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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문선 제129권 / 묘지명(墓誌銘); 시문충 하공 묘지명(하윤, 하륜) 광주 귀양
    동문선 제129권 / 묘지명(墓誌銘)유명조선국 분충장의 동덕정사 좌명공신 대광보국 숭록대부 진산부원군 수문전대제학 영경연 춘추관서 운관사 세자사 시문충 하공 묘지명 병서 (有明朝鮮國奮忠仗義同德定社佐命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晉山府院君修文殿大提學領經筵春秋館書雲觀事世子師諡文忠河公墓誌銘 幷序)윤회(尹淮)하씨(河氏)의 조상은 진주(晉州)에서 나와 한 고을의 명망 있는 집안이 되었다. 좌사낭중(左司郞中) 휘 공진(拱辰)으로부터 고려에 벼슬하여 현왕조(顯王朝)에 공을 세워 오랑캐를 평화롭게 하고 적을 물리쳐 일대의 명신이 되었다. 그 뒤에 탁회(卓回)라는 분은 고왕조(高王朝)에 벼슬하여 사문박사(四門博士)가 되었고, 박사로부터 사대(四代)가 잇달아 과거에 올라 대대로 명망 있는 사람이 있어 경사를 심고 선행을 쌓아서 공에 이르러 가문이 더욱 번창하였다.공의 휘는 윤(崙)이요, 자는 대림(大臨)이다. 증조는 휘 식(湜)이니, 박사의 5대손으로, 징사랑 선관서승(徵仕郞膳官署丞) 증 순충보조공신 보국숭록대부 판사평부사 진강군(贈純忠輔祚功臣輔國崇祿大夫判司平府事晉康君)이요, 조부 휘 시원(恃源)은 식목녹사(式目錄事) 증 순충적덕병의 보조공신(贈純忠積德秉義輔祚功臣)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우정승 판병조사 진강부원군(判兵曺事晉康府院君)이요, 아버지 윤린(允潾)은 봉익대부 순흥원사(順興院使) 증 충근익대신덕수의협찬공신 대광보국 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진양부원군(贈忠勤翊戴愼德守義協賛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晉陽府院君)이고, 어머니 강씨(姜氏)는 증 진한국대부인(贈辰韓國大夫人)이니, 검교예빈경 증 숭록대부 의정부찬성사 판호조사 휘 승우(承祐)의 딸이며 모두 공의 귀함으로 증직을 얻었던 것이었다. 지정(至正) 정해년 봄에 강씨가 길몽을 꾸고 태기가 있어 그 해 12월 기축일에 공을 낳았다.공은 어렸을 때부터 우뚝이 보통 아이와 같지 않고 10세에 배우기 시작하여 전수받으면 대번에 외웠다. 나이 14세에 경자년 국자감 고시에 합격하였으니, 행촌(杏村) 이 대부(李大夫)가 바로 그때 시관이었고, 19세에 을사년 과거 시험에 합격하였는데, 초은(樵隱) 이문충공(李文忠公)과 목은(牧隱) 이문정공이 그 좌주였다. 문충공이 한 번 보고는 큰 그릇으로 여겨 곧 그 아우 예의판서(禮儀判書) 인미(仁美)의 딸로서 아내를 삼았다. 그 때 두 공이 사문(斯文)의 종주가 되어 학사(學士) 대부(大夫)가 모두 그 문하에서 나오게 되었다. 공이 사우(師友) 사이에 주선하면서 강론을 연마하여 학문이 날로 전진되었다. 정미년에 춘추관에 뽑혀서 겸열(檢閱)과 공봉(供奉)이 되었다. 홍무(洪武) 원년 무신에 감찰규정(監察糾正)을 고시하고, 기유년에 수사(收司)가 양전한 것을 조사하면서 신돈(辛旽)의 문객으로 수사 부사(收司副使)로 있는 자를 탄핵하였다가 신돈에게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 신해년에 신돈이 처형된 뒤에 지영주안렴사(知榮州按廉使)로 기용되자 김주(金湊)가 그 정사와 행실이 제일이라고 아뢰었다. 임자년에 고공좌랑(考功佐郞)으로 불러 제수하고, 계축년에 판도좌랑(版圖佐郞)으로써 교주 강릉도 찰방(交州江陵道察訪)이 되었고, 갑인년에 제릉서령(諸陵署令)이 되고, 을묘년에 사헌부 지평과 전리 정랑(典理正郞)이 되었다. 병진년에 전교부령 지제교에 올랐다가, 전의부령(典儀府令)으로 옮겼고, 정사년에 전법총랑 보문각 직제학에 올랐으나, 전례대로 지제교를 맡았다. 이로부터 제직(除職)이 되었으나, 모두 관직(館職)을 띄었고, 또 판도총랑으로 교주도안렴(交州道按廉)이 되었다. 무오년 전리총랑이 되고 기미년에 전교령 성균대사성에 오르고, 경신년 9월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고, 신유년에 기복(起復)되어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었으나, 상을 끝낼 수 있도록 청하니, 허락하였다. 임술년에 삼복이 끝나자 우부대언(右副代言)이 되고, 계해년에 우대언(右代言)에 옮기고 얼마 안 되어 전리판서(典理判書)가 되었고, 갑자년에 밀직제학(密直提學)이 되고, 을축년에 첨서(僉書)에 오르고, 그 가을에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가 국자전부(國子典簿) 주탁(周倬) 등을 보내니, 공이 서북면(西北面)에 영접하였으며, 돌아갈때에 공이 사표(謝表)를 받들고 함께 가니, 주탁 등이 매우 예우하였다.정묘년에 동지(同知)에 오르고, 무진년 봄에 무신 최영(崔塋)이 군대를 일으켜 요양(遼陽)을 범하려 할 때, 공이 힘껏 불가함을 진술하였더니, 최영이 노하여 양주(襄州)로 추방하였다. 여름에 최영이 패하자, 공이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다. 을사년 봄에 다시 동지(同知)가 되었고, 가을에 영흥군(永興君) 왕환(王環)이란 자가 일본에서 오니 공이 인척(姻戚)으로 평소에 왕환의 얼굴을 알았기에 그가 왕환이 아님을 말하였다가 광주(光州)에 귀양갔다. 경오년 봄에 울주(蔚州)에 옮겼다가 여름에 윤이(尹彛)ㆍ이초(李初)의 옥사가 일어나자 모든 귀양살이하던 사람을 청주에 모아 둘 적에 공이 사면되어 진주로 돌아왔다. 신미년 여름에 전라도 도관찰사에 기용되었고, 임신년 여름에 돌아오니 우리 태조가 이미 임금이 되었다. 계유년 가을에 다시 공을 기용하여 경기좌도 관찰사가 되었었다. 공이 비로소 민호(民戶)의 농토 개간의 정도여부에 따라 부역을 정하니 토호들은 싫어하였으나, 백성들은 그 공평함에 복종하였다. 여러 도가 모두 본받아 드디어 제도로 정해지게 되었다.그 때에 태조가 계룡산으로 서울을 옮기려고 이미 공사가 시작되었을 때, 공이 힘껏 간언하였기 때문에 따랐다. 갑술년 3월에 첨서중추원사(僉書中樞院事)가 되었고, 을해년 4월에 중추사(中樞使)에 옮기고, 7월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였고, 병자년 4월에 기복되어 예문춘추관 학사가 되어 사퇴를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고황제가 사표(謝表)한 글이 불공하다고 하여 우리나라에서 그 문장을 주관한 자인 정도전을 입조(入朝)하게 하였다. 또 우우(牛牛) 등을 보내어 독촉을 하니, 공이 관반(館伴)이 되었는데, 태조가 은밀히 조신들에게 보내는 문제를 물었다. 모두들 관망만하고 굳이 보낼 필요가 없다고 하였으나, 공만이 보내는 것이 편리하다고 하여 정도전이 크게 감정을 품었다. 7월에 태조가 이지(李至)를 보내어 일을 주달하려 하였을 때, 사신이 아뢰기를, “오직 하관반(河館伴)이라야 사명을 다 할 것입니다.” 하고 함께 가기를 청하였다. 공이 명나라 조정에 이르러 상세하고 분명하게 아뢰어 일이 풀리게 되었다. 정축년 정월에 정도전이 군대를 일으켜 국경을 나갈 것을 의논하려 하면서, 공을 꺼려 계림부윤으로 내보냈더니, 그 해 봄에 왜추(倭酋) 몇 명이 무리를 거느리고 경상도에 와서 항복할 것을 청하므로 4월에 공이 관찰(觀察)ㆍ절제(節制) 제공과 더불어 이 일을 처리할 것을 의논하였더니, 의논을 주장한 자가 실책하여 왜추가 도망갔다. 6월에 공 등을 체포하여 순군(巡軍)에 치대(置對)하였고, 7월에 수원부에 안치되었고, 10월에 풀려 나고, 무인년 7월에 충청도 도관찰사가 되었다.9월에 상황(上王)이 왕위를 계승하자, 불러 정당문학이 되고, 10월에 정사공(定社功)을 책정하여 공이 1등으로 진산군(晉山君)의 봉작을 받고 들어가서 건문황제(建文皇帝)의 등극을 축하하였고, 기묘년 12월 참찬문하부사가 되었다. 경진년 4월에 찬성사에 오르고, 5월에 판의흥삼군부사 겸 판상서사사(判義興三軍府事兼判尙瑞司事)가 되고, 9월에 문하우정승 판병조사(門下右政丞判兵曹事)에서 관작이 승진하여 백(伯)이 되고, 11월에 금상이 즉위하였고, 신사년 정월에 좌명공(佐命功)을 녹하매 공이 또 1등에 있었고, 윤 3월에 병으로 사퇴하니 영삼사사(領三司事)가 되고, 4월에 지공거가 되어 지금 지신사(知申事) 조말생(趙末生) 등 33명을 뽑았고, 7월에 관제(官制)가 고쳐지매 영사평부사 겸 판호조사(領司平府事兼判戶曹事)가 되어 비로소 국내에 통행하는 저폐(楮幣)를 만들어서 나라의 용도를 풍부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임오년 6월에 명나라 조정에 가서 명명(明命) 악장(樂章) 두 편을 받을 때에 교서를 내려 권장하였다.10월에 의정부 좌정승 판이조사(議政府左政丞判吏曹事)로 지금 황제의 등극을 축하할 적에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이첨(李詹)이 부사(副使)가 되었다. 공이 명나라 서울에 도착하자 이공(李公)과 더불어 예부(禮部)에 글을 올리기를, “새 천자께서 등극하여 천하가 더불어 새롭게 되었으니, 우리 임금의 벼슬도 고쳐 주기를 바랍니다.” 