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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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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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용정 芙蓉亭
    남구 고싸움로 2(칠석동)   부용정은 감사 부용 김문발(金文發, 1359~1418)이 1411년에 별장으로 세운 정자이다. 《광주읍지》(1879, 1924)에는 주의 서남쪽 30리에 있다. ‘부용’은 송宋의 주돈이周敦離가 ‘애련설愛蓮設’에서 연꽃을 꽃 중의 군자라고 칭송하였던 것에서 따온 것이다. 정내에는 창암 이삼만의 '芙蓉亭'이란 현판과 양응정, 고경명, 이안눌 등 이름난 학자들의 시를 새긴 편액이 즐비하게 걸려 있다.김문발은 고려말과 조선초의 왜구 토벌에 공을 세웠고 전라 감사ㆍ황해도관찰사ㆍ형조 참판 등을 지냈다. 관직에서 물러나 부용정을 중심으로 여씨呂氏의 남전향약藍田鄕約과 주자朱子의 백록동규약白鹿洞規約을 따라 시행하며 풍속의 교화에 힘썼다. 광주 향약좌목鄕約座牧의 유래가 되었다. 광주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향약을 시행했던 정자이기도 해 유서가 남다르다. 문화재자료 제13호인 부용정은 고싸움놀이로 유명한 칠석마을 앞에 있다. 이 정자는 지역 인재들의 강학과 선비들의 시회장詩會場, 향촌 규율과 민주적인 여론 수렴을 위한 향약의 집회장소로 활용하기 위해 건립했다. 정자의 건물은 앞면과 옆면 다같이 3칸으로 기둥머리에 공포가 없는 민도리집이다. 우물마루를 깐 맞배지붕, 민흘림기둥을 세웠고 홑처마로 건립됐다. 기단은 네모 막돌 바른층 쌓기를 하였다. 좌우 가운데를 제외하고는 자연석 덤벙주초를 놓았다. 사방은 벽이 없이 개방된 공간이며, 천장은 연등천장을 하였고 연골벽은 회반죽으로 마감하였다.정자 주변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33호 칠석마을 고싸움놀이 전수관과 김문발이 심었다는 은행나무(기념물 제10호)가 서 있고, 1984년 부용정의 내력이 쓰인 부용정석비芙蓉亭石碑가 이곳을 찾는 길손을 맞고 있다.
    2020-03-12 | NO.180
  • 북사정 北射亭
    동구 제봉로 210   북문 밖의 활터로 광주 동부소방서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북사정은 광주 구역 주변의 작은 언덕배기 위에 썰렁하게 서있었다. 1920년대에 설립된 이 건물은 지역 유지들이 북문밖 주민들을 대상으로 야학을 설립할 때 회합장소로 이용됐다면서 당시 신문에 잠깐 등장한다. 이 건물을 일러 북사정이라 한 것은 오랜 생활 관습상 옛 북문밖 일대에 있었던 것에서 붙여진 것이다. 동시에 그 반대편인 남문밖, 지금의 조선대 장례예식장 일대에 남사정南射亭이 있었던 것을 염두에 두고 부른 이름이기도 했다.1916년 광주에 왔던 오석 유형업이 다른 곳으로 이설됐다고 말한 공북루는 이 시기에 북사정으로 사용된 게 아닌가 싶다. 그 위치에 대해 1960년대에 발간된 ‘광주시사’는 비록 전해지는 말이란 전제를 깔며 북사정이 광주 구역 일대인 대인동에 있었다고 했다. 물론 북사정의 위치나, 북사정이 본디 공북루를 해체 복원했던 것이라는 주장 등은 명확하지 않다. 아직도 우리는 공북루의 역사에 수많은 빈칸이 있기 때문에 사실과 추정, 그리고 정황 등을 통해 보충해야 한다. 
