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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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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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대승- 遊山羈客不能休
    遊山羈客不能休 산길 걷는 나그네 쉬지 못하다가偶到仙滄一散愁 우연히 선창에 이르러 시름을 풀었노라 風約林梢呈遠野 숲 끝에 부는 바람 먼 들에 보내고烟開波浪露長洲 안개는 물결에 걷혀 긴 모래톱 드러나네塵埃只恨三山隔 풍진 속에 삼산이 막혀 한스러울 뿐이니樽酒何妨半日留 동이 술에 한나절 머문들 어떠하리人事悠悠難自了 사람의 일일랑 하도 많아 마치기 어려우니故應來賞待高秋 응당 와서 상쾌한 가을을 맞이하리라*삼산은 삼신산(三神山)이라 하며 중국 전설에 나오는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
    2020-04-07 | NO.525
  • 기대승- 김언우(金彦瑀)가 화답한 시에 차운해 답하는 시(次金訓導辱和示及韻)
    故遣蒼雲鎖澗泉 푸른 구름 보내어 산골물을 막아두고 瑤琴閑抱自無絃 거문고 안았으니 줄이 필요 없구나 人間美譽仍輸百 인간의 아름다운 명예 다 내처 버리고  物外淸歡恰取千 물외의 맑은 기쁨 많이 갖고 싶도다 日暮鳥烏啼柳幕 날 저무니 까마귀 버드나무에 울고  風微蜂蝶舞花筵 바람 솔솔 부니 나비가 꽃자리에 춤춘다 懸知富貴徒爲爾 부귀가 모두 부질없음을 알았으니 更與田家望有年 다시 농가와 함께 풍년을 바라노라/고봉집 제1권고봉 기대승이 김언우(金彦瑀)가 화답해 보여 준 시에 차운해 답하는  시(次金訓導辱和示及韻)에  김 훈도(金訓導)라고 적고 있다.
    2020-04-07 | NO.524
  • 기대승-自喜文翁化
    自喜文翁化  스스로 문옹의 교화를 기뻐하니還應託有隣  도리어 의탁하는 이웃이 되었네笑談蠡測海  담소하니 표주박으로 바다를 헤아리는 격이고酬唱枿生春  수창하니 그루터기에 싹이 돋는구나曜德輝南極  밝은 덕은 남쪽에 빛나고懸情拱北辰  매달린 정은 북극성을 향하는 듯風雲他日會  다른 날 풍운으로 모이면洪量鎭甘辛  넓은 도량으로 고락을 진정시키리기대승은 1553년 6월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제수되었던 오겸(吳謙, 1496~1582)과 자리를 하고 시에 이렇게 읊는다.
    2018-07-27 | NO.523
  • 기대승-규봉암
    瑞石名山峙海堧  서석의 명산 바닷가에 솟았으니蓬瀛風日正依然  봉영(三神山)의 바람과 햇볕 참으로 비슷하여라. 羣仙更莫慳淸邃 신선들아 맑고 깊음 아끼지 마라 我亦今來最上巓  나도 이제 가장 높은 곳에 왔노라.
