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려/묘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총 286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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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상의-충민공 전상의 신도비
- 광주시 북구 무등로 1050 충민사 內(화암동)1972년전상의신도비(全尙毅神道碑)는 충민사에 있다. 구성부사 증자헌대부 병조판서 시충민 전공 신도비(龜城府使 贈資憲大夫 兵曹判書 諡忠愍 全公 神道碑)라 한다. 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1627(정묘)년에 건노(建虜, 후금국)가 반적(反賊) 강홍립(姜弘立)을 앞세워 쳐들어올 때 구성부사 겸 좌영장인 전공 휘 상의가 전사하였다. 처음에 공이 평안병사 남이홍과 안주목사 김준과 같이 안주에 진치고 있다가 남 김 양공(兩公)은 중영(中營)을 지키고 공은 백상루(百祥樓) 아래 진을 치고 있었다. 적병이 점점 가까이 올 때 공이 군중에 명령하기를 적의 세력이 저렇게 강성하고 우리는 밖에서 개미새끼만한 구원병도 오지 않으니 강약이 분명하고 수효의 많고 적음이 대등하지 않으니 전쟁을 이길 방법은 오직 군기를 구비하고 있어야 한다. 지금 군기가 부족하니 함부로 남용하지 말라 당부하였다. 갑자기 적진에서 철갑을 입은 기병들이 달려오니 공이 군사를 정리하여 기다리고 있는데 발사명령을 하기도 전에 먼저 총을 쏜 자가 있어 곧 베어 죽이니 일군이 놀라 숙연하였다.이에 병기를 감추고 일부러 약세를 보이니 적군이 더욱 교만하여 바로 성 아래로 갑자기 뛰어 들어왔다. 공이 선봉에 발포 명령을 내려 전군이 일시에 계속 발포하니 포성이 천지를 진동하였다. 노병(虜兵)이 크게 무너져 죽은 시체가 산 같이 쌓이니 싸움에 이긴 여세를 타서 적병을 평야에서 크게 쓸어버렸다. 모든 군사가 재빨리 앞을 다투어 추격하고자 하니 공이 말려 말하기를 “병사가 교만하면 패하는 것이니 적의 정세를 파악하기 어려움에 함부로 진격하지 말고 성벽을 견고히 지켜서 그때그때 형편에 맞추어 알맞게 처리하는 것이 병법가의 계책이다” 하고 대오를 정비하고 망동치 못하게 엄중히 경계하고 사방에서 모여든 자 그 수효를 알 수 없었다. 우리 병사는 미약하고 식량과 군기도 다되어 가니, 공이 눈물을 흘리며 군졸과 더불어 여기서 순국할 것을 맹세했다. 이때 남공이 노병(虜兵)에게 강화를 요청하여 잠시라도 그 세력을 완화시키고자 하였다. 전공은 분연 대노하여 대의로써 남공을 꾸짖고 칼을 들어 죽이려고 하다가 남공의 뜻이 실지로 강화하려는 것이 아닌 줄을 알고 멈추었다.연일 싸움을 격려하며 충의로 장사들을 권장하여 모두 죽기로 맹세하고 발길을 돌리지 않고 싸우고 있는데, 남공이 불을 질러 스스로 타 죽자고 하니, 공이 말려 말하기를 “만일 먼저 방화를 하면 우리 남은 군사가 다 죽을 것이며 군기도 다 없어질 것이니 우리에게 좋을 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적의 세력만 더 높게 할 뿐이다. 잔병을 수습하여 적 한 사람이라도 더 잡아 죽인 것이 먼저 죽는 것보다 나은 일이 아닌가? 싸우다가 군사와 화살이 다 떨어진 뒤에 조용히 나가 죽어도 늦지 않다” 하였다.남이흥과 김준 부자가 마침내 불에 타 죽고, 군졸과 병기가 모두 타 없어지고 말았다. 전공이 남은 병기를 수습하여 누중(樓中)에 두고 장사들을 불러 놓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병기와 식량이 다 떨어지고 후원군은 오지 않고 중영이 이미 함락되었으니 천명을 어찌 할 것인가? 너희 장사들이 있어 보았자 어찌할 수 없다. 너희들은 속히 생명을 도모하여 지체 말고 나가거라. 관교 배상증과 백유정이 머뭇거리며 차마 공만 남겨 두고 갈 수 없어 배회하고 가지 않으니, 공이 크게 꾸짖어서 내보냈다.홀로 백상루 위에 서서 활을 들어 적을 쏘면서 일현(一弦)에 화살 3개를 매겨 적을 향하여 쏘아 대니 화살이 맞지 않음이 없었다. 적의 화살이 비 오듯 하는 가운데 화살이 공의 좌측 정강이에 맞아 화살을 뽑아내니 살대만 빠지고 촉은 살 속에 박혀서 나오지 아니하자 차고 있던 칼을 빼어 납시공생(納矢貢生)을 주며 살을 헤치고 촉을 빼라 명하고 조금도 돌아보지 않고 연속 활을 쏘아댔다. 그러나 날은 저물고 화살은 없어지고 힘이 다하여 공이 서울을 향해 네 번 절하고 칼을 뽑아 자문(自刎)하여 백상루 아래로 떨어져 죽으니 그날이 정월 이십일일이다. 노병들도 놀래어 서로 말하기를 충신열사의 시체를 군중의 시신 속에 섞여 둘 수 없다 하고 루 앞에 매장하고 표를 세워 두고 갔다. 뒤에 광주 무등산에 예장하니 유좌이다.이 일을 조정에서 듣고 자헌대부병조판서의 증직을 하고 예관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주고 숙종 갑자(1684)년에 정려를 명하고 그 이름을 충신지문이라 하였다. 그리고 안주 충민사에 배향하고 광주 경열사에 추향하였으니 조정의 포상과 사림의 은덕을 보답함이 또한 지대하였다.