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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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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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낙락정樂樂亭
    남구 대촌동(건지산하)에 운파雲坡 최수화崔洙華(1885~1962)의 만년 소요처였다. 최수화는 광주 지산리에서 출생하여 생후 21개월만에 부친을 여의고 조부의 슬하에서 자랐다. 8세에 취학하여 조부의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매우 성실하고 근면 정직하였다. 성장하면서 서실에 천문天文, 지리, 의약, 복서 등 온갖 잡서를 두고 있다가 할아버지에게 들켜 심히 꾸지람을 들었다. 학문을 하는 사람이 잡서를 보아 정신이 분산된다면 아니 될 것이라 하며, 아직 심지도 정해진 바 없고 뜻도 세워지지 않았는데 <제자백가>를 어지러이 섭렵하면 정신이 분산될 뿐 아니라 잡기로 흐르기 쉬운 것이라고 엄히 훈계를 받은 후 학문에 전념하게 되었다.그러나 조부 최익창이 갑오 동학란 때 광주의 방수장(防守將)이 되어 나주 초토사(招討使) 민종렬(閔鐘烈)과 합세하여 의거를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은거하였다. 그는 어렸을 때 할아버지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그 후 국난과 가정의 변고로 글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고 나서 비분을 참지 못하고 실의에 빠져 산천을 찾아다니며 천년의 원한을 글로 써서 노래하며 회포를 풀며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그 시절 청광(淸狂)처럼 보였으나 내심은 자못 장엄하였다. 집안을 다스림에 상하로 하여금 각기 그 직분을 지켜 서로의 분수를 넘지 않도록 하였다.1967년에 간행된 <운파유고雲坡遺稿>가 있다.
    2020-03-12 | NO.240
  • 낙류정
    서구 유촌동 388-1서구 유덕동주민센터로부터 덕흥마을 방향으로 약 2백m 쯤 떨어진 곳에 있다. 길 왼편 낙류정樂柳亭 입구入口라는 한자로 써진 바위가 시멘트 기단 위에 가로로 있다. 1백m 들어가면 주변은 각종 창고들로 어수선하다. 그 사이에 1990년에 서광농업협동조합 이한영李漢榮 조합장 등이 지은 낙류정이 있다. 현판은 가암柯巖이 썼다.정자 앞에 낙류정 건립 기념비가 있다. 기념비에는 "옛 광산군 극락면 유촌리(새말)가 이제 호남의 웅도 광주 유덕동으로 개편 변천됨에 따라 우리 유촌은 불원한 장래 시의 중심부를 이루게 될 것인 바 촌로 유지 등의 발기로 노후한 기존의 회로정會老亭을 철거하고 초분골 풍치림 경승에 고전적인 정각을 재건하자는 중의를 모아 추진위원회를 구성, 촌민 다수의 자발적인 협찬으로 1990년 7월 23일 극락과 유촌을 상징하는 낙류정을 준공하였다"고 했다.낙류정은 유리문을 만들어 내부를 거실처럼 꾸며 의자며 책상, 선풍기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인근 노인들이 모여 소일하는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는 듯 했다.주변에는 팽나무 3그루와 버드나무 1그루가 있다. 수령이 350년 쯤 되어 두 그루는 서구청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2018-05-24 | NO.239
  • 낙암 樂庵 낙암정