    2020-03-12 | NO.179
  • 분수원 分手院 누각
    동구 학동 무등산 앞 분수원은 지금의 동구 학동 일대로 보이는 남문 밖에 있었다. 동구 원지교 일대로 오늘날 학동에 속하는 원머리마을은 아주 오래전 분수원 역원이었다. 즉 관리들의 주막이었다. 이곳에는 먼 길을 떠나는 나그네들의 휴식 공간의 물길이 있었고 그 변에 반드시 누각이 있었다.좀 더 동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다 보면 주남마을 못미쳐 원지골 혹은 원두라 부르는 골짜기가 있다. 원지교란 다리 이름도 이 여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광산현光山縣 편에는 분수원이 남쪽 5리에 있다고 한다. 분수원 앞에서 눌재 박상은 정암 조광조가 지금의 화순 능주로 유배가는 길에 만나 슬픔을 나눴다. 분수원 앞에서 눌재는 정암의 손을 부여잡고 그의 생애 마지막 길을 전송했다. 分手院前會把手 분수원 앞에서 일찍이 손잡고 헤어졌는데怪君黃閣落朱崖 그대가 황각(政府)에서 낭떠러지로 떨어지다니 괴이하다朱崖黃閣莫分別 주애와 황각(黃閣)을 분별하지 말 일이니經到九原無等差 구천에 이르러 보면 차등(差等)이 없으리도다*주애(朱崖)란 붉은 낭떠러지 절벽을 말하며, 바다 물가운데 있는 절벽을 뜻한다.광주지역 역원驛院 가운데 경양역景陽驛은 현의 동쪽 8리에 있는데 승(丞)을 두었다. 선암역仙巖驛은 현의 서쪽 40리에, 수여원水餘院은 현의 서쪽 33리에, 증원甑院은 현의 서쪽 45리에 있었다. 최정원崔鄭院은 현의 남쪽 25리에, 저원猪院은 현의 동쪽 20리에, 보통원普通院은 현의 북쪽 2리에, 장록원長祿院은 현의 서쪽 30리에, 견암원堅巖院은 현의 남쪽 18리에, 혈보원穴洑院은 현의 북쪽 25리에, 누문원樓門院은 현의 북쪽 5리에, 극락원極樂願은 주의 서쪽 30리에, 진국원鎭國院은 주의 북쪽 40리에, 신원新院은 주의 서쪽 45리에 있다.
    2020-03-12 | NO.178
  • 불로당 不老堂 무학정 舞鶴亭
    남구 구소동 165   불로당은 남구 구소동 1구 마을앞 도로변 좌측에 있다. 불로당은 1951년에 최창규와 동료 8인이 동거하면서 유영강학의 목적으로 건립했다.정면 3칸, 측면 2칸의 평기와 팔작지붕으로 기둥 및 서까래의 본채를 제외한 사면의 벽이 모두 벽돌로 되어있고, 3칸의 건물이 모두 방으로 꾸며졌다. 처마는 겹처마로서 양철물받이 채양이 있고 기둥은 정평주초 위에 사각기둥을 세워 도리를 올렸다. 정자의 내부에는 어느 정자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시문현판이 없고 또 문미門楣의 편액扁額도 걸려있지 않다. 별칭을 불로당不老堂이라 한 것은 이들 노인들의 노익장을 바라는 축원의 뜻으로 붙인 것이다.1990년 개인 소유로 넘어가 지금은 가정집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정자의 명칭을 무학舞鶴이라 한 것은 정자의 가까운 거리에 이 마을의 학산鶴山이 있기 때문이다.학산을 상징하고 또 노인들의 휴식처로 활용된 이 정자가 지금은 개인소유의 민가로 바뀌어 옛날의 무학정임을 느끼게 할 뿐이다. 광주시가 발행한 <누정제영>(1992)에 제주 양회순이 쓴 불로당기不老堂記에 정자의 내력을 자세히 알 수 있다. 광주에서 40리 떨어진 서남지역 간방의 구동의 한 모퉁이에 자리했다고 한다.  "우리 아조는 극락(極樂) 구강(九江)의 산록(山麓)위에 높이 자리한 이 정자가 이처럼 그 이름을 떨치게 됨은 이 정자가 김칠계, 유설강과 같은 높은 도덕을 지닌 유능한 명사에 의해 지어졌기 때문이다.오늘의 이 불로당의 광주로부터 40리거리인 서남간의 간방에 있는 구동의 한 모퉁이에 자리하고 있다.무성한 죽림이 주변을 둘러 그 경관이 매우 아름답고 똑 격식을 갖춘 불비불벽(不鄙不憵)의 한 정자가 그 사이에 높이 서 있다.서석산으로부터 비롯된 힘찬 산맥이 굴곡의 자세로 연이어 내려오면서 그의 국세가 한없이 청고하고 또 서남의 금성 월출과 좌우 황룡 지강이 사면을 둘러 그의 원경이 매우 아름답다......몸은 비록 늙었다 할지라도 마음은 늙지 않았다는 신노심불로(身老心不老)의 옛말이 저절로 생각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다시 나에게 이 당의 기문(記文)을 청하였다. 네 다시 그에게 말하기를「위에서 이미 말한바 있는 풍영, 호가의 두 정자가 아무리 그 모습이 훌륭하다 할지라도 김칠계, 유설강과 같은 뛰어난 도의가 없다면 오늘의 명성을 이룰 수 없다」이러한 점을 생각하여 볼 때 높은 도의가 있을 때에는 반드시 이에 따른 정자가 있기 마련이요, 또 아름다운 정자가 있을 때에는 반드시 이에 따른 도의가 있기 마련이다.이러한 일은 어떠한 인위적인 작용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순리에 의해 저절로 이뤄지는 하나의 이치이다......봄철의 난초가 피고 가을의 국화가 피는 아름다운 계절을 맞이하여 서로의 회포를 나누는 시주(詩酒)의 모임을 갖는 것도 또한 빠뜨릴 수 없는 하나의 즐거움이다.이러한 가운데 세상의 풍진에 휩쓸린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기도 하고 또 앞으로의 노쇠를 방지하는 활력의 비방이 생길 수도 있다.옛날의 속담에 「늙어갈수록 더욱 건장하다」는 노익장(老益壯)이 라는 말이 있다. 노익장의 끝자인 이 장은 기력이 왕성하여 늙지 않음을 이른 말이다.속담의 이 말이 오늘의 자네를 두고 한 이름이 아닌가 생각된다.
