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285
게시물 검색 폼
  • 식음당 息蔭堂 명발제
    광산구 도덕동 (봉정마을) 원래 나주군 삼가면 봉정리 나주오씨의 선산 언덕에 식음정으로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진 정자다. 식음 오현석(1646∼1708)을 제향하는 사당으로 남아 식음당이라 한다. 나주오씨 문중에서는 이 식음당을 가리켜 명발제라 부른다. '그늘에 쉰다’는  식음(息陰)은 사람이 볕이 없는 그늘에서 쉬면 그림자가 나타나지 않아 그 존재를 숨길 수가 있다는 뜻의 말을 사용하여 벼슬에서 물러나 초야에 은거함으로써 몸을 구속하는 잡무에서 벗어나야만 바람직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뜻을 비유하였다. 남조(南朝) 송(宋)나라 사영운(謝靈運)이 지은 시 환구원작견안범이중서(還舊園作見顔范二中書)에 “양생의 도 떳떳한 법이 있나니, 그늘 쉬어 몸 구속 벗어나야 해 衛生自有經 息陰謝所牽” 한 데서 인용한 것이다.이 건물은 1919년에 오익수吳益洙가 건립해  오현석吳玄錫(1646∼1708)을 제향하는 사당으로 100여년에 이르고 있다. 구청에는 상지上池제각이라 등록했다.정자주인은 조선후기 숙종 때 1691년 증광시 생원 2등 17위에 급제한 오현석이 띠집을 지어 살았던 곳이다. 그 뒤 몇 차례 시험에서는 뜻대로 되지 않았다. 식음이라는 아호는 암農巖  김창협金昌協(1651~1708)이 지어준 것이다. 예조참판, 대제학 까지 오른 김창협이 그의 학덕을 높이 평가해 그의 호를 식음(息蔭)을 지어주고 식음당이라는 제목의 시를 남겼다. 젊었을 때 임가에서 서로 만나 알았는데오늘날에 중봉중봉하니 머리카락 하얗도다. 이십년간 미환사를 말하여서 무엇하리다함없는 강 물결이 모래 씻어 흐르는듯 하네오현석은 김창협  도의로 친했으며 5살 위였다.  48세 때인 1698년 때 아버지 김수항(金壽恒)이 영암에 유배되어 있을 때 식음당(息陰堂)에 들려 시주로 즐기며 "오 상사(吳上舍) 계휴(啓休)에게 주다"라는 제목의 시를 1698년에 남겼다.錦館城北是君家  금관(금성 나주)이라 성북에 터를 잡은 그대 집種竹移梅度歲華  대 심고 매화 옮겨 세월을 보냈고녀 莫歎儒衣空老去  유생으로 헛되이 늙어감을 한탄 마오英賢自昔半泥沙  뛰어난 자 예부터 태반이 미천했거니 /농암집 별집 제1권又少晴相識自林家 今日重鬢已華欲 逢說悲歎廿年事 長江不盡浪陶沙  그는 오군(吳君)은 덕함(德涵)과 매우 친하였고 그가 평생 닦은 학문의 본말을 잘 알았는데, 나도 그의 벗이라 하여 여러 차례 그에 대해 말하며 그의 죽음을 애석해 마지않았다. 그리고 덕함의 절구 한 수를 읊어주었는데, 매우 간단하긴 하였으나 서로 다정하게 어울렸던 뜻을 알 수 있었다. 이에 더욱 감흥이 일어 짧은 시를 지어 뜻을 보인다.그대 만나 나눈 얘기 창랑 얘기 절반이요 / 남긴 시 듣노라니 하염없는 눈물일레공이 떠난 빈 정자에 오솔길 그대론데 / 찾아가는 벗 없어 잡초만 무성하리逢君半是說滄浪聽松遺篇淚更長身後虛庭三逕在草深無復過裘羊/농암집 제5권상사(上舍) 오계휴(吳啓休) 현석(玄錫) 가 천리 길을 찾아와 두 아들을 맡겼는데 그 뜻이 매우 간절하였다. 떠나기에 앞서 끈질기게 전별시를 청하므로 임덕함(林德涵)의 시에 차운해 시를 짓는다.젊은 시절 임공(임영 林泳)) 집서 처음 서로 알았는데 / 다시 만난 오늘 우리 귀밑머리 하얗구려이십 년 세월 동안 겪은 희비 말하려니 / 긴 강 물결 끊임없이 모래 일어 씻어내네憶曾相識自林家 今日重逢鬢已華 欲說悲歡廿年事 長江不盡浪淘沙또 이들이 서로 주고 받은 서신도 전하고 있다.오계휴(吳啓休) 현석(玄錫) 에게 답하기를 "천리 먼 거리를 찾아와 주시어 고마운 뜻이 정말 두터웠는데, 헤어져 떠난 뒤로 섭섭하여 날마다 잊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보내 주신 편지를 받고 무사히 돌아가신 것을 알고 나니, 그지없이 마음이 놓입니다. 저는 무지하고 못난 모습이 그저 전일과 다름없으나 집안에 우환이 한창 심하여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그대의 아드님 형제는 지금은 그런대로 잘 있습니다만, 지난번에 마을에 전염병이 돌아 제 집을 강 건너편으로 옮겼기 때문에 광나루 황씨 집으로 가서 머물러 있도록 하였다가 이달 초에 비로소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우환이 계속 이어져 진지하게 학문을 강론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 점이 한탄스럽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생각을 신중히 하고 묻기를 좋아하여 가르치는 사람으로 하여금 새로운 안목이 트이고 모자라는 점을 보태게 하는 일이 있게 하니, 너무도 기쁩니다."농암집 별집 제1권명발제는 정남향으로 해가 밝아오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해서 이름을 지었다. 재실은 앞면 4칸 옆면 2칸에 한 기와를 올린 팔작지붕 건물이다. 5단의 화강석 석계를 놓고 5단의 기와로 기단 뒤에 디딤돌주초를 놓고 배흘림의 형태를 가진 원주 기둥을 세웠다.내부는 중앙에 대청을, 좌우에 온돌방을 배치했다 천장은 우물천정이며 대들보위에 사다리꼴 판대공을 보아지와 함께 종보와 종도리를 가구한 5량 집이다. 처마는 홑처마로써 양철 물받이를 달았고 담장은 토석 혼축 담장이며 대문은 소슬 대문이다.인근에 삼도경로당과 상지지석묘군上池支石墓君 3기가 있다.  