    광산구 신룡동 391-12 (신촌마을)《광주읍지》(1924)에서 낙암은 주의 북쪽 40리 거리에 있다고 했다. 신촌마을 뒤 중앙 언덕에 기씨의 재각인 청량재淸凉齋와 함께 낙암정이 있다. 낙암은 고봉 기대승(1527~1572)이 성리학을 강론한 곳으로 1570년에 짓고 그 아래 동편에 수칸數間의 우사寓舍를 지어 찾아오는 학자들을 머물게 했다. 정내에는 1919년에 식재 기재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낙암이건상량문樂庵移建上樑文'이 있고 1934년 석사 기동설의 '낙암이건기樂庵移建記'에 따르면 이 정자는 고봉 기대승 선생이 고마산 기슭에 초막을 짓고 학문을 연마하는 장소로 활용해오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쇠락된 것을 후손 낙암 기정룡(1670~1738)이 중건한 후 몇 차례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고 했다.현재의 낙암정은 고마산중叩馬山中에 있었던 옛날 기대승의 낙암이 아니라 기정룡의 후손들이 그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해 옛날의 정명을 빌려 이곳에 다시 이건한 별도의 정자이다. 고마산은 낙암이 들어선 이후 낙암산으로 이름이 바뀐 듯 하다.이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2 칸의 팔작지붕 형태의 기와집으로 사방이 트여 있어 여름날 주민들의 쉼터로도 활용되고 있다. 옆에는 연륜이 묻은 은행나무와 아름드리 고송이 구불구불 뻗어 있어서 세월의 유구함을 보여주고 있다.현판은 해강 김규진의 단아한 예서체 글씨이다. 기둥에는 묵경사계墨卿司戒, 감고영대敢告靈臺, 당사이존當事以存, 미타기적靡他其適, 동정무위動靜無違, 표리교정表裏交正, 출문여빈出門如賓, 승사여제承事如祭 등 8개의 주련이 걸려 있다.“먹으로 경계를 적어, 감히 靈臺에 고하노라! 일을 당해서는 그 일에만 신경 쓰고, 다른 데 마음을 두지 마라! 움직일 때나 가만히 있을 때나 어기지 말고, 겉과 속을 모두 바르게 하라! 집 나설때는 손님 만나러 가듯 단정하게 하고, 일할 때는 제사지내듯 정성껏 하라!”기정룡은 광주 소고용리小古龍里 천동泉洞에서 기진성과 평양박씨 박상현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1910년에 후손인 기동두에 의해서 낙암유고樂庵遺稿인 <낙암집樂庵集>이 간행되었다. 5권 1책의 목활자본이다. 서문을 쓴 송병순은 기대승이 살았던 터에 기정룡이 암자를 짓고 살았기 때문에 낙암이라고 일컬어졌으며 손재 박광일로부터 기대승 이후의 1인이라고 평가를 받았다. 발문은 기우만과 기동두가 썼다.
    2020-03-12 | NO.238
  • 난계정 蘭溪亭
    남구 군분로77번길 26 (주월2동) 1938년 소암紹菴 김영철金永喆이 선친인 난계蘭溪 김태석金泰錫(1872~1933)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원래는 효지면 주월리 지금의 주월동 백운광장 일대에 초당을 짓고 행화촌을 꿈꾸다 떠났다. 1989년 퇴락되었다가 이후에 다시 현재의 위치로 옮겨지었다. 지금의 남구 주월동 월산마을(명지아파트 뒤)이다. 남구 주월동과 서구 풍암동 사이의 노인고개라고 부르는 왼편이다.노인고개는 금당산에서 옥녀봉으로 이어진 능선이 북쪽으로 내려 서재를 이루고 짚봉산으로 이어진다. 서창 방면에서 광주 읍내로 들어오는 지름길로 지금의 회재로懷齋路로 1896년 지도군수가 서창에서 회재 박광옥의 고향인 개산을 지나 이 고개를 넘어 들어왔다고 전한다. 난계정을 가는 길은 월산마을이 끝나는 곳에서 짚봉산 등산로와 갈라지는 첫길 왼편으로 오솔길 따라 100여m 가다 보면 뽕나무밭 뒤에 채소밭 보다 높은 곳에 창효각彰孝閣을 왼편으로 자리하고 있다.김태석의 난계정원운과 남강 정순환과 만헌 김병준의 시가 있다. 당시에 정자가 있었던 곳의 풍경은 긍당 이기영의 기문에서 "광산光山의 서쪽 계봉桂峰의 아래에 시내를 향하여 날을 듯이 솟아있는 난계라는 한 정자가 있다. 