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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령 장군 전[金將軍傳]- 서하집

김 장군 전[金將軍傳] - 서하집 제14권 / 전(傳) : 이민서(李敏敍, 1633~1688).


장군의 이름은 덕령(德齡)이고, 자는 경수(景樹)로, 광주(光州) 석저촌(石底村)의 사람이다. 아버지 붕섭(鵬燮)과 조부 익(翊)은 재행(才行)이 있었으나 모두 현달하지 못하였다. 집안이 대대로 유업(儒業)에 종사하였으니, 장군도 어릴 적에 향교(鄕校)를 출입하며 유아(儒雅)를 쌓았다. 일찍부터 자부심이 강하고 강개한 기질에 큰 뜻을 품고 있었으나, 잘 드러내지 않고 반듯하게 자신을 가다듬어 이를 아는 사람들이 없었다.


사람됨은 그리 장대(長大)하지 않았으나, 용맹이 남달랐다. 어릴 때에 이웃집의 감이 익자, 장군은 몸을 날려 입을 갖다 대고는 실컷 먹고서야 내려왔다. 또 두어 길 되는 칼을 즐겨 다루었는데, 때때로 술기운에 말을 타고 산비탈을 질러가며 칼을 좌우로 휘둘러 자르면서 내달리면, 마치 폭풍우가 몰아치듯 지나는 곳마다 큰 소나무가 어지러이 쪼개지고 쓰러졌다. 또 항상 한 쌍의 철추를 늘 좌우에 차고 다녔는데, 철추의 무게가 각각 백 근이나 되었다.


더러는 말을 달려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가, 방향을 바꿔 내달려 나오기도 하였다. 더러는 지붕에 올라가 옆으로 누워 처마로 굴러 떨어지다가 미처 땅에 닿기 전에, 몸을 회전시켜 뛰어올라 방 안으로 들어가기도 하였다. 일찍이 사나운 호랑이가 대밭 속에 있으면서 나오지 않자, 장군이 먼저 화살을 쏘아 자극하였다. 호랑이가 놀라고 성이 나서 입을 딱 벌리고 사람을 물려고 하였는데, 장군이 창을 빼어 들고 마주해서 찌르자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으니, 이러한 일들이 매우 많았다. 매양 스스로를 조운(趙雲)에게 견주었는데, 일찍이 시를 지어 ‘군병(軍兵)을 거느려 적을 무찌르고는 갑옷을 벗고 강호(江湖)로 돌아가겠다.’는 뜻을 스스로 읊었으니, 그 의중을 알 만하였다.


만력(萬曆) 임진년(1592, 선조25)에 왜구가 크게 쳐들어오자 선조께서는 용만(龍灣 의주(義州))으로 파천(播遷)하였다. 이듬해에 명(明)나라 황제가 군사를 보내 구원하여 연이어 삼경(三京)을 수복하였으나, 적은 영남(嶺南)에 머물면서 날마다 군병을 증가시키며 재침(再侵)을 꾀하여, 관군(官軍)과 의병(義兵)들이 도처에서 무너지고, 명나라에서 보낸 장리(將吏)들 역시 겁먹고 회피하며 관망만 하고 있었다.


이때 장군은 모친의 상(喪)을 당해 집에 있었는데, 담양 부사(潭陽府使) 이경린(李景麟)과 장성 부사(長城府使) 이귀(李貴)가 번갈아 방백(方伯)에게 장군을 천거하였고, 이경린은 또 전투 장비까지 내주며 기병(起兵)해서 싸움에 나가기를 권유하였다. 방백이 이에 조정에 보고하자, 특별히 형조 좌랑(刑曹佐郞)을 제수하였다. 장군의 자부(姊夫) 김응회(金應會) 또한 기개가 있고 뜻이 큰 의사(義士)였는데, 의리로써 장군을 개유(開諭)하니, 11월에 장군은 마침내 상복을 벗고 담양(潭陽)에서 병력을 모집하여 수천 명을 얻었다. 원수(元帥 권율(權慄))는 영남에 있으면서 그 군대를 초승군(超乘軍)이라 표방(標榜)하였다. 세자(世子)는 전주(全州)에 있으면서 장군의 기병(起兵) 소식을 듣고 익호 장군(翼虎將軍)이란 칭호를 내렸다. 이듬해에는 임금께서 사신을 보내 장유(獎諭)하고, 또 군호(軍號)를 충용(忠勇)이라고 하사했다.


