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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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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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수-계남김선생유허비
    광주시 남구 대촌동(화장동) 농막마을1913년이 계남김선생유허비는 김정수(桂南 金鼎洙)의 유허비이다. 경당 최윤환(敬堂 崔允煥)이 글을 썼는데 1913년에 건립되었다. 광주광역시 남구 화장동 농막부락 김인규씨집 뒷편 숲속이다.유허비에는 김정수는 현와 고광선(弦窩 高光善)의 문인으로 이름난 효자였을 뿐 아니라 땅을 주어 농민들의 기근을 면하게 해주고 병자들을 구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종종 관호정(觀湖亭)의 건립자를 김영현(金永賢), 김형준(金亨俊) 및 김동정(金東鼎) 등으로 기록된 것을 볼 수 있는데, 김영현은 김정수의 자(字), 김형준은 호적상의 이름, 그리고 김동정은 족보에 항렬자로 맞춰 쓴 이름으로 모두 김정수를 뜻하는 이름이다. 관호정의 상량문에 따르면 김정수가 지은 이 정자는 1932년에 건립되었다.  이 정자의 거실 한칸을 자신의 처소로 할애하여 그의 호를 따 계남정사(桂南精舍)라고도 불렀다. 桂南金先生 遺墟碑韓文公曰道之所在師之所在也師者所傳道授業解惑也人非生而知之者孰能無惑惑而不從師其爲惑也經不解矣故桂南金先生從師弦窩高先生質疑解惑早得爲己之學博通貴典敎授學徒成就者多且孝於雙親養志爲先親有疾病煎湯躬進終至殞命斷脂灌血延命數日奄遭巨創全廢酒肉蘭蘭梅梅有棘人諸氣象侍墓痛哭以終三年後喪亦然世稱孝子又以慈善爲心每出己財用藥於貧病者終爲廖愈買受田土許與於無晨者免其艱難飢歲傾廩救給於貧窮者脫其窘途且送米藥救護於窮産者全其生命喜迎過容禮遇而厚贐之且無困境如此功德何可盡說乎鄕黨稱善壬申建蔡觀湖亭湖南名碩多有題詠居處安閒日事詠觴訓迪弟子每叙彛倫韓文公所謂道之所存者非此耶噫先生之學問孝行善德不可一日忘之故同碩諸益合謀翌碑於亭下以寓羹墻之慕庶扶風敎之頹廢金萬鎬與文吉殫誠也先生諱鼎洙字永賢桂南號也高宗丁亥與丙子生卒年也駕洛國王諱首露興武王諱庚信蔡隱公諱方礪俱爲顯祖有雲齊公贊仲子也先生有子三人鳳奎龍奎麟奎眞鳳毛而孫曾甚繁不盡錄方翌遺蹟碑於觀湖亭友人宋營鎭請余文余與公有舊不辭而書之癸丑二月上澣 慶州崔允煥 撰 信州康仁煥 書
    2018-06-17 | NO.239
  • 김창환-국창 김창환 묘비
    광주시 광산구1997년國唱金昌煥墓碑는 흥성 장재철 짓고 평택 임형문 쓰다
    2018-12-02 | NO.238
  • 김창환-동몽교관 김창환 유허비
    광주시 광산구 신촌동 975-3번지1910년(순종4년)이 김창환유허비(金昌煥遺墟碑)는 동몽교관(童蒙敎官)으로 조봉대부(朝奉大夫)를 지낸 김창환 선생의 비이다. 전통시대에 효행을 실천한 선비의 유허비로 효행정신의 선양과 후대의 추숭활동을 알 수 있어 제도사와 향토사적 의의가 있다.아원표출이창대부(我願表出以昌大夫) 숭정후오주병진(崇禎後五周丙辰)이라는 연기(年記)로 보아 1916년에 이 곳(광주 광역시 광산구 신촌동 975-3번지)에 세워졌다.기우만(奇宇萬)이 명(銘)을 짓고 오준선(吳駿善)이 찬(撰)하였다. 이중권(李重權)이 글을 짓고, 이재춘(李載春)이 글씨를 썼다.창살로 네 면이 둘러져 보존되고 있으나 비문의 활자가 닳아지고 있어 바로 확인하기는 어려운 상태이다. 비의 앞면에는 "有朝鮮孝子童蒙敎官行朝奉大夫 贈吏曹參判幽菴金海金公昌煥之遺墟碑'라고 쓰여 있다.1916년 김해김씨 종중에서 건립하였다.    孝子金公遺墟碑三孝一烈。萃于一家。有古罕聞。于今尤嘉。有家獨然。有國則無。我願表出。以勖夫夫。
