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총 72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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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응정- 題朴居士江樓 光州林谷黃龍江上
- 題朴居士江樓 光州林谷黃龍江上 박 거사 강루 광주 임곡의 황룡강에서 씀 直勝如何不起樓 이렇게 좋은 곳에 왜 누대가 없었을까乾坤極力爲藏收 건곤이 힘을 다 해 숨겨 놓은 것이겠지千條雨瀑銀爭灑 천 줄기 폭포수가 은가루를 뿌리는데一抹晴嵐翠欲流 한 가닥 개인 안개 흐를 듯이 푸르러라莊叟託懷鵬背闊 장자는 붕조 등에 자기 회포를 실어 보았고羅公騁術月邊遊 나공은 묘술 부려 달에 가서 놀았다네主人所撰超前轍 주인이 지은 것이 예전과 월등하니賢聖同筵送幾秋 성현과 같은 자리에 몇 해를 보냈는가양응정은 지금의 광주시 광산구 박호동 박산마을에 살고 있었고 이 마을 앞에도 황룡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 2020-04-10 | NO.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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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응정-光州敎坊歌謠
- 玉節從天降 옥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蘭旌竝海巡 난정으로 바다까지 운행한다네蒼生歸雅量 넓은 아랑에 창생을 감싸고紫綬照芳春 꽃다운 나이에 붉은 인끈 어울리네願作衣間絮 옷 속의 솜 되는 게 바램이오思爲席上塵 자리 위의 먼지 될 생각이네前緣知有托 전생의 인연 있음을 알게 되니楚觀夢繽紛 초관이 끊임없이 꿈속을 오가네-송천선생유집(松川先生遺集) 권1조선시대 여기(女妓)를 관장한 기관을 교방(敎坊)이라 했다. 송천 양응정은 광주 출신으로 조선 중기 권신이었던 윤원형(尹元衡)에 의하여 김홍도(金弘度)와 함께 탄핵을 받고 파직당할만큼 곡직한 인물이다. 시문에 능하여 선조 때 8문장의 한사람으로 뽑혔으며 효행으로 정문이 세워졌던 대사성 송천(松川) 양응정이 1568년(선조 1) 광주목사로 재직중에 광주목 소속의 기생들의 광주교방가요(光州敎坊歌謠)를 읊은 시이다.
- 2018-07-12 | NO.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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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응정-光州東軒題詠
- 年過半百鬢絲絲 나이는 오십이 넘고 머리는 가늘고 긴데 不用荒城滯一麾 작은 고을 목사자리에 매여 있기 바랬던가.東閣官梅堪折取 동각엔 매하꽃 피어 꺾을 만한데 故園知發幾層枝 내고향 정원에도 몇가지 피었으리
- 2018-07-26 | NO.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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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응정-부용정의 운(芙蓉亭韻)
- 朝來雨意欲絲絲 아침에 실낱같은 가는 비 내리더니, 向晩靑光蕩綠池 저녁되니 맑은 빛이 푸른 못에 넘실거리네. 佳會豈非天所借 아름다운 모임 어찌 하늘이 준 기회가 아닐까. 使君行色自應遲 사군(使君)의 행색 저절로 응당 더디리.-양응정(梁應鼎, 1519~1581)
- 2018-08-02 | NO.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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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재경-光州三嘆 一樓門 二胎峯 三防築
- 光營眉目北樓門 광영의 생김새는 북루문의 기상이니 氣像萬千孰與論 기상의 천만가지를 논하기 어렵다胎似圓金還似玉 태봉은 둥근 금이나 옥과도 같고 是爲高廩復爲藩 이것이 곳집이요 또 울타리가 된다 景陽防築神奇澤 경양방죽(景陽湖)은 신기한 못이요 瑞石山川活發源 서석(무등산)의 산천은 활발한 근원이라俗類不知天定理 속류들이 하늘의 정한(天定) 이치를 모르고 破壞無端被世怨 무단히 파괴하여 세상의 원망을 산다 양재경(梁在卿, 1894-1976)의 자는 여정(汝正)이고, 호는 희암(希庵)이며, 본관은 제주(濟州)이다. 학포 양팽손(梁彭孫)의 후손으로, 자질이 탁이하여 스승에게 나아가 수학함에 요지를 능히 해득하고 송독함에 있어서는 물이 흐르는 것처럼 막힘이 없었다. 유집에 희암유고(希菴遺稿) 13권 3책이 있다*광주의 모습을 담았다.
- 2018-06-16 | NO.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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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천(良賤) 변별의 송사- 광주목사
- 보첩고(報牒攷) -光州牧使○ 영조(英祖) 42년(1766) 2월 초1일 조윤관(曺允寬)ㆍ이필제(李必齊) 등이 제소한 양천(良賤) 변별의 송사에 관한 입안(立案)결급(決給)에 관한 일. 본주(本州)의 하리(下吏) 조윤관의 정장(呈狀)에, “제가 이필제ㆍ이한적(李漢迪)ㆍ이한복(李漢復) 등과 더불어 서로 송사를 벌인 것은 이미 전 사또(使道)가 재임할 때였는데, 원정(原情)과 문목(問目)을 빠짐없이 모두 바쳤으므로 뒤에 마땅히 결안(決案)이 나와 이 송사가 매듭지어줄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전 사또가 별도로 쓴 글에, ‘너희들의 송사에 대한 곡직(曲直)은 이미 피차의 원정과 문목을 통해 잘 파악하여 털끝만큼도 의심할 만한 단서가 없으니만큼 마땅히 결안을 작성하여 조윤관에게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큰 송사이니만큼 관가(官家)에서 경솔하게 처결할 수 없다.’라고 하면서 판결에 임해 송사를 기각하였습니다.제가 이미 송사를 제기한 뒤에 결안을 받지 못하여 너무나도 억울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뜻으로 사유를 갖추어 의송(議送)을 바치니, 그 제사(題辭)에, ‘과연 그 정장(呈狀)의 말대로라면 본주(本州)에서 송사를 기각한 점이 매우 괴이하다. 곧바로 판결을 내려 송사를 체류하지 말라는 뜻으로 다시 제사를 써서 본관(本官)에 하달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전 사또가 불시에 체직(遞職)되었으므로 새 사또가 부임하기를 기다렸다가 처음에 판결에 임한 송사를 판결해 줄 것을 청하니, 새 사또가 말하기를, ‘지금은 송사를 판결할 때가 아니니, 가을을 기다려 다시 정소(呈訴)하도록 하라.’고 하시기에 이렇게 다시 소장을 바칩니다.대체로 이 송사의 근본 원인은 다음과 같습니다. 위의 이한복 등이 다투는 것은 바로 그들의 외증조(外曾祖) 몫의 제위노(祭位奴)인 몽용(夢用)의 양처(良妻)가 낳은 자식을 차지하겠다고 운운(云云)한 것이고, 제가 다투는 것은 바로 몽용의 양처가 낳은 자식은 그가 차지할 물건이 아니라는 것인데, 이 문제로 송사를 제기하게 된 것입니다.대체로 몽용은 바로 남평(南平) 사람 손후창(孫後昌)의 노복이고 몽용의 아내 구례(九禮)는 바로 손후창의 아우 손후권(孫後權)의 딸입니다. 그런데 이한복 등이 위의 몽용은 자기들의 외증조 손후창의 노복이란 이유로 그들의 화회문기(和會文記) 중 제위(祭位)조에 기록하였는데, 그들이 자칭 외손봉사(外孫奉祀)라고 하면서 몽용의 후손을 차지하겠다는 것입니다.그들이 이른바 ‘두 번 지나간 병인년(丙寅年, 1686, 숙종12)의 화회(和會)에 운운(云云)하였다.’라고 한 것은 재주(財主)가 생존하였을 때 참여해 간섭하지 않았다는 것이었으나 화회문기의 말 중에는, ‘그 재주 손후창이 나이가 차지 않아 죽었기 때문에 문기를 작성하지 못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손후창이 나이가 68세에 이르러 죽었으니, ‘나이가 차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또 그들이 말하기를, ‘손후창의 아우 손후권이 벼슬을 구하려 상경(上京)하였다가 아우의 초상이 나고 형수의 초상이 났다는 부음(訃音)을 듣고도 오지 않았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거주한 고을의 장적(帳籍)을 상고해 보니 그들이 이른바 아우란 자는 나이가 62세였고 그들이 이른바 형이란 자는 나이가 59세였습니다. 이는 아우와 형이 전도되어 천륜(天倫)의 자리가 뒤바뀐 것이니, 그들이 이른바 화회문기는 너무나도 맹랑하였습니다. 또 그들이 말하기를, ‘손후권이 벼슬을 구하러 상경하여 부음을 듣고도 오지 않았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고증할 만한 문안(文案)에는 그 화회문기를 작성한 해에 손후권이 나주(羅州) 지도 만호(智島萬戶)로 임명받은 직첩(職帖)이 분명히 당시의 임소(任所)에 있었으니, ‘손후권이 상경하여 오지 않았다.’는 말이 완전 거짓말임이 편연하게 드러났습니다.또 말하기를, ‘저희들의 외증조가 계해년에 죽었다.’라고 하였는데, 그들의 외증조가 거주한 고을의 장적에는 계해년과 갑자년에도 여전히 입적(入籍)한 것이 존재하였으니, 계해년에 죽었다가 갑자년에 다시 살아났단 것입니까. 사람의 생사는 얼마나 큰일입니까. 그런데 산 사람을 죽었다고 하였으니, 무슨 일인들 무함(誣陷)하지 못하겠습니까. 이외에도 위조한 단서를 낱낱이 다 열거하고 낱낱이 다 셀 수 없고 보면 그들이 이른바 화회 운운하는 것은 필시 인위적으로 만든 거짓의 글자이니만큼 결코 그들의 말을 믿을 수 없습니다.그리고 외손봉사(外孫奉祀)란 말이 단지 오늘날 그들의 입에서만 나오고 원래부터 문권(文券) 가운데 증거가 될 만한 것이 한 글자도 없습니다. 또 인정이나 사리로 말한다면 이한복 등의 외증조모(外曾祖母) 만향(萬香)이 저의 처조모(妻祖母) 구례(九禮)와 동성(同姓) 간의 사촌(四寸)이니, 동성의 사촌이 상호 노복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고, 또 질녀서(姪女壻) 몽용(夢用)을 외손봉사의 몫으로 준다는 것도 인정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로 보나 저로 보나 이한거 등이 말 한마디마다 거짓으로 농간을 부린 것이니, 하늘이 반드시 싫어할 것이고 귀신이 반드시 처벌할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결국 이것으로 인해 송사를 제기하였던 것입니다.이미 이에 대한 원정(原情)을 바치고 문목(問目)에 대해 공초(供招)를 바쳐서 피차의 곡직이 일성(日星)처럼 명백해졌기 때문에 전 사또(使道)가 송사를 기각할 때 적은 제사(題辭) 중에 저에게 결급(決給)한다는 말뜻이 과연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판결에 임해 송사를 기각한 바람에 결안(決案)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하늘에 사무치는 저의 원한입니다. 물러나와 의송(議送)을 바치고 엊그제 사또께 소장(訴狀)을 올렸던 것은 제가 결급을 얻은 뒤에 결안을 받지 못한 원통함에서 나온 것입니다.또 한 가지 근거가 없는 일이 있습니다. 저와 이한복 등은 한 성(城) 안에 살고 있는데, 대대로 사귀어 그 정의가 형제와 같았고 조석으로 상종하여 마치 지친(至親)과도 같았으나 원래부터 이 일에 대해 한 마디 말이나 반 마디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근백년(近百年) 전에 있었고 그 사이에 아무 말 없이 지내오다가 지금 비로소 말을 꺼낸 것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세월이 오래되고 사람이 죽어서 사적을 밝히기 어렵게 된 뒤를 기다렸다가 마치 해를 피하는 도깨비가 밤이 되면 활동하는 것처럼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전 사또(使道)가 결안(決案)을 작성하지 않고 미루어두었다가 금일의 사또를 기다린 것이니. 이는 저의 불행 중에 큰 다행입니다.엎드려 바라건대, 신감(神鑑)을 소유하신 사또께서는 피차가 이미 도장을 찍은 원정과 문목을 다시 가져다가 자세히 통촉하신 뒤에 분명하게 처결을 내리어 사리상 맞지 않아 패소한 자에게 율(律)에 따라 엄하게 처벌을 내려 주셨으면 합니다.”라고 하였다.소지(所志)에 이와 같이 말하였기에 지나간 분기에 원고와 피고가 서로 송사를 제기한 문안을 일일이 다 바치도록 하였다.갑신년(甲申年, 1764, 영조40) 12월 20일에 인리(人吏) 조윤관(曺允寬)의 이름으로 바친 소지(所志)에, “저의 처조모(妻祖母)와 이필제(李必齊)의 어머니는 동성 사촌간입니다. 그런데 이필제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서 저에게 말하기를, ‘너의 처조모는 우리 외가(外家)의 물건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제 아내의 어머니는 금년에 75세인데, 지난 을해년(乙亥年, 1755, 영조31)에 죽었습니다. 