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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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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태만-용은 홍주송공태만 효행비
    광주시 남구 대촌동 상신마을1996년 4월용은홍주송공태만효행비는 상신마을 뒤 내동마을로 가는 길가에 있다. 비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효도는 강상의 으뜸이요 백행의 근원으로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를 행해야 할 본분으로 알면서도 언행이 일치해서 세인으로부터 효자라고 칭송받기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므로 한 가문에 한사람의 효자가 나온다는 것은 만에 하나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인데 홍주송씨 청심헌공파 가문에서 효자가 나왔으니 실로 아름답고 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오직 충효세전의 가훈에서 기인됨이라 하겠으나 공자께서 어버이를 공경하는 것은 인덕을 기르는 근본이다 하셨고, 후한세대의 위제가 충신을 구하려면 반드시 효자의 가문에서 구하라 하였듯이 그들은 충과 효의 정신이 근본적으로 일치한다는 것을 세상사람들에게 입증시킨 본보기이다. 해광제민의 후예이며 사인수진의 자로서 어려서부터 자품이 온화하고 행의가 공건하였으며 언행이 법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자라났다. 아버지를 받들지 못했음을 철천의 한으로 여기고 홀로된 어머니를 지성으로 섬기면서 그 뜻에 순응함은 물론이요 어머니의 마음을 항상 기쁘고 편안하도록 받들었다. 살림의 제반사를 어머니에게 맡기고 안팎일을 어머니에게 품의 해서 처리하였다.필요한 용돈은 어머니에게 사유를 말씀드리고 타서 썼으며 의복을 비롯한 가정에 필요한 물품을 살 때는 반드시 어머니 몫을 먼저 샀으며 심지어 동생들의 혼숫감을 살 때도 어머니의 옷을 먼저 사니 상인들까지도 효자라고 칭송하였다. 철철이 관광을 시켜드림은 물론이요 명절때마다 가난한 이웃을 구할 때도 반드시 어머니의 명에 따랐다. 어머니가 병환으로 신고할 때 대소변처리와 약달여 드리는 일을 남에게 맡기지 않았으며 상을 당해서는 조석상식을 가리지 않고 삼년동안 충우를 가리지 않고 날마다 성묘하여 호곡했다. 어머니가 임종 때 담배를 삼가라 하였으므로 평생 담배를 끊었으며 남은 유언도 착실히 실행하니 향리에서 효자라고 칭송하였다. 선영을 위한 정성이 지극하여 문중의 대소사에 적극 협력하며 선조의 묘역 정화와 석물을 세우는데 앞장서니 종중은 물론 사림에서도 칭송하였다. 1980년 광주향교에서 효자포상이 있었고 정남 호근과 차남 창근이 서울에서 공장을 경영하며 이들을 거느리고 서울시 구로구 개봉동에서 살고 있다.서기 1980년 8월 20일광주향교 전교 고운석 찬영광 강진구 근서서기 1996년 4월 7일 입비
    2018-06-17 | NO.164
  • 송파 김해김공 유인 밀양박씨 효열비
