃집으로 피해 갔는데 선생이 남아서 병을 구완하기를 원하였다. 그리하여 밤이면 들어가서 간호를 하고 낮이면 반드시 밖에서 기다리는 등 진사공이 피접(避接)한 곳에는 아예 발길을 돌리지 않고 오직 안부만을 살폈다. 그의 타고난 효성과 우애가 이러하였다. 조금 자라서는 글을 읽을 줄을 알았고 외울 줄도 알았다. 15, 6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글짓기를 공부하게 되었는데 표현하는 언사(言辭)에 이미 문장의 체계가 있었다. 병술년(1526, 중종21) 겨울에 모친상을 당하여 묘소 아래에서 여막살이를 하면서 3년 동안 수질(首絰)과 요대를 벗지 않았으며 부친의 안부를 살피는 일 말고는 발길이 여막에서 떠나지 않았다. 인정과 예문을 다 갖추었으며 정성과 효도도 흠잡을 데가 없었다.가정(嘉靖) 경자년(1540)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나서 부친을 위하여 누차 성균관(成均館)에 몸담았다. 비록 많은 사람들 가운데 있더라도 항상 깨끗하게 자신을 지키면서 구차하게 영합하지 않았으며, 또한 모난 행동을 하지 않았다. 성균관 안의 유생들이 모두 선생에게 도가 있는 줄을 알고 선생과 가까이할 수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간간이 부박한 무리들이 자신들과 다른 것을 꺼려하여 교묘하게 그 하자를 찾고자 하였으나 끝내 한 점도 찾아내지를 못하였다. 이는 대체로 그 후한 덕과 훌륭한 행실로 파고들 하자가 본디 없었던 것이지 꾸미거나 의도적으로 바로잡아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계축년(1553, 명종8)에 관천(館薦)으로 사직서 참봉(社稷署參奉)에 제수되니, 선생이 어버이의 권고로 하는 수 없이 관직에 나아갔다. 이듬해에 집경전 참봉(集慶殿參奉)으로 옮기고 또 명년에 제용감 참봉(濟用監參奉)으로 옮겼으나 선생이 어버이가 늙었다는 이유로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가을에 다시 전생서 참봉(典牲署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얼마 후에 사직하고 돌아왔다. 이때 진사공의 나이가 이미 80세였다.선생이 아우 참봉공(參奉公)과 함께 좌우에서 모시면서 온갖 가지로 봉양을 하였다. 온화한 기상과 좋은 얼굴로 이목(耳目)과 심지(心志)를 즐겁게 해 드리는데 최선을 다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한갓 음식만 봉양할 뿐이 아니었는데, 신유년(1561) 여름에 진사공이 끝내 별세하고 말았다. 선생의 형제가 반년 동안 시탕(侍湯)을 하면서 슬픈 마음으로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막상 유명을 달리하고 나자 며칠 동안 물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아 하마터면 위태로울 뻔하였다가 다시 소생하였다. 장사를 지낸 후 묘소 아래에 여막을 짓고 하루에 세 차례 상식(上食)을 하고 곡(哭)은 반드시 애절함을 다하였다. 당시에 선생의 나이가 60세가 넘었지만 꿇어앉아서 절하는 고생을 그만두지 않았다. 비록 심한 추위나 무더운 여름에도 상복(喪服)을 항상 몸에 입고 있었으니, 비록 옛날에 거상(居喪)을 잘한 자라 하더라도 어찌 이보다 더할 수 있겠는가. 상복을 장차 벗으려 할 때에 현감(縣監)이 선생 형제의 효행에 대하여 고을의 여론을 들어 본도(本道)에 보고하고, 본도에서 고을의 체문(帖文)을 들어서 치계(馳啓)하니, 이듬해인 갑자년에 상이 선생 형제에게 정려문(旌閭門)을 내리도록 명하였다.그 뒤에 상이 경전(經典)에 밝고 행실이 잘 닦인 사람을 선발하여 6품 관직을 초급하여 수여하라고 명하니, 대신이 그 선발을 주관하여 여섯 사람을 얻었는데 선생이 그중 한 사람이었다. 병인년(1566)에 언양 현감(彦陽縣監)을 제수하니, 선생이 은명(恩命)에 감격하여 즉시 사은(謝恩)하러 나섰으나 가을 더위가 극성을 부려 길에서 병이 나는 바람에 가지 못하였다. 그 사실이 알려지자, 상이 내의(內醫)에게 명하여 약을 지어서 내려 보내도록 하고 또 본도(本道)로 하여금 양식을 지급하도록 하였으며, 또 서늘한 가을이 되거든 올라오라고 명하였다. 9월에 전지(傳旨)를 내려서 여섯 사람 모두 역마를 타고 대궐로 입궐하게 하였다. 상이 사정전(思政殿)에서 인견하고 정치하는 도리에 대하여 물으니, 선생이 아뢰기를, “임금이 정치하는 방법은 자신을 수양하는 것보다 우선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대학(大學)》에서는 이것으로 팔조목(八條目)의 근본을 삼고, 《중용(中庸)》에서는 이것으로 구경(九經)의 근본을 삼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수양하는 방법에도 그 근본이 있으니, 진실로 그 근본을 알지 못하면 학문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상께서 전적으로 자신을 수양하는 도리에 힘쓰시어 끊임없이 노력하신다면, 나라를 다스리는 도와 학문을 하는 방법을 다른 데서 찾으려고 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물러난 뒤에 상이 아뢴 말을 직접 써서 올리라고 명하였는데, 그것은 대개 정무를 마치고 난 한가한 시간에 보기 위한 것이었다. 상이 호초(胡椒)를 하사하라고 명하고 또 경회문(慶會門)에서 술을 내렸다.부임하고 나서 고을의 잔약함과 백성들의 폐해를 깊이 우려하던 차에 융경(隆慶) 원년(1567)에 재이(災異)에 관한 구언(求言)으로 인하여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삼가 국가의 형편을 보건대 말씀드릴 것이 많습니다. 세자(世子)의 자리를 오랫동안 비워 두어서는 안 되는데 세자를 아직 정하지도 못하였고, 조정(朝廷)을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되는데 탐오하는 풍토가 아직 바로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학교의 교육이 황폐해지고 국경의 방어가 소홀해지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염려스러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대신(大臣)이 이미 아뢰었고 시종신(侍從臣)이 이미 진달하여 성상께서도 응당 익히 생각하셨을 것이니 소원하고 보잘것없는 신까지 굳이 성상께 아뢸 필요가 없겠습니다마는, 다만 보잘것없는 신이 보고 들었던 것 가운데 잔약한 고을의 절실한 폐단을 우선 아뢰겠습니다.” 하였다. 이어 여섯 가지 폐단을 들어서 제시하고 맨 끝에 폐단을 구제하기 위한 방안에 대하여 언급한 다음 아뢰기를, “신이 진달한 여섯 가지 폐단을 원컨대 성상께서는 유념하시고 대신과 의논하여 잔약한 고을의 백성으로 하여금 죽어 가는 자를 살려 주고 뼈만 남은 자에게 살이 돋게 하신다면 보잘것없는 신은 분수에 맞게 마땅히 시골로 물러가서 평소에 간직했던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을 조금은 풀 수가 있을 것이니, 이 역시 세상을 헛되이 산 것은 되지 않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성상께서 특별한 관심 없이 의례적으로 해조에 내리신다면, 해조에서는 필시 국가의 상전(常典)을 한 고을만을 위하여 가볍게 고치는 것은 불가한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되면 잔약한 고을이 더 이상 소생할 리가 만무하니, 구제할 수 없는 상황에 도달한 뒤에는 아무리 구제하고 싶어도 어찌할 수가 없게 됩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큰 나무가 넘어질 적에 뿌리가 먼저 뽑혀 넘어진다.’ 하였는데, 신은 아마도 뿌리가 뽑혀 넘어지게 되는 것이 먼저 언양(彦陽)으로부터 시작될까 두렵습니다.” 하였다.