    2018-08-01 | NO.522
  • 기대승-규봉암에 이르러(到圭峯)
    朗廓無塵境  티끌없이 청정한 도량이여淸高不住天  청고하게 막힘없는 하늘이로세幽花欹石罅  깊숙히 핀 꽃은 돌틈에 스러지고古木倚巖邊  고목은 바위를 의지하여 서 있네日轉南溟活  해가 오르니 남쪽 바다가 넘실대고雲移北斗懸  구름이 비키니 북두칠성 완연하다來遊窮勝賞  선경에 빠져들어 거닐다보니渾覺挾飛仙  홀연히 신선도 나와 함께 있더라-고봉집 제1권
    2018-08-01 | NO.521
  • 기대승과 고경명의 국화시 사설
    광주광역시 광산구에서 전해 내려오는 기대승과 고경명에 관한 이야기. 고경명(高敬命)[1533~1592]이 기대승(奇大升)[1527~1572]을 찾아갔으나 만나 주지 않자 자신의 서운한 감정을 시로 적어서 표현하였고, 기대승이 고경명의 시를 읽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사죄하면서 교유 관계를 시작하였다는 이야기이다. 1985년 광산군지편찬위원회가 간행한 『광산군지』에 수록되었고, 1990년 광주직할시가 간행한 『광주의 전설』에 수록되었다.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과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은 한 시대를 같이한 전라도 광주 지역의 대학자이자 명현(名賢)이다. 고경명이 평소에 존경하던 기대승을 만나기 위해 임곡면 신룡리에 있는 고봉의 집으로 갔다. 하지만 기대승은 얼굴과 이름도 모르는 고경명을 만나 주지 않았다. 고경명은 기대승의 태도에 섭섭한 감정을 느끼고, 국화를 소재로 한 시를 지어서 하인에게 주고 떠났다.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색황위기 천자백역기(正色黃爲貴 天姿白亦奇)[국화꽃의 색깔은 노래서 귀한 것이지만 본래 색깔은 하얀 것으로 이 또한 진기하고 아름답다] 세인간자별 균시오상지(世人看自別 均是傲霜枝)[세상 사람들 보는 눈이 이처럼 다르긴 해도 국화꽃을 좋아하는 것은 한결같이 모진 서리를 이겨내는 절개를 숭상하고 사랑함에 있다] 기대승은 하인에게 전해 받은 시를 읽고는 고경명의 시재(詩才)와 호걸의 기상에 감명을 받았다. 기대승은 몸소 4㎞를 쫓아가서 고경명을 붙잡고, 자신이 소홀히 대한 것을 사죄하고 집으로 다시 맞아들였다. 기대승과 고경명은 이를 계기로 두터운 교분을 이어 나갔다.「기대승과 고경명의 국화시 사설」은 일화적 성격을 지닌 이야기이다. 연배가 높은 기대승이 자신을 찾아온 청년 고경명을 소홀히 대하고, 이에 고경명이 시로 자신의 감정을 전달한다. 기대승은 고경명의 시를 읽은 뒤에 반성하고, 두 사람의 교유 관계가 이루어졌다는 내용이다. [참고문헌] 『광산군지』(광산군지편찬위원회, 1981) 『광주의 전설』(광주직할시, 1990)[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1 | NO.520
  • 기언관- 存齋庭下有餘種
    存齋庭下有餘種 존재의 뜰아래 남겨둔 국화 있어黃白花開九月霜 황백색 국화 구월 서리 속에 피고 精舍依然留舊馥 서재에 여전히 옛 향기 머무는데 淵源何以繼前光 뿌리를 어찌 찾아 조상의 얼 따르리秋風可愛坤裳正 가을 바람에 어울리는 황국 사랑스러우니 老圃當看晩節香 묵은 텃밭에서 말년에 향기 맡으리라人臣若守此花性 신하가 만약 이 국화 같은 성품 지킨다면 爲國何難蹈劍鋩 나라 위해 어찌 날선 검 앞에 뛰어들기 어려우랴! 고봉 기대승의 6대손인 기언관奇彦觀(1706~1784)이 국천재(菊泉齋)에서 읊은 시다. 국천재는 기언관이 1750년에 지은 정자로 광산구 광산동 광곡마을에 그 터와 동백나무가 지금도 남아 있다. 고봉 기대승의 다른 호로 존재存齋가 있다. 이 시에서 존재는 선조인 기대승을 의미한다. 곤상坤裳은 누런 치마라는 뜻으로 황국을 의미한다. 《周易》坤卦의 <黃裳元吉文在中也>에서 나온 말이다.  
