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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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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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우윤-光州敎坊歌辭
    十二樓玉京之中霞結佩而送仙馭千萬峯瑞石之下花爲陣而䢎瑤㫌其虛其徐且前且進伏惟相公閤下東山雅量杜曲豪情凜節英標固已振乎金石遐心遠思時見惹乎蕙蘭非膠固之小丈夫乃弛張之大君子曾作北門之鎻鑰冄采南國之風謠亦旣見不云悅乎何其久必有以也一二年孤燈孤影錦衾瑤席何寂寥數百里長亭短亭銀鞍白馬更燦瀾兹可爲知者道信難與俗人言妓生梅梢月等姸華恐闌幽㤪思釋猗猗綠竹幾衞情之繞淇片片綵雲願楚夢之八峽倘蒙惠綏乎帳裏庸許宛轉於燈前則進香山之遨遊受窺廣平之作賦何敢自以爲幸賜之周乎亦可謂之有緣樂無央矣所宜益護靈犀之點更拂靑菱之塵獻巧笑之瑳然鳴寶瑟之鏗爾䲶鴦鉉鳳凰柱絃不斷而柱不傾桃李顔楊柳眉顔則低而眉則展言不盡意系之以詩詩曰觀風湖外摠英賢却道光山有可憐金節初從天縹緲錦屛㴱鎻玉嬋姸曾因夢過情相合不待琴桃意己傳唱罷柳枝腸斷處碧雲香雨曲欄邉-용만유고(龍灣遺稿) 권1
    2018-07-12 | NO.465
  • 김우윤-祈晴文 光州權任時作(기청문 광주를 임시로 맡았을 때 짓다)
    惟神之居 생각건대 신의 거처는 宅于岩隈 바위 모퉁이에 자리하여擁厥嘉休 아름다운 상서(祥瑞)를 안고 肅焉徘徊 엄숙하게 배회하십니다借柄專雄 권병을 빌려 우두머리로서司其翕闢 음양의 열고 닫음을 관장하여以袪民災 백성의 재앙을 제거하고以佑成績 치적을 이루도록 돕습니다今玆之沴 그런데 지금 이러한 재앙은 胡焉而虐 어찌도 이리 사납습니까陽德愆候 양덕의 기후가 어긋나 滛霖不絶 장마비가 그치지 않아서曾是水潦 이에 넘치는 물결이 混爲塗泥 진흙길과 뒤섞여서泛濫疇隴 밭두둑에 범람하고 坡陀圃畦 언덕의 채소밭까지 넘실댑니다擢擢嘉生 곱게 돋은 가곡의 싹은 惟天之養 저 하늘이 길러주신 것인데豈使秶盛 어찌 자성으로 하여금沉於艸莽 잡초더미에 침몰케 하십니까 哀我人斯 슬프다 우리 백성이여薪不燭竈 부엌에 땔나무를 못 지피니野夫興憂 들의 농부는 근심을 일으키고 官守增悼 관리들은 서글픔을 더합니다諸陰旣閉 모든 음기가 이미 폐색되어休徵未獲 좋은 징조를 얻지 못하니敢用昭告 감히 써 밝게 고하여期于有答 응답이 있기를 기약합니다神惟智知 신께서 이를 아실 것이니 我以誠往 저는 정성으로 기도합니다 苟失其應 만일 응답을 아니 하시면人將安仰 백성은 장차 누구를 의지하겠습니까望誅黑蜧 바라건대 검은 이무기를 죽이고兼扶陰蜺 겸하여 암무지개를 부축해 올려式乾后土 대지를 마르게 하시어以廓天倪 하늘 끝까지 맑게 하소서白日懸野 밝은 태양이 들을 비추고幽泥化壒 깊은 진흙탕이 사라지면 豈惟禾稼 어찌 단지 벼농사 일만 亦救顚沛 전패됨을 구할 뿐이겠습니까惟神之德 또한 신의 은덕도靈用不休 신령함이 그치지 않으리이다尙或聽之 바라건대 이 기도를 들어주시어無作神羞 신에게 부끄러움이 되지 않기를-용만유고(龍灣遺稿)김우윤(金友尹, 1550~1597)의 자는 지임(之任)이며 호는 용만(龍灣)이다. 나주 출생이다. .
