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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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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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상열-의사오공순절기적비
    광주시 광산구 명도동 137-7(가마마을)1985년 개축가마마을에는 일제강점기 때 항일의사로 적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오상열 순절비가 있다. 이 의사오공순절기적비는 광산구 출신의 조선 말기 오상렬 의병장이 일본군과 맞써 싸워 적탄에 맞아 순국한 것을 알리는 기적비이다. 항일의사 오상열은 1879년(고종 17년) 광산구 명도동에서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항일구국의 큰 뜻을 품고 영사재에서 무예를 닦는 한편  화약 등 무기를 만들어 의병활동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오 의병장은 1906년 김태원(金泰元)·김율(金聿)·전수용(全垂鏞) 등과 1,000여명의 의병을 모아 김태원을 의병장으로 하고 도통장(都統將)이 되었다. 특히 대명동 영사재에서 무기의 제작을 주도하였으며, 어등산과 석문산 등지에서 활약하였으며 광주 무등산일대에서 일본군과 격전 끝에 200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1907년 사호치(沙湖峙) 전투에서 도통장으로 일본군 대부대와 대치하여 45일 동안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여 적에게 막대한 손실을 주는 전공을 세웠다. 1907년부터 함평․나주․담양․광주 등에서 왜적과 대항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으나 적에 비해 무기가 열악하고 병사가 부족하여 결국 1908년 12월 23일 엄동설한에 임곡 사호치에서 왜적과 치열히 싸우다 향년 30세의 젊은 나이로 순절하였다. 1977년 12월 13일 대통령 건국포장이 추서됐다.오상렬 의병장의 이러한 공훈을 기려 그가 생전 무기를 제작하며 의병활동을 주도했던 영사재가 있는 명곡마을 입구의 도로변에는 오상렬 의병장의 순절기적비가 세워져 있다. 명곡마을 일대는 오상렬 의병장의 묘역과 순절기적비 등이 남아있어 오상렬 의병장의 의기가 서려있는 곳이다. 1907년 10월 15일 의병으로 첫 출전하면서 부인 배씨에게 남긴 유시가 의사의 충과 효를 잘 나타내준다. 吾生未可必(오생미가필)   내 삶을 기필하기 어려우니 須護腹中兒(수호복중아)   모름지기 뱃속의 아이를 잘 보호하시오 不恨死當死(불한사당사)   마땅히 죽을 때 죽는 것은 한이 없으나 親年六十餘(친년육십여)   어버이 연세 예순이 넘으시니 그것만이 마음에 걸리네2018.12.01 수정
    2018-11-11 | NO.134
  • 오자치 원당영각 입구 비석군
    광주시 광산구 원당길 1011913년이 오자치신도비(吳自治神道碑)를 비롯하여 오상열 의병장 오성술 의병장 등의 비가 원당영각 인근에 있다.원당영각(元堂影閣)은 1892년 유림 및 후손에 의하여 건립되었으며 양평공 오자치의 영정(보물 1190호)을 배정하고 있으나 현재는 서울 중구 궁중유물전시관에 보관중이다. 건물은 1975년에 지붕을 보수했으며 1976년에는 대문을 보수했다.영각 뒤편에는 1918년에 건립된 시기재(始基齋)를 비롯하여 모정과 이곳을 알리는 안내판 등으로 구성되있다.  나조오씨 중조라 할 오자치(1426~?)는 1467년(세조13년) 이시애의 난을 토벌한 공으로 직개공신 2등에 책록된 인물이다.이 공으로 당시 세조 임금이 그의 영정을 하사한 것이라 전해 내려온다. 