공은 천안인이니 백제 십제 공신 환성부원군 휘 섭(聶)이 그 시조이고, 본조에서 광주목사가 휘 구생(俱生)이 그 육대조이다. 증조의 휘는 완(琬)이고 조고(祖考)의 휘는 개(漑)이니 참봉을 지내었고 고(考)의 휘는 용(蓉)이니 증 승지이다. 공은 만력 을해(1575)년에 출생하여 계묘(1603)년에 중식년 무과에 급제하였다. 배(配)는 증정부인 풍천임씨이니 묘는 합장하였다. 아들이 셋인데 백원(伯元), 중원(仲元), 계원(季元)이고 손자는 유긍(有恆)과 유성(有成), 유장(有章)이다.공이 훈련되지 아니한 군사를 거느리고 범과 이리와 같은 십만 적병을 대하고 보니 형세가 난처하여 어찌할 수 없었다. 아무리 해도 목숨을 건질 수 없음을 알고 살기를 돌아보지 아니한 그의 기특함을 알 수 있다. 계책과 사려가 공허하지 아니함이 없어 결국 몸을 희생하고 말았으니, 옛 현인들의 말이 대담하게 죽기는 쉬워도 조용하게 의를 취해서 죽기는 어렵다고 하였다. 공은 이 두 기지를 겸하였으니, 이른바 죽기가 어려운 일이 아니라 죽는 방법을 얻기가 어려운 일이다. 진실로 순절한 것이 그 의의(宜義)에 합당함을 안다면 어찌 그 죽음을 아끼리오! 몸을 버림이 만일 그 장소를 얻었다면 열사가 그 존재를 아끼지 않을 것이다.아! 아름다운 일이다. 공은 일찍이 시와 예를 통하고 학문을 연구하여 유고도 있어서 후세에 전할 만한 것이 많다. 무식한 영웅이 없다더니 거짓말이 아니다. 공의 후손인 광태(光兌) 광표(光表) 광로(光魯) 응팔(應八)이 나에게 비문을 청하기로 내가 일찍부터 공의 사절의 의의를 알고 있고 또 제 손들의 성의에 감격하여 병으로 사양을 못하고 이에 명하노라.슬프다 전공은 남국의 기강이라.시를 잘하고 예법도 잘 설명하여옛날 극곡(郤縠)과 같도다.심산에서 병서를 공부하고궁술에 뜻을 두어서무술로 몸을 닦아 신분을 발휘하여훌륭한 사람이 되었도다.건노가 약속을 위반하고우리 서쪽 변방을 침범하여긴 행렬로 달려드니그 형세가 심히 웅장하다.공이 구성에 병부를 갖고좌영장이 되었더니병기와 식량이 떨어져서어떻게 할 계책이 없으나공은 그 용맹을 다하여계략을 뛰어나게 발휘하여순국할 것을 맹서하고극력 대항할 것을 말하고뚜렷하게 계획을 세워갑옷에 신체를 싸고 죽었다.아름다운 옥은 부서지지 않고굳은 정조가 훼손될 수 없다.곰을 취하고 물고기를 버리는 것은천성으로부터 나온 것이다.하늘과 땅 사이에나의 큰 경륜을 세웠으니응당 정령(精靈)이 있어바람과 번개가 되어재앙을 쓸어버리고일월이 다 밝아졌다.임금의 포창이 더 하여높은 벼슬을 명하고위로의 조사도 있었으니삼충을 충민사에 병향하고경열사에도 추향하였다.여러 사림들이 상의하여제찬(祭餐)도 만족하고제미(祭米)도 풍부하니천세 만세까지무궁한 보은이로다.무등산 묘소에큰 비를 세우고내 명을 깊이 새겨두니길이길이 보전하소서.숭정기원후 4신해(1851) 대사헌 당성 홍직필 짓고 전면 큰 글자는 능성 구철우가 쓰고, 신천 강인환이 쓰다. 단군 서기 4305년(1972) 임자 음력 5월 하순 세우다. 天啓丁卯建虜引反賊姜弘立八寇時龜城府使兼左營將全公諱尙毅死之始公與平安兵使南以興安州牧使金浚同陣于安州南金兩公守中營公留陣百祥樓下賊兵漸邇公下令軍中曰賊勢甚盛而外絶蟻子之援强弱相懸衆寡不敵制勝之具專在軍械而以告乏愼不虚發俄而賊以鐡騎長驅公方整軍以待有不待令而先放銃丸者立斬之一軍警肅乃戢兵以示弱賊勢益驕馳突直扺城下公於是令先鋒一時放砲軍中鱗次繼放砲聲振天虜兵大壤僵尸山積遂乘勝大破之賊兵披靡平壤諸軍皆欲乘鋭遂之公止之曰兵驕則敗賊情難測不可輕進堅壁自守隨時應變是兵家之筭也嚴整行伍戒厥妄動翌日曉望賊兵籠郊絡野自四方流八者又不可勝數我兵單弱饗械俱罄公雪涕誓衆矢心立慬於是南公與虜講和盖欲少緩其鋒以有待也公奮然大怒責南公以大義欲拔劒斬之尋知南公之意不在於和乃止連日督戰忠義自勵將士皆以死自誓戰不旋踵南公欲放火自焚公止之曰若先放火則我軍餘者皆死而軍械消盡無益徒增賊勢未若收捨殘兵獲一醎猶勝於先斃必待兵矢俱盡然後從容就死未晩也南公及金公父子卒死於火軍卒及兵械己灰燼矣公收餘械樓中召將士抆淚而言曰兵食俱竭後援不至而中營己陷天實爲之奈爾將士何爾等速出圖生母用踟蹰官校裴尙增白惟精不忍捨公遲回不去公大叱放出獨挺立樓上張弓射賊一絃三矢發無不中賊矢如雨中其左股拔箭而鏃留在肥拔佩刀給納矢貢生剖肥出鏃連射之日己脯矢竆力盡公望京師四拜遂拔劒自刎墜于樓下而正月十七日也虜動色相語曰忠臣烈士之體不可雜於衆尸之中瘞樓前立表而去返葬于光州無等山酉坐事聞贈資憲大夫兵曹判書遺禮官致侑肅宗甲子命旌其閭曰忠臣之門配享于安州之愍忠祠追享光州景烈祠朝家之褒賞士林之崇報亦至矣公天安人十濟功臣歡城府院君諱聶其初祖也八本朝有諱俱生光州牧使寔公六代祖也曾祖諱琬祖諱漑叅奉考諱蓉贈承旨公生于萬曆乙亥癸卯中式年武科配贈貞夫人豊川任氏墓附有三子伯元仲元季元孫有恆有成公提不敎之卒當虎狼十萬之衆形格勢禁事無奈何而出萬死不顧一生斯已奇矣而出謀發慮罔不中窾竟以身殉曩哲云慷慨殺身易從容取義難公具此兩者是所云非死之難處死之難者也是知殞節苟合其宜義夫豈吝其殉捐軀若得其所烈士不愛其存於呼懿哉公早服詩禮力治文辭有零稿可傳世無不識字英雄云者詎不信哉公後孫光兌光表光魯應八請不佞以牲石之文不佞夙服公死綏之義又感諸孫苦誠靡敢以癃病辭遂爲之銘曰嗟嗟全公南國之紀敦詩說禮郤縠是似竆山讀兵厲志孤矢發身韎韋是爲君子建虜敗盟寇我西陲長蛇封豕其勢騤騤公握龜符爲左營帥兵食俱殲無計可施公奮其勇發謀出奇矢心殉國克抗厥辭定計於鮮衽革裹尸圭璧不碎堅貞靡虧熊魚取舎出自秉彝天地中間立我大經應有精靈化爲風霆掃盪腥氛日月雙明褒寵有嘉命秩斯隆有侐愍詞並祀三忠追侑烈廟詢謀僉同牲牢伊碩黍稷維豊有來永世崇報無窮有山無等石戴螭首我銘深鐫用垂不朽崇禎紀元後四辛亥大司憲 唐城 洪直弼 