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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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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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송재 晩松齋 만산재晩山齋
    남구 이장동 (황산마을) 만송재는 외당畏堂 고한주高漢柱(1871~1959)가 살던 뒷산에 지어 후학을 가르쳤던 서당이다. 나중에 만산재晩山齋로 개명했다. 고한주는 광주 장산리(이장동 황산마을)에서 태어났다. 간재 전우와 연재 송병선 밑에서 공부하여 성리학의 종지를 알고 이치를 깨우쳐 실천했다.그는 이理와 기氣는 성리와 심기心氣로 정론을 삼아야 하며 이를 존중하고 기를 검찰하며 의제는 사훈을 엄수하고 법복이 아니면 입지 않고 성현서가 아니면 보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정자를 지으니 많은 문생들이 운집하였다 한다. 그러나 승명하지 않고 자송하기를 "입신하여 부모를 현양치 못할지언정 소절인 이것을 못하면 어찌 자식의 도리리요"하고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는 1959년 8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외당유고畏堂遺稿>는 1960년 그의 아들 고광준이 유고를 모아 간행하였는데 권순명이 서를 썼다. 그 중에서 담양 소쇄원을 다녀 온 기록 가운데 일부는 다음과 같다.   “만약 소쇄처사 양공이 대명의 시절을 당했더라면 오히려 절개로 이름나고 도의를 쇄연灑然히 즐기고, 숙연蕭然한 환도環堵의 취향이 있었을 것이다. 우암 선생이 특별히 ‘소쇄처사양공지려’라는 여덟의 큰 글자로서 쓴 것이 지금에 이르도록 담장의 사이에 밝게 빛나고 있어, 사람으로 하여금 이 집에 들어오는 자는 더욱 흠복하고 공경함이 더해서 어찌나 열렬하던지 더욱 빛이 난다.”
    2020-03-12 | NO.210
  • 만오정(晩悟亭)2 -임리정
    광산구 산월동   북구 용두동 거진마을에 거주하는 최희순(崔喜順)이 거처한 공간이다. 원래 임리정(臨履亭)은 광산구 산월동 월봉마을 입구의 안산 정상에 있었다. 정자 주인 최희순이 읊은 임리정 원운(原韻)의 시이다.임리정 높은 곳에 저자 티끌 끊어지니서식(棲息)한 이내 몸이 한없이 새롭도다.오동(梧桐)의 밝은 달빛 값없이 바라보고드리운 성사(成絲) 버들 봄철을 알려주네.농담(農談)을 나누면서 술잔을 기울이고바둑판 앞에 두고 시린(詩隣)을 맞았도다.연빙(淵氷)의 마음으로 성훈(聖訓)을 명심하여이 사람 뜻에 따라 임리(臨履)라 하였도다. 송시열의 9세손 은진恩津 송병직宋秉稷(1864~1921)의 임리정기(臨履亭記)에 "옛날의 군자(君子)가 항상 공경한 마음으로 남들이 듣지도 않고 보지도 않는 홀로 있을 때의 언행(言行)을 삼가 두려워하였고 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싹트려는 사심(私心)의 기미를 미리 점검하여 사전에 예방하는 독실한 수양을 쌓았다."며 적은 것으로 보아 이 정자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여기서 리(履)는 밟을 리, 신 리로 살얼음을 밟는 듯(如履薄氷)하다는 데서 극히 위엄한 일, 또는 매사에 조심하는 것을 일컫다.송병직(宋秉稷)의 임리정기(臨履亭記)에 따르면 “그의 아들 최재진(崔在鎭)이 어버이의 뜻을 받들기 위해 일부러 명승의 이곳을 골라 이 정자를 지었다”라고 하였다. 이 정자의 주인은 최희순(崔喜順)이라고 하지만 실질적인 건립자는 그의 아들 최재진(崔在鎭)이다.여기서 임리는 깊은 연못에 다달으고 엷은 얼음을 밟는 것처럼 항시 행동거지를 삼가한다는 뜻이요, 만오는 이 세상의 참된 이치를 늦게서야 깨달았다는 후회(後悔)의 뜻이라고 했다.이 정자에 대한 문헌상의 기록을 보면 임리, 만오 두 정자가 별도로 존재한 것처럼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한때 월봉마을의 부농인 천봉안(千鳳安)에게 매도되어 그의 소유로 이전된 뒤 일부 구조를 바꾸어 그 이름을 만오정(晩悟亭)로 고치어 다른 기록에는 만오정이라 한다. 만오(晩悟)로 고치어 부르다가 1961년에 건물 자체가 퇴락되어 그의 모습을 잃게 되었다. 전후 4개, 좌우 3개의 주춧돌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정면 3칸(三間), 측면 2칸(二間)의 건물이었다.이 정자의 창건연대를 관련 기록의 내용으로 보아 1880년대가 아닌지 추정된다. 좌우후면의 토사유입 방지를 위한 별도의 석축방벽(石築防壁)이 있어 당시의 완고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 정자가 다른 정자와 달리 높은 산정에 위치해 있어, 전후좌우가 모두 트여있고 송백수림(松栢樹林)이 주위를 둘러 그의 전망이 매우 아름답다.  