    광주시 남구 진월동(노대동) 노대마을1914년노대마을 앞에 송파 김경두(松坡 金炅斗)의 처 밀양 박씨의 효열(孝烈)을 기념하는 비가 있다.효덕동 노대마을 입구에 위치해 있으며, 비문의 내용은 송파 김경두와 그의 부인 밀양박씨의 효행에 대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비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오직 효(孝)와 열(烈)은 삼강(三綱) 가운데 첫번째요 두 효자와 열녀(烈女)가 한 가문에서 배출하고 부부(夫婦)가 겸하였다는 것은 옛날부터 매우 드물게 볼 수 있는 일이다. 풍속을 바로 세우는데 일조(一助)가 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할진데 지금까지 효열사례가 어둠에 묻혀 있으니 어찌 이 세상에 개탄스러울 일이 아니겠는가, 김공(金公)의 이름은 영두(霙斗)요 자는 중집(中集)이며 아호는 송파(松波)로 가락국 수로왕의 후손이다. 절효선생(節孝先生)은 그 가문의 중조(中祖)요, 탁영선생(濯纓先生)은 덕업과 문장이 뛰어난 분으로 공의 9세조(九世祖) 되는 분이다. 증참의(贈參議)이신 현상(顯祥)과 증한성판윤이신 재선(再善)과 증사복시정필 등 세 분은 공의 고조, 증조와 조부되는 분들이요 아버지의 이름은 창섭(昌燮)이고 어머니 광산이씨의 아버지는 광식(光植)이다. 벼슬이 통정대부이신 창익(昌益)과 숙부인 밀양박씨는 생가집 부모님이다.1812년 3월 10일에 태어난 공은 어려서부터 재주가 총명하여 일찍이 학문을 이루었다. 효심으로 부모님을 봉양하였고 양아들로 들어와 양부모 섬기기를 생가 부모님을 섬기듯 하여 병석에 눕자 늘 간호하였고 양부모님의 똥맛도 보았으며 자신의 손가락 피를 흘려 환을 지어 먹게 할 때 반드시 먼저 맛을 보았다. 초상을 만나서는 간장 등 채소를 먹지 않고 곡성이 끊기지 않았으며 움막에서 3년 복을 마쳤다. 그 뒤에도 성묘를 하고 사당에 절을 하며 자신을 닦아 가정을 바르게 하였다.부인 밀양박씨의 아버지 이름은 세정(世貞)이니 문헌공(文獻公)이신 영균(永均)의 후손이다. 1811년에 태어난 부인은 친정에 있을 때에도 효녀로 알려졌으며 출가하여서는 효성으로 시부모를 섬겼고 예의로 남편을 섬겼다. 남편께서 기이한 병마를 만나자 치료하는데 약을 쓰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결국 남편이 일어나지 못하고 죽으니 그 뒤를 따라 가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샘물에 몸을 던지려 하기도 했고 혹은 목을 매려 하기도 했으나 그때마다 가족들의 구원이 있었다. 부인은 남편의 시신을 거두는 일과 장례 치를 일을 몸소 준비하여 가족들에게 믿음을 주었으며 얼굴에 슬픈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시어머니까지도 자기를 잘 봉양해 줄 것을 믿고 부인의 태도 감시가 조금 풀어졌다. 장례를 마친지 7일 뒤에 조용히 침실에 들어가 남편의 옷을 둘러쓰고 남편의 허리띠로 목을 메었다. 뒤늦게야 가족들이 깜짝 놀랬으나 구원할 길이 없었으니, 즉 1840년 5월 15일이며 나이는 겨우 30이요, 노대실 남쪽 석림등에 오좌(午坐)로 남편과 함께 장사하였다.딸 하나를 생산했는데 성장하여 황추인(黃秋仁)에게 시집갔으며 조카 용순(容淳)도 뒤를 이었고 마을 또는 군민 도(道) 유림 등이 서로 교대하여 그 부인의 효열을 천거하였다. 아~ 요즈음 관리들 가운데 글공부를 하여 의리(義理)를 안다고 하는 대신(大臣)이라는 것들이 임금을 속이고 나라를 팔아먹었다. 여자들은 규방에서 성장하였기에 옛날부터 여인들의 절행(節行)이 간혹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경우가 있다. 이제 부인의 효열을 표출(表出)하기 위해 모든 가족이 힘을 합해 비석을 세우려고 상기(相基)를 나에게 보내어 비문을 요청하였다. 그의 요청을 거역하지 않았다.기우만(寄宇萬) 엮음, 1914년 9월
    2018-06-13 | NO.163
  • 수곡영모계 기적비
    광주시 북구 수곡동 171-1(용강마을 입구)1976년이 수곡영모계기적비(水谷永慕契紀績碑)는 李相南 짓고 쓰다.  
