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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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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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도규-月小樓詩會 金侯在獻 以四韻要和敬次
    ‘월소루 시회에서 김재헌이 사운으로 화답하기를 청하여 삼가 이어서 짓다(月小樓詩會 金侯在獻 以四韻要和敬次)’登堂絲肉滿庭喧 당에 오르니 사육이 뜰에 떠들썩今日優逰屬藝垣 오늘 마침 예원에서 즐겁게 노니네三代儒冠高會席 삼대의 유관이 높게 자리에 모여서十分春色細傾鐏 흐드러진 봄빛에 술잔을 기울이네清歌酒後爲佳賞 맑은 노래 취한 후 감상을 즐기니暑氣風前不敢存 더운 기운이 바람에 머물지 않네何幸千秋逢聖節 참으로 다행히 천추의 성절을 맞아岡陸萬壽頌君恩 만수무강을 빌며 군은을 송축하네 - 덕암만록(德岩漫錄) 권2나도규(羅燾圭, 1826-1885)의 자는 치문(致文)이며 호는 덕암(德岩)이다.김재헌(⾦在獻)은 1856~1858년 광주목사로 재임했다.
    2018-07-26 | NO.450
  • 나도규-製錦樓卽事 此篇於和金候六律中
    製錦軒高坐 제금루 헌창에 곧게 앉으니天際滿斜陽 하늘 끝에 석양빛이 가득羽籥伶人奏 악공은 피리를 연주하고蟬衫小妓粧 얇은 옷 어린 기녀는 단장하네 月臺濃夜色 달빛 누대에 밤빛이 짙고蘭谷浥秋香 난초 골짝은 가을 향기에 젖었네媿我功名計 부끄럽다 나의 공명의 계책이여一生自傯忙 일생을 스스로 바쁘게만 보냈네
    2018-07-10 | NO.449
  • 나도규-무등산
    아스라히 떠 있는 티끌 산 기슭을 덮고 있고높이 솟은 기암괴석 산봉우리를 옹위하고 있네활달한 마음 열려 속마음을 얻으니가소롭다 시객(詩客)들아! 시짓는 일일랑 거두어라- 서석록(瑞石錄 德巖漫錄),
    2018-08-01 | NO.448
  • 나숭대와 누나의 힘겨루기
    광주광역시 북구 효령동 종방마을에서 전해 내려오는 나숭대와 누이에 관한 이야기.「나숭대와 누나의 힘겨루기」는 역적으로 몰린 나숭대와 나숭대의 누이가 피신한 와중에 내기를 하였던 이야기이다. 2018년 1월 30일 광주광역시 북구 효령동 종방마을에 거주하는 주민 김봉희[남, 71세]의 이야기를 채록하였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주관하는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에 수록되었다. 나숭대가 역적으로 몰려 죽을 위기에 처해 처마 밑으로 숨을 때, 나숭대의 누나는 나숭대의 긴 옷고름을 짧게 잘라서 들키지 않게 하였다. 나숭대와 누나가 내기를 하였는데, 나숭대는 금성산을 한 바퀴 돌고, 누나는 한복을 짓는 내기였다. 누나는 한복을 완성했지만 나숭대가 돌아오지 않자, 한복을 다시 뜯고 짓기를 계속하였다. 이후 집으로 돌아온 나숭대는 누이가 옷을 짓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옷을 완성하지 않았다고 오해하여 누나를 칼로 죽이고 말았다. 「나숭대와 누나의 힘겨루기」의 주요 모티프는 '위기에 대처하는 기지'와 '영웅으로서의 한계'이다. 나숭대는 1728년 이인좌(李麟佐)[1695~1728]의 난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참형을 당한 인물이다. 나숭대의 누이가 나숭대를 숨기기 위해 긴 옷고름을 일부러 잘라서 보이지 않게 하였다는 내용으로 보아, 나숭대의 누나가 뛰어난 기지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내기 중에, 나숭대의 누나는 옷을 다 완성했지만 나숭대가 돌아오지 않아 계속 옷을 풀고 만드는 행위를 반복했다. 나숭대는 누나가 옷을 다 짓지 않은 것으로 오해하고, 내기에서 진 누나를 죽인다. 나숭대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않고, 뛰어난 누나를 죽이는 것은 나숭대가 영웅이 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http://people.aks.ac.kr)[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7 | NO.447
  • 나옹 선사-규봉암
    金風一陣掃庭中  가을 바람 한 떼가 뜰안을 쓸어가고萬里無雲露碧空  만리(萬里)에 구름없이 푸른 하늘 드러났네爽氣微濃人自快  상쾌한 기운 무르녹아 사람들 기뻐하고眸光漸淡上連通  눈빛은 맑아져 기러기 연달아 지나가네 明明寶月分雜盡  밝은 저 보배의 달 가늠하기 어렵고歷歷珍山數莫窮  굽이치는 산맥은 끝없이 뻗어갔네 法法本來安本位  모든 것은 본래부터 제자리에 있는데滿軒秋色半靑紅  처마 가득 가을빛, 반(半)은 붉고 반(半) 푸르네규봉암 일대는 겹겹이 솟구친 봉 하늘을 받치는 기둥 삼아 전체가 천상 누각이라고 칭해도 좋으리라.  오늘 일대는  '반은 붉고 반은 푸르네(半靑紅)'라고 읊었던 나옹선사의 시의 내용과 같은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2018-08-01 | NO.446
  • 나옹 선사-무등산 석실
    全體堅牢誰做出  단단한 이 집을 모두 뉘가 만들었을고 未分天地已安然  아마도 천지가 나뉘기 이전의 조화였으리空空四璧千千歲  사방에 텅빈 벽은 천년을 말하고 歷歷三椽萬萬年   해묵은 서까래 만년을 이어왔네劫劫巍巍無散壞  높고 높이 솟았으나 무너지지 아니하고 時時落樂不零穿  떨어질 듯 걸렸으나 떨어지지 않더라含容法界能寬廓  베풀고 용서하는 법계 크고도 넓으니古往今來玄又玄  시공(時空) 의 진리는 현묘할 뿐이네.고려 말기의 고승으로 나옹선사(1320~1376)는 무등산 규봉암과 지장암 사이 즉 지공(指空) 너덜 아래 있는 석굴로서 보조국사께서 수도하였다하여 무등산 석실(無等山石室)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읊은 시이다.