1월 26일에 장군이 병력을 거느리고 담양을 출발하면서 영남에 고유(告諭)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정의(正義)에 의거하면 아무리 위태롭더라도 반드시 흥(興)하고, 순리(順理)를 범하면 아무리 강대하더라도 반드시 멸망하는 법이다. 이 때문에 비수(淝水) 가의 작은 부대가 부견(苻堅)의 대군(大軍)을 꺾을 수 있었고, 독부(督府)의 수군(水軍)은 오히려 역적 양(亮)의 군대를 꺾었으니, 이 사실은 역사에 실려 있고, 시기는 고금(古今)에 다름없다. 이제 출병(出兵) 시기도 길괘(吉卦)를 얻었고, 정기(旌旗)는 동쪽을 향하고 있으며, 병사들은 정예하고 병기(兵器)는 예리하며 군사들은 다만 명분이 곧아서 사기가 왕성하니, 저 가마솥 속의 물고기들이 어찌 오랫동안 버티겠는가?”라고 하였다.


남원(南原)에 도착하여 병사들을 휴식시키고 있을 때, 이 고을의 사인(士人) 최담령(崔聃齡)을 얻어 별장(別將)으로 삼고, 2월에 영남 지역으로 진출하니 군대의 명성이 크게 떨쳤다. 왜적이 장군의 위명(威名)을 듣고 석저 장군(石底將軍)이라 부르며, 벌벌 떨고 감히 기를 펴지 못하였다. 적장 가등청정(加籐淸正)은 몰래 화공(畵工)을 보내 장군의 형상을 그려 오라고 하여 그 그림을 보면서 이르기를 “참으로 장군이로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병졸을 거두어 노략질을 못하게 하는 한편, 여러 곳의 작은 진지를 철수시키고 병졸을 규합하여 대기하도록 하였다.


장군은 도원수를 찾아뵈어 그 지휘를 받고, 또 장군 곽재우(郭再祐)에게 서찰을 보내어 원수를 함께하자는 뜻으로 약속했다. 조정에서는 여러 도(道)의 의병을 혁파하여 오로지 장군 휘하에 소속시키도록 하였다. 장군은 마침내 병졸을 이끌고 나아가 일본에 격문(檄文)을 전하니, 이에 원근에서 향응(響應)하고 진동하였고, 휘하의 졸개들도 용기백배하여 분격하며 싸우고자 하였으며, 왜적들에게 포위되어 진지를 지키던 관군과 중국 군사들도 장군에게 모두 의지하며 중하게 여겼다.


마침 조정에서는 강화(講和)를 논의하며, 여러 장군들에게 교전하지 못하도록 경계하였다. 장군은 부득이 진주(晉州)에 주둔해 병사들을 크게 집결시키고 밤낮으로 전투 장비를 더욱 손보았으며, 널리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싸우고 지키는 계책으로 삼아 누차 싸우기를 청했으나,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또 장군의 위명(威名)을 시기하고 공 세우는 걸 싫어하는 자가 있어 백방으로 저지하였다. 장군은 큰 공을 세울 수 없는 데다가 장차 화를 예측할 수 없음을 알아차리고서, 마음이 격해지고 울분이 쌓여 날마다 술을 마시다 얼마 후 마음의 병을 얻게 되었다.


이때 군중에 죄를 범한 자가 있어 장군이 목을 베었는데, 어떤 사람이 죄 없는 자를 죽였다고 무고(誣告)하자 임금이 장군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라고 명하였으나, 대신이 힘써 구하여 풀려났다. 임금께서 장군을 소견(召見)하여 위로하고 어구마(御廏馬)를 내리면서 속히 본진(本陣)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그 뒤에 이몽학(李夢鶴)이 호서(湖西 충청도)에서 반란을 일으켜 죽임을 당하자, 그때에 뜬소문이 돌기를 “김(金)ㆍ최(崔)ㆍ홍(洪)이 함께 반역하였다.”라고 하였는데, 김은 장군을 가리키고, 최는 장군의 별장인 최담령이요, 홍은 이천(利川)의 장사 홍계남(洪季男)이다.