    2018-06-11 | NO.237
  • 김함-찬성 김공함 신도비
    광주시 북구 금곡동 산 164-1(충장사 주변)1830년이 유명조선국숭정대부판결사의정부예의찬성김공함신도비(有明朝鮮國崇政大夫判決事議政府禮義贊成金公瑊神道碑)는 金致洙 쓰다.<광주읍지>에 따르면 주(州)의 동쪽 20리의 거리인 배재(梨峙)마을에 있는 비석이다. 후손 면식(冕植)이 이를 세웠다. *瑊은 올돌 감, 또는 옥돌 함으로 읽는다.충장사 입구에서 충효동 쪽으로 송강로길을 타고 150m 지점의 길 우측에  김성원 순효비와 함께 있다. 김함은 광산 김씨  김문손(金文孫)의 아들이다. 김문손은 김후(金詡)와 김함 두 아들을 두었다. 김후의 장녀 윤덕은 양산보의 부인이 되었고, 둘째 아들이 김윤제다. 양산보의 서자 양자호가 김윤제의 3남 김윤충의 사위가 됨으로써 김, 양 두 집안은 겹사돈 관계를 맺었다. 김함의 차녀는 고경명의 장인 김백균(金百鈞, 1525~1584)에게 출가했고, 김함의 손자가 바로 김성원이다. 김윤제는 양산보의 처남, 송순의 고모는 양산보의 어머니, 양산보의 4종매는 임억령의 부인, 임억령의 둘째 딸은 김성원의 부인, 김성원은 정철의 처외재당숙, 정철은 김윤제의 외손녀사위, 양산보의 2남 양자징(梁子澂)은 김인후의 사위, 고경명은 김윤제의 종생질녀(從甥姪女) 사위였다. 김덕령(金德齡, 1567~1596) 의병장은 김문손의 4대손이다. 이처럼 면앙정과 식영정, 환벽당, 소쇄원, 서하당, 송강정의 주인들은 서로 혈맥(血脈)과 혼맥(婚脈)으로 맺어져 있다. 
    2018-06-18 | NO.236
  • 김해김씨삼세칠효비
    광주시 광산구 하산동 침산마을1963년 이 김해김씨삼세칠효비(金海金氏三世七孝碑)는 김해김씨 문중에서 관리한다.
    2018-12-01 | NO.235
  • 김해김씨쌍효유적비1
    광주시 광산구 동곡동 하산마을1955년김해김씨쌍효유적비는 樂安 吳炳鎰이 짓다.
    2018-12-02 | NO.234
  • 김해김씨쌍효유적비2
    광주시 광산구 본덕동 마곡마을1920년이 김해김씨쌍효유적비(金海金氏雙孝遺蹟碑)는 진주강씨 문중에서 관리한다. 현와 고광선이 짓다.
    2018-12-01 | NO.233
  • 김해김씨효열비
    광주시 광산구 운수동 120 하강골마을1886년(고종 23년)김해김씨 효열비는 운수동 하강골 부락에 위치해 있다. 송정영광간 도로변 좌측에 세워져 있으나 시궁창으로써 위치가 좋지 않다.숙부인 김해김씨는 광산군 동곡면 현송대동 복호부락에서 송항의후손으로 태어나 13세때 진주강씨 문절공 후손의맹의 후손 증조참대부 동호교관대효씨와 성결하였다.그러나 부군이 재행길에 간질에 감염되어 병간호에 정성을 다하였으나 그 보람도없이 삼년만에 타제하여 애통해하였다. 김씨부인은 부부간 화락한 생활한번을 가져보지 못한채 시부모님의 공양과 시중에 효성을 다하였으며 강승원을 양자삼아 가계를 잇도록 하고 60년생 홀로살며 현간의 덕을 쌓고 칠순으로 별세하였다.석비(178cm x 66cm)는 1886년 3월 김해김씨의 효열을 기리기 위하여 진주강씨문중에서 세웠으나 풍우로 마모가 심하여 자획을 알아 볼 수 없게 되었다. 1976년 3월 14일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국한문 혼용체로 개문하였다. 도로 확·포장 공사로 1999년 해체하였으며 이축대상지는 미정이다.