撰前面大字綾城 具哲祐 書信川 康仁煥 謹書檀君紀元四千三百五年壬子端陽月下浣 竪 충민사는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청(淸)나라 침략군을 맞아 안주성(安州城) 싸움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장렬히 순국한 구성도호부사(龜城都護府使) 전상의(全尙毅) 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장군은 조선(朝鮮) 선조(宣祖) 8년(1575)에 지금의 광주광역시(光州廣域市) 서구(西區) 구동(龜洞)에서 전용(全蓉)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용력과 무술이 남달리 뛰어나 선조 36년(1603) 29세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첫 벼슬로 내외 관직을 역임하였다. 광해군(光海君) 9년(1617) 오윤겸(吳允謙)과 함께 회답사(回答使)로 일본(日本)에 건너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끌려간 동포 150여 명을 귀국시키는 데 공을 세우고, 내금위(內禁衛) 예차(豫差) 및 어모장군(御侮將軍)을 봉직하였다. 인조(仁祖) 3년(1625) 구성도호부사(龜城都護府使) 겸 좌영장(左營將)이 되어 흐트러진 관위를 정비하고 변방방어에 극력 대비하였다. 인조 5년(1627) 1월 청의 3만 대군이 쳐들어와 의주(義州)를 점령하고 물밀듯이 남으로 안주(安州), 평양(平壤)을 거쳐 황주(黃州)에 이르렀다. 이때 장군은 안주성(安州城) 싸움 중 남영(南營)인 백상루(百祥樓)에서 5일간 분전하다가 53세를 일기로 장렬히 순절(殉節)하니 적장(敵將)들도 충신(忠臣)의 죽음을 애통해하였다 한다. 난이 끝난 후 2월 7일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 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추증(追贈)되고, 이어서 안주로부터 그의 출생지인 광주로 시신(屍身)을 옮기어 동년(同年) 7월 26일 이곳에서 서쪽으로 보이는 평두산(平頭山)에 예장(禮葬)하였다. 숙종(肅宗) 8년(1682) 장군의 충절(忠節)을 기리기 위하여 전몰지(戰歿地)인 안주의 충민사(忠愍祠)에 받들게 하고, 동(同) 10년(1684)에는 충신정려(忠臣旌閭)를 명하였다. 헌종(憲宗) 15년(1849) 광주의 경렬사(景烈祠)와 제주(濟州)의 귤림서원(橘林書院)에도 배향(配享)되었었으나 고종(高宗) 5년(1868)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에 의하여 헐리게 되었다. 본 사당(祠堂) 건물은 유적정화사업으로 1982년 6월 28일에 착공하여 1985년에 완공하였다.
- 2018-06-11 | NO.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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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상의장군정려각
- 광주 북구 무등로 1050(화암동) 충민사1684년이 전상의장군정려각(全尙毅將軍旌閭閣)은 충민사 경내에 위치해 있다. 전상의 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864년 9월 2일 명정되어 그해 광주시 동구 지원동 회산마을 앞에 세웠다. 1982년 충민사가 새로 건립되면서 이곳으로 정려각을 이건하였다. 정려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한식기와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겹처마로 되어 있다. 내부에는 증 충신자헌대부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행 통훈대부구성도호부사 전상의 지려 숭정 후 갑자 11월(贈 忠臣資憲大夫兵曹判書 兼 知義禁府事 行 通訓大夫龜城都護府使 全尙毅 之閭 崇禎 後 甲子 11月)의 복원된 정려편액이 걸려 있다.
- 2018-11-12 | NO.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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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중판사사 건천 정광신도비
