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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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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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은유공효행비
    광주시 광산구 동호동 신촌마을1960년이 경은유공효행비耕隱柳公孝行碑는 동호교 옆 신촌마을 입구에 유인옥(柳寅玉, 1850~1919)의 효행을 기록한 비이다. 경자년 정월에 건립되었으며, 비문은 정종원이 편찬하고 나승만이 글을 썼다.광산구 덕림동 산 37-2 수성마을 덕림사 德林祠에 일당(逸堂) 유절(柳節, 1517~1580)과 그의 둘째 아들 농포(弄圃) 유희달(柳希達), 농포의 아들 고암(高巖) 유시필(柳時必), 농포의 9세손 경은(耕隱) 유인옥(柳寅玉) 등을 배향하고 있다. 자 학선(學善). 호 경은(耕隱). 서산 자미(西山 自漏)의 I5대손이요, 롱포 희달(弄圃 希達)의 9대손이요, 춘영(春永)의 계자(系子)이다. 생부(生父)는 용영(龍永)이다. 철종(哲宗) 원년 庚成 7월 23일 광산군 본량면 동호리 금호(光山郡 本良面 東湖里 琴湖)에서 태어나 겨우 4세에 부친을 여의고 편모 슬하에 성장 하였다. 일찍 서당(書堂)에 다니면서 소학(小學)과 효경(孝經)을 읽었는데 효우(孝友)에 대한 글귀가 나오면 반드시 심중에 새기고 말하기를 『옛 사람은 효제(孝悌)를 인(仁)의 근본으로 삼았다. 만약 효제를 먼저 힘쓰지 않으면 마침내 인이 될 수 없을 것이니 어찌 실천하지 않아서 되겠는가?』하였다. 이렇듣 효우를 천성으로 타고나 모친을 섬기고, 형들을 받듬에 효성과 우애가 독실함으로 향당에서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나이 18세에 종가(宗家)로 출계(出系)하였는데 가세가 본래 빈한하여 부모 공양이 어려운지라 글공부를 폐하고, 몸소 농사 지어 자신은 헐벗고 굶주리면서도 지성을 다하여 봉양하였다. 그리고 조석으로 거처를 살피어 문안을 드리고 집을 나가거나 돌아와서는 반드시 아뢰고 낮을 보이며, 뜻을 순종하여 조금도 어김이 없었다. 고종(高宗) 13년 丙子(1876) 3월, 출행중 정읍(井邑)에 이르러 날이 저물었는데 갑자기 마음이 놀래어 땀이 흐르는지라, 이상히 여기고 밤 길을 나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노령(蘆嶺)을 넘는데 범 한마리가 나타나 길을 인도하여 새벽녘에 집에 당도하니 부친께서 병환이 위독하여 사경(死境)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공의 회귀(回歸)를 이상히 여기고 말하기를 『이는 필시 공의 효성을 산 신령이 강복함이라.』하였다. 급히 의원을 모셔다가 진찰한 후 약을 다려 드리고 한편 하늘에 기도하여 자신을 대신해 주도록 간절히 빌었으나 환후(患候)가 더욱 위독하므로 자기의 손가락을 깨어 피를 흘려 드리니 4일을 연명하고 드디어 운명하시었다. 공께서 망극의 슬픔을 다하고 장례를 모신 후 궤전(饋奠)의 절차를 예제에 쫓아 3년을 하루 같이 행하고, 기일에는 초종(初終)과 같이 슬픔을 다함은 물론 촛불을 밝히고 날을 새우면서 살아 계시는것 같이 지성을 다 하였다. 31년 甲午(1894)에 동학란(東學亂)이 일어나 사설(邪說)이 횡행하고 인심이 흉흉하거늘 공께서 출입을 금하고 자정(自靖)하여 자질들을 경계하고 이웃을 회유하니 온 마을이 그에 힘입어 안정하였다. 己未 4월 6일 향년 70으로 졸하시니 본량면 동호리 후록 수영동 선영 을좌(本炎面 東湖里 後麓 水永洞 先瑩 乙坐)에 장례를 모시었다. 배위 광산정씨(光山鄭氏)는 류(?)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을 갖추어 구고(舅姑)를 섬김에 효성을 다하고, 부군(夫君)을 받들어 공경을 다하였으며 1남2녀를 두어 아들은 홍렬(洪烈)이요, 따님은 금성나상운(錦城羅尙運) ? 