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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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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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덕령 오누이의 씨름 시합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서 전해 내려오는 김덕령 오누이의 힘겨루기 이야기. 김덕령(金德齡)[1567~1596]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 씨름판을 돌아다녔다. 김덕령의 누이는 동생의 이러한 행동이 걱정스러워 남장(男裝)을 하고 씨름판에 나섰고, 김덕령을 이겼다. 김덕령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다시는 씨름판에 나서지 않았으며, 학문과 무술을 익히는 데 전념했다.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 거주하는 제보자 유몽룡의 이야기를 채록해서, 1990년 광주직할시가 간행한 『광주의 전설』에 수록했다.김덕령은 어려서부터 무등산에서 무술을 익혔고, 남다른 용력(勇力)을 과시하기 위해서 씨름판을 돌아다녔다. 김덕령의 누이는 동생의 이러한 행동이 걱정스러웠다. 어느 날 누이는 김덕령의 기를 꺾어 씨름판에 나서는 버릇을 고쳐주기로 결심했다. 누이는 김덕령이 담양 창평 장터의 씨름판에 출전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누이는 남장을 하고 씨름판으로 갔다. 김덕령은 창평 출신 ‘홍장사’를 물리치고 씨름판을 휘젓고 있었다. 판장[심판]이 김덕령과 맞서고 싶은 이가 더 있느냐고 물었다. 이때 남장을 한 누이가 나섰다. 김덕령은 이전까지 본 적도 없고, 체격도 왜소한 사람이 나서는 것을 보고 걱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씨름이 시작되자 김덕령은 상대방의 힘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국 김덕령은 상대에게 지고 말았다. 김덕령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겸손하게 씨름판에서 물러났다. 누이는 패배를 인정하고 떠나는 동생 김덕령이 대견했고, 오히려 동생의 기를 꺾은 것이 아닌지 걱정하였다. 김덕령은 이후 더 이상 씨름판에 나서지 않고 학문과 무술을 익히는 데 전념하였다. 「김덕령 오누이의 씨름 시합」은 김덕령 인물전설로서 오누이 힘겨루기 이야기 유형이다. 오누이 힘겨루기 유형의 이야기에서 여성은 남자 주인공보다 힘과 지혜 측면에서 뛰어나다. 그러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힘과 지혜를 드러낼 수 없다. 동생이 용력(勇力)을 과신하고 오만해지는 것을 자중(自重)시키기 위해서 누이가 남장을 하고 씨름판에 나선다. 누이가 승리하고, 이후 동생은 자신이 진 상대가 누이라는 것을 알고 분개하거나 누이를 죽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김덕령 오누이의 씨름 시합」은 이러한 오누이 힘겨루기 이야기의 일반적 서사 내용을 삭제하고, 시합에서 진 김덕령이 자성하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영웅적 자질을 갖추어 가는 형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러한 변개(變改)는 김덕령에 대한 지역민의 긍정적 인식이 반영된 결과이다. [참고문헌] 『광주의 전설』(광주직할시, 1990)[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4 | NO.495
  • 김덕령 옥사에 대한 계〔金德齡獄事啓〕 -약포집
    김덕령 옥사에 대한 계〔金德齡獄事啓〕 -약포집 제3권 / 계(啓) : 정탁(鄭琢, 1526~1605)김덕령의 옥사에 대해서 신은 끝내 의혹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덕령은 특별히 근거할 만한 정황이 없고 다만 적들의 입에 이름이 올랐다는 이유로 그가 역모를 꾀했다고 의심하여 기어코 죽이고 만다면, 어떻게 나라 사람들의 의혹을 풀 수 있겠습니까. 덕령의 이름은 나라 사람들이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적(夷狄)과 중화(中華)에서도 모두 알고 있습니다. 왜적의 괴수가 당초에 도당들을 모아 어리석은 백성들을 유인하고 협박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저대로 허장성세(虛張聲勢)하여 말하기를 “우리의 오늘 거사는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아무개 진영의 아무개 장군도 올 것이며, 아무개 지역의 아무개 역사도 이를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한 사람이 주창하면 백 사람이 화답하니 이는 흉악한 무리들이 꾀하는 가장 심각한 것입니다. 적중의 일도 반드시 이런 도모가 없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홍계남(洪季男)에 있어서는 이때 성을 지키고 있어서 이름이 조금 알려졌기 때문에 면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끝내 덕령에게는 미치지 않았습니다. 덕령은 이름이 가장 높았기 때문에 적들의 입에 오르내림이 더욱 심했던 것인데, 이것을 가지고 반드시 역모에 참여했다고 지목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무릇 왜적을 호남으로 불러들여 왕래하면서 서로 통했다고 하기에, 이를 조사해 보니 대개 입증이 되지 않았고, 5도의 군마(軍馬)가 함께 왔다는 말도 왜적들이 하는 말과 같아서 과장된 말이 없지 않으니 결코 이것을 근거로 믿어서는 안 됩니다. 옛날 부소(扶蘇)와 항연(項燕)은 죽은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도 진승(陳勝)의 무리들은 오히려 그들의 이름을 빌렸으니, 덕령을 역괴(逆魁)라는 구설수에 올리는 것이 어찌 괴이하지 않겠습니까.무릇 왜적이 장황하게 한 말은 대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알기 어렵지 않습니다. 덕령이 남하한 뒤 마침 시의(時宜)를 잃어버려서 비록 기록할 만한 작은 공로가 없었지만, 군대를 잃고 나라를 욕보인 죄도 별로 없었습니다. 호남의 왜적들이 난을 일으키던 초기에 원수(元帥)의 전령(傳令)을 듣고는 그날 즉시 병사를 동원해서 그다음 날 길을 떠났고, 또한 머뭇거리거나 관망한 자취도 별로 없었습니다. 다만 적들의 입에 이름이 올랐다는 이유로 정황을 따져보지도 않고 서둘러 엄한 국문을 하여 경폐(徑斃 형을 집행하기 전에 죽음)하게 한다면, 죄명이 명백하지 않아서 국인들의 의심이 끝내 풀리지 않을 것이며 남쪽 변방의 장수된 자들이 서로 두려워할 것이니, 모두가 전전반측하며 불안한 마음을 품게 된다면 아마도 국가의 복이 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신의 지나친 염려는 처음부터 끝까지 여기에 있었습니다.그리고 국가의 많은 어려움이 아직도 진정되지 않았고 해구(海寇)들의 정황도 예측하기 어려운데 이유도 없이 한 명의 명장을 죽인다면, 왜적의 비웃음만 사게 되고 난리를 평정하는 정책에는 아무런 보탬이 없게 될까 매우 두렵습니다. 진실로 가볍게 풀어 줄 수 없다고 여기신다면 또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덕령이 진실로 역모를 꾀하였다면 그 정적(情跡)을 만에 하나라도 끝내 가릴 수 있는 이치가 없었을 것이니 우선 옥에 그대로 가두어 두는 것만 못합니다. 시일을 늦추어 정적(情跡)이 밝게 드러나기를 기다린 뒤에 죄를 성토하여 죽인다면 국법을 씀에 구차하지 않고 죄인은 변명이 없이 죽음으로 나아갈 것이고, 국인들의 의혹 또한 크게 해소될 것이며, 남쪽 변방의 장사들 중에 진력하는 자들도 거의 모두 저절로 안심하여 결국 전전반측하는 마음이 없게 될 것이니, 어찌 다행스럽지 않겠습니까? 삼가 상께서 재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주-D001] 김덕령(金德齡) : 1567~1596.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경수(景樹)이다. 