- 광주시 남구 진월동1916년전중판사사(殿中判寺事) 건천(巾川) 정광(程廣) 신도비(神道碑)주(州)의 서쪽 5리의 거리인 금당산(金堂山)에 있는 비석으로 이천(伊川)의 사손(祀孫) 오경박사(五經博士) 광인(廣仁)의 전서(篆書) 및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명사(銘詞)가 있다.<명 문(銘文)>한산정씨(韓山程氏) 선조이신 이천(伊川)선생* 그분께서이기철학(理氣哲學)의 깊은 듯을 이 세상에 권했도다우리 후학(後學) 깨우치는 그의 뜻이 간절하여천억만억(千億萬億) 여러 사람 많은 교훈 얻었도다그 당시의 여러 후손(後孫) 동쪽으로 내려와서그지없는 번창(繁昌)으로 이 나라를 빛냈도다이 가운데 한사람인 건천(巾川)이란 이 어른이그의 조덕(祖德) 이어받아 많은 행적(行蹟) 남겼도다숭불(崇佛)하는 그 당시에 삼년독상(三年獨喪) 지키면서척불(斥佛)하는 그 신념을 가훈(家訓)으로 남겼도다포은(圃隱) 야은(冶隱) 두 동지와 서로 뜻을 모아임금 앞에 나아가서 많은 간언(諫言) 올렸도다.어지러운 나랏일(國事)을 그지없이 걱정하여ユ도 모르는 사이에 많은 눈물 흘렸도다.모든 일을 단념하고 전원(田園)으로 돌아가니고려(高麗)라는 이 나라가 뒤를 따라 망했도다망복(罔僕)** 하는 그의 뜻을 시를 지어 읊으면서여러 자손 불러모아 엄한 훈계(訓戒) 내렸도다죽지 않은 그 자체(自體)를 부끄럽게 여기면서사립문(柴扉)을 굳게 닫아 그의 몸을 숨겼도다바른 언사(言辭) 옳은 의리 어김없이 지키면서위아래의 순서 따라 모든 정(情)을 다했도다이와 같은 높은 행의(行義) 어느 누가 따를손가이 세상의 바른 윤리(倫理) 일으키어 세웠도다조그마한 언덕 위에 가는 샛길(間路) 이어지니사척(四尺) 높이 그의 무덤 어렴풋이 보였도다아름다운 그의 유덕(遺德) 그지없이 추모하매나도 모른 그 사이에 나의 몸을 굽혔도다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지음*이기(理氣)의 철학을 제창하여 유교의 도덕적 기초를 다진 중국 북송(北宋) 때 유학자 정이(程顧)의 호(號).**고려의 신하로써 절개를 지키어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의미1916년에 건립된 정광(程廣) 신도비는 진월동 마 국도1호선 LG서비스센터 옆에 위치한다. 하남정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는데 풍우에 의한 마모가 심한 편이다.617년 전에 이곳에 터를 잡은 하남(河南) 정씨(程氏)의 시조, 정사조(程思祖)의 2세인 정광(程廣)이 은거했고, 묻힌 땅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정사조는 원나라 사람으로 1351년 12월에 고려 공민왕의 왕비인 노국공주를 모시고 개경에 들어온 인물이다. 그는 노국공주를 보필하면서 어사대부(御使大夫, 관리의 감찰 업무를 맡는 관청의 정삼품 벼슬)를 지냈고, 훗날 공신으로 책봉되어 정일품인 삼한삼중대광(三韓三重大匡)으로 추증되었다. 정사조를 따라온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아들 정도(程度)는 오부부사(五部副使)를 지냈지만 후손이 없어 대가 끊겼고, 둘째 아들 정광은 아버지를 따라온 직후인 135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전중성(殿中省, 왕실 살림을 관장하던 부서) 판사(判事)에 이르렀다. 고려 땅에 순조롭게 안착하는가 싶던 정씨 집안은 공민왕이 살해되고, 우왕·창왕으로 이어지는 혼란기에 다시 한번 변화를 겪었다. 정광이 벼슬을 버리고 광주에서 서남쪽으로 10리쯤 떨어진 금당산 자락(지금의 진월동)으로 숨었다. 정광은 이미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는 충실한 고려의 신하가 되어 있었다.그는 “일찍이 고려가 번성한 날 엔/ 온 세상이 고려의 신하였는데/ 어찌 고려가 쇠잔할 줄 알았으랴/ 온 세상이 고려의 신하가 아니네”라고 세상을 한탄했다. 정광이 광주까지 내려오게 된 것은 아마도 그의 아내가 광산(光山, 광주광역시 광산구) 이씨여서, 처가 동네 근처로 옮겨온 것으로 보인다. 그는 “물가에 터를 잡고 띠를 베어 산수간에 집을 짓고” 살면서, 때로 무등산 정상 서석대에 올라 송도를 그리워했다. 등서석음(登瑞石吟)이라는 시이다.瑞石靑春也自好 서석대의 푸른 봄을 좋아하네雖將松岳舊顔來 송악에 있던 나를 누가 데려왔나一回含淚一回哭 한 번 눈물에 또 한 번 통곡하네 水咽出溪鬱此懷 물과 산골짜기 우울한 회포를 삼키네백제 가요 무등산가(無等山歌)는 가사가 전해오지 않으니, 무등산을 소재로 한 시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걸로 여겨지는 작품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정광은 역성혁명에 편승하여 조선 왕조로 스며들지 않고, 외진 산간으로 스며들어 버렸을까? 더욱이 연고도 없는 자식들에게까지 훈계하는 계자시(戒子詩)를 남겨, “너 또한 고려조의 신하이거늘/ 어찌 새 임금을 섬기랴/ 만약 신하 된 도리를 안다면/ 전조의 임금 은혜를 잊지 마라”고 했다. 이 유언 때문인지 하남 정씨 집안에서는 국가적인 변란인 임진왜란 때 화순 향리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순국한 정득운(程得雲), 정득원(程得元) 형제가 공신으로 책봉될 때까지 크게 이름을 얻은 이가 없었다. 정광이 의리를 지킬 수 있었던 힘은 그의 집안 내력에서 나왔다. 하남 정씨인 정광은 본관이 중국의 하남성으로, 송나라 수도였던 낙양(洛陽, 하남의 옛 이름)에 그의 선조가 살았다. 정광의 10대조가 바로 이천부자(伊川夫子)인 정이(程)인데, 정이는 그의 형 명도부자(明道夫子) 정호(程顥)와 함께 성리학을 창시한 걸출한 인물이다. 