    2020-03-12 | NO.209
  • 만오정1 晩悟亭
    남구 노대동 473   만오 윤하검(1813~1905)을 위해 1902년 그의 두 아들인 희진喜鎭, 희성喜聖 형제가 지은 정자이다.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남쪽 10리 거리에 있다. 윤하검은 집이 가난했지만 사람을 좋아하는 성품 때문에 항시 시인 묵객들이 그의 집을 찾곤 했다. 윤하검은 종이품의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랐다. 그의 향시과지를 비롯한 사명교지가 남아 있다. 그의 장남인 희진의 통덕랑 교지가 있고, 그의 차자인 희성은 우국지사 송사 기우만의 문인으로 학덕이 높았다.현재 누정은 원 위치에서 옮겨온 것으로 윤하검의 나이 90인 1902년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 누정의 구조는 도리석초, 도리기둥의 골기와 팔작지붕으로 앞면 3칸 옆면 2칸의 규모를 갖추고 있고 중앙의 한 칸 거실이 있으며 관자마루로 되어 있다.1978년 후손에 의해 한 차례 보수가 이루어졌을 뿐이며, 현재는 보존상태가 좋지 않아 관리대책 마련이 필요하다. 기록에는 송사 기우만의 만오정기, 윤하검의 제영, 녹천 정해만의 차운, 승지 송간의 차운 등 시판 7점이 있었다다. 현재 현판 1점과 주련 7점만 남아 있다. 주련이 원래 8점으로 추정되는데 기둥 하나에 주련이 빠져 있다.광산구 산월동에 있는 같은 이름의 만오정은 원래 임리정이었다.석음 박노술(1851~ 1917)의 시 한 수를 만오정에서 만날 수 있다. 衡門一步小溪東 일보(一步)정도 걸어가는 작은 시내 동쪽에選勝尋幽結搆同 좋은 장소 물색하여 한 정자를 세웠도다. 簷角影回南極宿 첨각 위의 그림자에 밝은 별이 반짝이니枕邊夢覺北窓風 침변가에 꿈을 꾸다 찬 바람에 깨었도다. 何須靈境求諸外 밖에 있는 좋은 영경(靈境) 무엇하러 구할손가自是眞天在此中 하늘나라 참이치가 이 가운데 멈췄도다. 莫道惺惺今己晩 오늘날의 깨달음을 늦었다고 하지마오靑春玉樹正林叢 푸른 봄의 옥수(玉樹)나무 한 없이 총총하네.
    2020-03-12 | NO.208
  • 만전당
    서구 치평동만전당晩全堂은 서구 치평동과 덕흥동에 걸쳐 있는 지역인 극락면 평촌리에 평강平康 채두영蔡斗永이 지어 지냈던 정자이다. 『조선호남지』(1935) 권2에 실려 있다. 채두영의 아들 채동연蔡東延(1825~1883)은 1879년 생원시에 합격했고 전북 군산의 임피臨陂에서 살았다.평강 채씨는 강원도 평강군을 본관으로 하고 있다.