    2020-04-22 | NO.519
  • 기언관- 雨中春興 再淸凉庵
    草木蒼蒼降雨澤  비 내린 덕에 초목은 푸르고 푸르러 靑山相對暫怡顔  청산을 대하니 잠시 안색이 펴진다. 雲生澗底騰巖上  구름은 계곡 아래서 일렁거려 바위로 올라타고水活林端走谷間  활수는 콸콸 숲 끝에서 계곡 사이를 달린다.細草垂生穿土易  막 돋아난 새싹은 쉽게 흙 뚫고 뿌리 내리거늘 微禽帶濕度空艱  작은 새는 젖은 날개로 버겁게 공중을 날아간다.春和潤物非專美  화창한 봄날 윤택한 만물만 아름답지 않고 聖德與天本一般  임금의 덕 하늘같아 본래 한가지라네. 기언관(奇彦觀, 1706~1784)은 고봉 기대승의 6대손으로  형조·호조참의를 역임하다 낙향해 거처였던 귀전암(歸全菴)을 1723년에 중건하고 그  아래 광산동 428번에 1750년에 국천재(菊泉齋) 정자를 짓고 자연을 벗 삼아 학문에 강했다.
    2020-04-13 | NO.518
  • 기언관-七梅處士讀周易
    七梅處士讀周易 칠매처사 주역을 읽으니五柳先生餐菊英 오류선생 국화 꽃잎으로 안주 삼네.  二子高風皆灑落 두 분의 고상한 풍취 이제 쇄락하니作詩我欲傳其名 시라도 지어 나는 그 이름 전하고자 한다오.   /兩世遺稿 菊泉齋集국천재(菊泉齋) 기언관(奇彦觀 1706~1784)은 형조·호조참의를 역임한 고봉 기대승의 6대손으로 칠매당에 들려 시를 남긴다.이 시에서 오류선생(五柳先生)은 도연명(陶淵明, 365~427)의 자호로  ‘이슬에 젖은 꽃잎을 따 시름 잊게 하는 술에 띄워 마시니... 裛露掇基英汎此忘憂物’ 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칠매처사가 도연명의 생활처럼 살았다는 것을 이르고 있다.
    2020-04-03 | NO.517
  • 기언관-送使行過光州拱北樓
    使行遠入垂楊路 사행이 멀리 수양길에 접어드니風景湖南擅勝州 풍경은 호남의 명승을 독점했네節似埋輪張也按 부절은 매륜한 장강 태수와 같지만時非懷土仲宣樓 때는 고향 그리던 중선의 누각 아닐세山高瑞石巖巖立 서석산은 높이 우뚝우뚝 솟아 있고蓮滿陽池灔灔流 연꽃 가득한 양지는 졸졸 흐르네宸極彤雲瞻望地 북궐의 붉은 구름 우러러 보는 곳不妨星使暫登遊 사신으로 잠시 올라 노님도 무방하리 -국천재유고(菊泉齋遺稿)기언관(奇彦觀, 1706-1784)의 자는 백첨(伯瞻)이며 호는 국천재(菊泉齋)이다.
    2018-07-17 | NO.516
  • 기우만- 哭安景雲 龍煥 三絶
    哭安景雲 龍煥 三絶 天資淳謹罕如君。去後尙留席上芬。夢裏堂顔珍重意。翩翩濁世不同羣。竆道論心有幾人。多君叔季任天眞。奪吾一友今何速。瞻望南雲淚滿巾。悠悠萬事總傷心。坐送情朋獨苦吟。幸有承家君不死。肯堂應不負淸深。
    2020-04-08 | NO.515
  • 기우만- 죽취정에서
    腥氛不到一區亭 竹翠山光獨秀靑 勤向衛詩磋琢地 認君志氣確然醒 范善中以竹翠亭詩示余 拈首尾韻和之 松沙先生文集卷之一又覽揆重辰此日至 善家餘慶正悠悠 崖翁氣節能嗣述 悔老文章幾講修爵秩耀門新降渥 綺詞溢軸舊交遊 滿庭鸞鵠無疆祝 鳧藻龜蓮永可求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이 죽취정에서 시주로 즐기며 시를 남긴다.
