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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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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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성정惺惺亭
      광산구 등임동 방혜마을에 영광 홍농 출신의 산곡 山谷 최기모 崔基模가 지냈고 기문이 있다. 최기모(崔基模, 1869-1925)의 자는 진우(進愚)이며 호는 산곡(山谷)이다. 최익현의 문인이다. 《산곡유고(山谷遺稿)》가 있다.최기모는 산곡유고 권1에 '광주를 지나며(過光山府)'라는 시가 있고 쌍석정에 올라 시(謹次雙石亭韻 李熙容)를 남겼다.  
    2020-03-13 | NO.150
  • 소빈헌 笑嚬軒
    동구 금남로1가   지금의 민주의 종각 옆 건물 상무관 주변에 소빈헌과 함께 관누정 중 월소루가 있었다. 광주읍지(1879, 1924)에는 객사의 동쪽에 있는 하모당 서쪽 10보의 지점에 소빈헌이 있다. 바로 옆 건물인 셈이다. 광주목사로 부임한 한성우(1633~1710)가 광주 동헌 하모당 서쪽에 지었다. 목사 한성우는 1701년 전라감사, 1702년에는 전라도관찰사로 재임하는 등 전라도와의 인연은 깊다. 한성우는 1701년 전라감사, 1702년에는 전라도관찰사로 재임하는 등 전라도와의 인연은 깊다. 한성우는 1689년 기사환국으로 노론이 몰락하고 송시열도 제주도로 귀양 갔다가 사사되자 그 역시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1694년 갑술옥사로 남인세력이 무너지자 수찬에 재기용된 뒤 교리·응교·집의·사간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1699년 대사간에 오른 뒤 철원부사·광주목사(光州牧使) 등을 거치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주철(鑄鐵)로 된 송덕비를 세웠다고 하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광주읍성, 그곳에 있었던 관 누정 가운데 1699년에 여동래呂東萊가 지은 ‘소빈笑嚬은 지방관이 당堂 아래 만 가지 즐겁고 슬픈 일, 당 위에서 한번 웃고 찡그리네’라는 싯귀를 취하여 소빈헌이라 이름했다. 총 15칸으로 구성된 규모있는 큰 건물이었다. 笑嚬軒月小樓在何暮堂西十步牧使韓聖佑所構取呂東萊送嘉禾倅詩堂下萬休戚堂上一笑嚬之句名笑嚬軒高其西起一小樓取蘇東坡赤壁賦山高月小之義名月小樓월소루는 소동파 적벽부의 '산은 높으니 달은 작게 보인다'는 강산풍월江山風月을 뜻하는 의미의 누각이다. 소빈헌이 15칸인데 반해 3칸 짜리 건물이라 그렇게 이름 붙였을 것으로 보인다.1877년에 화재로 무너졌으나 이듬해 복구됐다. 없어졌다. 1896년 지도군수 오횡묵이 왔을 때 이미 재건축된 것이었다.
    2020-03-13 | NO.149
  • 소해정蘇海亭 경의재景義齋
    북구 소해로 11 (일곡동)   *경의재 소해정은 소해蘇海 노종용盧種龍(1856~1940)이 1930년에 세웠으며 그의 아호에 따라 이름을 지은 정자다. 노종용은 대촌동 양촌마을에서 출생하였다. 원풍정願豊亭 건립자인 농암 노재규의 아들이다. 노종용은 연재 송병선, 심석재 송병순, 면암 최익현, 송사 기우만 등 한말 우국지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송병선이 자결하고 최익현이 일제에 잡혀 대마도에서 순절하자, 통곡하며 장례를 지냈다. 스승의 유지를 받들고 척사위정斥邪衛正의 대의로서 여러차례 상소를 올려 오적五賊을 물리치고 나라를 보전하려 노력했다. 이것이 관철되지 않자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북구 일곡동에 내려와 학문을 논하고 전념하며 후진양성에 힘썼다. 저서에 <소해문집蘇海文集>이 있다 소해정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골기와 팔작지붕 건물이며 내실에 쪽마루를 두었다. 경의재란 현판이 있고 면수재勉修齋, 농아聾啞란 별칭으로도 부른다. 주련은 석촌 윤용구가 썼으며 고광선, 노상익, 기우만 등의 기문과 이외 시 등 46개의 현판이 있다. 소해정은 경의재로 이름으로 바뀌게 되는데 1965년 노종용의 아들 노진영이 이 정자를 경내에 있는 만주사晩洲祠의 강당으로 헌납했기 때문이다. 만주사는 송병선과 노종용을 배향하는 사우祠宇다. *만주사경의재는 강학講學을 하는 곳으로 바뀌었다. 경의재가 있는 곳에는 원풍정과 만주사도 함께 있다. 같은 경내에서도 경의재가 한 단 아래에, 원풍정은 한 단 위에 각각 위치해 있으며 경의재 바로 옆에 만주사가 있다.경의재가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일곡근린공원과 일신초등학교 사이의 사거리에서 일곡마을로를 따라 일곡 자연마을의 평지와 한새봉 산이 맞닿은 곳까지 500여 미터 쯤 가면 왼쪽 길가에 절효사가 있다. 그곳에서 오른쪽 앞쪽에 산과 접해 있는 길로 150여 미터 쯤에 경의재가 원풍정(농암정), 만주사와 함께 있다.  
