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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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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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덕령의 태몽 이야기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서 전해 내려오는 김덕령의 태몽과 관련된 이야기.김덕령(金德齡)[1567~1596]은 전라도 광주 충효동에 태어난 조선 시대 실존 인물이다. 김덕령의 어머니가 호랑이꿈을 꾸고 김덕령을 낳았다는 이야기이다.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 거주하는 제보자 김종영의 이야기를 채록해서, 1990년 간행한 『광주의 전설』에 수록했다.광주광역시 충효동은 과거부터 광산김씨(光山金氏)의 집성촌이다. 충효동 출신의 많은 사람들이 과거에 벼슬을 했다. 김붕섭(金鵬燮)의 부인 남평반씨(南平潘氏)가 마을 아녀자들과 함께 길쌈을 하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부인은 골짜기에 스치는 바람에 취해서 잠이 들었다. 부인은 꿈을 꾸었다. 자신 앞에 큰 호랑이가 나타나 느닷없이 자신의 품에 들어와 안겼고, 부인은 아무 두려움 없이 호랑이를 쓰다듬어 주었다. 호랑이는 남평반씨를 물지도 않고 다소곳이 있었다. 남평반씨는 잠에서 깼지만 꿈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남편이 때마침 들어왔고, 그녀는 함께 길쌈하는 여자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녀는 남편에게 꿈 이야기를 했다. 반평반씨는 일 년 뒤에 사내 아이를 출산했다. 하인들은 아이의 출산을 알리기 위해서 사랑채로 가다가 호랑이 두 마리가 웅크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호랑이는 이내 산으로 올라갔다. 김붕섭은 하인들의 말을 듣고, 호랑이가 산신령임을 알게 되었다. 산신령이 내려와서 김덕령이 안전하게 태어나는 것을 지켜보았던 것이다. 「김덕령의 태몽 이야기」는 광주광역시 충효동에서 전승되는 김덕령의 출생담이다. 김덕령 전설은 전국적으로 전승되고 있고, 다양한 유형(type)과 각편(version)이 있다. 「김덕령의 태몽 이야기」는 태몽이라는 장치를 통해서 김덕령 출생의 현실적 개연성을 확보하고 있으며, 호랑이로 변한 산신령을 통해서 비범한 존재로서 김덕령을 강조한다. [참고문헌] 『광주의 전설』(광주직할시, 1990)[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4 | NO.480
  • 김덕령의 환벽당 참새 잡기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서 전해 내려오는 김덕령의 비범한 능력을 보여 주는 이야기.김덕령(金德齡, 1567~1596)이 여덟 살 때에 환벽당(環碧堂) 처마에 올라가 새둥지를 나무 위로 옮겨 주었고, 이를 지켜본 할아버지의 훈계를 듣고 글공부에 전념하였다.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 거주하는 제보자 김동영의 이야기를 채록해서, 1990년 광주직할시가 간행한 『광주의 전설』에 수록하였다. 김덕령이 여덟 살 때 아이들과 함께 환벽당에 놀러갔다. 환벽당 주위에는 나무가 무성하였고, 처마 밑에는 많은 새들이 둥지를 틀고 살았다. 저녁이 되자 새들이 둥지로 돌아왔다. 동네 아이들은 김덕령에게 환벽당 처마 밑에 있는 새를 잡아 달라고 하였다. 김덕령은 새를 잡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었지만 환벽당 처마가 계속 더러워져서 무슨 수를 써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김덕령은 훌쩍 뛰어서 처마에 올라갔고, 처마 밑에 있는 둥지에 손을 넣어서 새를 잡았다. 아이들은 김덕령이 잡은 새를 갖고 싶었으나, 김덕령은 환벽당 주변에 있는 나무 위에 새 둥지를 만들어서 잡은 새를 옮겨 주었다. 아이들은 김덕령의 용력(勇力)을 알기에 따지지도 못하고 보기만 할 뿐이었다. 김덕령이 집으로 돌아가는데 할아버지가 김덕령을 불러 세웠다. 할아버지는 김덕령에게 힘이 있다고 자랑하거나 뽐내지 말고, 남이 모르게 힘과 실력을 길러야 한다고 충고하였다. 김덕령은 할아버지의 훈계를 듣고는 크게 깨달아 글공부에 전념하였다.「김덕령의 환벽당 참새 잡기」는 인물전설로서 김덕령의 성장담에 속한다. 김덕령의 능력 과시와 김덕령에 대한 훈계 등이 순차적으로 연결되어 김덕령의 영웅적 면모를 보여 주고 있다. 김덕령의 능력 과시는 역사적으로 비극적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이유로 제시된다. 그러나 실존 인물이 출생하고, 후손들이 현재까지 살고 있는 곳에서는 이야기가 순화되고 교훈적인 형태로 변형되는 경우가 있다. 「김덕령의 환벽당 참새 잡기」는 순화되고 교훈적인 내용으로 이야기가 변형된 것이다. [참고문헌] 『광주의 전설』(광주직할시, 1990)[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4 | NO.479
  • 김만식-宿光山府
    角罷人初定  화각 소리 그치고 인적이 고요한데 砧繁夜更遲旅懷無與共 惟有一燈知- 난실유고(蘭室遺稿) 권1김만식(金晩植, 1845-1922)의 자는 사성(司晟)이며 호는 난실(蘭室)이다.
