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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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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竹塢權公墓誌銘 幷序 -노백헌집(老柏軒集) 권41
    竹塢權公墓誌銘 幷序 - 권정희(權應五)이다.권준(權濬, 1578~1642), 광주목사로 의령 안동권씨 명석적의 입향조이다. 권정희는 그의 후손이다.노백헌집(老柏軒集) 권41영오(英五), 후윤(厚允)이고, 호는 기정진(奇正鎭)의 문인. 김석귀(金錫龜), 정의림(鄭義林), 기우만(奇宇萬), 허유(許愈), 곽종석(郭鍾錫) 등과 교유했다.竹塢居士權公。隱居鵬山之中。築亭逍遙。其言曰。人之志大如鵬。可以逍遙於世。我非其人。只寓懷於逍遙耳。童稺灑掃。課日伊吾。亦一逍遙也。賓朋時至。琴酒嘯咏。亦一逍遙也。竊惟逍遙本旨。隨意自適。不受物惹絆之意。而南華老人託志虛曠。蓋遊方之外者。若公隨遇隨安。寓至樂於名敎之中。觀於此。公之爲公。槩可見矣。公諱珽煕字應五。高麗太師諱幸。始得姓。食邑安東。諱漢功諡文坦。諱仲達諡忠憲。遂爲東方顯閥。諱嗣宗判吏部。自是仕我朝世簪纓。諱濬號霜嵒。遊鄭寒岡門。光海昏朝。杜門完節。仁廟丙子。以光牧倡義旅勤王。聞和成而歸。不復仕。是生諱克履有隱德。始家宜寧。是生諱欽贈司僕正。是生諱宇亨文牧使。監連山時。尤齋先生謫耽羅。延送盡禮。及楚山柩歸。迎哭奠賻。坐是罷黜。後贈左承旨。是生諱壽期。有行誼贈參判。是生諱翕有才早亡。是生諱佖中號納新齋。師事尹屛溪。寔公之高祖也。曾祖諱思宅。祖諱正夏通德郞。考諱秉肅。妣光州盧氏。慶祖女。有婦德。公自幼志尙異凡。見人爲不義。不忍不告。人多敬憚。嘗赴擧入塲。見塲屋風色不佳。折券而歸。遂挈家入鵬山。養竹千竿。因以自號。脫略世絆。結情雲山。悠然有自得之趣。收敎村子弟。與里人倣呂約。春秋勸懲。峽俗漸化。恒以早孤不克終養爲至痛。祭必盡誠。口不葷腥。省掃以時。雖衰老不廢。子孫皆循循雅飭。參鉉早知爲儒方。勉勉於內修。庶幾不遷於時學者。公之身敎然也。己亥十一月八日考終。距生乙酉。壽七十五。葬于洛西方寺洞午坐原。從先兆也。配全州全氏。文國女。先公卒。葬鵬山村後亥坐。子三男一女。載鳳,載庸,載學出後。女適陳益煥。孫七男五女。參鉉,永鉉,徐炳奎妻長房出。榮鉉,商鉉,奭鉉,盧直洪妻仲房出。夏鉉,玠鉉,盧賢圭妻。二未行。季房出。內外曾玄繁不盡名。載鳳納誌幽堂。使參鉉述行。徵銘於不佞。不佞嘗屢承顔色者。遂櫽栝而序之。繼以銘。銘曰。
    2023-07-31 | NO.97
  • 竹塢處士權公 (珽煕) 墓表- 심석재집(心石齋集) 권29
    竹塢處士權公 (珽煕) 墓表- 권정희(權珽煕,1825~1899)의 자는 응오(應五)이다.심석재집(心石齋集) 권29송병순(宋秉珣, 1839~1912)의 자는 심석재(心石齋)이다. 入山。耕樵以供滫瀡。築精舍於閒曠一區。扁以鵬山亭。識之曰。人固志大如鵬。可以遊於世。然我非其人。只取閒地之逍遙耳。灑掃庭除。伊吾課業。琴酒嘯咏。竟日歡娛。亦一逍遙也。又以詩述懷曰。棲息殘年於此足。向人何暇問竆通。於此槩可見其藏修之樂矣。嘗與里人倣藍田鄕約。春秋會集。勸以德業。規以過失。里俗漸化。永成遺模。每語及事親。輒流涕曰。凡爲人子。生當盡歡。猶有風樹之憾。况未克終養者乎。喪餘之日。必致如在之誠。雖及隆耋。不進薰腥。省掃以時。不以氣衰或廢。非終身慕其親者。烏能如是。人皆光牧齋。受學于屛溪尹文獻公。屢登剡薦。諱思宅。諱正夏通德郞。祖以上昭穆也。考諱秉肅。令德克世其家。妣光州盧氏。慶祖女。克有壼範。配全州全氏。文國之女。與公同年而生。先公五年而圽。墓在鵬山乾坐原。擧三男一女。男長載鳳。次載庸。季載學出其叔父后。女適陳益煥。曰參鉉,永鉉,徐炳奎妻長房出也。曰瑨鉉,商鉉,奭鉉,盧直洪妻仲房出也。曰夏鉉,玠鉉,盧賢圭妻過房出也。餘幼不盡錄。噫。公淸直其行。可敦薄夫之俗。高尙其操。無愧隱淪之躅。古人所云竆居求道者。非公而伊誰哉。參鉉抱家狀而徵墓文於余。余雖蕪拙。揆以先契。終難孤負。略敍如右。且戒樵牧曰勿歌嘯踐傷於此。此竹塢處士衣履之藏也。
    2023-07-31 | NO.96
  • 處士權公墓碣銘- 월고집(月皐集) 권15 / 墓碣銘
    處士權公墓碣銘- 權思璨월고집(月皐集) 권15 / 墓碣銘직교(直敎), 호는 기정진(奇正鎭)의 문인. 정태원(鄭泰元), 이최선(李最善), 김녹휴(金祿休), 최익현(崔益鉉), 기우만(奇宇萬) 등과 교유했다.處士權公諱思璨。歿已八十餘禩。其玄孫載斗請碣銘于趙性家曰。府君望實俱隆。足以不朽。而狀誌俱闕。惟挽祭一卷存焉。且家庭間耳口傳授。猶有未盡泯者。乃敢述其表著者一二爲行錄。邀惠公一言以賁于阡。性家嘗撰處士公之孫曾幽窩,西洲父子文字矣。今益昏瞀。何敢上而至於處士公金石事乎。禮辭不獲。敢攟摭而著之銘。敍其世裔生卒婚嗣于左。銘曰。公字義之。其先安東人也。文坦忠憲兩公。大顯麗季。入我朝簪組不絶。進士繼祐。始居丹城。霜巖諱濬。出爲光牧。入爲樂正。有名節。曾祖壽鵬贈僕正。祖????考有中。代有儒望。全義李石臣。妣之父也。公生以英廟癸酉四月。卒以純祖己卯八月十九日。春秋六十七。配海州鄭胤新女。有賢行。墓中麻卯坐。男女各二。男長敍夏早卒無嗣。次敬夏。壻許欑,朴煕性。敬夏三男。長秉天系伯父。次秉祚,季秉佑。曾孫以下不盡錄。
    2023-07-31 | NO.95
  • 觀察使崔公神道碑銘 최철견- 상촌선생집 권28 / 신도비명(神道碑銘)
    상촌선생집 권28 / 신도비명(神道碑銘)그 뒤에 흠은 과거에 급제하여 낭서(郞署)를 역임하고 만력 임진년에 체찰사의 막하에 차출되어 그 부관으로 호남을 순찰하였는데, 몽은공은 그때 전라 도사(全羅都事)로 있었으므로 날마다 함께 어울려 군중의 일을 같이 처결하는 과정에서 더욱 어느 한 지역을 담당할 만하다는 것을 알았으며 아울러 공의 임진년 사적을 얻어들었으니, 다음과 같다. 공이 군병을 거느리고 남원을 지키고 있을 때 중국 참장 낙상지(駱尙志)가 순천(順天)에서 진주(晉州)가 함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남원으로 와 공과 합류하였다. 그런데 적의 기병이 주변 고을까지 접근하여 남원 사람들이 술렁거리며 밧줄을 타고 성을 빠져나가자, 어느 한 역관(譯官)이 공에게 피신할 것을 권하였으나 공은 흔들리지 않으니 낙장(駱將)이 의롭게 여겼다. 고의 휘는 철견(鐵堅), 자는 응구(應久)이고 몽은은 그의 호이다. 최씨의 선계는 전주에서 나왔는데 원조(遠祖) 득평(得枰)은 고려조를 보좌하였고 본조에 들어와 대대로 관직을 살았다. 고조 효기(孝基)는 증 이조 참판이고 증조 해(瀣)는 이조 참의이고 조부 희증(希曾)은 숨은 덕이 있었는데 증 형조 참의이며, 선고 역(櫟)은 증 호조 참판이고 선비 이씨는 선계가 선파(璿派)에서 나왔는데 희릉령 석(熙陵令晳)의 따님이다. 