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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원수 권공 신도비명 - 상촌선생집 제28권

도원수 권공 신도비명(都元帥權公神道碑銘) - 상촌선생집 제28권 : 상촌(象村) 신흠(申欽 : 1566~1628)

증 효충장의협력선무공신(效忠仗義協力宣武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ㆍ홍문관ㆍ예문관ㆍ춘추관ㆍ관상감사 세자사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 자헌대부 의정부우참찬 팔도도원수 권공(權公)의 묘도에 비석이 갖추어지자 우의정 신흠은 말을 다듬어 다음과 같이 새긴다.


공이 적을 쳐부순 공적은 간이(簡易) 최공 입(崔公岦)이 행주(幸州)의 비석에다 기록하였고 공의 아름다운 사적은 공의 사위 오성 상국(鰲城相國) 이공 항복(李公恒福)이 묘지(墓誌)에다 기록하였으므로 더 이상 추가할 것은 없겠으나, 옛날의 제도를 상고해 볼 때 공과 같이 위대한 분에 대해서는 신도비명을 짓는 것이 합당하니 마땅히 대로변에 세워 후세 사람에게 알려야 하지 않겠는가. 공의 휘는 율(慄), 자는 언신(彦愼)이다. 시조는 행(幸)으로 신라의 종성(宗姓)인데 견훤(甄萱)을 토벌하여 공을 세웠으므로 고려 태조가 권씨 성을 하사하고 안동(安東)에다 봉해주어 그대로 본관이 되었다. 13대를 내려와 부(溥)는 정승을 지내고 수복(壽福)으로 일생을 마쳤으며 한 가문에서 군(君)에 봉해진 자가 아홉 사람이나 되었다. 3대를 지나 근(近)은 벼슬이 찬성인데 곧 공의 6대조이다. 증조 교(僑)는 양근군수(楊根郡守)이고 조부 적(勣)은 강화 부사(江華府使)이고 선조 철(轍)은 의정부 영의정을 지냈는데 네 조정을 내리섬겨 태평 시대의 재상이 되었다. 선비 조씨(曹氏)는 적순부위(迪順副尉) 승현(承睍)의 따님으로 하성부원군(夏城府院君) 익청(益淸)의 후손이다.


가정(嘉靖) 정유년(1537, 중종32)에 공을 낳았는데 공은 어릴 적에 소꿉놀이를 좋아하지 않았고 장성해서도 부귀 자제의 호사를 즐기는 버릇이 없자 의정공이 기특하게 여겨 말하기를 “우리 가문에 인재가 나왔다.” 하였다. 경학(經學)을 열심히 공부하였으나 어릴 적에 불운하여 과거에 급제를 못하다가 만력 임오년(1582, 선조15)에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당시 나이는 46세로서 식자들 중에는 혹 장상(將相)의 그릇임을 아는 자도 있었다. 승문원의 정자ㆍ저작ㆍ박사로부터 성균관 전적으로 오른 뒤에 사헌부 감찰, 예조 좌랑, 호조 정랑, 전라도사(全羅道事), 경성판관(鏡城判官)으로 옮겼다. 신묘년에 다시 호조 정랑에 제수되고 승진하여 의주 목사(義州牧使)에 제수되었다가 임진년 봄에 사건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그해 여름에 일본 괴수 수길(秀吉)이 우리나라를 정복할 심산으로 수가(秀嘉)와 행장(行長)등을 위시한 60만 대군을 보내 침략을 감행하여 온 나라가 안절부절 혼란에 빠졌다. 선묘께서 하교하기를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권율의 재주는 시험해 볼 만하다 하였다.” 하고,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제수하니, 공은 그날로 임금을 하직하였다. 적이 문경 새재를 넘어 충주(忠州)를 함몰시키고 순변사(巡邊使) 신립(申砬)이 전사하였다. 적이 승승장구하여 경성에 바싹 다가오자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파천하였다. 전라도 관찰사 이광(李洸)이 충청도 관찰사 윤국형(尹國馨), 경상도 관찰사 김수(金睟)와 함께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진위(振威)에 당도하여 장수들에게 계책을 묻자, 공이 말하기를 “주공(主公)께서 온 지방의 군사들을 다 쓸어 거느리고 왔으니 나라의 존망이 이 한 번의 거사에 달렸습니다. 이제 마땅히 대군을 거느리고 곧장 수원(水原)으로 가 통진(通津)을 거쳐서 조강(祖江)을 건너 임진(臨津)을 차단하고 행재소에서 왕명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그 세력을 얻어 큰 공을 꾀할 수있을 것입니다.” 하였으나, 광은 그 말을 따르지 않아 적의 꼴을 보기도 전에 무너지고 말았다.