    2018-05-23 | NO.207
  • 만절정 晩節亭
    동구 학동   사암 박순의 <사암집> 권7에 광주 남문밖에 있는 만절정에서 백록 신응시가 지은 시가 있다[題晩節亭爲思庵朴相公作-在光州南門外 辛白麓應時]. 신응시는 전라도관찰사를 지내고 1580년 광주목사로 재직 중이었다. 광주출신 명 재상 사암 박순을 만나 만절정에서 그를 위해 읊은 시 '題晩節亭'이다. 一曲溪山萬勝專 한 구비의 시내와 산은 온갖 경치를 차지하였고繞亭松樹政堪憐 정자를 둘러싼 소나무는 정녕 사랑스럽다.千章擁翠層雲合 빽빽이 들어선 푸른 나무는 높은 구름에 닿아 있고十里聞聲爽籟傳 십리 밖에서 소리 들어도 상쾌한 가락 전한다.不獨大材棟樑用 큰 재목으로 동량에 쓰일 뿐만 아니오須看正色雪霜前 눈과 서리 앞에서 정색하는 가를 보아라相公佳篇寧無意 상공의 아름다운 시는 어찌 뜻이 없으랴取比他年晩節全 훗날 만절의 온전함을 비유하였네 /在光州南門外 辛白麓應時 思菴集 卷7그렁가하면 신응시의 <白麓遺稿> 칠언률七言律편에 같은 시가 '晩節亭。爲思庵朴相公作。亭在光山'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사암 박순을 해 이 시를 지었고, 만절정은 광산에 있다는 장소를 알려주고 있다. 이 때의 광산은 오늘의 광산구가 아니라 동구 광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남문은 현재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안에 있었으므로 만절정은 무등산 아래 동구 학동의 증심사천 인근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사암 박순은 중후한 인품과 학문적 온축‚ 탁월한 조정 능력을 갖춘 인물로 사림士林 상하의 추앙을 받았던 신응시의 우상이었다. 만절은 만년의 절조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만절정은 박순과 관련성이 있어 보인다.
    2020-03-12 | NO.206
  • 만취당 晩就堂
    북구 일곡동 (일동마을)   만취당은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북쪽 15리에 있다. 만취(晩翠)는 논어 자한(子罕) 에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彫也” 는 것처럼 의지를 굳게 가져 어려움에도 변하지 않는다는 세한(歲寒)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곤궁한 처지에서도 변치 않는 군자(君子)의 지조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일동日洞마을에 이종수李鍾洙가 지었다. 북구 일동택지로 45에 일동초등학교, 일동택지로 10에는 일동중학교가 있다.일곡은 본래는 큰 마을이라 하여 ‘한실’이라 부르다가 마을 이름을 한자로 바꾸면서 ‘一曲’이라 했다. 1792년까지는 一曲(일곡)이라 하였고, 1795년부터는 一谷(일곡)으로, 1801년에 日谷(일곡)이라 했다. 1957년에 광주시에 편입되었고,  2003년 7월 7일 일곡동 관할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20-03-12 | NO.205
  • 만취정1 晩翠亭 - 심원표
    광산구 본량본촌길 29(동호동 419)   만취정은 청송심씨 동족마을인 동호동 남동마을 입구에 있다. 2002년 광주시 문화재자료 26호이다. 남동마을 입구에는 만취정, 남동사, 동호사 등이 마을 앞 도로와 나란히 배열하여 지나는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만취정은 정남향을 바라보고 있다. 일제강점기인 1913년 만취 심원표(1853~1939)에 의해 건립되었다. 1973년 개와, 1978년 중수를 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기와 건물이다. 가운데 칸에 온돌방을 넣은 구조이다. 일제가 침략하자 심원표는 의병장 김준 전수용 심수택 등을 도왔다. 여러 행적으로 일제의 미움을 사 장성 및 광주 등지의 헌병대에 구인되어 많은 고초를 겪었다. 총포 사살의 위협에도 조금도 두려워함이 없는 자세를 견지하였다. 그래서 절사節士라고 부른다. 일본의 은사금을 단호히 거절하고 만년에 이 정자를 지어 만취라 하였다. 그는 만취정소서晩翠亭小序에 옛날 정자의 이름을 만대晩對라 하고 거실의 이름을 남취攬翠라 했다. 그의 경우는 ‘만’과 ‘취’만을 취해 ‘만취晩翠’라 했다. 이는 그의 씨족이 절의의 그늘을 갖고 있어 소나무의 절개를 본받아 만년을 보내겠다는 것이었다.그는 나이 이십 이전에 노사 기정진을 찾아가 그의 문하에서 위인의 도를 배웠고, 심석재 송병순으로부터 존양의 의리를 배웠다. 정자 안에는 송사 기우만, 난와 오계수, 후석 오준선, 석음 박노술 등이 심원표의 덕행을 찬미한 시문 등 17점이 걸려 있다.정자의 현판은 해강 김규진, 석촌 윤용구의 정면에 걸려 있고 심석재 송병순의 독지헌篤志軒이라는 별도의 편액이 오른쪽 벽 위에 있으며, 또 계봉정사桂峯精舍라는 다른 이름이 문헌상으로 남아 있다.