    2018-11-11 | NO.232
  • 김효자 정문(旌門)
    광산구 대산동 가산마을
    2018-06-19 | NO.231
  • 나주오공돈지배열부문화류씨행적비
    광주시 광산구 삼도동 도덕마을광복44년羅州吳公燉之配烈婦文化柳氏行蹟碑는 행주 기우하가 짓고 관산 임만수가 쓰다.
    2018-12-02 | NO.230
  • 나주오씨삼대효자비
    광주시 광산구 본동로 92(명도동) 평림마을1975년, 1999년나주오씨의 효자비로 1892년에 건립되었다. 도로변에 있으며 1975년 8월에 비신을 새로 세웠다. 경위도좌표: N 35˚09´52.6″, E 126°41′31.6″  이 나주오씨삼대효자비는 광산구 명도동  평림경로당 옆 에 있다. 나주 오상림, 자 덕환, 직환, 손 영기에 관한 효자비이다.1975년에 먼저 세웠고 1999년에 새롭게 세웠다.
    2018-11-30 | NO.229
  • 낙전당집 제10권 / 묘지명(墓誌銘)- 최기(崔沂, 1553~1616)
    낙전당집 제10권 / 묘지명(墓誌銘)유명 조선국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경연 의금부 춘추관 성균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통정대부 수 충청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순찰사 최공 묘지명병서〔有明朝鮮國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通政大夫守忠淸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崔公墓誌銘 幷序〕아! 간흉들이 정권을 훔쳐 충성스럽고 어진 이들을 죽이고 십 년간 덫과 함정을 놓아 충성스럽고 어진 이들을 죽여 원통함을 부르짖는 이들이 나라에 가득했는데, 해주(海州)의 옥사가 그중에서도 가장 억울하다고 하니 지금까지도 해주 옥사를 언급하면 비분강개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다. 최기(崔沂) 공이 해주 목사가 되어 충성스런 마음을 다하여 재앙의 발단을 미연에 방지하려고 했는데, 많은 사람들의 원한을 사서 마침내 그의 집안이 전복되었다. 집안이 비록 전복되었지만 정도(正道)를 지키며 동요하지 않고 자기 한 몸으로 한 시대 사류들이 당할 불의의 큰 화를 대신하였으니, 이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비분강개하여 눈물을 흘리도록 만들고 오랜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게 하는 이유이다.공은 어릴 때부터 원대한 기국을 지녀 사우(士友)들 사이에서 존중을 받았다. 만력(萬曆) 갑신년(1584, 선조17)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이듬해에 성균관에 들어가 곧이어 대과에 합격하고 선발되어 승문원에 보임되었다. 얼마 후에 사국(史局)에 들어가 검열과 대교를 역임했으며, 이정귀(李廷龜) 공을 천거한 일에 연루되어 논핵을 당하고 파직되었다. 얼마 후에 서용되어 다시 봉교가 되었고, 제용감 주부, 형조 좌랑으로 자리를 옮겼다.임진왜란 때는 방어사 이옥(李沃)의 군중에서 종사관으로 있었다. 계사년(1593)에 직위를 옮겨 해운 판관에 임명되었다. 가을에 지평으로 부름을 받고 돌아오다가 도중에 부친의 상을 당했다. 상기를 마치고 나서 호조 정랑에 임명되어 재자관(齎咨官)으로 요동에 갔다. 조정에서 숙천(肅川)이 서쪽 관문의 큰 길목이라 논의하여 공을 추천하여 담당하게 하였다.정유년(1597) 여름에 문학, 헌납, 지제교에 임명되었고, 집의, 겸필선, 종부시 정, 사간, 보덕을 역임하였으며, 홍문록(弘文錄)에 올라 부수찬과 교리를 역임하였다. 선조가 《춘추》에 대한 좌씨(左氏), 정씨(程氏), 호씨(胡氏)의 세 가지 전(傳)을 찬집하도록 명하자, 1부로 만들어 올렸다. 