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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강유집 제18권 / 부록 2(附錄二)- 신익전

동강유집 제18권 / 부록 2(附錄二)

유명 조선국 가의대부 예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춘추관사 오위도총부부총관 신공 묘지명 병서 〔有明朝鮮國嘉義大夫禮曹參判兼同知義禁府春秋館事五衛都摠府副摠管申公墓誌銘 幷序〕 [김만기(金萬基)]


인조조(仁祖朝)에 현헌(玄軒) 신 문정공(申文貞公)은 덕업과 문장으로 한 시대의 모범이 되었는데, 그분의 두 아들이 가르침을 받고 미덕을 계승하여 가문의 명성을 떨쳤다. 막내아들 참판공은 조용하고 겸손하게 처신하여 마침내 역경에 굴하지 않고 가주(家主)를 보호하였다고 한다.

참판공의 휘는 익전(翊全), 자는 여만(汝萬), 자호(自號)는 동강(東江)이다. 시조 신숭겸(申崇謙)은 고려 태조를 도와 원훈(元勳)이 되어 평산(平山)을 본적으로 하사받았다. 그 후 본조(本朝 조선)에 들어와서 휘 효(曉)가 우정언을 지내고 용퇴(勇退)하였는데 조정에서 불러도 나아가지 않았다. 휘 세경(世卿)은 사직서 영을 지냈는데, 덕행으로 기묘 제현(己卯諸賢)에게 존중을 받았다. 이 분이 휘 영(瑛)을 낳았는데 의정부 우참찬을 지냈고 시호는 이간공(夷簡公)이다. 이 분이 휘 승서(承緖)를 낳았는데 개성부 도사(開城府都事)를 지냈다. 이 분이 휘 흠(欽)을 낳았는데 영의정을 지냈으니 바로 현헌 문정공이다. 부인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청강(淸江) 선생 제신(濟臣)의 따님인데, 만력(萬曆) 을사년(1605, 선조38)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온순하고 삼가서 장난을 좋아하지 않았다. 학문을 배우자 문장에 대한 이해력이 날로 진전되어 겨우 10세를 넘겼을 때 주자(周子 주돈이(周敦頤))의 〈태극도(太極圖)〉를 보고 두 번째 동그라미를 가리키며,

“이것은 양(陽) 가운데 음(陰)이 있고 음 가운데 양이 있는 것이다.”

하니, 문정공이 매우 기특하게 여겼다. 약관의 나이에 많은 책을 널리 섭렵하여 글재주가 뛰어났다.

병인년(1626), 별시에 급제했는데 창방(唱榜)하기 전에 헌관(憲官)이 근거 없는 논의를 가지고 파방(罷榜)하니 사람들이 모두 공에 대해 탄식하고 애석하게 여겼다. 그러나 공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오직 몸을 삼가고 학문을 닦는데 더욱 힘썼다.

병자년(1636), 조정의 신하들에게 어진 선비를 천거하도록 명하였는데 천거하는 문서에 공의 이름이 올랐다. 당시 청음(淸陰) 김 문정공(金文正公)이 인사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참봉의 첫 번째 후보자로 의망하였다. 그런데 주상께서 공이 예전 성균관에 있을 때 장릉(章陵)을 추숭(追崇)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상소하였다는 이유로 진노하여 김공을 문책하자, 김공은 문재(文才)와 식견으로는 후배들 중에서 얻기 어려운 인재라고 대답하였다.

이해 다시 과거에 급제하고 이듬해 승문원에 보임되었으며, 곧 사국에 들어가 규례대로 봉교로 전임되고 성균관 전적으로 승진하였다. 사간원 정언, 병조 좌랑에 누차 임명되고, 얼마 후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다.

이때 청음 김공이 간신들의 시기를 받아 심한 중상모략을 당하였다. 인사권을 장악한 자가 그 논의를 주도하고 기회를 틈타 독단하여 조금이라도 정도를 지키는 선비는 모두 배척하고 자기편 사람을 기용하는 데 혈안이 되어 친척조차 버젓이 피혐(避嫌)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 기세에 눌려 감히 말하지 못했지만 공은 사은숙배하는 날에 즉시 전관(銓官)이 거리낌없이 사정(私情)을 따르는 실상을 탄핵하자 주상이 가납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인사를 담당하는 자리가 점점 깨끗해지고 공론이 다시 시행되었으니 공은 참으로 군자와 소인이 나아가고 물러나는 데 기여한 것이다. 체차되어 전적에 임명되었다가 옥당에 들어가 부수찬이 되었다.