가정 무신년(1548, 명종3)에 공을 낳았다.경인년에 다시 병조로 들어가 정랑이 되었으며 서장관으로 연경에 갔다가 돌아와서 직강과 병조 정랑이 되었고, 지방으로 나가 전라 도사(全羅都事)가 되었는데 공로를 인정받아 승진하여 풍저창 수(豐儲倉守)를 겸임하였다.신축년에 황해관찰사에 제수되고 호조 참의로 체직되었으며 갑진년에 춘천 부사(春川府使)가 되었다가 신병으로 해직되어 돌아왔다. 무신년에 선묘가 승하하셨을 때 풍수가의 말로 인해 산릉을 오래도록 잡지 못하자 공은 상소하여 그 부당함을 말함으로써 조정의 논의가 마침내 결정되었다. 만년에 신병이 들어 근 10년 동안 칩거 생활을 하다가 무오년(1618, 광해군10) 겨울에 마침내 일어나지 못했으니, 향년 71세였다. 이듬해 기미년에 양주(楊州) 송산(松山) 해좌(亥坐)의 자리에 장사지냈는데 선영이 있는 곳이다. 부인은 진주 정씨(晉州鄭氏)로 진사 윤붕(允弸)의 따님인데 공보다 7년 앞서 작고했으며 공과 합장하였다.공은 담박하고 차분하여 공명을 세우는 것을 일삼지 않았고 평소에 재산을 늘리는 것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책을 보기를 좋아하여 손에서 책이 떠나지 않았고 문장력이 매우 풍부하여 붓대를 잡으면 거침없이 수백 자를 즉시 이루어냈다. 일찍이 승지로 있을 때 선묘께서 그 문장을 기특하게 여겨 고문 중에서 어떤 것을 숭상하는가 묻기까지 하였다. 이미 재주와 기국을 갖추었으면서도 지닌 것을 다 베풀어 쓰지 못하였으니, 장차 하늘의 보답이 어찌 한량이 있겠는가. 흠의 아들 익전(翊全)은 공의 사위 조군(趙君)의 동상랑(東床郞 사위의 별칭)이 되었으므로 흠이 공에 대해서는 한 조정에 벼슬하여 우의가 두터운 정도만이 아니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쓰여질 것 같더니만 / 如必以施뜻을 얻지 못했으니 / 而乃不偶자기 당댄 막혔으나 / 嗇之于身뒤에 결실 거뒀다네 / 而食於後울창한 저 동녘산은 / 鬱彼東阡공의 만년 무덤인데 / 萬年之藏사실대로 명을 지어 / 我銘非諛이 현당을 빛낸다오 / 賁玆玄堂
    2023-07-31 | NO.94
  • 通政大夫承政院右副承旨贈資憲大夫吏曹判書成公墓誌銘- 성안의
    通政大夫承政院右副承旨贈資憲大夫吏曹判書成公墓誌銘- 성안의 광주목사갈암집 제25권 / 묘지명(墓誌銘),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익승(翼昇)인데, 아호로는 갈암 외에 남악(南嶽)으로 불려지기도 했다.공은 휘가 안의(安義)이고 자는 정보(精甫)이며, 성은 성씨(成氏)이고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고려 때 휘 송국(松國)이 태위(太尉)가 되어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에 이르렀고, 본조에 들어와서는 휘 만용(萬庸)이 판도 판서(版圖判書), 보문각 태학사(寶文閣太學士)를 지냈다. 명공(名公)과 거경(巨卿)이 잇따라 나와 동남(東南) 지방의 망족(望族)이 되었다. 증조는 휘가 익동(翼仝)이고, 조는 휘가 윤(胤)이고, 부는 휘가 궤(几)이니, 모두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다. 모(母)는 장연 노씨(長淵盧氏)이니, 호조 참의 휘 사영(士英)의 따님이다. 대가(大家)에서 태어나 덕(德) 있는 집안에 시집와서 아내의 역할과 어머니의 역할을 함에 있어 모두 그 도(道)를 얻었다. 만력 19년 신묘(1591, 선조24)에 비로소 벼슬을 하였고, 이듬해 여름에 일본이 난을 일으키니, 공이 의병장 곽공 재우(郭公再祐)에게 가서 따랐다. 또 관찰사 백암(柏巖) 김공 륵(金公玏)의 막하(幕下)가 되니 백암공이 경도되어 허여하였고, 이때 공이 막 상처(喪妻)하니, 마침내 맞이하여 형의 손녀서(孫女壻)로 삼았다. 공이 이에 양친을 모시고 영천군(榮川郡)에서 처가살이를 하였고, 피난 나온 친척들이 공에게 의지하였다.이때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유 문충공(柳文忠公)이 영남(嶺南)에 개부(開府)하였는데 자주 세상을 구제할 재능이 있다고 공을 칭찬하였다. 이어 근친(覲親)하기 위해 휴가를 받았는데, 총독사(摠督使) 윤승훈(尹承勳)이 평소 공에게 유감을 가지고 있다가, 이때에 이르러 관직을 비우고 직차(職次)를 이탈했다고 무고하여 드디어 처벌을 받게 되었다. 일이 장차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었는데, 문충공이 치계(馳啓)한 데 힘입어 용서받게 되었다. 공이 풀려나온 뒤에 더욱 스스로 노력하여 군량미를 조달하고 기민을 구휼하여 군국(軍國)이 이에 힘입었다. 갑진년(1604) 가을에 어버이의 병이 있어 창녕에 돌아왔는데, 잇달아 내외간(內外艱)을 당하였다. 장사를 지낸 뒤에 분암(墳庵)을 지어 영모(永慕)라는 현판을 달아 놓고 슬퍼하고 돌보며 그리워하는 곳으로 삼았다. 거상(居喪)하는 여가에 고을 사람들의 자제를 가르쳐서 성취시킨 자가 많았다고 한다. 신해년(1611) 봄에 규례에 따라 광주목(光州牧)으로 옮겼는데, 공의 뒤를 이어 남원 부사가 된 자가 당시 재상의 뜻에 따라 공의 허물을 캐내려 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 광주 목사가 된 지 겨우 1년 만에 당로자(當路者)의 비위를 거슬러 파직되어 영천(榮川)으로 돌아왔다. 한가히 지내면서 심신을 수양한 지 13년이었는데, 자주 점잖고 덕 있는 선배들과 교유하고, 또 유인(幽人), 일사(逸士)와 더불어 즐거이 임천(林泉)에 모여 배회하며 유유자적하게 지냈다.이듬해 이괄(李适)의 반란으로 공이 어가(御駕)를 호위하여 공주(公州)로 갔고, 돌아와서는 호종한 공로로 통정대부에 올랐다. 이어 제주 목사(濟州牧使)에 제수되었는데, 조정의 의론이 그가 늙은 것을 걱정하여 가지 않기를 바랐으나, 공이 말하기를, “신하의 의리는 어려움을 사양하지 않는 것이다.” 하고 즉시 떠나서 임지에 가서 어질고 관대한 정사가 많으니, 백성과 아전들이 사모하였다. 병인년(1626) 봄에 일로 인하여 파직되어 돌아왔다.