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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선 제120권 / 비명(碑銘); 집현전학사 이공 신도비명 병서

동문선 제120권 / 비명(碑銘)

유명조선국 추증추충직절 수문병의 보조공신 특진보국숭록대부 문하우정승 판도평의사사사 병조사 수문전대학사 영예문춘추관사 서원백 시 문간공 행 광록대부 형부상서 집현전학사 이공 신도비명 병서 (有明朝鮮國追贈推忠直節守文秉義輔祚功臣特進輔國崇祿大夫門下右政丞判都評議使司事兵曹事修文殿大學士領藝文春秋館事西原伯諡文簡公行光祿大夫刑部尙書集賢殿學士李公神道碑銘 幷序)


권근(權近)


영락(永樂) 원년 가을 8월에 영사평부사 서원부원군(領司平府事西原府院君) 이공(李公)이 선군(先君)의 묘비명을 나에게 부탁하여 말하기를, “우리 선군자(先君子)께서 덕을 심고 그 열매는 먹지 아니하여 우리 후인에게 끼치셨습니다. 인하여 부자(父子)가 임금의 총애와 영광을 입어 지위는 높고 봉록은 두터워서 선세(先世)에까지 작(爵)을 추봉하게 되었습니다. 분황(焚黃)하고 제사를 올려 은총을 밝힌 일은 있었으나, 그 묘도(墓道)에 아직 비석이 없어서 뒷세상에 보일 길이 없습니다. 또 나는 불행하게도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으며 세 형도 또한 다 먼저 세상을 떠났으므로, 선인(先人)의 덕행을 자세하게 알 수 없습니다. 인멸하여 전하지 못하게 될까 두렵습니다. 그대는 세계(世系)와 선인이 경력한 관작(官爵)을 상고하여 명(銘)을 지어 주십시오.” 하기에, 나는 사양할 수 없었다.

삼가 상고하건대, 이씨(李氏)는 청주(靑州)가 관향(貫鄕)이니, 나라의 명망있는 가문으로 가장 드러났으며 또 오래 되었다.