적당(賊黨) 한현(韓玄)이 체포되어 문초하자 또 그 뜬소문이 실제라 하고, 또 “곽재우와 고언백(高彦伯)도 그의 복심(腹心)이다.”라고 말하였는데, 모두 당대의 명장들이었다. 당시 충청 병사(忠淸兵使) 이시언(李時言)과 경상 병사(慶尙兵使) 김경서(金景瑞)가 더욱 장군을 시기하면서 이때를 이용해 죽이려고 밀계(密啓)를 올려 ‘장군에게 반역한 정상(情狀)이 있다’고 말하였는데,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이 이시언 등의 말에 동조하니, 임금께서 대신들과 의논하여 장군을 체포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앞서 도원수 권율(權慄)이 장군을 보내서 호서의 역적 이몽학을 토벌하게 하였는데, 운봉(雲峰)에 이르러 이몽학이 이미 사로잡혔다는 말을 듣고 진주(晉州)로 환군하였으나, 얼마 후 장군은 체포되어 차꼬를 차고 서울에 이르게 되었다. 장군이 말하기를 “나는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맹세코 적을 격멸하고자 하였으니, 어찌 역적을 추종하여 반역을 꾀할 수 있단 말입니까?”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신이 만일 딴 뜻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어찌 도원수의 영(令)을 받들어 이몽학을 치려고 운봉까지 갔겠습니까? 이몽학이 체포된 뒤에는 또 어찌하여 병사를 인솔하고 본진으로 돌아가려고 했겠습니까? 다만 신은 상중(喪中)의 슬픔을 잊고 의병을 일으켰는데, 터럭만큼의 공도 없어서 충의를 펴 보지 못하고 도리어 효성만 손상케 하였으니, 이에 신에게 죽을죄가 있는 것입니다. 또 신은 응당 죽어야 하겠지만 최담령은 죄가 없으니, 청컨대 신 때문에 그를 함께 죽이지는 말아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임금께서 여러 신하에게 물으니, 정공 탁(鄭公琢)과 김공 응남(金公應南) 등이 김덕령은 분명 반역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역설하였지만, 영상(領相) 유성룡(柳成龍)만 홀로 대답하지 않았다. 임금께서 괴이하게 여겨 묻자, 유성룡이 대답하기를 “차후에 만일 예기치 못한 일이 생긴다면, 김덕령같이 용맹한 자를 풀어 주었다가 다시 잡아들일 수 있을지 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엄한 형벌을 받아 옥중에서 죽으니, 나이는 29세요, 때는 병신년(1596, 선조29) 8월이었다. 나라 사람들이 슬퍼하고 애석해하기를 마치 송(宋)나라 사람들이 악무목(岳武穆)을 슬퍼하듯 하였다. 최담령과 곽재우 등도 오랏줄에 묶여 옥에 갇혔으나, 뒷날 모두 풀려났다.


당초 장군을 체포할 적에 조정에서는 장군이 명령에 따르지 않을까 의심하여, 수신(帥臣)으로 하여금 음밀하게 일을 핑계로 장군을 불러 군영(軍營)으로 들어오면 포박하도록 하였다. 승지 서성(徐渻)이 말하기를 “김덕령은 반역자가 아닙니다. 사자(使者) 한 사람만 보내서 잡아오게 하면 잡아올 수 있는 것을, 어찌 구태여 사계(詐計)까지 쓰려고 합니까?”라고 하였다. 임금께서 서성이 쉽게 말하는 것을 의심하여 서성에게 성을 내며 말하기를 “네가 가서 잡아오너라.” 하였다. 서성이 도착하니 장군은 벌써 진주(晉州)의 감옥에 갇혀 있었다.