오자치의 행적을 살필 수 있는 기록은「세조실록」과「성종실록」에 약간의 내용이 있을 뿐 그 외의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오자치의 묘와 영당이 용진산 밑 원당리에 있고 오자치의 묘 옆에 심어져 있는 백일홍은 나라에 슬픈일이 일어날때는 꽃이 피지 않는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吳自治神道碑  (정리중)公諱自治吳氏望羅州者爲世名族高麗中郞將偃寔公高祖也曾大父諱季愼中郞將大父諱類達益山郡事考諱愼中進士 贈參判錦城君?李氏 贈貞夫人盖以公貴也公天資湍溫才器夙然性於孝有至誠深愛好讀書弱冠淹貫經史智勇絶倫能於射御錦城嘗有惡獸多像人物又有妖僧偉暴資?一州?然公以一箭一椎函除兩害閏境賴以得安公家甚貧躬執漁樵?難繼欲爲春親以圖祿仕而屢屈科場乃反武科魁讓付宣傳官由主簿經歷求補郡邑政治淸白?之以嚴恕吏民?其德累蒙褒賞之典及遭外憂哭?無節而復甦專以事母爲心益致愉小宛不復有仕進之計 光陵丁亥叛賊施愛據有嶺?朝野憂惶莫過?鋒 廟堂薦公召命勤塾公見國執山俗○郞應命從征 上召人別殿賜西溫慰諭公乃與曺錫文魚有沼等一心效勞身了昌矣石斬獲甚多高原有宜陳之地恐爲賊所奪以車巫騎疾馳先據左執大旗右捲障泥吹作角聲明聞之不敢上我軍遂獲大捷施愛之弟施合方在吉州勢甚?張公興李?等空入賊里縛施合以歸未及營而追騎大至前裏被執公奪身回擊斬施愛而還一軍莫不震?二賦戮餘黨悉平振旅返京遂策高火氣二等勳盖八茂績不下曺魚諸公而以其官階之卑未尋參元勳識者恨之翌年四月陞通政七月進階嘉善封羅城君桑拜兵曹參判公不以勳責自居謙牧思退累疎陳懇曰臣之親年益高養旦不多 上特許以南遝故里恒侍親則務盡順滴時或黃冠野眠逍林泉不復渡漢津也丁內艱廬丁墓則○○○柴毁骨立成疾漸劇竟至不叔壽五十訃開 上震悼賜賻致祭禮葬于元堂山枕良原睿完朝賜不初之典配食 次廟廟庭後 贈吏曹判書諡襄平配呂氏處士孟?女擧二男張世勳府使○○在左贊成羅原石次世翊上護軍日謙右議政錦陽君認進士?庶尹 贈參議長房出也曾玄以下不少錄公氣溫粹才識明敏吏政兵籌周涉?奇通其卓掌英達世鮮倫比而建功身退以成五湖扁周之樂視諸同勳諸人多不保終公之先見不翅超然而可以欽服於百世之下也代久遠且經兵焚(희)文叡巳失立朝履歷生年紀皆僕而難詳矣遂靑蓮李公所撰狀文?括如右以寒公後孫偉才達簿試郡府발難北發??射日 王曰汝征公起家念奮厥義勇?昌天石衡突賊陳敢我道大?敦獻? 王靈斯赫策公鬼勳錫賚進針讓不代願欲赤松歸着老因務盡順澗旣忠且孝垂各竹帛原始要終久矣彬總曾我銘昭揭無垠 施蒙大荒落復之上浣嘉義大夫司憲府大司憲兼成均館祭酒侍講院贊善德殷 宋秉璿 撰十三代孫 駿善書兼篆 崇禎五癸丑十一月日立
    2018-12-01 | NO.133
  • 오정선-균음당오선생 묘역
    광주시 광산구  본동로 158 부근(동호동)동학농민군으로 활약한 전현령 오정선(吳禎善, 1861~1923)은 <균음당유고(筠陰堂遺稿)> 3권1책이 1963년 석판본이 있다.  
    2018-12-10 | NO.132
  • 오처대-서송정오처대묘비
    광주시 광산구 삼도동 복호마을1978년서송정오처대묘비墅松亭吳處大墓碑는 종후손 오중렬이 짓다. 進士墅松亭吳公(處大)墓表는 후석유고(後石遺稿)에 실려 있다.조선 숙종 때 광산구 삼도면 지평리 사실마을에 오처대라는 문장이 뛰어나고 덕망이 있는 학자가 있었다. 오공은 젊은 시절 과거에 장원급제를 하자 숙종 임금이 친히 불러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오도록 분부를 내렸다. 전례가 드문 특별한 운명이었다. 오공이 압록강을 건너 중국땅에 이르렀는데 길목에 난데없이 양면에 잔글씨가 빽빽히 쓰인 8폭짜리 병풍이 둘러져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중국의 천자가 사신으로 오는 사람의 지혜를 시험하기 위해 꾸민 일이었다. 오공은 그것을 보고 말채찍을 힘껏 후려쳐서 병풍 한쪽을 제치고 지나쳤는데, 자기 앞에 선 오공을 보고 중국 천자는 오는 길에 뭔가를 본 일이 없느냐고 물었다. 오공이 노변에 세워진 '글씨병풍'을 보았노라고 대답하자, 천자가 껄걸 웃으면서 그 병풍에 쓰여진 글귀를 외워 보라고 했다. 오공이 그 글귀를 한 자도 빠짐없이 술술 외우는데 그 말미의 한 구절만을 외우지 못하니 천자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신하를 시켜 그 현장을 보고 오도록 하였다. 그 신하가 돌아와서 병풍의 한 가닥이 접어져 있었다고 아뢰었다. 천자는 무릎을 치고 탄복하면서 오공의 깊은 학문을 치하하고 그 자리에서 서송정墅松亭이라는 호를 내리고 잔치를 베풀어 크게 환대 했다고 한다. 조사결과 오처대 선생은 숙종 때 인물로 중국사신으로 가 중국천자로부터 서송정(墅松亭) 이라는 호까지 받았지만 선생에 관한 자료가 없어 안타까움이 많이 남는다.