    2020-04-25 | NO.514
  • 기우만의 안용환에 대한 답장
    1931년 간행된 기우만(奇宇萬,1846~1916)의《송사집(松沙集)》4권에 죽산안씨 20세 안용환(安龍煥,1857~1911)에게 답장했던 편지글이 남겨져 있다. 경운(慶雲)은 청심당(淸深堂) 안용환(安龍煥)의 자(字)이다. 答安慶雲 龍煥 令胤來。兼奉惠翰。若餠若饌。山廚太侈。貧士支供。想得勞心。旋深不安。犯曛伻發翳眼難於作答。追惟如噎。更請軆候萬裕。弟不病而病。百凡無足言。胤君朴實有餘。竊觀箚記。辭足達意。可知內有所得。爲其大人賀不淺。但賤子無堪啓發。可愧。
    2020-04-08 | NO.513
  • 기우용 에게 답함 〔答奇羽用 文鉉○辛丑二月〕 - 매산집 제16권
    기우용문현 에게 답함 신축년(1841, 헌종7) 2월〔答奇羽用 文鉉○辛丑二月〕 - 매산집 제16권 / 서(書) :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 1776~1852)학궁(學宮)은 수선(首善)하는 곳이므로 사양함을 예(禮)로 여기는데, 사양함은 나이가 많은 이를 높이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른바 “연향(宴享)할 때에 머리 색깔에 따라 자리를 배치하는 것은 나이 순서대로 차례를 정하기 위함이다.〔燕毛所以序齒也〕”라는 것입니다. 살았을 때에 이미 장유(長幼)를 구별하여 좌차(座次)를 정하였다면 죽은 후에도 연수(年數)의 차례대로 자리를 정해야 합니다. 이 때문에 우옹(尤翁)께서도 눌재(訥齋)와 사암(思菴)을 합사(合祀)할 때에 고봉(高峯)에게 고유하는 글에서, “세대의 선후에 따라 눌재 선생을 서쪽 자리에 모시고 사암 선생을 다음 자리에 모시고 고봉 선생을 동쪽 자리에 모십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도(神道)는 오른쪽을 높이기 때문에 서쪽을 상석(上席)으로 삼는 것이니, 세 분의 위차를 이렇게 정한 것은 바로 나이에 따라 차례를 정하는 의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나이에 따라 차례를 정하는 것이 중요한 이상, 본 서원의 빈주(賓主)는 굳이 따질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눌재ㆍ사암 두 현인과 고봉이 나이에 선후가 있기 때문에 고봉의 위패를 두 현인의 아래에 모시는 것이라면 고봉의 위상에 있어서 조금도 격하될 것이 없습니다. 만약 고봉의 위패를 두 현인의 위에 모신다면 고봉이 제향을 받을 때에 편안하지 못할 듯하니, 신도(神道)와 인정(人情)으로 볼 때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할 것입니다. 《송자대전(宋子大全)》에 실려 있는 춘향(春享)과 추향(秋享)의 축문에서 그 차례를 고봉을 먼저 하고 눌재와 사암을 나중에 한 것은 위차를 기준으로 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고 바로 고봉에게 고유하는 글 아래에 이 축문을 썼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고봉에게 고유하는 글 가운데에서 ‘서쪽’, ‘동쪽’이라고 한 것을 가지고 자리의 차례를 정해야 하니, 이는 바꿀 수 없는 정론입니다. 이전부터 행해 오던 대로 따르고 고치지 않는 것이 정도(正道)에 맞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주-D001] 기우용(奇羽用) : 기문현(奇文鉉, 1811~?)으로,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우용이다. 거주지는 광주(光州)이고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의 후손이다. 1844년(헌종10)에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정언, 충청 도사(忠淸都事), 부수찬, 부사직 등을 역임하였다.