전라도 광주(光州) 출신으로, 1596년(선조29)에 도체찰사 윤근수(尹根壽)의 노복을 장살하여 투옥되었으나 영남 유생들의 상소와 약포 정탁(鄭琢)의 변호로 곧 석방되었다. 그해 7월 홍산(鴻山)에서 이몽학(李夢鶴)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충청도 체찰사 종사관 신경행(辛景行)과 모속관(募粟官) 한현(韓絢)이 이몽학과 내통했다고 무고하였다. 그리하여 최담년ㆍ곽재우ㆍ고언백(高彦伯)ㆍ홍계남(洪季男)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에 정탁ㆍ김응남(金應南) 등은 김덕령이 이몽학과 무관함을 힘써 변명하였으나 20일 동안 여섯 차례의 혹독한 고문으로 옥사하였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주-D002] 부소(扶蘇) : ?~기원전 210. 진 시황(秦始皇)의 장자(長子)로 성품이 인자했으나, 진 시황의 노여움을 사, 북쪽으로 보내어 장군 몽염(蒙恬)의 군사를 감시하게 되었는데, 뒤에 이사(李斯)ㆍ조고(趙高)에 의하여 거짓 조칙(詔勅)으로 사사(賜死)되고 말았다. 《史記 卷6 秦始皇本紀》[주-D003] 항연(項燕) : ?~기원전 223. 전국 시대 말 초(楚)의 장군으로, 항량(項梁)의 아버지이며, 항우(項羽)의 조부이다. 진나라 장수 왕전(王剪)에게 초군(楚軍)이 대패하자 창평군(昌平君)을 초왕으로 세우고 진에 대항하다가 왕전ㆍ몽무(夢武)에게 패하여 자살하였다. 《漢書 卷31 陳勝項籍傳》[주-D004] 진승(陳勝)의 …… 빌렸으니 : 진 이세(秦二世) 때 진승이 오광(吳廣)과 함께 반기를 들고일어나면서 이미 죽은 진의 공자 부소와 초(楚)의 장수 항연이 살아 있다가 나타난 것처럼 꾸며 백성들의 호응을 모았다. 《史記 卷48 陳涉世家》
    2020-12-31 | NO.494
  • 김덕령 장군 전[金將軍傳]- 서하집
    김 장군 전[金將軍傳] - 서하집 제14권 / 전(傳) : 이민서(李敏敍, 1633~1688). 장군의 이름은 덕령(德齡)이고, 자는 경수(景樹)로, 광주(光州) 석저촌(石底村)의 사람이다. 아버지 붕섭(鵬燮)과 조부 익(翊)은 재행(才行)이 있었으나 모두 현달하지 못하였다. 집안이 대대로 유업(儒業)에 종사하였으니, 장군도 어릴 적에 향교(鄕校)를 출입하며 유아(儒雅)를 쌓았다. 일찍부터 자부심이 강하고 강개한 기질에 큰 뜻을 품고 있었으나, 잘 드러내지 않고 반듯하게 자신을 가다듬어 이를 아는 사람들이 없었다.사람됨은 그리 장대(長大)하지 않았으나, 용맹이 남달랐다. 어릴 때에 이웃집의 감이 익자, 장군은 몸을 날려 입을 갖다 대고는 실컷 먹고서야 내려왔다. 또 두어 길 되는 칼을 즐겨 다루었는데, 때때로 술기운에 말을 타고 산비탈을 질러가며 칼을 좌우로 휘둘러 자르면서 내달리면, 마치 폭풍우가 몰아치듯 지나는 곳마다 큰 소나무가 어지러이 쪼개지고 쓰러졌다. 또 항상 한 쌍의 철추를 늘 좌우에 차고 다녔는데, 철추의 무게가 각각 백 근이나 되었다.더러는 말을 달려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가, 방향을 바꿔 내달려 나오기도 하였다. 더러는 지붕에 올라가 옆으로 누워 처마로 굴러 떨어지다가 미처 땅에 닿기 전에, 몸을 회전시켜 뛰어올라 방 안으로 들어가기도 하였다. 일찍이 사나운 호랑이가 대밭 속에 있으면서 나오지 않자, 장군이 먼저 화살을 쏘아 자극하였다. 호랑이가 놀라고 성이 나서 입을 딱 벌리고 사람을 물려고 하였는데, 장군이 창을 빼어 들고 마주해서 찌르자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으니, 이러한 일들이 매우 많았다. 매양 스스로를 조운(趙雲)에게 견주었는데, 일찍이 시를 지어 ‘군병(軍兵)을 거느려 적을 무찌르고는 갑옷을 벗고 강호(江湖)로 돌아가겠다.’는 뜻을 스스로 읊었으니, 그 의중을 알 만하였다.만력(萬曆) 임진년(1592, 선조25)에 왜구가 크게 쳐들어오자 선조께서는 용만(龍灣 의주(義州))으로 파천(播遷)하였다. 이듬해에 명(明)나라 황제가 군사를 보내 구원하여 연이어 삼경(三京)을 수복하였으나, 적은 영남(嶺南)에 머물면서 날마다 군병을 증가시키며 재침(再侵)을 꾀하여, 관군(官軍)과 의병(義兵)들이 도처에서 무너지고, 명나라에서 보낸 장리(將吏)들 역시 겁먹고 회피하며 관망만 하고 있었다.이때 장군은 모친의 상(喪)을 당해 집에 있었는데, 담양 부사(潭陽府使) 이경린(李景麟)과 장성 부사(長城府使) 이귀(李貴)가 번갈아 방백(方伯)에게 장군을 천거하였고, 이경린은 또 전투 장비까지 내주며 기병(起兵)해서 싸움에 나가기를 권유하였다. 방백이 이에 조정에 보고하자, 특별히 형조 좌랑(刑曹佐郞)을 제수하였다. 장군의 자부(姊夫) 김응회(金應會) 또한 기개가 있고 뜻이 큰 의사(義士)였는데, 의리로써 장군을 개유(開諭)하니, 11월에 장군은 마침내 상복을 벗고 담양(潭陽)에서 병력을 모집하여 수천 명을 얻었다. 원수(元帥 권율(權慄))는 영남에 있으면서 그 군대를 초승군(超乘軍)이라 표방(標榜)하였다. 세자(世子)는 전주(全州)에 있으면서 장군의 기병(起兵) 소식을 듣고 익호 장군(翼虎將軍)이란 칭호를 내렸다. 이듬해에는 임금께서 사신을 보내 장유(獎諭)하고, 또 군호(軍號)를 충용(忠勇)이라고 하사했다. 1월 26일에 장군이 병력을 거느리고 담양을 출발하면서 영남에 고유(告諭)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정의(正義)에 의거하면 아무리 위태롭더라도 반드시 흥(興)하고, 순리(順理)를 범하면 아무리 강대하더라도 반드시 멸망하는 법이다. 이 때문에 비수(淝水) 가의 작은 부대가 부견(苻堅)의 대군(大軍)을 꺾을 수 있었고, 독부(督府)의 수군(水軍)은 오히려 역적 양(亮)의 군대를 꺾었으니, 이 사실은 역사에 실려 있고, 시기는 고금(古今)에 다름없다. 이제 출병(出兵) 시기도 길괘(吉卦)를 얻었고, 정기(旌旗)는 동쪽을 향하고 있으며, 병사들은 정예하고 병기(兵器)는 예리하며 군사들은 다만 명분이 곧아서 사기가 왕성하니, 저 가마솥 속의 물고기들이 어찌 오랫동안 버티겠는가?”라고 하였다.남원(南原)에 도착하여 병사들을 휴식시키고 있을 때, 이 고을의 사인(士人) 최담령(崔聃齡)을 얻어 별장(別將)으로 삼고, 2월에 영남 지역으로 진출하니 군대의 명성이 크게 떨쳤다. 왜적이 장군의 위명(威名)을 듣고 석저 장군(石底將軍)이라 부르며, 벌벌 떨고 감히 기를 펴지 못하였다. 적장 가등청정(加籐淸正)은 몰래 화공(畵工)을 보내 장군의 형상을 그려 오라고 하여 그 그림을 보면서 이르기를 “참으로 장군이로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병졸을 거두어 노략질을 못하게 하는 한편, 여러 곳의 작은 진지를 철수시키고 병졸을 규합하여 대기하도록 하였다.장군은 도원수를 찾아뵈어 그 지휘를 받고, 또 장군 곽재우(郭再祐)에게 서찰을 보내어 원수를 함께하자는 뜻으로 약속했다. 조정에서는 여러 도(道)의 의병을 혁파하여 오로지 장군 휘하에 소속시키도록 하였다. 장군은 마침내 병졸을 이끌고 나아가 일본에 격문(檄文)을 전하니, 이에 원근에서 향응(響應)하고 진동하였고, 휘하의 졸개들도 용기백배하여 분격하며 싸우고자 하였으며, 왜적들에게 포위되어 진지를 지키던 관군과 중국 군사들도 장군에게 모두 의지하며 중하게 여겼다.마침 조정에서는 강화(講和)를 논의하며, 여러 장군들에게 교전하지 못하도록 경계하였다. 장군은 부득이 진주(晉州)에 주둔해 병사들을 크게 집결시키고 밤낮으로 전투 장비를 더욱 손보았으며, 널리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싸우고 지키는 계책으로 삼아 누차 싸우기를 청했으나,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또 장군의 위명(威名)을 시기하고 공 세우는 걸 싫어하는 자가 있어 백방으로 저지하였다. 장군은 큰 공을 세울 수 없는 데다가 장차 화를 예측할 수 없음을 알아차리고서, 마음이 격해지고 울분이 쌓여 날마다 술을 마시다 얼마 후 마음의 병을 얻게 되었다.이때 군중에 죄를 범한 자가 있어 장군이 목을 베었는데, 어떤 사람이 죄 없는 자를 죽였다고 무고(誣告)하자 임금이 장군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라고 명하였으나, 대신이 힘써 구하여 풀려났다. 임금께서 장군을 소견(召見)하여 위로하고 어구마(御廏馬)를 내리면서 속히 본진(本陣)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그 뒤에 이몽학(李夢鶴)이 호서(湖西 충청도)에서 반란을 일으켜 죽임을 당하자, 그때에 뜬소문이 돌기를 “김(金)ㆍ최(崔)ㆍ홍(洪)이 함께 반역하였다.”라고 하였는데, 김은 장군을 가리키고, 최는 장군의 별장인 최담령이요, 홍은 이천(利川)의 장사 홍계남(洪季男)이다.