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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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축록 속(己丑錄續) 성명 미상(1700년대)

기축록 속(己丑錄續) 성명 미상(1700년대)


《기축록》에 이어 효종 8년 정유(丁酉 1657)로부터 숙종 28년(1702)까지 45년간에 일어났던 정개청(鄭介淸)의 서원 철훼를 두고 동서(東西) 양파간의 싸움을 기록한 일기이다.

이 일기를 쓴 사람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1700년대 전후에 생존하였던 것만은 확실하다. 그 외의 사실은 알 길이 없다.

이 일기를 보면 효종 때 송준길(宋浚吉)이 호남 유생(湖南儒生)들이 정개청의 서원 철훼를 반대하는 상소를 왕께 올리게 된 데 대하여 호남 유생들을 다시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하여 호남 유생들은 이에 반발하여 선조 때에 정철의 불공평한 처사로 정개청이 억울하게 죽었으며, 인조 때에 김장생(金長生) 등이 올린 정개청에 관한 상소문이 옳지 못한 것을 통렬하게 논박함과 동시에 송준길의 상소도 옳지 못하니 정개청을 호남의 큰 스승으로 높혀 받들 것을 간청하였다.

이 동서인(東西人) 간의 싸움은 숙종 28년에도 종식이 되지 않고 계속되어 조선 말기까지 계속되어 조정에서 동인들의 청을 들어주어 정개청의 관작을 회복시키고 서원을 다시 세우게 되면 이번에는 서인들이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다시 정개청의 관작을 삭탈케함과 아울러 서원을 헐어 버리게 하여 관작의 여탈(與奪)과 서원의 철훼가 반복하기를 3백 연간이나 계속되었던 것이다.

이 싸움에 있어서 동인의 대표적 인물로는 윤선도(尹善道)ㆍ허목(許穆) 등이 있고, 서인의 대표 인물은 전기 김장생ㆍ송준길 이외에도 이만성(李晩成) 등이 있다.

