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총 72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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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운 선생 문집 중간 서문〔孤雲先生文集重刊序〕[노상직(盧相稷)]
- 세상에서 신라(新羅)를 논할 때면 산에 대해서는 반드시 두류(頭流)와 가야(伽倻)와 청량(淸涼)을 말하고, 물에 대해서는 반드시 동명(東溟)과 동락(東洛)을 말하고, 사람에 대해서는 반드시 문창(文昌) 최 선생(崔先生)을 말한다.대개 나라가 나라답게 되기 위해서는 명산(名山)과 명천(名川)과 명인(名人)이 있어야 한다. 그런 뒤에야 산천의 빼어난 기운을 온전히 받아 이상적인 정치를 행할 수가 있는 것이다.이 세 가지는 또 서로 화합해야만 아름다운 결과를 이루어 낼 수가 있다. 그러한 까닭에 명산과 명천의 빼어난 기운이 두텁게 쌓여서 인재를 배출한 결과 선생이 태어나게 된 것이다.선생도 명산과 명천에 대해서 뜻을 두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은 선생 스스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하늘이 그렇게 만든 것이었다.가령 선생이 끝내 당(唐)나라에서 뜻을 펼 수 있었다면 선생은 당나라 사람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또 신라에서 뜻을 펼 수 있었다면 선생의 자취는 명산과 명천에 두루 미칠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선생은 약관이 되기도 전에 중국 조정에서 실시한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리고 23세 때에는 절강(浙江)의 적도(賊徒)인 황소(黃巢)를 붓으로 꺾었는데, 이에 천자가 어대(魚袋)를 하사하고 천하가 그 문장을 암송하였다.이때에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당나라의 고운(孤雲)으로만 알고 있었으니, 자기가 태어난 나라를 찾아서 다시 돌아갈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는가.선생은 그때 이미 기미를 눈치채고 있었다. 그리하여 어지러운 나라에는 거주하고 싶지 않았으므로은하(銀河)에 열수(列宿)가 벌여 있는 나이에 조서(詔書)를 받들고 금의환향하는 사람이 되었으니, 신라로서는 엄청난 행운을 맞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그러나 신라는 좁은 나라였다. 그러니 사해(四海)의 제일가는 인물을 어떻게 용납할 수가 있었겠는가. 시기하는 자들이 점차 떼를 지어 일어나게 되었으니, 이렇게 해서 선생이 다시 불우하게 되고 말았다.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나는 선생이 불우하게 된 것을 한스럽게 여기지 않는다. 다만 선생이 만난 그 시대의 운수가 길하지 못했던 것을 슬퍼할 따름이다.당나라는 개국 이래 19명의 황제를 거치고 나서 탕산(碭山)의 부로(俘虜)가 새로 하늘의 총애를 받았고, 신라의 삼성(三姓)은 49명이 왕위를 전하고 나서 보리(菩提)의 당부(堂斧)가 거듭 일어나는 가운데 음탕한 여제(女弟)가 왕의 자리에 올랐으니, 선생이 어떻게 한 손으로 이를 부지(扶持)할 수가 있었겠는가.선생이 일단 조정에 편안히 있을 수 없게 된 뒤에는 해운대(海雲臺)와 임경대(臨鏡臺)와 월영대(月影臺)에서 고신(孤臣)의 분개한 회포를 풀 수 있었고, 두류(頭流)의 암문(巖門)에서 널리 구제하려는 뜻을 보였으며, 청량(淸涼)의 기판(棋板)에서는 승패의 운수를 관찰하였고, 가야(伽倻)의 유수(流水)에서는 시비(是非)의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었으니, 이를 통해서 선생이 불행해지면서 산천과 조우하게 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그 뒤 세월이 오래 흐르면서 아름다운 명성이 차츰 인멸됨에 따라 사람들이 단지 근거 없는 소문만을 가지고 자기들끼리 헤아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황엽(黃葉) 청송(靑松)의 구절을 가지고 고려의 왕을 위해 상서한 것이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고려의 후대의 왕도 그 구절이 태조(太祖)의 왕업을 은밀히 도운 것이라고 하여 성무(聖廡)에 올려서 제사를 받게 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홍(洪)과 배(裵)와 신(申)과 복(卜)의 네 공신이 응당 선생보다 앞서야만 했을 것이다.종사(從祀)는 대례(大禮)인 만큼 왕이 독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신하들과 의논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고려에서 신라의 현인을 종사함에 있어서는 선생이 아니면 해당되는 자가 없었을 것이다.선생은 실로 우리 동방에서 처음으로 출현한 문학가였다. 그리고 삼천리강산에 예의의 풍속이 있게 된 것도 선생이 실로 창발시킨 공로라고 해야 할 것이다.혹자는 선생의 문구(文句)에 왕왕 범어(梵語)가 섞여 있는 것을 흠으로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세속에서 숭상하는 것에 대해서는 성인도 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으니, 엽각(獵較)이 바로 그것이다. 선생이 어찌 참으로 불교에 아첨한 사람이었겠는가.선생의 학문은 사술(四術)과 육경(六經)에서 인(仁)을 근본으로 삼고 효(孝)를 시작으로 삼는 것을 종지(宗旨)로 하였다. 선생은 심약(沈約)의 “공자는 단초를 열었고 석가는 극치를 다했다.〔孔發其端 釋窮其致〕”라는 말을 변론하여 말하기를, “부처가 심법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으로 말하면 현묘하고 현묘해서 끝내는 바람이나 그림자를 붙잡기 어려운 것과 같다.〔佛語心法 玄之又玄 終類係風影難行捕〕”라고 하였고,노장(老莊)과 불교가 이도(異道)라고 못 박으면서 말하기를 “공자(孔子)는 인에 의지하고 덕에 의거하였으며, 노자(老子)는 백을 알면서도 흑을 잘 지켰다. 불일을 다시 맞이하여 공색을 분변하니, 교문이 이로부터 계척을 나누게 되었다.〔麟聖依仁乃據德 鹿仙知白能守黑 更迎佛日辨空色 敎門從此分階墄〕”라고 하였으며,장자방(張子房)이 적송자(赤松子)를 따라 노닐었다는 설을 배척하며 말하기를 “그가 가령 신선술을 처음부터 끝까지 배웠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한낮에 하늘로 올라갈 수가 있었겠는가. 학의 등 위의 허깨비 같은 몸이 되고 말았을 뿐이다.〔假學仙有始終 果能白日上升去 止得爲鶴背上幻軀〕”라고 하였다. 이상 세 가지의 말을 가지고 유추해 본다면, 선생이 원한 것은 공자를 배우는 것이었다. 선생이 승려와 어울려 노닐었던 것은 멀리 은둔하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요, 어느 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 숲 사이에 신발을 남겨 두었던 것은 인간 세상에 다시 살지 않겠다는 뜻을 보여준 것일 따름이다. 이 밖에 또 다른 무엇이 있겠는가. 점필(佔畢 김종직(金宗直)) 선생의 “세상에서는 신선이 되어 떠났다 말할 뿐, 빈산에 무덤이 있는 것은 알지 못한다네.〔世上但云尸解去 那知馬鬣在空山〕”라는 시구야말로 천고(千古)의 의혹을 풀 수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선생은 《경학대장(經學隊仗)》이라는 책 1권을 저술하여 성리(性理)를 드러내 밝혔는데, 이는 암암리에 시대를 앞서서 송유(宋儒)의 주장과 서로 부합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세상에서 모두 이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생도 사람들에게 보여 주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고려 시대에는 불경을 애송하는 정도가 더욱 심했기 때문에 《경학대장》을 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선생의 시문조차 읽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러고는 오직 《사산비명(四山碑銘)》 하나가 사방에 전파되었으므로 이를 통해서만 방불한 모습을 구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그래서 고운 선생의 참모습을 사람들은 알지 못하였다.