상소가 들어가자, 상이 해조와 대신에게 명하여 일일이 거행하게 하고 또 본도 감사에게 전교하기를, “지금 언양 현감 임훈(林薰)이 올린 상소의 내용을 보건대, 자신이 직접 백성을 다스리는 관직에 있으면서 백성들의 곤궁한 생활상을 목격하고 조목조목 폐단을 진달하였으니,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경은 이 뜻을 본현(本縣)에 전달하도록 하라.” 하였다. 얼마 후에 선생은 사직하고 돌아왔고, 그 뒤에 대신이 의논하여 네 가지의 폐단을 혁파하였다.선묘(宣廟) 기사년(1569, 선조2) 겨울에 군자감 주부를 제수하였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얼마 후에 비안 현감(比安縣監)에 보임되었는데, 하직하던 날에 상이 편전(便殿)에서 인견하고 묻기를, “수령칠사(守令七事)를 외우게 하는 것은 규례에 불과하다. 그대가 학행(學行)이 있다고 들었으니 말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말하도록 하라.” 하니, 선생이 먼저 겸손한 말을 올리고 또 이르기를, “선왕조(先王朝) 때에……이황 같은 현자가 좌우에서 떠나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이때에 퇴계 선생이 고향으로 물러나 있었기 때문에 이런 말을 아뢴 것이다. 물러난 뒤에 승정원(承政院)에 불러다가 호초(胡椒)를 하사하라고 명하고, 전교하기를, “무더운 날이 머지않아서 호초를 하사하는 것이니 잘 가도록 하라.” 하고, 또 경회문(慶會門)에서 술을 하사하였다. 부임한 이듬해에 사직하고 돌아왔다.만력(萬曆) 원년(1573, 선조6)에 지례 현감(知禮縣監)을 제수하였으나 병 때문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다시 종묘서 영(宗廟署令)을 제수하였으나 또 부임하지 않았다. 얼마 후 봉상시 정(奉常寺正)으로 승직하고, 수직(守職)으로 장악원 정(掌樂院正)을 제수하니, 마지못해 소명(召命)에 따랐다. 10월에 광주 목사(光州牧使)를 제수하니, 선생이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사피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아 이에 부임하였다. 고을 백성들이 부역이 균등하지 않은 것을 우려하자 선생이 즉시 전부(田簿)를 다시 기록하여 그 부역을 균등하게 하니 백성들이 매우 편하게 여겼다. 그 밖에 백성들을 괴롭히는 부역을 줄이기도 하고 고치기도 한 것이 매우 많았다. 고을에 있던 날에는 관디를 갖추고 관아에 일찍 나가고 늦게 돌아오곤 하였는데, 만약 하루라도 출근하지 않으면 마음이 언제나 편치 않았다. 그 후 2년이 지난 갑술년(1574)에 사직하고 돌아왔다.을해년(1575) 겨울에 상이 양식을 하사하라고 명하니, 선생이 봉사(封事)를 올려 사례하였다. 그 대략에, “삼가 생각건대, 주상전하께서는……종묘사직의 다행이며 신민의 다행입니다.” 하였고, 또 우(禹) 임금의 읍고(泣辜)와 탕(湯) 임금의 축망(祝網)의 고사를 들어서 아뢰기를, “대저 우 임금과 탕 임금이 능히 은혜를 미루어 정치로 확대할 수 있었던 것은 마음에 근본이 있었기 때문이며, 한(漢)나라와 당(唐)나라가 은혜를 미루지 못하여 구차한 실책을 면하지 못한 것은 역시 마음에 근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우 임금과 탕 임금으로 법을 삼고 한나라와 당나라로 경계를 삼아서 근본을 다스리고 은혜를 미루어 확대하도록 하소서.” 하였고, 또 아뢰기를, “신이 선왕조 때에……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는 일입니다.” 하였다. 말미에는 적군(籍軍)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소요의 폐단에 대하여 아뢰기를, “그 폐해의 심하기가 항우(項羽)나 부견(符堅)이 지나간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였으니, 이는 그 당시 어사들이 저지른 가혹한 참상을 심하게 말한 것으로 사림들이 훌륭하게 여겼다. 상소가 주달되자 상이 매우 칭찬하였다.정축년(1577)에 재차 장악원 정을 제수하였는데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으니, 상이 양식을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또 봉소(封疏)를 올려 사례하였는데, 그 대략에, “임금이 백성을 사랑하는 것은……이것은 무엇을 위한 것이겠습니까.” 하였다. 당시에 마침 양전(量田)에 관한 조치가 있었고, 또 호강(豪强)한 자를 적발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선생이 사안별로 논열하면서 그것이 불가하다는 것을 극력 진달하였다. 그 말에, “국가가 실시하는 일이……이 어찌 고인(古人)이 하신 반구(反裘)의 경계를 알겠습니까.” 하였다. 가을에 또 쌀을 하사하니, 전문(箋文)을 올려 사례하였다. 임오년(1582) 여름에 특명으로 통정(通政)을 가자하고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로 삼으니, 즉시 봉사(封事)를 올려 첫머리에 분수에 넘치는 품계라서 받기가 어렵다는 뜻을 말하고, 군민(軍民)의 폐단을 덧붙여 아뢰기를, “삼가 오늘날의 폐단을 보니……도망가거나 흩어지는 정도에 그치지 않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아, 임금의 한마음은……말할 것조차 없습니다.” 하니, 상이 비답을 내리기를, “판결사의 자리를 오랫동안 비워 두기 어려우므로 체직하겠지만 가자(加資)한 것은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또 덧붙여 헌의(獻議)한 말을 보고는, “내가 그대의 지극한 정성을 아름답게 여긴다.” 하였다.갑신년(1584) 1월 임인일에 병환으로 외침(外寢)에서 임종하니, 향년 85세였다. 이보다 앞서 본도(本道)에서 선생의 병환에 대하여 치계(馳啓)하였는데 별세한 지 며칠이 지나서야 어의(御醫)가 약을 가지고 왔고, 부음(訃音)이 전해지자 상이 특별히 부의(賻儀)를 하도록 명하였다. 4월 기유일에 집의 북쪽 자좌오향(子坐午向)의 언덕에 장사를 지냈는데, 선영(先塋)을 따른 것이다.아, 선생의 아름다운 덕에 대해서는 선친(先親)이 뇌장(誄狀)에서 남김없이 진술하였으니, 아들이자 후학(後學)인 내가 어찌 감히 그 사이에 군더더기 말을 덧붙일 수 있겠는가. 다만 선생에게 직접 배운 제자들이 전해 주는 말을 들어 보면, “하늘이 비단결같이 아름다운 자질을 선생에게 부여하였고, 선생은 그것을 받아서 몸에 간직하여 젊어서부터 늙을 때까지 80여 년을 때묻지 않고 상하지 않게 고이고이 간직하다가 온전한 채로 돌아갔다.” 하니, 이 말은 덕을 아는 자의 말이라 하겠다. 그가 부여받은 것이 중후하고 순수하였으므로 발현되는 것이 순전하고 아름다웠던 것이며, 용모와 언사에 나타난 것이 온후하고 화평하였으며 맑고 여유가 있어 보였다. 평소에 말을 급하게 하거나 조급한 표정을 짓지 않았으며 기쁨과 노여움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일찍이 거칠거나 사나운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많은 사람들 앞이라 하여 으스대지 않았으며 혼자 있을 때라 하여 태만하지도 않았다.이를 통해 가정에서는 부모를 섬길 때 정성과 효도를 다하고 형제간에 우애를 돈독히 하였으며 종족에게 인자함을 베풀고 처지가 어려운 자는 돌보아 주었다. 향당에서는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고 노인을 공경하였으며 돈후하고 질박하기를 힘쓰고 신뢰와 의리를 숭상하여 일찍이 남의 잘못을 말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그의 덕에 심취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임금을 섬길 때에는 정성을 다하여 인도하는 말과 조목조목 따져 진달하는 말이 한결같이 올바른 것들이고 공리(功利)나 잡다한 술책에 관한 것은 없었으니, 이는 모두 맹자가 말한 “인(仁)과 의(義)가 아니면 진달하지 않는다.”