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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율의 행주 승첩(幸州勝捷) -연려실기술 제16권 / 선조조 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

권율의 행주 승첩(幸州勝捷), 정담(鄭湛)의 웅령전사(熊嶺戰死)붙임. 권율(權慄)ㆍ황진(黃進)의 이티[梨峙]승첩 붙임. -연려실기술 제16권 / 선조조 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

처음에 광주 목사(光州牧使) 권율이 용인(龍仁)에서 돌아와 고을 안의 젊은 사람들 5백여 명을 모으고 이웃 고을에 격서를 보내어 천여명을 모았다. 전라 감사 이광은 권율이 군사를 일으킨다는 소문을 듣고 권율을 전라도 도절제사(全羅道都節制使)라고 일컫고, 각 고을을 독려하여 적군이 달려드는 것을 막게 하였다.


○ 7월에 적이 금산(錦山)에서 웅티(熊峙)를 넘어 전주 땅으로 들어오려고 하므로 권율이 도복병장(都伏兵將) 나주 판관(羅州判官) 이복남(李福男)과 의병장(義兵將) 황박(黃璞)ㆍ김제 군수(金堤郡守) 정담(鄭湛) 등을 보내어 험난한 곳에 웅거하여 적을 맞아 쳐서 막게 하였더니, 이광(李洸)이 군사를 보내어 싸움을 돕게 하였다. 복남은 산봉우리의 중턱에 진을 치고, 황박은 그 위를 지키고, 정담은 그 아래를 지키고 있었다. 8일 새벽에 왜적 수천 명이 칼을 휘두르며 정면으로 덤벼들어 총탄이 비오듯 하였으나 복남 등이 죽음을 무릅쓰고 앞장을 서니 군사들이 모두 죽기로 싸웠다.적병이 조금 물러서더니 적의 대군(大軍)이 해 뜰 무렵에 다시 오는데 산골짜기에 가득하였다. 적이 육박하여 재에 올라오며 패를 나누어 교대로 싸우므로 복남 등이 적의 일진(一陣)을 무찔러 싸웠으나 결국 당해내지 못하고 퇴각하였고, 박의 군사도 힘이 다하여 무너져 나주 군사의 진으로 들어갔다. 적이 기세를 올리며 재에 오르니 나주 군사의 진 또한 무너지고 말았다. 정담은 처음부터 힘을 다해 싸우면서 붉은 기 아래 백마를 타고 있는 적병의 장수를 쏘아 죽이니 적이 바람 앞에 풀 쓰러지듯 물러갔다.그러나 이제는 정담이 고립된 군사로서 포위당하자 부하 장수들이 담에게 군진을 후퇴시키기를 권하였으나 담은 말하기를, “차라리 적병 한 놈을 더 죽이고 죽을지언정 한 걸음 물러나 살아서 적으로 하여금 전진하게 할 수는 없다.” 하고 꿋꿋이 서서 적을 쏘는데 시위소리와 함께 적은 모두 거꾸러졌다. 육박전으로 드디어 죽었으며 종사관 이봉(李葑)도 전사하였다. 복남 등이 물러나와 안덕원(安德院)에 진치니 적이 우리 측에 방비가 있음을 알고 감히 재를 넘지 못하고 멈추었다.