공은 광주(光州)로 돌아가 의기에 넘쳐 말하기를 “종묘사직이 폐허가 되고 주상께서 파천한 마당에 신하된 자로서 어찌 나라가 망하는 것을 앉아서 기다릴 수 있겠는가.” 하고, 주변의 고을에 격문을 돌려 군사 1천 5백 명을 모아 이치(梨峙)로 나아가 진을 치고 양남(兩南)의 목을 쥐었다. 영남의 적이 금산(錦山)의 적과 힘을 합쳐 공격해오자 공은 장검을 빼들고 뛰쳐나가 앞장서서 적의 칼날과 대항하니, 제장(諸將)이 서로 말하기를 “유자(儒者)도 이럴 수있단 말인가.” 하고, 사기가 백배하여 그들을 산기슭에서 무찔렀다.


조정에서는 공에게 거진(巨鎭)을 맡겨볼 생각으로 가을에 벼슬을 옮겨 나주(羅州)를 지키게 하였다가 임소에 부임하기 전에 승진시켜 전라관찰사 겸 순찰사를 제수하니, 공은 명을 받고 통곡하였다. 전주(全州)에서 대대적으로 군사를 모아 1만 명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올라갈 계책을 세우고서 수원(水原) 독성(禿城)을 점거, 근거지로 삼아 경성의 적을 위협하고 곧장 서로(西路)를 노리자 수가(秀嘉)는 빈틈을 찔릴까 두려워하고 행장(行長)은 후방을 공격받을까 염려하였으니, 마치 제방이 물을 막는 것처럼 앉아서 관서의 인심을 결집시켰다. 선묘께서는 상방검(尙方劍)을 풀어 보내주며 이르기를 “장수들 가운데 군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이것으로 처단하라.” 하고, 또 여러 진영의 의병을 전부 공의 통솔을 받도록 하였다. 경성의 적은 공의 위세에 눌려 예봉이 꺾였으며 수만 명의 군사를 출동하여 세 진영으로 짜 계속 싸움을 걸었으나 공은 성벽을 굳게 지키고 응전하지 않았으며 이따금 기병(奇兵)을 내보내 무찔렀다.


계사년에 독성으로부터 양천(陽川)으로 진영을 옮기고 군사를 나누어 각 지방을 지원하였으며, 곧장 양천강(陽川江)을 건너 성 서쪽 안현(鞍峴)으로 나아가 진을 치려고 하였으나 제장들이 극력 반대하여 고양(高陽) 행주산(幸州山)에 진을 쳤다. 경성의 적은 이때 세력이 한창 불어났는데 공이 적은 군사로 깊이 들어간 것을 보고 2월 12일에 그들의 정병을 전부 동원하여 두 길로 나누어서 밤중에 행주성을 공격해왔다. 공이 일어나 내려다 보니, 적의 총칼이 온 들판을 뒤덮고 성을 몇 겹으로 포의한 상황이었다. 공은 즉시 사졸들에게 주먹밥을 돌려 먹게 한 뒤에 활을 잘 쏘는 자를 뽑아 성가퀴에 배치시켜 화살을 빗발처럼 쏟아붓고 또 힘센 사람을 뽑아 돌을 던져 내리치며 뒤이어 차자화(車子火)를 쏘았다. 아침부터 날이 저물 때까지 적은 아홉 번 진격해 들어왔다가 아홉 번 퇴각하였다. 급기야는 적이 풀단[束草] 가지고 불을 지르며 크게 소리치면서 성을 올라오자, 공은 상방검을 뽑아들고 서서 장수들을 독려하니 장수들이 앞을 다투어 접전하여 적이 마침내 물러갔다. 적의 장졸은 죽은 자가 부지기수였고 군수 물자를 버려두고 도망갔으며 적의 머리 1백 30여 급을 거두어 베었다.