적당(賊黨) 한현(韓玄)이 체포되어 문초하자 또 그 뜬소문이 실제라 하고, 또 “곽재우와 고언백(高彦伯)도 그의 복심(腹心)이다.”라고 말하였는데, 모두 당대의 명장들이었다. 당시 충청 병사(忠淸兵使) 이시언(李時言)과 경상 병사(慶尙兵使) 김경서(金景瑞)가 더욱 장군을 시기하면서 이때를 이용해 죽이려고 밀계(密啓)를 올려 ‘장군에게 반역한 정상(情狀)이 있다’고 말하였는데,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이 이시언 등의 말에 동조하니, 임금께서 대신들과 의논하여 장군을 체포하라고 명하였다.이에 앞서 도원수 권율(權慄)이 장군을 보내서 호서의 역적 이몽학을 토벌하게 하였는데, 운봉(雲峰)에 이르러 이몽학이 이미 사로잡혔다는 말을 듣고 진주(晉州)로 환군하였으나, 얼마 후 장군은 체포되어 차꼬를 차고 서울에 이르게 되었다. 장군이 말하기를 “나는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맹세코 적을 격멸하고자 하였으니, 어찌 역적을 추종하여 반역을 꾀할 수 있단 말입니까?”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신이 만일 딴 뜻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어찌 도원수의 영(令)을 받들어 이몽학을 치려고 운봉까지 갔겠습니까? 이몽학이 체포된 뒤에는 또 어찌하여 병사를 인솔하고 본진으로 돌아가려고 했겠습니까? 다만 신은 상중(喪中)의 슬픔을 잊고 의병을 일으켰는데, 터럭만큼의 공도 없어서 충의를 펴 보지 못하고 도리어 효성만 손상케 하였으니, 이에 신에게 죽을죄가 있는 것입니다. 또 신은 응당 죽어야 하겠지만 최담령은 죄가 없으니, 청컨대 신 때문에 그를 함께 죽이지는 말아 주십시오.”라고 하였다.임금께서 여러 신하에게 물으니, 정공 탁(鄭公琢)과 김공 응남(金公應南) 등이 김덕령은 분명 반역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역설하였지만, 영상(領相) 유성룡(柳成龍)만 홀로 대답하지 않았다. 임금께서 괴이하게 여겨 묻자, 유성룡이 대답하기를 “차후에 만일 예기치 못한 일이 생긴다면, 김덕령같이 용맹한 자를 풀어 주었다가 다시 잡아들일 수 있을지 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엄한 형벌을 받아 옥중에서 죽으니, 나이는 29세요, 때는 병신년(1596, 선조29) 8월이었다. 나라 사람들이 슬퍼하고 애석해하기를 마치 송(宋)나라 사람들이 악무목(岳武穆)을 슬퍼하듯 하였다. 최담령과 곽재우 등도 오랏줄에 묶여 옥에 갇혔으나, 뒷날 모두 풀려났다.당초 장군을 체포할 적에 조정에서는 장군이 명령에 따르지 않을까 의심하여, 수신(帥臣)으로 하여금 음밀하게 일을 핑계로 장군을 불러 군영(軍營)으로 들어오면 포박하도록 하였다. 승지 서성(徐渻)이 말하기를 “김덕령은 반역자가 아닙니다. 사자(使者) 한 사람만 보내서 잡아오게 하면 잡아올 수 있는 것을, 어찌 구태여 사계(詐計)까지 쓰려고 합니까?”라고 하였다. 임금께서 서성이 쉽게 말하는 것을 의심하여 서성에게 성을 내며 말하기를 “네가 가서 잡아오너라.” 하였다. 서성이 도착하니 장군은 벌써 진주(晉州)의 감옥에 갇혀 있었다. 조정에 도착하자, 오히려 더욱 의심하여 쇠사슬로 묶고 큰 나무로 칼을 채웠는데, 장군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만일 모반하고자 한다면 이따위로 어찌 나를 꼼짝 못하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화를 내며 몸에 힘을 주자 쇠사슬이 모두 끊어졌다.애초 장군이 군대를 일으킬 적에 서석산(瑞石山) 골짜기 안으로 가서 큰 칼을 주조하였는데, 칼이 만들어질 무렵 산에서 우레 같은 소리가 울리고 흰 기운이 산골짜기 안에서부터 하늘까지 뻗쳐 며칠간 사라지지 않았다. 그 고을에는 옛 명장(名將) 정지(鄭地)의 묘소가 있고, 자손들이 대대로 정지의 철갑 옷을 간수하고 있었는데, 장군이 그 철갑 옷을 가져다 입고 칼을 차고 가서 정지의 묘소에 제사를 올리며 고하였다. 제사를 지낼 때 차고 있던 칼이 세 번이나 저절로 풀려 땅에 떨어지자, 사람들이 모두 괴상하게 여기며 상서롭지 못하다고 생각하였다.진주에 있을 때에 목장 안에 사나운 말이 있었는데, 한번 날뛰면 나는 듯해서 사람들이 가까이하지 못하였다. 장군이 소문을 듣고 마침내 직접 찾아가서 굴레를 씌우고 올라타니 말이 매우 온순해졌다. 그 후 장군이 처음 체포되었을 때 말이 며칠 전부터 먹지를 않았는데, 재차 체포되자 또 열흘이나 먹지 않았다. 이 때문에 사자(使者)가 채 도착하기도 전에 장군은 이미 자신에게 화가 닥쳐올 것을 알았다.당시에 당화(黨禍)는 이미 벌어졌고 병란까지 일어나 나라가 곧 망하게 되었는데도, 붕당을 짓는 자들은 더욱 심하게 치고받으면서 초야에 있는 선비도 끌어들여 미워하고 저해(沮害)하였다. 장군은 비록 당인(黨人)은 아니었으나, 장군의 자부(姊夫)로서 공을 권하여 군사를 일으키게 했던 김공 응회(金公應會)와 장군은 모두 정공 송강(鄭公松江 정철(鄭澈))과 같은 고을 사람이고, 김응회는 또 우계(牛溪) 성 선생(成先生 성혼(成渾))의 문인이었다. 그때 송강과 우계는 모두 당화(黨禍)를 입은 우두머리였으므로, 이 때문에 김응회 역시 동시에 무함을 당해 체포되어 거의 죽을 뻔했다가 다행히 살아났다. 장군은 당시 제장(諸將)들이 시기하고 미워하는 대상인 데다가, 집정자(執政者)가 안에서 그들을 거들었기 때문에 마침내 죽음을 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장군이 죽은 뒤로 여러 장군들은 각자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 것을 의심하여, 곽재우(郭再祐)는 드디어 군병을 해산하고 벽곡(辟穀)을 익힌다며 앙화를 피하였고, 이순신(李舜臣)은 한참 싸울 즈음에 갑옷을 벗어 스스로 적의 탄환을 맞고 죽으니, 호남과 영남 사이에서는 부자와 형제가 의병에 가담하지 말라고 서로 경계하였다. 그런데 적들은 장군의 죽음을 듣고 비로소 날뛰면서 서로 경하하여 이르기를 “김덕령이 죽었으니, 더는 두려울 자가 없다.”라고 하였다.장군은 아들이 없었고, 효종(孝宗) 때에 이르러 원통함을 밝혀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증직하도록 명하였다. 장군의 형 김덕홍(金德弘)은 고공 경명(高公敬命)을 따라 금산(錦山)에서 전사하였고, 장군의 처는 이씨(李氏)로, 정유년(1597, 선조30)에 병란을 피하여 담양(潭陽)에 있다가, 적을 만나 심하게 꾸짖으며 굽히지 않고 죽었다.다음과 같이 논(論)한다. 김 장군이 군사를 일으킨 지 4년 동안 조그마한 공도 세우지 못하고 결국 무함을 받아 죽었으니, 어찌 된 일인가? 대체로 장군은 위명(威名)이 너무 성하여 이르는 곳마다 적은 반드시 군병(軍兵)을 거두고 먼저 피해 버려 끝내 한번의 교전(交戰)도 하지 못했고, 조정에서는 두려워하고 미워하여 시기하고 해치려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화의(和議)와 당화(黨禍)도 그 사이에 끼어들었으니, 공을 이루지 못하고 죽는 것이 마땅하다 하겠다. 세상에 전하기를, 장군이 군중(軍中)에 있을 때에 화란(禍亂)이 반드시 닥칠 것을 염려하여 그의 아우 김덕보(金德普)에게 이르기를 “네게 만일 나의 용맹이 있고 나에게 혹 너의 지혜가 있다면 몸도 보전할 수 있고 공도 세울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하니, 아마도 장군이 충용(忠勇)을 스스로 떨치면서 몸을 보전할 지혜를 강구할 겨를이 없었던 것인가? 비록 그러나 응후(應侯)가 백기(白起)를 죽이자 소왕(昭王)은 걱정하는 낯빛이 있었고, 송(宋)나라 사람이 단도제(檀道濟)를 죽이자 위병(魏兵)이 양자강(楊子江)에 이르렀으며, 진회(秦檜)가 악무목(岳武穆)을 죽여 송나라는 그로 인해 망하였으니, 그 사람들 모두가 꼭 꾀에 공교롭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아! 어찌 하늘이 아니겠는가.[주-D001] 유아(儒雅) : 유학(儒學)의 문아(文雅)한 기풍이나, 혹은 그러한 기풍을 가진 단아한 선비를 이른다.[주-D002] 조운(趙雲) : 삼국 시대 촉(蜀)나라의 무장(武將)으로, 자가 자룡(子龍)이다.[주-D003] 삼경(三京) : 서경(西京)인 평양(平壤)ㆍ중경(中京)인 개성(開城)ㆍ남경(南京)인 한양(漢陽)의 통칭이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宣祖)는 요동(遼東)으로의 망명(亡命)을 염두에 두고 의주(義州)로 파천하였는데, 이듬해에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조선에 출정하여 평양성과 개성을 차례로 탈환하고 마침내 한양을 수복하였다.