이필제와 제 아내의 어머니가 한 성(城) 안에 같이 살면서 조석으로 상대한 지 몇 년이나 되었는지 모를 정도였으나 그간에 이 일에 관해 전혀 한 마디 말이나 반 마디 말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제 아내의 어머니가 죽은 뒤에 지금 비로소 이 말을 꺼냈으므로 너무나도 놀라웠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우러러 하소연하오니, 이필제를 잡아다 종래의 근맥(根脈)을 각별히 엄하게 조사한 뒤에 법대로 처결해 주셨으면 합니다.”라고 하였다.갑신년(甲申年) 12월 23일에 원고와 피고가 처음 송사를 제기하였을 때 바친 공초(供招)에, “이한거(李漢擧)의 나이는 42세이고 인리(人吏) 조윤관(曺允寬)의 나이는 39세인데, 아룁니다. 저희들이 노비(奴婢)를 변별(辨別)하는 일로 당일에 처음 송사를 제기하였는데, 아무런 이유 없이 30일이 다 되도록 송사의 장소에 나오지 않을 경우에는 법전(法典)에 따라 처결한다고 하셨으며, 노비를 소급해 변별하려고 할 때 반드시 믿을 만한 문기(文記)가 있을 터이니, 문기와 원정을 또한 바치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라고 하였다.원고 조윤관의 원정에, “아룁니다. 산이 비록 백 번 구불구불 뻗었으나 그 근본을 찾아보면 곤륜산(崑崙山)이고 물이 비록 만 번 꺾여서 흘렀으나 그 근원을 궁구해 보면 황하(黃河)입니다. 대체로 송사의 이치도 그 뿌리를 찾아보고 그 근원을 궁구해 보아야만 백(白)이 백(白)으로 판명되고 흑(黑)이 흑(黑)으로 판명될 것입니다.이 송사의 핵심은 몽용을 제위노(祭位奴)로 분배받았는지의 허실(虛實)과 화회문기(和會文記)의 진위(眞僞)에 있습니다. 만약 이한거의 말대로 몽용을 제위노로 분배받은 것이 적실하다면 사리상 당연히 분배받은 첫해부터 몽용 두 글자를 그의 장적(帳籍)에 기재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강희(康熙 청(淸)나라 성조(聖祖)의 연호로 1662~1722년) 병인년(丙寅年, 1686, 숙종12) 이후 장적을 상고해 보니 강희 계유식(癸酉式)에 이한거의 할아버지 생존 시 원호적(元戶籍) 가운데 ‘아내 쪽에서 분배받은 노(奴) 후초(厚肖)의 나이는 42세인데, 그의 아비는 사노(私奴) 동금(同金)이고 어머니는 양녀(良女) 정생(丁生)이다.’라고 기재되어 있고 원래 몽용 두 글자는 없었습니다.병인년에서 을유년까지는 20여 년인데, 을유식(乙酉式) 장적에 비로소 아내 쪽에 분배받은 노 폐금(閉金)의 나이는 38세라고 기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무신년(戊申年, 1728, 영조4) 장적에는 분배받은 비(婢) 폐덕(閉德)의 나이는 35세로 기재되어 있고 신해년(辛亥年, 1731, 영조7)의 장적에는 비 폐덕이 하나의 비 선화(善化)를 낳았는데, 그의 나이는 15세라고 기재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미년(辛未年, 1751, 영조27) 장적에는 아비 반노(班奴) 몽용(夢用), 어미 양녀(良女) 구례(九禮) 등이 남평(南平) 정광촌(正光村)에 거주하였다고 기재되어 있었습니다.병인년에 작성한 화회문기가 과연 진짜라면 계유식 호적 중에 제위조 몫으로 분배받은 노 몽용이 왜 기재되어있지 않고 후재(厚載)로 기록되어있단 말입니까. 계유식부터 임오식에 이르기까지 네 개의 호적 가운데 아내 쪽 몫으로 분배받은 후초(厚肖)는 계속해서 기재되어 있고 몽용 두 글자는 아애 없다가 을유식 장적 중에 은연히 폐금ㆍ폐덕ㆍ선화 등이 기재되어 있으니, 저 이한거가 ‘제위조 몫으로 몽용을 분배받았다.’라고 한 말이 과연 말이 되겠습니까. 전후의 장적과 그의 몫으로 분배받은 문기가 이처럼 서로 틀리니, 문기를 위조(僞造)한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이외에 또 한 가지 단서로 위조한 것임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 문기의 내용 중에, ‘처삼촌(妻三寸) 손후권(孫後權)이 벼슬을 구하러 상경(上京)하였다가 미처 내려오지 못하였다고 동서화회(同壻和會)에 이렇게 되어있으며, 막내 후내(後內)의 5녀 중에 3녀는 성혼(成婚)하고 2녀는 성혼하지 않았다.’라고 운운(云云)하였습니다. 손후창 부부가 1년 안에 모두 죽었는데, 그의 아우 손후권이 이미 만호(萬戶)를 지내어 조금 예절은 알 것이므로 영화의 욕망이 비록 간절해도 동기간에 부음(訃音)을 듣고 초상(初喪)에 달려가지 않을 리가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손후창이 비록 후사(後嗣)가 없이 죽었다고 하나 이미 그의 아우 손후권이 있으니만큼 전답(田畓)과 노비를 물려받았을 터이고 손후권은 법리상 마땅히 재주(財主)가 되어 이를 맡아 처리하였을 것입니다. 설사 그의 말대로 손후권이 벼슬을 구하러 상경하였다가 오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삼년상(三年喪)이 지나지 않고 2녀가 성혼하지 않았으니, 무슨 숨길 일이 있기에 손후권이 내려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이처럼 구차하게 말을 만들어 법에 벗어난 화회를 한단 말입니까. 법리(法理)로 참작해 보고 사례(事例)로 논해 보면 모두 말이 되지 않습니다. 이 점에 대해 남평(南平)의 관청에 공문을 발송하여 손후창의 전후 장적 및 전답양안(田畓量案)을 한 번 상고해 줄 것을 요청하고 오동서화회문기(五同壻和會文記)도 일체로 가져다 한 자리에 놓고 서로 상고해 보니 위조한 간계를 엄폐하려 해도 엄폐하기 어렵고 회피하려고 해도 회피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저의 처조모(妻祖母) 구례는 바로 손후권의 여식인데, 이시원(李時元)의 아내 손(孫) 조이(召史 양민의 아내)와 동성 사촌이므로 구례의 자녀 폐금과 폐덕은 손 조이와 이성 오촌의 숙질(叔姪)간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외톨이로 의지할 곳이 없어서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닐 적에 그 이시원이 흉중에 비의(非義)의 마음을 품고 밖으로 목족(睦族)의 의리를 가탁하여 폐덕 1인을 보호하여 데리고 와서 집안에 두고 살면서 서로 숙질(叔姪)로 호칭하다가 폐금과 폐덕을 암암리에 그의 호적에 기재하였습니다. 그의 꾀가 이처럼 음흉하고 간사하였으니, 무식하고 어리석은 폐금ㆍ폐덕과 같은 백성이 어떻게 앞으로 닥칠 우려를 알 수 있겠습니까.폐금ㆍ폐덕이 죽고 폐덕의 아들 학봉(鶴奉)도 죽은 뒤에 학봉의 아들 태산(泰山)ㆍ태남(泰南)ㆍ태금(泰今) 등이 노(奴)의 양처(良妻) 소생이라고 일컬으며 그들에게 매질을 하고 공갈협박하면서 스스로 속전(贖錢 천역(賤役)이나 죄를 면하기 위해 바치는 돈)을 바치라고 하였습니다. 태산 등이 연소하여 형장(刑杖)을 견뎌내지 못하고 우매하여 옥석(玉石)을 분변하지 못한 바람에 그들의 가산을 털어도 부족하여 전답(田畓)의 값을 논하여 속전을 바쳤으니, 이것이 어찌 인정상 차마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설사 그의 말대로 폐금ㆍ폐덕이 진짜 노비라 하더라도 그들의 손녀 태남 등 5명은 모두 신해년(辛亥年) 뒤에 양처(良妻)에게서 낳았으니, 법리상 강제로 속전을 내도록 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법을 어기고 속전을 징수하였습니다. 이로 미루어보건대, 양인을 강제로 노비로 삼는 것이 바로 그들의 집안에 유래한 습관입니다.지난 병인년(丙寅年)부터 올해 식년(式年)에 이르기까지 전후의 장적을 죽 상고해 보면 폐금ㆍ폐덕이 이미 백골(白骨)이 되었는데, 그때에 살아있는 것처럼 혹은 남평(南平)에 거주하였다 하기도 하고 혹은 이필제(李必齊)의 장적에 기재하기도 하고 혹은 이필대(李必大)의 장적에 기재해 놓기도 하고 혹은 이한적(李漢迪)의 장적에 기재하기도 하고 또 이한복(李漢復)의 장적에 기재해 놓기도 하고 또 이동량(李東良)의 장적에 기재해 놓기도 하는 등 천 가지 허점과 백 가지 구멍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변환(變幻)되었으나 이상 각 사람들의 전후 호적 중에 윤화(允化) 두 글자는 한 곳도 기재된 곳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나간 경오식(庚午式) 이한적의 호적 중에, ‘노(奴) 몽용(夢用)의 셋째 소생 비(婢) 윤화(允化)의 나이는 58세인데, 부동방(不動坊)의 각 호(戶)’라고 이처럼 모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그들이 그 윤화를 가리켜 저의 아내 어머니라고 하였습니다.저의 아내 어머니가 만약 그들의 몫으로 분배받은 자의 소생일 경우에 한 성(城)에 같이 산 지 몇십 년이나 된 줄 모를 정도이고 금년에 나이 75세로, 죽은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생전에 어찌하여 한 마디 말이나 반 마디 말도 침해하지 않았단 말입니까. 그리고 제가 아내를 맞이한 지도 17년 정도나 오래되었고 그들과 더불어 조석으로 만나 호형호제(呼兄呼弟)하면서 자주 상종하였는데, 또한 한 마디 말이나 반 마디 말도 침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지금에 이르러 폐금ㆍ폐덕ㆍ학봉 등이 죽은 지 오래되고 저의 아내 어머니도 이미 하얀 백골(白骨)이 되어 물어볼 데가 없게 된 뒤에 갑자기 자기들이 상전(上典)이라고 하면서 으르렁거리며 침해하고 있으니, 이는 바로 이른바 요망한 여우가 촉루(髑髏)로 분장하여 백주에는 출현하지 못하고 어두운 밤에 횡행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그리고 가장 매우 통분한 것은 폐덕 1인을 유인해 데리고 와서 거짓으로 편안하게 보호한 체하면서 은연 중 그의 장적에 기재해 놓았다가 죽은 지 오래된 뒤에 그의 손녀(孫女)의 아들과 양처(良妻)가 모두 신해년(辛亥年)에 태어난 뒤에 그의 소생(所生) 태남(泰男) 등을 강제로 자기의 물건으로 삼아 속전(贖錢)을 받고 내주었으니, 이는 이미 용서할 수 없는 율(律)을 범하였습니다. 이를 본받아 기꺼이 하나의 칼자루로 만들어 스스로 분배받은 몽용의 일파(一派)라고 하며 침해하려고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이미 맛보았던 솥 안의 음식에 침을 흘리고 과도하게 요행수에 뜻을 둔 것이 아니겠습니까.다만 지금 식년(式年) 이한복의 호구(戶口)로 본다면 폐금ㆍ폐덕의 나이가 백 년이 지나고 죽어서 백골(白骨)이 된 사람을 고인이 되었다는 의미의 고(故) 자를 쓰지 않고 당시에 부동방(不動坊) 각 호(戶)에 존재한 것처럼 기재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의도이겠습니까. 그리고 여러 이가(李哥)의 호적 중에 폐금ㆍ폐덕ㆍ선화 등을 번갈아 기록하여 마치 누락된 것처럼 만들어 그의 자손을 먹으려는 묘술(妙術)을 부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폐금ㆍ폐덕의 자손은 비록 수백 년이 되더라도 끝내 양인(良人)이 될 날이 없을 것입니다. 그들의 정적(情迹)을 궁구해 보면 어찌 극도로 흉악한 자가 아니겠습니까. 그의 호적 중에 간사한 거짓행위가 백 가지로 나오고 허점의 단서가 여러 가지로 많습니다. 또 화회문기를 위조한 바가 이처럼 명백하니, 그가 비록 밥을 쳐서 떡을 만들고 싶지만 되겠습니까.양인을 강압적으로 노비로 만들 경우에는 마땅히 시행하는 율(律)이 있으니, 엎드려 바라건대 전후의 내맥(來脈)을 세세히 참고하여 법대로 처리함으로써 한편으로는 인심을 통쾌하게 해 주고 한편으로는 지하에 있는 저의 처모(妻母)의 원통함을 씻어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전후로 호적을 변환(變幻)한 한 조목에 있어서는 이한적ㆍ이한복 등을 심문하여 엄하게 처리해 주소서.”라고 하였다.송척(訟隻 송사(訟事) 하는 상대자) 이한거(李漢擧)의 원정(原情)에, “아룁니다. 몽용은 바로 저의 외증조(外曾祖) 손후창(孫後昌)의 종입니다. 외증조가 원래 아들이 없고 단지 딸만 있었기 때문에 외손(外孫)으로 하여금 제사를 받들게 하고 그 몫으로 약간의 전지와 노비를 모두 저의 할아버지에게 주었습니다. 몽용의 양처(良妻) 구례(九禮)는 바로 외증조의 동복형 손후권(孫後權)의 미천한 딸입니다. 그런데 몽용이 구례와 암암리에 사통하여 데리고 지도(智島)로 도망가 산 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몽용이 첫째로 낳은 종 폐금(閉金)ㆍ폐덕(閉德)ㆍ윤화(允和) 등은 모두 같은 태(胎)에서 태어났는데, 그들이 저의 집에서 여러 해 동안 일을 하다가 폐덕은 지금 이미 면천(免賤)하여 양인(良人)이 되었습니다. 윤화는 역리(驛吏) 김구덕(金九德)의 아내가 되었는데, 그가 낳은 첫째 촉운덕(亍云德)은 하리(下吏) 조배성(曺培星)의 아내가 되었고 둘째 아이도리(我伊道里)는 능주(綾州) 하리(下吏) 박등(朴登)의 아내가 되었습니다.대체로 촉운덕ㆍ아이도리는 윤화의 소생이고 윤화는 몽용의 소생이며 몽용은 저의 할아버지가 외가(外家)에서 분배받은 종인데, 몽용 1구(口)가 외증조의 도문기(都文記) 제위(祭位)조에 명백하게 기재되어 있고 몽용 및 그의 소생 폐금ㆍ폐덕 등도 모두 저의 호적 가운데에 기재되어 있으므로 장적(帳籍)을 상고해 보면 한 글자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몽용의 내역이 분명하여 엄폐하기 어렵고 그가 낳은 자녀의 계파(系派)가 분명하여 틀린 바가 없으니, 그 사이에 무슨 의심할 만한 것이 있겠습니까. 