    2018-07-27 | NO.478
  • 김만식-暮向梨峴
    幽尋弊屟趂凉霄  해진 나막신으로 그윽한 곳 찾으려 서늘한 하늘에 나아가暝入孤邨酒氣消  저물녘에야 외로운 마을에 드니 술기운이 사라지네.小雨纔晴殘水呴  가랑비 잠깐 개니 남은 물 뿜어대고 密雲初散遠峰孤  짙은 구름 막 흩어지니 먼 봉우리 외로워라老去賸逢連日醉  늙어 가며 넉넉한 만남에 날마다 취하고 歸來又見故人招  돌아오는 길에 다시 만난 벗들 손짓을 한다네䕺篁隱映松明細  떨기 대 은은히 비추니 소나무 밝고 분명한데 爛漫題詩夜覺遙  난만히 시 지으니 밤 아득해짐을 느끼겠구나-충장공 김덕령의 후손으로 김만식(金晩植:1845~1922)이 충효동에서 해질녘에 충장사가 있는  고개 배재(暮向梨峴)를 넘다 읊은 시다.
    2018-07-30 | NO.477
  • 김만식-望光山舊墟
    碧蘿小屋紫苔庭 凉雨初過病肺醒鶴老也同閒處啄 蟬淸最合靜中聽烏巾隨意雲相遂 白髮偏憐雪半零山外故人如問我 爲言家事付樵靑-난실유고(蘭室遺稿) 권1김만식(金晩植, 1845-1922)의 자는 사성(司晟)이며 호는 난실(蘭室)이다. 본관은 광산이다. 충장공 김덕령의 후손으로 광주 충효동에서 출생하였다. 고향에서 살면서  1890년에 친족들과 취가정(醉歌亭)을 세우고 후학을 지도하는 등의 일을 펼치다 생을 마감하였다.  광주의 모습을 노래했다.
