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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궁중의 버들〔宮中柳〕 - 성호전집 제8권 / 해동악부(海東樂府)
    궁중의 버들〔宮中柳〕 - 성호전집 제8권 / 해동악부(海東樂府) : 성호(星湖) 이익(李瀷)광해군 때에 유씨(柳氏)가 외척으로 정사를 주도하였다. 소암(疎菴) 임숙영(任叔英)이 과거 시험의 대책(對策)에서 극언을 하니, 석주(石洲) 권필(權韠)이 이를 두고 시를 지었다. 궁 버들은 푸르고 꾀꼬리 어지러이 나는데 / 宮柳靑靑鸎亂飛 온 도성의 벼슬아치 봄볕에 아양 떠네 / 滿城冠蓋媚春暉조정에선 다 같이 태평성대 축하하거늘 / 朝家共賀昇平樂누가 곧은 말이 선비 입에서 나오게 했나 / 誰遣危言出布衣 석주가 이 필화(筆禍) 사건에 걸려 장을 맞고 유배 가던 도중에 죽으니, 온 나라 사람들이 슬프게 여겼다. 천지가 모두 봄이라 만물이 번창하는데 / 天地同春物皆昌그중에 버들이 먼저 향기를 발하누나 / 就中楊柳先芬芳구름까지 솟은 윗가지엔 봉황이 깃들고 / 上枝干雲宿鸞鳳늘어진 아랫가지엔 천 가닥이 자라네 / 下枝拂地千絲長분칠한 담장 머리에 비단 휘장 둘렀는데 / 粉牆前頭錦幃張그 가운데 온갖 꽃이 마음껏 향기롭구나 / 中間百花隨意香바람결에 한 곡조 풍악 소리 들리니 / 風便一曲聽絲篁뾰로롱 가늘게 화답하며 꾀꼬리 날아가네 / 嚶鳴細和黃鸎翔꾀꼬리가 때로 화려한 누각 곁을 맴도니 / 黃鸎時繞畫樓傍행인의 마음은 부질없이 방황하네 / 行人著意徒彷徨다들 태평의 상서를 말하고 / 皆言太平祥화창한 기운이 사방에 가득하여 / 玉燭轉四方집집마다 즐거움 그치지 않고 / 家家樂未央거리에는 많은 사람 줄을 이뤘는데 / 街路列成行대담한 선비가 거리낌 없이 간언하여 / 士有大膽言不妨붓 휘둘러 지적하니 임금도 무색해라 / 奮筆指天天無光인정은 바삐 가는 물처럼 쉬이 떠나는데 / 人情易逝如水忙세도는 부질없이 봄날을 붙잡으려 하네 / 世道欲挽留春陽아아, 홀로 원통하고 분한 마음 품으니 / 嗟爾獨抱冤憤腸선인이 버림받는 것 감당할 수 없네 / 蘭焚蕙委不可當그대는 들어 보았나 / 君不聞여장이란 서생이 지은 노래를 / 書生作歌字汝章악부에 전하는 노랫소리도 양양하다 / 樂府傳唱聲洋洋훌륭한 문장은 몸의 재앙이 될 뿐인 걸 / 文章只解爲身殃궁 버들에 미친 듯 부는 바람만 보이네 / 但見宮柳風吹狂바람 부는 궁 버들에 나뭇잎 드날리나 / 風吹宮柳葉飄揚한겨울의 된서리는 어찌할 수 없으리 / 無柰歲暮多繁霜[주-D001] 궁중의 버들 : 이 내용은 광해군 조에 선비가 시로 인해 화를 당한 사건으로 매우 널리 회자되었다. 《명재유고(明齋遺稿)》 권43 〈동몽교관 증 사헌부 지평 권공 행장〉에 전후의 내용이 자세히 실려 있다.[주-D002] 임숙영(任叔英)이 …… 하니 : 임숙영(1576~1623)은 자는 무숙(茂叔)이고, 호가 소암(疎菴)이다. 문과 별시 대책(對策)에서 올린 글에 외척의 전횡과 후궁의 청탁에 대해 비판한 내용이 있어 광해군의 노여움을 사서 삭방(削榜)되었다가 후에 이항복의 구원으로 다시 복과(復科)되었다. 임숙영의 대책 내용은 《광해군일기》 3년 3월 11일 기사에 전문이 실려 있다.[주-D003] 권필(權韠) : 1569~1612.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여장(汝章), 호는 석주(石洲)이다. 권벽(權擘)의 아들이자 정철(鄭澈)의 문인으로, 문재가 매우 뛰어났으나 성격이 자유분방하고 구속받기 싫어하여 제술관과 동몽교관에 추천되었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광해군 때 김직재(金直哉)의 옥사에 연루되어 장을 맞고 귀양 가다가 죽었다. 인조반정 이후 사헌부 지평에 추증되었고, 광주(光州) 운암사(雲巖祠)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석주집(石洲集)》이 전한다.[주-D004] 鸎亂飛 : 대본에는 ‘鸎亂飛’라고 되어 있으나, 권필의 《석주집》과 본시가 인용된 다른 문헌에는 모두 ‘花亂飛’라고 되어 있다. 성호의 실수인지 의도적으로 고쳤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래 성호의 악부에서도 계속 꾀꼬리를 시 전개의 한 소재로 삼고 있어서 대본대로 번역하였다.[주-D005] 석주가 …… 죽으니 : 권필이 지은 시를 〈궁류시(宮柳詩)〉라고 하는데 광해군의 처남인 유희분(柳希奮) 등이 외척으로 권세를 부리던 폐단을 기롱한 것이다. 당시 김직재의 무옥(誣獄)에 연루된 조수륜(趙守倫)의 집을 수색하다 이 시를 발견해 올렸는데, 광해군이 대로하여 그 출처를 조사하여 권필임을 알게 되자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친국(親鞫)을 하였다. 권필은 친국에서 장을 맞은 뒤 함경도 경원(慶源)으로 귀양 길에 올랐는데 동대문 밖에서 사람들이 주는 전별의 술을 폭음하고 이튿날 죽었다. 시에서 말한 궁궐의 버들은 유씨(柳氏)를 비유한 것이라고 알려졌다. 이 시가 《석주집》 권7에는 〈임무숙이 삭과되었다는 말을 듣고〔聞任茂叔削科〕〉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주-D006] 선인(善人)이 버림받는 것 : 원문의 난분혜위(蘭焚蕙委)는 난초를 불태우고 혜초를 버렸다는 뜻으로, 학덕 있는 선인이 버림받은 것을 말한다. 굴원의 〈이소(離騷)〉에 “내 이미 난초를 구원에 심고, 또 혜초를 백묘에 심었네.〔余旣滋蘭之九畹兮 又樹蕙之百畝〕” 하였다.
    2020-09-23 | NO.540
  • 권 원수(權元帥)의 행주비(幸州碑) - 간이집 제1권 / 비(碑)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제도 도원수(諸道都元帥) 정헌대부(正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증(贈)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춘추관사 홍문관제학 동지성균관사 권공 율(權公慄)이 세상을 떠난 지 일 년이 지나고 나서, 공의 막료(幕僚)였던 사람들이 ‘공이 전에 거두었던 행주(幸州)의 승첩(勝捷)이야말로 그 공이 워낙 컸던 만큼 그 당시 현장의 언덕에 비를 세워 그 공적을 영원히 전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뜻으로, 공의 사위인 현재의 영상(領相) 이공(李公)을 찾아가 나에게 글을 보내 비문을 청하도록 부탁하기에 이르렀다.삼가 살펴보건대, 임진년 4월에 일본이 병력을 대대적으로 동원하여 우리나라를 침범해 왔다. 그러고는 미처 대비하지 못한 우리의 허점을 틈타서 잇따라 우리의 군진(軍陣)과 고을을 함락시켰으므로 중외(中外)가 모두 크게 경악하였다.이에 상이 이르기를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권모(權某)의 재주를 한 번 시험해 볼만하다고 하는데, 지금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하였다. 이렇게 해서 공이 전임(前任) 의주 목사(義州牧使)의 신분에서 바로 기용되어 광주 목사(光州牧使)에 임명되었다.당시에 조정의 신하들은 호남과 영남 지방을 사지(死地)로 여기고 있었는데, 공은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곧장 단기(單騎)로 치달려 갔다. 그러나 광주에 도착하자마자 경성(京城)을 이미 지킬 수 없게 되어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몽진(蒙塵)하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징집한 군사들을 이끌고 서쪽으로 들어가 호위하려는 계책을 세우게 되었다.이때 전라 순찰사(全羅巡察使) 이광(李洸)이 군사 4만 명을 징발한 다음, 방어사(防禦使) 곽영(郭嶸)과 함께 영(嶺)을 사이에 두고 북상(北上)하면서, 공에게 방어군(防禦軍)의 중위장(中衛將) 임무를 맡게 하였다. 이는 서생(書生)을 무부(武夫) 취급하는 조치였으므로 혹 난색을 표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공은 의연히 “내가 행해야 할 직분이다.” 하였다. 직산(稷山)에 이르러 충청(忠淸) 군사와 합세, 수만의 군세(軍勢)를 이룬 뒤에 다시 수원(水原)으로 진군하였다.이때 이광이 곽영으로 하여금 용인(龍仁)에 있는 적의 진영을 먼저 공격하게 하였으므로, 공이 건의하기를 “왜적이 우리보다 먼저 험준한 지세를 점거하고 있는 만큼, 우리가 습격하기에 유리한 형세가 못 된다. 그리고 지금 이것보다 큰 문제가 있으니, 그것은 경성(京城)이 이미 적의 손에 넘어가 있는 상황에서 주공(主公)이 한 지방의 군사들을 모두 이끌고 왔다는 점이다. 그러니 지금으로서는 오직 곧장 위로 올라가 조강(祖江)을 건넌 다음 임진(臨津)을 굳게 막아 적이 서쪽으로 향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제압하기에 유리한 형세가 전개될뿐더러, 행재소(行在所)에 품달하여 명령을 받을 수 있는 길도 열리게 될 것이니, 장차 큰 계획을 실천에 옮길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지금 소규모의 적을 상대로 예봉(銳鋒)을 다투어서는 안 될 것이요, 그렇게 하는 일은 또 만전을 기하는 일이 못 되는 만큼 우리의 성세(聲勢)와 위신을 손상시키는 결과만 빚게 되고 말 것이다.” 하였다.그리고 선봉장(先鋒將) 백광언(白光彦)과 조전장(助戰將) 이지시(李之詩)가 각각 정예 군사 1천 명을 직접 이끌고 갈 때에도 그들이 경솔하게 진격하려는 뜻을 보이자, 공이 또 경계시키면서 상대가 먼저 공격해 오기를 기다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공의 이 모든 말들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백광언 등이 모두 전사(戰死)하는 사태에까지 이르고 말았는데, 이날 밤에 군중(軍中)이 지레 겁내며 놀라더니 아침에 적의 모습만 보고도 크게 무너지고 말았으므로, 제군(諸軍)이 모두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이에 공 역시 부득이 광주(光州)로 되돌아오고 나서 잠을 잘 때에도 옷을 벗지 않은 채 다시금 주장(主將)을 설득해 보려고 하였으나 오래도록 조용히 있기만 하자, 곧장 분연(奮然)히 일어나 말하기를 “지금은 신자(臣子)가 가만히 앉아서 나라가 망하는 날만 기다리고 있을 때가 아니다.” 하고는, 마침내 경내(境內)의 자제 5백여 인을 끌어모으는 한편 이웃 고을에 격문(檄文)을 돌려 또 1천여 인을 얻은 다음, 경상도와의 경계로 나아가 진을 쳤다.이때 남원(南原)의 백성들이 왜적이 들이닥치기도 전에 자기들끼리 소요를 일으키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잠시 이를 진정시키고 위무(慰撫)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순찰사가 공의 보고를 접하고는 공에게 부절(符節)을 내주어 임시로 도절제(都節制)를 맡게 하면서, 열읍(列邑)의 관군(官軍)을 지휘 감독하여 영(嶺)에서 호남으로 넘어오는 왜적의 길목을 차단하게 하였으므로, 공이 이치(梨峙)로 진군하여 험준한 지세를 의지하고 적을 기다렸다.7월에 왜적의 공격을 받고 신속히 격퇴시켰으나, 군중(軍中)에서 용명(勇名)을 떨치던 동복 현감(同福縣監) 황진(黃進)이 적의 탄환에 맞아 퇴각하는 바람에 군사들의 사기가 크게 저하되면서, 미처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에 왜적이 요새지 안으로 뛰어들어 형세가 매우 급하게 되었다. 이에 공이 칼을 빼어 들고 크게 소리를 지르며 앞장서서 적의 칼날을 무릅쓰자, 전사(戰士)들이 모두 일당백(一當百)의 용맹심을 발휘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왜적들이 사상자를 돌볼 틈도 없이 치중(輜重)을 낭자하게 내버려 둔 채 달아나고 말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 행재소(行在所)에서 공을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임명하였는데, 이는 나주가 광주보다도 중요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나서 곧이어 본도(本道)의 순찰사(巡察使)를 또 제수받게 되었다. 교서(敎書)가 진중(陣中)에 도착하던 날, 공이 서쪽을 향하여 머리를 조아리며 눈물을 쏟자, 그 비통한 모습에 군사들 모두가 감동되었다. 공이 방어사(防禦使)로 하여금 이치(梨峙)를 대신 지키게 하고, 자신은 전주(全州)로 달려가 도내(道內)의 군사 1만여 명을 수습한 뒤, 9월에 근왕(勤王)의 계책을 실행에 옮기려 하였다.당시에 여러 왜적들은 평양(平壤)과 황해(黃海)와 개성(開城)을 나누어 점거하고 있었으며, 경성을 점거하고 있는 자들은 꽤나 큰 진영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이들이 군사들을 풀어 놓아 사방을 약탈하게 하는 바람에 서쪽 행재소로 가는 길이 끊어지자, 여러 근왕(勤王)의 부대들 역시 모두 강화(江華)로 들어가서 그저 강을 사이에 두고 굳게 지키고만 있는 실정이었다.공은 상이 의주(義州)에 머물러 있는 상황에서 왜적이 아직은 평양 이북을 넘어가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는, 우선 경성에 대한 공격을 도모함으로써 서쪽에 가 있는 적들로 하여금 동쪽을 돌보느라 틈이 없게끔 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최상의 방책이라고 판단을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수원(水原)의 독성(禿城)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상에게 보고를 올리니, 상이 상방검(尙方劍)을 풀어 급히 내려 주며 이르기를 “장수들 중에 군령(軍令)을 따르지 않는 자가 있거든 이것으로 처단하라.” 하였다.경성에 있는 왜적들로서는 공이 군사상의 요해지(要害地)에 버티고 있는 것이 걱정거리였다. 그래서 병력 수만 명을 세 개의 진영으로 나눈 뒤 오산(烏山) 등 지역에 분산 배치하고는 수시로 왕래하면서 도전을 해 왔다. 그러나 공은 성벽을 굳게 지키고 대응을 하지 않으면서 이따금씩 기병(奇兵)을 내보내 예봉을 꺾어 놓곤 하였으므로, 왜적이 결국에는 아무런 소득도 거두지 못한 채 밤에 영채(營寨)를 불사르고 떠나갔다.계사년 2월에 공이 휘하의 정병(精兵) 약 4천 명을 두 개의 부대로 나눈 뒤, 하나는 절도사(節度使) 선거이(宣居怡)에게 주어 금주(衿州)의 산에 진을 치고서 성원(聲援)을 하게 하는 한편, 하나는 공이 직접 이끌고서 양천강(陽川江)을 건너 고양(高陽)의 행주산성(幸州山城)에 진을 쳤는데, 이때의 병력이 실로 2300인에 불과하였다.이때 중국의 대장인 이공 여송(李公如松)이 구원병을 총지휘하여 동쪽으로 내려와서는 벌써 평양을 탈환하는 등 그 위명(威名)을 크게 떨치고 있었다. 