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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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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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량(奇子亮) 정익(挺翼) 에게 답함 - 명재유고 제17권
    기자량(奇子亮) 정익(挺翼) 에게 답함 갑인년(1674, 현종15) 5월 16일 명재유고 제17권 윤증(尹拯)어깨를 나란히 한 것처럼 서로 바라보면서도 다른 세상을 사는 것처럼 서로 막혀서 살아왔으니, 어찌 그대의 편지가 멀리서 날아와 혼자 외롭게 살아가는 나를 크게 위로해 주리라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감동이 일었습니다. 슬하의 세 아들이 모두 세상을 떠났다 하니 듣는 사람도 차마 듣지 못하겠거늘 하물며 직접 당한 사람이야 오죽하겠습니까.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치에 맞게 세상을 달관하고 평소 건강을 유지하여 아무리 어렵고 우환이 있는 가운데에서도 학문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으니, 그대에게 감복하는 마음이 그치지 않습니다.나는 화란 속에서 목숨이 살아남아 질기고도 구차하게 세월을 보내며 한결같이 칩거해 살아가고 있으니, 그다지 말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박군(朴君)과 주고받은 여러 설들을 나에게 보여 주었으니, 나를 따돌리지 않은 점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지금 세상에 이러한 이야기로 서로 강설을 하는 경우가 실로 드물고 오로지 과거 공부에 휩쓸려서 이록(利祿)만을 추구할 뿐이니, 어찌 눈을 비비고 보지 않겠습니까. 다만, 식견이 고루하고 몽매하여 여기에 참여하기에 부족한데도 과분하게 이런 배려를 받고 보니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그러나 그대의 말씀이 정중하기에 끝내 저버리지 못하겠습니다. 게다가 이를 통하여 따끔한 가르침을 계속해서 받을 수 있다면 나로서도 다행이겠습니다. 그래서 감히 나의 견해를 일일이 피력하여 별지(別紙)에다 기록하였으니,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길이 멀어서 함께 모이지 못하는 것을 그대가 한탄하였는데, 이는 실로 나의 한탄이기도 합니다. 헛된 명성과 실제의 병폐가 안팎으로 나를 병들게 하고 사방의 외우(畏友)들과 교유하여 가르침을 받을 길도 없으며, 나이가 50이 되어 더 이상 진보할 가망도 없으니, 나 자신에 대한 개탄스러움을 이루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노형(老兄)이 덕음(德音)을 아끼지 않고 계속해서 나에게 가르침을 준다면 노형이 두터운 은혜를 베푸는 것이 될 것이요, 나에게는 더욱 큰 다행이 되겠습니다. 간절하게 기다리겠습니다. 마침 감기로 거의 죽었다 겨우 살아나서 병상에 누워 있은 지가 지금 40여 일이 되었습니다. 기력이 떨어지고 정신이 혼몽하여 하고 싶은 말을 다하지 못하겠습니다.[별지]박군(朴君)에 대해서는 그 이름을 들은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 노형을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되었으니, 고루한 내 모습이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그의 학설을 본다면 아무리 노형이 그를 두둔한다 하더라도 이단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단에도 크기가 있어서 주장하는 인물이 크면 그 폐단이 깊고 인물이 작으면 그 폐단이 얕습니다. 노형이 이미 그와 벗을 하였다 하니 불가불 그 학설의 오류를 힘껏 파헤치고 공격하여 끝까지 회개를 시켜야 할 것입니다. 선친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이른바 선비의 자득(自得)이라는 것은 반드시 성현이 말씀하지 않은 이치를 터득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성현의 말씀 가운데에서 지극히 당연하여 바꿀 수 없는 이치를 진정으로 알아내는 것이 바로 자득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성리설(性理說)은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에 이르러 크게 체계화되어 더 이상 추가할 것이 없습니다. 만약 정자와 주자의 학설 밖에서 이치를 찾으려고 한다면 이는 착견(鑿見)이요, 사설(邪說)이 될 뿐입니다. 박군이 이 말을 들으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에서 마음을 쓰는 데가 없는 사람은 그럭저럭 범범하게 일생을 보내고, 학문에 뜻을 두었다고 하는 사람들은 또 대부분 이와 같습니다. 바른길을 내버려 두고 굽은 길을 찾으며 경솔하게 자신을 너무 크게 여겨 끝내는 아무것도 터득하지 못하니 매우 한탄스러운 노릇입니다. 보여 주신 책자는 의당 돌려 드려야 하겠지만 한 번 더 보기 위해 그대로 가지고 있겠습니다.말씀하신 사우(士佑)는 어떤 사람입니다. 남쪽 지방에 함께 학문을 할 만한 사람으로 지금 누구누구가 있습니까? 나에게 알려 주어 고루함을 풀어 주시기 바랍니다.이설(理說) 운운변론한 것이 맞는 듯합니다. 다만, 그의 주장에서 이른 바 “사물은 이(理)에 의지한다.[物依於理]”라고 한 것 또한 폐단이 있으니, “사물이 그 이(理)를 가지고 있다.[物有其理]”라고 고치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체용변화(體用變化)” 이하는 그 뜻을 잘 모르겠습니다. 대체로 변화귀신(變化鬼神)과 진퇴존망(進退存亡)은 모두 기(氣)이니, 이(理)를 논할 것이 아닙니다. 그의 말 가운데 “진퇴존망지간(進退存亡之間)”이라 한 것과 “유무동정지간(有無動靜之間)”이라고 한 것은 아마도 이(理)를 별개의 사물로 보아서 그 사이에 매달려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표현한 것인 듯합니다. 인용한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라고 한 것 역시 그 뜻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합니까?도기설(道器說) 운운이 단락은 전체가 선유(先儒)의 학설과 다르므로 굳이 변론할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변론한 내용 가운데 “상면지상(上面之上)과 하면지하(下面之下)가 아니다.”라고 한 것은 아마도 적절치 않은 듯합니다. 상하(上下) 두 자를 상면(上面)과 하면(下面)으로 보지 않고 무엇으로 보겠습니까. 또 “무형이상(無形而上)”과 “유형이하(有形而下)”라고 하였는데, 이 또한 적절치 않습니다. 대체로 형(形)은 사물이므로 그 상면에 비어 있는 것을 도(道)라 하고 하면에 꽉 차 있는 것을 기(器)라고 한 것뿐이니, 그렇다고 어찌 이(理)가 위에 있고 기(氣)가 아래에 있어 그의 견해처럼 확연히 두 가지로 나뉜다고 말하겠습니까?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운운이 단락 역시 모두 주자(朱子)와 다른 견해를 내세웠으니, 굳이 변론할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두 선생의 말에 각자 치우침이 있어 경문(經文)의 본뜻과는 합치되지 않는다.” 하고 또 “두 선생의 뜻은 모두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을 두 개의 마음으로 나누고 있다.”라고 하였는데, 그의 말투를 보건대 오만하게도 자신을 정자(程子)와 주자의 위에다 놓고 더 이상 후학(後學)으로서 선사(先師)를 존경하는 뜻을 보이지 않습니다. 이처럼 심하게 도리에 어긋난 사람은 곧장 북을 쳐서 성토하여야 마땅하고, 그와 사사로이 어울려 성현을 모독하는 죄에 함께 빠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변론 가운데 남헌(南軒)의 말을 인용하였는데 그의 생각과는 다른 듯합니다. 그가 말한 유위무위(有爲無爲)는 곧 동정(動靜)을 말한 것이고 남헌이 말한 유위무위는 의리(義利)를 말한 것입니다. 다만, 하문(下文)의 보설(補說)로 보건대 그대도 이미 그 오류를 깨닫고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성설(性說) 운운근래에 정랑(正郞) 김극형(金克亨)이 성(性)을 체(體)로 삼고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용(用)으로 삼은 적이 있었는데, 지금 이 주장이 또한 그와 같습니다. 대체로 그의 의도는 필시 성을 높여서 제일층(第一層)으로 삼으려 한 나머지 다음의 네 가지로 불리는 것을 꺼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른바 일리(一理)라는 것이 바로 인의예지요, 인의예지 밖에 별도로 일리가 있는 것이 아님을 모른 것입니다. 명도(明道)는 “성(性)이라 말하는 순간 이미 성(性)이 아니다.”라고 말하였는데, 위의 ‘성’ 자는 “생지위성(生之謂性)”의 성이요 아래 ‘성’ 자는 “본연지성(本然之性)”의 성입니다. 만약 위의 말을 바꿔 “본연지성이라 말하는 순간 이미 본연지성이 아니다.”라고 하게 되면 정말 말이 되지 않습니다. 논의의 대강은 맞는 말입니다. 다만 “성을 논한 것이 매우 어긋나지 않았다.”라고 말하였으니, 그가 인의예지가 성이 되는 줄을 모르고 있는데도 매우 어긋났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장차 무엇을 가지고 매우 어긋났다고 하겠습니까. 