담이 처음에 이광을 따라 공산(公山)으로부터 파군(罷軍)하고 돌아와서는 분하고 한스럽게 생각하여 사람을 대하면 반드시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항상 부하 장수들에게 말하기를, “나물 한 가지 밥 한알, 그 어느 것인들 임금이 주시지 않은 것이겠는가. 임금께서는 지금 왕성을 떠나 피난하고 계시는데 오직 나와 너만이 차마 어찌, 편안하게 이 찬(饌)을 먹을 수 있으랴.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하면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 하고 목이 메어 자신을 억제치 못하였다.군사를 일으키던 날에는 희생(犧牲)을 죽여서 사사(社祠)에 제사하고, 맹세를 고유하고 떠났으며 이에 이르러 고을 사람들이 쌓여 있는 해골 속에서 시체를 찾다가 꿰맨 옷 속에서 성명을 써놓은 것을 발견하고 그가 평일에 죽기로 결심한 것을 짐작할 수 있다고들 하였으며 적도 의롭게 여겨 시체를 모아 큰 무덤을 만들고 돌을 세워, “조선의 충간의담(忠肝義膽)을 조상한다.”고 써놓았다. 조정에서 뒤에 이 사실을 듣고 벼슬을 추증하고 정려하였다. 《계갑록》 《기재잡기》 《일월록》


○ 그때 모든 군사가 오히려 진을 한군데에 합치고 물러나지 아니 하였더니, 적이 드디어 금산에 주둔하였다. 권율이 군사를 진산(珍山)에 진주시키고 동복 현감(同福縣監) 황진 등과 더불어 험난한 곳에 의거하여 기다리고 있는데 적병 수천여 명이 진산을 불질러 약탈하고 이티[梨峙]로 덤벼들므로 권율 등이, 부장(副將) 위대기(魏大奇)ㆍ공시억(孔時億) 등과 더불어 군사를 독려하여 재에 의거하여 막아 싸우니 적이 낭떠러지로 기어 올라왔다. 이에 황진이 나무에 의지하여 총탄을 막으면서 활을 쏘는데 쏘면 안 맞는 것이 없었다.황진이 탄환에 맞아 다리에 부상하고 조금 물러섰더니 적이 진(陳) 속으로 뛰어 들어, 우리 군사들이 놀라 흩어져 달아나려고 하므로 권율이 물러나는 자를 베어 죽이니 모두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다. 황진도 상처를 붙들고 다시 싸우니 군사들은 모두 한 사람이 백 사람을 당해낼 만큼 용감하게 종일토록 싸웠으므로 적병이 크게 패하여 병기를 다 버리고 달아났다. 이에 수백 명을 목 베니 송장이 더미로 눕고 피가 흘러 시내와 골짜기가 피 비린내로 채워졌다.


적중(賊中)에서 조선의 3대 승첩을 말하는데 이티(梨峙)의 승리를 첫째로 쳤다. 논평하는 이가 말하기를, “이 승리가 없었으면 왜적은 반드시 호남 전체를 유린하였을 것이다.” 하였다.


○ 8월에 권율이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승진하였다가, 승첩의 보고가 들어가자 전라 감사(全羅監司)로 승진되었고, 황진은 익산 군수(益山郡守)로 승진되었다가 또 충청 조방장(忠淸助防將)으로 승진되었다. 이복남(李福男)은 당상관(堂上官)으로 승진시켜 운봉(雲峰)의 팔량신성(八良新城)을 지키라고 명하였다.


9월에 이광이 붙잡혀 와서 치죄(治罪)를 받게 되니 윤두수(尹斗壽)가 아뢰기를, “광주 목사(光州牧使) 권율이 기개가 있고 도량이 있어서 장수의 재질이 있으니 전라 감사는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됩니다.” 하여 드디어 권율을 감사에 임명했다. 《기재잡기》


○ 그때 적병이 전주(全州)에 육박하여 성 밖에서 무력을 과시하자 광이 도망쳐 금구(金溝)로 달아나니 여러 군사가 일시에 무너져 흩어졌다. 적병은 우리 군사가 달아나는 것을 보고 저들의 배후를 습격할까 의심하여 그날 밤으로 무주ㆍ금산으로 도망쳐 돌아갔다.