그래서 왜적 중에 평양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진 자, 황해 지방을 버리고 온 자, 개성에서 후퇴한 자, 함경도에서 풍문을 듣고 도망쳐 온 자들이 모두 경성에 모여들었으므로, 경성에 있는 왜적들은 오히려 그 형세가 더욱 치성해지고 있었다.이러한 때에 공이 외로운 군대를 이끌고서 경성과 근접한 지역으로 들어갔던 것인데, 왜적은 공의 병력이 소수인 것을 알고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으면서 그저 한번 엿보다가 발로 짓밟아 버리면 그만이라고 여기고 있었다.그달 12일 여명(黎明)에 척후(斥候)하던 관리가 왜적의 출현을 보고하자, 공이 군중에 동요하지 말라고 경계시킨 뒤 높은 곳에 올라가 바라보니, 성으로부터 5리(里) 떨어진 지점에 벌써 왜적이 벌판을 까맣게 뒤덮으며 밀려오고 있었다. 왜적은 먼저 1백여 기(騎)를 내보내 우리를 압박하더니, 이윽고 대대적으로 병력을 동원하여 성 주위를 포위하고 성곽을 타고 올라왔는데, 계속 증가되는 숫자가 다시 헤아릴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이에 아군(我軍)이 결사적으로 항전하면서 화살과 바윗돌을 비 오듯 아래로 쏟아 붓자, 왜적이 병력을 셋으로 나눈 뒤에 계속 교대로 휴식을 취하면서 공격을 가해 왔다. 묘시(卯時)에서 유시(酉時)까지 이어진 세 차례의 격전에서 왜적의 전세(戰勢)가 불리해지자, 이제는 갈대 단을 묶어 바람결에 불을 놓기 시작하였는데, 그 불길이 목책(木柵)에까지 번져 오자 성안에서 물을 길어 와 끄기도 하였다.그런데 다만 서북쪽의 자성(子城 성안에 설치한 또 다른 작은 성)을 지키던 승병(僧兵)의 기세가 약간 꺾인 틈을 타서 왜적이 함성을 지르며 쳐들어오자 군사들 모두가 그 분위기에 휩쓸려 무너지려는 조짐을 보였다. 이에 공이 칼을 빼들고 장수들을 질타하자 여러 장수들이 다투어 예봉(銳鋒)을 막아 서며 육박전을 벌이기에 이르렀다.그리하여 결국에는 왜적이 대패(大敗)한 나머지 시체를 네 곳에 쌓아 두고 불을 지른 뒤에 그곳을 빠져나갔는데, 우리 군대가 아직 남아 있는 왜적들을 붙잡아 목을 벤 것만도 130여 급(級)이나 되었으며, 그들이 버리고 간 기치(旗幟)와 개갑(鎧甲)과 도창(刀槍) 등을 노획한 것 역시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당시에 이 제독(李提督)이 개성(開城)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그 선봉(先鋒)인 유격(遊擊) 사대수(査大受)가 공의 대첩(大捷) 소식을 듣고는 다음 날 편비(褊裨)를 보내 전쟁터를 돌아보게 하였으며, 또 며칠 지난 뒤에는 공과의 면회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이에 공이 군진(軍陣)을 정돈하고서 그를 맞았는데, 그가 와서는 탄식하며 말하기를 “외국에도 이런 진짜 장수가 있었구나.” 하였다.얼마 지난 뒤에 공이 파주(坡州)의 산성으로 군대를 이동시켰다. 왜적이 행주에서의 패배를 기필코 보복하려고 군사를 총동원하여 서쪽으로 향하다가, 공이 성벽 위에 서서 행주에서보다 더 엄하게 대비하고 있는 것을 멀리서 바라보고는, 그곳을 공격하지 말라고 서로 경계하며 그냥 돌아간 것이 무려 세 차례나 되었다.4월에 이 제독(李提督)이 심유경(沈惟敬)의 계책을 들어 줌에 따라, 여러 왜적들이 강화(講和)의 약속을 얻어 냈다고 일컬으면서 어느 날 갑자기 경성을 버리고 떠나가기 시작하였다. 공이 이 소문을 듣고는 날랜 군사들을 이끌고 경성으로 치달려 들어갔으나, 그때는 이미 왜적이 한강(漢江)을 건넌 뒤였다.그런데 이 제독이 유격(遊擊) 척금(戚金)을 보내 공의 동정(動靜)을 일일이 보고하게 하다가, 한강 나루에 있는 배들을 모두 거두어 추격하는 군대가 건너가지 못하게 방해하였으므로, 공이 울분을 터뜨리면서도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어 군대를 해산시키고 본도(本道)로 돌아오게 되었다.대체로 살펴보건대, 공은 처음부터 경성을 수복(收復)하려는 뜻을 품고 있었는데, 그것이 그만 전임 순찰사(巡察使) 때문에 좌절되고 말았었다. 그리하여 양호(兩湖)의 6만 병력이 집결했던 것을 계기로, 임진(臨津)으로 달려가서 기필코 지켜 낼 수 있는 그 좋은 기회를 무산시킨 채, 급기야는 수원(水原)에서 어처구니없는 패배를 맛보게 되기에 이르렀으니, 이치(梨峙)에서의 승리 같은 것은 불행을 당하고 나서 조금밖에 분풀이를 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몇 년 동안이나 봉시 장사(封豕長蛇)가 다시는 호남 지방을 넘보지 못하게 한 결과, 호남의 그 풍성한 곡물을 거두어 동쪽과 서쪽에 수송해서 충분히 공급하게 해 주었으니, 이것이 모두 누구의 덕분이라고 해야 하겠는가.그러다가 순찰사의 직책을 대신 맡게 된 뒤로부터는 일도(一道)의 군사들을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는 하였으나, 당시에 그 병력을 진작부터 쓰고 있는 자들이 많았으니, 가령 절도사(節度使) 최원(崔遠)이 병력을 먼저 장악하고서 근왕(勤王)하는 대군(大軍)이라고 일컫다가 강화(江華)에서 기세가 꺾여 버린 경우 같은 것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밖에도 곳곳마다 의병이나 관군(官軍) 등 여러 부대들이 혹은 싸우고 혹은 지키고 있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다.그래서 공이 겨우 1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서 북상(北上)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정도의 군세(軍勢)로는 곧장 승냥이와 범의 소굴을 두들겨 팰 수가 없었기 때문에 독성(禿城)에서 그들의 목을 잠시 누르고 있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만으로도 좌충우돌하는 적의 위세를 꺾어 놓음으로써 양호(兩湖)와 기우(畿右)의 길이 막힘없이 뚫리게 하는 효과를 거둘 수가 있었다.그러다가 행주(幸州)에 이르게 되어서는, 주인이 객을 맞는 유리한 위치에서 부족한 병력으로 엄청난 수의 왜적을 무찌르는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대체로 보건대, 중국 장수가 평양을 탈환한 그 위세도 아직 남아 있었지만, 그뿐만이 아니라 이 행주의 대첩 역시 흉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에 충분한 효과가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만약에 왜적을 겁나게 하는 이런 승리가 있지 않았더라면, 심유경(沈惟敬) 같은 자가 백 명이 있었다 하더라도, 하루아침에 왜적이 경성을 버리고 떠나가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쯤 되어서는 공이 당초에 경성을 수복하려고 했던 그 뜻이 어느 정도나마 풀어지게 되었다고도 할 것이다.6월에 도원수(都元帥)에 임명되어 영남(嶺南)의 제군(諸軍)까지 모두 지휘하게 되었는데, 그 뒤로 도원수의 직책을 내놓기도 하고 다시 임명되기도 하다가, 정유년 겨울에 제독(提督) 마귀(麻貴)를 따라 울산(蔚山)의 전역(戰役)에 참가하였다.그리고 무술년 가을에는 제독 유정(劉綎)을 따라 순천(順天)의 전역(戰役)에 참여하였는데, 제독의 지휘를 받는 신분상의 제약 때문에, 선견지명을 발휘하여 건의를 올려도 채택이 되지 않고, 성곽을 먼저 타고 올라가는 용맹이 있어도 공을 세울 수가 없었으므로, 공만이 비통한 눈물을 흘렸을 뿐만이 아니라 뜻있는 인사들 모두가 이를 애석하게 여겼다.그러나 이제는 왜적이 또다시 엿보면서 깊이 침입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얼마 뒤에는 또 군대를 철수하여 돌아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일단 경성을 수복하고 우리 힘으로 지켜 낼 수가 있게 되었으니, 이쯤 되어서는 공이 원래 품은 뜻이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하겠다. 만약에 중흥을 이룬 공적을 세운 사람이 없다고 한다면 그만이지만, 있다고 한다면 과연 누구를 첫째로 꼽아야 하겠는가.기해년에 공이 병으로 면직을 청하고 돌아간 뒤 도성에서 치료를 받기도 하였으나 다시 조정에 복귀하지 못한 채 7월에 세상을 하직하니 향년 63세였다. 부음(訃音)이 들리자 상이 애도하며 정사(政事)를 보지 않고 조문(弔問)과 제례(祭禮)와 부의(賻儀)를 특별히 더하게 하였다.아, 공의 공적에 대해서 본조(本朝)에서는 얼마나 뚜렷하게 드러내 보여 주었던가. 병신년에 공이 재차 도원수의 직책을 사직하자 윤허하지 않고 내구마(內廐馬)를 하사하며 교서(敎書)를 내렸고, 하직 인사를 드리자 술을 하사하는 동시에 또 내구마와 말 안장을 주면서 교서를 내렸고, 다시 무술년에 파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자 특별히 장려하며 유시(諭示)를 내렸었다. 그리고 공이 세상을 하직하자 관직을 추증(追贈)하도록 하는 한편 대신(大臣)에게 자문을 하며 시호(諡號)를 의논토록 하였다.아, 공의 명성이 중국 조정에는 얼마나 성대하게 전파되었던가.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은 본국에 상(賞)을 행하는 것과 관련하여 자문(咨文)을 보내었고, 병부 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은 천자에게 주문(奏文)을 올려 공의 공적을 아뢰었고, 천자의 명을 받든 홍려시(鴻臚寺)의 관원은 본국에 칙지(勅旨)를 선유(宣諭)하였다.그리고 전진(戰陣)에 임했을 당시에는 제독 마귀(麻貴)가 호령을 제대로 행한다고 칭찬하였고, 경리(經理) 양호(楊鎬)는 공의 장병이 역전(力戰)하는 것을 가상하게 여겼으며, 세월이 흐른 뒤에도 중국 조정의 대소 관원들이 공의 이름만 듣고서도 그 사람됨이 어떠한지를 모두 가늠해 알 수 있게 되었는가 하면, 왜적의 여러 수령들조차도 권 원수(權元帥)의 기거가 어떠한지 꼭 안부를 묻곤 하였다. 이러한 종류에 대해서는 태사씨(太史氏 사관(史官))가 역사에 모두 기록해 놓을 것인데, 비문에 구체적으로 써넣을 성격의 것도 아닌 만큼 이쯤 해서 생략하기로 한다.공의 자(字)는 언신(彦愼)이요, 관향은 안동(安東)으로서 고려(高麗)의 태사(太師) 권행(權幸)의 후예이다. 그리고 본조(本朝)에 들어와서는 찬성(贊成) 권근(權近)의 6대손이요, 영의정 권철(權轍)의 아들이니, 그러고 보면 공이 세운 공업(功業) 역시 본디 그 유래가 있다고 하겠다.공은 사람을 다스리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특히 성심(誠心)과 화기(和氣)로 대하였을 뿐 결코 엄의(嚴毅)를 앞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든 간에 감복을 하여 사력(死力)을 다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공은 46세 되던 해인 임오년 문과(文科)에 급제한 뒤 낭관(郞官)을 거쳐 당상(堂上)에 뛰어올랐고, 급기야는 유장(儒將)으로서 현달하게 되었다. 공은 관직을 역임한 것도 그다지 많지 않고 조정의 반열에 서 있었던 적도 드물기만 하다. 그저 어렵고 힘든 시대를 만나 그 능력을 다 발휘한 것은 아니다.그러나 옛날 공의 대장 깃발 아래에 있었던 인사들이 공의 덕의(德誼)를 사모하면서도 이를 선양(宣揚)할 길이 없자, 다투어 출자(出資)하여 힘을 모은 다음에 공의 형인 상호군공(上護軍公)에게 이를 알리고서 이 비석 건립에 서로들 힘을 쏟고 있으니, 이 또한 얼마나 가상하다 하겠는가.상호군공은 가선대부(嘉善大夫) 권순(權恂)이요, 영상(領相) 이공(李公)은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 항복(恒福)이다. 공은 두 번 장가들었으나 모두 아들을 두지 못하였다. 공의 묘소는 경성 서쪽 홍복산(洪福山)에 있다.[주-D001] 봉시 장사(封豕長蛇) : 엄청나게 큰 멧돼지와 뱀처럼 포학하고 탐욕스러운 무리를 가리키는 말인데, 여기서는 왜적이 그렇다는 말이다.최립(崔岦 1539~1612), 《간이집(簡易集)》 
    2022-03-04 | NO.539
  • 권벽-次光州喜慶樓韻
    長笛那堪暮倚樓 긴 젓대소리 저녁 누대에 기대어 어이 견디리美人遙望隔三秋 가을 석 달 동안 떨어진 미인 멀리 바라보네親朋會面渾靑眠 친한 벗 얼굴을 보니 모두 반가이 맞아주고道路關心易白頭 도로에 마음 두니 흰머리로 세어졌네木落山容當檻瘦 나뭇잎 떨어진 산 용모 난간을 당하여 수척하고雨收嵐氣入簾浮 비 거둔 남기는 주렴에 들어 뜨네詩情正與羈情倦 시 읊는 마음 곧 나그네 정과 함께 게으르니欲就新篇不自由 새로운 시편을 지으려 해도 자유롭지 못하구나 -습재집(習齋集) 권1권벽(權擘, 1520-1593)의 자는 대수(大手)이며 호는 안배당(安排堂), 습재(習齋)이다. 아들이 석주 권필로 광주 운암서원에 배향되었다. 전라도(全羅道) 점마감(點馬監)을 지냈다.명종과 선조의 무렵을 우리나라 문장의 최고 전성기라고 일컫는데, 그 중 습재(習齋) 권벽의 문장이 웅장과 혼후(渾厚)로 뛰어나 특별히 여러 대가들의 추대를 받았다. 그의 둘째 아들 석주(石洲) 권필(權韠)이 뒤따라 흥기하여 빛내고 확대하였으므로 당시 아전이나 서민들도 모두 이들 부자(父子) 성명을 알아 그 시(詩)를 돌려가며 외우는가 하면 중국의 사람들까지도 모두 칭송했다. 2019.1.18. 수정
    2018-07-26 | NO.538
  • 권율 광주목사일 때 정충신(鄭忠信, 1575~1636)
    晩雲集 附錄 권2 / 年譜晩雲先生年譜, 정충신(鄭忠信, 1575~1636)贈崇政大夫,判敦寧府事兼判義禁府事。行竭誠奮威出氣效力振武功臣,正憲大夫,五衛都摠府都摠管兼八道副元帥。錦南君。諡忠武。鄭公諱忠信。字可行。自號晩雲。自參判公至公。三世以正兵。爲兵營鎭撫。公下番則又爲本州知印。萬曆三年乙亥十二月二十九日子時。公生於光州故 卿校洞。丙子立春。已入於二十七。日故以丙子行。 及長。短小精悍。目如曙星。公少入番兵營。嘗館老妓家。一日。老妓苞裹兵使宴餘物以饋之。公却而不食曰。大丈夫當自爲兵使。以食方丈之饌。何以食人頷下物乎。壬辰公年十七。時倭寇大入。權元帥慄。以光牧。起兵討賊。公自請偵探。率數人以往。則倭陣已捲去。而只有一覆甕。公疑其中。試持滿射之。果有一病倭。中箭而倒。遂斬首而還。人莫不奇之。權公又將募人。以本道討倭事情。狀聞行朝。時倭奴充斥八路。道途不通。人皆畏避。無有應募者。公獨挺身請行。晝伏夜行。跋涉數千里。始達龍灣。白沙李相公。以兵判招見。與語大奇之。遂留幕下。仍授以左,國,史記等諸書。公聰明絶人。過目輒成誦。白沙歎賞。宣廟命設科灣上。以慰本道及扈從諸臣。公乃登武科丙科。宣廟一日。謂李相曰。鄭某之才。已聞卿言。後日。卿須率來。李相遂與公入對。宣廟奬諭曰。年尙少。竢稍壯。可大用也。*光州 牧使 權慄의 휘하에 있으면서 敵情을 정탐하다. 전라도의 討倭事情을 보고하는 權慄의 장계를 義州 行朝로 전달하고, 병조 판서 李恒福의 휘하에서 「左傳」, 「國語」, 「史記」 등의 책을 섭렵하다. 宣祖가 본도 및 호종 신하들을 위로하기 위해 의주에서 시행한 武科에 丙科로 합격하다.