와 주자(朱子)가 배운 네 글자의 뜻에서 나왔다. 백성을 다스릴 때에는 청렴[淸]과 신중[愼]과 인자[慈]와 용서[恕]를 바탕으로 하여 진실만을 추구하고 외형을 꾸미지 않았으며 세상을 놀라게 하거나 백성의 환심을 사는 것으로 능사를 삼지 않았으므로 일 년 내내 헤아려도 남을 만큼의 공적이 저절로 쌓였다. 맹자가 이르기를, “근본이 있는 자라야 이와 같을 수 있다.”고 하였는데, 대개 선생은 이미 근본이 있으므로 무슨 일을 하든지 척척 들어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그렇기는 하지만 선생이 어찌 명분(名分)에만 집착하고 실천이 따르지 않는 분이었겠는가. 선생의 실생활을 보면 비스듬히 기대지 않고 하루 종일 단정히 앉아서 용모를 공손히 하지 않은 적이 없으며 표정도 장중하게 갖지 않은 적이 없다. 모든 행동 하나하나를 단정하고 중후하게 하기를 힘쓰고 예사로운 말이나 행동도 반드시 신중히 하였다. ‘성경(誠敬)’이란 두 글자와 ‘생각에 사특함이 없어야 한다.[思無邪]’와 ‘자신을 기만하지 말아야 한다.[毋自欺]’ 등의 문자를 창가와 책상에 크게 써서 걸어 두고 항상 가슴에 새겼다. 평소에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서 머리를 빗고 의관을 단정히 한 다음 책상을 마주하고 책을 보다가 피곤하면 잠시 궤안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가 일어나면 다시 책을 보았다. 언제나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는데 늙을수록 더욱 부지런하였다.항상 참봉공(參奉公)과 밤낮으로 담론(談論)을 벌인 것이 성현(聖賢)의 학문(學問)을 하는 방법이 아닌 것이 없었으며, 옛사람의 시비와 득실에 대한 문제와 세도(世道)가 오르내리고 쇠퇴하거나 융성하는 변화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으로 논란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마침내는 모두 의리로 귀결시켰다. 항상 후생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어려서부터 매번 전날에 한 일을 되돌아 생각해 보고 두렵게 여기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지금 늙어서도 여전히 그렇다.”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사람은 평소에 한 일을 남에게 말하지 못할 것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으니,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롭게 하고 안으로 자신을 살펴 허물이 없게 하려고 한 공부가 거원(蘧瑗)과 온공(溫公)의 기풍에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하겠다. 선생이 지은 문장은 넓은 바다처럼 광범위하여 무궁한 뜻을 담고 있어 참으로 경서(經書)와 같은 글이었고 꾸밈없는 소박한 맛을 느끼게 한다.아, 하늘이 선생을 낸 것이 진실로 의도한 바가 있었으니, 만약 묘당(廟堂)에 앉아서 백관(百官)을 진퇴시키고 임금의 좌우에 출입하면서 임금의 덕을 보좌하도록 하였더라면 어찌 요순과 같은 임금으로 만들지 못하였겠으며 국가의 형세를 태산처럼 안정되게 하지 못하였겠는가. 애석하게도 그 도(道)가 시운(時運)과 서로 맞지 않아서 뜻을 펼칠 수가 없었다. 만년에 이르러 비록 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나 조그만 백 리 정도의 지역에서 그럭저럭 감서(監署)하는 직임을 맡은 것에 지나지 않았으니, 어찌 그 뜻을 만분의 일이나마 펼칠 수 있었겠는가.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고을 사람들의 덕을 좋아하는 마음이 오랜 세월이 흘러도 시들지 않아서 선생의 형제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문헌공(文獻公)의 사당에 배향하여 제사를 모셨으니 백세 이후에 반드시 풍교를 듣고 흥기할 자가 있을 것이다.선생은 고양 유씨(高陽兪氏)에게 장가들었는데, 사헌부 장령을 지낸 뇌계(㵢溪) 선생 호인(好仁)의 손녀이다. 부인의 아버지는 진사 휘 환(瑍)이며 어머니는 창녕 조씨(昌寧曺氏)인데 망기당(忘機堂) 한보(漢輔)의 딸이다. 부인은 성품이 순후하고 조심성이 있어서 남편을 도와 위배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선생보다 13년 먼저 졸하였다. 3남 1녀를 두었는데 위의 두 아들은 모두 일찍 죽었으며, 딸은 군수 이구인(李求仁)에게 시집갔으나 역시 일찍 죽고 후사가 없다. 3남 승조(承祚)는 훈도(訓導) 신준(愼準)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4녀를 낳았다. 장남은 진상(眞㦂)이며 2남은 진흠(眞????)이며 3남은 진준(眞惷)이다. 진상은 사인(士人) 하세보(河世寶)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장녀는 사인 주국신(周國新)에게 시집갔다. 진흠은 사인 신희양(愼希讓)의 딸에게 장가들고 진준은 장가들지 않았다. 2녀는 동지 한형(韓詗)에게 시집가서 아들과 딸 약간 명을 두었다. 선생이 별세한 후에 세 손자가 모두 자식이 없이 죽고 진상만 단지 두 명의 딸을 두었는데 정홍서(鄭弘緖)와 손작(孫綽)이 그 사위이다. 정홍서의 처가 후사가 없이 일찍 죽고 딸 하나만 두었는데 아무개에게 시집갔다. 손작은 자녀 아무개를 두었다.선생의 총부(冢婦)가 종사(宗祀)를 이어 갈 주인이 없는 것을 민망하게 여겨 선생 중씨(仲氏)의 손자인 진무(眞懋)를 데려다가 후사로 삼았다. 진무는 아무개의 딸에게 장가들어 자녀 아무개를 낳았다. 진무가 선생의 묘정에 세울 갈문(碣文)을 나에게 부탁한 지가 오래되었으나 시일을 끌다 보니 아직도 완성하지 못하였다. 항상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다시 예전에 읽던 글을 정리한다면 아마도 불후(不朽)의 전함을 보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뜻하지 않게 오늘날 국가의 운명이 이미 다하고 도적이 갑자기 쳐들어와 지존하신 임금을 모시고 고립된 성으로 들어가 위급함이 조석에 달려 있으니 한번 죽는 것이야 한스러울 것이 없지만 명현(名賢)이 이룩한 공적을 드러내지 못할까 염려되어 포석(炮石)이 날리는 가운데에 삼가 대략을 위와 같이 간추려 싣고 이어서 명(銘)을 쓴다. 명은 다음과 같다.숭고한 덕의 언덕 / 崇高德岳저 높이 하늘에 닿겠네 / 峻極于天신령한 기운을 빚어내어 / 釀靈毓秀우리 명현을 내셨네 / 生我名賢그리운 우리 선생은 / 我懷伊賢금옥 같은 아름다움과 / 玉潤金精강하 같은 도량에다 / 江河之量난곡과 같은 모습이라 / 鸞鵠之形봄바람이 자리에서 이는 듯 / 春風生席화기가 넘쳐흐르는 듯 / 和氣敦薄효도와 공경으로 / 惟孝惟悌가정을 다스리고 / 居家之政충성과 신뢰는 / 曰忠曰信타고난 성품이었네 / 本然之性정성으로 사물을 접하고 / 誠以接物공경으로 몸을 간직하고 / 敬以持身성리를 연구하고 / 硏窮性理경전을 탐구하고 / 探討典墳잘못을 알아서 고쳐 가기는 / 知非遷改거백옥의 기풍이요 / 伯玉之風남을 대하여 부끄러움이 없기는 / 對人無愧사마군실의 공부였네 / 君實之功조정에 들어가 임금을 섬길 때는 / 入以事君맹자의 공경과 주자의 학문을 따르고 / 孟敬朱學나가서 백성을 다스릴 때에는 / 出而莅民봄날 우로의 은택을 베풀었네 / 春噓雨澤하늘은 이미 풍부하게 부여하고서 / 天旣富與어찌 크게 시험하지 않았는가 / 胡不大施조그만 백 리 지역이라니 / 栖栖百里그것도 백발이 다 되어서 말이지 / 白髮衰遲난들 어찌 비난할 수 있으랴 / 吾何譏乎시운에다 돌릴 뿐이네 / 歸之於時산이 바다 되고 골짜기가 구름으로 변하더라도 / 山移谷變이름만은 사라지지 않으리라 / 名不可夷[주-D001] 수령칠사(守令七事) : 수령이 수행해야 할 일곱 가지 임무로서, 즉 농상을 활성화하는 것[農桑盛], 호구를 증대시키는 것[戶口增], 학교를 흥기시키는 것[學校興], 군정을 잘 다스리는 것[軍政修], 부역을 균등하게 하는 것[賦役均], 사송을 간소화하는 것[詞訟簡], 간활한 자가 없게 하는 것[奸猾息]을 말한다. 