○ 권율이 진중에서 감사 임명을 받고 머리를 조아리며 임금이 피난하여 있는 서쪽을 향하여 우니 온 군중이 슬퍼하였다. 권율이 방어사(防禦使)로 하여금 대신 이현(梨峴)을 지키게 하고, 친히 전주(全州)에 이르러 기율(紀律)을 일신(一新)하게 하고, 모든 장수를 불러 의논하여 말하기를, “지금 평양 이남이 모두 적의 진지(陣地)가 되어 버렸지만 경성(京城)은 근본이 되는 곳이니 먼저 경성을 수복하여야 한다.” 하고 군사 2만 명을 일으켜 북으로 올라갔다.


○ 전라 감사 권율이 군사 2만을 거느리고 임금을 도우려 오니 각지의 수령장수들과 승장(僧將) 처영(處英) 등이 따랐다.


○ 10월에 체찰사(軆察使) 정철(鄭澈)이 아산(牙山)에 배를 정박시켰다. 권율이 지나는 길에 가보았더니 철이 권율에게 같이 전라도 지역을 지키자고 하였으나 율이 듣지 아니하고 북으로 나아가 수원(水原)의 독성(禿城)에 진을 치니, 임금이 칼을 풀어 가지고 말을 달려 보내어 권율에게 주며 이르기를, “모든 장수 중에 명령을 듣지 않는 자가 있거든 이 칼로 처단하라.” 하였다. 그때 서울에 있던 적병이 호남(湖南)의 군사가 또 왔다는 말을 듣고 군사 수만을 출동시켜 길을 나누어 쳐들어 왔다.이에 권율이 성벽을 굳게 지키고 움직이지 아니하니 적이 세 개의 진채(陳寨)를 오산(烏山) 등지에 만들어 놓고 날마다 와서 싸움을 돋우었으나 응하지 아니하고 이따금 기습병(奇襲兵)을 내보내어 적병을 베어 죽이고 적의 영채(營寨)를 불사르곤 하니 적이 도로 서울로 돌아갔다. 바야흐로 적이 쳐들어 오려 할 때 권율이 날마다 체찰사(軆察使)에게 보고하면서 구원병(救援兵)을 청하니 정철이 전라 도사(全羅都使) 등에게 급히 기별을 보내어, 성화(星火)같이 군사를 전진시켜 수원성(水原城)의 위급을 구(救)하였고, 도사(都事) 최철견(崔鐵堅)ㆍ변사정(邊士貞)ㆍ임희진(任希進) 등의 의병(義兵)도 달려와 원조하였다.


○ 12월에 권율이 장계를 올렸는데, “체찰사 정철이 신에게 명하기를, ‘신에게 호남의 도적을 방어하도록 명하고, 근왕은 다른 장수를 시켜 올려보내겠다.’고 하였으나 신이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수원에 이르렀더니 군사들의 마음이 호남을 지키라는 체찰사(정철)의 말을 기쁘게 생각하고 호남으로 도망간 자가 천여 명이나 됩니다.” 하였다.이에 임금이 크게 화를 내니 유영길(柳永吉)이 아뢰기를, “정철은 술에 빠져 정신이 흐리멍텅하여 기밀 사무에 어두워서 임금의 세력이 고립되고, 공론(公論)이 행하여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윤두수는 나라를 회복시킬 만한 재주가 없고 지공무사(至公無私)하지 못하여 하는 일이 마침내 실적이 없게 되었습니다. ……” 하였다. 《일월록》