김구석(金九碩)의 호적에는 그의 아내 아버지가 몽용으로 기록되어 있고 조배성(曺培星)의 호적에는 그의 아내 외할아버지가 몽용으로 기재되어 있으니, 이것이 어찌 하나의 큰 증안(證案)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공초한 바는 사실을 적출하여 진술하였으니, 참작하여 처리해 주셨으면 합니다.”라고 하였다.문목(問目)에, “조윤관이 아뢰기를, ‘이한거가 바친 화회문서와 원정을 가져다 상고해 보니 병인년(丙寅年) 간에 몽용을 제위조(祭位條) 몫으로 분배받았고 이한거의 할아버지가 봉사(奉祀)를 하였으니, 제위조 몫으로 분배받은 몽용은 마땅히 이한거가 전래한 종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가 낳은 폐금ㆍ폐덕ㆍ윤화는 모두 같은 태(台)의 소생으로 이한거의 집에서 노역을 하였는데, 폐덕은 지금 이미 면천하여 양인이 되었다. 같은 태에서 낳은 형제가 혹은 노역을 하거나, 혹은 양인이 되었으니, 윤화의 딸 촉운덕은 본래 그의 여종이고, 김구석의 호적 중에 그의 아내의 아버지를 몽용이라고 기재하였다고 하였으니, 이는 너의 아내가 이한거의 여종이라는 하나의 큰 증거이다. 그러니, 이한거의 여종이 아닌 곡절에 대해 다시 고하라.’고 하셨습니다.”라고 하였다.원고 조윤관을 다시 추문(推問)하니, 그가 아뢰기를, “저 교활한 이한거가 농간을 부린 바가 이미 한 가지가 아니고 화회문기를 위조한 바가 또 이와 같이 명백하므로 지금 말을 허비하여 다시 진술할 만한 단서가 없으나 이렇게까지 물으시므로 감히 조목조목 진술하겠습니다. 대체로 이한거의 원정 중에, ‘병인년 간에 몽용을 제위조로 분배받았고, 그가 낳은 폐금ㆍ폐덕ㆍ윤화는 모두 같은 태(台)의 소생으로 이한거의 집에서 노역을 하였는데, 폐덕은 지금 이미 면천하여 양인이 되었습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너무나도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만약 그의 말대로 몽용을 병인년 간에 분배받은 것이 적실할 경우에 분배받은 그해부터 아내 쪽에 분배받은 것을 반드시 몽용으로 기록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분배받은 몽용을 기록하지 않고 후초(厚肖)로 기록하였단 말입니까. 이것으로 말하건대, 아내 쪽에 분배받은 것은 후초지 몽용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미 후초를 화회에서 분배한 뒤에는 반드시 몽용을 다시 화회에서 분배하지 않았을 터이므로 이른바 후초를 분배한 화회문기가 당연히 진짜 문안입니다. 그 문기를 그로 하여금 바치도록 하면 몽용을 분배받았다는 문기가 저절로 위조로 귀결될 것입니다. 이 송사의 큰 요점은 모두 이 문기에 있으니, 후초를 분배받은 문기를 그로 하여금 속히 바치도록 하소서.병인년에서 을유년까지는 20여 년의 뒤인데, 갑자기 아내 쪽에 분배받은 종 폐금ㆍ폐덕ㆍ선화 등의 아비는 반노(班奴) 몽용, 어미는 양녀 구례라고 은연히 기록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농간을 부린 하나의 큰 증안(證案)입니다. 두 번 지나간 병인년에서 저번에 지나간 경오년까지는 67년이나 되는 오랜 기간입니다. 그런데 67년 사이에 이한거 등의 호적 가운데 윤화(允化)란 두 글자가 기재된 곳이 단 한 곳도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과 같이 한 성(城)에 산 지 또한 몇 년인 줄 모를 정도였으나 원래부터 한 마디 말이나 반 마디 말도 침해하지 않았고 또한 말하는 사이에 털끝만큼도 내비치지 않다가 이제 와서 ‘노역을 하였다.’라고 운운(云云)하니, 이는 허위로 꾸며 낸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저절로 허망(虛妄)한 것으로 귀결되고 말 것입니다.그리고 저희 집안이 대대로 이 땅에서 거주하면서 이한거 무리들과 같이 이웃집에서 살았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는 그들과 더불어 죽마(竹馬)를 타고 파피리를 부는 등 사이가 친밀하였고 장성해서는 호형호제(呼兄呼弟)하는 등 세의(世誼)가 남달랐으며 사내를 장가보내거나 여자를 시집보낼 적에 피차가 서로 대등한 사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어찌 동서(同壻)의 딸에게 장가를 들고 노역(奴役)을 할 리가 있겠습니까. ‘폐덕은 지금 이미 면천하여 양인이 되었다.’라고 하는 말은 더욱더 말이 되지 않습니다. 폐덕은 이한거의 할머니 손 조이(孫召史)와 이성 오촌숙질(五寸叔姪)의 사이였는데, 혈혈단신(孑孑單身)으로 의지할 데가 없어서 떠돌아다니며 살 곳을 잃었을 때에 이한거의 할아버지 이시원(李時元)이 흉중에 비의(非義)의 마음을 품고 밖으로 목족(睦族)의 의리에 가탁하여 편안히 보호하겠다며 데리고 와서 집안에 두고 서로 아저씨와 조카로 호칭하다가 암암리에 폐금ㆍ폐덕 등을 호적에 기재하여 장래의 기물(器物)로 삼으려고 하였습니다. 비록 그의 꾀가 음흉하였으나 도리어 금일 이한거가 망신(亡身)당하는 함정이 되어버렸습니다. 복을 구하는 계책이 도리어 화를 얻게 된 것이 어찌 이런 경우가 아니겠습니까.위의 폐덕이 죽고 폐덕의 아들 학봉(鶴奉)도 세상을 떠난 뒤에 학봉의 자식 태남(太男) 등 5명을 종과 양처(良妻)의 소생으로 지칭하고 자칭 상전이라 하면서 곤장을 치고 협박하여 그들로 하여금 대가(代價)를 바치고 속죄(贖罪)하도록 한 바람에 그들이 가산을 탕진하는 데 이르렀습니다. 이른바 학봉이 과연 진짜 이한거의 종이라면 그의 소생 태남 등은 이미 신해년(辛亥年) 후에 양처가 낳은 것이므로 법리상 대가를 요구하거나 속전을 징수할 없습니다. 그런데 태남 등이 우매 무지하다고 여기어 법을 벗어나 강제로 속전을 징수하였으니, 이러한 짓도 잔인하게 하는데, 무슨 짓인들 못하겠습니까. 그가 이미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하고 나서 봄철에 꿩이 스스로 울듯이 이를 구실로 삼아 ‘태남 등을 방면하여 양인이 되도록 하였다.’라고 하니, 그게 과연 말이 되겠습니까. 이는 바로 이른바 스스로 자기의 뺨을 때린 격입니다.또 한 마디 말로 판가름을 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이한거가 바친 화회문기(和會文記)가 과연 진짜의 문안이고 몽용을 분배받은 것도 적실할 경우에 병인년에 화회(和會)할 때에 몽용의 아들 폐금의 나이는 18세이고 몽용의 딸 폐덕은 나이 15세입니다. 폐금과 폐덕의 나이가 이미 장성하였으니만큼 화회문기 가운데 마땅히 ‘몽용과 그의 양처가 모두 폐금ㆍ폐덕을 낳았다.’라고 써넣어 처리해야만 사리상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른바 문기 중에 단지 몽용 1구(口)만 기재하였으니, 그 문기를 위조했다는 것이 명명백백(明明白白)하여 엄폐하기 어렵습니다.그리고 문목(問目) 중에, ‘너의 아내의 아버지를 몽용으로 기록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너의 아내가 이한거의 여종이라는 하나의 큰 증안(證案)이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문기의 위조가 이처럼 명백하니, 몽용을 분배받지 않았다는 것도 명백합니다. 그런데 지금 몽용을 아내의 아버지로 기록하였으니, 이것을 어찌 노비의 증안으로 귀결지울 수 있겠습니까.또 윤화(允化) 두 글자를 저번에 지나간 경오식(庚午式) 이한거의 호적 가운데 비로소 암암리에 기재해 놓고 제 아내의 어머니라고 지칭하였습니다. 노비의 허실(虛實)에 대해서는 우선 놔두고 논하지 않고 사리만 가지고 말하더라도 침해한 자는 마땅히 이한적이 되어야 하고 송사에 응해야 할 자도 마땅히 이한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한적이 자기가 한 짓이 비리임을 알고 송사를 기각해 줄 것을 애걸하다가 억울하다고 호소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른바 이한적이 중간에 돌출하여 앞장서서 침해하고 앞장서서 대신 송사를 하였으니, 무슨 의도란 말입니까. 그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대저 송사의 요점은 사리를 벗어나지 않고 법문(法文)이 분명하여 일성(日星)과 같으니, 엎드려 바라건대, 피차의 곡직을 참고하여 법대로 처결해 주시기 바랍니다.전답(田畓)과 노비는 말할 것도 없고 크고 작은 송사 중에 상고할 만한 문기를 처음 송사를 제기할 때 한 번 바친 뒤에는 비록 혹시 상고할 곳이 있더라도 송사의 상대방과 같이 관아의 뜰에 들어가 피차가 보는 곳에서 한번 고열(考閱)한 뒤에 곧바로 반납하는 것은 본래 송사의 체통입니다. 저 교활한 이한거는 이 일을 꾀한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만큼 그의 집에 유래 운운한 화회문기(和會文記)를 필시 달마다 강론하고 날마다 눈여겨보았을 것이므로 의당 한 마디 말이나 하나의 글자도 잘 알지 못한 곳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제 와서 오동서화회문기(五同壻和會文記)에 대한 문목(問目)이 하달된 뒤에 간사한 허점을 막기 어려울까 겁을 먹고 너무나 초조한 나머지 송사의 체통을 헤아려 보지 않은 채 고열할 곳이 있다는 이유로 당돌하게 혼자 들어가 문기를 가지고 나와 자기 집에 엎드려 1통의 말을 만들고 참증(參證)을 뽑아 그 뒤에 조목조목 열거하였는데,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베껴냈습니다. 그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헤아려 보면 전후로 위조한 묘술(妙術)이 오늘날 발단이 되었다는 것이 너무나도 분명합니다.이른바 화회문기 중에 비록 제위(祭位)에 대해 조목별로 열거한 사항이 있기는 하나 이시원의 이름 아래 별도로 봉사(奉仕)란 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금일 외손봉사(外孫奉祀)라고 한 말도 진실인지 추측하기 어려우니, 그 말이 극도로 궁색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한거가 전후로 저지른 간사한 행위가 이미 이와 같이 훤히 드러났으니, 모두 참작하여 처분을 내려 주셨으면 합니다.”라고 하였다.이한거(李漢擧) 나이 43세. 아뢰기를, “‘너희 할아버지 이시원(李時元)의 아내 쪽 전민(田民)에 대한 오동서화회문기(五同壻和會文記)를 이미 바쳤다. 너희 할아버지 이시원의 처가가 이미 후사(後嗣)가 없으므로 제위조(祭位條)의 전민(田民)이 귀속(歸屬)할 데가 없었는데, 너희 할아버지 이시원이 도의상 외손봉사(外孫奉祀)하게 되자, 그 전민을 분배해 주었을 것이니, 그때 몽용을 분배받은 명문(明文)을 바치도록 하라. 그리고 어느 해부터 비로소 봉사를 하였으며 봉사한 연조(年條)를 모두 고하도록 하라.’고 추문(推問)하셨습니다.저의 할아버지 이시원의 아내 쪽 사내종 몽용을 분배받은 명문은, 저의 외증조(外曾祖)가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그 제위조의 전민을 저의 할아버지의 오동서화회명문 중에 몽용을 제위조에 기재하였는데, 이것이 저의 할아버지 몫으로 분배받은 명문입니다. 외가의 제사를 받든 것은 병인년부터 비로소 하였습니다. 상고하여 처리해 주셨으면 합니다.”라고 하였다.문목(問目) “이한거가 아뢰기를, ‘「몽용을 손가(孫哥)의 집에서 제위조의 몫으로 분배받았다면 분배받을 때에 너의 할아버지 처삼촌(妻三寸) 손후권(孫後權)이 마땅히 재주(財主)가 되어 문서를 작성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의 사위 3인 등이 스스로 재주가 되어 그 일을 맡아 분배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법리(法理)란 말인가. 몽용을 과연 병인년에 분배받았다면 강희(康熙) 계유식(癸酉式) 너의 할아버지 이시원 호적 가운데 아내 쪽에서 분배받은 사내종 후초(厚肖) 하나만 기재되어있고 몽용 두 글자는 아애 없었는가 하면 20년 후 을유식(乙酉式)의 호적 중에 아내 쪽에서 분배받은 종 폐금(閉金)ㆍ폐덕(閉德)ㆍ선화(善化) 등이 비로소 기재되어 있었다.그리고 그들의 아비 반노(班奴) 몽용(夢用)과 어미 양녀(良女) 구례(九禮) 등이 남평(南平) 정광촌(正光村)에서 살았다고 하였으니만큼 몽용을 과연 병인년에 제위조로 분배받았다면 마땅히 호적에 기재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계유년부터 임오년까지 네 번 식년(式年)에 이른 뒤에 호적에 기재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곡절인가.노비를 몫으로 분배받을 적에 각각 그 주인이 있으니, 가령 몽용을 진짜로 네가 분배받은 종이라면 너의 호적에 마땅히 기재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필대(李必大)ㆍ이한적(李漢迪)ㆍ이한복(李漢復)ㆍ이동량(李東良) 등 5인의 호적 중에 모두 기재한 것은 무슨 뜻인가.윤화(允化) 두 글자는 기재된 곳이 하나도 없다가 비로소 이번에 지나간 경오식(庚午式)의 이한적 호적 중에 몽용의 셋째 소생 여종 윤화의 나이는 58세라고 기록되어 있다. 과연 마땅히 추심해야 할 노비라면 몇 년이나 된지 모를 정도로 그들과 같이 한 성(城) 안에 살면서 그들이 노비란 것을 한 마디 말이나 반 마디 말도 하지 않다가 폐금ㆍ폐덕ㆍ윤화 등이 모두 죽어서 물어볼 데가 없게 된 뒤에 비로소 그들이 너의 노비라고 말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곡절이란 말인가.