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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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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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강정 西江亭
    광산구 어룡동 (호송마을)   어룡동은 2백여년전 박뫼마을에 살던 제주양씨 일부가 옮겨와 정착 개촌했다. 이후 죽산박씨가 입촌하여 지금에 이르고 속칭 ‘개솔’이라고 한다. 인가가 접하는 지점에는 좌우 두 곳에 정자가 있다. 두 곳 모두 서강정西江亭이라 부른다. 오른편 서강정은 2005년에, 왼편 서강정은 1918년 이전에 지어진 정자로 추측된다. 왼편의 서강정은 아예 콘크리트 구조물로 다시 지었다. 정자 옆으로 물길이 있고 고목 아래 자리하고 있어 누가 봐도 마을민들의 소통의 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오른편 정자의 현판은 ‘무오년戊午年 정월正月 원단元旦 소당素堂’이 썼다. 1918년 이전에 지어졌을 것으로 보인다.서강西江이라는 의미를 담기에 아울린다. 마을 뒷편 동쪽에는 어등산이 있고 앞에 서편에는 황룡강이 흐르고 있어 이렇게 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대는 일제강점기 때 선암 일대에 나루터가 있었고 돛단배가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목포 앞바다까지 운행되었다.조선 중기의 문신 장유張維(1587∼1638)가 서강에서 노닐며 읊은 시가 일대의 분위기와 어울렸다.   寒潮欲落暮雲低 차가운 조수가 빠지는 저녁 구름 낮게 드리워진 때客散樽空月色凄 손님들 흩어지고 남은 빈 술잔 달빛만 처연히 비추네正是騷人腸斷處 그야말로 시인의 창자 끊어지는 때에綠蘋芳草滿長堤 개구리밥에 향초들 긴 둑에 가득하네   蘋 빈
    2020-03-13 | NO.165
  • 서루 書樓
    광산구 풍영정길 21   광산구 신창동 선창산과 극락강이 마주치는 강변 일대에는 무수한 정자군이 있었다. 대표적인 정자가 1560년 승문원承文院 판교를 끝으로 관직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온 칠계 김언거가 지은 풍영정이다.그의 6세손 김이려金以呂(1633~?)는 서루書樓를 지었다. 서루에 시를 남긴 사람은 朴潢, 尹絳, 金弘錫, 尹履之, 金時粲, 尹順之, 尹坵, 宋光拭, 金灝, 申景洛, 韓佑一, 韓以明, 宋錫範, 申景淇, 姜絪, 金得元, 南翧, 崔壽錫, 李溟, 金道淵, 李謙著, 金鎭商, 李泳, 柳景深 등이 있다.     翧 翧
    2020-03-13 | NO.164
  • 서벽암 棲碧菴?
    옛 본량면 원당리, 광산구 왕동(원당)지역에 난와難窩 오계수吳繼洙가 지어 강학했고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이 기문을 쓴 정자가 있었다.난와 오계수(1843∼1915)는 유학자이며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이며 항일지사이다. 본관은 나주. 자는 중함重涵, 호는 난와難窩. 아버지는 갑선甲善이며, 어머니는 나주 정시혁鄭時爀의 딸이다. 그는 이기론理氣論에 있어 이理는 본성本性이고, 기氣는 기형器形으로, 둘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표리와 같이 불리부잡不離不雜한 하나라는 일물론一物論을 주장하였다. 저서로는 <난와유고難窩遺稿> 17권이 있다.
    2020-03-13 | NO.163
  • 서은정 瑞隱亭
    북구 망월동   서瑞는 상서롭다는 뜻을 갖고 있다. 서은정瑞隱亭은 박윤하朴潤夏가 북구 망월동에 지어 지냈으나 사라지고 없다. 조선환여승람(1935)에 전하고 있다. 1904년 4월 6일 성균관박사로 임명되었다가 4월 9일 의원면직된 박윤하朴潤夏가 동일 인물 여부는 검토가 필요하다.  