공이 병조에 있을 때 한 역졸에게 장(杖)을 쳤는데 오랜 뒤에 그가 다른 병으로 죽었다. 이때 전관에게 붙은 헌관이 공에게 앙심을 품고 중상하였는데 심리에 부쳐 진상을 조사하자 결백이 밝혀져 주상이 온전히 석방하라고 특명을 내렸다. 패초에 나아가지 않아 파직되었다가 서용되어 직강에 임명되었다. 교리, 헌납, 수찬, 부교리를 두루 거치고 지제교(知製敎)를 겸하였다.

서장관으로 심양(瀋陽)에 갔는데 당시는 겨우 난리를 겪은 뒤라 국법이 무너져 사행을 수행하는 하례(下隷)들이 공공연히 금지 물품을 소지하여 왕왕 큰소리로 다투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자 공이 개인 소지품을 샅샅이 뒤져 범법자를 다스렸는데, 오랑캐 정명수(鄭命壽)와 사이가 가까운 역관이 자기 죄를 알고 노관(虜館)으로 달아나 나오지 않았다. 공이 마침내 결박해 와서 처벌하니 일행이 두려워하며 숙연해졌다. 정명수가 깊은 원한을 품었지만 공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복명하고 나서 부사(副使)와 함께 심리를 받고 평구역(平丘驛)에 유배되었다. 이는 주상이 명을 내려 주선하게 한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고, 세자가 돌아가 주상을 뵙는 것을 허락받았는데 사신이 왕명을 따르지 않고 제멋대로 청했기 때문이라고 주상이 의심해서였다. 세자가 서울에 들어오자 즉시 풀어주라고 명하였다. 서용되어 교리에 임명되고, 헌납을 거쳐 시강원 문학에 임명되었다.

심양에 들어가게 되자, 조정에서 공이 정명수와 원한을 맺었다는 이유로 체차하도록 명하였다. 평소 공을 시기하던 자가 갑자기 이조에 들어갔는데 공을 배척하여 거산도 찰방(居山道察訪)으로 삼았지만 공은 조금도 표정이나 말로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 임지로 가서 못가에 작은 집을 짓고 그곳에 거처하면서 글읽기를 그치지 않았다. 때때로 혼자 바닷가나 산골짜기에 가서 노래하고 읊조리며 스스로 즐겼다.

임오년(1642), 청나라에 있던 적신(賊臣) 이계(李烓)가 공의 형제와 두세 재신(宰臣)이 명나라를 부지하려는 뜻을 품었다고 무고하였다. 그리하여 모두 심양관(瀋陽館)에 구류되어 앞일을 예측할 수 없었는데, 공은 동요하지 않고 태연자약하였다. 다행히 세자가 구명해 준 덕분에 석방되었다. 이에 앞서 공이 이계와 시험장에 들어갔다가 그의 부정행위를 발견하고는 그와 말을 섞지 않고 나와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 작자는 장차 못할 짓이 없을 것이다.”

하니, 이계가 이 말을 듣고 앙심을 품었다. 공이 명을 받들고 심양에 갈 때 기자묘(箕子廟)에 들러 제사 지냈는데 강개한 말을 많이 하였다. 이계가 마침내 오랑캐에게 고자질하여 사지(死地)에 빠뜨리려 한 것이니, 사람들이 공의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