책이 완성되자 공과 동료 관원들이 차자를 올려 《춘추》의 복수(復讐)의 대의(大義)를 밝혔는데, 임금이 가납하고 모두 한 자급씩 올려 주었다. 공 역시 승조관(陞朝官)이 되어 서반(西班)의 부호군에 서용되었다. 공은 예전에 문사낭청(問事郎廳)으로 역적을 국문하는데 참여하여 또 포상으로 가선대부의 자급을 받았으나, 언관(言官)들이 지나치게 빨리 승진한다고 논하여 다시 바뀌었다.임인년(1602)에 동부승지에 임명되었고, 좌부승지로 승진했다가 체직되어 광주 목사(光州牧使)에 임명되었다. 부임하기 전에 자리를 옮겨 동래 부사에 임명되었는데, 상신(相臣)이 계청하여 밀양 부사(密陽府使)로 자리를 바꾸었다. 암행 어사가 고과(考課)가 가장 높다고 아뢰자, 교지와 습의(襲衣)를 하사하였다.갑진년(1604)에 좌부승지에 임명되었다. 가을에 정주 목사(定州牧使)에 임명되어 하직인사를 올리자, 임금이 직접 쓴 서찰을 하사하여 백성을 어루만지고 폐단을 제거하며, 군량을 비축하고 군사들을 훈련시켜 관서 지역의 보장(保障)으로 만들라고 면려하셨다. 윤음(綸音)이 간곡한데다 표피(豹皮)까지 하사하였으니, 매우 특별한 예우였다.공이 임금의 지우(知遇)에 더욱 감격하여 마음을 닦고 공무를 수행하여 온갖 폐해진 것을 일으켜 기월(期月)의 효과를 이루자, 내구마(內廏馬)를 하사하여 포상하였다. 정미년(1607)에 하지사(賀至使)로 연경에 갔을 적에 권귀(權貴)들의 청탁을 물리쳤으며, 행낭이 초라하였으니, 사론(士論)이 훌륭하게 여겼다. 도중에 충청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는데, 관찰사의 체모를 잘 갖추었다.무신년(1608, 광해군 즉위년)에 호조 참의로 있다가 경주 부윤에 임명되었는데, 형의 부고를 듣고서 사직을 하고 장례를 치렀다. 형조 참의, 장례원 판결사를 거쳐 호조 참의에 임명되었는데, 문민공(文敏公) 황신(黃愼)이 막 호조 판서에 부임했을 때라 공을 믿고 의지하였다.계축년(1613)에 박응서(朴應犀)의 옥사가 일어났을 때, 전조(前朝)의 구신(舊臣)들이 모두 법망에 걸려들었는데, 공 역시 조정에 편안히 있지 못하고 해주 목사(海州牧使)로 나가게 되었다. 문민공은 이미 옹진(瓮津)으로 유배되었으며, 남이공(南以恭) 역시 송화(松禾)로 유배되었다. 간흉들이 사람을 사주하여 “박치의(朴致毅)가 구월산(九月山)에 숨어 도적들을 불러 모은다.”고 상소를 올리게 하여 큰 옥사를 일으켜 해서(海西)에 유배된 이들을 끌어들여 사림(士林)을 모두 없애고, 모후(母后 인목대비(仁穆大妃))에게까지 화가 미치게 하려고 하자, 조정 안팎이 불안해하고 두려워하였다.해주 사람 박희일(朴希一)과 박이빈(朴以彬)은 고을에서 죄를 얻은 뒤 스스로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몰래 간사한 무리와 결탁하여 고변하기로 약속을 하고 밀봉된 글 한 통을 받았다. 글 속에 기록된 사람들은 모두 당시의 명사들이었는데, 특히 문민공(文敏公) 황신(黃愼)을 요주의 인물로 삼았다. 일을 고변하기 전에 박희일의 부형과 종족이 크게 두려워 그 글을 태워버렸다. 그러자 흉계를 더욱 심하게 꾸며 고을에서 명망이 있는 자들까지 모두 끌어들여 한 번에 모두 제거하려고 하였다.부형이 박이빈이 예전부터 꾸민 흉계를 적발하여 공에게 고하여 처벌하게 하였다. 공이 급하게 그들을 체포하자, 박이빈이 드디어 흉서(凶書)를 꺼내며 위협하였다. 공이 그의 허망(虛妄)한 행동을 꾸짖고는 장을 쳐서 내쫓았는데, 고을에서는 재앙의 근원이 여전히 남아있어 앞일을 예측하기 힘들다고 생각하여 그 부형과 모의하여 두 사람을 죽였다.간흉(奸凶)이 충복인 유세증(兪世曾)을 보내어 그 정황을 살피고는 해당 도(道)에서 그 일을 아뢰도록 하였다. 공과 해주 사람들이 모두 체포되었는데, 공은 심문을 받으면서 사실대로 답변하며 간흉의 흉계를 모두 밝혀냈다. 