    2020-03-13 | NO.162
  • 서은정사 瑞隱精舍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헌종 12) ~ 1916)이 쓴 서은정사기(瑞隱精舍記) 송사집(1931) 권18에 전하고 있다. 瑞隱精舍記  "有不隱。隱則吾必曰瑞石乎。瑞石爲山。南服之鎭。中立而不倚。如巨人長德。咡詔生徒。是以或出或處之君子。環山輩出。蓋所謂地靈人傑者也。北馳一支。回抱作區。范氏世葬而世居。衣冠十世。至今讀聖賢而談仁義。佖植其一也。就先壟下。構數椽爲讀書之室。扁以瑞隱精舍。蓋士不得於朝則山林。非必屑屑於隱爾。而見今世變罔極。入耳觸目。皆不欲見不欲聞。一隱之外。更無餘法。君訢然樂而忘世。若將終身。然世無常亂。如雨而必晴。夜而必朝。他日明天子在上。可以出而仕。則必有倚門而歌招隱者。君猶樂吾瑞隱而無幡然改圖者乎。君逡巡而謝曰。今日視可隱而隱爾。其他非吾所知也。遂記問答之語。以爲他日一登之先路云爾。"松沙先生文集卷之十八
    2020-08-10 | NO.161
  • 서창루 세동각 세하당
    서구 눌재로 420(세하동)1998년 조성된 기존의 서창향토문화마을이 2017년에 정비사업을 통해 서창한옥문화관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내부의 한옥 건물에 대하여 정인서 서구문화원장의 제안으로 지역의 명칭을 따라 건물 이름과 방 이름을 정하여 생명을 갖도록 했다.서창루西倉樓는 서창지역이 옛 세곡창고였다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이고, 세동각細洞閣은 삽봉 김세근 장군이 이 마을로 들어와 살았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며, 세하당細荷堂은 세하동 마을 명칭에서 가져왔다.한옥문화관 내부에는 방마다 박상, 박순, 박광옥, 박호련, 김세근의 이름을 붙여 서창지역의 역사적 이름들을 기억하도록 했다. 문화관의 두 개의 출입문도 하나는 공자의 수신편에 나오는 첫 구절인 격물이 이상적인 정치의 첫 단계로서 사물에 대한 올바른 가치관을 확립하는 의미를 가진 격물문格物門, 다른 하나는 논어의 첫 편인 학이편은 배움의 기쁨을 말하고 있어 세상을 바르게 보고 바르게 판단하는 배움을 이야기하는 학이문學而門으로 지었다. 이곳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옛 문화와 정신을 배울 수 있도록 했다.
    2018-05-23 | NO.160
  • 서헌(西軒)
    광주읍성내 서헌(西軒)은 수령 가족들이 생활하는 지방관아의 안채를 의미하며, 내아(內衙) 또는 내동헌(內東軒)이라고도 한다. 이름처럼 보통 동헌의 반대편에 위치해 서헌(西軒)이라고 부른다. 서헌은 일반적으로 조선 상류층의 살림집과 비슷한 형태였다. 광주 서헌과 관련한 기록은 조선 전기의 대표적 명신 보한재(保閑齋) 신숙주(申叔舟, 1417~ 14756)의 시 ‘광주 서헌에서’(題光州西軒) 시에서 원님이 동년배라고 알리고 있다.   西軒舊湫隘  서헌(西軒)이 오래되어 낡고 좁은데制度今奐然  제도는 지금도 빛나는구나.鄕人多戚屬  향인은 대부분 친척들이고城主況同年  원님이 하물며 동년배라네.   政理無前日  정사 다스림에 예전의 경험 없으나循良比昔賢  좋은 전례 따르니 옛 현인(賢人)에 비견되네.歸來記異事  돌아가서 특이한 일을 기록하려고援筆寫荒篇  붓을 잡고 거친 책에 써내려가네.     시령이 수령에 엄하여 으레 관우를 수리하는 것을 일삼지 않아 무너진 것을 좌시하였다. 나와 동갑인 유민이 주목이 되어 일을 이미 다스려 새롭게 하였다. 사람이 하지 못할 일을 했기에 시를 지어 축하하였다.(令嚴守令 例不以修整館宇爲事 坐視頹毀 吾同年柳公敏爲州牧 事旣理 又能新之 爲人所不爲 詩以爲賀)’라는 설명이 곁들여져 있다. 