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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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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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농은정3 膿隱亭
    광산구 수완동 (통머리마을앞)   농은정은 통머리마을의 부농으로 유림사업에 종사한 농은膿隱 이근태李根泰에 의해 지어진 매우 아름다운 정자였다.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고 대신 그 자리에 오백년 된 왕버들나무(문화재자료24호) 옆에 정자를 세워 수완경로당 옆에 수완정이라는 마을 모정이 남아 있다.정자의 건립 연대는 후석 오준선의 농은정기라는 기문 등을 볼 때 1890년대로 추정된다. 농은 이근태는 암곡 이종겸을 선조로 한 한말 시대 사람으로 역내의 많은 빈민을 구제하였고 또 그의 효행이 지극하여 유림 및 모성공회의 표창과 목능참봉의 음직을 받은 당시의 효자였다. 정자를 위주로 한 주변의 경관을 살펴보면 푸른 산맥이 후면을 두러 있고 3천여평의 넓은 연방죽이 전면에 펼쳐져 있으며 수 백년의 오랜 괴목이 그 옆에 자리하고 있다. 정자를 지어 그 이름을 농은이라 한 것은 근본의 이치를 깨달은 깊은 사려가 있기 때문이다.오준선은 기문에서 이근태에 대해 "오늘의 이거사李居士가 몸소 밭을 갈아 농사를 지으며 외부의 성명聲名을 구하지 않았다. 그리고 또 정자를 지어 그 이름을 농은膿隱이라 하였다"고 했다.  
    2020-03-12 | NO.225
  • 대환정 大歡亭 화수정 花樹亭
    남구 서오층석탑2길 15 (광주공원)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서남쪽 1리 정도의 거리에 있다. 일제강점기 때 광주지역 당호로 비서승秘書丞의 벼슬을 지낸 부호 사범士凡 임병룡(1846~ ?)이 1927년 정자를 지어 노인들의 유회소로 활용하였다. 별칭으로 관덕정이다. 당시 임병룡은 光州郡 不動坊面 社洞 4統3戶에 주소를 두고 있었다. 1906년에 설립한 광주농공은행의 박원규朴源奎, 최상진崔相鎭, 김기영金祺永, 이응일李應逸 등과 함께 주주였다.대환정은 읍의 서쪽 구강정龜岡町에 있는 건물이며 1935년 무렵 향교의 뒷산으로 옮겨 향인들의 사장이 되었다는 조선호남지의 이건 기록이 있다. 기록으로 볼 때 정자의 위치가 현재의 광주공원 성구등聖龜嶝 성거사지탑聖居寺址塔 오층탑 근처임을 알 수 있다.이 지역에는 대환정 이외에도 붕남 지응현의 붕남정鵬南亭이 자리하고 있었다. 광주공원은 광주시의 신도시가 변두리에 형성되면서 방문객 숫자가 크게 줄면서 지금은 노인들의 휴식처로 전락했다.대환大歡이란 “크게 기뻐한다”는 뜻이다. 이 정자에 대한 기문, 원운 등의 문헌이 없다. 대환정은 1959년 임병룡 손자가 전주최씨 문중에 매각함으로써 대환정이 화수정花樹亭 현판으로 바뀌어 신흥사찰 성거사 옆에 남아있다.1985년 최씨 문중 6대 회장인 최동렬의 주선으로 오늘의 모습으로 남았다. 의재 허백련의 현판이 걸려 있고 대서주련이 앞면 4개의 기둥에 있다. 사각 주춧돌에 사각기둥으로 골기와 팔작지붕 형태의 정면 3칸 측면 2칸 구조의 한옥과 양옥이 혼합되어 있다. 화수정이 위치한 이 자리가 현재의 공원과 연계되어 매우 아늑한 풍치를 이루고 있다. 광주의 명소였던 경암敬菴 최숙崔橚의 화수정원운花樹亭原韻은 이곳의 운치를 유감없이 대변해 주고 있다.   對立全州寒碧樓 전주고을 한벽루와 대립하여 서 있으니乾坤日月自春秋 하늘 땅의 밝은 일월 본 가을이 오고 가네.庭蘭挺秀香無盡 피어나는 뜰앞 난초 그지없이 향기롭고先輩敦風好轉遊 선배들의 맑은 풍류 호전하여 흘렀도다.微醉添杯山影倒 맑은 잔에 술 부으니 산 그림자 비쳐있고愛吟來社世塵收 시 읊으며 올라오니 세상 티끌 거둬지네.夢中幾有輕謾想 경만스런 잡생각이 꿈속에서 일어나니不敢斯筵繼續遊 아름다운 이 자리에 오래 놀지 못했도다