[주-D004] 방백이 …… 보고하자 : 방백은 전라도 관찰사 이정암(李廷馣)을 가리킨다. 이정암은 1593년(선조26) 12월 13일 급히 장계를 올려 아뢰기를, “전일 삼가 받든 유지(有旨)에, 항오(行伍) 가운데 장재(將才)가 있어 쓸 만한 사람이 있는지 다방면으로 알아보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담양 부사(潭陽府使) 이경린(李景麟)의 첩보(牒報)를 보건대, 부내(府內)에 거주하는 교생(校生) 김덕령(金德齡)이 젊어서부터 용기가 뛰어나 한 고장이 모두 탄복하였는데 이제 장재를 발탁함에 있어 이 사람보다 나은 사람이 없지만 지금 상중(喪中)에 있어 응모하기가 어렵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담양에 이르러 덕령을 불러 보고 기복(起復)하여 종군함으로써 국가의 위급함을 구제하도록 권면하였던바 이제 바야흐로 의병(義兵)을 모집하고 있는데 원근이 다투어 붙좇는다고 합니다. 따라서 동지 수백 명을 모집하게 되면 적의 예봉을 꺾고 진(鎭)을 함몰시키기 위해 일대 사전(死戰)을 벌일 결심이라고 합니다. 그 뜻이 매우 가상하니 이런 사람은 특별히 조정에서 면려 표창하여 그 공효를 책임 지우소서. 그리고 군량과 병기 등의 물품도 사세가 사적으로 판출하기는 어려울 것이니 각 고을에 저축되어 있는 것 가운데서 숫자를 헤아려 제급(題給)하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국역 선조실록 26년 12월 13일》[주-D005] 임금께서 …… 하사했다 : 1593년(선조26) 12월 29일 비변사가 아뢰기를, “김덕령 군대의 군용이 매우 성대하다는 것은 신들도 들었습니다. 전에 들은 바에 의하면 덕령이 권율(權慄)에게 군호(軍號)를 청하였는데 권율이 초승장(超乘將)으로 호칭하게 했다고 합니다. 초승이라는 호칭은 별로 근거할 데가 없으니 조정에서 새로 호칭을 내리고 또 한 명의 관원을 보내어 그 군중(軍中)에 나아가 위무, 전진(戰陣)에 달려가 공을 세우도록 충의(忠義)를 격려 권면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선조가 따랐다. 그리고 이튿날 김덕령의 군대에 충용군이라는 호칭을 내릴 것을 계하하였다. 《국역 선조실록 26년 12월 29일, 30일》[주-D006] 비수(淝水) …… 있었고 : 원문의 ‘편사(偏師)’는 주력부대가 아닌 작은 부대를 뜻하는 말이다. 춘추 시대 한헌자(韓獻子)가 환자(桓子)에게 “체자가 편사로 출전해서 적진에 빠졌으니, 그대의 죄가 크다.[彘子以偏師陷, 子罪大矣.]”라고 하였다. 《春秋左氏傳 宣公12年》 부견(苻堅)은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때 전진(前秦)의 왕이다. 군사 백만으로 동진(東晉)을 멸하려다가 비수의 물가에서 동진의 명장 사현(謝玄)이 거느리는 정병 8만 명에게 참패를 당하였다. 《晉書 卷79 謝安列傳》[주-D007] 독부(督府)의 …… 꺾었으니 : 독부는 송 고종(宋高宗) 때 우윤문(虞允文)이 거느렸던 수군(水軍)을 지칭한다. 북송 때에 여진족(女眞族)이 금(金)나라를 건국하고 송(宋)나라를 침략하여 송나라가 강남으로 쫓겨 갔다. 남송은 금나라에 신하가 되겠다는 서약을 올리고 겨우 두 나라의 평화를 유지하였는데, 금나라에서 황족인 완안량(完顔亮)이 임금을 죽이고 자기가 황제가 되었으므로 역적인 양이라고 칭한 것이다. 당시 금(金)나라 폐제(廢帝) 양(亮)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남침하자, 고종이 우윤문에게 명하여 군대를 호궤(犒饋)하게 하였다. 우윤문은 여러 장수들을 지휘하고 작전을 지시하여 금나라를 크게 격파하였다. 《宋史 卷383 虞允文傳》[주-D008] 병사들은 …… 왕성(旺盛)하니 :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선공(宣公) 12년조에 “명분이 바른 군대는 사기가 왕성한 반면, 명분이 없는 군대는 쇠하기 마련이다.[師直爲壯, 曲爲老.]”라는 말이 나온다.[주-D009] 석저 장군(石底將軍) : 김덕령 장군의 출생지가 광주의 석저촌(石底村)이라서 생긴 별명이다.[주-D010] 원수(怨讎)를 함께하자는 뜻 : 원문의 ‘동구(同仇)’는 원수를 함께한다는 말이다. 《시경(詩經)》 〈무의(無衣)〉에 “어찌 옷이 없다 해서, 그대와 솜옷을 같이 입으리오. 왕이 군사를 일으키면, 우리들 창과 모를 손질하여, 그대와 함께 원수를 치리.[豈曰無衣, 與子同袍? 王于興師, 修我戈矛, 與子同仇.]”라고 하였다.[주-D011] 이때 …… 풀려났다 : 《국역 선조실록》의 29년 2월 1일 기사에 따르면 “김덕령은 첩보(牒報) 전달을 지체했다는 이유로 역졸 한 사람을 매로 쳐서 죽였을 뿐만 아니라 도망한 군사의 아버지를 잡아다가 매를 쳐서 죽게 하였는데, 죽은 자는 바로 윤근수(尹根壽)의 노속(奴屬)이었다. 윤근수가 남쪽 지방을 순시하는 도중에 김덕령을 직접 만나 석방해 주도록 타일렀고 김덕령은 이를 승낙하였는데, 윤근수가 돌아가자 즉시 그를 죽였던 것이다. 이때 논의가 분분해서, 김덕령은 살인을 부지기수로 많이 했으며 심지어 사람을 물에 빠뜨려 죽였다고 말하는 자까지 있었다. 결국 김덕령을 나국(拿鞫)하였는데 증거를 들어 스스로 해명하자 상(上)은 특별히 방면할 것을 명하여 위로하고 달래어 보내고 또 전마(戰馬) 1필을 주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주-D012] 이몽학(李夢鶴)이 …… 당하자 : 1596년(선조29) 임진왜란 중에 충청도에서 일으킨 반란을 가리킨다. 이몽학(?~1596)은 본관이 전주(全州)로, 왕족의 서얼 출신으로 한양에 살았다. 성품이 불량하고 행실이 좋지 않아 아버지에게 쫓겨나서 충청도ㆍ전라도 사이를 전전하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모속관(募粟官) 한현(韓絢) 등과 함께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에서 모의하고 의병을 가장하여 조련을 실시하였으며, 동갑회(同甲會)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친목회를 가장, 반란군 규합에 열중하였다. 한현은 어사 이시발(李時發) 휘하에서 호서(湖西)의 조련을 관리하라는 명을 받았으나, 민심이 이반되고 방비가 없음을 알아채고 이몽학과 함께 거사를 꾀하였다. 1596년 7월 일당이 야음을 틈타 홍산현을 습격하여 이를 함락하고, 이어 임천군(林川郡)ㆍ정산현(定山縣)ㆍ청양현(靑陽顯)ㆍ대흥현(大興縣)을 함락한 뒤 그 여세를 몰아 홍주성(洪州城)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반란군 가운데 이탈하여 관군과 내응하는 자가 속출하여 전세가 불리해졌고, 그는 부하 김경창ㆍ임억명(林億命)ㆍ태근(太斤) 3인에게 피살되었다.[주-D013] 송(宋)나라 …… 하였다 : 악무목(岳武穆)은 송나라의 명장 악비(岳飛)로, 무목(武穆)은 그의 시호(諡號)이다. 그는 금(金)나라를 쳐서 중원(中原) 회복을 목전에 두었는데, 간신 진회(秦檜)가 황제의 명령으로 불러서 군사를 돌리게 하고, 악비를 무함하여 결국 옥중에서 죽도록 하였으니, 송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宋史 卷365 岳飛列傳》[주-D014] 서성(徐渻)이 …… 있었다 : 《국역 선조실록》 1596년(선조29) 8월 1일 기사를 보면, “동부승지 서성의 서장에, ‘신이 단성(丹城)에 달려가 원수(元帥) 권율이 김덕령(金德齡)을 진주(晉州)에 가두었음을 듣고 즉시 선전관(宣傳官)으로 하여금 진주에 달려가 잡아오도록 하는 한편, 전 현감(縣監) 김경눌(金景訥) 등을 시켜 압송해 올려보내도록 했습니다.’ 하였는데, 추국청에 계하하였다.”라는 내용이 나온다.[주-D015] 정지(鄭地)의 묘소 : 정지(1347~1391)의 본관은 나주(羅州), 시호는 경렬(景烈)이다. 고려의 무신(武臣)으로, 공민왕(恭愍王) 때에 왜구를 평정할 방책을 왕에게 올려 전라도 안무사(全羅道按撫使)가 되고, 뒤에 다시 순천도 병마사(順天道兵馬使)가 되어 순천과 낙안(樂安) 등지에 침입한 왜구를 소탕하였다. 그의 묘소는 광주의 망월동에 있다.[주-D016] 당화(黨禍) : 기축옥사(己丑獄事)와 신묘옥사(辛卯獄事)를 가리킨다. 기축옥사는 1589년(선조22)에 동인(東人)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당화이다. 이 옥사는 당시에 황해도 관찰사 한준(韓準), 재령 군수 박충간(朴忠侃), 안악 군수 이축(李軸), 신천 군수 한응인(韓應寅) 등이 정여립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고변함으로써 시작되었는데, 서인(西人)인 정철(鄭澈)이 옥사를 엄하게 다스려서 백유양(白惟讓)ㆍ이발(李潑)ㆍ이길(李洁)ㆍ김우옹(金宇顒)ㆍ정언신(鄭彦信)ㆍ정언지(鄭彦智)ㆍ정창연(鄭昌衍) 등 동인 인물들이 대거 처형되거나 유배당하였다. 