    2018-08-01 | NO.445
  • 난중일기 속 이충무공의 광주 도착
    李忠武公全書卷之七 / 亂中日記三[丙申]九月十六日己酉。晴。體相發行。自高敞到長城。十七日庚戌。晴。體相與副使往笠巖山城。吾獨到珍原縣。與主倅同話。從事官亦到。暮到衙中。兩姪女出坐叙久。還出小亭。與主倅及諸姪。向夜同話。十八日辛亥。小雨。食後。到光州。與主倅話。十九日壬子。風雨大作。從事官簡及尹侃,荄問簡亦到。○是朝。光牧來。同朝飯。○午。綾城入來。封庫光牧。體相罷黜云。二十日癸丑。雨勢大作。見牧伯登程之際。唐人二名邀話。故饋之以酒。終日雨下。未能遠行。到和順宿。二十一日甲寅。或晴或雨。早到綾城。上最景樓。望見連珠山。
    2023-07-06 | NO.444
  • 난중잡록 (亂中雜錄) - 임진년 상 만력 20년, 선조 25년(1592년)
    난중잡록 1(亂中雜錄一) - 임진년 상 만력 20년, 선조 25년(1592년) : 산서(山西) 조경남(趙慶男, 1570~1641)이 저술한 야사(野史) 해제이 책은 지금부터 약 4백 년 전 전라도 남원에서 유학자이며 무용(武勇)을 겸비한 의병장(義兵將)으로 이름이 높은 산서(山西) 조경남(趙慶男) 선생이 저술한 야사(野史)이다.저자 조경남은 한양 조씨(漢陽趙氏)로서 태종조(太宗朝)의 우상(右相)이었던 한평부원군(漢平府院君) 조연(趙涓)의 후손이며 중종조(中宗朝)에 호조 판서(戶曹判書)를 지낸 조숭진(趙崇進)의 현손이다. 선조(宣祖) 3년(1570년) 11월에 남원부(南原府) 원천내촌리(源泉內村里)에서 났으니, 자는 선술(善述) 호는 산서처사(山西處士) 또는 주몽당(晝夢堂)이라고 한다. 그는 자질이 명민하고 의표가 준수하여 3살 때 시구(詩句)를 듣고서 외었으며, 6세에 부친을 여의고 편모 양씨(梁氏) 슬하에서 자랐다. 13세 때에는 또 모친상을 당하여 외조모 허씨(許氏)의 교양을 받았으나 이때부터 그는 의젓한 성인(成人)의 모습으로 3년상을 애통과 효성으로 마치는 한편, 학업에 정진하여 경전(經傳)과 제자서(諸子書)를 관통하였으며, 저술에도 괄목의 경지에 이르렀고 본《난중잡록》을 시작해서 쓰기도 이때부터였다. 한편으로 활쏘기를 연습하여 백발백중의 묘기를 쌓아서 후일 국난에 위훈을 세운 기초가 된 것이다 17세에 중봉(重峯) 조헌(趙憲)의 문하에 나아가서 성리학과 실천궁행(實踐窮行)의 요체를 배워 사문(師門)의 격찬을 받았다. 선조 25년(1592년)에 왜란이 일어나니 제봉(齊峯) 고경명(高敬命)의 의진(義陣)에 달려갔다가 외조모 허씨의 병보가 급함을 듣고 돌아와서 시탕(侍湯)하였고, 그해 8월에 동지 정사달(丁士達) 등을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켜 10여 차의 전투에서 많은 적추(賊酋)를 사살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 후 선조 30년(1597년)에 왜적의 재침을 당하여 다시 의병을 이끌고 남원ㆍ곡성ㆍ섬진(蟾津)ㆍ함양(咸陽)ㆍ산음(山陰)ㆍ곤양(昆陽)ㆍ하동(河東) 등지로 전전하면서 무수히 적을 섬멸하였으며, 명장(明將) 도독(都督) 유정(劉綎)의 전봉(前鋒)이 되어 초인의 전략을 구사하였으며 한 번 쏜 화살에 5, 6명의 적을 연관(連貫)하여 전 명군을 경탄케 하였다. 유 도독(劉都督)은 그를 평하기를, “동국의 열남자다. 학문은 삼재를 통하였고 가슴에는 만갑을 담았으며 산림기상을 가졌으니 아마 제갈무후에 견줄 만한 위인이다.” [東國豈無烈男子 眞所謂學究三才 胸藏萬甲 又有山林之爭 其諸葛武候之比宇] 하였다. 권율(權慄) 도원수(都元帥)와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이 그의 충용한 공적을 상주하려 하였으나, 그는 힘써 사양하여 이르기를, “나는 다만 신자의 직분을 다한 것일 뿐이다.” 하고, 알리지 못하게 하였다. 31세가 되던 선조 33년(1600년) 경자에는 자기 향리에서 수백의 인명을 해친 큰 백호(白虎)가 횡행하여 방어사(防禦使) 원신(元愼)이 잡으려고 고심을 하다가 못 잡고 나국(拿鞫)까지 받았다는 말을 듣고, 그는 범이 다니는 길에 틀을 차려놓고 기다리는데 걸려서 틀을 달고 산으로 뛰는 호랑이를 활로 명중하여 잡았다. 새로 부임한 방어사 이사명(李思命)이 크게 감사히 여겨 범고기와 말안장, 은장도와 쌀 5석을 상으로 보내니 그는 고기만 받고 다른 것은 다 돌려보내면서, “범 한 마리 잡았다고 이런 것을 받을 수 있겠나. 만약 이런 곡물이 있으면 백성들에게 양곡을 주라.” 하였더니, 방어사는 쌀 30석을 그 마을 민호에 보내왔다. 그 후부터는 문을 닫고 저술에 전념하여 《난중잡록》을 비롯하여 《제례의(祭禮儀)》ㆍ《성리석(性理釋)》ㆍ《오상론(五常論)》ㆍ《소견록(消遣錄)》등 많은 저서를 완성하였다. 인조(仁祖) 2년(1624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아니하였다. 이괄(李适)의 난과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그때마다 의병을 모아 서울로 떠나갔으나 도중에서 난이 평정된 소식을 듣고 돌아갔다. 그는 일생을 국란에 진췌(盡悴)하다가 인조 19년(1641년) 신사년 1월에 72세로 서거하였다. 숙종(肅宗) 7년(1681년)에는 지방 유림이 합의하여 남원 신포(新浦)에 주포서원(周浦書院)을 세워서 유덕을 추모하였으며 철종(哲宗) 12년(1861년)에는 유림 박창규(朴昌奎) 등의 상소로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증직하여 생전의 공훈이 포장되었다.이 《난중잡록》은 저자 조경남선생이 13세 때인 선조 15년(1582년) 임오년 12월에 태양이 세 개로 갈라져서 떠오르면서 쌍무지개가 해를 관통하고 있음을 보고서 앞으로 반드시 이변이 있을 것이라고 예감하면서 그날부터 일록(日錄)을 쓰기 시작하였다. 제 1차로는 광해군(光海君) 2년(1610년) 경술년까지 국내의 중요한 사실을 엮어서 《난중잡록》이라고 명명하여 4권을 완성하였으니, 내용은 대개 임진ㆍ정유 두 차례 왜란의 기사가 주요 부분이 되어 있으므로 표제를 그렇게 정한 것이다. 처음 이 4편이 끝나고서 그의 자서문(自序文)에 이르기를, “7년의 긴 세월을 전쟁으로 지나오면서 나랏일에 큰 힘이 되지 못하였으나 마음만은 이 나라와 왕실을 떠나지 못하여, 승전한 기록은 기쁜 마음으로 춤추면서 쓴 것이고 패전한 기록은 통분한 마음으로 쓴 것이다. 다른 날 이 책이 지사(志士)가 무릎을 치면서 감격하여 읽을 자료가 되기를 바란다.” 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 잇달아 일어나는 명(明) 나라와 청(淸) 나라 사이의 분쟁으로 우리나라에서의 북방 출병 문제와 광해조의 모비 유폐(母妃幽廢), 임해군(臨海君)과 영창대군(永昌大君)의 피살, 인조 반정(仁祖反正) 등 여러 사건과 이괄의 반란, 병자호란(丙子胡亂) 등의 큰 국난을 당하여 그는 계속 기록에 정진하였으니, 즉 광해 3년(1611년) 신해년부터 인조(仁祖) 16년(1638년) 무인년까지의 역사를 서술하여 《속잡록(續雜錄)이라는 이름으로 4권을 완성하였다. 이상 전후의 기간을 통산하면 모두 57년간의 기록이 되는 것이다. 이 책에는 국가 전체의 역사적 기록을 실었고 전란 중 저자 자신이 의병장으로 전투한 사적 등은 객관적 견지에서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중에 특히 임진왜란을 중심으로 수록된 자료 중에는 《경상순영록(慶尙巡營錄)》의 기록이 대부분 실려 있는데 이것은 이 책만으로 그 귀중한 자료가 전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평상시 국내에 큰 일이 없이 평온하게 지난 연대에는 그 중에서 특기할 큰 사건만을 듣고 본 대로 기록하여 극히 적은 양으로 지나가는 해가 많으나 전란과 그 외에 큰 사건이 있던 해는 1년 분의 기록이 상당히 방대하게 수록되어 있다. 그 후손가에 보존된 초본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편찬되어 있다.