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덕촌집 제10권 / 비장(碑狀)-죽곡 묘지명〔竹谷墓誌銘〕 이장영

덕촌집 제10권 / 비장(碑狀)-죽곡 묘지명〔竹谷墓誌銘〕


옛날 중종 때 호남에 죽곡(竹谷) 이 선생 형제가 있었다. 덕행(德行)과 문장(文章)으로 일세 유림의 긍식(矜式)이 되었으나, 매양 낭서(郞署)와 주군(州郡)을 전전하다가 끝내 그 뜻과 공업을 밝은 시대에 펼치지 못하고 은둔하다가 세상을 떠나 길이 당세에 애석해 하는 바 되었고 후인들이 송모(誦慕)하는 바 되었다.

지금 선생이 작고하신 지 백여 년이 되어가고 병란을 겪은 나머지 집에 소장된 문적(文籍)이 거의 다 산실되었다. 지난번에 선생의 5세손 병(苪)이 유당(幽堂)에 묘지가 없어 세월이 오래될수록 징험할 길이 없음을 매우 두렵게 여겨 용암(龍庵) 처사 박공 태구(台耈)가 쓴 행장을 가지고 내게 와서 묘지명을 간청하므로 나는 사양하지 못하였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선생 형제는 실로 우리 집안의 선대와 정의가 매우 두터워 이미 그 유풍(流風)을 익숙히 듣고 있었다. 이에 감히 그 행장을 보고 사실을 차례로 서술하였다.

삼가 살펴보니 선생의 휘는 장영(長榮), 자는 수경(壽卿), 세계(世系)는 함풍(咸豐)에서 나왔다. 고려 광종(光宗) 때 상호군(上護軍) 언(彦)이 바로 비조(鼻祖)이며 5세를 지나 휘 광봉(光逢)은 벽상삼중좌명(壁上三重佐命)에 책훈(策勳)되고 함풍군(咸豐君)에 봉해져 자손은 이로 인하여 관향을 삼아 대대로 벼슬하였다. 또 6세를 지나 휘 희림(煕林)에 이르러 본조에 들어와 청주 판관(淸州判官)이 되었는데 선생의 5세조이다. 고조의 휘는 유(瑈)로, 경복궁 제거(景福宮提擧)였고, 증조의 휘는 안(岸)으로 참봉(參奉)을 지냈으며, 조부 계형(桂亨)은 부사직(副司直)을 역임하였고, 아버지 석(碩)은 생원(生員)이었다. 어머니는 나주 나씨(羅州羅氏)인 진사 윤(贇)의 딸이다. 선생의 형제는 7명으로, 장남 대영(大榮)은 문재(文才)가 있었으나 일찍 작고하고, 차남 백영(百榮)은 참봉, 그 다음은 천영(千榮)으로 생원, 그 다음은 만영(萬榮)으로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대시(臺侍)를 역임하였고 호는 죽음(竹陰)이며, 그 다음 억영(億榮)은 진사이고, 그 다음은 조영(兆榮)으로 통덕랑(通德郞)을 지냈고, 형제 중 막내가 바로 선생이다.

