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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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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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등산석실
    화순군 이서면 영평리 산96   나옹선사(1320~1376)는 1340년 허망하게 요절한 친구의 죽음에 무상함을 느끼고 그길로 공덕산 묘적암에서 요연선사에게 출가한다. 1344년에는 회암사에서 큰 깨달음을 얻게 되면서 원나라에 가서 연경의 법원사에 머물며 4년여를 지공에게 수학하였다구월산ㆍ용문산ㆍ원적산ㆍ금강산 등을 순력한 뒤 송광사에 머물다가 회암사 주지가 되어 절을 중창하고 왕명에 따라 밀양의 영원사로 가던 중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그의 수도 행적은 나옹선사의 토굴가에서 찾을 수 있다.나옹선사가 전라도 땅을 밟은 흔적은 무등산 규봉암과 지장암 사이, 즉 지공指空 너덜 아래 있는 석굴이다. 보조국사께서 수도하면서 무등산석실無等山石室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제봉 고경명이 1574년 4월 20일부터 24일까지 광주목사 갈천 임훈(1500~1584)의 일행과 함께 5일간에 걸쳐 무등산에 오른 감상을 4,800자의 순한문으로 기술한 유서석록遊瑞石錄에 지공너덜 이야기가 등장한다. 지공너덜의 이 많은 돌은 본래 상봉 근처에 있는 돌무더기였다. 김덕령 장군이 하루아침에 깨뜨려다가 내던져서 이렇게 된 것이라는 전설이 있다. 나옹선사하면 빼 놓을 수 없는 시가 있다.   청산은 나를보고 말없이 / 창공은 나를보고 티없이 살라하네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靑山見我無語居 蒼空視吾無埃生 -貪慾離脫怒抛棄 水如風居歸天命  
    2020-03-12 | NO.195
  • 무송원 撫松園
    동구 의재로 222 (운림동)   남구 양림동 무송원, 부호였던 현기봉 아들 무송 현준호(1889~1950)가 부친의 제각을 겸한 무송원을 지었다. 현준호의 부친 현기봉 때에 이미 영암 구림 일대에서 유력한 지주로 성장했고 1908년 목포로 옮겨와 살았다. 그 뒤에 다시 광주로 활동공간을 넓혔다. 현기봉은 이미 광주농공은행(현 충장로2가 갤러리 존에 있었음) 이사를 비롯해 전라남도 참사 전남도평의회 의원 등을 역임했던 터라 광주에 오래 머물렀다.현준호도 열일곱 살 때인 1906년부터 광주와 각별한 인연을 맺었다. 창평에서 고정주(高鼎柱)란 선비가 개설한 사립학교인 영학숙英學塾에서 수학했다. 여기서 그는 훗날 한국현대사에 이름이 자주 오르게 될 인물들인 동아일보의 김성수(고창 출신), 한민당의 송진우(담양 출신),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김병로(순창 출신)와 함께 공부했다. 그들은 현준호의 일생에 직간접으로 많은 영향을 주었다.1919년 6월 현준호는 호남은행의 설립에 착수했다. 이 때 현준호의 생활근거지는 광주였다. 하지만 생활근거지를 목포를 거쳐 광주로 옮겨온 뒤에도 영암과의 인연은 계속됐는데 그곳에는 현준호가 부친에게 물려받은 토지 외에 일제 때 그 자신이 간척한 땅을 기반으로 한 학파농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농장을 통해 얻은 부와 영향력은 훗날 현씨 일가가 성장하는데 큰 원동력이 됐다. 일제강점기 때 학파농장의 주소지가 호남동 67번지, 현준호 저택이었던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지금 그 무송원은 광주전통문화관 건물 일부가 되었다. 