하였더니, 황제가 아름답게 여겼다. 영락(永樂) 원년 계미 4월에 명나라 사신 도지휘사(都指揮使) 고득(高得) 등과 함께 고명(誥命)과 인장(印章)을 받들어 오니, 임금이 더욱 귀하게 여겨 하사한 물건이 실로 후하였다. 갑신년 6월에 가뭄으로 면직할 것을 빌었고, 을유년 정월에 좌정승에 복직되어 세자사(世子師)를 더하였고, 병술년에는 공이 각 종파의 절 주지(主持)들이 전토와 노비를 많이 점유하여 돈놀이를 하고, 여색에 빠져 재물을 좀먹고 대중을 미혹시킨다고 건의하여 각도의 주(州)와 군(郡)에 한두 절만 남기고 모두 철거하였으며, 그 전토와 노비는 나라에 귀속시키게 하니 임금이 이 의견을 따르자 식자들이 통쾌한 일이라고 칭찬하였다.정해년 4월에 문사들이 중시(重試)를 치룰 때, 공에게 명하여 시권을 읽도록 하여 지금 예문관 제학 변계량(卞季良) 등 10명을 뽑고, 7월에는 가뭄으로 임금의 처소를 옮기기를 청하였었다. 무자년 2월에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가 되고, 신묘년 3월에는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지금 평양판관 권극중(權克中) 등 33명을 뽑았고, 임진년 8월에 좌정승에 복직되었으니, 공이 이 때에 네 차례나 국권을 잡았다.갑오년 4월에 국가에서 주관(周官)을 모방하여 정부의 모든 사무를 나누어 육조(六曺)에 귀속시키고 공을 영의정부사로 삼았으며, 을미년 10월에 또 좌의정이 되었다. 병신년 봄에 공의 나이가 70이 되었으므로 옛 일에 의거하여 치사(致仕)하기를 요청하였으나 임금이 오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공이 수차례 여쭈니, 임금이 특별히 우대하여 조회에는 참여하지 않게 하더니, 4월에 이르러 허락하고는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으로 사제(私第)로 나아가도록 하였는데,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는 반드시 자문을 하였다.그 해 10월에 임금이 함길도(咸吉道)에 사신을 보내어 선왕(先王)의 능침(陵寢)을 두루 살피려 하자 공이 스스로 갈 것을 청하였더니, 임금이 늙었다고 민망히 여겼으나 그 뜻을 가상히 여겨 친히 교외에 나가서 전송을 하였다. 공이 이미 일을 끝내고 돌아오려 할 때, 병이 나자 임금이 이 소식을 듣고 급히 내의(內醫)를 보내어 치료하게 하고, 내주(內廚)에서 반찬을 제공하니 문병하는 중관(中官)이 길에 잇달았다. 11월 6일 계사에 정평(定平) 관사에서 졸하였다.부고가 이르자 임금이 심히 애도하여 눈물을 흘리고 3일 동안 조회를 폐하고 7일 동안 소찬(素饌)을 하고, 예관을 보내어 교서를 가지고 가서 치제하였다. 또 유사에게 명하여 호상(護喪)하여 서울로 돌아오게 하여 본제에 빈소를 차리고는 임금과 세자가 친림하여 조문과 제전을 하고 시호를 문충(文忠)이라 하였다. 관아에서 장례식을 맡고 특별히 하였으니, 공에 대한 사후의 영예가 참으로 유감이 없다고 할 수 있었다. 명년 정유 3월 11일 정유에 사자(嗣子) 도총제공(都摠制公)이 관을 모시고 진주(晉州) 동방등(桐房洞) 감산(坎山) 언덕에 있는 선영 동쪽에 부장(附葬)하였으니, 공의 유언을 따른 것이었다.공은 천품이 중후하고 식견이 밝고 도량이 넓으며, 조용하고도 간소하여 평생에 빠른 말과 급한 얼굴빛이 없었으나, 단정히 묘당(廟堂)에 있다가 의심나는 것을 판결하고 계책을 정할 때에는 그 기운이 씩씩하여 조금이라도 훼방과 찬양으로써 그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었다. 정승이 되었을 때는 대체(大體)만을 힘쓰고 까다롭게 살피지 않았으며, 아름다운 정책과 은밀한 의견으로 임금에게 도움이 컸으며, 물러나서는 일찍이 남에게 누설을 한 일이 없었다. 자기 몸가짐이나 사람들을 만날 때에 한결같이 정성으로 하되 거짓이 없고, 종족에는 어질고, 벗에는 믿음 있고, 아래로 노복에 이르기까지 모두 은혜에 감복하고, 인재를 추천함에 늘 부족하게 여기고, 지극히 작은 착함도 반드시 취하되 그 작은 허물은 덮어 주었다. 집에 거처할 때는 살림살이를 다스리지 않고 사치를 좋아하지 않으며, 잔치 놀이를 즐겨하지 않았다. 성품이 글읽기를 좋아하여 손에는 책을 놓지 않고 여유있게 휘파람과 시를 읊으면서 침식을 잊고, 경사자집(經史子集)을 연구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심지어는 음양(陰陽)ㆍ의술(醫術)ㆍ성경(星經)ㆍ지리(地理) 등에 이르기까지도 극히 정밀하였으며, 예악과 여러 제도는 모두 공이 상정(詳定)한 것이었다. 후생을 권면하고 의리를 토론함에 매우 부지런히 하였으며, 국정을 담당한 이래로 오로지 문한(文翰)을 맡아서 외교의 사명(辭命)과 문사(文士)의 작품이라도 반드시 공의 윤색(潤色)과 인가(印可)를 거친 뒤에 정하였다. 일찍이 어명을 받아 《태조실록(太祖實錄)》 15권을 수찬해서 올리었다. 스스로 호를 호정(浩亭)이라 하였는데 문집 약간 권이 있다. 미리 유서(遺書)를 써서 상자 속에 간직하여 자손에게 교훈을 하였으되 자세하여 빠진 것이 없었고, 또 상장(喪葬)에는 한결같이《주자가례》에 의거하고 불교 의식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공이 세상을 떠나자 그 집에서 유서가 발견되어 모두 그 말을 따랐다.부인 이씨(李氏)는 지금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으로 봉작을 받았다.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이름은 구(久)이며 중군도총제부총제(中軍都摠制府摠制)이다. 딸 둘이 있는데 맏딸은 한성부윤 홍섭(洪涉)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경상좌도 도절제사 이승간(李承幹)에게 시집 갔다. 손자 복생(福生)은 어리고, 외손, 다섯은 모두 도절제사의 아들인데 첨전(忝全)은 전(前) 공정고 부사(供正庫副使)요, 신전(愼全)은 사재직장(司宰直長)이요, 다음은 성전(誠全)ㆍ안전(安全)ㆍ항전(恒全)이다. 서자 셋이 있는데 장(長)과 연(延)은 모두 어리고, 영의(永義)는 흥시위사대호군(興侍衛司大護軍)이다. 서녀(庶女) 셋이 있는데 맏딸은 곡산부사(谷山府使) 김질(金秩)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중군사직(中軍司直) 장희걸(張希傑)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어리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진산은 푸르고 / 晉山蒼蒼진수는 넘실넘실 / 晉水泱泱아, 아름다운 땅의 신령스러움 / 猗歟地靈호정을 낳았구나 / 生我浩亭선생의 자질 / 先生之質옥처럼 윤택있고 엄준하네 / 玉潤而栗시원스러운 흉금은 / 洒落胷中개인 달과 맑은 바람이라 / 霽月光風하늘이 동방을 도우시어 / 天眷東方우리 임금을 돕게 하시네 / 俾輔我王여러 말과 계책을 들어 주시니 / 言聽計從천년에 한번 나는 기회로다 / 千載一逢공을 정승으로 삼아 / 爰立作相백관의 우두머리가 되게 하니 / 百僚是長공로가 종묘사직에 있고 / 功在廟社은택은 어려운 백성에 미쳤다오 / 澤被鰥寡이단을 배격하여 / 觝排異端도학을 밝히시니 / 唱鳴道學공이 이 때에 / 公於是時당나라의 한유가 되고 / 唐之昌黎두 조정에 계책을 정하여 / 定策兩朝친히 국사를 도왔으니 / 親扶日轂공이 이 때에 / 公扵是時송나라 치규라네 / 宋之稚圭미연에 밝게 알아 / 明炳幾先계책이 헛됨이 없었으니 / 筭無遺策누구와 비슷한가 / 誰其似之장막 속의 장자방이라오 / 帷幄子房충의와 정성이 / 忠義精誠위로 흰 해를 꿰었으니 / 上貫白日누구와 같은가 / 誰其似之한 평생 분양이라오 / 終始汾陽사업이 넓고 덕이 높아 / 業廣德崇나라의 원로이네 / 宜國黃耇칠순에 마치시니 / 七旬而終어찌 장수라 이르리오 / 孰云其壽팔 다리가 없어진 듯 / 股肱之虧임금께서 슬퍼하고 / 元首傷悲철인이 돌아가시니 / 哲人之萎길가는 나그네도 눈물지었다 / 行路涕洟아, 선생이시여 / 嗚呼先生이제 돌아가시다니 / 今也卽亡이름을 솥에 남기고 / 名留鼎彞신은 고향으로 돌아갔오 / 神返故鄕울창한 선영에 / 有欝先塋길이길이 간직하고 / 其永于藏돌 다듬어 글을 새겨 / 鑱石銘辭먼 장래에 보이리 / 用示攸長
    2022-05-06 | NO.209
  • 동문선 제129권 / 묘지명(墓誌銘); 흥녕부원군 시양도 안공 묘지명 (안경공), 이숙야 광주목사
