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285
게시물 검색 폼
  • 경의당景義堂
    경의당景義堂은 학산사鶴山祠 경내에 있는 강당이다. 경내에는 사우인 학산사와 경의당, 학산사 묘정비 등이 세워져 있다. 서창동 불암마을 외진 곳에 있는 학산사는 조선 중기 문신이며 의병장이었던 삽봉揷峯 김세근金世斤(1550∼1592)을 모시는 사당이다. 해마다 음력 3월 22일에 춘향제를 지낸다. 광주향교의 <광주지>(1964)에는 학산사 동문간에 만취영당晩翠影堂이 있어 만취 김용희를 제향했다 한다.경의당景義堂은 정면 4칸의 측면 2칸으로 내실을 두고 쪽마루를 설치했다. 건립 때 경의당과 학산사의 현판은 전북 김제 출신인 강암 송성용(1913-1999)이 썼다.광주 지역의 유림들이 사우 창열단彰烈壇을 건립하였고, 임진왜란 당시 순절한 김세근의 충의정신을 기리고 그의 넋을 추모하기 위하여 1958년 지역 유림들이 뜻을 모아 학산사를 건립했다.
    2018-09-10 | NO.270
  • 경장각 敬章閣
    광산구 용아로 460경장각은 전의이씨 문중에서 석탄石灘 이신의李愼儀(1551~1627)가 임금에게서 하사받은 선조대왕의 어필 병풍과 평소 애용하던 거문고인 수양금首陽琴을 영구 보존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광주읍지>(1924)에는 유애사遺愛祠의 유지에 지었다고 한다. 후석 오준선의 상량문과 식재 기재의 기문이 있다.1754년에 건립된 유애사가 있었으나 대원군의 서원훼철령 이후 1901년 서적과 거문고 유품을 임시로 보관하기 위해서 금서재琴書齋를 지었다. 1919년 금서재를 철거하고 건립한 것이 경장각이다. 1955년과 1985년 두 차례의 보수를 했다. 유애사 훼철 후 81년 만인 2000년에 경장각 후면에 새로운 단청 사우를 마련해 2005년 유애서원遺愛書院으로 성균관成均館에 등록하였다.이신의는 1582년 학행學行으로 천거 받아 예빈시봉사禮賓寺奉事가 되고 1584년 참봉, 이어 종묘서봉사宗廟署奉事를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향군鄕軍 300명과 함께 적과 싸워 공을 세우고 사옹원직장司饔院直長이 되었다. 광해군 때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고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유폐하려는 데 대해 항소를 올렸다가 회령會寧에 유배되고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와 1627년 형조참의·형조참판을 역임했다. 같은 해 정묘호란으로 왕을 호종하여 강화로 가던 도중 수원에서 병사했다.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문집에 <석탄문집石灘文集>이 있다.
    2020-03-11 | NO.269
  • 경현당 景賢堂
    남구 구만산길 34(원산동)광주 남구 원산동 뒷산 제청골에 양심당과 경현당이 잇었다. 필문 이선제의 큰 아들 양심당 이시원(1428~1488)이 아버지의 시묘살이를 마친 후 그 옆에 양심당養心堂을 지어 후학을 가르치며 머물렀다. 양심당의 본래 '맑은 마음을 바르게 가른다'는 뜻으로 이시원의 아호이다.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그의 학덕이 높아 명성을 얻으며 그를 따르는 후학이 늘어나자 그의 마을 옆에 경현당 건물을 지어 강학 장소로 활용했다. 이시원은 광산 이씨 필문 이선제의 큰 아들로 1433년 세종 10년에 태어났다. 이시원은 일찍 과거에 올라 예조참판禮曹參判을 거쳐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 등의 요직을 두루 거친 오원五元 중의 한 사람이다. 