수성최작현(隋城崔灼鉉)에게 출가하였다. 향당에서 공의 효행을 기리어 庚子(1960) 3월에 공께서 생장하신 금호(琴湖)마을 앞에 효행비 (孝行碑)를 세웠는데 비문은 오천정종원(烏川鄭琮源)이 지었다. 이로부터 유림(儒林)의 공론이 일어나 호남(湖商) 각 향교(鄕校)의 천장(薦狀)이 있어 乙巳(1965) 9월에 광산 덕림사(光山 德林祠)에 추배(追配)하였다. 공의 묘갈명은 술암 송재성(述菴 宋在晟)이 지었다. 자손이 본량면 덕림리(本良面 德林里)에 살고 있다. ※ 孝行碑銘, 德林祠誌 (비문 정리중)耕隱柳公孝行碑蔭記孝爲百行之源也子識之所當行而世敎之所先務也然?古令而能之者幾人乎志體供養父母安之宗族鄕黨稱之而爲稔慕者其惟耕隱柳公諱寅玉字學善其庶幾乎公以 哲廟庚戌二十三日生于高巖里弟賊性淳厚用心近仁自幼能知愛親而溫淸?省之節不敎而能及就學也至於孝友等文句沈潛反覆常以愉婉承順而未嘗有?其親意矣年至十人以父命出系于族叔春永后而事所后慈親如事所生甘旨之供靡不庸極而家貧躬耕以供子職負米百里極力營辨而嘗欲上京至于井邑忽心驚而星夜還程至族蘆嶺遇席同行及未明而還家親?危谷尤祈斗禱天以不怠至於本生孰喪如一人皆稱之以小大連之居喪也至于忌日則以致如枉可謂終身慕者也旣有鄕道剡薦而未蒙棹?之典可歎也己未四月六日卒葬于水永洞己坐原柳氏系出文化以高麗大承公諱車達爲鼻祖而圭組火?爀可謂三韓巨族矣入本朝而有諱自湄 端廟遜位葉官入山而世稱西山先生諱軒大司憲諡文簡定公之十五世祖也和錫命百興民春永高曾祖補諱也?咸平李氏李生考諱龍永?靈光丁氏齊光山鄭氏擧一男二女男洪烈女適羅尙運崔灼鉉余?之洪烈男枉薦在鎬嗣孫在萬克趾其義爰謀代石以圖不朽要余記實世好難慧累辭不獲而?述便槪以?後人之弓今式云爾庚子正月上元 鳥川 鄭琮源 謹撰金城 羅承萬 謹書
    2018-11-18 | NO.125
  • 계산유공인교효행비
    광주시 광산구 동림동 구룡마을1982년이 계산유공인교효행비(桂山柳公寅敎孝行碑)는 문화유씨 문중에서 관리한다. 계산 유인교(桂山 柳寅敎)
    2018-12-01 | NO.124
  • 고경명-고씨삼강문
    광주광역시 남구 압촌길 66(압촌동 산14)광주시 기념물 제12호. 1985년 2월 25일 지정고씨삼강문(高氏三綱門)은 조선 중기의 문관·의병장인 고경명(1533∼1592) 일가 7명의 충효열 삼강문이다. 삼강문은 충신, 효자, 열녀를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旌閭)이다. 삼강문옆에 문중 제각인 추원각(追遠閣)이 있다. 보호구역 66㎡이며 장흥고씨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이 정려는 임진왜란 때 금산전투에서 전사한 의병장 고경명을 비롯하여 그 일가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844년에 세운 것으로 1층, 3효, 2열, 1절로 표창되어 있다. 1충은 고경명, 3효는 장남 종후(從厚), 차남 인후(因厚), 손자 부금(傅金), 2열은 딸 노상룡(盧尙龍)의 처와 질부인 거후(居厚)의 처 광산정씨(光山鄭氏), 1절은 동생 경형(敬兄)이다.충렬공 제봉 고경명(1533-1592)은 압촌동에서 태어나 여러 관직을 거쳐 1501년 동래부사를 끝으로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금산에서 왜병과 싸우다 두 아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이곳에는 고경명을 비롯하여 진주성에서 전사한 효열공 종후, 금산에서 전사한 의열공 인후 등 효자 두 아들과 열녀로서 정유재란때 순절한 그의 딸 영광 유생 노상룡의 처와 고거후의 처로 그의 질부인 광산정씨, 효자로 그의 손자인 선교랑 고부금과 절의로 죽은 동생 고경형 등 일가 7명이 기록되어 있다. 1595년에 고경명·고경형·고종후·고인후, 1597년에 노상룡의 처, 1655년고부금, 1844년광산정씨가 정려를 받았다.현존 건물은 1844년에 세운 것으로 사방에 홍살문을 설치하여 내부를 차단하고 앞뒤 이열로 정려 현판을 걸었다. 정면 4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지붕은 부연이 없는 홑처마로 처리했다. 건물밖에는 담장을 돌리고 외삼문을 세웠다.