    2020-03-12 | NO.194
  • 무송정 撫松亭
    남구 칠석동 30 (이리마을)   참봉 서태환徐台煥(1857~1940)이 세상을 비관하여 숨어 지내기 위해 고싸움놀이 전수관 바로 뒷편 마을에 당시의 일제강점기 세상을 비관하여 스스로 종적을 감추기 위해 1922년에 건립한 정자이다. 서태환이 젊어서 문학적 재능이 있어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으나 한일합방으로 시절이 변하여 그 뜻을 온전히 펴지 못하고 고향인 칠석동 마을에 와서 살게 되었다. 그는 누정을 짓고 소나무를 주변에 빙 둘러 심었으며, 20년 동안 밖을 나가지 아니하며 회포를 풀었다고 한다.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서쪽 30리에 칠석마을 죽령산 아래에 있다. 도리석초, 도리기둥 방식은 3칸 한옥으로 특이한 점은 상량 위로 단층 다락이 있다. 무송은 바로 옆에 기이한 노송 한 그루가 외로이 서 있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도연명의 '무고송이반환撫孤松而盤桓'이라는 귀거래사의 글귀를 줄여 무송撫松이라 하였다. 어루만진다는 무撫자는 깊이 사랑하고 아낀다는 뜻이요, 또 솔이라는 송松은 여러 나무 중에서도 가장 으뜸가는 나무를 가리켜 이른 말이다. 무송이란 나무 중에서도 가장 으뜸가는 솔을 아끼고 사랑한다는 뜻이 된다. 상량문에 임술壬戌이라는 간기로 보아 1922년에 세운 것이다.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며 현판 1점만 걸려 있다. <무송정실기>라는 책자에 무송정기 2편, 무송정설 1편, 무송정찬 1편, 무송정자서 1편이 있다. 판서 윤용구의 제액 및 승지 김영한, 지재 송철헌, 현와 고광선의 기문이 있다. 무송정이 있는 곳은 고싸움이 매년 일어나는 곳으로 유서 깊은 전통마을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곳에서 정자 주인 서태환은 원운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陶翁遺蹟起余淸 도옹의 높은 유적 이 마음 맑게 하니經始一亭今適成 한 정자 새로 지어 때마침 이뤘도다. 雪裏更看寒歲色 눈속의 푸른 세한 즐겁게 다시 보고風邊靜聽素琴聲 바람의 맑은 금성 고요히 들었도다. 偶參關柝非吾願 관탁의 낮은 벼슬 나의 소원 아닌지라永矢盤桓畢此生 이곳에 반환하며 이 평생 마치오리. 從古行藏難副實 예부터 행장간에 부실하기 어려우니令人O愧錫嘉名 분외의 이 이름이 그지없이 부끄럽네  
    2020-03-12 | NO.193
  • 문화정
    서구 마재로3(금호동)서구 금호동의 마재근린공원 가운데 위치하며 중흥아파트 쪽문 가까운 곳에 있어 사람들이 많이 찾는 정자이다. 1999년 마재근린공원이 조성될 사이에 만들어졌으며 누군가 ‘문화정文化亭’이라는 현판을 만들었다. 이왕 마재정이라 했으면 더 좋았을 듯 싶다. 다른 곳보다 높은 곳에 위치하여 풍금사거리를 한 눈에 볼 수 있다.비교적 넓은 공원이며 지역민의 휴식처이다. 풍금사거리 바로 앞에 있으며, 서구문화센터 옆에 위치한다. 여기 마재근린공원에는 서구의 유일한 시비라 할 수 있는 정덕채 시비가 함께 있다.
