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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원수(權元帥)의 행주비(幸州碑) - 간이집 제1권 / 비(碑)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제도 도원수(諸道都元帥) 정헌대부(正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증(贈)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춘추관사 홍문관제학 동지성균관사 권공 율(權公慄)이 세상을 떠난 지 일 년이 지나고 나서, 공의 막료(幕僚)였던 사람들이 ‘공이 전에 거두었던 행주(幸州)의 승첩(勝捷)이야말로 그 공이 워낙 컸던 만큼 그 당시 현장의 언덕에 비를 세워 그 공적을 영원히 전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뜻으로, 공의 사위인 현재의 영상(領相) 이공(李公)을 찾아가 나에게 글을 보내 비문을 청하도록 부탁하기에 이르렀다.

삼가 살펴보건대, 임진년 4월에 일본이 병력을 대대적으로 동원하여 우리나라를 침범해 왔다. 그러고는 미처 대비하지 못한 우리의 허점을 틈타서 잇따라 우리의 군진(軍陣)과 고을을 함락시켰으므로 중외(中外)가 모두 크게 경악하였다.

이에 상이 이르기를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권모(權某)의 재주를 한 번 시험해 볼만하다고 하는데, 지금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하였다. 이렇게 해서 공이 전임(前任) 의주 목사(義州牧使)의 신분에서 바로 기용되어 광주 목사(光州牧使)에 임명되었다.

당시에 조정의 신하들은 호남과 영남 지방을 사지(死地)로 여기고 있었는데, 공은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곧장 단기(單騎)로 치달려 갔다. 그러나 광주에 도착하자마자 경성(京城)을 이미 지킬 수 없게 되어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몽진(蒙塵)하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징집한 군사들을 이끌고 서쪽으로 들어가 호위하려는 계책을 세우게 되었다.

이때 전라 순찰사(全羅巡察使) 이광(李洸)이 군사 4만 명을 징발한 다음, 방어사(防禦使) 곽영(郭嶸)과 함께 영(嶺)을 사이에 두고 북상(北上)하면서, 공에게 방어군(防禦軍)의 중위장(中衛將) 임무를 맡게 하였다. 이는 서생(書生)을 무부(武夫) 취급하는 조치였으므로 혹 난색을 표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공은 의연히 “내가 행해야 할 직분이다.” 하였다. 직산(稷山)에 이르러 충청(忠淸) 군사와 합세, 수만의 군세(軍勢)를 이룬 뒤에 다시 수원(水原)으로 진군하였다.

이때 이광이 곽영으로 하여금 용인(龍仁)에 있는 적의 진영을 먼저 공격하게 하였으므로, 공이 건의하기를 “왜적이 우리보다 먼저 험준한 지세를 점거하고 있는 만큼, 우리가 습격하기에 유리한 형세가 못 된다. 그리고 지금 이것보다 큰 문제가 있으니, 그것은 경성(京城)이 이미 적의 손에 넘어가 있는 상황에서 주공(主公)이 한 지방의 군사들을 모두 이끌고 왔다는 점이다. 그러니 지금으로서는 오직 곧장 위로 올라가 조강(祖江)을 건넌 다음 임진(臨津)을 굳게 막아 적이 서쪽으로 향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제압하기에 유리한 형세가 전개될뿐더러, 행재소(行在所)에 품달하여 명령을 받을 수 있는 길도 열리게 될 것이니, 장차 큰 계획을 실천에 옮길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지금 소규모의 적을 상대로 예봉(銳鋒)을 다투어서는 안 될 것이요, 그렇게 하는 일은 또 만전을 기하는 일이 못 되는 만큼 우리의 성세(聲勢)와 위신을 손상시키는 결과만 빚게 되고 말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선봉장(先鋒將) 백광언(白光彦)과 조전장(助戰將) 이지시(李之詩)가 각각 정예 군사 1천 명을 직접 이끌고 갈 때에도 그들이 경솔하게 진격하려는 뜻을 보이자, 공이 또 경계시키면서 상대가 먼저 공격해 오기를 기다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공의 이 모든 말들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백광언 등이 모두 전사(戰死)하는 사태에까지 이르고 말았는데, 이날 밤에 군중(軍中)이 지레 겁내며 놀라더니 아침에 적의 모습만 보고도 크게 무너지고 말았으므로, 제군(諸軍)이 모두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에 공 역시 부득이 광주(光州)로 되돌아오고 나서 잠을 잘 때에도 옷을 벗지 않은 채 다시금 주장(主將)을 설득해 보려고 하였으나 오래도록 조용히 있기만 하자, 곧장 분연(奮然)히 일어나 말하기를 “지금은 신자(臣子)가 가만히 앉아서 나라가 망하는 날만 기다리고 있을 때가 아니다.” 하고는, 마침내 경내(境內)의 자제 5백여 인을 끌어모으는 한편 이웃 고을에 격문(檄文)을 돌려 또 1천여 인을 얻은 다음, 경상도와의 경계로 나아가 진을 쳤다.