조정에 승전보가 들어가자 특지로 자헌대부에 가자하고 장사(將士)들에게도 차등을 두어 상을 내렸다. 황조의 유격대장 사대수(査大受)가 찾아와 공을 보고 감탄하기를 “외국에도 진짜 장수가 있구나.” 하였으며,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은 이자(移咨)하여 칭찬하기를 “권 포정(權佈政)은 국난 속의 충신이요 중흥을 이룩한 명장이라 이를 만하다.” 하고, 채단과 백금 등 물품을 상으로 주었다. 병부 상서 석성(石星)은 천자에게 아뢰기를 “배신(陪臣) 권율은 홀로 외로운 성을 지켜 막강한 적과 대항하였다.” 하였고, 천자도 가상히 여겨 말하기를 “전라도에서 적을 참획한 수효가 많아 그 나라의 인민이 그런대로 진작될 수 있었다.” 하였다.


공은 행주의 적을 무찌른 뒤에 진영을 파주(坡州)로 옮겼다. 파주는 곧 서쪽으로 뻗은 큰길이 있어 적이 꺼려하였다. 다시 행주에서의 패배를 갚기 위해 피를 뽑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공을 공격하려 계획하였다가 끝내 감히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물러갔다. 4월에 경성의 적이 도망갈 때 공은 경무장한 군사로 그 뒤를 추격하려 했는데 때마침 제독 이여송(李如松)이 계책을 써 적의 퇴각을 추진하는 중이라서 공으로 하여금 남쪽으로 내려가지 못하게 하였다.


6월에 제도 도원수(諸道都元帥)로 제배되어 영남에 머물러 있다가 겨울에 형조 판서가 되고 의정부 우참찬으로 전임되었다. 갑오년 봄에 신병으로 사직을 청하니, 선묘께서 염려한 나머지 의원을 잇달아 내보냈다. 무사 하나가 전장에 나가는 것을 피해 전주(全州)에 숨어 있으므로 공이 그를 참수하였는데 체찰사가 그 가족의 하소연을 곧이듣고 공을 문책할 것을 청하여 파직되자, 웃으며 말하기를 “몇 년 동안 장수로 있던 내가 군법으로 병졸 하나를 참수할 수 없단 말인가.” 하고서, 모든 일을 사절하고 고향 강화(江華)로 돌아갔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다시 한성 판윤(漢城判尹), 호조 판서, 지의금부사에 제수되고 비변사 당상관을 겸임하였다. 어전에 입시하였을 때 선묘께서 하교하기를 “경이 아니었더라면 국가가 어찌 오늘이 있었겠는가.” 하고, 내구마(內廐馬)를 하사하였다. 병신년에 충청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는데 선묘께서 다시 특명으로 도원수를 삼고 이르기를 “경은 충성과 공로가 크게 드러나고 용맹과 지략이 세상에 뛰어나 이름이 천하에 자자하고 위세가 적국을 떨게 하였으니, 경을 놓아두고 원수의 직책을 누구에게 맡기겠는가.” 하였다. 조정을 하직할 때 임금은 공을 불러 접견하고 술을 내려 마음을 달래줬으며 또다시 내구마를 하사하였다.


7월에 호서(湖西)의 사인(士人) 이몽학(李夢鶴)이 모반하여 다섯 고을을 잇달아 함몰시키자 조정에서 공에게 그들을 토벌할 것을 명하였다. 공이 군사를 거느리고 급히 달려가 보니 적은 이미 홍주(洪州)에서 잡혀 죽은 뒤였는데, 그 도당의 죄를 다스리고 억울한 자는 재심하는 일을 매우 분명히 하여 호서 지방이 안정을 되찾았다.