제 1 권, 선조 15년(1582년)~동 25년(1593년) 7월까지제 2 권, 선조 25년 8월~동 26년(1594) 6월까지제 3 권, 선조 26년 7월~동 31년(1598년) 12월까지제 4 권, 선조 32년 1월~광해 2년(1610년) 2월까지이상 4권 3책으로 《난중잡록》이 성립되었고 그 이후 부분인 《속잡록》은 광해 3년(1611년)부터 인조(仁祖) 16년(1638년)까지의 기사로서 다음과 같이 편집되어 있다.제 1 권, 광해 3년(1611년) 1월~동 13년(1621년) 12월까지제 2 권, 광해 14년(1622년) 1월~인조 6년(1628년) 11월까지제 3 권, 인조 6년 12월~동 13년(1635년) 12월까지제 4 권, 인조 14년(1636년) 1월~동 16년(1638년) 12월까지이것도 4권 2책으로 이상과 같이 구성되었다. 그래서 전후 57년간의 기록이 총 8권 4책으로 되었고, 권수(卷首)에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최시옹(崔是翁), 저자인 산서옹(山西翁)의 서문이 있고 끝에는 한익철(韓翊哲)의 발문과 저자의 11세 종손(宗孫) 조태희(趙台熙)의 간행사(刊行辭)를 붙여서 지난 1964년 9월에 후손들이 석판으로 간행 반포하였다. 이 간행사에 의하면 인조 때에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을 편찬하면서 이 초본을 올려다가 사료(史料)로 참고하였고, 그 부본을 작성하여 정부에 보관하고 원본은 효종(孝宗) 8년(1667년) 정유년에 본가에 돌려주었다. 뒤에 고서간행회에서 《대동야승(大東野乘)》을 간행할 때에 그 중에 이 《난중잡록》이 들어 있었으니, 아마 정부에 보존되었던 부본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추측되는 것이라 하였다.《대동야승》중에는 제 26권부터 34권까지의 사이에 본서를 9편으로 나누어서 수록하였는데, 그 내용이 위에 말한 본손가(本孫家)의 초본과는 다소 다르게 실려 있다. 즉 《대동야승》에 있는 본서의 내용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1. 초본인 《난중잡록》과 《속잡록》중에서 선조 임진년(1592) 8월부터 인조 6년 무진년(1628) 12월까지 부분을 〈난중잡록〉 제 1 내지 제 7 권으로 책정하여 《대동야승》 26권 내지 32권까지에 수록하였고,2. 인조 6년 12월부터 동 9년(1631)년 5월까지의 기사를 〈속잡록(續雜錄)〉이라는 표제로 《대동야승》 제 32 권 후반에 수록하였고,3. 인조 9년 6월부터 동 13년(1635)까지의 기사를 다시 〈난중잡록〉이란 명칭으로 《대동야승》 제 33 권의 전반에 수록하였으며,4. 인조 14년(1636) 1월부터 15년(1637) 3월까지의 기사를 다시 〈속잡록〉의 명칭으로 《대동야승》제 33 권 후반에 수록하였고,5. 인조 15년(1637) 4월부터 동 16년(1638) 12월까지의 기사를 또 다시 〈난중잡록〉의 이름으로 《대동야승》제 34 권의 전반에 수록하였으며,6. 끝으로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 17년(1367년 명 태조(明太祖) 홍무(洪武) 원년)부터 조선 왕조 선조 원년(1568년) 사이에 우리나라가 명 나라, 일본, 기타와 서로 교섭하였던 외교 즉 사대 교린(事大交隣) 관계의 기사를 상세히 기록하여 〈역대요람(歷代要覽)〉이라는 명칭으로 《대동야승》제 34 권의 후반에 싣고서 이 책을 완결시켰다.이상과 같이 되어 있으므로 《대동야승》중에는 초본 제 1 권의 선조 15년(1582년) 임오년부터 동 25년(1592년) 임진년 7월까지의 기사가 전부 탈락되었고, 저자가 정한 〈난중잡록〉이란 명칭은 광해 2년(1610년) 경술년까지의 기사에 그쳤는데 여기에는 인조 6년(1628년) 무진년까지 그 명칭으로 내려오다가 그 다음부터는 〈속잡록〉이란 명칭과 한 편씩 교대하여 사용하여 저자가 원래 편집한 순서를 문란케 하였다. 그리고 권말의 〈역대요람〉은 초본에는 없는 것을 《대동야승》에만 부록되어 있다. 이《대동야승》의 내용을 보면, 현재 규장각 도서로 보존된 필사본인 원본 중에도 오자 탈자 등이 많고 그 편집이 조잡함을 볼 수 있는 것이나, 금번 본 한국고전번역원에서 《대동야승》의 국역을 단행하는 것을 계기로 하여 본가에서 간행한 원본 중에서 제 1 권 기사와 여러 사람의 서문ㆍ발문ㆍ간행사 등 《대동야승》에 탈락된 것을 추가 등재하였으며, 원본에는 실려 있지 아니한 〈역대요람〉 1편도 전과 같이 수록하여 〈난중잡록〉 4권 〈속잡록〉 4권, 부록 1권으로 완전한 편집을 보게 된 것이다. 이 책은 저자 당시에 표기한 명칭 이외에 전체를 총괄하여 〈산서야사(山西野史)〉 또는 〈대방일기(帶方日記)〉 등의 명칭으로 불리고 있어서, 이조 중기 전란사의 귀중한 사료가 되는 동시에 그 시대의 정치ㆍ문화ㆍ사회ㆍ당쟁ㆍ외교 등 관계의 연구에 필요한 자료가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규장각 도서로 보존된 등사본을 대본으로 《대동야승》에 수록되어 고서간행회에서 간행을 보았고 그 후 수십 년을 지나서 저자의 후손가에서 8권 4책으로 원본 간행이 되었으나 어려운 한문으로 되어 일반의 해독에는 어려운 점이 많았던 바 지금 국역본으로 세상에 펴게 되었으니 지극히 다행으로 아는 바이다.1971년 7월 30일亂中雜錄[第一]壬辰上 萬曆二十年。宣祖二十五年。如光州則朴君光玉。奔走開諭。收拾散亡。令賤子從厚。因厚分領。到水原戰所。交付于光牧。是時。巡察。在道遲回。2023.6.16. 수정
    2020-09-13 | NO.443
  • 남구만-贈吏曹判書高公請諡行狀 戊子 이조판서에 추증된 고공의 시호를 청한 행장
    남구만-贈吏曹判書高公請諡行狀 戊子 이조판서에 추증된 고공의 시호를 청한 행장 -약천집(藥泉集) 권23여기에서 고공(高公)은 고경명(高敬命)의 아들 고종후(高從厚, 1554~1593)를 말한다. 1592년 금산(錦山) 싸움에서 아버지와 동생을 잃은 그는 이듬해 일본군이 진주를 공략한 뒤 호남지방으로 침입하려 하자 휘하 의병을 이끌고 진주성에 들어가 성을 지켰다. 6월 29일 진주성이 함락되자 창의사 김천일(金千鎰), 경상병사 최경회(崔慶會) 등과 함께 남강(南江)에 투신하였다. 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는데, 그에게 시호를 내려주기를 청하는 이 행장은 죽음을 각오한 고종후가 광주 절양루에서 진주로 출발하기 직전의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공은 성이 고씨이고 휘가 종후이고 자가 도충이고 호가 준봉이다. 그 선대는 탐라의 성주에서 나왔는데 고려 때에 이르러 장흥을 관향으로 하사받았으며, 조선조에 들어와서 좌통례를 지낸 휘 자검이 처음으로 광주에 살았다. 배위인 이부인이 두 아들을 거느리고 안동의 친정에서 피난하고 있었다. 부인은 공이 장차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는 죽음을 무릅쓰고 달려와 겨우 황계(黃溪)의 농막에 이르렀는데 공은 이미 본주의 절양루 아래에서 군대를 정돈하고 있었다. 부인이 계집종을 시켜 말을 전달해서 서로 만나 작별할 것을 청하자 공은 말하기를 “내 이미 군영에 있으니 떠날 수가 없다”고 하였다. 부인이 또다시 계집종을 시켜 두 아들을 보내어 가서 작별하게 하니 큰 아들은 나이가 일곱 살이었고 작은 아들은 다섯 살이었다. 공은 각각 안아서 무릎 위에 올려놓고 등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나는 너희들이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살아 있었는가”하고는 속옷을 벗어 두 아들로 하여금 부인에게 전하게 하여 작별하니 좌우에 있던 자들이 모두 울고 차마 똑바로 보지 못하였다. 公姓高氏 諱從厚字道沖號隼峯 其先出耽羅星主 及麗朝賜籍長興 入本朝左通禮諱自儉 始居光州 配李夫人率二子避兵安東本家 聞公將起義討賊 冒死奔赴 僅達黃溪農舍 公已治兵于本州之折楊樓下矣 使侍婢傳言請與相訣 公曰我已在軍中不可去 夫人又使婢送二子往訣 長七歲季五歲 公各抱置膝上 撫其背曰吾以汝爲已死 今尙生耶 解裏衣使二子傳于夫人以爲訣 左右皆泣不能視-약천집(藥泉集) 권23남구만(南九萬1629-1711)의 자는 운로(雲路)이며 호는 약천(藥泉), 미재(美齋)이다.
