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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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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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사절요 제31권 / 신우 2(辛禑二) 광주 왜구 침입
    경신신우 6년(1380), 대명 홍무 13년○ 3월에 왜적이 순천 송광사(松廣寺)를 침범하였다. ○ 왜적이 광주(光州)와 능성(綾城)ㆍ화순(和順) 두 현을 침범하니, 원수 최공철(崔公哲)ㆍ김용휘(金用輝)ㆍ이원계(李元桂)ㆍ김사혁(金斯革)ㆍ정지(鄭地)ㆍ오언(吳彦)ㆍ민백훤(閔伯萱)ㆍ왕승보(王承寶)ㆍ도흥(都興)을 보내어 막았다.
    2022-04-29 | NO.630
  • 고려사절요 제32권 / 신우 3(辛禑三) 노준공
    정묘신우 13년(1387), 대명 홍무 20년○ 겨울 10월에 광주(光州) 사람 노준공(盧俊恭)이 시묘를 살고 3년 복을 입었으므로, 그 마을을 정표하였다. ○ 왜적이 광주(光州)를 침략하여 전 서운정(書雲正) 김언경(金彦卿)의 처 김씨를 잡아 가서 욕보이려하니, 김씨가 땅에 엎어져 적을 꾸짖으며 크게 고함치기를, “너희들은 곧 나를 죽여라. 의리상 욕은 당하지 않겠다." 하여, 드디어 해를 당하였다.
    2022-04-29 | NO.629
  • 고려사절요 제32권 / 신우 3(辛禑三) 왜구 침입
    갑자신우 10년(1384), 대명 홍무 17년○ 11월에 ○ 왜적이 동복현(同福縣)을 침략하니, 도순문사 윤유린(尹有麟), 광주(光州) 목사 김준(金準), 장흥(長興) 부사 유종(柳宗)이 적과 싸워 9급을 베었다.
    2022-04-29 | NO.628
  • 고려사절요 제33권 / 신우 4(辛禑四) 왜구 광주 함락
    무진신우 14년(1388), 대명 홍무 21년○ 가을 7월에 왜적이 광주(光州)를 함락시키니 양광ㆍ전라ㆍ경상도 도체찰사 황보림(皇甫琳)과 양광도 부원수 도흥(都興), 전라도 부원수 김종연, 경상도 부원수 구성로(具成老) 등에게 명하여 구원하게 하였다.
    2022-04-29 | NO.627
  • 고려사절요 제34권 / 공양왕 1(恭讓王一)- 원상 광주 귀양
    경오 2년(1390), 대명(大明) 홍무 23년○ 대간이 번갈아 소를 올려 다시 변안열의 당(黨)을 논핵하니, 을진(乙珍)과 경도(庚道)를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고, 왕안덕(王安德)은 풍주(豐州)로, 우홍수는 인주(仁州)로, 원상(元庠)은 광주(光州)로 귀양보냈다.
    2022-04-29 | NO.626
  • 고려사절요 제35권 / 공양왕 2(恭讓王二)- 유백유 광주 귀양, 정지 졸
    신미 3년(1391), 대명 홍무 24년 6월○ 과거에 성균 사예 유백순(柳伯淳)이 순녕군(順寧君) 담(耼)과 말하기를, “무진년에 여러 장수들이 명령을 받고 요동을 쳤는데 머뭇거리다가 군사를 돌이켰으니, 공이 없는 것 같은데도 지금 도리어 포상을 받았으며, 그 군사를 돌이켰을 때에 왕씨를 세우는 것을 저지하고 아들 창을 세운 것도 또한 형세가 그렇게 된 것인데, 대신이 이 일로 옥에 갇히었다. 옛날 의종 때 조정의 난을 또한 거울로 삼을 만하다. 지금 유자 정도전 등이 나라의 권력을 마음대로 부리려 하니, 혹시 전날과 같은 난이 있다면 우리들이 그 화를 입을까 두렵다." 하였다. 이때에 와서 대간과 형조가 자은사(慈恩寺)에 모여서 담과 백순을 잡아서 신문하니 상세히 자백하므로, 드디어 담은 견주(見州)로 귀양보내어 속적(屬籍 왕실의 족보)을 삭제하고, 백순은 곤장을 쳐서 기주(基州)로 귀양보냈다. 또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 유백유(柳伯濡)가 전법(田法)을 비난하였기 때문에 광주(光州)로 귀양보내었다.10월 ○ 판개성부사 정지(鄭地)가 졸하였다. 정지는 젊을 때 큰 뜻이 있고 자질이 뛰어나게 훌륭하였으며, 성품이 너그럽고 후하였다, 장수가 되어 글 읽기를 좋아하여 대의에 통하였으며, 드나들 때마다 항상 서적을 지니고 다녔다. 윤이ㆍ이초의 옥사에 잡혀서 청주(淸州)에 갇혔는데, 불복하며 말하기를, “이 시중(李侍中 이성계(李成桂))이 대의를 주장하여 군사를 돌이킬 때 내가 이윤(伊尹)ㆍ곽광(霍光)의 고사로써 시중에게 암시한 것은 깊은 뜻이 있었는데 다시 어찌 윤이ㆍ이초에게 편당하였겠느냐." 하면서 말할 때마다 반드시 하늘에 맹서하며 말뜻이 사무쳤는데, 결국 수재 때문에 죄를 면하고 물러나와 광주(光州)에 있었다. 이때에 와서 왕의 부름을 받았는데, 나아가기 전에 졸하였다.