다시 너의 원정을 보니, 구례는 바로 너의 외증조의 아우 손후권(孫後權)의 미천한 딸이고 구례가 낳은 윤화는 바로 너의 외증조 손후창(孫後昌)의 질녀이다. 그러므로 오동서(五同壻)가 전민(田民)을 분배하는 문서를 작성할 때에 만약 손후권이 있었다면 필시 그의 딸을 질녀서(姪女壻)에게 분배해 줄 리가 없으며, 가령 오여서(五女壻)가 전민을 분배할 때에 손후권이 혹시 몰랐다고 하더라도 그 뒤에 분배한 문서를 필시 보았을 것이고 그러면 아마도 그들이 분배한 대로 그냥 두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점으로 볼 적에 그 화회문기를 위조한 것임이 명백하여 의심할 바가 없다. 오여서(五女壻)의 분배문기(分配文記)를 취하여 상고할 것이니, 모두 바치도록 하라.」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송척(訟隻) 이한거가 아뢰기를, “문목의 내용에 운운(云云)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 가문에서 전민(田民)을 분배하는 방도는 원재주(元財主)가 없을 경우에 차재주(次財主)가 분배할 수 있고, 형제가 화회(和會)할 때 반드시 문장(門長 가문의 어른)이 증인으로 참석해야 하는데, 이는 본래 마땅히 시행하는 규정입니다. 그런데 저의 외증조 부부가 미처 전민을 분배하지 못하고 해마다 잇따라 돌아가셨으므로 뒤에 동복형 손후권이 마땅히 주관하여 전민을 분배했어야 할 것입니다.그런데 손후권이 무과(武科) 출신(出身)으로 벼슬을 구하러 상경(上京)한 지 여러 해 만에 겨우 만호(萬戶) 벼슬을 얻어 그때 임소에 있으면서 형의 초상과 제수의 초상이 났다는 기별을 듣고도 끝내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았는데, 이는 벼슬을 탐한 소치가 아님이 없습니다. 또한 중간에 소식이 서로 끊어졌을 적에 그의 천첩(賤妾)에게서 난 구례가 그의 아우 집 사내종 몽용과 간통하여 도망가 숨어버렸는데, 가문의 변괴가 이보다 더 큰 것이 없기 때문에 너무나도 통분한 나머지 참여하여 간여하지 않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그리고 문장이 올 기약도 묘연한데다 결혼을 하지 않은 동생이 의탁할 곳이 없고 처부모의 제사를 주관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부득이 동성 8촌인 손순매(孫順每)와 이성 5촌인 강시재(姜時裁)를 참관의 증인으로 삼아 화회문서를 작성한 다음 여러 동서가 각각 1장씩 나누어 가졌습니다. 어찌 동서가 스스로 재주가 된 혐의가 있겠으며, 또 이것이 어찌 위조를 의심할 만한 단서가 되겠습니까.문목 중에 거론한 몽용을 기재한 일은 의심할 것조차도 없습니다. 대개 후초(厚肖)는 아내 쪽에서 분배받은 종이기 때문에 병인년에 기재한 것이고, 몽용은 애당초 분배받은 종이 아니고 아내의 부모 제위조(祭位條)로 별도로 분배한 종이므로 병인년에 화회문서를 작성할 때 제위조에 분명하게 기재한 것입니다. 제위조는 마땅히 큰 사위에게 해당하나 둘째 사위 박지수(朴之秀)가 남평(南平)에 살기 때문에 동향(同鄕)인 점을 취하여 그로 하여금 제사를 받들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박지수 부부가 불행히도 후사(後嗣)가 없이 모두 죽은 뒤에 도리어 제사를 주관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여러 동서가 강희(康熙) 계미년(癸未年, 1703, 숙종29)에 또다시 화회를 열어 저의 할아버지로 하여금 제사를 주관하고 차지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병인년(丙寅年, 1686, 숙종12)부터 임오년(壬午年, 1702, 숙종28)까지는 박지수가 차지한 걸로 기재하고 계미년(癸未年) 이후에는 저의 할아버지가 차지하였기 때문에 아내 쪽 제위조의 종 몽용을 을유년(乙酉年)부터 기재한 것이니, 그 사이에 무슨 의심할 만한 것이 있습니까.문목 중에, ‘윤화(允化) 두 글자를 경오식(庚午式) 호적에 비로소 기록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윤화는 저의 큰삼촌 호적에 분명하게 기재되어 있는데, 식년(式年)마다 반드시 기록한 바가 한두 번이 아니었으므로 더욱더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이는 전일 장적을 가져다 상고할 때에 저의 삼촌 호적을 끝내 두루 상고해 보지 않은 까닭입니다.문목 중에, ‘노비가 각각 그 주인이 있는데, 두세 사람을 모두 기재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몽용을 이미 제위조에 기재하였으면 제사를 주관한 사람이 마땅히 차지한 걸로 기재해야 하기 때문에 저의 할아버지 생전에 마땅히 차지한 걸로 기재한 것이고, 저의 할아버지의 호적을 파기한 뒤에 저의 아버지가 대신 호적을 수립하였기 때문에 예전대로 기재한 것입니다. 저의 할아버지가 임종(臨終)할 때에 제위조를 중자(仲子)에게 이속(移屬)하였기 때문에 경오식(庚午式) 호적부터 기재하였다가 가운데삼촌이 죽은 뒤에 장종형(長從兄) 이한적(李漢迪)이 아버지 대신 호적을 수립하였기 때문에 몽용이 그 호적에 들어간 것이니, 이는 당연한 도리입니다. 이는 부자와 형제가 차례대로 이어서 기재한 것이니, 또한 어찌 의심할 것이 있겠습니까.문목 중에, ‘같이 한 성안에 살면서 한 마디도 노비라고 말하지 않았다.’라고 하였는데, 이 대목을 재삼 읽으면서 한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대개 윤화의 모녀가 같이 이웃마을에 살면서 혹은 세시(歲時)에 찾아와 인사를 하기도 하고 혹은 명절에 반찬을 바치기도 하였습니다. 그 뒤에 윤화의 딸 사십덕(四十德)과 아도이(我道伊) 2구(口)가 시집을 가려고 할 때 그의 어미 윤화가 20냥을 가지고 와서 양인(良人)으로 만들어주어 혼사 길을 열어달라고 간청하였으나 저의 종형이 ‘너희들은 외증조 제위조의 종이므로 임의로 양인을 허락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굳이 거절하고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찌 같이 한 성안에 살면서 한 마디 말이나 반 마디 말도 노비라고 언급한 일이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또 종형의 집에서 노역을 한 학봉(鶴奉)ㆍ태산(太山) 등은 바로 몽용의 손자이고 사십덕과 사촌의 사이입니다. 그렇다면 학봉ㆍ태산 등이 어찌하여 저의 집 종이 되겠으며, 사십덕이 어찌하여 저의 집 종이 될 수 없겠습니까.그지없이 분개한 나머지 많이 변론하지 않겠습니다. 사십덕과 아석이(我石伊)는 모두 윤화의 소생인데, 아석이는 능주(綾州) 하리(下吏) 박등(朴登)의 아내가 되고 사십덕은 오늘날 조배성(曺培星)과 송사를 벌이고 있습니다. 장적을 상고해 보고 각장의 문기를 상고해 보면 내맥(來脈)이 분명하니,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의심할 것이 있겠습니까.대개 손후권(孫後權)이 재주(財主)가 되지 않았던 것은 녹봉(祿俸)을 구하는 데 탐욕을 부려 끝내 고향을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봉사(奉祀)를 주관할 사람이 없고 동생(同生)이 의탁할 데가 없어서 다급한 나머지 여러 동서가 동성(同姓)의 처당(妻黨), 이성(異姓)의 처족(妻族)과 같이 의논하여 전민(田民)을 분배하였는데, 이는 정리상 당연한 것이고 사리상 떳떳한 것입니다. 또 손후권이 경성(京城)에서 죽어서 돌아왔으니, 그가 전후의 문서에 끝내 참석하여 간여하지 않았다는 것이 정말로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몽용을 이미 제위조로 분배받은 것이니만큼 제사를 받들기 전에는 차지할 수 없으므로 제사를 받든 뒤에 비로소 호적에 기록하였으니, 이는 법리의 경상적인 것이고 사리의 당연한 것입니다.윤화가 처음부터 나중에 이르기까지 주인이라 호칭하고 여종이라 호칭하였고 저의 큰삼촌 호적에 잇따라 기록하였으니, 몽용의 내맥(來脈)이 분명하여 엄폐하기 어렵고 문권(文券)의 참증(參證)이 뚜렷하여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조배성(曺培星)이 무슨 상고할 만한 문권(文券)이 있고 무슨 근거할 만한 법리(法理)가 있기에 간계를 꾸며 백방으로 주인을 거절하고 있으니, 너무나도 터무니없습니다. 또 그가 저의 집 화회문서를 위조했다고 한 말은 더욱더 매우 통분합니다. 설사 저의 할아버지가 탐욕스럽고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한 장의 문자는 혹시 위조할 수 있지만 여러 동서의 각 가정에 있는 문권을 모두 낱낱이 위조할 수 있겠습니까. 백 년 가까이 유래한 문권을 금일에 이르러 위조한 것으로 의심하고 있으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이에 외람됨을 피하지 않고 조목마다 진술하오니, 전후 문서의 진위, 몽용의 내맥, 조배성의 교활, 제가 세력이 없어 고단한 연유에 대해 일일이 통촉하신 뒤에 법전과 문권에 따라 공정 명확하게 처결해 주시기를 천만번 바랍니다.”라고 하였다.문목(問目)“조윤관이 말하기를, ‘몽용은 분명 손씨(孫氏) 집의 종인데, 외손봉사(外孫奉祀)조로 박지수(朴之秀)에게 분배해 주었다가 박지수가 죽은 뒤에 이시원(李時元)에게 이속(移屬)하였기 때문에 몽용의 자식은 모두 이시원의 노비이다.’라고 하였다. 몽용이 호적에 누락된 것에 대해 너의 원정 중에, ‘비록 이것이 의심의 단서가 될 수 있으나 지금 이한거의 원정을 보면 봉사를 처음 박지수에게 위임하였기 때문에 병인년부터 임오년에 이르기까지 박지수가 차지한 걸로 기재하였고 계미년 이후에 비로소 그의 호적 중에 기재하였습니다. 이로 본다면 화회문기가 위조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윤화의 자녀가 이미 몽용의 자손이므로 그의 동생 등이 혹은 사환(使喚 심부름꾼)으로 부리기도 하고 혹은 양인(良人)으로 내보내기도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너의 아내만 어찌 이한거의 노비가 될 수 없겠는가. 몽용을 과연 이시원에게 분배하지 않았다면 지금 몽용의 상전은 누구이겠는가. 이 한 조목에 대해 고하도록 하라. 박지수가 남평(南平)에다 호적을 만들었으면 몽용이 그 호적에 기재되었는지의 여부를 상고(相考)해야겠으니, 이한거와 같이 베께서 가지고 오도록 하라.”고 하였다.같은 날 이한거 42세, 아뢰기를, “네가 바친 분재도문서(分財都文書)를 상고해 보니 강희(康熙) 55년 병술(丙戌)에 작성하였는데, 사십덕(四十德)의 어미 윤화(允化)는 과연 너의 몫으로 분배받은 것이었다. 윤화는 계유생(癸酉生)이므로 병신년에 분배받을 때 그의 나이가 이미 24세이다. 어찌하여 분배한 문서에 기재하지 않았는지 다시 고하도록 하라. 계유년부터 임오년까지 40년 동안 기재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그 곡절을 그 사이로 돌릴 것이다. 그렇다면 외가의 봉사를 박지수(朴之秀)로 정하였기 때문에 마땅히 남평 박지수의 호적에 기록되어 있을 터이니만큼 박지수의 호적을 한 번 상고해 보면 당장 분변될 것이다. 조윤관(曺允寬)과 같이 가서 남평의 호적을 베껴서 성첩(成貼)해 가지고 오도록 하라.”고 하였다.원고 조윤관을 다시 추문하니, 아뢰기를, “문목 중에, ‘남평현(南平縣) 장적에 몽용이 기재되어 있는지의 여부에 관해 송척 이한거와 같이 베껴오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한거와 같이 가서 베껴보니 본현(本縣) 두산면(頭山面) 마성리(馬城里) 15통의 신유식(辛酉式) 손후창(孫後昌)의 호적에, ‘여종 시월(十月)의 셋째 소생 사내종 몽용의 나이 37세’로 기재되어 있었고 을유식(乙酉式) 호적에는 ‘아비 사노(私奴) 언명(彦命)’으로 기재되어 있었습니다. 을유식 손후창의 동복아우 손후권의 호적에는 ‘여종 시월의 셋째 소생 사내종 수점(水占) 나이 36세’로 기재되어 있었고 병술년 호적에는 ‘아비 언명’으로 기재되어 있었습니다. 7년 뒤에 손후창이 죽고 사위 박지수(朴之秀)가 대신한 정묘식(丁卯式)의 호적에는 ‘여종 시월의 소생 사내종 목용(木用)의 나이 44세’로 기재되어 있었고 을유식 호적에도 이와 같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상 3개의 호적을 근거로 삼아 거짓말의 단서를 추출해 보니 단 한 명의 여종 시월이 낳은 자식이 어찌하여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는 몽용이고 하나는 수점이고 하나는 목용이니, 한 어미가 1년에 세 번 출산하지 않았다면 이는 반드시 허위이므로 여러 번 많이 변론할 것조차도 없습니다.또 그 가운데 하나의 큰 허위의 단서가 있습니다. 피고 이한거가 이른바 손후권은 손후창의 형인데, 손후권의 호적에는 그의 나이가 59세로 기재되어 있었고 계해식의 아우 손후창의 호적에는 그의 나이가 62세로 기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경신년(庚申年)에 나이 62세 먹은 자가 59세 먹은 자의 아우가 되었고 나이 59세 먹은 자가 62세 먹은 자의 형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낳은 연도를 계산해 보면 아우가 형이 되고 형이 아우가 되었는데, 이한거가 이른 바로 말한다면 아우가 거꾸로 형이 되고 형이 거꾸로 아우가 되었으니, 형제의 순서가 도착되어 천륜의 자리가 뒤바뀌었습니다. 그렇다면 관가(官家)에서 신빙(信憑)의 자료로 삼아야 할 것은 당사자들의 본적(本籍)이겠습니까. 