    2018-07-12 | NO.442
  • 남원 부사로 부임하는 고용후를 전송하는 시의 서문 -어우집
    남원 부사로 부임하는 고용후를 전송하는 시의 서문〔送南原府使高用厚 詩序〕 -어우집 제3권 / 서(序) : 어우(於于) 유몽인(柳夢寅, 1559~1623)내가 듣건대, 호랑이의 새끼는 소를 잡아먹을 수 있고 천리마의 새끼는 어미를 추월한다고 한다. 양이 젖을 먹을 때 무릎을 꿇고 먹는 것은 공경할 줄 알아서이고, 새가 먹이를 물어다 어미 새를 먹이는 것은 봉양함을 알아서이다. 백로는 날마다 목욕을 하지 않아도 눈처럼 희고 까마귀는 날마다 검게 칠하지 않아도 옷 칠한 것처럼 검으니 그 족속이 원래 그러해서이다. 얼음이 물에서 생겨나지만 물보다 차갑고 청색이 쪽에서 생겨나지만 쪽보다 푸르러 생기게 해준 대상을 욕되게 하지는 않는다. 이 때문에 활을 잘 만드는 궁장(弓匠)의 아들은 키를 만들고 훌륭한 대장장이의 아들은 가죽옷을 만들며, 아비가 장작을 쪼개 놓으면 그 아들이 지고 가고아비가 집터를 닦으면 자식이 집을 완성시키는 법이니, 이와 반대로 하는 것은 천리(天理)를 거스르는 것이다.지금 용성 태수(龍城太守 용성은 남원(南原)의 옛 지명)는 제봉(霽峰) 선생의 아들이다. 선생은 충성을 바쳐 세상을 떠나고 태수는 효성으로 보답하였다.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는 도는 입신양명이 우선인데 일찌감치 급제하여 청요직에 올라 부친을 추증시켰으니 부모에 대한 보답이 이보다 더할 수 없다. 그런데 이제 예문관을 떠나 묵수(墨綬)를 차고 독서당을 떠나 동부(銅符)를 차니, 그 이유는 무엇인가? 예전 임진왜란 때 선생은 의병을 일으켜 적진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떠날 적에 태수는 열 살도 되지 않은 나이로 말고삐를 부여잡고 울부짖으며 기로에서 영영 이별하였다. 선생이 편지가 든 주머니 하나를 손수 그의 허리에 채우며 말하길,“나와 네 형들은 나라를 위해 마땅히 죽어야하지만 아이가 무얼 알겠는가. 돌아가 네 어미를 봉양하고 네가 장성하거든 나의 유고(遺稿)를 간행하여 세상에 전한다면 내가 죽더라도 영원할 것이다. 그러니 너는 힘쓸지어다.”하였다. 태수는 부친의 유언을 가슴에 새겨 그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근래 용성의 태수 자리가 비게 되었을 때 마침 내가 이조에 있을 때라 여러 번 나의 집에 방문하여 지성으로 그 자리를 구하였으니, 간행하는 자금이 많이 필요하여 집안에서 개인적으로 충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태수의 개인적인 감정이 비록 간절했지만 조정에서 지금 그를 매우 의지하고 믿고 있으니 이조를 주관하는 자는 공적인 일을 우선하고 사적인 일을 뒤로하는 것이 본디 마땅하다. 다만 생각건대, 나 또한 일찍이 문장에 종사하여 망녕되게도 오랫동안 전하려는 마음에 평생의 흩어진 원고를 수습하여 분량이 말만한 것이 50권이니, 만약 후세에 다시 양자운(揚子雲)이 있다면 죽더라도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명월(明月)의 구슬과 야광(夜光)의 보옥이 있어 그 크기는 손에 가득 차고 그 광채는 조승주(照乘珠)와 같거늘 없애버리고 내버려두어 똥 더미처럼 만들어 버린다면 이 두 가지 보물이 또한 욕되지 않겠는가. 종이를 잘라 돈처럼 만들고 꼴을 묶어서 개 모양으로 만들어, 헝겊으로 싸고 상자에 넣어 보관하여 사당에 올리고 향불을 쐬게 한다면 이 두 가지 물건이 또한 영화롭지 않겠는가. 지금 가죽신 만드는 장인이 신발을 만드는데 기술이 부족해도 푸른 가죽으로 덧대고 자주색 실로 끈을 만들며 그 신발 구멍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그 바닥은 분칠하여 시장에 판다면 오히려 열 배의 값어치를 바랄 수 있을 것이다.문(文)이란 어떤 물건인가? 성정(性情)에서 나온 것이다. 주공(周公)의 뜻과 공자(孔子)의 사상, 경전(經傳)의 말과 뜻은 백 대를 가로질러 천하를 뒤덮는다. 이 문장 짓는 재주를 연마하는 자들은 자신의 글이 허무하게 내버려지는 것을 안타까워할 것이다. 그러므로 문장을 지을 적에 간을 끄집어내고 신장을 쥐어짜서 오장을 불태우고 아침저녁으로 고생하며 축을 쌓고 편을 누적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홀연히 길이 이별하며 그 자손에게 맡겼으니, 자손된 자가 만약 훌륭하게 판각하여 책으로 간행하여 온 고을과 큰 도성에 전하고 중국에까지 유입시켜 천하 만세에 퍼지게 한다면 비록 죽었더라도 영원할 것이리라. 만약 이러한 이치를 모른 채 작은 비용을 아끼느라 마멸되도록 내버려두어 끝내 쥐가 파먹게 만든다면, 비록 형산(荊山)의 띠 풀로 술을 걸러 신령을 부르고 강남(江南)의 쌀로 밥을 지어 제수를 올리고 울창주(鬱鬯酒)를 떠서 땅에 부으며, 살찐 소의 다리 힘줄을 삶아 국그릇에 올리고 은색 비늘의 물고기를 잡아다 회를 쳐서 제기에 올리며, 팔일(八日)의 군무와 육영(六英)의 음악으로 제향을 하더라도 혼백이 지각이 있다면 어찌 돌아보려 돌아보겠는가.지금 태수를 보니 진정 선생의 아들이로다. 아비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절의를 수립하였고 자식은 다함이 없는 효행을 세워 이미 대대로 그 아름다운 덕을 이루는데, 다시 이조를 맡은 자로 하여금 그 경중을 가리고 그 거취를 살펴서 영원히 전해질 사업을 이루게 하였으니 어질구나, 태수여! 호랑이와 비교하면 울음소리가 모든 짐승을 떨게 할 것이니 어찌 다만 소를 먹을 것뿐이겠는가. 말과 비교하면 하루에 이 천 리를 달릴 것이니 어찌 다만 어미를 초월할 뿐이겠는가. 무릎을 꿇어 젖을 먹는 공경은 천성에 나왔고, 먹이를 물어다 어미를 먹이는 성심은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그 족속에 부끄럽지 않고 생기게 해준 대상을 욕되게 하지 않으며, 키와 가죽옷을 만드는 것을 폐기하지 않고 장작을 지고 집을 만드는 것을 그치지 않아 천리의 올바름에 순응하였다. 태수의 효성은 선생의 충성에 부합하는 바가 있도다! 만약 간행의 일이 끝나 뜻한 바가 이미 이루어졌는데도 또다시 태수로 하여금 백 리 되는 지역에 머물러 있게 한다면 이는 이조를 주관하는 자의 죄일 것이다. 태수여 힘쓸지어다! 태수가 마침 떠날 때 내가 병석에 있었던지라, 지금 뒤늦게 그 본말을 미루어 서술하고 이어서 그 시에 화운(和韻)한다.[주-D001] 남원 …… 서문 : 이 글은 1616년(선조38)에 남원 부사(南原府使)로 부임하는 고용후(高用厚, 1577~?)를 전송하며 쓴 시의 서문이다. 그러나 시는 부기되어 있지 않다. 고용후의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선행(善行), 호는 청사(晴沙)이다. 내직으로는 예조 좌랑ㆍ병조 좌랑ㆍ병조 정랑ㆍ판결사 등을 역임하였고 외직으로는 남원 부사ㆍ고성 군수 등을 역임하였다.[주-D002] 백로는 …… 검으니 : 《장자》 〈천운(天運)〉에, “무릇 백로는 날마다 목욕하지 않아도 희고, 까마귀는 날마다 검게 칠하지 않아도 검다.[夫鵠不日浴而白, 烏不日黔而黑,]”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주-D003] 얼음이 …… 푸르러 : 《순자(荀子)》 〈권학(勸學)〉에 나오는 말이다.[주-D004] 활을 …… 만들며 : 《예기》 〈학기(學記)〉에, “훌륭한 대장장이의 아들은 아비의 일을 본받아 응용해서 가죽옷 만드는 것을 익히게 마련이고, 활을 잘 만드는 궁장(弓匠)의 아들은 아비의 일을 본받아 응용해서 키 만드는 것을 익히게 마련이다.”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주-D005] 아비가 …… 가고 : 《춘추좌씨전》 소공(昭公) 7년 조에, “그 아비가 장작을 쪼개 놓았는데, 그 아들이 능히 짐지지 못한다.[其父析薪, 其子弗克負荷.]”라고 한 말을 변개하여 사용한 것이다.[주-D006] 아비가 …… 완성시키는 : 《서경》 〈대고(大誥)〉에, “아비가 집을 지으려 하여 이미 설계까지 끝냈다 하더라도, 그 자식이 집터도 닦으려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집이 완성되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若考作室, 旣底法, 厥子乃不肯堂, 矧肯構?]”라고 한 말을 변개하여 사용한 것이다.[주-D007] 제봉(霽峰) : 고경명(高敬命, 1533~1592)으로,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이순(而順), 호는 제봉ㆍ태헌(苔軒),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光州)의 의병 6천여 명을 이끌고 금산(錦山)에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때 두 아들 인후(因厚)와 종후(從厚)도 참전하여 인후는 함께 죽고 종후는 부친의 시신을 수습해 돌아왔다가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그 후 종후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남강에 투신하여 순절하였다.[주-D008] 묵수(墨綬)를 차고 : 묵수는 동인(銅印)에 매달아 놓은 끈인데, 지방의 수령으로 나가는 것을 가리킨다.[주-D009] 동부(銅符)를 차니 : 동부는 지방 수령이 차는 관인(官印)을 가리킨다.[주-D010] 후세에 다시 양자운(揚子雲) : 그 저술에 대해 올바르게 평가해 줄 안목을 갖춘 후세 사람을 뜻한다. 자운은 한나라 때의 유학자인 양웅(揚雄)을 가리키는데, 그가 《태현경(太玄經)》을 지었을 때 사람들이 모두 그것을 비웃자 이르기를, “세상이 나를 믿어주지 않아도 상관없다. 후세에 다시 양자운이 있다면 반드시 이 책을 좋아할 것이다.” 하였다. 《五百家注昌黎文集 卷17 與馮宿論文書》[주-D011] 조승주(照乘珠) : 광채가 멀리 비쳐 수레 여러 채의 앞을 볼 수 있게 하는 구슬을 가리킨다. 《사기》 〈전경중완세가(田敬仲完世家)〉에, “위왕(魏王) 이 제왕(齊王)과 들에서 만나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과인(寡人)의 나라는 소국이지만 그래도 열두 채의 수레 앞뒤를 비치는 경촌(經寸)의 구슬이 열 개 있다.”라고 하였다.[주-D012] 형산(荊山)의 …… 걸러 : 축주(縮酒)는 제사에 올리는 술을 띠 풀에 거르는 의식을 가리킨다. 유종원(柳宗元)의 〈여최연주론석종유서(與崔連州論石鐘乳書)〉에 “형산의 띠 풀은 모두 축주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주-D013] 육영(六英) : 전설상의 제곡(帝嚳) 고신씨(高辛氏)의 음악을 가리킨다.[주-D014] 다함이 없는 효행 : 지극한 효성을 뜻한다. 《시경》 〈기취(旣醉)〉에, “효자의 효성이 다함이 없으니, 영원히 그대에게 복을 내리리라.[孝子不匱, 永錫爾類.]”라는 말에서 나온 말이다.[주-D015] 대대로 …… 이루는데 : 후손이 선조의 아름다운 덕업을 계승하는 것을 뜻한다. 《춘추좌씨전》 문공(文公) 18년 조에, “대대로 그 미덕을 이루어서, 그 명성을 떨어뜨리지 않았다.[世濟其美ㅡ 不隕其名.]”라고 하였다.