    2018-07-10 | NO.464
  • 김운덕-光州拱北樓步李耕韻
    每依北斗望京華 매번 북두성에 의지해 북쪽 서울을 바라본다不是他由爲國家 다른 뜻이 아니고 나라를 위하는 마음神鞭何断中州使 신편은 어찌 중주의 사신을 끊을까?怪律偏多外域笳 이역의 피리소리라 곡조가 기이하구나烟霞勝地流凉月 연하의 명승지에 서늘한 달빛 흐르더니風雨今天亂落花 풍우가 몰아치는 오늘 낙화가 어지럽네事去年湥如此恨 사연도 세월 따라 나의 한처럼 깊은데每依北斗望京華 매번 북두성에 의지해 북쪽 서울을 바라본다 -추산유고(秋山遺稿)  :권1김운덕(金雲悳, 1857-1936)의 자는 명극(明克)이며 호는 추산(秋山)이다.
    2018-07-12 | NO.463
  • 김윤식-광석대
    神仙好高曠  신선(神仙)은 높고 탁 트인 곳을 좋아해 天築自然臺  하늘이 자연스런 대(臺)를 쌓아주셨네恐浼遊人跡  유람하는 이들의 자취로 더럽혀질까 두려워 林風掃屐苔  숲 바람이 이끼에 찍힌 나막신 자국 쓸어버렸네高挹天皇袂  천황(天皇)의 옷소매 높이 잡고 搔頭謝俗塵  머리 긁적이며 티끌세상(俗世)과 작별했네山中多白石  산 중에 하얀 돌 많고 많은데 誰是牧羊人  양(羊)을 치는 사람은 그 누구인가-운양집 제14권, 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 1831~1900)이 1860년(철종11) 가을에 서석산을 유람하고 광석대(廣石臺)에서 읊은 시이다. "광주(光州) 무등산(無等山)의 삼황봉(三皇峯) 및 광석대(廣石臺), 입석대(立石臺) 같은 경우는 맑게 트이고 쑥 솟아나서 만 개의 기둥을 묶어세운 듯하다."고 적고 있다. 그가 머리를 긁적인 이유는 약사암 중건기(藥師庵重建記)에서 나타난다. 1860년(철종11)그가  가을에 서석산을 유람한 적이 있는데, 그 꼭대기에 올라가서 이백(李白)의 시 낙안봉(落鴈峯)을 큰 소리로 읊고는 산중의 장관이 여기에 다 있다고 여겼다고 회고 하고 있다.
    2018-08-01 | NO.462
  • 김윤현 광주목사는 남원부사로 이배(1886.1.16)
    호남계록(湖南啓錄)○고종(高宗) / 고종(高宗) 23년(1886)2월 14일 승정원 개탁이번에 도착한 남원 부사(南原府使) 김윤현(金胤鉉)의 첩정(牒呈)에, “부사는 통훈 대부(通訓大夫) 본도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정월 16일 정사(政事 관리의 임면과 출척에 관한 사무)에서 본직에 이배(移拜)되어, 2월 초2일에 하직인사는 생략하라는 관문(關文)을 받들고 같은 달 초10일에 도임(到任)하였습니다.”라고 보고해 왔습니다. 연유를 치계하오니 잘 아뢰어 주소서.광서 12년 2월 14일
    2023-08-16 | NO.461
  • 김종직-光州人, 射其判官禹允功中臂 允功奔和順
    武珍遺俗故凶奸 童子能探赤白丸豈意治朝猶犯分 初聞衰髮尙衝冠滄浪自致群狙怒 箠楚將成百室殘弭節鳳笙亭下路 轉移無術愧王官-점필재집(佔畢齋集)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자는 효관(孝盥), 계온(季昷)이며 호는 점필재(佔畢齋)이다.
    2018-07-10 | NO.460
  • 김종직-光州無等山
    蒼蒼瑞石聳秋空  푸르고 푸른 서석산 가을 하늘에 솟았는데 十日尋常在眼中  보통 십 일 동안을 안중에 들어온다네喜慶樓前更回首  희경루 앞에서 다시 머리 돌려 바라보니 雲烟纔罅見靈宮  구름 연기 잠깐 걷히자 영궁이 보이누나烟雨冥濛積翠寒  이슬비 자욱이 내려 산 기운 차갑더니 今朝日出露巑岏  오늘 아침에 해 돋으니 봉우리를 드러내네嵬然終是羣山長  우뚝한 것이 끝내 여러 산의 어른이라 仿佛頭流頂上看  두류산 꼭대기를 보는 것과 방불하구나- 점필재집(佔畢齋集) 권21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 ~ 1492)이 희경루에 올라 무등산을 바라보며  영궁(靈宮)이라며 그 회포의 산물로 찰라의 여유를 누리게 만든다. 김종직은 조선시대에 성리학을 정립한 인물이며  영남학파의 종조로 전라도관찰사로 재직하면서 순찰하며 각 고을에 향촌의 향약을 권장, 조직했다.