    2022-04-29 | NO.625
  • 고려장과 지게
    광주광역시 북구 생용동 생용마을에서 전해 내려오는 고려장에 관한 이야기. '고려장과 지게'는 고려장(高麗葬)을 이행하려는 아버지와 아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2018년 1월 30일 광주광역시 북구 생용동 생용마을 마을회관에서 주민 이맹순(여, 80세)의 이야기를 채록하였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주관하는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에 수록되었다.어느 사람이 아버지를 고려장하기 위해 지게에 지고 갔다. 이때, 그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따라갔다. 그 사람은 아버지를 땅에 묻고 지게를 그곳에 두고 돌아가려고 했는데, 그 사람의 아들은 지게를 가지고 가자고 말하였다. "지게는 갖고 갑시다!" "뭣 헐라고 그냐?" 그 사람이 이유를 물으니, 아들은 이렇게 답하였다. "아부지도 죽으믄 이 지게에 지고 와서 여어다가 묻을랑게." 그 사람은 아들의 말에 잘못을 깨닫고, 아버지를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왔다.'고려장과 지게'의 주요 모티프는 '고려장이 없어진 계기'이다. 고려장은 늙은 부모를 산 채로 갖다 버리는 악습으로, 고려장을 폐지하는 계기에 관한 설화는 전국적으로 전승되는 광포전설(廣浦傳說)이다. 아버지는 악습에도 불구하고 따르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나, 아들은 지게를 통해 아버지의 불효를 깨닫게 하고 잘못을 고치도록 유도한다. 이 이야기는 아들의 지혜를 통해 효와 인간의 가치를 강조한다. [참고문헌]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7-31 | NO.624
  • 고목나무 속의 구렁이업
    광주광역시 서구 덕흥동 덕흥마을에서 전해 내려오는 구렁이업에 관한 이야기. '고목나무 속의 구렁이업'은 구렁이업으로 우환을 당한 본량댁에 대한 이야기이다. 2018년 3월 6일 광주광역시 서구 덕흥동 덕흥마을에 거주하는 주민 최현섭(남, 84세)의 이야기를 채록하였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주관하는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에 수록되었다. 본량댁이란 사람의 집 뒤에 할아버지당산이 있는데, 옆에 큰 나무 두 그루가 있었다. 동짓날에 죽을 쑤어 놔두었더니, 누군가 죽을 다 먹었다. 이후 나무가 고목이 되자, 집안 사람들은 나무를 베고 땅을 다지는 공사를 하였다. 그런데 나무를 베고 보니 그 속에 큰 구렁이 여러 마리가 죽어 있었다. 그 이후 본량댁에서는 큰아들을 비롯하여 여러 사람들이 연이어 죽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은 이를 보고 구렁이가 업이었는데 죽여서 본량댁 사람들이 화를 입었다고 보았다. '고목나무 속의 구렁이업'의 주요 모티프는 '구렁이업으로 인한 화'이다. 업은 말과 동작과 생각, 그리고 거기에 비롯한 인과를 통칭하는 불교 용어로, 인간 개인의 행동과 사회가 맞물려 돌아가는 장치로 작용된다. 본량댁은 고목을 제거하고 땅을 다지기 위해 고목 안에 있는 구렁이를 죽게 하였다. 이러한 행동이 이후의 일에 영향을 미쳐 집안 사람들이 연달아 죽는 비극으로 이어진 것이다. 「고목나무 속의 구렁이업」 이야기에서 마을 사람들은 구렁이업으로 본량댁이 화를 입게 되었다고 인식하고 있다. [참고문헌] 조용길, 「업(業)에 대한 고찰」(『한국불교학』 5집, 한국불교학회, 1987)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7-31 | NO.623