이 정자의 주위를 살펴보면 산수연하山水烟霞의 맑은 풍치가 좌우로 둘러있어 고요히 거처할만한 높은 승경을 이루고 있다"고 말하고 "그의 덕德이 난초처럼 향기로왔고 그의 기운이 시내처럼 맑았기에 이에 알맞은 근사한 물명物名을 취하여 그의 호를 난계라 한 것"이라고 밝혔다.김태석의 ‘서석기瑞石記’는 그의 문집 <난계유고蘭溪遺稿> 권2에 실려 있다. 주로 무등산의 정상을 중심으로 주변의 승경을 적고 있는데, 풍혈대風穴臺, 규봉圭峰, 물외암物外菴, 증심사證心寺, 약사암藥師菴, 원효사元曉寺 등의 이름이 보인다. 이 작품은 작자의 유산 내용이 너무 간략해 산기류山記類 같은 유산기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김태석은 효행이 깊어 중추원 의관을 제수받았는 데, 이 기념비석이 난계정에 자리하고 있다.
    2020-03-12 | NO.237
  • 난계초당 蘭溪草堂 (난계정사)
    남구 양과동 조선 중기의 문인,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난계 박종정朴宗挺(1555~1597)이 1576년 식년시에 진사 2등 21위로 합격했다. 뜻을 더해 송광사에서 열심히 공부했으나 건강이 좋지 않아 집에 돌아와 난계蘭溪라는 초당을 지었다. 당쟁에 가담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자유롭고 마음 편히 살다 떠난 곳이다. 자는 응선(應善), 호는 난계(蘭溪), 본관은 함양(咸陽.이다 남구 양과동 출신으로 해남 훈도 계공랑(啓功郞) 박인朴認의 아들이며 안중관安重寬의 사위이다. 6살 때, 벽에 걸어놓은 호랑이 그림을 보고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한 걸음도 뗄 수가 없구나![一物無所見 一步無得行]”라 할 정도로, 자질이 총명하고 늠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도성을 떠나 딴 곳으로 피란하자 형인 진사 박천정朴天挺과 함께 제봉 고경명과 건재 김천일을 도와 군량과 의병을 모집하여 의병에 참여하였다. 임진왜란 때 동지들과 적병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조목조목 진달하여, 조정으로부터 장원서별제(掌苑署別諸)를 제수 받았다.1597년 정유재란에 임금을 호위하기 위해 서해 바다에서 배를 타고 한양으로 가기 위해 배를 타려고 영암으로 가는 도중 왜적이 공격해오자 영암 월출산 쪽으로 피신을 하였는데 왜적을 만나 부자가 함께 순절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시신을 안은 채 죽었다 한다. 이러한 효성이 조정에 알려져 효자정려孝子旌閭를 내렸다.    1907년 목활자본 상하1권 <난계집蘭溪集>이 있고 고전국역화사업으로 2013년 보성문화원 발행 <蘭溪朴宗挺先生文集: 난계 박 종정 선생 문집>이 있다.
    2020-03-12 | NO.236
  • 남강정1 南康亭
    남구 포충로 701 (원산동)   제봉산 하록에 있었다고 하는 남강정은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일설에는 참판 이시원(李始元)과 집의 이조원(李調元)이 여러 동생들과 참의인 하천 고운과 함께 계를 경영했다는 수계소修契所라는 기록도 있다. 옛날 그 자리에 황산사黃山祠의 강당인 숭의당崇義堂이 들어서 있다. 황산사는 고경명의 중부인 송설松雪 고중영高仲英과 귀암龜巖 고경조高敬祖, 죽천竹泉 고성후高成厚, 청계淸溪 위덕의魏德毅 등을 향사한 사우이다. 원래 이 터가 광산이씨 소유인 남강정(南康亭)의 터였다. 고경명의 조부인 고운(高雲)이 청심당(淸心堂) 이조원의 문인으로 그의 손서(孫婿)가 되었기 때문에 고씨문중에 이 땅을 기증해 이 사당을 짓게 한 것이다. 또한 이시원과 이조원이 공동으로 축조했던 경연대慶筵臺가 있었다고 한다.필문 이선재의 큰아들 참판 양심당 이시원 등 5형제와 여러 문인들이 학문과 자연을 즐기는 곳이다. 이들 5형제가 오늘날의 고시를 합격해 오원거족五元巨族이라고 부르는 명문가이다.