여기서 오원五元은 이시원의 5형제를 말한다. 옛날 양심당 터에 5칸 접집으로 된 아담한 전통한옥이 그 자리에서 대신하고 있으나 경현당을 대신하는 건물은 없다. 이들 5형제 전부 높은 벼슬에 올라 광산이씨5원화족光山李氏五元華族을 두고 김종직이 전라감사로 부임하자마자 가장 먼저 들린 ‘학덕이 높은 장자가 사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이들이 살았던 곳을 장자동長子洞으로 명명했다.   巨族五元家 거대한 광산 이씨 오원五元집 태어나니一元遯跡嘉 둔적遯跡한 일원 행적 한없이 아름답네.右文今世上 문화를 숭상崇尙하는 오늘의 이 성세成勢에毋使玉音遐 서로가 잊지 않고 옥음玉音을 나눴으면 
    2020-03-11 | NO.268
  • 계정
    서구 유촌동 (옛 극락면)한말 효자였던 정석동鄭碩東이 지었다는 계정溪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광주읍지》(1879, 1924)에는 주의 서쪽 10리에 있고 여러 사람의 제영이 있다고 했다. 정석동은 하동정씨 문절공 좌찬성 정수충鄭守忠(1401~1496)의 후손이다. 주역, 소학 등의 경서와 산수를 좋아하여 찾아다니며 시를 읊었다. 병환 중인 부모의 생사를 알기 위해 대변을 입으로 맛을 보고 부모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부모의 입에 혈지血指하는 등 효도를 다했다. 『광주지』 효행편에 정석동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있다.농은 이돈식의 시가 있는가 하면 정자 주인이 계정에서 읊은 원운에 당시의 풍치를 나타내고 있다. 시에서 말하는 계천은 어디쯤일까. 광주천에서 극락강으로 흐르는 실개천이 많아 짐작이 어렵다. 정석동의 원운은 다음과 같다.옥후송균함외천 屋後松筠檻外川 집 뒤에는 솔과 대밭이요 난간 밖은 계천溪川인데영구어아유기연 靈區於我有奇緣 아름다운 이 신기한 곳에서 좋은 기연 맺었도다.사양로입평사우 斜陽鷺立平沙雨 비 내리는 모래 개펄 위에 하얀 백로가 서 있고장일우경광야연 長日牛耕廣野烟 연기 끼인 넓은 들에 누런 황소가 밭을 가네수영단단명월야 樹影團團明月夜 겹겹이 덮은 나무 그림자에 밝은 달밤 깊어지고산광점점권운천 山光點點捲雲天 여기저기 산빛 위에 하늘 구름 사라지네금오자무가오화 琴吾自撫歌吾和 내 스스로 거문고 타며 화음 맞춰 노래하는 데항리생애송백년 巷裡生涯送百年 한가로운 길거리에서 백년세월 보냈도다.
    2018-05-24 | NO.267
  • 고난정 苦難亭
    남구 제중로 77(양림동)남구 양림동 역사문화마을, 개화기 선교유적 등 근대 문화유산과 초기 기독교의 흔적이 고스란히 보존된 동네다. 그 일대를 아우르는 해발 108m의 양림산이 있다. 정상에 있는 작은 정자를 누군가 고난정이라 부른다. 정자 현판은 없다.인근에 구한말 당시 척박한 조선 땅에 들어와 광주 최초로 시민장을 치렀던 간호사 엘리자베스 쉐핑(서서평 Elisabeth. J. Shepping)과 목사 유진벨(배유지 Eugene Bell), 오웬(Clement C. Owen) 등과 그 가족 22명 등이 묻혀있는 선교사 묘역이 있다.고난정으로 가는 길은 호랑가시나무 옆 우월순 사택을 지나는 산책로다. 조선에 와서 기독교 선교와 의료, 교육 등을 실천한 선교사들의 흔적과 추모 조형물들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광주시에서도 이 길을 ‘고난의 길’이라고 명명했다. 양림산 일원의 호남신학대와 수피아여고, 사직공원 등 20만㎡에 순교자 기념공원과 문학소공원이 들어섰고, 양림산 보행길, 편의시설 등이 조성되었다. 중국에서 추앙받고 있는 정율성 선생이 소년기를 보냈고, 김현승과 황석영, 이수복 등 유명 문인들이 양림동에 머물며 창작활동을 펴기도 했다. 