그러다가 아조(我朝)에 들어와서는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이 선생의 지팡이와 신발을 들고 시봉하며 따르고 싶다 발원하였고,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가 문학을 창도한 선생의 공을 찬탄하였으며, 이자(李子 이황(李滉))가 서악정사(西岳精舍)라고 선생의 서원(書院)을 명명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때에도 《경학대장》에 대한 말은 보이지 않았으니, 이는 선생이 또 요부(堯夫)에게 진가를 인정받지 못한 것이었다. 그 밖에 많은 사람들이 불명(佛銘)을 지었다고 분분하게 선생을 비평하는 일이 아직도 끊이지 않고 있는데, 이는 실로 사도(斯道)를 보위하고 이단을 배척한 공이 불명 속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창려(昌黎)가 태전(太顚)을 위해 의복을 남겨 주었지만 그의 〈불골표(佛骨表)〉는 오히려 만고(萬古)의 창언(昌言)이 된 것처럼 선생이 불교를 위해 명(銘)을 지었지만 불교를 배척하는 뜻이 은연중에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후손 최국술(崔國述) 군이 여러 해 동안 선생의 유문(遺文)을 수집한 다음 자금을 내어 간행에 부쳤다. 이는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선생이 불교를 위해 명을 지은 것은 모두 임금의 명을 삼가 받들면서 그 속에 풍간(諷諫)하는 뜻을 부치려 했다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함이요, 선생이 산택(山澤)에서 소요(逍遙)하며 종신토록 돌아오지 않은 것은 명승지에서 지내려 함이 아니라 오직 왕씨(王氏)의 조정에서 몸을 더럽힐까 염려한 나머지 처음에는 미록(麋鹿)으로 벗을 삼다가 끝내는 기러기처럼 아득한 하늘로 날아오르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계원필경(桂苑筆耕)》과 《경학대장》은 이미 각각 1책씩 간행하여 배포하였지만, 《사륙집(四六集)》은 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책에 기재된 것이 이처럼 허술하게 되었으니, 후학이 함께 한스럽게 여기는 바이다.병인년(1926) 6월 하순에 후학 광주(光州) 노상직(盧相稷)은 삼가 쓰다. [주-D001] 어지러운 …… 않았으므로 : 참고로 《논어》 〈태백(泰伯)〉에 “위태로운 나라에는 들어가지 말고, 어지러운 나라에는 거주하지 말아야 한다. 천하에 도가 있으면 자기를 드러내고, 천하에 도가 없으면 숨어야 한다.〔危邦不入 亂邦不居 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주-D002] 은하(銀河)에 …… 나이 : 28세를 가리킨다. 열수(列宿)는 28수(宿)의 별자리를 뜻한다.[주-D003] 탕산(碭山)의 부로(俘虜) : 부로는 송주(宋州) 탕산 출신으로,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후량(後梁)의 태조가 된 주전충(朱全忠)을 가리킨다. 원래 황소(黃巢)의 적도(賊徒) 출신으로 당나라에 귀순하여 사진절도사(四鎭節度使)에 이르고 양왕(梁王)에 봉해졌는데, 그 뒤 소종(昭宗)과 애제(哀帝)를 시해하고 국호를 양(梁)으로 바꿨으나, 만년에 누차 패하면서 세력이 위축되다가 마침내는 차자(次子)인 주우규(朱友珪)에게 시해당하였다. 《新五代史 卷1 梁本紀 太祖》[주-D004] 보리(菩提)의 당부(堂斧) : 불교의 사탑(寺塔)을 가리킨다. 보리는 깨달음이라는 뜻을 지닌 산스크리트어의 음역으로 불교를 의미하고, 당부는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에 나오는 말로 무덤을 뜻하는데, 사원의 탑이 원래 사리(舍利)를 보관하는 곳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참고로 신라 문성왕(文聖王) 17년(855)에는 창림사(昌林寺)에 무구정탑(無垢淨塔)이 세워지고, 경문왕(景文王) 10년(870)에는 보림사(寶林寺)에 남북으로 두 개의 석탑이 세워지고, 3년 뒤에는 높이 23장(丈)의 황룡사(皇龍寺) 9층탑이 개수(改修)되었는데, 그 이듬해인 경문왕 14년에 고운이 당나라에서 등과(登科)하였다.[주-D005] 음탕한 여제(女弟) : 신라 정강왕(定康王)의 여동생인 김만(金曼) 즉 진성여왕(眞聖女王)을 가리킨다. 젊은 미소년을 불러들여 음행을 하는가 하면 각간(角干) 위홍(魏弘)과 사통했다는 설이 전한다.[주-D006] 월영대(月影臺) : 창원(昌原)의 남쪽 바닷가에 있는 대이다. 고운이 일찍이 이곳에서 노닐었다고 하는데, 서거정(徐居正)의 시 〈월영대〉에 이르기를, “월영대 앞에 달은 길게 있건만, 월영대 위에 사람은 이미 갔네. 최고운이 고래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뒤, 흰 구름만 아득하여 찾을 곳이 없구나.〔月影臺前月長在 月影臺上人已去 孤雲騎鯨飛上天 白雲渺渺尋無處〕” 하였다.[주-D007] 두류(頭流)의 암문(巖門) : 두류는 지리산(智異山)을 말하고, 암문은 쌍계사(雙溪寺)를 말한다. 쌍계사의 골짜기 입구에는 두 바위가 서로 마주 서 있어 대문의 모양새를 이루고 있는데, 고운이 이곳에서 글을 읽을 적에 동쪽의 바위에는 ‘쌍계(雙溪)’, 서쪽의 바위에는 ‘석문(石門)’이라고 새겼다고 한다.[주-D008] 청량(淸涼)의 기판(棋板) : 청량산은 안동(安東)에 있는 산이며, 이 산의 풍혈(風穴) 입구에는 두 개의 판이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고운이 앉아서 바둑을 두던 판이라고 한다.[주-D009] 황엽(黃葉) …… 하는데 : 《동국통감(東國通鑑)》에 “고려 현종(顯宗) 경신(庚申) 11년(1020)에 신라의 집사성 시랑(執事省侍郞) 최치원을 내사령(內史令)에 추증하고, 선성(先聖)의 묘정에 종사(從祀)하게 하였다. 당초 태조(太祖)가 잠저(潛邸)에 있을 적에 고운이 보낸 글 중에 “계림에는 누런 잎이 지고, 곡령에는 소나무가 푸르다.〔雞林黃葉 鵠嶺靑松〕”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이와 관련하여 “최치원이 태조의 왕업을 은밀히 도운 그 공을 잊을 수 없다고 하여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이 밖에 《동사찬요(東史纂要)》와 《서악지(西岳誌)》와 〈청학동비명(靑鶴洞碑銘)〉에도 청송(靑松) 황엽(黃葉)의 구절이 각각 언급되어 있는데, 한마디로 청송은 새로이 흥기하는 고려를 가리키고 황엽은 시들어 가는 신라를 가리키는 것으로 고운이 비유했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곡령은 개경(開京)의 송악(松嶽)을 가리킨다.[주-D010] 홍(洪)과 …… 공신 : 고려의 개국 공신(開國功臣)인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을 가리킨다.[주-D011] 엽각(獵較) : 사람들과 경쟁적으로 사냥하여 잡은 짐승으로 제사 지내는 것을 말하는데,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공자가 노나라에서 벼슬할 적에 노나라 사람들이 엽각을 하자 공자 역시 엽각하는 일을 행하였다.〔孔子之仕於魯也 魯人獵較 孔子亦獵較〕”라는 말이 나온다.[주-D012] 사술(四術)과 육경(六經) : 사술은 시(詩)ㆍ서(書)ㆍ예(禮)ㆍ악(樂)의 네 가지 경술(經術)을 말하고, 육경은 《시경》ㆍ《서경》ㆍ《역경(易經)》ㆍ《춘추(春秋)》ㆍ《예기(禮記)》ㆍ《악경(樂經)》을 말한다.[주-D013] 선생은 …… 하였고 : 《고운집》 권2 〈진감 화상 비명(眞監和尙碑銘)〉에 “심약의 말 중에 ‘공자는 단초를 열었고 석가는 극치를 다했다.’라는 말이 있다. 그는 대체(大體)를 안 자라고 이를 만하니, 이 정도는 되어야 비로소 지극한 도에 대해서 더불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불교가 심법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으로 말하면 현묘하고 현묘해서 어떤 이름으로도 이름 지을 수가 없고 어떤 설명으로도 설명할 수가 없다. 비록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의 뜻이나 앉아서 잊는 경지를 체득했다고 할지라도, 끝내는 바람이나 그림자를 붙잡아 매기기 어려운 것처럼 표현하기 어렵다고 해야 할 것이다.