당시의 권신이 간적의 우두머리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터라, 옥사가 번복되어야 한다고 소리 높여 말하자, 간적들은 실정이 탄로 날까 두려워 음모를 더욱 치밀하게 꾸며 몰래 사형수 정충남(鄭忠男)에게 박희일 등의 밀봉된 글 속에 있는 사실을 참여하여 들었으며, 공이 역도의 우두머리라고 자백하게 시켰다.간흉이 또 해주 사람 중에 옥에 갇혀있는 자들을 꾀어 자신들을 따르면 복을 받고 따르지 않으면 화를 당할 것이라 하여 동요시키자 모두 거짓으로 자백을 하였다. 형방 승지 한찬남(韓纘男)이 평소에 공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때에 정조(鄭造), 남근(南瑾)과 함께 날조하여 죄안을 만들어 결국 공을 죽음에 이르게 하였으니, 실로 병진년(1616) 6월 25일의 일이다. 8월에 추론하여 공의 시신을 파내어 시장에 늘어놓았다. 공의 외아들 유석(有石)도 함께 목숨을 잃었으니, 슬프도다.공의 자는 청원(淸源), 호는 서촌(西村)이며, 본관은 해주이다. 고려 문헌공(文獻公) 충(沖)의 후예로, 고조는 예조 좌랑 청(埥)이고, 증조는 사헌부 감찰 운손(雲孫)이며, 조부는 마량진 첨절제사 선(璿)이며, 부친은 선전관 여개(汝漑)인데, 3대가 모두 이조 참판으로 증직되었다. 모친은 양천 허씨(陽川許氏)로, 현감 운(雲)의 따님이다. 공은 가정(嘉靖) 계축년(1553, 명종8) 3월 병신일에 태어났으니, 향년 64세이다.초취(初娶)는 만호 강탁(姜倬)의 따님이며, 재취(再娶)는 충의위 이희복(李希福)의 따님이다. 슬하에 모두 1남 4녀를 두었다. 장녀는 유찬(柳燦)에게 출가하였는데, 강씨 소생이다. 아들은 유석(有石)이고, 차녀는 현감 윤훈거(尹勛擧)에게 출가하였으며, 삼녀는 사부(師傅) 홍우정(洪宇定)에게 출가하였으며, 사녀는 사인 김해(金垓)에게 출가하였는데, 이들은 이씨 소생이다.유석의 아들은 익(瀷)으로, 요절하였다. 익(瀷)은 아들 한 명을 두었는데, 어리다. 유찬은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도사 시영(時英)이며, 딸은 사인 이석평(李碩平)에게 출가하였다. 윤훈거는 아들 한 명을 두었는데, 변(抃)이다. 홍우정은 4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극(克), 윤(允), 욱(旭), 태(兌)이며, 나머지는 어리다. 유시영은 2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정(寊)이고, 딸은 안정소(安廷熽)에게 출가하였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이석평은 3남 1녀를, 홍극은 2녀를, 홍유는 1남을, 윤변은 2남을, 유정은 1녀를, 안정소는 1남 2녀를 두었는데, 어리다.처음에 집안사람들이 공의 유해를 거두어 고향에 묻었는데, 인조반정 초기에 공을 이조 판서로 추증하고 예관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주고, 관청에서 장례를 도와주도록 명하니, 유시영(柳時英)이 공의 관을 받들어 양근(楊根) 서종면(西終面) 모좌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갑자년(1624, 인조2) 이부인(李夫人)이 세상을 떠나자 공의 묘 곁에 장사 지냈다.공은 기국과 도량이 관대하고 후하였으며, 지조와 행실은 순수하고 확고하였다. 천성적으로 효우(孝友)를 타고났으며, 윤리와 법도에 독실하였고, 선대를 받드는 데 더욱 삼가서 사우(祠宇)를 세우고 종손에게 주관하도록 하였다. 아내의 재산을 쪼개어 집을 사서 형에게 주어 살게 하였으며, 가난한 친척들 중에 공의 덕택으로 밥을 지어 먹는 이들이 항상 십여 명이었는데, 가업을 꾸려 자손들을 위한 계책을 마련한 적은 없었다.여러 차례 큰 고을을 다스려 백성들에게 이로운 일을 일으키고 폐단을 제거함이 각기 조리가 있었고 관청의 창고를 가득 채우니, 사람들이 편안하게 살게 되어 공이 떠난 뒤에는 반드시 비석을 세워 그 덕을 칭송하였다. 