    2020-03-13 | NO.148
  • 송대 松臺
    광산구 신룡동 (신촌마을) 고봉 기대승의 후손으로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지낸 송대 기문현奇文鉉(1811~1861)이 만년에 작은 정자를 짓고 유유자적했다. 기문현은 학문과 사상은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 노사 기정진의 제자로 가장 많은 학문적인 영향을 받았으며 입재 기재선의 아들이다송대松臺에 대한 정보는 없으나 광산구 신룡동 낙암산 아래 인근 행주기씨幸州奇氏 집성촌인 신촌(새말)마을 일대 황룡강이 흐르는 곳에 위치한 것으로 보인다. 문집에 《송대유고(松臺遺稿)》가 있다.사헌부 장령, 집의, 사간을 끝으로 벼슬을 버리고 낙향, 전남 강진군 성전면 호남의 소금강이라 일컫는 월출산 기슭 금릉(강진) 경포대에 신암초당新庵草堂을 짓고 은거했던 신암 조승하가 그의 정자에 들려 시를 읊었다.   一間茅屋翼然飛 한 칸의 초가집이 나래를 펼치는 듯臥聽溪聲枕畔歸 베개 맡의 물소리를 누운 채로 듣노라高峯流澤於斯見 고봉(기대승)선생 남긴 윤택 여기에서 보겠으니餘香馥襲人衣 남은 향기 그윽하게 사람 옷에 배는구나  
    2020-03-13 | NO.147
  • 송설정 松雪亭
    남구 압촌동 고경명의 조부인 송설松雪 고중영高仲英(1506~ ?)은 남구 압촌동 출신으로 하천 고운의 아들이다.귀양에서 풀려나 조정에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아니하고 고향에 돌아와 학문에 전념하면서 여생을 보냈던 곳이다. 중종 때의 절신(節臣)인 고중영은 명종비 인순왕후심씨仁順王后沈氏의 외삼촌인 정승 이량李梁이 명종의 신임을 바탕으로 이감李戡, 신사헌愼思獻, 윤백원尹百源 등과 당을 만들어 국권을 농간하는 죄상을 들추어 상소를 하였다가 도리어 이량의 모함으로 진도에 유배되었다. 그 후 사림들과 친교가 있던 심의겸沈義謙이 이 일을 명종에게 알려 이량의 죄상이 드러나 보령에 유배되었다. 이후 고중영은 귀양에서 풀려나게 된 것이다. 광주의 경렬사에 배향되었으나 1868년 서원 훼철령에 의해 훼철된 뒤 남구 원산동 황산사黃山祠에 배향되었다.  
    2020-03-13 | NO.146
  • 송암정 松菴亭
    북구 신룡동 (복룡마을) 북구 신룡동 복룡마을 뒷산 황룡강이 바라 보이는 기슭에 인동장씨 장건표張健杓 장연섭張淵涉이 지은 정자였다. 정자주인 장건표가 지은 원운 시, 교리 김진우가 지은 송암기가 광주시의 《누정제영》(1992)에 전한다. 송암松菴은 이 정자 앞에 늙은 노송이 높이 솟아 창연한 고색을 띠었고 정자 주인이 어려서부터 소신을 굽히지 않는 자신의 기질을 드러낸 것이다. 이 정자는 1971년에 그들의 자손이 매각한 뒤 없어졌다.장건표의 송암정 원운은 이렇게 노래한다. 榮利平生强不求  평생동안 세상 명예 힘써 구하지 않았더니老年方悔少時遊  어린 시절 허송세월 나이 들어 후회하네人倫都喪芝焚嘆  인간 윤리 없어지니 그의 한탄 한이 없고天理其然添室憂  하늘 이치 그러하니 나의 근심 깊어지네惟有孤忠依北斗  변함없는 외로운 충성 북두처럼 빛나있고難扶大義付東流  무너지는 큰 대의는 동류(東流)처럼 흘러가네庭前獨守松高節  절개 높은 푸른 솔이 정원앞에 서있으니撫愛盤桓假我休  그 아래 노니면서 편안하게 쉴까보다.  