이때 남원(南原)의 백성들이 왜적이 들이닥치기도 전에 자기들끼리 소요를 일으키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잠시 이를 진정시키고 위무(慰撫)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순찰사가 공의 보고를 접하고는 공에게 부절(符節)을 내주어 임시로 도절제(都節制)를 맡게 하면서, 열읍(列邑)의 관군(官軍)을 지휘 감독하여 영(嶺)에서 호남으로 넘어오는 왜적의 길목을 차단하게 하였으므로, 공이 이치(梨峙)로 진군하여 험준한 지세를 의지하고 적을 기다렸다.

7월에 왜적의 공격을 받고 신속히 격퇴시켰으나, 군중(軍中)에서 용명(勇名)을 떨치던 동복 현감(同福縣監) 황진(黃進)이 적의 탄환에 맞아 퇴각하는 바람에 군사들의 사기가 크게 저하되면서, 미처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에 왜적이 요새지 안으로 뛰어들어 형세가 매우 급하게 되었다. 이에 공이 칼을 빼어 들고 크게 소리를 지르며 앞장서서 적의 칼날을 무릅쓰자, 전사(戰士)들이 모두 일당백(一當百)의 용맹심을 발휘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왜적들이 사상자를 돌볼 틈도 없이 치중(輜重)을 낭자하게 내버려 둔 채 달아나고 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 행재소(行在所)에서 공을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임명하였는데, 이는 나주가 광주보다도 중요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나서 곧이어 본도(本道)의 순찰사(巡察使)를 또 제수받게 되었다. 교서(敎書)가 진중(陣中)에 도착하던 날, 공이 서쪽을 향하여 머리를 조아리며 눈물을 쏟자, 그 비통한 모습에 군사들 모두가 감동되었다. 공이 방어사(防禦使)로 하여금 이치(梨峙)를 대신 지키게 하고, 자신은 전주(全州)로 달려가 도내(道內)의 군사 1만여 명을 수습한 뒤, 9월에 근왕(勤王)의 계책을 실행에 옮기려 하였다.

당시에 여러 왜적들은 평양(平壤)과 황해(黃海)와 개성(開城)을 나누어 점거하고 있었으며, 경성을 점거하고 있는 자들은 꽤나 큰 진영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이들이 군사들을 풀어 놓아 사방을 약탈하게 하는 바람에 서쪽 행재소로 가는 길이 끊어지자, 여러 근왕(勤王)의 부대들 역시 모두 강화(江華)로 들어가서 그저 강을 사이에 두고 굳게 지키고만 있는 실정이었다.