조정에 도착하자, 오히려 더욱 의심하여 쇠사슬로 묶고 큰 나무로 칼을 채웠는데, 장군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만일 모반하고자 한다면 이따위로 어찌 나를 꼼짝 못하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화를 내며 몸에 힘을 주자 쇠사슬이 모두 끊어졌다.


애초 장군이 군대를 일으킬 적에 서석산(瑞石山) 골짜기 안으로 가서 큰 칼을 주조하였는데, 칼이 만들어질 무렵 산에서 우레 같은 소리가 울리고 흰 기운이 산골짜기 안에서부터 하늘까지 뻗쳐 며칠간 사라지지 않았다. 그 고을에는 옛 명장(名將) 정지(鄭地)의 묘소가 있고, 자손들이 대대로 정지의 철갑 옷을 간수하고 있었는데, 장군이 그 철갑 옷을 가져다 입고 칼을 차고 가서 정지의 묘소에 제사를 올리며 고하였다. 제사를 지낼 때 차고 있던 칼이 세 번이나 저절로 풀려 땅에 떨어지자, 사람들이 모두 괴상하게 여기며 상서롭지 못하다고 생각하였다.


진주에 있을 때에 목장 안에 사나운 말이 있었는데, 한번 날뛰면 나는 듯해서 사람들이 가까이하지 못하였다. 장군이 소문을 듣고 마침내 직접 찾아가서 굴레를 씌우고 올라타니 말이 매우 온순해졌다. 그 후 장군이 처음 체포되었을 때 말이 며칠 전부터 먹지를 않았는데, 재차 체포되자 또 열흘이나 먹지 않았다. 이 때문에 사자(使者)가 채 도착하기도 전에 장군은 이미 자신에게 화가 닥쳐올 것을 알았다.


당시에 당화(黨禍)는 이미 벌어졌고 병란까지 일어나 나라가 곧 망하게 되었는데도, 붕당을 짓는 자들은 더욱 심하게 치고받으면서 초야에 있는 선비도 끌어들여 미워하고 저해(沮害)하였다. 장군은 비록 당인(黨人)은 아니었으나, 장군의 자부(姊夫)로서 공을 권하여 군사를 일으키게 했던 김공 응회(金公應會)와 장군은 모두 정공 송강(鄭公松江 정철(鄭澈))과 같은 고을 사람이고, 김응회는 또 우계(牛溪) 성 선생(成先生 성혼(成渾))의 문인이었다. 그때 송강과 우계는 모두 당화(黨禍)를 입은 우두머리였으므로, 이 때문에 김응회 역시 동시에 무함을 당해 체포되어 거의 죽을 뻔했다가 다행히 살아났다. 장군은 당시 제장(諸將)들이 시기하고 미워하는 대상인 데다가, 집정자(執政者)가 안에서 그들을 거들었기 때문에 마침내 죽음을 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장군이 죽은 뒤로 여러 장군들은 각자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 것을 의심하여, 곽재우(郭再祐)는 드디어 군병을 해산하고 벽곡(辟穀)을 익힌다며 앙화를 피하였고, 이순신(李舜臣)은 한참 싸울 즈음에 갑옷을 벗어 스스로 적의 탄환을 맞고 죽으니, 호남과 영남 사이에서는 부자와 형제가 의병에 가담하지 말라고 서로 경계하였다. 그런데 적들은 장군의 죽음을 듣고 비로소 날뛰면서 서로 경하하여 이르기를 “김덕령이 죽었으니, 더는 두려울 자가 없다.”라고 하였다.


장군은 아들이 없었고, 효종(孝宗) 때에 이르러 원통함을 밝혀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증직하도록 명하였다. 장군의 형 김덕홍(金德弘)은 고공 경명(高公敬命)을 따라 금산(錦山)에서 전사하였고, 장군의 처는 이씨(李氏)로, 정유년(1597, 선조30)에 병란을 피하여 담양(潭陽)에 있다가, 적을 만나 심하게 꾸짖으며 굽히지 않고 죽었다.