    2018-06-17 | NO.123
  • 관산임씨 기행비
    서구 백설길 37(마륵동)운천사를 끼고 돌아가면 그 길목 중간쯤에 효열문孝烈門이 하나 서 있다. 효열부 관산임씨(1909~1969) 기행비孝烈婦冠山任氏紀行碑이다. 서창 출신 김평길金平吉이 그의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1993년에 세운 것이다. 비문 내용을 보면 관산임씨는 임윤재任允在의 딸이며 김해 감무공파 김천두金千斗(1910~1956)의 처였다. 그의 손자가 김월출 제5대 광주광역시의원이다. 남편이 영암 도갑사에서 공부하던 중 병이 들어 이를 치료하기 위해 23년간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세상을 떠나자 3년상을 치렀다. 또한 먼저 떠난 자식 생각에 중풍에 걸린 시아버지의 대소변을 받아내는 간병 활동을 하였다. 그렇게 세상을 떠나자 또 3년상을 치렀다. 글은 장흥인 만취晩翠 위계도魏啓道(1926~1990)가 지었고 글씨는 신천인 강인환康仁煥이 썼다.
    2018-05-25 | NO.122
  • 광산김공정복정열쌍효비
    광주시 남구 덕남동 산138번지 향등제 인근1922년  남구 양과동 만산마을에는 1922년 광산 김씨 김정복(金廷福)·김정열(金廷烈)의 효행를 기리는 ‘쌍효비(雙孝碑)’가 있었다. 광산김씨 문중에서 두 형제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으며, 효열의 내용은 효열행지에 기록되어 있다. 남구 양과동 쓰레기매립장 조성공사 등으로 인하여 이 비는 남구 덕남동 산138번지 일대에 향등제 저수지와 빛고을전남대병원 가는 좁은 길 오른편 억덕 아래에 있다. 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선조님에게 진실로 지극한 효행이 있어 정려(旌閭)를 세우고 싶지만 신청할 곳이 없어 걱정이고, 국사에 기재하고 싶지만 정직한 붓을 잡을 사람이 없다. 그 효행을 숨겨 두는 것보다는 차라리 조그마한 돌에 새겨 영원히 후세 사람들에게 보여 일깨워주는 것이 어떠하겠는가.오늘날 송석동(松石洞) 향등리에 김효자 정복·정렬 형제가 있었으니 광산김씨 문숙공이신 주정(周鼎)의 후손 계문(啓文)의 아들이다. 특이한 기질을 가지고 태어났기에 어려서부터 그 어버이를 사랑하고 공경하여 그 마음을 미리 짐작하고 그 몸을 편안히 하였다. 그 어머니 김해김씨의 병세가 위독하자 큰 아들과 둘째 아들이 차례로 손가락을 깨물어 입안에 피를 흘려 수명을 몇 일간 연장하도록 하였다고, 본장(本狀)에서 이 사례만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효도는 온갖 행동에 근본이 되는 것이기에 기타 행동을 추측하여 알만하다.대개 효도란 그 어버이가 운명하려 할 때 그 절박한 심정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일이니 한 가문에서 두 효자가 배출되었다는 것은 세상에 드문 일이다. 아~ 효자 두 형제가 세상을 떠나간 지 이제 2백여년이 되었다. 당시 본 고을 또 도내(道內) 선비들이 그 효행을 열거하여 군수와 관찰사에게 보고를 하였건만 임금님에게까지는 알리지 못하였으니 어찌 아쉬움이 아니겠는가.