    2020-03-12 | NO.177
  • 불리정 不離亭
    광산구 삼도동 도야리   도야마을 석문산에 자리한 6각 촌정村亭이다. 동네에서 150m쯤 떨어진 야트막한 언덕배기에 지어져 있다. 조선 전기의 문신 충장공 정분鄭苯(1396∼1454)을 기리기 위해 1978년에 월파 정복규가 새로 지은 현대 정자이다. 정자의 지붕은 4각형에 하부는 8각형인 대청 누각으로 정내에는 성암 이원기가 썼다는 현판과 이 정자의 내력을 기록한 월파 정복규, 이원영, 윤효중이 지은 불이정기不離亭記 등 다섯 개의 각판刻版이 있다. 정자 앞에는 월파별업月波別業이라는 석비가 있다.정복규의 시에 그 유지가 남아 있어 오래전에 다른 초당草堂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自愛高山不負吾 사랑스런 높은 산 나를 반겨주니囂塵懸隔漏輿圖 티없는 맑은 땅 지도에 빠져 있네衡茅眞趣那堪許 띠집에서 사는 진취 어느 누가 이을손가嶺月松風只信符 고개 위 달 솔바람 부적처럼 믿었도다그는 문음(門蔭)으로 벼슬에 나가 경승부승(敬丞府丞)에 이르렀고, 1416년(태종 16)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이조좌랑·승문원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452년(단종 즉위년) 김종서(金宗瑞)의 천거로 우의정에 올랐다. 장흥의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다. 수양대군이 왕권 강화와 국방력 강화를 명분으로 조카인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계유정란으로, 문종의 유명(遺命)을 받아 단종을 보필하던 황보 인(皇甫仁)·김종서 등이 주살되자 그도 낙안(樂安)에 안치되었다. 곧 고신(告身)을 추탈당한 뒤 낙안의 관노가 되었다. 1년 여간 목숨을 보존하다가 1454년 장흥에서 사약을 받아 사사(賜死)되었다.  충절을 중시하던 선비들은 수양대군의 이러한 행동을 용납하지 못해 강력하게 저항하였다.
    2020-03-12 | NO.176
  • 불원정 不遠亭
    광산구 신흥동(도호동)   광산구 신흥동 도호마을엔 조선시대 예문관·집현전·홍문관·규장각 등의 종2품 관직 증贈 제학提學을 지냈던 심재 박원명朴源明(1847~ ?)이 축조한 불원정이 있었다.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서쪽 30리 거리인 도호마을에 있다. 불원不遠은 멸망의 선례는 가까운 곳에 있다는 뜻으로 ‘다른 사람의 실패를 자신의 거울로 삼으라’는 은감불원殷鑑不遠의 준말이다. 또 주역 복괘(復卦)의 불원복(不遠復)의 의미도 담고 있다. 불원복은 ‘멀리 가지 않고 돌아온다’는 뜻이다. 불선(不善)임을 알았으면 곧바로 선(善)으로 돌아온다는 의미다. 박원명의 제영이 전한다.도계 북쪽 이 자리에 이 정자를 일으키니 심리평야 넓은 들이 뚜렷하게 펼쳤도다버드나무 그늘 아래 책을 펼쳐 공부하고연꽃없는 이 자리에 지초꽃이 피었도다가지런한 산등 위에 가는 비가 나부끼고둘러앉은 들판 아래 저녁 연기 서렸도다불원정의 세 글자가 서로 함께 부합하니그 이름을 돌아보며 많은 번성하였도다
    2020-03-12 | NO.175
  • 불환정 不換亭
    광산구 내등길 265 (내등마을)   황룡강의 송산교에서 임곡 방향으로 향하다 보면 우측에 내등마을이 나온다. 마을 안쪽 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면 어등산 북쪽 기슭에 불환정이 있다.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서쪽 30리 거리에 있다. 불환정의 주인은 임덕원(1713~1787)이다. 