다음과 같이 논(論)한다. 김 장군이 군사를 일으킨 지 4년 동안 조그마한 공도 세우지 못하고 결국 무함을 받아 죽었으니, 어찌 된 일인가? 대체로 장군은 위명(威名)이 너무 성하여 이르는 곳마다 적은 반드시 군병(軍兵)을 거두고 먼저 피해 버려 끝내 한번의 교전(交戰)도 하지 못했고, 조정에서는 두려워하고 미워하여 시기하고 해치려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화의(和議)와 당화(黨禍)도 그 사이에 끼어들었으니, 공을 이루지 못하고 죽는 것이 마땅하다 하겠다. 세상에 전하기를, 장군이 군중(軍中)에 있을 때에 화란(禍亂)이 반드시 닥칠 것을 염려하여 그의 아우 김덕보(金德普)에게 이르기를 “네게 만일 나의 용맹이 있고 나에게 혹 너의 지혜가 있다면 몸도 보전할 수 있고 공도 세울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하니, 아마도 장군이 충용(忠勇)을 스스로 떨치면서 몸을 보전할 지혜를 강구할 겨를이 없었던 것인가? 비록 그러나 응후(應侯)가 백기(白起)를 죽이자 소왕(昭王)은 걱정하는 낯빛이 있었고, 송(宋)나라 사람이 단도제(檀道濟)를 죽이자 위병(魏兵)이 양자강(楊子江)에 이르렀으며, 진회(秦檜)가 악무목(岳武穆)을 죽여 송나라는 그로 인해 망하였으니, 그 사람들 모두가 꼭 꾀에 공교롭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아! 어찌 하늘이 아니겠는가.