광주는 고려시기에 들어와 태조 23년(940)에 오늘날의 지명인 광주(光州)로 고을명을 사용했고 고려 말 학자 이집(李集, 1314~1387)이 ‘광주남국최웅번(光州南國最雄藩)이라 불렀지만 그 위상은 전주와 나주가 계수관(界首官)으로서 남부 지역의 정치・경제 중심지로 성장하였기 때문에 뒤 떨어졌다.광주 지역이 전라도의 중심 지역으로 부상하게 된 것은 1896년 13도제를 시행하는 가운데 전라남도의 관찰부를 광주에 설치된 때 부터였다. 그동안 고려・조선 시기에 걸쳐 나주에 밀렸던 지역 중심지로서의 위상을 다시 찾게 되었지만 그 이유가 궁금하다. 그것은 전라남도의 위치적으로나 대강을 끼고 있는 자연환경 등이 나주가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 이후로 광주는 전라남도의 수부(首府)로서 행정의 중심지는 물론 사법・통신・교육・금융의 중심지로 발전하여 광역시화 됐다.그 광주읍성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둘레 8,253척 높이 9척이며 안에 우물이 100개가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1872년지방지도(광주)에 객사와 내아 및 4개 성문을 비롯하여 33채의 건물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최근의 발굴 자료에 의하면 성곽의 규모는 둘레2.5km 높이3m로로, 방어시설인 해자와 목책주공과 함께 구전으로 전하던 ‘대황사(大皇寺)’ 유지로 추정되는 터도 확인되고 있듯이 거읍이었으나 다 사라졌다. 전주시와 너무도 다른 모습에서 고개가 다른 곳으로 돌아가는 이유가 되고 있다.
    2020-03-13 | NO.159
  • 서헌정사 瑞軒精舍
    북구 생룡동   북구 생룡동에 태어나 향촌의 정신적 지주로 서헌瑞軒 범윤기范潤奇(1850~1923)가 만년에 지은 서헌정사가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졌다. 그는 자가 찬도贊道이다. 그의 부친은 심재心齋 범재준范再駿(1822~1857), 자는 인헌仁憲이며 심재유고(心齋遺稿)가 있다.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로 경학과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낙론洛論의 대가로서 이이, 송시열의 학통을 계승한 간재 전우에게 전수한 고산 임헌회의 문인이다. 조선말기 학자.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에 입각하여 의병을 이끌었던 구한말 의병장 화순군 출생 송사 기우만과 종유했다.그의 아들 송림松林 범만식范ㅇ植은 송사 기우만의 문인으로 열심히 들어서 배우며 바르고 점잖으며 언행이 말이나 행동을 삼가고 조심하여 향리들이 그들 존경했다. 송림의 부인은 연일延日 정씨로 19세에 시집 와서 26세의 젊은 나이에 남편을 여의고 시부모님을 극진히 봉양하며 어린 두 아들을 키우고 한평생을 수절하여 孺人鄭氏孝烈碑가 생룡먀을에 세워져 있다.생룡마을 뒤에서 죽취봉 쪽으로 가파른 구릉을 따라가면 금성 범씨 여환의 묘와 견훤대라 부르는 돌무더기 꼭대기까지 약 2.5㎞에 걸쳐 토축과 일부 열을 지은 돌들이 폭 2~3m로 길게 뻗쳐 성터의 흔적이 드러나 있다. 여러 기록을 보면 1894년 당시 국내외 정세에 대비한 피난처를 생룡마을의 범경준, 범윤길, 범윤기 등이 축조, 주위 5리쯤 된다고 하며 전해지는 말로는 견훤대甄萱臺 또는 후백제성이라고도 한다. 