    2020-12-28 | NO.441
  • 남원(南原) 정충사(貞忠祠)의 비문 - 청음집 제29권
    남원(南原) 정충사(貞忠祠)의 비문 - 청음집 제29권 : 청음 김상헌(金尙憲, 1570~1652)만력(萬曆) 계사년(1593, 선조26)에 왕사(王師)가 왜병들을 바닷가에서 크게 무찔러 왜적들의 수괴인 풍신수길(豊臣秀吉)이 깊이 원망하였다. 그해 6월에 자신의 장수인 가등청정(加藤淸正)으로 하여금 정예병을 모두 거느리고 진주성(晉州城)을 공격하여 평양성(平壤城)에서의 패전을 갚게 하였는데, 일본 전국의 힘을 이 한 성에 응집시켜서 그 형세가 참으로 바윗덩이로 계란을 억누르는 것과 같았다. 우리 군사들은 하루에 두세 번을 적과 싸우면서 혼자 열 명을 당해 내지 않는 군사가 없어 사기가 백 배는 치솟았다. 그러나 하늘이 순조롭게 도와주지 않아 큰비가 쏟아져 내려 성이 무너진 탓에 열흘 만에 성이 함락되었다. 이에 성 안에 있던 장사는 모두 죽었는데, 그중에 한 분이 바로 충청 절도사(忠淸節度使) 황공(黃公)이었다.공은 휘가 진(進)이고, 장계현인(長溪縣人)으로, 고(故) 상신(相臣)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의 5세손이다. 아버지는 좌의정에 증직된 황윤공(黃允恭)이며, 어머니는 남양 방씨(南陽方氏)인데, 가정(嘉靖) 경술년(1550, 명종5)에 공을 낳았다.공은 체구가 크고 수염이 아름다웠으며 용력(勇力)이 남보다 훨씬 뛰어났다. 성품은 강직하고 굳세었으며 큰 뜻을 지니고 있었다. 27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다. 상제를 마치고 거산도 찰방(居山道察訪)에 제수되었다.계미년(1583, 선조16)에 죄를 물을 때 반호(叛胡)를 활로 쏘면서 먼저 성에 올라가 공을 세웠다. 안원 권관(安原權管)에 제수되었는데, 자신이 노획한 오랑캐의 수급을 나누어 주어 공을 세워 죄를 씻어야 하는 친구의 죄를 벗겨 주자 사람들이 의롭다고 하였다. 이후 다시 선전관에 임명되었다.얼마 있다가 통신상사(通信上使) 황윤길(黃允吉)을 따라 일본에 갔는데, 함께 간 일행이 앞 다투어 물품을 사 가지고 와 이문을 얻으려고 하였으나, 공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보검(寶劍) 두 자루만 구입하였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기며 그 까닭을 물으니, “내년에 왜적이 반드시 맹약을 깰 것이다. 나는 그때 이 칼을 써서 섬멸할 것이다.” 하자 공에 대해 잘 모르는 자들은 도리어 큰소리를 치는 것으로 의심하였는데, 훗날에는 과연 공의 뜻을 보게 되었다.조정에 돌아오자 상께서 왜적의 사정을 물었는데, 상사인 황윤길은 왜적이 반드시 침입해 올 것이라고 하였고, 부사인 김성일(金誠一)은 왜적이 반드시 침입해 오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때 공은 상소를 올려 김성일을 참수하고 수군(水軍)을 양성해 왜적을 방어할 계책을 진달하려고 하였으나 시의(時議)에 의해 저지되었다. 이후 제용감 주부(濟用監主簿)와 동복 현감(同福縣監)에 제수되었는데, 날마다 전술을 익히면서 대비하느라 편히 쉬는 날이 없었다.다음 해에 과연 왜적이 대군을 이끌고 침략해 오자 어가가 서쪽으로 파천하였다. 전라 감사 이광(李洸) 등은 용인(龍仁)에서 왜적에게 궤멸되었으나, 공만은 홀로 군사를 온전하게 데리고 돌아와 웅치(熊峙)에서 왜적과 싸웠으며 또 이현(梨峴)에서 싸웠는데, 모두 적을 크게 무찔러서 호남이 이에 힘입어 온전하게 보존되었다. 군사를 거느리고 전주(全州)를 지나갈 때 전주 사람들이 은덕에 감격하면서 호장(壺漿)을 싸들고 와 길을 메웠다. 그러나 막부(幕府)에서 공의 공(功)을 엄폐하여 상이 훈련 부정(訓鍊副正)에 그쳤다.체찰사가 승제(承制)로 익산(益山)의 임시 군수(郡守)로 삼았는데, 곧바로 정식으로 익산 군수가 되게 하였다. 전라 병사(全羅兵使) 선거이(宣居怡)가 수원(水原)으로 진격하였을 때 공은 척후(斥候)로 나갔다가 적에게 포위되었는데, 적중에 좋은 말을 탄 자가 있는 것을 보고는 그 말을 빼앗아 타고 적의 포위망을 뚫고 돌아왔다. 이 일이 보고되어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승진되어 충청 조방장(忠淸助防將)에 제수되었다.계사년(1593, 선조26)에 전라 병사로 승진하였다. 이때 경성(京城)에 있던 왜적이 후퇴하는 것을 상주(尙州) 적암(赤巖)까지 추격하여 격퇴시켰다. 다시 함안(咸安)까지 추격하였다가 진주(晉州)로 진영(陣營)을 옮겼는데,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 최경회(崔慶會), 김해 부사(金海府使) 이종인(李宗仁), 복수장(復讐將) 고종후(高從厚) 등이 차례로 와서 모였다. 이때 이미 왜적이 쳐들어올 것이라는 소문이 돌더니, 며칠도 채 지나기 전에 왜적이 갑작스럽게 쳐들어왔는데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았다. 공은 기운이 더욱 굳세어져 여러 왜적들을 집어삼키려고 하였다. 이에 밤낮없이 성가퀴의 사이에 나가 있으면서 조금도 긴장을 풀지 않고 있었다. 왜적이 비가 오는 틈을 타서 성의 허술한 곳으로 넘어오려고 하자, 공은 스스로 흙과 돌을 날라 그곳을 메우니 병사들이 감격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앞 다투어 성을 보수하였다. 또 분발하여 떨쳐 일어나 셀 수 없이 많은 적을 죽였는데, 성 부근의 초목이 붉게 물들 정도였다.왜적이 사방에서 일제히 쳐들어오면서 무기를 몹시 많이 가지고 공격해 왔는데, 공이 번번이 계책을 써서 부숴 버렸다. 또 화살로 왜적의 장수를 쏘아 죽이니, 적장이 스스로 물러갔다. 그때 마침 왜적 한 놈이 성의 해자(垓子) 가에 숨어 있다가 몰래 총을 쏘아 공의 좌측 이마를 맞추었으므로 드디어 공을 구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에 모든 군사가 부모를 잃은 듯이 슬퍼하여 통곡 소리가 천둥이 울리는 것과 같았다.이종인(李宗仁)도 역시 온 힘을 다해 혈전을 치르다가 적병을 양쪽 옆에 끼고는 강물에 투신하여 죽었다. 김천일(金千鎰)ㆍ최경회(崔慶會)ㆍ고종후(高從厚) 등도 모두 촉석루(矗石樓) 아래로 투신하여 죽었는데, 이때 죽은 자가 1만여 명이나 되었다. 드디어 왜적이 성을 함락시키고 떠났다.당초에 공이 “우리들 모두가 한 성에 들어가 있다가 외부에서 원군이 이르지 않을 경우에는 일이 위급하게 될 것이다. 나는 성 밖으로 나가 진을 치고 있다가 안팎에서 서로 호응하려고 한다. 