    2018-07-12 | NO.459
  • 김집-광주로 돌아가는 도중에(次歸光山道 中)
    人寰閱盡死生關  죽고 사는 관문을 하나하나 다 겪었고 世味千般熱更寒  뜨겁고 찬 세상 맛도 천 가지나 보았다네 久客行裝唯白髮  오랜 세월 나그네 신세 남은 것은 백발뿐이요 晩途交契是靑山  늘그막의 다정한 벗 청산이 그것이라네 一天王土誰相忌  한 하늘 밑 한 땅에서 누가 서로 꺼리는가 流水浮雲不耐閑  흐르는 물 뜬구름은 저리도 한가로운데 莫道幽居無所事  산에 숨어 사는 사람 하는 일 없다 말을 말라 曲肱眞樂在其間  팔 들어 베고 자는 즐거움 거기래야 있단다노년에 스승 송익필(宋翼弼)의 시에 차운한 시를 모아 놓은 차구봉시(次龜峯詩)。-신독재선생유고(愼獨齋先生遺稿)김집(金集, 1574~1656)의 자는 사강(士剛)이며 호는 신독재(愼獨齋)이다.
    2018-07-10 | NO.458
  • 김천일(金千鎰)ㆍ양산숙(梁山璹) - 연려실기술 제16권
    김천일(金千鎰)ㆍ양산숙(梁山璹) - 연려실기술 제16권 / 선조조 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 전라 우도의 의병장 김천일이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하였다.○ 천일은, 자는 사중(士重)이요,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나주(羅州)로 이사하여 두 대[二代]째이다.이항(李恒)에게 배웠다. 은일로 천거를 받아 대간이 되었는데, 그는 곧은 말을 과감히 하나 용모는 초라하여 외모가 옷을 이기지 못할 듯이 보였다. 이때 나주에 있다가 임금이 서쪽으로 피난하였다는 말을 듣고 울부짖으며 슬퍼하더니 조금 후에 분연히 말하기를, “울기만 하면 무엇하리오.나라에 환난이 있어 임금이 파천하였는데, 나는 대대로 벼슬해 온 신하로서 새[鳥]처럼 도망하여 살기를 구할 수가 없다.” 하고, 드디어 글로서 고경명(高敬命)ㆍ박광옥(朴光玉)ㆍ최경회(崔慶會) 등 여러 사람에게 통하니, 의기(義氣)있는 선비들이 소문을 듣고 달려와 모였다. 정예한 군사 수백 명을 얻어 군중(群衆)들과 함께 맹세하고 서쪽으로 떠났다. 《명신록》 ○ 의사(義士) 송제민(宋濟民)ㆍ양산룡(梁山龍)ㆍ양산숙(梁山璹)ㆍ임환(林懽)ㆍ이광주(李光宙)ㆍ서정후(徐廷厚) 등과 더불어 피를 마시며 맹서하고 의병을 일으켰다. 천일이 평소에 몸이 약하고 병들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기쁜 표정으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오늘 내가 칼을 차고 말을 타니 거뜬하여서 날고 싶다.”고 하였다. 《계곡집》 ○ 처음에 천일이 이광이 적을 보고만 있으면서 근왕(勤王)의 일에 게으른 것을 통분하게 여겨 경명에게 글을 보내어 “먼저 이광을 쳐서 죄를 바로잡은 뒤에 군사를 거느리고 북으로 올라가려 한다.”고 하였더니 경명이 말리었다.○ 각 도의 군사가 모두 무너졌다는 소문을 듣고 온 군중이 두려워하여 위축하였다. 천일이 여럿에게 타일러 말하기를, “우리 군사는 의를 위해서 나선 것이다. 전진이 있을 뿐이요, 후퇴는 없다. 가고자 하는 자는 가는 대로 내버려두겠다.” 하니 여러 군사들이 모두 감동하고 분발하여 몰래 도망하는 자가 없었다. 호서(湖西)에 이르렀을 때 군사가 수천 명이 되었다. 병사(兵使) 최원(崔遠)과 더불어 수원(水原)으로 진군하였다. 천일이 독산(禿山)의 옛 성에 자리 잡고서 적에게 따라 붙은 간사한 백성을 찾아내어 목 베니 기내(畿內)의 선비와 백성 중에 와서 협력하는 자가 많았다. 