공은 상이 의주(義州)에 머물러 있는 상황에서 왜적이 아직은 평양 이북을 넘어가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는, 우선 경성에 대한 공격을 도모함으로써 서쪽에 가 있는 적들로 하여금 동쪽을 돌보느라 틈이 없게끔 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최상의 방책이라고 판단을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수원(水原)의 독성(禿城)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상에게 보고를 올리니, 상이 상방검(尙方劍)을 풀어 급히 내려 주며 이르기를 “장수들 중에 군령(軍令)을 따르지 않는 자가 있거든 이것으로 처단하라.” 하였다.

경성에 있는 왜적들로서는 공이 군사상의 요해지(要害地)에 버티고 있는 것이 걱정거리였다. 그래서 병력 수만 명을 세 개의 진영으로 나눈 뒤 오산(烏山) 등 지역에 분산 배치하고는 수시로 왕래하면서 도전을 해 왔다. 그러나 공은 성벽을 굳게 지키고 대응을 하지 않으면서 이따금씩 기병(奇兵)을 내보내 예봉을 꺾어 놓곤 하였으므로, 왜적이 결국에는 아무런 소득도 거두지 못한 채 밤에 영채(營寨)를 불사르고 떠나갔다.

계사년 2월에 공이 휘하의 정병(精兵) 약 4천 명을 두 개의 부대로 나눈 뒤, 하나는 절도사(節度使) 선거이(宣居怡)에게 주어 금주(衿州)의 산에 진을 치고서 성원(聲援)을 하게 하는 한편, 하나는 공이 직접 이끌고서 양천강(陽川江)을 건너 고양(高陽)의 행주산성(幸州山城)에 진을 쳤는데, 이때의 병력이 실로 2300인에 불과하였다.

이때 중국의 대장인 이공 여송(李公如松)이 구원병을 총지휘하여 동쪽으로 내려와서는 벌써 평양을 탈환하는 등 그 위명(威名)을 크게 떨치고 있었다. 그래서 왜적 중에 평양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진 자, 황해 지방을 버리고 온 자, 개성에서 후퇴한 자, 함경도에서 풍문을 듣고 도망쳐 온 자들이 모두 경성에 모여들었으므로, 경성에 있는 왜적들은 오히려 그 형세가 더욱 치성해지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공이 외로운 군대를 이끌고서 경성과 근접한 지역으로 들어갔던 것인데, 왜적은 공의 병력이 소수인 것을 알고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으면서 그저 한번 엿보다가 발로 짓밟아 버리면 그만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달 12일 여명(黎明)에 척후(斥候)하던 관리가 왜적의 출현을 보고하자, 공이 군중에 동요하지 말라고 경계시킨 뒤 높은 곳에 올라가 바라보니, 성으로부터 5리(里) 떨어진 지점에 벌써 왜적이 벌판을 까맣게 뒤덮으며 밀려오고 있었다. 왜적은 먼저 1백여 기(騎)를 내보내 우리를 압박하더니, 이윽고 대대적으로 병력을 동원하여 성 주위를 포위하고 성곽을 타고 올라왔는데, 계속 증가되는 숫자가 다시 헤아릴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이에 아군(我軍)이 결사적으로 항전하면서 화살과 바윗돌을 비 오듯 아래로 쏟아 붓자, 왜적이 병력을 셋으로 나눈 뒤에 계속 교대로 휴식을 취하면서 공격을 가해 왔다. 묘시(卯時)에서 유시(酉時)까지 이어진 세 차례의 격전에서 왜적의 전세(戰勢)가 불리해지자, 이제는 갈대 단을 묶어 바람결에 불을 놓기 시작하였는데, 그 불길이 목책(木柵)에까지 번져 오자 성안에서 물을 길어 와 끄기도 하였다.