    동문선 제129권 / 묘지명(墓誌銘)유명조선국 추충익대 개국공신 보국숭록대부 흥녕부원군 시양도 안공 묘지명 병서 (有明朝鮮國推忠翊戴開國功臣輔國崇祿大夫興寧府院君諡良度安公墓誌銘 幷序)윤회(尹淮)안씨(安氏)의 조상은 (順興)의 명망있는 가문이었다. 급제(及第) 휘 석(碩)이 학문에 힘을 써서 집안을 일으키더니, 얼마 안 되어 깊이 숨어 자취를 감추어 시골의 착한 선비가 되었다.그가 문정공(文貞公) 휘 축(軸)을 낳았는데 원조(元朝)의 제과(制科)에 합격되어 고려를 도와 벼슬이 첨의찬성사 흥녕부원군 영예문관사(僉議贊成事興寧府院君領藝文館事)에 이르렀고, 문장과 정사로 일대의 명경(明卿)이 되었다. 그가 문간공(文簡公) 휘 종원(宗源)을 낳았는데, 약관에 과거에 올라 청요직을 역임하고 드디어 대정(大政)에 참여하였고, 개국(開國) 초년에 나라의 원로로서 덕을 쌓아 판문하부사 집현전대학사(判門下府事集賢殿大學士)가 되었다가, 그 지위에서 졸하였다. 그가 우상시(右常侍) 김휘남(金輝南)의 딸에게 장가들어 세 아들이 과거에 올랐으므로 경혜택주(慶惠宅主)를 봉하였으니, 바로 공의 아버지와 어머니였다.공의 휘는 경공(景恭)이요, 자는 손보(遜甫)이니, 일찍이 가정의 교훈을 받아 조금도 부호가의 화려한 습속이 없고, 온화하고 어질고 효도롭고 경건함이 천성에 근본하였다. 지정(至正) 25년 을사에 사마시에 올랐고, 홍무(洪武) 5년 임자에 산원(散員)에 보직되었고, 명년에 낭장(郞將)에 특진되어 사헌규정(司憲糾正)을 겸하였고, 병진년에 의영고 부사(義盈庫副使)로서 동진사(同進事)에 합격하여 전리(典理)ㆍ전법(典法)ㆍ좌랑(佐郞)ㆍ사헌지평(司憲持平) 등을 역임하였고, 예의정랑(禮儀正郞)에서 다섯 차례 전임되어 삼사좌윤(三司左尹)에 이르렀고, 비순위 상호군(備巡衛上護軍)으로 판통례문사 진현관 제학(判通禮門事進賢館提學)을 겸했다가, 얼마 안 되어 판전교시사 지제교예의판서(判典校寺事知製敎禮儀判書)로 전법(典法)에 옮기었는데, 죄수를 불쌍히 여겨 기뻐하지 않아 공평하게 판결하여 죄를 가볍게 처리하였다. 외직으로 나가 황주목(黃州牧)이 되어서는 백성을 자식처럼 어루만지니 백성들은 그가 떠난 뒤에도 사모하였다. 임신년 4월에 밀직사(密直司)에 들어와 좌부대언(左副代言)이 되었고, 7월에 우리 태조가 천명을 받아 혁명하였을 때, 공이 천명이 태조에게 돌아가는 것임을 알고 장상(將相)들과 더불어 추대하여 좌대언(左代言)에 올랐다. 관제가 새로 실시되어 익대개국공신(翊戴開國功臣) 중추원 도승지(中樞院都丞旨)에 승진되었으니, 이 때는 정사를 처음 시작할 시기여서 공이 제일 먼저 승지로 있으면서 왕명출납이 밝고 적당하여 아름다운 계획과 비밀스러운 의논으로써 도움이 크고 많았다. 계유년에 사헌부 대사헌 도평의사사 사보문각학사(都評議使司使寶文閣學士)에 승진되었다. 공이 두 차례나 사헌부에 들어가 바름을 지켜 흔들리지 않았으며 풍채가 엄숙하였다. 갑술년에 문간공의 상사를 당하였고, 상복이 끝나자 자헌대부로 흥녕군(興寧君)에 봉하였고, 공훈과 관직(館職)은 전과 같았다.영락(永樂) 4년 병술에 판공안부(判恭安府)로서 정헌대부에 가자되고, 판한성부(判漢城府)로서 두 차례 더하여 숭정대부가 되었다. 무자년에 아버지 상을 만났는데, 약물의 봉양과 상장(喪葬)의 예식에 극히 정성과 효도를 다하니 보는 자가 공경하고 우러렀다. 경인년에 태종이 송도에 거동할 때, 공에게 명하여 개성유후(開城留後)를 삼았고, 병신년에 보국숭록대부 집현전 대제학에 특진되어 부원군의 봉작을 받았다.공이 조정에 있을 때는 국사에 대한 걱정에 전념하여 여러 사무를 다스리고, 대신이 되어서는 안정스럽게 장중한 모습으로 조정의 표준이 되었다. 공이 일찍이 경상도 안렴사와 전라ㆍ황해도의 관찰사가 되어 흐름을 따라 교화를 펼쳐 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도와 유지시키며 너그럽고 간소하여 까다롭지 않았기 때문에 부(部) 안이 잘 다스려졌다. 신축년 정월 10일에 정침(正寢)에서 졸하니, 나이 75세였다. 공이 병에 걸렸을 때, 태종과 지금 전하께서 급히 국의(國醫)를 보내어 치료하고 중사(中使)를 시켜 병을 보살폈다. 부고가 이르자, 양궁(兩宮)이 애도하여 조문과 치제를 후하게 하고 유사로 하여금 대장(大葬)을 하게 하고 시호를 양도(良度)라 하며 2월 27일 경신에 금천(衿川) 백사동(栢寺洞) 언덕에 장사하였다.공은 마음가짐이 곧고 미더우며, 몸가짐을 삼가히 하여 일찍이 추세에 따라 이리저리 하지 않았으며, 또한 특이한 행동을 하여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을 접대할 때 정성과 믿음으로 대하여 거짓이 없었으며, 마음속에 잘잘못을 모르는 것이 아니로되 입으로 절대로 남의 잘잘못을 논하지 않았다. 그 겸손한 덕은 벼슬이 높을수록 더욱 나타났으며, 본래부터 화려함을 싫어하여 검소에 힘썼다. 만년에 한가히 거처하여 잘 나가지를 않았고, 손님이 오면 반드시 술을 대접하여 기쁨을 취하되 사치를 숭상하지 않고 흉금이 담담하여 남과 다툼이 없었다. 공의 형제 셋이 모두 명성이 있었으나, 아들이 없이 일찍이 세상을 떠나고 오직 공만이 천복을 누려 나라의 원로가 되었으며, 손자와 증손이 번영하여 문호가 더욱 창성하였으니, 적선한 보답이 참으로 헛되지 않도다.부인 오천 정씨(烏川鄭氏)는 문정공(文貞公) 사도(思道)의 딸이었는데, 공신의 맏며느리라고 하여 의정택주(懿靜宅主)에 봉하였다.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이름은 순(純)이니, 현재 숭정대부 호조판서 보문각 대제학으로서 정당문학 정공권(鄭公權)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3녀를 낳았다. 맏아들 숭직(崇直)은 용양사 상호군이요, 다음 숭선(崇善)은 승정원 도승지이니, 경자년 과거에 장원이요, 다음 숭신(崇信)은 웅무사 호군 중추원경력(雄武司護軍中樞院經歷)이요, 다음 숭효(崇孝)는 중군사직(中軍司直)이다. 맏딸은 사헌부 대사헌 이숙치(李叔畤)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 조혜(趙惠)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사헌부 감찰 김준례(金遵禮)에게 시집갔는데, 증손은 남녀 약간 명이 있다. 상호군은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 조견(趙狷)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 하나를 낳았는데 사직(司直) 박강(朴薑)에게 시집가고, 도승지는 상호군 송천우(宋千祐)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2녀를 낳았는데 맏아들은 훈(訓)이요, 다음은 의(誼)요, 맏딸은 경창부승(慶昌府丞) 김숙(金潚)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세자좌사경(世子左司經) 조석문(曺石門)에게 시집갔다. 호군은 광주 목사(光州牧使) 이숙야(李叔野)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전(詮)이요, 맏딸은 도염녹사(都染錄事) 최민(崔旼)에게 시집가고, 나머지는 어리다. 사직은 동지충추원사 이숙묘(李叔畝)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3녀를 두었는데, 맏아들은 겸(謙)이요, 다음은 눌(訥)이요, 딸은 모두 어리다. 대사헌은 딸 하나를 낳았는데, 인순부승(仁順府丞) 이계현(李繼賢)에게 시집갔다. 판통례는 5남 3녀를 두었는데, 맏아들 지당(之唐)은 종묘서승(宗廟署丞)이요, 다음 지은(之殷)은 부사정이요, 다음은 지하(之夏)요, 다음은 지한(之漢)이요, 다음은 지주(之周)요, 맏딸은 유학 조계번(趙季蕃)에게 시집가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감찰은 4남 4녀를 두었는데, 맏아들은 맹절(孟節)이요, 다음은 맹의(孟義)요, 다음은 맹렴(孟廉)이요, 다음은 맹치(孟恥)요, 맏딸은 유학 홍도상(洪道常)에게 시집가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며, 현손(玄孫)은 약간명이 있다. 박사직(朴司直)은 1남 3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고, 김부승(金府丞)은 1남 1녀를 두었는데 어리고, 전(詮)은 2녀를 두었고, 녹사는 1녀를 두었는데 어리고, 서승(署丞)은 1남을 두었으나 어리고, 부사정은 1남 2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아, 번성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높은 소백산 / 小白之山위로 푸른 하늘에 닿아있고 / 上磨蒼穹기이한 기운이 모여 빼어난 사람을 잉태하여 / 鍾奇孕秀칠상 오공을 낳았구나 / 七相五公후히 양도공을 낳았으니 / 篤生良度대대로 가업을 전하였도다 / 箕裘是承오직 충과 효로 / 惟忠惟孝전전긍긍하였소 / 戰戰兢兢공훈이 종과 솥에 새겨지고 / 勳銘鍾鼎명망이 사대부에 무거웠고 / 望重簪紳노성하신 덕 / 老成之德시초나 거북처럼 신묘하였오 / 蓍龜其神생시엔 특별한 은혜 높았고 / 生被殊遇죽으니 법도가 있다오 / 沒有典章슬픔과 영화로움의 시종이 / 哀榮終始청사에 빛이 더하였고 / 靑史增光자손이 연이어져 / 子孫繩繩복록이 다하지 않았다오 / 福祿未央돌을 다듬어 글을 묻어 / 鑱石埋辭먼 미래에 보이노라 / 用示攸長*광주목사 이숙야
    2022-05-06 | NO.208
  • 동평군정선생유허비