    2018-11-13 | NO.162
  • 수원백씨충효정려각 水原白氏忠孝旌閭閣
    광주시 북구 우치로422번길 28(삼각동)1859년이 수원백씨충효정려각은 삼각동 월산마을 입구에 있다. 충신 백홍암(白弘嵒)과 효자 백찬수(白讚洙, 1822~1858)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1859년 국가에서 명정(酩酊)하고 1962년 4월 24일 현 장소에 이건하였다. 이 정려각은 콘크리트 바닥에 덤벙주초를 놓고 원주기둥을 세워 일식기와를 얹은 소슬문으로 되어있다.충효를 겸비한 백홍암은 병자호란 때 이흥발(李興?)과 같이 의병을 일으켜 청주까지 진군하였으며 돌아와 부모님을 섬기며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친상(親喪)을 당하여 시묘(侍墓)를 3년 동안 살았는데 범이 항시 호위하였다 하여 그곳을 호계라 하였다 한다.백찬수의 자는 대연(大宴), 호는 곡은(梏隱)으로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님 섬기기를 잘하였으며 친상을 당하여는 예(禮)대로 행하는 한편 선대 홍념공의 충효사적을 찾아 정려를 받도록 하였다. 이에 백홍암은 <忠孝贈嘉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總府剖總官白弘嵒之閭>라 하고 백찬수는 <孝子贈童蒙敎官朝奉大夫白贊洙之閭>라 하려 명정하였다.
    2018-11-12 | NO.161
  • 수촌 고정봉 묘역
    광주시 남구 이장동수촌 고정봉⽔村 ⾼廷鳳(1743∼1822)의 묘역에 묘비는 정원용이 찬했다.髙廷鳳의 자는 鳴國이요, 호는 水村,  부친 髙暎과 모친 서산김씨 麒瑞의 딸 사이에서 1745년에 태어났다. 모친이 태몽에서 상서롭게 떠오르는 해를 안는 꿈을 꾸어 어려서의 이름은 ‘捧日’이라고 불렸다. 고정봉의 집안은 역대로 변란이 있을 때 나라에 충성을 다한 인물이 다수 출현했었다. 가령, 6대조인 髙敬命은 임란 때 의병장으로서 금산전투에서 순절하였고, 5대조 髙從厚는 부친인 고경명과 동생 髙因厚가 순절하자 復讐義兵將이라 칭하고 진주성에서 金千鎰 등과 싸우다 순절하였다. 그런데 고정봉의 부친 때에 이르자 집안의 이러한 명성과는 달리 선조의 위업이 점차 쇠해지고 있었는데, 따라서 고정봉에게 건 기대가 남달랐다. 이로써 고정봉은 주변의 뜻에 부응하기 위하여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뿐만 아니라 집안은 비록 쇠미하나 형제간의 우의는 돈독하였고, 지조는 항상 간직하고 있었다. 고정봉의 나이 55세 무렵(1797년)에 정조는 직접 교정한 眞西山의 <대학연의>와 邱瓊山의 <대학연의보>초본을 광주에 보내어 고증과 정정을 하도록 했는데, 고정봉의 것이 가장 나은 것으로 평가받았다. 또한 고경명의 후예라 하여 특별 우대 조치를 내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것이 계기가 되어 전라도사라는 벼슬을 하사받게 되었고, 3년이 지난 다음에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병조좌랑, 사헌부지평, 비인현감 등을 역임하는데, 선정을 베풀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80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유고집으로 <水村集>이 있다. 목활자본 7권 3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1에는 시문이, 권2에는 書ㆍ家狀ㆍ遺墨書 등이, 권3에는 疏ㆍ賦ㆍ詩義 등이, 권4에는 序ㆍ記ㆍ跋ㆍ說ㆍ銘ㆍ賦ㆍ辭가, 권5에는 雜著ㆍ附錄ㆍ書가, 권6~7까지는 경서에 대한 글이 각각 실려져 있다.2019.1.8. 수정