또 “중선(衆善)은 인의예지의 기(紀)이다.”라고 하였는데, ‘기’ 자는 아마도 ‘목(目)’ 자만큼 적합하지 않은 듯합니다.논수설(論數說) 운운무릇 이(理)가 있은 뒤에 기(氣)가 있고 기가 있은 뒤에 상(象)이 있고 상이 있은 뒤에 수(數)가 있으니, 기에서 상까지에는 청탁(淸濁), 수박(粹駁), 장단(長短), 대소(大小)에 모두 일정한 수(數)가 있습니다. 그가 말한 “한 가지 일도 수가 아닌 것이 없고 한 가지 물건도 수가 없는 것이 없으며 사람의 일에는 수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 것이 없다.”라고 한 것은 진실로 본 바가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수요(壽夭)와 궁달(窮達)은 모두 수(數)로써 말할 수 있지만, 유독 선악(善惡)만은 수로 돌리지 못합니다. 이는 이(理)가 그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맹자가 “성(性)이 들어 있으므로 명(命)이라 말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한 것이니, 어찌 박군이 이에 대해서는 따져 보지 않은 것입니까? 지금 자포(自暴)하여 악을 행하는 것과 자강(自强)하여 선을 행하는 것을 똑같이 수(數)로 돌리고 만다면 배우는 이들이 어디에다 힘을 쓰겠습니까. 이 설을 주장하는 것은 실로 유자(儒者)의 주장이 아니어서 혹 사람을 자포하여 악을 행하는 지경으로 인도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그 마음의 씀씀이가 어긋나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대의 변론은 가히 노력을 다하였다고 할 만하지만, 기(氣)와 수(數)를 둘로 나누려고 한 것에 대해서는 내 생각으로는 적절치 않다고 봅니다.대체로 기와 수는 똑같은 것[一般]입니다. 예를 들어 인용한 내용을 가지고 말해 보겠습니다.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이 처음에는 재물을 불리는 일에 종사하다가 말년에는 학문의 조예가 고원(高遠)한 경지에 올랐습니다. 이는 기품(氣稟)에 맑은 분수(分數)가 많고 탁한 분수가 적었기 때문이니, 이 또한 수(數)로 말할 수 없겠습니까. 안연(顔淵)은 아성(亞聖)이 되었으면서도 끝내 가난하게 살다가 요절하였으니, 이는 청수(淸粹)한 기를 받았으면서도 단명(短命)한 것입니다. 이 또한 기가 아니겠습니까. 봄이 변하여 여름이 되고 가을이 변하여 겨울이 되며, 오행(五行)이 서로 교대함에 각각 정해진 수(數)가 있어 바꿀 수가 없으니, 수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일육(一六), 이칠(二七), 삼팔(三八), 사구(四九)의 수는 모두 생성(生成)의 기(氣)이니, 기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대의 견해는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태극무극해(太極無極解) 운운퇴계(退溪)가 남장보(南張甫)에게 답한 편지에서 “어떤 사람이 말한 궁극(窮極)이 없다는 주장은 주자가 이미 잘못된 것으로 여겼으니, 주자의 설을 살펴보게나.”라고 하였습니다.“태극(太極)의 이(理)는 낳고 낳아서 끝이 없으므로 무극(無極)이라고 한다.”라고 한 것은 이른바 유(有)는 무(無)에서 난다는 주장과 같으니, 그 오류가 대단히 심합니다. 이에 대한 그대의 변론은 대체로 타당합니다. 다만, “물(物)의 극고처(極高處)를 극(極)이라 한다.”라고 한 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닌 듯합니다. 주자는 극지처(極至處)로 극(極) 자를 풀이하였지 극고(極高)를 말한 적이 없습니다.또 “태(太)는 심대(甚大)의 뜻이다.”라고 하였으니, 그리되면 또 “심대한 극”이 되므로 또한 적절하지 않습니다. 대체로 태(太)가 바로 심(甚)이요 지(至)입니다. 그 의미는 “극지지(極之至)”일 뿐이니, 심대(甚大)로 극(極)을 꾸며 준다고 해서 더 나아지는지는 것이 아닙니다.또 “무극(無極)이라는 것은 무형(無形)의 극(極)이다.”라고 한 것 또한 적절하지 않습니다. 대체로 태극은 실로 입으로 표현할 수 있는 소리도 냄새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극이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무극이라는 것은 “그 극이 없는 것[無其極]”입니다. 만약 “무형의 극”이라 한다면 마땅히 “무의 극[無之極]”이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그의 주장에 따르면 “물(物)이 태허(太虛)에서 변화하는 것은 얼음이 물에서 얼었다 녹았다 하는 것과 같다.” 하였는데, 이 말은 바로 정자(程子)가 그 잘못을 지적한 바 있는, 형태가 없어지면 근원으로 돌아간다[形潰反原]는 횡거(橫渠)의 주장과 같은 말입니다. 대체로 만물이 세상에 태어나는 원리를 말하자면, 가는 것은 영원히 지나가 버리고 새로이 오는 것이 그 뒤를 이어서 끝없이 낳고 또 낳습니다. 그동안 굽혀 있던 기[旣屈之氣]를 가지고 다시 현재 펴 있는 기[方伸之氣]를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물이 얼음이 되고 얼음이 다시 물이 되는 것으로 비유를 한다면, 이는 전혀 천지조화의 낳고 낳는 뜻이 없고 부처의 윤회설(輪回說)과 가깝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자가 이를 배척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으로 기(氣)를 논하는 것도 옳지 않거늘 하물며 이것으로 태극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역해(易解) 운운무슨 자는 마땅히 무슨 자가 되어야 하고 또 무슨 자는 마땅히 무슨 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감히 독창적인 견해와 새로운 주장을 함부로 만들어 내어서는 안 됩니다. 그대가 이에 대해 남다른 것을 좋아하는 병폐가 있다고 지적한 것은 참으로 옳은 말입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남다른 것을 좋아하는 병폐뿐만 아니라 큰 소리를 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거리낌 없이 말하는 병폐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누가 그에게 무실위기(務實爲己)와 하학손지(下學遜志)의 방도를 말해 줄 수 있겠습니까?[주-D001] 박군(朴君) : 박상현(朴尙玄, 1629~1693)을 가리킨다. 자는 경초(景初), 호는 우헌(寓軒), 본관은 순천(順天)이며, 전라도 광주(光州)의 진곡(眞谷)에서 학문에만 전념한 학자이다. 아들 박광일(朴光一)을 송시열에게 보내 학문을 배우게 하였고, 그의 문집인 《우헌집(寓軒集)》에 송시열과 주고받은 편지가 여러 편 있으며, 송시열은 그를 모년지기(暮年知己)로 허여하였다고 한다. 《우헌집》에는 기정익(奇挺翼)에게 보낸 11편의 편지가 수록되어 있는데 주로 성리학의 격물, 이기, 태극에 관한 내용들이다. 《韓國文集叢刊解題 4輯 寓軒集, 遜齋集》[주-D002] 사우(士佑) : 유세익(柳世翊)의 자이다. 본관은 서산(瑞山)으로 광주 동곡(東谷)에 살았다. 호는 회와(悔窩)이다. 서산 유씨 유익서(柳益瑞)가 기정익의 매부였던 까닭에 일가가 모두 기정익의 문인이 되었다. 기정익의 사후 문인들과 함께 그를 모신 장성의 추산서원(秋山書院)의 건립을 주도하였다. 박상현의 문집 《우헌집》에 유세익과 주고받은 학술적인 내용의 시와 편지가 수록되어 있다. 문집으로 《회와유고(悔窩遺稿)》가 있다. 《寓軒集 卷1 次柳士佑詠陰陽韻ㆍ卷4 與柳士佑, 韓國文集叢刊 134輯》[주-D003] 자포(自暴)하여 악을 행하는 : 대본에는 ‘自暴□惡’로 한 자가 결락되어 있다. 동일본인 국립중앙도서관장본(도서번호:b13648-61-10)에 의거하여 ‘爲’를 보충하여 번역하였다.[주-D004] 자포하여 악을 행하는 : 대본에는 ‘自暴□惡’로 한 자가 결락되어 있다. 동일본인 국립중앙도서관장본(도서번호:b13648-61-10)에 의거하여 ‘爲’를 보충하여 번역하였다.[주-D005] 남장보(南張甫) : 남언기(南彦紀)로 장보는 자이다.
    2020-09-16 | NO.510
  • 기정진-무등산
    偉然體德一方宗  위대하게 덕스런 모습 한 지방 종주 되니 友敢云乎師則隆  벗이라고 말할까, 스승이라면 너무 높도다山若可名還可字  산을 이름 짓고서 자를 지을 수만 있다면開門喚作丈人公  문을 열고서 어르신(丈人公)이라 부르겠네-노사집 제2권.
    2018-08-01 | NO.509
  • 기축록 속(己丑錄續) 성명 미상(1700년대)