    광주시 광산구 본덕동 마곡마을 뒷편1937년이 동평군정선생유허비(東平君鄭先生遺墟碑)는 정종우의 비석이다. 하동정씨 문중에서 관리한다.(정리중)公諱種字播卿系出河東新羅景明王朝諱道正南方豪族先見國之將屋率先歸服于高麗太祖陞爲平章事受封河東君爲得貫始祖隣世五傳諱國龍匡靖大夫密直副使生諱蘭衍文科左尹高祖文科錦城君諱盛曾王考文科判軍器寺事 贈匡靖大夫都僉議諱履王考恭愍王乙巳魁司馬丙午魁殿策創設高麗水軍建造戰艦四海道都指揮處置使門下評理諡景烈公號退菴諱地祖?郡夫人密陽朴氏右相椿女考文科七道觀察使號悔?諱耕?貞夫人光山金氏門下侍中文正公台鉉女高麗恭讓王辛未生孝友剛直文武兼全李朝 太宗八年戊子登文科出宰濟州鍾城等邑歷黃海道忠淸道觀察使 端宗元年癸酉十月咸吉道都節制使李澄玉叛據北鎭及女眞全域自稱大金皇帝將定都五國城澄玉之武勇絶人出等華夷畏之皆服從野人聞風爲迎賊計上待除公爲鍾城府使專擔滅賊公遂星夜赴任鍾城時澄玉設置部署官屬刻期將越江定都行至鍾城日巳暮矣公欲夜圖之進日墓夜行軍部伍相失不如待明曉澄玉可之據椅假寐公預伏武士於民家親率內廂軍乘其熱睡而突入澄玉所斬殺澄玉幷殺其子滋源潤源妾子鐵同成同軍官朴文憲等三十餘人滅之時値隆冬丁亥五月五日吉州李施愛學其弟施合擧兵叛大殺北方守令席卷咸興以北人心洶洶咸興府民包圍監營其務甚急上命龜城君李浚爲都摠使曺錫文爲副公及康純許琮南怡魚有沼等文科有將略者二十八員爲大將出征浚領十萬後發接應公與曺錫文等率三萬兵先赴咸興解圍大戰於洪源北靑且戰於利原蔓嶺(馬訖嶺)大破叛軍施愛脫身逃走于吉州追擊生擒斬首乃八月也錄勳精忠出氣布義??愾功臣號賜鐵券東平君爲資憲大夫行兵曹判書 贈諡良襄溫良好樂曰良甲?有勞曰襄庚寅退老于此吾河東鄭氏之始居而爲世居之地源出於蘆嶺或興佛甲錦城或成壟崗平野透施東南星降魯平開面正立萬山輻輳拱衛極樂黃龍合流於面前千水萬流自成之江河秀麗山水沃野千里盡入一眸之間眞足南國勝地王考退翁吟詠錦城山木浦水公繼其志愛山水而寓此地世稱種丘亭矣丁酉卒葬于光州壯元峰下艮原有碣配貞夫人竹山朴氏王頁女墓?育三男長曰鋤字保民號漁隱文科內翰林淑夫人瑞山鄭氏縣監繼咸女仲曰耕文科金海府使淑夫人羅州林氏季曰宣蔭密陽府使孫成字子輝文科監察廣州李氏縣監典翰女穫字子收文科監察漢陽趙氏奎女積蔭主簿禾惠蔭縣監開字子華逸箕子殿參奉行南平縣監金城吳氏縣監蕃女恂文科縣監咸陽朴氏光彦女思湜蔭佐郞曾孫承玄蔭校尉光山金氏府使鍾孫女孝宗進士參奉羅州羅氏翰林昶女元宗文科通訓大夫新平宋氏持平碩? 孫承玄蔭校尉光山金氏府使鍾孫女孝宗進士參奉羅州羅氏翰林昶女元宗文科通訓大夫新平宋氏持平碩考女(通訓玄孫忠信武科行兵曹判書封錦南君諡忠武)悌宗蔭參奉白川趙氏郡守淨女慈宗?育忠宗蔭縣監彦祥蔭參奉禧武宣傳官恩津宋氏宗元遊留八域壽堅蔭別侍衛禦侮將軍密陽朴氏訓導儼碩女思平不仕忠州朴氏舜臣生員全義李氏以下不盡錄且公之昆李有四公居長次曰諱機文科海州牧使後孫居玉果三曰諱?文科山蔭縣監后孫居咸平務安四曰諱和蔭直長后孫居海西松禾長淵等地嗚呼公在朝累滅叛賊盡忠報國退老多涉勝地遺裔八域長房翰林住趾于光羅次房金海遺裔於靈長之間三房密陽遺裔於海西康翎石橋海州加川翰林之子長監察後裔寓光州芝山洞柳德洞次監察後裔住羅州金安洞咸平務安三主簿後裔移住忠南珍山四縣監後裔留於八域五南平後裔惟獨留此誦舊傳而繁衍我東平先祖肇基於此地寔近乎半千載其間累經滄桑或盛或衰從近式蕃數至幾千生事凡百一無就緖故曾設二五行榮?淳寬玉淳祥今爲主動創起遺墟之役謹識始基先德誓守後昆益篤斯役也巨且難淳龍淳基淳孝淳泰淳晧淳煥合力經之營之不煩他而成遂石旣具委任屬文上爲慕先之誠孝下爲諸從宗之情親特其上下誠情略?其大綱如右歲 檀紀四千三百六年癸丑上巳東平君諡良襄公十五代孫淳杓?手謹識書
    2018-12-01 | NO.207
  • 류평-서산류씨송암선생휘평묘갈명
    광주시 광산구瑞山柳氏松庵先生諱玶墓碣銘은 남학교수 이재순 짓다.유평(柳玶, 1577∼1645)은 1577년 광주시 광산구 본덕동 창교에서 태어났다. 자는 화보(和甫)이고 호는 송암(松庵)이며, 서산인(瑞山人)으로 을사명신(乙巳名臣)인 광주 호가정 주인 설강(雪江) 유사(柳泗)의 손자이며, 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의 외손이다. 재주가 뛰어나고 체구가 건장하였으며, 용력이 남달라 충장공(忠壯公) 김덕령(金德齡)과 이름이 나란히 하였다. 사계 김장생 문하에서 수업을 받았으며 거인장덕(鋸人長德)이라며 칭하였다. 그는 정유재란 때에는 선생을 따라서 황주(黃州)와 봉산(鳳山) 사이에서 피난하여 3년 동안 머물다가 돌아왔다. 선생이 일찍이 효우(孝友)가 독실하다고 허여 하였는데, 이에 대해서 헐뜯는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1624년(인조 2) 갑자식년사마시(甲子式年司馬試)에 진사 3등으로 합격하여 광해군 때에는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서 참봉(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마침내 과거 공부를 폐한 채 학문을 강마하였는데, 이때 그의 스승 김장생은 이 편지를 보내어 장려하면서 ‘그대의 높은 의기는 하늘에까지 닿았다.’고 하였다. 장원봉 줄기를 따라 북쪽으로 약4km 제4수원지 아래쪽에 펼쳐지는 협곡에 분토마을이 자리잡고 있는데 그 뒷산에 고려말의 용장 정지장군을 모신 경렬사가 있다. 이곳은 처음에는 경렬공만을 모셨다가 후에 설강 유사, 송설정 고중영, 구성 전상의, 송암 유평, 충무공 정충신, 고중영의 아들 구암 고경조, 시은 유성익 등 7인을 더 모셔 팔현사라고도 부른다. 『송암유고(松庵遺稿)』는 유평(柳玶)의 시문집으로 1929년 유평의 후손 유영보(柳永甫), 병로(秉魯) 등의 노력으로 5권 1책의 목활자본으로 간행되었다. 서문은 송증헌(宋曾憲)이 작성하였다. 유평이 사계김장생(沙溪金長生)의 문인으로 난을 당하여서 충효를 다한 인물이며, 그의 용기와 지략은 호남에서 김덕령과 쌍벽을 이룬다고 칭송하고 후손들이 문집을 간행하려고 서문을 부탁한 경위를 적고 있다. 권1은 시이다. 오언절구 29제 36수, 칠언절구 63제 98수, 오언사율 21제 25수, 칠언사율 30제 32수, 오언배율 8제 8수가 시체(詩體) 별로 수록되어 있다. 그의 시는 유평 자신이 일상생활 속에 마주치는 사물이나 경치,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병(病), 춘하추동의 계절의 변화, 친구들을 방문하거나 헤어질 때 일어나는 감흥, 밤늦게까지 독서하면서 일어나는 느낌, 친구들이나 후손들에게 당부하는 말, 의병을 일으키던 때의 감회, 친구나 문인들의 죽음을 애도한 만사(輓詞) 등 다양한 소재의 시가 작성되었다. 특히 1632년 가을 지은 창화시는 임담(林墰)이 동복현의 수령으로 있었던 때 임탄(林坦), 임토위(林土韋), 임담(林墰), 고전민(高傳敏) 등 저자의 친구들이 동복의 협선루(狹仙樓)를 찾아가 함께 술을 마시면서 시를 짓고 즐겁게 노니는 모습을 잘 묘사하였다. 시를 주고 받은 인물로는 기의헌(奇義憲), 나응숙(羅應淑), 정홍명(鄭弘溟), 오희도(吳希道), 송제민(宋濟民), 권필(權鞸), 원두표(元斗表) 등 인조 연간의 서인출신의 중앙 정계 및 호남에서 활약한 정치가 및 학자들이다. 권2는 격문(檄文), 상량문(上樑文), 서문(序文) 등 3장의 짧은 내용으로 되어 있다. 격문은 1636년 병자호란 때 유평이 광주 절양루(折楊樓)에 모의청(募義廳)을 설치하였을 때 지은 격문과 1637년 태인에서 다시 지은 두 개의 격문으로 되어 있다. 광주에서 지은 격문은 선비는 충효를 다해야 하는데 임금의 교서가 내려와서 열읍(列邑)에 알리니 한 마음으로 일어서서 의병과 군량을 모아 국가를 구하는 대의를 다하고 공명을 세우라는 글이다. 태인에서 지은 격문은 와전된 소식으로 의병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사실대로 내용을 알려주어 군정(軍情)을 안정시키게 해 달라고 요구한 글인데, 내용상 격문보다는 관청에 올린 글에 가깝다. 상량문은 유평이 사는 마을의 정자를 지을 때 지은 상량문으로 종족이나 이웃 간에 화목하고 강학하는 바탕이 될 수 있도록 축원하는 내용이다. 서문은 유평 자신이 모은 시문집의 자서(自序)로서 어렸을 때 아버지를 여의었고 중년에 잦은 병으로 학문에 힘쓰지 못해 자신의 글이 보잘 것이 없으나 일에 따라 자신의 회포를 서술한 약간의 글을 모아 「송암한사(松庵閒事)」라고 한다는 글이다. 부록은 두 권으로 되어 있는데, 권1은 유평의 일생을 연대별로 요약한 「행록략(行錄畧)」과 박종(朴琮)이 지은 만장(挽章), 유청의 현손 유련보(柳璉甫)의 부탁으로 1700년에 오대경(吳大經)이 찬한 행장(行狀), 유청의 9대손 유찬근(柳贊根)과 상근(庠根)의 부탁으로 1869년(고종9)에 이재순(李載純)이 찬한 묘갈명(墓碣銘), 1872년 외손의 후예인 박이휴(朴頤休)가 찬한 묘지명(墓誌銘)이 있다. 권2는 전주향교에 보낸 통문과 전라감사에게 유평의 증직을 청원하는 세통의 상서로 되어 있다. 전주향교에 보낸 통문은 1762년(영조38) 9월 광주와 나주, 장성, 화순 일대의 유생들이 연명으로 통보한 것이며, 전라감사에게 청원하는 첫 번째 상서는 1762년 9월 나주와 광주, 화순 일대의 유생 375인이 연명으로 청원한 것이고, 두 번째 상서는 1762년 10월에 전주, 고부, 부안 일대의 유생 140인이 연명으로 청원한 것이고, 세 번째 상서는 1763년 2월에 광주와 나주, 전주, 남평 일대의 유생 393인이 증직을 청원한 것이다. 이에 대해 전라감사는 각각 ‘사실을 더 수집하라.’ ‘영문에서 참작해 보겠다.’ ‘행적이 뛰어나니 당연히 그렇게 해야겠다.’는 제사(題辭)를 차례로 내렸다. 권3은「제가잡지(諸家雜誌)」이다. 제가잡지에는 『여지승람(輿地勝覽)』,『정묘양호거의록(丁卯兩湖擧義錄)』,『사계전서(沙溪全書)』에서 유평 관련 기사를 뽑아서 수록한 것이다. 권미에는 1929년 유평의 충효를 기리는 양계묵(梁啓黙)의 발문과 유평의 문집 편찬 과정을 서술한 유평의 11세손 유병로(柳秉魯)의 발문이 있다. 유병로는 백부 송파공(松坡公)이 유평의 시문을 책으로 간행하기 위해서 1권으로 모아두었는데, 책을 간행하기 위해 종제 병순(秉洵)과 함께 문중에 건의하였고, 이어 족숙 영택(永澤)이 보관한 초고(草稿) 1책을 더 합하여 문집을 간행하게 되었으며, 문집 간행 과정은 족조오 영오(永五)가 간행을 감독하였다고 서술하였다.