    2018-05-23 | NO.192
  • 방혜별장 芳蕙別莊
    광산구 등임동 (방혜마을) 나주 다시 출신 이종우李從愚(1485∼1533)가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 낙향하여 어등산魚等山 아래에서 지냈던 곳이다. 당시에는 일대가 나주목이었다. 본관은 함평, 자는 예수(睿叟)이다. 부친은 현감을 지낸 이근종李根宗이다. 모재慕齋 김정국金正國(1478~1543)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당시 우리나라에서 소학小學을 새로 간행하게 되자 스승인 모재의 명으로 교정에 참여하였다. 1513년 식년시 생원 2등 11위에 합격하였고, 호학교수湖學敎授로 관직에 나아갔다.안당安塘의 추천으로 영좌절도사嶺左節度使(경상좌도 병마절도사)를 지냈으며,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복재服齋 기준奇遵, 면앙俛仰 송순宋純과 교유하며, 동년금방계同年金榜契를 설립하였다. 49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임진왜란 발발하기 이전, 어지러운 국내정세로 미루어 왜적과 가장 인접한 지역인 울산에 위치한 경상좌도병마절도사慶常左道兵馬節度使에 아무도 올 사람이 없었다. 이 때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로 있던 이종우는 “이제 죽을 자리를 찾았다”며 1526년 경상좌병영 병사(종2품)로 특천되었다. 그는 울산의 임지에 부임하자 성지를 쌓고 병기를 정비하고 군수품을 비축하는 한편 군기를 확립하면서 동해연안에서 횡행하던 왜구를 평정하였다. 그의 묘墓는 광산구 방혜마을 뒷편에 있다. 방혜마을은 마을 형국이 물위에 뜬 주형舟形과 같아 배외재라 불렀으나 조선 후기 마을의 경관이 빼어나다 하여 방혜芳蕙라 이름하였다. 마을의 형성은 500여년전 이종우가 나주 다시면에서 이주해와 정착 개촌하였으며 지금은 등임동 방혜마을이다. 
    2020-03-12 | NO.191
  • 백암 白菴
    북구 하백로29번길 24 (매곡동)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북쪽 10리 거리에 김기현이 건립하였다. 후석 오준선의 기문이 있다. 이 기문에 백암은 서석산 북쪽의 연화봉 아래 있다고 하였다. 김기현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화순 동복에 거주한 농재 김곤변의 8세손 김윤겸金潤謙의 아들이다김기현이 작고한 이후 손자 하은 김희수(1861∼1919)가 다시 1917년 이 정자를 증축했다. 광주민속자료 제3호로 지정되어 있는 김용학가옥金容鶴家屋의 사랑채로 백암정사라 한다. 백암白菴, 청풍헌淸風軒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염재 송태회(1872~1940)가 쓴 글이다.앞면 7칸 옆면 3칸의 팔작지붕이며 홑처마이다. 평면 형태는 중앙의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측에 온돌방을 배치하였는데, 뒷부분을 손질하여 마루와 부엌을 증축하였다. 대청은 우물마루이며, 천정은 연등천정이다. 왼쪽 방 끝에 반 칸의 마루가 있어 남쪽으로 터진 담장 사이로 연못을 볼 수 있다. 김용학 가옥은 연파정과 하은정이 함께 있다.
    2020-03-12 | NO.190
  • 백야당 白野堂
    광산구 진곡동   《광주읍지》(1879, 1924)에 따르면 주의 북쪽 30리에 있다. 정랑 백야당 박광원(朴光元, 1659∼1741)은 광산구 진곡에 살던 우헌 박상현의 둘째아들로 박광일의 아우이자, 박광선의 형이다. 1699년 기묘증광사마시己卯增廣司馬試에 생원 1등으로 합격하여 벼슬이 형조정랑刑曹正郞,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1738년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다.수암 권상하와 지촌 이희조 등과 더불어 경서를 강론하였다. 1709년 최석정의 ‘예기유편禮記類編’이 체계적이지 못함을 여러 유생들과 함께 상소했다. 당시 대관臺官이 그를 귀양 보낼 것을 청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우암 송시열은 박상현의 문인으로 정자의 편액을 썼다. 시문집으로 1926년에 간행한 <백야당집白野堂集> 4권 2책이 있다. 서문은 송래희(1926)가 썼고 발문은 김병운(1813), 기우만(1899)이 썼다.