조선중기의 유명한 처사로 부귀와영화를 헌 신짝처럼 버리고 어등산 기슭 상류에 두 어 칸의 모정을 짓고 오로지 학문연구와 자연감상에 몰두하여 은거한 관계로 주위에서 사람들이 용이 엎드려 있다는 뜻으로 그의 칭호를 복룡암伏龍菴이라 하였다. 1771(영조47)년에 다시 도리석초 도리기둥 정 측면 모두 삼칸팔작지붕이며 다른 정자에서는 볼 수 없는 중앙에 방을꾸며 이곳으로 옮겨 지으니 바로 현재의 정자다.정자의 이름인 불환不換은 임덕원이 아름다운 이 강산은 삼공과도 바꿀 수 없다고 하여 ‘삼공불환비강산三公不換比江山’의 고시를 인용해 붙인 것이다. 아름다운 강산을 삼공(고려시대에 태위·사도·사공의 세 벼슬을 이르던 말로 삼정승과 같은 뜻)과 바꿀 수 없다는 의미이다.정자의 상량문에 ‘숭정기원후삼신묘崇禎紀元後三辛卯’란 기록으로 보아 건립은 1771년이다. 임덕원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을사사화로 화를 입은 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1504~1547)와 송파 임식(1539~1589), 광주목사를 지내던 중 이괄의 군사에게 살해당한 관해觀海 임회林檜(1562~1624)의 후손이다. 선비 집안의 가풍을 이어 받아 대쪽처럼 올곧은 성품을 소유했다.정자는 처음에 짚으로 지붕을 인 모정茅亭이었으나 여러 차례 중수하면서 기와지붕으로 바뀌었다.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중앙에 거실 한 칸을 두었다. 지붕은 팔작기와이다. 정내에는 조선시대 학문과 문장이 뛰어났던 금호 임형수의 유고집을 펴내기 위해 새긴 책판이 보관되어 있다. 정자 안에는 금호 임형수의 <금호유고錦湖遺稿> 목판각이 보관되어 있고, 송사 기우만의 기문이 있다. 사간과 육조의 판서를 두루 지낸 서하 이민서가 임형수의 수려한 문장에 탄복하여 흩어진 유고를 모아 간행한 것이다. 여기에는 관해 입회(1562~1624)의 <관해집觀海集>도 보관되어 있다.  임덕원의 '불환정 원운'精舍三間築 정사삼간축  세 칸짜리 정자를 이곳에 세워놓고依然遠俗居 의연원속거  의연하게 속된 거처 멀리했네疎籬仍柳菊 소이잉유국  성근 울타리 사이 버드나무와 국화 심었고淸案整琴書 청안정금서  처사에게는 반듯한 거문고와 책 뿐이라蹙口鋤蔬後 축구서소후  입을 오무린 채 남새밭 풀을 매고攢眉採藥餘 찬미채약여  눈살을 찌푸려가며 약초를 캐었네優遊塵慮絶 우유진려절  한가롭게 노닐며 속세 생각 끊어지니知己眼中虛 지기안중허  참다운 벗도 허망함을 분명하게 알겠더라
    2020-03-12 | NO.174
  • 붕남정 鵬南亭
    남구 서오층석탑2길 15   남구 구동 광주공원 성구등, 성거사지탑 북쪽 지금의 오층탑 옆에 있었다 한다. 광주출신의 충주지씨인 한말의 만석거부인 붕남 지응현(1867~1957)에 의해 지어진 건물이다. 지응현은 충성군 지계최의 후손으로 중추원의관을 역임하였으며 누만금의 자산을 모아 적이능산의 자선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서구 금호동 병천사를 일제 강점기인 1924년에 세워 여러 선현을 제향하고 누세묘각을 지어 선조의 유덕을 계승하였으며, 응세학원을 세워 후진을 교육하고 원효사를 중창하여 불도를 장려하였다. 이러한 그가 이곳에 정자를 지어 붕남정이라 하였다. ‘붕남’이란 상상의 큰 새인 붕새가 북쪽에서 남쪽으로 일거에 구만리 장정을 날고자 하는 그의 영웅적인 큰 뜻을 가리켜 이른 말이다. 하늘의 붕새처럼 동서남북의 먼 끝을 마음대로 날고 쉬는 자신의 원대한 계획을 상징하기 위해 이러한 명칭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 이 정자의 사적을 기록한 원기, 원운 등의 문헌이 없고 또 이를 증빙할만한 구전상의 자료가 없다. 지응현의 출생년도로 보아 이 정자의 창건은 한말로 추정되고 일반 시민의 안식처를 제공하기 위해 세운 곳이라는 시혜정신이 곁들여 있다. 광주시사(1966)에 ‘붕남 지응현씨가 시민의 안식을 위해 세운 곳이다’라는 짤막한 기록이 있다.  