    2018-12-02 | NO.131
  • 운남처사박공유장비
    광주시 남구 행암동 468-51977년운남처사박공유장비(雲南處士朴公遺庄碑)는 브라운스톤1단지(효천LH천년나무5단지) 옆 도동경로당과 꿈드리유치원 입구에 있다. 1977년에 장흥 위계도의 글과 신천 강인환의 글씨로 써 있다.박공은 밀양박씨로 도동마을에 거주했고 연안조씨와의 사이에 2남 안중 안성이 있다고 한다.
    2018-10-26 | NO.130
  • 운암서원 유허비
    광주시 북구 화암동 218(운암서원 내)1905년이 운암서원유허비(雲岩書院遺墟碑)는 해광(海狂) 송제민(宋齊民, 1549∼1602)을 모신 서원 내에 있다. 숙종 32년(1706) 지역 유림들의 청원으로 북구 운암동 東背 마을 앞 山에 터를 잡아 건립하고 조선 중기의 학자 해광 송제민을 배향하였다. 숙종 35년(1709)에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제봉(霽峯) 고경명의 사촌동생이자 조선 선조 때의 유생인 창랑(滄浪) 고경리(高敬履, 1559~1609)를 추배하였다. 서원에는 그 외에도 송 타(宋 柁) 권 필(權 韠) 신 필(申 鞸) 신한주(申漢柱) 등을 추배하였다. 운암서원은 훼철 이전 장의(掌議) 2인, 색장의(色掌議) 1인, 원생(院生) 13인을 두었다.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1868년에 훼철되어 1905년 그 자리에 유허비를 세웠다가 1985년 운암서원을 복원하면서 현재의 무등산 자락 운암서원 자리로 옮겼다. 지붕돌을 갖춘 유허비는 높이 134m, 폭 45cm, 두께 13cm로, 26자 8행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원래 이 자리에는 운암서원을 철폐한 후 1933년에 건립했던 송제민의 재실 영모재가 있었는데 현재는 운암서원 안에 영모재(永慕齊)가 들어서 있는 형태로 되었다.현재 이 비가 있는 곳에 1933년 건립된 해광 송제민외 제실인 영모제와 해광의 묘가 있다. 비문은 관찰사 김세기(金世記)가 지었고, 군수 권중은(權重殷)이 썼다.비문東國院設盖出先王之崇報多士之尊慕一自綴享孰不齋恨本院後孫立碣表址請文工宋猥濫措筆只輯院祝以記之曰海狂宋公諱齊民春秋之義訂禎之仁名高東海光照後人滄浪高公諱敬履承連山學辯牛溪誣妙契太極克配院宇花菴宋公諱柁殲賊奮義蹈海殉節兩世同祀千古幷烈石洲權公諱鞸濂洛口䪨孤竹淸風仁主褒贈後儒尊崇靜友申公諱滭拜官不就終身若喪擧義勤王忠孝敢詳道溪申公諱漢柱海翁同配克杞院宇惠心經學矜式○○惟願多士永慕謹守爲百世遺蹟焉 資憲大夫觀察使金世基 謹記 通政大夫行郡守權重殷 謹書 甲申仲冬 日立 비문번역 우리나라에 서원(書院)을 설치하는 것은 대체로 선왕(先王)의 융숭하게 보답하려는 은혜와 많은 선비들이 존경하고 사모하는 마음에게 나온 것이다. 그러나 한번 배향(配享)을 거둔 뒤로부터는 누구인들 한스러워하지 않았겠는가. 본 서원의 후손이 묘갈(墓碣)을 세워 그 터에 표시하고자 나에게 묘갈문(墓碣文)을 부탁하였다. 내가 외람되게 붓을 잡아 다만 서원의 축문(祝文)을 모아서 그것을 기록하였다. 기록에 이르기를, '해광(海狂) 송공(宋公)은 휘(諱)가 제민(齊民)인데, 춘추(春秋)의 의리(義理)와 정정(訂禎)의 어짐으로 명성(名聲)이 동해(東海)에 높았고 광채가 후인(後人)들에게 비추었다. 창랑(滄浪) 고공(高公)은 휘가 경리(敬履)인데, 연산(連山)의 학문을 이어받았고 우계(牛溪)의 무고(誣告)를 분별하였으며 오묘하게 태극(太極)과 합치되어 능히 원우(院宇)에 배향되었다. 화암(花菴) 송공(宋公)은 휘가 타(柁)인데, 적(賊)을 섬멸(殲滅)하고 의(義)를 떨쳤으며 바다를 뛰어들어 순절(殉節)하여 양대(兩代)에서 함께 제사를 받아 오래도록 아울러 성대하였다. 석주(石洲) 권공(權公)은 휘가 필(鞸)인데, 주돈이(周敦頥)와 정자(程子)의 구운(口䪨)이 있었고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의 맑은 풍모(風貌)가 있어서 어진 임금이 기려 추증(追贈)하여 후세 선비들의 존숭(尊崇)을 받았다. 정우(靜友) 신공(申公)은 휘가 필(滭)인데, 관직(官職)을 제수 받아도 나아가지 않아 종신(終身)토록 상(喪)을 당한 사람같이 하였고 의병(義兵)를 일으켜서 부지런히 임금을 섬겼으니 충성과 효도를 두루 갖추었다. 도계(道溪) 신공(申公)은 휘가 한주(漢柱)인데, 해옹(海翁)과 함께 짝하여 능히 원우에 배향되었고 경학(經學)에 마음을 다하였으니 삼가 본보기가 되었다.’라고 하였다. 다만 원컨대 많은 선비들이 영원히 사모하고 삼가 지켜서 백세(百世)의 유적(遺蹟)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자헌대부 관찰사 김세기(金世記) 지음. 통정대부 군수 권중은(權重殷) 씀.갑신년 음력11월에 세움
    2018-06-11 | NO.129