    2020-03-11 | NO.266
  • 고암정 苽菴亭
    남구 양과동 (광곡제 인근)남구 양과동은 중앙의 대촌천大村川을 따라 비옥한 충적평야가 펼쳐져 있어 지금도 물산이 풍부하고 풍치가 아름다운 고을이다. 이곳은 목가적인 풍경으로 많은 선비들의 은거터로 자리했다. 조선 중기에 당시 대촌면 이장리 광곡마을 이관산 기슭에 생원이었던 경주최씨 생원 최운환(崔雲漢, 1444~1499)이 지냈던 은거터 고암정이 있었다. 최운한의 부친은 1447년에 생원진사시 3등 56위로 급제했고 영사정 최영한의 형이다. 남구 지산재芝山齋는 처음에는 최운한과 함께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 857∼?), 영사정(永思亭) 최형한(崔亨漢,1460?~1504), 약포(藥圃) 정오도(鄭吾道,1641~1732) 등 등 네 분을 배향한 것으로 보아 향리에서는 정신적 지주였던 것으로 보인다. 지산재는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헐려 없어졌던 것을 1922년에 다시 세우면서 최치원을 모시고 있다. 인근에 그의 후손으로 보이는 인재(忍齋) 최인환(崔仁煥, 1878~1958)의 강학소 겸 유림들이 모여 강회를 여는 곳으로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수경정守敬亭이 있었다.*2023.6.22 수정
    2020-03-11 | NO.265
  • 공북루 拱北樓
    북구 독립로237번길 (광주일고 부근)   공북루는 주州의 북쪽을 향한 누각을 말한다. 광주읍지(1879, 1924)에는 ‘주의 북쪽 5리에 있고, 옛날에는 절양루折楊樓라 칭하였는데 1670년 목사 오두인 때 공북루로 고쳤다. 목사 신석유가 중수하였다는 기문이 있다’고 기록했다. 조선 태조 1392년 무렵 건립으로 추정된다. 북구 누문동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 부근에 있었다. 1792년 편간된 광주목읍지도 같은 내용을 전하고 있는데, 이를 뒷받침하듯 18세기 무렵부터 제작된 지도들은 모두 ‘공북루’라고 표기하고 있다. 북北은 임금은 신하를 대할 때 남면하고[君南面] 신하는 임금을 대할 때 북면한다[臣北面]는 조선시대 때 군신간에 대하는 규정에서 비롯한 것이다. 공拱은 가슴 높이에서 두 손을 맞잡고 인사하는 것이다. 공북이라는 이름은 북쪽 도성에 계시는 임금에 대한 충성의 의미를 담은 것이다. 누각에서 공북하는 자격은 임금이 직접 내려준 중앙 직책 벼슬아치만이 가능하다. 백성들은 북문에서 예를 갖출 뿐이다. 공북루는 지방관리가 사신을 접대하거나 지방 유지들과 연회를 여는 공적인 장소로 사용됐다. 국가적 행사 망월례 등을 지냈다.공북루는 앞면 5칸 옆면 4칸의 규모였고 머리엔 웅장한 팔작지붕을 이고 있었다. 주변에 연지를 두고 청아한 연꽃을 심었다. 누문동은 누樓의 문門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누문이 되었다. 북구 유동과 임동 일대 유림숲이라는 울창한 버드나무숲이 있어 공북루에서 관망하며 즐겼다. 광주읍내로 들어서는 초입인데다 주변의 너른 들녘 탓에 2층의 누각이 더욱 돋보였다.공북루는 중도에 `절양루(折楊樓)’라고도 했다. 전에 절양루를 언급할 때 다룬 것처럼 누각이 `버드나무를 꺾는다’란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이곳이 광주의 초입인 동시에 광주를 떠나는 사람들의 마지막 경유지였던 까닭이었다. 버드나무, 또는 버드나무를 꺾는다는 행위는 이별을 상징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유형원의 `동국여지지’란 지리서에 따르면, 이 일대에 `누문원’이란 여관이 있었다고 했는데 이 역시 공북루가 갖는 공각적 맥락에서 생겨났을 것이다. 옛날에 절양折楊이란 ‘버드나무 가지를 꺾는다’는 의미다. 17세기 중반 이전부터 버드나무 숲이 있었다. 광주천의 범람을 막기 위한 제방을 축조하면서 심었던 나무가 자라 울창해진 것이다. 지난 1백여년간 이 유림숲은 물론 강둑의 숱한 아름드리 나무들이 대부분 사라졌다.