다시 옥당에 들어갔다가 천거를 받아 의정부 사인에 임명되고, 부응교, 사간으로 누차 옮기고 시강원 필선을 겸하였으며, 다시 사인에 임명되었다. 소현세자가 죽자 춘방의 동료들과 글을 올려 기년복을 입도록 청하였다. 묘소도감 도청(墓所都監都廳)으로 묘소의 일을 감독하고 일을 마치자 통정대부로 가자되었다.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나가서는 외로운 충심으로 분발하여 누락된 군오(軍伍)를 보충하고 포흠(逋欠)난 환곡을 해결하였으며, 불필요한 비용을 절감하여 백성들의 요역을 도와주었다. 그리고 학교를 정비하고 유생들을 시험하니 고을 사람들이 추모하여 비석을 세워 덕을 칭송하였다. 임기가 만료되자 동부승지에 임명되고 체차되어 형조 참의에 임명되었으며 예조, 병조, 호조로 전임되었다. 중간에 다시 승정원에 들어가 차례대로 승진하여 우승지로 옮겼다.

인조가 승하하자 시책문(諡冊文)을 써서 올려 가자를 받고 좌승지를 거쳐 도승지에 올랐다. 이때부터 기해년(1659, 효종10)까지 차례로 예조, 병조, 형조 등의 참판 및 한성부의 당상에 임명된 것이 많게는 서너 번이었고 승정원 도승지에 임명된 것도 세 번이었으며, 조정에 들어와서 도총부와 금오의 직임을 겸임한 것도 여러 번이었다.

경인년(1650, 효종1), 부사(副使)로 연경에 갔다. 돌아온 뒤에 동지춘추관사를 겸하여 《인조실록》의 찬수에 참여하였다. 우윤을 지낼 적에 권세 있는 집안의 종이 법을 어기고는 숨어서 나오지 않는 일이 일어났는데, 공이 나졸을 풀어서 잡아 왔다. 그런데 중재하는 자가 공이 왕실과 인척이라는 혐의를 들어 위태로운 말로 충동질하였다. 공은 분개하여,

“법관이 범법자를 다스리는데 어찌 혐의를 논하는가.”

하고, 마침내 법대로 논죄하였다.

송도 유수(松都留守)로 나갔는데, 백성이 청나라 사신의 요구로 고생하여 몹시 피폐한 데다 많은 폐단이 잇따라 생겼다. 공은 가장 먼저 노인들을 불러 고충을 물은 다음 완화하거나 없앴다. 그리고 호조의 동과 철을 지급해달라고 조정에 요청하여 시전 상인들의 밑천으로 빌려주고 이자를 받아 비용을 충당하니,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모두 도움이 되었다.

개성부는 공납이 과중했는데 요행으로 면제받는 자가 많았다. 그러자 공이 모두 적발하여 균등하게 부과하였다. 마침 조정에서 화폐 사용을 돌연 폐지하자 개성부로 돈이 모이기만 하고 쓸 곳이 없어 많은 상인들이 생업을 잃었다. 공이 조와 쌀을 내는 자에게 돈으로 대납하게 하니 백성이 대단히 기뻐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훗날까지 바꾸지 않고 법으로 삼고 있다.

예로부터 고을 관원의 사적인 비용이 공납에서 지출되었는데, 공이 말하기를,

“이 법이 어찌 사적인 수요를 위해 만든 제도이겠는가.”

하고, 털끝만큼도 사적인 용도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자 창고가 가득차서 백성의 공납을 여러 번 감면해주었는데도 관청의 비용은 풍족하였다. 풍속이 이익을 다투고 소송을 좋아하여 고을 관원이 시비곡직을 혼동하고 송사가 적체되어 비방을 초래하였다. 그런데 공이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 소송 문서가 씻은 듯 사라지고 모두 실정에 맞으니 백성들이 칭송하여,

“합하께서 재직하시는 동안에는 이치에 닿지 않는 일을 요구할 수 없다.”

하였다. 관직을 그만두고 돌아가게 되자 온 성의 백성이 수레를 붙잡고 차마 놓지 못하였으며, 비석에 새겨 떠난 분에 대한 그리움을 담았다.

다시 힘써 외직을 구하여 밀양 부사(密陽府使)가 되었는데, 다스림이 청정하여 어지럽지 않았다. 날마다 고을의 자제들을 불러서 직접 가르치고, 읍내의 충신, 효자, 열녀들의 사적을 찾아서 새로 정표하고 그 후손들에게 양식을 지급하여 고을 백성을 진작하고 권면하였다. 그런데 관찰사가 친척이라는 이유로 피혐하여 체차되었다.