    2023-07-13 | NO.537
  • 권율의 행주 승첩(幸州勝捷) -연려실기술 제16권 / 선조조 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
    권율의 행주 승첩(幸州勝捷), 정담(鄭湛)의 웅령전사(熊嶺戰死)붙임. 권율(權慄)ㆍ황진(黃進)의 이티[梨峙]승첩 붙임. -연려실기술 제16권 / 선조조 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 처음에 광주 목사(光州牧使) 권율이 용인(龍仁)에서 돌아와 고을 안의 젊은 사람들 5백여 명을 모으고 이웃 고을에 격서를 보내어 천여명을 모았다. 전라 감사 이광은 권율이 군사를 일으킨다는 소문을 듣고 권율을 전라도 도절제사(全羅道都節制使)라고 일컫고, 각 고을을 독려하여 적군이 달려드는 것을 막게 하였다.○ 7월에 적이 금산(錦山)에서 웅티(熊峙)를 넘어 전주 땅으로 들어오려고 하므로 권율이 도복병장(都伏兵將) 나주 판관(羅州判官) 이복남(李福男)과 의병장(義兵將) 황박(黃璞)ㆍ김제 군수(金堤郡守) 정담(鄭湛) 등을 보내어 험난한 곳에 웅거하여 적을 맞아 쳐서 막게 하였더니, 이광(李洸)이 군사를 보내어 싸움을 돕게 하였다. 복남은 산봉우리의 중턱에 진을 치고, 황박은 그 위를 지키고, 정담은 그 아래를 지키고 있었다. 8일 새벽에 왜적 수천 명이 칼을 휘두르며 정면으로 덤벼들어 총탄이 비오듯 하였으나 복남 등이 죽음을 무릅쓰고 앞장을 서니 군사들이 모두 죽기로 싸웠다.적병이 조금 물러서더니 적의 대군(大軍)이 해 뜰 무렵에 다시 오는데 산골짜기에 가득하였다. 적이 육박하여 재에 올라오며 패를 나누어 교대로 싸우므로 복남 등이 적의 일진(一陣)을 무찔러 싸웠으나 결국 당해내지 못하고 퇴각하였고, 박의 군사도 힘이 다하여 무너져 나주 군사의 진으로 들어갔다. 적이 기세를 올리며 재에 오르니 나주 군사의 진 또한 무너지고 말았다. 정담은 처음부터 힘을 다해 싸우면서 붉은 기 아래 백마를 타고 있는 적병의 장수를 쏘아 죽이니 적이 바람 앞에 풀 쓰러지듯 물러갔다.그러나 이제는 정담이 고립된 군사로서 포위당하자 부하 장수들이 담에게 군진을 후퇴시키기를 권하였으나 담은 말하기를, “차라리 적병 한 놈을 더 죽이고 죽을지언정 한 걸음 물러나 살아서 적으로 하여금 전진하게 할 수는 없다.” 하고 꿋꿋이 서서 적을 쏘는데 시위소리와 함께 적은 모두 거꾸러졌다. 육박전으로 드디어 죽었으며 종사관 이봉(李葑)도 전사하였다. 복남 등이 물러나와 안덕원(安德院)에 진치니 적이 우리 측에 방비가 있음을 알고 감히 재를 넘지 못하고 멈추었다.담이 처음에 이광을 따라 공산(公山)으로부터 파군(罷軍)하고 돌아와서는 분하고 한스럽게 생각하여 사람을 대하면 반드시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항상 부하 장수들에게 말하기를, “나물 한 가지 밥 한알, 그 어느 것인들 임금이 주시지 않은 것이겠는가. 임금께서는 지금 왕성을 떠나 피난하고 계시는데 오직 나와 너만이 차마 어찌, 편안하게 이 찬(饌)을 먹을 수 있으랴.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하면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 하고 목이 메어 자신을 억제치 못하였다.군사를 일으키던 날에는 희생(犧牲)을 죽여서 사사(社祠)에 제사하고, 맹세를 고유하고 떠났으며 이에 이르러 고을 사람들이 쌓여 있는 해골 속에서 시체를 찾다가 꿰맨 옷 속에서 성명을 써놓은 것을 발견하고 그가 평일에 죽기로 결심한 것을 짐작할 수 있다고들 하였으며 적도 의롭게 여겨 시체를 모아 큰 무덤을 만들고 돌을 세워, “조선의 충간의담(忠肝義膽)을 조상한다.”고 써놓았다. 조정에서 뒤에 이 사실을 듣고 벼슬을 추증하고 정려하였다. 《계갑록》 《기재잡기》 《일월록》 ○ 그때 모든 군사가 오히려 진을 한군데에 합치고 물러나지 아니 하였더니, 적이 드디어 금산에 주둔하였다. 권율이 군사를 진산(珍山)에 진주시키고 동복 현감(同福縣監) 황진 등과 더불어 험난한 곳에 의거하여 기다리고 있는데 적병 수천여 명이 진산을 불질러 약탈하고 이티[梨峙]로 덤벼들므로 권율 등이, 부장(副將) 위대기(魏大奇)ㆍ공시억(孔時億) 등과 더불어 군사를 독려하여 재에 의거하여 막아 싸우니 적이 낭떠러지로 기어 올라왔다. 이에 황진이 나무에 의지하여 총탄을 막으면서 활을 쏘는데 쏘면 안 맞는 것이 없었다.황진이 탄환에 맞아 다리에 부상하고 조금 물러섰더니 적이 진(陳) 속으로 뛰어 들어, 우리 군사들이 놀라 흩어져 달아나려고 하므로 권율이 물러나는 자를 베어 죽이니 모두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다. 황진도 상처를 붙들고 다시 싸우니 군사들은 모두 한 사람이 백 사람을 당해낼 만큼 용감하게 종일토록 싸웠으므로 적병이 크게 패하여 병기를 다 버리고 달아났다. 이에 수백 명을 목 베니 송장이 더미로 눕고 피가 흘러 시내와 골짜기가 피 비린내로 채워졌다.적중(賊中)에서 조선의 3대 승첩을 말하는데 이티(梨峙)의 승리를 첫째로 쳤다. 논평하는 이가 말하기를, “이 승리가 없었으면 왜적은 반드시 호남 전체를 유린하였을 것이다.” 하였다.○ 8월에 권율이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승진하였다가, 승첩의 보고가 들어가자 전라 감사(全羅監司)로 승진되었고, 황진은 익산 군수(益山郡守)로 승진되었다가 또 충청 조방장(忠淸助防將)으로 승진되었다. 이복남(李福男)은 당상관(堂上官)으로 승진시켜 운봉(雲峰)의 팔량신성(八良新城)을 지키라고 명하였다.9월에 이광이 붙잡혀 와서 치죄(治罪)를 받게 되니 윤두수(尹斗壽)가 아뢰기를, “광주 목사(光州牧使) 권율이 기개가 있고 도량이 있어서 장수의 재질이 있으니 전라 감사는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됩니다.” 하여 드디어 권율을 감사에 임명했다. 《기재잡기》 ○ 그때 적병이 전주(全州)에 육박하여 성 밖에서 무력을 과시하자 광이 도망쳐 금구(金溝)로 달아나니 여러 군사가 일시에 무너져 흩어졌다. 적병은 우리 군사가 달아나는 것을 보고 저들의 배후를 습격할까 의심하여 그날 밤으로 무주ㆍ금산으로 도망쳐 돌아갔다.○ 권율이 진중에서 감사 임명을 받고 머리를 조아리며 임금이 피난하여 있는 서쪽을 향하여 우니 온 군중이 슬퍼하였다. 권율이 방어사(防禦使)로 하여금 대신 이현(梨峴)을 지키게 하고, 친히 전주(全州)에 이르러 기율(紀律)을 일신(一新)하게 하고, 모든 장수를 불러 의논하여 말하기를, “지금 평양 이남이 모두 적의 진지(陣地)가 되어 버렸지만 경성(京城)은 근본이 되는 곳이니 먼저 경성을 수복하여야 한다.” 하고 군사 2만 명을 일으켜 북으로 올라갔다.○ 전라 감사 권율이 군사 2만을 거느리고 임금을 도우려 오니 각지의 수령장수들과 승장(僧將) 처영(處英) 등이 따랐다.○ 10월에 체찰사(軆察使) 정철(鄭澈)이 아산(牙山)에 배를 정박시켰다. 권율이 지나는 길에 가보았더니 철이 권율에게 같이 전라도 지역을 지키자고 하였으나 율이 듣지 아니하고 북으로 나아가 수원(水原)의 독성(禿城)에 진을 치니, 임금이 칼을 풀어 가지고 말을 달려 보내어 권율에게 주며 이르기를, “모든 장수 중에 명령을 듣지 않는 자가 있거든 이 칼로 처단하라.” 하였다. 그때 서울에 있던 적병이 호남(湖南)의 군사가 또 왔다는 말을 듣고 군사 수만을 출동시켜 길을 나누어 쳐들어 왔다.이에 권율이 성벽을 굳게 지키고 움직이지 아니하니 적이 세 개의 진채(陳寨)를 오산(烏山) 등지에 만들어 놓고 날마다 와서 싸움을 돋우었으나 응하지 아니하고 이따금 기습병(奇襲兵)을 내보내어 적병을 베어 죽이고 적의 영채(營寨)를 불사르곤 하니 적이 도로 서울로 돌아갔다. 바야흐로 적이 쳐들어 오려 할 때 권율이 날마다 체찰사(軆察使)에게 보고하면서 구원병(救援兵)을 청하니 정철이 전라 도사(全羅都使) 등에게 급히 기별을 보내어, 성화(星火)같이 군사를 전진시켜 수원성(水原城)의 위급을 구(救)하였고, 도사(都事) 최철견(崔鐵堅)ㆍ변사정(邊士貞)ㆍ임희진(任希進) 등의 의병(義兵)도 달려와 원조하였다.○ 12월에 권율이 장계를 올렸는데, “체찰사 정철이 신에게 명하기를, ‘신에게 호남의 도적을 방어하도록 명하고, 근왕은 다른 장수를 시켜 올려보내겠다.’고 하였으나 신이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수원에 이르렀더니 군사들의 마음이 호남을 지키라는 체찰사(정철)의 말을 기쁘게 생각하고 호남으로 도망간 자가 천여 명이나 됩니다.” 하였다.이에 임금이 크게 화를 내니 유영길(柳永吉)이 아뢰기를, “정철은 술에 빠져 정신이 흐리멍텅하여 기밀 사무에 어두워서 임금의 세력이 고립되고, 공론(公論)이 행하여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윤두수는 나라를 회복시킬 만한 재주가 없고 지공무사(至公無私)하지 못하여 하는 일이 마침내 실적이 없게 되었습니다. ……” 하였다. 《일월록》 ○ 계사년 2월 권율이 수원(水原)에서 고양(高陽)의 행주산성(幸州山城)으로 나아가 주둔하였는데, 군사를 나누어 4천여 명을 병사(兵使) 선거이(宣居怡)에게 주어 금천(衿川)에 머물며 성원하게 하고, 권율 자신은 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양천강(楊川江)을 건너서 행주(幸州)에 진을 쳤다. 한편 창의사(倡義使) 김천일은 강화로부터 나와 해안에 진을 치고, 충청 감사(忠淸監司) 허욱(許頊)은 통진(通津)에 진을 치고, 충청 수사(忠淸水使) 정걸(丁傑) 또한 응원하기로 하였다. 그때 서북(西北)에 있던 왜적이 모두 경성에 모여 있어서 기세가 더욱 치열하였는데 전라도의 군사가 강을 건너왔다는 말을 듣고 길을 나누어서 나오는데 그 수효를 셀 수 없었다.적장 평수가(平秀家)는 우리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발끝으로 차서 거꾸러뜨릴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12일 새벽에 우리 척후 장교가, 적이 좌ㆍ우익(左右翼)으로 나뉘어 붉은 기와 흰 기를 들고 온다고 보고하니 권율이 모든 군사에게 현혹(眩惑)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높은 곳에 올라가 바라보니 우리 진영에서 5리쯤 떨어진 곳에 적이 이미 가득 차 있었다. 이에 곧 모든 장수와 더불어 의논하기를, “고립된 군사가 깊이 들어와서 갑자기 적병을 만나니 세력이 서로 대적할 수 없다.만약 한 목숨을 버리지 않으면 나라에 보답할 길이 없다.” 하고, 모든 장수에게 타일러서 대오(大悟)를 엄중히 단속하여 활을 버티고 기다리는데, 적의 선봉(先鋒)인 기병(騎兵) 백여 명이 먼저 와서 시위(示威)를 하더니 금방 대군 수만 명이 들을 덮고 우리 진영을 포위하였다. 이에 군사를 세 패로 나누어 쉬어가면서 교대로 달려드니 고함 소리는 땅을 흔들고 포탄이 비오듯 하였으나 우리 군사는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으며, 권율은 몸소 물과 미음을 가지고 돌아다니면서 군사들의 갈증을 풀어 주었다.묘시(卯時)에서부터 유시(酉時)에 이르기까지에 적병은 세 번 달려들었다가 세 번 퇴각하였는데 번번이 적이 불리하니 적이 드디어 갈대를 가지고 바람 부는 방향을 따라 불을 놓아 우리 성책(城柵)을 태우려 하므로 성안에서는 물을 끼얹어 꺼버렸다. 처음 승병(僧兵)에게 서북면(西北面)을 지키게 하였는데 적의 군사가 크게 고함지르며 돌격하여 오자 승병이 무너져 내성(內城)으로 들어오므로 권율이 칼을 빼들고 독전(督戰)하니 모든 장수가 칼날을 무릅쓰고 육박전을 하였다. 이에 적군이 크게 패하여, 드디어 시체를 네 무더기로 쌓고 불태우니 냄새가 10리에 퍼졌다.