보한재 신숙주가 쓴 희경루에 대한 기문에서 “옛날에는 누각이 이 고을 치소治所의 북쪽에 있었는데, 이름을 공북루라 했었으나 허물어진 지 이미 오래 되었다. 이번에 태수 죽산 안철석이 부임하여 1년도 되지 않았는데, 정사를 다스리는 바쁜 가운데 틈을 내어 고을의 어른들을 모아 놓고 물었다. 고을에 유람할 장소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사실이오. 더욱이 광산은 이 도의 요충지로 사객이 벌 모이듯 하는데, 막히고 답답하고 깊고 가려져서 시원하게 해 줄 길이 없으니, 이를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하니 모든 어른들이 말하길, “높고 밝고 시원스러운 땅으로는 공북루의 옛터만한 곳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공북루가 있는 지역은 대도시에 해당한다. 공북루에 대한 최초의 문헌기록은 `동국여지승람’이다. 특히 이 책이 신증(新增), 즉 일종의 증보판으로 간행되기 전부터 공북루를 언급한 것을 보면, 늦어도 15세기부터는 이 누각이 존재했음이 분명하다. 동국여지승람 편찬을 총괄한 보진재 노사신이 1453년 광주읍성 공북루에 올라 읊은 시에서 공북루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 나라의 빛난 번영은 온 세상이 흠모하니만성滿城하는 문물 속에 어진 선비 가득하네.임금님의 높은 윤음綸音 서로 다퉈 환영하고대궐 북문北門 바라보며 일편단심 바쳤도다.
    2020-03-11 | NO.264
  • 관가정 觀稼亭
    봉산정 주인 고재현(高在鉉, 1885 ~ 1967)이 '光州觀稼亭'이라는 시문을 <지산유고(志山遺稿)>에 남겼다. 담양 관가정이 옛 광주 영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담양 관가정은 광주호 바로 인근으로 담양군 고서면 분향리 241-16이 그 위치이다. 창녕(昌寧) 조씨인 조희윤(曺喜贇)과 조치선(曺致善) 1949년 농사일을 살피기 위해 지었다가 1992년 복원하였다. 관가정은 널따란 논 한 가운데에 있다. 400여년 된 당산나무와 아주 잘 어울린다. 정자이름에서 씨를 뿌리고(稼). 작황을 살피기(觀) 위해 즉, 농사의 감독을 위한 전사적(田舍的), 장사(莊舍:농장)적 권농의 성격인 찰농지소(察農之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관가정(觀稼亭)의 제호는 해위(海葦) 윤보선(尹潽善 1897~ 1990) 전 대통령의 글씨이다.
    2020-08-28 | NO.263
  • 관간정
    서구 유덕동 (덕흥마을)유덕동 마을의 원래 명칭은 덕산이었다. 1914년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덕흥으로 부르게 됐다. 마을의 역사는 500여년이 된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원래 한씨 성촌이었다고 전해지나 현재 나주 오씨와 남평 문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이 마을 야트막한 덕산德山(해발 35m) 정상에 느티나무가 자라고 있다. 그 북쪽으로 대동여지도에 ‘칠천漆川’이라고 명명했던 극락강極樂江을 앞에 두고 산의 능성이에 관간정觀澗亭이 있었다. 정자 이름에서 보면 간澗은 산골 물 산골짜기를 나타내는 말로 물길에 정자가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일대는 산간수도山間水道란 말처럼, 산과 산 사이의 물길이 골짜기를 따라 흐르는 시냇물이 뱀처럼 꿈틀거리는 곡류가 흐르고 있다.마을 뒷편 광주시의 서구 치평동과 쌍촌동 사이의 영산강 구간을 일컫는 지명 극락강변은 오래전부터 주변 초등학생 소풍지역으로 유명하다. 도시민들의 주말 휴식처로도 이용되고 특히 낚시터를 찾는 외지인들이 늘고 있다. 인근에 운암雲岩 정태만丁泰晩이 생전에 유유자적하며 세운 정자 운암정雲岩亭도 있었다. 1990년에 정찬규 등이 지은 낙류정樂流亭이 유촌동에 있다.