송사를 제기한 자의 위조문서이겠습니까. 남평현에 만약 장적이 없다면 이한거의 문기와 원정이 거의 말을 가리켜 사슴이라고 한 것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너무나도 음험합니다. 이 하나의 거짓 단서만으로도 충분히 이 송사의 단안(斷案)이 될 수 있으므로 다시금 번거롭게 다른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그리고 이한거의 집안에서 대대로 쌓아온 공부가 모두 허위로 꾸미는 데 뜻을 기울이고 힘을 기울인 바가 비일비재한 자취를 아울러 거론하여 밝히겠습니다. 이한거가 바친 문기에 말하기를, ‘손후창이 임술년(壬戌年)에 사망한 것이 적실하다.’라고 하였는데, 남평현 장적에는, ‘손후창이 정묘년(丁卯年)에 사망하였고 그의 사위가 대신 호적을 세웠다.’라고 분명하게 기재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임술년에 이미 죽은 손후창이 다시 살아나 6년 후에 생을 마쳤다는 말입니까. 정묘년에 생을 마친 것을 정묘년이라 말하지 않고 62세 먹은 형을 거꾸로 59세의 아우라고 한 것입니다. 이처럼 제형(弟兄)이 뒤바뀌고 사생(死生)이 전도되었으니, 어느 일이든 속이지 않겠으며 무슨 말인들 지어내지 못하겠습니까. 천친(天親)의 큰 윤리를 뒤바꾸고 막대한 사생을 변개(變改)하였으니, 외손봉사를 했다는 거짓말과 화회문서를 위조한 것은 정말로 이한거 등이 소유한 재능의 나머지 버릇입니다.또 손후창의 소생은 본래 7녀인데, 이한거가 이른바 화회문서에는 숫자를 줄여 단지 5녀로 기록하였으니, 이는 농간을 부리는 허위가 많아 번다한 것이 싫어서 줄인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또 송사마당의 한 가지 단서입니다.또 외손봉사의 설을 사람의 상정(常情)으로 헤아려 보면 더욱더 기만 중에 완전히 기만한 것입니다. 그 이유를 어떻게 밝히느냐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손후권이 이미 전 만호였는 만큼 행신이 옹졸하지 않을 것이니, 자기에게 비록 아들 한 명만 있더라도 큰형님의 종사(宗祀)를 완전히 단절하지 않고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아들이 두 명이나 있었으니, 어찌 차마 아버지의 형제 제사를 외면하고 외손(外孫)에게 맡길 수 있겠습니까. 이는 너무나도 사리에 벗어나 근거가 없는 허황된 말입니다.문목 중에, ‘몽용을 제위조로 이시원에게 분배하지 않았다면 지금 몽용의 상전은 누구인가? 이 한 조목에 대해 분명히 고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몽용이 비록 손후창의 종이지만 그의 아내 구례는 바로 손후창의 아우 손후권의 여식입니다. 그렇다면 몽용은 이시원과 사촌동서의 사이이고 손후창의 질녀서이므로 그의 자손은 손후창의 지친(至親)이니, 이는 외손에게 제위조로 분배해 준 노비가 아닙니다. 만약 손후창을 상전으로 가리킬 경우에는 상전인 손후창이 도리어 처삼촌이 되니, 이외에 어떤 사람이 그의 상전이 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정리(情理)가 다한 뒤에 차지한 손후권의 후손이라면 그래도 되겠으나 손후창의 외손은 천만 부당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 밖에 허위의 단서를 이루 다 지적할 수 없고 필단(筆端)으로 이루 다 거론할 수 없으나 몇 건의 큰 조목만으로도 충분히 명감(明鑑)이 꿰뚫어 볼 수 있고 도깨비를 깨뜨리는 태양이 될 수 있기에 요점을 뽑아서 공초를 바치고 법대로 처결해 주시기를 기다립니다.”라고 하였다.송척 이한거의 원정에, “아룁니다. 저의 아버지가 병신년(丙申年)에 재산을 분배할 적에 촉운덕(亍雲德)의 어미 윤화(允化)를 도문서(都文書) 가운데 기재하지 않은 일에 대해 저번의 공초 중에 이미 누락된 경위를 대략 진술하였습니다. 대개 목용(木用)과 구례(九禮)가 은밀히 간통한 뒤에 자취가 탄로 날까 두려워한 나머지 해도(海島)로 도망가 여러 해 동안 살다가 목용 부부가 모두 죽은 뒤에 그의 소생 폐금ㆍ폐덕 등이 의지할 데가 없자 스스로 상전의 집에 나타났는데, 이로 인해 그냥 눌러앉아 사역(使役)을 하게 되었습니다. 윤화는 해도에서 타처로 시집가 숨어살았는데, 폐금 등이 완전히 숨겼기 때문에 윤화의 유무를 알지 못하여 문서에 기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뒤에 윤화가 나이 30이 가까워져서 본남편에게 구박을 당하여 갈 데가 없자, 부득이 폐금ㆍ폐덕을 찾아와 의탁한 뒤에 비로소 윤화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윤화가 찾아와 나타난 뒤에 그냥 김구석(金九碩)의 아내가 되어 촉운덕과 이도리(伊道里)를 낳았습니다. 그러므로 병신년에 전민(田民)을 분배할 적에 윤화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윤화가 목용의 소생임이 적실하여 의심할 바가 없고, 몽용을 저의 할아버지가 제위조의 몫으로 분배받았다는 것이 또 적실하여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윤화가 문서 중에 기재되었는지의 여부가 송사의 단안이 될 가치가 없습니다.박지수(朴之秀)의 호적은 분부하신 대로 조윤관(曺允寬)과 같이 등서(謄書)하여 인장을 찍어 바칩니다. 조윤관이 거짓을 꾸며 농간을 부리는 바가 갈수록 더해지고 있으니, 차후에 또 무슨 탈잡을 만한 단서를 만들어낼지 모르겠습니다. 전후의 문권을 일일이 조사하고 상고하여 공정하게 처결해 주시고, 조윤관의 백 가지 간사한 정황도 통촉해 주시어 관정(官庭)에서 시끄럽게 소요를 일으키는 폐단이 없도록 해 주셨으면 합니다.”라고 하였다.남평(南平) 이광필(李光必) 나이 60세. 아뢰기를, “‘남평현(南平縣) 전 만호(萬戶) 손후권(孫後權)이 벼슬을 구하러 상경하였는데, 혹은 경성에서 죽었다 하고 혹은 집에서 죽었다 하기도 하였다. 손후권이 어디에서 죽었는지 사실대로 고하라.’고 하셨으므로 아룁니다. 손후권이 경성에서 내려와 집에서 죽은 정황에 대해 저의 아내 및 동(洞)에 거주하는 8, 90세 노인 중에 90세 황여기(黃汝己), 80세 조신방(曺信方) 등이 모두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상고하여 처결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성안에 거주하는 주 조이(朱召史) 나이 63세. 아뢰기를, “문목 중에 남평현 전 만호 손후권이 죽은 곳에 대해 추문(推問)하였습니다. 저는 손후권의 외손부(外孫婦)이므로 손후권이 경성에서 죽었는지의 여부에 대해 알지 못하오니, 상고하여 처리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원고 조윤관의 원정에, “아룁니다. 제가 송사를 시작한 뒤에 3통의 원정과 두 차례의 문목에 대한 진술을 모두 바쳤으므로 지금 마땅히 곡직을 판별하여 결안(決案)을 작성할 단계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문자 중에 명백한 허위의 단서를 혹시 다 채취하지 못하여 신감(神鑑)의 착오를 초래하지나 않을까 염려되기에 이전에 진술하여 드렸을 때 적실하여 의심할 것이 없는 허위의 단서 중에 가장 큰 14개 조목을 간추려서 결말을 지을 때에 상고하기에 편리하도록 하였습니다.1. 송척(訟隻) 이한거가 송사를 제기한 초기에 단지 화회문기 한 장을 바치면서 말하기를, ‘이 밖에 다른 문권은 없습니다. 봉사(奉祀)는 병인년부터 시작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몽용이 병인년과 을유년의 호적에 누락된 것에 대해 그의 원정 중에 말하기를 ‘해도로 도망가 살았기 때문에 호적에 기재되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다가 관가에서 물어보자 말하기를, ‘저의 할아버지 이시원의 동서 박지수가 중간에 봉사를 맡았기 때문에 호적에서 누락된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송사의 핵심은 모두 봉사 한 조목에 달려있는데, 어찌하여 문권을 바칠 때에 이 일을 말하지 않고 있다가 관가에서 물어본 뒤에 이 일을 말하였단 말입니까. 그가 궁지에 몰리자 갑자기 만들어낸 허위의 말임이 분명하게 탄로 났으니, 이것이 하나입니다.1. 저와 이한거 등이 같이 한 성안에 살면서 정이 형제와 같은 벗이었습니다. 만약 이러한 일이 있다면 제가 장가간 뒤 17년 동안에 어찌하여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다가 저의 아내 어머니와 폐덕 등이 죽은 지 오래되어 물어볼 데가 없게 된 뒤에 이 일을 끄집어냈단 말입니까. 그렇다면 마치 여우가 촉루(髑髏)로 분장하여 증인의 눈이 있을 때에는 나타나지 못하고 하늘이 흐려져 비가 젖기를 기다렸다가 머리를 내민 것임이 명백하여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1. 폐덕의 아들 학봉이 정말로 이한거의 말대로 그의 종이 되었다면 그의 자녀는 바로 양처(良妻)의 소생이고 또 신해년 뒤에 태어났으니, 그가 법을 어기고 차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감히 곤장을 치고 위협하여 속전(贖錢)을 징수하였고 지금에 이르러 말을 만들어 말하기를, ‘주인으로서 그를 양인(良人)으로 만들어 풀어 주었다.’라고 하였으니, 어찌 그의 가풍(家風)을 이어받은 것이 아니겠으며, 또한 계략 위에 꾀를 써서 그 간특함이 비할 데가 없는 자가 아니겠습니까.1. 이한거가 이른바 화회(和會) 운운한 것은, 설사 그의 말대로 재주 손후권이 벼슬을 구하러 상경하여 문기를 작성할 때 미처 참석하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그의 아들 손시흥(孫時興)의 나이가 36세이고 그의 아우 손우작(孫右作)의 나이가 또 장성하였으니, 법리상 마땅히 참석하여 화회문기를 작성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재주 부자가 모두 참석하지 않고 화회를 구성했다고 하니, 이것이 어찌 거짓으로 말한 것임이 명백하여 의심할 바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1. 오동서화회문기를 모두 바칠 것을 분부하였으니, 이한거가 마땅히 각장의 문서를 취합하여 바쳤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허겁지겁 관정(官庭)으로 들어가 전에 바친 문서에 상고할 부분이 있다고 핑계 대면서 도로 추심해 가지고 나와 암암리에 사실(私室)에 엎드려 1자의 가감도 없이 베껴냈는데, 그 베껴낸 것이 비로소 오동서가 소지한 각장의 문서가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의 그릇된 습관이 성질로 굳어져 계속 허위의 농간을 부리고 있으니, 더욱더 사람으로 하여금 모발이 쭈뼛쭈뼛하여 소름이 끼칩니다.1. 이한거가 이른바 ‘화회문기는 재주 손후권이 알지 못하고 참석하지 않았다.’라고 한 말에 대해 꾀를 써서 엄폐하기를, ‘손후권이 벼슬을 구하러 상경하였다가 죽어서 오지 않았다.’라고 하는 등 그의 원정 중에 공허한 것을 빌려서 공허한 것을 보충하였으나, 실은 손후권이 자기 집에서 죽은 것을 그의 손녀사위 이가(李哥)가 스스로 증명하였습니다. 또 손후권이 백신(白身)으로 벼슬을 구하러 갔다고 하면 말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출신(出身)으로 공초를 하였으나 실은 애당초부터 활을 잡아보지도 않았던 자입니다. 만약 사실을 확인하려고 할 경우 홍패(紅牌)를 바치도록 하면 곧바로 그 말이 허위임이 판명될 것입니다. 한 가지 허위를 잡아내면 백 가지 허위가 모두 탄로 난다는 것을 하늘을 두고 증명할 수 있습니다.1. 이한거의 원정 중에, ‘박지수가 후손이 없다.’라고 한 것은 박지수가 후손이 없다고 말해야만 제위조(祭位條)로 분배한 것을 이속(移屬)했다는 말이 성립되기 때문에 후손이 없다는 말을 완전히 허위로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렇다면 박지수의 아들 박필주(朴必周)와 박지수의 손자가 어찌 하늘을 향해 울부짖으며 통읍(慟泣)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아들이 있고 손자가 있는 박지수를, ‘후손 없이 죽었다.’라고 하였으니, 그 위조(僞造)의 화가 오늘날 저에게 해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하에 있는 박지수에게 얼마나 통한을 안겨주었겠습니까.1. 박지수가 죽은 뒤에 이른바 아내 쪽의 제위조를 동서 이시원에게 넘겼다면 그 퇴납(退納) 문서 중에 어찌 다만 전지 3마지기를 전해 주었다는 글만 있고 원래 그 글에 몽용이란 글자가 없단 말입니까. 몽용은 애초부터 제위조로 분배되지 않았다는 것을 이것으로 증거를 삼으면 적실하여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1. 남평현의 장적으로 본다면 손후창과 박지수의 호적에 사내종의 양처 소생의 아이 이름 아래에 아무 해에 아비 아무개, 어미 아무개가 낱낱이 기재되어 있었으나, 몽용에 있어서는 병자년(丙子年)에 이미 나이 52라고만 기재되어 있었는데, 이는 다른 이유가 아니라, 그의 아내 구례가 손후창의 질녀(姪女)이고 그의 자녀는 손후창의 지친이기 때문에 노비의 줄에 싸잡아 넣어 기록하지 않고 싶었기 때문이니, 이는 너무나 분명하여 엄폐하기 어렵습니다. 