주자가 뒤이어 정호와 정이의 학설을 집대성하면서 성리학이 완성되는데, 이들의 성(姓)을 따서 성리학을 정주학(程朱學)이라고도 부른다. 성리학, 즉 정주학은 한반도에서 고려 말부터 통치이념으로 뿌리내리게 되는데, 하남 정씨는 정주학과 더불어 한반도에 뿌리내린 집안인 셈이다. 정광은 당시 불교를 숭상하고 복(福)을 구하는 시대 풍조를 보고 “나의 가문은 이천부자와 선조(先祖)로부터 불도(佛道)를 쓰지 않거늘 내 어찌 저 무리를 존숭하고 믿겠는가”라고 비판할 정도였다. 그는 예(禮)와 윤리, 도덕을 중시하는 정주학의 근본에 충실하여 고려 충신으로 남고자 한 것이다. (여행작가 허시명의 글 중에서)안쪽에는 재실(永慕齋, 1960년 건립)과 묘소와 묘비가 있다.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이 비문을 지어 1916년(崇禎5周 병진)에 세웠다. 저서는 정광인(程廣仁), 비문 글씨는 18세손 정남진(程南鎭)과 정의진(程義鎭)이 썼다. 원문은 《송사선생문집》권24(한국문집총간 345집 587쪽)에 실려 있다.⾼麗殿中判寺事⼱川先⽣程公神道碑中州聖賢之裔。多舍中⼟⽽居褊邦。若孔孟周朱⽒是⽿。⽽河南程{⽒伊川先⽣之後。亦其⼀也。蓋箕聖東出。⼋條敎⺠。禮樂⽂物。⾮復舊時之陋。⽽夫⼦⼜欲居之。故⽅五胡亂華。避地⽽來者。不於他⽽必於此歟。抑東⽅⽂敎將興。菀然有⼩中華之稱。⽽爲吾道東來之兆眹歟。程{⽒以有宋太⼦少師⽻爲肇祖。尙書員外希振。開府儀三司遹。太中⼤夫珦。少師後三世。太中公⽣明道伊川兩夫⼦。伊川三⼦。季端彥郊社齋郞。五傳⾄翰林學⼠庇,樞密院事在⼼。六傳⽽衛尉校丞思祖。與翰林孔紹等陪魯公主東來。官殿中侍御史。卽⼱川先⽣考也。妣貢⽒。⽗錢塘太守載。公諱廣字德魯。⽣卒年⽉。世久無徵。⽣⽽純孝有氣節。養兼志軆。⽣致樂喪致哀。時麗季短喪。獨⾏三年。⽴家廟。祭盡誠敬。俗尙祈佛。獨慨然⽈。吾家⾃伊川先祖。不⽤浮屠。斥之甚嚴。恭愍朝。爲殿中判寺事。與鄭圃隱,吉冶隱。志同道合。與論國計。輒⾄流涕。嘗登滿⽉臺賦聯句。若閔{農隱,安富,直提學安省,鄭圃隱,掌令徐}甄,籠巖⾦澍,樞密李鍾學,沙川伯南⼄珍。皆⼀時淸流。遣意悽切。亦⾒交遊之盛。知國事不可爲。棄官歸⼭。散錄隱淪之蹟。題其⾸⽈。忠節⼈⾂之⼤寶。古之君⼦奉以周旋於蕩板之⽇。苟⼀失之。⾮⼈⾂道理。余亦亡國⼤夫。不勝⽲⿆之懷。摭記若干⼈。以愧後世爲⼈⾂懷⼆⼼者。⼜以詩⾒志⽈。我以⼈間無似⼈。肯作泉下有罪⾂。如將今⽇出新國。後世其柰辱及⾝。亦以戒⼦⽈。汝亦麗朝⾂。何可事新君。若知⼈⾂道。不忘前⺩恩。太祖屢徵。以書辭⽈上不負⺩⽒。下不負鄭夢周。屛居以終。墓在光州⾦塘⼭程郞洞⼦坐。夫⼈光州李⽒。掌令彥章⼥。雙封。三⼦有連判尹,有達進⼠,有通府使。判尹⼦儒。進⼠⼦任。府使⼦仁。鄭侍郞鴻慶序公遺集云孟⽒⾃國初。已爲顯族。孔⽒始著于中廟。屢登淸顯。朱⽒始著於正廟。雲漢昭回。譜牒增光。⽽夫何伊川之裔。淪落草野。深致慨惜之意。第念程{⽒克守先祖勿仕之訓。五百年鞱光鏟跡。此則程{⽒⽽已。久屈}必⼤伸。以先⽣⾼⾵偉節。兼爲⼤賢之後。闡揚必有其⽇。旣刊集矣。⼜將昭刻矣。昌⼤其⾨。將⾃今伊始矣。⼜有私慨于⼼者。遺⽂久爲⼱衍之藏。使其早⾏于世。使今⽇爲親⾂世⾂者讀之。則必有所感激于衷。⽽圖所以善後者矣。今於神道之刻。程{⽣炳鉉致其⾨⻑⽼之命⽽徵爲銘。⼤賢之裔。兼有扶植之義。不敢以⽼且病辭。銘⽈。所祖伊川。傳不傳學。啓我後⼈。彌萬彌億。遺孫東來。光華在國。矧是⾀修。克念祖德。獨喪三年。家訓斥佛。圃冶同志。出⼊禁闥。傷⼼國⾮。潸然霑臆。筮遯歸隱。麗社隨屋。以詩⾒志。戒⼦罔僕。不死爲恥。杜⾨屛跡。上下不負。辭嚴義直。萬世倫綱。賴以扶植。程{郞之阡。是公四尺。⾼⼭景⾏。疇敢不式。嶽崇五周丙辰 八月幸州 奇宇萬 撰中等河南伊川祀翰林院五經博士程廣仁篆十八世孫 南鎭 謹書번역고려 전중판시사 건천선생 정공 신도비명 [서문을 함께 씀]중주 성현의 많은 후예들이 살기 좋은 땅을 버리고 편방으로 옮겨 살고 계시는 분들은 공맹정주씨이니 하남정씨 이천선생의 후예도 또한 그 한분이시다. 그 당시 기자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팔조지교로 백성을 가르치니 예악과 문물이 구시대와는 달리 많이 향상되었으나 그때 중화에서는 오호가 난립하여 세상이 어지러울 때 명도 이천 두 부자도 살고자 함에 그 난을 피하여 편방으로 옮기게 되었다.이때 동방의 문교가 점점 흥하여 융성하여지니 소중화라는 칭이 있었음은 유교가 크게 발전할 수 있는 징조이며 정씨는 송태자 소사 우로 중시조를 삼으니 상서 원외랑 희진과 개부의삼사 휼과 태중대부 향은 소사후의 3세이다. 태중공이 명도 이천 양부자를 생하였고 이천의 자 단중은 관농 영전사요 한림학사는 비요 추밀원사는 응발이며 위위교승은 사조니 한림 공소등과 함께 노국공주를 모시고 고려에 처음으로 나와 그 벼슬이 전중시어사가 되니 건천선생의 고이며 비는 공씨이니 부는 전당태수의 재이다. 공의 휘는 광이요 자는 덕노이며 벼슬은 전중성판사이니 돌아가신 년월은 오래되어 알길 없으나 공의 천성이 순효하고 기절이 뛰어나 부모를 봉양함에 지체를 겸하였으며 상사에 있어서는 애를 극진하게 하였다. 당시 고려에서는 단상을 행하였으나 공께서는 꼭 3년을 행하시고 가묘를 세워 지성과 공경심을 다하니 당시의 풍속이 불교를 숭상함에 이를 개탄하며 이르시기를 우리 가문은 이천선조로부터 부처를 믿지 아니하였으며 배척하기를 심히 엄하게 하였다. 공민왕 4년 1355년 을미에 그 벼슬이 전중성판사가 되어 정포은 길야은과는 뜻이 같고 도가 같아 서로 국사를 논의할 때에는 어지러운 고려를 생각하며 눈물까지 흘렸다. 