[주-D002] 학궁(學宮)은 수선(首善)하는 곳이므로 : 수선은 ‘선(善)을 시작함’ 또는 ‘모범을 세움’의 뜻으로, 한 무제(漢武帝) 때의 재상인 공손홍(公孫弘)이 학관(學官)이 되었을 때에 교육과 관련된 제도를 혁신할 것을 청하면서 한 말에, “교화를 시행하려면 수선하기를 도성으로부터 시작해서 안에서 밖으로 미쳐 가야 합니다.[教化之行也, 建首善自京師始, 由内及外.]”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유래하여 수선이 도성이나 태학(太學)을 지칭하게 되었다. 《史記 卷121 儒林列傳》[주-D003] 연향(宴享)할 …… 위함이다〔燕毛所以序齒也〕 : 이 말은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9장에 보인다.[주-D004] 우옹(尤翁)께서도 …… 하였습니다 : 우옹은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다. 눌재(訥齋)는 박상(朴祥, 1474~1530)으로,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창세(昌世), 호는 눌재이다. 사암(思菴)은 박순(朴淳, 1523~1589)으로,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화숙(和叔), 호는 사암이다. 고봉(高峯)은 기대승(奇大升, 1527~1572)으로,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ㆍ존재(存齋)이다. 1578년(선조11)에 김계휘(金繼輝)의 주도로 기대승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광주(光州)에 망천사(望川祠)를 창건하고 위패를 모셨는데, 1654년(효종5)에 ‘월봉(月峯)’이라고 사액되었고, 1671년(숙종27)에 송시열 등의 건의로 인근의 덕산사(德山祠)에 모셔져 있던 박상과 박순의 위패를 옮겨 와 기대승과 함께 합사(合祀)하였다. 합사할 때에 송시열이 기대승에게 고유하는 축문을 지었는데, 이 축문은 송시열의 문집인 《송자대전(宋子大全)》 권151에 〈월봉서원눌재사암합향시고기고봉문(月峯書院訥齋思菴合享時告奇高峯文)〉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주-D005] 본 서원의 빈주(賓主) : 본 서원은 월봉서원(月峯書院)을 이른다. 월봉서원은 본래 기대승(奇大升)을 제향하기 위해 창건된 곳이므로 기대승이 서원의 ‘주(主)’가 되고 박상(朴祥)과 박순(朴淳)이 ‘빈(賓)’이 된다.[주-D006] 송자대전(宋子大全)에 …… 것은 : 앞서 말한 〈월봉서원눌재사암합향시고기고봉문(月峯書院訥齋思菴合享時告奇高峯文)〉 아래에 춘향(春享)과 추향(秋享)의 축문도 함께 덧붙여져 있는데, 여기에는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눌재(訥齋) 박상(朴祥), 사암(思菴) 박순(朴淳)의 순서로 실려 있다. 《宋子大全 卷151 月峯書院訥齋思菴合享時告奇高峯文》
    2020-10-08 | NO.512
  • 기은 기공(기의헌) 행장〔棄隱奇公行狀〕 - 강재집 제12권
    기은 기공 행장〔棄隱奇公行狀〕 - 강재집 제12권 : 강재(剛齋) 송치규(宋穉圭, 1759~1838)공의 휘는 의헌(義獻), 자는 사직(士直), 성은 기씨(奇氏),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기씨 뿌리는 기자(箕子)에서 나왔으며 평(平)이 시조이다. 조선조에 들어와 휘 건(虔)이 세종조에 포의(布衣)로 지평(持平)에 발탁되었고 대사헌을 거쳐 판중추부사가 되었는데 광묘(光廟 세조)가 수선(受禪)하자 청맹과니라고 핑계를 대고 벼슬하지 않았다. 청백리로 기록되었으며 시호는 정무(貞武)이다. 고조 휘 찬(禶)은 홍문관 부응교로 시호는 정렬(貞烈)이다. 증조 휘 진(進)은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으로 좌찬성(左贊成)에 증직되었는데, 덕성군(德成君) 복재(服齋) 선생 준(遵)이 그의 동생이다. 