    2020-03-12 | NO.189
  • 백운정 白雲亭
    광산구 두정동 산82《광주읍지》(1879, 1924)에 주의 서북쪽 40리에 있으며 고봉 기대승(1527~1572)이 지었다고 했다. 기대승이 출가해 처음으로 생활한 곳으로 옛 소고용리召古龍里에 속해 있었다. 고봉의 8대손 종손 연기 현감 기상익 이후 1760년께 퇴락되었다. 광산구 임곡 본량동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고경명의 시가 남아 있다.기대승은 어려서부터 재주가 특출하여 문학에 이름을 떨쳤을 뿐 아니라, 독학으로 31세 때 주자대전朱子大全을 발췌하여 <주자문록朱子文錄>(3권)을 편찬할 만큼 주자학에 정진했다. 조선 유학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이황과의 8년간의 서신 교환을 통하여 사칠논변四七論辨을 전개했다. 벼슬은 부제학副提學 홍문관弘文館에 이르렀다.기대승은 많은 선비들과 풍영정과 서석산(무등산)에도 오르고 강학에 열중하였다. 용진산과 황룡강이 보이는 정자에서 <유거잡영幽居雜詠>(고봉속집 제1권)을 서술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백운정에 머무르면서 그동안 소홀히 했던 학문을 연구하는 한편 제자를 양성하고 현지에서 사족을 형성하며 문화적, 학문적 잠재력을 일깨웠다. 기대승이 입신출세라는 욕망의 장치에 갇히지 않고 입신양명의 정신을 온전하게 구현한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낙향할 때마다 머물렀던 백운정은 고향마을 내 낙암과는 좀 떨어진 것으로 보인다. 정자 이름인 백운白雲은 ‘백운재공곡白雲在空谷’에서 나온 말로 흰 구름[白雲]은 보통 은자(隱者)로, 빈골짜기[空谷]는 보통 은거하는 곳의 비유로 많이 쓰인다. “남조 양梁나라 도홍경陶弘景의 임금[齊高帝]이 산속에 무엇이 있는가? 재 위에 흰 구름 많다네.(山中何所有, 嶺上多白雲)”라고 했다.그의 운명은 생각보다 빨리 닥쳤다. 대사성에 복직되어 부제학으로 재임 중에 사퇴하고, 다시 1572년 대사간을 지내다가 병으로 그만두고 귀향하는 도중 고부古阜에서 객사하고 만다. 그의 나이 46세 때였다.
    2020-03-12 | NO.188
  • 벽간당 碧澗堂
    사촌 김윤제(金允悌)가 광주시 북구 충효동에 금다리보(金橋)를 짓고 벽간당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이곳은 본래 환벽당을 말함다. 환벽당의 당호(堂號)는 영천자 신잠(靈川子 申潛)이 지었으며, 벽간당(碧澗堂)이라고도 불렀음이 고경명(高敬命)의 유서석록(遺書石綠)에 기록되어 있다.건물은 정면 3칸, 측면2칸, 팔작지붕이다. 가운데 2칸을 방으로 하여 앞쪽과 오른쪽을 마루로 깐 변형된 형식이다.원래는 전통적 누정 형식이었으나 후대에 증축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이곳에는 우암 송시열(尤庵宋時烈)이 쓴 제액(題額)이 걸려있고, 석천 임억령(石川林億齡)과 조자이(趙子以)의 시가 현판으로 걸려 있다.환벽당에 관한 시는 정철이 지은 2수가 있는데, 송강속집과 광주목지에 실려 있다.정철의 4대손 정수환(鄭守環)이 김윤제의 후손으로부터 사들여 현재 연일정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2020-05-16 | NO.187
  • 벽진정 碧津亭
    서구 서창동 (벽진마을)벽진碧津은 고려 때 벽진부곡이 있었으며 바닷물이 들어왔고 나루터로 운영된 곳이였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국립호텔격인 극락원極樂院이 있었던 일대는 김정호의 대동지지에는 벽진碧津이라 했다. 벽진마을은 300여년전 박학순이 광주에서 농경지를 찾아 이곳에 옮겨와 터를 잡았다고 전한다.회재 박광옥의 저서 회재집에는 “1602년 광주 벽진촌에 벽진서원碧津書院을 세웠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은 의열사義烈祠 사당을 뒤로 하고 벽진서원이 을씨년스럽게 폐가로 남았다. 규모는 외삼문과 정면 4칸에 측면 2칸으로 좌우에 1칸씩 재실과 정 내부는 현판이나 그 어떠한 흔적은 없다.사우가 되기 전에는 임진왜란 때 회재 박광옥 의병장이 김덕홍, 김덕령, 김덕보 3형제와 충정공 오두인 등과 함께 시국을 논하며 시주와 함께 즐겼던 곳이다. 누군가 이곳을 벽진정이라 부른다.벽진정이 있는 사월산에는 일제시대 때 방공호가 5곳이 있었다는 등의 묵은 사연들이 많이 있었다. 벽진부곡이 있던 서창은 조선 말기까지 수운선이 드나들며 세금으로 거둔 세곡을 영산포조창이나 영광조창으로 보내던 나루터였다. 광주읍성~벽진마을~서창마을~영산강의 벽진(극락진)~청암역~나주로 연결된다. 벽진은 고려~조선시기에 중요한 큰 나루였다.  