《六典條例 承政院》[주-D002] 이황 …… 선생이 : 이 부분은 원문의 생략으로 인해 전후의 기사 내용이 서로 연계되지 않으므로 《동계집》 초간본에 따라 일부 보충하였다. 보충한 부분의 원문은 아래와 같다. “如滉之賢 不宜去離左右 蓋是時 退溪先生方”[주-D003] 읍고(泣辜) : 우(禹) 임금이 죄인이 많은 것을 보고 불쌍하게 여겨 울었다는 말로, 한(漢)나라 유향(劉向)이 쓴 《설원(說苑)》 〈군도(君道)〉에, “우 임금이 거리에 나갔다가 죄인을 보고 수레에서 내려 위문하며 울었다.” 하였다.[주-D004] 축망(祝網) : 탕(湯) 임금이 들판으로 나가다가 사냥꾼이 그물을 사방으로 쳐 놓고 “모든 새들은 다 내 그물에 걸려라.” 하고 비는 것을 보고 너무 심하다고 여겨, 세 군데를 터 놓고는 “피하기 싫은 새들만 이 그물에 걸리거라.”라고 빌었더니, 제후들이 듣고 그의 성덕을 찬양하였다 한다. 《史記 卷3 殷本紀》[주-D005] 반구(反裘)의 경계 : 경중과 본말을 알지 못한다는 비유에서 온 말이다. 한(漢)나라 유향(劉向)의 《신서(新書)》 〈잡사(雜事) 2〉에, “위 문후(魏文侯)가 길에서 모피 옷을 뒤집어 입고 꼴을 지고 가는 사람을 보고 그 이유를 묻자, 털을 아끼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문후가 ‘속가죽이 다 닳고 나면 털이 붙어 있을 데가 없게 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처사다.’라고 말하였다.” 하였다.[주-D006] 잘못을 …… 기풍이요 : 거백옥은 춘추 시대 위(衛)나라 대부로, 이름은 원(瑗)이며, 백옥(伯玉)은 그의 자이다. 그가, “나이 50세에 49년 동안의 언행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라고 하였는데, 임훈 역시 이러한 기풍이 있었다는 뜻으로 인용한 것이다. 《淮南子 原道訓》[주-D007] 남을 …… 공부였네 : 사마군실(司馬君實)은 송(宋)나라의 대학자로, 이름은 광(光), 호는 온공(溫公)이며, 군실은 그의 자이다. 그는 한평생 말을 함부로 하지 않았는데, 일찍이 이르기를, “내가 남보다 나은 것은 없으나, 한평생 해 온 일을 남에게 말할 수 없는 것은 없었다.” 하였다. 《宋史 卷336 司馬光列傳》 여기에서 인용한 뜻은 임훈에게도 그러한 공부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2022-05-06 | NO.214
  • 동국이상국전집 제36권 / 묘지(墓誌)ㆍ뇌서(誄書); 채순희
    중서시랑 평장사 태자소사(中書侍郞平章事太子少師) 채공(蔡公)의 뇌사대저 대장부가 세상에 태어나서 벼슬이 재상에 이르렀다가, 70세에 벼슬을 사양하고 정신을 수양하여 천연의 수명을 능히 누린 다음, 죽음을 잘한 자는 고금을 통해 구해 봐도 많지 않은데, 우리 소사(少師) 채공은 그것을 향유하였다.공은 휘가 순희(順禧)인데, 관향이 광주(光州)이다. 부친은 휘가 모(某)인데 벼슬이 모관(某官)에 이르렀다. 공은 의종 때 내정(內廷)에 관적을 두었고, 명종이 선위할 때까지도 오히려 임금의 측근에서 떠나지 않았다.성상이 일찍이 수창궁(壽昌宮)에 있을 때 적신(賊臣) 조원정(曺元正)과 석린(石麟) 등이, 불궤(不軌)를 꾀하여 밤에 담을 넘어 금중(禁中)에 들어와 난을 일으켰다. 이날 밤에 내직(內直)한 근신(近臣)들은 난이 일어난 소식을 듣고는, 놀라고 두려워하여 모두 담을 넘어 도망하였는데, 공은 홀로 궁궐에 입시하여 잠시도 임금의 곁에서 떠나지 않았다. 임금이 감탄하기를,“옛사람의 말에 ‘질풍에 굳센 풀을 알아본다.’ 하더니, 바로 그대를 이름이로다.”하였다. 벼슬은 다섯 조정을 통하여 중요한 자리를 거쳤고, 지금 임금의 모년(某年)에 이르러 중서시랑 평장사 태자소사(中書侍郞平章事太子少師)에 올랐더니, 사직하고 물러와서 거문고와 술로써 몇 해 동안을 한가히 노닐다가 세상을 떠났으매, 이른바 애영(哀榮)과 종시(終始)가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모두 갖추어졌으니, 이는 대장부라 칭할 만한 분이다.천성이 너그러워 대중을 포용하였으매 일찍이 성내는 기색을 볼 수 없었으니, 비록 옛날 방석에 술을 토한 아전을 용서하고국을 쏟은 종을 용서하던 자라도 어찌 이에서 더했겠는가? 그러나 조원정ㆍ석린의 난에서 ‘난에 임하여 두려워하지 않는 굳센 절개’를 보여준 일이 있으니, 이 어찌 ‘인자(仁者)는 반드시 용맹이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부음이 전하자, 임금은 애도하여 정사 듣는 일을 폐하고, 유사에게 명하여 명기(明器)와 노부(鹵簿)를 갖추게 하였다. 모산(某山)에 장사지내자, 시호를 모공(某公)이라 내리고 거듭 소신에게 명하여 사실을 모아서 뇌사를 짓게 하였다. 뇌사는 다음과 같다.왕좌(王佐)의 재주라 먼저 큰 책임을 맡을 인물로 점쳤더니, 강직한 우리 공이여 책임을 짐이 진실로 특이하셨다. 조원정ㆍ석린이 난을 꾸며 밤에 금문(禁門)을 치니, 내신(內臣)들은 마치 쥐처럼 담을 넘어 모두 도망하였는데, 공은 홀로 입시하여 신색이 변하지 않았으니, 후조(後凋)의 절개는 날씨가 추운 뒤에야 알겠다. 절개를 지킴이 이와 같으니 마땅히 귀하고 영화하리라. 과연 다섯 임금의 정승이 되어 명망이 태형(台衡)에 높았도다. 급류(急流)처럼 용감하게 벼슬에서 물러나니, 이름이 온전하고 덕이 높았다. 하늘이 돌보지 않으사 나라의 들보가 부러졌다. 임금이 매우 슬퍼하여 죽은 자에게 주는 예가 구비하였다. 누가 그 아름다움을 찬양할 것인가. 소신이 뇌사를 짓는도다.[주-D001] 불궤(不軌) : 여기서는 모반을 가리킨다.[주-D002] 방석에……용서하고 : 한 선제(漢宣帝) 때 병길(邴吉)이 정승으로 있을 당시에, 그의 마차를 술에 취한 관속이 타고 가다가 토하여 방석을 더럽혔다. 그 이유로 관속을 해직시키려 하니, 병길이 “그는 정승의 방석 하나를 더럽힌 데 불과한 일이니, 해직시킬 일이 못 된다.” 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漢書 卷70 邴吉傳》[주-D003] 국을……용서하던 : 후한(後漢) 장제(章帝) 때 유관(劉寬)은 성질이 매우 너그러워 좀처럼 화를 내지 않았다. 그 부인이 그가 얼마나 너그러운가를 시험하고자 하여 그가 조회에 들어가려고 관복(官服)을 차려 입었을 적에 종을 시켜서 관복에 국을 엎질렀으나, 다만 “네 손이 데지나 않았느냐?”고 했을 뿐 다른 말은 없었다 한다. 《後漢書 卷25 劉寬傳》[주-D004] 인자(仁者)는……있다 : 이 말은 《중용(中庸)》에 보인다.[주-D005] 후조(後彫)의……알겠다 : 난을 겪어야 절의 있는 것을 알 수 있다는 뜻. 《논어》자한(子罕)에 “날씨가 추운 뒤에야 송백은 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하였다.[주-D006] 태형(台衡) : 정승을 가리킨다. 하늘의 삼태성(三台星)은 인간의 정승을 맡은 별이라 하고, 정승은 세상을 저울질하는 권한이 있다고 해서 이렇게 비유한 것이다.
    2022-05-06 | NO.213
  • 동명집 제18권 / 묘지(墓誌); 조희보 광주목사