〔沈約有云 孔發其端 釋窮其致 眞可謂識其大者 始可與言至道矣 至若佛語心法 玄之又玄 名不可名 說無可說 雖云得月指或坐忘 終類係風影難行捕〕”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불교를 폄하하여 비판한 말이 아닌데, 서문의 저자는 이를 잘못 해석해서 이렇게 인용한 듯하다. 아래의 말도 마찬가지이다.[주-D014] 노장(老莊)과 …… 하였으며 : 《고운집》 권3 〈지증 화상 비명(智證和尙碑銘)〉에 “공자는 인에 의지하고 덕에 의거하였으며, 노자는 백을 알면서도 흑을 잘 지켰다네. 두 종교만이 천하의 법도로 일컬어졌으므로, 석가의 가르침은 경쟁하기 어려웠다네. 그래서 십만 리 밖에서 서역의 거울이 되었다가, 일천 년 후에야 동국의 촛불이 되었다오. 계림은 땅이 오산의 옆에 있는지라, 예로부터 도교와 유교에 기특한 자가 많았다네. 어여쁘게도 희중이 직분에 충실하여, 다시 불일을 맞아 공색을 분변하였다오. 종교의 문이 이로부터 단계별로 나뉘고, 말의 물길이 특색 있게 각자 퍼져 나갔다네.〔麟聖依仁乃據德 鹿仙知白能守黑 二敎徒稱天下式 螺髻眞人難确力 十萬里外鏡西域 一千年後燭東國 鷄林地在鼇山側 儒仙自古多奇特 可憐曦仲不曠職 更迎佛日辨空色 敎門從此分階墄 言路因之理溝洫〕”라는 말이 나온다.[주-D015] 장자방(張子房)이 …… 하였다 : 《고운집》 권2 〈무염화상비명(無染和尙碑銘)〉에 “저 문성후는 한 고조(漢高祖)의 사부가 되어 만호에 봉해지고 열후의 지위에 오른 것을 크게 과시하였다. 그리하여 한나라 재상의 자손으로서 최고의 영광으로 여겼으니 비루한 일이다. 그가 가령 신선술을 처음부터 끝까지 배웠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한낮에 하늘로 올라갈 수가 있었겠는가. 그런데 그것도 중간에 그만두어 학의 등 위의 하나의 허깨비 같은 몸이 되고 말았을 뿐이다. 그러니 어떻게 우리 대사가 처음에 속세를 초월하고 중도에 중생을 제도하고 마지막에 자기 자신을 깨끗이 한 것과 같을 수가 있겠는가.〔彼文成侯爲師漢祖 大誇封萬戶位列侯 爲韓相子孫之極 則㑋矣 假學仙有始終 果能白日上升 去於中止得爲鶴背上一幻軀爾 又焉珿大師拔俗於始 濟衆於中 潔己於終矣乎〕”라는 말이 나온다. 자방(子房)은 한(漢)나라 개국 공신 장량(張良)의 자이고, 문성후(文成侯)는 그의 시호이다.[주-D016] 경학대장(經學隊仗) : 《유설경학대장(類說經學隊仗)》의 약칭이다. 중국인 주경원(朱景元)이 지은 것으로, 고운의 작품이 아니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흠정사고전서총목(欽定四庫全書總目)》 권137 〈자부(子部) 47 유서류존목(類書類存目) 1〉에 《경학대장》 3권의 저자와 책에 대한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주-D017] 이는 …… 것이었다 : 후세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는 말이다. 후세에 제대로 평가해 주는 식견이 높은 사람을 기다린다고 할 때, 흔히 양자운(揚子雲)과 소요부(邵堯夫)를 거론하는데, 자운은 한(漢)나라 양웅(揚雄)의 자이고, 요부는 송(宋)나라 소옹(邵雍)의 자이다.[주-D018] 창려(昌黎)가 …… 것이다 : 고운이 어디까지나 유자(儒者)로서 불교를 배척했다는 주장을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무리하게 논리를 전개하며 견강부회하고 있다는 느낌이 짙다. 창려는 창려백(昌黎伯)에 봉해진 당(唐)나라 한유(韓愈)를 가리킨다. 그가 조주 자사(潮州刺史)로 있을 적에 친하게 지냈던 노승 태전(太顚)과 작별하면서 자신의 의복을 남겨 주었던〔留衣服爲別〕 이야기가 그의 〈여맹상서서(與孟尙書書)〉에 실려 있다.[주-D019] 계원필경(桂苑筆耕)과 …… 없었다 : 고운의 저술은 문집으로는 중국에서 지은 시문집인 《계원필경》 20권,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 5권, 《금체시(今體詩)》 1권, 《오언칠언금체시(五言七言今體詩)》 1권, 《잡시부(雜詩賦)》 1권, 《사륙집(四六集)》 1권이 있고, 국내에서 지은 문집(文集) 30권이 있다. 역사서로는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이 있고, 불교 관계 저술로는 《부석존자전(浮石尊者傳)》 1권,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 1권, 《석이정전(釋利貞傳)》, 《석순응전(釋順應傳)》, 《사산비명(四山碑銘)》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서 《계원필경》 20권과 《법장화상전》 1권, 《사산비명》만이 현전한다. 《정구복 외, 譯註 三國史記 권4 주석편 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762쪽》 고운의 문집은 고려 때부터 여러 차례 간행되었으나 모두 중간에 없어져 버렸다. 본 《고운집》은 《계원필경집》이나 《동문선》에 실린 것과 불교 관계 자료집, 금석문 등에 산재한 것을 한데 모아 놓은 것으로, 사실상 ‘습유(拾遺)’의 형태를 면치 못하고 있으며, 잘못된 글자나 내용이 있음을 면치 못하고 있다. 《최영성, 譯註 崔致遠全集2, 아세아문화사, 1999, 18~19쪽》[주-D020] 노상직(盧相稷) : 1855~1931. 한말(韓末)의 뛰어난 성리학자(性理學者)로,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치팔(致八), 호는 소눌(小訥)이며, 밀양(密陽) 단장면(丹場面) 노곡(蘆谷)에 거주하였다. 허전(許傳)의 문인이다. 성리학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실학(實學)에 관해서도 저술을 남겼다. 저서로는 《소눌집(小訥集)》, 《역대국계고(歷代國界考)》, 《역고(曆考)》, 《육관사의목록(六官私議目錄)》, 《심의고증(深衣考證)》, 《주자성리설절요(朱子性理說節要)》가 있다.
- 2022-04-30 | NO.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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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의후- 영국(詠菊)
- 국화를 읊다有花無酒可堪嗟(유화무주가감차) 술이 없는 꽃이야 어찌 탄식을 참아내며有酒無人亦奈何(유쥬뮤인역내하) 사람 없는 술이야 또한 이내 어찌하리오. 世事悠悠不須問(세상유유뷸수문) 세상 일일랑 멀고 아득하여 모름지기 묻지 않고看花對酒一長歌(간화대주일장가) 활짝 핀 꽃을 보며 잔을 들고 길게 노래하리라.-고의후(高依厚, 1569~?)
- 2020-04-01 | NO.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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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적지법(考績之法) - 경세유표 제4권 / 천관 수제(天官修制)
- 아무 달 아무 날, 광주 저리(光州邸吏) 최모(崔某)는 판관(判官)에게 가만히 뇌물을 주어 그 역가(役價)를 증액(增額)했음을 밝혀내었다.
- 2022-04-29 | NO.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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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제림-到元曉寺
- 十里山行境復佳 십 리 산행(山行)에 경계는 다시 아름다워 雨中元曉夕陽崖 빗속의 원효사(元曉寺) 석양 끝에 이르렀네白雪守壑如相護 흰 눈은 골짝 지켜 서로를 보호하는 듯/瑞石齊天此可階 상서로운 바위 하늘에 가지런히 섬돌 될 만하네遠客靑藜三日是 먼 손님의 푸른 지팡이 삼 일 동안 바르고祗園紅樹四時皆 사찰의 붉은 나무 사계절 동안 같네坐來恰受淸閑意 앉아서 흡족히 맑고 한가로운 뜻 받으니 塵夢幾年野外齊 속세의 몇 년 꿈 들 밖과 나란하네/회운유고(晦雲遺稿)권3고제림(高濟琳 1817~1884)이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무등산에 있는 원효사(元曉寺)에 들리고(到元曉寺) 읊은 시다. 자는 백범(伯範), 호는 회운(晦雲), 본관은 장흥(長興)이다. 고경명(高敬命)의 후손으로 담양 창평에서 출생하였다. 초반에는 과거 공부에 몰두하다가 후에 성리학을 연구하였으며, 특히 조문경(趙文敬)에게 사사하였다. 조병덕의 문하에서 경학과 예학 등 공부하였으며, 기정진에게 서신을 주고받는 등 근친했다. 문집으로는 회운유고(晦雲遺稿)가 있다. 고제림이 무등산을 등반했다. 담양창평 방향에서 먼저 만날 수 있는 원효당(元曉堂), 원효암(元曉庵)이라고도 불리고 있는 원효사에 머물며 힐링하는 시간을 갖는다.