그 증손 용휴(容休) 등이 효자비를 세울 것을 결심 땅을 팔아 비석을 세우려 했건만 불행하게도 죽었다. 용년(容年)이 소를 팔아 비석을 다듬고 그 종제 용휴 조카 이중(二中)과 더불어 효행 포양장을 안고 나를 찾아와 눈물을 흘리며 비문을 지어줄 것을 간청할 때 해가 이미 넘어갔다. 나는 그들의 선조를 추모하는 생각과 또한 효자 두 분의 사적에 감명을 받아 천만년 후세에 믿음직한 고증자료를 남길 것을 결심하고 드디어 붓을 들어 다음과 같이 명(銘)을 지었다.뭇 백성들의 행동에 효도가 가장 첫머리가 된다. 김씨가문 두 아들은 순수한 성품을 하늘에게 받았다. 이치는 밝고 밝은 것이니 그 어찌 효행자취가 묻혀버릴 것인가. 단단히 이 돌에 새겨, 요즘 사람을 깨우쳐주는 자료로 사용하리라.1922년 여름 종손 영식 지음.
    2018-06-15 | NO.121
  • 광산김씨 효열문
    광주시 광산구 박호동 152-1(노동마을)1623-1649황룡강변을 끼고서 들녘이 바라다 보이는 박호동 노동부락 어귀에 광산김씨산 옆에 효열문이 있다. 이 효열문의 건립 연혁은 효자 김응기와 나주나씨 효열을 기리고자 유림들의 천거로 인조와 선조가 명하여 세워졌다. 김응기는 3세때 모친 죽산박씨를 잃고 13세때 백부 김건에게 양자로 입양됐다. 김응기는 어려서부터 부모님 시중을 잘하고 15세 때 생부가 별세하자 슬픔과 성심으로 3년 상을 치루었다. 18세 때 같은 마을 문화유씨와 결혼하고 양부모에게 효성을 다했다. 34세 때 부친이 병상에 눕자 백방으로 명의와 선약을 구해 간호했으며 별세하자 묘소 곁에서 3년 동안 시묘를 하였다고 전한다.
    2018-11-11 | NO.120
  • 광산김씨효열각
    광주시 남구 포충로 701에 있는 광산김씨효열각이다. 오른쪽은 효원각으로 효자천선당광산김선진행적비가 있고, 왼쪽은 열일각으로 효열부풍산홍씨실적비이다. 효자천선당광산김선진행적비는 황산사 밑에 1956년 김해김씨 문중이 건립했다. 비의 내용은 노조모와 편모에 대한 효심이 지극하여 향리의 효자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라는 점이다.  [碑文의 內容] 省以日溫淸如時一經慈候之命則勿逆勿怠恒時悲痛者幼孤不能盡誠於嚴君皇靡逮讀主衰蓼莪之淚省楸顔丁不及其返而息無時不切十四歲窂平澤林錫周之女琴湖諱亨秀后生長于壺則之門端莊幽閒德配君子誠孝事舅姑堂內和集皆以貞婦稱君自後奉偏慈命負笈于弦窩高先生門二十一杖策于鹿洞書院責課數年二十三復往從太學生于成均館學業成家遍遊於長德宿儒之門非直以博吾聞見以其慈候表彰之誠心也京鄕鴻碩皆感君誠孝而贈之以笈善之筆用是遠近士友皆知洪氏特節之行各郡通狀及散處院宇兪文積以卷軸監司公所築漆石芙蓉亭爲人所執君濁0金額而還完且每歲百種之節以白米數石賑恤鄕里之窮之歲甲申日人以巧畫之物品欲取利于民間自郡道廳以至各面室皆和同之君獨力拒破之大運動元解至於新聞記載此皆君三十前事而奉行親命者也世皆以大義男子稱之不幸短命以三十四己丑十一月二日切其奈天壽何可欲者君之生世也纔逾壯年其行義之起越乎老成如許孝烈之親化疾尙今康寧七十而先祖芙蓉亭天然無患冠賊之行肆見燀而破之諸盤從可推矣噫使君至今在世則行政者取法不法者見化豈徒爲修身篤行   효열부 풍산홍씨 실적비 1956년 김해김씨 문중에서 건립한 비석이다. 