선생은 나주(羅州) 죽곡(竹谷)에서 태어나 이로 인하여 호를 죽곡(竹谷)이라 하였다. 이에 세상에서는 죽음(竹陰)과 죽곡 두 선생을 난형난제(難兄難弟)라 칭하였다. 선생은 정덕(正德) 신사년(1521, 중종16) 11월 30일에 태어났다. 나이 20세인 가정(嘉靖) 경자년(1540, 중종35)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고 무오년(1558, 명종13)에 명경(明經)으로 을과(乙科)에 발탁되었다. 경신년(1560, 명종15)에는 승문원에 선발되어 들어가 정자(正字)가 되었고, 신유년(1561, 명종16)에 북평사(北評事)에 제수되었으나 모부인이 연로하여 사직하고 돌아와 뵈었고, 임술년(1562, 명종17)에는 모친의 봉양을 위하여 수령으로 나가기를 청하여 함평(咸平) 현감(縣監)에 제수되었다. 계해년(癸亥年)에는 모친상을 당하여 3년간 여묘(廬墓)살이 하였고, 정묘년(丁卯年) 황해 도사(黃海都事)에 제수되었다. 무진년(戊辰年)에는 사간원(司諫院) 사간(司諫)에 제수되고, 기사년(己巳年)에는 장흥 부사(長興府使)로 제수되었다가 임기가 차서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제수되었으며, 임오년(壬午年)에는 함평 군수(咸陽郡守)로 제수되고 갑신년(甲申年)에는 성주 목사(星州牧使)에 제수되었으며, 을유년(乙酉年) 관직을 버리고 귀가(歸家)하였다. 병술년(丙戌年)에는 중시(重試)에 장원으로 발탁되어 전례에 따라 통정(通政)의 품계를 더해주고 승정원 우부승지(承政院右副承旨)에 제수되었다. 정해년(丁亥年)에는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에 제수되었으며, 무자년(戊子年)에는 양양 부사(襄陽府使)에 제수되었다. 기축년(1589, 선조22) 4월 21일 관직에 있을 때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69세였다.

대개 조정에 계신 지 32년 동안 내외직을 역임한 이력이 마땅히 이 정도에 그치지는 않을 것이나 오직 남아있는 교지(敎旨)에 의거하여 그 경개(梗槩)를 볼 수 있는 것이 이와 같을 뿐이다. 생원공(生員公)은 타고난 자질이 매우 높아 이미 성균관에 올랐으나 과거 공부를 폐하고 학문 탐구에 전념하여 예학(禮學)을 강명(講明)하고 자제들을 가르침에 한결같이 옳은 방도로 하였다. 모부인 나씨(羅氏)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후원(後園)에 세 개의 작은 서재를 나란히 두고 자제들을 나누어 거처하게 하면서 경학(經學)을 과업(課業)으로 하였다.

하루는 선생 형제가 앞개울에 나가 목욕을 하고 돌아와서 잡은 물고기를 드리니 모부인이 좋아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물고기는 내가 바라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고, 물리치고 회초리로 쳤으니 그 가법(家法)의 바름과 교도(敎導)의 엄함이 이와 같았다. 선생은 이미 예법이 있는 가문에서 태어나서 훈도에 젖어 습관이 본성과 더불어 이루어졌고 타고난 자질이 수연(粹然)하고 총명함이 남달라 막 말을 배울 때에 이미 스스로 말을 뱉으면 문장이 이루어졌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왕발(王勃)이라 칭찬하였다. 그리고 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효는 지성(至性)에서 나와서, 8세에 부친의 상을 당하여 능히 몸을 상할 정도로 슬퍼하고 정성을 다하였으니 대개 나이는 아직 성동(成童)이 되지 않았으나 문행(文行)이 병진(並進)하여 또래들이 따르고 복종하였다. 방백(方伯)이 그 명성을 듣고 본읍을 순행하다가 그 집을 방문하여 그 행동거지가 공순(恭順)하고 응대함이 예절에 맞아 엄연히 노숙한 성인과 같음을 보고 크게 칭탄(稱歎)하며 신동(神童)이라 지목하여 이로부터 성예(聲譽)가 더욱 파다하였다. 매일 새벽이면 모부인의 안부를 살피고 나와서는 서실로 나아가 종일 단정히 앉아 우러러 생각하고 고개 숙여 책을 읽되 힘써 노력하여 게으름을 잊었으니, 대개 일찍부터 양지(養志)의 효에서 스스로 터득하고 덕과 학문을 갈고 닦는 방도에 실제로 힘을 쓴 것이다.