    2020-03-12 | NO.173
  • 비해재 匪懈齋
    비해재는 광산구 삼도동에 나주 오씨 처사 오대찬吳大贊이 지어 지냈다. 이곳은 조선 전기의 무신이요 공신이었던 오자치吳自治(1426∼?)를시조로하는 나주 오씨들의 집성촌이 있는 곳이다.  손재遜齋 박광일朴光一(1655~1723)의 시가 <금성읍지>에 남아 있어 지어진 시기를 유추할 수 있다. 비해(匪懈)는 시경에 이르기를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않아서, 한 사람만을 섬기는도다.夙夜匪懈以事一人”했듯이 ‘게으르지 않는다.匪懈 ’와 ‘욕을 끼치지 않는다. 無忝’는 것은 어버이를 섬기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참고로 비해당(匪懈堂)은  세종대왕의 3남인 안평대군(安平大君) 용(瑢)의 호이다.
    2020-03-12 | NO.172
  • 삼괴정 三愧亭
    북구 금곡동 산17-5 북구 무등산으로 가는 길에 충장사에서 광주호 방면에 금곡동이 나온다. 금곡동 입구 삼거리 길에서 소쇄원으로 가는 도로 옆 하천변 윗골(金감마을)의 꾀꼬리 당산나무가 있는 곳에 삼괴정이라는 정자가 하나 있다. 삼괴정은 1900년 괴암槐庵 문병일文炳日(1877~1948)이 부친 삼괴三愧 문유식文愉植의 뜻을 받들어 건립하였다. 삼괴정은 도리기둥을 한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작은 건물로 골기와 팔작지붕이다. 중앙 1칸에는 방을 들였고, 좌우 칸에는 벽이 없으며 마루가 깔려 있다. 건립 이후 1985년에 기와교체 작업을 한 번 했을만큼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정자가 있는 자리는 문유식이 생전에 즐겨 찾았던 곳이라 부친의 호를 따서 지었다. 삼괴란 미립未立(학문을 이뤄 뜻을 세우지 못함), 미현친未縣親(아버지의 명예를 높이지 못함), 미교자未敎子( 자식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함)의 세 가지 부끄러움을 의미한다. 겸손하고 자책하는 마음을 정자에 담아 후손들에게 좋은 교훈적 메시지를 남기고 있다.정자의 현판은 보성출신으로 독특한 설주체를 완성했으며 “설주(雪舟)의 먹물에 보성강이 검게 물들었다”는 전설과 함께 마지막 일심(一心)이란 두 자를 남기고 92세 1965년 임종때 까지 붓을 놓지 않았던 설주 송운회(雪舟 宋運會 1874~1965)가 썼다. 기노장(奇老章 기정진)의 기문(記文), 화순 이양면 추신 일제강점기 유학자 양회갑(梁會甲 1884년(고종 21)∼1961)의 상량문을 비롯해 성암(惺庵) 김희준(金熙駿), 삼은(三隱) 기세백(奇世伯), 각헌(覺軒) 박흥규(朴興圭), 송은 정안석,   오호 정운영, 이재풍, 여창현 등이 쓴 시문(詩文)이 걸려 있다. 정내에 현액된 시 중에 정자 주인 문병일이 지은 ‘삼괴정원운’은 이 정자를 지은 이유를 나타내고 있다. 평생동안 느낀 삼괴三愧 귀신에게 물어보며깊은 산에 홀로 사니 빠른 세월 흘러 가네이른 나이 풍진 세상 옛날 자학子學 그리었고늦은 만년 천석泉石속에 사구沙鳩처럼 지냈도다.선세유업 못다하니 남은 여감餘憾 한이 없고자식교육 그릇치니 내 스스로 반성하네이 세상이 어지러워 이 마음이 답답하니하늘가에 휜구름과 짝을 지어 놀았도다.삼괴정의 한편에는 남근석이 하나 있다. 자식을 바라는 사람들이 소망을 비는 곳이다. 노동력이 많이 드는 벼농사를 지으며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아들 낳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 이런 신앙형태가 나타났을 것이다. 삼괴정에서 무등산을 바라보면 원효계곡이 구불구불 산 속으로 스며들 듯 하는데 여기에서 100미터 위에 분천사기 전시관과 풍암정이 자리잡고 있다. 뛰엄바우와 시검바우는 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이 무술을 연마한 곳이었다고 하며, 금곡마을에서는 8·15광복 이전까지 당산제와 기우제를 지냈다. 각헌(覺軒) 박홍규(朴興圭)가 이 정자에서 지은 시에 "정자의 그 모습이 넓으면서 고요하나 / 맑은 임천(林泉) 사랑하여 흐른 물에 불타(不唾:침을 뱉지 않음)했네"하는 글로 보아 정자 앞을 흐르는 계곡 이름을 알 수 있다.삼괴정을 세운 아들인 괴암 문병일은 1968년에 간행한 <괴암일고槐庵逸稿>가 있다.  