적병이 물러가자 우리 군사가 그 나머지를 수습(收拾)하여 1백 30여 명을 베고 군용 자재를 무수하게 얻었다. 《일월록》ㆍ《권원수유사(權元帥遺事)》 《자해필담(紫海筆談)》에, “날이 저물 무렵에 일본장수 평수가(平秀家)가 유시(流矢)에 맞아 드디어 병갑(兵甲)을 거두어 가지고 달아나니 행주(幸州)로부터 서울에 이르는 길에는 거꾸러진 시체가 서로 이어졌다.”고 하였다. 한창 싸우고 있을 때 화살이 거의 다하여 군중(軍中)이 바야흐로 위태로웠는데 정걸(丁傑)이 두 척의 배로 화살을 싣고 와서 바다 쪽에서 들여보냈으므로 계속하여 사용할 수가 있었다.○ 어떤 이는 전해 말하기를, “권율도 또한 겁내고 미혹(迷惑)하여 스스로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그의 형 전(悛)이 와서 보고, ‘이것은 해내기 쉬운 일이다. 내가 전쟁하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 하고 율을 대신하여 지휘하니, 율은 머리에 구리솥을 덮어쓰고 돌아다니며 모든 군사들을 타이르다가 총소리가 조금 그치면 즉시 구리솥을 벗어서 물을 담아 가지고 싸우는 군사의 입에 대어 주었으니 전(悛)의 공도 또한 많다.”고 한다.○ 그때 이여송이 개성에 주둔하였고, 선봉(先鋒) 사대수(査大受)는 행주 승첩의 기별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싸움한 곳을 시찰하고 또 수일 후에는 권율을 청하여 서로 만나보고 감탄하여 말하기를, “권장군의 진은 다른 군사들과는 유별나게 다르다. 외국에 이러한 참다운 장수가 있었구나.” 하고 군사를 임진(臨津)으로 이동시켜 이빈(李薲)과 합력하여 파주산성(坡州山城)을 지키기로 하였다. 승첩의 보고가 행재소에 올라가자 권율에게는 자헌대부(資憲大夫), 조경에게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중 처영에게는 절충장군(折衝將軍)을 가자(加資)하고 모든 장사(將士)에게 상과 벼슬을 주었는데 등차(等差)가 있었다.○ 권율이 일찍이 말하기를, “세상에서는 행주의 싸움에 공(功)이 있다고들 하지만 실상은 이티[梨峙] ‘이티[梨峙]’를 본래 ‘웅티[熊峙]’라고 썼으나 아마 이(梨)자의 잘못일 것이다. 의 싸움이 제일 중요한 것이었고 그 다음이 행주싸움이다. 대개 이티의 싸움 전쟁의 시초부터 적의 기세는 한창 날카로운데 우리 군사는 외롭고 약할 뿐만 아니라, 또 건장한 군사도 없었으므로 군사들의 마음이 흉흉(洶洶)하여 이긴다고 믿기 어려웠으나 드디어 능히 있는 힘을 다하여 죽음으로서 싸웠기 때문에 천 명도 되지 않는 약한 군사를 가지고 10배나 되는 사나운 적병을 당해내고 마침내 호남을 보전하여 국가의 근본이 되게 하였으니 이것이 어려웠다고 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때는 서쪽 길은 막혀 끊어졌고 본도(本道)가 무너져 이산(離散)하였기 때문에 내가 비록 공이 있어도 드러내어 칭찬하는 사람이 없었으나, 행주의 싸움은 내가 이티에서 공을 세운 뒤에 있었고, 권력과 지위가 벌써 무거웠기 때문에 군사의 마음들이 이미 내게 돌아온데다가, 호남의 정맹(精猛)한 장졸들이 다 내 수하(手下)에 예속해 있을 뿐만 아니라 군사의 수효도 수천 명을 넘었고 지리(地利)도 또한 험하여서 적병의 수가 비록 배나 되었지마는, 그 기세가 이미 쇠약해 있었으므로 공(功)을 세우기 쉬웠던 것이며, 바로 명 나라 군사가 위압(威壓)해 있고 각도의 근왕하는 군사들이 경기내에 바둑돌처럼 깔려 있었으나, 나의 행주 싸움의 성공이 때마침 모든 군진보다 먼저 있었기 때문에 그 공이 드러나기가 쉬웠던 것이다.” 하였다. 《백사집》 ○ 조경(趙儆)이 권율의 중군장(中軍將)으로서 밤에 강을 건너가서 먼저 지형을 살피다가 군사를 주둔시킬 만한 높은 언덕을 발견하니 그것이 즉 행주였다. 권율이 말하기를, “명 나라의 군사가 많이 왔으니 적병이 필시 감히 나오지 못할 것이다. 반드시 성책(城柵)을 만들어야 할 필요는 없다.” 하니 경이, “외로운 군사로서 큰 적과 가까이 있으니 성책이 없을 수 없다.” 하였으나 율이 듣지 아니하였다. 마침 그때 체찰사(軆察使)가 양주(楊州)에 있으면서 율을 불러다가 일을 의논하는 동안에 경이 모든 군사를 시켜 이틀 동안에 성책을 완성한 후에, 율이 돌아왔고, 목책(木柵)을 만든 지 사흘만에 적의 대군이 쳐들어 왔다.이에 정오(正午)가 지나도록 힘껏 싸우니, 적병은 드디어 긴 나무[長木]를 가져다가 다락같은 모양의 높다란 가마[轎]를 만들어서, 그 위에 총수(銃手) 수십 명을 싣고 수백 명이 메어 올려 우리 진영 안을 사격하므로 조경이 지자포(地字砲)를 가져오게 하여, 큰 칼 두 개를 포(砲) 앞에 매어달고 적의 가마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려 포를 쏘니, 지나간 곳마다 천둥ㆍ벼락을 맞은 것 같아서 가마는 모두 부숴지고 가마 위에 있던 적병은 몸뚱이와 팔ㆍ다리가 흩어져 날아가 떨어졌으므로 적병이 감히 다시 진격하지 못하였다.이 싸움에서 적병은 죽은 자가 거의 반이나 되었다. 권율과 모든 장수들이 모두 말하기를, “오늘의 승리는 모두 공(公 조경)의 힘이요.” 하였음을 대개 그가 목책을 설치한 것을 말한 것이었다. 풍양군(豐壤君) 조경(趙儆)의 비(碑) ○ 권율(權慄)은 자는 언신(彦愼)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요, 영상 철(轍)의 아들이다. 임오년 46세 때 명경과(明經科)에 합격하고 계사년에 도원수(都元帥)가 되었으며 벼슬이 호조 판서에 이르렀다. 기해년에 죽으니 나이가 63세였다. 선무공신(宣武功臣)으로 책훈(策勳)되고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을 봉하고 영의정을 추증(追贈)하였다.○ 신묘년 9월, 의주 목사(義州牧使)가 결원되었을 때 조정에서 공을 천거하여 낭료(郞僚)호조 정랑 에서 발탁되어 정규의 승진 순서를 뛰어 임명되니 그때의 세론(世論)이 영예스럽다고 하였다. 임진년 봄에 북경으로 간 역관이 유언비어를 중국에 퍼뜨려 요동(遼東) 지방을 놀라 떨게 하였다는 말이 있으므로 이들을 옥에 내려 국문하였는데 공도 그들의 공사(供辭)에 관련되어 옥에 갇혔다. 4월에 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들으니 권율이라는 쓸 만한 재질이 있다는데 지금 어디에 있는가. 호남이나 영남의 거진(巨鎭)을 맡겨 시험해 보겠다.” 하고, 즉시 광주 목사(光州牧使)에 임명하였다. 그때 그의 사위 이항복(李恒福)이 승정원(承政院)에 당직하고 있었는데 공(公)이 가서 작별하니 항복이 말하기를, “왜 그렇게 급히 가십니까?” 하자 율이, “국가의 일이 급하니 이때야말로 신하로서 죽음을 바쳐야 할 때이다. 어찌 감히 잠시 동안인들 지체하여 아녀자(兒女子)의 슬피 우는 꼴을 흉내낼 것인가?” 하였다. 그때는 평화가 오랫 동안 계속되다가 갑자기 왜병이 온다는 기별을 들었기 때문에, 조신들은 호남과 영남은 죽으러 가는 곳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권율은 말과 기색이 강개(慷慨)하니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여 마지않았다.전라 감사 이광(李洸)이 공을 중위장(中衛將)으로 삼아 선봉으로 하였더니, 혹 공이 문인으로서 군대의 선봉이 된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는 이가 있으면 공은 웃으며 말하기를, “이것이 나의 직분이다.” 하였다. 백사가 가려 뽑은 유사 ○ 송응창(宋應昌)이 본국에서 자문(咨文)을 보냈는데 그 대략에, “왜놈들이 당신네 나라를 쳐부수고 함락시켜 조선에는 충성스러운 사람이 없다고 말할 수 있었는데, 홀로 권모만은 고립된 성을 굳게 지켜서 많은 군사를 불러모아 자주 기묘한 꾀를 내고 때로는 큰 부대의 적을 대항하였다. 요사이는 다시 부대에 모래를 넣어 군량을 가장하여 왜놈이 와서 약탈하도록 유인하여 놓고는 습격하여 죽였으니, 이 사람이야말로 나라가 어지러운 때에야 알아볼 수 있는 충신이요, 중흥의 명장이라 하겠습니다. 인하여 붉은 비단 네 필과 백은(白銀) 50냥(兩)을 상으로 주어 충용(忠勇)을 권장하십시오.” 하였다. 백사가 가려 뽑은 유사 ○ 명 나라 조정의 대소 문무관(大小文武官)들은 공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반드시, “이 이가 전일 행주에서 승첩한 이가 아닌가.” 하였으며 왜놈의 추장(酋長)도 반드시 권 원수의 동정을 물었다고 한다. 《일월록》 ○석성(石星)이 사신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의 모든 신하 가운데 만약 권율과 같은 자가 두어 사람만 있다면 내가 무엇을 근심하겠는가.” 하였다. ○ 유사(遺事) ○ 한 무관(武官)이 싸움터에 나가는 것을 싫어하여 달아나 전주(全州)에 숨어 있으면서 스스로 명 나라 장수에게 의탁하여 공이 여러 번 전주에 공문을 보내어 잡아 보내라고 하였으나 전주의 관리가 명 나라 장수를 두려워하여 감히 잡지 못하였는데 을미년에 공이 순시하다가 전주에 이르러 베어 죽였다. 얼마 안 되어 정승[國相]이 남방에 군사 시찰을 갔는데 처형된 무관의 집 사람들이 공을 무고하여 마침내 파면되니 공은 웃으며 말하기를, “대장된 지 3년에 한 사람의 도망병을 벤 것이 파면에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하였다. 유사 ○ 병신년에 적병이 오래도록 물러가지 않으므로 조정(朝廷)에서 한창 원수(元帥)의 임명을 의논하는데 임금이 묻기를, “누가 원수가 될 만한 사람인가?” 하니, 좌우에 있던 신하들이 다른 사람을 가지고 대답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어찌 권율을 원수로 삼지 않으랴.” 하고 특히 도원수(都元帥)에 임명하였다. 이에 공이 즉시 숙배(肅拜)하고 하직을 아뢰니 특히 내구(內廐)의 말을 하사하였다. 《조야첨재》 ○ 명 나라의 장수들이 네 길로 나누어 진군하려 할 때, 유정(劉綎)과 마귀(麻貴)에게 권 원수(權元帥)가 협력하여 따라와 주기를 요망하자 두 사람이 다투기를 마지 아니하여 임금이 마침내 권율을 유정(劉綎)에게 붙여 주었다. 《조야첨재》 ○ 기해년 가을에 병이 나서 벼슬을 그만두고 강화(江華)의 시골집으로 돌아왔는데 병이 위독해지자 배를 타고 서울로 들어가 7월 6일에 우거(寓居)하던 집에서 죽으니 나이가 63세였다. 특별히 좌찬성을 추증하였다.○ 권율은 인품이 사람을 거느림에 있어 친화와 사랑으로 성심을 보이고, 엄격하기만을 주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즐겨 복종함으로써 위급한 때에 힘입었던 것이다. 《일월록》 공은 조정에 우뚝 서서, 일을 만나면 우레처럼 움직여서 출입하고 변통함에 막힘이 없으면서도 바른 길을 잃지 않는 권태사(權太師 권율의 조상)의 유풍과, 바라보면 의젓하고 가까이 가면 따사로워 친화로서 사람을 대하여 충심으로 심복하게 만드는 권양촌(權陽村 권율의 조상, 이름은 근(近))의 미행(美行)과, 높고 큰 띠로 풍채와 용의(容儀)를 의젓이 바로 가지며 일에 당하여서는 곧고 꿋꿋하나 질박하여 까다롭지 않은 그의 아버지인 영의정 권철의 국량이 있었다. 공은 이 세 가지를 겸하여 가졌으되 공훈과 충렬(忠烈)은 이 세 사람보다 더하였다.○ 허 균(許筠)이 공의 제문을 지었는데, “원공(元公 영의정)의 증직은 그 아버지의 정승을 이었음이요, 길창(吉昌)부원군으로 한 것은 문충(文忠 권근)의 봉군을 승습(承襲)한 것이다.”는 구절이 있었는데 공의 사위 이항복(李恒福)이 잘 지었다고 극구 칭찬하였다.