이 속록도 《기축록》과 마찬가지로 전부가 각 인물들의 상소문을 연차 순에 따라 모아 편집한 것인데, 이것들을 보면 동ㆍ서인 간의 당쟁이 얼마나 연원(淵源)이 길었던 것과 동시에 치열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일기 속에는 전기 대표적 인물들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의 글이 있으므로 조선 당쟁의 연구에 《기축록》과 아울러 많은 참고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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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개청에게 정철의 사람됨을 물으면서 청백한 것을 칭찬하니, 정개청이 대답하기를, “선유의 말에 사람이 몸가짐을 청백하게 하는 것은 도리어 벼슬을 사랑함이니, 비록 아버지와 임금을 죽이더라도 감히 할 것이다…….” 하였으며, 또 무자 연간에 정철이 광주(光州)에 있었는데 정개청이 곡성 현감으로서 근친(覲親)하러 내왕하는 길에 한 번도 존문(存問)하지 않고, 그 문을 지나면서도 들어가지 않아서 정철이 더욱 감정을 두었는데, 이것이 두 사람에게 앙화가 되어 공교하게 무함하고 얽어서 극율(極律)로써 섬멸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선비를 죽였다는 이름은 만고에 큰 죄악이니, 공론이 마침내 민몰(泯沒)되지 않아, 양도(兩道)에서는 사림의 소장(疏章)이 해마다 일어나고, 조정에서는 대간(臺諫)의 논박이 때로 준절하였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선조 대왕께서도 마음속으로 곧바로 깨달으시고 깨달은 후에 곧 명을 내려 정철의 관작을 삭탈하고 강계(江界)에 안치(安置)하였으며, 매양 정철은 간철(奸澈) 또는 독철(毒澈)이라 하시면서 심지어는 그 아들을 독종이라고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 전조(銓曹)에 엄칙하여 벼슬에 의망(擬望)하지 말도록 하셨으니, 비록 효자 자손(孝子慈孫)이라도 감히 원통함을 호소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혼조(昏朝)에 와서 정철의 아들 종명(宗溟) 등이 아비의 설원을 청하는 소에, 그 아비가 정개청을 무함한 장계의 말은 전혀 없고 이르기를, “선조 대왕께서 문목(問目) 가운데에 절의를 배척한 논설도 아울러 넣을 것을 명하시어 형추하였다.” 하였으며, 최영경의 일에 대해서도 역시 그 아비가 구원하려 하였으니 이루지 못하였다는 뜻으로 말하여 마침내 그 무리들로 하여금 모두 이 말을 하게 하였는데, 그 뜻은 대개 선비를 죽인 이름을 임금에게로 돌리고, 선비를 죽인 그 아비의 죄를 벗으려는 것이니 그 계획이 참독(慘毒)합니다. 이단상의 소에도 정철이 정개청을 무함한 계사의 말은 빼고서 다만 말하기를, “선조 대왕께서 절의를 배척한 조항을 문목 가운데 넣으라고 하교하시어, 한 차례 형신(刑訊)한 후 명하여 북쪽 변방으로 귀양보내어 죽였다.” 하였으니, 이단상의 소에 있는 말은 대개 종명의 말을 조술(祖述)한 것입니다. 단상의 분의는 종명과 다른데, 이와 같이 그의 말이 같은 것은 무슨 곡절이겠습니까. 김장생이 항상 정철을 군자로 삼아 송준길이 개청을 무함할 때, 그 말이 그의 스승의 말을 증거함이 많았던 것이니, 이것은 스승의 중망을 빌려 정철을 두둔한 것이고, 정철을 두둔하는 것은 그 스승의 말을 옳게 여기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무망한 것이 이제 밝게 나타나서 반드시 만세의 공론으로 되었으니, 스승을 위한다는 것이 끝내는 그 스승을 해로운 데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단상이 개청을 무함한 말이 모두 송준길과 안팎으로 호응하였는데, 그 말이 준길보다 더욱 가중(加重)한 것은 모두 준길을 위하여 두둔한 것입니다. 그러나 송준길로 하여금 만세 공론에 흠절을 더욱 무겁게 만든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게 하였으니, 역시 깊게 생각하지 못한 일입니다. 정개청이 구원(九原)의 썩은 뼈가 된 지 이미 70년이 지났는데, 지금 사람으로 누가 혐의하고 누가 원망하겠습니까. 비록 죄를 얽더라도 이로울 바 없고, 원통을 씻더라도 해로울 바 없을 것인데, 무함하는 것이 반드시 기축년보다 곱절이나 되는 것은 그 뜻이 어디 있겠습니까. 정개청은 자초한 화로 돌리고, 정철이 선비 죽였다는 이름을 벗기려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추후로 정개청의 죄명을 얽는다는 것은 끝내 이루어 질 수 없는 일이니, 후세에도 어찌 분변할 사람이 없겠습니까. 저 사람들도 이것을 생각했으므로 선비 죽인 이름을 마침내 임금에게로 돌리려고 했던 것이니, 어찌 심히 통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서원의 유무에 대해서는 그 손실과 이익이 다만 사림에게 있는 것이고, 그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정개청을 사종(師宗)으로 삼는 사람들이 또한 어찌 서원의 유무로 정개청의 경중을 삼아서 있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고 없는 것을 혐의쩍게 알겠습니까. 다만 우리 나라에서 정개청만 못한 자가 서원에서 향사하는 이가 또한 반드시 이루 헤아릴 수 없는데, 서원을 허물어뜨리는데 오직 정개청의 서원만을 유독 먼저 급급하게 하려고 하는 것은 모두 그 뜻하는 바가 있어서입니다. 