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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집 제18권 / 묘지(墓誌); 조희보 광주목사

동명집 제18권 / 묘지(墓誌)

분승지를 지내고 이조 판서에 추증된 조공의 묘지〔分承旨贈吏曹判書趙公墓誌〕


공의 성은 조씨(趙氏)이고, 휘는 희보(希輔)이고, 자는 백익(伯益)이며, 풍양인(豐壤人)이다. 시조인 휘 맹(孟)은 고려 초에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그 뒤에 휘 염휘(炎暉)란 분이 있어 우대언(右代言)을 지냈고, 신(愼)은 사복시 정(司僕寺正)을 지냈다. 증조는 휘가 익상(益祥)으로, 장령(掌令)을 지냈다. 할아버지 휘 세적(世勣)은 정국 공신(靖國功臣)으로서 자헌대부(資憲大夫) 풍양군(豐壤君)에 추증되었다. 아버지 휘 기(磯)는 감찰(監察)을 지내고 승지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현령을 지낸 이숙(李淑)의 딸로, 효령대군(孝寧大君)의 후손이다.

공은 가정(嘉靖) 계축년(1553, 명종8)에 탄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빼어나 보통 아이들과는 달랐다. 장성하자 명성이 더욱 퍼져 나갔다. 임오년(1582, 선조15)에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하고, 무자년(1588)에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소속되었다가 천거되어 한림(翰林)에 제수되었다. 신묘년(1591)에 아버지를 여의었고, 상복을 벗자마자 또다시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다.

을미년(1595, 선조28)에 예조ㆍ형조ㆍ호조의 낭관에 제수되었다. 정유년(1597)에 충청 도사(忠淸都事)에 제수되었다. 당시에는 군사를 일으키는 일이 있어 사무가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공은 순찰사를 보좌하면서 잘 조처하니, 순찰사로 있던 유근(柳根)이 매우 칭찬하였다. 기해년(1599)에 예천 군수(醴泉郡守)에 제수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인해 체차되었다. 경자년(1600)에 시강원 필선, 사헌부 장령ㆍ집의, 사간원 사간 등의 직을 역임하였다. 대간으로 있을 적에는 풍채가 늠연하였다.

임인년(1602)에 북방에 기근이 심하게 들자 조정에서 공을 어사(御史)로 삼아 진휼하여 구하게 하였는데, 살려낸 사람이 많았다. 당시에 시사(時事)가 크게 변해 청류(淸流)들이 모두 배척당하였다. 공 역시 사간으로 있다가 외직으로 나가 대동 찰방(大同察訪)이 되었는데, 마정(馬政)을 돌보는 데 온 힘을 다하여 역로(驛路)를 소생시켰으며, 병란에 불탄 우사(郵舍) 역시 새로 지어 말끔하게 하였다. 그러자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가 기문(記文)을 지어 찬미하였다.

을사년(1605)에 삼척 부사(三陟府使)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인해 부임하지 못하였다. 병오년(1606)에 사도시 정(司䆃寺正)을 거쳐서 광주 목사(光州牧使)에 제수되었다. 정사를 엄하게 하면서도 은혜를 베풀어 온 경내가 잘 다스려졌으므로, 어사가 표창하라고 아룀에 따라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또 감사가 잘 다스린 상황에 대해 보고함으로써 통정대부로 승진하였다. 떠나온 뒤에는 고을 사람들이 비석을 세워 기렸다.

그 뒤에 성주 목사(星州牧使)에 제수되었다. 고을 안에 정인홍(鄭仁弘)의 인척들이 많이 살면서 제멋대로 굴었는데, 공은 법으로 이들을 다스리면서 청탁하는 것이 있어도 하나도 들어주지 않았다. 이에 정인홍이 유감을 품고는 다른 사람을 사주하여 탄핵함에 따라 파직되었다. 한참 뒤에 승지 및 병조 참의에 제수되었는데, 모두 분사(分司)의 직이었다.

당시에 권간(權奸)들이 정권을 잡아서 조정의 정사가 크게 어지러웠으므로, 공은 벼슬길에 뜻이 없었다. 이에 임술년(1622, 광해군14)에 집안사람들을 다 거느리고 원주(原州)로 돌아갔다. 얼마 뒤에 병으로 졸하니, 향년은 70세였다. 아들 형(珩)이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됨으로 해서 공에게 이조 판서와 그에 따른 겸직을 추증하였다. 다음 해에 양주(楊州) 해등촌(海等村)에 있는 손향(巽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은 혼조(昏朝) 때에 살아서 끝내 자신의 뜻을 펴지 못하였으며, 계해년에 반정(反正)이 일어났을 때에는 공은 이미 서거한 뒤여서 미처 등용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식자들이 한스러워하였다.