겨울에 일본에서 돌아온 우리나라 사람이, 청정(淸正)이 재차 침략하려 한다고 말을 전하여 조야가 술렁거리자 공은 말하기를 “설사 청정이 다시 쳐들어온다 하더라도 그에 대처할 방도가 있게 마련인데 머리를 맞대고서 걱정만 하고 있으니,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고 진영을 나누어 배치하여 적을 제압할 계책을 상주하였다. 정유년 가을에 과연 다시 침입하여 진주(晉州)와 남원(南原)을 함몰시키고 곧장 경기로 향해 올라오자 공은 일변 싸우고 일변 행군을 하면서 적의 수급을 베어 조정에 보고하였다. 그러다가 임금의 부름을 받고 조정으로 들어갔는데 공의 힘에 의해 한강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조정으로 돌아온 그 이튿날 중국의 장관(將官) 팽우덕(彭友德)과 한강을 도로 건너가 직산(稷山)에서 접전하여 크게 무찔렀다.


겨울에 중국이 대군을 출동하여 제독(提督) 마귀(麻貴)와 경리(經理) 양호(楊鎬)를 보내 울산(蔚山)의 적을 공격하였는데, 공은 본국의 토병을 거느리고 선봉에 서서 맨 앞에 돌진하며 뒤처진 자를 참수하여 조리돌리자, 모든 군사가 사기 충천하여 적의 성벽을 개미떼처럼 달라붙어 올라가 그 외성(外城)을 함락하니, 제독과 경리가 입을 모아 칭찬하였다. 무술년 봄에 신병으로 면직을 청하자 선묘께서 위로하는 말로 달래주고 애써 만류하였다. 중국이 병부 상서 형개(邢玠)를 보내 세 제독을 독려하여 길을 나누어서 적을 칠 때 공은 유정(劉綎)을 따라 순천(順天)의 적을 공격하였는데, 유정은 심중에 싸울 뜻이 없어 머뭇거리며 진격하지 않으므로 공이 여러 번 계책을 건의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얼마 안 되어 적들은 수군도독(水軍都督) 진인(陳璘)에게 대패하고 또 그들의 괴수 수길이 죽었기 때문에 각도의 적이 모두 철수하여 돌아갔다.


기해년(1599, 선조32) 여름에 공은 병세가 위독해져 사직하니 선묘께서 윤허하여 체직되었으며 7월 6일에 마침내 일어나지 못했으니, 향년 62세였다. 선묘는 크게 슬퍼하여 조회를 일시 중지하고 부의를 많이 내렸으며 관원을 보내 치제하고 찬성을 증직할 것을 명하였다. 9월에 양주(楊州) 홍복산(洪福山) 술좌(戌坐)의 자리에 장사지냈는데 선영이 있는 곳이다. 이듬해 을사년에 논공(論功)할 때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책록되고 영의정과 부원군에 추증되었다.


공의 전부인은 창녕 조씨(昌寧曹氏)로 첨정(僉正) 휘원(輝遠)의 따님인데 따뜻하고 정중하며 부드럽고 후덕하여 내간의 규범이 있었다. 향년 24세에 별세하고 정경부인에 추증되었으며 딸 하나를 두었는데 곧 오성공(鰲城公)의 부인이다. 2남 1녀를 낳아 장남은 성남(星男)이고 차남은 정남(井男)인데 다 음직으로 벼슬하여 군수가 되었으며, 딸은 윤인옥(尹仁沃)에게 시집갔다. 성남은 처음에 판서 권징(權徵)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았고, 뒤에 주부 김계남(金繼男)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4녀를 낳았으며, 정남은 승지 윤의(尹顗)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았고, 윤인옥은 1남 1녀를 낳았다. 후부인 박씨(朴氏)는 죽산(竹山) 거족으로 현령 세형(世炯)의 따님인데 총명하고 자애로워 법도를 지켰으며 시어머니와 공을 잘 받들어 일체 뜻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 공이 별세한 뒤에는 미망인으로 자처하고 명절과 세시(歲時)의 제사를 예법대로 하지 않은 일이 없었으며, 이따금 의복을 지어 제물을 차리고서 태워드렸다. 공보다 10년 뒤에 별세하였으니 무신년 2월이었으며 향년은 62세였고 정경부인에 봉해졌다. 4월에 공의 묘역에 부장(祔葬)하였다.