    기축록 속(己丑錄續) 성명 미상(1700년대)《기축록》에 이어 효종 8년 정유(丁酉 1657)로부터 숙종 28년(1702)까지 45년간에 일어났던 정개청(鄭介淸)의 서원 철훼를 두고 동서(東西) 양파간의 싸움을 기록한 일기이다.이 일기를 쓴 사람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1700년대 전후에 생존하였던 것만은 확실하다. 그 외의 사실은 알 길이 없다.이 일기를 보면 효종 때 송준길(宋浚吉)이 호남 유생(湖南儒生)들이 정개청의 서원 철훼를 반대하는 상소를 왕께 올리게 된 데 대하여 호남 유생들을 다시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그리하여 호남 유생들은 이에 반발하여 선조 때에 정철의 불공평한 처사로 정개청이 억울하게 죽었으며, 인조 때에 김장생(金長生) 등이 올린 정개청에 관한 상소문이 옳지 못한 것을 통렬하게 논박함과 동시에 송준길의 상소도 옳지 못하니 정개청을 호남의 큰 스승으로 높혀 받들 것을 간청하였다.이 동서인(東西人) 간의 싸움은 숙종 28년에도 종식이 되지 않고 계속되어 조선 말기까지 계속되어 조정에서 동인들의 청을 들어주어 정개청의 관작을 회복시키고 서원을 다시 세우게 되면 이번에는 서인들이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다시 정개청의 관작을 삭탈케함과 아울러 서원을 헐어 버리게 하여 관작의 여탈(與奪)과 서원의 철훼가 반복하기를 3백 연간이나 계속되었던 것이다.이 싸움에 있어서 동인의 대표적 인물로는 윤선도(尹善道)ㆍ허목(許穆) 등이 있고, 서인의 대표 인물은 전기 김장생ㆍ송준길 이외에도 이만성(李晩成) 등이 있다.이 속록도 《기축록》과 마찬가지로 전부가 각 인물들의 상소문을 연차 순에 따라 모아 편집한 것인데, 이것들을 보면 동ㆍ서인 간의 당쟁이 얼마나 연원(淵源)이 길었던 것과 동시에 치열했었던 것을 알 수 있다.그리고 이 일기 속에는 전기 대표적 인물들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의 글이 있으므로 조선 당쟁의 연구에 《기축록》과 아울러 많은 참고가 될 것이다.------------------------------------------어떤 사람이 개청에게 정철의 사람됨을 물으면서 청백한 것을 칭찬하니, 정개청이 대답하기를, “선유의 말에 사람이 몸가짐을 청백하게 하는 것은 도리어 벼슬을 사랑함이니, 비록 아버지와 임금을 죽이더라도 감히 할 것이다…….” 하였으며, 또 무자 연간에 정철이 광주(光州)에 있었는데 정개청이 곡성 현감으로서 근친(覲親)하러 내왕하는 길에 한 번도 존문(存問)하지 않고, 그 문을 지나면서도 들어가지 않아서 정철이 더욱 감정을 두었는데, 이것이 두 사람에게 앙화가 되어 공교하게 무함하고 얽어서 극율(極律)로써 섬멸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선비를 죽였다는 이름은 만고에 큰 죄악이니, 공론이 마침내 민몰(泯沒)되지 않아, 양도(兩道)에서는 사림의 소장(疏章)이 해마다 일어나고, 조정에서는 대간(臺諫)의 논박이 때로 준절하였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선조 대왕께서도 마음속으로 곧바로 깨달으시고 깨달은 후에 곧 명을 내려 정철의 관작을 삭탈하고 강계(江界)에 안치(安置)하였으며, 매양 정철은 간철(奸澈) 또는 독철(毒澈)이라 하시면서 심지어는 그 아들을 독종이라고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 전조(銓曹)에 엄칙하여 벼슬에 의망(擬望)하지 말도록 하셨으니, 비록 효자 자손(孝子慈孫)이라도 감히 원통함을 호소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혼조(昏朝)에 와서 정철의 아들 종명(宗溟) 등이 아비의 설원을 청하는 소에, 그 아비가 정개청을 무함한 장계의 말은 전혀 없고 이르기를, “선조 대왕께서 문목(問目) 가운데에 절의를 배척한 논설도 아울러 넣을 것을 명하시어 형추하였다.” 하였으며, 최영경의 일에 대해서도 역시 그 아비가 구원하려 하였으니 이루지 못하였다는 뜻으로 말하여 마침내 그 무리들로 하여금 모두 이 말을 하게 하였는데, 그 뜻은 대개 선비를 죽인 이름을 임금에게로 돌리고, 선비를 죽인 그 아비의 죄를 벗으려는 것이니 그 계획이 참독(慘毒)합니다. 이단상의 소에도 정철이 정개청을 무함한 계사의 말은 빼고서 다만 말하기를, “선조 대왕께서 절의를 배척한 조항을 문목 가운데 넣으라고 하교하시어, 한 차례 형신(刑訊)한 후 명하여 북쪽 변방으로 귀양보내어 죽였다.” 하였으니, 이단상의 소에 있는 말은 대개 종명의 말을 조술(祖述)한 것입니다. 단상의 분의는 종명과 다른데, 이와 같이 그의 말이 같은 것은 무슨 곡절이겠습니까. 김장생이 항상 정철을 군자로 삼아 송준길이 개청을 무함할 때, 그 말이 그의 스승의 말을 증거함이 많았던 것이니, 이것은 스승의 중망을 빌려 정철을 두둔한 것이고, 정철을 두둔하는 것은 그 스승의 말을 옳게 여기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무망한 것이 이제 밝게 나타나서 반드시 만세의 공론으로 되었으니, 스승을 위한다는 것이 끝내는 그 스승을 해로운 데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단상이 개청을 무함한 말이 모두 송준길과 안팎으로 호응하였는데, 그 말이 준길보다 더욱 가중(加重)한 것은 모두 준길을 위하여 두둔한 것입니다. 그러나 송준길로 하여금 만세 공론에 흠절을 더욱 무겁게 만든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게 하였으니, 역시 깊게 생각하지 못한 일입니다. 정개청이 구원(九原)의 썩은 뼈가 된 지 이미 70년이 지났는데, 지금 사람으로 누가 혐의하고 누가 원망하겠습니까. 비록 죄를 얽더라도 이로울 바 없고, 원통을 씻더라도 해로울 바 없을 것인데, 무함하는 것이 반드시 기축년보다 곱절이나 되는 것은 그 뜻이 어디 있겠습니까. 정개청은 자초한 화로 돌리고, 정철이 선비 죽였다는 이름을 벗기려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추후로 정개청의 죄명을 얽는다는 것은 끝내 이루어 질 수 없는 일이니, 후세에도 어찌 분변할 사람이 없겠습니까. 저 사람들도 이것을 생각했으므로 선비 죽인 이름을 마침내 임금에게로 돌리려고 했던 것이니, 어찌 심히 통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서원의 유무에 대해서는 그 손실과 이익이 다만 사림에게 있는 것이고, 그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정개청을 사종(師宗)으로 삼는 사람들이 또한 어찌 서원의 유무로 정개청의 경중을 삼아서 있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고 없는 것을 혐의쩍게 알겠습니까. 다만 우리 나라에서 정개청만 못한 자가 서원에서 향사하는 이가 또한 반드시 이루 헤아릴 수 없는데, 서원을 허물어뜨리는데 오직 정개청의 서원만을 유독 먼저 급급하게 하려고 하는 것은 모두 그 뜻하는 바가 있어서입니다. 또 서원을 세우고 허물어뜨리는 것은 다만 그 사람의 도덕의 높고 낮음으로 논할 뿐이니, 하필 평소에 없었던 죄목을 억지로 찾아낼 필요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정개청 같은 사람은 벼슬이 낮고 붕당의 후원이 끊어져서, 서원을 허물어버리는 데에도 많은 언사(言辭)와 노력을 허비할 필요가 없을 것인데, 기축년에도 없었던 허다한 죄상으로 모함하는 것이 어찌 그 이유가 없겠습니까. 그 뜻이 반드시 정철이 한 착한 선비를 죽인 이름을 벗기려는 것이니, 신은 정개청을 해친 뒤에 장차 최영경에게도 미칠까 두렵습니다. 종명(宗溟)이 논설을 한데 모으자 이러한 근거 없는 말이 같은 편 사람들 가운데 떠돌아, 위로는 천지 신명을 속이고 아래로는 사람들의 이목을 현란하게 하니, 당론이 국시를 해롭게 하고 국맥(國脈)을 위태롭게 함이 이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송준길은 같은 편 사람들 가운데에서 중망이 있어 당시에 추앙을 받았는데, 신이 정개청을 논함이 송준길과는 상반되자 어떤 사람들은 혹 신에게 해가 있을까 두려워서 신을 경계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신의 뜻으로는, “임금이 말을 하면서 스스로 옳다고 하면 경대부가 감히 그 그른 것을 바로잡지 못한다.” 한 것은, 곧 자사(子思)가 깊이 경계한 바로써 임금과 신하의 사이에도 이와 같은 것인데, 하물며 그 아랫 사람이야 어떻겠습니까. 그 말이 혹 국시에 어긋난다면 신이 차마 어찌 준길이 있는 것만 알고 국가 있는 것을 알지 못하여 임금의 앞에 밝게 분변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준길이 말한 바가 어찌 그가 지어낸 것이겠습니까. 반드시 사람들에게서 들은 것이니 사람들이 준길을 그르치게 한 것이요, 준길이 국시를 그르치게 한 것은 아닙니다. 자로(子路)는 과실(過失) 듣는 것을 기뻐하였고, 공자(孔子)는, “내가 진실로 과실이 있으면 사람들이 꼭 알게 되니 다행이다.” 하였으며, 순(舜) 임금은 자기를 버리고 다른 사람을 따르며, 남이 선을 하도록 도와주었다고 합니다. 송준길이 과연 군자로서 신의 말이 옳은 것을 깨달았으면 반드시 자로가 과실 듣는 것을 기뻐하고, 공자가 자기 과실이 있으면 사람들이 반드시 앎을 다행으로 여기며, 순임금이 자기를 버리고 남을 따르며, 남이 선을 하도록 도와준 것처럼 할 것이니,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신의 말에 감정둘 것이 있겠습니까. 준길은 과연 이런 마음으로 과실을 고치고 착한 것을 하는 데 인색하지 않다면, 신이 어찌 송준길을 혐의하여 끝까지 피차를 구별하는 마음을 두겠습니까. 훗날 혹 서로 만난다면 처음에 서로 어긋나서 길이 달랐던 것을 한탄하고 마침내 원만히 같이 돌아가게 된 것을 기뻐할 것이니, 신이 두려워하는 바는 그가 허물 고치기를 꺼리지 않음을 알지 못하고, 송준길을 버리는 데 있는 것입니다. 신은 정개청의 지극한 원통함을 안타깝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국시가 크게 문란하게 됨을 통탄하는 것이며, 국가를 위하여 심히 두려워하고 전하를 위하여 지극한 정성이 있으므로 전혀 꺼리거나 숨기는 것 없이 말을 하는데 가릴 바를 모르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사소한 것을 통촉하시고 덕음(德音)을 내리시어 황천(黃泉)에 있는 정개청의 원통을 씻어 주시고, 사방 사림의 공론을 통쾌하게 하시어 국시를 바로잡아 나라의 명맥을 길이 이어 주신다면 국가에 있어 매우 다행일 것입니다. 아! 