드디어 금령(金嶺)수원땅 의 적을 습격하여 깨뜨렸다.○ 수원에서 인천(仁川)으로 향하면서 본도에 구원병을 청하니, 이광이 조방장(助防將) 이유의(李由義)와 진도 군수(珍島郡守) 선거이(宣居怡) 등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가게 하였다.○ 유생(儒生) 곽현(郭玄)‘玄’을 기재는 ‘賢’으로 썼다. ㆍ양산숙을 보내어 바닷길로 가서 평안도에 들어가 글을 올리니 임금이 친히 남쪽의 소식을 물었다. 산숙 등이 천일이 최원등과 군사를 합쳐서 수원에 이르렀으며 고경명과 조헌도 또한 군사를 일으켰고, 영남에서도 또한 김면ㆍ정인홍ㆍ박성ㆍ곽재우가 있다는 것을 아뢰었다.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변변치 못한 까닭으로 너희들이 멀리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적의 속으로 모험해 왔구나.” 하였다.산숙이 아뢰기를, “천일의 군사들 중에는 정예하고 용감한 자가 많기는 하나 태반은 유생들인데 다만 충성과 의리만을 의지하고 일어선 것이니 성공과 실패는 하늘에 달렸을 뿐입니다.” 하니, 임금이 울며 이르기를, “충의가 격동하는 곳에 무슨 일인들 이루어지지 않겠느냐.” 하였다. 곽현이 아뢰기를, “신이 평소에 조헌과 교분이 두터운데, 신의 거사할 무렵에 헌이 말하기를, ‘요사이 천문(天文)을 살펴보니 우리나라에 멸망할 운수가 없으니, 적도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조헌은 기축년 역적의 변이 있을 줄을 알았으며, 신묘년에는 나라에 반드시 큰 난리가 있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한 일이 있으니 천문을 관찰한 것이 들어맞은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렇게 잘 맞는단 말인가.” 하고 드디어 곽현과 양산숙 두 사람에게 상으로 벼슬을 주고 인하여 천일ㆍ경명ㆍ광옥등에게 교지(敎旨)를 전하여 등급을 따라 벼슬을 주고, 산숙 등에게는 공조 좌랑을 임명하였다.○ 7월에 천일이 의병을 이끌고 먼저 경기에 이르니, 임금이 판결사(判決事)에 임명하고, 창의사(倡義使)라는 군호를 내려주고, 인하여 강화(江華)에 들어가 지키면서 남쪽과 북쪽의 아뢰는 소식이 통하게 하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경기로 피난한 조정의 벼슬아치와 의병들이 많이 강화에 모여 있다가, 최원ㆍ김천일의 두 군사가 근왕하러 오는 것을 보고 기뻐 생기가 돌아서 드디어 함께 합세하여 강을 건너 장단(長湍)에서 적을 엿보는데 적의 복병이 사방에서 일어나 형세가 바람 앞의 등불 같아서,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여 죽은 자가 무수하였고, 천일 등은 배 한 척을 타고 달아나 면하였다. 《일월록》 ○ 공은 양화(楊花) 나루에서 군사의 위세를 보이면서 평수길(平秀吉)의 죄상을 게시하여 성안의 적군에게 도전하였으나 적은 끝내 나오지 아니 하였다. 다음 해 이여송이 장차 서울에 있는 적을 치려 할 때 공은 선유봉(仙遊峰)에 진군하여 도독(都督 이여송)을 위하여 성원하였다. 적이 이미 물러간 뒤에 천일이 서울 성안에 들어가니 조정에서 적을 추격하라고 명하였다. 천일이 마침 병으로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나며 말하기를, “내가 이제 죽을 곳을 얻었다.”