신묘옥사는 1651년(효종2) 김자점(金自點)과 그의 아들 김식(金鉽)이 수어청 군사와 수원(水原)의 군대를 동원하여 원두표(元斗杓)ㆍ김집(金集)ㆍ송시열(宋時烈)ㆍ송준길(宋浚吉)을 제거하고 숭선군(崇善君)을 추대하려고 했다는 역모가 폭로됨으로써, 부자(父子)가 함께 복주(伏誅)된 사건을 가리킨다.[주-D017] 같은 고을 사람 : 모두가 전라도 광주 사람들이라는 말이다.[주-D018] 곽재우(郭再祐)는 …… 피하였고 : 벽곡(辟穀)은 도교(道敎)에서 말하는 일종의 수련술(修鍊術)이다. 《국역 광해군일기》 즉위년 8월 13일 기사에 수록된 윤근수(尹根壽)의 차자(箚刺)에 따르면, “곽재우는 임진왜란 초기에 필부로서 군병을 일으켜 정진(鼎津)을 가로막아 지키며 왜적의 진군을 차단하여, 누차에 걸쳐 그 예봉을 무너뜨리고 적의 기세를 꺾어서 마침내 적이 정진을 건너 서쪽으로 향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니, 그 공적은 위대합니다.……중략……그런데 곽재우가 산성 방수(防守)를 그만둔 뒤로 벽곡을 하여 솔잎만을 먹고 있으므로, 남들은 그가 도인(道引)을 하는 것이라고 하나, 아는 사람의 말은, 김덕령(金德齡)이 뛰어난 용맹과 힘을 지니고도 남의 모함에 빠져서 마침내 비명에 죽자, 곽재우가 자신도 명장이므로 혹시나 화를 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서 이를 핑계로 세상을 도피하는 것이라고 합니다.”라고 하였다.[주-D019] 효종(孝宗) …… 명하였다 : 실록에 따르면, 김덕령의 신원과 복관(復官)은 1661년(현종2)에 이루어졌다. 《국역 현종실록 2년 8월 30일》[주-D020] 응후(應侯)가 …… 있었고 : 응후는 전국 시대 진 소왕(秦昭王)의 재상이었던 범수(范睢)를 이른다. 당시 장군 백기(白起)가 주위의 나라들과 싸워 무려 70여 성(城)을 탈취하면서 명성을 떨쳤는데, 후일 범수는 진 소왕에게 백기가 왕명에 복종하지 않는다고 참소하고 자결하게 하였는데, 이때 소왕은 얼굴에 걱정스런 빛을 띠었다. 《史記 卷73 白起列傳》[주-D021] 송(宋)나라 …… 이르렀으며 : 단도제(檀道濟)는 남북조 시대 송나라의 인물로, 무제(武帝) 때에 북위(北魏)를 정벌하고서 전군(全軍)을 보전하여 돌아와 사공(司空)에 임명되는 등 위명이 대단하였다. 이후 송나라 조정에서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거짓 조서(詔書)를 내려 불러들이어 주살하였다. 북위에서는 이 소식을 듣고 “단도제가 죽었으니 꺼릴 것이 없다.”고 하면서 양자강을 건너 공격해 왔다. 《宋書 卷43 檀道濟列傳》[주-D022] 진회(秦檜)가 …… 망하였으니 : 악무목(岳武穆)은 송나라의 명장 악비(岳飛)로, 무목(武穆)은 그의 시호(諡號)이다. 그는 금(金)나라를 쳐서 중원(中原) 회복을 목전에 두었는데, 간신 진회(秦檜)가 황제의 명령으로 불러서 군사를 돌리게 하고, 악비를 무함하여 결국 옥중에서 죽도록 만들었다. 이로 인해 송나라도 결국 망하고 말았다. 《宋史 卷365 岳飛列傳》
    2020-12-23 | NO.493
  • 김덕령 장군과 불한당
    광주광역시 광산구에서 전해 내려오는 김덕령의 비범한 능력에 관한 이야기.김덕령(金德齡)[1567~1596]이 소년 시절에 불한당(不汗黨)이 모여 산다는 서봉사(瑞峯寺)에 가서 비범한 능력으로 굴복시켰고, 불한당이 개과천선했다는 이야기이다.1981년 전라남도 광산군이 간행한 『광산군지』와 1990년 광주직할시가 간행한 『광주의 전설』에 수록되었다.김덕령은 호남이 낳은 위대한 장군이며 숱한 전설을 남기고 떠난 민중 영웅이다. 김덕령이 열다섯 살 때, 어머니의 병환에 좋다는 잉어를 구하기 위해서 외갓집이 있는 전라도 화순군 남면 배소마을에 갔다. 소년 김덕령은 불한당이 근처 서봉사를 강점하고 노략질을 일삼는다는 소문을 들었다. 의협심이 남다른 김덕령은 불한당이 우글거리는 서봉사로 갔다. 김덕령은 글공부를 하러 온 도령처럼 위장하고, 불한당과 함께 며칠을 생활하였다. 김덕령이 본 불한당은 악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김덕령은 그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계략을 짰다. 김덕령은 불한당과 내기 씨름을 해서 힘으로 불한당을 굴복시켰다. 김덕령은 지붕으로 올라가서 몸에 줄을 묶어서 불한당에게 그 줄을 던진 다음에 자신을 끌어내리도록 하였다. 김덕령은 일곱 명의 장정이 밑에서 줄을 잡아당겨도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김덕령이 힘을 쓰니 불한당이 끌려 올라갔다. 불한당은 힘으로는 김덕령을 제압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무릎을 꿇고 빌었다. 인정이 많은 김덕령은 불한당과 함께 밤을 지새우며 다시는 도적질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김덕령은 이 일로 인해서 용맹과 도량이 세상에 알려졌고, 훗날 수천 명의 의병을 거느리는 대장군이 되었다. [모티프 분석] 「김덕령 장군과 불한당」은 김덕령의 비범한 능력을 보여 주는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김덕령의 담력과 용맹이 사람들에게 알려진 계기를 설명한다. 비범한 능력을 지닌 김덕령이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는 불한당을 물리치고 지역 사회에 안정을 가져다 준 모티프는 김덕령이 민중 영웅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참고문헌] 『광산군지』(광산군지편찬위원회, 1981) 『광주의 전설』(광주직할시, 1990)[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4 | NO.492
  • 김덕령 장군과 용천마
    광주광역시 동구 용산동 화산마을에서 전해 오는 김덕령 장군과 용마에 관한 이야기.  「김덕령 장군과 용천마」는 김덕령 장군과 용마와의 내기에 관한 이야기이다.  「김덕령 장군과 용천마」 이야기는 광주광역시 동구 용산동 화산마을에 거주하는 최복연[남, 87세]에게 채록하여 한국구비문학대계에 수록한 것이다. 화산마을은 지리적으로 외진 곳에 있다.앞서 최복연이 분적산이 무등산의 아들이라는 이야기를 구현한 뒤, 조사자들이 무등산 이야기가 나왔으니 김덕령 장군 이야기를 구현해 줄 것을 부탁하여 채록하였다.김덕령 장군은 무등산에서 용천마를 타면서 활을 쏘곤 하였다. 어느 날, 김덕령 장군은 용천마와 자신 중에서 누가 먼저 가는지 내기를 하였다. 이에 김덕령 장군이 화살을 쏘고 말이 출발하였는데, 말보다 화살이 먼저 도착했다고 한다. 「김덕령 장군과 용천마」 이야기는 전라도 광주 지역에서 수집되는 김덕령 장군과 용마와의 내기에 관한 이야기를 최복연이 구술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최복연의 기억에 의존하여 구술하다 보니 이야기가 많이 생략되어 있다.[참고문헌]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4 | NO.491
  • 김덕령과 누이의 재주 겨루기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동에서 전해 내려오는 김덕령에 관한 이야기. 김덕령(金德齡)[1567~1596] 장군이 큰 인물이 될 수 있었던 이유에 관한 이야기이다. 김덕령의 누이가 김덕령보다 힘과 재주가 좋았는데, 누이의 희생으로 김덕령이 깨우치고 큰 인물이 되었다는 김덕령에 관한 인물전설이다. 2000년 9월 27일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동에 거부하는 주민 강복동의 이야기를 채록하였으며, 2000년에 광주민속박물관에서 간행한 『광주의 설화』에 수록되었다.김덕령 장군은 힘이 세고 용맹하였다. 그런데 김덕령의 누이는 김덕령보다 힘도 세고 지혜가 남달랐다. 김덕령의 누이는 뛰어난 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조금 부족한 사람이 힘에 눌려서 큰 사람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김덕령의 누이는 힘과 재주로 본다면 자신이 낫지만, 여자는 출가외인이 되기 때문에 남자인 동생이 출세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김덕령의 누이는 김덕령에게 재주를 겨루자고 제안하였다. 