스스로를 청렴과 고결함으로 단속하여 부임한 관사에서 관례로 나누어 주는 물품은 역시 관사의 창고로 돌려보내고 털끝만큼도 이익을 취하지 않았다.평소에는 엄숙하게 거처하고 의관을 가지런하게 갖추었으며 일체의 사치나 이득에 대해서는 마음을 두지 않았다. 사람을 대할 적에는 간격을 두지 않아, 공을 바라보면 장덕군자(長德君子)인 줄을 알았다고 한다. 선조(宣祖)를 만나 높은 지위에 등용될 듯하였으나 임금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 운명이 재앙과 함께 찾아왔으니, 천도(天道)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어쩌면 공의 몸과 공의 명성을 바꾸어 무궁토록 전해지게 하여 세상의 이랬다저랬다 변덕을 부리는 사람들을 권면시키려는 것인가.나는 공이 선인과 연고가 있어서 상 곁에서 뵌 적이 있으며, 선인 역시 죄에 걸려 풍파가 닥치던 날에 내 마음이 쪼개진 적이 있으니, 단지 남들을 따라서 비분강개하며 눈물을 흘릴 뿐만이 아니다. 이에 도사군이 행장을 가지고 와서 명을 부탁하니, 공의 묘지명을 짓는 일을 의리상 감히 사양할 수 없다. 삼가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선악은 뒤섞이지 않지만 / 善惡不紊화복은 간혹 어긋난다네 / 禍福或舛천 년 전 맹박의 말로 / 千載孟博之辭공의 묘지명에 새기노라 / 刻公隧石之篆[주-D001] 유명 …… 묘지명 : 이 글은 최기(崔沂, 1553~1616)에 대한 묘지명이다.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청원(淸源), 호는 서촌(西村)ㆍ쌍백당(雙栢堂)이다.[주-D002] 해주(海州)의 옥사 : 최기(崔沂)가 해주 목사(海州牧使)로 있으면서, 이이첨(李爾瞻)의 일파인 박희일(朴希一), 박이빈(朴以彬)을 무고죄로 처형하였다는 이유로 이이첨의 미움을 받아, 이이첨의 일파인 황해도 관찰사 백대형(白大珩), 해주 목사 유세증(兪世曾)에 의해 남형죄(濫刑罪)로 투옥되어 고문을 받고 옥사(獄死)한 사건을 가리킨다.[주-D003] 재앙의 …… 했는데 : 계축년(1613, 광해군5)의 옥사 때 지명수배 하였으나 체포되지 않은 자가 있었는데, 이를 인하여 이이첨(李爾瞻)과 허균(許筠)이 ‘그자가 해서(海西) 지방의 산골짜기로 도망쳐 있으면서 무리들을 모아 난을 일으키려 한다.’는 내용으로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술책을 꾸며 평상시에 꺼리고 미워하는 자들을 모두 그 속에 몰아넣으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몰래 박희일(朴希一)과 박이빈(朴以彬) 등을 사주하여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상변(上變)하게 하였다. 박희일과 박이빈은 모두 해주 사람으로 평소에 행실을 삼가지 않아 향리에서 용납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이첨과 허균의 사주를 받고는 특별한 상을 받을 것이라고 여겨 갑자기 스스로 대단한 인물인 양 여기며 향리로 돌아가서 그런 내용을 살짝 누설하였다. 그의 부형들이 그 말을 듣고서는 크게 두려워하여 실상을 폭로하였다. 최기가 이 두 사람을 잡아들이기는 하였으나 중한 죄로 처리하지는 않았다. 《淸陰集 卷24 觀察使崔公神道碑銘》[주-D004] 복수(復讐)의 대의(大義) : 부모의 원수를 반드시 갚는다는 말이다. 제 양공(齊襄公)이 9대 선조의 원수를 갚기 위해 기(紀)나라를 멸망시켰을 때, 《춘추》에서는 그저 “기후가 영원히 그 나라를 떠났다.[紀侯大去其國]”라고만 하였는데, 멸망시킨 제 양공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은 것에 대해 《춘추공양전》에서는 어진 이를 위해서 피휘를 해 준다.