○ 계사년 2월 권율이 수원(水原)에서 고양(高陽)의 행주산성(幸州山城)으로 나아가 주둔하였는데, 군사를 나누어 4천여 명을 병사(兵使) 선거이(宣居怡)에게 주어 금천(衿川)에 머물며 성원하게 하고, 권율 자신은 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양천강(楊川江)을 건너서 행주(幸州)에 진을 쳤다. 한편 창의사(倡義使) 김천일은 강화로부터 나와 해안에 진을 치고, 충청 감사(忠淸監司) 허욱(許頊)은 통진(通津)에 진을 치고, 충청 수사(忠淸水使) 정걸(丁傑) 또한 응원하기로 하였다. 그때 서북(西北)에 있던 왜적이 모두 경성에 모여 있어서 기세가 더욱 치열하였는데 전라도의 군사가 강을 건너왔다는 말을 듣고 길을 나누어서 나오는데 그 수효를 셀 수 없었다.적장 평수가(平秀家)는 우리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발끝으로 차서 거꾸러뜨릴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12일 새벽에 우리 척후 장교가, 적이 좌ㆍ우익(左右翼)으로 나뉘어 붉은 기와 흰 기를 들고 온다고 보고하니 권율이 모든 군사에게 현혹(眩惑)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높은 곳에 올라가 바라보니 우리 진영에서 5리쯤 떨어진 곳에 적이 이미 가득 차 있었다. 이에 곧 모든 장수와 더불어 의논하기를, “고립된 군사가 깊이 들어와서 갑자기 적병을 만나니 세력이 서로 대적할 수 없다.만약 한 목숨을 버리지 않으면 나라에 보답할 길이 없다.” 하고, 모든 장수에게 타일러서 대오(大悟)를 엄중히 단속하여 활을 버티고 기다리는데, 적의 선봉(先鋒)인 기병(騎兵) 백여 명이 먼저 와서 시위(示威)를 하더니 금방 대군 수만 명이 들을 덮고 우리 진영을 포위하였다. 이에 군사를 세 패로 나누어 쉬어가면서 교대로 달려드니 고함 소리는 땅을 흔들고 포탄이 비오듯 하였으나 우리 군사는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으며, 권율은 몸소 물과 미음을 가지고 돌아다니면서 군사들의 갈증을 풀어 주었다.묘시(卯時)에서부터 유시(酉時)에 이르기까지에 적병은 세 번 달려들었다가 세 번 퇴각하였는데 번번이 적이 불리하니 적이 드디어 갈대를 가지고 바람 부는 방향을 따라 불을 놓아 우리 성책(城柵)을 태우려 하므로 성안에서는 물을 끼얹어 꺼버렸다. 처음 승병(僧兵)에게 서북면(西北面)을 지키게 하였는데 적의 군사가 크게 고함지르며 돌격하여 오자 승병이 무너져 내성(內城)으로 들어오므로 권율이 칼을 빼들고 독전(督戰)하니 모든 장수가 칼날을 무릅쓰고 육박전을 하였다. 이에 적군이 크게 패하여, 드디어 시체를 네 무더기로 쌓고 불태우니 냄새가 10리에 퍼졌다.적병이 물러가자 우리 군사가 그 나머지를 수습(收拾)하여 1백 30여 명을 베고 군용 자재를 무수하게 얻었다. 《일월록》ㆍ《권원수유사(權元帥遺事)》 《자해필담(紫海筆談)》에, “날이 저물 무렵에 일본장수 평수가(平秀家)가 유시(流矢)에 맞아 드디어 병갑(兵甲)을 거두어 가지고 달아나니 행주(幸州)로부터 서울에 이르는 길에는 거꾸러진 시체가 서로 이어졌다.”고 하였다. 한창 싸우고 있을 때 화살이 거의 다하여 군중(軍中)이 바야흐로 위태로웠는데 정걸(丁傑)이 두 척의 배로 화살을 싣고 와서 바다 쪽에서 들여보냈으므로 계속하여 사용할 수가 있었다.


○ 어떤 이는 전해 말하기를, “권율도 또한 겁내고 미혹(迷惑)하여 스스로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그의 형 전(悛)이 와서 보고, ‘이것은 해내기 쉬운 일이다. 내가 전쟁하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 하고 율을 대신하여 지휘하니, 율은 머리에 구리솥을 덮어쓰고 돌아다니며 모든 군사들을 타이르다가 총소리가 조금 그치면 즉시 구리솥을 벗어서 물을 담아 가지고 싸우는 군사의 입에 대어 주었으니 전(悛)의 공도 또한 많다.”고 한다.