    2020-03-13 | NO.135
  • 신서당 新書堂
    남구 석정동 407   신서당은 새당(새시당)마을에서 옛터를 지켰던 송대유宋大有(1916~1997)의 8대조 용강龍岡 송인하宋寅夏(1724~1804)의 고거이다. 남구 석정동 뒷산에 있다. 송대유는 광주고보에 입학해 성진회 사건에 연루되어 2학년말인 3월 1일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 6월 9일 풀려났으나 졸업하지 못했다. 나중에 명예졸업장을 추인받았다. 대촌면장을 지냈다.송인하의 자는 군칠(君七), 본관은 홍주(洪州) 송씨다. 조선 영조 무렵 이 고을 선비로 그의 별당을 이곳에 지어 자신의 강학 겸 휴양소로 활용한 당시의 서당이다. 마을은 북쪽의 봉황산 자락 바로 아래에 있고 그 너머로 등룡산登龍山 자락이 있다. 등룡산(登龍山)은 시의 남구 대촌동 관할 대지동(大支洞)과 석정동(石亭洞) 경계에 있는 산이다(고도:117m)). 금당산에서 남서쪽으로 뻗어 내린 능선이 화방산과 송학산을 거쳐 봉황산에 이르러 남쪽으로 내려서다 우뚝 선다. 송인하는 운암동[黃界] 출신이나 남구 석정동에서 살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사서오경을 두루 공부해서 학문이 경지에 이르렀다. 그는 항시 중요한 글을 가록하여 자신을 수양하고 집안을 다스리는데 지침서로 활용 하였고, 부모를 섬김에 몸과 마음을 다하여 봉양하였다.1768년 모친인 함풍노씨와 부친 송여흠宋汝欽(1688-1768)이 한 달 사이에 세상을 떠나자 장사를 지내고 3년 시묘 자리에 1772년경 5형제가 초당을 지었다. 송인하가 이곳을 용강정사龍岡精舍라 편액하고 자손들의 강학처로 활용했고 인근 학동들이 찾아와 신서당이라 하였다. 또 시정詩亭이라는 별도의 명칭이 있어 이 지역 선비들의 많이 애용한 것으로 보인다. 
    2020-03-13 | NO.134
  • 신향각 新香閣 문향각聞香閣
     광주 동구 금남로1가   광주관아의 핵심건물들은 기본적으로 옛 도청 쪽(광산동)인 아시아문화전당 자리가 아니라 그 맞은편인 금남로 1가와 대의동 일대에 집중돼 있었다. 관아를 동헌(東軒)이라 부르는 것은 자북에 따른 동쪽이 아니라 동문 쪽에 배치했기 때문이다.따라서 관아가 금남로 1가 일대에 집중된 것은 옛도청 앞길, 즉 서석로를 따라 객사가 서쪽에 배치되었기 때문이다.1610년에 세워진 하모당 동쪽에 목사의 숙소인 내아內衙가 있었다. 내아는 여러 채의 건물들로 이루어졌다. 그중 본채는 5칸이었고 그 주변에 좌우익랑左右翼廊, 전행랑前行廊, 외행랑外行廊이 각 10칸씩이었다. 내아는 1920년대까지 남아 있었다고 한다. 내아 뒤편에는 문향각聞香閣이란 건물도 있었다. 가운데에 마루를 두고 그 양편에 2칸짜리 방을 둔 형태였다. 광주읍지(1879, 1924)에는 1876년 화재를 입었다가 목사 남호원南鎬元이 복구했다. 이때부터 신향각新香閣으로 고쳐 불렀다. 하지만 향기를 맡는다는 문향이란 의미가 좋아서인지 사람들은 문향각과 신향각을 혼용해 불렀다고 한다.  