김덕령에게는 말을 타고 무등산을 한 바퀴 돌아오라고 하고, 자신은 그동안에 도포 한 벌을 짓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겨루기에서 진 사람이 이긴 사람을 위해 기꺼이 죽어서, 이긴 사람에게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울 기회를 주자고 하였다. 김덕령은 누이를 감당할 재주가 없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작은 뜻도 못 펴고 누나에게 죽겠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착잡해졌다. 그러나 어차피 죽게 될 것이라면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김덕령의 누이도 옷감과 반짇고리를 준비하고, 김덕령은 말을 타고 겨루기를 시작하였다. 겨루기가 시작되었고, 김덕령의 누이는 김덕령이 돌아오기 전에 이미 옷을 다 지었다. 김덕령의 누이는 이대로라면 자신이 살고 동생이 죽을 것이며, 또 자신도 젊은 나이에 죽기는 아까웠다. 마음의 갈등을 느끼고 있는 사이, 말방울 소리가 가까이 들리기 시작하였다. 순간 김덕령의 누이는 도포의 옷고름을 잡아떼었다. 김덕령이 집으로 들어와 누이를 보니, 김덕령의 누이는 아직 옷고름을 달지 못하였다며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였다. 그리고 그날 밤 노끈으로 목을 매어 죽고 말았다. 다음 날 누이의 죽음을 알게 된 김덕령은 통곡하다가 혹시나 하고 도포 자락을 살펴보니 일부러 옷고름을 뜯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김덕령은 자신을 살리기 위해 희생한 누이의 뜻을 받들어 밤낮없이 학문과 무술을 연마하여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였다. 큰 인물이 나려면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모티프 분석] 「김덕령과 누이의 재주 겨루기」의 주요 모티프는 ‘오누이의 힘내기’이다. 오누이가 서로의 목숨을 걸고 힘 대결을 하거나 재주 겨루기를 하는 이야기이다. 내기의 조건은 짧은 시간에 끝날 것, 남보다 힘이 셀 것, 먼 거리를 빨리 다녀올 것 등이다. 대체로 여자는 힘에 관한 재주, 남성은 거리에 대한 속성이 있다. 그런데 후대로 올수록 여자의 힘 속성이 약화되면서 옷 짓기, 밥 짓기 등으로 변화하였다. 이러한 설화 유형에서는 누이의 힘이 동생의 힘보다 우월하다. 그럼에도 누이가 죽고 남동생이 대결에서 이긴다. 이는 공존할 수 없는 두 주체 사이에 일어나는 필연적인 갈등으로, 주체가 오누이로 설정된 것은 모권 사회에서 부권 사회로 교체된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광주의 설화』(광주민속박물관, 2000) 『한국민속문학사전』설화 1-2(국립민속박물관, 2012)[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4 | NO.490
  • 김덕령과 문바위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서 전해 내려오는 김덕령과 관련한 용마 이야기.김덕령은 무등산의 문(門)바위에서 용력을 기르고 술법을 익혔다. 김덕령은 문바위에서 활을 쏜 뒤에 용마(龍馬)를 타고 달려가기를 반복했는데, 이는 용마의 능력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다. 김덕령은 섣부른 판단으로 용마를 죽이고 말았다.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 거주하는 제보자 유몽룡의 이야기를 채록해서, 1990년 광주직할시가 간행한 『광주의 전설』에 수록하였다. 지공너덜은 무등산 정상 아래, 해발 약 1,000~1,100m 사이의 남쪽에 있으며, 폭은 150m에 이르고 상부 경계가 아래로 들어간 혀 모양의 형태로 되어 있다. 옛날 인도 승려 지공대사(指空大師)가 이곳에 와서 석실(石室)을 만들고 좌선 수도하였다고 해서 지공너덜이라 불렸다. 보조국사(普照國師)는 지공너덜의 석실에 문바위를 세웠다. 김덕령은 용마를 타고 문바위에 와서 용력을 기르고, 술법을 익혔다. 어느 날, 김덕령은 용마에게 “내가 큰 일을 하려면 너부터 잘 달려야 한다. 이제 내가 활을 쏠 터인데 화살이 건너편 화순 마실리에 이르기 전에 네가 먼저 거기에 당도해야지 그렇지 못하면 네 목을 치겠노라”고 하였다. 용마도 김덕령의 말을 알아들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화살이 김덕령의 활시위를 떠나자마자 용마도 김덕령을 태운 채 쏜살같이 달렸다. 김덕령은 목적지에 도착했으나 화살이 보이지 않자 용마를 죽이려 했다. 이때 하늘 위로 화살이 지나갔다. 김덕령은 용마를 상대로 이와 같은 시험을 자주 하였다. 김덕령은 마지막 시험이라 생각하고 광주의 경양방죽을 향해 활을 쏘았다. 용마는 김덕령을 태우고 쏜살같이 달렸다. 김덕령은 경양방죽에 도착해서 한참을 기다려도 활이 보이지 않자 과감히 칼로 용마의 목을 쳤다. 잠시 후, 화살이 날아왔고, 이를 지켜본 김덕령은 크게 후회하였다. 이 광경을 지켜본 마을 사람들은 용마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겨 방죽 근처에 말을 묻고 용마비(龍馬碑)를 세웠다. 용마비는 경양방죽이 메워질 때 함께 묻혔다.「김덕령과 문바위」는 김덕령의 용마 관련 이야기이다. 용마는 영웅의 신이성과 비범성을 배가시킨다. 하지만 한국의 민중 영웅은 신화적 인물과 유사한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성장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결핍을 지니고 있어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김덕령의 조급성과 섣부른 판단은 김덕령이 비범한 능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비극적 죽음을 맞이하게 된 이유가 된다. 용마전설은 민중 영웅으로서 김덕령의 결핍을 드러내고 있다. [참고문헌] 『광주의 전설』(광주직할시, 1990)[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4 | NO.489
  • 김덕령과 사검
    광주광역시 북구 효령동 종방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김덕령과 사검에 관한 이야기.「김덕령과 사검」은 김덕령(金德齡)[1567~1596]이 하늘에서 내려준 사검(蛇劍)을 받은 이야기이다. 2018년 1월 30일 광주광역시 북구 효령동 종방마을에 거주하는 주민 김봉희[남, 71세]의 이야기를 채록하였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주관하는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에 수록되었다. 김덕령이 씨름판에 가려고 길을 지나가는데 매우 큰 구렁이가 길을 가로막았다. 김덕령은 바윗덩이를 가져다 뱀을 눌러 버렸다. 어느 날 김덕령이 어디를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길에 뱀을 눌렀던 자리를 보니, 그 자리에 칼이 있었다. 하늘에서 김덕령에게 내려준 사검(蛇劍)이었다. 이후, 김덕령은 하늘에게 내려준 사검으로 싸움에서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김덕령과 사검」의 주요 모티프는 '인물의 비범성'이다. 김덕령은 임진왜란 당시에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인물이며, 광주광역시나 인근 지역에서 김덕령의 비범한 능력에 관한 설화가 다수 전해진다. 사검(蛇劍)의 경우, 검신(劍身)이 S자형으로 구불구불해서 마치 뱀이 움직이는 모습과 같아서 이름이 붙여진 검이다. 이 검은 일본에서 '사행검(蛇行劍)', 또는 ‘곡신검(曲身劍)’이라 불리며 다수 출토된다. 한국에서는 1972년 전라북도 임실군 관촌면 금성리 고분에서 발견된 사곡검(蛇曲劍)이 유일하게 알려질 정도로 드물다. 이처럼 한국에서는 사검이 드물고, 김덕령이 바위로 누른 뱀이 사검으로 변하였으며, 하늘이 김덕령에게 내려준 검이라는 이야기는 뱀 앞에서 담대했던 김덕령의 비범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4 | NO.488