    2020-03-12 | NO.224
  • 덕남정 德南亭
    남구 덕남동 (덕남마을)덕남마을 입구의 높은 산록 위에 1935년에 건립된 덕남정이 있다. 이 정자는 석초 사각기둥의 평기와 건물로 앞면 2칸 옆면 2칸의 구조로 방이 없는 판자 마루로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조그마한 촌정이다. 상량문에 소화昭和 10년이라는 연대 표시가 있다.주위 사방이 노거수로 둘러있고 보존상태도 좋은 편이다. 이 정자의 경관으로 보아 최초의 건립 당시에는 매우 아담한 정자였고 개인의 정자가 아닌 마을 사람들의 공동협력에 의해 이뤄진 마을의 동정이었다. 남구 효덕동 관할 노대동에서 행암동을 잠시 거쳐 덕남동으로 넘는 곳에 덕고개가 있다. 분적산에서 북서쪽으로 감돌아 노대마을 서편을 지나는 능선이 행암동 도동마을 동쪽 봉우리에 있는 덕남정수장으로 이어진다. 신기마을에 서남쪽 덕남마을로 갈 때 넘는 재이다. 남서쪽으로 가면 향등마을로 나오고 양과동으로 연결된다. 크고 중요한 곳 또는 으뜸에 ‘덕德’자가 따른다. 높지 않지만 일대에서는 중요한 길이 되어 유래되었다. 덕남마을은 덕고개 남쪽에서 유래하였다. 덕남마을은 정월대보름에 당산제를 지냈다.
    2020-03-12 | NO.223
  • 덕암정 德巖亭
    북구 효령동 (학동마을) 처사 덕암德巖 김호외金好畏가 벼슬을 구하지 않고  북구 우치동(효령동) 학동마을에 있었던 형인 죽계 김존경의 삼류정三流亭 서쪽에 자기 호를 따라 덕암정德巖亭을 지었다. <추성지秋成志 우치면조牛峙面條>에 따르면 김호외가 이곳에서 농사와 낚시로 소일하며 학문을 닦으며 지냈다. 본관은 광산이다.할아버지는 김성金誠이며, 아버지는 김언욱金彦勗, 형은 조선 중기의 문신 참판 죽계竹溪 김존경金存敬(1569∼1631)으로 1803년(崇禎後三癸亥) 간행된 <죽계집(竹溪集)> 4권2책(목활자본)이 간행됐다. 이 책은 1617년 성절사로 파견되었을 때의 성절사일기(聖節使日記)가 수록되었으며 조천록 뿐만아니라 1623년부터의 방대한 일기가 권4에 수록되어 있다.
    2020-03-12 | NO.222
  • 덕흥정
    서구 덕흥동 454-1덕흥마을 야트막한 35m 정도의 덕산德山 꼭대기에 있는 정자를 덕흥정德興亭이라 한다. 여기엔 서구청 보호수인 덕흥동 느티나무가 수령 450세 정도이다. 흉고는 557cm, 높이는 약 22m이다. 250여년 전부터 동작의 상당인 할머니 당산나무로 신격화되어 덕흥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했다.덕흥마을의 당산은 원래 12당산이었다고 하나 확인할 수 있는 것은 1987년 조사에서 동작의 상당 하당(2) 당샘, 서작의 상당 하당 자손당 당샘, 우마당, 짐대 등 10개이다. 동작과 서작을 합하여 6개의 당산만 남았다. 동작의 상당과 하당, 서작의 상하당과 자손당, 그리고 동작과 서작이 합제로 지내는 우마당이다. 동작의 하당 중 하나는 자손 당산으로 경지정리 때 없어졌다. 이곳 당산제는 1990년대 후반까지는 치러졌으나 그 이후로는 중단되었다.이 느티나무는 2012년 가을까지는 건강하게 자라고 있었다. 도시 생활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고향마을의 감성을 일깨워주었다. 2012년 당시 서구청의 덕흥동 주거환경개선사업의 하나로 소방도로를 개설했다.