    2020-03-13 | NO.133
  • 쌍계정 雙溪亭 쌍계당
    담양군 대전면 대치리   《광주읍지》(1879, 1924)에는 쌍계정은 주의 북쪽 40리에 있다. 부제학 효우당 이종검(? ~ ?)이 지었다. 본래는 용인에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 헐어지자 후손이 광주로 옮겨 1821년에 다시 건립하고 이름은 그대로 사용하였다. 이종검의 호는 쌍계이다. 1429년 종제인 이보흠과 함께 문과 급제하고 예문관 검열로써 태종실록 편찬에 기사관으로 참여했다. 지평, 사간원 좌사간 등을 역임했다. 고려말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인 남곡 이석지의 손자로 효성이 지극하고 아우인 이종겸과 우애가 독실하다 하여 문종이 효우당이라는 당호를 내려 주었다. 세조가 즉위하자 벼슬을 버리고 용인 남곡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0권 경기京畿 용인현龍仁縣, 속동문선 제13권 기記 효우정기孝友亭記에 실려 있다. 사가 서거정(1420~1488)이 이 정자의 기문을 짓고 모재 김안국, 북애 이증, 춘정 변계량의 제영이 있다.오늘날 담양에 있는 이 정자명이 쌍계당으로 바뀌었다. 영천이씨 후손들의 문중 강론장소인 쌍계당이 마을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1881년 1차 중수, 1908년 의병전쟁으로 소실된 것을 1956년에 중건하였다. 당의 앞면에는 쌍계당 편액과 어울려 문종의 어필인 효우당 편액이 함께 걸려 있다. 앞면 4칸 옆면 2칸, 팔작지붕으로 구성되어 있다.목판본인 1권 1책의 <남곡유사南谷遺事>가 있고 광주의 대치사大峙祠 등에 제향되고 있다. 경기도 안성시 서운면 서운로 383에 안성시 향토유적 제44호로 효우당 이종검 정려문이 있다.  
    2020-03-13 | NO.132
  • 쌍석정 雙石亭
    쌍석정(雙石亭), 쌍석(雙石) 이희용(李熙容, 1853∼1931)이 지어 금서(琴書)와 자연을 벗 삼아 여유롭게 살아가며 시주를 즐겼던 곳이다. 정자는 사라지고 없다. 산곡(山谷) 최기모(崔基模, 1869∼1925) 등이 이곳에 오르고 시(謹次雙石亭韻 李熙容)를 남겨 이곳도 일제강점기 초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1869년(고종 6) 최문원(崔文源)과 남평반씨(南平潘氏)의 아들로그의 자는 진우(進愚), 호는 산곡(山谷), 영광(靈光) 홍농(弘農)에서 출생했다.이희용은 시문에 능해 광주시 북구 청풍동 신촌마을 균산정(次文龍鉉筠山亭韻)을 비롯해 삼산정(次李啓琮三山亭韻), 광주읍성 내 동헌 하모당(何暮堂執事), 광주시 오치동 이용헌(李龍憲, 1851∼1895)의 정자 오산정(次李龍憲梧山亭韻),  연계정(次蓮溪亭韻), 북구 오치동에  정대현(鄭大鉉, 1873~1946)의 석계정(次鄭大鉉石溪亭韻) 등에서 시를 남겼다.이희용의 쌍석정원운(雙石亭原韻)에 차운했던 오준선(吳駿善)․오계수(吳繼洙)․조영만(趙永萬)․ 보산(普山) 기우승(奇宇承 1858∼1907)․ 현와 고광선(玄窩 高光善)․  박이숙(朴而淑)․ 박노술(朴魯述 185I∼1917 次雙石亭韻)․ 박노후(朴魯厚)․ 기로사문(奇盧沙門)에서 수업하여 문장과 덕행이 뛰어났던 박노면(朴魯冕)․ 산곡(山谷) 최기모(崔基模)․ 기경연(奇慶衍)․ 이승학(李承鶴)․ 서요(徐鐃)․이승문(李承文)․ 유창수(柳昌秀)․ 난실(蘭室) 김만식(金晩植 1845~1922)․ 김도병(金道炳)․ 여방섭(呂邦燮)․ 김진현(金珍鉉)․ 성재(誠齋) 임태주(任泰柱 1881∼1944)․ 정재(正齋) 양회갑(梁會甲 1884~1961) 등의 시문이 남아 있어 그가 폭 넓은 활동을 했음을 알 수 있다.
    2020-04-08 | NO.131
  • 애산정愛山亭
    광산구 본량동 맥동마을의 현포玄圃 김기하金基夏의 강학터였고 김기회 金基會 등이 배웠다. 마을 앞 산중턱에 애산정이란 정자가 있으며 마을 어귀에는 현포거사 김기하의 학덕을 기리는 추모비가 있다.17세기경 마을의 형성은 17세기 해주최씨 최익홍이 함평에서 외가인 박뫼마을 양씨댁을 따라 옮겨왔으나 비옥한 농토를 찾아 이곳으로 다시 이주하여 정착하게 되었고, 이후 광산 김씨들이 나주에서 이곳으로 이주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천평동이라 하였다가 용동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맥동마을은 마을 뒤편의 어등산의 자락(126.7m)과 마을 앞의 황룡강을 끼고 있는 풍광이 빼어난 마을이다. 맥동마을은 한때「맥골」이라고도 불렀으며 보리가 많이 생산된다고 하여 일제 때부터 붙여진 이름이며 마을 북쪽에 있는 골짜기를 공창이라고 하여 옛 여황면의 공유지가 있었던 곳이다. 토박이 땅이름가는-골-중산골 위쪽에 있는 골짜기공청-맥동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옛 여황면의 공유지였음땅-재(지치)-부수동 동쪽에서 하흑석으로 가는 고개. 서낭당이 있었음.마당-배미-맥동 남쪽에 있는 들. 타작마당이 있었다함모개나뭇-골-한당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모과나무가 있었음.물통-골-선동 저수지 아래쪽에 있는 논. 물이 흔함바우-배기1-땅재 밑에 있는 골짜기바우-배기2-바우배기에 있는 논. 바위가 박혀있음.부수-동(富峀洞)-부시동부시-동(부수동)-맥동 서쪽에 있는 마을. 연봉(군산천)밑이 됨부엉-굴-부시동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북당-골- 부엉굴 남쪽에 있는 골짜기살통-깨-맥동 동쪽에 있는 들. 어살을 놓고 물고기를 잡았음새-방천-맥동 남쪽에 있는 들. 새로 만든 방천 밑이 됨서창-배미-질마배미 밑에 있는 논선동-저수지(선동제)-선동 서남쪽에 있는 저수지수장-걸-진걸 동쪽에 있는 논승방-동(僧房洞)-심방골심방-골(승방동)-땅재 동쪽에 있는 골짜기안-고라실-맥동 북쪽에 있는 골짜기외앗-골-중산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용-동(龍洞)-맥동중산-골-부수동 북쪽에 있는 골짜기. 죽은 중을 불살랐다함.지-치(地峙)-땅재진-걸-부수동 동쪽에 있는 긴 논질골-재-부수동에서 임곡면 사호리로 가는 고개질마-배미-부시동 동쪽에 있는 논포전-들(浦田)-맥동 동쪽에 있는 들. 황룡강 옆이 됨한당-골-부수동 북서쪽에 있는 골짜기