  • 운초전주이공기룡배효부수원최씨기행비
    광주시 광산구 명도동 평림마을1998년
    2018-11-30 | NO.128
  • 월봉서원(月峯書院) 묘정비명(廟庭碑銘) 병서 - 고봉전서(高峯全書) 보유 최근덕(崔根德)
    월봉서원(月峯書院) 묘정비명(廟庭碑銘) 병서 - 고봉전서(高峯全書)  보유   최근덕(崔根德)조선조 명종ㆍ선조 연간에 문운(文運)이 빈빈(彬彬)하고 사류(士類)가 성(盛)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전대(前代)에 겪은 사화(士禍)의 남은 불씨가 아직도 척신(戚臣)과 간인(奸人) 사이에 남아 있어서 은밀히 선비를 해치는 재앙을 빚고 있기도 했다. 이런 때를 당해 힘써 독류(毒流)를 배척하고 청의(淸議)를 끌어당기며 의리를 밝혀 학문이 이룩되고 도가 높아 우뚝하게 유종(儒宗)이 된 분은 고봉(高峯) 기 선생이시다. 일찍이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가 되어 경연(經筵)에 입시하여 아뢰기를 “천하의 일에 옳고 그름이 없을 수 없습니다. 옳고 그름을 밝힌 뒤에야 사람들이 마음으로 복종하고 정부의 명령도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입니다. 대저 옳고 그름은 비단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실상 천리(天理)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한때 비록 가리고 베어내 버린다 하더라도 그 옳고 그름을 아는 본심(本心)은 끝내 없어지지 않습니다.” 하였고, 또 아뢰기를 “언론 창달(言論暢達)은 국가의 중대한 일입니다. 언로(言路)가 열려 있으면 국가가 평안하고 언로가 막혀 있으면 국가가 위태롭습니다.” 하였으며, 또 어진 이를 등용하는 도(道)를 논하기를 “학교 교육을 밝게 닦아 인재를 양성해서 그 성취도에 따라 뽑아 등용할 것이며, 능히 국가의 치란(治亂)과 백성의 기쁨ㆍ슬픔을 헤아려 아는 자와 더불어 정치를 하면 묵은 병폐(病弊)를 개혁하고 앞사람들이 미처 하지 못한 일들을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치를 논하고 주장을 세움에 있어서 도를 지키지 않음이 없었다. 상세한 것은 《논사록(論思錄)》에 실려 있다.선생의 휘는 대승(大升)이고, 자는 명언(明彦)이며, 호는 고봉(高峯)이고 또 존재(存齋)라고도 한다. 성은 기씨(奇氏)로 행주(幸州) 사람이다. 고(考)의 휘는 진(進)이고 호는 물재(勿齋)이며, 호가 복재(服齋)인 아우 준(遵)과 더불어 학행으로 세상에 저명했다.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복재가 화를 입자 세상일에 뜻을 멀리하고 광주(光州) 고룡향(古龍鄕)으로 물러나 살게 되었다. 비(妣)는 진주 강씨(晉州姜氏)로 사과(司果) 휘 영수(永壽)의 따님이다. 중종(中宗) 22년 정해년(1527) 11월 18일 선생께서 고룡리(古龍里) 집에서 태어났다.공은 천자(天資)가 빼어나고 꿋꿋하여 어릴 적부터 지절(志節)이 있었으며 성품이 또한 강개(慷慨)해 항상 도의(道義)를 선양(宣揚)하고 퇴패적(頹敗的)인 풍조를 일소해서 천박한 학문에 대해 모범을 보이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음식을 물리치고 눈물을 흘렸으며 두문불출(杜門不出)했다. 〈자경설(自警說)〉을 지어 스스로를 경계(警戒)했다.기유년(1549, 명종4)에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하였고, 을묘년(1555)에 물재공(勿齋公)의 상을 당해 여묘(廬墓)로 삼년상을 마쳤다. 《주자문록(朱子文錄)》을 저술하였다. 무오년(1558) 7월에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선생과 일재(一齋) 이항(李恒) 선생을 찾아뵈었고, 10월에 문과(文科) 을과(乙科) 제1명(第一名)으로 과거에 올라 권지 승문원 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가 되었으며, 이달에 퇴계 선생을 서울에서 찾아뵈었다. 추만(秋巒) 정지운(鄭之雲)이 〈천명도(天命圖)〉를 선생에게 보여 주었다. 기미년(1559) 3월에 퇴계 선생에게 편지를 올렸는데, 이로부터 8년여 동안 두 선생께서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을 논변(論辨)했다.계해년(1563, 명종18)에 거듭 예문관 봉교(藝文館奉敎)에 제수되었으며 사관(史官)이 되고 홍문관부수찬 겸 경연검토관 춘추관기사관(弘文館副修撰兼經筵檢討官春秋館記事官)에 올랐다. 