[주-D001] 유아(儒雅) : 
유학(儒學)의 문아(文雅)한 기풍이나, 혹은 그러한 기풍을 가진 단아한 선비를 이른다.
[주-D002] 조운(趙雲) : 
삼국 시대 촉(蜀)나라의 무장(武將)으로, 자가 자룡(子龍)이다.
[주-D003] 삼경(三京) : 
서경(西京)인 평양(平壤)ㆍ중경(中京)인 개성(開城)ㆍ남경(南京)인 한양(漢陽)의 통칭이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宣祖)는 요동(遼東)으로의 망명(亡命)을 염두에 두고 의주(義州)로 파천하였는데, 이듬해에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조선에 출정하여 평양성과 개성을 차례로 탈환하고 마침내 한양을 수복하였다.
[주-D004] 방백이 …… 보고하자 : 
방백은 전라도 관찰사 이정암(李廷馣)을 가리킨다. 이정암은 1593년(선조26) 12월 13일 급히 장계를 올려 아뢰기를, “전일 삼가 받든 유지(有旨)에, 항오(行伍) 가운데 장재(將才)가 있어 쓸 만한 사람이 있는지 다방면으로 알아보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담양 부사(潭陽府使) 이경린(李景麟)의 첩보(牒報)를 보건대, 부내(府內)에 거주하는 교생(校生) 김덕령(金德齡)이 젊어서부터 용기가 뛰어나 한 고장이 모두 탄복하였는데 이제 장재를 발탁함에 있어 이 사람보다 나은 사람이 없지만 지금 상중(喪中)에 있어 응모하기가 어렵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담양에 이르러 덕령을 불러 보고 기복(起復)하여 종군함으로써 국가의 위급함을 구제하도록 권면하였던바 이제 바야흐로 의병(義兵)을 모집하고 있는데 원근이 다투어 붙좇는다고 합니다. 따라서 동지 수백 명을 모집하게 되면 적의 예봉을 꺾고 진(鎭)을 함몰시키기 위해 일대 사전(死戰)을 벌일 결심이라고 합니다. 그 뜻이 매우 가상하니 이런 사람은 특별히 조정에서 면려 표창하여 그 공효를 책임 지우소서. 그리고 군량과 병기 등의 물품도 사세가 사적으로 판출하기는 어려울 것이니 각 고을에 저축되어 있는 것 가운데서 숫자를 헤아려 제급(題給)하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국역 선조실록 26년 12월 13일》
[주-D005] 임금께서 …… 하사했다 : 
1593년(선조26) 12월 29일 비변사가 아뢰기를, “김덕령 군대의 군용이 매우 성대하다는 것은 신들도 들었습니다. 전에 들은 바에 의하면 덕령이 권율(權慄)에게 군호(軍號)를 청하였는데 권율이 초승장(超乘將)으로 호칭하게 했다고 합니다. 초승이라는 호칭은 별로 근거할 데가 없으니 조정에서 새로 호칭을 내리고 또 한 명의 관원을 보내어 그 군중(軍中)에 나아가 위무, 전진(戰陣)에 달려가 공을 세우도록 충의(忠義)를 격려 권면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선조가 따랐다. 그리고 이튿날 김덕령의 군대에 충용군이라는 호칭을 내릴 것을 계하하였다. 《국역 선조실록 26년 12월 29일, 30일》
[주-D006] 비수(淝水) …… 있었고 : 
원문의 ‘편사(偏師)’는 주력부대가 아닌 작은 부대를 뜻하는 말이다. 춘추 시대 한헌자(韓獻子)가 환자(桓子)에게 “체자가 편사로 출전해서 적진에 빠졌으니, 그대의 죄가 크다.[彘子以偏師陷, 子罪大矣.]”라고 하였다. 《春秋左氏傳 宣公12年》 부견(苻堅)은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때 전진(前秦)의 왕이다. 군사 백만으로 동진(東晉)을 멸하려다가 비수의 물가에서 동진의 명장 사현(謝玄)이 거느리는 정병 8만 명에게 참패를 당하였다. 《晉書 卷79 謝安列傳》
[주-D007] 독부(督府)의 …… 꺾었으니 : 
독부는 송 고종(宋高宗) 때 우윤문(虞允文)이 거느렸던 수군(水軍)을 지칭한다. 북송 때에 여진족(女眞族)이 금(金)나라를 건국하고 송(宋)나라를 침략하여 송나라가 강남으로 쫓겨 갔다. 남송은 금나라에 신하가 되겠다는 서약을 올리고 겨우 두 나라의 평화를 유지하였는데, 금나라에서 황족인 완안량(完顔亮)이 임금을 죽이고 자기가 황제가 되었으므로 역적인 양이라고 칭한 것이다. 당시 금(金)나라 폐제(廢帝) 양(亮)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남침하자, 고종이 우윤문에게 명하여 군대를 호궤(犒饋)하게 하였다. 우윤문은 여러 장수들을 지휘하고 작전을 지시하여 금나라를 크게 격파하였다. 《宋史 卷383 虞允文傳》