    2020-03-13 | NO.171
  • 삼류정 三流亭
    북구 용강동 (하신마을)   1866년에 하신마을 주민들이 힘을 모아 지은 삼류정三流亭이 있었다. 삼류정은 기록상으로 1623년 솟재(牛峙)라 부르는 우치면에 이미 있었다. 죽계竹溪 김존경金存敬(1569∼1631)이 지어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삼류정상량문(三流亭上樑文)을 직접 남겼다.죽음竹陰 조희일趙希逸(1575~1638)과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1570∼1652)의 제영시가 전하고 있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죽음 조희일은 1623년 광주목사로 있을 때 삼류정에 들려 시를 남겼다. 여기에서 삼류三流는 세 곳에서 물이 합류된 계류가 흘러 운치가 있었을 것이다.   春寒料峭酒微醒 봄추위 싸늘해서 술 조금 깨이는데羈宦連年恨不平 해 이은 벼슬살이 마음이 한스럽네燈暗小牕聞馬齕 등 어두운 창 밖에 말은 여물 먹고 있고夢回孤枕數鷄鳴 꿈 깨인 외론 베개 새벽닭 울음 잦네祗憑吾友論交道 나의 벗과 더불어서 사귀는 도 논할 뿐欲向何人說世情 누굴 향해 세속 정을 말하려고 하는가 已判此身同許國 나라에 몸 바치기로 이미 마음 먹었으니與君終始寸心明 그대와 종시토록 이내 마음 밝으리라   김존경은 1617년에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갔었으며, 이후 강원감사, 동지중추부사, 경주부윤을 역임하였다가 인조반정 이후 대북파의 몰락과 함께 관직에서 밀려났다. 이때 김상헌이 김존경이 1927년 남쪽으로 돌아갈 때 시주로 이별하면서 읊었다.   兩翁相對雪盈頭 두 노인네 마주 보매 머리에 눈 가득하니同閱人間甲子周 둘 다 같이 인간 세상 육십갑자 지냈구려衰病不堪湖海別 몸 쇠하여 호수나 바다와 같은 이별 감당하지 못하니楚雲秦樹夢悠悠 초나라 구름 진나라 숲이 꿈속에서 유유하리청음집 제2권
    2020-03-13 | NO.170
  • 삼양정사 三陽精舍
    북구 용봉동   용봉동에 있었다는 삼양정사는 광주 봉곡리鳳谷里에서 태어나 자란 술재(述齋) 안종기(安鐘基, 1881~1949)가 국치의 변을 당해 출사를 접고 동지들과 구인회를 만들어 은거하며 유민으로 삶을 지내다 생을 마감한 곳이다. 창평 삼인산三人山에서 삼양정사를 짓고 후진교육에 전념했다는 기록도 있어 확인할 필요가 있다.서헌(瑞軒) 안규용(安圭容)의아들로 타고난 맵시[天姿]가 순수하여 진실한 공부를 일찍이 성취했던 지식인이었다. 송사 기우만을 사사했고 서편 김기상, 현와 고광선, 송산 권재규 등에게서 견문을 넓혔다. 각화동 대봉산 기슭에서 내려오는 경방천과 일곡동에서 흘러오는 용봉천이 합류하는 왕개 윗쪽에 용봉동이 자리하고 있다. 일찍이 풍수지리상 명당이라 소문난 곳이다. 전남대 학생회관 뒤편으로 이어지는 언덕 자락은 용주, 반룡마을을 안고 있어 반룡희주형盤龍戱珠形 명당이라 한다. 용주, 반룡, 봉곡, 청계마을의 이름 가운데 용주, 반룡의 ‘용’과 봉곡의 ‘봉’자를 따서 ‘용봉리’라 하였다.‘섬배미’, ‘저불들’, ‘진봇들’, ‘여시박골’에 농사를 짓던 이곳은 1951년 전남대학교의 설립으로 점차 대학촌으로 발전하였고 1980년 북구청의 개원과 함께 북구의 중심지가 되었다.1989년에 전라남도 향토문화연구자료 제28집으로 영인 간행된 안종기의 술재유고述齋遺稿가 있다.  
