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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강유집 제18권 / 부록 2(附錄二)- 묘표〔墓表〕 [이민서(李敏敍)]

동강유집 제18권 / 부록 2(附錄二)- 묘표〔墓表〕 [이민서(李敏敍)]


동강(東江) 신공(申公)의 휘는 익전(翊全), 자는 여만(汝萬)이다. 계보는 고려 장절공(壯節公) 숭겸(崇謙)에게서 나왔다. 신씨(申氏)는 처음에 곡성(谷城)을 본적으로 삼았는데 장절공부터 평산(平山)으로 옮겼다.

6대조 효(曉)는 우정언(右正言)을 지냈는데 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물러나 행주(幸州)에 은거하여 서호산인(西湖散人)이라 자호(自號)하였다. 고조 휘 세경(世卿)은 명망과 덕행이 있었는데 관직은 사직서 영에 그쳤다. 증조 휘 영(瑛)은 의정부 우참찬을 지냈으며 시호는 이간(夷簡)이다. 조부 휘 승서(承緖)는 문장과 덕행이 있었으나 단명하였다. 관직은 개성부 도사(開城府都事)에 그쳤는데, 훗날 공의 선친 문정공(文貞公)이 귀하게 되자 규례대로 추은(推恩)하여 증직되었다.

문정공 휘 흠(欽)은 문장과 덕업으로 세상에 이름난 재상이 되어 인조(仁祖)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부인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절도사 제신(濟臣)의 따님으로, 만력(萬曆) 을사년(1605, 선조38) 8월 3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자질이 돈후하고 기운이 순수하여 어려서부터 장난을 좋아하지 않았다. 겨우 10세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선생이 문정공의 자리 곁에 있는 공을 보고서 평범한 아이와 다르다고 칭찬하였다. 공 역시 이때부터 더욱 힘써 평소 반드시 몸가짐을 바로하고 강독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한번은 〈태극도(太極圖)〉의 두 번째 동그라미를 보고,

“이것은 음(陰) 가운데 양(陽)이 있고 양 가운데 음이 있는 것이다.”

하니, 문정공이 대단히 기특하게 여겼다. 조금 성장하자 여러 책을 널리 섭렵하고 문장을 지었다. 당시 세상이 갈수록 어지러워져 공은 과거를 단념하고 한가하게 지내면서 더욱 학업을 닦았다.

병인년(1626, 인조4) 가을, 별시에 급제하였는데 대간이 근거 없는 논의를 가지고 논핵하여 파방(罷榜)하자 공론이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하였다.

병자년(1636), 천거를 받아 참봉에 의망되었다. 예전에 공이 상소를 올려 장릉(章陵) 추숭에 대해 논한 적이 있었는데, 주상이 공의 지난 일로 진노하여 이조(吏曹)를 문책하였다. 당시 이조 판서였던 청음(淸陰) 김 문정공(金文正公)이 공에게 문재와 식견이 있다고 대답하였다. 겨울에 다시 별시에 급제하였으나 이때 병자호란이 일어나 이듬해 가을에 비로소 창방(唱榜)하여 승문원을 거쳐 추천을 받아 사국에 들어갔다.

무인년(1638), 전적에 오르고 차례로 정언, 병조 좌랑, 지평에 임명되었다. 당시 큰 난리를 겪고 겨우 안정을 찾았는데 소인배가 이 틈을 타서 청음 김공을 거꾸러뜨리고자 자기편을 들지 않는 사람은 모두 축출하였다. 인사권을 쥔 자가 몰래 그 논의를 주도하였는데 그가 끌어들여 기용한 자는 대부분 교활하고 간사한 사람들이었다. 공이 처음 대각에 들어가자 제일 먼저 전조가 거리낌없이 사심을 따르는 실상을 논열하니 사론이 통쾌하게 여겼다.

곧 옥당에 들어가 수찬이 되었다. 공이 병조에 있을 때 한 역졸(驛卒)에게 장(杖)을 쳤는데 오랜 뒤에 그가 병으로 죽었다. 전관(銓官)의 당파에 속한 헌관(憲官)이 중상모략할 의도로 탄핵하여 심리를 받게 되었으나 진상을 조사해 보니 사실이 아니므로 주상이 용서하라고 명하였다.

기묘년(1639), 교리에 임명되어 지제교를 겸하고 헌납으로 옮겼다. 겨울에 서장관이 되어 금지한 물품을 사사로이 소지한 자를 대대적으로 수색하여 처벌하니 일행이 모두 숙연해졌다. 사행의 일에 주상의 뜻에 맞지 않는 점이 있었으므로 심리에 회부되어 도배(徒配)를 당했다가 이내 풀려났다.