성품는 본래 담박(淡泊)하여 사물에 대하여 좋아하는 것이 없었으나 오직 옛 서적을 탐독하기를 맛있는 음식이 입을 즐겁게 하는 것처럼 하였다. 평생 질병이나 사고가 아니면 일찍이 잠시라도 흘려보내지 않고 깊이 사색하고 탐구하느라 혹 음식을 먹어도 맛을 모르기까지 하였다. 비록 관직에 있으며 백성들을 다스리는 때라도 조금의 여가가 있으면 그때마다 책상을 대하여 송독(誦讀)하였다. 역학(易學)에 더욱 정밀하여 상수(象數)의 변화와 소장(消長)의 운행을 연구하여 관통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초연히 밝고 드넓은 근원을 홀로 보았고, 여사로 익힌 문장은 전중(典重)ㆍ온아(溫雅)하여 우뚝하게 일대의 통유(通儒)가 되었다. 일시의 선류(善類)들이 추중(推重)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조남명(曺南冥)ㆍ유미암(柳眉巖)ㆍ기고봉(奇高峯)ㆍ오덕계(吳德溪)ㆍ양송천(梁松川) 등 여러 선생들이 서로 따르며 강마(講劘)하여 늙도록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 연원(淵源)과 이택(麗澤)의 성대함이 이와 같았다.

성품이 꼿꼿하여 세상과 어울리지 않고 도(道)와 더불어 이웃하여 즐기며 근심을 잊고 단표누공(簞瓢屢空)의 상황에서도 대처함이 태연하였다. 전후로 역임하였던 주읍(州邑)은 웅부(雄府)와 대읍(大邑)이 아닌 경우가 없었으나 집에는 조금의 양식도 없었고 상자에는 여벌의 옷이 없었다. 평생의 저술은 겨우 시문(詩文) 각 수십 편이 집에 소장되어 있다. 필법은 또 힘이 굳세어 고인의 경지에 핍진하였으나 전해진 것은 더욱 많지 않다.

아, 이것은 모두 여러 명현가(名賢家)에 대대로 전해진 말과 본군(本郡)의 선행록(善行錄)에서 근근이 주워 모은 것이다. 언론과 사업은 그 상세함을 알 수 없지만 그 입심(立心)과 제행(制行)에 대해서는 그 본말을 볼 수 있다. 계해년 여묘살이 하던 시절에 원근에서 학문에 뜻을 둔 선비들이 모여들어 수업을 청하니 선생은 과업을 엄히 하여 가르치고 차근차근 잘 이끌어주었다. 또 학계(學誡)를 써서 일깨웠으니 대략 이르기를, “크게는 삼강오상(三綱五常)의 도이며, 세세하게는 일사일물(一事一物)의 은미함이 모두 내 마음 속에 갖춰지지 않음이 없으니, 곧 《대학》에서 말한 명덕(明德)이며, 《중용》에서 말한 천명(天命)이 이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한 가지라도 혹 은미한 중에 삼가지 않으면 한 터럭만큼의 차이가 끝내 천 리나 어그러지게 된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대개 정부자(程夫子)가 말한 천덕(天德)과 왕도(王道)는 그 요체가 다만 근독(謹獨)에 있다는 뜻이니 그 말의 뜻을 완미(玩味)하면 그것이 깊은 경지에 나아가 스스로 터득한 나머지에서 나온 것이며 전인(前人)의 말을 도습(蹈襲)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함양(咸陽)을 다스릴 때 방백(方伯)이 그 평가에 쓰기를, “청백은 백이(伯夷)와 같다.”고 하였고, 성주(星州)를 다스릴 때는 “추호도 어김이 없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전례를 따라 칭찬하여 등한(等閑)하게 품평한 것이 아니었다.

또 제봉(霽峯) 고 선생(高先生)이 그 장례에 지은 만사에 이르기를, “문자는 장산공(藏山公)의 후세요, 아손(兒孫)에게 남은 재물을 기탁할 곳이 없네.”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덕에 훈도되었던 이 생애 어찌 그런 날이 다시 올까, 노산(魯山)의 용모는 그림으로 그리기 어렵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또한 그 마음으로 기뻐하여 진심으로 복종하는 뜻을 볼 수 있다. 이 몇 가지 일로 논하면 바로 이른바 한 점의 고기로 솥 안의 고기 전부의 맛을 알 수 있다는 것이며, 봉의 깃털 하나로 오색의 갖춤을 안다는 것이니, 또한 족히 이것으로 후세에게 믿음을 주어 의심이 없을 것이다.