    2018-05-24 | NO.262
  • 관덕정 觀德亭
    남구 사직길 49관덕정은 사직공원 내에 있다. 다른 누정의 강학, 또는 휴양, 놀이와는 다르게 국궁의 사장射場이다. 건물 또한 한옥이 아닌 콘크리트 양옥구조이다. 입구에 관덕정이라 쓰인 석각이 있으며 누정 앞면에 현판이 걸려 있다. 관덕정은 1963년 권승관 회장을 비롯하여 한만교, 김용배 등을 중심으로 1965년에 건립했다. 전통국궁 수련장으로 부지 4천298㎡(1천300평) 규모이며 각종 수목과 화초로 조경도 잘 이뤄져있다. 관덕은 사람의 덕을 본다는 뜻으로 활을 쏘아 목표한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마음과 자세를 바르게 수양해야 함을 강조한 말이다.조선시대에 활쏘기는 향사례라 해서 향음례와 함께 지방교화의 한 방편이었다. 지방관은 1년에 두 차례, 삼월 삼짇날과 구월 중양절쯤에 지역 양반들을 불러 모아놓고 주연을 베푼 뒤에 활쏘기 시합을 펼쳤다. 이런 행사의 주 무대가 관덕정이었다. 일제강점기 때는 관덕정에 준하는 건물이 여러 군데 있었다. 그 중 하나가 광주공원 옆에 있었다. 한량이자 부호인 임병룡이 세운 대환정이 그것이다. 해방 후에 후손이 전주 최씨 문중에 매각되었지만 건물은 그대로 있다. 그것은 화수정으로 현판이 바뀌어 신흥사찰 성거사 옆에 있다.남문 밖에는 남사정, 북문 밖에는 북사정이란 활터 건물이 있었다. 남사정은 조선대병원 장례식장 근처, 북사정은 대인동에 있었다고 한다. 모든 활터의 기원이 관덕정이고 본래는 광주읍성 안에 있었다. 문화재청은 건립된 지 50년 이상 경과된 근·현대 체육시설 중 문화재적 가치를 지닌 관덕정을 2016년 2월 문화재 등록을 예고했다.
    2020-03-11 | NO.261
  • 관수정 觀水亭 1
    광산구 내동송동길 9-71   지족암 오겸(1496~1582)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명종 때 호조참판, 예조판서, 의금부판사 등을 지냈고 지춘추관사가 되어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고 우의정에 이르렀던 인물이다.그를 기리기 위해 광산재 오응석(1660~1735)이 구곡천이 바라보이는 내동마을에 1726년 무렵 정자를 세웠다. 1840년 폐허가 되었다가 1941년에 중건했다. 세조 때의 명장 양평공 오자치(1426~?)의 6세손으로 사서육경을 독파하고 이곳에서 유유자적하며 지방의 유림들과 문재를 나누며 후진을 교육하였다. 지금의 정자는 1987년에 개축하여 현재에 이른다. 내동마을에는 그를 제향하는 광산사廣山祠가 있다.정자 이름인 관수 곧, 흐르는 물을 바라본다는 뜻으로 이곳 관수정 앞으로 평림천과 황룡강이 만나 흐르고 있다. 앞면 3칸 앞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된 정자이다. 정내에는 김문옥의 '관수정기'를 비롯하여 오헌수의 '관수정후기', 오방선의 '관수정중건기', 오응석의 '관수정원운' 등이 걸려 있는 것으로 보아 예로부터 시인묵객들의 공간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관수정은 여러 곳에 있다. 대구 달성의 관수정, 경남 합천의 관수정, 장성의 지지당 송흠의 관수정, 담양 계월당 조여충의 관수정과 묵은 이정신의 관수정 등 많다."물결을 보고 근본이 있는 것을 안다는 것이며, 그 맑은 것을 보고 나쁜 마음을 씻은 후에 가히 관수觀水라고 할 것이다" 라는 뜻에서 붙여진 정자 이름으로 정해 자신을 다듬는 일을 하겠다는 의지가 담겼다.  
