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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선 제129권 / 묘지명(墓誌銘); 시문충 하공 묘지명(하윤, 하륜) 광주 귀양

동문선 제129권 / 묘지명(墓誌銘)

유명조선국 분충장의 동덕정사 좌명공신 대광보국 숭록대부 진산부원군 수문전대제학 영경연 춘추관서 운관사 세자사 시문충 하공 묘지명 병서 (有明朝鮮國奮忠仗義同德定社佐命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晉山府院君修文殿大提學領經筵春秋館書雲觀事世子師諡文忠河公墓誌銘 幷序)


윤회(尹淮)


하씨(河氏)의 조상은 진주(晉州)에서 나와 한 고을의 명망 있는 집안이 되었다. 좌사낭중(左司郞中) 휘 공진(拱辰)으로부터 고려에 벼슬하여 현왕조(顯王朝)에 공을 세워 오랑캐를 평화롭게 하고 적을 물리쳐 일대의 명신이 되었다. 그 뒤에 탁회(卓回)라는 분은 고왕조(高王朝)에 벼슬하여 사문박사(四門博士)가 되었고, 박사로부터 사대(四代)가 잇달아 과거에 올라 대대로 명망 있는 사람이 있어 경사를 심고 선행을 쌓아서 공에 이르러 가문이 더욱 번창하였다.

공의 휘는 윤(崙)이요, 자는 대림(大臨)이다. 증조는 휘 식(湜)이니, 박사의 5대손으로, 징사랑 선관서승(徵仕郞膳官署丞) 증 순충보조공신 보국숭록대부 판사평부사 진강군(贈純忠輔祚功臣輔國崇祿大夫判司平府事晉康君)이요, 조부 휘 시원(恃源)은 식목녹사(式目錄事) 증 순충적덕병의 보조공신(贈純忠積德秉義輔祚功臣)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우정승 판병조사 진강부원군(判兵曺事晉康府院君)이요, 아버지 윤린(允潾)은 봉익대부 순흥원사(順興院使) 증 충근익대신덕수의협찬공신 대광보국 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진양부원군(贈忠勤翊戴愼德守義協賛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晉陽府院君)이고, 어머니 강씨(姜氏)는 증 진한국대부인(贈辰韓國大夫人)이니, 검교예빈경 증 숭록대부 의정부찬성사 판호조사 휘 승우(承祐)의 딸이며 모두 공의 귀함으로 증직을 얻었던 것이었다. 지정(至正) 정해년 봄에 강씨가 길몽을 꾸고 태기가 있어 그 해 12월 기축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렸을 때부터 우뚝이 보통 아이와 같지 않고 10세에 배우기 시작하여 전수받으면 대번에 외웠다. 나이 14세에 경자년 국자감 고시에 합격하였으니, 행촌(杏村) 이 대부(李大夫)가 바로 그때 시관이었고, 19세에 을사년 과거 시험에 합격하였는데, 초은(樵隱) 이문충공(李文忠公)과 목은(牧隱) 이문정공이 그 좌주였다. 문충공이 한 번 보고는 큰 그릇으로 여겨 곧 그 아우 예의판서(禮儀判書) 인미(仁美)의 딸로서 아내를 삼았다. 그 때 두 공이 사문(斯文)의 종주가 되어 학사(學士) 대부(大夫)가 모두 그 문하에서 나오게 되었다. 공이 사우(師友) 사이에 주선하면서 강론을 연마하여 학문이 날로 전진되었다. 정미년에 춘추관에 뽑혀서 겸열(檢閱)과 공봉(供奉)이 되었다. 홍무(洪武) 원년 무신에 감찰규정(監察糾正)을 고시하고, 기유년에 수사(收司)가 양전한 것을 조사하면서 신돈(辛旽)의 문객으로 수사 부사(收司副使)로 있는 자를 탄핵하였다가 신돈에게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 신해년에 신돈이 처형된 뒤에 지영주안렴사(知榮州按廉使)로 기용되자 김주(金湊)가 그 정사와 행실이 제일이라고 아뢰었다. 임자년에 고공좌랑(考功佐郞)으로 불러 제수하고, 계축년에 판도좌랑(版圖佐郞)으로써 교주 강릉도 찰방(交州江陵道察訪)이 되었고, 갑인년에 제릉서령(諸陵署令)이 되고, 을묘년에 사헌부 지평과 전리 정랑(典理正郞)이 되었다. 병진년에 전교부령 지제교에 올랐다가, 전의부령(典儀府令)으로 옮겼고, 정사년에 전법총랑 보문각 직제학에 올랐으나, 전례대로 지제교를 맡았다. 이로부터 제직(除職)이 되었으나, 모두 관직(館職)을 띄었고, 또 판도총랑으로 교주도안렴(交州道按廉)이 되었다. 무오년 전리총랑이 되고 기미년에 전교령 성균대사성에 오르고, 경신년 9월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고, 신유년에 기복(起復)되어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었으나, 상을 끝낼 수 있도록 청하니, 허락하였다. 임술년에 삼복이 끝나자 우부대언(右副代言)이 되고, 계해년에 우대언(右代言)에 옮기고 얼마 안 되어 전리판서(典理判書)가 되었고, 갑자년에 밀직제학(密直提學)이 되고, 을축년에 첨서(僉書)에 오르고, 그 가을에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가 국자전부(國子典簿) 주탁(周倬) 등을 보내니, 공이 서북면(西北面)에 영접하였으며, 돌아갈때에 공이 사표(謝表)를 받들고 함께 가니, 주탁 등이 매우 예우하였다.