고려 태조가 창업할 때, 휘가 능희(能希)라고 하는 이가 있었는데, 태조를 잘 도와서 공(功)이 있었으므로 국공(國公)을 봉하고, 공신으로서 벽상(壁上)에 화상(畵像)을 그리게 되었다. 그의 6대 손에 이르러 휘를 공승(公升)이라고 하는 이가 있었는데, 행실이 단정하였으며, 인종(仁宗)과 의종(毅宗)을 도왔다. 일찍이 봉명사신으로 금(金)나라에 갔으나 한 닢의 돈도 받지 아니하니 맑은 덕이 더욱 드러났다. 의종이 추석에 달 구경을 하는데, 하늘이 밝고 구름도 없었다. 오랫동안 감탄하며 아름다워하다가 이르기를, “오늘 밤의 밝은 달은 공승(公升)의 가슴속 같아서 한 점의 티끌도 없구나.” 하였다. 졸하매 시호를 문정(文貞)이라고 하였다. 상하(上下) 수백 년 동안에 자손들은 조상의 업을 이어 받들어 아름다움을 이룩하여 대대로 덕 있는 이가 서로 이어 오더니, 문간공(文簡公)에 이르러서는 더욱 스스로 경계하고 신칙하여 후손에게 경사(慶事)를 끼치게 하였다. 사평공(司平公)은 그의 아들 상당군(上黨君)과 마음을 합하고 힘을 다하여 우리 이씨 조선에 거듭 정사좌명(定社佐命)의 공훈이 있어서 공신으로서 훈맹(勳盟)에 함께 피를 마셨으며, 모두 정승의 높은 벼슬에 올랐다. 상당군(上黨君)과 그의 아우 청평군(淸平君)은 모두 공주에게 장가들었는데, 적선(積善)이 남긴 경사가 더욱 크고 창성하다. 아, 성대하도다. 문간공(文簡公)의 휘는 정(梃)이니 그전 이름은 춘길(春吉)이다. 태정(泰定) 을축년에 공이 29세로 처음에 문음(門蔭)으로 팔관보 판관(八關寶判官)이 되었고, 다음해에 과거의 병과(丙科) 제2등으로 급제하였다. 봉거 직장(奉車直長)에서부터 전법 좌랑(典法佐郞)을 역임하였으며, 치화(致和) 원년에는 판도정랑(版圖正郞)으로 나가서 지초계군사(知草溪郡事)가 되었는데 어진 정치를 한 바 있다. 그 뒤에 감찰ㆍ장령ㆍ전법 총랑ㆍ경상도 찰방에 차례로 임명되었다. 그리고는 10년 동안을 한가롭게 살면서 조용히 노닐며 편안하게 지내다가 지정(至正) 계사년에 다시 중정(中正)ㆍ성균 좨주(成均祭酒)에 임명되고, 봉순대부 판전교시사 진현관제학(奉順大夫判典校寺事進賢館提學)으로 추자(追資)되었다. 갑오년에는 정순대부 판통례문사(貞順大夫判通禮門事)가 되었으며, 을미년에는 판위위시사 보문각제학(判尉衛寺事寶文閣提學)이 되고, 위계(位階)는 봉익대부(奉翊大夫)로 높아졌다. 조금 뒤에 우상시(右常侍)로 전임하였고, 정유년에는 영록대부 우산기상시 집현전학사(榮祿大夫右散騎常侍集賢殿學士)로 고쳐 임명되었다. 무술년에는 광록대부 형부상서(光祿大夫刑部尙書)가 되었으며 관직은 전과 같았다. 이것이 그가 역임한 벼슬이다. 공은 일찍이 청렴하고 검소한 것으로써 스스로 다스리며 예법을 따라 실천하고, 세속에 따라 굽히고 펴고 하는 일을 하지 아니하니, 세속 사람들이 그의 바르고 곧음에 탄복하였다. 진주(鎭州)의 상산(常山)에 물러가 살면서 벼슬과 영달을 구하지 아니하였다. 공민왕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 오래 그의 어짐을 들었으므로 왕위에 오르자 공을 불러 서울에 오게 하고, 그의 맑고 삼가는 것을 가상히 여겨 내불당(內佛堂)의 일을 주관하게 하고, 문정공(文貞公)의 절조와 행적의 대강과, 의종(毅宗) 임금이 달을 보고, ‘오늘밤의 밝은 달은 공승(公升)의 가슴속 같아서 한 점의 티끌도 없다.’고 탄상한 말을 친필로 쓰고, 이어 공의 뜻이 선조를 사모하여, 또한 세상 살이의 욕망을 담박하게 하는 일 등, 수백 가지의 말을 써서 내려 주고, 이제 곧 크게 등용하려 하였는데, 공이 갑자기 전에 은거하던 곳으로 돌아가 신축년 6월 19일에 병으로 졸하니, 춘추가 63세였다. 상산(常山)의 남쪽 기슭에 장사하였다.