주변은 대리석의 돌기둥을 세워 돌담장을 둘러 비석을 보호하고 있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碑文內容> 之素聞移孝事舅姑姑姑曰善事我敬戒夫子子子甚宜之歲壬戌夫人年才二十二其夫忽羅奇疾夫人不擇晝夜以迎醫合藥爲事舍置餘事嘗糞以驗其差劇湯藥必親手晨昏井花設壇以木兄天及其隕絶以脂血注口幾絶還甦如是者累矣知其將不免囑夫人曰吾家是忠孝節行之家及於身而止今也不幸以家事托夫人善養五王父母與偏慈及乳孤而不絶後嗣則地下之目庶幾可暝奄然而終夫人蒼黃顚制仆地氣絶而還甦盖下從之意不勝亡夫臨終之託也初終葬祭一一稱禮而少無遺憾後當王舅姑憂衰毁之節几尊之奉遵古制偏慈在堂抑搔撫問藥餌之供未嘗之絶平日嫂叔娣妣庭無間言嫁娶分戶極稱人情及其哭偏慈也比於前喪尤極備禮疊故之餘田地盡沒負債無弄晨夜績織裁縫不過數載而淸了素來遺業沒數還復宗家山地之見執者以巨額復完家度稱敍乳孤漸長使之負笈于弦窩先生門常自戒來力曰寡婦之子非有見焉不與爲友汝須節勵篤行使朋儕有好德之實也其於堂內尤盡恩義奉祭接賓之道未嘗懈惰雖在鄕憐之餓每多賑恤之爲子別築讀書之室曰晴霽軒善鎭長成有二男二女女出嫁爲羅州吳根求室餘幼善鎭從京鄕有名之家學業克承家庭夫人每從其所言不自專監司公所築漆石芙傭亭見奪於人命善鎭濁金額而遺復家中雍睦和氣滿室鄕道士林薦狀擬以漢陳孝婦令女之行至成均館各鄕校祠宇儒會所贊湯之狀昏奉
    2018-10-21 | NO.119
  • 광산김씨효열문 / 光山金氏孝烈門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정읍 박호리 노동마을 입구孝子 金應期와 烈女 羅州羅氏의 孝烈을 기리기 위해 조선 인조 때 건립한 효열문, 목조와가孝子 金應期와 烈女 羅州羅氏의 孝烈의 뜻을 기리고자 儒林들의 천거로 仁祖와 宣祖께서 命旌  
    2020-03-02 | NO.118
  • 광산이씨 효열비각
    서구 금호동 702-37 인근광산이씨효열정려는 음성박씨 박성립朴性立의 처 광산이씨의 효열을 기리는 정려였다. 음성박씨정승공파백암문회에서 관리했다. 광산이씨의 아버지는 이중근, 조부는 이경욱, 증조는 이언식으로 대제학을 지냈으며 외조부는 조계원이다. 광산이씨는 1795년에 출생하여 박성립과 성혼하였으나 출가한지 한 달 만에 남편과 사별하게 되었다. 이씨는 남편을 따라 하종하니 1819년의 일이었다. 순조 때 특명으로 1832년에 정려가 내리니 비각은 정면, 측면 1칸의 골기와 팔작지붕 건물이었다. 매산 홍직필이 짓고 노사 기정진이 찬했다. 효열비각孝烈碑閣 광산이씨정려중건기실비光山李氏旌閭重建紀實碑는 2007년에 기존의 비를 다시 세운 것이다. 그 옆에는 1978년에 세워졌던 원래의 효열녀유인 광산이씨 정려중건기실비가 있다. 이 비문은 파평인 중헌重軒 윤정복尹丁鍑이 짓고 영천인 이재련李載鍊이 글씨를 썼다. 광주 북쪽의 대재동에 건립하였고 고종 때 만호동으로 옮겼다가 세월이 흘러 훼손되어 마을 남쪽에 중건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효열비각 건립기 비문이 옆에 따로 있다. 내용은 서구 금호동은 20세기 말까지 광산군 서창면 만호실마을로 조선 순조 때 음성 박성립 공의 부인으로 효부이자 열부였던 광산이씨를 기리는 정려가 나라에서 내려져 2백여년 동안 보존되어 왔던 자랑스러운 마을이었다. 오늘날 광주가 현대 도시로 팽참함에 따라 고층건물이 숲을 이루니 정려가 그에 묻혀 유지할 수 없게 되어 어쩔 수 없이 정려를 거두고 이 자리에 효열정려 비각을 세워 자랑스러웠던 유적으로 남겨 후세대 사람들이 그를 더듬어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음성박씨 만호실 백암문회 뜻을 모아 이 비를 세웠다고 한다.