    2020-03-12 | NO.186
  • 봉산정 鳳山亭
    근세 초 기의 한학자 고재현(高在鉉, 1885 ~ 1967)이 지어 학문을 강구하며 후학을 가르치는 강학터로 사용했다.그는 고재현은 초명이 재봉(在鳳)이며, 자는 치구(致球)이고, 호는 지산(志山)이다. 무안읍 용월리 토동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의 후손으로 민재(敏齋) 박임상에게 나아가 공부하였다. 우국지사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거의(擧義)에 참여했다.한일합방으로 종사(宗社)가 무너진 뒤에는 왜적을 일찍이 제거하지 못함을 길게 탄식하고, 강가에서 낚시하며 그 울분을 풀었다. 무안에서도 지산정사(志山自記, 志山記,) 서당을 개설하여 후진양성에 힘썼다.고종과 순종이 앞뒤로 서거하자 북망하여 거애하고 3년 동안 상복을 입었다. 유학자로서의 강직한 삶을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고재현은 시문에 능했으며 보평산시회(寶平山詩會), 감방산시회(坎方山詩會), 유산정시회(遊山亭詩會,題良) 과정시회(瓜亭六六契詩會)등의 시회에 참여하고 많은 시문을 남겼다. 함평인 이창헌李昌憲을 송별하고 봉산정에서 독서한다는 오언율시가 <지산유고>에 있는 데 이창헌은 광주 서구 용두동 봉황산 현와 고광선의 엄이재 중건기 비문과 북구 월출동 해산마을의 덕암허공효행비(德巖許公孝行碑) 글씨를 썼다.개인문집 <지산유고志山遺稿>는 서는 임창순이 썼고, 간행사를 고영창이 썼으며, 발은 없다. 그는 김문옥과 가깝게 지냈으며 호은정(題湖隱亭守押海尹柱逸), 江遊, 무안 평천정(題朴敏齋先生平川亭), 효우정(孝友亭崔炳文), 송계정(題松溪亭), 목포 유달산( 三月三日儒達山詩), 題花溪處士柳渟基講習所, 次花塢堂道龍洞, 애절당(次愛節堂朴錫元), 삼체당(次三棣堂鄭龍熙) 盤谷齊叙懷九首, 두남당(題斗南堂朴士浩氏), 광주 학수당(次光州鶴壽堂), 춘원정(次春園亭黃龍金源益), 용파정(次龍坡亭黃龍金源得), 금동서재(丙午二月日至金洞書齋便記), 평호당(三乎堂記), 랑월재(朗月齋記), 무안 애백당(愛栢堂記) 삼호정(題三乎亭, 三乎亭上樑文) 영암 호은정(湖隱亭) 무안 몽탄 연포당(淵圃堂) 무안 영화정(詠花亭與諸生暢和) 송계정(松溪亭) 유산정(遊山亭) 광주 학수당(鶴壽堂) 봉산정(送李昌憲讀光州鳳山亭) 광주 관가정(光州觀稼亭) 춘원정(春園亭) 남오정(次南吾亭) 취성재(聚星齋戒諸生) 삼체당(三棣堂) 모암재(題慕岩齊) 등에서 읊은 시가 문집 <지산유고(志山遺稿)>에 있다.