기묘사화 뒤에 광주(光州)로 은퇴하여 그대로 광주 사람이 되었다. 조부 휘 대림(大臨)은 고봉(高峯) 선승 대승(大升)의 형이며 동부 참봉(東部參奉)으로 좌승지에 증직되었다. 아버지 휘 효분(孝芬)은 부사과(副司果)로 이조 참의에 증직되었고, 어머니 함평 이씨(咸平李氏)는 유회(惟誨)의 따님이다.만력(萬曆) 정해년(1587, 선조20) 1월 9일 고룡리(古龍里) 집에서 태어나 조실부모하여 계부(季父)인 현감공 효전(孝筌)의 집에서 성장하였다. 타고난 자질이 화평하였고 덕성이 심후하여 남을 대할 때는 경계를 설정하지 않고 꾸밈없이 있는 모습을 드러내었으며 마음가짐과 처신은 자연스러웠다. 여러 사람을 널리 사랑하고 받아들여 한결같이 성신(誠信)으로 하였으며 귀천(貴賤)과 현우(賢愚)를 막론하고 모두에게 환심을 얻었다. 손님과 벗이 항상 자리에 가득하여도 여유롭게 담소하여 가타부타하는 것이 없었으며 일을 처리할 때는 강단(剛斷)이 남보다 뛰어났다. 집안에서의 행실은 매우 독실하여 계부와 백형이 사는 곳이 조금 멀었으나 명절과 삭망(朔望)에는 반드시 가묘(家廟)에 참배하고 물러나서는 공손하게 인사를 올리는 것을 빠뜨리지 않았다. 백형이 병이 들자 집으로 모셔와 정성을 다해 치료를 하였다. 돌아가시자 장례를 치르고 여러 조카들을 길러 혼인시킬 때까지 유감이 없도록 하였다. 종통을 귀중하게 여기는 데에 뜻을 다하였고 제전(祭奠)을 돕는 데에 반드시 정성과 공경을 바쳤다. 평소 성격은 영리(榮利)에 담담하였다. 광해군 때에 8촌 형 자헌(自獻)이 나라의 권력을 쥐자 달라붙는 사람이 문에 가득하였으나 공 홀로 굳건히 지조를 지켰다. 내한(內翰 한림원 학사) 남성신(南省身)은 곧 공의 인척으로 당시 사람들의 추중을 받았다. 공을 끌어당기려고 누차 은근히 말하였으나 또한 듣지 않았으니 공의 선견지명과 지조의 탁월함이 이와 같다.인조 정묘년(1627, 인조5)에 강로(姜虜 강홍립(姜弘立))가 청나라 군대를 끌고 국경으로 들어오자 위급 상황을 알리는 보고가 나날이 급하였으며 임금은 강화도로 피신 가고 세자는 전주(全州)로 내려갔다. 사계 김선생이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로서 공을 도유사(都有司)로 임명하였다. 공은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모아서 밤을 새워 달려갔으나 강화(講和)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왕세자를 전송하여 여산(礪山)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숭정(崇禎) 병자호란(1636, 인조14)으로 청나라 군대가 도성으로 쳐들어왔다. 남한산성이 포위되자 애통한 조서를 내리고 근왕병(勤王兵)을 징발하자 공이 또 거의도유사(擧義都有司)로서 한 도(道)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모집하였다. 청주(淸州)에 이르자 화해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해산하고 돌아왔다. 공이 꿈에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병자, 정축 연간의 큰 화란에 / 子丑年間時大亂임금 수레는 어디로 향하는가 / 聖君車駕向何之오늘날 이 몸이 쓸데없다고 말하지 마시오 / 莫言今日身無用백발백중 오호궁을 가지고 있다오 / 百發烏號手自持공이 나라를 깊이 생각하고 의리를 부지하는 정성이 본성에 근거한 것을 이 시에서 알 수 있다.공은 고봉 선생의 종손(從孫)으로 가학에 이미 연원(淵源)이 있었다. 동심인성(動心忍性) 네 글자에 공부를 깊이 하였으며, 《주역》을 파고들어 《계몽전의(啓蒙傳疑)》를 가장 오래도록 읽었는데 다음의 짤막한 시가 있다.하나의 이치가 천지 이전에 이미 존재하였으니 / 一理已具兩儀前흩어져 천 가지가 됨을 속유들이 어찌 알리오 / 俗儒寧識散爲千손수 성현의 격언을 써서 좌우에 걸어 두고 좌우명을 지었으며 또 한 편의 글을 지어 자질(子姪)의 학업을 권면하였다. 