을미년(1655), 다시 개성 유수로 부임하자 공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모두 환영하였고, 공 또한 백성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선정이 더욱 현저하였는데 백성들이 지금까지 잊지 못하고 있다. 공의 자손이 개성부를 지나게 되면 백성들이 너도나도 만나보러 와서는 공이 재직할 때의 일을 말하는데 간혹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이듬해에 체차되어 돌아갔다. 효종이 승하하자 명을 받들어 애책문(哀冊文)을 쓰고 가의대부의 품계에 올랐다.

공은 몇 년 전부터 이미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는데, 경자년(1660, 현종1) 봄에 주상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듣고 병든 몸을 이끌고 대궐에 나아가 유숙하면서 하루에 세 번 문안하는 반열에 나아갔다. 이때부터 몸이 더욱 좋지 않았는데, 얼마 안 되어 감기에 걸려 2월 27일 자택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56세였다. 주상이 예법대로 조문하고 치제하며 부의하라고 명하였다. 처음에는 영평(永平) 거사동(居士洞)에 장사 지냈는데 묏자리가 좋지 않아 양주(楊州) 덕연(德淵) 가로 이장하였다가 무신년(1668) 8월에 충주(忠州) 관청 서쪽 앙암(仰巖) 중방동(中房洞) 묘향(卯向)에 안장하였다.

공은 성품과 행실이 순수하고 돈독하였다. 문정공을 섬기면서 온화하고 기쁜 안색으로 뜻을 다르니, 문정공이 매양 칭찬하여,

“우리 집안의 효자이다.”

하였다. 거상할 때 몸이 수척해지자 보는 사람들이 측은하게 여겼지만 그럴수록 더욱 게을리 않고 예법을 지켰다. 제사 때는 마치 돌아가신 분을 뵐 듯이 오열하였으며, 간혹 지방으로 가서 제사에 참여하지 못하면 영위(靈位)를 설치하여 곡하였는데 늙어서까지 처음처럼 하였다. 효종의 대상(大喪) 때는 이미 연로하고 병들었는데도 6일 동안 죽을 먹고 몇 달 동안 소식(素食)을 했으며 선왕에 대해 언급하면 반드시 흐느끼며 눈물을 떨구었다.

문정공을 섬기듯이 한결같이 형님 동양공(東陽公)을 섬겼는데, 일이 있으면 반드시 여쭌 뒤에 하였으며 날마다 찾아 뵙고 유시(酉時)가 지난 뒤에 물러나왔다. 동양공의 상을 당하자 빈소 곁에서 거상하고 졸곡 뒤에야 돌아왔다.

막내 누이가 중병에 걸려 일 년 내내 투병할 때는 날마다 몸소 보살피며 직접 약을 조제하였다. 어떤 사람이 노쇠한 나이에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만류하자 공이 말하기를,

“내 형제자매가 여덟 명이었는데 누이만 살아 있다. 내가 어찌 차마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공은 가정에서 훈도를 받아 평소 행동이 몹시 조심스러웠다. 예전 옥당에 입직하였을 때 설문청(薛文淸 설선(薛瑄))의 《독서록(讀書錄)》을 읽고 깨달음을 얻어 이때부터 선유(先儒)들의 성리학 서적들을 모두 가져다가 집중하여 사색하였다. 특히 《주역》 읽기를 좋아하여,

“이것보다 즐거운 것은 없다.”

하였다. 독서하는 데 날마다 일정한 분량을 정해 두어 외물이 마음을 어지럽히지 못하게 하니, 집에 양식이 떨어져도 몰랐다. 낙정(樂靜) 조석윤(趙錫胤) 공이 항상 공경하며,

“침착하고 고요하며 선을 좋아하기로는 아무 공만한 사람이 없다.”

하였다. 온화하고 자애로와 남을 대할 적에는 그저 상대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염려하여 잘못을 저지른 자제가 있어도 꾸짖지 않고 차근차근 타일렀다. 그러나 벼슬하여 직무를 맡았을 때는 의지가 확고하여 꺾을 수 없었다.