그 후 19년 뒤 정해년(1647)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서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고, 또 아들 이성(以性)이 영국 공신(寧國功臣)이 되었기 때문에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 겸 지경연의금부춘추관성균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세자좌빈객 오위도총부도총관(吏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世子左賓客五衛都摠府都摠管)에 추증되었다.5남 5녀를 두었는데, 장남 이침(以忱)은 어진 행실이 있었으나 일찍 죽었고, 지평(持平)에 증직되었으며, 차남은 이각(以恪)인데 전부인의 소생이다. 3남 이성(以性)은 화현직(華顯職)을 두루 역임하였고 자급은 통정대부이며, 청백리(淸白吏)로 저명하였다. 4남은 이념(以恬)이고, 5남은 이항(以恒)이다. 공은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 효성스럽고, 형제와는 우애로웠으며, 집안의 식솔을 거느리고 빈객을 접할 때 정성과 신의로써 하여 속이지 않는 것을 위주로 하였다. 또 남의 과실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남들과 구차히 영합하려 하지 않았지만 남들이 사모하여 함께 사귀었다. 공은 관대하고 온후하며 외모가 준수하여 중인(衆人)들이 거인 장자(巨人長子)로 추대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박학하여 통달한 것이 많았고, 특히 심계(心計)를 잘하였다. 관리의 일을 가지고 결정함에 있어 남보다 뛰어났으나 대부분 백성을 사랑하고 옛 법을 지키는 것을 힘쓰고, 겉으로 엄하거나 심히 각박한 것을 능사로 여기지 않았다. 분수에 편안하여 스스로 만족하고, 영리를 도모하는 데 급급하지 않았다. 명은 다음과 같다.선비가 혹 덕은 넉넉한데 재주가 부족한 경우가 있고 / 士或德優而才歉또한 재능은 많은데 행실이 불완전한 경우도 있다 / 亦有多能而行不完그러므로 두 가지를 겸비하기가 / 故兼二者而有之자고로 어렵다고 하였다 / 自古以爲難오직 공은 이미 이 아름다운 덕이 있고 / 惟公旣有此德美또 그 재능이 어려운 시국을 구제하기에 충분하였다 / 又其才猷足以濟時艱그 평생에 세운 공을 돌이켜 보면 / 跡其平生所樹立어찌 이른바 선인 군자가 아니겠는가 / 豈所謂善人君子者邪아, 지위가 재능을 따라가지 못하니 / 吁嗟乎位不滿能그것이 명임을 어찌하랴 / 其如時與命何
    2023-07-31 | NO.93
  • 거오재양만용선생신도비
    광주시 광산구 동호동 산 32-2 1986년據梧齋梁曼容先生神道碑는 박도빈(1828~1866)이 찬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이는 오재 양공의 묘이다. 공의 7대손 찬영이 나의 선군자를 찾아 뵙고 비명을 부탁했었다. 선군자께서는 뜻이 있었으나 이루지 못했다. 지금 찬영씨가 그의 장남 상기를 보내서 도빈에게 부탁했다. 도빈은 뜻이 계술에 있으니 어찌 감히 문장이 아니라고 사양할 수 있겠는가? 삼가 행장을 살펴보니 공의 휘는 만용이요 자는 장경이다. 선조의 계통은 탐라에서 나왔고 증조 학포는 휘가 팽손인데 홍문과 교리로서 정암 조선생과 함께 기묘화를 당하고 나란히 죽수서원에 철향되었다. 조부 송천은 휘가 응정인데 대사성을 지내고 문장으로 일세를 복종시켰다. 고의 휘는 산축인데 율곡 이선생을 스승으로 받들고 경학에 전심하여 처사로 불리었다. 임진란 때 형 생원 산룡, 좌랑 산숙과 의병을 일으켰고 정유재란에 이르러 모부인 박씨를 모시고 창날을 피해 바다로 갔다가 졸지에 적을 만나서 나주 삼향포에서 순절했다. 효를 포상하여 정려문이 세워졌다. 비는 장흥 고씨인데 효열공 종후의 딸로서 부도를 지니고 서사에도 능했다. 정유년 부인은 바야흐로 임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온 가족과 함께 바다에 이르렀다가 계집종들이 구출하여 다행히 목숨을 구했다. 만력년간 무술(1598)년 3월 24일 공을 낳았다. 공이 5세 때 참새새끼를 얻어서 가지고 놀았는데 갑자기 죽어 버렸다. 공은 종이에 싸서 파묻고서 말하길 「새가 죽었는데 사람이 묻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나 때문에 죽었으니 이런 까닭에 묻는 것이다」라고 했다. 보는 사람이 모두 기특하게 여겼다. 글을 배웠는데 한 번 들으면 곧 외웠고 시문을 짓는데 말이 곧 사람을 놀라게 했다. 성품이 소탕하여 글 읽는 소리를 섬기지 않았는데 일찍이 외지스승인 수은 강항공에게 매를 맞아 피가 흐르고 종기가 생겼다. 그런데 구더기가 생기게 되도록 오히려 굴복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물으니 공이 말하길 「글을 다독하면 소견이 좁아질까 두렵기 때문에 복종하지 않는 것이오. 복종하고 다독하지 않으면 자기를 기만하는 것이며 장자를 속이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강공이 또 썩은 새끼줄로 묶어서 깊은 못 위 누운 소나무 가지에 매달아 놓고 두렵게 하고자 했는데 공은 조금도 기가 꺾이지 않았다. 하루는 알리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는데 모부인이 친히 그 종기를 씻어 주고 그날로 돌려보내자 야막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곧 자책하기를 「존사께 알리지도 않고 왔는데 또 자모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으니 내가 어찌 사람인가?」하고선 즉시 스승의 집으로 갔다. 강공은 독려함이 지나치고 더욱 엄했는데 갖가지 방법으로 위협했다. 한 번은 옷을 벗겨서 더러운 연못 속에 집어넣으니 거머리가 달라붙어 피를 빨았으나 또한 날이 다 지나도록 굴복하지 않고 웃으며 말하면서 태연자약했다. 하루는 공이 갑자기 마음을 바꾸고 말했다. 「다독하기를 청합니다」 그리고 공은 이로부터 공경하게 대하는 방책을 잠시도 거두지 않아서 여름에는 옷이 썩어 헐었다. 