이 와중에 느티나무가 자라는 덕산을 절개하고 소공원을 조성했다. 문제는 그 후부터 느티나무 한쪽이 급격하게 고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덕산 정산에서 자라는 나무의 생육환경을 고려하지 않고 산 부근을 절개하면서 뿌리 일부를 잘라내 생육에 지장을 준 것이라는 지적이다. 다행히 느티나무는 생존해 덕산을 지키고 있으며 정인서 서구문화원장과 오광교 서구의회 의장의 지원과 마을주민들이 합심하여 2018년 정월대보름부터 덕흥당산제를 부활시켜 새로운 마을당산제를 지내기 시작했다.한편 서구 광신대교 부근 천변에서 일부 궁사들이 활을 쏘는 장소를 덕흥정이라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2018-05-24 | NO.221
  • 도담정사 陶潭精舍
    동구 지산동   동쪽으로 5리에 있으며 구단舊丹 사동砂洞 서암瑞岩 조병훈趙秉勳이 지어 지냈던 곳으로 《조선환여승람(1935)》에 전하고 있다. 화순 능주 광덕리 출신 방은(芳隱) 임호응(林鎬應, 1870~?) 등이 다녀가며 시를 남겼다고 전한다. 임석주(林碩周)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나주의 신 모에게서 수업을 한 이래 정양묵(鄭良黙), 문채황(文采璜) 등에게 나아가 계속 수업하였고, 장성의 기우만(奇宇萬)의 문하가 되어 학업에 정진하였다. 일신재 정의림, 애산 정재규와 종유하였고 《방은유고(芳隱遺稿)》가 있다.지산동은 기와의 사투리 발음인 ‘지와’를 한자로 표기한 지막芝幕리의 이름을 따서 지산芝山이라 하였다.무등산 서쪽 장원봉에서 향로봉, 깃대봉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500여년 전인 조선 초기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2020-03-12 | NO.220
  • 돈의당
    서구 금호만호길 45-5돈의당敦義堂은 이희범李喜範 이재범李在範 형제가 우의를 이어 받기 위해 이희범의 아들 이회춘 등이 1935년 앞면 2칸 옆면 1칸의 무실대청으로 일신당 앞에 있는 효정자이다. 이들은 부모를 일찍 여의고 어려운 살림에 토지를 희사하며 우의를 다지며 돈의계敦義契를 만들었고 계의 자산을 문중으로 넘겨 자손들의 화목을 도모하는 재단으로 활용했다. 당내에는 당시에 명필 염재念齋 송태회宋泰會(1872~1941)가 쓴 심곡재원운心谷齋原韻, 성석醒石 이희범李喜凡의 사내계서私內契序, 심곡재기心谷齋記, 심곡지心谷誌, 심곡재이건상량문心谷齋移建上樑文, 심곡재이건운心谷齋移建韻 등 14개의 기문 현판 등이 있었다고 전한다. 2017년초까지지 황폐화되어 일신당과 함께 무너지기 시작해 결국 그해 여름에 모두 철거하고 주차장으로 바뀌었다. 성석醒石 이희범李喜凡이 지은 원시에는 그의 염원이 깃들어 있다.이곳에서 지은 이 집 물 동쪽 가까우니     새로운 문안 골목 하늘처럼 넓어졌네.부모 은혜 저버리니 평생 한이 맺혔으나   이 집 지은 그 공로는 백세까지 전해지길서석산의 맑은 달은 먼 산위에 비쳐있고   만호마을 맑은 바람 나는 연기 오고가네.고명사의顧名思義 그 마음이 한이 없이 간절하니   천년 만년 오래 살아 이 가운데 즐겼으면 송사 기우만의 동생인 도남산인道南散人 기노선奇老善(1895~1937)이 이곳에서 원운에 차운한 시가 전하고 있다.돈의하는 형동생이 서쪽 동족에 거주하며    돈의당을 새로 지어 한 이불에 함께 자네.화목 위한 장씨 인자 밝은 교훈 남기었고     자선 위한 번씨 의장 많은 공적 쌓았도다.어지러운 이 세상은 상해처럼 변해가고        아름다운 옛날 풍속 찾아보기 어렵도다.정주이씨 한 종파가 이곳에서 장착하여        만호마을 일월 중에 한가로이 가고 오네.