어린 나이에 글을 지어 문정공의 칭찬을 받았는데 노년에도 더욱 부지런히 힘써 시는 당(唐)나라 두보(杜甫)를 배우고 문은 반고(班固)와 한유(韓愈)를 본받았으며 간간이 명(明)나라 대가들의 글을 참고하였는데, 오랫동안 힘을 기울여 조예가 깊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 수창하거나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문장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다만 택당(澤堂) 이식(李植)과 상국(相國) 홍서봉(洪瑞鳳)은 대단히 칭찬하였는데, 이공이 한번은 동양공(東陽公)에게 말하기를,

“아우님의 문장으로 말하자면 기력은 비록 공보다 조금 못하지만 전아하기로는 더 나은 듯하오.”

하였다. 서법도 단정하고 굳세어 옛사람의 필법을 터득하였는데, 조정의 전례에 관련된 책문과 이름난 인물들의 묘도문자는 대부분 공이 썼다.

부인 양주 조씨(楊州趙氏)는 국구(國舅)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 창원(昌遠)의 따님이자 지돈녕부사 소민공(昭敏公) 존성(存性)의 손녀이다. 단정하고 정숙하여 어려서부터 법도를 따르니 소민공이 어질다고 칭찬하며 다른 손자들보다 특별히 사랑하였다. 공의 집안에 시집와서는 정성을 다하고 예의를 갖추어 시부모를 받드니, 문정공이 항상 훌륭한 며느리라고 칭찬하였다.

공이 조정에 벼슬하여 현달한 뒤에도 더욱 청렴하고 검약하여 가산을 불리는 일을 하지 않았다. 부인은 가난한 상황에서 힘써 가정을 꾸려나갔는데 살림에 법도가 있어 공으로 하여금 가정 형편이 어떠한지 모르게 하였다. 성품이 검소하여 화려하고 사치스런 물건을 몸에 걸치지 않았으며 사양하고 받는 일을 조심하여 터럭만큼도 구차하지 않았다. 감식안이 있고 사리에 통달하여 공이 미덕을 이루도록 도운 일이 많았다.

자의대비(慈懿大妃)가 중전이 되고 부인의 딸이 숭선군(崇善君) 이징(李澂)에게 시집가자 부인은 더욱 두려워하고 조심하여 극히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알아서 잘 처리하였다. 미망인이 되어서는 졸곡한 뒤에도 묽은 죽만 들었으며, 아침저녁으로 올리는 제전(祭奠)은 반드시 손수 차렸다. 슬픔으로 몸을 상하고 고생하다 병이 나서 공이 돌아가신 이듬해 7월에 돌아가시니 향년 55세이다. 공의 무덤에 부장(祔葬)하였다.

슬하에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정(晸)은 문과에 급제하고 병조 참판을 지냈다. 섬(暹)은 진사에 급제하고 빙고 별검을 지냈다. 창(㫤)은 요절했다. 엽(曅)은 진사시에 장원급제했다. 앙(昂)은 장가들기 전에 요절했다. 딸 셋을 두었는데, 장녀는 대사간 이혜(李嵇)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바로 숭선군의 부인이며, 셋째 딸은 선비 윤지빈(尹之贇)에게 출가했다.

정은 먼저 교리 심희세(沈煕世)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셋을 두었는데 징화(徵華), 서화(瑞華), 진사 계화(啓華)이다. 딸은 사인(士人) 이석형(李碩亨)에게 출가했다. 나중에 판관 허섬(許暹)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4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진화(鎭華)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섬은 현감 유성오(柳誠吾)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아들 셋을 두었는데 지화(志華)는 요절했고, 다음은 처화(處華), 몽화(夢華)이다. 창은 시정(寺正) 이선(李䆄)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자식이 없어서 처화를 후사로 삼았다. 엽은 생원 임후(任垕)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이혜는 희유(喜濡)라는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요절했다. 숭선군은 2남 4녀를 두었다. 아들은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이고 딸은 선비 윤세정(尹世鼎)에게 시집갔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나는 예전에 선배와 어른들에게 다음과 같이 들었다. 공은 문정공을 아버지로, 동양위를 형으로 두었으니 그 가문이 든든한 배경이 될 만하였고, 훌륭한 재주도 남보다 뛰어났다. 하지만 도리어 겸손하여 이런 배경을 믿지 않았기에 과시하는 자들에게 조롱과 비웃음을 사기까지 했지만 이 역시 개의치 않았다. 권세를 추종하고 출세하는 데 안달하는 사람을 보면 반드시 이마를 찡그렸으며, 요직을 맡더라도 항상 핑계를 대고 물러날 생각만 하였다.