    2020-03-13 | NO.130
  • 애일당(愛日堂)
    광산구 광곡길 73 (광산동) 애일당은 한국적 살롱문화 溪山風流의 산실로 일컫는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산동 광곡(廣谷 너브실)마을에 고봉의 13대 후손 기세훈(奇世勳, 1914~2015)이 지낸 애일당(愛日堂)이 자리하고 있다.너브실에서 가장 유명한 집이 고봉의 13대 후손 기세훈(奇世勳, 1914∼현재)의 고택이다. 애일당(愛日堂)이라 불리는 이 집은 고봉의 6대손 기언복(奇彦復)이 숙종 때 처음 터를 잡은 이래 300년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고봉 사상을 연구하는 ‘고봉학술원(高峰學術院)’이 들어서 있다.현판 글씨는 성당 김돈희(惺堂 金敦熙, 1871∼1937)가 필체를 남긴 것으로 보아 이곳도 일제강점기 때 지어졌다는 추측을 낳게 만든다. 당내에 1935년 기근섭이 지은 애일당을 지으면서 시를 짓고 그 내력을 간단히 적은 현판과 근대 한학자·교육자·역사가로 1934년 일제가 날조한 역사 대신 우리의 역사 속에 흐르는 ‘얼사상’을 주창했던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1893 ~ 1950) 가 애일당의 건립내력을 적은 기문 애일당기(愛日堂記)가 있기 때문이다.당명 애일(愛日)은 자식이 부모를 섬기는 날을 아낀다는 말리다. 법언(法言)에, “오래도록 할 수 없는 것은 어버이를 섬기는 일이므로 효자는 날을 아낀다[不可得而久者 事親之謂也 孝子愛日].” 하였다.기세훈 고택이 가지고 있는 특징은 우거진 대밭과 소나무 그리고 각종 정원수들이 어우러져 마치 숲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아늑함을 준다.  이 집이 지닌 자연의 향기는 대숲에서 나온다. 전체 대지 3500평 가운데 사랑채 뒤쪽으로는 700평의 대숲이 조성되어 있다. 대나무 숲에 들어서면 왠지 모르게 청정한 느낌이 든다. 옛 선비들은 그런 느낌을 유현(幽玄)하다고 표현하였다.고택의 대나무 숲 속에는 또 하나의 귀한 물건이 자라고 있었다. 바로 차(茶)나무들이다. 널따란 대숲 아래에는 푸른빛 차나무들이 티 내지 않고 자리잡고 있다. 대나무 숲에서 자라는 차는 그 맛이 뛰어날 수밖에 없는데, 특별히 이를 죽로차(竹露茶)라고 부른다. 대나무의 아침 이슬 기운을 받아먹으면서 자란 차 잎으로 만든 차라는 뜻이다.호남 계산풍류의 현장은 무등산 원효계곡에서 시작되어 창평, 담양 일대로 이어지는 라인에 자리잡은 수많은 누정들이었다. 면앙정, 소쇄원, 독수정(獨守亭), 식영정(息影亭), 송강정(松江亭), 환벽당(環碧堂), 명옥헌(鳴玉軒), 풍암정(楓岩亭) 등을 포함하여 약 70여 개의 누정들이 창평, 담양 일대에 현재까지 존재하고 있다.15세기 말부터 16세기에 걸쳐 빈번히 일어났던 사화를 목격한 선비들이 벼슬살이에 환멸을 느끼고 시골로 내려와 자연과 벗하면서 생겨난 누정들이다. 당시에는 150여 개의 누정들이 있었다고 하니 그야말로 이 일대는 한국 누정문화의 본고장이자, 한국 문예부흥기의 중심지였다.박석무씨는 ‘무등산의 풍류와 의혼(義魂)’이라는 글에서 그러한 계산풍류의 인맥을 잘 밝히고 있다. 이에 따르면 계산풍류는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하다가 30대에 연산군의 학정을 만나 고향에 내려온 지지당(知止堂) 송흠(宋欽, 1459∼1547년)에서 처음 시작된다.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 1480∼1545년), 면앙정(?仰亭) 송순(宋純, 1493∼1583년)이 송흠에게서 학문과 문학을 배우면서 여기에 참여하였다.이후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년)는 면앙정의 제자로서 소쇄원에 주로 머물렀다. 대사성을 지낸 송천(松川) 양응정(梁應鼎, 1519∼1581년)은 양팽손의 아들로 계산풍류의 멤버였는데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년), 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 1537∼1582년),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 1539∼1583년)과 같은 뛰어난 제자들을 배출한다.가장 한국적인 정취가 어려 있는 정원이라고 평가되는 소쇄원을 세운 인물은 양산보(梁山甫, 1483∼1536년)이다. 그는 조광조의 문인으로서 기묘사화에 벼슬을 단념하고 고향에 내려와 소쇄원을 세웠다. 양산보는 면앙정 송순과는 인척간의 아우이고, 하서 김인후와는 사돈간이다. 고봉 기대승, 제봉 고경명, 백호(白湖) 임제(林悌, 1549∼1587년),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 1513∼1577년), 청련(靑蓮) 이후백(李後白, 1520∼1578년)과 같은 당대의 일급문사들이 계산풍류에 참가하였다.