    2018-05-24 | NO.219
  • 돈학재敦學齋
    광주시 광산구 평동 묵헌默軒 이중권李重權(1869~1932)이 학문을 강구하기 위해 일제강점기 때 지어 지냈던 곳이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당시에는 전남 나주 평동면平洞面에 있었으며 평동면은 1949년에 삼도면과 본량면, 광산군으로 이속시키고, 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로 변했다.이중권의 자는 경구敬球, 호는 묵헌黙軒 또는 돈학재敦學齋이며 본관은 전주이다. 1869년(고종6) 광주에서 감찰監察을 역임한 복룡재伏龍齋 이용태李容泰의 아들이다.조선 말기 의병장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후석後石 오준선吳駿善, 유학자이며 항일지사 난와難窩 오계수吳繼洙 등 일대 당대의 명사들과 강론하면서 두문불출하며 학문을 강구하다 1918년 고종이 승하하자 망곡단을 쌓고 통곡하며 국운을 걱정하다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문집 <돈학재유고敦學齋遺稿>가 남아 있다. 필사본 4권 2책으로 손자 이동수가 그의 유문을 수집하여 홍양 송광세의 서문을 받고 문인 문성 김종곤과 이영수의 발문으로 1953년에 책을 발간하려 했으나 간행되지 못하고 남아 있다.  
    2020-03-12 | NO.218
  • 동강정사
    동강정사 東岡精舍남구 양촌길 21남구 양림동은 선교사들의 활동무대였던 사직공원을 중심으로 우일선 선교사 사택, 수피아 홀과 윈스보로우 홀, 배유지 기념예배당, 오웬 기념각 등 곳곳에 근대 서양식 건축물들이 흩어져 있다. 또 이장우 가옥, 최승효 가옥 등 우리나라 전통한옥도 있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1904년 목포를 거쳐 1905년 일부가 광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일제강점기 선교사들은 교회를 열고 학교와 병원을 세워 ‘광주의 예루살렘’, ‘서양촌’이란 말을 들었다. 당시에 만들어진 기독교 유적과 우리네 전통문화 유적이 좁다란 골목을 따라 오롯이 남아 있어 '양림동 역사문화마을'이라고 부른다.양림동의 정자로는 1914년 양파 정낙교(1863~1938)가 광주공원 입구 양림동 치안센터 뒤 능선에 지은 양파정楊波亭과 이장우가옥 내 동강정사가 있다. 동강정사는 안채, 사랑채, 행랑채, 곳간채, 대문간으로 구성된 전통 상류가옥이다. 1899년 정병호가 안채와 대문간을 건축한 것을 1965년 나주 동강대학교 설립자인 이장우가 매입한 후 사랑채와 행랑채, 곳간채까지 완성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연못과 주변에 수령이 100년이 넘었다는 은행나무와 멋스런 향나무 등 정원수와 오죽烏竹 숲이 있고 작지만 거북이의 석조물 상지上池와 정원수를 가득 담은 하지下池가 있다.정내에는 현판 3개와 주련은 김굉필의 후손으로 시문에도 능했던 고당 김규태가 썼다. 편액은 중앙에 동강정사東岡精舍(동강선생이 여기에 배움의 터를 세우니) 왼쪽에 산해숭심山海崇深(학문이 산과 바다 보다 높고 깊게 융성하여), 오른쪽에 봉저난상鳳翥鸞翔(봉황처럼 높이 날아오르고 난새처럼 비상하리라)은 성인군자에 이르는 인물이 많이 배출되리라는 교육자의 염원을 담고 있다.동강東岡은 동쪽의 산 언덕으로 세상을 마다하고 은둔하는 곳을 의미하며 어원은 후한서後漢書 주섭전周燮傳에, “선세先世 이후로 국가에 대한 공로와 임금의 은총으로 대를 이어왔는데, 어찌하여 그대 혼자 동강東岡의 언덕만을 지키려고 하는가.”에서 유래했다.동강정사에서 느낄 수 있는 감흥을 석지에 거북이가 달을 읊으니. 달이 비친 돌못에 거북이는 수영하고(石池龜泳月) 소나무 밭에서 학이 바람을 읊으니(松圃鶴吟風), 대나무에서 많은 표제를 글귀로 얻는다(得句多題竹), 책을 읽다 반쯤 소나무에 기대 바라보니(觀書半倚松), 한 뜰이 추색으로 그려져 있고(一庭秋色畵), 가을빛 물든 정원은 한 폭 그림과 같다(萬戶夕陽鍾)고 적었다. 정자주인 동강東岡 이장우李章雨(1919~2002) 박사는 교육에 대한 열정과 신념으로 동강유치원과 동신중ㆍ고등학교, 동신여중ㆍ여고, 동강대학, 동신대학교를 설립하여 호남 지역 교육 발전에 이바지하였던 빼놓을 수 없는 지역 유지였다.안채가 1989년 광주광역시 민속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으며, 곳간채는 한때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2009년에 복원되었다. 안채는 ㄱ자 형태의 2고주 5량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왼쪽부터 툇마루 건넌방, 대청, 안방, 부엌이 있고 꺾인 곳에 작은방이 배치되어 있다.