고 하였는데 그때, 천일의 부하는 여러 군사(軍師)에게 이리저리 빼앗기고 남아 있는 자가 수백 명에 불과하였다.천일이, “호남은 우리나라의 밑뿌리요, 진주는 호남의 병풍이요, 울타리이다.” 하고 드디어 진주에 들어갔다. 성(城)과 병기가 믿을만한 것이 없었으나 천일이 최경회ㆍ황진 등과 더불어 죽음으로서 지킬 것을 약속하였다. 얼마 안되어 적의 대군이 달려드니 임기응변으로 대비하였다. 처음에 수길이 여러 길의 왜적들이 모두 공 세운 것이 없음을 분하게 여겨, 모든 장수를 책망하고 반드시 한 이름난 성을 무찔러 벌충을 하고자 하였다. 그런 까닭에 이 싸움에서는 성이 오래도록 함락되지 아니하고 적병의 전사자도 정도를 넘었건만 오히려 퇴각하지 아니하였다.마침 그때 오래 비가 내려 성의 흙이 풀어져 잘 무너졌다. 적이 군사를 더하여 급히 공격해 오니 성이 드디어 함락되었다. 이때 천일이 촉석루(矗石樓) 위에 있었는데 맏아들 상건(象乾)과 막하의 양산숙등이 옆에 있다가 울며 부르짖어 말하기를, “장차 어찌 하렵니까?” 하니 천일이 태연히 말하기를, “일을 일으키던 날, 나는 이미 나의 죽음을 결정하였다. 다만 너희들이 가엾구나.” 하고 드디어 일어나 북쪽 행재소를 향하여 절하고 나서 먼저 병기를 물속에 던지고 상건과 더불어 서로 안고 촉석루 아래의 깊은 물에 뛰어드니 장수들과 막료(幕僚) 중에 따라 죽은 자가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적도 또한 힘이 다하여 감히 다시 호남을 침범하지 못하였다. 임금이 듣고 크게 슬퍼하여 찬성(贊成)을 증직하고, 치제(致祭)를 내리었다. 호남 사람들이 나주(羅州)의 서쪽 옥정봉(玉井峰) 아래에 사당을 세우니 조정에서 정렬(旌烈)이라고 사액(賜額)하였다. 《명신록(名臣錄)》 ○천계(天啓) 병인년에 비를 세우고 계곡(溪谷)의 비명을 지었다. ○ 명 나라의 지휘(指揮) 오종도(吳宗道)는 평소에 천일을 존경하여 심복하더니, 제문을 지어서 사람을 시켜 보내고 공의 영전에 잔을 드리게 하였다. 제문에, “연월일 병부참모군사 무거지휘사(兵部參謀軍事武擧指揮使) 오종도는 삼가 양과 돼지의 제물로서 조선 창의사(朝鮮倡義使) 김장군의 영위(靈位)에 제사드립니다. 무릇 사람이 하늘과 땅 사이에 있어서 죽어도 오히려 산 자가 있고 살아도 오히려 죽은 자가 있는데, 살았으면서 죽은 자는 지금 천하에 그득합니다. 죽었어도 살아 있는 이로서 나는 창의사 김장군에게서 느낌이 많습니다.왜적들이 미쳐 날뛰는 때를 당하여, 임금이 초야에 파천하고 전국 8도가 거의 온전한 고을이 없는데 오직 장군은 낚시대[竿]를 세워 깃발을 달고, 나무를 베어 칼을 만들어 팔뚝을 걷어붙이고 한 번 부르짖으니, 호걸들이 호응하였습니다. 창의(倡義)하는 선비 천여 명을 얻어 한강(漢江) 가에 주둔하여 지키면서 왜적과 더불어 살고 싶지 않음을 맹세하였습니다. 장군의 명성은 안과 밖에 높았습니다. 불민한 나는 군무(軍務)의 바쁜 틈에 처음 만나 알게 되었는데 곧 다정하게 옛 친구처럼 대해주셨습니다.그때 왜놈들이 바야흐로 강화를 요청하니 장군은 문득 팔을 걷고 꾸짖으며, 항상 이놈들을 멸망시키고야 밥을 먹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뜻과 그 공이 비록 성취되지 못하였으나 장군의 이름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더욱 떨치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왜놈들은 항상 저희끼리의 생각으로 옛 송(宋) 나라의 일을 오늘 일에 비교하여, 악무목(岳武穆)이 죽지 않고는 금(金)과 송(宋)과의 화의(和議)가 성립될 수 없었음과 같이 장군이 죽지 않고는 오늘의 강화가 결정될 수 없겠다고 생각하여, 왜놈들이 밤낮으로 작전계획한 것은 오직 기어코 장군을 죽이는 것으로 일을 삼았던 것입니다.