《근사록》, 설문청(薛文淸)의 《독서록(讀書錄)》 등의 저서를 더욱 좋아하여서 깊이 빠져 연구하느라 침식을 잊었으며 노년이 다가오는 것조차도 잊었다.집이 본래 곤궁하였으나 태연히 대처하였으며 ‘육오(六吾)’라고 서재 이름을 지었는데 시명(詩銘)이 있으며, 자호를 기은(棄隱)이라 하고 설(說)을 지어 자신의 뜻을 드러내었다. 의약과 천문 또한 그 개요를 대략 이해하였으며 만년에는 조예가 더욱 정심하고 덕행과 도량이 순수하여 고을의 모범이 되었다. 서로 송사를 일으킨 사람이 판정을 구하면 공이 옳고 그름을 깨우쳐 주었는데 듣는 사람이 기뻐하며 복종하였다.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이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처신을 비난하여 망대부(莽大夫)라고 비유하자 공이 글을 지어 변호하였는데 상론자(尙論者)가 공의 말을 옳다고 하였다. 숭정 계사년(1653, 효종4) 4월 9일에 작고하였으니 향년 67세였다.부인 광주 조씨(廣州趙氏)는 지기(之麒)의 따님이다. 자녀 넷을 두었는데 장녀는 충의위 이원혁(李元赫)에게 시집갔고, 장남은 전(瑑)이고, 차남은 문과에 급제한 정자(正字) 침(琛)이고, 막내딸은 요절하였다. 내외 손자와 증손은 다 기록하지 않지만 학문과 행실로 집안을 계승한 사람이 많은데 증손 정룡(挺龍)은 학술과 덕망으로 더욱 알려졌고 교관(敎官)으로 증직되었으며, 현손 처훈(處勳) 또한 집안의 아름다움을 잘 이어갔다.아, 공은 복재와 고봉 두 분 집안의 후예로서 덕성(德性)이 아름답고 지조가 견고하여 행실은 가정에서 드러났고 신뢰는 고을에서 인정받았다. 광해군 때의 재상이 공과 가까운 인척이었지만 끝내 오염됨이 없이 초탈하게 자신을 지켰다. 두 차례나 의병을 일으켜 나라의 어려움에 달려갔을 때는 충성과 울분이 솟구쳐 세운 공적이 매우 대단하였다. 또 선현의 출처를 변론한 글과 자질(子姪)에게 학문을 권면한 글은 공명정대하고 진실하여 공의 학문을 더욱 징험할 수 있다. 공의 5대손 종락(宗洛)이 아들 상협(商協)을 보내어 나에게 행장을 부탁하였다. 나는 후대에 태어나서 듣고 본 것이 직접 미치지 못하였지만 삼가 공의 아들 정자군(正字君)이 지은 가장과 종락이 기술한 것을 근거로 수정한 것이 이와 같다. 덕을 아는 자가 살펴 주기를 바란다.[주-D001] 기공 : 기의헌(奇義獻, 1587~1653)으로,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사직(士直), 호는 기은(棄隱)이다. 병자호란 때 의병활동을 하였다. 저서로 《기은유고(棄隱遺稿)》가 있다.[주-D002] 고룡리(古龍里) : 현재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룡동 용동 마을이다.[주-D003] 오호궁(烏號弓) : 뽕나무 가지로 만들었다는 질 좋은 활의 이름이다.[주-D004] 동심인성(動心忍性) :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마음을 발동(發動)하고 성색취미(聲色臭味)의 성품을 참는다는 뜻으로, 어떤 고난에도 흔들리지 않고 의연히 자신을 지키는 것을 말한다. 《孟子 告子下》[주-D005] 설문청(薛文淸) : 명(明)나라의 학자 설선(薛瑄, 1389~1464)을 말한다. 자는 덕온(德溫), 호는 경헌(敬軒), 문청은 그의 시호이다. 성리학에 밝으며 저서로 《독서록(讀書錄)》, 《설문청집(薛文淸集)》이 있다.[주-D006] 망대부(莽大夫) : 후한(後漢)의 양웅(揚雄)을 폄하하는 말이다. 왕망(王莽)이 한나라를 찬탈하여 국호를 신(新)으로 고치고 칭제(稱帝)하였을 때 양웅이 절개를 잃고 왕망 밑에서 대부(大夫)를 지냈으므로 그렇게 부른 것이다.[주-D007] 상론자(尙論者) : 옛 사람의 일을 평가하는 사람을 말한다.
    2020-10-03 | NO.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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