    2019-12-03 | NO.217
  • 동계정 東磎亭 / 동계초당 東溪草堂
    동구 계림동 동계정/동계초당은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동쪽 10리에 있다. 광주광역시 북구 청풍동 등촌(登村)마을은 청풍이라는 동이름 처럼 산수가 수려하고 목가적인 풍경이 펼쳐진 자연마을이다.등촌(登村)마을 골짜기 대밭골에는 1774년(영조 50년)에 평산신씨(平山申氏)로 사후에  증지평(贈持平)에 오른  신광택(申光宅)이 건립한 동계정(東磎亭)이 있었다. 그의 사후 퇴락 후 5대손 신만재가 1898년 중건했다고 하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광주시 광산구 평동 출신 묵헌(默軒) 이중권(李重權 1869~1932)이 동계초당중수기(東溪草堂重修記)를 남겼다.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1835∼1919 1835)의 재액과 참판(參判) 을 지냈던 신두선(申斗善)과 의병장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 유학자  동강 김영한(金寧漢) 등의 기(記)가 남아 있어 중건했을 당시를 짐작케 한다. 일신재(日新齋) 정의림(鄭義林, 1845∼1910)도 이곳에 같이 들려 시 '謹次申(光宅)東溪亭韻'을 남겼다.동계東溪 신광택申光宅은 1725년 훈련원 부정, 1726년 영원군수(寧遠郡守), 1728년 상원군수(祥原郡守), 1740년에 여주목사가 되었다.초당이 있었던 일대의 풍경을 매천梅泉 황현黃玹(1855~1910)이 <매천집梅泉集> 권6에서 동계 후손이 동계초당이 중건됐을 때 '동계초당기東溪草堂記'를 썼다. “왕년에 나는 서석산(무등산) 동쪽 산기슭을 지나다가 시내가 맑고 대나무가 푸르며 닭이 울고 개가 짖는 아득히 푸른 운기雲氣가 도는 곳을 바라본 적이 있다. 그런데 지금 들으니, 그곳이 바로 동계초당이 있던 곳이라고 한다”고 적고 있다.1906년 황현의 나이 52세 되던 해에 지은 동계초당의 원운東溪草堂原韻에 화답하는 시에서 초당의 주변의 풍경을 엿볼 수 있다. <매천집> 권3에 있다.俯仰溪堂憶老成 동계초당을 둘러보며 옛 늙은이 추억하니百年花石照人淸 백년 된 꽃과 바위 사람을 맑게 비추네 祖宗盛際多眞隱 번성한 조상 때는 참된 은자 많았는데山水名區有遠聲 산수동의 이름난 곳 명성 멀리 퍼졌네 細草依然書帶綠 어린 풀은 의연히 서대초처럼 푸르고寒星猶傍釣臺明 찬별은 여전히 낚시터 옆에 밝도다 珠絃一斷歲云暮 세모에 거문고 줄 한번 끊어지니誰復賞音叢桂生 누가 다시 음률 알아 총계(계수나무)생을 부르리  동계천은 동구 지산동에서 발원하여 서구 양동의 복개상가 인근에서 광주천으로 합류하는 하천이다. 광주천의 지천 동계천과 뱃놀이를 했던 경양방죽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흐르는 푸른 물줄기는 옛 광주읍성 지도에만 남아 있다. 