    2020-09-24 | NO.536
  • 권지학유 고공(고인후)의 시호를 청하는 행장 -문곡집
    권지학유 고공의 시호를 청하는 행장〔權知學諭高公請諡行狀〕 -문곡집 제22권 / 행장(行狀) : 김수항(金壽恒, 1629~1689)본관은 전라도 장흥부(長興府)이다. 증조는 휘(諱) 운(雲)으로,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형조 좌랑(刑曹佐郞)을 지냈으며, 예조 참의(禮曹參議)에 추증되었다. 할아버지는 휘 맹영(孟英)으로, 문과에 급제하고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을 지냈으며,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에 추증되었다. 아버지는 휘 경명(敬命)으로, 호(號)는 제봉(霽峯)이다.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공조 참의(工曹參議)와 지제교(知製敎)를 지냈으며,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공은 휘 인후(因厚)로, 자(字)는 선건(善建)이고, 자호(自號)는 학봉(鶴峯)이다.고씨(高氏)는 본래 탐라(耽羅)에서 나왔는데, 공의 선대가 장흥(長興)을 본적으로 하사받아 마침내 장흥 사람이 되었다. 충렬공은 일찍이 문장으로써 세상에 명성을 떨쳤고 화현직(華顯職)을 두루 거쳤는데 중간에 연좌되어 파출되고 당시 등용에 좌절되었지만 끝내 충절(忠節)로써 크게 드러났다. 울산 김씨(蔚山金氏)에게 장가들었으니, 부제학(副提學) 김백균(金百鈞)의 딸이며, 장부(丈夫)인 아들 여섯을 두었다. 공은 그 가운데 둘째로, 가정(嘉靖) 신유년(1561, 명종16)에 태어났다.태어나면서 민첩하고 총명함이 남들보다 뛰어났다. 3세에 글자를 알았고, 6세에 처음 학문을 배웠는데 스승을 번거롭게 하지 않으면서 일취월장하였다. 또 뜻이 고상하고 원대하여 여러 아이들과 함께 어울려 놀 때 사상견례(士相見禮)를 설행했는데 읍양(揖讓)하고 주선(周旋)하는 것이 엄숙하게 법도에 들어맞았으니, 장로들이 보고서 남다르게 여겼다. 성장해서는 아버지에게 가르침을 받고 지조와 행실에 독실하게 힘썼다. 장가들고 나서 처가가 본디 재산이 넉넉하여 공을 매우 후하게 대접했는데, 공은 화려하고 사치스런 의복이나 일용품을 일체 거절하고 검소함으로써 자신을 신칙하며, 밤낮없이 오직 경서(經書)와 사서(史書)에만 부지런히 힘을 다하였다.정축년(1577, 선조10)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는데, 당시 나이가 겨우 17세였다. 기축년(1589)에 문과에 급제하자, 조정의 의논이 공의 문학으로는 한원(翰苑 예문관)이나 호당(湖堂)에 두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니 앞다투어 천거하고자 하였다. 당시 충렬공이 요직에 있는 자에게 꺼림을 당했는데, 이로 인해 아울러 공까지 배척하여 성균관 권지학유(成均館權知學諭)로 축출해서 보임하니,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애석해하였다.임진년(1592)에 왜구(倭寇)가 대거 침입하자 여러 고을이 와해되어 왜적들이 마침내 멀리 북쪽까지 쳐들어가는데도 그 칼날에 맞서는 자가 없었다. 당시 호남(湖南)의 관찰사(이광(李洸))는 변고를 듣고 위축되어 근왕(勤王)할 뜻이 전혀 없었는데, 충렬공은 공의 형제와 함께 바야흐로 광주(光州)의 고향에 은거하고 있다가 의병을 일으켜 달려가 국난을 구하기로 의논하였다. 관찰사가 조정의 명령을 받아 비로소 군대를 거느리고 행차가 금강(錦江)에 이르렀는데, 어가(御駕)가 서쪽으로 거둥했으며 경성(京城) 또한 사수하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급작스럽게 진(陣)을 해산시키고 돌아가자, 온 도내의 인심이 더욱 흉흉한 채 안정되지 못하였다. 급기야 재차 병사를 징발하자, 사람들이 모두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곳곳마다 도망쳐 숨어 버렸다.충렬공이 박광옥(朴光玉)과 함께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효유하여 본주(本州 광주)의 흩어진 병졸들을 수습하고, 공과 공의 백씨(伯氏) 임피공(臨陂公 고종후(高從厚))에게 군대를 나눈 다음 수원(水原)에 이르러 목사(牧使) 권율(權慄)에게 군대를 넘겨주도록 했다. 이어 서쪽의 행재소로 달려가려 했으나 길이 막혀 나아갈 수가 없었다. 돌아와 담양(潭陽)에 이르니, 충렬공이 이미 의병의 깃발을 세워 대장이 되었다. 공이 임피공과 실로 충렬공을 따랐다.장차 완산(完山 전주(全州))으로 군대를 옮기려 할 적에 한 사인(士人)이 “내게 늙은 어머님이 계시니 돌아가 어머님을 뵙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뒤따라 계원장(繼援將)에 소속되고자 합니다.”라고 청하자, 공이 분개하여 “저 사람은 참형(斬刑)에 처해야 옳다. 사람들 모두 떠나려고 한다면 어떻게 군대를 유지하겠는가.”라고 하니, 군중(軍中)이 두려워하였다. 완산에 주둔할 적에 충렬공이 공에게 휘하의 용맹한 군사들을 거느리고 진안(鎭安)과 무주(茂朱)의 경계에 매복한 다음 영남(嶺南) 쪽 왜적들의 침범을 막게 했는데, 얼마 뒤에 왜적들이 무주에서 다시 영남으로 향하였다.충렬공이 비로소 병사들을 정비하여 북상할 계획을 세우고 여산(礪山)으로 나아가 주둔하며 이에 여러 도에 격문을 보내 관서(關西 평안도)에 이르게 하였다. 호서(湖西)의 경계에 다다랐을 때 또 황간(黃澗)과 영동(永同)의 왜적들이 금산으로 넘어 쳐들어왔는데 기세가 더욱 사나워 완산이 머지않아 위급해지려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자 충렬공이 휘하 여러 사람들과 상의하여 먼저 금산의 왜적들을 공격해서 본도(本道)를 구하고자 마침내 병사들을 진산(珍山)으로 이동시켰다.전사 가운데 모집에 응한 자들이 점점 많아져 이에 장수와 병졸들을 부대로 나누었다. 공을 선봉으로 삼아 금산에 이르러 방어사(防禦使) 곽영(郭嶸)과 영(營)을 나누어 좌우익(左右翼)으로 만들었다. 의병이 먼저 전투를 독려하여 적병을 토성으로 몰아넣고 사방에서 공격하며 에워싸자 왜적들이 많이 죽거나 다쳐 감히 밖으로 나오지 못하였다. 마침 날이 저물고 관군이 또 기꺼이 전투를 돕지 않았기에 바로 군대를 퇴각시켜 진(陣)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의병과 방어군(防禦軍)이 함께 전투에 나가 미처 교전하지도 못했는데 왜적들이 성벽을 뚫고 나와 먼저 관군을 공격하자, 방어사의 여러 군사들이 멀리서 이 광경을 바라보다 먼저 궤멸되었고, 의병 또한 따라서 궤멸되었으며, 충렬공은 왜적의 칼에 맞아 죽고 말았다.공은 항상 선두에 있으면서 무사(武士)들을 이끌고 격려했는데, 군사들이 궤멸되자 말에서 내려 부대의 대오를 정리하고 다시 전투를 하려다가 결국 진중(陣中)에서 죽고 말았으니, 바로 이해 7월 10일이었다. 남쪽 백성들 가운데 이 소식을 듣고 목 놓아 울며 서로 조문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임피공이 승려들에게 청하여 공의 시신을 찾아 염(殮)했는데, 죽은 지 이미 40여 일이 지났는데도 낯빛이 산 사람 같았다. 모년(某年) 모월(某月) 모일(某日)에 창평현(昌平縣) 수곡리(壽谷里) 모향(某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처음에 선조(宣祖)께서 공(公)의 부자가 전몰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매우 슬퍼하며 공을 예조 참의(禮曹參議)에 추증하라는 명을 내렸고, 을미년(1595, 선조28)에 또 유사(有司)에게 정문(旌門)을 내리라는 명을 내렸다. 신축년(1601)에 또 고을 사람들이 청을 올렸기 때문에 사당을 세워 충렬공을 제사 지내고 공을 배향하도록 명한 다음 포충(褒忠)이라고 사액(賜額)하였다. 임피공은 상차(喪次)에서 의병을 일으켜 복수하다가 정유년(1597)에 진주성(晉州城)이 함락되자 강물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다.공의 누이동생과 사촌 누이동생 또한 왜적을 꾸짖은 다음 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충렬공의 서제(庶弟)인 경형(敬兄) 또한 임피공과 함께 죽었다. 세상에서 부자간의 의로운 죽음을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제갈첨(諸葛瞻)과 변 성양(卞成陽)을 말하는데, 공과 같은 경우는 한집안에서 5, 6명이 앞뒤로 목숨을 바치고 부자와 형제가 모두 충효(忠孝)와 의열(義烈)로써 세상에 드러났으니, 어찌 고금(古今)에 보기 드문 일이 아니겠는가.공의 부인은 이 부인(李夫人)으로, 감사(監司) 이경(李璥)의 딸이다. 4남 1녀를 두었으니, 큰아들은 부림(傅霖)이고, 그 다음은 부천(傅川)으로 문과에 급제했으며 장령(掌令)을 지냈다. 그 다음은 부즙(傅楫)으로 생원(生員)이며, 그 다음은 부량(傅良)으로 진사(進士)이다. 딸은 오희일(吳希一)에게 시집갔다. 첩은 아들이 1명으로 부매(傅梅)이며, 3녀 가운데 큰딸은 금계군(錦溪君) 박동량(朴東亮)의 첩이 되었고, 그 다음은 참봉(參奉) 장응붕(張應鵬)에게 시집갔고, 그 다음은 참의(參議) 유성증(兪省曾)의 첩이 되었다. 내외 손과 증손이 수십 명이다.공은 타고난 자질이 빼어나고 깨끗하며, 의지와 기개가 강개하여 세상의 영욕(榮辱)과 이해(利害)의 득실에 대해서는 욕심이 없어 조금도 그 마음을 동요시키는 것이 없었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충렬공을 섬길 적에 옆에서 부지런히 시중들었으니, 사랑과 공경이 모두 극진하였다.충렬공이 군(郡)에 부임했을 적에 공이 잠시 가서 뵈었는데 이 부인이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충렬공이 공을 바로 돌려보내려 하지 않고 공도 감히 굳이 청하지 못하고 있는데 갑작스레 재차 급보(急報)가 있었다. 충렬공이 그제야 서둘러 공을 돌려보냈지만 병은 이미 어찌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이 부인이 임종할 적에 여러 어린 자식들을 부탁하자, 공이 애통해하며 “마땅히 아이들을 위한 작은 계책으로 다시는 아내를 두지 않겠소.”라고 하였다. 상기(喪期)를 마치고 나서 충렬공이 다시 장가를 들이려 했지만 공이 이러한 자신의 뜻을 말씀드렸기 때문에 충렬공 또한 강요하지 않았다.소싯적에 정시(庭試)를 보러 들어가 시제(試製)를 보니 바로 공이 이전에 사사로이 지었던 것이어서 꺼려져 선뜻 써서 바치지 못하고 있는데, 친한 벗이 강력히 권하자, 공이 “선비의 입신(立身)은 구차해서는 안 되네.”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다시 자기가 그 글을 사용하기를 청하자 또한 허락하지 않았다. 마침내 다시 다른 글을 구상하여 쓰기를 겨우 끝냈는데 정해진 시간이 이미 지나 버렸다. 권세 있는 집안의 자제가 공이 지은 글이 뛰어나게 아름다운 것을 보고 매우 안타까워하며 곡진히 공의 처지를 위하고자 하여 여러 번 말을 했지만 공이 끝내 듣지 않고 오히려 시권(試券)을 접어 소매에 넣은 다음 나와 버리자, 사람들이 모두 혀를 차며 칭찬하고 감탄하였다.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기억력이 뛰어나 독서를 할 때는 세 번을 넘기지 않아도 죽을 때까지 잊지 않았으며, 문장을 지으면 글귀가 아름답고 민첩하였다. 임진년(1652, 효종3)에 서간이나 격문 같은 여러 글들은 충렬공이 손수 초안을 잡은 것이 아니면 대부분 공의 형제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임피공이 공이 쓴 격문 중의 말을 거론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칭찬하며 “‘저들이 곧 제멋대로 하면 노중련(魯仲連)처럼 바다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다. 지금은 오히려 이렇지만 전단(田單)이 제(齊)나라를 돌이킨 것과 같이 되기를 기대한다.’라고 하였으니, 이를 가지고 미루어 보면 또한 그 마음가짐을 징험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군중(軍中)에 있을 적에 공은 보잘것없는 일개 서생(書生)으로 활쏘기와 말 타기는 평소 익힌 것이 아니었지만 몸소 전투에 나가 홀로 한 방면을 맡으며 일찍이 두려운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항상 “오늘날의 일이 비록 자신을 죽이고 일족을 모두 죽이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바야흐로 의병을 일으킬 적에 충렬공이 스스로 옷 위에 성명(姓名)을 적고 공 또한 똑같이 했는데, 이로써 훗날 시신을 찾는 데 증거가 되었으니, 공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한 뜻이 이미 처음에 결정되었음을 여기에서 알 수가 있다.아! 공이 재주와 행실로 이미 과거에 급제하고 조정에 출사했으니, 만약 때를 타서 포부를 펼쳤다면 경악(經幄 경연(慶筵))과 사원(詞苑 예문관(藝文館))이 어찌 합당하지 않았겠으며, 세상에 끼친 그 명성과 업적이 필시 당대의 여러 이름난 공들보다 못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도리어 시론(時論)에 곤액을 당하여 논사(論思)하고 찬술(撰述)하는 자리에서 한번도 포부를 펼치지 못하고 마침내 나라가 어지러운 때를 당하여 들판에서 시신이 되어 자신의 불행을 나라의 영광으로 만들었으니, 슬프도다.인조(仁祖)조에 아들 부천이 원종훈(原從勳)에 참여했기 때문에 누차 공을 영의정에 추증하였다. 금상(今上 숙종(肅宗)) 정묘년(1687, 숙종13)에 이르러 호남의 많은 선비들이 대궐문 앞에 엎드려 글을 올려 임피공과 공의 사적을 상세히 진술하며 아울러 시호를 내려 주기를 청하자, 임금이 특별히 허락하여 일을 태상시(太常寺)에 명하였다. 공의 현손(玄孫)인 응익(應翼)이 여러 부형의 요청으로 내게 행장을 지어 줄 것을 부탁하였다. 나는 비록 공의 부자보다 늦게 태어났지만 평소 깊이 사모했기에 이에 감히 비루하고 졸렬함을 헤아리지 않고 삼가 그 가첩(家牒)을 모아 위와 같이 차례대로 엮어 유사(有司)에게 알린다.[주-D001] 중간에 연좌되어 파출되고 : 고경명은 명종 때 홍문관 교리가 되었지만, 아버지 고맹영의 죄에 연좌되어 파출되었다가 선조 때 동래 부사가 되었다. 《국역 선조수정실록 22년 10월 1일》[주-D002] 당시 등용에 좌절되었지만 : 고경명은 동래 부사로 재임 중에 날마다 술을 마시며 직무를 살피지 않는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국역 선조실록 24년 4월 4일》[주-D003] 제갈첨(諸葛瞻)과 변 성양(卞成陽) : 제갈첨(227~263)은 촉한(蜀漢)의 장수로, 제갈량(諸葛亮)의 아들이다. 위(魏)나라가 촉한을 공격할 당시 위나라 장수 등애(鄧艾)와 싸우다 전사했고, 아들 제갈상(諸葛商) 또한 전투 중 전사했다. 《三國志 卷35 蜀書 諸葛亮傳》 변 성양은 진(晉)나라의 변호(卞壺, 281~328)로, 성양(成陽)은 지명이다. 소준(蘇峻)의 반란 때 전사하고, 아들 변진(卞眕)과 변우(卞盱)가 뒤이어 전사했기 때문에 ‘변문충효(卞門忠孝)’의 고사가 전한다. 《晉書 卷70 卞壺列傳》[주-D004] 노중련(魯仲連)처럼 …… 수밖에 : 노중련은 제(齊)나라의 고사(高士)이다. 노중련이 조(趙)나라에 있을 적에 진(秦)나라가 조나라를 포위하면서, 위(魏)나라가 신원연(新垣衍)을 보내 진나라를 천자(天子)로 받들면 살려 주겠다고 하자, 노중련이 진나라는 예(禮)를 버리고 공(功)만을 숭상하기 때문에 진나라를 섬기느니 동해에 빠져 죽는 것이 낫다고 하였다. 《史記 卷83 魯仲連趨陽列傳》[주-D005] 전단(田單)이 …… 것 : 전단은 제나라의 전씨(田氏) 왕족이다. 연(燕)나라가 제나라를 공격하여 70여 성을 함락했는데, 전단이 즉묵성(卽墨城)을 지켜내 연나라 군사들을 물리치고 제나라를 수복했다. 《史記 卷82 田單列傳》[주-D006] 금상(今上) …… 명하였다 : 1688년(숙종14) 3월 7일에 호남 유생들이 청을 올려 고인후에게 시호를 내리라는 명이 있었고, 1694년 10월 11일에 고인후에게 의열(毅烈)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국역 숙종실록 14년 3월 7일, 20년 10월 11일》