신이 보건대, 지금 개청을 두둔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정개청의 어진 것을 아는 것은 아니나, 진실로 개청의 원통한 것을 애석해 하는 것은 진실로 정철의 간독한 것을 미워하는 데서 나온 것이고, 개청을 모함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개청의 어짊과 개청의 원통을 아는 것은 아니면서도 입으로는 모두 이 말을 하는 것은 대개 정철이 착한 선비를 죽였다는 이름을 급급하게 벗기려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선악과 일의 시비를 그릇되게 논하는 것은 모두 그 사람의 선악과 그 일의 시비를 적실하게 알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만약 참으로 안다면 비록 매이고 인색해 하는 마음이 있더라도, 어찌 차마 하늘을 속이고 임금을 속이는 데 스스로 빠져 천고의 간사한 소인이 되는데에 만족스러워 하겠습니까. 다만 천운이 쇠잔하고 세상이 말세가 되어 교화가 무너지고 풍속이 퇴폐하여, 사람들이 하늘의 이치와 사람의 윤리에 어두운 까닭이니, 이는 바로, “그 실정을 알았으면, 불쌍히 여기고 기뻐하지 말라.”는 증자(曾子)의 말과 같은 것입니다. 어찌, 다만 한두 가지 일만 그렇겠습니까. 만사가 모두 이와 같으니, 만사가 모두 이와 같으면 나라가 나라 꼴이 되지 않을 것은 지혜 있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명도 선생(明道先生)이 조정에서 말하기를,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풍속을 바르게 하며, 어진 인재 얻는 것을 근본으로 삼으라.” 하여, 누누이 정학(正學)의 도(道)를 강론하여 밝히는 것을 언급하였으니, 아름답다, 그 말씀이여! 신은 아마도 현재 나라 다스리는 도(道)가 이보다 앞설 것이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2022-05-03 | NO.508
  • 김 감사(金監司) (우굉 宇宏) 에 대한 만사(挽詞) 우복집 별집 제1권 / 시(詩)
    김 감사(金監司) (우굉 宇宏) 에 대한 만사(挽詞)- 김우굉(1524~1590)《우복집(愚伏集)》 별집 제1권 / 시(詩)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1632)총각 시절부터 이미 노성한 이 같았거니 / 丱角凝然已老成문장 솜씨 뛰어나서 그 명성이 우뚝했네 / 更將詞藻擅華聲원기부는 사람들이 앞다투어 외웠었고 - 공은 어린 나이에 〈중니원기부(仲尼元氣賦)〉를 지었다. - / 賦成元氣人傳誦요승 보우 논한 상소 귀신조차 놀래었네 - 영남(嶺南)의 사림(士林)들이 상소를 올려 보우(普雨)에 대해 논할 적에 공이 소두(疏頭)가 되었다. - / 疏詆妖髡鬼砉驚안탑에 이름 쓴 건 강사하는 날이었고 - 공은 43세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 / 雁塔名題强仕日붕새가 바람 치고 몇 천 리나 날았다네 / 鵬溟風擊幾千程주정에선 푸른 소 탄 노자(老子) 얻음 기뻐했고 - 공은 사관(史官)으로 있었다. - / 周庭喜得靑牛老한제께선 강직했던 백마생을 용납했네 - 공은 간관(諫官)의 직임을 맡았었다. - / 漢帝能容白馬生단리는 문성에서 명망 본디 깊었고 - 공은 승정원(承政院)에 있었다. - / 短李素深門省望소소는 옥당의 성대함에 합당했네 - 공은 경연관(經筵官)으로 있었다. - / 小蘇端合玉堂盛임금 은혜 태산처럼 무거운 걸 알겠거니 / 天恩便覺丘山重벼슬길서 훌쩍 하니 물러나기 어려웠네 / 仕路難敎去就輕공직함에 내직 외직 구분한 적 없었나니 / 供職未曾殊內外정성 다해 밝은 정사 돕기만을 원하였네 / 竭誠惟願贊淸明휘장 걷자 기 땅 경내 탐오한 자 사라졌고 - 공은 호서 관찰사(湖西觀察使)로 있었다. - / 搴帷冀境貪汚屛병주 맡자 노약자들 앞다투어 환영했네 - 공은 광주목사(光州牧使, 1587~1589)로 있었다. - / 分竹幷州稚弱迎태평시절 공명 이룸 기대할 수 있었는데 / 平世功名方有待나이 늙어 노쇠해져 병이 들고 말았다네 / 暮年衰病却相嬰강호에서 임금 그려 눈물 줄줄 흘리었고 / 江湖不盡思君淚영남에선 동생 그려 마음 고생하였다네 / 嶺塞兼勞憶弟情참새가 홀연 술병 입구 막은 깁을 뚫더니만 / 神雀忽穿甁口縠갈매기가 끝내 물가 맹서한 이 잃었구나 - 공은 낙동강 가에 정자를 짓고서 바야흐로 소요하며 노닐 계획을 하였었다. - / 信鷗終失渚頭盟눈앞의 자손에게 남은 경사 남겨졌고 / 眼前蘭玉留餘慶죽은 뒤에 문장은 아름다운 이름 있네 / 身後文章帶令名못난 나는 요행히도 후한 대우 받았거니 / 苽葛幸嘗叨厚分선산에서 어찌 차마 무덤 향해 절하리요 / 松楸那忍拜荒塋울음 참는 통곡 속에 오도 위해 상심하며 / 呑聲一慟傷吾道한 글자를 쓸 적마다 한 줄기의 눈물 쏟네 / 一字題詩一涕橫[주-D001] 김 감사(金監司) :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김우굉(金宇宏, 1524~1590)을 가리킨다. 김우굉은 자가 경부(敬夫)이고 호가 개암(開巖)이며,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며, 상주의 속수서원(涑水書院)에 봉향(奉享)되었다. 저서로는 《개암집(開巖集)》이 있다.[주-D002] 보우(普雨) : 명종(明宗) 때의 중으로, 명종의 모후(母后)인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섭정(攝政)할 때 문정왕후의 총애를 받아 승과(僧科)를 부흥하고 도첩(度牒)을 주어 불교를 부흥시켰다. 문정왕후가 죽은 뒤 유신(儒臣)들에 의해 귀양 갔다가 피살되었다.[주-D003] 안탑(雁塔)에 …… 날이었고 : 40세에 과거에 급제하였다는 뜻이다. 안탑은 서안(西安)의 자은사(慈恩寺)에 있는 7층 탑인데, 당(唐)나라 때 과거에 입격하여 진사(進士)가 된 사람들이 곡강(曲江)에서 잔치를 한 뒤에 이 탑에 제명(題名)하였으므로, 과거에 입격하였다는 뜻으로 쓰인다. 강사일(强仕日)은 《예기(禮記)》에서 ‘마흔 살에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간다.〔四十曰强而仕〕’ 한 데서 온 말로, 40세를 가리킨다.[주-D004] 붕새가 …… 날았다네 : 벼슬길에 나아갔다는 뜻이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붕새가 남쪽 바다로 옮겨 갈 때에는 물을 3000리를 치고 힘차게 날아 9만 리를 올라간다.” 하였다.[주-D005] 주정(周庭)에선 …… 기뻐했고 : 조정에서는 훌륭한 사관(史官)을 얻어 좋아했다는 뜻이다. 노자는 주(周)나라의 태사(太史)로 있었으며, 《도덕경(道德經)》을 지은 뒤에 서쪽으로 가면서 푸른 소를 타고 갔다.[주-D006] 한제(漢帝)께선 …… 용납했네 : 선조(宣祖)가 강직하게 올리는 간언을 받아들여 주었다는 뜻이다. 한제는 한나라 광무제(光武帝)를 가리키고, 백마생(白馬生)은 장담(張湛)을 가리킨다. 광무제 때 장담이 간관(諫官)으로 있으면서 잘못하는 것이 있으면 그때마다 간하였는데, 장담이 항상 흰 말을 타고 다녔으므로, 광무제가 장담을 볼 적마다 말하기를, “백마생이 또다시 간하러 오는가?” 하였다. 《後漢書 卷27 張湛列傳》[주-D007] 단리(短李)는 …… 깊었고 : 김우굉이 동부승지로 있을 때 명망이 높았다는 뜻이다. 단리는 당나라 때의 시인인 이신(李紳)을 가리키고, 문성(門省)은 중서성(中書省)을 가리킨다.[주-D008] 소소(小蘇)는 …… 합당했네 : 소소는 송나라 소식(蘇軾)의 동생인 소철(蘇轍)을 가리키고, 옥당(玉堂)은 홍문관(弘文館)의 별칭이다. 김우굉은 홍문관 부제학을 지냈다.[주-D009] 휘장 …… 사라졌고 : 김우굉이 전라도 관찰사가 되어 백성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청렴한 정사를 폈다는 뜻이다. 후한 때에는 자사(刺史)가 부임하면서 수레에 휘장을 쳐 얼굴을 가리고 가는 것이 전례였는데, 가종(賈琮)이 기주 자사(冀州刺史)가 되어 부임하면서는 ‘자사는 멀리 보고 널리 들어서 좋고 나쁨을 규찰하여야 마땅한데, 어찌 휘장을 드리워 앞을 가려서야 되겠는가.’ 하고는 휘장을 걷게 하였다. 그러자 그 소문을 듣고는 온 경내가 금세 두려워서 벌벌 떨었다고 한다. 《後漢書 卷31 賈琮列傳》[주-D010] 병주(幷州) …… 환영했네 : 지방관의 치적(治績)이 탁월하여 백성들이 환영하였다는 뜻이다. 후한 때 곽급(郭伋)이 병주에 있으면서 은혜로운 정사를 폈는데, 순시하다가 서하(西河)의 미직(美稷)에 도착하자, 노약자들이 모두 길가에서 절을 하면서 맞이하였다고 한다. 《後漢書 卷31 郭伋列傳》[주-D011] 영남에선 …… 고생하였다네 : 김우굉이 성주(星州)로 낙향해 있던 선조 때에 동생인 김우옹(金宇顒)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회령(會寧)으로 귀양 가게 되자, 김우굉이 영천(永川)으로 달려가 시 한 수를 지어 주며 이별하였다.[주-D012] 참새가 …… 뚫더니만 : 사람의 몸이 죽어서 혼백(魂魄)이 이미 떠나간 것을 말한다. 《법구경(法句經)》에, “정신이 형신 안에 거처하는 것은 참새가 병 속에 들어 있는 것과 같다. 병이 깨져 버리면 참새는 날아가 버린다.” 하였으며, 《대지도론(大智度論)》에는, “새가 날아와서 병 속으로 들어가매, 깁 가지고 병 주둥이를 막았네. 깁이 뚫어져 새가 날아가 버리자, 신명도 그에 따라 달아나누나.〔鳥來入甁中 羅縠掩甁口 縠穿鳥飛去 神明隨業去〕” 하였다.[주-D013] 갈매기가 …… 잃었구나 : 전원에서 한가로이 살던 김우굉이 죽었다는 뜻이다. 《열자(列子)》 〈황제(黃帝)〉에, “바닷가에 사는 어떤 사람이 갈매기를 몹시 좋아하여 매일 아침마다 바닷가에서 갈매기와 놀았는데, 날아와서 노는 갈매기가 100마리도 넘었다. 그의 아버지가 ‘내가 들으니 갈매기들이 모두 너와 함께 논다고 하는데, 너는 그 갈매기를 잡아오라. 내가 갈매기를 좋아한다.’ 하였다. 그다음 날 바닷가로 나가니 갈매기들이 위에서 날면서 아래로 내려오지 않았다.” 하였는데, 이로 인해서 후대에는 마음을 툭 터놓고 상대를 대하거나, 세상을 피하여 은둔한다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2023-08-09 | NO.507
  • 김 삭주(金朔州) 형제의 복수전(復讎傳)