어떤 사람이 전후의 근면함과 게으름이 같지 않음을 물으니 공이 대답하기를 「전에는 뛰어난 기억력에만 의지했지만 지금은 곧 숙독하고 상세히 음미한 이후에야 궁리진성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입니다」하였다. 비로소 성동이 되어 문사가 크게 성취되었는데 강공이 그 문조를 몹시 칭찬하여 이르길 「등림의 큰 강물이 붓 적실 물 대기에 부족하네」라고 했다. 그의 자랑함이 이와 같았다. 청년이 되어 남곽 박동열공의 문하에 학업을 청하여 경적에 침잠하고 성리를 탐색했다. 이때 혼조를 당하여 나설 뜻이 없었다. 그러나 부모 때문에 억지로 과거시험에 나갔다. 인조가 개옥한 이듬해 역적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어가가 파천했다. 공은 변란의 소식을 듣고 곧 적을 칠 의거를 부르짖고 병량을 모을 계책을 세웠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적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내 계획을 그쳤다. 이로부터 과거시험에 나가지 않고 날마다 주자서를 강론했다. 정묘년 금나라 오랑캐가 평산에 이르자 호소사 사계 김 선생이 양호에서 군대를 일으키니 공은 다시 거병하여 그 모임에 응했다. 그러나 조정과 오랑캐가 화해하여 곧 돌아갔다. 숭정 계유년 생원과 진사에 장원 합격하고 또 문과에 뽑혀서 그날로 한림에 배수되었다. 갑술년 시강원 설서, 예문관 검열에 배수되었다. 이때 적신 김자점이 전권으로 징병하니 여러 관료들이 두려워서 위축되었다. 공이 홀로 말하여 죄줄 것을 청했다. 양파 정태화공이 그 소식을 듣고 「조정에 직신이 있구나」하였다. 얼마 안 있어 호당에 추천되고 예문관 대교와 봉교로 승진되고 예조좌랑과 겸설서로 임명되었다. 한림과 주서로서 날마다 경광을 모시면서 진퇴가 민첩하고 기주가 물 흐르는 듯했다. 상께서 그 고아한 용의를 사랑하여 그 손을 잡고 그 수염을 어루만졌다. 그것은 특별한 대우였다. 후에 오랑캐 사신이 와서 인정전에서 불러 보았는데 따라온 오랑캐들이 난입함이 많았다. 공은 몹시 분노하여 상소를 올려 척화를 주장했는데, 그 상소에 「호전은 작은 조정에 차마 머물지 못했다」는 말이 있었다. 병자년 겨울 오랑캐가 들어와 노략질을 하자 공은 호남의 수재들에게 편지를 보내서 서로 함께 의병을 모집하고 구획을 이미 정했는데 이때 널리 알리는 교서가 남한산성이 포위된 가운데서 왔다. 공은 그것을 읽고 통곡하다 실성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격문을 쓰고 여러 의사들과 여산에서 모일 것을 약속했다. 집으로 돌아와 모부인과 이별하니, 모부인이 말하길 「힘껏 하여라. 나 때문에 염려하지 말라」고 했다. 정축년 시산에 도착하여 시를 쓰기를 「마땅히 남한산성의 달은 고신의 한 조각 충성을 비추리라」고 했다. 그것은 공의 스스로의 맹서였다. 청주에 이르니 적병이 점점 가까이 왔다. 공은 몇 명의 기병을 따라 적을 살폈다. 적은 산골짜기에 모여 소를 잡아서 먹고 있었다. 갑자기 들이쳐서 9명을 목 베고 그 적의 물자들을 취했다. 바야흐로 군사를 옮겨 험한 곳에 자리잡고 있는데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여러 의사들과 함께 북쪽을 향해 통곡하고 즉시 달려가 도성 아래에 이르렀다. 그리고 항소하여 대의를 밝혔다. 인조가 가상히 여겨 표창했다. 이로부터 물러나서 선롱을 지키면서 세상일에 뜻을 끊어 버렸다. 항상 주자의 내수외양의 의리를 강론함으로써 충분의 마음을 드러냈다. 말이 병자, 정축의 일에 이르면 칼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정언에 배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무인년 전남도사에 배수되어 숙명 하고서는 곧 돌아왔다. 조정에서 재학으로서 전량으로 추천했다. 이때 대각에서 원망을 품고 무고하는 상소가 있어 연서찰방으로 강등하여 제수했다. 기묘년 흥양현을 맡아서 모든 일을 맑게 다스리니 이민이 편안하게 여겼다. 신사년 모부인의 상을 당하여 너무 슬퍼하여 몸이 여윈 것이 정도에 지나쳤다. 계미년 홍문관 수찬에 배수되고 갑신년 거듭 배수된 후 정언에 배수되었다. 그러나 연이어 나가지 않았다. 또 부수찬에 배수되어 여러 번 은혜로운 부름을 받고 한 차례 사례드린 후 곧 상소를 올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또 정언에 배수되었는데 이 해에 명나라의 운명이 끝나고 청인이 연경에 들어와 점거했다. 공은 명나라가 임진년 두 차례 군대를 보내 준 은혜와 정축년 남한산성 아래의 수치를 설욕할 것을 말하면서 눈물을 그치지 않았다. 나중에 연경 가는 사신을 전송하며 「의관과 문물이 모두 새로 보는 것이고 성곽과 우정도 옛날과 다르다 하는데 만약 황금대 아래 길을 지나거든 나를 위해 모름지기 여러 군신들에게 위문해 주시오」라는 시구절을 썼다. 을유년 교리에 배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이때 척화제신의 무리가 조정을 떠나감이 많아서 성지가 엄절하여 끝내 교체되어 돌아올 수 없었다. 수찬에 배수되고 사헌부 장령으로 옮겨졌는데 회곡 조한영공의 삭직 사건에 상소하여 구하려다 뜻에 거슬려서 연루되어 파직당했다. 그리고 다시 수찬과 시강원 보덕에 차례로 배수되었다. 병술년 여러 번 집의, 부수찬, 부교리, 부응교, 응교, 사복시정에 배수되고 영국원종공신 이등 제이로 녹훈되고 여러 학교의 교수를 역임했다. 무자년 천재가 거듭 이르러 인정이 흉흉하고 소란스러웠다. 공은 사간으로서 소를 올려 궁궐을 규탄했는데 말이 모두 매우 적절하였다. 이 일로 인해 나주 옛집으로 돌아와 노년을 마칠 계획으로 삼았다. 기축년 인조가 세상을 뜨고 효종이 즉위하여 부수찬을 배수했다. 그런데 대각에서 소를 올려 국애사에 오지 못한 것을 언급하여 파직되었다. 한때의 명공들이 많은 소를 올려 구원하였다. 경인년 청풍군수에 배수되었다. 관용에 관련하여 민폐를 끼친 사람은 모두 견책하고 파면했다. 그리고 곳간을 헐어 백성의 고통을 구휼함에 지극하지 않음이 없었다. 