    2020-12-14 | NO.535
  • 권필-취시가
    聲閒于天  하늘에 대고 고요히 노래하니 忠貫日月  곧은 마음은 해와 달을 꿰뚫으네氣壯山河  기운은 산하에 넘쳐 醉歌於地  이 땅에 취하도록 노래하네 권필權鞸(1569~1612)은 본관은 안동. 자는 여장, 호는 석주.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술과 시를 즐기며 자유분방한 일생을 살았다. 동몽교관으로 추천되었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강화에 있을 때 명성을 듣고 몰려온 많은 유생들을 가르쳤으며, 명나라의 대문장가 고천준이 사신으로 왔을 때 영접할 문사로 뽑혀 이름을 떨쳤다.취가정(醉歌亭)은 광주시 북구 충효동 396번지에 있는 정자로 송강의 제자였던 석주 권필이 꿈에 김덕령 장군이 나타나서 취시가를 불렀다는 애기에서 따온 정자명이다. 1890년에 그가 선인 김덕령 장군의 넋을 위로하고 덕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짓고 시에서 취하도록 노래했다고 이르고 있다.《석주집》과 한문소설 《주생전 周生傳》이 전한다.2019.1.18. 수정
    2018-07-30 | NO.534
  • 귀락와 서문〔歸樂窩序〕
    귀락와 서문〔歸樂窩序〕  우리 유가(儒家)의 법문(法門)에서는 풀어 놓은 마음을 거두는 것을 지극한 비결로 삼았고, 외전(外傳 《장자(莊子)》)에는 “어려서 고향을 떠났다가 돌아올 줄 모른다.”를 슬퍼할 만한 일로 삼았다. 대개 마음을 풀어 놓고 거두지 않는 것을 ‘상(喪)’이라고 하고, 풀어 놓은 마음을 거두어 돌아오게 하는 것을 ‘귀(歸)’라고 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슬퍼할 만한 일은 마음을 풀어 놓는 것보다 심한 것이 없고, 즐거워할 만한 일은 풀어 놓은 마음을 돌아오게 하는 것보다 큰 것이 없다.마음이 만약 자신에게 돌아온다면, 천지 사이의 만물이 그 마음을 동요시킬 수 없다. 위로 이기씨(伊祈氏 요 임금)는 천하를 소유하였지만 관여하지 않았으며, 우순(虞舜 순 임금)은 진의(袗衣)를 입고서 두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는 것을 본래 소유한 듯이 하였다. 아래로 사성(思聖 자사(子思))은 부귀한 곳에 처해서는 부귀한 대로 행하였으며, 추 부자(鄒夫子 맹자)는 경상(卿相)이라는 직책을 주더라도 마음에 동요가 없었으니, 이 모두가 마음을 자신에게 돌아오게 했던 위대한 인물들의 경우이다.이를테면 자방(子房 장량(張良))이 유악(帷幄)에서도 적송자(赤松子)를 흠모한 것, 공명(孔明 제갈량(諸葛亮))이 장상(將相)의 직위에 있으면서도 〈양보음(梁甫吟)〉을 노래한 것, 배중립(裵中立 배도(裴度))이 전쟁터에 나가서는 장수요, 조정에 들어서는 재상의 지위에 있었지만 그 마음만은 녹야(綠野)에 있었다고 한 것, 곽 영공(郭令公 곽자의(郭子儀))이 24차례나 고과(考課)를 주관하였지만 그 마음을 늘 벼슬하지 않는 선비처럼 한 것이 그렇다. 그 즐거울 만한 일 가운데 무엇이 이보다 크겠는가.마음이 만약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는다면 부귀한 곳에 가서는 교만해지고 명리(名利)에 가서는 방일해지니, 내 8척의 작은 육신을 가지고 그 큰 것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항상 발돋움을 해 보려고 하지만 서 있을 수 없고, 항상 넘어가고자 하지만 걸을 수도 없어 천지간에 두려워 몸 둘 바를 모르고 해와 달이 떠올라도 긴 밤처럼 어둡게 느끼니, 이 어찌 매우 슬퍼할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슬프기만 하고 즐겁지 않으니 어떻게 평생을 살 수 있겠는가.승지(承旨) 유광천(柳匡天)은 일찍부터 벼슬길에 올라 승정원에서 많은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마침내 ‘귀락(歸樂)’으로써 자신의 집에 편액을 걸었으니 아, 이것이 진정 마음이 돌아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진(晉)나라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천명을 즐기는데 다시 무엇을 의심하랴.〔樂夫天命復奚疑〕”라는 글귀로 끝을 맺고 있으니, 유광천은 과연 천명을 즐기는 사람인가. 애오라지 이 글을 지어 물어본다.존재 위백규 <존재집> 권21 吾儒法門,以收放心爲摯訣,《外傳》以“弱喪不知歸”爲可哀。蓋放而不收則爲喪,收而反之則爲歸。是以人之可哀,莫甚於放,可樂莫大於歸。心苟歸矣,天地間萬物,不能動其心。上焉則伊祈氏有天下而不與,虞舜被袗衣二女婐而若固有之;下焉則思聖素富貴而行富貴,鄒夫子加卿相而不動心,此皆心歸之大者也。乃若子房則赤松於帷幄,孔明則《梁甫》於將相,裴中立出將入相,而其心則綠野也;郭令公二十四考,而其心則布衣也。其爲可樂,孰大於是?心苟不歸,則之富貴而驕之,之名利而溢之,挾吾八尺之軀,不勝其大。恒企而不得立,常跨而不能步,跼蹐於天地,長夜於日月,斯豈非可哀之甚者乎?哀而不樂,何以生百年爲哉?柳匡天承旨早騰雲路,羽儀銀臺,而乃以“歸樂”扁其窩。噫!是眞所謂心歸者歟?晉徵士《歸去來辭》,結之以“樂夫天命復奚疑”,柳子其果樂天者歟?聊爲之說而問之。[주D-001]어려서 …… 모른다 : 어려서 집을 떠나 오래도록 타향에서 편안하게 살다 보니 마침내 고향에 돌아갈 줄도 모르게 된 경우를 말한다. 《장자》 〈제물론(齊物論)〉에 “죽음을 싫어하는 것 역시 어려서 집을 떠나 돌아갈 줄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고 어떻게 단언할 수 있으랴.〔予惡乎 知惡死之非弱喪而不知歸者邪〕”라고 하였다.[주D-002]이기씨(伊祈氏)는 …… 않았으며 :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나온다.[주D-003]우순(虞舜)은 …… 하였다 : 《맹자》 〈진심 하(盡心下)〉에 나온다.[주D-004]사성(思聖)은 …… 행하였으며 :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4장에 “부귀에 처해서는 부귀대로 행하며, 빈천에 처해서는 빈천대로 행하며, 이적(夷狄)에 처해서는 이적대로 행하며, 환난에 처해서는 환난대로 행했다.”라고 하였다.[주D-005]추 부자(鄒夫子)는 …… 없었으니 :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나온다.[주D-006]자방(子房)이 …… 것 : 《사기》 권55 〈유후세가(留侯世家)〉에 한 고조(漢高祖)가 공신을 봉할 때 “장막 속에서 작전 계획을 세워 천리 밖의 승리를 결정지은 것은 자방의 공이다.”라고 한 말이 있다. 고조 만년에 장량은 인간 세상의 일을 버리고 적송자를 따라 노닐었다고 한다.[주D-007]공명(孔明)이 …… 것 : 〈양보음〉은 촉한(蜀漢)의 승상 제갈량이 출사하기 전 남양(南陽)에서 몸소 농사지을 때 매일 새벽과 저녁에 무릎을 감싸 안은 채 길게 불렀던 노래로, 천하에 뜻을 품은 선비가 울울한 심정을 토로함을 뜻한다. 〈포슬음(抱膝吟)〉이라고도 한다. 《三國志 卷35 諸葛亮傳》[주D-008]배중립(裴中立)이 …… 것 : 배도는 자가 중립(中立)으로, 중국 당(唐)나라 때의 재상이다. 시인 백낙천(白樂天)과 자기의 별장인 녹야당(綠野堂)에서 함께 풍류를 즐긴 인물이다. 《新唐書 卷173 裴度列傳》[주D-009]곽 영공(郭令公)이 …… 것 : 곽자의가 중서령(中書令)을 오래 역임하여 24차례에 걸쳐 관리들의 고과를 주관하였다. 《舊唐書 卷120 郭子儀列傳》[주D-010]유광천(柳匡天) : 1732~? 조선 후기 문신으로 자는 군필(君弼)이고 호는 귀락와(歸樂窩)이다. 1759년(영조35) 별시(別試)에 병과 6위로 합격하였고 관직에 올라 사간원 헌납과 사간원 장령을 거쳐 승지에 이르렀다.
    2020-08-26 | NO.533
  • 금계집 내집 제4권 / 잡저(雜著)-퇴계에게 올린 편지〔上退溪書〕
    금계집 내집 제4권 / 잡저(雜著)-퇴계에게 올린 편지〔上退溪書〕황준량(黃俊良, 1517~1563)한 번 주남(周南)에 누워 지금까지 체류하고 있으며 증세가 더욱 심해져 아직 떠날 날짜를 잡지 못하니 마음이 울울합니다. 사직한 후 공무를 일체 끊고 시골집에서 임시로 거처하고 있으며, 스무날 사이에 출발하려고 하나 몸이 이미 극도로 허약해져서 무사히 돌아가는 것을 보장하기 어려울 듯합니다.소식이 오래 끊어졌었는데 요즘 동정이 어떠하신지요? 아마도 지금쯤 도산(陶山) 주위를 두루 다니면서 매화와 버들을 구경하는 즐거움을 누리시리라 생각하지만, 저는 병상에 누워 부질없이 탄식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또 이곳 서원(書院)의 위차를 정하는 일은, 이미 기문(記文)을 지어주셨으니 시끄러운 논란이 조금 그치기를 기다렸다가 한 차례 위차를 정해도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제 병이 깊어 외부의 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으니 후임 군자에게 걱정 끼치는 것을 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난달에 우연히 사방의 명유(名儒) 및 오자강(吳子强)이 문병을 왔기에 고을 선비들과 서원에 모여 여러 날 묵었으며, 이때 류 광주(柳光州)도 함께 했습니다. 그때 모두 말하기를, “서원의 위차를 정하지 않고 돌아가면 뒤에 오는 자가 감히 그 가부를 논의할 수 없을 것이고, 또 유생들이 서원에 들어갈 때 마치 탱화가 없는 절과 같아 즐거이 모여 공부하지 않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유생들과 그 가부를 권점(圈點)하니, 한훤당(寒暄堂 김굉필)을 홀로 제향 하여 정위 남향으로 모시려고 하는 것에 대해 모두 찬성하였고, 문충공(文忠公 이인복)을 동쪽 벽에 배향하기를 원하는 자도 10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열공(文烈公)은 손에 염주를 들고 있어서 학궁에 모실 수 없다는 것이, 우리뿐만 아니라 경향 각지의 논의가 이미 정해졌으므로 절대로 다시 논의할 수 없습니다. 손에 염주를 들고 있는 늙은이를 사당에 넣고자 의논한다면 유생들은 차라리 신발을 신고 떠나고 말아 서원 가운데 유생의 자취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의견을 합하여 논의를 결정해야 하는데 유생들의 말도 지나치다고 할 수 없습니다.삼가 생각건대, 선생님께서 지으신 서원 기문은 엄연히 하나의 학문 규범인데, 저로부터 선생님의 가르침을 위반하는 일은 차마 못할 바이고, 이를 고집하며 유생들의 요청을 거절하는 것도 형편상 행하기 어렵습니다. 병으로 지친 마음이 더욱 어지러워 감히 급히 사자(使者)를 보냈습니다. 제 생각에 그 기문은 목사 노경린(盧慶麟)이 급박할 때 나왔고 여러 논의가 분분한 날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므로 아마 다시 요량해야 할 곳이 있을 듯합니다. 십분 타당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고치는 것도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만약 이미 정해진 기문이란 핑계로 다시 논의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면 아마도 중외 유생들의 의혹을 야기하게 될 것입니다. 밝은 가르침을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와병중이라 두서없이 한두 가지 말씀드렸을 뿐 자세히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허둥지둥 대필을 시켜서 더욱 송구스럽습니다. 중간에 두 이씨(李氏)의 후예들도 말하기를, “이씨 두 분을 고을의 현인이라 하여 사당에 들인 것은 퇴계가 결정한 일이고 노 목사(盧牧使)의 본래 뜻이니, 후배 젊은이들이 가볍게 고칠 일이 아니다. 만약 한훤당을 높이 받들고자 한다면 정당(正堂) 북쪽에 따로 세 칸 사당을 짓고 스승을 높이는 곳으로 삼으면 될 것이다.……”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서원 안에서 동쪽에는 향현사(鄕賢祠)를 모시고 북쪽에는 존현사(尊賢祠)를 모시는 일은 형세상 시행할 수 없을 듯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삼가 품의하는 편지를 올립니다.[주-D001] 주남(周南)에 …… 있으며 : 질병 등으로 인하여 지방에 머물러 있게 된 것을 말한다. 주남은 중국의 낙양(洛陽)을 이른 것이다. 한 무제(漢武帝) 때의 태사(太史)인 사마담(司馬談)이 병이 위독하여 주남에 머물러 있다가 한나라 봉선(奉禪)의 일에 참예하지 못하여 울분으로 죽었던 데서 온 말이다. 《史記 卷130 太史公自序》[주-D002] 서원(書院) : 1555년(명종10)에 노경린(盧慶麟)이 성주 목사로 부임하여 건립하고 황준량(黃俊良)이 중수한 영봉서원(迎鳳書院)이다.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수촌리에 있다. 숙정자(叔程子), 주자(朱子), 김굉필(金宏弼), 이언적(李彦迪), 정구(鄭逑), 장현광(張顯光)의 위패를 모셨다. 정구(鄭逑)가 1568년(선조1) 봄에 퇴계 선생에게 품의(稟議)하여 천곡서원(川谷書院)으로 고쳤다.[주-D003] 기문(記文)을 지어주셨으니 : 1560년(명종15) 7월에 이황이 〈영봉서원기(迎鳳書院記)〉를 지었으며, 《퇴계집》 권42에 실려 있다.[주-D004] 오자강(吳子强) : 오건(吳健, 1521~1574)으로, 자강은 그의 자이다. 본관은 함양(咸陽), 호는 덕계(德溪)이다. 남명 조식이 덕산동(德山洞)에서 강론하자 그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김인후(金麟厚)ㆍ이황(李滉)의 문인이기도 하다.[주-D005] 류 광주(柳光州) : 광주 목사(光州牧使)를 역임한 류경심(柳景深, 1516~1571)을 말한다. 본관은 풍산(豐山), 자는 태호(太浩), 호는 구촌(龜村)이다. 1560년 광주 목사가 되었고, 뒤에 호조 참판, 예조 참판, 대사헌, 병조 참판, 평안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문집에 《구촌집》이 있다.[주-D006] 권점(圈點) : 그림이나 글씨 옆에 동그라미를 치며 의견을 표시하는 것이다.[주-D007] 문열공(文烈公)은 …… 있어서 : 문열공은 고려 때 문신 이조년(李兆年, 1269~1343)이며, 고려 시대부터 전해오던 그의 영정 왼손에 염주가 들려 있던 것을 이른 것이다. 이조년의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원로(元老), 호는 매운당(梅雲堂)ㆍ백화헌(百花軒)이다.[주-D008] 노경린(盧慶麟) : 1516~1568. 본관은 곡산(谷山), 자는 인보(仁甫), 호는 사인당(四印堂)이다. 성주 목사(星州牧使)로 있을 때 영봉서원(迎鳳書院)을 세워 유학(儒學)을 장려하였다.[주-D009] 두 이씨(李氏) : 애초에 노경린이 영봉서원에 제향 하고자 했던 문열공(文烈公) 이조년(李兆年)과 그 장손 이인복(李仁復)이다.