    2018-06-16 | NO.476
  • 김만식-원효사에 들러
    十年來영秖園西  십 년을 동산 서쪽만을 오갔더니 松檜依然繞舊溪  소나무와 전나무 여전히 옛시내를 둘렀네一梘穿林寒溜滴  한 홈통 숲을 뚫어 찬물방울 떨어지고 亂藤縈樹密陰低  어지러운 등나무엔 빽빽한 그늘 드리웠구나銅甁曾是聞龍化  구리병 일찍이 용으로 변했다는 말 들었고畵閣猶能許燕泥  그림누각은 오히려 제비집을 허여했구나古塔題名誰所證  옛탑에 붙인 이름 그 누가 밝히리요空山惟有夜猿啼  빈산에는 한밤의 원숭이 울음뿐이로다. -난실유고(蘭室遺稿) 권1
    2018-07-30 | NO.475
  • 김문옥- 노당선생실기서 露堂先生實記序
    김문옥 효당문집 曉堂文集 권7露堂先生實記序天下之理未有無漸 而盛道之將興也 必有大人君子 自任以斯道之重者 倡之作之扶之植之 如導泉而出之山 如養苗而去其稗 然後其盛有不期致而至者 我邦數百年儒他盛矣苟㴑其源之何自而始 則漸於麗季諸賢有不可誣 盖當麗氏佞佛事神之日學士大夫不知有吾聖人之學之可尊 而有露堂秋文憲先生以晦軒安文成之徒 繼文成而敎迪人才 丕興儒學 以漸祛麗氏之陋而啟韓五百載文治之運 至今竆巷私塾 童幼而挾冊者無不誦先生所著之心鑑 殆若以是爲小學之階梯然讀其書不知其人者 世皆是也 嗚乎 建聖廟刱學校 以闢榛荒以惠無窮 固安文成之功爲大 而至若三都監五庫七管十二之徒諸生爲設科條以敎之 俾皆服仁羲之說 習詩書之訓 去佛而就儒捨邪歧而趨康莊者 顧不繇於先生化導之力歟而 其功如此 其效又如此顧上不獲配食於兩廡 下不得尸祝於人人 枉先生何憾哉 自知慕先生者言不能不慨然尒 嗚乎 今之時又非麗季 祇尙竺敎比也 風雨晦盲 百喙爭鳴 昔之儒化 其彬然者索然 燦然者窣然 於是而思先生倡道興學之苦心 政如坐大廈傾覆之下 想昔日匠心獨運構千萬間以遺來世者 其規模營度如彼其壯 而今乃岌 焉不支寧下爲之寒心哉 遠孫鏞禧與其族人 旣爲先生立祠黃山 又圖刊其實記 屬文鈺序之文鈺幼讀心鑑 見其無所引書目者 往往 而有不知爲誰氏語也 今知爲先生自下語 金條玉科亦何必多乎哉 附以叙述諸作 反鄉省士林之議躋聖廡文字 當時事雖未諧 百世下公議亦可以見矣노당(露堂) 추적(秋適)은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추계추씨(秋溪秋氏)의 입향시조이다. 충렬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 안동서기(安東書記)·직사관(直史館)을 거쳐 좌사간(左司諫)에 올랐다. 1298년(충렬왕 24) 환관 황석량(黃石良)이 권세를 이용, 자신의 고향인 합덕부곡(合德部曲: 지금의 충남 당진시 합덕읍)을 현(縣)으로 승격시키려고 할 때, 그 서명을 거부하자 황석량의 참소로 순마소(巡馬所)에 투옥되었다. 뒤에 풀려나와 시랑으로서 북계 용주(龍州)의 수령을 역임하였다. 충렬왕 말년 안향(安珦)에 의하여 발탁되어 이성(李晟)·최원충(崔元冲) 등과 함께 7품 이하의 관리, 혹은 생원들에 대한 유학교육을 담당하였으며, 한문교양서인 『명심보감』을 편찬하였다고 한다. 민부상서(民部尙書)·예문관제학에 이르러 치사(致仕)하였다. 露堂先生實記序文천하(天下)의 이치가 차츰차츰 나아가지 않을 수 없고 성대한 도(道)가 장차 흥하게 되면 반드시 대인군자(大人君子)가 나타나서 스스로 사도(斯道)의 중책을 자임하고 일으켜 시작하고 도와서 세우게 되나니, 마치 샘물을 인도하여 산곡을 벗어나게 하고 싹을 기르면서 잡초를 제거함과 같다. 그렇게 한 다음이라야 그 성대함이 극치에 이룸을 기대하지 않고도 이르게 되듯이 우리나라 수백년 유도(儒道)의 교화도 성대해 왔었다.진실로 그 근원이 어디에서부터 왔는지를 거슬러보면 고려(高麗)말기 제현(諸賢)들에 의해 점차 이어져 왔음을 부인할 수가 없을 것이다. 대개 고려조 불교(佛敎)가 성하고 신(神)을 숭상하던 시기에 있어서 학식이 있는 선비들도 우리의 성학(聖學: 儒道)이 존귀함을 알지 못하던 차에 문헌공(文憲公) 추노당(秋露堂)선생은 회헌(晦軒) 안문성공(安文成公 이름은 裕)의 제자로서 문성공의 뒤를 이어 인재(人才)를 교육하고 유학(儒學)을 크게 진흥케 되니 고려조의 폐습은 점점 사라지고 우리나라 오백년(五百秊) 문치(文治)의 대운이 열리게 된 것이다. 