아버지의 휘는 계감(季瑊)이다. 중대광 낭성군(重大匡琅城君)인데, 시호는 정헌(正憲)이다. 조(祖)의 휘는 창우(昌祐)이니, 판도총랑 증밀직사사(版圖惣郞贈密直司使)이다. 증조의 휘는 장(粧)이니, 전중감 증지문하성사(殿中監贈知門下省事)이다. 바로 문정공(文貞公)의 아들인 참지정사(叅知政事) 휘 춘로(椿老)의 아들이다. 김변(金胼)이니, 외조(外祖)는 시호를 문신공(文愼公)이라 하는데 모주(某州)의 사람이다. 부인(夫人)은 명주 김씨(溟州金氏)니, 모관(某官) 계초(繼貂)의 딸이다. 향년이 70세로서 공보다 15년 뒤인 홍무(洪武) 을묘년 4월 21일에 졸하여 공의 무덤 곁에 장사하였다. 또 그 뒤 20여 년 뒤에 사평 부사(司平府事)의 공(功)으로 공에게 문하우정승서원백(門下右政丞西原伯)을 추증하고, 부인에게 변한국부인(卞韓國夫人)을 봉하였으니, 공신의 조상에게 미루어 주는 은전(恩典)이다. 아들 넷과 딸 둘이 있다. 맏아들의 이름은 유신(由伸)이니, 임오년 과거에 급제하고 형부 낭중(刑部郞中)으로 경상도 안찰사로 나갔는데 공보다 먼저 몰(歿)하였다. 차남의 이름은 거인(居仁)이니, 검교 좌정승(檢校左政丞)으로 죽어서 시호를 공절(恭節)이라 하였다. 다음 삼남의 이름은 거의(居義)니, 공조 전서(工曹典書)로 일찍이 몰하였다. 다음 사남은 이름을 거이(居易)라고 한다. 문하 좌정승(門下左政丞)으로 지금 영사 평부사서원부원군(領司平府事西原府院君)이 되었다. 맏딸은 검교 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 이숭(李崇)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공안 부윤(恭安府尹) 민경생(閔慶生)에게 시집갔다. 손자와 손녀 약간 명이 있다. 장남인 낭중(郞中)이 상서(尙書) 홍승조(洪承祚)의 딸에게 장가 들어 아들을 낳았으니, 큰아들 이름을 덕윤(德閏)이라고 하며 호군(護軍)의 벼슬에 있고, 다음은 이름을 부윤(富閏)이라고 하며 전중경(殿中卿)의 벼슬에 있다. 맏딸은 정당문학 겸 사헌부대사헌 이지(李至)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대호군(大護軍) 김소(金紹)에게 시집갔다. 차남인 공절(恭節)은 도첨의 정승(都僉議政丞) 조익청(曹益淸)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둘을 낳았으나 다 어리다. 한산군(漢山君) 이광우(李光雨)의 딸에게 후취(後娶)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을 굉도(宏道)라고 하며 사수 감승(司水監丞)의 벼슬에 있다. 맏딸은 판사(判事) 박전의(朴專誼)에게 시집가고, 차녀는 군자 주부(軍資注夫) 양중관(梁仲寬)에게 시집갔으며, 다음 삼녀는 공조 의랑(工曹議郞) 노경(盧敬)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도염 서승(都染署丞) 심총(沈聰)에게 시집갔다. 삼남인 공조전서는 호군 김인회(金仁晦)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을 곤륜(崐崙)이라고 하며 사헌부 감찰의 벼슬에 있다. 4남인 영사평부사는 형부 상서(刑部尙書) 최연(崔堧)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을 저(佇)라고 하며, 의정부 찬성사 상당군(議政府贊成事上黨君)이다. 태상왕(太上王)의 딸 경신궁주(慶愼宮主)에게 장가들었다. 차남은 이름을 백관(伯寬)이라고 하며, 상호군(上護軍)의 벼슬에 있다. 다음은 이름을 백언(伯言)이라고 하며, 대호군의 벼슬에 있다. 다음은 이름을 백강(伯剛)이라고 하니 청평군(淸平君)이다. 지금 임금의 딸 정신궁주(貞愼宮主)에게 장가들었다. 다음은 이름을 현(儇)이라고 하는데 어리다. 맏딸은 전농정(典農正) 신중선(辛中善)에게 시집 갔다. 차녀는 종부 부령(宗簿剖令) 경지(慶智)에게 시집갔다.