    2023-12-04 | NO.532
  • 금남군 정충신에 대한 만시, 4수 〔錦南君鄭忠信挽, 四首〕 - 동명집 제5권
    금남군 정충신에 대한 만시, 4수 〔錦南君鄭忠信挽, 四首〕 - 동명집 제5권 : 동명(東溟) 정두경(鄭斗卿, 1597~1673)황각으로 인하여서 발탁됐으매 / 拔擢因黃閣젊은 나이 때에부터 날아올랐네 / 飛騰自黑頭몸은 비록 군사 일에 종사했지만 / 身雖事鞍馬책은 춘추 좋아하는 기벽 있었네 / 書是癖春秋호도책을 써서 적을 격파하였고 / 賊破虎韜策용액후의 높은 관작 봉해졌다네 / 官封龍額侯무덤 모습 기련산을 형상했거니 / 祈連如象塚무덤 이에 안현 본떠 만들었다네 / 鞍峴作斯丘훈업 보면 서쪽 변경에서 이뤘고 / 勳業從西塞웅대한 맘 북쪽 오랑캐에 있었네 / 雄心在北胡애석하게 허리 아래 차고 있던 칼 / 惜哉腰下劍입 속에 든 구슬로다 되어 버렸네 / 奄是口中珠활쏘기는 천호의 법 터득하였고 / 射得天弧法진영 보면 태을도를 전해 받았네 / 營傳太乙圖곽 표요가 그 옛날에 지었던 집의 / 嫖姚舊治第문 앞으로 난 길 날로 황폐해지리 / 門逕日荒蕪공 세운 건 말 달리길 잘해서였고 / 功以能馳馬명성은 또 글 잘 지어 이룩하였네 / 名因善屬文한 호통에 역적 무리 사로잡았고 / 一呼擒逆竪만번 죽어 밝은 임금 은혜 갚았네 / 萬死報明君군진 풀자 병사들은 비와 같았고 / 陣解兵如雨높이 솟은 운대 속에 화상 걸렸네 / 臺高畫入雲장안에서 상여꾼들 길을 떠나니 / 長安發玄甲되레 옛날 행군하던 때와 비슷네 / 還似舊行軍한해 지역 임할 날이 가까웠는데 / 瀚海臨將近기련산의 무덤 홀연 높이 솟았네 / 祈連塚忽高사신들은 기린각서 공 칭송하고 / 詞臣頌麟閣장사들은 용도 계책 생각하누나 / 壯士憶龍韜스스로가 삼군 장수 이루었거니 / 自致三軍帥어찌 일대 영웅호걸 아니겠는가 / 寧非一代豪젊은 시절 도필리로 있었던 것이 / 少時刀筆吏어찌 소조 병통이라 할 수 있으랴 / 安可病蕭曹[주-D001] 정충신(鄭忠信) : 1576~1636. 본관은 금성(錦城), 자는 가행(可行), 호는 만운(晩雲),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이괄(李适)의 난 때 공을 세워 진무 공신(振武功臣) 1등으로 금남군(錦南君)에 봉해졌다. 1627년(인조5) 정묘호란 때에는 부원수(副元帥)로 있었다. 천문(天文)ㆍ지리ㆍ복서(卜筮)ㆍ의술(醫術) 등 다방면에 해박하고, 청렴하기로도 이름이 높았다. 문집에 《만운집(晩雲集)》, 저서에 《백사북천일록(白沙北遷日錄)》, 《금남집(錦南集)》 등이 있다.[주-D002] 황각(黃閣)으로 …… 날아올랐네 : 정충신이 어린 나이 때부터 정승의 칭찬을 받아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는 뜻이다. 황각은 정승이 집무하는 청사를 말하는데, 한나라 때 승상의 청사 문을 황색으로 칠하여 궁궐과 구분했던 것에서 유래되었다. 정충신은 임진왜란 때 17세의 어린 나이로 광주 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의 명으로 선조가 있는 의주(義州)까지 갔다가 당시 병조 판서로 있던 이항복(李恒福)의 눈에 들어 크게 칭찬을 받았으며, 그해 가을에 행재소에서 실시하는 무과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주-D003] 몸은 …… 있었네 : 무장으로서 학문에도 조예가 깊었음을 뜻한다. 진(晉)나라 두예(杜預)는 자가 원개(元凱)인데 장군이며 학자로서 박학했고, 특히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매우 좋아하여 스스로 《춘추좌씨전》의 벽(癖)이 있다고 하였다. 《晉書 卷34 杜預列傳》[주-D004] 호도책(虎韜策) : 병법(兵法)을 말한다. 주(周)나라 여상(呂尙)이 지은 《육도(六韜)》라는 병서(兵書) 속에 〈호도(虎韜)〉라는 편명이 들어 있다.[주-D005] 용액후(龍額侯) : 용액은 중국의 지명이다. 한 무제(漢武帝) 때의 장군인 한열(韓說)이 위청(衛靑)을 따라 흉노 지역에 갔다가 이들을 정벌한 공로로 용액후에 봉해졌다. 《史記 卷111 衛將軍驃騎列傳》 여기서는 정충신이 장만(張晩)의 휘하에 있으면서 공을 세웠으므로 끌어다가 썼다.[주-D006] 무덤 …… 형상했거니 : 기련산(祈連山)은 중국 서부 지역에 있는 산으로, 감숙성(甘肅省) 청해(靑海)에 있는 산인 천산(天山)을 가리키는 말이다.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 곽거병(霍去病)이 기련산 주위에 있는 흉노족을 정벌하기 위하여 여섯 차례나 출정하여 큰 공을 세웠는데, 그가 죽은 뒤에 그의 무덤 위 봉분을 기련산 모양으로 만들어 그의 공적을 기렸다. 《史記 卷111 衛將軍驃騎列傳》[주-D007] 무덤 이에 …… 만들었다네 : 정충신의 공을 기리기 위하여 정충신의 무덤은 안현(鞍峴) 모양을 본떠 만들었다는 뜻이다. 정충신의 묘는 충청남도 서산시 지곡면(地谷面) 대요리 마힐산(摩詰山)의 국사봉 중턱에 있다. 안현은 서울의 질마재를 말한다. 정충신은 이괄의 난 때 안현에서 이괄의 군사를 물리쳤다.[주-D008] 훈업(勳業) …… 있었네 : 정충신이 정묘호란 때 평안도 일대에서 공을 세웠으며, 이후 오랑캐인 청나라를 치고자 하는 뜻을 품고 있었다는 뜻이다.[주-D009] 애석하게 …… 버렸네 : 용맹을 뽐내던 장수인 정충신이 죽었다는 뜻이다. ‘입 속에 든 구슬’은 시체를 염(殮)할 때 쌀과 구슬을 죽은 사람 입에 넣어 머금게 하는 반함(飯含)의 절차를 말한다.[주-D010] 천호(天弧) : 남방 칠수(七宿) 가운데 정수(井宿)에 소속된 별자리인데, 아홉 개의 별이 활 모양을 이루고 있다. 전하여 활을 아주 잘 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주-D011] 태을도(太乙圖) : 군사를 운용하는 방법을 적은 병서(兵書)를 말하는 듯하다. 정도전(鄭道傳)의 저술 가운데 《태을칠십이국도(太乙七十二局圖)》가 있다.[주-D012] 곽 표요(霍嫖姚) : 한(漢)나라 무제 때의 표기장군으로 있었던 곽거병(霍去病)을 가리킨다. 그는 표요교위(嫖姚校尉)로 있으면서 기련산 주위에 있는 흉노족들을 정벌하기 위하여 여섯 차례나 출정하여 큰 공을 세워 표기장군(驃騎將軍)이 되고 관군후(冠軍侯)에 봉해졌다. 《漢書 卷55 霍去病傳》[주-D013] 공 …… 잘해서였고 : 정충신이 17세의 어린 나이에 권율의 명을 받아 왜군들이 가득한 길을 단신으로 뚫고 행재소까지 갔으므로 한 말이다.[주-D014] 명성은 …… 이룩하였네 : 정충신이 무장(武將)이면서도 글재주가 있어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천문ㆍ지리ㆍ복서ㆍ의술 등 다방면에 걸쳐 정통하였으므로 한 말이다.[주-D015] 높이 …… 걸렸네 : 정충신이 이괄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공신에 봉해진 것을 말한다. 운대(雲臺)는 한(漢)나라의 명제(明帝)가 전대(前代)의 공신들을 추모해서 28명 장수의 화상을 그리고 이것을 보관하기 위하여 쌓은 대(臺)로, 전하여 공신각(功臣閣)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주-D016] 한해(瀚海) …… 가까웠는데 : 북쪽으로 오랑캐들을 정벌할 날이 가까웠다는 뜻이다. 한해는 몽고의 항원산(杭爰山)에 대한 음역(音譯)이다. 한나라 때 곽거병(霍去病)이 이곳에 여섯 번 출정하여, 멀리 사막을 건너고 봉선(封禪)을 행하며 한해에 등림(登臨)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漢書 卷55 霍去病傳》 여기서는 변경 지방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주-D017] 기련산(祈連山)의 …… 솟았네 : 정충신이 죽어 장사 지냈다는 뜻이다. 기련산(祈連山)은 중국 서부 지역에 있는 산으로, 감숙성(甘肅省) 청해(靑海)에 있는 산인 천산(天山)을 가리키는 말이다.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 곽거병(霍去病)이 기련산 주위에 있는 흉노족을 정벌하기 위하여 여섯 차례나 출정하여 큰 공을 세웠는데, 그가 죽은 뒤에 그의 무덤 위 봉분을 기련산 모양으로 만들어 그의 공적을 기렸다. 《史記 卷111 衛將軍驃騎列傳》[주-D018] 기린각(麒麟閣) : 공신들의 화상을 모셔 놓은 전각을 말한다. 한나라 선제(宣帝) 때 곽광(霍光) 등 공신 11명의 화상을 그려서 미앙궁(未央宮) 안에 기린각을 짓고 모시어 그들의 공적을 기렸다.[주-D019] 용도(龍韜) : 병법(兵法)을 말한다. 주(周)나라 여상(呂尙)이 지은 《육도(六韜)》라는 병서(兵書) 속에 〈용도(龍韜)〉라는 편명이 들어 있다.[주-D020] 젊은 …… 있으랴 : 정충신이 미천한 집에서 태어났으며, 절도영(節度營)에 속한 정병(正兵)으로서 지인(知印)의 직임을 맡고 있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권율의 명으로 의주(義州)의 행재소에 갔다가 발탁되어 끝내 큰 공을 세워 나라의 간성이 되었으므로 한 말이다. 도필리(刀筆吏)는 칼이나 문서를 맡은 하급 관리를 말한다. 소조(蕭曹)는 한(漢)나라의 개국 공신(開國功臣)인 소하(蕭何)와 조참(曹參)을 말한다. 이들은 원래 도필리로 있다가 유방(劉邦)을 도와 한나라를 건국하였다. 《한서》 권39 〈소하조참전(蕭何曹參傳)〉의 찬(贊)에 이르기를 “소하와 조참은 모두 진나라의 도필리 출신으로서, 당시에는 볼만한 행실이 없이 녹록하기만 하였다. 그러다가 한나라가 일어나자 해와 달의 후광을 의지하면서, 소하는 성실하게 근거지를 지켰고, 조참은 한신과 함께 정벌에 나섰다.”라고 하였다.