  • 고봉 기대승 선생의 산소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산동에서 전해 내려오는 고봉 기대승에 관한 이야기.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1527~1572]이 자기가 묻힐 묏자리를 스스로 정했는데, 풍수설에 따라서 기대승의 후손이 끊겼다는 이야기이다. 1989년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산동에 거주하는 기세옥의 이야기를 채록하였으며, 1990년 광주직할시가 간행한 『광주의 전설』에 수록하였다.고봉 기대승이 여름 동안 광산동 청량산(淸凉山)에서 거처한 후에 제자와 함께 산을 내려오다가 자신이 죽은 뒤에 묻힐 묏자리를 정하였다. 제자는 기대승이 정한 자리가 길이 끊긴 절손지지(絶孫之地)로 후손이 끊어질 것이라며, 명당이 아니라고 하였다. 기대승은 제자가 본 풍수가 맞다고 하면서, 형님의 자손들도 자신의 자손이니 후에 양자를 삼아서 집안의 대를 계승하면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묻힐 곳은 백대 향화지지(百代香火之地)로 좋다고 하였다. 기대승은 죽은 뒤에 자신이 정한 자리에 묻혔고, 제자의 견해대로 증손 때 절손(絕孫)이 되어서 양자를 들여 대를 이었다. 기대승의 산소는 현재 광주광역시 광곡(廣谷)[너브실마을] 서북쪽에 있으며, 월봉서원에서 봄과 가을에 제향(祭享)을 지낸다.  「고봉 선생의 산소」는 고봉 기대승과 관련한 일화적 성격의 이야기이다. 고봉 기대승이 자신이 묻힐 묏자리를 직접 정했고, 풍수설로 제자와 논쟁을 벌였다는 내용이다. 기대승은 손이 끊길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사대부 집안의 명예를 잇기 위해서 자신의 묏자리를 정하였다. 이 이야기는 허구적 성격의 설화이기보다는 사실적 성격의 일화이며, 기대승 집안을 중심으로 전승된다. [참고문헌] 장덕순, 『구비문학개설』(일조각, 1971) 『광주의 전설』(광주직할시, 1990)[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7-31 | NO.622
  • 고부민- 幽居述懷
    誅茅新卜博山陽 띠풀 베어 박산의 양지쪽에 초가집 엮으니瑞石層峰看渺茫 서석산 봉우리들이 아련히 떠오르네.屈曲前川如有護 굽이굽이 흐르는 앞 냇물이 감싸주는 것 같고 蕭條村落不成行 적막한 시골이라 나들이에 마음쓸 일 없네.   窮居自任蓬高下 궁벽한 곳, 초가집에 자신을 내맡기고 추려序 何 藜藿場 어찌 거친 쌀에, 명아주, 콩잎 밥상을 꺼리겠는가?春夢幾驚鷄報曉 새벽 닭 울음소리에 봄잠 몇번이나 깨었고秋懷頻見雁呼想 기러기 불음소리에 가을의 회포 몇번이나 느꼈는가?徒傷老大知無奈 다만 늙어감을 어찌할 수 없어 슬퍼하며苦戀明時念不忘 살기 좋은 때를 깊이 바라, 마음속에 잊지 못하고這裡難堪多少恨 그속에 많은 한 감당할 수 없으니 論心誰與共連床 마음을 펴는 데 누구와 더불어 자리를 같이 하리.*병자호란 때 탄음은 동지 오천여명을 규합하고 군량을 모아 서울로 향하던 중, 청주에 이르렀을 때 강화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면서 "하늘의 강기가 해와 달을 떨어뜨리고, 시절의 뜻이 역사를 말살시키는가 (天綱墜日月 時義掃春秋)"라는 시를 짓고 자연에 묻혀서 일생을 마쳤다. 숨어지내는 감회를 읊은 시가 애절하다
    2020-03-31 | NO.621
  • 고부천-객사 광산관
    百里蒼山一日還   백리길 푸른 산을 하루에 돌아오니夢魂仍在水雲間  꿈속의 넋 물과 구름 사이에서 맴도네.斗酒更對神明宰  말(斗)술로 다시 신명한 재상을 대하니爽氣催詩入我班  상쾌한 기운 재촉하여 시를 짓게 하네- 광주읍지,월봉집(月峯集)고부천(高傅川, 1578-1636)의 자는 군섭(君涉)이며 호는 월봉(月峯)이다.
    2018-07-27 | NO.620
  • 고성후-東軒酒席
    十載干戈後 10년의 전란을 거친 후에湖南有此筵 호남(湖南)에서 이 자리를 펼쳤네琴歌是別恨 거문고와 노래는 이별의 한尊酒卽江天  단지 술로 강천(江天)을 마주하네世道今新態 세도의 모습은 새로 바뀌었지만朋情莫更遷 친구간의 정(情)은 바뀌지 마세나光山一夜會 광산(광주)에서의 하룻밤 모임에서休說我狂顚 나의 흥이 과하다 이르지 말게 조선 중기의 문신 죽촌(竹村) 고성후(高成厚 1549∼1602)가  임진왜란이  끝난 어느날 광주 동헌 술자리에서 읊은 시다.