신사년(1641), 문학이 되었다. 겨울에 전관이 지난날의 유감 때문에 배척하여 거산도 찰방(居山道察訪)에 보임하였다. 이보다 앞서 공이 평소 이계(李烓)가 간사하다고 말하였는데, 이계가 변방 수령으로 있다가 청나라에 구속되자 우리나라의 비밀을 말해주고 살 길을 찾으려 하였다. 그래서 재신(宰臣) 5, 6명이 명나라를 보존하려는 뜻을 품고 있다고 무고하여 공의 형제와 여러 공들이 모두 심양으로 잡혀갔는데, 앞으로의 화를 예측할 수 없었으나 공은 동요하지 않고 태연자약하였다.

계미년(1643) 봄, 비로소 돌아왔다. 그 뒤 계속 옥당에 있으면서 응교로 승진하였으며, 사인, 사간, 겸필선을 역임하였다.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죽자 궁료(宮僚)들과 함께 글을 올려 기년복을 입도록 청하였으며, 원묘(園墓)의 일을 처리한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랐다. 겨울에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나갔는데 공은 외직이야말로 역량을 발휘하여 공헌할 수 있다고 여겨 누락된 군액을 보충하고 포흠(逋欠)난 환곡을 채웠으며, 저축을 확대하고 궁핍한 백성을 구휼하며 유생들에게 강학을 권하니 온 경내가 잘 다스려졌다.

무자년(1648), 체차되어 돌아와서 형조, 예조, 병조의 참의를 역임하였다.

기축년(1649), 인조가 승하하자 시책문(諡冊文)을 쓰고 가선대부로 가자되었다. 승정원에서는 동부승지에서 도승지까지 지냈다.

경인년(1650, 효종1), 부사로 청나라에 갔다. 그간 호조, 예조, 형조의 참판 및 한성부 좌윤과 우윤에 임명된 것이 두세 번에 이르기도 하였고, 금오와 총관을 겸한 것도 여러 번이었다.

신묘년(1651), 《인조실록(仁祖實錄)》의 찬수에 참여하였다. 여름에 개성 유수(開城留守)에 임명되었다. 개성은 서로(西路)의 요충지에 있는데, 오랑캐 사신이 오면 요구하는 것이 다른 고을보다 갑절이나 되어 백성이 감당하지 못하였다. 공은 누적된 포흠을 탕감해 주고 밑천을 빌려주어 백성을 넉넉하게 해 주었다.

돈이 쌓여 제때 유통되지 않아 백성이 몹시 고통스럽게 여기자 공은 세금으로 돈을 받아 쌓인 돈을 흩었다. 녹봉 외에는 관청의 물품을 하나도 손대지 않으니 몇 개월 만에 쌓이고 남아서 백성의 요역을 여러차례 대신하였다. 그리고 송사를 부지런히 판결하여 적체된 문서를 모두 없애니 백성이 몹시 기뻐하였다. 공이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돌아가게 되자 백성이 조정에 천금을 바치면서 유임시켜 달라고 청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비석에 사모하는 마음을 새겼다.

이후 밀양 부사(密陽府使)에 임명되자 오로지 청정(淸靜)하기를 힘썼는데, 얼마 안 되어 면직되었다. 몇 년 동안 한직에서 한가롭게 지내다가 다시 개성 유수가 되었는데 공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고을 백성이 양손을 이마에 얹고서 영접하였다.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더욱 잘 다스려졌으므로 공이 개성에 선정을 베푼 것이 유독 많았다.

병신년(1656), 체차되어 돌아왔다.

기해년(1659), 효종대왕의 애책문(哀冊文)을 쓰고 가의대부에 올랐다. 공은 평소 병에 걸려 허약했는데, 국상을 당해 놀라고 애통해하며 소식(素食)하느라 더욱 초췌해졌다.

경자년(1660, 현종1) 봄, 주상에게 환후가 있어 공은 대궐에 유숙하면서 문안하였는데, 귀가해서 감기에 걸려 2월 27일에 마침내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56세이다. 훗날 자녀들이 귀해지고 공신이 되어 여러 차례 추증을 받아 영의정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영평(永平)에 장사 지냈는데 묏자리가 좋지 않아 양주(楊州)에 임시로 매장했다가 무신년(1668) 8월 갑신일에 충주(忠州) 중방리(中房里) 유좌(酉坐)의 언덕에 안장했다.