- 2018-07-06 | NO.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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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태필- 객사 광산관
- 光鎭無等山 광산의 진산(鎭山)인 무등산(無等山)은 巍然擅海東 우뚝하여 해동에서 이름을 날리네昔年曾佐幕 옛날에는 좌막(佐幕)을 지냈는데今日又觀風 오늘날 또다시 풍화(風化)를 살피도다夜冷蟲喧座 밤이 차니 벌레가 자리에서 시끄럽고雲收月滿空 구름이 걷히니 달빛 하늘에 가득하구나客窓愁不寐 객창에 근심으로 잠 못 이루니離恨更重重 이별의 한이 더욱 겹치고 겹치누나- 광주읍지고태필(高台弼)은 문종-성종 무렵의 문신이다. 본관은 제주(濟州). 고득종(高得宗)의 아들. 세조 즉위에 공을 세워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에 책록되었으며 <예종실록(睿宗實錄)>의 수찬에 참여했다. 과거에 올라 조선 초기에 사간원 우헌납(司諫院右獻納, 1451), 청주 목사, 이조 참판, 전라도 관찰사, 황해도 관찰사, 개성 유수(開城留守) 등을 지냈다.
- 2018-07-27 | NO.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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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곳간에 도로 넣은 업구렁이
- 광주광역시 광산구 본량동 평촌마을에서 전해 내려오는 업구렁이에 관한 이야기. 광주광역시 광산구 평촌마을에서 전해 내려오는 업구렁이와 집주인에 관한 이야기이다.2018년 4월 27일 광주광역시 광산구 본량동 평촌마을에 거주하는 주민 정선자[여, 77세]의 이야기를 채록하였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주관하는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에 수록되었다. 업(業)은 사람들이 집을 자꾸 뜨거나 팔 것이라는 말을 할 때 나오는데, 사람들 눈에 업이 보이면 집안이 망한다고 한다. 업은 주로 구렁이의 모습인데, 보통의 구렁이가 흑질백장(黑質白章)의 모양으로 등 색깔이 밤색이고 배가 하얀색인데, 업구렁이는 누런색이라고 한다. 옛날 정선자가 어렸을 때 살았던 옆 동네 어느 집에 업구렁이가 나타나서 집안이 망해 갔다고 한다. 이때 집주인이 울타리로 나가려고 하는 누런 구렁이를 보았는데, 구렁이를 다시 곳간으로 돌려놓았더니 집안이 다시 일어났다고 한다. 「곳간에 도로 넣은 업구렁이」의 주요 모티프는 '업신에 대한 믿음'이다. 업신은 집안의 재물을 관장하는 신으로, 주로 업구렁이나 업두꺼비, 업동자, 업족제비 등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민간에서는 업신을 함부로 내쫓거나 해하는 경우, 집안이 망한다고 알려져 있다. 「곳간에 도로 넣은 업구렁이」의 업에 관한 이야기와 옆 마을 집주인에 관한 업 이야기에는 업신이 집안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믿음이 드러나 있다. [참고문헌]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2023-07-31 | NO.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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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지규(科擧之規) 1- 경세유표 제15권 / 춘관 수제(春官修制)
- 과거지규(科擧之規) 1, 과거 규정은 오직 먼저 거액(擧額 : 擧子의 정원)을 정해야 한다. 거액이 정해지면 온갖 폐단이 없어지게 된다.ㆍ남방(무남성의 경우) 거인의 정원(단위 : 명)무남성(武南省)광주(光州)나주(羅州)승주(昇州)광주 12나주 12승주 8장성(長城) 7영광(靈光) 6장흥(長興) 5능성(綾城) 4영암(靈巖) 4보성(寶城) 4담양(潭陽) 4함평(咸平) 4광양(光陽) 2창평(昌平) 5무안(務安) 3흥양(興陽) 3화순(和順) 4강진(康津) 3낙안(樂安) 3남평(南平) 3해남(海南) 4동복(同福) 3옥과(玉果) 3진도(珍島) 2금오(金鰲) 없음곡성(谷城) 2압해(押海) 없음검주(黔州) 없음공 44공 38공 28※ 위의 통계는 112명임.또한 반드시 거액을 정해서 응시하도록 할 것이며, 행검(行檢) 없고 글을 못하는 자는 함부로 응시할 수 없도록 한다.
- 2022-04-29 | NO.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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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산 김공(김성유) 묘갈명 병서 〔光山金公墓碣銘 幷叙〕 -사미헌집
- 광산 김공 묘갈명 병서 〔光山金公墓碣銘 幷叙〕-사미헌집 제10권 / 묘갈명(墓碣銘) : 장복추(張福樞, 1815~1900)광산(光山) 김공(金公)의 휘는 성유(性儒)이며 자는 유선(幼善)이다. 헌종 정미년(1847, 헌종13) 정월 30일에 돌아가셨고, 을축년(1865, 고종2)에 인동부(仁同府) 서쪽 세덕(世德)의 간좌(艮坐) 언덕에 이장하였다. 하루는 공의 증손자 봉상(鳳相)이 가장(家狀)을 지어 묘갈명을 부탁하였는데, 입언군자(立言君子)에게 청탁하지 않고 병들고 피폐한 나에게 반드시 받고자 함은 공을 앎이 나보다 상세한 이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삼가 살펴보건대, 신라 말에 왕자 휘 흥광(興光 성덕왕)은 덕으로 백성을 구제하고 복택을 퍼뜨렸다. 고려 시대에 이르러 대대로 평장사(平章事) 벼슬을 한 이가 있었으며, 그리고 문안공(文安公) 휘 양감(良鑑)은 송(宋)나라에 사신 가서 그곳의 태학(太學)을 본떠 우리나라의 성교(聖校 국자감)를 창설하였다. 조선조에 들어와 국자감(國子監) 생원 효로(孝盧)는 북문(北門)의 화를 만나 광주(光州)로부터 선성(宣城 예안(禮安))에 터를 잡아 은거하면서 벼슬하지 않았는데, 죽어서는 사당에 제향 되었다.중종 때 명신 휘 연(緣)은 호가 운암(雲巖)이다. 징사(徵士)였던 휘 부필(富弼)은 호가 후조당(後凋堂)이고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으며 시호는 문순(文純)으로 호가 읍청정(挹淸亭)인 휘 부의(富儀)와 함께 퇴도(退陶) 선생의 문하에서 배웠으니, 두 분 모두 덕망과 학문으로 세상에 난형난제로 일컬어졌다. 후조당은 읍청정의 아들 휘 해(垓)를 양자로 삼았는데, 해는 내한(內翰)의 관직을 지냈으며 호는 근시재(近始齋)로 임진왜란 때 순절하여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그의 아들 휘 광계(光繼)는 호가 매원(梅園)으로 숭정(崇禎) 후에 여러 번 벼슬에 불러도 나아가지 않았으니, 나의 여헌(旅軒) 선조의 고제(高弟)이다.고조부는 휘가 순의(純義)이고 호는 과헌(果軒)이며 증직이 도헌(都憲 대사헌)이다. 증조부는 휘가 교(嶠)이다. 조부는 휘가 명원(命元)이니 통덕랑에 올랐으며 호가 몽암(蒙菴)으로 인동부(仁同府)의 약목(若木)에 옮겨 우거하였다. 아버지의 휘는 재()이다. 전처는 의성 김씨(義城金氏)로 통덕랑(通德郞)을 지낸 여황(汝晃)의 따님이고 후처는 아주 신씨(鵝州申氏)로 부위(副尉) 벼슬을 지낸 효표(孝標)의 따님이니, 영조 계사년(1773, 영조49)에 공을 낳았다.공은 어려서부터 숙성하여 나이 14세에 아버지 상을 당하여 슬퍼하며 몸이 여위기를 노성한 사람같이 하였다. 어머니를 섬김에 힘을 다하여 겨울에 따뜻하게 해드림과 여름에 시원하게 해드림, 그리고 맛있는 음식을 해드림에 있어서 지극한 마음을 쓰지 않음이 없었으며, 어머니 상을 당하자 척이(戚易 상례의 형식과 내용)의 예를 극진히 하였다. 동생을 우애롭게 대함이 자연스러운 마음에서 나왔으며, 동생이 요절하여 후사가 없는 것을 애달프게 여겨 친히 스스로 양자를 구하여 교육시키고 집안을 세워주었다. 선조를 받드는 일에 있어서 우선적으로 제기(祭器)를 만들었고 묘소의 석물도 두루 갖추었다. 자식을 가르침에 의리에 입각하였다. 책장에는 경서를 가득 채워놓고 빈붕들이 오면 함께 강론하고 토론하여 비록 여러 날 머물러도 항상 부족한 듯이 여겼다. 