그렇게 하면 왜적을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김천일이 그렇게 하는 것을 곤란하게 여겨 성 밖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의병장 곽재우(郭再祐)도 공을 만나서 말하기를, “진주는 공이 관할해야 할 곳도 아니고 조정의 명령도 없는데 하필 성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십니까?” 하니, 공이 말하기를, “이미 창의사와 약속을 하여 저버릴 수가 없습니다.” 하자, 곽재우도 이미 공이 뜻을 정한 것을 알고는 술잔을 나누며 서로 영결하였다. 진주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곽재우가 말하기를, “다른 장수들은 쉽게 얻을 수 있으나, 황 절도사만은 그에 비길 만한 장수를 얻기가 어렵다.” 하면서 애통해 마지않았다.또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 추증된 고득뢰(高得賚) 역시 창의사 김천일을 따라 싸우다가 같은 곳에서 죽었으며, 첨정(僉正)에 추증된 안영(安瑛)도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을 따라 싸우다가 금산(錦山)에서 죽었다. 이들은 모두 종시토록 전장을 떠나지 않으면서 죽는 것을 편안하게 받아들였다. 이에 한꺼번에 남원(南原)에서 세 절의사(節義士)가 나오게 되었다. 그들이 성취한 것은 비록 크고 작은 차이가 있었으나, 떳떳한 천성이 열렬하여 뺏을 수 없는 것은 피차간에 차이가 없었다. 그러므로 향리 사람들이 이들을 함께 제사 지내면서 그 사당을 정충사(貞忠祠)라고 하였다.공에게는 정직(廷稷)과 정열(廷說) 두 아들이 있는데, 모두 무과에 급제했다. 손자 위(暐)는 사간원 정언으로 있다. 기축년(1649, 인조27) 봄에 이르러 남원의 향대부(鄕大夫)인 최온(崔蘊) 등 50여 인이 함께 천여 리나 떨어진 양주(楊州)까지 사람을 보내어 나에게 비석에 새길 글을 써 주길 부탁하였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공은 충신과 절의에 관한 일에 대해 말하여 후세에 전하기를 좋아한다고 들었습니다. 이제 이 삼현(三賢)의 자취를 기록하여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내가 감히 늙었다는 이유로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서문을 지은 다음 명(銘)을 지었다. 명은 다음과 같다.지난 옛날 백제 있던 이 한 구역에 / 百濟一區꿋꿋하고 굳센 장부 무리 있었네 / 毅夫之徒계백 장군 뒤에 있어 일으키었고 / 階伯後起성충 장군 앞에 있어 내몰았다네 / 成忠前驅열렬하고 열렬했던 우리 황공은 / 烈烈黃公바로 이곳 남원에서 태어났다네 / 挺生玆鄕삼한 땅의 뛰어났던 장수였으며 / 三韓之良일만 군사 막을 만한 무위 있었네 / 萬夫之防세차 마침 용사의 해 되던 그해에 / 歲丁龍蛇섬 오랑캐 제멋대로 날뛰었다네 / 逆虜跳梁공은 그때 절도사의 부절 잡고서 / 公時杖節호남 지역 전담하여 절제하였네 / 專制湖廂천리 먼 길 외론 군사 거느리고서 / 千里孤軍멀리 있는 진양 향해 달려갔다네 / 遠赴晉陽보는 자들 한심하게 여기었으나 / 見者寒心공은 홀로 떨치어서 일어났다네 / 公自奮揚장군께서 군사에게 내린 그 호령 / 將軍號令부월처럼 엄정하고 엄정하였네 / 鈇鉞其嚴의사께서 한 번 뱉은 승낙의 말은 / 義士一諾중하기가 천금보다 더 중하였네 / 重於千金적들 오는 모습 보면 고슴도치고 / 賊來如蝟공의 용맹 보면 마치 범과 같았네 / 公勇如虎큰소리로 군사들을 질타를 하매 / 音烏叱咤호령 소리 우레처럼 울리었다네 / 雷霆吼怒하늘에서 순조롭게 아니 도와서 / 天不助順요사스러운 별 보루에 떨어졌다네 / 妖星隕壘공의 혼은 상제 뜰에 올라갔으나 / 公神帝庭또한 역시 옛 향리로 돌아왔다네 / 亦返故里왕께서는 공의 그 공 생각하여서 / 王念乃功백성들을 시켜 사당 짓게 하였네 / 俾民以興날짜 가려 뽑고 제수 마련한 다음 / 卜日潔牲신주 깎아 모시고서 제사 올렸네 / 治主以升누가 감히 공경하지 아니하겠나 / 孰敢不敬더군다나 가래나무 숲 있는 데랴 / 況也梓林고득뢰와 안영 두 분 계시었거니 / 曰高曰安아름다움 나란하여 셋이 되었네 / 竝美成三용머리에 솟아 있는 정자가 있어 / 龍頭之亭그 절벽에 사적 지어 새길 수 있네 / 石崖可鐫공의 공적 기록하여 후대에 전해 / 紀蹟傳芳전 시대의 어진 이와 짝하게 하네 / 用配前賢[주-D001] 정충사(貞忠祠) : 남원(南原)에 있는 사당으로 뒤에 정충사(旌忠祠)로 사액(賜額)되었다. 임진왜란 때 순절(殉節)한 황진(黃進)ㆍ고득뢰(高得賚)ㆍ안영(安瑛)을 모신 사당이다.[주-D002] 계미년에……때 : 1583년(선조16)에 니탕개(泥湯介)를 중심으로 한 회령(會寧) 지방의 여진족이 일으킨 반란을 말한다. 니탕개는 선조 초에 우리나라로 귀화한 여진인으로, 육진(六鎭) 지역에 출입하며 조정으로부터 후대를 받아 온 자였다. 이때에 이르러서 경원(慶源)에 사는 여진인들이 민심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경원 부사 김수(金璲)가 이들에게 패해서 여진인들이 부내의 모든 진보(鎭堡)를 점령하여 기세를 떨쳤다. 그 뒤에 온성 부사(穩城府使) 신립(申砬)과 첨사 신상절(申尙節) 등이 힘껏 싸워 강을 건너서 여진족의 소굴을 소탕하매 난이 평정되었다. 《國朝寶鑑 卷28》[주-D003] 승제(承制) : 임금의 명을 받아 외방에 나가 있으면서 편의에 따라 그때그때 임시로 일을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주-D004] 고득뢰(高得賚) : 본관은 용담(龍潭)이고, 자는 은보(殷甫)이다. 어려서부터 무예가 출중하고 경서와 글씨에 뛰어났다.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고향인 남원(南原)에 있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최경회(崔慶會) 휘하의 부장이 되어 금산(錦山) 등지에서 왜병과 맞서 싸웠으며, 진주성(晉州城)이 위급해지자 최경회와 함께 성에 들어가 다른 의병과 협력하여 성을 지키다가 순국하였다.[주-D005] 안영(安瑛) : 본관은 순흥(順興)이고, 자는 원서(元瑞)이다. 임진왜란 때 서울이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광주(光州)에 있던 고경명(高敬命)의 휘하에 들어갔다가 금산의 싸움에서 고경명과 함께 순국하였다.