    2018-07-06 | NO.619
  • 고씨 출신 중범이 의거에 나아감을 보내며〔送高出身仲範赴義〕 - 노사집 제2권
    고씨 출신 중범이 의거에 나아감을 보내며〔送高出身仲範赴義〕 - 노사집 제2권 :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 신경을 어찌 봉천과 같은 때라 할까마는 / 神京豈曰奉天時근기에서 어쩌다 출새시 듣게 되었나 / 近甸那聞出塞詩칼 짚고 그대 감에 늙은 간담 격동시키니 / 杖劒君行激老膽제봉에게 후손 있음을 믿을 수가 있네 / 霽峯方信有孫枝[주-D001] 신경(神京)을 …… 할까마는 : 신경은 임금이 계시는 서울을 뜻한다. 봉천(奉天)은 당나라의 덕종이 주자(朱泚)라는 자의 반역 사건으로 인하여 서울에서 나와 피란을 갔던 곳이다. 당시 상황이 임금이 피란을 갈 정도로 화급한 때가 아님을 말하였다.[주-D002] 출새시(出塞詩) : 출새는 변방을 뜻하니, 곧 싸움과 관련된 시를 말한다.[주-D003] 제봉(霽峯) : 고경명(高敬命, 1533~1592)으로,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이순(而順), 호는 제봉이다. 광주(光州)에서 태어났다. 1552년(명종7)에 진사가 되었으며, 1552년 식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공조 좌랑을 시작으로 전적(典籍)ㆍ정언(正言)을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이량(李樑)의 전횡 사건에 연루되어 울산 군수로 좌천된 후 파면되기도 하였으나 다시 기용되어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적도 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 되어 금산(錦山)에서 곽영(郭嶸)의 관군과 함께 왜군에 맞서 싸우다가 작은 아들 고인후(高因厚)와 함께 전사하였다. 문집으로는 《제봉집(霽峯集)》이 있으며, 무등산 유람을 기록한 《유서석록(遊瑞石錄)》이 있다.
    2020-10-04 | NO.618
  • 고용후-海陽城聞琴(해양성에서 거문고를 듣다)
    骨靑年少眼如刀 기골이 푸른 젊은이 날카로운 눈빛으로三峽流泉指下挑 삼협에 흐르는 샘을 손끝으로 연주한다 風露滿空人寂寂 바람과 이슬 허공에 가득하고 인적은 드문데壯元峰上月輪高 장원봉 위에 둥근 달만 높이 떴네-청사집(晴沙集)고용후(高用厚, 1577~1652)의 본관은 장흥, 자는 선행(善行)이며 호는 청사(晴沙)이다. 고경명 장군의 여섯째 막내아들로 의병장이었다. 1605년(선조 38)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606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예조좌랑이 되었다. 그뒤 병조좌랑·병조정랑을 거쳐 1616년(광해군 8) 남원부사가 되었으며, 1624년(인조 2) 고성군수를 역임하였다.1631년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판결사(判決事)를 마지막으로 관직에서 은퇴하였다. 저서로는 《청사집》, 《정기록正氣錄》 등이 있다.《청사집》은 1680년 고부선이 저자의 유문을 수집하여 간행했고, 1759에 2권1책 목판본으로 간행했다.2019.1.18. 수정
    2018-07-10 | NO.617
  • 고운 선생 문집 중간 서문〔孤雲先生文集重刊序〕[노상직(盧相稷)]
    세상에서 신라(新羅)를 논할 때면 산에 대해서는 반드시 두류(頭流)와 가야(伽倻)와 청량(淸涼)을 말하고, 물에 대해서는 반드시 동명(東溟)과 동락(東洛)을 말하고, 사람에 대해서는 반드시 문창(文昌) 최 선생(崔先生)을 말한다.대개 나라가 나라답게 되기 위해서는 명산(名山)과 명천(名川)과 명인(名人)이 있어야 한다. 그런 뒤에야 산천의 빼어난 기운을 온전히 받아 이상적인 정치를 행할 수가 있는 것이다.이 세 가지는 또 서로 화합해야만 아름다운 결과를 이루어 낼 수가 있다. 그러한 까닭에 명산과 명천의 빼어난 기운이 두텁게 쌓여서 인재를 배출한 결과 선생이 태어나게 된 것이다.선생도 명산과 명천에 대해서 뜻을 두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은 선생 스스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하늘이 그렇게 만든 것이었다.가령 선생이 끝내 당(唐)나라에서 뜻을 펼 수 있었다면 선생은 당나라 사람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또 신라에서 뜻을 펼 수 있었다면 선생의 자취는 명산과 명천에 두루 미칠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선생은 약관이 되기도 전에 중국 조정에서 실시한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리고 23세 때에는 절강(浙江)의 적도(賊徒)인 황소(黃巢)를 붓으로 꺾었는데, 이에 천자가 어대(魚袋)를 하사하고 천하가 그 문장을 암송하였다.이때에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당나라의 고운(孤雲)으로만 알고 있었으니, 자기가 태어난 나라를 찾아서 다시 돌아갈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는가.