    2020-03-13 | NO.169
  • 삼우당 三友堂
    북구 운암동 (대내마을)   삼우당 이제백李齊白(1682~1759)이 시문을 짓고 풍류를 즐기며 지역 인사들과 지냈던 곳이다. 광산인으로 자가 백여(白汝)이며 호는 삼우당(三友堂)이다.매화(梅)와 동백(栢)을 심고 그 아래에 바위(巖)를 두고 삼우당이라 편액하고 매화의 청결함과 동백의 곧음, 돌의 견고함을 벗하고자 하는 뜻을 담았다.이제백은 석백매(石栢梅)라는 제목의 시로  삼우당(三友堂)을 지은 의미를 이렇게 시로 붙였다.빽빽한잎 푸르르니 늙은 동백 나무이고 /성긴 꽃봉우리 아름다우니 찬매화 틀림없네가는조수 어찌해 돌 사이에서 나왔는고 / 잠긴 물줄기 바다에서 흘러나온 듯 하네붓을 둘러 시 읊으니 맑은 소리 떨어지고 /술잔들어 취하니 그윽한 향기 돌아오네.말년의 한가한 취미 세벗(三友)에 부치어/삼우당이라 이름하니 아무도 시기하지 않네.그는 마을의 정신적 지주로 애경사를 주도했던 어른 역할을 하였다. 마을에 남전여씨향약을 조직해 규율 등을 세웠다. 남전여씨향약은 중국 송나라 때인 1076년에 여대충呂大忠을 비롯하여 대방大防, 대균大鈞, 대림大臨 등 4형제가 섬서성陝西省 남전현藍田縣에서 시행했다고 한다. <삼우당유고三友堂遺稿>가 있다.〈소학〉에도 간략히 소개된 이 향약은 덕업상권德業相勸, 과실상규過失相規, 예속상교禮俗相交, 환난상휼患難相恤의 4강령으로 되어 있다. 이를 '남전여씨향약' 또는 줄여서 '여씨향약'이라고 한다. 15세기 중엽을 전후하여 김문발金文發, 이선제李先齊, 정극인丁克仁, 강응정姜應貞 등과 같은 인물들이 향약을 시행했던 것으로 보인다.운암동은 북구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동이며, 운암산雲岩山에서 지명이 비롯되었다. 주변의 지세가 닭이 알을 품고 있는 모양을 하고 있어 풍수지리로 볼 때 황계구란형黃鷄拘卵形 명당이라고 한다. 마을이름인 대자실을 황계라고도 하여 황계면黃鷄面이라는 행정지명이 생겨났다. 대내(안짝)마을 뒷동산에는 ‘명당등’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일대에는 풍영정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일찍이 ‘안못들’, ‘계란들’과 같은 자드락을 일구어 생활하다가, 극락강과 광주천의 토사로 형성된 한강논을 개척한 농촌이었다. 1970년대말 대규모 택지조성사업이 시작되어 주택공사 아파트단지가 들어서면서 개발되었다. 지금은 운암아파트를 비롯하여 동洞 전체의 97.5%가 아파트인 공동주택 중심형이다.  