    2018-12-12 | NO.160
  • 신라왕자유허비
    전남 담양군 대전면 평장리 204번지1739년신라왕자유허비(新羅王子遺墟碑)는 <광주읍지>에 따르면 평장동(平章洞)에 있다. 김진상(金鎭商)의 음기(陰記)에 "광주의 서북쪽에 불대산(佛臺山)을 등지고 서석산(瑞石山)을 바라본 곳에 이른바 평장동(平章洞)이 있는데, 즉 옛날의 서일동(西一洞)으로서 나의 시조 신라왕자 김공의 유허(遺墟)이다. 왕자의 휘(諱)는 흥광(興光)인데 신라말엽을 당하여 국가가 장차 어지러울 것을 알고 이곳으로 와 터를 잡고 은거하였는데 김씨가 광산에서 살게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흥광(興光)의 아들 휘(諱) 식(軾) 이후 서로 이어 평장사(平章事)가 된 사람이 여덟 사람이었던 까닭에 마을 이름을 평장(平章)으로 고치었는데 고려를 지나 우리 조선에 들어 와서도 자손이 더욱 번창하여 이름있는 벼슬아치와 큰 선비가 혁혁(赫赫)히 서로 이었으니 이는 진실로 왕자의 빛을 숨기고 덕을 길러 길이 후세에 전한 음덕(蔭德)으로 말미암은 것이겠으나 또한 산천의 영수(靈秀)한 기운이 도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 왕자의 무덤이 세대가 오래되어 소재를 잃어버렸으니 후인이 방물(彷彿)히 사모할 수 있는 곳은 오직 유허뿐이다. 그런데 이 유허(遺墟)마저도 세월이 오래되어 잃어버릴까 염려되어 (宗人)들과 논의 하여 돌을 다듬어 기록하였다." 영조 기미년 1739년
    2018-06-17 | NO.159
  • 신재김해김공유적비
    광주시 남구 노대동 707번지 1996년신재김해김공유적비(愼齋金海金公遺跡碑)는 신기마을 뒤편 양양재(洋洋齋) 제각 한편에 있다. 1996년 6월에 김해김씨둔암공종중이 세웠다.가락 김형재가 찬했고, 둔암공 12세손 김호영이 글씨를 썼다.
    2018-09-07 | NO.158
  • 심남일-의병장남일심공순절비
    광주시 남구 중앙로107번길 15 (광주공원)의병장남일심공순절비(義兵將南一沈公殉節碑)이 비는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수많은 전과를 거두고 순국한 심남일(沈南一, 1871~1910) 의병장의 뜻을 길이 전하기 위해1972년 건립되었다. 찬자(撰者)는 이은상(李殷相)이고, 서자(書者)는 신호열(辛鎬烈)이다. 앞에 순절비건립에 찬조한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진 방명비(芳名碑)가 있다. 한말 대표적인 의병장인 심남일은 1871년 2월10일(음력) 전라남도 함평군 해보면 금덕리(고모리)에서 심의봉과 진주 강씨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심수택(沈守澤)이고, 호는 덕홍(德弘)이다. 남일은 별명이다. 어려서부터 담력이 크고 사서삼경에 능통하였으며, 고전을 섭렵하고 병서를 즐겨 읽었으며, 동양철학에도 능통하였다. 성장하여 서당의 훈장과 향교의 전교를 지냈으며 전형적인 유생의 모습이었다. 