공의 초취(初娶)는 판서 노직(盧稙)의 딸이다. 계실(繼室)은 감찰 최황(崔韹)의 딸이며, 대사헌 최진(崔璡)의 후손이다. 최씨 부인은 어질고 부도(婦道)가 있어 규문 안이 엄숙하면서도 화락하여 다른 사람이 이간하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공보다 27년 늦게 졸하여 향년이 71세였으며, 공과 같은 혈(穴)에 함께 폄(窆)하였다.

노씨 부인은 1녀 1남을 두었는데, 딸은 참봉 최정해(崔挺海)에게 시집갔으며, 아들 민(珉)은 감역(監役)이다. 최씨 부인은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바로 형(珩)으로, 의정부 좌참찬이며, 딸은 사인(士人) 유창한(柳昌漢)에게 시집갔다. 또 측실에게서 낳은 아들인 침(琛)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이고, 장(璋)은 현감이며, 딸은 첨지중추부사 조철(趙澈)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모두 다른 사람의 첩이 되었다.

참봉은 2남을 두었는데, 최석후(崔碩後)와 최석연(崔碩衍)이다. 감역은 목사(牧使) 민정명(閔定命)의 딸에게 장가들어 2녀를 두었는데, 정랑 최만길(崔晩吉)과 교리 이주(李裯)가 사위이다. 참찬은 참판 목장흠(睦長欽)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3녀를 두었다. 장남 상변(相抃)은 현감이고, 상정(相鼎)은 진사인데, 감역(監役)의 후사가 되었다. 삼남 상개(相槩)는 현감이고, 사남 상우(相愚)는 진사이다. 장녀는 도사(都事) 이두징(李斗徵), 차녀는 군수 심추(沈樞), 삼녀는 정자 이선원(李善源)에게 시집갔다.

공은 사람됨이 단정하고 엄숙하고 말수가 적었으며, 함부로 웃거나 떠들지 않았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허여하는 바가 드물었으며, 벗으로 삼은 사람들은 모두 이름난 사람들이었다. 특히 오상 윤겸(吳相允謙)과 더불어 친하게 지냈다. 이이첨(李爾瞻)은 공과 어려서 서로 알던 사이였으며 사는 집도 가까웠으나, 공은 그가 악한 짓을 하는 것을 미워하여 절대로 통교하지 않았다. 이이첨이 아는 사람을 통하여 만나 보기를 요청하자, 공은 통렬히 거부하였다. 스스로 자신을 지킴이 확고하기가 이와 같았다.

공이 명을 받아 북로(北路)에서 진구(賑救)할 적에 온 힘을 다하고 온 생각을 다하여 살려낸 사람이 아주 많았다. 그러자 방백으로 있던 한효순(韓孝純)이 말하기를 “한 사람만 살려내어도 오히려 음덕(陰德)이 있는 법인데, 더구나 수만 명을 살려낸 데이겠는가. 반드시 남은 경사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 참찬공이 과연 문과에 급제하여 팔좌(八座)의 지위에 올라 정부(政府)에 참여하였으니, 이는 그에 대한 보답인 것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옛사람이 일찍이 한 말이 있으니 / 古人有言

만년 절개 보존 실로 어렵다 했네 / 晩節實難

공께서는 선묘 때에 벼슬 살면서 / 公在宣廟朝

하신 일에 볼만한 게 많이 있었네 / 事多可觀

그 뒤 국사 아주 크게 어그러지자 / 國事大謬

물러나서 향리로 가 거처하였네 / 退居鄕里

그랬으니 어찌 아니 어진 것이랴 / 豈不賢哉

처음 있고 끝이 있다 할 만하다네 / 亦可謂有始有終者矣

후대에서 거울삼기 충분하기에 / 後其鑒

그런 사실 묘지 속에 담아 두었네 / 此其誌

[주-D001] 분사(分司) : 나라에 일이 있을 경우에 조정 외의 다른 지방에 설치하는 관사(官司)를 말한다.

[주-D002] 팔좌(八座) : 재신급(宰臣級)의 8명의 고위 관료로, 각 시대마다 지칭하는 바가 약간씩 다른데, 동한 시대 때에는 육조(六曹)의 상서와 영(令), 복야(僕射)를 말하였다. 여기서는 아들 조형(趙珩)이 의정부 좌참찬을 지낸 것을 가리킨다.

*조희보(趙希輔, 1553~1622) 1606.1. 광주목사로 제수됐고, 조형(趙珩, 1606~1679)을낳음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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