주강(晝講)에 입시해 “국가의 안위는 재상(宰相)에게 달려 있고 임금의 덕이 성취되는 것은 경연(經筵)에 책임이 있다.”라고 하였다. 을축년(1565)에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과 지제교(知製敎)가 되고, 또 이조정랑 겸 교서관교리(吏曹正郞兼校書館校理)로 임명되었으나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12월에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을 진국원(鎭國院)으로 찾아보고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을 논하였다. 소재가 나정암(羅整菴)이 지은 《곤지기(困知記)》를 옳다고 주장하니, 선생께서 〈곤지기론(困知記論)〉을 지어 분변해 주었다.정묘년(1567) 5월에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로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관서(關西)로 가서 허국(許國)과 위시량(魏時亮) 두 사신을 영송(迎送)했다. 마침 명종이 승하(昇遐)하여 중로(中路)에서 부음(訃音)을 들었다. 두 사신은 모두 중국의 명유(名儒)로, 많은 질문을 하였으나 선생께서 응대(應待)하되 상(常)과 변(變)을 강론하는 것이 다 적절하였다. 조정에 돌아오자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제수되었고, 조강(朝講)에서 사림이 화를 입는 이유 및 선정(先正) 조광조(趙光祖) 등 기묘제현(己卯諸賢)의 신원(伸寃)을 건의하였으며 어진 이를 등용하는 도를 자세하게 논하였다. 여러 번 옮겨 대사성(大司成)과 대사간(大司諫)에 두 번이나 임명되었다.경오년(1570, 선조3)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한강으로 나와 하룻밤 묵는데 서울의 사대부들이 조정을 비우다시피 전송(餞送)을 나왔다. 5월에 고마산(顧馬山) 아래에 자그마한 집을 지어 낙암(樂庵)이라 이름 붙였으니, 퇴계의 글 가운데 “가난할수록 더욱 도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을 취한 것이었다. 이보다 앞서 선생께서는 청량봉(淸凉峯) 아래에 자그마한 집을 짓고 은거하며 공부할 곳으로 삼았는데 귀전(歸全)이라 이름하였다. 부모가 온전히 낳으시매 자식이 온전히 몸을 보전하여 돌아간다는 뜻을 담은 것이다. 문인으로 좇아 배우는 자가 더욱 많았으며 사림의 중망(重望)이 선생에게로 돌아왔다. 여러 번 소명(召命)이 있었으나 소장을 올려 사퇴(辭退)했다.임신년(1572, 선조5) 2월에 종계변무 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로 또 소명이 있게 되니, 선생께서 사명(使命)이 중대한지라 부득이 조정에 나아가기로 하였다. 중도에서 대사간에 임명되고, 7월에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제수되었다. 10월에 벼슬을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당대의 많은 사대부가 한강까지 전송을 나왔다. 천안(天安)에 이르러 갑자기 둔종(臀腫)이 생겼고 태인(泰仁)에 이르자 더욱 위독해졌다. 매당(梅堂) 김점(金坫)이 달려와 병문안을 하니, 선생께서 “목숨이 길고 짧은 것은 명(命)이고 죽고 사는 것은 천(天)이니 모름지기 관념(關念)하지 마시오. 다만 어릴 적부터 문한(文翰)에 힘쓰다가 드디어 성현(聖賢)의 학문에 뜻을 두었는데, 중년 이래로 비록 스스로 체득(體得)한 것이 있었다 치더라도 다만 공부가 독실(篤實)하지 못해 처음 마음먹은 바에 부응하지 못할까 항상 저어하였지만 늠름(凜凜)하게 날로 반성하고 조심하였습니다. 만약 공부한 이들 사이에서 옛 성현의 진면목(眞面目)을 헤아려 논한다면 나도 또한 부끄러울 것이 없지만 단지 한 일들이 옛사람에게 미치지 못하니 그것이 두렵습니다.” 하였다. 이튿날 길을 재촉해 김공(金公)의 집에 이르러 이틀 만에 돌아가시니, 11월 1일이었다. 이때가 밤이 4경인데 갑자기 바람이 거세게 불고 우레와 번개가 치므로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향년 46세였다.임금이 선생의 병환이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특별히 어의에게 약을 갖고 달려가 치료하게 하고, 또 위문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지만 다 미치지 못하였다. 