    동명집 제18권 / 묘지(墓誌)분승지를 지내고 이조 판서에 추증된 조공의 묘지〔分承旨贈吏曹判書趙公墓誌〕공의 성은 조씨(趙氏)이고, 휘는 희보(希輔)이고, 자는 백익(伯益)이며, 풍양인(豐壤人)이다. 시조인 휘 맹(孟)은 고려 초에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그 뒤에 휘 염휘(炎暉)란 분이 있어 우대언(右代言)을 지냈고, 신(愼)은 사복시 정(司僕寺正)을 지냈다. 증조는 휘가 익상(益祥)으로, 장령(掌令)을 지냈다. 할아버지 휘 세적(世勣)은 정국 공신(靖國功臣)으로서 자헌대부(資憲大夫) 풍양군(豐壤君)에 추증되었다. 아버지 휘 기(磯)는 감찰(監察)을 지내고 승지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현령을 지낸 이숙(李淑)의 딸로, 효령대군(孝寧大君)의 후손이다.공은 가정(嘉靖) 계축년(1553, 명종8)에 탄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빼어나 보통 아이들과는 달랐다. 장성하자 명성이 더욱 퍼져 나갔다. 임오년(1582, 선조15)에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하고, 무자년(1588)에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소속되었다가 천거되어 한림(翰林)에 제수되었다. 신묘년(1591)에 아버지를 여의었고, 상복을 벗자마자 또다시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다.을미년(1595, 선조28)에 예조ㆍ형조ㆍ호조의 낭관에 제수되었다. 정유년(1597)에 충청 도사(忠淸都事)에 제수되었다. 당시에는 군사를 일으키는 일이 있어 사무가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공은 순찰사를 보좌하면서 잘 조처하니, 순찰사로 있던 유근(柳根)이 매우 칭찬하였다. 기해년(1599)에 예천 군수(醴泉郡守)에 제수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인해 체차되었다. 경자년(1600)에 시강원 필선, 사헌부 장령ㆍ집의, 사간원 사간 등의 직을 역임하였다. 대간으로 있을 적에는 풍채가 늠연하였다.임인년(1602)에 북방에 기근이 심하게 들자 조정에서 공을 어사(御史)로 삼아 진휼하여 구하게 하였는데, 살려낸 사람이 많았다. 당시에 시사(時事)가 크게 변해 청류(淸流)들이 모두 배척당하였다. 공 역시 사간으로 있다가 외직으로 나가 대동 찰방(大同察訪)이 되었는데, 마정(馬政)을 돌보는 데 온 힘을 다하여 역로(驛路)를 소생시켰으며, 병란에 불탄 우사(郵舍) 역시 새로 지어 말끔하게 하였다. 그러자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가 기문(記文)을 지어 찬미하였다.을사년(1605)에 삼척 부사(三陟府使)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인해 부임하지 못하였다. 병오년(1606)에 사도시 정(司䆃寺正)을 거쳐서 광주 목사(光州牧使)에 제수되었다. 정사를 엄하게 하면서도 은혜를 베풀어 온 경내가 잘 다스려졌으므로, 어사가 표창하라고 아룀에 따라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또 감사가 잘 다스린 상황에 대해 보고함으로써 통정대부로 승진하였다. 떠나온 뒤에는 고을 사람들이 비석을 세워 기렸다.그 뒤에 성주 목사(星州牧使)에 제수되었다. 고을 안에 정인홍(鄭仁弘)의 인척들이 많이 살면서 제멋대로 굴었는데, 공은 법으로 이들을 다스리면서 청탁하는 것이 있어도 하나도 들어주지 않았다. 이에 정인홍이 유감을 품고는 다른 사람을 사주하여 탄핵함에 따라 파직되었다. 한참 뒤에 승지 및 병조 참의에 제수되었는데, 모두 분사(分司)의 직이었다.당시에 권간(權奸)들이 정권을 잡아서 조정의 정사가 크게 어지러웠으므로, 공은 벼슬길에 뜻이 없었다. 이에 임술년(1622, 광해군14)에 집안사람들을 다 거느리고 원주(原州)로 돌아갔다. 얼마 뒤에 병으로 졸하니, 향년은 70세였다. 아들 형(珩)이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됨으로 해서 공에게 이조 판서와 그에 따른 겸직을 추증하였다. 다음 해에 양주(楊州) 해등촌(海等村)에 있는 손향(巽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공은 혼조(昏朝) 때에 살아서 끝내 자신의 뜻을 펴지 못하였으며, 계해년에 반정(反正)이 일어났을 때에는 공은 이미 서거한 뒤여서 미처 등용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식자들이 한스러워하였다.공의 초취(初娶)는 판서 노직(盧稙)의 딸이다. 계실(繼室)은 감찰 최황(崔韹)의 딸이며, 대사헌 최진(崔璡)의 후손이다. 최씨 부인은 어질고 부도(婦道)가 있어 규문 안이 엄숙하면서도 화락하여 다른 사람이 이간하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공보다 27년 늦게 졸하여 향년이 71세였으며, 공과 같은 혈(穴)에 함께 폄(窆)하였다.노씨 부인은 1녀 1남을 두었는데, 딸은 참봉 최정해(崔挺海)에게 시집갔으며, 아들 민(珉)은 감역(監役)이다. 최씨 부인은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바로 형(珩)으로, 의정부 좌참찬이며, 딸은 사인(士人) 유창한(柳昌漢)에게 시집갔다. 또 측실에게서 낳은 아들인 침(琛)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이고, 장(璋)은 현감이며, 딸은 첨지중추부사 조철(趙澈)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모두 다른 사람의 첩이 되었다.참봉은 2남을 두었는데, 최석후(崔碩後)와 최석연(崔碩衍)이다. 감역은 목사(牧使) 민정명(閔定命)의 딸에게 장가들어 2녀를 두었는데, 정랑 최만길(崔晩吉)과 교리 이주(李裯)가 사위이다. 참찬은 참판 목장흠(睦長欽)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3녀를 두었다. 장남 상변(相抃)은 현감이고, 상정(相鼎)은 진사인데, 감역(監役)의 후사가 되었다. 삼남 상개(相槩)는 현감이고, 사남 상우(相愚)는 진사이다. 장녀는 도사(都事) 이두징(李斗徵), 차녀는 군수 심추(沈樞), 삼녀는 정자 이선원(李善源)에게 시집갔다.공은 사람됨이 단정하고 엄숙하고 말수가 적었으며, 함부로 웃거나 떠들지 않았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허여하는 바가 드물었으며, 벗으로 삼은 사람들은 모두 이름난 사람들이었다. 특히 오상 윤겸(吳相允謙)과 더불어 친하게 지냈다. 이이첨(李爾瞻)은 공과 어려서 서로 알던 사이였으며 사는 집도 가까웠으나, 공은 그가 악한 짓을 하는 것을 미워하여 절대로 통교하지 않았다. 이이첨이 아는 사람을 통하여 만나 보기를 요청하자, 공은 통렬히 거부하였다. 스스로 자신을 지킴이 확고하기가 이와 같았다.공이 명을 받아 북로(北路)에서 진구(賑救)할 적에 온 힘을 다하고 온 생각을 다하여 살려낸 사람이 아주 많았다. 그러자 방백으로 있던 한효순(韓孝純)이 말하기를 “한 사람만 살려내어도 오히려 음덕(陰德)이 있는 법인데, 더구나 수만 명을 살려낸 데이겠는가. 반드시 남은 경사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 참찬공이 과연 문과에 급제하여 팔좌(八座)의 지위에 올라 정부(政府)에 참여하였으니, 이는 그에 대한 보답인 것이다.명은 다음과 같다.옛사람이 일찍이 한 말이 있으니 / 古人有言만년 절개 보존 실로 어렵다 했네 / 晩節實難공께서는 선묘 때에 벼슬 살면서 / 公在宣廟朝하신 일에 볼만한 게 많이 있었네 / 事多可觀그 뒤 국사 아주 크게 어그러지자 / 國事大謬물러나서 향리로 가 거처하였네 / 退居鄕里그랬으니 어찌 아니 어진 것이랴 / 豈不賢哉처음 있고 끝이 있다 할 만하다네 / 亦可謂有始有終者矣후대에서 거울삼기 충분하기에 / 後其鑒그런 사실 묘지 속에 담아 두었네 / 此其誌[주-D001] 분사(分司) : 나라에 일이 있을 경우에 조정 외의 다른 지방에 설치하는 관사(官司)를 말한다.[주-D002] 팔좌(八座) : 재신급(宰臣級)의 8명의 고위 관료로, 각 시대마다 지칭하는 바가 약간씩 다른데, 동한 시대 때에는 육조(六曹)의 상서와 영(令), 복야(僕射)를 말하였다. 여기서는 아들 조형(趙珩)이 의정부 좌참찬을 지낸 것을 가리킨다.*조희보(趙希輔, 1553~1622) 1606.1. 광주목사로 제수됐고, 조형(趙珩, 1606~1679)을낳음
    2022-05-06 | NO.212
  • 동문선 제120권 / 비명(碑銘); 집현전학사 이공 신도비명 병서