아들이 없어 공은 중씨(仲氏)의 아들 익경(益慶)을 데려다가 후사로 삼았는데 익경은 음직으로 벼슬하여 현감이 되었다. 처음에 이광륜(李光輪)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을 낳아 집(㠎)은 무과에 급제하여 현감이고, 다음은 입(岦)과 업(嶪)이며, 뒤에 이정(李淨)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3녀를 낳아 아들은 헌(巘)이고 딸은 이도기(李道基)에게 시집갔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집은 2남 1녀를 두고, 업은 1남을 두고, 도기는 1남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공은 팔척 장신으로 용모가 준수하였으며 풍채가 엄중하고 행실이 충직하였다. 부모 형제에 대해서는 유쾌하고 부드러우며 온화하고 너그러웠는가 하면 초상 때 슬퍼하고 제사 때 정성을 드리는 것이 한결같이 진정으로부터 우러나왔으며, 종족을 잘 대우하여 모두에게 환심을 얻었다. 천성이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여 집안에 귀한 물건이 없었으며 일을 주밀하고 신중히 처리하여 하는 일마다 반드시 만전을 기하였다. 적진과 대치하고 있을 때는 언행이 여유만만하였으며, 원수의 깃발을 세우고 원수부를 열고서는 재차 진영을 총괄할 때는 사졸의 선봉이 되어 위험을 무릅썼고 호령이 엄하고 분명하였으므로 장사(將士)가 잘 따라주어 계책이 행해지고 공이 뒤따랐다. 큰 적을 섬멸하여 적은 군사로 수많은 적을 대적한 것은 옛날의 명장이라도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 황조의 상서 석성(石星)은 우리나라의 사자를 만나 공의 안부를 물으며 말하기를 “그대의 나라에 권공과 같은 사람이 몇 명만 더 있다면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하였으며, 왜인도 우리나라 사람을 보면 반드시 권 원수는 지금 어디에 계시냐고 물었으니, 중국과 오랑캐가 다같이 이처럼 탄복하였다. 군중에 있을때 손수 성지(聖旨) 및 천조의 자문과 게첩을 베끼며 말하기를 “내가 죽으면 이 의정(李議政 이항복을 말함)이 반드시 내 묘지명을 지을 것인데 그 자료는 이것이면 충분하다.” 하였다. 큰 짐을 벗은 뒤에는 고향 강화도에 집 한 칸을 짓고 만취헌(晩翠軒)이라 자호하였으니, 은연중 자신의 뜻을 가탁한 것이다.