임금이 부음을 듣고는 크게 슬퍼하였고, 간원(諫院)에서 아뢰기를 “대사간 기대승은 어릴 적부터 성현의 학문에 종사하여 견식(見識)이 고명(高明)했고, 이황(李滉)과 더불어 의리(義理)를 논변하니 앞사람이 발명하지 못한 바를 많이 발명했으며, 경악(經幄)에 입시해서 진술하고 계옥한 것이 모두 성제(聖帝)ㆍ명왕(明王)의 도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온 세상이 추앙하고 존중해서 유종(儒宗)이 되었으나 불행히도 병이 있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졸(卒)하였습니다. 가세(家勢)가 청빈(淸貧)해 상장례(喪葬禮)를 치르기가 어려우니 청컨대 본도(本道)에 명해서 넉넉하게 도와줘 나라에서 선비를 높이고 도를 중히 여기는 뜻을 보여 주소서.” 하니, 상이 이에 따랐다.선생께서 평소에 주대(奏對)한 말씀들을 상이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1권으로 기록해서 《논사록(論思錄)》이라 이름 붙였다. 시문(詩文) 6권과 《주자문록》4권, 퇴계와 왕복한 서간(書簡) 3권과 《양 선생 이기왕복서(兩先生理氣往復書)》 상하 2권이 간행되었다. 증 수충익모광국 공신(輸忠翼謨光國功臣)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경연 의금부 성균관 춘추관사(吏曹判書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經筵義禁府成均館春秋館事) 덕원군(德原君)에 봉해지고,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선생께서 돌아가신 후 7년 되던 해인 무인년(1578, 선조11)에 사림이 뜻을 모아 고마봉(顧馬峯) 아래 낙암동(樂庵洞)에 사당을 건립하였다. 이때에 황강(黃岡) 김계휘(金繼輝) 공이 본도의 감사(監司)로 있으면서 힘을 많이 썼고 또한 강진(康津)의 언답(堰畓) 30여 석지(石地)를 서원으로 넣어 주었다. 그 후에 송강(松江) 정철(鄭澈) 공이 감사가 되어 또한 많이 돌보아 주었고 노비와 전토(田土)도 지급해 주었다. 임진왜란 후에 망월봉(望月峯) 아래 동천(桐川) 위로 이건(移建)하였으며, 효종 5년 갑오년(1654)에 월봉서원(月峯書院)으로 사액이 되었으며, 6년 을미년(1655) 4월에 편액을 맞이하고 예랑(禮郞) 원격(元格)이 제문(祭文)을 받들고 와서 치제했다. 현종 10년 기유년(1669)에 중창(重刱)을 했고, 12년 신해년(1671)에 문간공(文簡公) 눌재(訥齋) 박 선생과 문충공(文忠公) 사암(思菴) 박 선생을 추향(追享)하였으며, 숙종 9년 계해년(1683)에 문원공(文元公) 사계(沙溪) 김 선생을 추향하였고, 문경공(文敬公) 신독재(愼獨齋) 김 선생을 종향(從享)하였다. 정조 12년 무신년(1788) 4월에 예조 좌랑(禮曹佐郞) 박흥복(朴興福)이 명을 받들고 와서 치제하였다. 고종 5년 무진년(1868)에 훼철(毁撤)되니 사림과 자손이 모두 슬퍼하고 통탄해 마지않았다.광복 전 무인년(1938)에 문중에서 논의가 발의되어 계획을 세우고 재정을 모아 광주시(光州市) 광산구(光山區) 광산동(光山洞) 광곡(廣谷)에 빙월당(氷月堂)을 중건하여 강당으로 하고 광복 후 기미년(1979)에 지방문화재로 등록되었으며, 사림과 본손(本孫)이 당국에 건의하여 국비로 임술년(1982)에 숭덕사(崇德祠)와 내삼문(內三門)을 세웠고, 계해년(1983)에 장판각(藏板閣)을 지었으며, 경오년(1990)에 명성재(明誠齋) 4칸과 존성재(存省齋) 4칸 및 외삼문(外三門)을 세웠다. 신미년(1991)에 서원을 복원해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의전(儀典)을 순성(順成)했으며 3월 상정일(上丁日)에 향사하게 되었으니, 어찌 사문의 큰 다행이고 사림의 성대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루는 예손(裔孫) 대종회(大宗會) 회장 세훈(世勳)과 서원복원회(書院復元會) 회장 세탁(世鐸)이 나를 성균관(成均館)으로 찾아와 묘정비문(廟庭碑文)을 청탁하니, 내가 비록 그럴 사람이 못 되지만 어찌 감히 사양하리오. 대략 위와 같이 서술하고 다음과 같이 명한다.미묘를 정밀하게 연구하니 / 精究微妙도체를 꿰뚫었네 / 道體透洞널리 보고 조예가 뛰어나서 / 博覽超詣탐구하고 토의해 종합하고 분석하였네 / 探討約綜주대한 말씀은 / 奏對之辭논사록으로 외우고 / 論思以誦사칠이기설은 / 四七之說철학의 지표라 칭송하네 / 指南以頌법도 지키기를 준엄하게 하니 / 典則峻嚴예학에도 달통하였네 / 禮學達通많은 선비 추앙해 / 多士追仰사당 세워 받들고 / 建祠供奉백세의 모범 되니 / 百世矜式월봉이라 사액하였다네 / 賜額月峯경과 의 함께 세웠으니 / 敬義偕立길이 뒤를 따르리 / 永年隨踵서기 1998년 무인 5월 상한(上澣)에 성균관장(成均館長) 후학(後學) 경주(慶州) 최근덕(崔根德)은 삼가 짓고 번역하다.