신묘년 8월 26일 관사에서 고종하니 향년 54세였다. 공은 풍자가 영위하고 기량이 굉박했으며 문장과 절의는 세상에서 흠양을 받았다. 그러나 도리어 퇴연하게 스스로 영욕에 굴신하지 않고 처신이 여유로웠다. 대개 남의 착한 점을 좋아하고 나쁜 점을 치지 않고 명리에 흔들리지 않은 것은 천성이 그러하였다. 갑자, 정묘의 난에 포의로서 창의하였으나 미처 어려움에 다다르지 못했는데 곧 난리가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나라의 다행이었다. 그러나 공의 충성은 이미 병자년 난리에서 드러났으니 바야흐로 수백의 오합지졸로써 수백만의 사나운 올빼미 같은 적을 당하여 분발하여 몸을 돌보지 않고 죽음을 무릅쓰고 북쪽으로 갔는데 갑자기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이다. 비록 계책을 쓰지 못했으나 그 충성을 다하였다. 그리고 그 대절에 임했을 때 그의 뜻을 빼앗을 수 없음이 또한 이미 환하게 드러났다. 그러므로 고금에 있어서 의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궁궐의 신하보다 결코 아래가 아니었다. 곧 통곡하고 남쪽으로 돌아와서 의리를 지키고 강학을 자정의 요체로 삼았다. 비록 은륜이 여러 번 내려와서 끝내 열심히 직책을 받들게 되었지만 그 어렵게 나아가고 쉽게 물러나는 마음은 시종 한결같았다. 시남 유계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경연에 만약 양학사를 얻어온다면 틀림없이 좋을 것이다」라고 했다. 청음 김상헌공도 「장경은 지절이 있으니 그가 기꺼이 출사하겠는가?」하였다. 그로 인해 유공을 시켜 출사의 의리로써 타이르게 했다. 대개 공을 알아 준 사람은 김, 유 두 분인데 공의 일어남은 또한 도량과 의리가 있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혹 병자, 정축년 후의 관함을 척화신의 허물로 여겨 격론을 하였다. 유고가 집에 소장되어 있고 배필은 광주 이씨 현감 태남의 딸이며 우의정 인손의 후손이고, 문화 유렴의 외손이다. 순의단장하고 부도가 갖춰짐이 지극했다. 묘소는 나주 장본면 서쪽 기슭 계좌이다.공은 처음엔 동복 대원산에 묻혔다가 나중에 부인 묘 아래 계좌에 옮겨 묻혔다. 2남 4녀가 있는데 장남 화남은 요절했다. 차남 세남은 참봉으로 종사를 받들었고 장녀는 송지하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최거옹에게 시집가고 3녀는 군수 이정룡에게 시집가고 4녀는 진사 임치에게 시집갔다. 화남에게는 딸 한 명이 있는데 이분에게 시집갔고 세남의 아들은 극가와 대가이고 송지하의 아들은 기재, 기창, 기백이다. 최거옹은 아들이 여일이고 장녀는 윤유 동추에게 시집가고 차녀는 노주에게 시집갔다. 이정룡의 아들 오는 부사이고, 택은 생원 문과로 참판이었고, 협은 진사, 집은 문과로 감사였고, 딸은 박태정에게 시집갔다. 임치의 아들은 규와 예와 기이고 딸은 참봉 윤시교에게 시집갔다. 내외의 증현들을 다 기록하지 못한다. 명에 다음과 같이 쓴다.사람을 보는 데는 술이 있으니출처와 사생이어렵고 쉬울 때 이 생을 저울질하여 처함에 쉬운데로 나아가면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어렵고시대의 조처를 삼가 생각하고사는 바에 오묘한 뜻을 밝혀서나가야 할 때 나가고마땅히 살아야 할 때 사니누가 그러하였던가?오재선생은충문에서 빼어나와사는 바를 더럽히지 않고어린 시절의 우뚝함을평생 지켜 이루었네.간혹 시대적 처신에 있어스스로 생을 기약하지 않았네마땅히 이 명을 거울삼을지어다.모든 후생들이여.
    2018-12-02 | NO.92
  • 고광선-현와고선생묘비명
    광주시 서구 용두동 산 79(봉산정사)이 조선유민현와고선생묘비명(朝鮮遺民弦窩高先生墓碑銘)은 현와 고광선 선생의 묘비명이다. 봉산정사  건너편 왼쪽의 산록에 있다.고광선은 광산구 안청동 석음 박노술의 풍천대를 1920년 세울 당시에 도유사를 맡는 등 지역의 중추적인 인물이었다. 영식재와 만취정의 상량문을 써주었고 월호정의 찬기와 일산당의 중수기를 써주기도 했다. 『광주읍지』(1924)에 주의 서쪽 10리에 있다는 농은정農隱亭 에 명문이 있었다 한다.
    2018-05-31 | NO.91
  • 고려광주군노공신도비
    광주시 북구 오치동 109-2(광주노씨삼능단 입구)2003년이 고려광주군노공신도비(高麗光州君盧公神道碑)는 高光善 짓고 吳駿善(전면) 奇琮燮 쓰다.(추기) 盧在九 짓고 奇浩仲 쓰다. 광주노씨광주군파종회가 건립했다.1960년대 북구 삼각동에 세웠으나 2003년 비를 새로 만들고 비각을 세웠다.
    2018-11-13 | NO.90
  • 고려한공신도비
    광주시 광산구 서봉동 서봉마을1962년이 고려한공신도비(高麗韓公神道碑)는 청주한씨이다.
    2018-12-01 | NO.89
  • 고봉기대승묘역
    광주시 광산구 광산동 452, 광곡마을빙월당에서 북쪽으로 약 200m 가파른 산 중복에 있는 기대승의 묘역이다. 고봉 기대승(1527-1572)은 조선시대의 성리학자로,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峰), 본관은 행주(幸州), 덕성군 기진(寄進)의 아들로 광산구 신룡동에서 출생하였고, 1558(명종 13년) 문과 급제후 선종때 大司諫(대사간)에 이르렀다. 고봉 선생은 문학에 이름을 떨쳤을 뿐 아니라 독학으로 고금에 선학들이 미쳐 생각지 못한 학설을 제시한 것이 많다. 그 중에서도 퇴계 이황(李遑)과 사단칠청(四端七淸)을 주제로 하고 상호자기 학설을 주장한 서신왕복(書信往復)이 8년간 계속되어 조선 성리학계의 2백년간 논쟁의 실마리가 되기도 하였다. 퇴계의 학설은 4단-측은, 수오, 사양, 시비, 심리작용은 理에서 발동한 것이며 칠정일선, 희, 노, 애, 락, 애, 오, 욕의 감정작용은 기질에서 발동한다고 하였고, 고봉학설은 이와 기를 분리할 수 없다고 주장 이기, 공발설(共發說)을 역설하였다.월봉서원 뒤쪽으로 나있는 산길로 10여분을 오르면 그곳에 고봉묘역이 자리하고 있으며, 이 산길을 중심으로 백우산 일대에는 고봉선생이 걸었던 철학자의 길이라는 트레킹 코스가 있다.