    2020-03-12 | NO.204
  • 만취정2 晩翠亭- 김용희
    서구 매월동 (동산부락)만취정(晩翠亭)은 1925년에 김용희(金容希, 1860.5.27~1927.7.21)가 매월동 화개산 기슭에 처소로 지었다. 김용희의 호는 송암(松菴) 또는 만취정이다. 유고가 2권 있다고 족보에 기록되어 있으나 전해지지 않는다. 현와 고광선이 행장을 썼다. 삽봉 김세근 장군의 후손이다.만취정은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서쪽 20리에 있다. 『조선호남지』(1935)에는 서창면 동산리라고 했다. 이 마을은 지금의 서광주역이 들어서면서 해체되었고 정자는 그 이전에 사라졌다.김용희가 풍욕자적(風浴自適)하며 지내던 정자이다. 후석 오준선이 기문을 썼고 현와 고광선이 상량문을 썼다. 주인 김용희, 후석 오준선과 만초 이복규의 시가 있다.김용희는 1890년 봄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1836~1905)의 원계정사( 遠溪精舍)에서 학문을 배웠고(송병선은 1855년 옥천(현 영동)에 집을 짓고 이주하였고 원계정사에서 강학활동을 했다),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의 제자로 면암이 1903년 거의했을 때 병으로 참여하지 못해 원통해 하며 두문 불출하면서 만취정에서 독서와 학문연구에만 정진했다. 만취정, 논어의 지知인仁용勇, 즉 지혜로운 사람은 유혹에 넘어가지 아니하고 마음이 어진 사람은 근심하지 아니하며 용기 있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아니 한다[知者不惑 仁者不憂勇者不懼]는 실천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김용희는 정자에 지은 시에서 만취晩翠라는 이름은 ‘송백(松栢 소나무와 오동나무)이 늘 푸르듯이 절조가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뜻을 이렇게 읊었다.동산복축가첩지 東山卜築可捷遲 동산 마을에 정자 지어 이곳에 거처하며정식송청수호지 庭植松靑受護持 뜰 앞에 솔을 심어 정성껏 돌봤다네임하횡금문숙처 林下橫琴聞肅處 거문고 옆에 끼고 한가롭고 맑은 곳이요석두고침취면시 石頭高枕醉眠時 돌머리 베개 삼아 자우르는 그때로다.노룡굴곡운장체 老龍屈曲雲藏砌 늙은 용이 휘몰아치는 구름 섬돌 가에 숨고백학편표설만지 白鶴翩翲雪滿枝 흰 학이 나비처럼 날아 눈 쌓인 가지에 앉도다.면사아손성만달 勉使兒孫成晩達 후손에게 경계하여 늘그막에 명성 얻으라는영언춘색불위이 永言春色不萎移 봄빛을 길이 지켜 변함이 없으리라.시에서 당시의 일제강점기라는 격동기에 겪어야 할 후손들에게 ‘만달晩達’이라는 단어를 썼다. 그것은 육친의 덕이 없어, 또는 자신의 부덕으로 나라를 잃어 고난의 길을 걸어야 하고, 노력을 엄청나게 해도 돌아오는 공덕과 대가는 별로 없이 고생이 많다는 이야기다. 특히 사회적 관계에서 장애가 많아 좌절과 불운이 연속되며 안정되지 못한 생활을 영위해 나아가야 할 후손들을 걱정하고 늘그막에 벼슬이나 명성과 인망이 높아지길 바란다는 뜻을 담고 있다.* 수정 2023.07.19
    2018-05-23 | NO.203
  • 만치정(晩峙亭)
    빛고을 광주(光州)의 진산(鎭山)이자 모산(母山)으로 불리는 무등산(無等山·1187m), 광주 무등산에서 원효사편에서 오르는 길에 늦재삼거리 쉼터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옛날 나무꾼들이 나무를 하고 해질 무렵 하산길에 풀피리 불며 쉬어가는 장소라 하여 '늦재' 라 불렸는데 ​이 뜻을 한자로 새겨 늦을 만(晩) 에 언덕 치(峙) 로 이름하여 '만치정(晩峙亭)' 이라고 이름하였다. '나무꾼들의 풀피리 소리(晩峙草笛 만치초적)'에 늦재쉼터(만치정晩峙亭)은 원효사~서석대 사이의 완만한 등산로 수준으로 서석대와 공군 부대가는 길(4.12㎞)과 바람재 위 전망대로 가는 길로 나눠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옛날 나뭇꾼들이 땔깜이나 숯을 나르고, 군인들이 보급품을 지고 날랐던 길로 오래전 부터 휴식터로 정자가 있었다는 개연성을 충분해 보인다. 이곳은 1980년 이후 사용되지 않다가 최근에 개방되어 많은 등산객들이 다녀가는 명소로 자리했다.  