    2018-12-02 | NO.206
  • 류희달-농포류선생 신도비
    광주시 광산구 동호동 신촌마을 우산각 옆, 경위도좌표: N 35˚11´04.3″, E 126°41′05.2″  1947년이 농포류선생신도비(農圃柳先生神道碑)는 농포(弄圃) 류희달을 칭송하기 위해 1947년에 건립했다.  문화류씨 문중에서 관리한다. 광산구 덕림동 산 37-2 수성마을 덕림사德林祠에 일당(逸堂) 유절(柳節, 1517~1580)과 그의 둘째 아들 농포(弄圃) 유희달(柳希達), 농포의 아들 고암(高巖) 유시필(柳時必), 농포의 9세손 경은(耕隱) 유인옥(柳寅玉) 등을 배향하고 있다. 농포 유희달은 정유재란 때 왜병을 물리치는데 공을 세워 원종공신이 되었으며 그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신도비를 세웠다. 유희달은 1571년에 태어 났으며 죽산부사를 거쳐 동지중구부사를 지냈다. 그 당시 왕으로부터 선무 원종훈(宣武 原從勳)이 주어졌고 지금은 덕림사에 영정이 보관되어 있다.농포유선생의 신도비는 신촌마을 우산각옆 경사면에 세워져있다. 고위관직에 계셨던 분들만이 세 울수 있는 신도비로 이 마을에 신도비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자부심을 가지고 후손들이 더욱 더 계승 발전 시켜주길 류씨 어르신들은 말씀하신다.조선 단종 때 단종의 세력파인 류씨들이 세조가 왕으로 집권하면서 세력에 밀려  경기도에서 나주를 거쳐 이곳 신촌까지 내려오게 되었다는 문화류씨들의 집성촌이다. 지금으로부터 400년전 죽산부사 유희달공이 벼슬을 그만 두고 이 곳에 정착하면서  마을이 생성 되었는데 그 뒤 문화류씨가 세거번창하여 지금에 이른다.이 마을은 형성되어 신촌(莘村)이라 하였다가 여러 마을이 합하여 지고 그것이 와전되어 신촌(新村)으로 되었다.이 마을은 풍수지리학상 부자일신(父子一身)을 잉태하게 만든 곳으로 만월괘서의 명당이라 하여 이주 정착하여 그 후손들이 번창 지금에 이른다. 신도비 앞에 있는 연불암산이 유희달공의 선산이며, 그 분의 묘가 있다.弄圃 柳先生 神道碑  (정리중)嘉善大夫摠戎將竹山府使弄圃柳先生神道碑銘幷序穆陵壬辰倭寇猖獗 承輿?番越宗社危如一髮弄圃柳公以濟世之材從戚姻健金先生聞性命業弓馬以文武全才稱朝野擧公拜宣傳官爲應時之聞時明將宋大贊以游擊將提兵東援性驕悍人難接應特公特拜摠戎命接伴使?荇擊禮遇甚重?擊宅倭累捷歸京言干 上日累戰累勝皆以柳接伴智勇可壬大將 上納其言除竹山府使增秩嘉善同樞仍丁酉再亂與兄同倡義族草?布告前日同義金億秋林?等四十餘人召募響應所向無敵賊平錄豈○源從勳賜鐵券公讓功諸賢乞骸歸鄕晝而治圃夜而弄月逍遙自適世稱弄圃先生諱希達字仲顯號弄圃始祖諱車達統合三韓拜大丞諡文貞歷文簡亥正八○本朝諱曼殊開國功臣左議自湄號西山文科監察 端廟遜位自靖于首陽山咸日東方伯夷享淸節祠諱軒號西坡文科兩館提學大司憲燕山戊午宜練言守濟州受命贈議政諡文簡錄淸白諱繼先生文科歷三司四道觀察使諱琬縣令郞公之高曾祖也祖諱順長文科監察考諱節文科參議?淑夫人陽城李氏別坐光弼女始居羅州三男長希榮習讀次郞公李希培郡守皆以人物之隣豪稱湖南三柳公生於 明宗辛未於 宣朝辛未葬于距家五里九龍洞念佛山丙坐原元配固城李氏光育繼配咸平李氏主簿夢麟女俱 贈貞夫人五男四女曰時潤時必時淸時源時??皆隱德不仕女適晉州鄭來昌羅州鄭麟瑞高興柳載瑞陽城李櫓餘不盡錄嗚呼公以參議公之仲子世龍文蔭出身秋號非公素志天旣爲躬亂而命世何敢辭武職事君之道文武一也次才兼文武眞身戎馬扶存社稷讓功身退不亦偉哉然而爲外勳所掩世莫知公聞道於健香其節義之高由於公雖無損其如後學所矜式何後孫洪烈神其實記諸文於無文不得辭遂爲之銘曰龍蛇之亂天地蛇?覆忠臣義士應時而作 任其責弄圃先生氣湧山河志功掃淸明將未援人難接抑薦公接伴見卽心○游擊屯倭殲彼讐仇豈功偉烈誰與爲侍志同金趙名齊李權及其凱還讓功諸聚還山弄月豈無所以如可得也忠公復起遺墟隣近維梓與桑堅碑于玆陟降洋洋我銘斯刻用詔千億瞻彼念佛過者必式隆熙四十一年丁亥二月日通訓大夫前成均館博士 完山 李光秀 謹撰十代 孫庠烈 謹書冠山 林萬洙 敬篆
    2018-12-01 | NO.205
  • 모암거사 김공 유적비
    광주시 북구 효령동 636(우곡마을 입구)1957년이 모암거사김공유적비(慕庵居士金公遺蹟碑)는 金亨在 짓고 具哲祐 쓰다.
    2018-11-13 | NO.204
  • 모와노공정려유허비
    광주시 북구 일곡동 919-1(일곡마을) 송해당 내1892년효자 광산노씨 노계열(盧啓悅)의 효행을 기리기 위한 비이다. 이 모와노공정려유허비(慕窩盧公旌閭遺墟碑)는 奇宇萬이 찬했다. 1892년 盧啓悅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命旌하고 정려각을 건립했고 年久退落되어 旌閭閣을 毁撤하고 1963년 그곳에 遺墟碑를 건립
    2018-11-13 | NO.203
  • 몽심헌선생김공홍련지비
    광주시 광산구 내산동 망월마을1928년이 몽심헌선생김공홍련지비夢心軒先生金公洪련之碑는 몽심헌 김홍련의 비로 내산동 망월마을 뒤편 구릉지대에 고인돌 3기와 몽심헌 김홍련의 비가 있다. 광산김씨 문중에서 관리한다. 李炳壽가 찬했다.내산동은 원래 나주군(羅州郡) 삼가면에 속한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내동리(內洞里)·쌍계리(雙溪里), 도림면(道林面) 용산리(龍山里)· 망월리(望月里) 등의 일부를 합하여 삼도면(三道面) 내산리가 되었다. 1949년 광산군에 편입되었으며, 1988년 광산구가 신설되면서 광산구 내산동이 되었다. 내산동은 법정동으로 행정동인 삼도동(三道洞) 관할하에 있다.
    2018-11-18 | NO.202
  • 무진음사기실비
    광주시 남구 중앙로107번길 15(광주공원內)1989년무진음사기실비(武珍唫社紀實碑)는 무진음사 창립의 배경과 회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1989년 건립되었으며 영산 신호열(辛鎬烈)이 짓고, 여산 송성용(宋成鏞)의 글씨이다. 비문에 의하면 원석(圓石) 류종룡(柳鍾龍)이 시학(詩學)이 점차 쇠퇴해져 감을 걱정하여 호남의 선비들과 계를 맺어 광주(光州)의 옛 이름 ‘무진(武珍)’을 따와 무진음사(武珍唫社)라 하였다. 매월 초 9일 광주향교에서 시 짓는 모임을 가져오고 있다.
    2018-06-11 | NO.201
  • 문간박선생눌재신도비명
    광주시 서구 사동길 60 박상신도비에는 ‘문간박선생눌재신도비명文簡朴先生訥齋神道碑銘’이라 적혀 있다. 주州의 서쪽 30리 의 사동寺洞에 있는 비석으로 김병주金炳㴤)의 전서篆書 및 금곡錦谷 송래희宋來熙이 찬문撰文이 있다.박상신도비는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 겸 성균관成均館 제주 祭酒를 지낸 경연관經筵官 송래희宋來熙가 글을 짓고 규장각奎章閣 직제학直提學 시강원侍講院 우빈안용右賓安容 김병주金炳㴤가 글씨를 썼다. 한 시대를 풍미한 눌재 박상은 1530년에 56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그 후 광주 월봉서원에 제향됐다. 광주 서구 서창동(절골마을)에는 생가터와 재실인 봉산재, 묘소가 있다. 광산구 소촌동의 송호영당에는 눌재 박상과 사암 박순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비문(碑文)금곡(錦谷) 송래회(宋來煕) 지음선생께서는 평소 그의 뜻이 강개(慷慨)하여 높은 기절(氣節)을 가지었다. 젊은 시절부터 학문(學問)을 좋아하여 따뜻하게 입고 배불리 먹는 등의 편안함을 구하지 않았고 또 벼슬에 나아간 이후에 있어서도 더욱 그의 몸을 가다듬어 비록 임금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다 할지라도 조금도 그의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 선생께서 을해(乙亥)년의 상소를 올리면서 거의 죽음을 각오한 극도의 항언(抗言)을 하였다.선생의 이러한 일은 오로지 이세상의 옳은 도리를 지키고 우리 인간의 바른 윤리를 세우려는 깊은 충정(忠情)의 발로라는 의미에서 이에 대한 많은 흠앙(欽仰)이 없지 않다. 어찌 이를 가리켜 산악(山岳) 양두(量斗)의 높은 기개라 아니할 수 있겠는가? 선생이 비록 그 당시에 이러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할지라도 옳고 곧은 당직(讜直)의 선비라는 그의 이름이 온 세상에 떨치어 비록 선생과의 의견을 달리한 소인의 무리라 할지라도 모두 스스로의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흠복(欽服)의 마음을 가지었다.슬프다, 아무리 많은 재력이 있다 할지라도 어찌 이처럼 여러 대중의 자발적 감응(感應)을 얻을 수 있겠는가? 이는 다름 아닌 본래의 소양을 바탕으로 많은 학문을 쌓아 그의 국량(局量)을 확충하는 이러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항시 엄숙한 자세로 그의 행동을 바로하고 단정한 마음으로 그의 언소(言笑)를 삼가며 온화한 마음으로 사람을 접대하고 강직(剛直)한 모습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며 또 직장 및 가정 등의 어느 장소를 막론하고 항시 단정히 앉아 조금 도 게으르고 흐트러짐의 기색이 없기 때문에 어는 사람을 막론하고 저절로 업신여길 수 없는 존경의 마음이 생기게 된 것이다. 그리고 시문관계(詩文關係)에 있어서는 너무 익숙하거나 부드러운 문체(文體)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케케묵은 진언(陳言)이 아닌 새로운 말을 창작하여 홀로 옛날 작가의 규범을 지키었다.정조께서 말씀하신 "기특하고 씩씩하고 짙고 아름다운 옛날 삼백편(三百篇)의 깊은 유의(遺意)를 잃지 않았다."(奇壯濃郁不失三百篇之遺意》라는 이 말이 이러한 경우를 가리켜 이름이 아닌가 생각된다.