[주-D008] 병사들은 …… 왕성(旺盛)하니 :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선공(宣公) 12년조에 “명분이 바른 군대는 사기가 왕성한 반면, 명분이 없는 군대는 쇠하기 마련이다.[師直爲壯, 曲爲老.]”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9] 석저 장군(石底將軍) : 
김덕령 장군의 출생지가 광주의 석저촌(石底村)이라서 생긴 별명이다.
[주-D010] 원수(怨讎)를 함께하자는 뜻 : 
원문의 ‘동구(同仇)’는 원수를 함께한다는 말이다. 《시경(詩經)》 〈무의(無衣)〉에 “어찌 옷이 없다 해서, 그대와 솜옷을 같이 입으리오. 왕이 군사를 일으키면, 우리들 창과 모를 손질하여, 그대와 함께 원수를 치리.[豈曰無衣, 與子同袍? 王于興師, 修我戈矛, 與子同仇.]”라고 하였다.
[주-D011] 이때 …… 풀려났다 : 
《국역 선조실록》의 29년 2월 1일 기사에 따르면 “김덕령은 첩보(牒報) 전달을 지체했다는 이유로 역졸 한 사람을 매로 쳐서 죽였을 뿐만 아니라 도망한 군사의 아버지를 잡아다가 매를 쳐서 죽게 하였는데, 죽은 자는 바로 윤근수(尹根壽)의 노속(奴屬)이었다. 윤근수가 남쪽 지방을 순시하는 도중에 김덕령을 직접 만나 석방해 주도록 타일렀고 김덕령은 이를 승낙하였는데, 윤근수가 돌아가자 즉시 그를 죽였던 것이다. 이때 논의가 분분해서, 김덕령은 살인을 부지기수로 많이 했으며 심지어 사람을 물에 빠뜨려 죽였다고 말하는 자까지 있었다. 결국 김덕령을 나국(拿鞫)하였는데 증거를 들어 스스로 해명하자 상(上)은 특별히 방면할 것을 명하여 위로하고 달래어 보내고 또 전마(戰馬) 1필을 주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주-D012] 이몽학(李夢鶴)이 …… 당하자 : 
1596년(선조29) 임진왜란 중에 충청도에서 일으킨 반란을 가리킨다. 이몽학(?~1596)은 본관이 전주(全州)로, 왕족의 서얼 출신으로 한양에 살았다. 성품이 불량하고 행실이 좋지 않아 아버지에게 쫓겨나서 충청도ㆍ전라도 사이를 전전하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모속관(募粟官) 한현(韓絢) 등과 함께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에서 모의하고 의병을 가장하여 조련을 실시하였으며, 동갑회(同甲會)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친목회를 가장, 반란군 규합에 열중하였다. 한현은 어사 이시발(李時發) 휘하에서 호서(湖西)의 조련을 관리하라는 명을 받았으나, 민심이 이반되고 방비가 없음을 알아채고 이몽학과 함께 거사를 꾀하였다. 1596년 7월 일당이 야음을 틈타 홍산현을 습격하여 이를 함락하고, 이어 임천군(林川郡)ㆍ정산현(定山縣)ㆍ청양현(靑陽顯)ㆍ대흥현(大興縣)을 함락한 뒤 그 여세를 몰아 홍주성(洪州城)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반란군 가운데 이탈하여 관군과 내응하는 자가 속출하여 전세가 불리해졌고, 그는 부하 김경창ㆍ임억명(林億命)ㆍ태근(太斤) 3인에게 피살되었다.
[주-D013] 송(宋)나라 …… 하였다 : 
악무목(岳武穆)은 송나라의 명장 악비(岳飛)로, 무목(武穆)은 그의 시호(諡號)이다. 그는 금(金)나라를 쳐서 중원(中原) 회복을 목전에 두었는데, 간신 진회(秦檜)가 황제의 명령으로 불러서 군사를 돌리게 하고, 악비를 무함하여 결국 옥중에서 죽도록 하였으니, 송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宋史 卷365 岳飛列傳》
[주-D014] 서성(徐渻)이 …… 있었다 : 
《국역 선조실록》 1596년(선조29) 8월 1일 기사를 보면, “동부승지 서성의 서장에, ‘신이 단성(丹城)에 달려가 원수(元帥) 권율이 김덕령(金德齡)을 진주(晉州)에 가두었음을 듣고 즉시 선전관(宣傳官)으로 하여금 진주에 달려가 잡아오도록 하는 한편, 전 현감(縣監) 김경눌(金景訥) 등을 시켜 압송해 올려보내도록 했습니다.’ 하였는데, 추국청에 계하하였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주-D015] 정지(鄭地)의 묘소 : 
정지(1347~1391)의 본관은 나주(羅州), 시호는 경렬(景烈)이다. 고려의 무신(武臣)으로, 공민왕(恭愍王) 때에 왜구를 평정할 방책을 왕에게 올려 전라도 안무사(全羅道按撫使)가 되고, 뒤에 다시 순천도 병마사(順天道兵馬使)가 되어 순천과 낙안(樂安) 등지에 침입한 왜구를 소탕하였다. 그의 묘소는 광주의 망월동에 있다.
[주-D016] 당화(黨禍) : 