    2020-03-13 | NO.145
  • 송음정 松陰亭
    광산구 삼도회룡길 (회룡마을)   송음 장현규張賢圭(1820~1886)가 나주읍 삼도면 삼도리에서 초당을 짓고 지내다 사후 1886년에 그의 뜻을 기려 정자를 지었으나 퇴락하자 1955년 그 터에 중창했다. 지금의 송음정은 나주에 있었던 것을 그의 증손 덕암 장동택張東澤 등이 이곳 회룡마을로 1964년에 옮겨 중수했다.건물은 석주를 가미한 2층 누정으로 앞면 3칸 옆면 2칸의 대청마루에 함석 팔작지붕으로 구성됐다. 1971년에 보수하고 1984년 8월에 골기와에서 평기와로 교체했다. 마을을 완전히 감고 돌아 민가 없는 잡풀 야산에 있다. 흥성장씨 문중이 대를 이어 관리하고 있다.회룡마을 입구에 송음정이라는 입석 이정표가 있다. 진입하는 길이 없어 덤불을 헤치고 가면 정자는 높다란 대지 위에 서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정자주인 장현규는 효행이 뛰어나 부모의 병환을 치료하기 위해 부모의 병환에 자기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입에 흘려 넣는 단지, 작지斫指하면서 사후 7년간 시묘살이를 해 후손들이 이를 귀감이 되기 위해 건립했다고 전한다. 정자 안에는 월성 김용제의 송음정기松陰亭記와 파평 윤효중의 송음정중건상량문松陰亭上梁文 등의 각종 현판과 편액이 걸려 있다. 천정은 보에 용그림 등 단청으로 그렸다.  
    2020-03-13 | NO.144
  • 송하재 松荷齋
    북구 북쪽 10리송하재는 조선환여승람(1938)에는 효지면 송하리의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였던 심순성沈舜省의 후손인 북구 일신마을 심영택沈英澤(1810~?)과 심환택沈煥澤 형제가 건립한 담락처였다.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북쪽 10리, 광주향교 광주읍지(1925)에는 서쪽 10리에 있다고 한다.참판 심계택沈啓澤의 기문을 비롯하여 판서 윤용구의 제액 및 박사 심선택沈璿澤의 육위문六偉文이 남아 있다. 심영택의 기문도 있다. 이후 그 자리에 1960년 탐진최씨 문중이 최씨재실로 지었다. 건물은 콘크리트와 화강석을 섞은 기단을 1.5m 높이로 쌓아 중앙에 석계를 조성 신발돌 4개와 정평주초를 놓았다. 원형의 기둥을 세워 정면 4칸 측면 2칸의 일식기와 8작지붕으로 되어있다. 천정은 연등천정이며 5량집이다. 마루는 우물마루이며 좌우 퇴칸에는 머름을 설치하였다. 대문은 소슬대문으로 되어 있다. 다만 남부소방서옆 공휴지가 송하재 매립지라 하는 데 이 용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2020-03-13 | NO.143
  • 송해당 松海堂
    북구 일곡로 41번길 26   송해당은 송해 노문규盧汶奎(1850~1935)가 당시의 어지러운 세태를 비관하여 자신의 종적을 숨기기 위해 옛날 농가로 돌아와 지냈던 곳이다. 송해당의 건립 시기는 1860년에 해당되며 노문규가 귀향한 1906년에 중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은 문이 닫힌 채 폐가가 되어 있다.노문규의 둘째 아들 노석정은 경술국치를 슬퍼하여 항일 독립투쟁을 전개하다가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7년 옥고를 치른 당시의 우국치사이다. 정부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노문규는 18세 때 모든 경사經史를 통독할만큼 문장이 뛰어났고 향시에 여러 번 합격하였으나 대과에는 실패하였다. 한말에는 향약을 세우고 전라남도 사림의 추천으로 관찰부주사를 지냈으며 이듬해 6품인 승훈랑이 되었다. 송해松海라는 의미는 그의 뜻이 솔처럼 곧고 그의 마음이 바다처럼 넓다는 뜻으로 붙인 것이다. 송해당은 주초 위에 사각기둥을 세운 앞면 4칸 옆면 1칸의 평기와지붕으로 되어 있다. 송해당은 정자 형식의 건물이 아니라 옛날 농가를 개조했을 뿐이다. 당시에는 연못과 버드나무가 있었으나 모두 사라졌다. 건물 정면에는 송해당이라는 현판이 있고 기둥마다 판각 주련이 있으며 당내에는 40여 개에 달하는 당시 유림들의 찬미시문들이 있었다. 당시 주소는 全羅南道 光州郡 石提面 月谷里이며 병조참판 선무원종훈 회재晦齋 노희서盧希瑞의 17세손, 대사성 식재式齋 노광리盧光利의 10세손이다.