    김 삭주(金朔州) 형제의 복수전(復讎傳)송자대전 제214권 / 전(傳)김성일(金成一)의 자는 응건(應乾)인데, 광주(光州) 평장동(平章洞) 사람으로 담양부(潭陽府)에서 대대로 살았다. 그의 아버지 준민(俊民)은 벼슬이 우후(虞候)였고, 어머니는 하동 정씨(河東鄭氏)였는데, 용(龍)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꿈을 꾸고 공을 낳았기 때문에 아명(兒名)은 현룡(見龍)이었다. 키는 8척이었고, 붉은 수염은 창끝처럼 곧았으며, 용력(勇力)이 뛰어난 데다 음양가(陰陽家)를 섭렵(涉獵)하여 장차 무재(武才)로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준민의 아우는 세민(世民)이었는데, 그의 종[奴] 금이(金伊)가 세민의 아내 예합(禮合)과 간통하였다. 준민은 이를 통분하게 여겨 장차 그들을 제거하려 하였는데, 미처 거사(擧事)하기 전에 종 금이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제 아비와 두 동생을 거느리고 기사년(1629, 인조7) 10월 30일 밤에 준민의 집으로 쳐들어가 준민을 매우 참혹하게 어지러이 찍어 죽였다. 때에 성일은 과거를 보기 위해 서울에 갔다가 아버지의 부음(訃音)을 듣고 돌아왔는데, 그의 아우 성구(成九)는 피를 토하며 실성(失性)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형제가 서로 굳게 결심하고 창을 베개 삼아 거적자리에서 잠을 자며, 아버지를 장사 지내지 않고 적괴(賊魁)의 동정만을 살폈다. 이해 12월 15일에 시장(市場) 안에서 금이와 그의 부모를 찾아 손수 잡아 죽이고 그의 간(肝)을 잘라 내어 가인(家人)을 시켜서 아버지의 빈전(殯前)에 매달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즉시 부(府)에 나아가 형제가 자수(自首)하면서 죽여 주기를 청하였으니, 준민이 죽은 지 겨우 45일째였다.담양 부사(潭陽府使) 이공 윤우(李公潤雨)가 추관(推官)인 광주 목사(光州牧使) 임효달(任孝達)과 함께 예전의 복수면사의(復讎免死議 군부(君父)의 원수를 갚고 죽음을 면한 데 대한 의논)를 끌어대어 감사(監司)에게 보고하였다. 감사 송공 상인(宋公象仁)이 이를 조정에 보고한 결과, 승지(承旨) 이공 경용(李公景容)이 해조(該曹)에 알려, 《대명률(大明律)》의 장벌조(杖罰條)에 의거하여 시행하기를 청하였는데, 인조대왕(仁祖大王)은 그의 효의(孝義)를 가상하게 여겨 특사(特赦)하였다. 대체로 처음 변(變)이 났을 때부터 이제까지의 기간은 9개월이었다. 그러자 인리(隣里)의 여러 친지들은 준민의 시체가 돌아갈 곳이 없음을 민망하게 여겨 힘을 합해서 그를 장사 지냈다.성일은 담양(潭陽)을 선친이 살해당한 지역이라 하여 차마 그대로 살지 못하고, 형제가 드디어 흥덕(興德)ㆍ부안(扶安) 등지로 옮겨 가 우거(寓居)하였다. 사인(士人) 박문두(朴文斗)는 의로운 사람이었다. 그들 형제를 자기 집으로 맞이하여 재산을 기울여서 접대하였다. 그들 형제가 아버지의 상(喪)을 마치자, 백강(白江) 상공(相公) 이경여(李敬輿)는 그들을 막하(幕下)에 두고 후히 대우하였는데,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 신공 경진(申公景禛)도 역시 그렇게 대우하였다.병자호란 때는 대가(大駕)를 호종(扈從)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들어가 동성(東城)에 나누어 예속되었다. 선전관(宣傳官) 윤겸지(尹謙之)와 함께 베개를 연하고 잠시 토우(土宇)에서 쉬고 있었는데, 갑자기 세 번 부르는 소리가 들리므로 놀라 일어나서 뛰어나가다 뒤돌아 보니, 적(賊)의 포(砲)가 벌써 윤겸지의 머리를 부숴버렸다. 이리하여 사람들이 모두 그 일을 아주 이상하게 여겼다.난(亂)이 끝나자 선전관이 되었고, 무과(武科)에 합격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도총부 경력(都摠府經歷)이 되었으며, 영원 군수(寧遠郡守)로 나갔다가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였다. 복(服)을 마친 다음 곡산(谷山)과 철산(鐵山)의 군수(郡守)를 거쳐 간간이 장관(將官)이 되었는데, 대체로 문무관(文武官) 제공(諸公)에게 깊이 알려졌기 때문에 직임(職任)이 몸에서 떠난 적이 없었던 것이다.젊은 때의 패기가 줄어지자 전리(田里)에 물러나 살면서 여생을 마치려 하였다. 그러나 정유년(1657, 효종8) 6월에 효종대왕(孝宗大王)이 삭주 도호부사(朔州都護府使)를 특별히 제수하므로 한숨지으며 탄식하기를,“나는 늙었는데 어찌 다시 젊은 패기가 있겠는가마는 상의 은혜가 지극히 중하니 어찌 감히 죽기로써 기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고는, 드디어 애써 부임하였다. 그러나 어떤 일 때문에 눈바람을 맞으면서 용만(龍灣)을 왕래하다가 한질(寒疾)을 얻어 나이 66세로 무술년(1658, 효종9) 1월 1일에 졸(卒)하였다. 그러자 비변사(備邊司)에서 연도(沿道)에 명하여 그를 운상(運喪)해 돌아오도록 해서, 담양군(潭陽郡) 무이동(武夷洞) 정좌(丁坐)의 언덕 선영(先塋)에 장사 지냈다.그의 아내 이씨(李氏)는 아들 수태(守兌)가 있었는데, 그 아이를 낳은 지 돌도 안 되어 변(變)이 일어났으므로 아이를 온전히 보전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남몰래 재종형(再從兄)인 진경(振慶)의 집에 의탁하였다. 진경은 그를 길러서 자기 자식으로 삼았다. 수태의 아들 정하(鼎夏)가 삭주(朔州 삭주 도호부사를 지낸 김성일을 가리킴)에 대한 시말(始末)을 갖추어 가지고 와서 전(傳)을 만들어 주기를 청하였다. 나는 늙고 병들어 거의 죽게 된 지경이라, 필연(筆硯)을 손에서 놓은 지 오래지만, 이제 성일 형제의 사적은 세교(世敎)에 도움이 매우 크기 때문에 이상과 같이 대략 쓴다.삼가 예경(禮經)과 《춘추(春秋)》를 상고하건대 복수(復讎)에 대한 의리가 자상하였는데, 주 부자(朱夫子)에 이르러 그를 더욱 발휘(發揮)하고 천명(闡明)하였다. 그러나 세상이 쇠퇴하고 풍속이 투박하여 이런 의리를 아는 자가 적다. 이제 성일 형제는 꼭 예경이나 《춘추》의 뜻을 연구해서가 아니고, 다만 천부(天賦)의 성(性)을 가지고 생사(生死)를 잊고 분발하여 이런 큰일을 처리하였으니, 어찌 위대하지 않은가.인조대왕은 그가 제 맘대로 살인한 죄를 특사(特赦)하였고, 효종대왕은 또 그에게 벼슬을 제수하였으며, 상공 이경여는 가장(嘉奬 칭찬하고 장려함)하고 친후(親厚)하게 대하였다. 심지어 옥관(獄官)들까지도 모두 그를 살리자는 의논을 펴서 풍화(風化)를 도왔으니, 본조(本朝)의 예의(禮義)의 밝음이 중화(中華)에 비해 손색이 없음을 더욱 믿을 만하다.그 아버지의 장례(葬禮)를 뒤로 미루었던 것은 더욱이 주자의 설(說)과 부합된 점이 있다. 주자가 일찍이,“《춘추》의 법에, 임금이 시해(弑害)되었을 때 임금을 시해한 적(賊)을 토벌하지 못했으면 장(葬)이라고 쓰지 않은 것은 바로 복수의 대의(大義)를 중히 여기고 장사 치르는 상례(常禮)를 가볍게 여겨, 만세의 신자(臣子)에게 반드시 적을 토벌해서 원수를 갚은 다음에야 그 군친(君親)을 장사 지낼 수 있음을 보이기 위함이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면 비록 관곽(棺槨)과 의금(衣衾)이 더없이 융후(隆厚)하다 할지라도 실상은 시체를 구학(丘壑)에 버려서 여우와 너구리가 뜯어먹고 파리와 모기가 빨아먹도록 내버려두는 것과 같은 것이다.”하였으니, 그 의리가 아주 적절하다 하겠다. 이제 성일 형제의 처사가 그와 은연중 부합되며, 대체로 하늘에서 얻은 의리의 마음이 이와 같은 것이다. 아, 기특하도다.숭정(崇禎) 기원 후(紀元後) 8월 일에 은진 송시열은 쓴다.
    2023-08-08 | NO.506
  • 김 서장관에게 조천기를 주다 〔贈金書狀朝天記〕- 어우집(於于集) 후집> 제4권 / 기문〔記〕
    김 서장관에게 조천기를 주다 〔贈金書狀朝天記〕  압운押韻동해(東海)의 두 부사(浮槎)가 조수를 따라 흘러와 동국(東國)의 한강(漢江) 가에 이르렀다. 나와 죽계공(竹溪公)은 붙잡고 올라가 타니 그 뗏목이 유유자적 흘러갔다. 서쪽 지역에 이르러 물 하나를 건너는데 이것이 천강(天江)이고 여기를 넘으면 곧 하늘 끝이다. 옥황상제의 궁전까지 거리가 거의 구만 리인데, 이에 하고(河鼓 견우성(牽牛星))로 하여금 여섯 마리 소를 끌게 하고 방후(房侯 방성(房星))로 하여금 천사(天駟)에게 재갈을 물리게 하였다. 헌원성(軒轅星)과 진성(軫星)이 섭제성(攝提星)과 운형성(運衡星)을 따라 이르니, 이에 왕량(王良)으로 하여금 고삐를 잡게 하였다. 또 열결(列缺 번개의 신)로 하여금 채찍을 때리게 하고 풍륭(豐隆 천둥의 신)으로 하여금 수레를 밀게 하고 비렴(飛廉 바람의 신)으로 하여금 길을 깨끗이 하여 인도하게 하였다. 이 날은 날씨가 맑아 산천이 화창하여 광대한 사방이 눈에 모두 들어와 가로막힌 곳이 없었다. 곧장 북쪽으로 바라보니 거대한 낭성(狼星)이 앞으로는 턱밑 살을 밟고 뒤로는 꼬리를 밟아 넘어지면서 숨어있는데, 물어보니 위호씨(威弧氏)가 활을 팽팽하게 겨누어 쏘아 잡으려 해서라고 한다. 여기서부터는 기성(箕星)이 바람을 만들지 않고 필성(畢星)이 비를 만들지 않았다. 서쪽으로 길을 가면 어떤 곳에 이르니 자하성(紫霞城)으로 담장을 둘러 있고 다섯 개의 누각, 열 두 개의 웅장한 관문, 아홉 개의 궁문이 있으며 모두 야차(夜叉 사람을 해치는 귀신)가 지키고 있다.나와 죽계공은 길일을 가려 세 번 목욕하고 세 번 향을 훈습한 이후에 조회에 나아갔다. 구진성(句陳星)을 거쳐 천상의 문을 두드리고 우림성(羽林星)을 물리치고 광한전(廣寒殿)의 뜰에 들어가니, 그 땅은 오직 백옥(白玉)이고, 그 나무는 오직 붉은 계수나무와 흰 느릅나무이며, 그 새들은 오직 삼족오(三足烏), 붉은 새, 푸른 난새, 자줏빛 봉황, 까치이며, 그 짐승은 오직 기린, 옥토끼, 붉은 표범, 흰 호랑이며, 그 인충(鱗蟲)은 푸른 용, 검은 거북이, 검은 뱀이었다.이에 옥황상제가 화려한 일산(日傘)을 끼고 장대 의장 끝을 세우고 나오시어 균천(鈞天)의 음악을 울리고 예상(霓裳)의 곡조가 연주되는 가운데 접견하였다. 