선생은 그때 이미 기미를 눈치채고 있었다. 그리하여 어지러운 나라에는 거주하고 싶지 않았으므로은하(銀河)에 열수(列宿)가 벌여 있는 나이에 조서(詔書)를 받들고 금의환향하는 사람이 되었으니, 신라로서는 엄청난 행운을 맞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그러나 신라는 좁은 나라였다. 그러니 사해(四海)의 제일가는 인물을 어떻게 용납할 수가 있었겠는가. 시기하는 자들이 점차 떼를 지어 일어나게 되었으니, 이렇게 해서 선생이 다시 불우하게 되고 말았다.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나는 선생이 불우하게 된 것을 한스럽게 여기지 않는다. 다만 선생이 만난 그 시대의 운수가 길하지 못했던 것을 슬퍼할 따름이다.당나라는 개국 이래 19명의 황제를 거치고 나서 탕산(碭山)의 부로(俘虜)가 새로 하늘의 총애를 받았고, 신라의 삼성(三姓)은 49명이 왕위를 전하고 나서 보리(菩提)의 당부(堂斧)가 거듭 일어나는 가운데 음탕한 여제(女弟)가 왕의 자리에 올랐으니, 선생이 어떻게 한 손으로 이를 부지(扶持)할 수가 있었겠는가.선생이 일단 조정에 편안히 있을 수 없게 된 뒤에는 해운대(海雲臺)와 임경대(臨鏡臺)와 월영대(月影臺)에서 고신(孤臣)의 분개한 회포를 풀 수 있었고, 두류(頭流)의 암문(巖門)에서 널리 구제하려는 뜻을 보였으며, 청량(淸涼)의 기판(棋板)에서는 승패의 운수를 관찰하였고, 가야(伽倻)의 유수(流水)에서는 시비(是非)의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었으니, 이를 통해서 선생이 불행해지면서 산천과 조우하게 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그 뒤 세월이 오래 흐르면서 아름다운 명성이 차츰 인멸됨에 따라 사람들이 단지 근거 없는 소문만을 가지고 자기들끼리 헤아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황엽(黃葉) 청송(靑松)의 구절을 가지고 고려의 왕을 위해 상서한 것이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고려의 후대의 왕도 그 구절이 태조(太祖)의 왕업을 은밀히 도운 것이라고 하여 성무(聖廡)에 올려서 제사를 받게 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홍(洪)과 배(裵)와 신(申)과 복(卜)의 네 공신이 응당 선생보다 앞서야만 했을 것이다.종사(從祀)는 대례(大禮)인 만큼 왕이 독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신하들과 의논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고려에서 신라의 현인을 종사함에 있어서는 선생이 아니면 해당되는 자가 없었을 것이다.선생은 실로 우리 동방에서 처음으로 출현한 문학가였다. 그리고 삼천리강산에 예의의 풍속이 있게 된 것도 선생이 실로 창발시킨 공로라고 해야 할 것이다.혹자는 선생의 문구(文句)에 왕왕 범어(梵語)가 섞여 있는 것을 흠으로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세속에서 숭상하는 것에 대해서는 성인도 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으니, 엽각(獵較)이 바로 그것이다. 선생이 어찌 참으로 불교에 아첨한 사람이었겠는가.선생의 학문은 사술(四術)과 육경(六經)에서 인(仁)을 근본으로 삼고 효(孝)를 시작으로 삼는 것을 종지(宗旨)로 하였다. 선생은 심약(沈約)의 “공자는 단초를 열었고 석가는 극치를 다했다.〔孔發其端 釋窮其致〕”라는 말을 변론하여 말하기를, “부처가 심법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으로 말하면 현묘하고 현묘해서 끝내는 바람이나 그림자를 붙잡기 어려운 것과 같다.〔佛語心法 玄之又玄 終類係風影難行捕〕”라고 하였고,노장(老莊)과 불교가 이도(異道)라고 못 박으면서 말하기를 “공자(孔子)는 인에 의지하고 덕에 의거하였으며, 노자(老子)는 백을 알면서도 흑을 잘 지켰다. 불일을 다시 맞이하여 공색을 분변하니, 교문이 이로부터 계척을 나누게 되었다.〔麟聖依仁乃據德 鹿仙知白能守黑 更迎佛日辨空色 敎門從此分階墄〕”라고 하였으며,장자방(張子房)이 적송자(赤松子)를 따라 노닐었다는 설을 배척하며 말하기를 “그가 가령 신선술을 처음부터 끝까지 배웠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한낮에 하늘로 올라갈 수가 있었겠는가. 학의 등 위의 허깨비 같은 몸이 되고 말았을 뿐이다.〔假學仙有始終 果能白日上升去 止得爲鶴背上幻軀〕”라고 하였다. 이상 세 가지의 말을 가지고 유추해 본다면, 선생이 원한 것은 공자를 배우는 것이었다. 선생이 승려와 어울려 노닐었던 것은 멀리 은둔하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요, 어느 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 숲 사이에 신발을 남겨 두었던 것은 인간 세상에 다시 살지 않겠다는 뜻을 보여준 것일 따름이다. 이 밖에 또 다른 무엇이 있겠는가. 점필(佔畢 김종직(金宗直)) 선생의 “세상에서는 신선이 되어 떠났다 말할 뿐, 빈산에 무덤이 있는 것은 알지 못한다네.