인조 말엽에 조정의 논의가 갈라지자 더욱 조정에 있고 싶지 않아 외직을 구하여 광주 목사에 보임되었는데, 〈도연명의 귀거래사에 차운하다〔次陶淵明歸去來辭〕〉라는 글에


가장 좋은 것은 세상을 피하는 것이고 / 太上避世

그 다음은 땅을 피하는 것이다 / 其次避地


하였으니, 그 말에 깊은 뜻이 있었다. 광주에서 돌아온 뒤에는 세상이 더욱 험악해지고 공의 처지가 더욱 위태로워 말하기 어려운 일이 있었다. 이에 두문불출하여 사람들과 접촉하는 일이 드물었으며 항상 괄낭지계(括囊之戒)를 지켰다.

신묘년(1651, 효종2), 역적의 옥사가 일어나자 공의 일가에게까지 화가 미쳤지만 오직 공은 평소 사람들에게 충성스럽고 미덥기로 인정을 받았으므로 초연히 비방에서 벗어나 아름다운 명성을 보존할 수 있었다. 상국 정태화(鄭太和)가 지은 공의 만시(輓詩)에


위태로운 처지에서 몸과 명예를 보존하고 / 身名自保危疑地

공손과 신중이 결국 복록의 바탕이 되었네 / 恭謹終爲福祿基


하였는데, 사람들이 공에 대해 잘 말하였다고 하였다.

옛날 우리 선조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이 적소(謫所)에 있는 문정공을 방문하였을 때 공이 곁에서 모시고 있었는데, 열 살의 나이에 어른처럼 응대하자 우리 문원공께서 감탄하고 기특하게 여겨 훗날 큰 인물이 되리라 기대하였다. 우리 종대부(從大父)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이 효묘(孝廟 효종) 초에 어떤 사람의 말 때문에 조정을 떠나게 되었는데, 태학의 유생들이 주상께 글을 올려 만류하도록 청하였다. 그때 생각이 다른 사람이 있었는데, 공이 말하기를,

“선군께서 예전에 ‘사강(士剛 김집)은 군자다운 사람이다’라고 하셨다. 군자다운 사람을 만류하도록 청하는 일이 옳지 않겠는가.”

하고, 자제들에게 가서 참여하라고 명하였다.

나는 공의 행실을 행실을 흠모하였으며 또 소싯적에 공에게 한마디 칭찬을 받은 적이 있다. 지금 공의 아들이 와서 묘지명을 청하는데 감히 글재주가 없다는 이유로 사양할 수 있겠는가. 마침내 선배들에게 들은 것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명(銘)을 짓는다.


몸은 옷을 이기지 못하는 듯 유약하였고 / 退然身若不勝衣

말은 입에서 나오지 않는 듯 어눌하였네 / 吶吶然言若不出諸口

옛날에 그런 사람 있었는데 / 蓋古有其人

공이 실로 옛사람 벗하였네 / 而公實尙友

저 아첨하는 소인들은 / 彼夸毗子

앞다투어 너도나도 달리지만 / 爭騖竝驟

수레바퀴 부서진 적 없다가 / 曾不敝輪

곧바로 기울어 전복된다네 / 旋卽傾踣

공은 겸손한 덕에 힘써 / 公懋謙德

홀로 하늘의 도움을 받아 / 獨受其祐

명성 지켜 생을 마치고 / 旣克令終

자손도 많이 두었다네 / 而孫子多有

내가 공의 묘지명을 써서 / 我銘公之藏

후세에 알리노라 / 維以詔後


보국숭록대부 영돈녕부사 광성부원군 겸 오위도총부도총관 김만기가 짓다.