정묘년에 동지(同知)에 오르고, 무진년 봄에 무신 최영(崔塋)이 군대를 일으켜 요양(遼陽)을 범하려 할 때, 공이 힘껏 불가함을 진술하였더니, 최영이 노하여 양주(襄州)로 추방하였다. 여름에 최영이 패하자, 공이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다. 을사년 봄에 다시 동지(同知)가 되었고, 가을에 영흥군(永興君) 왕환(王環)이란 자가 일본에서 오니 공이 인척(姻戚)으로 평소에 왕환의 얼굴을 알았기에 그가 왕환이 아님을 말하였다가 광주(光州)에 귀양갔다. 경오년 봄에 울주(蔚州)에 옮겼다가 여름에 윤이(尹彛)ㆍ이초(李初)의 옥사가 일어나자 모든 귀양살이하던 사람을 청주에 모아 둘 적에 공이 사면되어 진주로 돌아왔다. 신미년 여름에 전라도 도관찰사에 기용되었고, 임신년 여름에 돌아오니 우리 태조가 이미 임금이 되었다. 계유년 가을에 다시 공을 기용하여 경기좌도 관찰사가 되었었다. 공이 비로소 민호(民戶)의 농토 개간의 정도여부에 따라 부역을 정하니 토호들은 싫어하였으나, 백성들은 그 공평함에 복종하였다. 여러 도가 모두 본받아 드디어 제도로 정해지게 되었다.

그 때에 태조가 계룡산으로 서울을 옮기려고 이미 공사가 시작되었을 때, 공이 힘껏 간언하였기 때문에 따랐다. 갑술년 3월에 첨서중추원사(僉書中樞院事)가 되었고, 을해년 4월에 중추사(中樞使)에 옮기고, 7월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였고, 병자년 4월에 기복되어 예문춘추관 학사가 되어 사퇴를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고황제가 사표(謝表)한 글이 불공하다고 하여 우리나라에서 그 문장을 주관한 자인 정도전을 입조(入朝)하게 하였다. 또 우우(牛牛) 등을 보내어 독촉을 하니, 공이 관반(館伴)이 되었는데, 태조가 은밀히 조신들에게 보내는 문제를 물었다. 모두들 관망만하고 굳이 보낼 필요가 없다고 하였으나, 공만이 보내는 것이 편리하다고 하여 정도전이 크게 감정을 품었다. 7월에 태조가 이지(李至)를 보내어 일을 주달하려 하였을 때, 사신이 아뢰기를, “오직 하관반(河館伴)이라야 사명을 다 할 것입니다.” 하고 함께 가기를 청하였다. 공이 명나라 조정에 이르러 상세하고 분명하게 아뢰어 일이 풀리게 되었다. 정축년 정월에 정도전이 군대를 일으켜 국경을 나갈 것을 의논하려 하면서, 공을 꺼려 계림부윤으로 내보냈더니, 그 해 봄에 왜추(倭酋) 몇 명이 무리를 거느리고 경상도에 와서 항복할 것을 청하므로 4월에 공이 관찰(觀察)ㆍ절제(節制) 제공과 더불어 이 일을 처리할 것을 의논하였더니, 의논을 주장한 자가 실책하여 왜추가 도망갔다. 6월에 공 등을 체포하여 순군(巡軍)에 치대(置對)하였고, 7월에 수원부에 안치되었고, 10월에 풀려 나고, 무인년 7월에 충청도 도관찰사가 되었다.