    2020-03-13 | NO.129
  • 야옹정 野翁亭
    북구 생룡동 (죽취산)   야옹(野翁) 범현식(范瀅植 (1862~1923)이 1890년 쯤에 그의 강학소 겸 처소로 세웠다는 야옹정이 있었다. 그는 선묘 가까운 곳에 또 죽취정竹翠亭을 지어 선조를 추모하며 강학소로 사용했다. 그는 범윤숙의 아들로 송사 기우만을 찾아 배웠다.심석재 송병순의 아들 지재 송철헌, 후석 오준선의 정기와 경당 최윤환의 시가 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일제강점기 초기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정자주인 범현식이 읊은 시에서 정자를 지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누추한 이 정자에 내 홀로 서지(棲遲)하며들녁의 뱀샘처럼 외로이 거했도다.생계(生計)를 이으려고 밭갈아 농사짓고공부가 모자라니 시 짓기 어렵구나.상마(桑麻)의 늙은 노포(老圃) 서로가 친근하고송백(松栢)의 선대 무덤 멀리서 추모하네.농상(籠上)의 옛친구가 찾아와 도와주니우리집 가을 풍년 미리서 알겠노라.
    2020-03-13 | NO.128
  • 야은당
    서구 눌재로 420(세하동)야은당野隱堂은 야은野隱 김용훈金容燻(1876~1948)을 기리는 정자이다. 자字는 봉현奉賢, 호號는 야은野隱, 우호又號는 우재愚齋이다. 광주향교의 『광주지』(1968)에는 김용훈을 기리는 서호영당瑞湖影堂이라 불렀다. 지금은 서창한옥문화관과 함께 다양한 문화프로그램이 운영되는 정자로 활용되고 있다.삽봉 김세근의 9대손인 김용훈은 1893년에 1차 과거시험인 향시 초시初試에 합격하고 1904년에 통훈대부 강릉참봉에 제수되어 처음으로 관직에 나아갔다. 이듬해 을사늑약의 쓰라린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일제강점기의 혼란에 관직을 포기하고 서구 세하동으로 거처를 옮겼다. 야은당은 1936년 그가 60세 되던 해에 자제들이 그의 취지와 절의를 사모하여 모든 고난을 다 버리고 건강하게 장수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은 것이라 한다. 세동마을 입구의 서창한옥문화관 옆에 있는 이곳은 후석 오준선이 1919년 3월 상순에 그의 처소에 들러 야은당기野隱堂記를 남겼다. 주불공사를 지낸 석하石下 김만수金晩秀(1858~1936)와 소호 조영희, 양정 기남도, 의제 기우정 등이 시를 지었고 주련은 석촌 윤용구가 썼다. 도리석초, 도리기둥의 앞면 3칸 옆면 2칸의 정내 중앙에 내실을 두었으며 팔작지붕이다. 꽤 오래 된 듯 보이는데 아직 비지정문화재에 속한다. 커다란 배롱나무가 인상적이다. 시가나 문장, 노래 따위를 지어 서로 주고받으며 부른다는 내삼문인 창수문唱酬門을 지나야 안마당으로 들어설 수 있다. 김종 전 조선대 교수가 ‘창수문’ 현판 글씨를 썼다. 오준선은 기문에서 “야은野隱은 본분을 지키는 꾸민 데 없고 진실한 사람으로 산이나 강이 아닌 이러한 평야에 그의 몸을 숨기는 이 일이 그의 실제에 가장 적합한 처사이다.”라고 적고 있다.
    2018-05-23 | NO.127
  • 야은정 野隱亭1
    북구 태봉동   문희탁文希鐸이 1900년 북구 태봉동에 만년에 귀거래사적 삶을 살기 위해 지어 지냈던 곳으로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조선호남지(1935) 누정편에는 서방면 태봉리에 있다. 문희탁은 동지 겸 오위장의 추천으로 동중추同中樞를 지냈으며 한말의 선비였다. 그가 지은 야은정원운에서 당시 정자 주변의 운치를 알 수 있다.   산수山水아닌 들녁에서 이내 몸을 은신하니화죽신장花竹新庄이 경내에 백일날이 더뎠도다.나의 본분 편히 여겨 참된 도리 즐겨하고농사일에 성근하여 경종시기 지켰노라   기주碁酒 등속 마련하여 어진 벗을 맞이하고시서 책을 많이 모아 적은 소아小兒 가르쳤네하월유연荷月柳烟 좋은 경관 마음대로 감상하니늙은 만년 이 거취를 어느 누가 이을손가  
    2020-03-13 | NO.126
  • 야은정 野隱亭2
    북구 일곡동 (삼각산)   일제강점기 때 야은 신세균申世均이 지었다고 알려진 야은정野隱亭이 있었다. 1966년 광주시사에 기록이 있다. 멀지 않은 태봉동에 1900년 문희탁의 야은정과 동명정자로 거의 같은 시기에 지어졌다.이 정자의 창건자인 신세균의 야은정원운에 ‘삼각산중정자성三角山中亭子成’이라는 시구가 있는 데 이는 삼각산에 정자를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야은은 야촌에 숨어산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효당曉堂 김문옥金文鈺(1901~1960)의 시와 현와弦窩 고광선高光善(1855-1934)의 '야은기野隱記'가 남아 있다.삼각산 아래 일곡동은 서로 동자봉(147m) 사이의 세장한 계곡 평지를 이루고 있으며, 그 주변에 영산강의 지류인 용봉천이 관통하고 있어 원삼국시대와 백제시대의 생활 유적이 나오는 등 오래전부터 사람이 생활했던 낙지였다.  