  • 김덕령과 주검동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서 전해 내려오는 김덕령이 임진왜란을 대비해서 무기를 만들고 군사를 훈련시켰다는 장소와 관련한 지명에 관한 이야기. 김덕령(金德齡)[1567~1596]이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예견하고 무등산 원효계곡 상류의 주검동(鑄劍洞)에 대장간을 세우고 칼과 창을 만들어서 군사들을 훈련시켰다는 이야기이이다.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 거주하는 제보자 유몽룡의 이야기를 채록해서, 1990년 광주직할시가 간행한 『광주의 전설』에 수록하였다. 주검동은 무등산 원효계곡 상류 삼전동[삼밭실]으로 올라가는 길 왼쪽에 있다. 김덕령이 왜군들이 침입해 올 것을 예견하고 이를 대비해 군사들을 훈련시켰던 곳이 주검동이다. 주검동 주변의 큰 바위에는 “만력계사(萬曆癸巳) 의병대장 김충장공 주검동”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김덕령은 수많은 장정들을 모아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년 전부터 나무가 울창하게 들어선 주검동에 드나들기 시작하였다. 쇠붙이 소리와 장정들의 기합 소리가 주검동으로부터 흘러나와 원효계곡에 밤낮으로 울려 퍼졌다. 김덕령은 주검동에 세 개의 대장간을 세우고 칼, 창, 화살, 투구, 갑옷 등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김덕령은 20여 명의 장정들을 모아서 칼과 창을 다루는 법과 활쏘기를 가르쳤다. 『광주읍지(光州邑誌)』 고적조(古蹟條)에는 “주검동은 무등산 서석 밑 계곡에 있다. 김덕령 장군이 거사할 때 주검동에서 칼을 치니 뇌성(雷聲)이 산에 울리고, 흰 기운이 계곡에서 하늘로 솟아올라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김덕령과 주검동」은 김덕령과 관련된 지명전설이다. 김덕령은 왜군이 침입할 것을 예견하고 무등산 원효계곡에서 전쟁을 대비하였다. 김덕령이 대장간을 세워서 무기를 만들고 군사들을 훈련시켜서 ‘주검동(鑄劍洞)’이라는 지명을 얻게 되었다. [참고문헌] 『광주의 전설』(광주직할시, 1990)[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4 | NO.487
  • 김덕령을 잡아가다- 고대일록
    김덕령을 잡아가다-고대일록 제2권 / 병신(丙申, 1596) : 정경운(鄭慶雲 : 孤臺, 1556~?)○ 7월 12일 정축(丁丑)전라도(全羅道)에서 전통(傳通)이 군(郡)에 이르렀는데, ‘7월 초이레에 역적(逆賊)들이 무리를 결성하였는데 그 수는 알 수 없다. 홍산현(鴻山縣)으로 돌입하여 군기(軍器)를 모두 빼앗고 창고를 봉하였으며, 현감(縣監) 아무개를 결박하였다. 초여드레 진시(辰時)에 임천군(臨川郡)으로 들어가 군수(郡守) 아무개를 결박하고, 그대로 끌고서 은산역(恩山驛)으로 향해 갔다’고 하였다. 흉적이 경내에 도사리고, 중국 병사들이 끊임없이 오가니, 백성들의 고통이 말할 수 없다. 토적(土賊)이 이 틈을 타고 무리 지어 몰래 일어나니, 사람이 이런 세상에 태어난 것이 그 얼마나 불행인가.○ 7월 13일 무인(戊寅)충용장(忠勇將) 김덕령(金德齡)이 군(郡)에 이르렀다.○ 7월 15일 경진(庚辰)큰비가 내렸다. 김덕령(金德齡)이 운봉(雲峯)으로 향해 비전(碑殿)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호서(湖西)의 적 우두머리가 이미 잡혔기 때문이다. 이에 앞서 홍산(鴻山)에 사는 이몽학(李夢鶴)이 몰래 반역의 뜻을 품고서 오합(烏合)의 무리를 모으니, 수천여 명에 이르렀다. 연이어 두 군(郡)을 함락하고 사방으로 공격하며 겁을 주니, 대흥(大興)ㆍ청양(靑陽)ㆍ정산(定山)ㆍ부여(夫餘) 등의 영장(令長)들이 기세만 보고도 달아났다. 충청 병사(忠淸兵使)가 금강(錦江)에 진(陣)을 치고 여러 날을 서로 대치했다. 홍주(洪州)에 사는 겸사복(兼司僕) 김모(金某)가 서울에서 오다가 적에게 사로잡혔다. 겉으로 투항하여 들어가 용기와 지략을 보이니, 도적이 크게 기뻐하며 심복으로 삼았다. 촌집에서 함께 잘 때 사복(司僕) 김모(金某)가, 달게 잠을 자는 틈을 엿보아 몽학(夢鶴)을 참수하여 아군(我軍)에 고하였다. 아! 한 필부(匹夫)가 사람을 무리 지어 가만히 발호하니, 호서(湖西) 주군(州郡)의 수령들이 기세만 바라보고 달아났는데, 일개의 사복이 마음을 다해 적을 잡았는데, 손 한 번 드는 사이에 평정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윗사람이 된 이가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7월 25일 경인(庚寅)한 고을 사람들이 서로 읍(揖)하고 헤어졌다. 나는 오후에 집으로 돌아왔다. 해가 저물녘〔晡時〕에 승지(承旨) 서성(徐渻)이 충용장(忠勇將)을 체포하려고 군(郡)에 도착하였다. 이보다 앞서, 도적들이 공초(供招)한 말에 ‘김덕령(金德齡)은 호남(湖南)에서 거병하고, 홍계남(洪季男)은 영남(嶺南)에서 거병한다.’는 말이 있었다. 덕령이 실제로 간여한 행적이 있다면, 거열형(車裂刑)을 준들 무엇이 애석(哀惜)하겠는가. 그러나 만일 그러한 행적이 없는데도 마구 떠드는 말만 믿었다면, 원통하고 억울함이 막심(莫甚)할 것이니 가련하다.○ 7월 26일 신묘(辛卯)승지(承旨) 서성(徐渻)이 운봉(雲峰)으로 가서 김덕령(金德齡)을 잡아갔다. ○ 광주(光州)에 사는 무진사(武進士) 이완근(李完根)이 조카딸 집에 와서 잤다. 조용히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2020-12-11 | NO.486
  • 김덕령의 뜀바위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서 전해 내려오는 김덕령이 담력과 무술을 연마한 장소와 관련한 지명 이야기. 김덕령(金德齡)[1567~1596]이 어렸을 때부터 담력을 기르고 무술을 연마한 장소라고 전해 내려오는 데서 유래한 지명 관련 이야기이다.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 거주하는 제보자 유몽룡의 이야기를 채록해서, 1990년 광주직할시가 간행한 『광주의 전설』에 수록하였다. 무등산(無等山) 정상은 천왕봉(天王峯), 지왕봉(地王峯), 인왕봉(人王峯)의 삼대봉으로 형성되어 있다. 무등산 정상의 삼대봉은 주상절리로 되어 있어서 마치 선돌을 세워 놓은 것처럼 솟아 있다. 그 모습이 기이하고 장엄하여 다른 곳에서는 보기 드문 경관이다. 삼대봉 가운데 지왕봉은 비로봉(毗盧峯)이라고도 하는데, 정상에 ‘뜀바위’라 불리는 장소가 있다. 충장공 김덕령은 유년시절부터 지왕봉 정상의 이쪽 바위에서 저쪽 바위로 뛰어다니면서 무술을 연마하고 담력을 기르는 훈련을 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곳을 ‘뜀바위’라고 불렀다. 일제강점기에 일본군 장교가 김덕령의 뜀바위 전설을 듣고, 자기도 할 수 있다면서 무등산에 올라가 뛰어내리다가 떨어져 죽었다. 「김덕령의 뜀바위」는 조선시대 전라도 광주 지역의 실존인물 김덕령과 관련된 지명전설이다. 광주광역시에는 김덕령과 관련된 다양한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그중 지명과 관련한 전설도 다수 전승되고 있다. 「김덕령의 뜀바위」는 김덕령과 관련한 지명전설 중 하나이다. [참고문헌] 『광주의 전설』(광주직할시, 1990) 『무등산권지질공원(https://geopark.gwangju.go.kr)』[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4 | NO.485