그때에 흩어지고 없어진 나머지의 군사를 가지고 진주를 지키게 됨에 이르러, 때마침 최군(崔君) 경회(慶會)도 거기에 있었는데, 최군은 더욱 왜놈들이 이전부터 꺼려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왜놈들은 대병(大兵)으로 수십 겹을 포위하여 나는 새도 지나가지 못하게 하여 가지고 기어코 두 분을 잡고야 말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때에 나는 명령을 받고 와서 전라도를 지키게 되었는데, 장마비로 인하여 죽산(竹山)에 머물러 있던 중에 별안간 큰 비바람이 불고 천둥벼락이 일어나 모래가 날고 나무가 뽑히어서 마치 나의 행군을 재촉하는 듯하였습니다.나는 비를 무릅쓰고 전진하여 수일을 지나서 남원(南原)에 박도하였고 그때에 기별이 날아왔는데, 진주는 화살이 다하고 식량이 끊어져서 성이 함락된 지가 며칠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장군 부자와 최군이 모두 왜적을 꾸짖고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비로소 죽산의 장마비는 곧 장군 부자의 눈물이요, 큰 바람과 천둥벼락은 장군의 불평의 기운이었던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아아, 장군은 이름이 천추에 빛나서 오래도록 결코 죽지 않을것이니 내 어찌 울 것입니까.나랏일을 잘못하여 임금을 피난 나가게 만들고, 군사를 가지고도 구원하지 못하여 성과 고을을 잿더미로 되게 하고도 부끄러움 없는 얼굴로 여전히 높은 지위의 의관(衣冠)을 하고 있는 자들은 비록 살아 있기는 하지만 어찌 장군의 죽음만 하리오. 슬프다, 하늘이 돕지 아니함이여, 부자가 함께 죽었도다. 절개와 의리가 겸하여 온전함이여, 우리의 강상(綱常)을 세웠도다. 저승과 이승이 달라졌음이여, 몽매(夢寐)에 보는 듯하도다. 어진 친구와 영원히 이별함이여, 나의 한잔 술을 올리나이다.” 하였다. 《동각잡기》 ○ 제독(提督) 형개(邢玠)도 또한 공(公)을, “충성스러운 혼과 씩씩한 넋이 늠름하여 살아 있음과 같다.”고 칭찬하였다.
    2020-09-24 | NO.457
  • 김충장유사서(金忠壯遺事序) - 홍재전서 제9권
    김충장유사서(金忠壯遺事序) - 홍재전서 제9권 / 서인(序引) 2  : 정조대왕(正祖大王, 1752~1800) 공동산(崆峒山) 북쪽의 차가운 바람 끝, 또는 연(燕), 조(趙)의 비장한 노래 여운처럼 쓸쓸하고 비통하면서도 그래도 그것이 한 개인이나 한 가정의 문헌(文獻)이 되어 버리고 말아서는 안 될 책이 바로 이 책이다. 그러니 내 어떻게 말을 하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러나 그가 한 말이라든지 그가 남긴 사공(事功)이 모두 이 책 속에 있으니 내가 그에 관해 중언부언하고 싶지는 않다. 그럼에도 부득이 말을 해야 한다면 그의 언어와 사공에 대한 뿌리를 말해 보겠다.대체로 어쩌다가 어진 이가 되고, 모이고 또 모여서 걸출한 자를 만들어 내는 것은 모두 기(氣)가 하는 일이다. 언어도 사공도 따지고 보면 그 역시 전부 기에서 나온다. 때문에 그 기운이 때를 만나 크게 쓰이게 되면 그 명예, 그 공로가 기상(旂常)에 쓰여지고 정이(鼎彝)에 새겨지며 혜택이 당세에 미치고 사적이 역사에 전해지는데, 그때는 언어나 사공이나 그게 그것으로 별 차이가 없다. 