일찍이 만월대에 올라 연구를 읊으시는데 농은 민안부와 직제학 안성과 정포은과 장령 서견과 농암 김수와 추밀이종학과 사천백 남을진은 당시의 손꼽는 청풍류로서 그 절친한 친교의 뜻을 가히 알 수 있었으며 고려가 망하자 다함께 은거 망복하니 벼슬을 버리고 광주 금당산에 돌아와 지금까지 행적을 산록하니 그 서문에 쓰기를 충절은 신하의 대보이며 옛 군자도 모든 국정이 문란해지면 바로잡도록 주선을 하였으니 진실한 충절은 한번 잃으면 신하의도리가 아니라 하였으며 이제 망국대부로서 고려국의 회포를 이기지 못하나 후세 사람으로서 신하가 되어두 마음을 품은 자는 부끄럽게 여겨왔다. 공의 뜻을 시로써 나타내기를 ‘나라는 인간이 무사한 사람으로서 지하에 가서도 죄 있는 신하가 될 것인가 만일 이제 새 나라에 나가 벼슬을 한다면 후세에 그 욕이 내 몸에 미쳐오는 것을 어찌하리오’ 하였다. 또한 아들에게 벼슬을 하지 말라는 경계 시에서 ‘너도 또한 고려의 신하로서 어찌 새 임금을 섬길 것인가 만일 신하로서 그 도리를 안다면 전왕의 은혜를 잊지 못하리라 하였다. 황익성공이 벼슬을 버리고 산으로 들어갈 때 고시를 써서 중하기를 그대는 청운을 타고 가는데 나는 청산을 바라보며 돌아가도다. 구름과 산이 이를 좇아 이별하니 눈물이 옷깃을 적시도다‘라 하였고 이태조께서 벼슬길에 나오라고 여러번 부르니 글로써 나타내기를 위로는 고려 왕씨를 저버릴 수 없고 아래로는 정몽주를 저버릴 수 없으니 죽지 못함이 부끄러울 뿐이라 거절하였다.그 뒤 영영 은거하여 조용한 일생을 마치니 묘는 광주 금당산 정랑동 자좌에 있으며 부인은 광산이씨이니 장령 언장의 딸이며 묘는 쌍봉하였다. 세 아들 가운데 유련은 판윤이요 유달은 진사요 유통은 부사이다. 판윤의 자 유는 진사요 임도 진사이며 인은 부사이다. 가만히 돌아 보건데 정시랑 홍경이 유업을 서술한 글에서 말하기를 맹씨는 조선 국초로부터 이미 관직에 나가 벼슬을 하였고 공씨는 비로소 중종 때에 와서 학식과 문벌이 높아 규장각 홍문관 선원관의 벼슬에 올랐으며 주씨는 비로소 정조 때에 이르러 운막이 나타나 빛을 보게 되어 보첩이 증광되었는데 어찌하여 이천의 후손은 고려가 망하자 초야에 묻혀 벼슬을 아니 하셨는지! 후손들은 이를 깊이 개탄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그 당시 정씨는 선조의 말씀대로 벼슬을 하지 말라는 훈계를 굳게 지켜 조선 오백년에 그 훌륭한 공적이 나타나지 않고 감추어져 흔적이 없어졌으니 이는 오직 정씨 뿐이며 고려에 대한 충절을 버리고 이조에 나가 벼슬을 했었다면 정씨가문은 대성하였을 것이다.선생의 고풍위절이 겸지하여 대현의 후예가 틀림없으며 이 뒷날 그 훌륭한 공적과 행적이 크게 나타나 반드시 밝게 빛나는 그날이 꼭 있을 것이다. 오래 전부터 선조들의 문집을 간행하여 이를 세상에 널리 알렸으면 정씨 가문이 더욱 밝게 대창 하였으련만 은거생활로 초야에 묻혀 그 빛을 잃게 되었으니 오직 마음에 개탄할 일이나 건천선생께서 남긴 유문이라도 오래도록 소중히 간직하게 되었으니 이를 세상에 널리 간행하여 친신 또는 세록신들이 그 문집을 읽고 정씨 가문을 알게 되었더라면 과연 충절은 신하의 대보로서 진실로 그 충절을 한 번 잃으면 신하의 도리가 아니라고 느끼게 되었을 것이며 ‘긍작유죄신 기나욕급신’과 그 ‘여역여조신 하가사신군’과 그 ‘상불부왕씨 하부정모씨’라 말씀하신 것을 보면 충절의 근본이 무엇인가를 후예들에게 꼭 전하고자 함이다. 이제 공의 모든 사실을 신도비에 낱낱이 새겨 후인으로 하여금 이를 보고 느끼도록 함이니 이미 비석이 갖추어져 정생 병현이 그 문중 어른의 명을 받아 비에 새기도록 대현의 후예가 이를 부탁하니 감히 늙었으나 이를 사양하지 못하노라.이천선생은 전치 못한 성리학을 후세에 전하여 어두웠던 당시의 후인들을 밝은 세상으로 인도하여 깨우쳐 주었으니 그 뒷날 그 광화가 우리나라에 까지 미쳐왔으며 선조들의 뜻을 받들어 큰 덕을 쌓아 삼년상을 홀로 행하고 가훈으로 불교를 배척하니 정포은과 길야은은 동지로서 금지된 대궐에 출입하고 국란과 국정의 어지러움에 상심하니 감추려했던 눈물이 문득 가슴에 적시도다.처음부터 은거생활로 돌아와 송도개경을 바라보며 시로써 모든 뜻을 나타내어 아들에게 벼슬을 하지 말라는 경계를 하였으나 죽지 못함이 부끄러울 뿐이며 두문불출 은거로서 자취를 감추어 버리니 위로는 충절을 저버릴 수 없고 아래로는 친교의 도의를 저버릴 수 없었으나 오직 만세의 윤상이 깊이 뿌리내려 영원히 빛나리라. 금당산 정랑동에서 공이 평생을 조용히 마치시니 고산같이 우러러보며 스스로 고개가숙여지도다.1916년 병진 8월 기우만이 짓고 중등 하남 이천사 한림원 오경박사 정광인이 전서를 쓰고 십팔세 손 남진과 의진이 글씨를 쓰다.
- 2018-06-13 | NO.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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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부광산김씨실행지비
- 광주시 북구 용두동 1044-1(거상마을 내)1900년 전후이 절부광산김씨실행지비(節婦光山金氏實行之碑)는 젊어서 남편과 사별한 후 유복자를 낳아서 어렵게 살았으나 타인의 모범이 되어 세웠다. 후석 오준선(後石 吳駿善;1851~1931)이 쓰다.