부인은 해주 오씨(海州吳氏)로 습독(習讀) 윤필(允弼)의 딸이며, 병조 참지(兵曹參知) 보(堡)의 손녀이다. 선생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 영광(靈光) 오개산(筽開山) □향의 자리에 부장(祔葬)하였다. 자녀는 4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곤(琨), 차남은 유(瑜), 그 다음은 선(璇)과 진(瑨)이다. 맏딸은 현감 정운룡(鄭雲龍)에게 출가하고, 둘째 딸은 생원 김경일(金敬一)에게 출가하였다. 곤은 아들이 둘인데 장남은 홍심(弘諶), 차남은 홍겸(弘謙)이다. 유는 3남2녀를 두었는데, 장남 홍순(弘詢)은 생원이고, 차남은 홍의(弘誼), 막내는 홍원(弘謜)이다. 첫째딸은 이형(李逈)에게 출가하였고, 둘째딸은 생원 송후옥(宋後玉)에게 출가하였다. 선은 아들이 둘인데, 홍기(弘記)와 홍식(弘識)이다. 진은 자식이 없어서 홍원을 후사로 삼았다. 정운룡은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두었는데, 아들은 성일(聖一), 첫째 사위는 군수 정홍록(丁弘祿)이고 둘째 사위는 김극순(金克純)이다. 김경일은 1남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기갑(奇甲)이며 딸은 김정길(金鼎吉)에게 출가하였다. 내외증현손(內外曾玄孫)이 몇 백 명 된다. 선생에게는 젊은 첩이 있었는데, 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 정신자수(貞信自守)하였다. 국상을 만나 이에 말하기를, “첩은 일찍이 대부(大夫)를 섬겨 늠록(廩祿)을 외람되이 먹었습니다.”라고 하고, 마침내 소복(素服)과 소식(素食)으로 석 달을 마쳤다. 측실에서 둔 딸이 하나 있는데 또 절행(節行)으로 정려(㫌閭)를 하사받았다. 이것으로 선생이 집안을 다스리는 일단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행(行)을 근본으로 삼고, 문(文)은 화려한 외식으로 여겼으며, 위(位)는 덕에 어울리지 않았으니, 하늘이 하는 것을 어찌할까. 높은 산과 큰 길과 같으니 불후(不朽)함이 이미 많았다. 오직 이 좋은 언덕의 진택(眞宅)은 길이 후인들의 찬탄을 받으리라.”

[주-D001] 옳은 방도 : 

의방(義方)은 일을 행함에 응당 준수해야 할 규범과 도리를 말한다. 《춘추좌씨전》은공(隱公) 3년 기사에 “석작이 간언하여 말하기를, 신이 듣건대 ‘아들을 사랑함에는 바른 길을 가르치어 나쁜 데로 들지 않게 하는 것이다.’고 합니다.〔石碏諫曰 臣聞愛子教之以義方 弗納於邪〕”라고 하였다.

[주-D002] 습관이 …… 이루어졌고 : 

《서경》 〈태갑 상(太甲上)〉에 “이 의롭지 못함은 습관이 본성과 더불어 이루어진 것이니, 나는 의리를 따르지 않는 자들과 가까이 하지 않겠다.〔茲乃不義 習與性成 予弗狎于弗順〕”라고 하였다.

[주-D003] 왕발(王勃) : 

650~676. 중국 당나라 초기의 시인으로, 자는 자안(子安)이다. 수나라 말의 유학자 왕통(王通)의 손자이다. 6세 때부터 문장을 짓는데 뛰어났으며, 9세 때에는 안사고(顔師古)가 주를 단 《한서(漢書)》를 읽고 그 오류를 지적하였다고 한다. 양형(楊炯)ㆍ노조린(盧照隣)ㆍ낙빈왕(駱賓王)과 함께 초당사걸(初唐四傑)로 일컬어진다. 저서로 《왕자안집(王子安集)》이 있다.