    2020-03-12 | NO.216
  • 동락대 同樂臺
    북구 운암동 동락대는 죽암(竹巖) 이응구李應龜(1703∼1781)가 지었다. 이응구는 광주 황계리黃溪里 지금의 운암동에서 태어났다. 자는 주서(周瑞)이고, 본관은 광산(光山)이다.쇄소당 이운홍의 후손이며 부친 삼우당 이제백의 장자로 태어났다. 부인은 판서判書를 지낸 청백리淸白吏 정순鄭珣의 후예이며, 정만구鄭萬龜의 딸인 서산정씨瑞山鄭氏였다. 정부인 서산정씨와의 사이에 2남 이길인(李吉仁)과 이경인(李景仁), 그리고 변종대(邊宗岱)와 최창민(崔昌民)에게 출가시킨 두 딸을 두었다. 측실에게서 서자 이몽인(李夢仁) 외 1남 2녀를 두었다. 자미산 기슭에 초당으로 동락대同樂臺를 지었다. 동락대기同樂臺記에서 “내 거문고를 어루만지며 앉으니 바위의 대(竹)가 맑은 바람을 보내어 나의 그윽한 흥을 돋군다. 마음이 이미 화창하니 목소리가 저절로 노래가 되어 나온다”고 했다.죽암별서竹巖別墅 라는 제목의 시로 감흥을 나타냈다.선영을 받으려고 별서(別墅)를 열였으며암죽(巖竹)은 사궜으니 비바람도 시기없네.구름안개 산이 뿜어 삶이 온지도 모르네하늘에 조화인가 내가 옴을 기다리네그는 송산松山 선산 아래 집을 짓고 살면서 아침저녁으로 선영을 바라보며 절을 하기를 추운 겨울이나 무더운 여름에도 멈추지 않았으며, 늙어서도 그치지 않아 마을에서는 그의 한결같은 효심을 칭찬하였다. 또 그의 둘째 아들 이경인이 병이 났을 때 손가락에서 피를 내어 그의 목숨을 3일 동안 연장하게 하는 등 고을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그의 유집으로 <죽암선생문집竹巖先生文集>이 있다. 서문은 노사 기정진이 썼고 그의 집안 내력을 잘 아는 미호 김원행의 제자로 성리학을 공부하였고 당송唐宋의 글에 뛰어났던 진사 임천재(臨泉齋)와 오광원(吳光源 1714∼1790)이 그의 행장을 썼다.
    2020-03-12 | NO.215
  • 두암정사 斗岩精舍
    신현대申鉉大(1867∼1945)는 조선 말기의 유학자로 외세의 침략이 거세지고 망국을 당하자 손수 마련한 두암정사(斗岩精舍)에 머물면서 시문을 짓고 후학들을 지도하다가 1945년에 79세로 별세했다. 자는 영화(永化)이고, 호는 신묵당(愼黙堂)이다. 본관은 평산(平山)이다.부친은 신내규(申來圭)이고, 모친은 파평윤씨(坡平尹氏)로 나주에서 출생했다. 본성이 효성스럽고 어질어서 할아버지 후암공(後菴公)의 신병을 잘 간호하여 주위의 칭송이 자자했다. 그는 4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조부와 편모를 극진하게 모셨는데 21세에 조부마저 세상을 뜨신 후 어머님에 대한 효성이 더욱 깊었다. 평생 효를 실천하며 유학의 가르침을 따랐다.그는 학업에도 열중하여 경전과 사서에 깊은 연구를 하였으며 조부인 후암공의 지도를 받았다. 그는 할아버지를 계승하여 고조인 성암공(誠菴公)과 증조인 경와공(敬窩公)의 유적을 찬술하여 강록과 군지에 게재했다.  시를 읊으면 그 묘리(妙理)가 성현의 도(道)와 합치하였다.문집으로 <신묵당유고愼黙堂遺稿> 상‧하권이 전한다. 상권에는 주로 시문(詩文)이, 하권에는 부록으로서 행장, 명(銘), 기문(記文) 등이 실려 있다. 그의 아들 신경철(申炅澈)이 시와 문을 수집하여 금성 오필선(吳弼善)의 서문과 평양 박노열(朴魯烈)의 발문을 받아 1948년에 발간했다.箕東講堂板, 謹次高弦窩掩耳齋韻, 德陽書院復設禮成韻, 愼黙堂自題(附小序), 斗巖精舍自題(附小序), 斗巖精舍開硯韻, 愼黙堂自題(二首), 舟巖歸路留藍石, 漁樵堂韻, 次李敦炯醉石亭韻, 題洞荷張氏晩歸亭, 次箕東講堂講會韻, 次瑞錦詩會韻, 次海陽壇詩會韻, 斗巖幽居, 次何陋齋韻, 題野隱亭, 題三溪亭, 羅敬齋(仁述), 羅敬齋朞服座前(附原書), 羅敬齋大孝獄前(附原書),  愼黙堂記, 愼黙堂銘(幷序), 斗巖精舍上樑文, 愼黙堂回甲詩軸序, 家狀(子 申炅澈), 行狀(宋光世), 道事(金東煥), 傳(崔仁宇), 墓碣銘(幷序)(梁鎰黙), 謹次愼黙堂韻, 謹次斗巖精舍韻, 謹次愼黙堂六十一初度吟, 輓章 跋(朴魯烈, 子 申炅澈)