    2018-12-02 | NO.88
  • 고부군수박원명묘지
    광주시 서구 서창동 506-7고부군수 박원명朴源明 묘지가 있다. 서창동 곽창기씨의 증언이다.당시 문제를 일으킨 조부갑이 체포 압송된 이후 용안현감이었던 박원명이 신임군수로 파견되어 이 전후사정을 잘 알고 설득하는 적절한 조치로 군중은 자진해산한 바 있다. 그러나 후에 부임한 안핵사인 이용태의 무자비한 조치로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했다. 박원명의 묘지가 있던 땅이 다른 사람에게 팔려 묘지가 방치된 상태이다. 동네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묘는 아직 이장이 안된 상태이다.박원명은 충주박씨로 우리나라 최고 증권투자사 박 모 회장의 종증조부로 알려져 있다. 확인이 필요하다.* 이 묘지는 당시 다른 사람에게 매각된 상태였는데 2021년 10월 무렵 문중 관련 후손들이 이장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2018년 10월 경 서창동 고부군수 박원명 묘지가 황폐화된 채 문인석마저 넘어져 있었다. 사진은 주민 곽창기씨가 알려주고 있다. 이분들이 어렸을 때는 이곳이 박 대감 묘지라고 햤었고 동네 놀이터였다고 한다.
    2018-11-29 | NO.87
  • 고양현후부군한사기공묘표
    광주시 광산구경인년高陽縣侯府君韓謝奇公墓表는 청주한씨 한기흥 짓고 한섭 쓰다.한사기는 중국 고양현후이며 1257년 송정 서봉리에 출생, 원나라에 특사로 가서 수훈을 세워 세상을 떠난 후 고양현후에 추증됐다.
    2018-12-02 | NO.86
  • 광주노씨 신도비
    광주시 북구 오치동 109광주노씨 신도비각은 노씨삼릉단 재각 앞에 있다.
    2018-12-07 | NO.85
  • 근시재(近始齋) 김 선생(金先生) 묘지명
    갈암집 제25권 / 묘지명(墓誌銘)근시 선생 김공이 돌아가신 지 93년이 지났는데, 어느 날 선생의 손자인 국자 상상(國子上庠) 면(愐)이 가전(家傳)을 가지고 와서 현일에게 말하기를, “황대부(皇大父)의 선한 덕과 행의(行誼)로 볼 때 마땅히 지(志)가 있어야 하는데, 처음에 국난(國難)이 평정되지 않아 장사 지낼 때 묘지명을 쓰지 못하였고, 그럭저럭 세월이 흘러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이러다가 마침내 사적이 인멸되면 유명(幽明)에 죄를 짓게 될까 두려우니 속히 묘에 명(銘)을 묻어 후손을 일깨우고 싶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되어 아는 자가 더욱 적어졌으므로 지명(誌銘)을 부탁할 사람이 없는데, 그대만은 가정에서 익히 들어 필시 우리 조부의 일을 능히 기술할 수 있을 것이니, 우리를 위해 지문을 써 주십시오.” 하였다. 현일이 일어나 절하고 사양하기를, “현일의 선인(先人)께서 일찍이 선생의 따님을 아내로 맞이하셨으니, 공의 고모가 바로 나의 선비(先妣)이십니다. 선인께서 선생이 살아 계실 때 직접 뵙고 가르침을 받지는 못했지만 현자(賢子)들과 교유하면서 유풍(遺風)에 감화받은 것이 많았습니다. 현일이 다행히 선대의 중한 교분으로 인하여 그 끼치신 은택을 입고 우러러 존모하는 것이 일반 사람과 다르니, 오늘의 의리에 있어 진실로 감히 사양할 수 없는 점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먼 시골의 후생으로 학문이 보잘것없고 문장이 심히 비루하니 어떻게 덕행을 능히 기술하여 먼 훗날에 전할 수 있겠습니까. 감히 백번 절하고 사양합니다.” 하였는데, 상사군(上舍君)이 거듭 대의(大義)를 들어 책망하기에 끝내 사양하지 못하고 마침내 그 가전에서 뽑고 내가 들은 것을 참고하여 아래와 같이 그 사적을 논차(論次)한다.삼가 살피건대,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실로 신라 왕의 후손으로 신라가 쇠할 때 왕자 흥광(興光)이 국가가 어지러워질 것을 알고 광주(光州)로 피신하였으니, 이분이 바로 비조(鼻祖)이다. 고려 때 휘(諱) 길(吉)이 태조(太祖)를 도와 공을 세워 품계가 대광(大匡)이고 지위가 사공(司空)에 올랐다. 그 후 대대로 광주에 살았고, 여러 대에 걸쳐 재상을 지냈으므로 사람들이 그 사는 마을을 평장동(平章洞)이라고 불렀다. 국조(國朝)에 들어와 휘 회(淮)가 음성 현감(陰城縣監)을 지내고 졸한 뒤에 병조 참의에 추증(追贈)되었는데, 이때 처음으로 안동(安東)에 살았다. 이분이 휘 효로(孝盧)를 낳았는데, 성균관 생원으로 졸한 뒤에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또 예안(禮安)으로 옮겨 휘 연(緣)을 낳았는데,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다. 이분이 휘 부의(富儀)를 낳았는데, 성균관 생원으로 퇴도(退陶 이황(李滉)) 노선생(老先生)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하는 대방(大方)을 들었다. 권씨(權氏)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가정(嘉靖) 을묘년(1555, 명종10) 2월 모갑(某甲)에 선생을 낳았다.선생의 휘는 해(垓)이고 자(字)는 달원(達遠)이다. 태어난 지 7일 만에 모부인(母夫人)이 돌아가시어 세모(世母) 하씨(河氏)의 손에서 자랐다. 조금 자라서 독서하고 행실을 닦아 고인(古人)의 학문에 뜻을 두었는데, 우뚝하게 일찍 성취하여 명성이 자자하니 제공(諸公)과 명인(名人)들이 모두들 탄복하고 허여하였으며 나이와 지위를 잊고서 더불어 사귀기까지 하였다. 그 전에 관찰공(觀察公)이 2남(男)을 두었는데, 장자가 부필(富弼)이니 별호(別號)는 후조당(後凋堂)이고 선생에게는 백부가 된다. 자식이 없어 선생을 자기 자식처럼 여기니, 선생이 그분이 살아 계실 때에는 효도를 다하였고, 돌아가시자 심상(心喪) 3년을 입었다. 만력(萬曆) 임오년(1582, 선조15)에 외간(外艱)을 당하여 묘 옆에서 시묘살이하면서 삭망(朔望) 때에만 내려와 궤연(几筵)에 전(奠)을 올렸고, 상을 마칠 동안 외부의 일에 간여하지 않았다.정해년(1587, 선조20)에 천거한 자가 있어 광릉 참봉(光陵參奉)에 제수되었는데 나아가지 않았고, 무자년(1588)에 사직서 참봉(社稷署參奉)에 제수되자 사은숙배하였다. 