부인 조씨(趙氏)는 국구(國舅)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 창원(昌遠)의 딸이다. 14세에 공에게 시집왔는데 단정하고 순결하여 옛적 어진 여인의 지조가 있었다. 공을 섬기면서 절도를 어기지 않았고 자제들을 가르치는 데 법도가 있었다. 또 성품이 현명하고 감식안이 있어 온 집안 부녀자들이 모두 본받았다. 공이 세상을 떠나자 슬퍼하다가 몸을 상하여 신축년(1661, 현종2) 7월 24일에 뒤따라 돌아가셨다. 양주에 임시로 매장했다가 무신년(1668) 8월에 공과 합장하였다.

공은 슬하에 5남 3녀를 두었다. 장남 정(晸)은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판서를 지냈다. 차남 섬(暹)은 빙고 별검을 지냈다. 삼남은 창(㫤)이다. 사남 엽(曅)은 문과에 급제하여 응교를 지냈다. 오남 앙(昂)은 요절했다. 장녀는 대사간 이혜(李嵇), 차녀는 왕자 숭선군(崇善君) 이징(李澂)에게, 삼녀는 사인(士人) 윤지빈(尹之贇)에게 출가했다. 서출 아들 하나가 있는데 온(昷)이다.

정은 먼저 교리 심희세(沈煕世)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2녀를 낳았다. 장남은 징화(徵華)이다. 차남 서화(瑞華)는 현감을 지냈다. 삼남 계화(啓華)는 문과에 급제하여 교리를 지냈다. 장녀는 요절했고, 차녀는 참봉 이석형(李碩亨)에게 출가했다. 나중에 판관 허섬(許暹)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6남 3녀를 낳았다. 아들은 진화(鎭華), 상화(尙華), 석화(錫華), 택화(宅華), 종화(從華), 우화(遇華)이다. 딸은 사인 이익하(李翊夏)와 진사 홍중익(洪重益)에게 출가했고 나머지는 어리다.

섬은 현감 유성오(柳誠吾)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을 낳았다. 장남은 지화(志華), 차남은 처화(處華), 삼남은 몽화(夢華)이다. 창은 시정(寺正) 이선(李䆄)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자식이 없어서 섬의 아들 처화를 후사로 삼았다. 엽은 생원 임후(任垕)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2녀를 낳았다. 아들은 채화(采華)이며, 딸은 사인 홍중성(洪重聖)에게 출가했고 나머지는 어리다. 이혜는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희유(喜濡)이다. 숭선군은 2남 4녀를 낳았다. 장남은 동평군(東平君) 이항(杭)이고 차남은 어리다. 딸은 사인 윤세정(尹世鼎), 윤정호(尹廷虎), 안수정(安壽鼎), 조명봉(趙鳴鳳)에게 출가했다. 온은 5남 1녀를 두었다.

징화는 좌윤 이상(李翔)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서화는 봉사 권회(權誨)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1녀를 낳았다. 계화는 목사 이민장(李敏章)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3녀를 낳았다. 진화는 시정(寺正) 김수증(金壽增)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지화는 참의 유헌(兪櫶)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후사가 없다. 처화는 현감 송광순(宋光洵)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몽화는 유원(柳瑗)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희유는 서탄리(徐坦履)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동평군은 군수 박세장(朴世樟)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 하나를 낳았다.

공은 효도와 우애가 돈독하였다. 어려서부터 항상 문정공의 곁에 있으면서 공손하고 신중하였기에 문정공이 매양 효성스럽다고 칭찬하였다. 거상할 때 곡하고 울며 전(奠)을 올렸는데 주위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형님 동양공을 섬기는 데 있어서 마치 문정공을 섬기는 것처럼 하여 매사를 반드시 여쭌 뒤에 행하였다. 막내 누이가 오랫동안 병마에 시달리자 당시 공은 이미 연로했는데도 날마다 가서 살펴보고 손수 약을 조제하였다.

평소 몸가짐이 의젓하여 차근차근 법도를 따랐으며, 말을 삼가고 과묵하여 남의 과실을 말하지 않았다. 외물에 욕심이 없어 마음에 두지 않았으며, 어진 이와 간사한 이를 분별해야 할 때는 반드시 신중하였다. 관직을 맡았을 때는 조금도 물러나거나 피하지 않아 우뚝 솟은 산과 같았다. 항상 독서를 낙으로 삼아 퇴청하면 반드시 일과를 정해놓고 읽었다.

평소 성품이 욕심없고 겸손하여 관직에 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항상 이르기를,

“전조(銓曹)가 인사권을 쥐고 있어서 권세를 좋아하고 관작을 탐하는 세상 사람들이 몰려간다.”