    2020-03-13 | NO.142
  • 쇄소당 灑掃堂
    북구 운암동   《광주읍지》(1879, 1924)에는 주의 서북쪽 40리에 있고 쇄소당 이운홍(李運鴻, ? ~1598)이 지어 지냈다. 이운홍의 호는 쇄소당이다. 기대승의 문하에서 공부했고 임진왜란 때 함재 기효증, 간재 이덕홍 등과 함께 의곡과 의병을 모았다. 정유재란 때 부친인 참의 이의중을 등에 업고 피난하다 왜적에게 피살당했다.그의 손자인 반학옹 이지원(1604~ ?)이 중수하여 그곳에서 거문고를 타고 독서를 하며 여생을 보냈다. 그는 보성 훈도訓導인 이발의 아들이자, 이지매李之邁의 형이다. 1635년 을해증광사마시乙亥增廣司馬試에 진사 3등으로 합격하였으나 병자호란 이후 “나의 삶 어려운 때 태어나 태평한 때를 보지 못하네. 상산商山의 늙은이처럼 지초芝草나 캐며 살아 보려네”하며 속세를 떠나 살았다. 쇄소灑掃는 인간이면 어려서부터 해야 할 당연한 도리의 근본이다. 소학에서 물 뿌리고 쓸고[灑掃] 부름에 답하고 물음에 답하고[應對] 나아가고 물러나는[進退] 예절과 어버이를 사랑하고[愛親] 어른을 공경하고[敬長] 스승을 높이고[隆師] 벗들을 친애하는[親友] 방법을 가르쳤다. 모두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바탕이 되는 것이다.고사전高士傳에 상산은 중국의 섬서성陝西省 상현商縣 동쪽에 있는 산 이름이다. 진나라 말기에 동원공東園公, 하황공夏黃公, 녹리선생甪里先生, 기리계綺里季 등 네 사람이 어지러운 세상을 피하여 이 산에 은거하였다. 그들의 수염이 희었기 때문에 ‘상산사호商山四皓’라고 일컫는다.  
    2020-03-13 | NO.141
  • 수경정 守敬亭
    남구 대촌동 (하선마을)   인재忍齋 최인환崔仁煥(1878~1958)의 일제강점기 때 대촌동 이관산 아래 지어진 정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덕은 송재직의 기문과 고당 김규태의 현판이 남아 있다고 전해 당시의 그들이 살았던 기간에서 알 수 있다. 지금은 건물은 사라지고 없다. 수경당이라는 기록도 있다.정자주인 최인환의 호는 삼위당三謂堂이다. 최상록의 아들이며 남구 양과동 야평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의 상을 당하여 예를 갖추어 치루고 매일 목욕하고 치성을 다하며 추모의 정을 잊지 않았다. 성장하면서 일찍이 문리를 터득하여 행의가 엄정하고 언사가 정직하고 경사에 밝고 지행志行이 굳어 사람들로부터 추앙받았다. 18세 때 큰형과 함께 송사 기우만의 문화에서 학문을 터득하던 터에 1910년 경술국치를 겪으면서 통한의 울분으로 두문불출하며 학문을 연구하고 후생을 교육했다. 수경정에서 많은 후학을 길러냈으며 유림들이 모여 수계 강회하던 유림들의 보금자리였다.송파 고광수, 회산 양일묵, 설주 송운, 고재창高在昌, 나철수羅喆洙 등 당대의 근대 한학자들과 교유했다. 그의 아들 최기원崔基元이 간행한 인재유고忍齋遺稿가 남아 있다. 서문은 송재직이 쓰고 행장은 유학자 장헌 기노장, 묘표는 경당 최윤환이 썼다.  