[春秋爲賢者諱]”라고 하였고, 또 “양공의 어떤 점을 어질게 여겼는가? 원수를 갚은 것을 말한다.[何賢乎襄公? 復讎也.]”라고 하였다. 《春秋公羊傳 莊公4年》[주-D005] 기월(期月)의 효과 : 교화를 빠른 시일 내에 이룩한다는 뜻이다. 《논어》 〈자로(子路)〉에 “만약 나를 써 주는 사람이 있다면 단 1년만 정치를 담당하더라도 그런대로 괜찮아질 것이요, 3년이면 업적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苟有用我者, 期月而已可也, 三年有成.]”라고 하였다.[주-D006] 맹박(孟博) : 후한 때의 인물인 범방(范滂)으로 맹박은 그의 자(字)이다. 청렴하고 지조 있는 관원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뜻있는 선비들과 친교를 맺고 환관들의 전횡에 반대하였다. 그 뒤 환관들이 이응(李膺) 등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관원을 일망타진하고자 당파를 조장한다는 죄목으로 이른바 ‘당고(黨錮)의 화(禍)’를 일으켰을 때, 당인으로 지목되어 33세의 나이로 옥사하여 태연히 죽음을 맞이하였다. 《後漢書 卷97 黨錮列傳 范滂》
    2023-12-04 | NO.228
  • 남원윤여사의순효행비
    광주시 남구 도금동 도촌마을1981년이 남원윤여사의순효행비는 윤의순의 비로 시부모를 공경하게 모신 효행을 기리기 위해 광주유도회 세운 것이다. 바로 옆에는 신도 최군성의 마라톤 기록비가 있다.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어두운 이 땅에 효경(孝經)의 등불을 비쳐준 한 여인이 있었으니 성은 남원윤씨요 이름은 의순이다. 윤효부는 남원윤씨의 화려한 가문에서 문효공(文孝公)의 후손으로 성격이 강직하고 엄격한 병철(秉哲)의 따님이다. 윤여사는 타고난 자품이 순박온후하고 자상하여 대촌면 도촌리 삭영최씨(朔寧崔氏) 가문에 출가하였다.최씨의 내력을 살펴보면 고려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천노(天老)를 시조로 기록하고 있으며 조선왕조 세조때 영의정으로 유명한 경국대전을 펴내는데 많은 공을 쌓은 항(恒)을 거쳐 광주목사인 정룡(庭龍) 등 현인(賢人)과 충신을 계속하여 배출한 빛나는 집안의 후손인 성한(成漢 字君盛 : 20세가 되면 관례를 치르고 지어준 이름)의 부인이다.남편인 최군성(崔君盛)의 고조는 우열(遇烈) 증조는 권구(權九) 조부는 병춘(炳春) 아버지의 이름은 절우(節宇)이다. 여사는 시가에서 남다를 부덕(婦德)을 쌓으며 가정을 다스리며 후손을 교육하는데 열과 성을 다하고 예법을 지켰다. 시부모님을 극진히 봉양하던 중 불의에 시부모님을 여의고 시아버지께 정성껏 효도를 다하고 아침 저녁으로 많은 고통을 겪으면서 슬하에 4남 2녀를 두었다. 그의 효행이 광주 유도회에까지 전해져 유도회는 1981년 6월 16일 효행비를 세워 주었다. 그 남편 군성공은 육순을 겨우 넘기고 세상을 하직했다.
    2018-06-17 | NO.227
  • 남평문씨쌍효문
    남구 사동 124-2번지. 남평문씨 文章甲, 文章燮 형제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866년 건립한 쌍효문건립 시기는 문중에서 1822년에 건립하였으며, 현재는 쌍효문만 남아있고 내부는 좌측문을 개조하여 관리자 문재구씨가 거주하고 있다.현판은 연탄불에 그을려 내부의 현판은 전혀 볼 수가 없다. 내부에는 정려기 이외에 12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고 한다.상량문에는 「崇禎紀元後 五丙寅二十六日丙午卯時立柱十七日丁未巳時上樑」이라 하여 건립시기를 알 수 있다. 정려의 정면에는 「孝子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文章甲之閭, 孝子曾童蒙敎官朝奉大夫文章變之閭上紀卽作二年乙丑命旌越二年丁卯改刻」이 써 있다.