이한거의 할아버지 이시원이 재주(財主)가 이와 같이 용의주도(用意周到)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을 것입니다만 후일의 간계(奸計)를 만들어내기 위해 재주의 호적에 누락된 폐금과 폐덕을 암암리에 기재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에 이르러 이한거가 영원히 그 간계를 이어받아 송사의 단서를 야기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제위조로 내준 노비이겠으며, 또한 어찌 외손봉사에서 누락된 것이겠습니까. 허위로 농간을 부린 자취를 여기에서 크게 통촉할 수 있을 것입니다.1. 몽용이 과연 제위조에 해당되고 과연 외손에게 전해 주었다면 이시원이 그의 자녀를 구처한 문기 중에 마땅히 아내 쪽에서 분배받은 몽용의 아들 아무개, 딸 아무개라고 분명하게 기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전혀 그러한 기록이 없고 부모도 없고 나이도 없는 폐덕(閉德) 두 글자를 은연 중 문기에 기록하였습니다. 화회문기를 작성할 때에 몽용을 제위조의 몫으로 분배받은 것이 적실하다면 어찌하여 구처(區處)의 글에 써넣지 않고 단지 십분 불분명한 폐덕 두 글자만 써넣었단 말입니까. 이것을 가지고 궁구해 보면 이른바 화회문기를 작성할 때 몽용을 제위조의 몫으로 분배받았다고 한 것은 이시원이 구처한 뒤에 소급해 작성했다는 것임이 불을 보듯이 분명합니다. 또 전후의 문서에 윤화(允化)란 두 글자가 없는데, 어느 문서를 근거로 삼아 그의 몫으로 분배받아 그의 제위조가 되었단 말입니까. 이른바 제위조의 몫으로 분배받았다는 말은 완전히 허위로 만들어낸 말임이 판명되어 마치 그의 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습니다.1. 일반적으로 사람의 가문에서 노복이 태어나거나 죽으면 그 연월일을 기록하고 남자 아무개나 여자 아무개를 낳았다고 분명하게 기재하는데, 이는 본디 규식에 따라 장적을 수정하는 규정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한거의 호적에는 단지 백 년이 지난 백골(白骨)의 종만 기록하고 그가 어느 해에 죽었다는 것은 말하지 않았는가 하면 그가 낳은 자녀가 누구인지 기재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무슨 법규이고 이것이 무슨 의미란 말입니까. 그의 의도가 어디에 있었는가 하면 만약 호적에 시기와 이름을 기록할 경우에는 암암리의 간계가 지레 먼저 사람들의 이목에 드러나 햇수와 날수가 얼마 되지 않은 것을 엄폐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먼저 꾸며 놓고 뒤에 터뜨리려는 계략이었다는 것임이 적실하여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 이것으로 보건대, 오징어가 먹물을 토한 것은 자기의 형체를 엄폐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사람이 그 먹물을 따라가 포획한다는 말이 바로 이한거를 두고 이르는 말입니다.1. 재주 손후창의 아우 손후권에게 이미 두 명의 아들이 있었으니, 큰아버지의 제사를 조카에게 맡기지 않고 외손에게 전하였다는 것이 인정으로 헤아려 보거나 법리로 헤아려 볼 때 이치에 맞는 말이 아닙니다. 또 외손봉사(外孫奉祀) 네 글자는 그가 바친 전후의 문권 가운데 전혀 있지 않았고 단지 화회문기에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이른바 화회라는 것도 원재주(元財主)가 알지 못하고 그의 자녀도 참석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진짜 화회를 이르는 것입니까. 가짜 화회를 이르는 것입니까. 명안(明案) 전의 신감(神鑑)이 반드시 태양처럼 간파하실 것입니다.1. 이한거가 이른바 제위조의 몫으로 몽용을 분배받았다고 한 것은 원래 한 글자의 문권도 없고 그의 입으로 공초한 내용 중에, ‘을유식(乙酉式)의 호적 중에 기록되어 있다.’는 말만 있는데, 이 말 역시 매우 불분명합니다. 그의 을유식 호적 중에 단지 폐금ㆍ폐덕만 기재되어 있고 제위조로 몽용을 분배받았다는 글자는 비록 옛날 눈이 밝은 이루(離婁)로 하여금 찾아보게 하더라도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몽용(夢用)이란 몽(夢) 자가 진짜 믿을 수 없는 춘몽(春夢)이란 것을 그가 어떻게 명감(明鑑)의 앞에 엄폐할 수 있겠습니까.1. 위의 13개 항은 허위로 만들어낸 형적이니만큼 그중 하나만 가지고도 충분히 이 송사의 단안이 되므로 전부 다 설파(說破)할 필요가 없고 그 가운데 더욱더 명백하게 드러난 허위의 단서가 하나 있으니, 형을 아우로 바꾸고 산 사람을 죽은 사람으로 만든 이 2건의 일입니다. 이러한 허위는 말을 가리켜 사슴이라고 한 조고(趙高)도 손을 움츠리고 하얀 것을 가리켜 검다고 한 공손룡(公孫龍)도 말문이 막힐 터인데, 이한거가 이와 같은 허무맹랑한 말을 지어내어 안전(案前)의 신명(神明)을 시험하였으니, 그 죄는 마디마디 베더라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균거(鈞鉅)의 아래에서 먼저 그 허위를 밝혀내어 특별히 징계하고 치죄함으로써 사방에서 듣는 사람이 통쾌하게 해 주소서. 그러면 그지없는 다행이겠습니다.”라고 하였다.원고(原告) 조윤관(曺允寬)의 원정(原情)에, “아룁니다. 송척(訟隻) 이한거의 외증조(外曾祖) 손후창(孫後昌)이 갑자년(甲子年)에 생존해 있었는데, 이한거가 전년도인 계해년(癸亥年)에 죽은 것으로 이른바 화회문기(和會文記)에 논하였으니, 그가 위조한 바가 이 한 대목이 명백합니다. 그런데 이한거가 위조한 것을 교묘하게 엄폐하기 위해 더욱더 꾀를 써서 말하기를, ‘갑자식(甲子式) 호적의 단자(單子)를 세전(歲前)에 받았기 때문에 갑자 단자를 계해년 겨울에 작성하였고 그해 12월 25일에 죽었기 때문에 갑자년에 생존한 것으로 된 것인데, 이러한 것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된 것이다.’라고 운운하였으니, 그 속임수가 이보다 더 심할 수가 없고 그 간사함이 이보다 더 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연소(年少)하여 중고(中古)의 일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그 즉시 관정(官庭)에서 그 거짓말을 깨뜨리지 못하였습니다.그 뒤에 중고에 단자를 받은 일을 인근의 읍(邑)과 이 고을에 사는 노인 및 퇴사(退仕)한 하리(下吏)에게 물어보니 여러 사람이 입을 모아 말하기를, ‘세전에 단자를 받는 것은 근년에 처음 시작한 것으로 4, 5년에 불과하고 예전부터 세운 규례는 해당 식년(式年)에 농사를 지어 곡식이 성숙할 때에 비로소 단자를 받았다. 그 의미의 소재는 농사를 지어 곡식이 성숙하면 떠돌아다니며 걸식(乞食)하는 사람들이 모두 귀농(歸農)하여 하나도 누락한 자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영문(營門)과 도내(道內) 열읍(列邑)에서 다 같이 통행하는 규례이니, 이한거가 이른바 이미 지나간 갑자년 세전에 단자를 받았다는 말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다.’라고 하면서 일제히 웃었습니다. 만약 안전(案前)에서 중고(中古)에 단자를 받아들이는 절차를 확인하려고 할 경우에는 우선 읍에 사는 노인을 초치하여 물어보시면 한 마디 말로 깨뜨릴 수 있습니다.그리고 계해(癸亥)ㆍ갑자년(甲子年)이 지금 80여 년이 되었는데, 타관(他官)에서 낳고 거주한 외증손(外曾孫)이 낳은 후손이 백 년 가까이 된 기왕의 일을 어떻게 이처럼 적실하게 증거를 댈 수 있단 말입니까. 갑자식(甲子式) 장적을 작성할 때 세전에 단자를 받아들인 문적을 그에게 바치라고 하면 수시로 갑자기 변명한 거짓말이 한마당에 깨뜨릴 수 있을 것입니다.대체로 손후창이 진짜로 죽은 날이 2월 25일이란 것에 대해 이선필(李先必)의 아내가 된 그의 종손녀(宗孫女)가 명백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한거가 이른바 12월 25일에 죽었다고 한 것은, 첫째는 세전에 단자를 받아들였다는 거짓말을 엄폐하기 위해서이고 둘째는 화회문기에 계해년에 죽었다고 한 거짓말을 엄폐하려고 한 것이니, 이렇게 마디마디 탄로 나 차례대로 증거를 댈 수 있습니다.1. 또 하나의 큰 허위의 단서가 있습니다. 손후창의 아우 손후권이 경성에서 죽었기 때문에 병인년 화회 때 참석하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병인년 한 해 뒤인 정해년에 어찌하여 손후창이 경성에 있지 않고 집에 있으면서 그의 외사촌 석태원(石泰元)과 같이 노비를 살 때 그의 이름으로 남평현에서 성사(成斜)하였단 말입니까. 그렇다면 이한거의 원정 중에 손후창이 경성에서 죽었다는 말이 옳겠습니까. 남평의 관아에서 인장을 찍고 성사한 문적이 적실하겠습니까. 이를 통해 보건대, 손후권이 병인년 화회 때 집에 생존해있었다는 것이 명백하여 의심할 바가 없어 마치 태양처럼 분명하다는 것을 하늘을 가리켜 증명할 수 있습니다.1. 또 한 가지 이한거가 부끄러워할 만한 일이 있습니다. 제가 허위의 단서에 대해 증거를 제시하여 밝힌 14건 중에 또 6개 항의 큰 조목이 있었는데, 이한거가 이에 대해 입증(立證)한 바가 단지 우매한 여자 한 명이였습니다. 그런데 양척(兩隻 송사(訟事)의 양쪽 당사자)이 분부를 받고 대질할 적에 그 여자가 묵묵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좌우를 돌아볼 뿐이었으니, 간신히 얻은 한 명의 여자가 어찌 그리도 맹랑하였단 말입니까. 이로 인해 그녀를 문밖으로 퇴출하였으므로 만인이 이 이야기를 서로 전하며 웃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이한거를 대신해 그지없이 부끄러워하였습니다.1. 이한거의 화회문서 중에 그의 외증조(外曾祖) 손후창이 나이가 아직 차지 않았기 때문에 전민(田民)을 처리하지 못하였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런데 남평(南平)의 장적(帳籍)을 상고해 보니 손후창이 정묘년(丁卯年)에 죽었다고 하였으니, 정묘년에서 역으로 손후창의 나이를 계산해 보면 그때 나이가 68세였습니다. 68세를 먹은 자를 나이가 차지 않았다고 하였으므로 문장이 성립되지 않으니, 이를 믿을 수 있는 글이라고 하겠습니까. 이한거가 위조한 것임이 이를 근거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1. 박지수가 같은 고을 사람 천협(千協)과 동서의 사이입니다. 박지수 부부가 모두 죽은 뒤에 처가(妻家)의 제사에 대해, 천협의 아내가 자기의 가산(家産)이 풍족한데다 지극한 정이 있었으므로 차마 향화(香火)를 갑자기 끊을 수 없다고 하여 그의 부모 묘소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그러한 행적을 같은 면(面) 부로(父老) 및 옛날 노복이 지금까지 끊임없이 칭송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한거가 ‘봉사(奉祀)했다.’라고 운운한 말이 거의 꿈속에서 헛소리하는 말과 같습니다.1. 완전히 백지(白地)에서 만들어낸 공허한 말이 있습니다. 병인년에 화회문기를 작성할 때에, 그의 문장(門長) 손후권(孫後權)이 제수와 아우의 상(喪)을 당한 뒤에 상경(上京)하여 4, 5년간 고향에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동참하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손후권을 지도 만호(智島萬戶)로 임명한 유지(有旨) 한 장을 얻어 상고해 보니 유지 상의 연조가 강희(康熙) 22년 윤6월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강희 22년은 바로 갑자년(甲子年)이므로 바로 손후권이 나주 지도의 임소에 있을 때입니다. 그런데 화회문기에, ‘상경하여 돌아오지 않았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손후권에게 벼슬을 제수한 유지가 지금 발견되리라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만든 것이므로 그의 위조 문자에 대한 하나의 큰 증거입니다. 이한거의 화회문기가 만약 위조한 것이 아니라면 하늘에서 떨어진 옥새(玉璽) 찍힌 직첩(職牒)을 어떻게 해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 한 조목이 천만 가지의 허위를 깨뜨리기에 충분하니만큼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외에 두서너 건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거짓이지만 입을 다물고 침묵만 지킬 수 없기에 모두 우러러 개진하여 사또(使道)의 명감(明鑑)이 남김없이 통촉하시기를 바랍니다.1. 이 송사의 하나의 큰 핵심은 모두 몽용을 제위조로 분배받았는지의 여부에 달려있습니다. 그런데 전후 문권에 원래 그러한 말이 기재된 바가 없으므로 이른바 화회문서라고 하는 것이 위조한 것이었음이 마디마디 탄로 나서 이처럼 분명하니만큼 다시금 의심스러워 결정을 내리기 어려운 단서가 없어졌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관가(官家)에서 여전히 몽용의 상전이 누구인지 파악하지 못하여 이를 가지고 다그쳐 물으셨습니다. 몽용의 상전은 본래 손후창이고 몽용의 아내 아비는 바로 손후창의 아우 손후권입니다. 