    2018-05-25 | NO.200
  • 문동길-애국지사문공동길공훈비
    광주시 북구 청풍동 1460 (신촌마을 입구)1988년이 애국지사문공동길공훈비(愛國志士文公東吉功勳碑)는 文正鎬 짓다.문동길의 보명(譜名)은 제황(濟晃)이요. 자는 동길(東吉), 호(號)는 우계(又溪)이다. 시조(始祖) 무성공(武成公)의 33대 손이요. 강성군(江城君)의 21대 손이요. 신제공(愼齊公)의 14대 손이다. 1901년 6월 10일 광주시 북구 청풍동 신촌에서 출생하니 부의 호는 매헌(梅軒) 휘(諱)는 재국(載國), 모 수원 백씨(白氏)의 장남으로써 그 용의가 단정하고 재질이 탁월하였다.서계(西溪) 철환(喆煥)이신 조부(祖父)의 훈도(訓導)로 한학(漢學)을 공부하고 15세 때에는 4서3경 정통하여 국가의 동량으로 촉망하였으나 당시의 국내 정세는 을사보호조약, 민비시해사건, 경술 한일합방 등으로 대일 감정이 날로 격화되어 을미 3·1운동이 거국적으로 확대)되자 19세의 몸으로 이 운동에 동참하여 3개월의 옥고를 치렀다.곧 이어 대한민국(大韓民國) 상해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 요인(要人) 신덕영(申德永) 선생(先生)으로부터 광복군(光復軍) 군자금(軍資金) 모금(募金) 지령(指令)을 받고 동지(同志) 김성현(金聖炫), 김제중(金濟中)과 모의(謀議) 비밀(秘密) 결사대(決死隊)를 조직(組織)하여 모금(募金)한 거액(巨額)의 군자금(軍資金)을 전달(傳達)하는 대과업(大課業)을 성취(成就)하였으나  모금(募金) 사건(事件)이 발각(發覺)되어 전원(全員) 체포(逮捕)되여 가진 고문(拷問)도 굴하지 않아 왜인(倭人)들의 간담(肝膽)을 서늘케 하시었다니 참으로 어린 소년(少年)의 절개(節介)가 장부(丈夫)다운 기상(氣象)이라.9년8개월(九年八個月)의 옥고(獄苦)를 감당(勘當)하시고 출옥(出獄)하시니 왜정(倭政)의 감시(監視)는 더욱 가혹(苛酷)하기만하여 부득이(不得已) 본명(本名)을 문수창(文洙昌)으로 바꾸고 애국지사(愛國志士)들과 계속(繼續) 항일운동(抗日運動)을 전개하여 드디어 조국(祖國)이 해방(解放)되고 1977(一千九百七十七)년(年) 12(十二)월(月) 23(二十三)일(日)에 건국포상(建國褒賞)을 받으시니 최고(最高)의 영예(榮譽)요, 온 겨레의 귀감(龜鑑)이라. 위대(偉大)하신 이 애국충정(愛國忠情)을 후세(後世)까지 계승(繼承) 발전(發展)시키기 위하여 비(碑)를 세우고저 하였으나 굳이 사양(辭讓)하심으로 추진(推進)을 못하여 이제라도 위로(慰勞)와 보답(報答)이 될까하여 문의(問議)를 모아 이 비(碑)를 세워드리오니 열납(悅納)하소서.
    2018-10-22 | NO.199
  • 문유사최서준표성기념비
    광주시 동구 선교동 444庚辰년 9월이 문유사최서준표성기념비는 탐진최씨4효2열각 부근에 있다.
    2018-11-22 | NO.198
  • 문헌공(文憲公) 고봉(高峯) 기 선생(奇先生) 신도비명 병서(幷序)
    고봉전서(高峯全書)  보유  - 조순(趙淳) 고봉 선생이 서거하신 지 431년의 오랜 세월이 흘렀다. 우리나라에는 그동안 치란(治亂)과 흥망(興亡)의 자취가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지나갔고 왕조도 점차 쇠퇴하여 마침내 경술년의 국치(國恥)를 당하였으며 광복 후에도 국토가 양단되고 국론이 분열되어 마침내 내란을 초래하였다. 다행히 근년에 국운이 다소 진작되고 있으나 남북통일은 아직 되지 못한 채 이륜(彛倫)이 거의 상실되고 풍속도 갈수록 퇴패(退敗)하고 있다.이때를 당하여 선생의 16대 주손(冑孫)인 성근(聖根) 씨가 선생의 묘도에 비를 세우려 하여 나를 찾아와 “비석을 세우는 일은 비단 선조의 학덕을 현창(顯彰)하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유학의 유풍을 발양(發揚)하고자 하는 뜻도 있으니, 그것은 곧 유림들의 소망입니다.”라고 하면서 나에게 비명(碑銘)과 서(序)를 청하였다. 나는 천학이라 굳이 사양하였으나 청하는 뜻이 간곡하였고, 또 퇴계 선생의 주손 이동우(李東愚) 옹도 사양하지 말라고 권하기에 마침내 봉행하기로 결심하였다.삼가 살피건대 선생의 휘(諱)는 대승(大升), 자는 명언(明彦), 성은 기씨(奇氏)이니 행주(幸州) 사람이다. 행주에 고봉(高峯)이라는 속현이 있어 선생이 고봉으로 자호한 것이다. 기씨는 고려조에 무예로써 장상(將相)이 된 분들이 많았고, 조선조에 와서는 문필과 덕행으로 당시에 저명한 분들이 더욱 많았다. 선생의 고조 휘 건(虔)은 벼슬이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로 세조(世祖) 때 청백리였으며, 시호는 정무(貞武)이다. 증조 휘 축(軸)은 풍저창 부사(豐儲倉副使)로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증직되었고, 조부 휘 찬(襸)은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로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부친 휘 진(進)은 그 아우 준(遵)과 함께 성리학으로 당세에 저명하였다. 아우가 기묘사화(1519, 중종14)에 화를 당하자 세상일에 뜻을 끊고 광주(光州) 고룡리(古龍里)로 물러나 거처하였다.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사은(謝恩)하고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 덕성군(德城君)에 추증되었다. 비(妣) 진주 강씨(晉州姜氏)는 사과(司果) 휘 영수(永壽)의 따님이며 문량공(文良公) 희맹(希孟)의 증손을 배필로 맞이하였다. 중종(中宗) 22년 정해년(1527) 11월 18일에 고룡리 송현동(松峴洞) 집에서 선생을 낳았다.선생은 천품이 영민하고 비범하였으며 총명함이 월등하게 뛰어났다. 겨우 7, 8세의 나이 때부터 가정에서 수학하면서 《효경(孝經)》과 《소학(小學)》을 읽었는데 매일 새벽에 일어나 단정히 앉아서 글 읽기를 그치지 않았다. 조금 장성해서는 가정에서 공부하는 데에 지장이 많아 마침내 향리 서당에 나아가 더욱 부지런히 연구함으로써 이미 육갑과 사물의 쇠왕(衰旺)의 이치를 대략 통하였다. 12세가 되던 무술년(1538)부터 17세가 되던 계묘년(1543)에 이르기까지 사서삼경(四書三經), 《전한서(前漢書)》, 《후한서(後漢書)》, 《통감강목(通鑑綱目)》 등의 책을 두루 통하였고, 틈나는 대로 당송 고문(唐宋古文)도 읽었으며, 또 국조(國朝)의 전적을 널리 살펴보았는데 한 번 보기만 하면 통하여 막힘이 없었다.선생은 평소에 자신을 수양하기 위한 학문인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뜻을 두었으며 명성이 실제를 능가하는 것을 몹시 꺼렸다. 〈과정기훈(過庭記訓)〉을 지어 부과(赴科)의 해를 논하여 이르기를 “벼슬길의 풍파는 참 두렵고도 두려운 것이니 자기의 뜻을 시행하기도 전에 화가 이미 따른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주자는 조정에 벼슬한 기간이 겨우 40여 일이었으니, 학자들은 또한 반드시 이것을 알아야 한다. 진실로 뜻을 행하고자 한다면 한 고을을 맡아 다스리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하였다. 숙부 덕양공(德陽公)이 이미 기묘사화를 당하고 또 계속하여 을사사화가 이어져 선생은 더욱 벼슬길에 나아갈 뜻이 없었다.마침내 노산(蘆山)에 서실을 짓고 글 읽기를 부지런히 하며 성명(性命)의 묘리에 침잠하고 천리와 인간의 이치를 연구하여 격물치지(格物致知)ㆍ성의정심(誠意正心)과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를 논한 《대학(大學)》의 도리와 천명솔성(天命率性)ㆍ무성무취(無聲無臭)의 경지를 밝힌 《중용(中庸)》의 이치를 정밀히 분석하며 빈틈없이 힘씀으로써 스스로를 수양하고 사람을 다스리는 방도를 이미 몸에 갖추었다.23세이던 기유년(1549, 명종4)에 비로소 과거에 응시하여 사마시(司馬試)를 보아 진사(進士)ㆍ생원(生員) 양시에 입격하였고, 32세이던 무오년(1558)에 문과(文科) 을과(乙科) 제1인(第一人)으로 입격하였다. 이때부터 14년간 허다한 관직을 두루 지냈는데 당시 조신들의 임명과 승진이 자주 변경되고 고관과 말직의 임기도 너무 짧아서 관리들이 뜻을 펴기가 어려웠다. 선생도 관직을 제수받고 체직됨이 역시 많았으니, 36세이던 임술년(1562, 명종17)에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藝文館檢閱兼春秋館記事官)이 되었다가 휴가를 얻어 남쪽 고향으로 돌아왔고, 37세이던 계해년(1563)에는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로 호당(湖堂)에 들어갔고 홍문관부수찬 겸 경연검토관(弘文館副修撰兼經筵檢討官)이 되었으며, 38세이던 갑자년(1564)에는 경연에 입시하고 병조 좌랑(兵曹佐郞)이 되었으며, 39세이던 을축년(1565)에는 이조 정랑(吏曹正郞)이 되었다. 40세이던 병인년(1566, 명종21)에는 예조 정랑(禮曹正郞)과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를 역임하였으며, 41세이던 정묘년(1567)에는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과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를 역임하였고, 원접사(遠接使)의 시종관(侍從官)으로 관서(關西)에 가서 중국 사신을 맞이하였다. 42세이던 무진년(1568, 선조1)에는 홍문관(弘文館)ㆍ직제학(直提學)ㆍ좌승지(左承旨)ㆍ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하였으며, 44세이던 경오년(1570)에는 남쪽 고향으로 돌아왔다. 45세이던 신미년(1571)에는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과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역임하였다. 46세이던 임신년(1572)에는 대사성ㆍ대사간(大司諫)ㆍ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올랐으나 병으로 체직되었다. 10월 3일에 사직하고 남쪽 고향으로 돌아오다가 천안(天安)에 도착하여 발병하였는데, 태인(泰仁)에 도착하여 병이 더욱 심해졌다. 매당(梅堂) 김점(金坫)의 집에 도착하였을 때 국왕이 선생의 병세가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특별히 어의를 보내 약을 가지고 달려가 구원하게 하고, 또 어찰(御札)을 보내 위문하게 하였으나 어의가 미처 도달하지 못하였다. 10월 30일에 장자 효증(孝曾)에게 유언을 남기고 11월 1일에 별세하니, 향년 46세였다.부음이 조정에 보고되자 국왕은 몹시 슬퍼하였으며 수의(襚衣)를 추가로 보냈으며, 경사(京師)의 사대부들은 모두들 슬퍼하고 애통해하며 종남산(終南山)의 선생의 우사(寓舍)로 가서 신위(神位)를 설치하고 곡하였다. 이듬해 2월 8일에 나주(羅州) 치소(治所) 북쪽 오산리(烏山里) 통현산(通峴山) 광곡(廣谷) 묘좌유향(卯坐酉向)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선조 23년인 경인년(1590)에 광국 공신(光國功臣)에 책록되고, 수충익모광국 공신(輸忠翼謨光國功臣)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경연 의금부 춘추관 성균관사(吏曹判書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에 추증되었으며, 덕원군(德原君)에 봉해지고, 문헌(文憲)이란 시호를 받았다.선생은 조정에서 벼슬할 때 항상 근본에 힘쓰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고 강상(綱常)을 세우고 어진 이를 높이고 사악함을 물리치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를 삼았다. 경연 석상에서 아뢴 말씀의 대요(大要)는 《논사록(論思錄)》 상ㆍ하권에 기록되어 있는데, 후일 정조대왕(正祖大王)이 읽고서 감탄하여 “지금 이 글을 탐독하면서 밤이 이미 깊어지고 촛불이 누차 바뀌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였으니, 야대(夜對)를 10번 하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하였다.