    2020-03-13 | NO.158
  • 석계정1 石溪亭
    동구 지호로 52번길 석계정은 고려 유학자 회헌晦軒 안향安珦(1243~1306)을 선조로 한 벽서(碧栖) 안규섭(安奎燮)이 지었다는 정자다. 동구 지산2동주민센터에서 맞은 편 골목길의 높은 언덕 위에 석계정이 자리했었다. 옛 단사동 丹砂洞인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이 정자는 원래 벽계(碧溪) 안병준(安秉準)이 학문을 좋아해 1921년 이후 초당에서 후학들을 가르쳤으나 변변한 학당 없이 생을 마감했다. 아들 안규섭이 이를 안타깝게 여겨 1947년 이 일대에서 가장 높은 곳을 찾아 지은 효정자이다. 아들의 호 벽서碧栖에서 栖(깃들일 서)는 ‘깃들이다. 새가 깃들여 살다. 머금다’는 뜻이다.석계정은 도리석초에 팔모기둥의 골기와 팔작지붕으로 무실 팔모마루로 되어 있고 정자 뒷면에는 전면좌우 등대형식의 석탑과 괴석이 자리하고 있다. 괴석에 소금강所金剛이라는 글씨가 크게 새겨져 있고 고목도 남아 있다.이곳은 “동쪽으로 무등산의 빼어난 명산이 있고 이 산으로 부터 내려온 봉황 모습의 한 산줄기가 날을 듯이 내려와 용반龍盤의 아래에 엎드려 있다. 그 아래에 지산동芝山洞이라는 마을이 있어 맑은 수석이 가득하다”고 안봉준의 석계정기에서 말하고 있다.  동구는 급격한 도시화로 변천하면서 전통문화 유적이 다른 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다. 그중에 몇 곳 없는 정자 가운데 하나였다.
    2020-03-13 | NO.157
  • 석계정2 石溪亭
    석계정(石溪亭)은 북구 오치동 정대현(鄭大鉉, 1873~1946)이 처사적 삶을 살았던 곳이다. 석계서실이라고도 부른다. 격동기에 살면서 어려서 과거 시험공부를 했으나 부질없음을 깨닫고 한말 의병장 송사 기우만에게 수학 후 학문을 배우며 지냈던 곳이다.이곳도 일제감점기 때 지은 것으로 보이며, 그가 직접 석계정 원운(石溪亭原韻)과 시문(石溪書室小記, 石溪亭記, 石溪記, 石溪小記, 石溪亭上樑文,  次石溪亭韻)을 남겼다.이완상(李玩相),  이계익(李啓翼), 이준범(李駿範), 유인섭(柳寅燮), 이계종(李啓琮), 고광수(高光洙) 등과 교류하며 지냈다. 유유상종했던  운파(雲坡) 김진현(金珍鉉, 1878∼1966) 등이 다녀가며 시(謹次石溪亭韻)를 남겼다.
    2020-04-08 | NO.156
  • 석서정
    지난 2006년 광주천 정화사업을 벌이면서 옛 정자 중 하나인 석서정을 복원했다.석서정은 1800년경에 편찬된 광주읍지에 지금은 폐허가 되어 있다고 한 기록으로 보아 정조 연간 이전에 사라진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석서정 터는 신증동국여지승람(1481) 광산현 고적조에 현 남쪽 2리에 있다고 기록되어있다. 정자가 많던 조선시대에도 광주의 명승 가운데 하나로 손꼽힐 정도로 유명했다는 석서정은 고려 우왕 재위기간(1375~1388)에 광주 목사 김상이 광주천의 물길을 바로잡아 주민들의 홍수피해를 막기 위해 지금의 양파정 앞 광주천 가운데 석축을 쌓고, 큰 섬을 만들어 그 위에 정자를 짓고 이름을 석서정이라 명명하고 양쪽으로 다리를 놓아 건너 다녔다. 이처럼 광주천이란 자연과 맞서 싸워야했던 옛사람의 근심과 분투를 보여준다. 이와 같은 내용은 동문선과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린 이색(李穡·1328∼1396)의 석서정기(石犀亭記) 기문(記文)을 보면 자세히 서술돼 있다.이색(李穡, 1328-1396)의 자는 영숙(穎叔)이며 호는 목은(牧隱)이다. 문집은 목은문고(牧隱文藁)가 있다.
    2018-07-10 | NO.155
  • 석서정사(石西精舍)
    광주 남구 월산동에 석서정사(石西精舍)가 있다. 김상기(金相基, 1891∼1954)가 말년에 정사를 짓고 문인ㆍ벗들과 시문을 지으며 살았다.   김상기(金相基)의 자는 찬경(贊敬)이요, 호는 석서(石西)며 본관은 김해(金海)다. 1891년(고종 17)에 광주에서 가선대부(嘉善大夫),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인 김용후(金容厚)와 밀양박씨(密陽朴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에게 배우다 장성하여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에게 수학했고, 뒤에 현와(弦窩) 고광선(高光善)에게 수학하였다. 1954년에 64세로 별세하였다. 『석서유고(石西遺稿)』는 5권 1책 석인본으로 아들 김호성(金鎬聖)이 유문을 수집하여 1967년에 간행하였다. 장헌(莊軒) 기노장(奇老章, 1904~1970)의 시 次金相基石西精舍韻가 있어 교우관계를 알 수 있다.