반면에 불행해서 기운과 때가 서로 엇갈리게 되면 펴 보이지 못하고 속에 쌓이고 쌓인 것들이 더러는 언어로 표현되고 더러 문자로도 표현되기 때문에 그가 수립하지 못한 사공의 계획 같은 것을 그 언어나 문자를 통하여 만분의 일이나마 상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는 가전(家傳)이 국사(國史)보다 비중이 큰 경우가 있으니, 지사(志士) 영웅의 눈물이 이 땅 곳곳에 두루 뿌려지고 있는 원인도 바로 거기에 있다.아, 충장공(忠壯公) 같은 이는 어쩌면 그리도 불행했던가. 그가 태어난 시기는 국운이 한창 왕성하던 선묘(宣廟) 때였다. 그 당시 인재가 배출된 것은 거의 주(周) 나라 무왕(武王) 때에 버금갈 정도였는데, 그가 그 뛰어난 용력과 세상을 요리할 만한 재목으로 칼을 짚고 용기백배한 군사들을 통솔할 때, 익호 장군(翼虎將軍)이니 석저 장군(石底將軍)이니 하여 조정에서 그를 중히 여기기 어떠했으며 또한 적국(敵國)에서는 얼마나 꺼려하던 존재였던가. 그 강대(剛大)하고도 충만한 기운을 절월(節鉞)을 잡고 전군을 지휘하는 데 조금이라도 써 보았더라면 연연산(燕然山)에다 공적을 새길 만도 하고, 능연각(凌煙閣)에 화상이 걸릴 만도 했을뿐더러 임진왜란 때 8년 동안이나 그들로부터 치욕을 당할 까닭도 없었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하늘은 그를 내셨는데 사람이 액을 주고, 재주는 타고났는데 쓰이는 길은 좁아 결국 무고한 탄핵을 받은 무목(武穆), 악비(岳飛)처럼 억울함을 당하고 금인(金人)들이 술을 마시며 축하를 하게 한 장본인이 되었던 것이다.다만 그를 있게 한 조화의 뭉침과 산악의 정기가 어렴풋하나마 그가 남긴 언어 문자(文字) 사이에 남아 있어 백세가 지난 오늘에도 그의 언어 문자를 외우고 읊조리노라면 황홀하게도 그 모습이 그림처럼 나타나고 목소리도 들리는 것 같다. 그것은 왜일까? 이는 그가 참된 기운을 타고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참된 기운은 사공(事功)과도 통하는 바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보기에 이 세상에서 자기 언어나 사공이 후세에 남겨지기를 바란 이들이 그 얼마나 많았으랴마는, 지금까지 역사에 남아 있고 기록으로 보존되어 있는 이가 과연 몇 사람이나 되던가. 그것을 보면 참된 기운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고 동시에 이 책만은 틀림없이 전해지리라는 것을 점칠 수 있다. 아, 이 드문 일을 두고 내 어찌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이렇게 말해 《김충장유사(金忠壯遺事)》의 서(序)로 삼는다.김덕령(金德齡)은 전라도 광주(光州) 사람으로서, 그가 남긴 시문(詩文)과 연보(年譜), 기전(紀傳), 비문(碑文), 찬문(贊文) 등 3권이 있다. 거기에다 그의 형 증(贈) 지평(持平) 김덕홍(金德弘) 및 그의 아우 증(贈) 집의(執義) 김덕보(金德普)의 유적과 유고를 이 책 뒤에다 붙여 인쇄한 후 세상에다 내놓는다.
    2020-09-30 | NO.456
  • 김태호-광주를 노닐며(遊光州)
    此是湖南第一州  이곳은 호남의 제일 가는 고을이라與君今日辨佳遊聳天瑞石霧中屹 穿野鏡湖烟外流貨物家家開大路 電燈處處起高樓聊知義擧學生事 風雨乾坤鷄不休-용파유고(龍坡遺稿)김태호(金泰鎬, 1889-1952)의 자는 국진(國珍)이며 호는 용파(龍坡)이다.