호남지역의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1905년 을사늑약이 맺어지자 의병을 일으켜 강진, 퇴계원, 남평, 나주 등지의 전투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으며,1907년에 창설된 기삼연의 연합부대가 해체되자 1908년 2월 남평에서 봉기하여 의병투쟁의 장을 열었다. 심남일 부대는 빠른 시기에 대규모 병력을 형성하여 함평을 근거지로 나주, 영암, 무안, 강진 등 전남 서부 지역과 남부지역 일대를 장악하여 일제를 위협하였다. 호남창의 회맹소의 부장으로 활동 하다가 김태원 형제가 죽자 잔여의병을 수습하고 전남제일의 의병장이라는 의미로 스스로 남일이라 불렀다. 이 부대는 권택, 안규홍, 의병부대와 연합작전을 펴기도 하였다.심남일 의병장은 1907년 11월1일 전남 각 지역에 격고문을 붙이고 향교에 통문을 돌리며 의병을 일으켜, 이후 1909년 7월 21일까지 3년여에 걸쳐 전남 남서부 지역에서 일본 헌병대, 주재소, 수비대, 순사대, 토벌대, 헌병보조원들을 척결대상으로 삼고 활발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으며, 20여 전투에서 약 300여명의 적을 사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 중에는 광주주재 경무사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또한 1908년부터 1909년까지 일본군과 경찰을 상대로 격전을 벌였으며, 일제의 앞잡이로 양민을 괴롭히거나 수탈한 사람들을 응징하였다. 1909년 5월에는 의병해산의 조칙이 내려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는 1909년 7월21일 전남 영암군 금마면 고인동에서 의병을 해산하고 일제의 남한폭도 대토벌 작전으로 체포될 때까지 1909년 9월 화순군 청풍면 이만리의 바윗굴에서 선봉장 강무경과 같이 은거하던 중 그해 8월26일 일본군에 체포되었다.광주로 갔다가 12월15일 1910년 대구감옥으로 이감되어 이듬해 7월23일 39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으며, 지금은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8번)에 안장되었으며 광주공원에는 장군의 충절을 기리는 순절비가 세워져 있다.
    2018-06-11 | NO.157
  • 양건당황공정려중수기 兩蹇堂黃公旌閭重修記
    정의림 일신재집 권14鄭義林(1845~1910) 《日新齋集》兩蹇堂黃公旌閭重修記嗚乎此故 宣廟朝名臣兩蹇堂黃公忠孝褒旌之閭也公事親至孝 事君盡忠 始以孝蹇 後以忠蹇 卒能殞身立慬於帶方城陷之日 至行大節 貞忠偉烈 足以扶綱常於天下起懦頑於百世 若其事蹟梗槩 野史國乘 昭載備錄此不必架疉焉 至正崇乙卯棹楔成 命七世孫鎭奎與諸宗創始之 後九十七年 今上甲午 承贈貤之典因以改題揭板及新丹雘之飾 盖九世孫柬之戶也後十四年丁未 以歲久材朽 慮有頹圯之患 將改建而一新之盖十世孫慶炫十二世孫悅周 倡諸宗而經營之也 嗚乎 世衰道徵 九野閉塞 未知公之忠魂義魄 其亦有以鑑此耶 今日之重建 未始非裨補世敎之一助云爾*양건당 황대중黃大中(1551~1597) 양건당충효정려각은 전라남도 강진군 작천면에 있다. 2004년 11월 1일 강진군의 향토문화유산 제19호로 지정되었다.1795년(정조19년)에 장군 양건당 황대중(1551-1597)의 충효를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고, 1894년(고종31) 중수, 1907년 중건되었다.