    2020-09-26 | NO.440
  • 남평 드들강의 유래
    광주광역시 서구 유덕동 덕흥마을에서 전해 내려오는 남평 드들강에 관한 이야기. 전라도 나주 남평의 드들강의 지명에 관한 전설이다. 전라남도 화순군 동면에서 도곡을 지나 나주 남평을 거쳐 영산강과 합쳐지는 지류를 지석강 혹은 남평천이라고 하는데, 흔히 드들강이라고 한다. ‘드들’이라는 처녀가 큰 메기에게 잡아먹힌 이야기와 남평천의 홍수를 막기 위해 ‘드들’이란 처녀를 제물로 바친 이후 ‘드들강’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이다. 2000년 9월 19일 광주광역시 서구 유덕동 덕흥마을에 거주하는 이경수의 이야기를 채록하였으며, 2000년에 광주민속박물관에서 간행한 『광주의 설화』에 수록하였다.옛날에 '드들'이라는 처녀가 있었다. 드들이가 강가에서 빨래를 하는데, 갑자기 큰 메기가 나타나 드들이를 삼켜 버렸다. 드들이가 집에 돌아오지 않자 가족들과 마을 사람들이 드들이를 찾아나섰다. 드들이를 찾던 중, 배가 불룩한 큰 메기를 발견하였다. 메기를 잡아 배를 갈라 보니 죽은 드들이가 있었다. 이때부터 드들이가 빠져 죽은 강이라고 하여 드들강이라 부른다. 드들강의 메기는 드들 처녀의 기운이 남아 있어 약이 된다는 말이 있다. 또 다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남평천은 예부터 홍수가 잦았다. 마을 사람들은 남평천 강의 신이 심술을 부리는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강의 신을 달래기 위해 마을의 처녀를 제물로 바치자고 하였다. 가난한 집안의 처녀인 드들이는 제물로 바쳐지면 쌀 백 석을 준다는 소리에 자신을 희생하기로 하였다. 이 소식을 알게 된 부모의 반대로 드들이는 포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드들이는 가난한 가족들을 위해 제물로 희생하기로 다시 결심하였다. 마을 사람들도 하는 수 없이 드들이의 투신을 추진하였다. 그날 아침 드들이는 부모 몰래 집을 나와 마을 사람들에게 자신의 가족을 잘 부탁한다며 강으로 뛰어들었다. 드들이가 강에 투신한 이후로 홍수가 나지 않아 마을은 평온해졌다. 이후 큰 물이 지면 드들강의 물소리가 ‘드들드들’ 하는 소리를 내며 흘러간다고 한다.「남평 드들강의 유래」의 주요 모티프는 ‘인신공희(人身供犧)’이다. 인신공희는 초자연적인 존재에게 인간이 숭배와 복종의 의미로 산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행위이다. 이러한 설화의 모티프는 집단의 안위를 보장받기 위해 산 사람을 제물로 바친다는 점에서 집단의 이기심을 보여 준다. 인신공희의 모티프를 가진 설화는 많지만, 지명과 관련된 설화로는 「공갈못전설」이 있다. 「공갈못전설」은 공갈못을 완성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공갈이라는 아이를 제물로 바쳐 완성하였다는 이야기이다. 「남평 드들강의 유래」처럼 산 사람을 제물로 바치고 그 사람의 이름을 딴 지명이 유래했다는 공통적인 구조를 보여 주고 있다. [참고문헌] 『광주의 설화』(광주민속박물관, 2000) 『한국민속문학사전』(국립민속박물관, 2017)[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7 | NO.439
  • 남효온- 登拱北亭
    甄萱謀伯業 후백제 견훤이 패업을 도모할 때此地實經營 바로 이 땅에서 실로 경영했었지 躍馬鳴雄劍 말을 힘차게 몰 땐 웅검이 울더니 亡家餘古城 나라 망한 뒤엔 옛 성만 남았네 歲隨流水去 그 세월은 강물 따라 흘러갔으나 春入柳眉靑 봄빛은 버들잎에 깃들어 푸르구나 覓句要奇絶 시구를 찾으며 절묘하게 지으려고 强登拱北亭 공북루 정자에 억지로 올라보노라-추강집(秋江集) 권2남효온(南孝溫, 1454-1492)의 자는 백공(伯恭)이며 호는 추강거사(秋江居士), 행우(杏雨)이다.
    2018-07-17 | NO.438
  • 남효온-光山途中 趙上將見知挽詞(忠世之妻父)
    有耳忍聞埋璧嘆 羈魂應去拜慈堂 一方春色光陰速 千里南州道路長 翦紙挽詞竹林下 呼童設奠梅花傍 相離浹歲今相遇 生死殊途最可傷-추강선생문집(秋江先生文集)남효온(南孝溫, 1454~1492)의 자는 백공(伯恭)이며 호는 추강(秋江), 행우(杏雨), 최락당(最樂堂), 벽사(碧沙) 등이다.
    2018-07-10 | NO.437
  • 내암집 제12권 / 행장(行狀)- 하진보(河晉寶, 1530~1585)
    내암집 제12권 / 행장(行狀)사간(司諫) 하공(河公) 행록〔司諫 河公 行錄〕 남을 대신하여 지었다.먼 조상 하공신(河拱辰)은 고려에 벼슬하여 좌사낭중(左司郞中)을 지냈으며 거란(契丹)에 사신으로 가서 굽히지 않고 죽어 문하시랑 동평장사(門下侍郞同平章事)에 추증되었다. 고조부 휘 기룡(起龍)은 통덕랑(通德郞)으로 통례문 통찬(通禮門通贊)을 지냈다. 증조부 휘 유(鮪)는 창신교위로 충무위 부사과(彰信校尉行忠武衛副司果)를 지냈다. 조부 휘 우치(禹治)는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안주 목사(安州牧使)를 지냈다. 부친 휘 숙(淑)은 승사랑(承仕郞)이었다. 모친은 함종 어씨(咸從魚氏)로 가선대부(嘉善大夫)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을 지낸 득강(得江)의 딸이다.공은 가정(嘉靖) 경인년(1530, 중종25) 6월 4일에 태어났다. 태어나면서부터 영특하였고 기골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으며 남달리 총명했다. 책을 읽을 때는 채 세 번을 읽기도 전에 문득 외고 잊어버리지 않았다. 임자년(1552, 명종7)에 부친상을 당했다. 을묘년(1555, 명종10)에 문과에 급제하여 처음에는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가 되었다가, 천거를 받아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 봉교(奉敎), 대교(待敎)가 되었으며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가 되고 시강원 설서(侍講院設書), 사서(司書)가 되었다.계해년(1563, 명종18)에 병조 좌랑으로 있으면서 동지사 서장관으로 연경에 갔는데, 공은 중국어에 능통하여 역관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에 중국인들이 그를 칭찬하였다. 사신 갔다 돌아와서 사헌부와 사간원을 두루 거쳤으니 곧 정언, 지평, 헌납, 장령 등이었다. 각 조를 두루 거쳤으니 곧 병조, 예조, 형조의 좌랑과 정랑이었다. 성균관에 제수된 것이 세 번이었으니 사성, 사예, 전적 등이다. 재상어사(災傷御史)로 차출된 것이 네 번이었으니 관동, 호서, 호남 등이었다. 이러한 관직을 거친 것은 모두 계해년(1563, 명종18) 이후지만 날짜의 앞뒤는 살펴볼 수가 없다.정묘년(1567, 선조 즉위년) 가을에 선산 부사(善山府使)에 제수되었다가 경오년(1570, 선조3)에 파직되었고, 임신년(1572, 선조5)에 안주 목사(安州牧使)에 제수되었다가 중도에 병으로 사직하였다. 계유년(1573, 선조6)에 조정에 들어가 종부시 정(宗簿寺正), 사복시 정(司僕寺正)이 되었으며, 이윽고 장령이 되었다가 체차되어 사예가 되었고 다시 외직으로 나가 성주 목사가 되었다. 을해년(1575, 선조8) 가을에 재상(災傷)으로 인해 파직되어 돌아왔다. 병자년(1576, 선조9) 겨울에 상의원 정(尙衣院正)에 제수되었고 정축년(1577, 선조10)에 예빈시 정(禮賓寺正)이 되었다가, 추국경차관(推鞠敬差官)으로 충청도 음부옥사를 처리하였다. 조정으로 들어와 사예가 되었다가 우통례로 옮겼는데 병으로 체직되었다가 가을에 김해 부사에 제수되었다.무인년(1578, 선조11) 겨울에 사간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중도에 병으로 사직하였다. 기묘년(1579, 선조12) 겨울에 밀양 부사에 제수되었다가, 임오년(1582, 선조15) 여름에 남천(南川)의 배가 파선하는 바람에 체직되었는데, 밀양의 선비와 백성들이 길을 막고 성을 에워쌌다. 성문을 밖에서 봉쇄한 지 한 달이 넘자, 그 소식을 듣고 조정에서 그대로 두었다. 계미년(1583, 선조16)에 어떤 일로 파직당해 돌아왔다. 내직과 외직에 제수된 것이 모두 겸춘추(兼春秋)였다. 만년에 또 홍문관에 천거되어 을유년(1585, 선조18)에 좌통례에 제수되었으나 임금의 명이 이르기 전에 졸하였으니 10월 15일이었다. 향연 56세였다. 다음해 2월 7일에 오곡(烏谷)의 달호음산(達好音山) 선영 옆 감좌(坎坐) 언덕에 장례를 지냈다.공은 덕성이 너그럽고 중후하였으며 풍채가 빼어났다. 