[주-D001] 두 아들 : 

장남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과 차남 신익전(申翊全)을 가리킨다.

[주-D002] 기묘 제현(己卯諸賢) : 

기묘사화 때 희생을 당한 조광조 등 신진 사류를 가리킨다. 1519년(중종14)에 유교의 왕도 정치를 실현하려다 남곤(南袞), 심정(沈貞)을 위시한 훈구 대신 일파에 의해 뜻이 좌절되어 참화를 입은 조광조(趙光祖), 김정(金淨), 김식(金湜) 등 신진 학자이자 정치가를 통틀어 기묘명현(己卯名賢)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우리나라 정통 성리학의 계승자로 일컬어지고 있다.

[주-D003] 장릉(章陵) : 

선조의 다섯째 아들이자 인조의 생부인 원종(元宗)과 그의 부인인 인헌왕후(仁獻王后)의 능호(陵號)이다.

[주-D004] 오랑캐 정명수(鄭命壽) : 

오랑캐에게 붙어 앞잡이 노릇을 한 정명수(鄭命壽, ?~1653)를 폄하하여 ‘정로(鄭虜)’라고 한 것이다. 평안도 은산(殷山)에서 태어난 천인 출신이다.

[주-D005] 노관(虜館) : 

청나라 사신이 머무는 객관(客館)을 가리킨다.

[주-D006] 임오년 …… 무고하였다 : 

1641년(인조19) 이계가 선천 부사(宣川府使)로 있을 때 명나라 상선과 밀무역을 하다가 청나라에 발각되어 의주에 구금되었다. 청나라 장군 용골대(龍骨大)의 심문을 받고 처형을 당할 위기에 처한 그는 최명길(崔鳴吉), 이경여(李敬輿), 신익성(申翊聖), 이명한(李明漢) 등이 명나라와 밀통한다고 무고하였다.

[주-D007] 경인년 …… 갔다 : 

당시 저자는 의순공주(義順公主)의 호행 부사(護行副使)로 연경에 갔다. 《東江遺集 卷17 附錄1 家狀》

[주-D008] 왕실과 인척이라는 혐의 : 

신익전의 둘째 딸이 왕자 숭선군(崇善君) 이징(李澂)에게 출가했다.

[주-D009] 가장 …… 것이다 : 

본서의 권1에 실려 있는 〈도연명의 귀거래사에 차운하다〉에는 “최선은 세상을 피하는 것이요, 차선은 땅을 피하는 것이라〔太上避世次避地〕”로 되어 있다. 《東江遺集 卷1 次陶淵明歸去來辭》

[주-D010] 괄낭지계(括囊之戒) : 

괄낭의 경계라는 뜻으로, 괄낭은 주머니를 묶는 것처럼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주역》 〈건괘(乾卦) 육사(六四)〉에 “주머니를 묶듯이 하면 허물도 없으며 칭찬도 없으리라.〔括囊, 无咎无譽.〕” 하였다.

[주-D011] 역적의 옥사 : 

김자점의 옥(獄)과 조귀인(趙貴人)의 옥사(獄事)를 말한다. 이때에 사위인 숭선군(崇善君) 이징(李澂)과 조카 신면(申冕)이 연루되었으나 신익전은 화를 면하였다. 신면은 김자점의 일당으로 지목되어 국문 도중 장형을 받다가 쓰러져 죽었다. 김자점은 숭선군의 누이인 효명옹주(孝明翁主)의 시할아버지인데, 김자점의 역모사건이 일어나자 숭선군의 어머니인 조귀인(趙貴人)과 누이가 역모에 관련되었다 하여 조귀인은 사사되고 효명옹주는 서인이 되었고, 숭선군도 이에 연좌되어 강화도에 위리안치되었다.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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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남구문화원(2001)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Ⅰ 인물과 문헌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01)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Ⅱ 문화유적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14) 광주 남구 마을(동)지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14) 광주 남구 민속지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21) 양림 인물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동구문화원(2014) 광주광역시 동구 마을문화총서 Ⅰ 광주동구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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