    2020-03-13 | NO.140
  • 수녕당(壽寧堂)
    동구 불로동 수녕당(壽寧堂), 수영당으로도 부르는데 마을기로회에서 지었으며 광주 최초의 노인당으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까지 그 역사를 이어온 데는 지역인사들의 적잖은 도움이 컸다. 일제 때에는 부호 붕남(鵬南) 지응현(池應鉉) 등이 재정적인 지원을 했다. 그래서 수영경로당(壽寧敬老堂) 건립에 큰 역할을 했던 6명의 공로를 기리는 공덕비들이 남아 있다. 1925년 지응현씨가 5칸 기와집과 156평 대지를 희사해 문을 연 수영경로당(동구 불로동 11-2)의 한 켠이다. 이 골목길이 넓혀지면서 연건평 82평짜리 번듯한 2층 건물로 변했다. 건물1층, 앞면은 점포로 내놓고 뒤쪽은 부녀회원들이 사용한다. 2층은 남자회원들 전용 공간, 회원수가 100명을 넘는다. ‘늙지 않는다’는 불로동(不老洞)으로 한 것과 연계가 있어 보인다.  
    2020-03-13 | NO.139
  • 수월당
    서구 매월동 513 (개산제) 전평제서구 풍암유통단지를 지나면 바로 오른 편에 아담하고 아름다운 저수지인 개산제가 있다. 이곳에는 회재懷齋 박광옥朴光玉(1526~1593)이 지었다는 수월당水月堂이 저수지 서편 고목을 옆으로 하고 자리하고 있다. 매월동, 벽진동 지역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재해방지를 위해 축조했던 저수지가 도심근교에서 방치되었다가 일제강점기 때 보수작업을 하면서 전평제라고 이름 붙였다. 1999년 국토공원화 시범사업으로 쉼터를 조성, 2002년에 조성 완료하여 지역민의 좋은 휴식 공간을 제공하고 있는데 아직도 전평제라는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다.  원래의 뜻을 좇아 개산제로 바꿔야 할 것이다.개산제는 1568년 박광옥이 당시 선도면船道面 개산蓋山마을 앞에 있다. 현재 매월동 회산懷山마을에 살면서 인근 주민들의 물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개산 남쪽의 물을 끌어들일 수 있도록 방죽을 막아 개산방죽介山防築이라 한 데서 유래되고 있다. 수월당도 그때 방중 가운데에 지어졌던 유서 깊은 정자다.박광옥은 방죽 위에 수월당을 짓고 고경명과 고경순, 이일원李一元, 이군현李君賢 등이 시회詩)를 열고 음풍농월을 즐겼다. 이들과 함께 성리학을 연구하는 장소로도 이용했다. 정내 현판에는 “고이순高而順 고경명이 수정水亭에 찾아와 사성 고경순과 더불어 술자리를 마련하고 이순이 먼저 시 한 수를 쓰고 이어서 사성이 지었는데 이근현이 뒤에 와서 시첩을 벽 위에 걸어 두었다. 중촌 2월 9일”이라고 전하고 있다,정자는 무실 팔각정으로 수월당 정이름의 현판과 내부에는 수월당복원문水月堂復元文 현판이 헌액되어 있다. 전평제에서 바라보이는 개금산은 무등산에서 장불재로 내린 용맥 하나가 안양산으로 가고 또 하나는 너릿재로 비룡하여 달리다가 칠구재가 있는 분적산을 세우고 다시 효덕동을 지나 금당산으로 힘차게 낙맥하니 나쁜 기운은 다 떨쳐내어 고은 자태로 화방산을 만들어 이곳까지 이르고 있다.박광옥은 이 우뚝한 산을 “아름답고 돈이 많이 모인다하여 마치 금으로 덮인 것 같다”는 뜻으로 개금산蓋金山이라고 짓고 성리학을 연구하고 선도향약船道鄕約을 실시하는 등 주민들을 교화하는 일에 힘썼다. 그가 지은 시에서 “농사 지어 납세하니 세금독촉 아니오고 / 말과 행동 삼가하니 이 한 몸이 편안하네.[樂業無逋租 安身戒守甁]”하는 대목에서 향약과 교화와 관련한 대목을 찾을 수 있다.