지금도 궁벽한 시골서당 어디를 가나 어린 아동들이 책을 끼고 다니며 선생이 쓴 명심보감을 외우지 않은 이가 없게 된 것은 어쩌면 이로 인해 소학(小學)의 공부를 닦기 위한 경로를 밟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책을 읽으면서도 그 저자가 누구인지 모르고 있으며 세상이 모두가 다 그러하니 참 서글픈 일이라 하겠다.향교를 짓고 학교를 창설하여 황무지를 개척하고 무궁한 혜택을 남기게 된 것은 진실로 안문성공의 위대한 공로였고, 삼도감(三都監) 오고(五庫)와 칠관십이도(七管十二徒) 제생(諸生)의 무리 같은 자에 이르기까지 조목별로 법령을 설립하여 가르치고 하여금 모두 인의의 가르침에 복종하며 시서(詩書)의 가르침을 익히게 하고 불도(佛道)를 떠나 유도(儒道)로 나아가게 하며, 올바르지 못한 외길을 버리고 육방(六方)으로 널리 통하는 길을 따르게 하였던 것은 돌아보건대 선생의 교화와 인도의 힘에 의함이 아니었겠는가? 그 공열이 이와 같고 그 효력도 또 이와 같았으나 돌이켜 보건대 먼저 양무(성균관 문묘나 향교의 대성전)에 배향(配享)되지 못하고 다음으로 축문을 맡은 사람들이나 선생을 스스로 추모할 줄 아는 자가 능히 개연(慨然)하며 탄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 지금 이 시기는 또 고려의 말기가 아니므로 단지 불교와 비교할 때가 아니다. 비바람 몰아치듯 세상이 어지럽고 캄캄하여 모두가 요란함에 지난날 유교의 교화도 그토록 빛나고 찬란하던 것이 흩어져 없어지고 찬연한 그 교화가 이에 졸연히 쇠해지니 당시 선생께서 창도하고 학풍을 일으켰던 고심을 생각하면, 정히 기울어져 가는 큰 집 아래 앉아서 지난날 목수장이가 생각나고 혼자서 운반하여 천만 칸을 지어 가지고 후세에 남겨주는 것 같이 그 규모와 설계가 그처럼 웅장했건만 높은 그 자체를 지탱하지 못하고 쓰러져 간다면 어찌 한심하지 않으랴! 후손 용희(鏞禧)는 그 일가들과 더불어 이미 선생을 위해 황추산 아래 사당을 짓고 또 그 실기(實記)를 인출할 것을 계획하면서 나 문옥(文鈺)에게 서문을 부탁하였다. 나 문옥도 어려서 명심보감을 읽었지만 그 인용한 서목(書目)을 볼 수가 없어서 가끔 어느 분이 쓴 글인 줄 알 수가 없었다.이제 와서 알고 보니 선생께서 자손을 위해 전할 말이 있었으니 금과옥조(金科玉條)같은 귀중한 문구가 어찌 많음이 필요하랴! 서술한 모든 저서와 향중에서 유림들이 발의하여 성무(문묘나 대성전)에 올린 문자를 부록으로 하였으며, 당시의 사실은 비록 분명하지 않으나 백세(百世) 후에 공론이 있게 되면 또한 가히 알 수 있을 것이다.기해(1959년) 4월의 상순 후학 광산(光山) 김문옥(金文鈺)
    2020-06-18 | NO.474
  • 김방 할아버지와 개미 떼
    광주광역시 동구 계림동과 신안동에서 경양방죽과 김방에 관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경양지(慶陽池)는 조선 시대 세종 때 김방(金倣)이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1967년까지 광주광역시의 계림동과 신안동 사이에서 볼 수 있었던 인공 못이다. 그런데 1968년에 태봉산(胎封山)을 허물고, 그 흙으로 경양지를 매립하였다. 김방이 경양방죽 공사 중에 무너진 개미집을 옮겨 주었는데, 개미 떼들이 그에 보답하려고 쌀을 물어다 주었다. 김방은 공사에 필요한 식량을 얻었고, 제방 축조를 완성했다는 전설이다.경양지는 조선 시대 1440년(세종 22)에 광주의 효천 출신인 김방이 축조했다고 전해진다. 김방은 김제에서 군사(軍事)로 있을 때 김제 벽골제(金堤碧骨堤)[전북 김제시 부량면 월승리 119, 사적 제111호]를 중수하여 김제평야를 곡창지대로 만들었다. 그리고 광주목사(光州牧使)로 전임해 와서 경양지를 만들었다고 한다. 해마다 가뭄이 들어 흉년이 계속되던 광주와 백성을 걱정하던 김방이 무등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모아 옥토로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경양방죽을 파게 되었다. 거대한 공사와 계속되는 가뭄으로 인해 일꾼들의 식량도 부족하게 되어 김방의 걱정이 매우 깊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방죽을 파던 중에 큰 개미집이 무너지게 되었다. 