〔世上但云尸解去 那知馬鬣在空山〕”라는 시구야말로 천고(千古)의 의혹을 풀 수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선생은 《경학대장(經學隊仗)》이라는 책 1권을 저술하여 성리(性理)를 드러내 밝혔는데, 이는 암암리에 시대를 앞서서 송유(宋儒)의 주장과 서로 부합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세상에서 모두 이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생도 사람들에게 보여 주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고려 시대에는 불경을 애송하는 정도가 더욱 심했기 때문에 《경학대장》을 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선생의 시문조차 읽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러고는 오직 《사산비명(四山碑銘)》 하나가 사방에 전파되었으므로 이를 통해서만 방불한 모습을 구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그래서 고운 선생의 참모습을 사람들은 알지 못하였다.그러다가 아조(我朝)에 들어와서는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이 선생의 지팡이와 신발을 들고 시봉하며 따르고 싶다 발원하였고,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가 문학을 창도한 선생의 공을 찬탄하였으며, 이자(李子 이황(李滉))가 서악정사(西岳精舍)라고 선생의 서원(書院)을 명명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때에도 《경학대장》에 대한 말은 보이지 않았으니, 이는 선생이 또 요부(堯夫)에게 진가를 인정받지 못한 것이었다. 그 밖에 많은 사람들이 불명(佛銘)을 지었다고 분분하게 선생을 비평하는 일이 아직도 끊이지 않고 있는데, 이는 실로 사도(斯道)를 보위하고 이단을 배척한 공이 불명 속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창려(昌黎)가 태전(太顚)을 위해 의복을 남겨 주었지만 그의 〈불골표(佛骨表)〉는 오히려 만고(萬古)의 창언(昌言)이 된 것처럼 선생이 불교를 위해 명(銘)을 지었지만 불교를 배척하는 뜻이 은연중에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후손 최국술(崔國述) 군이 여러 해 동안 선생의 유문(遺文)을 수집한 다음 자금을 내어 간행에 부쳤다. 이는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선생이 불교를 위해 명을 지은 것은 모두 임금의 명을 삼가 받들면서 그 속에 풍간(諷諫)하는 뜻을 부치려 했다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함이요, 선생이 산택(山澤)에서 소요(逍遙)하며 종신토록 돌아오지 않은 것은 명승지에서 지내려 함이 아니라 오직 왕씨(王氏)의 조정에서 몸을 더럽힐까 염려한 나머지 처음에는 미록(麋鹿)으로 벗을 삼다가 끝내는 기러기처럼 아득한 하늘로 날아오르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계원필경(桂苑筆耕)》과 《경학대장》은 이미 각각 1책씩 간행하여 배포하였지만, 《사륙집(四六集)》은 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책에 기재된 것이 이처럼 허술하게 되었으니, 후학이 함께 한스럽게 여기는 바이다.병인년(1926) 6월 하순에 후학 광주(光州) 노상직(盧相稷)은 삼가 쓰다. [주-D001] 어지러운 …… 않았으므로 : 참고로 《논어》 〈태백(泰伯)〉에 “위태로운 나라에는 들어가지 말고, 어지러운 나라에는 거주하지 말아야 한다. 천하에 도가 있으면 자기를 드러내고, 천하에 도가 없으면 숨어야 한다.〔危邦不入 亂邦不居 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주-D002] 은하(銀河)에 …… 나이 : 28세를 가리킨다. 열수(列宿)는 28수(宿)의 별자리를 뜻한다.[주-D003] 탕산(碭山)의 부로(俘虜) : 부로는 송주(宋州) 탕산 출신으로,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후량(後梁)의 태조가 된 주전충(朱全忠)을 가리킨다. 원래 황소(黃巢)의 적도(賊徒) 출신으로 당나라에 귀순하여 사진절도사(四鎭節度使)에 이르고 양왕(梁王)에 봉해졌는데, 그 뒤 소종(昭宗)과 애제(哀帝)를 시해하고 국호를 양(梁)으로 바꿨으나, 만년에 누차 패하면서 세력이 위축되다가 마침내는 차자(次子)인 주우규(朱友珪)에게 시해당하였다. 《新五代史 卷1 梁本紀 太祖》[주-D004] 보리(菩提)의 당부(堂斧) : 불교의 사탑(寺塔)을 가리킨다. 보리는 깨달음이라는 뜻을 지닌 산스크리트어의 음역으로 불교를 의미하고, 당부는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에 나오는 말로 무덤을 뜻하는데, 사원의 탑이 원래 사리(舍利)를 보관하는 곳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참고로 신라 문성왕(文聖王) 17년(855)에는 창림사(昌林寺)에 무구정탑(無垢淨塔)이 세워지고, 경문왕(景文王) 10년(870)에는 보림사(寶林寺)에 남북으로 두 개의 석탑이 세워지고, 3년 뒤에는 높이 23장(丈)의 황룡사(皇龍寺) 9층탑이 개수(改修)되었는데, 그 이듬해인 경문왕 14년에 고운이 당나라에서 등과(登科)하였다.