    2020-03-12 | NO.202
  • 매산재(梅山齋)
    광산구  본량동에 송용만(宋用萬, 1888~1962)이 지어 학문을 강구하고 후학을 가르쳤던 곳이다. 매산재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고 1914년 이전에 지어졌다고 확인되고 있다.그는 광산군(光山郡) 본량면(本良面) 매동리(梅洞里) 집에서 태어났다. 자는 현중(賢仲), 호는 매산(梅山)이며, 본관은 여산이다. 아버지는 경(坰)이고, 어머니는 진주 강씨(姜氏) 익상(翊尙)의 딸이다.매동리는 1914년 나주군 본량면(本良面) 선동리가 되었다가 1949년 광산군(光山郡)에 편입되었다. 1988년 광산구가 신설되면서 광주직할시 광산구 선동이 되었으며, 1995년 광주광역시 광산구 선동이 되었다. 선동은 법정동으로 행정동인 본량동(本良洞) 관할하에 있다.
    2020-08-13 | NO.201
  • 명봉재 鳴鳳齋
    주의 북쪽 10리   광주읍지(1879, 1924)에는 주의 북쪽 10리에 있다. 1879년판은 신와 이복근이 지었다 했는데, 1924년판에는 국포國圃 이규서(李奎緖, 1734~1775)가 건립한 것으로 수정됐다. 이규서의 제영에는 명봉재를 이렇게 설명한다.   금琴과 서書를 좋아하는 늙은 나이 이내 몸이시냇가 서쪽 가운데에 띠집을 지었도다한가로운 이 암중에 무슨 일이 있을손가아름다운 밝은 달이 연못 위에 비쳤도다
    2020-03-12 | NO.200
  • 명수당 明水堂
    북구 북쪽 10리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북쪽 10리 거리에 있는 건물로 죽산안씨 20세인 명수明水 안정환安正煥(1843~1909)이 지었다. 오늘날 북구 일곡동이다.안정환의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덕유(德有)이다. 그가 정자에서 교차하는 만감으로 읊은 시에서 정자를 지은 이유를 알 수 있다.   명수라는 이 집에서 나의 만년 보내면서노래하고 시 읊으며 나의 뜻을 즐겼도다선비생황 영위하며 많은 일을 그르치고높은 책상 베개삼아 오만하게 누웠도다난초 향기 마루 위에 여러 아들 글을 읽고넓지 않은 좁은 뜰에 나무 그늘 넘쳤도다탁영탁족濯纓濯足 그 맘으로 나의 본분 지키면서명생동안 괴심愧心 없는 바른 생활 하였도다   정자에는 송사 기우만의 기문이 있고 주인 안정환의 원운이 있다. 1931년 간행된 기우만의 <송사문집松沙文集> 43권에 안정환의 묘표墓表 기록이 있다.   명수안공묘표明水安公墓表公諱正煥字德有號明水。安氏上祖文成公晦軒先生曾孫。有文惠公元衡。勳封竹城君。分貫竹山。雙淸堂勉。竹溪魯生。文章德業。幷負世重。生員孟孫。始居光州。荷谷忠達文科正郞。士林推行義。