    동문선 제120권 / 비명(碑銘)유명조선국 추증추충직절 수문병의 보조공신 특진보국숭록대부 문하우정승 판도평의사사사 병조사 수문전대학사 영예문춘추관사 서원백 시 문간공 행 광록대부 형부상서 집현전학사 이공 신도비명 병서 (有明朝鮮國追贈推忠直節守文秉義輔祚功臣特進輔國崇祿大夫門下右政丞判都評議使司事兵曹事修文殿大學士領藝文春秋館事西原伯諡文簡公行光祿大夫刑部尙書集賢殿學士李公神道碑銘 幷序)권근(權近)영락(永樂) 원년 가을 8월에 영사평부사 서원부원군(領司平府事西原府院君) 이공(李公)이 선군(先君)의 묘비명을 나에게 부탁하여 말하기를, “우리 선군자(先君子)께서 덕을 심고 그 열매는 먹지 아니하여 우리 후인에게 끼치셨습니다. 인하여 부자(父子)가 임금의 총애와 영광을 입어 지위는 높고 봉록은 두터워서 선세(先世)에까지 작(爵)을 추봉하게 되었습니다. 분황(焚黃)하고 제사를 올려 은총을 밝힌 일은 있었으나, 그 묘도(墓道)에 아직 비석이 없어서 뒷세상에 보일 길이 없습니다. 또 나는 불행하게도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으며 세 형도 또한 다 먼저 세상을 떠났으므로, 선인(先人)의 덕행을 자세하게 알 수 없습니다. 인멸하여 전하지 못하게 될까 두렵습니다. 그대는 세계(世系)와 선인이 경력한 관작(官爵)을 상고하여 명(銘)을 지어 주십시오.” 하기에, 나는 사양할 수 없었다.삼가 상고하건대, 이씨(李氏)는 청주(靑州)가 관향(貫鄕)이니, 나라의 명망있는 가문으로 가장 드러났으며 또 오래 되었다.고려 태조가 창업할 때, 휘가 능희(能希)라고 하는 이가 있었는데, 태조를 잘 도와서 공(功)이 있었으므로 국공(國公)을 봉하고, 공신으로서 벽상(壁上)에 화상(畵像)을 그리게 되었다. 그의 6대 손에 이르러 휘를 공승(公升)이라고 하는 이가 있었는데, 행실이 단정하였으며, 인종(仁宗)과 의종(毅宗)을 도왔다. 일찍이 봉명사신으로 금(金)나라에 갔으나 한 닢의 돈도 받지 아니하니 맑은 덕이 더욱 드러났다. 의종이 추석에 달 구경을 하는데, 하늘이 밝고 구름도 없었다. 오랫동안 감탄하며 아름다워하다가 이르기를, “오늘 밤의 밝은 달은 공승(公升)의 가슴속 같아서 한 점의 티끌도 없구나.” 하였다. 졸하매 시호를 문정(文貞)이라고 하였다. 상하(上下) 수백 년 동안에 자손들은 조상의 업을 이어 받들어 아름다움을 이룩하여 대대로 덕 있는 이가 서로 이어 오더니, 문간공(文簡公)에 이르러서는 더욱 스스로 경계하고 신칙하여 후손에게 경사(慶事)를 끼치게 하였다. 사평공(司平公)은 그의 아들 상당군(上黨君)과 마음을 합하고 힘을 다하여 우리 이씨 조선에 거듭 정사좌명(定社佐命)의 공훈이 있어서 공신으로서 훈맹(勳盟)에 함께 피를 마셨으며, 모두 정승의 높은 벼슬에 올랐다. 상당군(上黨君)과 그의 아우 청평군(淸平君)은 모두 공주에게 장가들었는데, 적선(積善)이 남긴 경사가 더욱 크고 창성하다. 아, 성대하도다. 문간공(文簡公)의 휘는 정(梃)이니 그전 이름은 춘길(春吉)이다. 태정(泰定) 을축년에 공이 29세로 처음에 문음(門蔭)으로 팔관보 판관(八關寶判官)이 되었고, 다음해에 과거의 병과(丙科) 제2등으로 급제하였다. 봉거 직장(奉車直長)에서부터 전법 좌랑(典法佐郞)을 역임하였으며, 치화(致和) 원년에는 판도정랑(版圖正郞)으로 나가서 지초계군사(知草溪郡事)가 되었는데 어진 정치를 한 바 있다. 그 뒤에 감찰ㆍ장령ㆍ전법 총랑ㆍ경상도 찰방에 차례로 임명되었다. 그리고는 10년 동안을 한가롭게 살면서 조용히 노닐며 편안하게 지내다가 지정(至正) 계사년에 다시 중정(中正)ㆍ성균 좨주(成均祭酒)에 임명되고, 봉순대부 판전교시사 진현관제학(奉順大夫判典校寺事進賢館提學)으로 추자(追資)되었다. 갑오년에는 정순대부 판통례문사(貞順大夫判通禮門事)가 되었으며, 을미년에는 판위위시사 보문각제학(判尉衛寺事寶文閣提學)이 되고, 위계(位階)는 봉익대부(奉翊大夫)로 높아졌다. 조금 뒤에 우상시(右常侍)로 전임하였고, 정유년에는 영록대부 우산기상시 집현전학사(榮祿大夫右散騎常侍集賢殿學士)로 고쳐 임명되었다. 무술년에는 광록대부 형부상서(光祿大夫刑部尙書)가 되었으며 관직은 전과 같았다. 이것이 그가 역임한 벼슬이다. 공은 일찍이 청렴하고 검소한 것으로써 스스로 다스리며 예법을 따라 실천하고, 세속에 따라 굽히고 펴고 하는 일을 하지 아니하니, 세속 사람들이 그의 바르고 곧음에 탄복하였다. 진주(鎭州)의 상산(常山)에 물러가 살면서 벼슬과 영달을 구하지 아니하였다. 공민왕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 오래 그의 어짐을 들었으므로 왕위에 오르자 공을 불러 서울에 오게 하고, 그의 맑고 삼가는 것을 가상히 여겨 내불당(內佛堂)의 일을 주관하게 하고, 문정공(文貞公)의 절조와 행적의 대강과, 의종(毅宗) 임금이 달을 보고, ‘오늘밤의 밝은 달은 공승(公升)의 가슴속 같아서 한 점의 티끌도 없다.’고 탄상한 말을 친필로 쓰고, 이어 공의 뜻이 선조를 사모하여, 또한 세상 살이의 욕망을 담박하게 하는 일 등, 수백 가지의 말을 써서 내려 주고, 이제 곧 크게 등용하려 하였는데, 공이 갑자기 전에 은거하던 곳으로 돌아가 신축년 6월 19일에 병으로 졸하니, 춘추가 63세였다. 상산(常山)의 남쪽 기슭에 장사하였다.아버지의 휘는 계감(季瑊)이다. 중대광 낭성군(重大匡琅城君)인데, 시호는 정헌(正憲)이다. 조(祖)의 휘는 창우(昌祐)이니, 판도총랑 증밀직사사(版圖惣郞贈密直司使)이다. 증조의 휘는 장(粧)이니, 전중감 증지문하성사(殿中監贈知門下省事)이다. 바로 문정공(文貞公)의 아들인 참지정사(叅知政事) 휘 춘로(椿老)의 아들이다. 김변(金胼)이니, 외조(外祖)는 시호를 문신공(文愼公)이라 하는데 모주(某州)의 사람이다. 부인(夫人)은 명주 김씨(溟州金氏)니, 모관(某官) 계초(繼貂)의 딸이다. 향년이 70세로서 공보다 15년 뒤인 홍무(洪武) 을묘년 4월 21일에 졸하여 공의 무덤 곁에 장사하였다. 또 그 뒤 20여 년 뒤에 사평 부사(司平府事)의 공(功)으로 공에게 문하우정승서원백(門下右政丞西原伯)을 추증하고, 부인에게 변한국부인(卞韓國夫人)을 봉하였으니, 공신의 조상에게 미루어 주는 은전(恩典)이다. 아들 넷과 딸 둘이 있다. 맏아들의 이름은 유신(由伸)이니, 임오년 과거에 급제하고 형부 낭중(刑部郞中)으로 경상도 안찰사로 나갔는데 공보다 먼저 몰(歿)하였다. 차남의 이름은 거인(居仁)이니, 검교 좌정승(檢校左政丞)으로 죽어서 시호를 공절(恭節)이라 하였다. 다음 삼남의 이름은 거의(居義)니, 공조 전서(工曹典書)로 일찍이 몰하였다. 다음 사남은 이름을 거이(居易)라고 한다. 문하 좌정승(門下左政丞)으로 지금 영사 평부사서원부원군(領司平府事西原府院君)이 되었다. 맏딸은 검교 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 이숭(李崇)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공안 부윤(恭安府尹) 민경생(閔慶生)에게 시집갔다. 손자와 손녀 약간 명이 있다. 장남인 낭중(郞中)이 상서(尙書) 홍승조(洪承祚)의 딸에게 장가 들어 아들을 낳았으니, 큰아들 이름을 덕윤(德閏)이라고 하며 호군(護軍)의 벼슬에 있고, 다음은 이름을 부윤(富閏)이라고 하며 전중경(殿中卿)의 벼슬에 있다. 맏딸은 정당문학 겸 사헌부대사헌 이지(李至)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대호군(大護軍) 김소(金紹)에게 시집갔다. 차남인 공절(恭節)은 도첨의 정승(都僉議政丞) 조익청(曹益淸)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둘을 낳았으나 다 어리다. 한산군(漢山君) 이광우(李光雨)의 딸에게 후취(後娶)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을 굉도(宏道)라고 하며 사수 감승(司水監丞)의 벼슬에 있다. 맏딸은 판사(判事) 박전의(朴專誼)에게 시집가고, 차녀는 군자 주부(軍資注夫) 양중관(梁仲寬)에게 시집갔으며, 다음 삼녀는 공조 의랑(工曹議郞) 노경(盧敬)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도염 서승(都染署丞) 심총(沈聰)에게 시집갔다. 삼남인 공조전서는 호군 김인회(金仁晦)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을 곤륜(崐崙)이라고 하며 사헌부 감찰의 벼슬에 있다. 4남인 영사평부사는 형부 상서(刑部尙書) 최연(崔堧)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을 저(佇)라고 하며, 의정부 찬성사 상당군(議政府贊成事上黨君)이다. 태상왕(太上王)의 딸 경신궁주(慶愼宮主)에게 장가들었다. 