외손자와 외손녀 약간 명이 있다. 이 시중(李侍中 이숭)이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을 민(岷)이라고 하며, 광주 목사(光州牧使)의 벼슬에 있다. 다음은 이름을 인(嶙)이라고 하며, 사재 소감(司宰少監)의 벼슬에 있다. 다음은 이름을 치(峙)라고 하며, 연안 부사(延安府使)의 벼슬에 있다. 맏딸은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 최안준(崔安濬)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최유경(崔有慶)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 조준(趙浚)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봉례랑(奉禮郞) 김지(金祉)에게 시집갔다. 민공안(閔恭安) 부윤이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을 설(渫)이라고 하며, 직예문관(直藝文館)의 벼슬에 있다. 맏딸은 지곡 주사(知谷州事) 홍제(洪濟)에게 시집 갔다. 다음은 평원군(平原君) 조박(趙璞)에게 시집갔다. 증손자와 증손녀 약간 명이 있다. 평녕군(平寧君) 대림(大臨)은 지금 임금의 딸 경정궁주(慶貞宮主)에게 장가들었으니, 정승 조준(趙浚)의 아들이다. 나머지는 다 어리다. 예전부터 공훈이 있는 가문이 두어 대를 못 가서 한미한 가문이 되는 것은, 대체로 선조의 공덕을 거듭 쌓음이 비록 부지런하였더라도 자손된 자가 대개 교만하고 사치함이 많아서 지키는 데 삼가하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지금 공께서는 선대에서 쌓은 덕이 두터워 그 흘러오는 광채가 발달함이 이미 성대한데, 사평(司平)의 부자도 능히 모두 공경하고 근신하여 뜻과 절조를 더욱 가다듬어 귀한체 하지 아니하고 자랑하지 아니하며, 선을 즐겨 게을리 함이 없다. 이는 그 지킴을 더욱 삼가서 선대의 빛을 드날리는 것이니, 후손에게 경사가 흘러감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마땅히 명(銘)에 써야 하겠다. 그 명은 이러하다.


기름진 서원 땅 / 膴膴西原

그 근원을 누가 열었는가 / 孰濬其源

국공이 터를 잡아 / 國公肇緖

그 근본을 잘 굳혔네 / 克固其根

그 뿌리 굳건하여 / 其根旣固

가지와 잎 번성하구나 / 枝葉是繁

높고 큰 문정공 / 烈烈文貞

몸가짐이 맑아서 / 操履之淸

가슴속 티끌 없음이 / 胸中無累

가을달의 밝음일세 / 秋月之明

밝고도 정성스러운 형부상서 문간공 / 顯允刑部

덕행이 있어 / 維德之行

예로써 처신하며 / 身以禮持

세속에 영합하지 않았네 / 不與俗隨

청렴하고 검소함 더욱 돈독하여 / 淸儉彌篤

그 터전에 후하게 덕을 쌓았으니 / 厚積厥基

공경도 될 수 있고, 정승에도 알맞건만 / 宜卿宜相

마침내 시용하지 아니하고 / 訖莫以施

경사를 뒤로 물려 / 遺慶于後

넉넉함을 끼치었네 / 以垂其裕

사평을 계도하니 / 迺啓司平

준엄하고 씩씩하여 / 旣峻且武

충성은 사직에 있고 / 忠在社稷

공로는 맹부에 간직하였네 / 功藏盟府

부자가 두 번이나 맹세하여 / 父子再啑

임금의 큰 사업을 함께 도우셨네 / 同獎王業

형제 모두 훌륭하여 / 兄弟竝美

임금의 딸 맞이하니 / 王姬是室

광채나는 은총의 빛 / 赫赫寵光

옛날에도 짝 없구나 / 雖古罕匹

모두 법을 잘 지키고 / 咸能守法

더욱 지조를 삼가니 / 愈謹秉節

복록은 끊임 없고 / 福未有艾

전렬 더욱 빛이나 / 增光前烈

면면한 그 후손 / 繩繩來裔

길이길이 이어가리 / 引之無替

이 사연을 비석에 새겨 / 刻辭于碑

영원한 후세에 밝게 보이노라 / 昭示永世


*광주목사 이민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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