그런데 다만 서북쪽의 자성(子城 성안에 설치한 또 다른 작은 성)을 지키던 승병(僧兵)의 기세가 약간 꺾인 틈을 타서 왜적이 함성을 지르며 쳐들어오자 군사들 모두가 그 분위기에 휩쓸려 무너지려는 조짐을 보였다. 이에 공이 칼을 빼들고 장수들을 질타하자 여러 장수들이 다투어 예봉(銳鋒)을 막아 서며 육박전을 벌이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왜적이 대패(大敗)한 나머지 시체를 네 곳에 쌓아 두고 불을 지른 뒤에 그곳을 빠져나갔는데, 우리 군대가 아직 남아 있는 왜적들을 붙잡아 목을 벤 것만도 130여 급(級)이나 되었으며, 그들이 버리고 간 기치(旗幟)와 개갑(鎧甲)과 도창(刀槍) 등을 노획한 것 역시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당시에 이 제독(李提督)이 개성(開城)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그 선봉(先鋒)인 유격(遊擊) 사대수(査大受)가 공의 대첩(大捷) 소식을 듣고는 다음 날 편비(褊裨)를 보내 전쟁터를 돌아보게 하였으며, 또 며칠 지난 뒤에는 공과의 면회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이에 공이 군진(軍陣)을 정돈하고서 그를 맞았는데, 그가 와서는 탄식하며 말하기를 “외국에도 이런 진짜 장수가 있었구나.” 하였다.

얼마 지난 뒤에 공이 파주(坡州)의 산성으로 군대를 이동시켰다. 왜적이 행주에서의 패배를 기필코 보복하려고 군사를 총동원하여 서쪽으로 향하다가, 공이 성벽 위에 서서 행주에서보다 더 엄하게 대비하고 있는 것을 멀리서 바라보고는, 그곳을 공격하지 말라고 서로 경계하며 그냥 돌아간 것이 무려 세 차례나 되었다.

4월에 이 제독(李提督)이 심유경(沈惟敬)의 계책을 들어 줌에 따라, 여러 왜적들이 강화(講和)의 약속을 얻어 냈다고 일컬으면서 어느 날 갑자기 경성을 버리고 떠나가기 시작하였다. 공이 이 소문을 듣고는 날랜 군사들을 이끌고 경성으로 치달려 들어갔으나, 그때는 이미 왜적이 한강(漢江)을 건넌 뒤였다.

그런데 이 제독이 유격(遊擊) 척금(戚金)을 보내 공의 동정(動靜)을 일일이 보고하게 하다가, 한강 나루에 있는 배들을 모두 거두어 추격하는 군대가 건너가지 못하게 방해하였으므로, 공이 울분을 터뜨리면서도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어 군대를 해산시키고 본도(本道)로 돌아오게 되었다.

대체로 살펴보건대, 공은 처음부터 경성을 수복(收復)하려는 뜻을 품고 있었는데, 그것이 그만 전임 순찰사(巡察使) 때문에 좌절되고 말았었다. 그리하여 양호(兩湖)의 6만 병력이 집결했던 것을 계기로, 임진(臨津)으로 달려가서 기필코 지켜 낼 수 있는 그 좋은 기회를 무산시킨 채, 급기야는 수원(水原)에서 어처구니없는 패배를 맛보게 되기에 이르렀으니, 이치(梨峙)에서의 승리 같은 것은 불행을 당하고 나서 조금밖에 분풀이를 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몇 년 동안이나 봉시 장사(封豕長蛇)가 다시는 호남 지방을 넘보지 못하게 한 결과, 호남의 그 풍성한 곡물을 거두어 동쪽과 서쪽에 수송해서 충분히 공급하게 해 주었으니, 이것이 모두 누구의 덕분이라고 해야 하겠는가.

그러다가 순찰사의 직책을 대신 맡게 된 뒤로부터는 일도(一道)의 군사들을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는 하였으나, 당시에 그 병력을 진작부터 쓰고 있는 자들이 많았으니, 가령 절도사(節度使) 최원(崔遠)이 병력을 먼저 장악하고서 근왕(勤王)하는 대군(大軍)이라고 일컫다가 강화(江華)에서 기세가 꺾여 버린 경우 같은 것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밖에도 곳곳마다 의병이나 관군(官軍) 등 여러 부대들이 혹은 싸우고 혹은 지키고 있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다.