차남은 이름을 백관(伯寬)이라고 하며, 상호군(上護軍)의 벼슬에 있다. 다음은 이름을 백언(伯言)이라고 하며, 대호군의 벼슬에 있다. 다음은 이름을 백강(伯剛)이라고 하니 청평군(淸平君)이다. 지금 임금의 딸 정신궁주(貞愼宮主)에게 장가들었다. 다음은 이름을 현(儇)이라고 하는데 어리다. 맏딸은 전농정(典農正) 신중선(辛中善)에게 시집 갔다. 차녀는 종부 부령(宗簿剖令) 경지(慶智)에게 시집갔다.외손자와 외손녀 약간 명이 있다. 이 시중(李侍中 이숭)이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을 민(岷)이라고 하며, 광주 목사(光州牧使)의 벼슬에 있다. 다음은 이름을 인(嶙)이라고 하며, 사재 소감(司宰少監)의 벼슬에 있다. 다음은 이름을 치(峙)라고 하며, 연안 부사(延安府使)의 벼슬에 있다. 맏딸은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 최안준(崔安濬)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최유경(崔有慶)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 조준(趙浚)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봉례랑(奉禮郞) 김지(金祉)에게 시집갔다. 민공안(閔恭安) 부윤이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을 설(渫)이라고 하며, 직예문관(直藝文館)의 벼슬에 있다. 맏딸은 지곡 주사(知谷州事) 홍제(洪濟)에게 시집 갔다. 다음은 평원군(平原君) 조박(趙璞)에게 시집갔다. 증손자와 증손녀 약간 명이 있다. 평녕군(平寧君) 대림(大臨)은 지금 임금의 딸 경정궁주(慶貞宮主)에게 장가들었으니, 정승 조준(趙浚)의 아들이다. 나머지는 다 어리다. 예전부터 공훈이 있는 가문이 두어 대를 못 가서 한미한 가문이 되는 것은, 대체로 선조의 공덕을 거듭 쌓음이 비록 부지런하였더라도 자손된 자가 대개 교만하고 사치함이 많아서 지키는 데 삼가하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지금 공께서는 선대에서 쌓은 덕이 두터워 그 흘러오는 광채가 발달함이 이미 성대한데, 사평(司平)의 부자도 능히 모두 공경하고 근신하여 뜻과 절조를 더욱 가다듬어 귀한체 하지 아니하고 자랑하지 아니하며, 선을 즐겨 게을리 함이 없다. 이는 그 지킴을 더욱 삼가서 선대의 빛을 드날리는 것이니, 후손에게 경사가 흘러감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마땅히 명(銘)에 써야 하겠다. 그 명은 이러하다.기름진 서원 땅 / 膴膴西原그 근원을 누가 열었는가 / 孰濬其源국공이 터를 잡아 / 國公肇緖그 근본을 잘 굳혔네 / 克固其根그 뿌리 굳건하여 / 其根旣固가지와 잎 번성하구나 / 枝葉是繁높고 큰 문정공 / 烈烈文貞몸가짐이 맑아서 / 操履之淸가슴속 티끌 없음이 / 胸中無累가을달의 밝음일세 / 秋月之明밝고도 정성스러운 형부상서 문간공 / 顯允刑部덕행이 있어 / 維德之行예로써 처신하며 / 身以禮持세속에 영합하지 않았네 / 不與俗隨청렴하고 검소함 더욱 돈독하여 / 淸儉彌篤그 터전에 후하게 덕을 쌓았으니 / 厚積厥基공경도 될 수 있고, 정승에도 알맞건만 / 宜卿宜相마침내 시용하지 아니하고 / 訖莫以施경사를 뒤로 물려 / 遺慶于後넉넉함을 끼치었네 / 以垂其裕사평을 계도하니 / 迺啓司平준엄하고 씩씩하여 / 旣峻且武충성은 사직에 있고 / 忠在社稷공로는 맹부에 간직하였네 / 功藏盟府부자가 두 번이나 맹세하여 / 父子再啑임금의 큰 사업을 함께 도우셨네 / 同獎王業형제 모두 훌륭하여 / 兄弟竝美임금의 딸 맞이하니 / 王姬是室광채나는 은총의 빛 / 赫赫寵光옛날에도 짝 없구나 / 雖古罕匹모두 법을 잘 지키고 / 咸能守法더욱 지조를 삼가니 / 愈謹秉節복록은 끊임 없고 / 福未有艾전렬 더욱 빛이나 / 增光前烈면면한 그 후손 / 繩繩來裔길이길이 이어가리 / 引之無替이 사연을 비석에 새겨 / 刻辭于碑영원한 후세에 밝게 보이노라 / 昭示永世*광주목사 이민
    2022-05-06 | NO.211
  • 동문선 제127권 / 묘지(墓誌); 송당 선생 김공 묘지명(김광식)
    동문선 제127권 / 묘지(墓誌)송당 선생 김공 묘지명 병서 (松堂先生金公墓誌銘 幷序)이색(李穡)지정(至正) 신사년에 내 나이 14세에 성균시에 응시했다. 고시장에 나아가 뜰 가운데 선생을 바라보니 포(袍)와 홀(笏)을 갖추고 단정히 앉아 있는데, 엄숙한 모습이 마치 태산교악(泰山喬嶽)과도 같아서 여러 선비들이 숨소리를 죽이고 감히 떠들지 못하였다. 문생이 되어서는 왕래하면서 가르침을 들으니 따뜻한 말씨와 부드러운 낯빛으로 국법을 설명해 밝히고, 인재를 부지런히 권면하고 또 거듭 말하면서 나라의 풍속이 날로 쇠퇴하여 가고 있다고 개탄하였다. 집에서는 살림살이를 다스리지 않고 좌우에 거문고와 서적이 있어 담담하다. 동산 산마루에 솔을 재배하고 서재 남쪽 못 가운데 연꽃을 심었으며, 해마다 뜰에 모란이 활짝 피면 술과 음식을 갖추어 문생들을 불러놓고 대부인(大夫人)께 헌수(獻壽)하니, 그 형제와 자손들이 항상 화기애애하여 효제(孝悌)의 지극함은 신명까지 통하였다. 대부인이 91세의 장수를 누렸으니, 아, 참으로 성대한 일이 아닌가. 병신년 3월에 대부인이 병환으로 돌아가니, 황고(皇考) 문정공(文正公)의 묘소 아래에 장사 지내고, 그 곁에서 살면서 복제(服制)를 마쳤다. 선생은 본래 병으로 걷기가 어려웠으나 아침저녁으로 전(奠) 올릴 때에 반드시 몸소 쓸고 닦기를 잠시도 그만둔 적이 없었다. 우리나라 풍속에 부모의 분묘를 지킬 때에, 흔히 종을 대신시키고 사사로이 노복의 부역을 면제해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차마 어버이에게 섭섭하게 할 수 없다고 하여 몸소 이를 행하였으니, 이는 근래 재상 중에 일찍이 없던 일이다. 선생의 성은 김씨요, 이름은 광식(光軾)이고, 자(字)는 자여(子輿)이며, 호는 송당거사(松堂居士)이니, 광주(光州) 사람인 사공(司空) 김길(金吉)의 후손이다. 사공이 고려의 태조를 도와서 공로가 있었고, 그 후예에 이름은 광서(匡瑞)요, 벼슬이 중랑장(中郞將)인 사람이 있었다. 중랑장이 휘(諱) 위(偉)를 낳았는데 벼슬은 삼사사(三司使)였으며, 삼사사가 휘 경량(鏡亮)을 낳았는데 대장군이며, 대장군이 감찰어사 휘 수원(須元)을 낳았는데, 처음에 삼별초(三別抄)가 순수히 귀순하지 않고 반심(叛心)을 품고 바다 섬 속으로 들어갔었는데, 어사공이 영광(靈光)의 원으로 있다가 이들에게 죽었다. 어사공이 국자좨주(國子祭酒) 휘 고영중(高瑩中)의 손자 모관(某官)을 지낸 휘 몽경(夢卿)의 딸과 결혼하였는데, 고씨는 나이 1백 2세가 되도록 살았다. 예전에 고씨의 꿈에 밝은 별이 품안에 들어오는 것을 보았는데, 쾌헌 선생(快軒先生) 문정공(文正公) 휘 태현(台鉉)을 낳았다. 문정공은 4대의 왕조의 원로로 일국의 중대사를 결정짓는 고문적인 존재로 정승에 이르고 치사(致仕)하였다. 일찍이 국초 이래의 문장을 모아 《해동문감(海東文鑑)》이라 이름하여 간행한 적이 있고, 성균시를 관장하고 다시 지공거가 되어 공이 선발한 선비에 유명한 사람이 많았으니, 죽계(竹溪)의 안근재(安謹齋)와 최졸옹(崔拙翁)은 그 중에서도 더욱 뛰어난 분이었다. 먼저 행수낭장(行首郞將) 김의(金義)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이 광식(光軾)이요, 벼슬은 선부 의랑(選部議郞)에 이르렀고, 계실(繼室)은 태조의 아들 효은(孝隱)의 후손인 시랑(侍郞) 정단(丁旦)의 딸로서 3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 광철(光轍)은 급제하여 벼슬이 밀직사에 이르렀고, 다음이 선생이요, 다음은 광로(光輅) 급제하였다. 맏딸은 정당문학 안목(安牧)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밀양군(密陽君) 박윤문(朴允文)에게 시집갔다. 공의 삼형제가 이미 과거에 올라 대부인이 나라에서 주는 녹으로 그 몸을 마쳤다. 박씨의 아들 4명과 안씨의 손자 3명이 또 모두 과거에 오르니, 당시 사람들이 부러워하였다.공은 지원(至元) 갑자년 정월 갑자일에 출생하자, 이미 신장이 2척(尺)이 넘어 부모가 기특하게 여겨 몹시 사랑하였다. 