명종(明宗) 갑자년(1564) 2월 13일에 선생이 아뢰기를 “국가의 안위는 재상(宰相)에게 달려 있고 임금의 덕이 성취되는 것은 경연(經筵)에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임금의 덕이 성취된 후에야 어진 재상을 알아서 임용할 수 있으니, 경연의 역할이 재상보다도 더 중요합니다.” 하였고, 또 언로(言路)를 열고 직간(直諫)을 받아들이는 대방(大方)을 반복하여 설명하였다.41세이던 정묘년(1567)에 조강에 입시하였을 때 상주(上奏)하였는데, 그 대략에 “조광조(趙光祖)와 이언적(李彦迪)에게 일체(一體) 표창한다면 시비가 분명해지고 인심이 흥기할 것입니다.” 하였고, 또 “노수신(盧守愼), 유희춘(柳希春), 정황(丁熿)은 모두 학문이 높은 유신(儒臣)으로 오랫동안 적소(謫所)에 있었으니 지금 비록 방면되어 돌아오기는 하였지만 나이가 이미 6, 7십 대에 이르렀으니 의당 기용(起用)ㆍ발탁(拔擢)하여 어진 이를 등용하는 도를 다해야 합니다.” 하니, 왕이 그대로 따랐다. 조석(朝夕)으로 시강(侍講)하면서 아는 것은 모두 말하지 않음이 없었고 말을 하면 극진히 하지 않음이 없어, 반드시 임금을 요순(堯舜)처럼 만들어 이상 정치를 만회하고자 하였다. 사도(邪道)를 물리치고 정도(正道)를 부지하는 데 있어서는 말이 더욱 적절하였으며 그 고심과 지극한 정성은 군주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였다.경연의 강의는 경사(經史) 일반으로부터 우리나라의 역대 사론(史論)에 이르기까지 그 논지가 처음부터 끝까지 명쾌하여 천인성명(天人性命)의 이치와 국가흥망(國家興亡)의 귀감을 설파하였다. 당시 많은 인재들이 진출하여 경국제세(經國濟世)에 급급하여 논의가 분분하였으나 선생은 뜻을 세우고 현신(賢臣)을 구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아야 함을 주청하였으니, 그 뜻은 근본을 바르게 세우는 데 두고 교화를 먼저 하고 법제를 뒤로 하는 것이었으므로 개혁의 의논과는 별로 뜻이 맞지 않았다.선생은 일찍이 세상 물정에 어두운 학자라고 자평(自評)하였으나 그 출처(出處)와 진퇴(進退)의 절도를 살펴보면 모두가 성현(聖賢)의 법도에 맞았다.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나 남쪽 고향으로 돌아갈 때 한강의 배 안에서 어느 선비가 묻기를 “사대부로서 조정에 들어가 행동하는데 평생토록 지켜야 할 점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하고 묻자, 선생이 답하기를 “기(幾)ㆍ세(勢)ㆍ사(死) 세 글자면 충분히 해 나갈 수 있습니다.” 하였다. 그 뜻은 군자의 출처는 먼저 그 기미를 살펴 의리에 어긋남이 없어야 하고, 때를 알고 형세를 살펴서 구차한 일이 없어야 하고, 목숨을 걸고 도(道)를 잘 행하기를 기약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곧 고금의 인인(仁人)과 지사(志士)가 관직에 임하는 대방(大方)이요, 오활한 유자(儒者)의 말이 아니다.선생의 학문의 연원을 살펴보면 등과(登科)하던 해인 무오년(1558, 명종13)에 서울로 가던 도중 태인(泰仁)을 지나면서 일재(一齋) 이공(李公 이항(李恒) )을 배알하고 〈태극도설(太極圖說)〉을 논하였다. 당시 선생의 학문은 거의 대성(大成)의 영역에 도달해 있었지만 선생으로 하여금 진일보하여 승당입실(升堂入室)의 경지에까지 올라 일세(一世)의 유종(儒宗)이 되게 하신 분은 실로 퇴계(退溪) 선생이었다. 두 선생은 그해 경사(京師)에서 만났는데 한 번 보고도 십년지기(十年知己)와 같았다. 퇴계가 고봉에게 준 편지에 “무오년(1558, 명종13)에 도성에 간 일은 극히 낭패스러운 일이었으나, 다행스러웠던 것은 우리 명언(明彦)을 만났기 때문이다.” 하였다. 그 후로 두 선생은 겨우 두 차례 상면하였지만 사제(師弟)의 예는 조금도 해이하지 않았다.고봉은 탁월하고 명확한 자질로 행동거지는 오직 도산(陶山)을 본보기로 삼았고, 조정에서 경륜을 펼 때도 역시 오직 퇴계를 준칙으로 삼았다. 그 천품은 간결하고 사람을 쉽게 용납하지는 않았으나 오직 퇴도(退陶)에게는 성심(誠心)으로 열복(悅服)하였으며, 퇴계 역시 선생에게는 극진히 추허(推許)하고 항상 사석(師席)을 사양하였다. 매번 은미한 말이나 깊은 뜻이 담긴 글을 만날 때마다 항상 선생에게 질문하였으니, 다른 문인들은 여기에 참여할 수 없었다. 예법(禮法)과 사단칠정이기(四端七情理氣)의 논설에 관해서는 선생이 전인미답(前人未踏)의 심오한 경지에 나아갔으니, 퇴계도 누차 자기의 의견을 버리고 선생을 따랐으며 독보적인 관점과 이론을 가졌다고 허여하였다.퇴계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 선조가 묻기를 “조신(朝臣)들 중에 누가 학문으로 저명한가?” 하였다. 그 당시 많은 영재들이 조정에 가득하였으므로 실로 거명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퇴계는 아뢰기를 “기모(奇某)는 글을 박람하였고 성리학에도 뛰어난 조예를 가졌으니 참으로 달통한 선비라 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선생의 수명은 지명(知命)인 50세에 이르지 못하였으나 그 학문과 행적의 대요는 문집에 실려 있다. 《시문집(詩文集)》6권과 《주자문록(朱子文錄)》4권, 《논사록(論思錄)》 상ㆍ하권, 《양 선생 왕복서(兩先生往復書)》3권, 《사칠ㆍ이기 왕복서(四七理氣往復書)》 상ㆍ하편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그 문장은 수식을 일삼지 않고 기력이 웅장하고 법칙이 준엄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발분망식(發憤忘食)하게 한다. 달통한 선비의 학풍이 생기 있고 약동하여 볼만하였기에 당세의 명사와 후학들의 저술 중에 선생에 관련된 것이 극히 많았으니, 율곡(栗谷) 이 문성공(李文成公 이이(李珥) )은 선생의 대하(大河)가 흐르는 듯한 문장과 구름을 넘는 듯한 기상을 찬양하였으며, 사암(思庵) 박 문충공(朴文忠公 박순(朴淳) ), 택당(澤堂) 이 문정공(李文靖公 이식(李植) ), 계곡(谿谷) 장 문충공(張文忠公 장유(張維) ), 우암(尤庵) 송 문정공(宋文正公 송시열(宋時烈) )은 모두들 선생이 이 나라의 대유(大儒)요 세상의 사표(師表)임을 칭송하였다.배위 정부인 함풍 이씨(咸豐李氏)는 보공장군(保功將軍) 휘(諱) 임(任)의 따님으로 19세에 선생에게 시집와서 선생을 받드는 데 시종 어김이 없었고, 홀로된 25년 동안 자녀들에게 이록을 구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경계하였다. 병신년(1596, 선조29) 8월 18일에 집에서 별세하시니, 향년 67세였다. 선생의 좌측에 안장하였다.3남 1녀를 낳았으니, 장남 효증(孝曾)은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이고, 차남 효민(孝閔)은 전력부위 충좌위 부사과(展力副尉忠佐衛副司果)이고, 삼남은 효맹(孝孟)이며, 딸은 울산(蔚山)의 김남중(金南重)에게 출가하였다. 효증은 연은전 참봉(延恩殿參奉) 김점(金坫)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2녀를 낳았으니, 장남 정헌(廷獻)은 현감이며, 장녀는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承旨)를 지낸 한양(漢陽)의 조찬한(趙纘韓)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를 지낸 청주(淸州)의 한이겸(韓履謙)에게 출가하였다. 효민은 참봉(參奉)의 남원(南原) 양홍도(梁弘度)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2녀를 낳았으니, 장남은 영헌(齡獻)이고, 차남은 동헌(東獻)이며, 장녀는 생원(生員)의 고령(高靈) 박동휘(朴東煇)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함양(咸陽)의 여공준(呂貢俊)에게 출가하였다. 효맹은 승지인 광주(光州) 정엄(鄭淹)의 딸에게 장가들어 후사가 없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효민과 효맹은 중도에서 적을 만나 죽었고, 김씨에게 출가한 딸과 며느리 양씨와 정씨는 적에게 겁박을 당하였으나 굴하지 않고 모두 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선생의 후예들은 호남(湖南)에서 많은 선비들을 배출하였는데, 문학으로 국가의 원기(元氣)가 되기도 하고 무관으로 국가의 보장(保障)이 되기도 하였다.선생께서 별세하신 지 7년 되던 해에 호남의 유림들이 고마봉(顧馬峯) 아래에 사우(祠宇)를 지었는데, 효종(孝宗) 5년에 월봉서원(月峯書院)으로 사액되었고, 고종(高宗) 5년에 훼철되었다가 광복 후 서기 1991년에 광주시(光州市) 광산구(光山區) 광산동(光山洞)에 복원되었다. 아, 길고 아득한 500년 세월 동안 선생의 학덕(學德)은 우리나라에 견줄 이가 없었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뛰어난 자질은 / 超詣之資생이지지에 가까웠도다 / 近於生知잠심하여 고요히 생각함은 / 沈潛幽思칠팔 세 아이 적부터였도다 / 自髫齔時나이 십오 세에 / 志學之年이미 대성을 기약하였으며 / 已期大成경학의 뜻과 역사의 관점 / 經義史觀달통하고 분명하였도다 / 達通分明격물치지 수신제가의 수양을 / 格致修齊일신에 두루 갖추었고 / 備於一身치국평천하의 큰 뜻은 / 治平大志시종 순일하고 진실하였다 / 始終純眞조정에서 직임을 맡아서는 / 立朝莅職그 모습이 훌륭하고 영특하고 / 羽儀俊英경연에서 강론할 때는 / 經筵侍講그 논설이 종횡무진하였도다 / 論說縱橫만조의 신료들은 / 滿朝臣僚갱장에 뜻이 있었지만 / 意在更張공의 대본은 / 公之大本항상 강상을 중히 여기셨으니 / 恒重綱常어진 이를 추천하고 사악한 이를 물리치며 / 推賢斥邪극히 공명정대하셨다 / 至正大中세상에 나갈 때나 물러날 때나 말할 때나 침묵할 때나 / 出處語默한결같이 퇴옹을 준행하였고 / 一遵退翁서신의 왕복은 / 書信往復그 정의가 평생 변함이 없었다 / 情誼平生성리의 학설은 / 性理學說독보적 발명이었고 / 獨步發明사단과 칠정에 대한 논변도 / 四七論辯한편으로는 넓고 한편으로는 치밀하였으니 / 淹博精緻통유의 풍치와 인격을 / 通儒風標조야가 모두 우러렀으며 / 朝野仰止오직 기세사만을 / 惟幾勢死행신의 대방으로 삼으셨도다 / 行己大方창졸의 순간이라도 / 造次顚沛몸가짐과 행실을 엄중하게 지켰으니 / 操履嚴守사림의 아망은 / 士林雅望별 중에 북두성과 같았다 / 如星有斗맹자의 말씀대로 천명을 순하게 받으셨으며 / 順受天命백세에 향기를 남기셨도다 / 百世遺香서기 2003년 계미 4월 일,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학술원 회원(學術院會員) 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서울특별시장 후학(後學) 풍양(豊壤) 조순(趙淳)은 삼가 짓다.후학 진원(珍原) 박경래(朴景來)는 삼가 번역하다.[주-D001] 승당입실(升堂入室) : 실(室)은 방이고 당(堂)은 대청마루이다. 도의 심오한 경지에 들어감을 뜻한다. 공자가 제자 자로(子路)의 경지를 두고 말하기를 “당에는 올랐고 아직 실에는 들어가지 못했다.〔升堂矣 未入於室也〕” 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論語 先進》[주-D002] 생이지지(生而知之) : 태어나면서부터 이치를 아는 매우 뛰어난 자질을 말한다. 애공(哀公)이 정사에 대해 묻자, 공자가 대답하기를 “혹은 태어나면서 이것을 알고, 혹은 배워서 이것을 알고, 혹은 애를 써서 이것을 아는데, 그 앎에 이르러서는 똑같습니다. 혹은 편안히 이것을 행하고, 혹은 이롭게 여겨 이것을 행하고, 혹은 억지로 힘써서 이것을 행하는데, 그 성공함에 미쳐서는 똑같습니다.〔或生而知之 或學而知之 或困而知之 及其知之 一也 或安而行之 或利而行之 或勉强而行之 及其成功 一也〕” 하였다. 《中庸章句 第20章》
    2022-04-30 | NO.197
  • 문헌공고봉기대승선생비
    광주시 광산구 임곡동文憲公高峯奇大升先生碑는 아들 기효증이 찬했다.