하였다. 비단 자신이 피했을 뿐만 아니라 자제들에게도 훈계하였으므로 공의 두 아들도 그 경계를 삼가 지켜서 전조의 관직을 받을 때마다 선친의 훈계를 이유로 사양하였으니, 여기에서 공이 스스로 지킨 원칙을 알 수 있다.

공은 왕실과 인척을 맺었는데, 신묘년(1651, 효종2)의 옥사 때 화가 집안에 미치자 어느 곳이나 모두 지극히 위태로웠다. 그렇지만 공은 홀로 초연히 벗어나 사람들이 감히 터럭만큼도 공에게 조금도 누를 끼치지 못하여 마침내 스스로 명성을 지켰으니, 여기서 공의 충성과 신의가 평소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장은 간결하고 자연히 규범에 맞아 어렸을 때 이미 문정공에게 칭찬을 받았다. 택당(澤堂) 이식(李植) 공과 낙정(樂靜) 조석윤(趙錫胤) 공이 모두 누차 칭찬하여,

“관각(館閣)에 있어야 마땅하다.”

하였다.

세상의 대갓집 자제들을 보건대, 교만하면 낭패를 당하고 겸손하면 가문을 유지하는데 항상 그러하다. 공의 경우는 지조와 행실이 돈독하고 확고하니 원칙으로 세울 만하고, 절개를 지키고 겸손하였으니 퇴폐한 습속을 진작시킬 만하다. 문장과 행동은 대대로 지켜오던 것을 실추시키지 않았으나 지위가 그 덕에 걸맞지 않았다. 다 누리지 못한 것을 후손에게 영원히 물려줄 것이니 이 또한 도를 지녔던 옛사람에 가깝지 않겠는가.

나는 공과 삼대에 걸친 우호가 있어 그런대로 공의 의리를 사모할 줄 알기에 마침내 그 유사(遺事)를 편차하여 묘표를 짓는다.

정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이민서가 짓다.

[주-D001] 추은(推恩) : 

관원의 선조에게 관직을 추증(追贈)하는 것을 말한다. 신승서는 아들 신흠이 1품 관원이자 선조조(宣祖朝)의 원종공신(原從功臣)이라는 이유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象村稿 卷25 先府君墓表》

[주-D002] 장릉(章陵) : 

선조의 다섯째 아들이자 인조의 생부인 원종(元宗)과 그의 부인인 인헌왕후(仁獻王后) 구씨(具氏)의 능호(陵號)이다.

[주-D003] 이계가 …… 잡혀갔는데 : 

1641년(인조19) 이계가 선천 부사(宣川府使)로 있을 때 명나라 상선과 밀무역을 하다가 청나라에 발각되어 의주에 구금되었다. 청나라 장군 용골대(龍骨大)의 심문을 받고 처형을 당할 위기에 처한 그는 최명길(崔鳴吉), 이경여(李敬輿), 신익성(申翊聖), 이명한(李明漢) 등이 명나라와 밀통한다고 무고하였다.

[주-D004] 경인년 …… 갔다 : 

당시 저자는 의순공주(義順公主)의 호행 부사(護行副使)로 연경에 갔다. 《東江遺集 卷17 附錄1 家狀》

[주-D005] 양손을 이마에 얹고서 : 

두 손을 이마에 대는 것〔加額〕은 상대방에게 경의를 표하거나 축원하는 의식의 하나이다. 송나라 사마광(司馬光)이 낙양에 사는 15년 동안 입궐할 때마다 백성들이 모두 손을 이마에 얹고 공경스럽게 바라보면서 “이분이 사마 상공(司馬相公)이시다.”라고 하였다. 《宋史 卷336 司馬光列傳》

[주-D006] 신묘년의 옥사 : 

김자점의 옥(獄)과 조귀인(趙貴人)의 옥사(獄事)를 말한다. 이때에 사위인 숭선군(崇善君) 이징(李澂)과 조카 신면(申冕)이 연루되었으나 신익전은 화를 면하였다. 신면은 김자점의 일당으로 지목되어 국문 도중 장형을 받다가 쓰러져 죽었다. 김자점은 숭선군의 누이인 효명옹주(孝明翁主)의 시할아버지인데, 김자점의 역모사건이 일어나자 숭선군의 어머니인 조귀인(趙貴人)과 누이가 역모에 관련되었다 하여 조귀인은 사사되고 효명옹주는 서인이 되었고, 숭선군도 이에 연좌되어 강화도에 위리안치되었다.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저자(연도) 제목 발행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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