    2020-03-13 | NO.125
  • 양과정 良苽亭 양과동정
    남구 이장동 266   《광주읍지》(1879, 1924)에는 양과정이 주의 서남쪽 20리에 있다. 일명 간원대諫院臺이다. 이 지역 출신 인물들이 간관諫官으로 많이 진출하여 국사를 논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고경명의 별장이라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1600년대 중반께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편액 '良苽洞亭'이라는 글씨는 우암 송시열이 쓴 것이다. 지금은 모든 기록이 양과동정이라 하고 있다. 원래는 양고동정이라 해야 맞다. 아마도 ‘과瓜’와 ‘고苽’를 착각해 발음이 변한 듯하다.양과동정은 동약洞約이나 향약鄕約이 열린 곳이어서 동정洞亭이라는 이름을 썼다. 정자 안에는 시문과 ‘양과동적입의서良苽洞籍立議序’나 ‘양과동정향약서良苽洞亭鄕約序’와 같은 관련 글들이 걸려 있다.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맞배지붕 기와집으로 바람 막는 판이 설치돼 있다. 기단은 바른층 막돌쌓기를 하고 덤벙주초를 놓고서 원형기둥을 세웠다. 사방은 벽이 없이 개방된 공간이며 우물마루를 깔았다. 천장은 서까래의 연골이 그대로 들어난 연등천장으로 하였으며 홑처마다. 광주시 문화재 자료 제12호이다.양과동정에는 지고 고의상, 최윤환의 중수기문이 있고 유사경의 양과동적입의서, 고한원의 양과동정향약서와 제봉 고경명, 규암 송인수, 회재 박광옥 등 많은 시가 남아 있다.
    2020-03-13 | NO.124
  • 양심당 養心堂
    남구 원산동 951-6 구만산길   양심당이라는 정자는 남구 원산동 만산마을 뒷산 제청골에 있었다 한다. 필문 이선제의 큰아들 양심당 이시원(1428~1488)이 아버지의 시묘살이를 마친 후 그 옆에 초막을 지어 지낸 곳이다. 양심당은 이시원의 호이다. 광산이씨 청심당공파 세보(1988)에 따르면 만산마을 옆에 경현당景賢堂을 지어 강학터로 활용했다고 한다. 따라서 이것이 두 개의 건물인 것인지 아니면 양심당이 나중에 경현당으로 바꿔 부른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의 후손 동암 이발(1544~1589)이 지은 ‘근차양심당운謹次養心堂韻’과 ‘제경현당題景賢堂’이라는 두 수의 시가 있는 것으로 보아 두 개의 건물로 보인다. 다음은 '근차양심당운'이다. 家學有傳心  우리 가문 바른 학통 마음으로 전해오니一源如海深  흘러 내린 그 근원이 바다처럼 깊었도다. 瞻之如在我  우러러서 본받으면 나의 소유 될 것이니外此更何求  이런 이치 저버리고 그 무엇을 찾을손가.이 주소지에는 양심당이선생유허비養心堂李先生遺墟碑와 그 뒤에 양심당묘정비급유적비창립기적비養心堂廟庭碑及遺蹟碑刱立紀蹟碑가 당시의 흔적을 나타내고 있다.