삼공(三公)과 팔좌 상서(八座尙書) 그리고 즐비한 낭료들이 북극성에 위치한 황제를 향해 공수하였다. 이에 천시성(天市星)에서 칙령을 내리고 천창성(天倉星)에서 보물을 내어오고 천고성(天庫星)에서 녹봉을 내주었다. 이어서 북두성의 긴 자루를 당겨 유하주(流霞酒)와 추로주(秋露酒)를 떠서 두 번, 세 번 권하였다. 나와 죽계공은 취하고 배가 불러 춤을 추며 되돌아와서 하늘의 은하수 가 옥으로 만든 궁전에서 묵었다.다음 날이 되자 무지개가 흐르고 번개가 치며 아름다운 상서가 연달아 나타났다. 선관(仙官)과 천인(天人)이 옥 계단에서 일제히 하례하였고 하례가 끝나자 떠났다. 옥황상제가 말하길,“너 몽인(夢寅)은 나오거라. 너는 빼어난 기운을 타고나 저 멀고 궁벽한 곳에 살고 있으니 항상 우주를 좁게 여기는 마음을 지녔구나. 내가 이 때문에 세 번 너를 불러 신선들의 반열에 있도록 했다. 아! 재주가 크면 용납하기 어려우니 너는 돌아가거든 삼갈지어다.”하였다. 또 말하길,“존경(存敬)아, 너는 총명하고 온윤하며 미더워 내가 너를 가상히 여기니 너는 가서 공경히 행할지어다.”하였다. 또 말하길,“존경아, 너는 병이 많으니 이에 나의 천의성(天醫星)에게 가서 치료하도록 명하겠다.”하였다. 또 말하길,“천의성아, 동해의 신하 존경이 학질에 걸렸으니 네가 가서 치료할지어다.”하였다. 또 말하길,“천복성(天福星)아, 너는 인간 세상의 복록(福祿)을 주관하니, 선한 사람을 가리는 것은 너에게 달려있다. 장차 몽인과 존경에 큰 복을 내릴지어다.”하였다. 또 말하길,“천덕성(天德星)아, 너는 인간 세상의 후덕(厚德)을 주관하니 훌륭한 사람에게 복을 내리고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지어다. 몽인과 존경이 그 덕을 삼가했으니 너는 이들에게 더욱 복을 내려 동방 사람으로 하여금 큰 은택을 입도록 할지어다.”하였다. 또 말하길,“노인성(老人星)아, 너는 몽인과 존경에게 각각 삼천 육백 년의 수명을 하사할지어다.”하였다. 또 말하길,“직녀성(織女星)아, 너는 손수 짠 오운(五雲)의 비단 약간 필을 내어서 두 현인의 옷을 만들지어다. 규성(奎星)과 벽성(壁星)아, 지금 너희들이 나의 문장을 주관하고 있으니 나의 조명(詔命)을 지어서 두 사람이 동쪽으로 돌아가도록 허여할지어다.”하였다. 규성과 벽성이 삼가 명을 받들어 말하기를,“땅이 봉래산(蓬萊山)과 가까워 가자미가 나는 해역에 신선을 내려 보내노라. 복과 예물을 담은 광주리를 몸소 받들고 가서 궁궐의 섬돌에서 상서로움을 바칠지어다. 발해(渤海)에서 진주를 거두니 너의 패물을 엮을 만하고, 한단(邯鄲)으로 아름다운 옥이 돌아가니 더욱 내 마음이 아프구나.”이에 나와 죽계공은 조서를 받고는 공손히 절을 하고 떠났다.東海有兩浮槎,隨潮波泊東國漢江涯。余與竹溪公攀而乘之,之槎也悠悠泛泛。至西邦越一水,曰天江,越于玆,卽天倪也。去玉皇居,殆九萬里,於是使河鼓牽六牛,使房侯銜勒天駟。有曰軒轅曰軫者,從攝提、運衡而至,乃使王良執其轡。又使列缺者施鞭,豐隆者挾輅,飛廉者淸路以導行。是日也天氣淸,山川開朗,四外曠曠乎極目,靡有碍障。直北而望,有大狼前跋後疐而遁,問之則威弧氏關弓機矢,欲將徼射之爲者,自此箕不風畢不雨。西取道至一所,有繚垣周以紫霞城,有五樓,有十二雄關,有九重,皆守以夜叉。余與竹溪公涓吉朝,三沐三舋,然後乃進。歷句陳叩天扃,排羽林入廣寒之庭,則厥土惟白玉,厥樹惟丹桂、白楡,厥鳥惟踆鴉、紅鳥、靑鸞、紫鳳、鵲鳥,厥獸惟麒麟、玉兔、赤豹、素虎,厥蟲惟碧龍、黑龜、玄蛇。於是玉皇上帝乃擁華葆之蓋,建杠竹之梢,張匀天之樂,奏霓裳之調以見之。三台、八座曁有蔚郞僚,環拱于北極之宸。乃勑天市,開珍天倉,發俸天庫。繼供引北斗長杓,挹流霞、秋露之醥,再三勸之。余與竹溪公醉且飽,蹈舞而返,乃空銀河上玉宇以館之。越翌日,流虹遶電,有休祥見隨。仙官、天人齊賀于玉墀,賀已乃辭。帝曰:“來汝夢寅。惟汝負奇氣處遐偏,常有隘宇宙心。予用是三引汝齒列仙。吁!材大難容,汝歸愼旃。” 曰:“存敬,惟汝聰明溫諒,予嘉乃,欽哉汝往。” 曰:“存敬,汝惟多疢,庸命予天醫往診之。” 曰:“天醫,惟東海臣存敬遘瘧,汝往藥之。” 曰:“天福,汝管人間福祿,惟相善在汝,其福夢寅、存敬甚鉅。” 曰:“天德,汝能主世間德厚,祜碩人惠黔首。惟夢寅、存敬,愼厥德,汝其益之,俾東方蒙丕澤。” 曰:“老人,汝錫夢寅、存敬壽各三千六百年。” 曰:“織女,汝出汝手織五雲錦若干匹,衣兩賢。曰奎曰璧,今汝掌予文章,其製予詔辭,許兩人東歸。” 奎、璧拜命而稱曰:“地近蓬萊,降仙鰈域。身承筐篚,奠瑞龍階。渤海收珠,可綴汝佩;邯鄲還璧,益疚予懷。” 於是余與竹溪公受詔,拜手稽首而辭。[주-D001] 김 …… 주다 : 이 글은 김존경(金存敬, 1569~1631)을 위해 쓴 조천기(朝天記)이다. 김존경의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수오(守吾), 호는 죽계(竹溪)이다. 1617년(광해군 9)에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갔었으며, 이후 강원 감사, 지중추부사, 경주 부윤을 역임하였다가 인조반정 이후 대북파의 몰락과 함께 관직에서 밀려났다.[주-D002] 두 부사(浮槎) : 부사는 바닷가와 은하수를 왕래하는 전설상의 뗏목이다. 여기서는 저자와 김존경이 중국으로 사신을 가기 위해 각각 이 뗏목을 타는 것을 가리킨다.[주-D003] 왕량(王良) : 춘추 시대 사람인데 말을 잘 다루었다. 《회남자(淮南子)》 〈남명(覽冥)〉에 “옛날 왕량(王良) 조보(趙父)가 수레에 올라 고삐를 잡으면 말이 차분해서 발을 옮기는 것이 일정하며 노일(勞逸)이 한결같다.” 하였다.[주-D004] 위호씨(威弧氏)가 …… 잡으려 : 장형(張衡)의 〈사현부(思玄賦)〉에 “위호를 휘어지도록 당겨 파총산의 큰 이리를 쏘리라.[彎威弧之拔剌兮, 射幡冡之封狼.]”라고 한 말이 보인다. 여기서는 북쪽 오랑캐들이 중국의 위엄에 숨죽이고 있음을 비유한 것이다.[주-D005] 기성(箕星)이 …… 않았다 : 《서경》 〈홍범(洪範)〉에 “서민은 별과 같다. 별은 바람을 좋아하는 것도 있고 비를 좋아하는 것도 있다.” 했는데, 그 주에 “기성은 바람을 좋아하고 필성(畢星)은 비를 좋아한다.” 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주-D006] 구진성(句陳星) : 별 이름으로 북극에 가장 가까운 여섯 개 별 중의 하나이다. 천자(天子)의 군대를 주관한다고 하며, 금군(禁軍)을 상징한다.[주-D007] 우림성(羽林星) : 별 이름으로, 황제의 친위 군병(親衛軍兵)인 금위군(禁衛軍)을 가리킨다.[주-D008] 균천(鈞天)의 음악 : 균천광악(鈞天廣樂)으로 천상(天上)의 음악을 가리킨다.[주-D009] 예상(霓裳)의 곡조 : 선인(仙人)을 노래한 무곡(舞曲)으로, 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이라고도 한다. 8월 보름에 나공원(羅公遠)이 당 현종(唐玄宗)과 함께 월궁(月宮)에 갔더니, 선녀 십여 명이 흰 비단 무지개 치마를 입고 넓은 뜰에서 춤추고 있었다. 그 곡의 이름을 물으니 ‘예상우의’라 하기에 나공원이 그 음조를 기억하고 돌아와 악공을 불러 그대로 지었다.[주-D010] 세 …… 불러 : 저자가 1591년(선조24)에 주청사(奏請使) 질정관(質正官)으로, 1596년에 진위사(進慰使) 서장관(書狀官)으로, 1609년(광해군1)에 성절사 겸 사은사(聖節使兼謝恩使)로 중국에 사신간 것을 가리킨다.[주-D011] 한단(邯鄲)으로 …… 돌아가니 : 한단은 전국 시대 조(趙)나라의 수도이다. 조나라 혜문왕(惠文王)이 화씨벽(和氏璧)을 얻자, 진(秦)나라 소왕(昭王)이 15개 성과 바꾸자고 청했다. 이에 인상여(藺相如)가 화씨벽을 가지고 진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소왕이 구슬을 받고 나서 약속을 이행할 생각이 없음을 알고는 다시 계교를 써서 빼앗은 뒤 온전히 조나라로 돌려보냈다. 《史記 卷81 廉頗藺相如列傳》 여기서는 천상에 왔다가 복과 예물을 가지고 온전히 귀국한 사신 일행을 가리킨다.[주-D012] 더욱 …… 아프구나 : 옥황상제가 천상에 온 사신 일행이 잠깐 있다가 떠나자 아쉬워하는 것을 가리키는 듯하다.* 어우(於于)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의 원집(原集 전집) 6권과 후집 6권 도합 6책 12권으로 된 문집 <어우집(於于集) 후집> 제4권 / 기문〔記〕
    2020-08-23 | NO.505
  • 김광욱-次光州極樂院谿谷韻
    次光州極樂院谿谷韻暫卸征鞍駐 登臨感慨長 詩魂已漠漠 山色尙蒼蒼古壁留殘墨 遺珠落遠疆 悲吟續淸響 無復襲蘭香竹所集 卷之二죽소竹所 김광욱金光煜(1580∼1656)은 우부승지를 지내다 1638년 나주목사로 부임 받고 “好在金支使 김 지사 그동안 잘 있었는지 / 春來得寄聲 봄철 들어서야 소식 전할 수 있게 됐소”하며 서로 시를 주고받으며 친했던 계곡 장유의 시가 극락원에 있어 반가운 나머지 차운하여 읊는다.
    2018-07-17 | NO.504
  • 김극광-社稷壇祈雨祭文 사직단기우제문
    社稷之立本以爲民民之不淑責在明神惟玆亢早不日不月始自種綿 汔于收麥有草皆枯靡穀不痒矧令民事正急分秧泉源亦渴抱甕何補 民之遑遑如彼涸鮒昨者油然霓望正切凄風撥雲虐炎增鑠將雨不雨 神意莫測豈社不臨豈稷不克禦灾捍患民固望神降福佑民此維其辰 胡閟霈澤而爲此虐若過旬時雖雨無及速回玄機甘㴻斯洽高田決渠 枯苗勃興三農慰滿百穀豊登豈惟吾民鼓腹樂生神之粢盛亦頼而出 春秋潔祀庶永無缺自惟菲寸新莅玆邑獲罪神明灾及生靈恐惧柢慄 不敢遑寧適病在床薦不以躬替遣鄕紳陳此醴牲神其降歆庶格微誠-원관헌집(遠觀軒集) 권9김극광(金克光, 1653-1724)의 자는 현보(顯甫)이며, 호는 원관(遠觀)이다. 사직의 본분은 백성을 위한 것이다는 내용이다.
    2018-07-10 | NO.503
  • 김기홍- 그 어느때 하얀 학(鶴)이 둥지찾아 돌아올고
    그 어느때 하얀 학(鶴)이 둥지찾아 돌아올고푸른 밭을 좋아하여 숲속들을 멀리하네.하늘 땅의 비장(秘藏)이치 어느 누가 깨달을고연남송회(烟嵐松檜) 푸른 빛이 서로 함께 사귀었도다.동포(東圃) 김기홍(金基洪)
    2020-04-25 | NO.502
  • 김기홍-우봉낙조 牛峰落照
    뚜렸하는 서쪽산에 늙은 소가 누웠는데(牛峰)삼간(三竿) 길이 붉은 날이 서루(書樓)위에 비쳤도다.티끌 세상 뜬 인생이 나도 몰래 다 늙어서모자 벗은 머리위에 하얀 백발 가득하네동포(東圃) 김기홍(金基洪)이 청품마을 균산정에서 읊은 8경 중 7경 우봉의 낙조이다.