9월에 상황(上王)이 왕위를 계승하자, 불러 정당문학이 되고, 10월에 정사공(定社功)을 책정하여 공이 1등으로 진산군(晉山君)의 봉작을 받고 들어가서 건문황제(建文皇帝)의 등극을 축하하였고, 기묘년 12월 참찬문하부사가 되었다. 경진년 4월에 찬성사에 오르고, 5월에 판의흥삼군부사 겸 판상서사사(判義興三軍府事兼判尙瑞司事)가 되고, 9월에 문하우정승 판병조사(門下右政丞判兵曹事)에서 관작이 승진하여 백(伯)이 되고, 11월에 금상이 즉위하였고, 신사년 정월에 좌명공(佐命功)을 녹하매 공이 또 1등에 있었고, 윤 3월에 병으로 사퇴하니 영삼사사(領三司事)가 되고, 4월에 지공거가 되어 지금 지신사(知申事) 조말생(趙末生) 등 33명을 뽑았고, 7월에 관제(官制)가 고쳐지매 영사평부사 겸 판호조사(領司平府事兼判戶曹事)가 되어 비로소 국내에 통행하는 저폐(楮幣)를 만들어서 나라의 용도를 풍부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임오년 6월에 명나라 조정에 가서 명명(明命) 악장(樂章) 두 편을 받을 때에 교서를 내려 권장하였다.

10월에 의정부 좌정승 판이조사(議政府左政丞判吏曹事)로 지금 황제의 등극을 축하할 적에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이첨(李詹)이 부사(副使)가 되었다. 공이 명나라 서울에 도착하자 이공(李公)과 더불어 예부(禮部)에 글을 올리기를, “새 천자께서 등극하여 천하가 더불어 새롭게 되었으니, 우리 임금의 벼슬도 고쳐 주기를 바랍니다.” 하였더니, 황제가 아름답게 여겼다. 영락(永樂) 원년 계미 4월에 명나라 사신 도지휘사(都指揮使) 고득(高得) 등과 함께 고명(誥命)과 인장(印章)을 받들어 오니, 임금이 더욱 귀하게 여겨 하사한 물건이 실로 후하였다. 갑신년 6월에 가뭄으로 면직할 것을 빌었고, 을유년 정월에 좌정승에 복직되어 세자사(世子師)를 더하였고, 병술년에는 공이 각 종파의 절 주지(主持)들이 전토와 노비를 많이 점유하여 돈놀이를 하고, 여색에 빠져 재물을 좀먹고 대중을 미혹시킨다고 건의하여 각도의 주(州)와 군(郡)에 한두 절만 남기고 모두 철거하였으며, 그 전토와 노비는 나라에 귀속시키게 하니 임금이 이 의견을 따르자 식자들이 통쾌한 일이라고 칭찬하였다.

정해년 4월에 문사들이 중시(重試)를 치룰 때, 공에게 명하여 시권을 읽도록 하여 지금 예문관 제학 변계량(卞季良) 등 10명을 뽑고, 7월에는 가뭄으로 임금의 처소를 옮기기를 청하였었다. 무자년 2월에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가 되고, 신묘년 3월에는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지금 평양판관 권극중(權克中) 등 33명을 뽑았고, 임진년 8월에 좌정승에 복직되었으니, 공이 이 때에 네 차례나 국권을 잡았다.

갑오년 4월에 국가에서 주관(周官)을 모방하여 정부의 모든 사무를 나누어 육조(六曺)에 귀속시키고 공을 영의정부사로 삼았으며, 을미년 10월에 또 좌의정이 되었다. 병신년 봄에 공의 나이가 70이 되었으므로 옛 일에 의거하여 치사(致仕)하기를 요청하였으나 임금이 오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공이 수차례 여쭈니, 임금이 특별히 우대하여 조회에는 참여하지 않게 하더니, 4월에 이르러 허락하고는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으로 사제(私第)로 나아가도록 하였는데,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는 반드시 자문을 하였다.