    2018-05-25 | NO.117
  • 광산정씨효열실적비
    광주시 광산구 지평동 지정마을1983년이 광산정씨효열실적비(光山鄭氏孝烈實蹟碑)는 광산정씨 문중에서 관리한다. 奉奇鐘이 찬했다.
    2018-12-01 | NO.116
  • 교관광산김공화택효행비
    광주시 북구 양산동 원산마을1938년 이 교관광산김공화택효행비(敎官光山金公和澤孝行碑)는 광산김씨 문중에서 관리한다. 李漢雨가 찬했다.
    2018-12-01 | NO.115
  • 김덕령-충효동정려비각(조선국증좌찬성충장공김덕령증정경부인흥양이씨충효지리)
    광주시 북구 충효샘길 7(충효동)1789년충장공 김덕령 충효리비(忠孝里碑)는 <광주읍지>에 따르면 주(州)의 동쪽 30리에 있다. 광주 석저면(石底面)의 고비(古碑名)로 朝鮮國 贈左贊成 忠壯公 金德齡 贈貞敬夫人 興陽李氏 忠孝之里충효동 정려비忠孝洞旌閭碑는 김덕령金德齡(1567-1596)과 그의 가족의 충효와 절개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건립 연대는 1789년(정조 13)이다. 1985년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4호로 지정되었다.비문은 비신의 전면과 후면에 기록되어 있다. 비신의 전면에는 ‘조선국증좌찬성충장朝鮮國贈左贊成忠壯/공김덕령증정경부인公金德齡贈貞敬夫人/흥양이씨충효지리興陽李氏忠孝之里’라는 제명이 세로 세 줄로 크게 적혀 있다. 제명의 서자는 미상이다.  비신 후면에는 김덕령의 업적 및 임진왜란 당시 금산전투錦山戰鬪에서 전사한 김덕령의 형 김덕홍金德弘(1558-1592)과 아우인 김덕보金德晋(1571-1627)의 충효를 기리는 내용이 담겨 있다. 비문에 따르면, 정조正祖(재위: 1776-1800)가 직접 김덕령의 고향 마을을 충효리忠孝里라고 이름 짓고 비를 세워 표시하게 하였다고 한다.  비문은 서유린徐有隣(1738-1802)이 글을 짓, 서용보徐龍輔(1757-1824)가 글씨를 썼다. 서체는 해서이며, 각자는 미상이다.  비는 개석과 비신, 하대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개석의 재질은 응회암이고, 비신의 재질은 석회암이며, 하대석의 재질은 화강암이다. 개석은 팔작지붕 형태이다. 내림마루와 추녀마루의 형태가 잘 남아 있으며 추녀의 끝이 들려 있다. 비신의 상태는 전체적으로 양호하지만, 곳곳에 낙서를 비롯해 인위적인 긁힘이 보인다. 하대석은 직육면체 형태로 아무런 무늬가 없으며, 상태는 양호하다.  서유린(徐有鄰)의 기(記)에 다음과 같이 써 있다."옛날에 충용장군 김덕령이 초야로부터 일어나 의병을 일으켜 흉한 왜구를 막아냈다. 위엄과 명성이 일본에까지 진동했으나 불행하게도 기이한 재앙에 걸려 죽었다. 이에 앞서 그의 형 덕홍도 금산전투에서 순절하였고 부인 이씨 또한 왜적을 만나 순절하였다. 이처럼 충효가 한 집안에 모였으나 지하의 원혼을 펴지 못하고 아름다운 빛이 표창되지 못하여 군자(君子)가 이를 슬퍼했다. 