    2020-03-13 | NO.123
  • 양암정 羊巖亭
    광산구 산막동 (어등산 북쪽)   양암洋巖 최형崔衡(1663~ ?)이 지냈던 곳으로 광산구 어등산의 북쪽 황룡강 위에 있었던 정자이다. 조선지지자료(1910)에는 광산구 산막동이라 했다.호남인물지(湖南人物志)에는 최형(崔衡)의 자는 평숙(平叔)이요 호는 양암(羊岩)이다. 본관은 수원(水原)이다. 그는 우암 송시열과 남계南繼) 박세채 (朴世采)의 문인이었다.  그는 송시열과 박세채와 자주 서신을 나눴고 송시열이 제주에 귀양갔을 때 양羊과 궤유跪乳의 뜻으로 양암羊巖 2자를 써 주었다 한다. 그 후 자손들이 유지에 정자를 지었다. 최형이 쓴 <만덕창수록(晩德唱酬錄)>은 박광일(朴光一, 1655-1723)·안여해(安汝諧, 1657-1691)·송주석(宋疇錫, 1650-1692)·양경지(梁敬之) 등이 그들의 스승 송시열(宋時烈, 1607-1689)과 수창(酬唱)한 시들을 수록한 것이다. 부록으로 송시열이 숙종(肅宗) 15년(1689) 세자책봉과 관련하여 올린 상소가 문제가 되어  제주 유배 당시 박광일·안여해·최형(崔衡)이 가는 길을 동행(1689년 2월 18일-2월 29일까지)하면서 기록한 일기가 있다.일기 뒤에는 박광일이 용진사(聳珍寺)에서 강학할 때 제자들과 수창한 시를 수록한 <용진창수록(聳珍唱酬錄)>이 함께 편집되어 있다. 이 책은 박광일이 당시 기록해 두었던 것을 그의 손자 박하진(朴夏鎭)이 편집·간행한 것이다.  그는 현종(顯宗) 4년에 나서 우암(尤菴) 남계(南溪)와 논변(論辨)한 서신이 많고 우암이 제주에 귀양갔을 때 양궤유(羊궤乳)의 뜻으로  양암(羊岩) 2자를 써 주었다 한다. 최형은 돌아와서 용강(龍江)의 석벽(石壁)에 새겼는데 그후 자손들이 유지(遺址)에 정자를 지었다. 유집(遺集)이 있다.우암 송시열이 정면의 현판을 썼고 광주부사였던 조철영이 용강龍崗의 석벽에 각자했다고 전한다. 자주 들렸을 법한 백하 양상형의 시도 있다. 후석 오준선이 이곳에 자주 들렸던 것으로 보아 그때까지는 정자가 있었음을 암시해주고 있다. <간양록看羊錄>의 수은 강항이 어느 날 황룡강을 지나다 비를 만나 연잎으로 종이머리를 감싸고 있는 모습을 여유롭게 지었던 시가 아련하게 다가온다. 連江驟雨動經瀾 강물 위 소낙비에 잔물결 일렁이고細葛初霑六月寒 가는 베옷 비에 젖자 유월에도 춥구나. 倦客行裝多勝事 지친 손님 행장에도 볼 만한 일 많나니馬前童僕盡荷冠 말 끌고가는 하인들이 연잎 고깔 다 쓰고 있네. 기우만이 양암정기(羊巖亭記)를 남겼다. 詠歸爲臺 羊巖先生崔公暮春風浴之所 公身後二百有餘年 始亭焉 亭宜曰詠歸 而臺之側面濱江白石 有所刻羊巖二大字.....이 밖에 이곳에는 기우만과 유유상종했던 절인 석음(石陰) 박노술(朴魯述, 185I∼1917) 등이 시문(謹次羊巖亭韻, 羊巖亭記)를 남기고 떠났다. 이때 중수했음을 알수 있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10대를 지나 양암에 처음 정자를 세웠네선현의 운수소관에 신령스런 땅처마 끝 나지막한 달은 청백한 마음 전해주고곱절되는 뜰 나무는 득의양양 푸르러라이후로 양암 언덕길이 적막하지 않을 터멈춰선 지팡이 다시 머문 듯곧은 마음 말하려도 아는 이 없어 강산을 들러보니 아득할 뿐이다.羊巖亭記詠歸爲臺。羊巖先生崔公暮春風浴之所。公身後二百有餘年。始亭焉。亭宜曰詠歸。而臺之側面濱江白石。有所刻羊巖二大字。卽尤翁手筆書贈公於晩德蕭寺者。尤翁蓋嘗經過。緣江越瞻。白石似眠羊。因念高人隱居行義於其中。澗阿孔邇。愛而不見。深喜其追到晤言。有是贈。公奉以摸刻。因又自號。亭不以羊巖。則當日授受眞傳。恐復埋沒。雲仍名亭之義得矣。登斯亭者想像先生之風。而念先生爲尤翁不見而願見。旣見而深喜者。用何道而致然。則此亭之有助於後生者。豈曰少也。亭旣落。後孫潤聖致諸仍之意。求爲文。宇萬嘗屢登而高景者。不辭而諾 /松沙先生文集卷之十八
    2020-03-13 | NO.122
  • 양파정
    양파정은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에 있다. 양파(楊波) 정락교(鄭洛敎, 1863~1938)가 지은 누정이다. 이 누정은 일제강점기 때인 1914년에 지었으며, 사직공원 입구 꽃바심 위쪽에 있다. 1932년에 중건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인 정낙교의 원기(原記)와 원운(原韻)을 비롯하여 당시 유명한 문인들의 시문을 판각한 30여 점이 걸려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명성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이 누정에는 원래 석서정(石犀亭)의 옛터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정낙교가 이미 폐정된 이곳에다 누정을 지었음을 알 수 있다.楊波亭重建記居高明處臺榭禮經爲順時而言也 거고명처대사례경위순시이언야높고 밝은 누대에 거처하는 것은, 예문과 경전에서는 시대를 순응(세상을 살피는)하는 것이라고 말한다.