아, 흠은 공이 원수로 계실 때 막좌(幕佐)로 있었는데 우경(虞卿)의 백벽(白璧) 같은 사랑을 받았으나 중랑(中郞)의 황견(黃絹) 같은 문장이 없다. 삼가 공에 대해 일찍이 평하기를 “높은 산 깊은 숲에 용호(龍虎)가 변화무쌍하다는 말이 공에게 적격이다. 분양(汾陽)의 공을 이루고서도 중서(中書)의 벼슬을 하지 못하고 진공(晉公)의 덕을 지니고서도 녹야(綠野)의 낙을 누리지 못했으니 이 점이 한탄스럽다. 충절을 지키며 심신을 다 바쳐 한 몸에 나라의 안위를 짊어지고 단서(丹書) 철권(鐵券)에 이름이 올라 그 명성이 영원히 전해지는 점에 있어서는 충분히 저 두 공과 짝을 이룰 만하다.” 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지난 과거 임진년에 / 若昔壬辰
미련한 저 생물들이 / 蠢彼介鱗
흉한 마음 지니고서 / 鞠頑裒兇
침략하여 미쳐 뛰니 / 奔突跳躑
무찌를 자 누구인가 / 孰獮孰剔
널린 것이 적들일레 / 遍我箕封
우리 임금 하문하길 / 惟上曰咨
아군을 뉘 지휘할꼬 / 疇董我師
적임자 곧 그대로다 / 繄爾其才
공은 중책 받고나서 / 公膺其重
조선 팔도 총괄하니 / 八路是總
꺼진 재에 불붙었네 / 再燃于灰
행주에서 적을 이겨 / 熸之于幸
큰 세력을 깨부수며 / 大鋤其梗
직산 울산 누비었고 / 于稷于蔚
좌우 수륙 거침없이 / 左水右陸
목을 잡고 등때리니 / 扼項批脊
우릴 감히 넘볼쏘냐 / 莫我敢越
북두 다시 높아지고 / 斗極更恢
황도 또한 트였으니 / 黃道褰開
이는 공의 업적이요 / 伊公之烈
사람 모두 동조하고 / 人謀畢凝
신도 재능 인정하니 / 鬼神與能
이는 공의 계책이요 / 伊公之籌
밝디 밝은 위광에다 / 赫赫厥靈
높디 높은 명성이란 / 巍巍其名
바로 공의 경사이고 / 伊公之休
까마득히 솟은 산과 / 有山嶻峛
헌거롭게 놓인 비석 / 有碑嵽嵲
바로 공의 무덤일세 / 伊公之藏
나는 공의 막좌로서 / 公有幕佐
공의 사적 선양하여 / 載揚載播
무덤 앞에 새긴다오 / 銘于墓陽