김방은 이 개미집을 가까운 무등산의 장원봉에 옮겨 주었다. 얼마 후 김방의 집 마당에 쌀이 한 가득 쌓여 있었다. 그 다음 날도 계속 쌀이 쌓여 있었다. 이를 이상히 여겨 아침 일찍 지켜보니 개미 떼들이 쌀알을 물고 와서 마당에 쌓은 것이었다. 김방은 개미들의 보은(報恩)으로 여기고, 이 쌀을 인근의 백성들과 일꾼들에게 나눠 주어 경양방죽을 완성할 수 있었다. 광주의 경양방죽을 축조하는 데 있어 개미 떼의 도움으로 일꾼들을 먹일 식량을 충당하였다는 제방 축조와 관련된 전설이다. 개미 떼가 돕게 된 이유는 김방이 무너진 개미집을 구해 줬고, 개미들이 김방에 보은을 한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보은담은 거의 대부분이 동물담으로 동물에 빗대어 보은의 논리를 제공한다. 특히, 개미의 보은은 개미가 가진 특성, 작고 부지런하고 힘이 센 특성이 부각되어 작은 쌀알들을 수많은 개미들이 옮겨 수북이 쌓은 것으로 표현된다. [참고문헌] 김홍삼, 『경양방죽의 역사』(제일문화사, 1968) 『광주의 전설』(광주직할시, 1990)[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7 | NO.473
  • 김방원이가 던져 버린 비석
    광주광역시 광산구 평촌마을에서 전해 내려오는 마을 뒤에 있었던 비석에 관한 이야기.  「김방원이가 던져 버린 비석」은 김방원이라는 도적이 길에 있는 비석을 사람이 서 있는 것으로 착각하였다가, 그 비석을 뽑아 마을 앞에 있는 방죽에 버렸다는 이야기이다. 2018년 4월 27일 광주광역시 광산구 평촌마을에 거주하는 주민 김종수[남, 85세]의 이야기를 채록하였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주관하는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에 수록되었다.평촌마을 뒤편에 묘가 하나 있는데, 그 묘를 심총(沈塚)이라 불렀다. 그런데 청송심씨(靑松沈氏)와 광주정씨(光州鄭氏) 집안이 서로 자기 집안의 묘라 주장하면서 제를 모셨다. 결국 조선 말기에 두 집안의 싸움은 소송으로 번졌는데, 두 집안이 같이 제사를 모시라는 판결이 나왔다고 하며, 아직까지도 논쟁은 해결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두 집안이 묘지 앞에 비를 세우기 이전에 원래 비석이 하나 있었다. 김방원이라는 힘이 센 도적이 도적질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비석을 보고 사람이 서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하였다. 이에 김방원은 그 비석을 뽑아 마을 앞에 있는 방죽에 던져 버렸다고 한다. 현재 비석이 던져진 자리는 논이 되었는데, 심씨 집안에서 논을 파서 정말 비석이 있는지 확인하자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김방원이가 던져 버린 비석」의 주요 모티프는 '오해로 인한 행동의 결과'이다. 묘비석은 죽은 사람의 사적이나 행적 등을 돌에 새겨 사자를 기념하는 것으로, 죽은 사람의 신분, 성명, 행적, 자손, 출생일, 사망일 따위의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김방원이라는 도적이 비석을 사람으로 착각하여 자신의 죄가 드러나는 것을 염려한 나머지 비석을 방죽에 던져 버렸다. 이로 인해, 현재까지도 두 집안이 묘지에 묻힌 사람의 성명과 가문을 확인하지 못하여 누구 집안의 묘인지 확인하지 못한다. 만일 김방원이라는 도적이 비석을 방죽에 던지지 않았다면, 두 집안이 묘지 문제로 싸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참고문헌]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7 | NO.472
  • 김부윤이 조사경에게 보내 편지( 광주목사 안경부?)