視壅則志滯故必有遊息之物 시옹즉지체고필유유식지물시야가 가리면 뜻이 막히는 까닭에 반드시 휴식할만한 건물이 있었으니, 柳柳州爲爲政而發也 유유주위위정이발야유종원이 위정자를 위하여 지었던 것(정자)에서 시작되었다. 余嘗三復斯言以爲非惟居官 여상삼복사언이위비유거관내가 일찍이 세 번씩 반복 음미하면서 생각해 보니 오직 관료뿐만 아니라 雖處於家者亦不容無此矣 수처어가자역불용무차의비록 가정생활을 하는 이라도, 또한 이러한 것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此吾亭之所以作也 차오정지소이작야이것이 내가 정자(양파정)를 짓게 된 이유라 創新在甲寅四月重建在壬申五月 창신재갑인사월중건재임신오월이 정자가 처음 세워진 것은 갑인(1914, 당시 정자는 石犀亭)년 4월이며, 다시 세운 것은 임신(1932)년 5월이다.噫歷年十九亭之欹傾頹廢若是焉 희력년십구정지의경퇴폐약시언아∼ 슬프구나 19년 세월을 지나다 보니, 이렇게 정자는 기울어져 퇴락하였는데, 況人事之變遷當何如哉略加修治 황인사지변천당하여재략가수치하물며 인생사 변천은 어떻겠는가? 내 생각은 대략 보수하는 것이었지만, 是吾志而重建乃己亦其勢也 시오지이중건내이역기세야다시 지을 수밖에 없는 것 또한 이미 대세였다. 從玆以往家居慮欝輒杖策登眺雲烟開斂 종자이왕가거려울첩장책등조운연개렴 이로부터 집에 생활 하면서 울적한 생각이 들면 지팡이 짚고 (정자에)올라 조망하면 구름과 노을이 펼쳐졌다 걷히고朝暮萬像溪流橫帶漁釣交錯萬室之邑百貨之肆 조모만상계류횡대어조교착만실지읍백화지사아침과 황혼녘의 온갖 모습과 흐르는 시내에는 어부들의 낚시대는 서로 이어졌으며, 읍내의 수많은 집들과 상점들이 줄지어 撲其下間曠之趣紛華之像可謂兼有而不相妨矣 박기하간광지취분화지상가이겸유이불상방의아래쪽으로 밀치는 듯하나, 훤한 정취와 화려한 형상이 함께 어우러져 서로 방해가 되지 않으니.或曰人之憂樂在於其心 혹왈인지우락재어기심누가 말하기를 사람들의 근심과 즐거움은 그 들의 마음에 있는 것이니心靜則雖一水一石吾得而樂焉 심정즉수일수일석오득이락언마음이 안정되면 비록 물 한 방울 돌멩이 하나에서라도 즐거움을 얻는 것이고 心不靜則雖溪山之勝波斯之繁豈得而樂之哉 심불정즉수계산지승파사지번기득이락지재마음이 안정되지 않으면 비록 강산의 아름다운 경치와 서양의 화려함이라도 어찌 즐거움이 되겠는가? 라고 하기에余曰子之言是矣反而思之又有一焉 여왈자지언시의반이사지우유일언나는 그대 말이 옳다라고 말하면서, 돌이켜 생각해 보니 또 하나 있으니盖樂者登之可以增其樂憂者登之可以忘 개락자등지가이증기락우자등지가이망대략적으로 즐거운 사람이 이 정자에 오르면 그 즐거움이 증가되고, 고뇌하는 사람이 이 정자에 오르면 근심을 잊으며, 其憂官居者公餘一登足以宣其欝 기우관거자공여일등족이선기울지친 관료가 공무 중 여가를 내어 한번 오르면 충분히 울적함을 떨치고 家居者乘間輒往足以樂其志 가거자승기간완족이락기지일반 가정에서도 틈을 타 이따금 오르면 그 마음을 즐겁게 하기에 충분하며, 遠方羇旅之道於此者與鄕鄰韻士之登此者皆得以快心目焉 원방기려지도어차자여향린운사지등차자개득이쾌심목언먼 지방의 나그네와 가까운 이웃 시문객 들이 여기에 오르면 모두 눈과 마음이 상쾌해 지리라. 然則吾亭不爲無助於憂者樂者出者處者遠近者之淸償矣 연즉오정불위무조어우자락자출자처자원근자지청상의그렇다면 나의 이 양파정은 고뇌하는 사람과, 즐거워하는 사람, 세상에 나가 활동하는 사람이며, 세상을 등지고 은둔하는 사람과 멀리 사는 사람이며, 가까이 사는 사람에게 청초한 감상을 주는데 도움이 없다고 말하지는 못하리라而所謂順時游息者與衆共之豈得而獨專哉 이소위순시유식자여중공지기득이독전재소위 시류를 따르기 위한 휴식공간을 대중과 공유하는 것이니, 어찌 나 홀로 독차지하여 즐기겠는가? 라고 했더니聞者黙然無以應遂記其說如此 문자묵연무이응수기기설여차묵묵히 듣던 이가 대꾸하지 않기에 이와 같이 한 말을 기록하게 하였으니, 惟願吾子孫克軆此意嗣而葺之以永其事也오직 나의 자손들은 진실로 이러한 뜻을 체득하여 이어서 엮어갈 것이며 이 정자가 영원히 남아 있기를 소망하노라. -壬申五月下澣 鄭洛敎 記1932년 5월 하순에 정락교 지음.
    2019-08-01 | NO.121
  • 광주광역시
  • 한국학호남진흥원
  • 사이버광주읍성
  • 광주서구청
  • 광주동구청
  • 광주남구청
  • 광주북구청
  • 광주광산구청
  • 전남대학교
  • 조선대학교
  • 호남대학교
  • 광주대학교
  • 광주여자대학교
  • 남부대학교
  • 송원대학교
  • 동신대학교
  • 문화체육관광부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 국립아시아문화전당
  • 광주문화예술회관
  • 광주비엔날레
  • 광주시립미술관
  • 광주문화재단
  • 광주국립박물관
  • 광주시립민속박물관
  • 국민권익위원회
  • 국세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