그래서 공이 겨우 1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서 북상(北上)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정도의 군세(軍勢)로는 곧장 승냥이와 범의 소굴을 두들겨 팰 수가 없었기 때문에 독성(禿城)에서 그들의 목을 잠시 누르고 있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만으로도 좌충우돌하는 적의 위세를 꺾어 놓음으로써 양호(兩湖)와 기우(畿右)의 길이 막힘없이 뚫리게 하는 효과를 거둘 수가 있었다.

그러다가 행주(幸州)에 이르게 되어서는, 주인이 객을 맞는 유리한 위치에서 부족한 병력으로 엄청난 수의 왜적을 무찌르는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대체로 보건대, 중국 장수가 평양을 탈환한 그 위세도 아직 남아 있었지만, 그뿐만이 아니라 이 행주의 대첩 역시 흉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에 충분한 효과가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만약에 왜적을 겁나게 하는 이런 승리가 있지 않았더라면, 심유경(沈惟敬) 같은 자가 백 명이 있었다 하더라도, 하루아침에 왜적이 경성을 버리고 떠나가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쯤 되어서는 공이 당초에 경성을 수복하려고 했던 그 뜻이 어느 정도나마 풀어지게 되었다고도 할 것이다.

6월에 도원수(都元帥)에 임명되어 영남(嶺南)의 제군(諸軍)까지 모두 지휘하게 되었는데, 그 뒤로 도원수의 직책을 내놓기도 하고 다시 임명되기도 하다가, 정유년 겨울에 제독(提督) 마귀(麻貴)를 따라 울산(蔚山)의 전역(戰役)에 참가하였다.

그리고 무술년 가을에는 제독 유정(劉綎)을 따라 순천(順天)의 전역(戰役)에 참여하였는데, 제독의 지휘를 받는 신분상의 제약 때문에, 선견지명을 발휘하여 건의를 올려도 채택이 되지 않고, 성곽을 먼저 타고 올라가는 용맹이 있어도 공을 세울 수가 없었으므로, 공만이 비통한 눈물을 흘렸을 뿐만이 아니라 뜻있는 인사들 모두가 이를 애석하게 여겼다.

그러나 이제는 왜적이 또다시 엿보면서 깊이 침입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얼마 뒤에는 또 군대를 철수하여 돌아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일단 경성을 수복하고 우리 힘으로 지켜 낼 수가 있게 되었으니, 이쯤 되어서는 공이 원래 품은 뜻이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하겠다. 만약에 중흥을 이룬 공적을 세운 사람이 없다고 한다면 그만이지만, 있다고 한다면 과연 누구를 첫째로 꼽아야 하겠는가.

기해년에 공이 병으로 면직을 청하고 돌아간 뒤 도성에서 치료를 받기도 하였으나 다시 조정에 복귀하지 못한 채 7월에 세상을 하직하니 향년 63세였다. 부음(訃音)이 들리자 상이 애도하며 정사(政事)를 보지 않고 조문(弔問)과 제례(祭禮)와 부의(賻儀)를 특별히 더하게 하였다.

아, 공의 공적에 대해서 본조(本朝)에서는 얼마나 뚜렷하게 드러내 보여 주었던가. 병신년에 공이 재차 도원수의 직책을 사직하자 윤허하지 않고 내구마(內廐馬)를 하사하며 교서(敎書)를 내렸고, 하직 인사를 드리자 술을 하사하는 동시에 또 내구마와 말 안장을 주면서 교서를 내렸고, 다시 무술년에 파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자 특별히 장려하며 유시(諭示)를 내렸었다. 그리고 공이 세상을 하직하자 관직을 추증(追贈)하도록 하는 한편 대신(大臣)에게 자문을 하며 시호(諡號)를 의논토록 하였다.