현종때 비로소 공의 원통함을 씻어 병조참의(兵曹參議)를 증하고 숙종 때 벼슬을 올려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증하고, 의열(義烈)의 편액을 하사했다. 정조 무신(戊申, 1788)에 다시 벼슬을 올려 좌찬성(左贊成)을 증하고 충장(忠壯)의 시호를 하사하였다. 그리고 이씨에게는 정경부인(貞敬夫人)을 증하고 덕홍(德弘)에게는 지평(持平)을 추증하였다. 이어 공의 고향 마을을 충효리(忠孝里)라 이름하여 비석을 세워 표하게 하고 신(臣) 유린(有鄰)에게 명하여 비석 뒷면에 그 음기(陰記)를 짓게 하였다.공의 아우 덕보(德普) 또한 지행(志行)으로써 집의(執義)를 증하여 형제 인이 모두 의열사(義烈祠)에 향(享)하였는데 이와같이 국가에서 김씨의 집안에 치우치듯이 위로와 도움을 준 것은 진실로 충장공(忠壯公) 때문이다. 방금 성주(聖主)의 교화(敎化)가 널리 드러나 어둡고 숨겨진 곳을 반드시 비추어 잘못된 것을 바르게 하고 억울한 일을 제대로 펴는데 있어 공이 가장 으뜸가는 혜택을 받아 큰 비석에 특별히 새긴 비문이 단청(丹靑)처럼 찬란하여 한 때의 억울함이 백세(百世)의 훗날에 펴지게 되었으니 공에게 있어 무슨 유감이 있으라. 따라서 하늘이 공을 탄생시킨 것은 충용(忠勇)을 우주의 사이에 고취시키기 위한 것일 것이다. 어찌 공의 집안만의 다행한 일이랴. 그러나 충(忠)이라는 것은 반드시 효(孝)에 근본하는 것으로서 공의 집안에서의 효도가 바로 국가를 위한 충성이 되었던 것이다. 하물며 형이 앞에서 죽고 아내가 뒤에서 죽어 한 집안의 열렬(烈烈)함이 진실로 한 나라의 충성이 되었으니 이 또한 효도를 미루어서 이루어진 것이며 마을에 세운 정문(旌門)을 충렬(忠烈)이라 하지 아니하고 충효(忠孝)라 한 것은 성상(聖上)의 깊은 뜻이 있어서인 것이다. 후일에 이 정려문(旌閭門)을 향하여 머리를 숙이고 이 비문을 읽는 사람은 마땅히 먼저 효도에 힙을 써야할 것이다. 삼가 기록하여 오는 후인들에게 고하는 바이다."충효비각은 1792년에 처음 세워졌는데 정면은 3칸이고 옆면은 1칸이고 지붕은 맞배지붕이다.<비문>故忠勇將軍金公德齡起自草野倡義旅遏兇寇威聲震於日域不幸中奇禍以死其兄德弘先死於錦山之戰夫人李氏又遭倭殉節死忠烈萃於一家而幽冤未伸懿光不彰君子悲之顯廟始雪公冤贈兵曹參議肅廟加贈兵曹判書賜祠額曰義烈當宁戊申又加贈左成賜諡忠壯李氏贈貞敬夫人德弘亦贈持平仍名公故居曰忠孝里碑以表之命臣有隣記其陰臣承命踧踖退自惟念國家有事天必生濟難之才以待之然媢克之不罥而成功者鮮矣況公之不幸哉世之冤公者恒比之岳武穆武穆猶有隁城捷爾公則自擧義之始己爲用事者沮撓齎志蓄鋒百不一施而卒以橫累死使公得爲武穆死則幸矣嗟乎天之生之適足以遺志士之痛耶然列聖之湔滌褒顯殆無餘憾而節惠也旌表也又皆出特恩忠臣遭遇之盛奚間於生死哉公之弟德普又以志行贈執義兄弟三人並享于義烈祠國家之慰藉若偏金氏寔惟忠勇之故也方今聖化普彰幽隱畢照枉直屈伸公實居最而豊碑特書炳若丹靑一時之屈伸於百世在公何慽焉然則天之生公所以皷忠勇於寰宇也豈獨公家幸哉然忠者必本於孝公之孝於家正所以忠於國也況兄死於前妻死於後一家之烈擅爲一國之重是亦孝之推也宅里之旌不曰忠烈而曰忠孝者聖意有以也後之式是閭而讀是碑者盍先勉於孝哉謹書之以告來許弘文提學徐有隣撰 奎章閣直閣徐龍輔 上之十三年己酉三月日立*수정 : 2023.07.17 