享羅山祠。文行科宦。爲南土名家。高祖喆胤。曾祖思行。考瑛壽。妣南平文氏父致達。公以從子後焉。處士泓壽。孺人洪州宋氏廷大女。本生考妣。公生憲宗癸卯。生而豐厚。身幹頎然。甫上學。不煩師敎。弗得弗措。竟以魯得。爲門戶計。早業功令。業精而不第。親沒過毁。禮亦無闕。遂斷進取意。敎授鄕里子弟。篤於人倫。不拘拘於詞章。是以從公遊者。皆循循雅飭。每花辰月夕。朋酒徜徉。詩騷遣懷。而隨得隨失。不爲傳後計。貲稍饒。喪葬昏嫁。周竆恤貧。不吝傾儲。雖至剝落而無悔也。享年六十七。卒己酉八月十日。葬所居鳳谷後乾坐。二夫人。坡平尹氏佑鎭女。育三女。錦城丁氏大杓女。育三男二女。男圭鎰,圭泰,圭鎭。崔相琇,朴箕錫,李昇憲,李玩相,李承春壻也。余與公追隨蓋舊。每見少年浮華輕薄。擧公而勖之。世益渝而公不顧留。吾誰擧似以厲薄俗。顯刻之託。曷可以老且病而辭諸。
    2020-03-12 | NO.199
  • 명암재 鳴巖齋
    명암재는 광주광역시의 남구 대촌동 관할 도금 · 칠석동과 나주시 남평읍 수원리 경계에 있는 죽령산(竹嶺山 184m)에 있는 십여 질이나 되는 큰 명암바위 밑에 김형이 지은 서실이다. 서실을 짓고 '巖巖忽自鳴因以爲名' 시를 지어 바위를 읊으니 바위가 문득 스스로 울기를 수일을 하다가 그쳐 명암이라 하였다 한다. 또 매일 글 읽는 소리가 꼭 '산이 궁궁(宮宮)하고 울음소리와 같다고 하여 사람들은 궁암(宮巖)이라 부를 만큼 많은 책을 암송했다.  그 학문으로 학행하여 이곳에서 수 많은 후진 양성에 전념했다. 신증 광주목지, 1899년(광무 3)에 편찬된 광주읍지(光州邑誌) 고적(古蹟)에 "鳴巖在州西四十里竹嶺山高十丈處士金迥作書室於其下賦詩詠巖巖忽自鳴因以爲名"이라고 적고 있다.명암(鳴巖) 김형(金逈, 1543~?)은 고경명(高敬命)의 문인으로 문장과 덕행이 뛰어나 사림들의 선망의 대상 이었는데 과거보는 일에 뜻을 두지 않고 고향에서 은둔 생활을 하며 지내니 명암처사(鳴巖處士)라 칭하였다. 죽령산에는 큰 고개란 의미로 한재>한댓재>대치가 되었으며, 대를 대나무 죽(竹)으로 바꿔 죽치>죽령(竹嶺)이 되었다. 향토지리지에는 “죽령산과 대치 일대에 신무왕 김우징이 지낸 왕자대王子坮가 있었고, 죽령산 서편 칠석(옻돌) 마을과 그 뒷등이 우리나라 지도처럼 보인다고 했다. 그의 학식은 해박했으며 시문에도 능했다. 고경명의 응제앵운應製鶯韻을 따라 글을 지었다. 이 시가 세상에 회자되어 사람들이 마치 벙어리(瘖)처럼 과묵하다 해서 '구필음(口必瘖)' 선생이라 하였다. 죽령산(竹嶺山)은 남평에서 광주로 넘는 1번 국도옆에 있다. 큰 고개란 의미로 한재>한댓재>대치가 되었으며, 대를 대나무 '죽(竹)'으로 바꿔 죽치>죽령(竹嶺)이 되었다. 향토 지리지에는 "죽령산과 대치 일대에 신무왕(神武王) 김우징(金祐徵, ?~839)이 지낸 왕자대(王子坮)가 있었고, 죽령산 서편 칠석(옻돌) 마을과 그 뒷등이 우리나라 지도처럼 보인다.