○ 그때 이여송이 개성에 주둔하였고, 선봉(先鋒) 사대수(査大受)는 행주 승첩의 기별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싸움한 곳을 시찰하고 또 수일 후에는 권율을 청하여 서로 만나보고 감탄하여 말하기를, “권장군의 진은 다른 군사들과는 유별나게 다르다. 외국에 이러한 참다운 장수가 있었구나.” 하고 군사를 임진(臨津)으로 이동시켜 이빈(李薲)과 합력하여 파주산성(坡州山城)을 지키기로 하였다. 승첩의 보고가 행재소에 올라가자 권율에게는 자헌대부(資憲大夫), 조경에게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중 처영에게는 절충장군(折衝將軍)을 가자(加資)하고 모든 장사(將士)에게 상과 벼슬을 주었는데 등차(等差)가 있었다.


○ 권율이 일찍이 말하기를, “세상에서는 행주의 싸움에 공(功)이 있다고들 하지만 실상은 이티[梨峙] ‘이티[梨峙]’를 본래 ‘웅티[熊峙]’라고 썼으나 아마 이(梨)자의 잘못일 것이다. 의 싸움이 제일 중요한 것이었고 그 다음이 행주싸움이다. 대개 이티의 싸움 전쟁의 시초부터 적의 기세는 한창 날카로운데 우리 군사는 외롭고 약할 뿐만 아니라, 또 건장한 군사도 없었으므로 군사들의 마음이 흉흉(洶洶)하여 이긴다고 믿기 어려웠으나 드디어 능히 있는 힘을 다하여 죽음으로서 싸웠기 때문에 천 명도 되지 않는 약한 군사를 가지고 10배나 되는 사나운 적병을 당해내고 마침내 호남을 보전하여 국가의 근본이 되게 하였으니 이것이 어려웠다고 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때는 서쪽 길은 막혀 끊어졌고 본도(本道)가 무너져 이산(離散)하였기 때문에 내가 비록 공이 있어도 드러내어 칭찬하는 사람이 없었으나, 행주의 싸움은 내가 이티에서 공을 세운 뒤에 있었고, 권력과 지위가 벌써 무거웠기 때문에 군사의 마음들이 이미 내게 돌아온데다가, 호남의 정맹(精猛)한 장졸들이 다 내 수하(手下)에 예속해 있을 뿐만 아니라 군사의 수효도 수천 명을 넘었고 지리(地利)도 또한 험하여서 적병의 수가 비록 배나 되었지마는, 그 기세가 이미 쇠약해 있었으므로 공(功)을 세우기 쉬웠던 것이며, 바로 명 나라 군사가 위압(威壓)해 있고 각도의 근왕하는 군사들이 경기내에 바둑돌처럼 깔려 있었으나, 나의 행주 싸움의 성공이 때마침 모든 군진보다 먼저 있었기 때문에 그 공이 드러나기가 쉬웠던 것이다.” 하였다. 《백사집》