    2018-12-02 | NO.196
  • 밀양 부사 이공 묘갈명 병서〔密陽府使李公墓碣銘 幷序〕 - 이유달
    동주집 문집 제9권 / 묘갈명(墓碣銘)- 밀양 부사 이공 묘갈명 병서〔密陽府使李公墓碣銘 幷序〕이유달(李惟達) 공의 자는 겸선(兼善)이다. 나와 함께 임자년(1612, 광해군4)에 과거에 급제하여 평소 서로 흠모하며 매우 즐겁게 지냈다. 일찍이 밀양 부사(密陽府使)가 되었는데, 성종(成宗)을 섬기면서 직언(直言)을 잘했고 연산군 때에 억울하게 죽은 헌납(獻納) 박한주(朴漢柱)가 본래 밀양 사람이었다. 공이 부임한 뒤에, 서신으로 나의 글을 요청해 박한주가 살던 마을을 표시함으로써 무너진 풍속을 진작시키려고 하였다. 대개 공의 생각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좋은 글을 나에게 맡길 만하다고 잘못 여겼던 것인데, 나는 그 후의에 매우 부끄러워 글은 완성하였으나 돌에 새겨 넣지 못하였다. 그런데 공이 이듬해 숭정(崇禎) 을해년(1635, 인조13)에 병으로 운명하니, 향년 겨우 57세였다. 나는 지금까지도 비통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공의 아들이 행장(行狀)을 소매 속에 넣어 가지고 와서, 나에게 묘갈명(墓碣銘)을 요청하며 말하기를 “이것이 아니면 제 선친(先親)을 영원히 전할 수 없습니다. 또 선생께서 그 남은 자손을 감싸 주고 돕는 것도 아마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아아, 이 말은 곧 공의 뜻이었을 것이다.공은 지극한 성품을 소유하여 단정하고 성실하였으니, 사귀기는 쉬웠으나 허물없이 가까워지기는 어려웠다. 평소 일찍이 크게 소리치거나 성난 낯빛을 보이지 않았으며, 지나치게 겸손하여 의관조차 견뎌내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나 일을 만나면 스스로 주도하여 능히 그 정도를 잃지 않았다. 벗들과 어울리는 곳에서 오래 있어도 더욱 엄격하였으니, 일찍이 고결한 체 꾸며서 남들과 영합하기를 구하지 않았다.집안에서의 행실이 잘 갖추어져서, 계모 황씨(黃氏)를 정성을 다하여 봉양하며 백발이 되도록 한결같았다. 맛난 음식을 얻으면 반드시 가지고 돌아가서 올렸으며, 일찍이 계모의 뜻을 미리 헤아려 기쁘게 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므로, 황씨가 편안히 여겼다. 제사가 돌아오면 제물을 갖추고 공경을 다하여 몸소 제수 준비를 살폈는데, 일찍이 풍성하면서도 깨끗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족형(族兄) 유종(惟宗)과 한집에서 10년을 같이 살며 의복과 음식을 서로 주고받으며 지냈는데, 종들이 일찍이 흠잡는 말을 하지 않았다. 관직을 맡아서는 청렴하고 결백하며 삼가고 부지런하였을 뿐 명예를 취하지 않았다. 고을살이할 때마다 번번이 기록할 만한 공적이 있었으므로 여러 번 임금의 칭찬을 받았고, 임지를 떠난 뒤에는 일찍이 백성들의 사모함을 받지 않은 적이 없었다.공은 젊어서 사부(詞賦)를 공부하여 향시(鄕試)에서 장원하였고, 병오년(1606, 선조39)에 성균관에 들어갔다. 과거에 급제한 뒤에는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에 뽑히고 시강원 설서(侍講院說書)와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를 역임하였는데, 어떤 일로 인하여 권세 있는 관리에게 밉보여 해미 현감(海美縣監)이 되었다. 내직으로 들어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과 병조 좌랑(兵曹佐郞)이 되었다.계해년(1623, 인조 원년)에 인조(仁祖)께서 즉위하시자, 어사(御史)에 충원되어 호남에 선유(宣諭)하였다. 그 뒤로 조정에서 13년 동안 벼슬하면서, 제조(諸曹)의 경우 예조(禮曹)와 병조(兵曹)의 정랑(正郞)을, 사유(師儒 성균관)의 경우 직강(直講)과 사예(司藝)를, 각사(各司)의 경우 제용감(濟用監)ㆍ예빈시(禮賓寺)ㆍ군자감(軍資監)ㆍ군기시(軍器寺)ㆍ종부시(宗簿寺)ㆍ사도시(司䆃寺)의 정(正)을,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경우 사서(司書)ㆍ문학(文學)ㆍ필선(弼善)을, 사헌부(司憲府)의 경우 지평(持平)ㆍ장령(掌令)ㆍ집의(執義)를 역임하였다. 겸관(兼官)은 지제교(知製敎)와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이었다. 외직(外職)의 경우 경기 도사(京畿都事), 광주 목사(光州牧使), 밀양 부사(密陽府使)를 지냈으니, 이상이 공의 이력이다.처음 성종(成宗) 강정대왕(康靖大王)에게 지자(支子) 휘(諱) 수(????)가 있었는데, 작호(爵號)는 완원군(完原君), 시호(諡號)는 소도공(昭悼公)이다. 이성군(伊城君) 휘 수강(壽剛)과 의원군(義原君) 휘 억(億)과 신흥 군수(莘興郡守) 휘 몽윤(夢尹)으로 전해졌다. 충의위(忠義衛) 휘 찬(璨)에 이르러 밀양 박씨(密陽朴氏) 사의(司議) 효원(效元)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니, 이분들이 공의 선고(先考)와 선비(先妣)이다.공의 부인 숙부인(淑夫人) 진천 송씨(鎭川宋氏)는 출가 전에도 출가 후에도 공손하고 또한 온화하였으며, 공보다 앞서 모월(某月) 모일(某日)에 운명하였다. 아들은 담(????)이며, 두 딸은 관찰사(觀察使) 윤명은(尹鳴殷)과 사인(士人) 김경주(金慶胄)에게 출가하였다.공은 너그럽고 온화하며 순수하고 독실하였다. 안으로 기량을 지녔지만 밖으로 드러내어 꾸미고 과장하는 행실이 없었는데, 나이와 지위가 그 덕에 미치지 못하였으니, 식자(識者)들이 천도(天道)를 의심하였다. 오직 공의 아들 담(????)이 삼가고 조심하며 그 가문을 이어가고 또 자손이 끊이지 않았으니, 아마도 이른바 천도가 여기에 있는 것인가.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질박하면 저속하고 / 質則近俚꾸미면 방자해지니 / 或文而肆휩쓸리는 것과 오기 부리는 것은 / 惟隨與敖둘 다 같은 문제점이 있기 마련이지 / 弊一于二온화하고 공손한 사람 / 溫溫恭人뽐내지도 않고 자만하지도 않아 / 不矜不盈말할 때는 어눌한 것처럼 했고 / 出言若吶종요로움을 잡아 바름에 거하였네 / 操約居貞처음에 외로운 몸 떨쳐 일으켜 / 始奮孤身바른 자취 물들여 / 漸厥矩武조정에 모범 되니 / 儀于朝署그 위의 드날렸네 / 有翽其羽심은 덕 도타우니 / 有樹其惇높은 지위 올라 끝내 명예롭게 되어야 하는데 / 歷敭終譽어찌 장수도 누리지 못하고 / 胡不臷茂지위는 대부에 그치고 말았던가 / 而止大夫저 둥근 무덤에 / 彼睪之丘이 빗돌 세우니 / 有揭斯石내가 내 글을 새겨 / 我銘我辭삼가 그 무덤 표시하노라 / 式表窀穸[주-D001] 박한주(朴漢柱) : 1459~1504.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천지(天支), 호는 우졸재(迂拙齋)이다.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 때 평안북도 벽동(碧潼)으로 유배되었고, 1504년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처형당하였다.[주-D002] 조정에 …… 드날렸네 : 이유달이 조정 관리로서 모범적인 인물이었다는 말이다. 《시경》 〈권아(卷阿)〉에 “봉황이 나니, 그 깃이 퍼덕인다.[鳳凰于飛, 翽翽其羽.]”라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이유달의 아름다운 위의를 표현한 말이다
    2023-12-04 | NO.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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