  • 김덕령의 어머니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서 전해 내려오는 김덕령의 출생과 관련된 이야기. 김덕령(金德齡)[1567~1596]은 광주광역시 충효동에 태어난 조선시대 인물이다. 호랑이가 밭에서 일하고 있는 김덕령 어머니를 잡아먹고 사람으로 환생하려다가 신의 방해로 실패한 이야기이다.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 거주하는 제보자 김종영의 이야기를 채록해서, 1990년 광주직할시가 간행한 『광주의 전설』에 수록하였다.김덕령의 어머니가 김덕령을 임신하였을 때의 일이다. 김덕령의 어머니는 호식(虎食)을 당할 운명이었다. 어느 날 늙은 중이 지나가는 사람을 보고 말했다. “나는 중이 아니고 호랑이다. 나는 저기 밭에서 일하고 있는 여자를 잡아먹고 사람으로 환생할 예정이다.” 중은 말을 마치고 재주를 세 번 넘고 나서 호랑이로 변해서 밭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호랑이는 밭에서 다시 재주를 세 번 돌고 중으로 변해서 돌아왔다. 중은 “저 여자를 잡아먹기 위해서 밭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불칼에 삥 둘러싸여 들어갈 수가 없다. 오늘은 시간을 놓쳐서 사람으로 환생할 수 없게 됐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김덕령의 어머니는 호식을 당할 운명이었는데, 명산의 정기를 지닌 김덕령이 배 속에 있었기 때문에 천지신령이 불칼로 김덕령의 어머니를 보호했던 것이다.  「김덕령의 어머니」는 김덕령 관련 인물전설의 한 편이다. 김덕령 인물전설은 전국에서 전승되지만 「김덕령의 어머니」 이야기는 다른 지역에서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한국의 설화에서 호랑이는 양가적(兩價的) 특성을 갖는다. 호랑이는 사람들을 보호해 주는 선신(善神)이기도 하며,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악신(惡神)이기도 하다. 「김덕령의 어머니」의 호랑이는 악신이다. 악신 호랑이가 김덕령의 어머니를 잡아먹으려고 하지만, 김덕령을 보호하는 신들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했다는 내용이다. 김덕령의 신이성(神異性)을 예비하는 이야기이며, 광주광역시 충효동에서만 전승되고 있다. [참고문헌] 『광주의 전설』(광주직할시, 1990)[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4 | NO.484
  • 김덕령의 용기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서 전해 내려오는 김덕령의 용력에 관한 이야기. 김덕령(金德齡)[1567~1596]은 광주광역시 충효동에서 태어난 조선시대 실존인물로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일으켰다. 김덕령이 열다섯 살 때에 글공부를 위해서 서봉사에 갔다가 호랑이를 잡은 이야기이다.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 거주하는 제보자 김동호의 이야기를 채록해서, 1990년 광주직할시가 간행한 『광주의 전설』에 수록하였다.김덕령은 열다섯 살 때에 글공부를 하기 위해서 친구들과 함께 담양의 서봉사(瑞峰寺)로 갔다. 김덕령과 친구들은 서봉사에서 글공부에 열중하였다. 서봉사는 주변 환경이 조용해서 글공부를 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런데 밤만 되면 사나운 짐승들이 울며 서봉사 주변에 자주 나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덕령은 담력이 남달라서 사나운 짐승들에 아랑곳하지 않고 밤에도 거리낌 없이 서봉사 주변을 돌아다녔다. 김덕령이 서봉사에 온 지 일 년이 지난 어느 날, 밤에 화장실을 가게 되었다. 그때 갑자기 어둠 속에서 큰 호랑이가 나타나서 김덕령을 덮쳤다. 김덕령은 주저하지 않고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리, 발로 배를 걷어찼다. 김덕령은 침착하게 호랑이를 대청 기둥에 밧줄로 묶었다. 김덕령이 화장실을 다녀온 후에 대청 기둥을 보니 호랑이가 마루 밑에 들어가 있었다. 다음 날 아침, 김덕령은 친구들에게 마루 밑에 있는 짐승을 찾아보라고 하였다. 친구들은 마루 밑에 큰 호랑이가 죽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서봉사 스님들과 친구들은 김덕령의 담력에 또 한 번 감탄하였다.  「김덕령의 용기」는 인물전설로서 김덕령의 성장담에 해당한다. 「김덕령의 용기」는 김덕령이 성장하면서 일반 사람들과 다르게 비범하였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만든 이야기이다. 김덕령의 성장담은 ‘오누이 힘겨루기’ 이야기 등이 다른 지역에서 전승되고, 이러한 이야기가 김덕령이 비극적 영웅이 될 수밖에 없는 근거로 활용된다. 하지만 김덕령이 태어난 광주광역시 충효동에서는 김덕령 성장담의 결핍 요소를 보여주기보다는 김덕령이 비범한 영웅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 등을 설명하는 이야기로 인물전설을 구성하는 경향이 있다. [참고문헌] 『광주의 전설』(광주직할시, 1990)[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4 | NO.483
  • 김덕령의 의리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서 전해 오는 김덕령의 비범성과 관련된 이야기. 어린 김덕령(金德齡)[1568~1596]이 논에 물을 대는 외갓집 식구들과 물싸움이 벌어진 이웃집 사람들을 징치[징계하여 다스림]하면서 비범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광주직할시 북구 충효동에 거주하는 제보자 김종영의 이야기를 채록해서 1990년 발행한 『광주의 전설』에 수록하였다. 김덕령이 어렸을 때 전라남도 담양에 있는 외갓집에 갔다. 그해 여름은 비가 오지 않아서 몹시 가물었고, 마을 사람들은 논에 물을 대느라 혈안이 되어 있었다. 물싸움이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자주 일어났다. 김덕령의 외갓집이 물을 대는 날이었다. 그런데 이웃집 사람들이 자신들의 힘을 믿고 김덕령 외갓집의 물을 빼앗았다. 외갓집 식구들이 항의를 하면서 다시 논에 물을 대려고 하니 이웃집 사람들이 괭이를 들고 몰려와 위협하였다. 김덕령은 물싸움을 말리려고 하였으나, 이웃집 사람들은 어린 김덕령을 무시하면서 어른들의 일에 끼어들지 말라고 협박하며 괭이를 휘둘렀다. 김덕령은 날아오는 괭이를 손을 잡아서 엿가락처럼 늘려서 이웃집 사람을 땅에 박아 버렸다. 「김덕령의 의리」는 인물전설로서 김덕령의 성장담이다. 김덕령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비범성을 보임으로써 민중적 영웅이 될 수밖에 없었던 징후적 당위성을 보여 주고 있는데, 이러한 서사가 영웅 성장담의 특징이다. 물싸움, 부도덕한 인물들의 위협과 대결, 징치는 비범한 영웅의 성장담에 자주 차용되는 전설 모티프이다. [참고문헌] 『광주의 전설』(광주직할시, 1990)[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4 | NO.482
  • 김덕령의 지혜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서 전해 오는 김덕령 관련 이야기.김덕령(金德齡)[1567~1596]과 함께 글공부를 하는 친구가 모친상(母親喪) 소식을 듣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냇가의 물이 불어서 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김덕령이 지혜를 발휘하여 친구가 냇가를 건널 수 있게 도와주었다는 이야기이다. 광주직할시 북구 충효동에 거주하는 김동호에게 채록하여 1990년 발행한 『광주의 전설』에 수록하였다. 김덕령이 서봉사에서 친구들과 함께 글공부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폭우가 내리고 냇가의 물이 넘쳐서 절과 마을을 이어 주는 길이 끊기게 되었다. 김덕령과 친구들은 냇가에서 물 구경을 하고 있었다. 이때 한 총각이 냇가 건너편에 와서 김덕령의 친구 중 한 명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친구는 갑작스러운 소식에 망연자실하였고,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에 좌절하고 있었다. 김덕령은 서봉사 중에게 큰 함지를 가져오게 하였다. 그는 친구를 함지에 태워서 물을 건널 수 있게 도와주었다. 김덕령은 친구를 냇가 건너편으로 옮겨 주고, 자신은 함지에 올라서 다시 돌아왔다. 친구들과 중은 김덕령의 지혜와 용기에 탄복하였다.  「김덕령의 지혜」는 김덕령의 인물전설로서 성장담에 해당한다. 김덕령이 친구의 위기 상황을 자신의 지혜와 용기로 해결해준다. 김덕령은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한 위기 해결 능력과 용기를 보여 준다. 이야기는 김덕령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보여 준 비범성을 강조하고 있다. [참고문헌] 『광주의 전설』(광주직할시, 1990)[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4 | NO.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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