    2020-08-26 | NO.214
  • 만경당 晩警堂
    남구 압촌동 만경당晩警堂 고두경高斗經(1619~1690)은 남구 압촌동 출신으로 그의 서재나 정자가 이곳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자는 처중(處中). 호는 만경당(晩警堂) 또는 황탄거사(黃灘居士)이다. 참의參議를 지낸 고성후高成厚의 후손이며 병자호란 때, 의병과 군량을 모아 청병과 대적하려 했던 탄음(灘陰) 고부민(高傅敏, 1577-1642)의 아들이다. *宋子大全隨箚 卷之十三 > [隨箚] 우암 송시열(1607~1689)의 문인이다. 학업에 정진하여 일찍이 유학에 깊이 정통하게 되었고 이치의 근본을 이해하고 몸으로 실제를 체득했던 유학자다. 송시열이 직접 당호를 지어 현판을 써줄 만큼 아끼는 제자였다. 자주 오고 갔던 서찰에서도 각별한 사이였음을 알 수 있다. 송시열은 좌의정으로 있을 때 인성왕후의 복상문제가 거론되었다. 송시열은 대공설을 주장했으나, 남인이 주장한 기년설이 채택되고, 평소 불화관계에 있었던 허적 등의 모함으로 송시열은 1675년 덕원에 유배되었다. 이때 고두경은 송시열의 문하에서 같이 공부했던 사매당四梅堂 윤삼거尹三擧(1644~1718), 안촌 박광후 등과 함께 스승의 억울하고 비통함을 임금께 상소를 하기도 하였다. 고두경은 만감이 교차하는 심정으로 원망과 걱정을 실어 시를 읊는다. 却把深誠直瀉眞 깊은 성충, 곧이곧대로 진실을 토로하려 했더니如何天怒速如神 어인 일로 임금님의 노하심이 이같이 빠르신가?因玆遺札登龍案 이로 인해 임금께 올릴 서찰 접어 두고擡眼長安望喜人 눈을 들어 서울을 보며 고운 님 생각하네. 海上寒風襲客衣 바다 위 찬 바람 나그네 옷자락을 파고드는데此中行色涕堪揮 그중에 나그네의 모습 눈물을 자아내게 하네. 蒼溟萬里波濤險 푸른 바다 멀고멀고 파도는 험한데至祝檣帆好好歸 마음깊이 축원함은 돛대 높이 무사히 돌아오소서
    2020-03-12 | NO.213
  • 만귀정 습향각 묵암정사
    서구 동하길 10 (세하동)서구 세하동, 마을 뒤에 백마산과 옥녀봉이 솟아있고 마을 앞에는 서창평야의 넓은 들고 그 가운데로 극락강이 흐르는 전형적인 농촌이다. 넓은 서창평야를 바라보며 오랫동안 마을 입구에 자리한 옛 정원형 정자가 있다. 마을 입구에 큰 연못이 있고 그 위로 다리를 사이에 두고 3개의 정자가 나란히 있다. 만귀정晩歸亭, 습향각襲香閣, 묵암정사默菴精舍이다.만귀정은 만귀 장창우가 1750년께 후학을 가르쳤던 옛터에 후손들이 1934년 땅을 파고 연못을 만든 다음 파낸 흙으로 동산을 만들어 정자를 창건했으나 완성하지 못하다가 1945년 마무리했다. 앞면 2칸 옆면 2칸 팔작지붕이며 바닥에는 우물마루를 깔았다. 동, 서, 남쪽의 3방향에는 난간을 돌렸다.습향각은 1940년 묵암 장안섭이 만귀정에 이어 그 운치를 더하기 위해 연못 중앙에 사방 1칸으로 날렵하게 지은 정자이다. 주위의 연꽃 향기가 엄습하여 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만귀정의 별당으로 지어진 정자다. 가장 안쪽에 있는 묵암정사는 송정읍장으로 재직한 장안섭의 덕행을 기리기 위해 1960년 광산군민이 성금을 모아 건립한 사방 1칸의 팔작지붕이다. 결국 만귀정과 습향각, 묵암정사는 동일한 지역에 내에 있을 뿐 주인이 다른 셈이다.연못의 면적은 4,600㎡(약 1,400평)로 가운데에 세운 3개의 정자가 다리를 사이에 두고 한 줄로 늘어서 있는 보기 힘든 정자군이다. 전라도 지역에서 유일무일한 형태의 정자군을 형성하고 있는 독특한 누정이다. 2020년 가을 광주 서구청에서 만귀정 개선사업을 하면서 다리를 석조로 만들었는데 난간을 너무 높이 만들어 전체적인 조화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있어 안타깝다.