[주-D004]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 

인심(因心)은 마음에서 우러나와 억지로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시경》 〈황의(皇矣)〉에 “이 왕계가 마음으로부터 우애하시다.〔維此王季 因心則友〕”라고 하였다.

[주-D005] 양지(養志) : 

부모를 봉양함에 그 뜻에 순종하고 기쁘게 해드리는 효를 행한다는 말이다.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증자와 같이 하면 뜻을 봉양한다고 이를 만하다. 어버이 섬김을 증자와 같이 해야 한다.〔若曾子 則可謂養志也 事親若曾子者 可也〕”라고 하였다.

[주-D006] 옛 서적을 : 

분전(墳典)은 삼분오전(三墳五典)으로, 고대 전적을 통칭하는 말이다.

[주-D007] 맛있는 …… 것 : 

추환(芻豢)은 소ㆍ양ㆍ돼지 따위의 가축으로, 육류 식품을 두루 이른다.《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이와 의가 우리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은 마치 고기 음식이 우리의 입을 즐겁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理義之悅我心 猶芻豢之悅我口〕”라고 하였다.

[주-D008] 상수(象數) : 

《주역》의 상(象)과 수(數)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천(天)ㆍ일(日)ㆍ산(山)ㆍ택(澤) 등을 상이라 하고, 초(初)ㆍ상(上)ㆍ구(九)ㆍ육(六) 등을 수라 한다. 《춘추좌씨전》희공(僖公) 15년 기사에, “거북점은 형상으로 길흉을 나타내고 시초점은 수로 나타낸다. 만물이 생겨난 뒤에 형상이 있고, 형상이 있은 뒤에 점점 많아지고, 많아진 이후에 수가 있게 되었다.〔龜 象也 筮 數也 物生而後有象 象而後有滋 滋而後有數〕”라고 하였다.

[주-D009] 통유(通儒) : 

고금에 통달하여 학식이 깊고 넓은 유자를 말한다.

[주-D010] 조남명(曺南冥) : 

조식(曺植, 1501~1572)으로,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健中), 호는 남명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연구하여 대학자로 추앙받았으며 벼슬을 거절하고 은둔하며 학문에만 힘썼다. 그의 문하에서 정구(鄭逑)ㆍ정인홍(鄭仁弘)ㆍ곽재우(郭再祐) 등이 배출되었다. 대사간에 추증되고, 1615년(광해군7) 영의정에 증직되었으며 진주의 덕천서원(德川書院), 김해의 신산서원(新山書院), 삼가의 용암서원(龍巖書院) 등에 제향 되었다. 저서로는 《남명집》ㆍ《남명학기유편(南冥學記類編)》 등이 있다.

[주-D011] 유미암(柳眉巖) : 

유희춘(柳希春, 1513~1577)으로,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인중(仁仲), 호는 미암이다. 경전에 널리 통했고 제자(諸子)와 역사에도 능하였다.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 부제학, 전라도 관찰사, 대사헌, 형조ㆍ예조ㆍ공조ㆍ이조 참판 등 청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담양의 의암서원(義巖書院), 무장의 충현사(忠賢祠), 종성의 종산서원(鍾山書院)에 제향 되었다. 저서로는 《미암집》ㆍ《속몽구(續蒙求)》ㆍ《주자어류전해(朱子語類箋解)》 등이 있다.

[주-D012] 기고봉(奇高峯) : 

기대승(奇大升, 1527~1572)으로,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ㆍ존재(存齋)이다. 이황과의 서신 교환을 통하여 사칠논변(四七論辨)을 전개하였다. 성균관 대사성, 대사간, 공조 참의를 역임하였다. 광주의 월봉서원(月峰書院)에 제향 되었으며,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저서로는 《고봉집》ㆍ《논사록(論思錄)》ㆍ《이기왕복서(理氣往復書)》 등이 있다.