신극재(申克齋)가 창건한 사창(社倉)을 이건하고 동락서원(東洛書院)의 학계(學契)를 주관하였으니, 이것은 현자를 사모하고 선비를 장려하는 성의에서 나온 것이다.나는 묘령(妙齡 20세 안짝의 나이) 때부터 옆에서 공을 모시면서, 공이 어린 나이 때부터 집안 일을 주관하고 남은 힘으로 글 공부하는 것을 그윽이 보아왔다. 공부한 것을 다른 일에 적용함에 넉넉함이 있었고, 필획은 정밀하고 발랐다. 집안을 다스림과 사람을 대함, 그리고 아래 사람을 부림에 있어서 조리 정연하게 법도가 있었다. 그러나 세도에 문제가 있어서 끝내 곤궁함을 면하지 못한 채 아래 지위에 있었으니, 개탄스러움이 마땅히 어떠하겠는가.부인은 인동 장씨(仁同張氏) 우섭(禹燮)의 따님이며 만회당(晩悔堂) 경우(慶遇)의 후손으로 규방에서의 법도가 있었다. 공보다 2년 전에 태어나서 공보다 7년 뒤에 죽었으며, 묘소는 공과 합장되어 있다. 1남 운교(澐敎)는 수직(壽職)으로 부호군(副護軍)을 지냈으며 3녀는 장석민(張錫敏),정연(鄭埏),허회(許檜)에게 각각 시집을 갔다. 부호군의 아들은 제동(濟東)과 제로(濟櫓)이다. 장석민의 아들 진원(晉遠)은 문과에 급제하여 정자(正字) 벼슬을 지냈으며, 딸은 김원규(金元奎),홍치규(洪致奎),송진수(宋鎭洙)에게 각각 시집을 갔다. 정연의 아들은 태석(台錫)이며 딸은 이탁소(李鐸韶)에게 시집을 갔다. 허회의 아들은 군수를 지낸 식(烒)과 위(煒),첨(燂)이다. 증손자와 현손자는 많아서 기록하지 않는다.명은 다음과 같다.신라와 고려 시대 이래로 / 自羅麗來고위 관직과 큰 덕을 가진 이가 있었네 / 巨卿碩德중세에 다섯 현자가 있어서 / 中世五贒명성을 날리며 집안을 빛냈네 / 揚聲潤色공은 그런 집안에 태어나 / 公又其家타고난 품성이 비상하였네 / 天賦異常몸을 계칙함에는 근검절약하였고 / 飭躬儉約처세에는 적절하게 대처하였네 / 處世圓方효손이 나에게 묘갈명을 구하여 / 孝孫求銘불후하게 남길 것을 도모하네 / 爲圖不朽산은 푸르고 물은 깊은 곳에 / 山蒼水深공의 묘소가 불룩하네 / 公藏之厚백세토록 묘소를 쓸고 성묘하니 / 百世瞻掃믿을 만한 근거가 비석에 있네 / 徵信在玆감히 아부하는 좋은 말을 할 수 있으랴 / 敢有阿好내가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을 기록하네 / 記耳目之[주-D001] 북문(北門)의 화 : 북문(北門)은 신무문(神武門)을 말하니 심정과 남곤 등이 신무문을 열고 일으킨 기묘사화를 말한다.[주-D002] 내한(內翰) : 한림원을 말한다. 여기서는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子)와 검열(檢閱)에 재직한 사실을 두고 말한다.[주-D003] 양자 : 원문 ‘螟兒’는 명령(螟蛉)을 말하는 것으로 양자(養子)를 비유하는 말이다. 벌의 종류 가운데 나나니벌〔蜾蠃〕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항상 자기 새끼가 아닌 명령을 취해다 기른다. 여기에서 유래하여 명령은 양자를 말한다.[주-D004] 신극재(申克齋) : 신익황(申益愰, 1672~1722)을 말한다.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명중(明仲), 호는 극재로 인동(仁同) 출신이다.[주-D005] 동락서원(東洛書院) : 경북 구미시 임수동에 있는 서원이다. 1655년(효종6) 지방유림의 공의로 장현광(張顯光)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76년(숙종2) ‘동락’이라고 사액되었으며,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해오다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5)에 훼철되었다. 1932년 다시 서원으로 복원되었다.
- 2020-12-14 | NO.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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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산 향교 중수기〔光山鄕校重修記〕 - 허백당문집 제4권
- 광산향교 중수기〔光山鄕校重修記〕 - 허백당문집 제4권 : 용재(慵齋) 성현(成俔, 1439~1504)경신년(1500, 연산군6) 11월에 표제(表弟) 상사(上舍) 박이온(朴以溫)이 와서 〈광산학기(光山學記)〉를 지어 달라고 부탁하면서 말하였다.“현감 권군 수평(權君守平)이 부임해 온 이래 마음을 다해 백성을 사랑하고 길러 고달픈 백성들이 은혜를 흡족하게 입었습니다. 그래서 고을의 폐해가 모두 제거되고 지체된 옥송(獄訟)이 남아 있지 않으며, 교활한 관리가 그 간교한 꾀를 부리지 못하고 백성들이 편안하여 제자리를 얻지 못한 사람이 없었으며, 여염이 평온하여 도적이 일어나지 않고 다스림이 공정하고 송사(訟事)가 없어져서 그에 관련된 장부와 문서가 아주 드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늘 공무를 보는 틈틈이 친히 유생(儒生)들을 이끌고 경학(經學)을 담론하여 자상하게 가르쳐 주고 잘 이끌어 주었는데 모두 사리에 합당하였습니다.학교가 예전에는 성안에 있었는데 지대가 낮고 비좁으며 퇴락하였습니다. 현감이 부로(父老)들을 불러들여 말하기를 ‘선성(先聖)의 거소(居所)로는 걸맞지 않으니 어찌 중수하여 새롭게 하지 않겠는가.’라고 하니, 이에 부로들이 모두 ‘명대로 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성의 서쪽 2리쯤에 터를 잡고 공사를 시작하였는데, 백성들이 마치 자식이 어버이의 일에 달려오듯이 연이어 모여들어 몇 달 지나지 않아 낙성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대성전(大聖殿)을 지어 선사(先師)와 십철(十哲)을 위차하고, 또 동무(東廡)와 서무를 지어 70제자와 역대의 여러 현인을 안치하였습니다. 앞에는 명륜당(明倫堂)을 두어 강학하는 장소로 삼았습니다. 명륜당의 동쪽과 서쪽에는 또 협실(俠室)을 두었습니다. 동쪽 협실은 교관(敎官)이 앉아 있는 곳이고, 서쪽 협실은 사마재(司馬齋)라 하였는데 이 고을의 상사(上舍)가 우거하면서 학업을 닦는 곳입니다. 또 동재와 서재를 두었으니 바로 유생들이 거처하는 곳입니다. 서재의 뒤에는 전사청(典祀廳)이 있고 동재의 뒤에는 교관들의 사무실인 아실(衙室)이 있습니다. 이에 신과 사람이 문란하지 않고 스승과 학생이 각각 거처할 집이 있게 되었으며, 당(堂)과 창고와 부엌과 목욕탕이 각각 제자리에 있게 되었는데, 무려 50여 칸이나 되었습니다.학교 앞에 있는 백성의 밭 몇 이랑〔頃〕을 현감이 돈을 내어 사들여 논을 만들기도 하고 채마전을 만들기도 하였으며 종들이 거처할 집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또 옛 향교의 터를 모두 학교에 소속시켜 밭을 만들었습니다. 또 백성의 밭을 사서 절반은 학교의 소유로 들이고 나머지 절반은 사마재의 소유로 들였으며, 또 면포(綿布) 100필과 조곡(租穀) 100섬으로 학생의 비용에 충당하였고, 또 면포 20필, 조곡 20섬은 상사인(上舍人)들의 비용으로 쓰게 하였습니다. 또 사서(四書)ㆍ오경(五經)ㆍ제자(諸子)ㆍ운서(韻書)를 갖추어 책장에 보관해 놓아 후진들이 볼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이때 감사 이공 숙감(李公淑瑊)과 도사 정군 탁(鄭君鐸)이 그 뜻을 가상히 여겨 감영에 있는 면포 40필, 조곡 50여 섬을 내주어 비용에 보태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문풍(文風)이 크게 진작되고 덕치의 교화가 더욱 밝아졌습니다. 고을 사람 중에 준수한 자들이 여기에 와서 유학하였는데, 배울 때에는 성현을 본받아 덕성을 도야하고 행동할 때에는 성(誠)과 경(敬)에 정성을 다하게 하니 점차 인의(仁義)의 도에 교화되어 모두 선한 사람으로 변화하였습니다. 이렇게 된 뒤에는 광산의 학교가 다른 읍에 비해 번창하고 인재가 빈빈하게 배출되었습니다. 선생께서도 광산 김씨(光山金氏)의 후예이니 광산 향교 중수의 전말을 기록하여 그 아름다움을 길이 남기게 해 주십시오.”나는 공자(孔子)의 도가 참으로 지극하다고 생각한다. 하늘과 대지가 만물을 덮어 주고 기르는 것 같아 그 크기를 다하였고 해와 달이 비춰 주는 것 같아 그 밝기를 다하였으며, 하해가 넓고도 깊은 것 같아 측량할 수 없고 산악이 높고 험준한 것 같아 미칠 수가 없다. 