이해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이듬해 여름에 비로소 출사(出仕)하여 승문원 정자에 보임(補任)되었는데, 얼마 안 있어 예문관 검열에 옮겨졌다. 겨울에 사원(史院)의 동료가 사초(史草)를 불사른 일에 연좌되어 파직되어 고향에 돌아왔다. 이때 역변(逆變)이 있었는데, 무고로 조사를 받다가 재신(宰臣)이 변호해 주어 벗어날 수 있었고, 관작을 삭탈당하여 전리(田里)에 돌아왔다. 이때부터 두문불출하고 조정의 시비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았으며 3, 4년간 지방에만 있었다.임진년(1592) 여름에 왜란이 일어나 열흘 사이에 삼도(三都)가 모두 무너졌다. 선생이 종국(宗國)의 비상한 변란에 통분하여 창의(倡義)하여 향병(鄕兵)을 일으키고 동지(同志)를 규합하여 거느리고 의를 위해 목숨을 버릴 계획을 하였는데, 마침 학봉(鶴峯 김성일(金成一)) 김 선생(金先生)이 초유(招諭)의 명(命)을 받고서 도내에 격문(檄文)을 돌렸다. 선생이 답한 편지에, “도이(島夷)가 창궐하여 어가(御駕)가 파천(播遷)하였으니, 신민(臣民)으로서 통탄스러워 살아 있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합니다. 그러나 궁벽한 시골에서 한묵(翰墨)만을 일삼아 활쏘기와 말타기를 익히지 못했으니 맨주먹만으로는 스스로 공을 이루기 어려울 듯합니다. 그러나 충의(忠義)는 타고난 본성인지라 복수하려는 뜻이 간절하니, 천지에 맹세코 적을 토벌하는 의리를 펴겠습니다.” 하였다. 8월에 진군하여 안동에 이르니 열읍(列邑)의 의병들이 추대하여 대장으로 삼았다. 이에 빈객(賓客)을 안배(按排)하고, 용궁(龍宮)과 함창(咸昌)의 지경으로 진(陣)을 옮겨서 기회를 보아 적에 대응하여 공을 세우려 하였다. 계사년(1594) 1월에 명(明)나라 군대가 평양(平壤)을 수복하자 적이 철군하여 달아나니, 이에 승세를 타서 적을 사로잡고 참(斬)하여 상당히 많은 수급(首級)을 얻었고, 이로 인하여 적을 추격해서 남쪽으로 내려와 여러 군대와 밀양(密陽)에서 모였다. 5월에 단인(端人) 이씨(李氏)의 부음(訃音)을 듣고서 계모(繼母)는 늙고 자식은 어린데 형제가 없는 것을 염려하여 잠시 돌아가 가사(家事)를 상의하고 즉시 진(陣)으로 돌아왔다. 행군하여 경주(慶州)에 이르러 병이 나서 졸(卒)하니, 춘추가 39세였다.부음이 이르자 전군(全軍)이 부르짖고 통곡하기를 친척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처럼 하였고, 원근의 사람들이 모두들 탄식하기를, “선인(善人)이 죽었다.” 하였다. 이해 11월 경오일에 현(縣)의 서쪽 지례촌(知禮村) 계향(癸向)의 언덕에 장사 지내니, 상락공(上洛公) 김방경(金方慶)의 묘와 같은 언덕이다. 이는 선생이 상락공의 외손이기 때문이다. 을미년(1595, 선조28) 가을에 상(上)이 선생의 자신을 잊고 나라를 위해 순국(殉國)한 의리를 생각하여 특별히 승의랑(承議郞) 홍문관 수찬에 추증하였다. 천계(天啓) 병인년(1626, 인조4)에 상락공의 손자가 본도의 관찰사가 되어 강제로 선생의 묘를 파서 옮기게 하였다. 이듬해 2월에 재사(齋舍)의 뒤쪽 기슭에 임시로 이장했으나 마침 나라에 전란이 있어 길지를 가려 안장하지 못하였다. 전란이 안정되자 거음곡(居音谷) 신좌을향(辛坐乙向)의 언덕에 모셔 안장하니, 이때가 12월 모일(某日)이었다. 그 후 무신년(1668, 현종9)에 복인(卜人)의 말을 따라 또 송음동(松音洞) 유좌(酉坐)의 언덕에 이장하니, 이때가 4월 24일이었다.선생은 타고난 자품이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의용(儀容)과 풍도(風度)가 근엄하였다. 그 학문은 참으로 알고 실천하여 성현의 바른 문로(門路)를 얻었다.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서는 그 힘을 다하였고, 선조를 받듦에 있어서는 그 정성을 다하였다. 집안을 다스리는 데에 법도가 있어 내외(內外)가 분명하였고, 친지와 향당(鄕黨)에 대해서는 돈독하고 화목하며 공경하고 겸양하는 도리를 다하였다. 길흉(吉凶)에 경조(慶弔)할 때 예를 빠뜨림이 없었고, 궁핍한 자를 구휼할 때에도 그 힘을 아끼지 않았는데, 일찍이 말 1필을 출연(出捐)하여 궁핍한 벗의 급함을 구제해 주었다. 취사(取捨)를 신중히 하고 응대(應對)를 삼갔으며, 남의 작은 허물을 용납하고 남의 선을 말하기를 좋아하였다. 교제하는 데 구차하지 않아 사귐이 오래되어도 공경하였으니, 비지(賁趾) 남치리(南致利), 송암(松巖) 권호문(權好文), 송소(松巢) 권우(權宇),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 존재(存齋) 곽준(郭䞭)과 도의(道義)로 사귀면서 책상을 마주하여 강론하고 편지로 왕복한 것이 함께 수양하고 절차탁마하는 데 도움되는 것 아님이 없었다.사는 집 남쪽에 작은 서재를 열고 현판을 근시(近始)라고 하고서 날마다 거기에서 독서하며 경훈(經訓)을 깊이 연구하고 예서(禮書)를 널리 상고하여 그 요체를 궁구하고 그 차이점을 바로잡았으며, 역대의 치란과 흥망의 자취를 모두 이해하고 통달하였다. 그리고 천문(天文), 지지(地誌), 병법(兵法), 군율(軍律), 의술(醫術), 복서(卜筮)의 설까지도 모두 그 근원과 지류를 섭렵하여 그 대체를 알았다. 학자(學子)가 찾아와 배움을 청하면 그 재품(才品)에 따라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항상 퇴도(退陶)의 문하에 나아가 직접 가르침을 받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고, 퇴도 선생의 남은 자취를 정리하고 실추된 서업(緖業)을 이어서 사문(斯文)을 흥기(興起)시키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려운 세상을 만나 병들어 죽었으니, 어찌 후학의 무궁한 한이 되지 않겠는가.처음에 퇴도 선생이 〈사단칠정변(四端七情辨)〉을 짓자 근세의 대유(大儒)라고 불리는 자들이 이기(理氣)는 호발(互發)이 없다는 설을 주장하면서 노선생(老先生)에 대해 의리(義理)가 분명하지 않다고 기롱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선생이 설(說)을 지어 변론하기를, “천지(天地)에 가득 차고 고금(古今)에 유행(流行)하는 것은 이기일 따름이다. 