    2020-05-17 | NO.198
  • 모룡대 慕龍臺
    북구 일곡로 51번지   모룡대는 1934년 노종구가 부친 곡은 谷隱 노훈규(1844∼1915)의 유적을 기념키 위해 세운 정자이다. 광주읍지(1924) 효자란에 노훈규가 기록돼 있다. 한 평도 안 되는 초미니 정자에는 글이 새겨진 목판이 21개나 걸려있어 버거울 정도다.원래 모룡대가 있던 곳은 임금[龍]을 중심으로 여러 신하가 첨모瞻慕하는 형국이며, 바위가 벽처럼 솟아 높이를 자랑한 장소였다. 북향으로 대를 건립한 것과 ‘여견如見’을 옆면에 붙여 충과 효를 함께 했음을 읽을 수 있다. 1959년 중흥동에서 문을 연 살레시오중고등학교가 1989년에 옮겨왔다. 북구 일곡지구와 우치공원 사이 시내버스 종점 부근에 ‘모룡대길’이 있다. 지금의 모룡대길은 살레시오고와 숭일고 등이 있어 등하교 때 매우 복잡하다. 길을 확장하면서 모룡대가 옮겨졌다. 그러다보니 모룡대 바로 곁의 바위에 음각됐던 ‘곡은노공훈규지천谷隱盧公勳奎之阡’이라는 바위가 사라졌다. 모룡대가 옮겨진 장소에 이 글씨를 새긴 비석을 세워 그것을 대신했다.이종택과 기노선의 모룡대 기문이 있고 노석풍盧錫灃의 모룡대상량문이 있다. 많은 이들의 원운과 송파 고광수와 석사 기동설의 모룡대팔경시가 있어 당시의 풍광을 극찬하고 있다.  윤용구의 "모룡대 주인을 축하함"서석의 푸른 산은 하늘 높이 솟아있고극락강 맑은 물은 출렁이며 흘러가네.아담한 모룡대가 이곳에 세워지니산처럼 높은 기상 물처럼 오래 가길충성도 장하지만 효도도 극진하니거룩한 그 정신이 일월처럼 빛나도다.석실을 만들어 사첩을 보관하니백세의 오랜 세월 그 향기 전하리라
    2020-03-12 | NO.197
  • 몽교서당 夢橋書堂
    남구 칠석동 (양촌마을)   마을 뒷산에 검은 옻돌(漆石)이 많이 나왔고 동네 주위에 고인돌 7개가 놓여 있어 칠석(七石)이라는 이름을 가진 마을에 몽교서당이 있었다. 몽천 김선명(1656~1733)이 1719년에 진사에 합격한 뒤 학문에 정진하여 사서오경 천문 지리 역술 등 모두를 공부했다. 김선명은 칠석동 양촌마을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북헌 김춘택(1670~1717)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사액 사당인 포충사褒忠祠의 현판을 써서 사람들의 칭송이 많았다. 1696년에 흉년이 들어 생활이 곤궁한데 초가을에 모친상을 당하여 어려움을 겪을 때 이웃들도 돕기 어려운 시절에 이웃 마을의 친구가 도움을 주어 항상 친구에게 옛 고사를 생각하며 결초보은結草報恩 할 뜻을 가졌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 뒤 몽교서당을 짓고 친구인 나재홍(羅載弘)과 함께 지내기로 약속을 했다. 나주 나씨로 이판 나빈(羅彬)의 7세손이고, 나이례(羅以禮)의 아들이다.이곳에서 후학을 양성했는 데 문하에서 생원 임도任道, 진사 장필홍張必弘 등 수많은 지식인들을 배출했다. 마을 동쪽에 마을의 주산인 죽령산이 있고, 서쪽에 영산강의 지류인 대촌천이 흐르고 있어 근방에 위치했을 것으로 보인다.친구가 먼저 떠나 홀로 화단과 정원을 가꾸고 기거하면서 거문고를 벗 삼아 금명琴銘과 몽교록夢橋錄 등의 저서를 남겼다. 1712년 문정공 태현의 묘소를 참배한 일록(日錄)을 친필로 남겼다. 김문발의 부용정芙蓉亭, 서태환의 무송정撫松亭도 마을에 있다.
    2020-03-12 | NO.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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