    2023-07-06 | NO.471
  • 김상용-望題十七首
    落日登臨喜慶樓 석양에 희경루에 오르니萬家煙景正新秋 집집마다 내 낀 경치 곧 새 가을이로세玉人千里無消息 천리 떨어진 옥인 소식 없어徒倚闌干不盡愁 난간에 기대니 시름 끝없어라 -선원유고(仙源遺稿) 상김상용(金尙容, 1561-1637)의 자는 경택(景擇)이며 호는 선원(仙源),풍계(楓溪)이다.
    2018-07-17 | NO.470
  • 김상헌-시민여상(視民如傷), 청음집(淸陰集) 청음집 제6권
    중서(中書) 신여만(申汝萬) 군이 나와 더불어 붕우의 의리와 골육의 정이 있은 지 두 세대였는데, 근래에 임금의 곁에 있으면서 수고를 한 공로로 승진되었다가 얼마 뒤에 광주(光州)의 명이 있었다. 대개 옛날에 공경(公卿)의 직임을 맡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민사(民事)를 다스리는 일에서 시험해 보았으니, 그 뜻이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장차 길을 떠나려고 하매 서간을 보내어 한마디 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내가 노병으로 인해 오랫동안 붓 잡는 일을 사절하고 있었는바, 적이 인인(仁人)의 호를 사모하였으나 줄 것이 없는 게 부끄러웠다. 이에 애오라지 옛 훈계의 ‘시민여상(視民如傷)’이라는 네 글자를 읊조려서 서로 권면하고, 이어 근체시(近體詩)로 율시 한 수를 지어 그가 가는 길을 노래한다. - 여만(汝萬)의 이름은 신익전(申翊全)이다. - 청음집(淸陰集) 청음집 제6권翩翩五馬出湖關  펄펄 뛰는 오마 이제 호남으로 나아가니瑞石晴光几案間  서석산의 밝은 빛이 궤안 사이 비추리라 誰遣汲郞違禁闥  누가 급랑 보내어서 대궐 떠나가게 했나 定知王掾愛西山  정히 왕연 서쪽 산을 사랑함을 알겠구나 褰帷問俗民謠徧  건유 하고 민속 물어 민요 널리 퍼질 거고 臥閤鳴絃吏趣閑  와합하고 명현하매 관리 정취 한가하리遙想早春東閣下  생각건대 이른 봄에 고을 동각 아래에는 落梅千點錦苔斑  매화꽃이 떨어져서 이끼 위에 점 찍으리[주-D001] 신익전(申翊全) : 1605 ~ 1660.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자는 여만(汝萬)이며 호는 동강(東江)으로, 영의정 신흠(申欽)의 아들이며 청음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병자호란 뒤에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돌아와 부응교, 사인(舍人), 사간을 거쳐 광주 목사(光州牧使)를 지냈으며, 이후 병조 참판, 한성부 좌윤, 도승지를 역임하였다. 《주역》에 밝았으며, 문장에 능하였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저서로는 《동강유집(東江遺集)》이 있다.