사람의 한 몸은 이(理)와 기(氣)를 합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사단(四端)이 발(發)하는 것에 대해 기(氣)가 없다고 할 수는 없으나 그 주(主)가 되는 것이 이(理)이기 때문에 이발기수(理發氣隨)라고 하는 것이고, 칠정(七情)이 발하는 것에 대해 이(理)가 없다고 할 수는 없으나 그 주가 되는 것이 기(氣)이기 때문에 기발이승(氣發理乘)이라고 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성현이 그 서로 떨어지지 않는 가운데서 서로 섞이지 않는 묘(妙)를 집어내서 말하였는데, 근세에 일종의 의론이 반드시 이와 기를 합쳐서 하나로 만들어 노선생이 주장한 이발기발(理發氣發)의 설을 가리켜 잘못되었다고 하니, 이는 이 설이 실로 주자(朱子)에게서 근본한 것이요, 노선생을 욕하는 것이 바로 주자를 욕하는 것이 된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 것이다.” 하였다. 이것이 그의 식견이 진실되고 사설(邪說)을 종식시키 데 도움되는 것이니, 어찌 근세의 유자(儒者)들이 발돋움하여 미칠 수 있는 것이겠는가. 글을 짓는 데 꾸미는 것을 일삼지 않아 평이하고 진실하며 온후하고 전아하였고, 가리키는 뜻이 명백하였다. 시(詩)는 혼후(渾厚)하고 담박(淡泊)하여 그분의 됨됨이와 같았다. 평생 저술한 것이 대부분 병화(兵火) 중에 산실(散失)되었고 약간 권만 집에 보관되어 있다.단인 이씨는 본관이 진성(眞城)인데, 조부는 휘가 의(漪)이고, 부는 휘가 재(宰)이며, 퇴도 선생에게는 질손녀(姪孫女)가 된다. 성품이 온화하고 정숙하며, 선생의 배필이 되어 부덕(婦德)에 어긋남이 없었고, 선생보다 한 달 먼저 졸하였으니, 향년 42세였다. 처음 장사 지낼 때부터 세 번을 이장하도록 모두 합장하였다.4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 광계(光繼)는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지냈고, 유행(儒行)이 있었다. 차남은 광실(光實)이고, 3남은 광보(光輔)인데 성균관 생원이었다. 4남은 광악(光岳)이다. 큰사위는 찰방(察訪) 박회무(朴檜茂)이고, 둘째 사위는 사인(士人) 유암(柳嵒)이다. 막내딸은 우리 선군(先君)께 시집왔는데, 선군의 휘는 시명(時明)이고, 성은 이씨(李氏)이고, 일찍이 능서랑(陵署郞)을 지냈다. 교관(敎官)이 자식이 없어 광실의 아들 렴(????)을 후사(後嗣)로 삼았다. 광실은 5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초(礎), 려(礪), 렴(????), 선(????), 빙(砯)이다. 딸은 모두 시집가서 사인의 처가 되었는데, 사위는 권계(權), 오익훈(吳益勳), 이민표(李民標)이다. 생원이 3남을 두었는데, 장남 면(愐)은 진사(進士)이고, 차남은 이(怡)이고, 3남은 근(慬)이다. 딸이 여섯인데, 장녀는 사인 정시태(丁時泰)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생원 변지두(邊之斗)에게 시집갔고, 그다음은 사인 조병(趙頩), 금이석(琴以晳), 이홍지(李弘至), 권경(權暻)에게 시집갔다. 광악이 3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정(䂻), 영(碤), 성(????)이고, 딸은 사인 김인(金????), 생원 채익하(蔡翊夏), 사인 강명(姜????)에게 시집갔다. 찰방이 1남을 두었는데, 이름이 료(炓)이다. 유암은 아들은 없고, 딸만 하나 있는데 사인 정억(鄭億)에게 시집갔다. 우리 선비(先妣)께서 일찍 돌아가셨는데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은 상일(尙逸)인데 참봉을 지냈고, 딸은 사인 여국헌(余國獻)에게 시집갔다. 렴이 또 아들이 없어 선의 아들 순의(純義)를 후사로 삼았다. 내외의 손, 증손, 현손을 합치면 90여 명이다.아, 선생의 타고난 아름다운 자품과 학문을 좋아하는 독실함으로 볼 때 만약 더 오래 살아서 대업(大業)을 마쳤더라면, 나아가서는 이 백성들에게 은택을 입히고 물러나서는 후세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 어떠하였겠는가. 불행히 성년(盛年)에 세상을 떠나 하늘이 수명을 조금도 연장시켜 주지 않았으니, 슬프다. 비록 그러나 그 남아 있는 것을 미루어 보면 사람으로 하여금 사(私)를 잊고 나약함을 분발시켜 도(道)를 보호하고 사설(邪說)을 물리치게 하는 공이 있으니, 끝내 불행하지만은 않다.명(銘)은 다음과 같다.아, 선생이시여 / 嗟惟先生정성스럽고 신중하며 단정하고 진실되도다 / 誠愼端慤지키시는 지조가 엄하고 / 持守之嚴실천함이 독실하였도다 / 踐行之篤지극히 효성스러웠고 / 謹謹其孝또 지극히 충성스러웠도다 / 蹇蹇其忠문재(文才)가 있고 무재(武才)가 있으며 / 有文有武훌륭한 말씀과 큰 공이 있도다 / 有言有功전에는 차분하게 / 伊昔從容시서를 읽고 법도가 있더니 / 詩書法度강개하게 전장에 임하여서는 / 慷慨臨戎그 용모가 굳세었네 / 其容曁曁또한 논저가 있어 / 亦旣論著사설(邪說)을 막았도다 / 式遏詖淫선현(先賢)에 빛나는 공로가 있으니 / 于前有耀어찌 오늘날만을 다행스럽게 한 것이겠는가 / 不寧幸今그 시종을 살펴보면 / 循厥始終후인으로서 어찌 서운하고 부끄럽지 않겠는가 / 奚憾奚愧명을 지어 밝게 드러내서 / 銘以昭之후세를 일깨우노라 / 以覺來世
    2022-04-29 | NO.84
  • 기대승-고봉기대승신도비
    광주시 광산구 광곡길 133 월봉서원고봉 기대승은 광주 출신으로 16세기 대표적인 성리학자이다. 그는 퇴계와 사단칠정을 비롯한 성리 논변을 통해 자신의 학문적  지평을 넓혔으며, 율곡의 성리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文憲公高峯奇大升先生碑는 아들 기효증이 찬했다.
    2018-12-04 | NO.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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