    2020-06-12 | NO.156
  • 양곡 오공(오두인) 신도비명(陽谷吳公神道碑銘) - 여한십가문초 제5권
    양곡 오공(오두인) 신도비명(陽谷吳公神道碑銘) - 여한십가문초 제5권, 왕성순(王性淳) 집(輯) ○ 이기소(李箕紹) 참정(參訂) ○ 공성학(孔聖學) 참정(參訂) / 한 농암 김창협(1651~1708) 문[韓金農巖文] [주-C001] 김창협(金昌協) : 자는 중화(仲和), 호는 농암(農巖), 안동인(安東人)이다. 숙종 임술년(1682) 문과에 장원, 벼슬은 홍문관 대제학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주-D001] 정불식(程不識) : 한(漢)나라 사람으로 처음에 장락위위(長樂衛尉)를 지냈는데 나중에는 이광(李廣)과 더불어 변군(邊郡)의 태수가 되었다가 호(胡)를 쳐서 일시에 명장이 되었다. 《漢書 卷54 李廣傳》[주-D002] 삼자(三字)의 직함 : 봉조하(奉朝賀)를 말한다. 봉조하는 종이품(從二品)의 관리가 벼슬을 그만둔 뒤에 임명되던 벼슬이다.[주-D003] 그때 나이가 66세였다 : ‘그때 나이가 66세였다[時年六十六]’가 《농암집(農巖集)》에는 빠져 있다.[주-D004] 경상 병사(慶尙兵使) : 《농암집(農巖集)》에는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로 되어 있다.[주-D005] 감역(監役) : 《농암집(農巖集)》에는 ‘학생(學生)’으로 되어 있다.[주-D006] 맹분과 전저 : 맹분(孟賁)은 전국 시대의 용사(勇士)로 물속에서는 교룡(蛟龍)을 피하지 않았고, 육지에서는 호랑이를 피하지 아니하였으며, 노성(怒聲)을 발하면 하늘까지 울렸다고 한다. 《제왕세기(帝王世紀)》에는, “진 무왕(秦武王)이 용사를 좋아하여 제나라 맹분의 무리가 갔는데 맹분은 소뿔을 산 채로 뽑을 수 있었다.” 하였다. 전저(專諸)는 춘추 시대 오(吳)나라 사람이다. 오의 공자(公子) 광(光)을 위하여 왕료(王僚)를 죽이고자 비수를 고기 뱃속에 숨겨가지고 들어가 그를 찔러 죽였으나 자기도 그 자리에서 잡혀 죽임을 당하였다. 《史記 卷86 刺客列傳》[주-D007] 유적(褕翟) : 유적은 황후(皇后)의 제복(祭服)을 말한다.[주-D008] 곤의(壼儀) : 곤의는 곤전(坤殿)을 말한다.
    2020-09-24 | NO.155
  • 양과동정공적비
    광주시 남구 이장동 166-12012년양과동정공적비(良苽洞亭公蹟碑)는 2012년에 세웠다.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2018-06-11 | NO.154
  • 양림동 선교사묘지
    광주시 남구 제중로 77 호남신학대양림동 선교사 묘지는 광주에 최초로 기독교를 전파하고 개화의 새 물결과 일제 치하에서 구국 운동의 계기를 마련했던 22인의 선교사가 묻혀 있는 곳이다. 광주광역시 양림동은 전라남도 최초의 선교사로 광주에서 활동하던 배유지 목사와 클레멘트 오웬의 주된 선교지였다. 오웬(c.c.Owen, 1867~1909)은 목포, 광주에서 선교활동을 했고 1904년 양림교회를 세웠다. 당시 사람들은 오웬을 ‘오 목사(吳 牧師)’라 불렀고, 그의 묘비에도 ‘님’이라는 존칭 없이 ‘吳牧師’라고만 새겨져 있다. 뒤에 함께 활동했던 유진 벨(Eugene Bell, 배유지, 1868-1925)의 묘비도 있다.지금은 묘비가 44기로 늘었다. 새로 들어선 검은색 묘비는 대부분 가묘이다. 이 지역의 근·현대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묘지에는 지금까지 23인의 선교사가 묻혀 있으나 묘비명이 있는 21인을 소개한다.ⓐ Paul Crane (1889-1919) ⓑ Owen(吳牧師)(1867-1909)ⓒ Eual Granam (1889.5.27-1930) ⓓ Louis G. Brand (1894-1938)ⓔ Homd Koox Dodson (1884-1924) ⓕ Eugene Bell(1868-1925)ⓖ Marguret W. Bell. Norfolk VA. Nov, 26, 1873 Kwang ju. Korea march. 26. 1919 till he Kcomeⓗ Lillian Andrus, Southall, nov, 4. 