    2020-03-11 | NO.260
  • 관수정 觀水亭 2
    담양군 대전면 대치리 (화암마을)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북쪽 40리에 있다. 찰방 이영선의 아들인 묵은 이정신李鼎新(1593~1674)이 만년을 위해 갈미봉 남쪽에 서옥리西玉里 신촌마을에 지었던 정자이다. 1645년엔 대치면 장안동 선산 아래에 짓고 관수재觀水齋라 하였다. 이어 1695년에 지은 것을 관수정이라 했다. 1918년에 1차로 중수했다.후손들이 1970년 담양군 대전면 평장리 회암마을 야트막한 야산에 중건하였고 2000년에 중건하였다. 기암 정홍명, 창주 나무송, 청사 고용후 등의 차운이 있고 만운 정충신의 기문 등 8개의 현판이 있다.관수觀水라는 말은 물을 본다는 의미이다. 노자의 도덕경 제8장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해주면서도 다투지 않고水善利萬物而不爭 뭇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머문다處衆人之所惡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故幾於道”라는 말이 있다. 이정신은 인목대비 유폐사건으로 귀향하여 수기치인한 사람이다.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격문을 보내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던 그는 정치의 일선에 있지 않았지만, 학문의 쓰일 곳이 어디이고 끝이 무엇인지를 알았던 인물이다. 담양 대전면의 관수정에서 칩거하며 남긴 시가 <묵은유고默隱遺稿>에 남아 있다.  묵은 이정신의 묵은집은 1907년에 그의 9세손인 이철수가 여기저기 흩어진 유고를 모아 간행한 것이다. 묵은집은 1권과 2권으로 되어 있다. 1권에는 시가 모두 183 수 실려져 있는데, 그 중에는 이정신과 화답한 다른 사람들의 시도 몇 편이 들어  있고, 2권에는 서가 1편 기가1편, 문1편과 , 잡저로 <제선명>, <갑자역괄시모의사실약>,<병자창의시사실약> 등 5편이 있으며, 부록이 실려있다.
    2020-03-11 | NO.259
  • 관어헌(觀魚軒)
    광산구 안청동옛 하남면 안청리, 광산구 안청동에 조선 후기의 문신 관어헌觀魚軒 박양동朴陽東(1829~1905)이 지어 지낸 정자이다. 안호(安湖) 박제방(朴濟邦)의 아들로, 아버지에 이어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평소 성품이 너그러우면서도 엄격하였고 학문을 즐겼으며, 여러 후학을 가르치며 한평생 인재양성에 힘썼다. 유고(遺稿)로는 '술상례집략(述喪禮輯略)', '자획오해(字劃誤解)' 등의 여러 편이 남아 있다. 2017년 순천박씨 진원종중에서 국역한 <관어헌유고觀魚軒遺稿>가 있다.그의 아들인 석음石陰 박노술朴魯述(1851~1917)과 조카인 상고헌(上古軒) 박노면(朴魯勉) 또한 노사의 강당인 담대헌(澹大軒)을 지키며 학문의 맥을 이었다. 송사 기우만奇宇萬(1846~1916)의 <송사집松沙集> 권1에 '追謝觀魚軒朴公 陽東 見寄韻 幷小序'라는 제목으로 시가 있다. 月汀講席。荷賜詩敦勉。非直宇萬多所開發。凡在座者。皆聞風起感。君子之澤及人博哉。且况令哥令抱。以至族黨。見是古家武繩。敢述衆人之情。以步其韻。/ 星紀已周哭奠楹。指南何處後生程。尊家文獻多依賴。玉珮承承大放聲。
    2020-03-11 | NO.258
  • 관포당 灌圃堂