[주-D005] 음탕한 여제(女弟) : 신라 정강왕(定康王)의 여동생인 김만(金曼) 즉 진성여왕(眞聖女王)을 가리킨다. 젊은 미소년을 불러들여 음행을 하는가 하면 각간(角干) 위홍(魏弘)과 사통했다는 설이 전한다.[주-D006] 월영대(月影臺) : 창원(昌原)의 남쪽 바닷가에 있는 대이다. 고운이 일찍이 이곳에서 노닐었다고 하는데, 서거정(徐居正)의 시 〈월영대〉에 이르기를, “월영대 앞에 달은 길게 있건만, 월영대 위에 사람은 이미 갔네. 최고운이 고래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뒤, 흰 구름만 아득하여 찾을 곳이 없구나.〔月影臺前月長在 月影臺上人已去 孤雲騎鯨飛上天 白雲渺渺尋無處〕” 하였다.[주-D007] 두류(頭流)의 암문(巖門) : 두류는 지리산(智異山)을 말하고, 암문은 쌍계사(雙溪寺)를 말한다. 쌍계사의 골짜기 입구에는 두 바위가 서로 마주 서 있어 대문의 모양새를 이루고 있는데, 고운이 이곳에서 글을 읽을 적에 동쪽의 바위에는 ‘쌍계(雙溪)’, 서쪽의 바위에는 ‘석문(石門)’이라고 새겼다고 한다.[주-D008] 청량(淸涼)의 기판(棋板) : 청량산은 안동(安東)에 있는 산이며, 이 산의 풍혈(風穴) 입구에는 두 개의 판이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고운이 앉아서 바둑을 두던 판이라고 한다.[주-D009] 황엽(黃葉) …… 하는데 : 《동국통감(東國通鑑)》에 “고려 현종(顯宗) 경신(庚申) 11년(1020)에 신라의 집사성 시랑(執事省侍郞) 최치원을 내사령(內史令)에 추증하고, 선성(先聖)의 묘정에 종사(從祀)하게 하였다. 당초 태조(太祖)가 잠저(潛邸)에 있을 적에 고운이 보낸 글 중에 “계림에는 누런 잎이 지고, 곡령에는 소나무가 푸르다.〔雞林黃葉 鵠嶺靑松〕”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이와 관련하여 “최치원이 태조의 왕업을 은밀히 도운 그 공을 잊을 수 없다고 하여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이 밖에 《동사찬요(東史纂要)》와 《서악지(西岳誌)》와 〈청학동비명(靑鶴洞碑銘)〉에도 청송(靑松) 황엽(黃葉)의 구절이 각각 언급되어 있는데, 한마디로 청송은 새로이 흥기하는 고려를 가리키고 황엽은 시들어 가는 신라를 가리키는 것으로 고운이 비유했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곡령은 개경(開京)의 송악(松嶽)을 가리킨다.[주-D010] 홍(洪)과 …… 공신 : 고려의 개국 공신(開國功臣)인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을 가리킨다.[주-D011] 엽각(獵較) : 사람들과 경쟁적으로 사냥하여 잡은 짐승으로 제사 지내는 것을 말하는데,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공자가 노나라에서 벼슬할 적에 노나라 사람들이 엽각을 하자 공자 역시 엽각하는 일을 행하였다.〔孔子之仕於魯也 魯人獵較 孔子亦獵較〕”라는 말이 나온다.[주-D012] 사술(四術)과 육경(六經) : 사술은 시(詩)ㆍ서(書)ㆍ예(禮)ㆍ악(樂)의 네 가지 경술(經術)을 말하고, 육경은 《시경》ㆍ《서경》ㆍ《역경(易經)》ㆍ《춘추(春秋)》ㆍ《예기(禮記)》ㆍ《악경(樂經)》을 말한다.[주-D013] 선생은 …… 하였고 : 《고운집》 권2 〈진감 화상 비명(眞監和尙碑銘)〉에 “심약의 말 중에 ‘공자는 단초를 열었고 석가는 극치를 다했다.’라는 말이 있다. 그는 대체(大體)를 안 자라고 이를 만하니, 이 정도는 되어야 비로소 지극한 도에 대해서 더불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불교가 심법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으로 말하면 현묘하고 현묘해서 어떤 이름으로도 이름 지을 수가 없고 어떤 설명으로도 설명할 수가 없다. 비록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의 뜻이나 앉아서 잊는 경지를 체득했다고 할지라도, 끝내는 바람이나 그림자를 붙잡아 매기기 어려운 것처럼 표현하기 어렵다고 해야 할 것이다.〔沈約有云 孔發其端 釋窮其致 眞可謂識其大者 始可與言至道矣 至若佛語心法 玄之又玄 名不可名 說無可說 雖云得月指或坐忘 終類係風影難行捕〕”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불교를 폄하하여 비판한 말이 아닌데, 서문의 저자는 이를 잘못 해석해서 이렇게 인용한 듯하다. 아래의 말도 마찬가지이다.[주-D014] 노장(老莊)과 …… 하였으며 : 《고운집》 권3 〈지증 화상 비명(智證和尙碑銘)〉에 “공자는 인에 의지하고 덕에 의거하였으며, 노자는 백을 알면서도 흑을 잘 지켰다네. 두 종교만이 천하의 법도로 일컬어졌으므로, 석가의 가르침은 경쟁하기 어려웠다네. 그래서 십만 리 밖에서 서역의 거울이 되었다가, 일천 년 후에야 동국의 촛불이 되었다오. 계림은 땅이 오산의 옆에 있는지라, 예로부터 도교와 유교에 기특한 자가 많았다네. 