1938ⓘ Roberta GeGile Goit, Entered This life, Sept 7th 1911 entered eternal life April 26th 1913ⓙ Thomas Hall woods Goil entered This life Sept 14th 1909 entered eternal life April 27th 1913ⓚ Tholma-Thumm feb. 7. 1902 may 25 1931ⓛ Elizabeth Lehtia Crane (1917-1918)ⓜ 미국인 로제세 의사 장모 롯스부인 묘 (1927.4)ⓝ Tohn Curtis Crane Jr Har-DCT 1921ⓞ Philpt Codington AUG 13 1960 - AUG 9. 1967ⓟ Jessie S, levie born may 30. 1896. Died SEPT 28. 1931ⓠ Elisabeth. J. Shepping Born SEPT 26. 1980 - died June 26 1934ⓡ kathry Newman-G Limet Born December 12. 1987 - died march 27. 1926ⓢ Gertrude p. Chapman, nov. I 1869 - march 24 1928ⓣ Elisabeth D. Nicbet oct 23 1922 - Jan 8. 1923ⓤ 校長 뉴애나지묘(生年月日 1869.1.19 - 逝年月日 1920.2.2) 主后 1923年 四月日 貞明女學校 同窓會立碑 墓主 柳瑞伯
    2018-06-20 | NO.153
  • 양만용선생 묘역
    주시 광산구 동호동 산 32-21986년한림학사翰林學士 양공만용梁公曼容  숙부인淑夫人 광주이씨廣州李氏 墓 양만용(1598∼1651)의 본관은 제주. 양산축梁山軸의 아들이며, 강항姜沆ㆍ박동열朴東說의 문인이다.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켰으며, 청현직淸顯職을 두루 역임하고 영국원종공신寧國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據梧齋梁曼容先生墓碑는 愼天翊이 짓다. 묘비명을 지은 신천익(1592~1661)은 1612년 문과을과에 들어 정자 이조참의를 지내다 영암에 은거했다가 효종 때 부제학을 거쳐 대사간 이조참판 한성부윤 등을 지냈다. 수은睡隱 강항姜沆(1567∼1618)의 같은 제자이다. 據梧梁曼容[주:字長卿山軸子松川應鼎孫仁祖朝科歷翰林官止應敎] 거오(거오재) 양만용 선생 묘는 광산구 동호동 장산재 인근에 있다.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장경長卿이며 1633년(인조11 계유) 증광시增廣試에 乙科7 로 급제했다. 예문관 검열을 거쳐 사복시 정에 이르렀다.據梧歌 梁曼容 字長卿 학포선생은 나의 증조부요 복수장 고종후 장군의 외손이라 어미가 왜적을 피해 유복자를 않고서 마을 뒤 숲 언덕에 옮기니 한 마리 큰 뱀이 그를 에워싸자 문득 새가 날개로 울타리를 만들어 보호한다 어머니는 몸을 못 움직인 채 뱀을 경계하니 양씨의 혈맥은 오직 유복자 뿐이라 네가 나를 해치고자 하는 것도 하늘의 운인데 아니라면 어찌 양씨 가문 위해 피하지 않느냐 뱀이 에워쌈을 풀고 연못 가운데로 들어가자 연못 물이 끓는 것처럼 용의 비늘 번득이는 구나 열 세살에 강항 수은 선생을 찾아가 배우니 성현 백가의 근원을 통하고 스물 일곱에 이괄의 난리 당해서 포의로 의병 일으켜 격문을 보냈다 서른에 또 오랑캐 난을 만나 사계 김장생선생과 의병을 모아 종사관이 되었다. 서른 여섯에 과거장에서 생원과 진사 문과에 양과에 합격하여 붉은 기를 꽂았구나 한림원의 춘방거쳐 호당과 옥서에도 참여하며 자리는 높았지만 스스로 높은 체 아니 하였다 중략~~~~~~~~ 서른 아홉에 병자호란 난리를 만나 다섯 현인과 힘을 합쳐 청주에 진을 치니 성 아래의 맹세를 차마 말하지 못하는 구나 강개하여 시 이루니 이하는 거오제의 충주에서 남한산성을 바라보고 지은 시 강상은 긴 세월 하늘과 땅에 뻐쳐 있네 오랑캐를 평정할 계책은 없고 갓 끈만 늘어져 있으니 칼을 어루만지나 한밤의 마음은 평온치 못하구나 남한산성 머리의 달을 바라보지만 달빛은 외로운 신하의 한 조각 정성을 비출 뿐이다.