- 2018-11-13 | NO.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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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경구-남곡거사정공효행실적비
- 광주시 서구 벽진동 마산마을 입구 1954년이 남곡거사정공효행실적비(南谷居士鄭公孝行實蹟碑)는 서창입구에서 서창동주민센터 방향으로 가는 도로 왼편에 있다. 계사년에 충주 박승주가 글을 지어 세웠다. 이름은 경구(庚九)이다. 철종(재위 1849~1863) 을묘(1855)~ 병진(1856) 연간에 나이 4~5세에 연달아 상을 당하였으나 극진히 상을 치렀다는 내용으로 보인다.2019.1.8. 수정
- 2018-10-26 | NO.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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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경렬공유허비
- 광주시 동구 동명로14번길 19-4 옛 경렬사 터(동명동)이 정경렬공유허비(鄭景烈公遺墟碑)는 광주 두방면(斗坊面)의 고비명(古碑名)이다. 원촌리(院村里)에 있다. 현 동구 동명동이다. (조선지지자료)
- 2018-07-03 | NO.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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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구신도비
- 광주시 북구 탑골길 35(장등동) 사성재(思誠齋)이 정구신도비(鄭球神道碑)는 장등동 장등마을에 있다. 기우만이 찬했다.
- 2018-12-01 | NO.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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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엄-효자광주정공엄정려
- 남구 서서평길 26-4(양림동 157-1), 양림오거리에서 사직공원으로 가는 샛길광산정씨문중 정엄鄭淹의 정려로 1611년 건립되었으나 오랜 기간 닳아져 1975년에 재건했다. '양림동 개비'로 알려진 충견 석상도 함께 있어 더욱 의미가 깊다. 국가에서 1611년 정엄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정려이다. 이수는 종 모양에 변형운문을 조식하였다. 정려각 내에는 견석상이 1구 있다.효자 정엄은 명종 무오년(1558)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부승지 등을 지냈다. 평소 효성이 지극하여 모친 섬기기에 효성을 다하였고 모친이 병상에 눕게 되자 옷을 벗지 않고 모친을 돌보았으며, 상을 당하여서는 장례절차를 성대히 하였으나 모친의 죽음에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얼마 되지 않아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정엄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국가에서 정려를 세웠으나 세월이 흘러 정려각이 퇴락하여 1975년에 석조로 재건하였다.비신에는 「贈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兼弘文館提學 藝文官提學同知 經筵春秋館義禁府事五衛都摠管 世子左副賓行通政大夫承政院同副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知製 敎楊村鄭先生 旌閭碑」라고 쓰여 있다.
- 2018-06-13 | NO.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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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지-경렬공 정지장군 사적비
- 광주시 북구 경렬사길 46(망월동) 경열사1980년광주시 북구 경렬사길 46(망월동) 경열사1980년이 경렬공정지장군사적비(景烈公鄭地將軍事蹟碑)는 경열사에 있다. 이은상이 짓고 김충현이 글씨를 썼다. 민족의 전통이란 결코 하루아침에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요 오랜 역사를 거쳐서 되는 것이니 우리 해군 전통도 역시 그러하다.이미 삼국시대부터 高句麗와 百濟의 해군이 모두 다 강성했거니와 新羅에 있어서는 儒禮王 6年(289)부터 戰船을 건조했으며 眞平王 5年(583)에는 船府署를 두어 해군과 戰船을 관장했고 말엽에는 張保皐가 강대한 해군을 거느리고 동양 삼국을 제패했으며 高麗의 王建 太祖와 後百濟의 甄萱도 실상은 다 해군 지휘자들이었다.그랬던 것이 李氏王朝 시대로 들어온 뒤에 차츰 文弱에 기울어져서 壬辰亂 같은 큰 국난을 당했지마는 위대한 영웅 李忠武公이 일어나 해전 사상 역사적인 대승첩을 거두어 나라를 건져낼 수 있었거니와 그도 실상 오랜 해군 전통을 계승한 데서 큰 힘을 얻었던 것이다.그러면 李忠武公에게 이어진 우리의 해군 전통은 과연 무엇이었으며 그 전통의 산맥 속에 가장 우뚝 솟은 봉우리는 또한 누구였던가. 高麗 말엽 해군의 영도자 바다의 영웅 鄭地 장군이 바로 그이시다. 恭愍王 때 中原 대륙에서 元나라와 明나라의 세력이 서로 바뀔 무렵 그 틈을 타고 일어난 紅巾賊들이 大軍을 이끌고 침구해 들어왔고 또 元의 후예 納哈出과 女眞의 三善三介가 침구해 오기도 했으며 高麗의 王室이 부패해짐에 따라 恭愍王이 시해됨에까지 이르렀었다. 그러는 한편 무엇보다 가장 큰 나라의 걱정은 倭寇였던 것이니 倭寇란 日本 연해안 流浪民으로 對馬 壹岐를 근거로 한 해적들인데 우리는 식량과 물품으로 회유도 하고 또 武力으로 응징도 했으나 高宗 이후로 倭寇들의 무수한 침구와 약탈이 끊일 사이가 없더니 鄭地 장군이 그들을 섬멸함으로써 해군의 전통을 확립시켰던 것이다.鄭地 장군은 본관이 河東이요、高麗 忠穆王 3年(1347) 丁亥에 錦城山 榮山江의 정기를 타고 羅州에서 났으니 첫 이름은 准提요. 어려서부터 모습이 장대하고 史書들을 즐겨 읽어 大義를 통했으며 19세에 司馬 장원 20세에 文科 급제 28세에 中郞將이 되었다.恭愍王 마지막 23년 장군은 28세로 왕을 모신 速古赤로서 倭寇 평정 책을 올려 全羅道 按撫使가 되고 다시 이어 상소를 올리되 섬에서 생장한 자들과 水戰을 자원하는 자들로서 해군을 편성하여 五년만 훈련시키면 연해안을 맡기겠다 하였으나 실시되지는 못했었다.다음 해 禑王 元년에 倭寇 두목 藤經光을 죽이려다 실패한 뒤부터 倭寇들은 더 난폭해져서 禑王 3年 장군 31세 되던 해 여름 順天 樂安을 침구하므로 장군은 禮儀判書로서 順天道 兵馬使가 되어 그들을 무찌르고 겨울에도 목 베고 사로잡아 큰 전과를 거두었으며 이듬해에 倭寇들이 靈光 光州 등지를 침략하므로 그 뒤를 쫓았더니 적들이 玉果縣 彌羅寺로 들어가므로 불을 질러 모두 타죽게 했다. 36세 때 海都元帥가 되어 鎭浦로 들어온 적들을 소탕한 뒤에 戰船들을 새로 건조하여 왕으로부터 金帶와 白金 五十兩을 받았고 때마침 유행병으로 죽은 군사들을 모두 알뜰히 장사지내 주었으며 장군도 병에 걸리자 왕은 특별히 散騎 河忠國을 보내어 위로했다.