○ 조경(趙儆)이 권율의 중군장(中軍將)으로서 밤에 강을 건너가서 먼저 지형을 살피다가 군사를 주둔시킬 만한 높은 언덕을 발견하니 그것이 즉 행주였다. 권율이 말하기를, “명 나라의 군사가 많이 왔으니 적병이 필시 감히 나오지 못할 것이다. 반드시 성책(城柵)을 만들어야 할 필요는 없다.” 하니 경이, “외로운 군사로서 큰 적과 가까이 있으니 성책이 없을 수 없다.” 하였으나 율이 듣지 아니하였다. 마침 그때 체찰사(軆察使)가 양주(楊州)에 있으면서 율을 불러다가 일을 의논하는 동안에 경이 모든 군사를 시켜 이틀 동안에 성책을 완성한 후에, 율이 돌아왔고, 목책(木柵)을 만든 지 사흘만에 적의 대군이 쳐들어 왔다.이에 정오(正午)가 지나도록 힘껏 싸우니, 적병은 드디어 긴 나무[長木]를 가져다가 다락같은 모양의 높다란 가마[轎]를 만들어서, 그 위에 총수(銃手) 수십 명을 싣고 수백 명이 메어 올려 우리 진영 안을 사격하므로 조경이 지자포(地字砲)를 가져오게 하여, 큰 칼 두 개를 포(砲) 앞에 매어달고 적의 가마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려 포를 쏘니, 지나간 곳마다 천둥ㆍ벼락을 맞은 것 같아서 가마는 모두 부숴지고 가마 위에 있던 적병은 몸뚱이와 팔ㆍ다리가 흩어져 날아가 떨어졌으므로 적병이 감히 다시 진격하지 못하였다.이 싸움에서 적병은 죽은 자가 거의 반이나 되었다. 권율과 모든 장수들이 모두 말하기를, “오늘의 승리는 모두 공(公 조경)의 힘이요.” 하였음을 대개 그가 목책을 설치한 것을 말한 것이었다. 풍양군(豐壤君) 조경(趙儆)의 비(碑)


○ 권율(權慄)은 자는 언신(彦愼)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요, 영상 철(轍)의 아들이다. 임오년 46세 때 명경과(明經科)에 합격하고 계사년에 도원수(都元帥)가 되었으며 벼슬이 호조 판서에 이르렀다. 기해년에 죽으니 나이가 63세였다. 선무공신(宣武功臣)으로 책훈(策勳)되고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을 봉하고 영의정을 추증(追贈)하였다.


○ 신묘년 9월, 의주 목사(義州牧使)가 결원되었을 때 조정에서 공을 천거하여 낭료(郞僚)호조 정랑 에서 발탁되어 정규의 승진 순서를 뛰어 임명되니 그때의 세론(世論)이 영예스럽다고 하였다. 임진년 봄에 북경으로 간 역관이 유언비어를 중국에 퍼뜨려 요동(遼東) 지방을 놀라 떨게 하였다는 말이 있으므로 이들을 옥에 내려 국문하였는데 공도 그들의 공사(供辭)에 관련되어 옥에 갇혔다. 4월에 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들으니 권율이라는 쓸 만한 재질이 있다는데 지금 어디에 있는가. 호남이나 영남의 거진(巨鎭)을 맡겨 시험해 보겠다.” 하고, 즉시 광주 목사(光州牧使)에 임명하였다. 그때 그의 사위 이항복(李恒福)이 승정원(承政院)에 당직하고 있었는데 공(公)이 가서 작별하니 항복이 말하기를, “왜 그렇게 급히 가십니까?” 하자 율이, “국가의 일이 급하니 이때야말로 신하로서 죽음을 바쳐야 할 때이다. 어찌 감히 잠시 동안인들 지체하여 아녀자(兒女子)의 슬피 우는 꼴을 흉내낼 것인가?” 하였다. 그때는 평화가 오랫 동안 계속되다가 갑자기 왜병이 온다는 기별을 들었기 때문에, 조신들은 호남과 영남은 죽으러 가는 곳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권율은 말과 기색이 강개(慷慨)하니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여 마지않았다.전라 감사 이광(李洸)이 공을 중위장(中衛將)으로 삼아 선봉으로 하였더니, 혹 공이 문인으로서 군대의 선봉이 된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는 이가 있으면 공은 웃으며 말하기를, “이것이 나의 직분이다.” 하였다. 백사가 가려 뽑은 유사