관례 후 황경(皇慶) 계축년에 과거에 급제하니, 좌주(座主) 일재선생(一齋先生) 권정승(權政丞)이 예법을 아는 것을 사랑하여 후히 대하고 성균학관(成均學官)에 보직하였다. 지순(至順) 경오년에 충혜왕을 따라 원나라 서울로 갔는데, 그 공로로 사복시 승(司僕寺丞)에 제수되었다가 다시 도관 정랑(都官正郞)으로 옮겼다. 그 뒤 지원(至元) 기묘년에 충혜왕이 조적(曹頔)에 의해 거의 폐위될 뻔했다가 다행히 이겼으나, 그의 일당이 원나라 권력층에 많이 붙어서 기필코 자신들의 음모를 성취시키려고 하였다. 왕이 북경으로 갈 때에 공이 말하기를, “우리 임금님이 위태로우실 것이니 나만 어찌 차마 여기서 혼자 면하겠느냐.” 하고 수종해 갔다가 천자의 성명(聖明)하심에 힘입어 다시 작위를 회복하고 돌아오니, 때는 경진년 가을 7월이었다. 군부총랑(軍簿摠郞)으로 참전선사(參銓選事)가 되고, 성균 좨주(成均祭酒)ㆍ삼사 좌윤(三司左尹)ㆍ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등 관직을 여러 번 전전하였으나, 모두 관직(館職)과 지제교를 겸임하였다. 다음해 가을에 성균시(成均試)를 주관하여 지금의 지밀직사사 성사달(成士達) 등 99명을 선발하니, 당시에 선비를 많이 얻었다고 일컬었다. 충혜왕이 평소에 공의 엄중함을 꺼렸고, 좌우의 사람들도 대부분 꺼렸는데, 다만 구실로 삼을 것이 없었다가 드디어 말하기를, “김공은 조용히 있는 것을 좋아하고 벼슬길에 나오는 것은 그의 본래의 뜻이 아니다.” 하니, 임금이 차차 이 말을 믿게 되어 드디어 공의 직임을 갈아버리니, 여러 소인들이 더욱 기세를 폈다. 계미년 겨울에 악양의 화[岳陽之禍 충선왕이 귀양간 것]가 일어나고, 갑신년에 충목왕(忠穆王)이 왕위에 서면서 공을 기용하여 우부대언(右副代言)으로 삼고 다시 지신사(知申事)로 옮기니, 권력을 잡은 대신이 자기에게 아부하지 않는 것을 미워하여 임금에게 아뢰어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제수하였다. 얼마 안 되어 임금이 이를 후회하고 밀직부사 제조전선사(密直副使提調銓選事)에 임명하였다가 곧 지사(知司)로 승진되었다. 기축년에 충정왕(忠定王)이 왕위에 오르자 서연(書筵)을 열어 공을 스승으로 삼으니, 공이 굳게 사양하였고, 첨의(僉議)로 들어가서 평리(評理)가 되고, 광정대부 예문관 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이 되어, 이어 제조전선사(提調銓選事)를 겸하고 있다가 바로 삼사우사(三司右使)로 고쳐 주니, 들어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문인에 대한 선발은 이조에서 관장하고 무신에 대한 선발은 병조(兵曹)에서 관장하는데, 정방(政房)에서 총괄하는 것은 권신(權臣)으로부터 비롯한 것이니 아름다운 법이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신의 말씀을 들어 주시어 옛 제도대로 하시는 것이 편리할 것입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그러나 반드시 공정해야 한다고 하며 공에게 명하여 전리판서(典理判書)를 겸임하게 하였다. 신묘년 10월에 현릉(玄陵)이 왕위에 오르자, 공은 두문불출하고 대부인을 봉양하면서 아침저녁으로 예절을 다하였다. 대부인이 돌아가시자 여묘(廬墓)를 마칠 때에 이르러서는 시중(侍中) 홍양파(洪陽坡)선생이 당대 이름 있는 경과 재상들과 같이 찾아가서 그 노고를 위로하자, 공은 말하기를, “내가 나이 63세로 처음 여기 와서 살 때에는 항상 하루아침으로 어머니보다 먼저 죽어 종족의 수치나 되지 않을까 두려워했더니,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은 나의 고비(考妣 돌아가신 부모)의 덕이다.” 하고 말을 마치자 눈물이 흘러 내렸다. 위문갔던 사람도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탄복하였다. 여묘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집 북쪽 모퉁이에 판위(版位)를 마련해 놓고, 행사할 때마다 곡읍(哭泣)을 그치지 않았다. 숙병으로 인하여 문밖을 나가지 않으니, 현릉(玄陵)이 그 명성을 듣고 사자를 보내어 공에게 유시하기를, “공과 더불어 말하고자 생각해 온 지 오래되었소. 과인으로 하여금 한 번 만나볼 수 있게 해 주지 아니하겠는가.” 하였다. 공이 황공하여 자식과 조카에게 부축하게 하여 조정에 들어가니, 임금이 이르기를, “연령과 안색은 그다지 쇠하지 않았는데도 병이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고, 한참 동안 탄식하고 애석해하였다. 그리고는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공이 사는 마을에 영창방(靈昌坊) 효자리(孝子里)라고 정문(旌門)을 세워 표시하고, 또 그 마을의 몇 호(戶)의 부세를 면제해 주어 공을 받들게 하였다. 신축년 겨울 11월에 홍건적을 피하여 고창현(高昌縣)에 이르러, 그곳에 머물러 살던 중 계묘년 3월에 경미한 병증을 느꼈으나 행동과 언어가 조금도 변함이 없더니, 14일에 날이 저문 후에 부인에게 말하기를, “내가 올해 나이가 70이니 죽은들 다시 무슨 여한이 있겠소. 남자가 부인 앞에 숨을 거두지 않는 것이 옛 예이니, 여러 여종과 더불어 물러가 있으시오.” 하고, 또 경계하기를, “음성을 높이거나 급한 말로서 나를 동요시키지 말라.” 하더니, 조금 있다가 숨이 끊어지니 평소 수양의 깊이를 알 수 있다. 아들과 사위들이 영구를 받들고 서울로 돌아와서 모월 모일에 덕수(德水)에 있는 선영 아래에 안장하였다.공은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 시호 양간공(良簡公) 김승택(金承澤)의 딸을 아내로 맞아 자녀 둘을 낳았는데, 아들의 이름은 흥조(興祖)로 성격이 쾌활하며 큰 뜻이 있었고, 벼슬이 중현대부 군기감(中顯大夫軍器監)에 이르렀으며, 수원(水原)ㆍ해주(海州)의 부사(府使)를 역임하여 치적이 매우 현저하였으나, 취성(鷲城 신돈)의 손에 죽어 사람들이 지금까지 이를 불쌍히 여기고 있다. 딸은 봉선대부 내부부령(奉善大夫內府副令) 박문수(朴門壽)에게 출가하였으니, 신라의 시조 혁거세(赫居世)의 후손이다. 손자는 남녀 몇이 있으니, 군기는 감찰대부 신중전(申仲全)의 딸과 결혼하여 딸 하나를 낳았는데, 낭장 송의번(宋義番)에게 출가하였다. 내부(內府)는 2남을 낳았는데 장남 총(樷)은 학문을 좋아하고 뜻이 고상하였으며, 전(前) 봉선대부 좌우위 보승호군(奉善大夫左右衛保勝護軍)이었고, 다음 포(苞)는 진사시에 합격하고 전의녹사(典儀錄事)를 역임하였다. 외증손 몇이 있는데 모두 어리다. 호군(護軍)이 공의 행장으로 한산(韓山) 이색(李穡)에게 묘비명을 청하며 말하기를, “자네가 마땅히 명을 지어야 하네.” 하니, 이에 받아 가지고 서술하는 바이다. 아, 선생의 덕행과 정사가 이처럼 현저하니, 자손이 많아야 마땅하거늘 군기감의 후손이 없으니 이는 하늘이 정하지 않은 것이요, 또 이것이 하늘의 좋아하고 미워함이 사람과 다른 바이다. 아, 슬프도다. 하지만 다행한 일은 박씨가 있다는 것이다. 선비가 공을 세워 그 외조부를 드러내는 자가 역사서에 끊이지 않았으니, 박씨는 힘쓰고 또 힘쓰라. 다음과 같이 명을 쓴다.동쪽 언덕 / 惟東有岡푸른 저 솔숲은 / 有松蒼蒼군자의 저택이요 / 君子之宅못물 가득히 차고 / 池水之盈연꽃 향기 맑음은 / 蓮香之淸군자의 덕이로다 / 君子之德나아가 임금을 섬길 적엔 / 出以事君정사가 있고 문채가 있어 / 有政有文우리의 왕국을 바로잡았고 / 正我王國들어와 어버이를 모실 적엔 / 入以事親늙을수록 더욱 참되어 / 愈老愈眞백성의 풍속을 변화시켰네 / 化我民俗선생의 높은 풍모 / 先生之風널리 해동을 덮어 / 被于海東길이길이 법받을 것이로다 / 永世攸則내 이 명을 지음은 / 我作斯銘선생을 사적으로 좋아함이 아니요 / 匪私先生사필의 곧음이로다 / 史筆之直*광주(光州) 사람인 사공(司空) 김길(金吉)의 후손이다
    2022-05-06 | NO.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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