    2020-08-28 | NO.185
  • 봉산정사 鳳山精舍 엄이재 掩耳齋
    서구 용두동 산 79번지   서구 용두동 봉학마을 깊숙한 꽤 높은 곳 봉황산 가파른 중턱에는 한 지식인이 시대적 아픔에 어쩌지 못하고 읍궁암泣弓菴에서 울분을 삭히며 세상을 마감했던 유서 깊은 흔적이 있다.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서쪽 30리의 거리인 봉황산에 위치해 있다.주변에 큰 은행나무가 자리하고 봉산정사는 을사조약(1905년) 이후 현와 고광선(1855~1934)이 강학하던 장소이다. 엄이재는 그가 주로 기거하며 책을 읽고 글을 썼던 곳이다. 막돌허튼층쌓기의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원기둥을 세운 정면 4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이다. 문인 수는 650명에 이른다. 고광선은 을사조약과 경술국치를 당한데 이어 무오년에 고종이 승하하자 어지러운 세상에 그만 ‘귀를 닫아버리고[掩耳]’ 싶었다고 해서 ‘가리다, 숨기다’의 엄(掩)자를 쓴 엄이재 띠집을 짓는다. 엄이재 현판은 엄이재 앞에 고직사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에 걸려 있는데, 1916년 봄에 사촌인 고광은高光殷이 쓴 것이다.주변 숲속에 읍궁암泣弓菴이 있다, 국권회복을 획책하다가 슬픔 속에 가신 고종 임금을 몹시 흠모하며 큰 바위에 읍궁암이라는 글씨를 새겨놓고 고종임금의 능묘로 삼아 조석으로 그 앞에 꿇어앉아 곡하기를 3년, 그 눈물자국은 파란 이끼가 되어 지금도 선연히 남아있다는 일화가 전할 정도이다. 사연이야 어찌 되었든 그가 지은 엄이재원운掩耳齋原韻 글에서 그의 고뇌가 서려 있다. 고광선은 고정헌高廷憲의 후손이며 고박주高璞柱의 아들로 남구 압촌동 복촌復村 출신이다. 1864년에 부모를 12세에 일찍 여의고 덕암 나도규와 노사 기정진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덕암 나도규 문하에서는 제자백가를 두루 섭렵하였다. 노사 기정진의 문하에 들어가 천인성명天人性命의 깊은 뜻과 일용日用의 예절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의심나는 곳이 있으면 부지런히 질문하여 깨우치는데 열의를 보여 기정진은 기특하게 여기고 성실하게 지도하였다. 성격은 온유하였으나 옳지 않은 것을 보면 용감하게 고쳤으므로 이를 장하게 여겼다 한다.1894년 동학란이 일어났을 때 그는 그 어지러움을 심히 걱정하며 기정진과 서로 협력하여 거동을 바르게 하여 주변 고을이 난리에 휩쓸리지 아니하고 안전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를 학덕과 인품을 원근의 학도가 책을 들고 막힌 곳을 물으러 운집하므로 고광선은 부득이 찾아온 사람을 물리치지 못하고 이에 응하니, 그 가르침을 입은 자가 매우 많았다. 그의 문인들은 고광선의 유풍을 추모하여 엄이재 옆에 영당인 봉산정사를 건립하여 제향해 오다가 1964년 향교 유림들의 논의로 봉산사鳳山祠로 이름을 고치고 그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경내에는 사당, 봉산사 묘정비, 추모제 유허비, 솟을대문인 상의문이 있다. 사당은 기단 위에 정평주초를 쌓아 지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건물로서 골기와 맞배지붕이고 정면은 단청으로 단장하였다. 그의 사후 1934년에 후손들에 의해 유지되었다. 하지만 엄이재는 한 보살절로 운영되고 있고 봉산사는 허물어지기 직전일 정도로 훼손되어 역사적인 장소가 잊혀져가고 있다. 그의 행적은 16권은 시 247편, 문 1,439편 총 1,686편이나 되는 방대한 작품이 실려 있는 저서 <현와유고弦窩遺稿>가 있다.