그렇다면 손후창이 결코 질녀(姪女) 지아비의 주인이 될 수 없고, 따라서 손후권도 봉사(奉祀)조에 기록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가 하면 또 그 화회문기에 구구절절마다 허위의 단서가 드러나 무려 백 개의 구멍과 천 개의 허점에 이르러서 이한거의 약낭(藥囊)과 의술(醫術)로는 완치하기 어렵게 되었으니, 비록 몽용이 죽지 않고 지금 살아 있더라도 이한거가 물어볼 바가 아닙니다.”라고 하였다.본관(本官)의 제사(題辭)이 송사의 곡직은 여하를 막론하고 《대전(大典)》에, ‘할아버지 비첩(婢妾)의 소생은 바로 동성(同姓) 간 사촌이므로 사역(使役)할 수 없고 5, 6촌에 이르러 친속(親屬)이 점점 멀어지면 안 될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번에 구례는 바로 손후권 첩의 소생이고 몽용은 손후권의 형 손후창의 종인데, 구례가 몽용의 아내가 되었으니, 손후창의 입장에서 볼 때 비록 종의 양처라도 역시 삼촌 질녀(三寸姪女)이다. 비록 손후권이 전민(田民)을 분배하였더라도 자기 비첩(婢妾)의 소생을 결코 도문서(都文書)에 기재할 리가 없으며, 만약 손후창이 종의 양처라고 하여 분배하고자 했더라도 삼촌 질녀를 외손봉사(外孫奉祀)조로 분배할 리가 결코 없다. 그런데 지금에 이르러 이한거가 손후창의 외손으로 이른바 몽용을 외손봉사조로 분배받은 것이라고 하여 몽용의 양처 구례가 낳은 자녀를 추심하려고 하였다. 구례는 이한거와 8촌간이므로 친속이 점점 멀어졌다고 이를 수 있으나 삼촌 질녀를 종의 양처라고 하여 외손봉사조로 분배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니만큼 이한거가 외손으로 손후창의 질녀 구례를 종의 양처라고 하여 구례가 낳은 자녀를 추심하려고 한 것은 너무나도 부당하다. 그러므로 마땅히 곧바로 조윤관에게 결급(決給)해야 하나 이는 큰 송사에 관계되어 경솔하게 처결할 수 없다는 말로 송사를 기각한다. 양척(兩隻)이 만약 송사를 기각한 것을 불쾌하게 여길 경우에는 후일 다시 다른 송관(訟官)에게 송사를 제기해도 마땅하다. 이상과 같은 말로 논하여 송사를 퇴출한다.조윤관이 다시 올린 정장(呈狀)에, “사또(使道)께서 송사 판결의 말씀 중에, ‘이번 구례는 바로 손후권의 첩 소생이고 몽용은 바로 손후권의 형 손후창의 종인데, 구례가 몽용의 아내가 되었으니, 손후창의 입장에서 볼 때 비록 종의 양처이기는 하나 역시 삼촌 질녀이다. 비록 손후권으로 하여금 전민(田民)을 분배하게 하였더라도 자기 비첩(婢妾)의 소생을 결코 도문서(都文書)에 기재할 리가 없고, 만약 손후창이 종의 양처라고 하여 분배하더라도 삼촌 질녀를 외손봉사조로 분배할 리가 결코 없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한거가 외손으로 이른바 몽용을 외손봉사조로 분배받은 것이라고 하여 몽용의 양처 구례가 낳은 자녀를 추심하려고 한 것은 인정(人情)과 법리(法理)에서 전혀 이치에 맞지 않다. 그러므로 마땅히 곧바로 조윤관에게 결급(決給)해야 하나 이는 큰 송사에 관계되어 경솔하게 처결할 수 없다는 말로 송사를 기각한다.’라고 하였습니다.그렇다면 이른바 저에게 결급해야 한다는 뜻은 곡(曲)은 이한거에게 있고 직(直)은 저에게 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똑같은 한 사람의 자손이니만큼 곡직이 반반이 될 리가 전혀 없으므로 굽으면 완전히 굽을 것이고 곧으면 완전히 곧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한거ㆍ이한상(李漢祥) 등이 이미 사또가 내린 처결의 언지(言旨)를 받고도 제가 감히 생각지도 않은 제와 같은 부모의 소생인 태남(太男) 등을 예전처럼 침략하려고 감히 연한 땅에 말뚝을 박으려는 꾀를 생각해내어 날마다 말할 수 없이 협박공갈을 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심지어 그가 감히 고질병으로 폐인이 되어 애긍하기만 한 태남의 사촌여동생 태금(太今)이 순순히 복종하지 않는다고 트집을 잡아 그의 족당(族黨)을 거느리고 가 밤을 틈타 수색해 체포하였는데, 마치 살림살이를 철거하고 재물을 훔치는 명화적(明火賊)과 같이 행동하여 강제로 협박하는 위엄을 혹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이로 인해 태금이 죽음을 피해 도망 다닌 참상을 차마 형언할 수 없었습니다.만약 사또(使道)께서 처결해 주신 언지로 본다면 이한거 등은 이미 패소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전에 마구 침해한 속전(贖錢)을 정말로 마땅히 추심해 받아야 할 것이고, 투식(偸食)한 식구도 마땅히 추심해 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미처 그 일을 시작하기 전에 그들이 공갈협박을 이처럼 심하게 하였으니, 이한거 등의 죄는 양족(良族)을 마구 침해한 것뿐만 아니라, 사또께서 하달한 언지를 어기고 거절한 바가 막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마땅히 의송(議送)을 바쳐 다른 관청으로 송사를 옮김으로써 이한거 등이 전후로 저지른 죄악이 훤히 드러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 이유도 없이 협박을 당한 무리들이 우선 애긍하게 여겨졌으므로 이한거ㆍ이한복ㆍ이한상 등이 사또의 언지를 어기고 불법을 저지른 정황에 대해 감히 이렇게 우러러 호소하오니, 법정(法庭)에서 엄하게 다스려 금단시켜 주셨으면 합니다.이한거 등이 이러한 짓을 하게 된 것은 신해년(辛亥年) 뒤에 낳은 자녀에게 그들이 법전(法典)을 어기고 몰래 속전(贖錢)을 받은 죄를 징계하여 다스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본받아 마음에 달게 여기어 갈수록 더욱더 간계를 부린 버릇을 파격적으로 통렬히 징계하여 먼 지방의 간세(奸細)한 무리가 법을 무시하고 허위로 조작하여 농간을 부리는 버릇을 막아주시라고 하니, 그 제사(題辭)에, ‘관가(官家)에서 이미 송사를 기각하였으니, 의송(議送)을 바쳐 다른 관아로 송사를 옮기든지 임의로 하라.’고 하기에 위의 조윤관 명의로 의송을 바쳤습니다.”라고 하였다.그 의송에, “말이 공정하다는 것은 바로 송사할 송(訟) 자의 의미이니, 의심이 있어서 쟁송(爭訟)할 경우에 공정한 말 한마디로 결판내는 것은 본래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미 원정과 문목에 대한 진술을 바쳤으면 한 마당에서 분변하여 깨뜨리면 되지 허구한 날을 지체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이 송사를 지난해 12월에 시작하여 지금까지 결말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본관(本官)이 지금 비로소 안전(案前)에서 송사를 기각하면서 말하기를, 「일의 곡직이 이미 이와 같이 분명하니, 마땅히 조윤관에게 결급(決給)해야 할 것이나 이는 큰 송사에 관계되므로 경솔하게 처결할 수 없으니, 다시 다른 관청에 송사를 제기해 보도록 하라.」고 하였는데, 조윤관은 바로 저입니다.관청에서 비록 송사를 기각하였으나 피차의 곡직이 이미 그 언지(言旨) 중에 다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관가의 뜻이 이러한데도 불구하고 다투는 것에 탐닉한 무리가 사사로이 침해하고 공갈하였는가 하면 심지어 구타를 가하여 목숨을 보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송사가 출장(出場)하기도 전에 이처럼 악행을 저지른 행위는 송법(訟法)이 생긴 이래로 일찍이 들어보지 못하고 지금 비로소 직접 보았습니다. 만약 농사철이라고 하여 다른 관청으로 송사를 옮기지 않고 지체할 경우에는 가엾은 저 공갈협박을 당한 무리들이 장차 뿔뿔이 흩어지는 지경에 이를 것입니다. 그래서 불속에 든 사람을 구하고 물에 빠진 사람을 구는 것보다 더 급하여 이렇게 우러러 호소합니다.송척(訟隻) 이필제(李必齊)ㆍ이한적(李漢迪)ㆍ이한복(李漢復)ㆍ이한거(李漢擧)ㆍ이한상(李漢祥) 무리들이 다투는 바는 바로 그들의 외증조(外曾祖) 제위조(祭位條) 몫의 종 몽용(夢用)과 양처(良妻)가 낳은 자식을 차지하겠다는 것이고, 제가 다투는 바는 바로 몽용과 양처가 낳은 자식은 그들이 차지할 물건이 아니라는 것인데, 이 문제로 송사를 제기한 것입니다.대개 몽용은 바로 남평(南平) 손후창(孫後昌)의 종이고 몽용의 아내 구례는 바로 손후창의 아우 손후권(孫後權)의 딸입니다. 이한거 등이 위의 몽용을 그의 외증조 손후창의 종이라고 하여 그들의 화회문기(和會文記) 제위(祭位)조에 기록한 다음 자기가 외손으로 외증조의 제사를 지낸다고 차지하면서 몽용과 구례가 낳은 후손을 차지하려고 하였습니다.그가 이른바 두 번 지나간 병인년(丙寅年)에 작성한 화회문기에 운운(云云)했다고 한 것은, 생존한 재주(財主)가 참석하여 간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화회문기의 글 중에, ‘재주 손후창이 나이가 차지 않아 죽었기 때문에 문기를 작성하지 않았다.’라고 하였는데, 그 손후창이 나이 68세에 이르러 죽었으니, 이른바 나이가 차지 않아 죽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또 화회문기의 글 중에, ‘손후창의 아우 손후권이 벼슬을 구하러 상경하였다가 제수의 초상이 나고 아우의 초상이 났다는 부음(訃音)을 듣고 오지 않았다.’라고 하였는데, 남평현(南平縣)의 장적(帳籍)을 상고해 보면 그가 이른바 아우란 자는 나이가 62세였고 그가 이른바 형이란 자는 나이가 59세였으니, 이는 아우와 형이 뒤바뀌어 천륜(天倫)의 자리가 바뀐 것이므로 그가 이른바 화회문기는 결코 믿을 만한 문자가 아닙니다.또 화회문기 글 중에 ‘손후권이 벼슬을 구하러 상경하였다가 부음(訃音)을 듣고 오지 않았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고증할 만한 문안(文案)을 상고해 보니 그 화회문기를 작성한 해에 손후권이 받은 지도 만호(智島萬戶)의 직첩(職帖)이 현존한 것으로 보아 그때 임소(任所)에 있었으니, 상경하여 오지 않았다고 한 말은 완전히 거짓말임이 판연합니다. 또 말하기를 ‘그의 외증조 손후창이 계해년에 죽었다.’라고 하였으나 남평현 장적에는 계해년 뒤 갑자년까지 생존하였으니, 계해년에 죽은 자가 갑자년에 다시 살아났단 것입니까.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얼마나 큰일입니까. 그런데 산 사람을 죽었다고 하였으니, 무슨 일인들 속이지 않겠습니까. 이외에 허위의 단서를 낱낱이 열거하고 다 세기 어려우니, 그가 이른바 화회문기는 필시 사람이 만든 위(僞) 자이지, 결코 진짜의 문서가 아닙니다.또 외손봉사(外孫奉祀)의 설은 단지 금일 그들의 입에서만 나왔지 원래 문권(文券)에는 한 글자도 없습니다. 그리고 인정과 사리로 말하자면 이한거 등의 외증조모(外曾祖母) 만향(萬香)은 제 아내의 할머니 구례(九禮)와 동성 사촌이므로 동성 사촌이 상호 종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은 우선 전혀 이치에 맞지 않은 말이고, 또 질녀서(姪女壻) 몽용을 외손봉사(外孫奉祀)조로 기재한다는 것 역시 인정상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로 보나 저로 보나 이한거가 구구절절마다 허위로 농간을 부렸으니, 하늘이 반드시 싫어할 것이고 귀신이 반드시 질책할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로 인해 송사를 제기한 것입니다.대개 요점을 약간 뽑아 위에서 우러러 호소한 것으로 보면 이 송사를 분변하여 설파한 바가 흑백처럼 분명하였기 때문에 본관(本官)이 안전(案前)에서 송사를 기각할 때 한 말씀 중에 제에게 결급(決給)한다는 말씀이 있었던 것인데, 그 뜻이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다른 관청으로 송사를 옮기라는 언지(言旨)가 있었으므로 이 억울한 원망을 안은 채 허구한 날을 지체할 수 없고 또 공갈협박을 당한 자들이 한시라도 견디기 어려운 사정을 위하여 이렇게 호소하는 바입니다.또 한 가지 전혀 근거가 없는 일이 있습니다. 저와 이한거 등은 같이 한 성(城) 안에 거주하면서 대대로 사귀어온 정이 형제와 같았고 조석으로 상종하여 마치 지친(至親)과도 같았으나 원래부터 한 마디 말이나 반 마디 말도 이러한 일을 뒤섞어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백 년이 가까워질 때가지 한마디 말도 없이 지나갔던 이유는 그가 계략을 꾸며 만들어낸 일이 위에서처럼 불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가 일부러 햇수가 오래되고 사람이 죽어서 사적을 밝히기 어려워진 뒤를 기다렸다가 형체가 없는 도깨비가 밤을 틈타 출현하는 것처럼 이 문제를 제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숨어있는 간계를 적발하는 명견(明見)을 지닌 도내 공정한 관청이 아니면 그가 허위로 만들어 진짜처럼 농간을 부리는 자취를 파헤치기 어려울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백성의 고통을 자세하게 살펴 주시는 대감(大監)께서는 별도로 도내 강명(剛明)한 관청의 사관(査官)에게 이 사건을 이관(移管)하여 그로 하여금 궁천극지(窮天極地)의 통한을 씻어주도록 하셨으면 합니다.”라고 하니, 그 제사(題辭)에, “과연 정장(呈狀)의 말대로라면 본주(本州)에서 송사를 기각한 것은 매우 괴이하고 의아스럽습니다. 