    2020-08-27 | NO.154
  • 석하정 石下亭
    서구 양3동충장로에서 포목상을 하던 심덕선이 1935년 양동 발산마을 위에 세운 정자이다. 발산마을이 옛날에는 경관이 수려한 언덕이어서 이곳에 정자를 세웠던 것이다. 발산마을은 현재 폐가와 공가가 많아 재개발대상인 가운데 최근 예술마을로 조성하는 사업이 진행 중에 있다. 석하정石下亭은 양동이나 유동 쪽에서 보면 구름 위에 떠 있는 것처럼 우아하게 보였다고 <광주1백년> 저자인 박선홍(1926~2017)은 이야기한다. 이 정자의 이름을 석하石下라고 한 것은 그의 할아버지인 심의종沈宜鍾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호를 따른 것이었다. 석하정은 1950년대에 철거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2018-05-23 | NO.153
  • 선암역仙岩驛 누각
    광산구 선암동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 제35권 광산현光山縣 편에 광주 주변의 역으로 선암역은 현의 서쪽 40리에 있다. 《광주읍지》(1879, 1924)에도 주의 서쪽 40리에 있는 데 또한 관원 전용 주막인 원院이 있다고 했다. 이곳은 유배자들도 쉬어 자는 곳이었다. 1750년대 초반에 제작된 해동지도 광주목에서 풍영정 왼편에 그 위치가 확인되고 있다. 여지도서(1757~1765)에 선암역은 소지면所旨面에 있었고 오늘날의 운수동雲水洞이다. 어등산 남쪽자락은 중심이 선암역으로 1914년 선암동이 되었다. 관원들에게 빌려주는 6필의 말을 길렀다.회재 박광옥이 선암역 누각에서 시를 읊었다. 황룡강변을 바라보는 곳에 자리했을 것이다. 十月霜風酒力微 시월 찬바람에 술기운도 사라졌는데郵亭孤坐待人歸 역의 정자에 홀로 앉아 고운 님 오길 기다리네草間喜見蜻蜒在 풀잎 사이로 고추잠자리 날개를 반짝이며猶向斜陽照處飛 석양이 비추는 곳 향하여 아름답게 날아다니네-懷齋遺集  우암 송시열이 1689년 생애 마지막의 길에 이곳에 머물며 만감이 교차하는 감정을 풀어낸다. 紛紛末路道非眞 분분한 말로에 도道가 참되지 못했는데惟有閩翁繼聖神 오직 주자께서 성신을 이으셨네魚躍鳶飛揮發後 물고기 뛰고 솔개 날은 흔적 뒤엔莫言千載更無人 천 년 동안 사람 없다 말하지 마오
    2020-03-13 | NO.152
  • 선원재 仙源齋
    노사 기정진의 <노사집蘆沙集> 권1에 유생 정공의 선원재를 노래한 시가 있다.광산 정생의 선원재 운〔光山鄭生仙源齋韻〕 洞天應自太康開  동천은 마땅히 태강 때부터 열렸으리니依舊潛行一路隈  예전부터 난 구비진 길을 몰래 걸어보네 祇信巖花明勝錦  다만 바위에 핀 꽃 비단보다 멋진 풍경이니那羞溪榭小如杯  어찌 시냇가 정자 술잔같이 작다 부끄러우랴客多貪徑他山去  많은 객들은 지름길을 찾다가 다른 산으로 가고  舟或尋春半道廻  배는 간혹 봄을 찾다가 도중에 되돌아오네 翹首幾時緣尙薄  바라본지 얼마인데 아직도 인연이 엷기만 하고 愧吾霞想久蓬哉  나의 신선 놀음은 오래 떠돌아 부끄럽구나
    2020-08-10 | NO.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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