    2022-04-30 | NO.127
  • 유경현묘지 (庾敬玄墓誌銘)
    유경현묘지 (庾敬玄墓誌銘)는  1235년(고종22)의 것으로 추정된다. 유경현(1180~1235)은 본관은 무송(茂松).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지낸 유자량(庾資諒)의 아들이다.문과(文科)에 급제하였고, 1227년(고종 14)에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로서 국자감시(國子監試)를 관장하였다. 이 해에 상서우승 지어사대사(尙書右丞知御史臺事)가 되고, 1232년에는 우승선으로서 몽고사신 도단(都旦)의 행패를 진정시키기도 하였다. 이규보(李奎報)와 친교가 깊었다.
    2023-07-17 | NO.126
  • 유사-설강유사선생묘갈명
    광주시 광산구  1885년瑞山柳氏鍾城府使雪江公諱泗 설강유사선생묘갈명은 덕은 송병선이 짓다.유사柳泗(1503~1571)는 조선중기의 문신, 본관은 서산이며 자는 중연(仲沿), 호는 설강(雪江)이다. 남구 유등곡柳等谷(현 이장동 양과동) 출신으로 봉훈랑(奉訓郞, 문관 또는 종친에게 준 종 5품 벼슬) 경흥교수(慶興敎授, 유생을 가르치는 선생)의 아들로 태어났다.1522년(중종 17) 21세 때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528년(중종 23) 27세 문과(별시別試 병과4丙科4)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며 무장현감 . 전라도사 . 낙안군수 . 삭주부사 . 종성부사 등을 역임했다. 1545년(인종 1 을사)에 인종이 죽자 새로 즉위한 명종의 외숙인 소윤(小尹)의 거두 윤원형이 인종의 외숙인 대윤(大尹)의 거두 윤임 일파를 몰아내는 과정에서 대윤파에 가담했던  문신 류인숙柳仁淑ㆍ류관柳灌 등 많은 문신들을 죽이거나 유배시킨 을사사화가 5-6년 동안이나 계속되고 또 1547년(명종 2 정미)에 정미옥사까지 이어지니 관료 간의 대립이 표면화되어 나타난 대옥사(大獄事)는 을사사화로서 마지막이 되었으나, 중앙정계에 대거 진출한 사림세력에 의해 붕당(朋黨)이 형성되었다. 1558년 명종의 왕비인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외숙인 이량李樑(1520-1571)이 왕의 총애를 기화로 전권을 휘두르며 당파를 만들어 윤근수尹根壽 심의겸沈義謙 등을 제거하려 하자 그를 위시한 권신들을 배척하는 상소를 했다가 무고로 몰려 권신 이량(李樑)과도 사이가 벌어져 고향에 돌아와 자연 속에서 욕심 없이 유유자적하면서 학문에 정진하고 자신이 제례를 제정하여 자손에게 가르치고, 장횡거(張橫渠)의 글을 베껴서 간행하고자 손에 훈계하는 글을 써서 심광언(沈光彦)에게 부탁하여 간행했다. 1563년(명종 18)에 삼사의 탄핵으로 파직되어 보령에 유배되어 이량이 세력을 잃게 되자 선생을 다시 기용하려고 영해부사寧海府使를 제수했으나 선생은 나이도 늙고 병이 있어서 사퇴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558년 고향의 건너편인 극락강과 황룡강이 합류하는 곳 노평산魯平山 기슭에 터를 잡아 정자를  처음 세우고 "소강절邵康節 호가지의浩歌之意"를 취해 호가정浩歌亭이라 이름 붙이고 종노지계終老之計로 삼아 서식棲息하였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이 정자가 불타 없어져 후손에 의해 1871년에 다시 세웠다. 그 후 1932년과 1956년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정자의 건물은 정사각형으로 축조한 대지의 중심부에 정측면 다같이 3칸으로 지어졌다. 저서로 『설강집』2권과 『위친필봉제축유서爲親筆奉祭祝遺書』가 전하고 있으며, 광주의 유림들은 경렬사에 추향하였으나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에 의해 훼철되었다.류사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그러나 혼탁한 정치 현실에 휘둘리지 않며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온 그를 보면 류사라는 인물의 절개와 지조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비록 현실정치에서는 꽃을 피우지는 못했으나 그의 학문적 열의와 절조는 이 땅에 뿌리내려 후세의 버팀목이 되고 있다.