그 해 10월에 임금이 함길도(咸吉道)에 사신을 보내어 선왕(先王)의 능침(陵寢)을 두루 살피려 하자 공이 스스로 갈 것을 청하였더니, 임금이 늙었다고 민망히 여겼으나 그 뜻을 가상히 여겨 친히 교외에 나가서 전송을 하였다. 공이 이미 일을 끝내고 돌아오려 할 때, 병이 나자 임금이 이 소식을 듣고 급히 내의(內醫)를 보내어 치료하게 하고, 내주(內廚)에서 반찬을 제공하니 문병하는 중관(中官)이 길에 잇달았다. 11월 6일 계사에 정평(定平) 관사에서 졸하였다.

부고가 이르자 임금이 심히 애도하여 눈물을 흘리고 3일 동안 조회를 폐하고 7일 동안 소찬(素饌)을 하고, 예관을 보내어 교서를 가지고 가서 치제하였다. 또 유사에게 명하여 호상(護喪)하여 서울로 돌아오게 하여 본제에 빈소를 차리고는 임금과 세자가 친림하여 조문과 제전을 하고 시호를 문충(文忠)이라 하였다. 관아에서 장례식을 맡고 특별히 하였으니, 공에 대한 사후의 영예가 참으로 유감이 없다고 할 수 있었다. 명년 정유 3월 11일 정유에 사자(嗣子) 도총제공(都摠制公)이 관을 모시고 진주(晉州) 동방등(桐房洞) 감산(坎山) 언덕에 있는 선영 동쪽에 부장(附葬)하였으니, 공의 유언을 따른 것이었다.

공은 천품이 중후하고 식견이 밝고 도량이 넓으며, 조용하고도 간소하여 평생에 빠른 말과 급한 얼굴빛이 없었으나, 단정히 묘당(廟堂)에 있다가 의심나는 것을 판결하고 계책을 정할 때에는 그 기운이 씩씩하여 조금이라도 훼방과 찬양으로써 그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었다. 정승이 되었을 때는 대체(大體)만을 힘쓰고 까다롭게 살피지 않았으며, 아름다운 정책과 은밀한 의견으로 임금에게 도움이 컸으며, 물러나서는 일찍이 남에게 누설을 한 일이 없었다. 자기 몸가짐이나 사람들을 만날 때에 한결같이 정성으로 하되 거짓이 없고, 종족에는 어질고, 벗에는 믿음 있고, 아래로 노복에 이르기까지 모두 은혜에 감복하고, 인재를 추천함에 늘 부족하게 여기고, 지극히 작은 착함도 반드시 취하되 그 작은 허물은 덮어 주었다. 집에 거처할 때는 살림살이를 다스리지 않고 사치를 좋아하지 않으며, 잔치 놀이를 즐겨하지 않았다. 성품이 글읽기를 좋아하여 손에는 책을 놓지 않고 여유있게 휘파람과 시를 읊으면서 침식을 잊고, 경사자집(經史子集)을 연구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심지어는 음양(陰陽)ㆍ의술(醫術)ㆍ성경(星經)ㆍ지리(地理) 등에 이르기까지도 극히 정밀하였으며, 예악과 여러 제도는 모두 공이 상정(詳定)한 것이었다. 후생을 권면하고 의리를 토론함에 매우 부지런히 하였으며, 국정을 담당한 이래로 오로지 문한(文翰)을 맡아서 외교의 사명(辭命)과 문사(文士)의 작품이라도 반드시 공의 윤색(潤色)과 인가(印可)를 거친 뒤에 정하였다. 일찍이 어명을 받아 《태조실록(太祖實錄)》 15권을 수찬해서 올리었다. 스스로 호를 호정(浩亭)이라 하였는데 문집 약간 권이 있다. 미리 유서(遺書)를 써서 상자 속에 간직하여 자손에게 교훈을 하였으되 자세하여 빠진 것이 없었고, 또 상장(喪葬)에는 한결같이《주자가례》에 의거하고 불교 의식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공이 세상을 떠나자 그 집에서 유서가 발견되어 모두 그 말을 따랐다.