    2018-06-13 | NO.226
  • 노 이천(盧伊川)의 묘갈명
    간이집 제2권 / 묘갈명(墓碣銘) 병서(幷序) ○ 음기(陰記)와 묘표(墓表)를 덧붙임공의 휘는 개(塏)요, 자는 청중(淸仲)이다. 노씨는 광주(光州)에서 나와 고려의 저명한 성씨가 되었는데, 아조(我朝)에 들어와서는 우의정(右議政) 노숭(盧嵩)이 있었으니, 이분이 공에게 6대조가 된다.증조인 노정(盧禎)은 부호군(副護軍)이고, 조부인 노자장(盧自璋)은 부사정(副司正)이고, 부친인 노한문(盧漢文)은 통정대부(通政大夫)로 광주 목사(廣州牧使)이다. 모친인 숙부인(淑夫人) 문화 유씨(文化柳氏)는 부사직(副司直) 유숙(柳淑)의 딸로서, 삼한 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유차달(柳車達)의 후예이다.공은 가정(嘉靖) 갑신년(1524, 중종19)에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영특하다고 일컬어졌다. 18세에 시부(詩賦)로 향시(鄕試)에 응시한 적도 있었으나, 이윽고 자제(子弟)의 행실을 독실하게 닦는 데에 전념하였을 뿐 다시는 과거 공부에 힘쓰지 않았으므로, 끝내 그 방면에는 소득이 없었다.음관으로 사산 감역(四山監役)에 보임(補任)되었는데, 상(喪)을 당해 그만두었다. 다시 수운 판관(水運判官)으로 근무하던 중 어떤 일에 관련되어 파직되었다가, 다시 전설사 별좌(典設司別坐)로 임명되었으며, 여기에서 인의(引儀)로 승진하면서 한성 참군(漢城參軍)을 겸임하였다.그 뒤 얼마 있다가 이천 현감(伊川縣監)으로 나가게 되었는데, 병으로 부임을 하지 못한 채 죽으니, 이때가 만력(萬曆) 정해년(1587, 선조20)으로서 향년 64세였다. 이해 8월 갑신일에 파주(坡州) 두문리(斗文里)에 장사 지냈다.공의 효성과 우애는 지극한 성품에서 발로된 것이었다. 부친을 잃은 뒤로 모부인(母夫人)만을 모시게 되면서는 비통해하고 두려워하는 심정이 더욱 간절하였으며, 형제 다섯 사람과 날마다 함께 모여 맛있는 음식으로 모부인을 기쁘게 해 드렸다. 그리고 상(喪)을 전후로 해서 몸이 극도로 상해서 거의 위태롭게 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며, 종가(宗家)에 후사(後嗣)가 없는 상황에서 차서(次序)로 볼 때 공이 후사로 들어가는 것이 마땅하였으나 고사(固辭)하며 피하기도 하였다.공은 어느 관직에 있거나 모두 충실하게 그 직책을 수행하였다. 공이 수운 판관에서 파직될 당시, 이졸(吏卒)들이 며칠 동안이나 수백 명씩 대성(臺省)에 몰려와 공의 억울함을 하소연하기도 하였으니, 이것이 하나의 증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하늘이 어찌해서 공에게 베풀어 주는 것을 유독 인색하게 했는지 애석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공의 부인인 거창 신씨(居昌愼氏)는 봉사(奉事) 신홍필(愼弘弼)의 딸이요, 우의정 신수근(愼守勤)의 손녀로, 모두 4남 3녀를 낳았다.장남 노수의(盧守誼)는 종실(宗室)인 영가수(永嘉守) 모(某)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노희천(盧希天)을 낳았다. 그다음 노수심(盧守諶)은 만호(萬戶) 유삼(柳參)의 딸에게 장가들어, 이대영(李大榮)의 처가 된 딸과 아들 노희성(盧希聖)ㆍ노희현(盧希賢)을 낳았다. 그다음 노수눌(盧守訥)은 증 판서(贈判書) 김주(金澍)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을 낳았으며 아들은 어리다. 그다음 노수밀(盧守謐)은 종실(宗室)인 영성영(靈城令) 모(某)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장녀는 신식(申湜)에게 출가하여 아들 신덕자(申德滋)를 낳았으며 그다음 아들과 딸 넷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그다음은 김익현(金翼賢)에게 출가하였다. 그다음은 한율(韓慄)에게 출가하여 아들 둘을 낳았는데 어리다.노수심은 무과(武科) 출신으로 현감(縣監)을 지냈는데 먼저 죽었다. 신식은 문과(文科) 출신으로 장령(掌令)이다. 김익현은 문과 출신으로 도사(都事)이다. 한율은 겸사복(兼司僕)이다. 나머지는 관직이 없다.나는 장령과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이기 때문에, 묘갈명을 지어 달라는 요청을 사양할 수가 없었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관원의 능력을 어찌 큰 관직에서만 볼 것인가 / 能視官不在大兮가정의 행실을 보면 됐지 어찌 꼭 집 밖을 논하리요 / 行視家何必外兮이러쿵저러쿵 공에 대해 비난이 있기도 하였다만 / 譏歸於時이분이야 책임질 일 무엇이 있었던고 / 斯人何負兮산 사람은 가신 이를 가슴 아파하는데 / 居者傷往가신 이는 산 사람에 고개도 돌리지 않는구려 / 往不回首兮
    2022-04-29 | NO.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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