○ 송응창(宋應昌)이 본국에서 자문(咨文)을 보냈는데 그 대략에, “왜놈들이 당신네 나라를 쳐부수고 함락시켜 조선에는 충성스러운 사람이 없다고 말할 수 있었는데, 홀로 권모만은 고립된 성을 굳게 지켜서 많은 군사를 불러모아 자주 기묘한 꾀를 내고 때로는 큰 부대의 적을 대항하였다. 요사이는 다시 부대에 모래를 넣어 군량을 가장하여 왜놈이 와서 약탈하도록 유인하여 놓고는 습격하여 죽였으니, 이 사람이야말로 나라가 어지러운 때에야 알아볼 수 있는 충신이요, 중흥의 명장이라 하겠습니다. 인하여 붉은 비단 네 필과 백은(白銀) 50냥(兩)을 상으로 주어 충용(忠勇)을 권장하십시오.” 하였다. 백사가 가려 뽑은 유사


○ 명 나라 조정의 대소 문무관(大小文武官)들은 공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반드시, “이 이가 전일 행주에서 승첩한 이가 아닌가.” 하였으며 왜놈의 추장(酋長)도 반드시 권 원수의 동정을 물었다고 한다. 《일월록》 ○석성(石星)이 사신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의 모든 신하 가운데 만약 권율과 같은 자가 두어 사람만 있다면 내가 무엇을 근심하겠는가.” 하였다. ○ 유사(遺事)


○ 한 무관(武官)이 싸움터에 나가는 것을 싫어하여 달아나 전주(全州)에 숨어 있으면서 스스로 명 나라 장수에게 의탁하여 공이 여러 번 전주에 공문을 보내어 잡아 보내라고 하였으나 전주의 관리가 명 나라 장수를 두려워하여 감히 잡지 못하였는데 을미년에 공이 순시하다가 전주에 이르러 베어 죽였다. 얼마 안 되어 정승[國相]이 남방에 군사 시찰을 갔는데 처형된 무관의 집 사람들이 공을 무고하여 마침내 파면되니 공은 웃으며 말하기를, “대장된 지 3년에 한 사람의 도망병을 벤 것이 파면에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하였다. 유사


○ 병신년에 적병이 오래도록 물러가지 않으므로 조정(朝廷)에서 한창 원수(元帥)의 임명을 의논하는데 임금이 묻기를, “누가 원수가 될 만한 사람인가?” 하니, 좌우에 있던 신하들이 다른 사람을 가지고 대답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어찌 권율을 원수로 삼지 않으랴.” 하고 특히 도원수(都元帥)에 임명하였다. 이에 공이 즉시 숙배(肅拜)하고 하직을 아뢰니 특히 내구(內廐)의 말을 하사하였다. 《조야첨재》


○ 명 나라의 장수들이 네 길로 나누어 진군하려 할 때, 유정(劉綎)과 마귀(麻貴)에게 권 원수(權元帥)가 협력하여 따라와 주기를 요망하자 두 사람이 다투기를 마지 아니하여 임금이 마침내 권율을 유정(劉綎)에게 붙여 주었다. 《조야첨재》


○ 기해년 가을에 병이 나서 벼슬을 그만두고 강화(江華)의 시골집으로 돌아왔는데 병이 위독해지자 배를 타고 서울로 들어가 7월 6일에 우거(寓居)하던 집에서 죽으니 나이가 63세였다. 특별히 좌찬성을 추증하였다.


○ 권율은 인품이 사람을 거느림에 있어 친화와 사랑으로 성심을 보이고, 엄격하기만을 주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즐겨 복종함으로써 위급한 때에 힘입었던 것이다. 《일월록》


공은 조정에 우뚝 서서, 일을 만나면 우레처럼 움직여서 출입하고 변통함에 막힘이 없으면서도 바른 길을 잃지 않는 권태사(權太師 권율의 조상)의 유풍과, 바라보면 의젓하고 가까이 가면 따사로워 친화로서 사람을 대하여 충심으로 심복하게 만드는 권양촌(權陽村 권율의 조상, 이름은 근(近))의 미행(美行)과, 높고 큰 띠로 풍채와 용의(容儀)를 의젓이 바로 가지며 일에 당하여서는 곧고 꿋꿋하나 질박하여 까다롭지 않은 그의 아버지인 영의정 권철의 국량이 있었다. 공은 이 세 가지를 겸하여 가졌으되 공훈과 충렬(忠烈)은 이 세 사람보다 더하였다.