만귀정 판액은 암사嵓史 윤희상尹喜祥이 썼다. 기장산하氣壯山河라는 편액은 석촌石村 윤용구尹用求(1853∼1937)가 썼다. 윤용구는 조선 후기에 도승지 등의 벼슬을 지내고 대한제국 수립 후에도 법부, 탁지부, 내무대신 등으로 10여 차례 임명되었으나, 이를 모두 거절했다. 만귀정, 습향각, 묵암정사 등에는 중건상량문, 중건기, 중수기 등과 만귀정원운과 팔경 등의 많은 시문현판이 걸려 있다. 만귀정 중건기는 1934년 고광선高光善, 상량문은 같은 해 이병수李炳壽가, 중수기는 후손인 장안섭이 썼다.또한 경내에는 만귀정시사 창립기념비가 세워져 있어 이곳이 문인들의 활동 무대였음을 알 수 있다. 만귀정에서 습향각으로 건너가는 다리 옆 한쪽은 취석醉石, 다른 쪽에는 성석醒石이라 새겨진 네모반듯한 석재가 있다. 이 뜻은 원래 다리를 건너 가서는 술에 취해도 좋지만 나올 때 반드시 술을 깨고 나오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습향각의 정자가 있는 것을 보면 다리를 건널 때는 연꽃 향기에 취하고 나올 때는 연꽃 향기에서 깨어 나오라는 의미가 더 설득력이 있다.1974년 신성일, 윤정희, 허장강 등 명스타들이 출연했던 영화 ‘꽃상여’, 1960년 ‘탈선 춘향전’도 이곳에서 촬영했다. 조선총독부 1914년 조사 자료에 의하면, 영산강 가항수로는 상류인 나주 봉호와 광주 서창까지(60.3㎞)는 작은 배의 출입이 가능했던 곳으로 물산이 풍부해 부자들이 살면서 많은 정자들이 지어졌다.한때 이곳은 광주사람들의 소풍장소였다. 봄이면 벚꽃이 흐드러졌고, 여름이면 창포꽃이 땅바닥을 뒤엎었고, 가을이면 연못가에 붉게 물든 상사화가 군락을 이루었다.
    2018-05-24 | NO.212
  • 만산정(萬山亭)
    남구 원산동 (만산마을)   만산마을은 큰 산아래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말+산+메>마살메>만산(萬山)으로 변천된 지명이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 있어 만산萬山이라 한다고 전해온다. 만산마을은 동쪽으로는 마을입구가 되며 경지 정리된 들녘이 있고 서쪽으로는 마을 골짜기와 모정등재, 제봉산이 있으며 북쪽으로는 제봉산 능선, 남쪽으로는 모정등재 능선이 있어 좁은 골짜기 마을을 이루고 있다. 마을 내의 길을 구만산길이라 한다. 1610년 포충사제위답여납명문에는 유등곡리柳等谷里 만산정萬山亭이라는 기록이 있어 인근의 경연대, 남강정과 함께 광산이씨 필문 이선제의 오원거족에 대한 스토리텔링이 묻혀 있는 곳이다.이선제의 부조묘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의 건물로 언제 창건된 것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1843년에 중수했다. 원래 포충사 뒤편 산기슭에 있었던 것을 50m쯤 떨어진 지금의 장소로 이설해 왔다. 1990년 시 지정 민속자료 제7호이다. 1960년에 건립된 정면 4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의 여재각에는 이일영李日英, 이선제 및 이시원 등 3대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입구에는 현재 자라고 있는 필문 이선제의 전설을 담은 괘고정수掛鼓亭樹의 600년 사연은 흔하지 않은 사례로 주목되고 있다15세기경 전라감사 김종직이 이 마을을 방문하여 ‘학덕이 높은 장자長者들이 사는 마을’이라고 하여 장자동長者洞으로 부르게 했다는 일화가 있다.   
    2020-03-12 | NO.211
  • 광주광역시
  • 한국학호남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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