고금을 관통하여 변함이 없고 사물을 포괄하여 모두 구비하였으며, 인륜이 이에 의지하여 베풀어지고 정교(政敎)가 이에 의지하여 시행되며, 존비와 상하의 구분이 이 때문에 문란하지 않고 잘못된 말과 간사한 의론이 이 때문에 함부로 횡행하지 않으며, 문명 세계의 백성들이 이 덕분에 옷을 왼쪽으로 여미는 오랑캐의 풍속을 따르는 것을 면하였다. 이러한 공자의 도를 따르면 세상이 다스려지고 따르지 않으면 어지러워진다. 이를 버리면 하루아침도 살지 못하므로 안으로는 경사(京師)로부터 밖으로는 주군현(州郡縣)에 이르기까지 문묘(文廟)를 숭상하여 제사를 지내고 학교를 설립하여 학생을 가르치지 않는 곳이 없으니, 어찌 공연히 그렇게 하는 것이겠는가. 생각건대 우리 동방은 본래 문헌의 나라이며 광산은 진신(縉紳)을 배출하는 지방이었는데, 또 현명한 태수를 만나 추로(鄒魯)의 고장과 같은 성현의 교화를 이루었으니, 촉군(蜀郡) 문옹(文翁)의 풍화(風化)가 오히려 이보다 아래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이 광산의 백성이 된 것이 어찌 행운이 아니겠는가. 광산 백성들의 행운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 조정의 풍교(風敎)에 있어서도 큰 다행일 것이다.[주-D001] 광산 향교 중수기(光山鄕校重修記) : 광산은 광주(光州)의 고호이다. 이 글은 1488년 부임한 광산현감 권수평(權守平)이 향교를 중수한 공적을 칭송한 기문이다. 권수평의 치적과 향교의 규모와 재원 등에 대해서는 이종사촌 동생인 박이온(朴以溫)의 말로 서술하여 백성들의 중론이라는 객관성을 확보하고 있다. 후반부는 공자의 도의 위대성과 향교 중수의 의의에 대하여 강조하고 이를 조정의 풍교로 귀결 짓고 있는데, 대구를 맞추어 서술하여 중후한 맛을 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주-D002] 박이온(朴以溫) : 성현의 이종사촌 동생이다. 성현의 부친 성염조(成念祖)의 전배(前配)는 박고(朴翶)의 딸인 죽산 박씨(竹山朴氏)이고 후배(後配)는 안종약(安從約)의 딸인 순흥 안씨(順興安氏)인데, 성현은 후취 안씨 소생이다. 안종약은 순흥 안씨의 시조 안자미(安子美)로부터 9세(世)에 해당하는 인물로, 장남 안구(安玖)를 비롯하여 4남 2녀를 두었는데, 그중 장녀가 성염조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박수지(朴遂智)에게 시집갔다. 박수지는 함양 박씨(咸陽朴氏)의 시조 박선(朴善)으로부터 12세에 해당하는 인물이고, 박이온은 박수지의 장남으로 진사(進士)였다. 족보에 의하면 박이온의 조부인 박선(朴鮮)이 나주(羅州)에서 광주(光州)로 이거하였다. 박수지는 세자익위사 우익찬(世子翊衛司右翊贊)을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된 인물로 5남을 두었는데, 차례로 이온(以溫), 이양(以良), 이공(以恭), 이근(以謹), 이신(以信)이다. 《昌寧成氏族譜, 肅宗35(1709)》 《順興安氏族譜, 顯宗6(1665)》 《咸陽朴氏世譜, 哲宗1(1850)》[주-D003] 권군 수평(權君守平) : 권수평(?~?)의 본관은 안동, 자는 정숙(正叔)이고, 부친은 권우(權虞)이다. 1483년(성종14)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고봉집(高峯集)》 권2 〈광주향교중수기(光州鄕校重修記)〉에 의하면 “1488년에 병부 시랑(兵部侍郞)으로 있다가 외직으로 나와서 이곳을 맡았다.”라고 하였고, 《연산군일기》 1년(1495) 2월 1일에 병조 정랑으로 상소를 올린 기사가 보인다.정약용의 『목민심서』(권7, 예전 흥학조)에서는 "이로 인하여 유학의 풍교가 크게 진작되고, 유학의 가르침이 더욱 밝아지게 되었다. 단정하고 올바른 사람을 선택하여 향교의 재장(齋長)으로 삼고 사표(師表)가 되어 교생들을 통솔하게 하였다. 그들을 예의로서 대우하여 향촌민들이 예의염치를 알도록 하였다.(由是儒風大振, 文敎益明. 簡選端方, 使爲齋長, 以作表率, 待之以禮, 養其廉恥.)"고 권수평(權守平) 현감의 일화에 대한 평가를 했다. 고을 수령으로서 지방 관학인 향교에 대한 지원이 모범적 사례가 되었다고 본 것이다.광주는 당시 광산으로 불리웠고 읍격은 현이었다. 판관 우윤공이 부민이 쏜 화살에 맞는 사건이 일어나 광산현으로 강등되었고, 이 무렵 부임해 온 권수평 현감은 향민 교화에 그만큼 힘을 다한 것으로 보인다.[주-D004] 제자리를 …… 없었으며 : 대본에는 ‘無不獲其所’로 되어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5 〈광산현(光山縣)〉에는 ‘無一夫不得其所’로 되어 있다.[주-D005] 자식이 …… 달려오듯이 : 백성들이 즐거워하여 자발적으로 부응하였다는 뜻이다. 《시경》 〈대아(大雅) 영대(靈臺)〉에 “서민들이 일을 하는지라 하루가 되지 않아 완성되도다. 빨리 짓지 말라고 하여도 서민들이 자식처럼 오도다.〔庶民攻之, 不日成之. 經始勿亟, 庶民子來.〕”라고 하였는데, 주희의 주에 “민심이 즐거워하여 자식이 어버이 일에 달려오듯이 하여 부르지 않아도 스스로 온 것이다.〔民心樂之, 如子趣父事, 不召自來也.〕”라고 하였다. 《맹자》 〈양혜왕 상(梁惠王上)〉에도 같은 내용이 있다.[주-D006] 선사(先師)와 십철(十哲) : 선사는 선성(先聖)인 공자(孔子)와 선사인 안자(顔子),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孟子)를 아울러 말한 것이고, 십철은 공문십철(孔門十哲)로, 민자건(閔子騫), 염백우(冉伯牛), 중궁(仲弓), 재아(宰我), 자공(子貢), 염유(冉有), 계로(季路), 자유(子游), 자하(子夏), 자장(子張)을 가리킨다. 대성전에 배향한 십철은 《논어》 〈선진(先進)〉에서 열거한 덕행, 언어, 정사, 문학의 4과(科)에 각각 우수한 사람 중에서 안연이 빠지고 자장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주-D007] 70제자와 …… 현인 : 70제자는 공자의 제자 3000명 중 육예(六藝)에 통달한 제자가 72인이었는데 성수(成數)를 들어 말한 것으로, 《사기(史記)》 권67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에 그들의 인적 사항이 기술되어 있다. 역대의 여러 현인은 송조 육현(宋朝六賢)과 동국 십팔현(東國十八賢)을 말한다.[주-D008] 신과 …… 않고 : 대본에는 ‘神人不紊’으로 되어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不紊’이 ‘咸寧’으로 되어 있다.[주-D009] 50여 칸 :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육십여 칸(六十餘間)’으로 되어 있다.[주-D010] 조곡(租穀) 100섬으로 :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 구절 다음에 ‘콩 20섬〔黃豆卄碩〕’이란 구절이 더 있다.[주-D011] 후진들이 …… 베풀었습니다 : 대본에는 ‘以惠後進’으로 되어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資考覽’으로 되어 있다.[주-D012] 이공 숙감(李公淑瑊) : 대본에는 ‘朴公淑瑊’으로 되어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 《문과방목》, 실록 등에 근거하여 ‘朴’을 ‘李’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이숙감은 세종ㆍ연산군 때의 인물로,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차공(次公), 호는 몽암(夢菴)ㆍ양원(楊原) 등이며, 1454년(단종2) 증광 문과에 급제한 이래 홍문관 부제학, 이조 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대제학에 증직되었고,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이숙감은 1499년(연산군5) 수 전라도 관찰사가 된 경력이 있다.[주-D013] 정군 탁(鄭君鐸) : 정탁(1452~1496)의 본관은 온양(溫陽), 자는 경숙(警叔)이며, 지평 충기(忠基)의 아들이다. 1484년(성종15) 진사시에 합격하여 문과에 오른 뒤 호조 정랑 등을 지냈으며, 상의원 첨정(尙衣院僉正)으로 호남에서 봉사하던 중 죽었다.