아, 공의 명성이 중국 조정에는 얼마나 성대하게 전파되었던가.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은 본국에 상(賞)을 행하는 것과 관련하여 자문(咨文)을 보내었고, 병부 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은 천자에게 주문(奏文)을 올려 공의 공적을 아뢰었고, 천자의 명을 받든 홍려시(鴻臚寺)의 관원은 본국에 칙지(勅旨)를 선유(宣諭)하였다.

그리고 전진(戰陣)에 임했을 당시에는 제독 마귀(麻貴)가 호령을 제대로 행한다고 칭찬하였고, 경리(經理) 양호(楊鎬)는 공의 장병이 역전(力戰)하는 것을 가상하게 여겼으며, 세월이 흐른 뒤에도 중국 조정의 대소 관원들이 공의 이름만 듣고서도 그 사람됨이 어떠한지를 모두 가늠해 알 수 있게 되었는가 하면, 왜적의 여러 수령들조차도 권 원수(權元帥)의 기거가 어떠한지 꼭 안부를 묻곤 하였다. 이러한 종류에 대해서는 태사씨(太史氏 사관(史官))가 역사에 모두 기록해 놓을 것인데, 비문에 구체적으로 써넣을 성격의 것도 아닌 만큼 이쯤 해서 생략하기로 한다.

공의 자(字)는 언신(彦愼)이요, 관향은 안동(安東)으로서 고려(高麗)의 태사(太師) 권행(權幸)의 후예이다. 그리고 본조(本朝)에 들어와서는 찬성(贊成) 권근(權近)의 6대손이요, 영의정 권철(權轍)의 아들이니, 그러고 보면 공이 세운 공업(功業) 역시 본디 그 유래가 있다고 하겠다.

공은 사람을 다스리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특히 성심(誠心)과 화기(和氣)로 대하였을 뿐 결코 엄의(嚴毅)를 앞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든 간에 감복을 하여 사력(死力)을 다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공은 46세 되던 해인 임오년 문과(文科)에 급제한 뒤 낭관(郞官)을 거쳐 당상(堂上)에 뛰어올랐고, 급기야는 유장(儒將)으로서 현달하게 되었다. 공은 관직을 역임한 것도 그다지 많지 않고 조정의 반열에 서 있었던 적도 드물기만 하다. 그저 어렵고 힘든 시대를 만나 그 능력을 다 발휘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옛날 공의 대장 깃발 아래에 있었던 인사들이 공의 덕의(德誼)를 사모하면서도 이를 선양(宣揚)할 길이 없자, 다투어 출자(出資)하여 힘을 모은 다음에 공의 형인 상호군공(上護軍公)에게 이를 알리고서 이 비석 건립에 서로들 힘을 쏟고 있으니, 이 또한 얼마나 가상하다 하겠는가.

상호군공은 가선대부(嘉善大夫) 권순(權恂)이요, 영상(領相) 이공(李公)은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 항복(恒福)이다. 공은 두 번 장가들었으나 모두 아들을 두지 못하였다. 공의 묘소는 경성 서쪽 홍복산(洪福山)에 있다.

[주-D001] 봉시 장사(封豕長蛇) : 

엄청나게 큰 멧돼지와 뱀처럼 포학하고 탐욕스러운 무리를 가리키는 말인데, 여기서는 왜적이 그렇다는 말이다.


최립(崔岦 1539~1612), 《간이집(簡易集)》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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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서 외(2015) 광주의 옛길과 새길 시민의 소리
정인서(2011) 양림동 근대문화유산의 표정 대동문화재단
정인서(2011) 광주문화재이야기 대동문화재단
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2016) 광주 역사문화 자원 100(上,下) 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
천득염(2006) 광주건축100년 전남대학교출판부
한국학호남진흥원(2022) 광주향약 1,2,3. 한국학호남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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