[주-D013] 오덕계(吳德溪) : 

오건(吳健, 1521~1574)으로,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자강(子强), 호는 덕계이다. 조식이 덕산동(德山洞)에서 강론하자 문인으로 수학했으며, 이황도 그의 학문이 정밀하고 심오함을 칭찬하였다. 정언, 교리, 이조 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산천의 서계서원(西溪書院)에 제향 되었다. 저서로는 《덕계문집》ㆍ《정묘일기(丁卯日記)》 등이 있다.

[주-D014] 양송천(梁松川) : 

양응정(梁應鼎, 1519~1581)으로,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공섭(公燮), 호는 송천이다. 시문에 능하여 선조 때 8문장의 한 사람으로 뽑혔으며 효행으로 정문이 세워졌다. 공조 좌랑, 진주 목사, 공조 참판, 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송천집》ㆍ《용성창수록(龍城唱酬錄)》 등이 있다.

[주-D015] 이택(麗澤) : 

두 못이 서로 붙어 있어 서로 불어나는 것처럼, 붕우 간에 서로 절차탁마한다는 말이다. 《주역》 〈태괘(兌卦) 상(象)〉에 “못이 연결된 것이 태이니 군자가 그 이치를 살펴 붕우들과 강습한다.〔麗澤兌 君子以朋友講習〕”라고 하였다.

[주-D016] 단표누공(簞瓢屢空) : 

《논어》 〈옹야(雍也)〉에 “한 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로 누추한 시골에 사는 것을 사람들은 그 근심을 견디지 못하는데 안회는 그 즐거움이 변치 않으니 어질구나, 안회여.〔一簞食 一瓢飲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 賢哉回也〕”라고 하였다. 《논어》 〈선진(先進)〉에 “안회는 도에 가까웠으나, 자주 끼니를 굶었다.〔回也其庶乎 屢空〕”라고 하였다.

[주-D017] 제행(制行) : 

도덕에 맞는 행위. 도덕과 행위의 준칙을 규정한다는 말이다. 《예기》 〈표기(表記)〉에 “성인이 백성들의 행동을 제어함에 자기가 능한 바로써 하지 않고, 백성으로 하여금 권면하고 부끄러워하는 바가 있게 하여 그 말을 행하게 한다.〔聖人之制行也 不制以己 使民有所勸勉愧恥 以行其言〕”라고 하였다.

[주-D018] 한 …… 된다 : 

《예기》 〈경해(經解)〉에 “역에 이르기를 ‘군자는 처음을 삼가야 하니, 처음에 호리의 차이가 나면 어그러지는 것은 천 리가 된다.’고 하였다.〔易曰 君子愼始 差若毫釐 繆以千里〕”라고 하였다.

[주-D019] 노산(魯山) : 

노산은 당나라 때 노산 영(魯山令)을 지낸 원덕수(元德秀, 696~754)를 말한다. 자는 자지(紫芝)이며 하남(河南) 사람이다. 사람됨이 청결하고 순박하며 청빈하게 삶을 살았다. 만년에 육혼산(陸渾山)에 은거하다 세상을 떠났다.

[주-D020] 마음으로 …… 복종하는 :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덕으로 사람을 복종시키는 자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기뻐하여 진실로 복종하는 것이니, 70제자가 공자에게 심복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以德服人者 中心悅而誠服也 如七十子之服孔子也〕”라고 하였다.

[주-D021] 한 …… 있다 : 

《회남자(淮南子)》 〈설림훈(說林訓)〉에 “한 점의 고기를 맛보면 솥 안의 고기 전부의 맛을 알 수 있다.〔嘗一臠肉而知一鑊之味〕”라고 하였다.

[주-D022] 봉의 …… 안다 : 

《주자어류(朱子語類)》 권48에 “봉의 깃털 하나만 보면 그 오색이 갖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觀鳳一羽 則知五色之備〕”라고 하였다.

[주-D023] 높은 …… 길 : 

《시경》 〈거할(車舝)〉에 “높은 산을 바라보며 큰 길을 가는구나.〔高山仰止 景行行止〕”라고 하였다.