[주-D014] 면포 40필, 조곡 50여 섬 :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綿布卅餘匹, 租穀七十餘碩.’으로 되어 있다.[주-D015] 문풍(文風)이 …… 밝아졌습니다 : 대본에는 ‘文風大振, 德敎益明.’으로 되어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文’이 ‘儒’로, ‘德’이 ‘文’으로 되어 있다.[주-D016] 배울 …… 변화하였습니다 : 대본에는 ‘學則薰陶德性, 行則罄盡誠敬, 漸仁磨義, 皆化於善.’으로 되어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學則持鑽仰之志, 而進德之功不已, 祠則秉對越之誠, 而非僻之心不入.’으로 되어 있다.[주-D017] 광산 김씨(光山金氏)의 후예이니 : 성현의 조모가 광산 김씨로, 광산군 김약항(金若恒, ?~1397)의 딸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주-D018] 문명 세계의 백성들 : 원문은 ‘화하민물(華夏民物)’이다. 화하(華夏)는 중화(中華)와 같은 말이나 여기서는 지역적인 개념보다는 문명과 야만을 구분하여 문명 세상이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민물(民物)은 백성이란 뜻이다.[주-D019] 진신(縉紳) : 대본에는 ‘縉紳’으로 되어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 글자 앞에 ‘衣冠’이 더 있다.[주-D020] 촉군(蜀郡) 문옹(文翁)의 풍화(風化) : 한 경제(漢景帝) 때 문옹이 촉군 태수로 나가서 저잣거리에 학교를 세우고 성적이 우수한 자를 관리로 임용하는 등 획기적인 문교정책을 실시하여 문풍(文風)을 크게 진작한 결과, 촉 지방이 제(齊)ㆍ노(魯)처럼 변화되었던 고사를 말한다. 《漢書 卷89 循吏傳 文翁》
- 2020-09-30 | NO.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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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산(光山)의 호칭을 광주(光州)로 회복하다 - 전라병영계록(全羅兵營啓錄) 1871년
- 광산(光山)의 호칭을 광주(光州)로 회복하다 - 전라병영계록(全羅兵營啓錄)○고종(高宗)/ 고종(高宗) 8년(1871) 9월 초10일 승정원 개탁 : 각사등록(各司謄錄) 절충 장군 수전라도 병마절도사 신 유(柳)지난 8월 24일에 동부승지(同副承旨) 신 이동욱(李東旭)이 담당하여 성첩(成貼)한 유지(有旨)에, “광산(光山)의 호칭을 광주(光州)로 회복하고 병부(兵符)를 개조(改造)한 다음 본영(本營)에 있는 목사(牧使)의 병부 왼쪽 하나도 금군(禁軍)을 정하여 내려 보내니, 경은 경건히 수령하고 옛날 병부를 본 승정원으로 올려 보내어 불태우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개조한 병부 왼쪽 하나를 금군 홍재하(洪在夏)가 싸가지고 왔기에 당일에 경건히 수령한 다음 옛날 병부 왼쪽 하나를 단단히 봉하여 싸서 신의 영(營) 대솔 군관(帶率軍官) 전 낭청(郎廳) 김유각(金有珏)에게 주어 승정원으로 올려 보냅니다. 연유를 치계(馳啓)하오니 잘 아뢰어 주소서.동치 10년 9월 초10일
- 2020-10-01 | NO.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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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산으로 가는 이양원을 전송하며〔送李養源赴光山〕 - 지봉집
- 광산으로 가는 이양원을 전송하며〔送李養源赴光山〕 - 지봉집 제4권 / 시(詩)○칠언율시(七言律詩) : 이수광(李睟光, 1563~1628)호남의 큰 번진에 격문 내리니 무진이라 / 湖徼雄藩是茂珍목민 재능 겸비한 인재 제일로 뽑기 어렵지 / 才兼牧御最難人남양에서 소두와 명성을 나란히 한 날이요 / 齊聲召杜南陽日조정에 기룡이 줄지어 나오는 봄이로세 / 接武夔龍北掖春전후로 수령 제수하는 성은을 거듭 입고 / 前後聖恩銅虎重형제가 색동옷 입고 봉양하니 새롭구나 / 弟兄榮養彩衣新수령 되어 멀리 떠나는 것 한스럽지 않으니 / 一麾遠別吾休恨지방관 되어 부모 봉양하기에 외려 기쁘다오 / 猶喜專城得近親공이 일찍이 남양(南陽)을 다스려 은혜를 끼쳤으며, 승지로 있다가 이 직임을 제수받았다. 게다가 공의 계씨(季氏)가 당시 고산(高山)에 수령이 되어 부모님을 모시고 갔기 때문에 언급한 것이다. [주-D001] 이양원(李養源) : 이경함(李慶涵, 1553~1627)으로,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양원, 호는 만사(晩沙)이다. 1585년(선조18)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 필선, 호조 참판, 병조 참판 등을 역임하였으며, 외직으로 남양 부사(南陽府使), 광주 목사(廣州牧使), 경주 부윤(慶州府尹), 황해 감사(黃海監使) 등을 지냈다. 또한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조회를 가기도 하였으며, 폐모론(廢母論)에 반대하다가 탄핵을 받아 사판(仕版)에서 삭거(削去)되기도 하였다. 《약천집(藥泉集)》 권18에 신도비명이, 《죽천집(竹泉集)》 권33에 묘지명이 실려 있다.[주-D002] 호남(湖南)의 …… 무진(茂珍)이라 : ‘무진’은 광주(光州)의 이칭이다. 곧 이경함을 광주 목사에 제수하는 격문이 내렸다는 것이다.[주-D003] 남양(南陽)에서 …… 날이요 : ‘소두(召杜)’는 소신신(召信臣)과 두시(杜詩)로, 모두 한나라 때 전후로 남양 태수(南陽太守)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당시 백성들은 이들을 칭송하여 “전에는 소부(召父)가 있었는데 뒤에는 두모(杜母)가 있었다.” 하였다. 《漢書 卷89 循吏傳 召信臣》 《後漢書 卷31 杜詩列傳》 곧 원주에 보이듯이 이경함이 남양에서 선정을 펼친 것이 소두와 마찬가지라는 말이다.[주-D004] 기룡(夔龍) : 순(舜) 임금의 두 현신(賢臣)으로, 기는 악관(樂官)이었고 용은 간관(諫官)이었다.[주-D005] 색동옷 입고 봉양하니 : 자식의 효성을 뜻한다. 춘추 시대 초(楚)나라의 노래자(老萊子)는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기어, 일흔 살의 나이에도 자신의 나이가 많은 것을 어버이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색동옷을 입고 어린아이의 놀이를 하여 어버이를 기쁘게 하였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小學 稽古》[주-D006] 공의 계씨(季氏) : 이경함의 막내아우 이경황(李慶滉)이다. 《白軒集 卷40 左參贊鵝川君贈領議政李公諡狀》
- 2020-12-31 | NO.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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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산이씨의 손(孫)을 지킨 종