    2018-07-10 | NO.455
  • 김형-부용정
    苦憶詩仙髮已絲 애타게 시선을 그리다 머리가 이미 희어졌네空留遺響軼咸池 속절없이 유향을 남기고 함지에 빠졌는데雙鳧去後無消息 쌍부로 떠난 뒤로 소식이 없으니何處丹邱白日遲 어느 곳 단구에서 긴 날을 보내고 있을까 -김형(金迥, 생몰년 미상, 1600년대 전후)
    2018-08-02 | NO.454
  • 까마귀가 갓을 물어다 놓은 터
    광주광역시 북구 생용동 생룡마을에서 전해 내려오는 마을 정착에 관한 이야기.「까마귀가 갓을 물어다 놓은 터」는 어려움을 겪은 사람들이 까마귀의 도움으로 생용마을에 정착하고 살게 된 이야기이다. 2018년 1월 30일 광주광역시 북구 생용동 생용마을에 거주하는 주민 범희인[남, 82세]의 이야기를 채록하였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주관하는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에 수록되었다. 생용마을은 처음에 마을 아래쪽에 터를 잡고 있었는데, 비가 오면 물이 범람하여 집이 침수되곤 하였다. 어느 날 까마귀가 갓을 물어와 어느 땅에 던져 놓았다.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원래 살던 곳에 살지 말고 다른 곳으로 옮겨서 살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마을 사람들은 까마귀가 갓을 던진 곳으로 이사를 갔는데, 그곳은 홍수가 나지 않아서 쉽게 정착할 수 있었다. 이후 까마귀가 갓을 놓은 자리가 생용마을 터가 되었다고 한다. 「까마귀가 갓을 물어다 놓은 터」의 주요 모티프는 '동물의 상징에 기반한 마을유래'이다. 까마귀는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새인데, 신령스러운 새 혹은 죽음이나 불길한 징조를 알리는 새의 상징성을 함께 갖고 있다. 이 설화에서는 생용마을 사람들이 이전에 살던 터가 홍수로 피해를 입자, 까마귀가 갓을 물어다 물이 범람하지 않은 곳을 점지하였다. 이때의 까마귀는 불길함의 상징이 아닌 신의 의지를 전달하는 신령스러운 존재이다. [참고문헌]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7 | NO.453
  • 꽃뫼마을과 화산가
    광주광역시 동구 용산동 화산마을의 지명에 관한 이야기.  「꽃뫼마을과 화산가」는 화산마을의 지명에 관한 유래와 화산마을 노래에 관한 이야기이다. 2018년 2월 21일 광주광역시 동구 용산동 화산마을에 거주하는 주민 박진규[남자, 73세]의 이야기를 채록하였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주관하는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에 수록되었다. 꽃뫼마을에는 노적봉에 꽃이 많이 피어 '화산(花山)'이라고도 불렀다. 특히 봄에는 진달래꽃이 많이 피었는데, 사람들이 산에 나무하러 다니던 시기에 진달래 뿌리를 다 뽑아 이제는 예전의 모습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마을 아래의 냇물은 물이 강처럼 많이 흘러 '용강(龍江)'이라고 불렀다.이곳과 학동 위쪽에서부터 화순에서 넘어온 곳까지를 합쳐 오늘날 용산동이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골뫼'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원래 이름은 꽃뫼였지만 사람들이 계속 골뫼라고 불렀더니 이름도 골뫼로 바뀐 것이다.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꽃뫼마을에는 「화산가」라는 제목의 마을 노래가 만들어져 전해졌다. 「화산가」의 가사는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내 고향 산꼴짝 화산이라네/ 앞에는 비들바위 가로 놓이고/ 뒤에는 노적봉이 우뚝 솟았네/ 그 사이에 맑은 물이 졸졸 흐르니/ 꽃 피고 새 우는 화산이라오 [모티프 분석] 「꽃뫼마을과 화산가」의 주요 모티프는 '지형에 따른 지명유래'이다. 화산마을의 이름은 마을의 뒷산인 노적봉에 진달래꽃이 많이 피었기 때문에 '꽃뫼' 혹은 '화산'이라고도 부른 것으로 알 수 있다. 특히 「화산가」라는 노래의 가사가 아직 남아 있고, 마을 사람들이 부르고 있어서 마을 이름의 유래를 증거할 수 있다. [참고문헌]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7 | NO.452
  • 나도규-和東軒韻別柳參奉 名未詳(동헌의 시운에 화답하여 유참봉과 이별하다. 이름은 미상)
    一生書釼客 일생을 서검으로 살아온 나그네自是惜流光 스스로 흐르는 세월이 아쉽구나詩語樽前好 시어는 술 단지 앞이라 좋고秋聲雨後長 가을 소리는 비온 뒤에 유장하다盛衰元有數 성쇠는 원래 운수가 있으니離合亦無傷 만남과 이별도 슬퍼할 것 없어라來日如今日 내일도 오늘과 같이淸遊更一床 맑은 놀이 마치고 함께 지새우세-덕암만록(德巖滿錄)나도규(羅燾圭, 1826∼1885)의 자는 치문(致文)이며 호는 덕암(德岩)이다.
    2018-07-10 | NO.451
  • 광주광역시
  • 한국학호남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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