    광산구 풍영정길 21 (신창동)풍영정을 지은 칠계 김언거金彦据(1503∼1584)의 아들 관포당灌圃堂 김광부金光符가 극랑강변 어딘가에 지어 지냈다. 김광부는 선무랑 군자감주부이다. 이황이 김언거에게 보낸 '기제관포정(寄題灌圃堂)'이란 시에  ‘관포당(灌圃堂)’이 나온다. 寄題灌圃堂 漆園傲吏離風塵 千載同歸漆水人 巧宦已拋蹊徑惡 幽居還帶圃畦新提攜一甕能全道 俯仰諸機自斲眞 未似多言端木氏 他年我不愧逡巡退溪先生文集 別集 卷之一광산구 신창동 선창산仙滄山과 극락강極樂江이 마주치는 강변의 대지 위 일대에는 무수한 정자들이 있었다. 인근의 대표적인 정자는 1560년 승문원承文院 판교를 끝으로 관직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온 김언거의 풍영정과 옥과 훈도訓導를 지냈으며 고경명 박광옥 등과 친했던 김언거의 중형인 김언우金彦瑀가 지은 정자 청원정淸遠亭이 있었다.그런데 김언거 손자이며 김광부의 아들인 김치원金致謜(1562~?)은 ‘수진당(守眞堂)’을 경영하며 풍영정도 관리했다.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 1571∼1637)은  수진당이 풍영정 동쪽 산 기슭에 있다(堂在風詠亭東麓)고 적고 2수의 시를 남겼다.(題守眞堂/潭州錄) 이안눌의 시 주석에 정자주인은 김치원의 군자감주부를 지냈던 아버지  김광부(金光符)가 지내는 거처라고 적고 있어 관풍대를 이어 받아 수진당으로 명명한 것으로 보인다.(亭主金光符所居之室也)
    2020-03-11 | NO.257
  • 관풍대 觀風臺
    동구 증심사길 150-12 (운림동)   무등산 증심사로 오르는 길 오른편에는 남종화의 대가로 불리는 의재 허백련(1891~1977)이 지인들과 함께 차를 마시며 '바람을 맞는다'는 공간이다. 한국화, 특히 남종화 대가인 의재 허백련(1891~1977)이 춘설헌春雪軒 본채만 지어 작품활동과 차 생산을 하며 머물렀다. 제자들과 지인들의 방문이 늘어나면서 공간이 좁고 별도의 머무는 자리가 필요해 별채를 지은 것이 관풍대이다. 사랑방 역할도 하며 허 화백이 직접 재배한 차를 시음하던 관풍대는 지금은 다례(茶禮)실습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자연의 도가적 삶이 풍기는 대나무와 단풍나무 등으로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고, 양쪽으로 계곡이 흐르는 작은 계간에 자리하고 있다. 관풍觀風이란 풍속을 자세히 살펴보는 관풍찰속觀風察俗이란 의미와 닮았다.흩날리는 대나무, 흐드러지게 핀 목단, 글씨와 여백들의 조화로 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여유를 갖게 하고 떠난 광주의 어른 허백련은 한국 남화의 대가의 이력 외에 한 인간의 차 한 잔의 향기만큼이나 그윽한 아름다운 삶을 살다 떠났다. 관풍대는 춘설헌, 삼애다원과 함께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한 유적이다. 추사가 어느 가을날 초당을 보고 지은 시가 관풍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靑苔仍屋老 푸른 이끼 낡은 집에 그대로 있고赤葉漸林姸 붉은 잎은 수풀에 물들어 곱네飄泊西東久동서로 떠돈 적이 하도 오래라山中銷暮煙 산 속에 저문 연기 잠기어 있네
    2020-03-11 | NO.256
  • 광주광역시
  • 한국학호남진흥원
  • 사이버광주읍성
  • 광주서구청
  • 광주동구청
  • 광주남구청
  • 광주북구청
  • 광주광산구청
  • 전남대학교
  • 조선대학교
  • 호남대학교
  • 광주대학교
  • 광주여자대학교
  • 남부대학교
  • 송원대학교
  • 동신대학교
  • 문화체육관광부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 국립아시아문화전당
  • 광주문화예술회관
  • 광주비엔날레
  • 광주시립미술관
  • 광주문화재단
  • 광주국립박물관
  • 광주시립민속박물관
  • 국민권익위원회
  • 국세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