    2020-03-12 | NO.235
  • 남강정2 南江亭
    광산구 첨단1동 (미산마을)   광산구 오룡동 미산마을 뒷산 정마봉停馬峰 아래 영산강이 바라보이는 곳에 임진왜란 이전 15세기 무렵에 도총부도사都摠府都事 등을 지낸 남강노어南江老漁 이몽린李夢麟이 지었던 정자가 있었다.정마봉은 모악(暮嶽) 권율(權慄 1537 ~ 1599)장군이 전란이 일어나자 광주목사에 제수되었다. 어느 날 이곳을 지나가다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말굽을 멈추는 기마의 태도를 이상히 여겨 즉시 내려 정자를 찾았다는 일화가 전하고 있다.이러한 사연으로 이 산에 향후 충신들이 머물렀던 이 정자를 일명 충의정忠義亭이라고 했고 이 산봉우리를 정마봉停馬峰라 했다 한다.  이때 권율은 이몽린과 김천일, 박광옥과 의논해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약속하고 고경명, 송제민 등과 함께 시주를 나눈 운명의 장소였다. 권율은 또한 이몽린의 아들 추암 이세환李世環과 재종제 서암 이완근李浣根 등을 알게 되어 그들을 막하장으로 임명하여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우는 기회를 갖도록 했다.
    2020-03-12 | NO.234
  • 남덕정 覽德亭
    남구 석정동 120   석정동 출신의 나주나씨 지재 나창을 선조로 1881년 덕암德巖 나도규羅燾圭(1826-1885)가 건립한 휴양 겸 강학소인 초가이다.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서쪽 30리에 있다. 마을 북쪽 길로 가다보면 왼쪽 모퉁이에 남덕정이 자리하고 있다. 현와 고광선 등에게 성리학과 도덕을 전수하여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곳이다.이듬해 초가가 무너져 겨우 유지되었으나 1950년에 이르러 그의 손자인 송암 나종우와 여러 제자들의 협력에 의해 중건했다. 1989년에 지붕개량, 1990년에 봉미담의 석축을 정비하였다. 정자의 한 칸을 봉양서실鳳陽書室이라 했다. 학도들을 가르치는 강학장으로 활용되면서 어진 인재를 양성한다는 육영제育英齋라는 이름이 그의 문집 <덕암만록德岩漫錄>에 있다. 정자 앞에는 봉미담鳳미潭이라는 연못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광주읍지에는 봉미鳳味라 했다.정자의 형태는 시멘트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원주의 기둥을 세운 앞면 3칸 옆면 2칸의 골기와 팔작지붕이다. 건물의 어칸御間은 대청마루로 했고 좌우에 온돌방을 배치하고 앞면에는 고주를 세워 납도리를 올린 5량집이다. 처마의 처리는 선자서까래이며 전후좌우퇴집 형태로서 회벽마감을 하였고 좌우측에는 간문을 설치하였다. 정자 주변에 철제울타리를 둘러놓았다.정내에는 한말 의정부참정과 탁지부대신을 지낸 해사 김성근의 현판이 판각으로 걸려있다. 나도규가 지은 ‘남덕정원운覽德亭原韻’ 시가 전하고 있다. 