    2020-04-25 | NO.501
  • 김대현 -무등산 한시 111편
    무등산한시선무등산에 대한 한시를 옛 문헌 속에서 찾아내어, 시대 순으로 편집하고 번역한 책이다. 우리나라 스물 두 번 째 국립공원인 무등산은 남쪽 지방의 대표적인 명산으로, 예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탐방하고 있다. 고려시대 대각국사 의천의 시문집에서부터 현대 의재 허백련의 시문집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옛 문헌 속에 무등산은 살아 숨 쉬고 있다. 이들 가운데 백여 수를 모아서 번역한 것이다.무등산을 올라가면 만나는 입석대나 서석대, 규봉암 등 무등산 정상 부근의 대표적인 절경들이 고스란히 한시 속으로 들어와 있다. '산 빛은 아침저녁으로 안개 자욱하고, 깎아지른 산세는 만고의 으뜸이라'는 퇴계 이황의 시구에서나, '많은 이들 우러르는 서석산, 꼭대기에는 태곳적 눈이 남아 있구나'라고 읊었던 다산 정약용의 시구에서처럼 우리나라 대표적인 문인들의 무등산 예찬을 만날 수 있다.서석산 규봉사에 시를 남기다/ 留題瑞石山圭峯寺/ 대각국사 의천 12규봉사 첫째 수/ 圭峯寺 1/ 김극기 14규봉사 둘째 수/ 圭峯寺 2/ 김극기 16증심사/ 證心寺/ 김극기 18무등산 석실/ 石室無等山/ 나옹선사 20광주 무등산 첫째 수/ 光州無等山 1/ 김종직 22광주 무등산 둘째 수/ 光州無等山 2/ 김종직 24무등산에 올라/ 登無等山/ 김시습 26규봉난야/ 圭峯蘭若/ 김시습 28서석을 유람하며/ 遊瑞石/ 정지반 30서석산을 유람한 시/ 遊瑞石山韻/ 박 상 32무등산에 올라 첫째 수/ 登無等山 1/ 송 순 34무등산에 올라 둘째 수/ 登無等山 2/ 송 순 36서석산의 한가한 구름/ 瑞石閒雲/ 송 순 38서석산의 한가한 구름/ 瑞石閑雲/ 임억령 40서석산의 맑은 구름/ 瑞石晴雲/ 임억령 42서석산의 맑은 안개/ 瑞石晴嵐 / 임억령 44서석산의 맑은 구름/ 瑞石晴雲/ 이 황 46양계명에게 주다/ 贈梁生季明/ 김인후 48서석산의 맑은 안개/ 瑞石晴嵐/ 김인후 50증심사 조선스님에게 드리다/ 證心寺贈祖禪/ 노수신 52광주 무등산/ 光州無等山韻/ 오수영 54서석산의 맑은 안개/ 瑞石晴嵐/ 박 순 56무등산 첫째 수/ 無等山 1/ 박대붕 58무등산 둘째 수/ 無等山 2/ 박대붕 60증심사에서 유시보에게 써 보이다/ 證心寺示劉施普/ 김성원 62규봉사의 주석에 쓰다/ 題圭峯寺柱石/ 김성원 64서석산의 한가로운 구름/ 瑞石閑雲/ 김성원 66서석산의 맑은 구름/ 瑞石晴雲/ 박광옥 68증심사 조선/ 證心寺祖禪詩/ 박광옥 70규봉에 이르러/ 到圭峯/ 기대승 72규봉에서 비를 만나/ 圭峯遇雨/ 기대승 74원효사/ 元曉寺/ 기대승 76서석산에 오르다/ 登瑞石山/ 김부륜 78규암에서 노닐며/ 遊圭庵/ 김부륜 80원효암/ 元曉庵/ 김부륜 82입석대를 오르다/ 登立石臺/ 구사맹 84규봉사에 이르러/ 到圭峯寺/ 고경명 86소은굴에서 우연히 읊다/ 小隱窟偶吟/ 고경명 88서석산의 맑은 안개/ 瑞石晴嵐/ 고경명 90서석산/ 瑞石山/ 이순인 92창랑정을 짓고서/ 滄浪亭原韻/ 정암수 94눈/ 雪/ 송익필 96서석산/ 瑞石山/ 유희경 98무등산 스님의 시에 차운하다/ 次題無等山僧軸/ 임 제 100무등산을 유람하여/ 游無等山/ 조팽년 102증심사 죽루에서 옛 운에 차운하다/ 證心竹樓次舊韻/ 고경리 104무등산에서 비를 만나다/ 無等山逢雨/ 최희량 106무등산을 유람하며 첫째 수/ 遊無等山 1/ 최희량 108무등산을 유람하며 둘째 수/ 遊無等山 2/ 최희량 110서석산 규봉에서 염불사에 이르다/ 自瑞石圭峯至念佛寺/ 진경문 112서석산을 유람하며 첫째 수/ 遊瑞石山 1/ 정운희 114서석산을 유람하며 둘째 수/ 遊瑞石山 2/ 정운희 116어떤 이가 ‘무등산노래’로 화답시를 구하다/ 有人示無等山歌求和/ 강 항 118무등산을 유람하다/ 遊無等山/ 이안눌 120서석산을 유람하다/ 遊瑞石山/ 조찬한 122서석산 첫째 수/ 瑞石山 1/ 고부민 124서석산 둘째 수/ 瑞石山 2/ 고부민 126서석산/ 瑞石山/ 신 즙 128무등산/ 無等山/ 장 유 130병들어 서석에 살면서 작은 감실 벽에 쓰다/ 病棲瑞石小龕題壁/ 정홍명 132서석산/ 瑞石/ 정지준 134서석산에 오르며/ 登瑞石山/ 이명한 136원효사/ 元曉寺/ 이시성 138증심사/ 證心寺/ 신익전 140함경이 대이에게 준 시에 화답하여/ 和咸卿寄大而韻/ 유 계 142창평 조사군 자방이 임지로 떠남에 이별하며 주다/ 贈別昌平趙使君子芳之任/ 신 최 144장마 중에 무등산을 기쁘게 보다/ 久雨喜見無等山/ 김만영 146서석산 원효암의 노승 영한이 찾아오다/ 瑞石山元曉菴老僧永閒委來相訪/ 김수항 148우연히 읊다/ 偶吟/ 이민서 150서석산 입석/ 瑞石山立石/ 신 완 152서석상봉/ 瑞石上峰/ 김창흡 154화음굴/ 華陰窟/ 김창흡 156광석대/ 廣石臺/ 김창흡 158서석산에 올라 저물녘에 증심사에서 자다/ 將登瑞石山暮投澄心寺/ 이해조 160증심사에서 묵다/ 留宿澄心寺/ 이해조 162서석산 입석대/ 瑞石山立石臺/ 이해조 164서석에 올라 첫째 수/ 登瑞石 1/ 양경지 166서석에 올라 둘째 수/ 登瑞石 2/ 양경지 168무등산/ 無等山/ 신익황 170말 위에서 서석산을 바라보며/ 馬上望瑞石山/ 이하곤 172서석산 지공너덜/ 瑞石山指空礫/ 임상덕 174입석을 바라보고/ 觀立石/ 임상덕 176서석산을 오르며 증심사에서 잠을 자다/ 將踏瑞石山宿證心寺/ 임상덕 178무등산/ 無等山/ 김도수 180서석산 원효사에서 자면서/ 宿瑞石山元曉寺/ 김도수 182서석산을 유람하며/ 遊瑞石山/ 위백규 184서석산에 올라/ 登瑞石山/ 정약용 186광주 무등산에 올라/ 登光州無等山/ 조인영 188갑인년 초여름 서석산을 유람하다/ 甲寅初夏遊瑞石山/ 송달수 190무등산/ 無等山/ 나도규 192서석을 구경하고 돌아와서/ 觀瑞石而歸/ 나도규 194광주 무등산 천황봉/ 光州無等山天皇峯/ 김윤식 196서석산/ 瑞石山/ 송병선 198서석산에 올라/ 登瑞石山/ 배현규 200서석산의 맑은 구름/ 瑞石晴雲/ 박노술 202증심사/ 澄心寺/ 나윤후 204광석대/ 廣石臺/ 이정회 206천황봉에 오르다/ 登天皇峰/ 이정회 208증심사 벽 위에 쓰다/ 題澄心寺壁上/ 금명보정 210서석산에 오르다/ 伴?瑞石山/ 송 홍 212규봉암에서 자다/ 宿圭峰庵/ 송 홍 214무등산 규봉암에서 자며 차운하다/ 宿無等山圭峯庵次韻/ 김희수 216서석상봉에 올라/ 登瑞石上峰/ 김희수 218무등산/ 無等山/ 허백련 220서석산을 유람하다/ 瑞石遊覽/ 정일섭 222
    2022-02-04 | NO.500
  • 김덕령 - 자해필담(紫海筆談)
    김덕령 - 자해필담(紫海筆談) : 하담(荷潭)김시양(金時讓, 1581~1643)<중략>이몽학(李夢鶴)이란 자는 서울의 천한 서얼인데, 몹시 방자하고 건방져서 그의 아비에게 내쫓기었다. 호서와 호남 사이를 왔다 갔다 하다가 한현(韓絢)이 선봉장이 되자 그의 군대에 예속되어 한현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선조 29년 7월에 이몽학이 먼저 홍산(鴻山)에서 군사를 일으켜 그 고을의 수령 윤영현(尹英賢)을 사로잡고 또 임천 군수(林川郡守) 박진국(朴振國)을 사로잡으니, 인심이 무너지고 흩어져서 감히 항거하는 자가 없었다. 잇따라 6ㆍ7개의 고을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한현은 일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고 호응하지 않았다. 이몽학이 진군하여 홍주(洪州)를 핍박하니, 목사 홍가신(洪可臣)은 일이 뜻밖에 일어났으므로 손을 써볼 계책이 없이 다만 성문을 닫을 뿐이었다. 도원수의 종사관 신경행(辛景行)이 마침 왔다가 격문(檄文)을 보내어 수사 최호(崔湖)를 불렀다. 최호가 군대를 거느리고 성안으로 들어오니, 인심이 비로소 진정되었다. 무장 박명현(朴命賢)은 날래고 꾀가 있는 사람인데, 상주노릇을 하느라고 고을 안에 있었다. 홍가신이 부르자, 박명현은 즉시 융복(戎服)을 갖추고 성안으로 들어왔다. 그리하여 성의 수비는 더욱 견고하게 되었다. 이몽학이 처음 군사를 일으킬 때에 그의 무리들에게 속여 말하기를,“김덕령(金德齡)이 나와 약속이 있고, 도원수ㆍ병사ㆍ수사도 다 내통되어 있으므로 반드시 호응할 것이다.”하여, 여러 무리들이 그렇게 여겼는데, 홍주에 군사를 내어 주둔하게 되었을 때, 여러 무리들은 수사가 군사를 거느리고 성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비로소 그가 속였음을 알았다. 그리하여 군사의 사기가 떨어져서 밤중도 안 되어 반군(叛軍)은 무너지고 말았다. 윤영현이 뛰어나와 성 아래에 이르러 부르짖기를,“적병이 무너져 흩어졌으니 나와서 뒤쫓아 치소서.”하였으나, 성중에서는 믿지 않고 명하여 윤영현을 묶어서 잡아 오게 하였다. 그러나 새벽이 되어서 살펴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성중은 비로소 후회하고 군사를 내보내어 추격해서 많은 포로와 수급(首級)을 얻었다. 그의 부하 임억명(林億明)이란 자가 이몽학의 머리를 베어 바치었다. 한현도 일이 발각되어 베임을 당하였다.김덕령(金德齡)이란 사람은 광주(光州)의 교생(校生)인데, 용맹과 힘이 있었으며 스스로 둔갑술을 안다고 하였다. 이귀(李貴)가 그를 믿고 무군사(撫軍司)에 추천하기를,“용과 범을 쫓아 잡고 공중을 날아다니며, 지혜는 제갈공명(諸葛孔明) 같고 용맹은 관우(關羽)보다 더하다.”하니, 세자가 불러서 보고 장려하여 익호장군(翼虎將軍)을 임명하였는데, 선묘가 그 칭호를 초승장군(超乘將軍)이라고 고쳤다. 이때 온 나라가 두려워 떨며 그를 신장(神將)이라고 하였으며, 김덕령 자신도 또한 그렇게 스스로 믿어 사양하지 않았다. 그러나 실상은 술에 취하여 기세를 부리고 법을 어겨 쓸 만한 사람이 못되어, 적진과 3년을 마주 대했지만 한 치의 공도 없었다. 마침내 헛이름 때문에 이몽학이 무리에게 이끌려 이용되었다가 고문을 받고 죽었으니, 이 또한 스스로 화를 부른 것이다.적당이 김덕령의 이름을 인용하자, 상은 매우 놀라 즉시 좌우를 물리치고 여러 대신들과 의논하기를,“김덕령은 용맹이 삼군(三軍)에 으뜸이고 또 친히 거느린 군사가 있으니, 만일 포박에 응하지 않는다면 어찌할 것인가?”하니, 유서애(柳西厓)가 대답하기를,“반드시 명령을 감히 거역하지 못할 것입니다. 서성(徐渻)이 새로 영남에서 왔으므로 반드시 사정을 알 것이오니, 청컨대 그에게 물어보소서.”하였다. 서성이 대답하기를,“신이 오랫동안 남쪽 고을에 있으면서 그의 하는 바를 보니, 망령되고 범상한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용맹과 힘이 있다고 하지만 또한 남보다 썩 뛰어난 것은 아니오며, 크게 민심을 잃어서 친히 거느린 군사들도 다 다른 마음을 품고 있으므로 비록 명령을 거역하고자 하여도 또한 될 수 없을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네가 잡아올 수 있겠느냐?”