    2018-12-02 | NO.152
  • 양산김선생유허비
    광주시 광산구 삼도동 도야(대산)마을1977년 이 양산김선생유허비(陽山金先生遺墟碑)는 상산김씨 문중이다. 진성 이원영이 짓고 전주 이학용 쓰다.
    2018-12-01 | NO.151
  • 양산숙-양씨삼강문
    광주시 광산구 박호동 산131-1 박뫼마을광주 기념물 제11호, 1985년 02월 25일 지정광주광역시 광산구 박호동에 있는 조선의 문신이며 임진왜란 때 활약한 양산숙과 일가 6명의 충효열 삼강문이다. 제주양씨삼강정려비가 있다.1592년 임진왜란 때 진주성 전투에서 왜적과 싸우다 순절한 충민공(忠愍公) 양산숙(梁山璹) 일가 7인의 충(忠)·효(孝)·열(烈)·행(行)을 기리기 위하여 인조 13년(1635)에 건립한 정려(旌閭)이다. 이곳에는 충신 양산숙 외에 효자·열녀·절부 각 두 명씩이다. 양산숙은 건재(健齋) 김천일(金千鎰)과 함께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하였다. 양산룡(梁山龍)은 양산숙의 형(兄)으로 군량미(軍糧米)를 모아 의병을 돕고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피란하다가 삼양포(三洋浦)에서 왜적을 만나 어머니 죽산박씨(竹山朴氏)와 함께 바다에 투신, 순절하였다. 양산수(梁山岫)는 삼양포(三洋浦)에서 형(兄) 산룡과 더불어 어머니를 구하려다 같이 순절하였다. 죽산박씨(竹山朴氏)는 부제학(副提學) 양응정(梁應鼎)의 처이자 양산숙(梁山璹)의 어머니로 삼양포(三洋浦)에서 아들딸들과 함께 순절하였다. 양산숙의 누이인 김광운(金光運)의 처 양씨는 정유재란때 삼향포에서 왜군을 만나 바닷물에 몸을 던져 자결하고 말았다. 광산이씨(光山李氏)는 양산숙(梁山璹)의 처로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무안(務安) 승달산(僧達山)에서 왜적을 만나 항거하다가 자결하였다. 제주양씨(濟州梁氏)는 양산룡의 딸로 나주(羅州) 회진(會津)에서 왜적에게 붙잡혀 압송중 영산강(榮山江)에 투신, 순절하였다. 나주의 회진 임씨 문중에 출가하여 순절한 양산룡의 딸은 임씨 문중에서 따로 정려를 모시고 있어 현재는 6위의 정려만 모셔져 있다. 이곳은 생장지인 박뫼(博山)마을 앞 산기슭으로 삼강문은 정면 5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이다. 각 기둥 사이에 홍살문을 달았고 삼문과 담장으로 둘러져 있다. 1803년에 이헌중(李憲中)이 ‘양씨삼강문(梁氏三綱門)’이란 현판을 썼다. 양산숙은 양응정(梁應鼎)의 아들로 진주성 싸움에서 성이 무너지자 김천일·최경회·고종후(高從厚) 등과 함께 남강에 몸을 던져 순국하였다.양산룡도 김천일을 도와 의병에 가담하였고 정유재란 때 가족들을 피난시키고자 나주 삼향포(三鄕浦, 현재의 무안)에서 뱃길로 떠나려고 할 때 왜적들이 나타나자 그와 어머니 박씨부인을 비롯한 가족들이 모두 바닷물에 몸을 던져 정절을 지켰다. 정려는 여러 차례 상소 끝에 인조 13년 생원 홍탁의 상소로 세워지게 되었다.
    2018-11-11 | NO.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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