    2020-03-13 | NO.168
  • 삼우정 三友亭
    광산구 삼도동 화암봉   삼우정은 광산구 삼도동 도야마을에 살던 죽산竹山 유양열柳良烈, 석봉石峰 김항배金恒培, 석남 정연철鄭然喆 등이 끈끈한 우정을 다지기 위해 지은 정자다. 정자 주인들이 썼다는 현판 글씨가 걸려 있었고 토관을 묻어놓은 우물은 연중 물이 나온다고 한다.사각기둥의 육모 지붕으로 된 이 정자는 단칸 건물이다. 주위 사면이 송림으로 둘려있고 그 옆에 성지천聖池泉이라는 맑은 샘물이 정자 앞으로 흐르고 있다. 세 사람의 뜻이 부합된 삼우三友로 당시의 시국을 비관하여 그들의 외로운 회포를 달래기 위해 일제강점기에 정자를 지었다.이 정자는 당초 겨우 비바람을 피할 정도의 허술한 모정이었으나, 세 사람의 후손들이 1986년에 다시 중창하여 오늘의 모습을 갖추었다. 이 일에는 김광종金光鐘, 정순기鄭淳基, 유재춘柳在春 등이 참여했다. 정내에는 전말을 기록한 기문, 삼우정이라는 송담 이백순의 현판 등이 있다.이 정자는 일제강점기 대정년도(大正年度)에 세 사람의 뜻이 부합된 다정한 삼우(三友)로 당시의 시국을 비관하여 그들의 외로운 회포를 달래기 위해 지었다. 또 이 정자를 중심으로 계회(契會)를 만드어 시주(詩酒)의 풍월을 즐겼다. 그 이름을 삼우(三友)라 한 것은 세 사람의 벗이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그 근본적인 어원은「익자삼우(益者三友)」라는 옛날의 성훈(聖訓)에서 연유된 말이다.「익자삼우(益者三友)」라는 이 말은 옛날 공자의 가르침으로, 벗을 사귈는데 있어서 유의해야 할 세가지 방법을 가리켜 이른 말이다. 그 첫째는 곧은 벗을 사귀어야 하고, 둘째는 신실(信實)할 벗을 사귀어야 하며, 셋째는 다문(多聞)한 벗을 사귀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의의를 살리기 위해 그 이름을 삼우(三友)라 한 이 정자는 당초 겨우 비바람을 피할 정도의 허술한 모가(茅家)였으나,  세 사람의 후손들이 1986년도에 당시 중창하여 오늘의 못습을 갖추게 되었다. 정내(亭內)에는 별다른 시설의 전말을 기록한 기문(記文),그리고 三友亭 이라는 송담(松潭) 이백순(李栢淳 1930-2012)의 대서(大書)  그리고 관련 시문(詩文) 중 이 정자의 소재를 나주인 금성(錦城)으로 표기한 것은 그 당시의 정자의 위치가 광주가 아닌 나주였다.정연철의 아들 정복규가 쓴 삼우정기三友亭記에는 “옛날 나의 선자先子께서 일찍부터 나라 없는 망국의 부끄러움을 개탄하며 이 산에 들어가 귀 눈을 막고 오직 인근의 동지 몇 사람과 함께 날마다 물소리, 산 빛을 벗삼아 술잔을 기울이며 시를 읊거나[觴詠], 계를 만들어 시문을 나누는[講契] 등으로 그의 우울한 회포를 달랬다”고 적었다. 
    2020-03-13 | NO.167
  • 삼호정 三湖亭
    북구 양산동 75-7   삼호정은 효자 정윤길정려, 효자 정재요 열부 밀성박씨정려, 만석재晩石齋 등이 있는 도로가에 있다. 굳게 닫힌 철문과 2m 높이의 담이 거대하게 서 있어 안을 들여다 볼 수가 없다. 서구 화정동 화담사에서 모시고 있는 문절공 정수충이 처음 지었던 것을 퇴락 후 그 터에 후손 석포石圃 정병현鄭丙鉉(1854~ 1921)에 의해 다시 지어졌다. 정병현이 정자에서 지내는 동안 띠집의 초가인 것을 그의 아들 해붕海鵬 정천익鄭天翼이 1917년 지금의 형태인 팔작지붕에 기와로 중축해 100년의 세월을 이어오고 있다.정병현은 시문에도 뛰어났으며 한말 10여년간 광주향교 전교로 역임하면서 유교의 도를 진흥하는 데 노력했다. 당시 이 일대에 있던 서호西湖, 남호南湖, 석호石湖 등 3개 호수를 나타내는 의미로 정자 이름을 삼호정이라 했다. 정해붕은 노사 기정진과 송사 기우만, 석음 박노술 등에게 수학했다. 그의 스승인 박노술은 그의 학덕이 출중해 사위로 삼았다. 이곳에는 정병현의 자서와 기우만, 김진우의 정기와 박노술, 동강 김영한의 중건기 그리고 후석 오준선의 상량기가 있다.삼호정은 2칸 건물로 ㅡ자였던 정자에 만석재를 지으면서 관리에 용이하게 ㄱ자로 이어 좌측은 삼호정이 우측에는 제각인 만석재 재각의 용도로 사용하는 특이한 구조를 취하고 있다. 정자에는 구조 자체가 방이 없는 마루로 트여 있는 무실정자로 정기 등 현액된 목판은 이곳에 걸려 있다. 이곳의 현판과 주련은 석촌 윤용구가 썼다. 만석재는 대문은 평3문으로 정윤길 정려鄭潤吉 旌閭를 겸하고 있으며 정씨재실鄭氏齋室이다.   
    2020-03-13 | NO.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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