○ 허 균(許筠)이 공의 제문을 지었는데, “원공(元公 영의정)의 증직은 그 아버지의 정승을 이었음이요, 길창(吉昌)부원군으로 한 것은 문충(文忠 권근)의 봉군을 승습(承襲)한 것이다.”는 구절이 있었는데 공의 사위 이항복(李恒福)이 잘 지었다고 극구 칭찬하였다.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저자(연도) 제목 발행처
광주·전남향토사연구협의회(2003) 광주 향토사 연구 (사)광주·전남향토사연구협의회
광주광역시 동구청(2021) 동구의 인물2 광주광역시 동구청
광주시남구역사문화인물간행위원회(2015) 역사를 배우며 문화에 노닐다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01)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Ⅰ 인물과 문헌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01)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Ⅱ 문화유적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14) 광주 남구 마을(동)지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14) 광주 남구 민속지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21) 양림 인물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동구문화원(2014) 광주광역시 동구 마을문화총서 Ⅰ 광주동구문화원
광주문화관광탐험대(2011~16) 문화관광탐험대의 광주견문록Ⅰ~Ⅵ 누리집(2023.2
광주문화원연합회(2004) 광주의 다리 광주문화원연합회
광주문화원연합회(2020) 광주학 문헌과 현장이야기 광주문화원연합회
광주문화재단(2021) 근현대 광주 사람들 광주문화재단
광주북구문화원(2004) 북구의 문화유산 광주북구문화원
광주서구문화원(2014) 서구 마을이야기 광주서구문화원
광주시립민속박물관 옛 지도로 본 광주 광주시립민속박물관
광주시립민속박물관(2004) 국역 光州邑誌 광주시립민속박물관
광주시립민속박물관(2013) 영산강의 나루터 광주시립민속박물관
광주시립민속박물관(2018) 경양방죽과 태봉산 광주시립민속박물관
광주역사민속박물관(2020) 1896광주여행기 광주역사민속박물관
광주역사민속박물관(2021) 광주천 광주역사민속박물관
김경수(2005) 광주의 땅 이야기 향지사
김대현.정인서(2018) 광주금석문, 아름다운 이야기 광주문화원연합회
김정호(2014) 광주산책(상,하) 광주문화재단
김정호(2017) 100년 전 광주 향토지명 광주문화원연합회
김학휘(2013) 황룡강, 어등의맥 16집. 광산문화원
김학휘(2014) 광산의 노거수, 어등의맥 17집. 광산문화원
김학휘(2015) 광산나들이, 어등의맥 18집. 광산문화원
김학휘(2016) 설화와 전설, 어등골문화 21호. 광산문화원
김학휘(2018) 광산인물사, 어등의맥 21집. 광산문화원
김학휘(2019) 마을사이야기, 어등골문화. 광산문화원
남성숙(2017) 전라도 천년의 얼굴 광주매일신문
노성태(2016) 광주의 기억을 걷다 도서출판 살림터
노성테.신봉수(2014) 사진과 인물로 보는 광주학생독립운동 광주문화원연합회
박규상(2009) 광주연극사 문학들
박선홍(2015) 광주 1백년 광주문화재단
정인서(2016) 산 좋고 물 맑으니-광주의 정자 광주문화원연합회
정인서 외(2015) 광주의 옛길과 새길 시민의 소리
정인서(2011) 양림동 근대문화유산의 표정 대동문화재단
정인서(2011) 광주문화재이야기 대동문화재단
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2016) 광주 역사문화 자원 100(上,下) 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
천득염(2006) 광주건축100년 전남대학교출판부
한국학호남진흥원(2022) 광주향약 1,2,3. 한국학호남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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