[주-D001] 우경(虞卿)의 …… 없다 : 
상촌 자신이 권율 생전에 권율로부터 각별한 사랑과 인정을 받았으나 권율이 작고하여 그 비문을 짓는 지금 평생의 사적을 훌륭하게 묘사할 문장을 지니지 못했다는 것임. 전국 시대 변설가 우경이 미천한 신분으로 조 효성왕(趙孝成王)을 유세하자, 왕은 한번 만나보고 황금 백 근과 백벽 한 쌍을 하사하였다고 함. 황견은 색사(色絲)로 절(絶)자의 은어임. 한 나라 채옹(蔡邕)이 효녀 조아(曹娥)의 비문을 잘 지어 어떤 사람이 그 비문을 읽고 비석 뒷면에 ‘황견유부외손제구(黃絹幼婦外孫齏臼)’라고 기록해 두었는데 재사(才士)인 조조(曹操)의 주부(主簿) 양수(楊修)에 의해 그곳이 ‘절묘호사(絶妙好辭)’의 은어임이 밝혀졌음.《史記 卷76 虞卿傳》《世說新語 捷悟》
[주-D002] 높은 산 …… 말 : 
《五百家注昌黎文集 卷33 唐故殿中少監 馬君 墓誌》에 “그 당시에 장무왕(莊武王 성명은 마수(馬燧))을 북정(北亭)에서 만났는데 마치 높은 산 깊은 숲에 용호가 변화무쌍한 듯하였으니, 걸출한 인물이었다.” 하였음.
[주-D003] 분양(汾陽)의 …… 못하고 : 
분양은 당 현종(唐玄宗) 때의 명장 곽자의(郭子儀)의 봉호. 삭방절도사(蒴方節度使)로 안록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의 난리를 평정하였고 토번(吐蕃)과 회흘(回紇)의 잦은 침입을 막아 20여 년간 국가의 안위를 책임졌으며, 벼슬이 중서령(中書令)에 이르고 분양군왕(汾陽郡王)에 봉해졌다. 권율이 임진왜란 때 왜적을 물리쳐 나라를 보전한 공이 곽자의의 그것에 비해 손색이 없는데도 충분한 보상을 받지 못했다는 것임. 《新唐書 卷137 郭子儀傳》
[주-D004] 진공(晉公) …… 못했으니 : 
진공은 당 헌종(唐憲宗) 때의 재상 배도(裵度)의 봉호. 회주(淮州)ㆍ채주(蔡州)가 조정에 반기를 들었을 때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각군을 지휘해 진군하여 채주 자사(蔡州刺史) 오원제(吳元濟)를 사로잡아 그 공으로 진국공(晉國公)에 봉해지고 재상이 되었으나 항상 겸손하였다. 문종(文宗) 때 동도 유수(東都留守)가 되어 녹야당(綠野堂)이란 별장을 세우고 백거이(白居易)ㆍ유우석(劉禹錫) 등 명사들과 즐겁게 나날을 보냈음.《新唐書 卷173 裵度傳》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저자(연도) 제목 발행처
광주·전남향토사연구협의회(2003) 광주 향토사 연구 (사)광주·전남향토사연구협의회
광주광역시 동구청(2021) 동구의 인물2 광주광역시 동구청
광주시남구역사문화인물간행위원회(2015) 역사를 배우며 문화에 노닐다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01)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Ⅰ 인물과 문헌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01)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Ⅱ 문화유적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14) 광주 남구 마을(동)지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14) 광주 남구 민속지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21) 양림 인물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동구문화원(2014) 광주광역시 동구 마을문화총서 Ⅰ 광주동구문화원
광주문화관광탐험대(2011~16) 문화관광탐험대의 광주견문록Ⅰ~Ⅵ 누리집(2023.2
광주문화원연합회(2004) 광주의 다리 광주문화원연합회
광주문화원연합회(2020) 광주학 문헌과 현장이야기 광주문화원연합회
광주문화재단(2021) 근현대 광주 사람들 광주문화재단
광주북구문화원(2004) 북구의 문화유산 광주북구문화원
광주서구문화원(2014) 서구 마을이야기 광주서구문화원
광주시립민속박물관 옛 지도로 본 광주 광주시립민속박물관
광주시립민속박물관(2004) 국역 光州邑誌 광주시립민속박물관
광주시립민속박물관(2013) 영산강의 나루터 광주시립민속박물관
광주시립민속박물관(2018) 경양방죽과 태봉산 광주시립민속박물관
광주역사민속박물관(2020) 1896광주여행기 광주역사민속박물관
광주역사민속박물관(2021) 광주천 광주역사민속박물관
김경수(2005) 광주의 땅 이야기 향지사
김대현.정인서(2018) 광주금석문, 아름다운 이야기 광주문화원연합회
김정호(2014) 광주산책(상,하) 광주문화재단
김정호(2017) 100년 전 광주 향토지명 광주문화원연합회
김학휘(2013) 황룡강, 어등의맥 16집. 광산문화원
김학휘(2014) 광산의 노거수, 어등의맥 17집. 광산문화원
김학휘(2015) 광산나들이, 어등의맥 18집. 광산문화원
김학휘(2016) 설화와 전설, 어등골문화 21호. 광산문화원
김학휘(2018) 광산인물사, 어등의맥 21집. 광산문화원
김학휘(2019) 마을사이야기, 어등골문화. 광산문화원
남성숙(2017) 전라도 천년의 얼굴 광주매일신문
노성태(2016) 광주의 기억을 걷다 도서출판 살림터
노성테.신봉수(2014) 사진과 인물로 보는 광주학생독립운동 광주문화원연합회
박규상(2009) 광주연극사 문학들
박선홍(2015) 광주 1백년 광주문화재단
정인서(2016) 산 좋고 물 맑으니-광주의 정자 광주문화원연합회
정인서 외(2015) 광주의 옛길과 새길 시민의 소리
정인서(2011) 양림동 근대문화유산의 표정 대동문화재단
정인서(2011) 광주문화재이야기 대동문화재단
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2016) 광주 역사문화 자원 100(上,下) 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
천득염(2006) 광주건축100년 전남대학교출판부
한국학호남진흥원(2022) 광주향약 1,2,3. 한국학호남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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