어여쁘게도 희중이 직분에 충실하여, 다시 불일을 맞아 공색을 분변하였다오. 종교의 문이 이로부터 단계별로 나뉘고, 말의 물길이 특색 있게 각자 퍼져 나갔다네.〔麟聖依仁乃據德 鹿仙知白能守黑 二敎徒稱天下式 螺髻眞人難确力 十萬里外鏡西域 一千年後燭東國 鷄林地在鼇山側 儒仙自古多奇特 可憐曦仲不曠職 更迎佛日辨空色 敎門從此分階墄 言路因之理溝洫〕”라는 말이 나온다.[주-D015] 장자방(張子房)이 …… 하였다 : 《고운집》 권2 〈무염화상비명(無染和尙碑銘)〉에 “저 문성후는 한 고조(漢高祖)의 사부가 되어 만호에 봉해지고 열후의 지위에 오른 것을 크게 과시하였다. 그리하여 한나라 재상의 자손으로서 최고의 영광으로 여겼으니 비루한 일이다. 그가 가령 신선술을 처음부터 끝까지 배웠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한낮에 하늘로 올라갈 수가 있었겠는가. 그런데 그것도 중간에 그만두어 학의 등 위의 하나의 허깨비 같은 몸이 되고 말았을 뿐이다. 그러니 어떻게 우리 대사가 처음에 속세를 초월하고 중도에 중생을 제도하고 마지막에 자기 자신을 깨끗이 한 것과 같을 수가 있겠는가.〔彼文成侯爲師漢祖 大誇封萬戶位列侯 爲韓相子孫之極 則㑋矣 假學仙有始終 果能白日上升 去於中止得爲鶴背上一幻軀爾 又焉珿大師拔俗於始 濟衆於中 潔己於終矣乎〕”라는 말이 나온다. 자방(子房)은 한(漢)나라 개국 공신 장량(張良)의 자이고, 문성후(文成侯)는 그의 시호이다.[주-D016] 경학대장(經學隊仗) : 《유설경학대장(類說經學隊仗)》의 약칭이다. 중국인 주경원(朱景元)이 지은 것으로, 고운의 작품이 아니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흠정사고전서총목(欽定四庫全書總目)》 권137 〈자부(子部) 47 유서류존목(類書類存目) 1〉에 《경학대장》 3권의 저자와 책에 대한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주-D017] 이는 …… 것이었다 : 후세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는 말이다. 후세에 제대로 평가해 주는 식견이 높은 사람을 기다린다고 할 때, 흔히 양자운(揚子雲)과 소요부(邵堯夫)를 거론하는데, 자운은 한(漢)나라 양웅(揚雄)의 자이고, 요부는 송(宋)나라 소옹(邵雍)의 자이다.[주-D018] 창려(昌黎)가 …… 것이다 : 고운이 어디까지나 유자(儒者)로서 불교를 배척했다는 주장을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무리하게 논리를 전개하며 견강부회하고 있다는 느낌이 짙다. 창려는 창려백(昌黎伯)에 봉해진 당(唐)나라 한유(韓愈)를 가리킨다. 그가 조주 자사(潮州刺史)로 있을 적에 친하게 지냈던 노승 태전(太顚)과 작별하면서 자신의 의복을 남겨 주었던〔留衣服爲別〕 이야기가 그의 〈여맹상서서(與孟尙書書)〉에 실려 있다.[주-D019] 계원필경(桂苑筆耕)과 …… 없었다 : 고운의 저술은 문집으로는 중국에서 지은 시문집인 《계원필경》 20권,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 5권, 《금체시(今體詩)》 1권, 《오언칠언금체시(五言七言今體詩)》 1권, 《잡시부(雜詩賦)》 1권, 《사륙집(四六集)》 1권이 있고, 국내에서 지은 문집(文集) 30권이 있다. 역사서로는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이 있고, 불교 관계 저술로는 《부석존자전(浮石尊者傳)》 1권,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 1권, 《석이정전(釋利貞傳)》, 《석순응전(釋順應傳)》, 《사산비명(四山碑銘)》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서 《계원필경》 20권과 《법장화상전》 1권, 《사산비명》만이 현전한다. 《정구복 외, 譯註 三國史記 권4 주석편 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762쪽》 고운의 문집은 고려 때부터 여러 차례 간행되었으나 모두 중간에 없어져 버렸다. 본 《고운집》은 《계원필경집》이나 《동문선》에 실린 것과 불교 관계 자료집, 금석문 등에 산재한 것을 한데 모아 놓은 것으로, 사실상 ‘습유(拾遺)’의 형태를 면치 못하고 있으며, 잘못된 글자나 내용이 있음을 면치 못하고 있다. 《최영성, 譯註 崔致遠全集2, 아세아문화사, 1999, 18~19쪽》[주-D020] 노상직(盧相稷) : 1855~1931. 한말(韓末)의 뛰어난 성리학자(性理學者)로,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치팔(致八), 호는 소눌(小訥)이며, 밀양(密陽) 단장면(丹場面) 노곡(蘆谷)에 거주하였다. 허전(許傳)의 문인이다. 성리학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실학(實學)에 관해서도 저술을 남겼다. 저서로는 《소눌집(小訥集)》, 《역대국계고(歷代國界考)》, 《역고(曆考)》, 《육관사의목록(六官私議目錄)》, 《심의고증(深衣考證)》, 《주자성리설절요(朱子性理說節要)》가 있다.
    2022-04-30 | NO.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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