평소에 다급한 말과 서두르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우애는 타고나서 아무도 이간하는 말이 없었다. 훌륭함을 밖으로 드러내 보이지 않았으나 시비를 가리는 일에는 마음속으로 엄격했다. 다른 사람들의 선행을 칭찬하는 것은 좋아하였으나 불선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않았다. 그가 대관(臺官)으로 있을 때 윤원형(尹元衡)을 탄핵하자 남명 선생이 서신을 보내 치하하였다. 또 부사 하정(河珽)의 원한을 논하여 풀어주었는데, 하정은 기묘사화 때에 김식(金湜)을 숨겨주었던 사건으로 인해 죽음을 당하여 오래도록 신원되지 못한 사람이었다.벼슬에 있을 때는 청렴으로 스스로를 지키고 폐정을 힘써 없앴다. 은혜와 사랑으로 백성을 어루만지니 백성들이 그 덕을 마음에 간직하였고, 엄격하고 분명하게 관리들을 부리니 벼슬아치들이 감히 속이지 못했다. 장부와 문서가 구름처럼 쌓여도 물 흐르듯 처리하였고, 송사를 결단할 때는 반드시 공정한 도리를 따랐으며 작지(作紙)에는 곤장을 치는 일이 없었다. 학교에 더욱 마음을 쏟아 권면하고 인도하는 데 힘썼으며, 양로연을 베풀 때는 반드시 직접 술잔을 잡고 술을 따랐다. 봄가을 석전(釋奠)과 사직단, 성황당 등에 제사지낼 때는 반드시 목욕재계하고 직접 행했다.의복에 쓸 옷감이나 면포를 준비할 때는 반드시 하인에게 명하여 집안의 곡식과 바꿔오도록 하였고 벼슬아치들에게 처리하라고 맡긴 적이 없었다. 자신을 돌보는 일에는 매우 박하였으나 친족이 궁핍한 경우에는 온힘을 다해 도와주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사람들이 그가 일족에게 후하게 대한다고 칭송하였다.성주 창고의 곡식이 거의 삼십만 석이었는데, 계속 썩어서 명목으로는 남아 있으나 실제로는 남은 것이 없었기에 백성들이 그 폐단을 견디지 못했다. 그래서 공이 곧 창고의 곡식을 풀어 헤쳐서 둘로 나눈 다음, 반은 그대로 쓰고 나머지는 모곡(耗穀)으로 원래 숫자를 채웠다. 백성들은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그가 떠난 후에도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비석을 세우기로 하였다가 배덕문(裵德文)의 저지를 당했는데, 배덕문은 토호(土豪)로서 일찍이 공의 제제를 받았던 사람이다.김해부에는 포흠(逋欠)이 많았기 때문에, 오래 누적되고 징수하기 어려운 것을 골라서 그 문서를 모두 태워버린 다음 소비를 줄여서 그 숫자를 채웠다. 그래서 거사비(去思碑)가 있다.밀양(密陽)에 부임했을 때는 민간에 귀신을 숭상하는 풍습이 있었다. 밀양부 안에 귀신을 모시는 사당이 있었는데 사대부 집안 여자들이 다투어 몰려들어서, 원하는 것이 있을 때마다 기도를 올리곤 했다. 공이 신상을 끌어내어 강에 빠트리라고 명을 내리니, 이로 말미암아 요사스런 귀신이 마침내 제거되고 오랜 악습이 모두 혁파되었다.또 소송을 좋아하는 습성이 생겨서 부인들이 송정(訟庭)에 자주 들어왔다. 그럴 때마다 염치를 가르쳐서 깨우쳐주니 부끄러움을 알고 마음을 바로 잡을 수 있게 되어 일 년이 채 못 되어 이런 폐단이 없어졌다. 사직단과 성황당의 위판은 관청에 줄을 세워두었는데 너무 더러워졌기에 공이 단 옆에 집을 지어서 보관하였다. 또 바깥에 재실을 지어서 제사지내는 장소로 삼았는데, 그가 떠나자 역시 비석을 세우고 그 덕을 칭송하였다.공은 벼슬길에 있을 적에, 도를 굽혀 진급하려 하지 않았고 구차하게 현달을 바라지도 않았다. 공의가 그를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아 자급을 올려주려고 동부승지와 동래부사에 천거하였지만 모두 낙점을 받지 못했다. 지위가 덕에 걸맞지 않아 끝내 당하관에 머물렀으니 운명이었다. 공이 벼슬을 그만두고 집에 있을 때는 날마다 형제들과 어울리면서 한 집안을 화목하게 했다. 술이 있으면 서로 자기가 거르겠다고 하면서 화락한 모습으로 즐거워했다. 간혹 한밤중이 되어서야 끝나기도 했으며 비바람이 몰아쳐도 하루도 거른 적이 없었으니 그 우애의 돈독함에 사람들이 모두 탄복했다.수우당 최영경 선생과 가장 밀접하게 교유하였으며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 공의 병이 위중해지자 선생이 달려와서 병문안을 하고 약을 썼으며, 돌아가시자 직접 염을 하고 안치하였는데 애도와 예의를 빠짐없이 갖추었다. 본가에 관으로 쓸 판목이 없어서 선생이 관과 곽으로 쓸 재목을 부의로 내었고 장례를 지낼 때 또 산소에 머무르면서 장사를 지냈으니, 평소에 서로 어울렸던 마음을 알 수 있다.성주와 밀양 두 고을의 향교, 서원, 향소에서 각각 교생, 원생, 품관 등을 보내 글을 지어 조문하고 제사를 올렸을 뿐만 아니라 또 부의까지 드렸으니 오래 될수록 잊지 못하는 뜻 역시 상상할 수 있다.공의 첫째 부인은 이공도(李公度)의 따님 전의 이씨로, 진사 이정윤(李貞胤)의 손녀였다. 자녀를 낳았는데 모두 요절하였다. 둘째 부인은 본관이 진주인 선전관 정수익(鄭受益)의 딸이자 수사(水使)를 지낸 정은부(鄭殷富)의 손녀였는데, 딸을 하나 낳았는데 그 남편은 정연(鄭沇)이다. 셋째 부인은 영산 신씨(靈山辛氏) 신여근(辛汝謹)의 딸이자 광주 목사(光州牧使) 신륜(辛崙)의 손녀인데 딸 하나를 낳고 요절하였다. 부실이 아들과 딸을 낳았는데 딸은 요절하였고, 아들 신동인(辛同寅)은 정유재란 때 포로가 되었다.[주-D001] 하공(河公) : 하진보(河晉寶, 1530~1585)로, 본관은 진양, 자는 선재(善哉), 호는 영모정(永慕亭)이다.[주-D002] 재상(災傷) : 수재ㆍ한재, 또는 풍해ㆍ병충해로 인해서 발생한 곡식의 피해를 말한다.[주-D003] 남천(南川) : 현 경상남도 밀양시의 밀양강이다.[주-D004] 겸춘추(兼春秋) : 각 고을의 문관 수령(文官守令)이 춘추관(春秋館)의 수찬관(修撰官) 이하 관직을 겸임(兼任)한 경우에 일컫는 말이다.[주-D005] 달호음산(達好音山) : 현 경상남도 진주시에 있는 월아산(月牙山)이다.[주-D006] 윤원형(尹元衡) : ?~1565.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언평(彦平)이다.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동생이다. 1533년(중종28) 문과에 급제하여 사관(史官)이 되었다. 소윤(小尹)의 우두머리로 1545년(인종1) 을사사화를 일으켜 대윤(大尹) 등 반대파를 숙청하고 집권했다.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죽고 명종이 왕위에 오르자,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배경으로 대윤 일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개시하고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집권 20년 만인 1565년 문정왕후가 죽자 양사(兩司)의 탄핵을 받아 관작을 박탈당하고 전리(田里)에 방귀(放歸)되었다. 강음(江陰)에 은거하다가 죽었다.[주-D007] 김식(金湜) : 1482~1520.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노천(老泉), 호는 동천(東泉)ㆍ정우당(淨友堂)이다. 1519년(중종14) 현량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성에 이르렀다. 기묘사화로 선산에 유배되었는데 거창으로 피했다가 자결했다. 시호는 문의(文毅)이다. 저술로 《사서집》이 있다.[주-D008] 작지(作紙) : 조세를 거두어 창고에 넣는 과정에서 그 장부를 꾸밀 때 쓰는 종이, 또는 명부를 만드는 일을 말한다.[주-D009] 모곡(耗穀) : 환자(還子) 곡식을 받을 때, 곡식을 쌓아둘 동안 축이 날 것을 미리 짐작하고 한 섬에 몇 되씩을 덧붙여 받던 곡식을 말한다.[주-D010] 배덕문(裵德文) : 1525~1603.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숙회(叔晦), 호는 서암(書巖)이다. 임진왜란 때 창의하였다. 저술로 《서암선생실기》가 있다.[주-D011] 포흠(逋欠) : 관물(官物)을 사사로이 소비하는 것을 말한다.[주-D012] 술이 …… 거르겠다고 : 《시경》 〈소아(小雅) 벌목(伐木)〉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주-D013] 화락한 모습으로 즐거워했다 : 《시경》 〈소아(小雅) 녹명(鹿鳴)〉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2023-12-04 | NO.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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