    2020-03-12 | NO.184
  • 봉생정 鳳笙亭
    동구 충장로 2가   광주읍성 내 황화루 동쪽 지금의 동구 충장로2가에 있었다는 봉생정, 1760년에 편찬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금폐今廢라 했고 《광주읍지》(1879, 1924)에도 지금은 없어졌다고 했다.황화루의 동쪽에 있던 누정인 봉생정은 《동국여지지》에는 나오지만 《여지도서》에는 ‘지금 없어졌다’고 한 것으로 보아 숙종대~영조대의 어느 사이에 없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여러 정황을 살펴보면 공복루와 함께 1451년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영의정에 오른 동산 정창손의 시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건축 시기는 조선 중기로 올라간다. 그는 화순 능주에 위치한 <봉서루鳳棲樓>에도 그가 지은 시가 전하고 있어 같은 시기에 이곳을 방문했을 것으로 추정된다.당대 최고 명가로 태어나 박학다식한 지식인이자 정치 반항아 자유분방한 연극같은 삶을 살다간 허균이 봉생정에 올라 그윽한 그 다운 회포를 풀어낸다.   鳳笙亭畔獨徘徊 봉생정 정자 가에 외로이 서성대니宋玉無心賦楚臺 송옥은 고당부高唐賦를 지을 생각 없었어라山鳥似迎佳客語 산새는 손을 맞아 이야기 나누자는 듯野梅如待故人來 들매화는 벗님 오길 기다리는 것 같네愁侵衰鬢千莖雪 시든 귀밑 시름 스며 터럭마다 눈이라면恨結柔腸一寸灰 유한 창자 한이 맺혀 한치 마음 재가 됐네公館漏闌廊月黑 공관에 밤이 늦어 달빛이 어슴푸레曲欄深閤影枚枚 굽은 난간 깊은 문은 그림자 아른거리네
    2020-03-12 | NO.183
  • 봉암대
    서구 용두동 (봉학마을)서강처사瑞岡處士 팔봉八峰 한기와韓基窩가 지었다고 한다. 그는 전남 영광군 홍농면 칠곡리 칠암, 홍농산 홍문동 홍문폭포虹門瀑布가 있는 곳에 홍문취헌虹門翠軒에서 송사 기우만 등과 학문을 논하며 지냈던 인물로 구한말 지식인이었다.봉암대鳳巖臺, 한기와가 읊은 시만 전하고 있다.높은 산등성이에서 읊조리는 나의 생각이여봉암대 위의 바위는 높고도 높네아침 해 선명한 별 오동에 올라 환하고단산 굴의 상서로운 빛은 땅 속의 숨은 것을 열어 놓았네.세상에는 할 수 없어 몸이 출몰을 하고누가 능히 옛날을 생각해 도리의 말을 하는가동방東方에 군자의 시기가 늦으니인조仁鳥가 온다면 반갑게 보리라. 시에서 인조仁鳥는 어진새[仁鳥]라고 불리며 상서로운 새이다. 덕치德治로 백성을 교화시켜 왕도정치를 실현하였을 때 나타나는 새들의 왕이라고 한다. 유가 사대부로서의 자세와 사명의식에 충실한 강직한 선비의 자세가 묻어있다.
    2018-05-23 | NO.182
  • 봉황정
    서구 사동길 118(서창동)서구 서창동 절골마을 봉산재에서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절골마을에 터를 잡았던 박지흥朴智興(1411~1488)의 추원재追遠齋와 박정朴禎(1467~1498)의 추모재追慕齋가 있다. 그 앞은 마을 정비사업으로 쉼터를 만들었는데 새로 지은 정자 이름이 봉황정鳳凰亭이다.아마도 박지흥과 박정, 부자간에 한 번씩 노닐다 담소를 나누며 즐기다 가라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이곳은 빛고을산들길이 지나가는 곳이다.
    2018-05-23 | NO.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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