潭上飄然一小亭 연못위의 작은 정자 날을듯이 서 있는데林端高出洗塵冥 수풀위에 높이 솟아 티끌없이 깨끗하네.深園花樹山仍紫 깊은 동산 꽃 빛깔에 산 얼굴이 붉어지고短崖篁梢水蘸靑 짧은 언덕 대그늘에 물 모습이 푸르도다.隨鳳翶翔明德覽 나는 봉황(鳳凰) 뒤따라서 밝은 덕을 살펴보고觀魚活潑此心醒 노는 고기 구경하며 이 마음을 깨우쳤네. 輔仁賴有諸君子 여러 군자(君子) 도움으로 나의 인仁을 닦아가며淸渭同流戒濁涇 맑은 위(渭)와 함께 탁한 경(涇)을 경계했네.<덕암만록德巖漫錄> 2권에는 시 302수, 서 88편, 설 10편, 서 20편, 기 34편, 기타 등, 상당한 분량의 글을 싣고 있다. 석정마을은 광주광역시 남구 석정동 봉황산 아래 깊숙한 곳에 있다. 이 마을은 1957년 광산군 대촌면 15개리가 광주시에 편입되면서 남구 석정동이 되었다. 석정은 원래 돌정지라 부른다. 봉황산에 큰 바위가 있어 독(바위)가 있는 곳이란 의미로 돌정지가 한자를 취하면서 돌정지>돌쟁이>돌석(石)+쟁이(亭)>석정(石亭)으로 변천되었다.
    2020-03-12 | NO.233
  • 남사정 南射亭
    동구 학운동 정자명에서 나타나 있듯 광주읍성의 남쪽에 있던 활터였다. 심신의 단련과 사교 목적으로 활을 쏘던 정자이다. 광주읍성 남문 밖 현재의 전남대병원과 조선대병원 장례식장 사이를 잇는 능선 끝자락에 있었다. 이 활터 정자는 1930년 경전선 철도가 놓이고 능선이 철길 개통될 무렵에 사라졌다. 일대의 풍경을 알리는 팔경에서 남사정의 기적소리라 해서 ‘南亭長笛’이 있다. 옛 남사정 언덕 전남대병원 뒤쪽 산자락을 말한다.   南射亭前線路長 남사정 바로 앞에 긴 선로가 놓였는데蕭蕭鐵笛撼江鄕 스산한 기적소리 강마을을 흔들어놓네.不妨書几春眠罷 책상에 기대어 깜박 졸다 깨어보니坐省橫烟落翠崗 가로누운 기차연기 언덕 위로 흩어지네   이 무렵 남사정 언덕은 ‘바로 앞에 높인 긴 선로’ 때문에 두 동강이가 난 상태였다. 남사정 언덕은 1920년대 말엽 대인동의 구광주역과 남광주역 사이를 초기 경전선 철길이 산등성이를 가로 지르면서 지금처럼 두 토막으로 잘려 나갔다.묵은 바탕은 종종 남사정 아래쪽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뒷날 경전선 철도와 순환도로가 지나면서 조선대병원 쪽에서 내려오는 산줄기가 두 토막으로 나뉘는 바람에 지금으로선 현실감이 떨어진 얘기가 됐다. 원래 이곳은 전남대병원 뒤쪽까지 하나의 산줄기였다. 남사정은 옛 학동 배수지(현 조선대 장례식장 터)에서 좀 더 동쪽으로 뻗어 내려온 언덕배기에 자리 잡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2020-03-12 | NO.232
  • 남석재南石齋
      남석재는 광산구 동호동(남동마을)에 남석 南石 심종대沈鍾大(1882~1959)가 지었다. 송사 기우만의 문인으로서 시서에 능하고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 동호동 남동사에는 초상화를 봉안했다.동구 계림동 계림오거리 금성건재사 심만구 대표의 부친이다.