    2020-09-15 | NO.531
  • 금남군 정충신의 어린 시절
    광주광역시에서 전해 내려오는 조선 중기 선조 때의 공신 정충신의 비범한 어린 시절에 관한 이야기.조선 후기 인조(仁祖)[재위 1623~1649] 때의 공신인 정충신(鄭忠信)[1576~1636]의 어린 시절의 비범함을 알 수 있는 세 가지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들은 당시 광주목사이던 권율 장군과 관련되어 있다. 1981년에 광산군지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한 『광산군지』에 수록되어 있다. 1985년에 광주시에서 간행한 『광주시사』에 수록되어 있다. 1990년에 광주직할시에서 간행한 『광주의 전설』에 수록되어 있다. 정충신은 조선 선조(宣祖)[재위 1567~1608] 때의 충신으로 고려 말 명장 경열공(景烈公) 정지(鄭地) 장군의 7대손이다. 정충신이 어렸을 때 임진왜란이 발생하였다. 전라도 광주에서 조정으로 상소문을 전달할 사람이 없었는데, 어린 정충신이 나섰다. 주위 사람들이 말렸으나 권율(權慄)[1537~1599] 장군은 비범함을 알아보고 믿고 맡겼다. 어린 정충신은 상소문을 담뱃대 속에 말아 넣는 지혜를 발휘하여 들키지 않고 전달하였다. 정충신은 어려서부터 영민해 당시 광주목사인 권율 장군의 통인(通引)으로 있었다. 하루는 권율 목사가 여섯 살 정충신의 지혜를 시험하고 싶었다. 권율 목사는 덧문을 아래에서 위로 높이 올려 처마 밑에 걸어두고 문짝 위에 물을 가득 담은 그릇을 두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급히 문을 내리면 쏟아지는 물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다음 권율 장군은 정충신을 불러 비가 와서 날이 쌀쌀하니 덧문을 내려 닫으라고 하였다. 정충신은 이 말을 듣자마자 바로 덧문을 닫지 않고, 광으로 가서 나무 의자와 대막대를 가져왔다. 차분하게 발판을 마루에 놓고 대막대로 문짝 위를 훑어서 물그릇이 걸리자 조심히 물그릇을 내려놓고 덧문을 내려 닫았다. 권율 장군은 이 광경을 목격하고 정충신의 비범함을 알아보았다. 얼마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은 난을 피해 의주로 몽진(蒙塵)하였다. 각 전선에서의 보고가 두절되었고, 권율 목사도 장계를 올리지 못해 걱정이 컸다. 이때 정충신이 권율 목사에게 자신을 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권율 목사는 깊이 생각하다가 정충신이 어리지만 영민하기에 믿고 맡길 만하다고 생각해 장계를 써서 정충신에게 건네주었다. 다음날 권율 목사는 길을 떠나는 정충신의 행색을 보고 매우 놀랐다. 장계는 지니고 있지 않고, 더벅머리 땔나무꾼 행색에 망태기를 메고 있었다. 정충신은 의아해 하는 권율 목사에게 메고 있는 망태기가 장계라고 하였다. 그리고 장계를 그대로 지니고 무사히 적진을 통과하기는 어렵기에 장계를 길게 찢어 새끼를 꼬아 망태기로 엮었다고 하였다. 권율 목사는 정충신의 기지에 매우 놀랐다. 정충신은 무사히 적진을 뚫고 도착하여 장계를 순서대로 다시 펴서 이항복(李恒福)[1556~1618]에게 전달하였다. 이항복은 어린 정충신의 비범함과 용기를 알아보고 거두어 들였다. 정충신은 이곳에서 학문과 무예를 닦으며 장유(張維)와 최명길(崔鳴吉) 등과 친교를 맺었고 얼마 후 무과에 급제하였다. 정충신은 광해군 때 청나라에 잠입하여 적정(敵情)을 탐지하였고, 인조 때는 이괄의 난을 평정하여 진무공신으로 사호(賜號)를 받고 금남군(錦南君)에 봉해졌다. 또 다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이 전라도 광주목사로 있을 때의 일이다. 권율 장군은 호남 각지에서 왜적을 대파한 승첩보와 호남의 정세를 선조가 몽진(蒙塵)하였던 의주(義州)의 행재소(行在所)[왕이 상주하는 궁궐을 떠나 거둥할 때 임시로 머무르는 행궁]에 알려야 했는데, 왜적이 가득하여 장계를 전할 길이 없었다. 이때 나이 어린 정충신이 사자(使者)를 자청하고 나섰다. 때는 삼복 한더위로, 민첩하고 지략이 있는 정충신은 온몸에 옻칠을 발라 나병 환자로 가장을 하였다. 그리고 장계를 가늘게 노끈으로 꼬아 배낭을 만들어 걸인 행색을 하고 길을 떠났다. 천품(天稟)이 영민한 정충신은 적진을 피해 가다가도 정탐을 위해 일부러 적진을 찾아들어가기도 하며 밤낮으로 의주를 향해 갔다. 정충신은 무사히 행궁에 도착하였고 메고 간 배낭을 풀어 장계를 원상태로 만들어 왕에게 전달하였다. 병조판서 이항복이 정충신의 비범함을 한눈에 알아보고 정충신을 자신의 집에 머무르게 하며 손수 글을 가르쳤다. 이항복은 정충신에 대해 만약 칼을 버리고 책을 취하면 훌륭한 명사가 될 것이라 하였다. 그해 겨울 정충신은 무과에 급제하였고, 이괄의 난 때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후에는 경상도병마절도사를 지내는 등 훌륭한 명신이 되었다. 비범한 인물의 어린 시절을 당대의 유명 인물이 미리 알아보고 훌륭한 인물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는 인물전설이다. 당대의 유명한 인물이 어린 아이를 시험하거나 우연한 사건을 목격하여, 그 지혜로움과 비범함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어린 인물은 후에 나라에 큰 공을 세우거나 큰 학자가 된다.[참고문헌] 『광산군지』(광산군지편찬위원회, 1981) 『광주시사』(광주시, 1985) 『광주의 전설』(광주직할시, 1990)[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1 | NO.530
  • 금동마을과 삼형제 다리
    광주광역시 광산구 삼도동에서 전해 내려오는 금동마을과 삼형제 다리에 관한 이야기. 「금동마을과 삼형제 다리」는 금동마을과 삼형제 다리의 유래에 관한 지명전설이다. 금덩어리를 뜻하는 '금(金)' 자와 삼형제를 지칭하는 아이 '동(童)' 자가 합쳐져 금동마을이 되었으며, 삼형제가 놓았다는 다리는 경지정리사업으로 인해 땅속에 묻혔다. 「금동마을과 삼형제 다리」는 1985년 광산군지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한 『광산군지』에 처음 수록되었고, 이후 1990년 광주직할시에서 간행한 『광주의 전설』에 다시 수록되었다. 아주 먼 옛날, 광산군 삼도면 김동리에 힘이 센 삼형제가 병든 아버지를 모시고 가난하게 살았다. 그러던 중, 아버지의 병세가 위중한 상태에 놓이게 되자, 삼형제는 의논 끝에 약초를 구하러 집을 나섰다. 이곳저곳을 헤맸지만 약초는 보이지 않았고, 지친 삼형제는 기진맥진하여 마침내 쓰러지고 말았다. 그런데 꿈속에서 산신령이 삼형제 앞에 나타나서 "나는 이 산의 산신령인데, 너희들이 찾는 약초는 이 산에는 없다. 이 산을 내려가면 큰 냇가가 있을 것이니 그 내를 건너가거라. 그러면 하늘에서 별 하나가 떨어지고, 그때 너희들이 찾고 있는 약초가 보일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이에 삼형제가 그 큰 냇가를 어떻게 건널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산신령은 "냇가에 이르면 큰 조약돌 세 개가 있을 테니, 그 돌을 냇물에 던지도록 하여라. 그러면 다리가 놓여질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삼형제는 잠에서 깨어나 서로 꿈이야기를 하면서 산을 내려갔다. 과연 큰 내가 나오고 큼직한 조약돌 세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삼형제가 기쁜 마음으로 조약돌을 들어 냇물에 던지려 하는 찰나, 살려 달라는 젊은 여인의 비명이 들려왔다. 깜짝 놀란 삼형제가 소리가 나는 곳을 살펴보니, 큰 호랑이가 여인을 입에 물고 있었다. 힘이 센 삼형제가 일시에 돌을 던졌고, 호랑이는 머리에 돌을 맞아 뻗고 말았다. 삼형제는 실신한 여인을 등에 업고 집으로 데려가 극진히 간호하였다. 얼마 후, 약초 생각을 다시 한 삼형제는 당황하였다. 삼형제는 의식을 잃은 여인을 방에 눕혀 두고는 다시 냇가로 달려가 산신령이 일러주었던 조약돌 한 개를 집어 힘껏 물속으로 던졌다. 이후 연거푸 조약돌 두 개를 다 던지자, 다리가 완전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삼형제는 조심조심 다리를 건넜고, 하늘에서 별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얼마 후, 별 한 개가 꼬리를 끌고 냇가 쪽으로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삼형제가 별이 떨어진 곳으로 급히 가 보니, 땅이 크게 파인 곳에 풀뿌리 같은 것이 있었다. 삼형제는 풀뿌리를 캐어 집으로 돌아가기가 바쁘게 약탕관에 넣어 달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삼형제는 호랑이에게 물려갈 뻔했던 여인을 생각하고는 급히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 여인은 온데간데없었다. 깜짝 놀라 삼형제가 이불을 들추니, 그 이불 밑에 눈부신 황금덩이가 놓여 있었다. 이후, 풀뿌리를 달여 마신 아버지도 언제 그랬냐는 듯 병환이 완쾌되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이 마을을 '금동'이라 부르게 되었고, 그때 놓인 다리를 '삼형제 다리'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 다리는 1980년대 초에 경지정리사업으로 인해 땅속에 묻혔다. [모티프 분석] 「금동마을과 삼형제 다리」의 주요 모티프는 '효성과 우애에 기반한 지명유래'이다. 삼형제는 병든 아버지를 모셨는데, 아버지의 병환이 깊어지자, 의논하여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해줄 약초를 구하러 길을 나섰다. 삼형제는 서로 합심하여 산신령의 명에 따라 조약돌을 던져 다리를 만들었다. 또한, 호랑이에 물려 죽을 위기에 놓인 여인도 지나치지 않고 합심하여 구하여 간호하였다. 삼형제의 효심과 우애, 의협심은 산신령이 꿈속에서 삼형제가 약초를 캘 수 있도록 조력하는 계기가 되었다.또한, 삼형제들은 그동안의 행동과 성품에 대한 보상으로 금덩이를 받았다. 삼형제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한 여인이 금덩어리로 변한 것이다. 그래서 금덩어리를 뜻하는 '금(金)' 자와 삼형제를 뜻하는 아이 '동(童)' 자가 합쳐져 마을 이름이 금동마을로 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삼형제 다리는 금동마을 인근에 위치한 삼도동 내기마을과 복골마을 사이에 있었는데, 1980년대 초에 경지정리사업으로 인해 땅에 묻혔다. [참고문헌] 『광산군지』(광산군지편찬위원회, 1985) 『광주의 전설』(광주직할시, 1990) 광주광역시 광산구청(https://www.gwangsan.go.kr)[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1 | NO.529
  • 금령의 갈림길에서- 김종직
    점필재집 시집 제4권 / [시(詩)]오월 이십팔일에 충청도 유지경차관이 되어 이사성ㆍ성시좌와 함께 서울을 출발하여 용인에서 자고, 다음 날 금령의 갈림길에 이르러 나는 양성으로 향해 가면서 짓다. 이 때 사성은 경상도로 향하였는데 그의 어버이가 진주에 있었고, 시좌는 전라도로 향하였는데 그의 부친이 광주목사로 있었다[五月二十八日以忠淸道宥旨敬差官同李師聖成時佐發京宿龍仁明日至金嶺分路向陽城有作師聖向慶尙道其親在晉州時佐向全羅道其父爲光州牧使]세 사람이 똑같이 금계사가 되어서 / 三人共作金鷄使천 리 밖 역참 길에서 다시 헤어지노니 / 千里還分馹騎途객지의 상황 내야 어찌 초라함을 혐의하랴만 / 客況我寧嫌草草어버이 뵙는 그대들은 되려 기쁘기만 하겠네 / 親闈君却得愉愉부슬부슬 저녁 비는 나그네 시름 돋우고 / 廉纖晩雨挑愁思어렴풋한 고향 산천은 그림처럼 생각나누나 / 依約鄕山想畫圖왕사가 기약 있으니 이별을 아쉬워 말라 / 王事有期休惜別달이 둥글었다 이지러지면 도성에 돌아가리 / 月圓復缺返神都[주-D001] 금계사 : 사조사(赦詔使)와 같음. 옛날 사조(赦詔)를 반포할 때 황금으로 머리를 장식한 금계(金鷄)를 간대 머리[竿頭]에 설치했던 데서 온 말이다.* 성준(成俊, 1436~1504)은 조선 전기에, 이조참의, 우부승지, 좌부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자는 시좌(時佐), 시호는 명숙(明肅)이다. 참판 성석인(成石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성엄(成揜)이고, 아버지는 참판 성순조(成順祖, 1418~1473)이다. 성순조가 광주목사(1466~1469)를 지냈다.
    2023-08-09 | NO.528
  • 금포가〔錦袍歌〕 - 동명집 제8권
    금포가〔錦袍歌〕 - 동명집 제8권 : 동명(東溟) 정두경(鄭斗卿, 1597~1673)그댄 보지 못하였나 / 君不見금남군 정 절도사를 / 錦南鄭節度그댄 보지 못하였나 / 君不見함릉군 이 사군을 / 咸陵李使君이 두 영웅 발해 바다 동쪽에서 태어나서 / 兩雄挺生渤海左삼한 사직 곤륜산과 같이 안정되게 했네 / 三韓社稷安崑崙장안에선 선비들 다 이 두 영웅 기리거니 / 長安布衣尙雄俠안 그러면 무슨 수로 장군 알 수 있었으랴 / 不然何以知將軍올해 내가 수천 리 밖 외방 향해 나아가자 / 今年我向數千里이별 임해 비단 한 필 내게 선사해 주었네 / 臨別贈我一段綺그들 위해 옷 마름해 그들의 정 받았으매 / 爲君裁衣領君情서생인 나 비단옷을 입자 모두 놀라누나 / 書生衣錦人皆驚양쪽 소매 휘저으매 쌍 원앙이 날거니와 / 兩袖披拂雙鴛鴦왼 소매엔 숫원앙이 수놓이었고 / 左袖雄鴛鴦오른쪽엔 암원앙이 수놓이었네 / 右袖雌鴛鴦두 원앙이 나란하게 함께 날지 못하거니 / 鴛鴦不得長比翼인생에서 서로 그리는 걸 어찌 원망하랴 / 人生何恨長相憶서로 간에 떨어져서 그리워하매 / 長相憶이를 보자 괜히 머리 희게 세거니 / 對此空白首차라리 이 비단 도포 훌훌 벗어 남에게 줘 / 不如脫袍贈他人신풍에서 술 사 먹게 하는 것이 더 좋으리 / 留却新豐典春酒[주-D001] 금포가(錦袍歌) : 남은경은 이 시를 정두경의 시문학 가운데 가행시(歌行詩)로 분류하고, 가행시 가운데서도 영물적가행(詠物的歌行)으로 분류하였으며, “이 시는 3, 5, 7로 이루어진 장단구로 된 작품이다. 이 시는 시구의 내용에 따라 압운(押韻)도 양(揚)하다가 억(抑)하고, 다시 양하다가 억하는 변화를 이루어 시인의 감정의 기복을 그리고 있고, 압운의 소밀(疏密)에 의해 속도의 변화도 이루어 시인 정서의 격변을 알 수 있게 하는 효과를 내고 있다. 또 기본 글자는 7자로 하면서, 독자의 주의를 환기시키거나 그 내용을 강조해야 할 때는 글자 수를 3자와 5자를 이용해 변화를 주고 있다.”라고 하였다. 《남은경, 東溟 鄭斗卿 文學의 硏究,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1998, 144쪽》[주-D002] 금남군(錦南君) 정 절도사(鄭節度使) : 정충신(鄭忠信, 1576~1636)을 가리키는 듯하다. 정충신의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가행(可行), 호는 만운(晩雲)이다. 1592년(선조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 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종군하였다. 1624년(인조2)에는 안주 목사(安州牧使)로 방어사(防禦使)를 겸임하고 있던 중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도원수 장만(張晩)의 휘하에서 전부대장(前部大將)이 되어 이괄의 군사를 황주와 서울 안산(鞍山)에서 무찔러 진무 공신(振武功臣) 1등으로 금남군에 봉해졌다. 정묘호란 때에는 부원수를 지냈고, 이후 경상도 병마절도사를 지냈다.[주-D003] 함릉군(咸陵君) 이 사군(李使君) : 이해(李澥, 1591~1670)로, 본관은 함평(咸平), 자는 자연(子淵), 호는 농옹(聾翁)이다.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 공신(靖社功臣) 2등에 책록되고 함릉군에 봉해졌다. 1624년에 개성부 유수가 되었으며, 이후 형조 판서를 지냈다. 1652년(효종3)에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처음에 충정(忠靖)으로 시호를 받았다가, 숙종 때 충민(忠敏)으로 개시되었다.[주-D004] 곤륜산(崑崙山) : 전설 속에 나오는 최고의 영산(靈山)으로, 중국의 서쪽 지역에 있으며, 서왕모(西王母)가 이곳에 산다고 한다.[주-D005] 신풍(新豐) : 중국의 지명으로, 이곳에서는 아주 맛 좋은 술이 생산되는데, 그 술을 신풍주라고 한다. 왕유(王維)의 시에 “신풍 땅의 맛 좋은 술 한 말에 만 전이고, 함양 땅의 유협 중엔 젊은이가 많네.〔新豐美酒斗十千 咸陽遊俠多少年〕”라고 한 구절이 있다. 《王右丞集 卷14 少年行》
    2020-09-15 | NO.527
  • 기고봉 명언에 대한 만사〔奇高峯明彦挽詞〕- 백담집
    기고봉 명언에 대한 만사〔奇高峯明彦挽詞〕- 백담집 제4권 : 구봉령(具鳳齡, 1526~1586)서석산 제일봉이 뜻밖에 부러졌구나 / 瑞石新摧第一峯이 사람에게 어찌 눈물 떨구게 하는지 / 斯人何使涕垂胷문장만 바다처럼 넓을 뿐이 아니고 / 文章不獨波瀾闊도술 또한 이 나라에 통하게 했었네 / 道術要將閫域通옛 절 차가운 달빛에 옅은 구름 비치고 / 古寺殘雲寒夜月작은 배 저문 강바람에 하얀 눈 흩날리네 / 小船飛雪暮江風만나 뵙지 못한 채로 영원히 이별했으니 / 乖逢便作平生別꿈속에서나마 간곡하게 혼매함을 깨우치소서 / 夢裏丁寧警蔽蒙내가 서울에 들어가는 날 배 위에서 공이 봉선사(奉先寺)에 묵는다는 것을 들었다. [주-D001] 기고봉(奇高峯) : 기대승(奇大升, 1527~1572)으로,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ㆍ존재(存齋)이다. 1558년(명종13) 문과에 급제하였고, 성균관 대사성, 대사간, 공조 참의를 지냈다. 퇴계와 주고받은 사칠논변(四七論辨)은 유학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논쟁으로 평가되고 있다. 광주의 월봉서원(月峰書院)에 제향 되었으며, 시호는 문헌(文憲)이다.[주-D002] 서석산(瑞石山) …… 부러졌구나 : 서석산은 광주(光州) 무등산(無等山)의 별칭이다. 산이 부러졌다는 말은 산붕(山崩)과 같은 말로 기대승의 죽음을 뜻한다. 《진서(晉書)》 권92 〈고개지열전(顧愷之列傳)〉에서 고개지가 스승 환온(桓溫)이 죽었을 때 “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마르니, 물고기와 새들 어디에 의지할꼬.〔山崩溟海竭, 魚鳥將何依.〕”라고 애도하였다.
    2020-12-14 | NO.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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