하니, 대답하기를,“만약 도망해 숨었다면 신이 잡아올 수 없으나 그렇지 않다면 그를 체포하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듯 쉽습니다.”하였다. 상이 위태롭게 여기니, 서애가 아뢰기를,“서성이 어찌 감히 성상의 위엄있는 지척의 거리에서 감당할 수 없는 일을 큰소리 치겠습니까? 그 말이 꼭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신이 보장하겠습니다.”하였다. 서성이 말하기를,“한명련(韓明璉)이 지금 영남에 있는데, 또한 용감하옵니다. 그를 시켜서 도모하게 하고, 김응서(金應瑞)로서 항복한 왜병(倭兵) 50인을 이끌고 조력하게 한다면 김덕령이 어찌 감히 맞서 버틸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신의 계산으로는, 김덕령이 반드시 손을 모아 포박을 받을 것이므로 반드시 이러한 사태에까지 이르지는 않을 것입니다.”하였다.이에 상이 서성에게 명하여 급전(急傳)을 타고 가서 잡아오게 하였다. 서성이 가다가 전주(全州)에 이르니, 도원수 권율(權慄)이 이미 김덕령을 진주(晉州)에 감금하고 있었다.권율도 그가 명령에 거역할 것을 염려하여 은밀히 성윤문(成潤文)을 시켜서 도모하게 하였다. 성윤문이 은밀히 김덕령에게 군무(軍務)를 의논하자고 청하니, 김덕령이 알아차리지 못하고 단기(單騎)로 왔다. 좌정한 뒤에 성윤문이 그의 손을 잡으며 말하기를,“조정에서 자네를 잡으라고 명하였네.”하니, 김덕령이 즉시 꿇어앉아 말하기를,“상의 명령이 있었다면 어찌 이렇게까지 하오? 원컨대 나의 손을 뒤로 돌려 묶으시오.”하였다. 성윤문은 그의 원통함을 가엾게 여겨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고, 다만 그의 두 손에 수갑만을 채워서 옥(獄)으로 보냈다. 서성은 김덕령이 이미 갇혔다는 말을 듣고, 조정에 장계를 올리기를,“권율이 김덕령에게 이몽학을 치게 했는데, 김덕령이 4일 동안 머뭇거리며 성패를 관망하므로 가두었습니다.”하였다. 그 여덟 글자가 드디어 김덕령의 단안(斷案)이 되어 사죄를 면치 못하게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서성의 잘못이라고 했다.<하략>
    2020-09-25 | NO.499
  • 김덕령 누나가 세운 바위들
    광주광역시 북구 용강동 입암마을에서 전해 내려오는 김덕령 장군의 누나에 관한 이야기.  「김덕령 누나가 세운 바위들」은 김덕령(金德齡)[1567~1596] 장군의 누나가 세운 바위에 관한 지명설화이다.2018년 1월 18일 광주광역시 북구 용강동 입암마을에 거주하는 주민 김용례[여, 79세]의 이야기를 채록하였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주관하는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에 수록되었다. 김덕령 장군이 힘이 없었지만 유명하였던 반면, 김덕령 장군의 누나는 유명하지 않았지만 힘이 무척 세었다. 그래서 김덕령의 누나는 자신의 치마에 바위를 가지고 다니면서 곳곳에 바위를 세우곤 하였는데, 세운 바위를 선바위와 꽃바위, 너럭바위라고 불렀다. 김덕령의 누나가 강했기 때문에 김덕령이 누나와 겨루려 하지 않았다.  「김덕령 누나가 세운 바위들」의 주요 모티프는 '인물에 의한 지명유래'이다. 김덕령 장군은 임진왜란 시기에 호남 지역에서 의병으로 활약했던 인물로, 광주 일대에는 김덕령과 김덕령 누나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다. 설화에서 김덕령 장군의 누나는 김덕령 장군보다 힘이 더 세고 능력이 좋은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김덕령 장군의 누나가 입암마을 뒤에 있는 삼각산 줄기에 선바위와 꽃바위, 너럭바위를 세웠다고 하는 지명의 유래를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광주광역시 북구문화원(http://gjbukgu.or.kr)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4 | NO.498
  • 김덕령 아버지가 훔친 명당자리
    광주광역시 동구 용산동 화산마을에서 전해 내려오는 김덕령과 명당에 관한 이야기. 「김덕령 아버지가 훔친 명당자리」는 김덕령의 탄생 배경과 관련된 풍수담이다.2018년 2월 21일 광주광역시 화산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주민 최복연[남, 87세]의 이야기를 채록하였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주관하는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에 수록되었다. 김덕령의 아버지는 주막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던 인물이었다. 어느 날 중국에서 온 풍수가가 주막에 머무르면서 묫자리를 보고 다녔는데, 하루는 김덕령 아버지에게 달걀을 하나 구해 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김덕령의 아버지가 곤달걀을 풍수가에게 주었더니, 풍수가는 새벽에 산으로 올라가 달걀을 묻고 기다렸다. 그러나 날이 새도 닭이 우는 소리가 나지 않자 풍수가는 낙심하며 돌아왔다. 김덕령의 아버지는 그 모습을 몰래 지켜보고 모른 척하고 있다가 풍수가가 다시 달걀을 가져다 달라는 부탁을 하자 이번에는 멀쩡한 달걀을 주었다. 풍수가가 전에 곤달걀을 묻었던 자리에 성한 달걀을 묻자, 그 자리에서 닭이 우는 소리가 났다. 이 자리는 달걀이 닭이 되는 길지(吉地)였던 것이었다. 풍수가가 중국으로 돌아가자, 김덕령의 아버지는 몰래 그 묫자리에 아버지의 묘를 썼다. 이후, 중국에서 돌아온 풍수가는 자신이 알아놓았던 묫자리를 찾아갔는데, 누군가 이미 묘를 쓴 것을 알게 되었다. 풍수가는 묫자리의 안대(案帶)가 틀린 것을 발견하고, 김덕령의 아버지에게 묫자리의 방향을 다시 잡아 주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김덕령의 아버지는 풍수가가 괜히 해코지를 할 것을 염려하여 그 부탁을 거절하였다. 때문에 사람들은 묫자리를 제대로 맞추지 못해서 김덕령이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능력이 부족하였던 것으로 생각하였다.「김덕령 아버지가 훔친 명당자리」의 주요 모티프는 '명당자리 빼앗기'이다. 풍수는 바람과 물의 위치에 따라 복이 발생한다는 믿음에 근거한 것으로, 풍수와 관련된 이야기는 다양한 방식으로 전승되고 있다. 김덕령의 아버지가 중국에서 온 풍수가가 정한 명당자리를 빼앗아서 김덕령의 할아버지를 묻었기 때문에 김덕령이라는 뛰어난 인물이 태어났다고 한다. 즉, 이 이야기는 명당자리를 빼앗은 것을 합리화하고 있다. 풍수가가 묫자리를 제대로 바로잡으려고 하였으나, 김덕령의 아버지가 이를 거절하였는데, 이 때문에 김덕령이 능력을 발휘하는 데 한계를 겪게 되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표인주, 「김덕령 설화의 기호적 의미와 전승집단의 인식-『광주전설』을 중심으로-」(『석당논총』 72,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2018)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4 | NO.497
  • 김덕령 오누이의 경주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서 전해 내려오는 김덕령 오누이의 힘겨루기 이야기.김덕령(金德齡)[1567~1596]은 남다른 용력(勇力)을 지니고 있으며, 자신의 용력으로 다른 사람을 굴복시키는 것을 자랑스러워하였다. 김덕령의 누이는 김덕령의 자만심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옷 짓기와 성 쌓기 시합을 했는데, 일부러 져주면서 동생의 자존심을 세워주었다는 이야기이다.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 거주하는 제보자 김종관의 이야기를 채록해서, 1990년 광주직할시가 간행한 『광주의 전설』에 수록하였다. 김덕령의 누이는 평소 도량이 넓고 힘과 지혜가 뛰어난 여장부였는데, 청계(淸溪) 김경회(金慶會)와 혼인했다. 김덕령의 누이가 어머니의 병환 때문에 친정에 와 있었는데, 김덕령이 형제들과 함께 화순을 다녀오면서 주막집에서 행패를 부리던 불한당을 제압했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누이는 김덕령을 불러서 용력을 과신하거나 자랑하지 말라며 주의를 주었다. 누이는 김덕령에게 시합을 제안했다. 누이는 정오까지 자신은 무명베로 도포를 짓고, 김덕령은 환벽당 밑의 언덕에 돌로 성을 쌓기로 했다. 누이는 정오가 되기 전에 이미 도포를 지었고, 마지막 마무리인 동정을 달지 않고 기다렸다. 김덕령이 성을 다 쌓고 누이가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누이는 그때서야 비로소 동정을 달기 시작했다. 김덕령은 누이가 동정을 다는 것을 보면서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했다. 김덕령은 누이를 이긴 승리감보다는 자신이 하려고 노력하면 능히 이룰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김덕령 오누이의 경주」는 김덕령의 인물전설로서 오누이가 힘을 겨루는 이야기 유형에 해당한다. 오누이 힘겨루기 전설은 한국의 비극적 영웅전설을 구성하는 이야기 유형이다. 오누이 힘겨루기 전설은 남성과 여성의 대결에서 여성이 일부러 져주거나, 어머니가 개입해서 남성이 승리하게 되고, 그 대가로 여성이 죽으면서 끝을 맺는다. 이러한 결말은 남성 주인공에게 반인륜적 특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김덕령 후손들은 오누이 힘겨루기 전설을 차용하지만, 김덕령의 비범성과 누이의 지혜로움을 함께 보존하면서 이야기 결말을 비극적으로 처리하지 않는다. [참고문헌] 『광주의 전설』(광주직할시, 1990)[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4 | NO.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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