    2020-03-12 | NO.231
  • 남석정 南石亭
    북구 임동   광주천변에 버드나무가 많은 유림촌柳林村[버드리]에 석당(石堂) 조병일趙炳一(1859~1905)이 1905년 강원도관찰부 주사江原道觀察府主事를 마지막으로 퇴휴해 만년에 건립해 사우들과 기문을 읊으며 행락했던 곳이 남석정이다. 유림촌은 1935년에 유동과 임동으로 분리되었다. 조선 후기 때 기례방면에 속하였고, 1947년 임동이라 부르기 시작했던 목가적인 풍경을 품고 있었던 마을이었다.조병일의 자는 학여(學汝), 본관은 한양이다. 아버지는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을 지낸 운재(雲齋) 조용원(趙龍元)이다.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고제(高弟)인 춘계(春溪) 송의섭(宋毅燮)에게 학문을 수학하여 유학과 경서에 뛰어나 향당과 붕우들이 우러르며 모범으로 삼았다.그의 문집 <석당실기石堂實記>가 1967년에 간행되었다.  
    2020-03-12 | NO.230
  • 남애정 南涯亭
    북구 서방동   <조선호남지>(1934) 누정편에 태봉산胎封山이 있는 서방면 태봉리에 효자 문치붕文致鵬이 세웠다는 남애정이 있었다. 정자가 있었던 자리는 태봉산 남쪽 밭 경양방죽 인근으로 보인다. 그림같이 목가적인 풍경을 자랑하는 곳이었다.남애정에는 덕은德隱 송병관宋炳瓘(1875~1945)이 쓴 기문이 전한다. 망국을 통탄하고 '경전경독 여세상위耕田更讀 輿世相違', 즉 세상과는 괴리가 있어 밭을 갈고 책을 읽으며 귀거래歸去來했다는 내용이다. 문치붕은 1907년 ‘대한매일신보’에 국채보상을 위한 헌금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는데 이 시에도 그런 분위기가 살짝 비친다. <조선호남지> 기록과 기문을 쓴 이를 보면 1900년대에 지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완전히 변해 그 흔적조차 사라지고 정자 주인의 시만 남아 있다. 태봉산 남쪽, 경양방죽 아래의 드넓은 들판 꽃들까지 활짝 피니 숨어살기에 좋네 나라를 걱정하듯 봄비는 덧없이 눈물처럼 내리고  밭을 갈다 돌아와 옛 사람의 글을 읽네맑은 연못에 물고기 뛰어오르자 연꽃은 움찔하고 외딴 마을 닭 울음소리에 대나무가 잠깐 그늘을 거두네  저 세상과 달리 여기선 그래도 감흥이 많아 가을 정취에 생각하며 늘그막까지 살리요
    2020-03-12 | NO.229
  • 납량정
    서구 화정로309번길 45 (농성동)농성공원은 서구 농성동 사거리에 있다. 살타공원이라 불렀던 이곳은 지금은 그렇게 부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 오래전에 아르헨티나의 살타(Salta)시와 서구와 자매결연을 맺으면서 기념으로 이름을 붙였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농성공원에는 예전에 세워진 모정과 함께 하나의 정자가 있다. 납량정納凉亭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한여름 무더위를 식히라는 납량특집이라는 말처럼 여름철에 더위를 피해 서늘함을 맛보라는 곳이다. 기문이 없어 언제 세워졌는지 알 수 없다.마카오에 한 부자가 1925년에 만들었다는 오문노원澳門盧園을 1970년대초 마카오정부가 사들여 노렴약공원盧廉若公園이라 하는 데 중앙에 같은 이름의 정자가 있다.또 중국 저장성[浙江省] 후저우시[湖州市] 궁위안로[公園路]에 있는 전업회관錢業會館은 청나라 광서제光緖帝 때인 1903년 건립되었는데 민간금융업계 인사들이 집회를 열어 사무를 논의하고 재신財神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이 회관의 정원 안에는 태호석太湖石으로 조성한 가산假山이 우뚝 솟아 있고, 가산의 동굴을 지나 오솔길을 따라가면 산꼭대기에 같은 이름의 납량정納凉亭이 있다. 이곳엔 지하철 농성역이 있다. 1번 출구로 나오면 우뚝 선 동상이 하나 보인다. 의병장 죽봉竹峰 김태원金泰元 장군의 동상이다. 화승총을 손에 든 채 한 손으로 어등산 봉우리를 가리키고 있는 굳센 얼굴이다.