기축옥사(己丑獄事)와 신묘옥사(辛卯獄事)를 가리킨다. 기축옥사는 1589년(선조22)에 동인(東人)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당화이다. 이 옥사는 당시에 황해도 관찰사 한준(韓準), 재령 군수 박충간(朴忠侃), 안악 군수 이축(李軸), 신천 군수 한응인(韓應寅) 등이 정여립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고변함으로써 시작되었는데, 서인(西人)인 정철(鄭澈)이 옥사를 엄하게 다스려서 백유양(白惟讓)ㆍ이발(李潑)ㆍ이길(李洁)ㆍ김우옹(金宇顒)ㆍ정언신(鄭彦信)ㆍ정언지(鄭彦智)ㆍ정창연(鄭昌衍) 등 동인 인물들이 대거 처형되거나 유배당하였다. 신묘옥사는 1651년(효종2) 김자점(金自點)과 그의 아들 김식(金鉽)이 수어청 군사와 수원(水原)의 군대를 동원하여 원두표(元斗杓)ㆍ김집(金集)ㆍ송시열(宋時烈)ㆍ송준길(宋浚吉)을 제거하고 숭선군(崇善君)을 추대하려고 했다는 역모가 폭로됨으로써, 부자(父子)가 함께 복주(伏誅)된 사건을 가리킨다.
[주-D017] 같은 고을 사람 : 
모두가 전라도 광주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주-D018] 곽재우(郭再祐)는 …… 피하였고 : 
벽곡(辟穀)은 도교(道敎)에서 말하는 일종의 수련술(修鍊術)이다. 《국역 광해군일기》 즉위년 8월 13일 기사에 수록된 윤근수(尹根壽)의 차자(箚刺)에 따르면, “곽재우는 임진왜란 초기에 필부로서 군병을 일으켜 정진(鼎津)을 가로막아 지키며 왜적의 진군을 차단하여, 누차에 걸쳐 그 예봉을 무너뜨리고 적의 기세를 꺾어서 마침내 적이 정진을 건너 서쪽으로 향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니, 그 공적은 위대합니다.……중략……그런데 곽재우가 산성 방수(防守)를 그만둔 뒤로 벽곡을 하여 솔잎만을 먹고 있으므로, 남들은 그가 도인(道引)을 하는 것이라고 하나, 아는 사람의 말은, 김덕령(金德齡)이 뛰어난 용맹과 힘을 지니고도 남의 모함에 빠져서 마침내 비명에 죽자, 곽재우가 자신도 명장이므로 혹시나 화를 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서 이를 핑계로 세상을 도피하는 것이라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주-D019] 효종(孝宗) …… 명하였다 : 
실록에 따르면, 김덕령의 신원과 복관(復官)은 1661년(현종2)에 이루어졌다. 《국역 현종실록 2년 8월 30일》
[주-D020] 응후(應侯)가 …… 있었고 : 
응후는 전국 시대 진 소왕(秦昭王)의 재상이었던 범수(范睢)를 이른다. 당시 장군 백기(白起)가 주위의 나라들과 싸워 무려 70여 성(城)을 탈취하면서 명성을 떨쳤는데, 후일 범수는 진 소왕에게 백기가 왕명에 복종하지 않는다고 참소하고 자결하게 하였는데, 이때 소왕은 얼굴에 걱정스런 빛을 띠었다. 《史記 卷73 白起列傳》
[주-D021] 송(宋)나라 …… 이르렀으며 : 
단도제(檀道濟)는 남북조 시대 송나라의 인물로, 무제(武帝) 때에 북위(北魏)를 정벌하고서 전군(全軍)을 보전하여 돌아와 사공(司空)에 임명되는 등 위명이 대단하였다. 이후 송나라 조정에서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거짓 조서(詔書)를 내려 불러들이어 주살하였다. 북위에서는 이 소식을 듣고 “단도제가 죽었으니 꺼릴 것이 없다.”고 하면서 양자강을 건너 공격해 왔다. 《宋書 卷43 檀道濟列傳》
[주-D022] 진회(秦檜)가 …… 망하였으니 : 
악무목(岳武穆)은 송나라의 명장 악비(岳飛)로, 무목(武穆)은 그의 시호(諡號)이다. 그는 금(金)나라를 쳐서 중원(中原) 회복을 목전에 두었는데, 간신 진회(秦檜)가 황제의 명령으로 불러서 군사를 돌리게 하고, 악비를 무함하여 결국 옥중에서 죽도록 만들었다. 이로 인해 송나라도 결국 망하고 말았다. 《宋史 卷365 岳飛列傳》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저자(연도) 제목 발행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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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남구문화원(2014) 광주 남구 마을(동)지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14) 광주 남구 민속지 광주남구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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