그의 흔적이 남아 있는 수월당은 아니지만 이름을 그대로 받아 광주시 서구청에서 정자를 복원해 개산제를 찾는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수월당에 올라서 읊었을까?춘심벽초편교원 春深碧草遍郊原  봄이 깊은 들판에 파란 풀이 가득한데부앙료탐만화원 俯仰聊探萬化源  쳐다보고 굽어보며 조화의 근원 찾네사진천홍무일구 謝盡千紅無一句  온갖 꽃들 다 지도록 시 한 구도 못 짓노니수지진악재무언 誰知眞樂在無言  참 즐거움 무언 속에 있는 것을 뉘 알리오회재집 제3권
    2018-05-23 | NO.138
  • 수진당 守眞堂
    광산구 신창동   풍영정(風詠亭)의 주인 칠계 김언거의 손자 김치원金致謜(1562~?)은 수진당을 경영하며 풍영정도 관리했다. 김치원의 자는 화제(和濟), 호는 수진당이다. 현신교위顯信校尉를 역임했으며 임진왜란 때는 권율 장군을 도와 이치전투에서 공을 세웠던 인물로 알려지고 있다.이곳에서는 임련林堜, 장운익張雲翼, 황혁黃赫, 신량申湸, 홍우석洪禹錫, 오인두吳斗寅, 채경선蔡慶先, 유함兪涵, 윤휘尹暉 등이 들려 시를 남겼다. 동악 이안눌李安訥(1571~1637)이안눌(李安訥은 《동악집東岳集》(1640) 권9 담주록潭州錄에 수진당이 풍영정 동쪽 산 기슭에 있다[堂在風詠亭東麓]고 적고 2수의 시를 남겼다. 주석에 정자 주인은 군자감주부를 지냈던 김치원의 아버지 김광부(金光符)가 지내는 거처[亭主金光符所居之室也]  라고 적고 있어 김광부의 관풍대를 이어 받은 것으로 보인다. 竹裏茅齋僻 苔庭絶點塵 煙沙一面水 花木四時春 耕釣堪終老 琴棋且樂眞 蕭然北窓下 方見葛天人夜宿仙滄里 林深草閣幽 芭蕉五更雨 蟋蜶一年秋 簪紱非吾好 丘園入客愁 遙知廣津畔 黍稷滿西疇 또 제봉 고경명의 여섯째 아들인 고용후高用厚(1577~1652)의 《청사집晴沙集》권1에 '風詠亭。謹次竹陰城主韻。仍呈參禮。求禮兩斯文及權上舍希慶。兼奉亭主金致謜'이라는 시 제목이 등장한다.  김치원은 봉정奉亭의 주인이라는 것이다.이 시 제목의 권희경은 조희일趙希逸(1575~1638)의 《죽음선생집(竹陰先生集)》 또는 《죽음집》(1704) 권7에 칠연율시로 쓴 시 제목에 다음과 같이 사사당(四事堂)의 주인 권희경(1569~?)이 등장한다. 次四事堂韻 主人進士權希慶。以四事名其堂者。承朝露看花。迎晩風觀柳。待皓月吟詩。留佳客飮酒。四事凡二十字。避而不犯。
    2020-03-13 | NO.137
  • 술헌
    서구 매월동 (회산마을)술헌述軒은 『광주읍지』(1924)에 주의 서북쪽 20리의 회산마을에 있다. 동지중추부사 겸 오위장五衛將(조선때 종2품 벼슬, 후에 정3품)을 지낸 강길회姜吉會가 건립했다. 사복시정司僕寺正 강주귀姜柱貴의 증손이고, 강재문姜在文의 아들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나 많은 훼손이 생겨나자 그의 아들 회산晦山 강세영姜世永이 중수하고 원운 시를 남겼다. 주인 강길회의 제영이 남아 있다.푸른 수풀 언덕 위에 맑은 수석 가득하니지난 시절 남긴 유업 이어가기 어렵도다골짝 위에 맑은 난초 그지없이 향기롭고언덕 위의 곧은 녹죽 한이 없이 자랐도다그지없는 정성으로 詩禮 전통 이어가고한가로운 마음으로 魚樵 생활 즐겼도다아름다운 이 가운데 한가로이 노닐면서티끌없는 맑은 雲霞 하염없이 바랐도다
    2018-05-23 | NO.136
  • 광주광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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