    2018-12-02 | NO.125
  • 유인곡부공씨열행비
    광주시 광산구 장안길 85-27 (안청동)1885년이 유인곡부공씨열행비孺人曲阜孔氏烈行碑)는 광산구 안청동 본안부락 앞에 있다. 효열부 곡부공씨의 효열의 뜻을 기리고자 철종 6년 나주목사 송기로宋騎老가 건립하였다. 정식명칭은 학생장흥고광우처열곡부공씨지려學生長興高光禹妻烈曲阜孔氏之閭이다. 고광우의 처인 곡부공씨는 결혼하여 3년도 못되어 친정에서 3년간 생활 중 남편과 사별하여 동녀童女로 과부가 되었다. 공씨부인은 남편의 뒤를 따르는 것이 여인의 도리라고 생각하여 저승에서나마 부부의 정을 나누고자 스스로 목을 메어 자결하였다 한다. 목조와가였던 정려는 사라지고 새롭게 세운 비석이 자리하고 있다.원래의 곡부공씨 정려는 마을 안으로 통하는 길 입구에 세워져 있었으나 관리상태가 양호하지 못했다. 건물은 콘크리트 바닥에 덤벙 주초를 놓고 원주기둥을 세워 정면 3칸 측면 1칸의 한식기와 맛배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현재는 마을 안길로 통과하게 되어 있었다. 내부에 기문은 없고 한옥처럼 대들보와 종보를 올려 판대공으로 가구 종도를 올린 3량집으로 되어 있으며 방풍막이 좌우에 설치되어 있다. 곡부공씨는 공자를 시조로 그의 54세손인 소紹가 노국공주를 따라 고려에 들어와 문하시랑평장사가 되어 우리나라 공씨의 중시조가 되었다. 2019.1.8. 수정
    2018-11-11 | NO.124
  • 유인금성오씨순절비
    광주시 광산구孺人錦城吳氏殉節碑
    2018-12-02 | NO.123
  • 유인금성오씨열행비
    광주시 북구 금곡동 890(이치마을 내)1991년이 유인금성오씨열행비(孺人錦城吳氏烈行碑)는 李栢淳 짓고 쓰다.
    2018-11-13 | NO.122
  • 유인반남박씨실행비
    광주시 북구 일곡동 산 69-1(숭일고 입구)1970년이 유인반남박씨실행비(孺人潘南朴氏實行碑)는 盧文永 짓다.    
    2018-11-13 | NO.121
  • 유인정씨효열비
    광주시 북구 생룡동 136-1 (생룡마을 입구)1951년이 유인정씨효열비(孺人鄭氏孝烈碑)는 범희덕范熙德 짓고 김진현金珍鉉 쓰다. 생룡마을의 범씨 문중 松林 범만식 선생에게 19세에 시집 와서 26세의 젊은 나이에 남편을 여의고 시부모님을 극진히 봉양하며 어린 두 아들을 키우고 한평생을 수절한 연일정씨 효열비이다.  연일정씨는 19세에 범만식선생과 결혼하여 2남(희일,희주)1녀를 두었으며 26세에 남편을 병으로 떠나 보내게 되었다. 친정아버지는 정하용으로  포은 정몽주 선생의 후손이다. 송림 범만식(1873-1902)선생은 문인으로서 지조와 행실이 고결했던 심재 범재준(1822~1857)의 손자이며  향촌의 정신적 지주로서 만년에 서헌정사를 지어 강론에 힘을 썼던 서헌 범윤기(1850~1923)의 아들이다. 조부이신 범재준은 포은 정몽주의 제자이기도 하다. 범만식 선생은 전라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운 후 계속 항일운동을 전개한 호남의 의병장 송사 기우만(1846~1916)의 문인으로 문학과 행의가 있었고 언행이 근신하여 향리들이 그를 존경하였다. 범만식 선생이 병이 들어 아프게 되자 연일정씨 부인이 남편을 따라 죽겠다고 했으나 남편의 유언이 시부모님을 누가 봉양 할 것이며 두 아들은 누가 키울 것인가? 당신이 부모님과 자식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해서 행실이 바르고 성품이 온화한 정씨 부인은 남편을 따라 죽지 못하고 26세의 젊은 나이에 시부모님을 극진히 봉양하고 어린 자식들을 잘 키우며 한 평생 수절하면서 글을 안 읽으면 안되고 성인의 가르침을 받들어 잘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한다. 마을 사람들과도 화합을 잘하여 귀감이 되는 삶을 사셨음으로 후손인 손자 대규를 비롯한 유림에서 지금으로부터 67년전 마을 입구에 그 뜻을 널리 칭송 하고자 ‘유인정씨 효열비’를 세워 추앙하였다. 그 후 정씨 부인을 일컬어 “삼강 중에 두 가지를 갖추었으니 하나의 몸으로 두 가지 절개를 지켰다. 오호라! 그 행실과 행적이 이에 다 후의 사표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2018-11-13 | NO.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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