[주-D024] 진택(眞宅) : 

사람이 죽은 뒤에 돌아가는 진정한 집이라는 말이다.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저자(연도) 제목 발행처
광주·전남향토사연구협의회(2003) 광주 향토사 연구 (사)광주·전남향토사연구협의회
광주광역시 동구청(2021) 동구의 인물2 광주광역시 동구청
광주시남구역사문화인물간행위원회(2015) 역사를 배우며 문화에 노닐다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01)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Ⅰ 인물과 문헌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01)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Ⅱ 문화유적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14) 광주 남구 마을(동)지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14) 광주 남구 민속지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21) 양림 인물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동구문화원(2014) 광주광역시 동구 마을문화총서 Ⅰ 광주동구문화원
광주문화관광탐험대(2011~16) 문화관광탐험대의 광주견문록Ⅰ~Ⅵ 누리집(2023.2
광주문화원연합회(2004) 광주의 다리 광주문화원연합회
광주문화원연합회(2020) 광주학 문헌과 현장이야기 광주문화원연합회
광주문화재단(2021) 근현대 광주 사람들 광주문화재단
광주북구문화원(2004) 북구의 문화유산 광주북구문화원
광주서구문화원(2014) 서구 마을이야기 광주서구문화원
광주시립민속박물관 옛 지도로 본 광주 광주시립민속박물관
광주시립민속박물관(2004) 국역 光州邑誌 광주시립민속박물관
광주시립민속박물관(2013) 영산강의 나루터 광주시립민속박물관
광주시립민속박물관(2018) 경양방죽과 태봉산 광주시립민속박물관
광주역사민속박물관(2020) 1896광주여행기 광주역사민속박물관
광주역사민속박물관(2021) 광주천 광주역사민속박물관
김경수(2005) 광주의 땅 이야기 향지사
김대현.정인서(2018) 광주금석문, 아름다운 이야기 광주문화원연합회
김정호(2014) 광주산책(상,하) 광주문화재단
김정호(2017) 100년 전 광주 향토지명 광주문화원연합회
김학휘(2013) 황룡강, 어등의맥 16집. 광산문화원
김학휘(2014) 광산의 노거수, 어등의맥 17집. 광산문화원
김학휘(2015) 광산나들이, 어등의맥 18집. 광산문화원
김학휘(2016) 설화와 전설, 어등골문화 21호. 광산문화원
김학휘(2018) 광산인물사, 어등의맥 21집. 광산문화원
김학휘(2019) 마을사이야기, 어등골문화. 광산문화원
남성숙(2017) 전라도 천년의 얼굴 광주매일신문
노성태(2016) 광주의 기억을 걷다 도서출판 살림터
노성테.신봉수(2014) 사진과 인물로 보는 광주학생독립운동 광주문화원연합회
박규상(2009) 광주연극사 문학들
박선홍(2015) 광주 1백년 광주문화재단
정인서(2016) 산 좋고 물 맑으니-광주의 정자 광주문화원연합회
정인서 외(2015) 광주의 옛길과 새길 시민의 소리
정인서(2011) 양림동 근대문화유산의 표정 대동문화재단
정인서(2011) 광주문화재이야기 대동문화재단
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2016) 광주 역사문화 자원 100(上,下) 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
천득염(2006) 광주건축100년 전남대학교출판부
한국학호남진흥원(2022) 광주향약 1,2,3. 한국학호남진흥원
  • 광주광역시
  • 한국학호남진흥원
  • 사이버광주읍성
  • 광주서구청
  • 광주동구청
  • 광주남구청
  • 광주북구청
  • 광주광산구청
  • 전남대학교
  • 조선대학교
  • 호남대학교
  • 광주대학교
  • 광주여자대학교
  • 남부대학교
  • 송원대학교
  • 동신대학교
  • 문화체육관광부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 국립아시아문화전당
  • 광주문화예술회관
  • 광주비엔날레
  • 광주시립미술관
  • 광주문화재단
  • 광주국립박물관
  • 광주시립민속박물관
  • 국민권익위원회
  • 국세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