[주-D002] 오마(五馬) : 태수(太守)는 말 다섯 마리가 끄는 수레를 타므로, 한 고을의 수령이 되어 나가는 것을 뜻한다. 《淸夜錄》[주-D003] 서석산(瑞石山) : 광주(光州) 무등산(無等山)의 별칭이다.[주-D004] 급랑(汲郞) : 한나라 때 직간(直諫)으로 이름 높은 급암(汲黯)을 가리킨다. 급암은 자가 장유(長孺)로, 일찍이 황제가 회양 태수(淮陽太守)에 제수하려 하자, 급암이 인수(印綬)를 받지 않으려고 하면서 아뢰기를, “신은 지금 병이 있어서 군(郡)의 일을 볼 수가 없습니다. 신은 중랑(中郞)이 되어 대궐을 출입하였으면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는 회양이 박하다고 해서 그러는 것인가? 내가 지금 그대를 부른 것은 회양의 백성들이 편히 살지 못하매 그대의 중망(重望)을 빌어서 다스리고자 해서이다.” 하였다. 《漢書 卷50 張馮汲鄭傳》[주-D005] 정히 …… 알겠구나 : 왕연(王掾)은 진(晉)나라 때 환충(桓沖)의 참군(參軍)으로 있었던 왕휘지(王徽之)를 가리킨다.[주-D006] 건유(褰帷) : 수레를 덮어씌운 휘장을 걷는다는 뜻으로, 백성을 직접 대면하고 보살피려는 방백의 성의를 가리키는 말이다. 후한(後漢) 때 가종(賈琮)이 익주 자사(翼州刺史)가 되었는데, 부임을 할 적에는 붉은 장막을 드리우고 가는 것이 규례였다. 그런데 가종은 “자사는 멀리 보고 널리 들어서 좋고 나쁨을 규찰하여야 마땅한데, 어찌 휘장을 드리워 앞을 가려서야 되겠는가.” 하고는 휘장을 걷게 하였다. 《後漢書 卷31 賈琮列傳》[주-D007] 와합(臥閤)하고 …… 한가하리 : 고을의 수령이 수고롭게 정사를 보지 않더라도 덕에 감화되어 백성들이 잘 다스려지는 것을 말한다. 와합은 문을 닫고 누워서 지낸다는 뜻으로, 한나라의 급암이 동해 태수(東海太守)가 되었을 적에 문을 닫고 방 안에 누워서 백성을 다스리니, 1년 남짓한 사이에 동해군이 매우 잘 다스려졌다. 《漢書 卷50 張馮汲鄭傳》 명금(鳴琴)은 거문고를 뜯으면서 지낸다는 뜻으로, 공자(孔子)의 제자인 복자천(宓子賤)이 선보(單父)의 수령이 되어 다스릴 적에 거문고를 뜯고 지내면서 당 아래로 내려가지 않아도 선보가 잘 다스려졌다. 《呂氏春秋 察賢》[주-D008] 동각(東閣) : 재상이나 감사, 수령 등이 거처하는 집이다.조선시대의 가장 험난한 격동기의 삶을 살면서도 한국사에서 절개와 지조의 한 상징의 인물로 자리하고 있는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 ∼1652 )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병자호란 뒤에 청나라에 볼모로 같이 잡혀갔다가 돌아왔다. 광주목사로 가는 신익전에게 백성들을 보기를 마치 다친 사람 대하듯이 걱정하라는 시민여상(視民如傷)이라는 네 글자와 시를 지어준다. 신여만(申汝萬) 군이 승진되었다가 얼마 뒤에 광주(光州)의 명이 있었다.