禑王 9년 37세 때 적선 120여척이 慶尙道로 들어오자 合浦 元帥 柳曼殊가 급히 알리므로 장군은 戰船 47척을 이끌고 급히 蟾津에 이르렀더니 적들이 南海 觀音浦로 들어가 엿보는지라. 그러나 日氣不順으로 風雨가 尤甚하매 將軍은 곧 사람을 智異山神祠에 보내 기도를 올리자 바람 자고 비도 멎어 장군의 전투사상 최대의 격전 끝에 가장 통쾌한 대승첩을 거두고 海道都元帥 楊廣全羅慶尙江陵道 都指揮處置使로서 諸道에 戰船들을 건조하여 海寇를 남김없이 쓸어버리고 우리 해군의 위용을 자랑했던 것이다. 禑王 14년 42세 때 李成桂의 遼東 정벌에 같이 종군했다가 중도에서 回軍하자 倭寇들은 그 틈을 타서 南原까지 쳐들어오므로 장군은 그리로 달려가 58級을 목 베고 말 64필을 노획하니 사람들이 장군 아니었다면 3道 백성들이 모두 죽을 뻔했다고 칭송했었다.그러나 장군의 마지막 운명은 기구하여 昌王 元년 43세 때에 禑王을 복위시키려는 金佇 등과 관련되었다 하여 慶州로 귀양 갔었고 다시 李成桂를 반대한 尹彝 李初 등과 연계되어 淸州獄에 갇혔더니 하늘의 돌보심인지 큰 홍수가 나서 저절로 풀려나온 몸이 되었다.그 뒤 回軍한 공로로 2等錄券과 논 50結을 하사받고 석방되므로 光州 別業으로 물러나있었는데 判開城府事로 召命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被召不赴) 향년 45세로 세상을 여의니 恭讓王 3年(1391)10月 15日이었고 光州市 北區 淸玉洞(望月洞)에 禮葬되었다.李朝 太宗 2年 壬午에 景烈이라는 謚號가 下賜되고 墓域 環山 15里와 祭田 五結이 賜牌地로 내려졌다. 장군은 실로 한 시대의 인물이나 또한 문중의 인물만이 아니요 겨레 전체의 영원한 인물이다. 장군의 영전에 삼가 찬송을 바친다.文武를 겸하시고 지혜 용맹 갖추시니.한때의 인물이리까 역사의 영웅이외다.戰艦을 만드시고 해군을 기르시어전통을 세워 주시니 바다의 영웅이외다.사나운 도둑 떼들 장군이 무찌르시니그 은혜 잊으오리까 겨레의 영웅이외다.자기 한 몸 돌보 잖고 나라만을 위하시니진실로 우러러 받들 거룩한 영웅이외다.시대가 바뀌어도 그 정신 빛나시니우리들 가슴마다에 깊이 새길 영웅이외다.장군은 이같이 우리 해군 전통의 초석이 된 역사적 인물이었건마는 뒷사람들이 높이 받들 줄 모르다가 仁祖 32년(1644)에야 3道 선비들이 全南 光州에 景烈祠를 창설하고 장군을 제사 모시더니 高宗 8년(1871)에 大院君의 서원 폐쇄령에 의하여 철훼되었고 뒤에 羅州 老安面 金安里에 사당을 옮겨 모시고 제사를 받들어 왔다.그러다 1974년 봄에 사단법인 鄭地 장군 유적보존회를 창립하고 1977년에 사당 중건에 착공하여 1980년에 준공함과 동시에 光州市 望月洞 장군의 묘소를 우러러보는 곳에 이 사적비를 세우며 거액의 국비와 지방비로써 보조해 주신 정부 당국에 감사를 드린다.後學 文學博士 鷺山 李 殷 相 짓고、 一中 金 忠 顯 씀1980년 12월 일後孫 周 永、 進 基 삼가 세움<추기>경렬공정지장군사적비는 경남 남해에 또 하나가 있다. 이 비는 정지장군유적보존회와 임진성기념사업회, 남면문화재보호위원회의 감수를 받아 1977년 가을에 남해군 남면 상가리 579-1번지 임진성기념각 전정에 세워 보존 관리해 오던 중 기념각은 폐허가 되고 주위는 잡초에 묻혀있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당시 종친회장인 20대손 정인규씨께서 복원을 추진중 남해군과 협조하여 2004년 4월 하순 임진성 주변으로 옮겨 보존하게 되었다.
- 2018-06-11 | NO.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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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지장군예장석묘
- 광주광역시 북구 망월동 산 176정지장군 예장석묘는 경열사내에 있다. 광주시 기념물 제2호이다.
- 2018-06-11 | NO.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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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양사근처동복오씨정렬비
- 광주시 북구 문흥동 995-4(느티나무공원 내)1970년이 제주양사근처동복오씨정렬비(濟州梁泗根妻同福吳氏貞烈碑)는 林海玉 쓰다.
- 2018-11-12 | NO.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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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양씨충민공산숙신도비명
- 광주시 광산구1819년濟州梁氏忠愍公山璹神道碑銘은 양산숙의 신도비로 풍산 홍양호가 찬했다.
- 2018-12-02 | NO.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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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호정려각
- 광주시 북구 서하로 48-25(용봉동) 광주시립민속박물관 오른편1884년이 조선호정려는 전남 승주군 송광면 대곡리 조선호(1812∼1870)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졌다.조선호는 부모의 병환 때 배설물을 맛보아 병세를 살폈고, 임종 때에는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드려 잠시 연명케 하였을 만큼 효성이 지극하였다. 이러한 조선호의 효행이 혼 세상에 널리 퍼져 1883년(고종 20)에 동문교관 조봉대부(童蒙敎官 朝奉大夫)에 추증되었고, 1년 후 정려가 하사되었다. 1968년 4월에 중건되었던 이 정려는 주암댐 건설공사로 수몰되자 광주시립민속박물관에서 기증받아 1989년 10월에 이설 복원하였다.
- 2018-11-12 | NO.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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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아라-소심당 조아라 기념비
- 광주시 남구 백서로 13, 수피아여자고등학교2008년1931년 수피아여학교를 졸업한 조아라는 여성 민주 인권화 운동에 실천적으로 앞장 서온 인물로 광주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들을 정도였다.
- 2018-06-20 | NO.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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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언수-증병조참판조공언수비명
- 광주시 광산구 명도동순의원종증병조참판조공언수비명殉義原從勳贈兵曹參判曺公彦壽碑銘은 월성 최영조가 짓다.1592년 임진왜란 때 금산전투에서 의병으로 왜적과 싸우다가 순절했다. 호남절의록에 올라 있다.창녕조씨삼강정려(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8호)에 충에 해당한다.
- 2018-12-02 | NO.7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