또 서원을 세우고 허물어뜨리는 것은 다만 그 사람의 도덕의 높고 낮음으로 논할 뿐이니, 하필 평소에 없었던 죄목을 억지로 찾아낼 필요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정개청 같은 사람은 벼슬이 낮고 붕당의 후원이 끊어져서, 서원을 허물어버리는 데에도 많은 언사(言辭)와 노력을 허비할 필요가 없을 것인데, 기축년에도 없었던 허다한 죄상으로 모함하는 것이 어찌 그 이유가 없겠습니까. 그 뜻이 반드시 정철이 한 착한 선비를 죽인 이름을 벗기려는 것이니, 신은 정개청을 해친 뒤에 장차 최영경에게도 미칠까 두렵습니다. 종명(宗溟)이 논설을 한데 모으자 이러한 근거 없는 말이 같은 편 사람들 가운데 떠돌아, 위로는 천지 신명을 속이고 아래로는 사람들의 이목을 현란하게 하니, 당론이 국시를 해롭게 하고 국맥(國脈)을 위태롭게 함이 이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송준길은 같은 편 사람들 가운데에서 중망이 있어 당시에 추앙을 받았는데, 신이 정개청을 논함이 송준길과는 상반되자 어떤 사람들은 혹 신에게 해가 있을까 두려워서 신을 경계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신의 뜻으로는, “임금이 말을 하면서 스스로 옳다고 하면 경대부가 감히 그 그른 것을 바로잡지 못한다.” 한 것은, 곧 자사(子思)가 깊이 경계한 바로써 임금과 신하의 사이에도 이와 같은 것인데, 하물며 그 아랫 사람이야 어떻겠습니까. 그 말이 혹 국시에 어긋난다면 신이 차마 어찌 준길이 있는 것만 알고 국가 있는 것을 알지 못하여 임금의 앞에 밝게 분변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준길이 말한 바가 어찌 그가 지어낸 것이겠습니까. 반드시 사람들에게서 들은 것이니 사람들이 준길을 그르치게 한 것이요, 준길이 국시를 그르치게 한 것은 아닙니다. 자로(子路)는 과실(過失) 듣는 것을 기뻐하였고, 공자(孔子)는, “내가 진실로 과실이 있으면 사람들이 꼭 알게 되니 다행이다.” 하였으며, 순(舜) 임금은 자기를 버리고 다른 사람을 따르며, 남이 선을 하도록 도와주었다고 합니다. 송준길이 과연 군자로서 신의 말이 옳은 것을 깨달았으면 반드시 자로가 과실 듣는 것을 기뻐하고, 공자가 자기 과실이 있으면 사람들이 반드시 앎을 다행으로 여기며, 순임금이 자기를 버리고 남을 따르며, 남이 선을 하도록 도와준 것처럼 할 것이니,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신의 말에 감정둘 것이 있겠습니까. 준길은 과연 이런 마음으로 과실을 고치고 착한 것을 하는 데 인색하지 않다면, 신이 어찌 송준길을 혐의하여 끝까지 피차를 구별하는 마음을 두겠습니까. 훗날 혹 서로 만난다면 처음에 서로 어긋나서 길이 달랐던 것을 한탄하고 마침내 원만히 같이 돌아가게 된 것을 기뻐할 것이니, 신이 두려워하는 바는 그가 허물 고치기를 꺼리지 않음을 알지 못하고, 송준길을 버리는 데 있는 것입니다. 신은 정개청의 지극한 원통함을 안타깝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국시가 크게 문란하게 됨을 통탄하는 것이며, 국가를 위하여 심히 두려워하고 전하를 위하여 지극한 정성이 있으므로 전혀 꺼리거나 숨기는 것 없이 말을 하는데 가릴 바를 모르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사소한 것을 통촉하시고 덕음(德音)을 내리시어 황천(黃泉)에 있는 정개청의 원통을 씻어 주시고, 사방 사림의 공론을 통쾌하게 하시어 국시를 바로잡아 나라의 명맥을 길이 이어 주신다면 국가에 있어 매우 다행일 것입니다. 아! 신이 보건대, 지금 개청을 두둔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정개청의 어진 것을 아는 것은 아니나, 진실로 개청의 원통한 것을 애석해 하는 것은 진실로 정철의 간독한 것을 미워하는 데서 나온 것이고, 개청을 모함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개청의 어짊과 개청의 원통을 아는 것은 아니면서도 입으로는 모두 이 말을 하는 것은 대개 정철이 착한 선비를 죽였다는 이름을 급급하게 벗기려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선악과 일의 시비를 그릇되게 논하는 것은 모두 그 사람의 선악과 그 일의 시비를 적실하게 알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만약 참으로 안다면 비록 매이고 인색해 하는 마음이 있더라도, 어찌 차마 하늘을 속이고 임금을 속이는 데 스스로 빠져 천고의 간사한 소인이 되는데에 만족스러워 하겠습니까. 다만 천운이 쇠잔하고 세상이 말세가 되어 교화가 무너지고 풍속이 퇴폐하여, 사람들이 하늘의 이치와 사람의 윤리에 어두운 까닭이니, 이는 바로, “그 실정을 알았으면, 불쌍히 여기고 기뻐하지 말라.”는 증자(曾子)의 말과 같은 것입니다. 어찌, 다만 한두 가지 일만 그렇겠습니까. 만사가 모두 이와 같으니, 만사가 모두 이와 같으면 나라가 나라 꼴이 되지 않을 것은 지혜 있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명도 선생(明道先生)이 조정에서 말하기를,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풍속을 바르게 하며, 어진 인재 얻는 것을 근본으로 삼으라.” 하여, 누누이 정학(正學)의 도(道)를 강론하여 밝히는 것을 언급하였으니, 아름답다, 그 말씀이여! 신은 아마도 현재 나라 다스리는 도(道)가 이보다 앞설 것이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저자(연도) 제목 발행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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