    2018-05-24 | NO.228
  • 농은정1
    광주 쌍유리雙柳里에서 출생한 농은農隱 이엽李爗(1729~1788)의 은거터 농은정農隱亭이 있었다. 서석산 서쪽 구림지역에 농사를 감독하기 위해 지었으며 자신이 농은당기(農隱亭記)를 직접 남겼다.이엽의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시회(時晦), 호는 농은(農隱). 아버지는 이상규李相奎, 할아버지는 이윤李潤이다. 이엽은 1763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777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부사과가 되었다. 이어 영묘실록랑英廟實錄郎, 선조보감찬집랑先朝寶鑑纂輯郎, 전적, 공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문장재행文章才行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이기경李基敬, 홍낙명洪樂命, 서배수徐配修 등과 교유, 학문을 깊이 토론하였다. 특히 주역에 조예가 깊었으며, 목민후생牧民厚生의 실학사상에도 관심이 있었다.  1779년 유광천, 기국진과 함께 북한산과 도봉산을 유람하고 쓴 '북한도봉산유기北漢道峰山遊記'가 있다. 그의 저서로는 <농은집農隱集> 7권이 있으며, 이밖에도 <학고집學古集>, <전거록田居錄>, <낙하록洛下錄> 등이 있었다고 하나 전하지는 않는다. <농은집>은 1960년 족후손族後孫 이도형李道衡 등이 간행하였다. 권두에 기정진奇正鎭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이기완李起完과 이도형의 발문이 있다. 권7은 부록으로 가장, 행장, 묘지명, 묘갈명, 제문, 농은당기農隱堂記, 농은당운이십영農隱堂韻二十詠, 만장 등이 수록되어 있다.쌍유리는 두 그루의 버드나무로부터 유래한 지명이다. <호구총수>(1789)에 ‘쌍류촌雙柳村’이라 했다. 1914년에 ‘쌍촌리雙村里’로 개칭되어 극락면에 편입했고 1973년 쌍촌동이 되었다. 쌍촌마을의 원래 위치는 한국병원 뒤 현대아파트 자리이며 400여년 전 전의이씨가 마을을 개촌했다.
    2018-05-24 | NO.227
  • 농은정2
    서구 주월동농은정農隱亭은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서쪽 10리에 있다.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의 제자인 참판 농은農隱 이돈식李敦植(1847~1920)이 세웠고 춘담 기동준(1860~1918)의 기문과 현와 고광선(1855~1934)의 명문이 있다. 옛 광주은행 화정동지점과 보성보寶城堡 인근 주월동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자주인 이돈식은 시문에 능했다. 운람雲藍 정봉현鄭鳳鉉(1852∼1918)이 제영 시가 1924년판 <광주읍지>에 남아 있다.오늘날의 이 정자가 임천林泉 위에 자리하니    지난 옛날 선세유적 계승하기 어렵도다봄이 깊은 동산 위에 맑은 화죽 가득하고          비가 내린 하늘 아래 많은 상마 자라도다참된 재미 얻으려고 이 가운데 은거하고           모든 물욕 멀리하여 맑은 신선 되었도다밭을 갈고 글 읽으며 모든 효성 다하지만          지난 옛날 선인들을 어찌 감히 따를손가
    2018-05-24 | NO.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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