-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 절골마을에서 전해 내려오는 광산이씨 일가에 관한 이야기. '광산이씨의 손(孫)을 지킨 종'은 광산이씨(光山李氏) 집안에서 살아남은 아이와 아이를 지켰던 종에 관한 이야기이다. 2018년 3월 6일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 절골마을에 거주하는 주민 이우춘[여, 80세]의 이야기를 채록하였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주관하는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에 수록되었다.예전 광산이씨 일가(一家)가 모략을 당해 집안의 사람들이 모두 죽는 사건이 있었다. 일가의 아들 한 명만 살아남았는데, 종이 일가의 그 아들은 등에 업고, 종의 아들은 걷게 하였다. 모략을 꾸민 사람들이 종에게 누가 그 일가의 아들이냐고 물었는데, 종은 걷고 있는 아들이 일가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종 덕분에 광산이씨 일가의 아들은 살아남았고, 종에게서 족보를 건네받았다. 살아남은 아들은 어느 부잣집에서 머슴살이를 하였다. 어느 날 부잣집 주인은 머슴이 족보를 몰래 펴보고, 처마 밑으로 족보를 숨기는 것을 보게 되었다. 주인이 머슴이 숨겼던 족보를 확인해 보니, 머슴이 이름 있는 성씨의 아들인 것을 알게 되었다. 이후, 주인은 광산이씨의 아들을 자신의 딸과 혼인시켰고, 광산이씨 가문은 그 자손이 퍼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광산이씨의 손(孫)을 지킨 종」의 모티프는 '가문의 후손을 지킨 종의 희생'이다. 광산이씨 일가의 멸문지화(滅門之禍)는 정여립(鄭汝立)[1546~1589]의 난에 연루되었던 필문(蓽門) 이선제(李先齊)[1390~1453] 선생의 5대손인 이발(李潑)[1544~1589]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이발은 1573년 문과에 급제하여 1584년 대사간에 올라 동인의 지도자가 되었는데, 당시 서인이었던 송강(松江) 정철(鄭澈)[1536~1593]과 크게 대립하였다. 결국 이발은 정여립의 모반(謀反) 사건인 기축옥사(己丑獄事)에 연루되어 동생 이길(李洁)을 비롯해 3대가 멸족되었다. 다만, 살아남은 일가 사람들이 진도로 피신하였는데, 현지인들의 도움으로 그곳에서 정착하여 가문의 대를 이었다고 한다. 「광산이씨의 손(孫)을 지킨 종」 이야기에서도 광산이씨 한 명이 살아남아 가문을 이을 수 있었는데, 이때 아들을 바친 종의 희생이 가문의 명맥에 크게 기여하였다는 내용과 연관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참고문헌]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 디지털진도문화대전(http://jindo.grandculture.net)[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수정 2023.11.21
- 2023-07-31 | NO.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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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산현 제영시서(光山縣題詠詩序)
- 광산현 제영시서(光山縣題詠詩序)이 고을은 신라 때 자사의 관할하던 곳이다. 이 때에 왕자 휘(諱) 흥(興)광(光)께서 장차 난리가 있을걸 예견하시고 서인(庶人)이 되어 이 고을 서쪽 한 마을에 오시어 거주하셨다. 마침 한 자제를 낳으시니 그 명함은 식(軾)이요 그 직함은 각간(角干)이라, 식(軾)께서 김길(金佶)을 낳으시니 길(佶)께서는 계교로 려조(麗朝)를 도와 통합하는 왕업에 큰 공이 있어 삼중대광 공신이 되시고 佶께서 좌복야(左僕射) 김준(金峻)을 낳으시고 峻께서 평장사(平章事) 문정공 김책(金策)을 낳으시니 策께서 광묘조에 특과로 뽑히어 상이 특별히 의봉문을 열고 어마를 태워 호송하여 영예를 후인에게 보였다. 策께서 평장사 정준(廷俊)을 낳으시고 廷俊께서 문하시중 문안공(文安公) 양감(良鑑)을 낳으시니 良鑑께서는 희령 갑인년에 송나라에 사신으로 들어가 태묘국자도를 본 떠서 본조에 바쳐 우리 동방에 비로소 창건되었다. 그리고 그 때에 송나라의 유명한 소동파(蘇東坡)가 작별하는 시를 지어 주었으니 이르되 "빌어 삼한 사신에게 주노니 새 그림이 낙랑에 이른다"고 하였다. 良鑑께서는 평장사 의원(義元)을 낳으셨다. 義元은 나의 현조(玄祖)이시라. 후인이 우리 시조 왕자공 興光께서 사시던 곳에 평장사가 많이 났다고 하여 동리 이름을 평장동(平章洞)이라 하였다. 이제 내가 제안(提按)으로서 여기에 와 이 사실을 기록함은 비록 우리의 내향(內鄕)이나 누세를 경과하여 그 고을 사람이 이 본말을 자상히 모르는고로 시에 가로되 "문정공이 해동에 어지시니 홀로 천장에 독보로 이르니 평장 한 마을이 오히려 의연하도다" 대덕 십일년 유월 일 제안 황대전고 김 이 씀(광주 평장동 유허비 음기) *김이(金珥) 구휘(舊諱) 김제(金제) 충렬왕(忠烈王)때 제안(提按) 황대전고(黃臺典誥)를 지냈으며 충렬왕(忠烈王) 신사(辛巳)에 음죽감무(陰竹監務)를 지냈으며, 충렬왕(忠烈王) 정미(丁未)에 광산현제영시서(光山縣題詠詩序)를 찬제(撰製)하였다. (見高麗史)
- 2020-05-17 | NO.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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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산현(光山縣)의 수재(守宰)로 나가는 최 학사(崔學士)를 전송하며 - 택당선생 속집 제3권
- 광산현(光山縣)의 수재(守宰)로 나가는 최 학사(崔學士)를 전송하며, 2수. 광주(光州)가 강등되어 광산(光山)으로 불리었는데, 도호부(都護府)의 임무는 그대로 계속 수행하면서 바야흐로 군적(軍籍) 정리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 택당선생 속집 제3권 : 택당(澤堂) 이식(李植 1584~1647)우리 각자 순해의 뜻품고 있다가 / 各有循陔志똑같이 시종신(侍從臣)의 은총을 입었어라 / 俱叨侍禁榮나는 삼장 올렸어도 아직 떠나지 못했는데 / 三章吾未退그대는 백리재(百里宰)로 먼저 나가게 되었구려 / 百里子先行현으로 강등되었어도 목사의 임무는 마찬가지 / 降縣仍同牧백성을 휴식시키려고 군적을 다시 정리하네 / 休民更籍兵경조의 웃음 얘기 익히 알고말고요 / 深知京兆笑의지할 곳 없는 백성 보살펴 주실 줄 믿소이다 / 亦在撫癏惸이(二)호남 땅 일천 가호(家戶) 크나큰 고을 / 湖外千家邑어딜 가도 풍광(風光)이 수려한 촌락 / 風煙處處村풍악 소리 울리는 고대광실 즐비하고 / 歌鍾多巨室꽃과 대 모두가 이름난 정원이라 / 花竹總名園취하거든 임동야도 찾아보시고 / 醉過林東野신 정언과 한 이불 덮고도 자 보구려 / 眠同愼正言노닐기에 평소 지친 답답한 이곳에서 / 平生倦遊處그대 떠나 보내려니 가슴이 아파 오오 / 送子一傷魂[주-D001] 순해(循陔)의 뜻 : 어버이를 봉양하면서 지내려 했다는 말이다. 가사가 없어진 《시경(詩經)》 소아(小雅) 남해(南陔)의 보망시(補亡詩)에 “남쪽 섬돌을 따라 올라가, 난초 캐어 어버이께 바쳐 올리리.[循彼南陔 言采其蘭]”라는 말이 나오는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주-D002] 삼장(三章) : 지방관(地方官)을 청하는 세 차례의 상소문이라는 말이다. 참고로 소식(蘇軾)의 시에 “외직(外職) 청하는 세 차례 상소 글자가 반쯤 기울어져, 혹시 눈병 걸렸냐고 조정의 비웃음을 받았다오.[乞郡三章字半斜 廟堂傳笑眼昏花]”라는 표현이 있다. 《蘇東坡詩集 卷36 七年九月自廣陵召還…》[주-D003] 백리재(百里才) : 지방 장관의 별칭이다.[주-D004] 경조(京兆)의 웃음 얘기 : 한(漢) 나라 준불의(雋不疑)가 경조 윤(京兆尹)이 되었을 때, 그가 퇴근하여 집에 돌아오면 그의 모친이 “오늘은 얼마나 죽을 목숨을 살려 주었느냐?”고 묻곤 하였는데, 억울한 사람들을 많이 구해 주었다고 하면 모친이 기뻐하며 웃고, 반대의 대답이 돌아오면 모친이 노여워하며 밥을 먹지도 않았다는 고사를 말한다. 《漢書 卷71 雋不疑傳》
- 2020-09-27 | NO.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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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 객관에서 묵다〔宿光州館〕- 백담집
- 광주 객관에서 묵다〔宿光州館〕- 백담집 : 구봉령(具鳳齡, 1526~1586)저물녘에 광주 객관을 찾아가니 / 黃昏爲訪光州館신선산에 기우는 달빛 보이려 하네 / 要看仙山月影斜괴롭구나, 조물주가 도리어 시기를 좋아하여 / 苦是天公還好妬은해를 현란하게 어른거리게 하네 / 却敎銀海眩生花- 당시 안질로 고생하였다. - [주-D001] 은해(銀海)를 …… 하네 : 은해는 도가에서 사람의 눈동자를 가리킨 말이다. 소식(蘇軾)의 〈설후서북대벽(雪後書北臺壁)〉 시에 “얼음은 옥루에 얼어 추워서 소름이 돋고, 빛은 은해를 흔들어 현란하게 어른거리네.〔凍合玉樓寒起粟 光搖銀海眩生花〕”라고 하였다.《蘇東坡詩集 卷12》
- 2020-12-14 | NO.6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