부인 이씨(李氏)는 지금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으로 봉작을 받았다.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이름은 구(久)이며 중군도총제부총제(中軍都摠制府摠制)이다. 딸 둘이 있는데 맏딸은 한성부윤 홍섭(洪涉)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경상좌도 도절제사 이승간(李承幹)에게 시집 갔다. 손자 복생(福生)은 어리고, 외손, 다섯은 모두 도절제사의 아들인데 첨전(忝全)은 전(前) 공정고 부사(供正庫副使)요, 신전(愼全)은 사재직장(司宰直長)이요, 다음은 성전(誠全)ㆍ안전(安全)ㆍ항전(恒全)이다. 서자 셋이 있는데 장(長)과 연(延)은 모두 어리고, 영의(永義)는 흥시위사대호군(興侍衛司大護軍)이다. 서녀(庶女) 셋이 있는데 맏딸은 곡산부사(谷山府使) 김질(金秩)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중군사직(中軍司直) 장희걸(張希傑)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어리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진산은 푸르고 / 晉山蒼蒼

진수는 넘실넘실 / 晉水泱泱

아, 아름다운 땅의 신령스러움 / 猗歟地靈

호정을 낳았구나 / 生我浩亭

선생의 자질 / 先生之質

옥처럼 윤택있고 엄준하네 / 玉潤而栗

시원스러운 흉금은 / 洒落胷中

개인 달과 맑은 바람이라 / 霽月光風

하늘이 동방을 도우시어 / 天眷東方

우리 임금을 돕게 하시네 / 俾輔我王

여러 말과 계책을 들어 주시니 / 言聽計從

천년에 한번 나는 기회로다 / 千載一逢

공을 정승으로 삼아 / 爰立作相

백관의 우두머리가 되게 하니 / 百僚是長

공로가 종묘사직에 있고 / 功在廟社

은택은 어려운 백성에 미쳤다오 / 澤被鰥寡

이단을 배격하여 / 觝排異端

도학을 밝히시니 / 唱鳴道學

공이 이 때에 / 公於是時

당나라의 한유가 되고 / 唐之昌黎

두 조정에 계책을 정하여 / 定策兩朝

친히 국사를 도왔으니 / 親扶日轂

공이 이 때에 / 公扵是時

송나라 치규라네 / 宋之稚圭

미연에 밝게 알아 / 明炳幾先

계책이 헛됨이 없었으니 / 筭無遺策

누구와 비슷한가 / 誰其似之

장막 속의 장자방이라오 / 帷幄子房

충의와 정성이 / 忠義精誠

위로 흰 해를 꿰었으니 / 上貫白日

누구와 같은가 / 誰其似之

한 평생 분양이라오 / 終始汾陽

사업이 넓고 덕이 높아 / 業廣德崇

나라의 원로이네 / 宜國黃耇

칠순에 마치시니 / 七旬而終

어찌 장수라 이르리오 / 孰云其壽

팔 다리가 없어진 듯 / 股肱之虧

임금께서 슬퍼하고 / 元首傷悲

철인이 돌아가시니 / 哲人之萎

길가는 나그네도 눈물지었다 / 行路涕洟

아, 선생이시여 / 嗚呼先生

이제 돌아가시다니 / 今也卽亡

이름을 솥에 남기고 / 名留鼎彞

신은 고향으로 돌아갔오 / 神返故鄕

울창한 선영에 / 有欝先塋

길이길이 간직하고 / 其永于藏

돌 다듬어 글을 새겨 / 鑱石銘辭

먼 장래에 보이리 / 用示攸長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저자(연도) 제목 발행처
광주·전남향토사연구협의회(2003) 광주 향토사 연구 (사)광주·전남향토사연구협의회
광주광역시 동구청(2021) 동구의 인물2 광주광역시 동구청
광주시남구역사문화인물간행위원회(2015) 역사를 배우며 문화에 노닐다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01)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Ⅰ 인물과 문헌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01)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Ⅱ 문화유적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14) 광주 남구 마을(동)지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14) 광주 남구 민속지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21) 양림 인물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동구문화원(2014) 광주광역시 동구 마을문화총서 Ⅰ 광주동구문화원
광주문화관광탐험대(2011~16) 문화관광탐험대의 광주견문록Ⅰ~Ⅵ 누리집(20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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