    2018-06-17 | NO.114
  • 김성원-서하당김선생모호산순효비
    광주시 북구 금곡동 산 164-1(충장사 주변)1978년이 서하당 김선생 모호산 순효비(棲霞堂金先生母護山殉孝碑)는 전남 화순군 남면 복교리에 세워졌다가 1990년대에 광주로 옮겼다. 충장사 입구에서 충효동 쪽으로 송강로길을 타고 150m 지점의 길 우측에 있다. 옆에는 김성원(金成遠)의 할아버지인 김함(김감)의 신도비가 있다. 보호각 등 별도의 보호 시설은 없으나 현대에 세운 화강석 비석이라 보존 상태는 아주 양호하다. 관리 주체는 광산 김씨 종중이다.조선시대 정유재란 시기의 김성원의 행적과 순효 사실, 광주와 화순의 향토학 현장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김성원 순효비가 있던 원래 위치인 전라남도 화순군 남면 복교리는 주암호 수몰 지역으로 들어가게 되어 현재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충효동]에 옮겨졌다. 김성원의 후손 김정식(金禎植)과 김희조(金熙祚)가 김성원 순효비(棲霞堂金先生母護山殉孝碑)를 세웠다. 비문은 담양의 전원식(田元植)이 짓고, 글씨는 김성원의 11세손 김희진(金熙鎭)이 썼다.  앞면에 내려쓰기 1행으로 ‘서하당 김선생 모호산 순효비(棲霞堂金先生母護山殉孝碑)’, 뒷면 비음기는 11행[1행 40자]으로 비문의 내용은 김성원의 인적 사항과 교유 관계, 임진왜란 때의 활동, 그리고 정유년의 동복 가관(假官), 모후산에서의 90세 노모와 함께 피신하다가 1597년 10월 7일에 어머니를 보호하며 순효한 사실, 이후 산 이름을 모호산으로 하고 촌명을 모호로 부르게 되었다는 지명 유래, 충효리와 충장공의 사호 등을 기록했다.옆면[향우]에는 ‘宣廟丁酉后三百八十二年戊午陽復月 潭陽田元植謹撰/十一世孫 熙鎭謹書/己未夏四月湖南儒林建立’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비문은 담양인 전원식이 정유재란 뒤 382년 되던 1978년 10월에 지었고 글씨는 11세손 희진이 써서, 비문을 지은 이듬해인 1979년 4월 호남 유림 명의로 세웠음을 알 수 있다.
    2018-09-06 | NO.113
  • 김해김씨삼세칠효비
    광주시 광산구 하산동 침산마을1963년 이 김해김씨삼세칠효비(金海金氏三世七孝碑)는 김해김씨 문중에서 관리한다.
    2018-12-01 | NO.112
  • 김해김씨쌍효유적비1
    광주시 광산구 동곡동 하산마을1955년김해김씨쌍효유적비는 樂安 吳炳鎰이 짓다.
    2018-12-02 | NO.111
  • 광주광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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