    2018-07-03 | NO.469
  • 김성원-식영취후여고제봉김상사경생호운(息影醉後與高霽峰金上舍景生呼韻)
    식영정에서 술 취한 뒤 고제봉, 김상사 경생과 더불어 운자를 부르다物外情難盡(물외정난진) 물외는 정 다하기 어려운데人間事或乖(인간사혹괴) 인간사는 혹 일도 어긋나네杯盤賓主共(배반빈주공) 주안상을 주객이 함께 받고談笑古今偕(담소고금해) 고금의 이야기 함께 나눴네酒味傾還喜(주미경환희) 술잔을 기울이면 더 기쁘고歌聲聽卽佳(가성청즉가) 노래 소리 아름답게 들리네星山此夜會(성산차야회) 별뫼의 오늘 밤 모임에서는消遣百年懷(소견백년회) 백년의 회포를 풀어 보리라瑞石纔探歷(서석재탐력) 서석을 겨우 탐승하고 나니松間意不乖(송간의불괴) 소나무 간에 뜻이 어울리네酒多情自放(주다정자방) 술 많으니 정도 호탕해지고吟苦笑兼偕(음고소겸해) 괴롭게 읊으나 웃음 겸했네長笛風前好(장저풍전호) 대피리소리 바람 앞에 좋고華燈夜亦佳(화등야역가) 등잔불 밤 되니 아름다워라棲霞成一宿(서하성일숙) 서하당에서 긴 밤을 보내니明發有餘懷(명발유여회) 날이 밝아도 회포는 남았네夜色深深好(야색심심호) 밤 빛일랑 깊을수록 좋은데往言事事乖(왕언사사괴) 오가는 말 일마다 어긋났네酒來曾不讓(주래증불양) 술이 오면 사양치 아니하고醉去宿能偕(취거숙능해) 취해 가면서도 함께 하노라爛爛情何極(란란정하극) 무르익은 정 다함이 있을까追隨意更佳(추수의갱가) 서로 따르는 뜻 아름다워라風煙迷洞壑(풍영미동학) 안개 바람 골짝에 가득하니春酌遣幽懷(춘작견유회) 봄술로 그윽한 회포 보내리-1570년(선조 3) 12월 8일 조선 유학의 거두이자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과 함께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인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이 세상을 떠났다. 1571년 3월 21일 이황의 백일장(百日葬)을 치르는 날 조선 유학의 거두이자 호남학파의 태두였던 기대승은 제자들과 함께 무등산 규봉(圭峯)에 올라 극진한 예로 조문했다. 기대승은 무등산에서 내려와 식영정에 들렀다. 세상을 떠난 임억령 대신 사위 김성원이 기대승 일행을 맞았다. 이 자리에는 고경명도 있었다. 김성원은 '식영취후여고제봉김상사경생호운(息影醉後與高霽峰金上舍景生呼韻)'이란 제목의 오언사운(五言四韻) 세 수를 지었다.
    2018-08-02 | NO.468
  • 김언거- 呈李退溪
    百谷波濤襄小塘 출렁이는 파도가 작은 연못을 덮치니秋來那得見淸香 가을이 와도 어디에서 청향을 볼 수 있나.紅雲翠幄慚無分 붉은 구름 푸른 장막 구분 없이 참담해져入夜憑欄賞月光 밤이 되면 난간에 기대어 달빛만 감상하네.    那得繁英颺晩風 어디에서 가득한 꽃봉오리 늦바람에 나부끼나只看靑草滿池中 다만 푸른 풀 못 가운데 가득함만을 보네.空名掛壁知無興 헛된 이름 벽에 걸어두고 흥 없음을 알겠으니淨植問夫濂上翁  연꽃에 대해서는 염계 주자에게 물어야 하리.   -김언거(金彦据 1503~1584)가 청원정에서  이퇴계에게 올리는(呈李退溪 )시다.김언거는 조선중기 1553년에 예조좌랑. 연안부사. 홍문관교리. 승문원판교에 지내다 1560년에 퇴임했다.
    2020-04-07 | NO.467
  • 김우급- 上光山沈年伯(演)
    書帷暫輟殿中香符印遙臨瘴霧鄕無等山前人一等海陽城外化春陽慈祥回甲均田日孝悌還申接士場河內願借雖有望廟堂其奈議徵黃-추담선생문집(秋潭先生文集) 권7김우급(金友伋, 1574~1643)의 자는 사익(士益)이며 호는 추담(秋潭)·추담거사(秋潭居士)이다. 김우급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  본관은 광산이며 영광에서 출생했다. 장성 황룡면 황룡마을에 있는 요월정 주인 공조좌랑 등을 지낸 김경우의 손자요 증 좌승지 김대성(金大成)의 아들로 1574년(선조30년)에 영광군에서 태어났다.인조반정후 목능참봉 등에 제수 되었으나 취임치 않았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한 아들 여옥(汝鈺 )에게  "예전에는 우기가 부자지간이지만 이제는 네가 군신간이 되었도다. 은의를 겸하여 다하기는 여러우니 위급할때 몸을 아끼지 말라"고 당부하고 남한산성으로 왕을 모시도록 하였다. 호조참판에 증직되었고 우국충절과 학문이 높아 모암서원(慕岩書院)에 배향 되었다.
    2018-06-16 | NO.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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