만약 큰 송사라는 이유로 결급(決給)하지 않고 송사를 다른 관청으로 옮기도록 하였다면 세상에 어찌 결급할 송사가 있겠으며 다른 관청에서도 어찌 대신 맡을 리가 있겠습니까. 비록 원고와 피고가 각각 다른 관아의 지역에 살더라도 본관(本官)으로 가서 송사를 제기하면 마땅히 정안(正案)을 궁구하여 법리상 공평하게 처결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본읍(本邑) 백성의 송사를 어찌 이와 같이 다른 관청으로 떠넘길 수 있단 말입니까. 곧바로 판결을 내림으로써 송사의 지체로 인해 억울하다고 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이상이 원정과 의송의 내용이다.이 송사는 이전 분기에 시작되었는데, 양척(兩隻)의 원정과 다시 공초한 문기를 호적과 비교 대조한 것을 등서하는 여러 가지 일을 남김없이 자세히 다 하였으므로 그들로 하여금 다시 격식을 갖추어 응대하게 할 필요가 없다. 그 문서들을 상세하게 고열(考閱)해 보니, 원고 조윤관 아내의 외할아버지 몽용은 바로 송척 이한거의 외증조 손후창의 종이고, 몽용의 양처 구례는 손후창의 아우 손후권의 첩이 낳은 딸이다. 구례는 손후창의 삼촌 질녀이고 이한거의 할머니와는 또 동당(同堂 같은 고조부(高祖父) 아래의 친척)의 자매(姉妹)이다. 법전(法典)에, “비첩(婢妾)의 소생은 5촌에 이른 뒤에 사환(使喚)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이 있고, 5촌에 이르기 전에는 속전(贖錢)을 내어 양인(良人)이 될 수 없는데, 이는 친속이 소원해진 뒤에 골육상잔(骨肉相殘)의 지경에 이르지 않게 하는 것으로서, 고금이 통행하는 규정이다.이한거가 쥐고 있는 요점은 병인년에 작성한 화회문기에 있는데, 그 문기는 본가(本家)의 재주(財主)가 없고 외부의 사람들이 스스로 재주가 되어 작성한 문권이니만큼 이는 불법의 일이고 근거가 없는 문권이다. 또한 어떻게 화회문기를 타인이 집필(執筆)할 수 있겠는가. 이는 문서의 두뇌(頭腦)가 잘못된 것이다.손후창이 이미 딸 5명을 낳고 사위 3명을 얻은 뒤에 죽었으니, 그가 조년에 죽지 않았다. 그리고 이른바 화회문기 중에 그들의 아내 부모가 나이가 차지 않아 죽어서 문권을 작성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이것이 어찌 말이 성립되겠는가. 손후권은 바로 손후창의 아우인데, 문기 중에 제수와 아우의 초상을 당하였다고 한 것은 형제의 순서를 뒤바꾼 것이다. 사위가 되어 아내 아버지의 형제 순서를 알지 못하였으니,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상 ‘나이가 차지 않았다.’는 말과 ‘아우의 초상을 당했다’는 말 이 두 조목으로 미루어보건대, 이른바 병인년에 작성한 도문서가 어찌 가짜가 아닌지 알 수 있겠는가.설령 도문서가 가짜가 아니고 진짜일 경우에도 이른바 제위조의 사내종 몽용만 기록되어 있고 몽용의 아내 구례 및 그들이 낳은 자식 19세의 폐금과 16세의 폐덕은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그 이유는 차마 지친(至親)의 입장에서 그들을 강제로 노비로 삼을 수 없어서 그런 것이니, 이는 인정(人情)과 천리(天理)상 당연한 것이다. 그 뒤 수십 년간의 장적 중 노비(奴婢)조에도 기재되어 있지 않았으니, 양인이 되는 것을 허락하여 골육지친(骨肉之親)을 보호했다는 것이 불을 보듯이 분명하다.병인년 뒤 20년에 이르러 을유식의 호적에 비로소 간계(奸計)가 싹트기 시작하여 몽용의 자녀를 갑자기 호적에 기재하였다. 이한거가 그들과 한 성안에 살 때 원래부터 주인이니, 종이니 하는 말이 없다가 지금 백 년 가까이 이르러 후속(後屬)이 소원해진 뒤에 강압적으로 양인을 노비로 만들려고 하였으니, 이미 너무나도 간악(奸惡)하였다. 그리고 몽용이 셋째로 낳은 윤화(允化)에 있어서는 최후에 침탈하려고 한 것은 무슨 의도란 말인가. 문권으로 보면 두뇌가 그처럼 어긋났고 법리로 보면 골육상잔(骨肉相殘)의 경고 대상이었다. 그래서 이전 분기의 송사 때 법에 비추어보고 간계를 간파하여 조윤관에게 승소를, 이한거에게 패소를 결정하여 이미 단안(斷案)을 성립한 것이다.이상과 같이 이전의 소견이나 나중의 소견이 별로 다른 바가 없다. 이전에는 비록 큰 송사를 경솔하게 처결할 수 없어서 기각하였으나 조윤관이 바친 의송(議送)에 대한 순영(巡營)의 제사(題辭)에, “송사를 다른 관청으로 옮기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본주(本州)로 하여금 처결하도록 한다.”라고 하였는데, 이상과 같이 제사를 작성하여 보냈다.이에 한결같이 뒤로 미룰 수 없어서 한결같이 지난번 송사에 대한 결사(結辭)에 따라 몽용 소생의 화명(花名) 뒤에다 기록하여 조윤관에게 결급(決給)한 다음 입안(立案)을 작성해 준다. 이한거가 비록 출타하여 부재중이기는 하나 이 송사는 이미 이전의 판결을 뒤집은 것이 아니고 일체 이전에 결급한 것을 베껴서 입안하였을 뿐이니만큼 별로 양척(兩隻)에게 다시 반문(盤問 자세히 캐물음)할 일이 없으므로 이한거의 변론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더구나 이한거의 사촌 이한복은 같은 송척으로 앞장서서 나와 스스로 대변(對辯)하였으니, 이한거와 이한복이 몸은 둘이지만 하나의 송척이다. 이한거가 돌아온 뒤에 비록 백 개의 입을 놀려 만 마디의 말을 늘어놓더라도 어찌 굽은 것을 전환하여 곧은 것으로 만들고 패소한 것을 변경하여 승소한 것으로 만들 리가 있겠는가. 모두 입안의 끝에 사리를 논하였으니, 상고하여 시행해야 할 것이다.후고차(後考次) 합행입안자(合行立案者)[주-D001] 의송(議送) : 개인이 관찰사(觀察使)ㆍ순찰사(巡察使) 등에게 올리는 민원서(民願書). 대개 수령(守令)에게 소지(所志)를 올렸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면 관찰사에게 올리거나, 곧바로 올리기도 하였다. 양반이 의송을 올릴 때에는 직접 하지 않고 그 집 노비의 이름으로 올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음.[주-D002] 외손봉사(外孫奉祀) : 조상의 제사를 계승할 때 적장자(嫡長者)ㆍ적손(嫡孫)ㆍ차자(次子) 이하의 아들이나 직계 손자 순으로 되어 있는데, 이들 중 아무도 없는 경우 즉 후사가 없을 때 외손에게 재산을 상속하고 사후의 제사를 의뢰하는 것을 말함.[주-D003] 재주(財主) : 재산의 임자. 화주(貨主). 노비와 전택(田宅)의 소유자가 그 재산을 처분하지 않고 사망한 경우 그 유산의 분할에 분쟁이 있을 때 이것을 공평하게 처리하기 위하여 관(官)에서 소유자 곧 재주를 대신하여 처분하는 수가 있다. 이를 관이 만든 재주[官作財主]라고 함.[주-D004] 출신(出身) : 문ㆍ무과(文武科) 또는 잡과(雜科)에 급제하고 아직 출사(出仕)하지 못한 사람. 주로 무과 급제자를 지칭함.[주-D005] 말을 …… 것 :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 “조고(趙高)가 권력을 휘두르려고 하였으나 신하들이 따르지 않을까 염려한 나머지 시험해 보기 위하여 이세(二世)에게 사슴을 바치기 전에 사슴을 가리키면서 말이라고 하니, 이세가 웃으며 말하기를, ‘승상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사슴을 말이라고 하다니.’고 하고 주위 사람에게 물었다. 그러자 신하들이 묵묵히 말하지 않기도 하고 말이라고 말하기도 하여 조고의 뜻에 아부하였다. 그중 말이라고 말한 사람은 조고가 은밀히 중상모략을 하여 법을 적용하여 처벌하니, 신하들이 모두 조고를 두려워하였다.”라고 하였는데, 후세에 고의로 시비(是非)를 전도시키는 것에 비유하였음.[주-D006] 홍패(紅牌) : 문과(文科)의 회시(會試)에 급제한 사람에게 내어 주는 붉은 종이에 쓴 교지(敎旨)임.[주-D007] 이루(離婁) : 중국 황제(黃帝) 때에 살았으며, 눈이 아주 밝았다고 전해지는 전설상의 인물. 《신자(愼子)》 〈내편(內篇)〉에, ‘이루(離婁)는 눈이 밝아서 백 보 밖에서도 능히 털끝을 살핀다.’라고 하였음.[주-D008] 사관(査官) : 감영 등에서 파견된 조사관으로, 죄인을 심문하는 등 사건을 검사하는 일을 맡아 보던 벼슬아치.[주-D009] 결사(結辭) : 추관(推官)이나 검시관(檢屍官)이 살인한 원인과 경과를 조사하여 조서(調書)에 적어 넣는 의견서.[주-D010] 화명(花名) : 호적부(戶籍簿)에 등록된 인명(人名).
- 2023-08-17 | NO.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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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청백리 이야기
- 청백리淸白吏 이야기는 역사상 청빈한 관리로부터 비롯되곤 하지요. 전라도사全羅道事로 새로 부임해온 조공趙公의 이야기입니다. 조공은 청백리와 무척 연관이 돼 있습니다. 눌재 박상의 후임으로 부임한 조공은 나이에 비해 성품이 칼날같이 예리하고 엄격해 일체의 부조리와 결코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이 점은 눌재와 닮았다 할 수 있겠지요. 조공이 부임했을 무렵 광주 고을은 흉흉한 소문이 돌았어요. "오늘은 동헌 뜰 은행나무 가지에 공방工房 아전의 목 하나가 걸렸고, 내일은 뉘 목이 대롱거릴까." 이렇다 보니 관아 안은 말할 것도 없고, 민가에까지 밤중에 불이 꺼진 것처럼 으스스한 찬 기운만이 감돌았지요..이처럼 부조리를 걷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던 그에게는 이 지방 유일의 지기知己이자 말동무인 한의사 정소죽鄭小竹, 그리고 이런 저런 심부름과 뒷바라지를 해주는 계집종 연옥蓮玉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조공은 늦어지는 정소죽을 기다리면서 계집종 연옥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조공은 연옥에게 "서울로 가고 싶지 않냐"고 묻습니다. 물어보는 저의를 알아채지 못한 연옥은 조공의 물음에 간단하게 "네" 하고 대답했지요. 조공은 "음 그럴 테지" 하며 섭섭한 여운을 남기며 조용히 가라앉은 말투로 대화를 이어갔습니다."옳아 가고 싶을 게다. 교활하고 간사한 수전노들만 우굴거리는 이곳 관아官衙, 도둑과 거러지를 합쳐서 둘로 나눈 것 같은 그런 놈만 있는 내 주위에서 하루가 급하다 떠나고 싶을 거야." 조공은 독백처럼 이렇게 내뱉고 침통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습니다. 연옥 또한 그 말에 대한 대답은 안했지만 그런 자(탐관오리)들에 사정없이 철퇴를 내리고 있는 사또 마님이 그지없이 좋고 자랑스러웠어요.조공이 이처럼 정소죽을 기다리는 데는 보이는 것, 들리는 것이 모두 언짢고 거슬리는 것 뿐인데 정소죽 단 한 사람만 예외로 소통이 됐기 때문이지요.조공이 "왜 이렇게 늦어?"라고 묻자 정소죽은 "용무가 별로 긴치 않은 것 같아서요. 의사는 환자가 더 중하지 원님의 말상대 같은 건 그 다음 일이 아닙니까?" 하며 웃지도 않고 스스럼없는 말대꾸를 늘어놓습니다. 곧 조촐한 주안상이 나오고 연옥의 시중으로 단 두 사람만의 술자리가 벌어졌지요. "이건 함평에서만 나는 백어白魚인데 이 귀한 것을 어떻게 구하셨지요? 이러한 진선珍膳을 늘 상미嘗味하신다니…과연 원님벼슬이 좋긴 좋군요. 이것도 남도에 오신 덕분 아닙니까?"정소죽은 충청도 태생으로 극도의 이 지방 혐오증에 걸린 듯 싶은 조 도사를 어르는 말투로 말했어요. "하긴 이런 싱싱한 백어는 임금님도 잘 못 잡수는 귀한 생선이지!. 생선만은 이곳 것도 좋거든…""어찌 생선뿐인가요. 인걸人傑은 또 어떻구요? 이 고장 출신 박눌재(눌재 박상) 박사암(사암 박순) 기고봉(고봉 기대승) 어디 더 세어볼까요? 밑천이 딸린가?""허허!, 이 사람 또 향토 자랑이 시작되는구먼. 의술은 변변치 못하면서 보학譜學만은 제법이거든 핫…"이렇게 해서 거리낌 없는 정담이 오가는 가운데 정소죽은 요즘 수하 이속吏屬에 대한 추죄追罪가 너무 가엄苛嚴하다는 항간의 소문을 있는 그대로 간언諫言을 했지요. 조 사또의 노여움과 꾸지람까지를 각오한 마음으로 부터의 충언이었습니다.그러나 조공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두 눈을 지그시 감고 한동안 말이 없었지요. 조공이 서울에서 착임하던 날, 그러니까 석 달 전의 일이었어요. 선례에 따라 많은 관속官屬들이 장성 경계까지 마중을 나갔었습니다.가을철 좀 차가운 날씨에 검은 무명배 고의적삼에 관복을 걸친 신관 사또의 너무나 검소한 옷차림에 마중 나온 이속吏屬들은 대경실색을 했지요. 값진 비단으로 감싼 자기네들의 사치스런 복색이 너무도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몰라 했습니다. 가마에서 내린 조 사또는 앞에 늘어선 수하 이속들에게 즉석 훈시를 했어요."이처럼 먼 곳까지 마중을 나와 주어서 고맙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그런데 한 가지 미리 일러둘 것은 빙공영사憑公營私로 사복私腹을 채우거나 무고한 백성을 괴롭히는 일이 있으면 나는 결단코 용서치 않는다. 이 지방의 아전들은 대개 치부가 대단하다고 들었는데…이렇게까지 사치스럽게 잘 입고 지내는 줄은 미처 몰랐다. 어쩐지 오늘부터 내 자신이 무슨 ‘광대’나 ‘기생오라비’의 우두머리라도 된 것 같구나."훈시라기보다는 지독한 야유와 통갈(으름짱)이 곁든 일종의 폭탄선언이었지요. 조공은 신임 초부터 기강을 세우기 위한 대수술을 거침없이 단행했습니다. 그것은 비단 수하 아전들에게만 그치지 않고 지방세도가나 양반들에게까지 미치는 아주 엄정하고도 철저한 것이었어요. 조금이라도 법을 어기고 비리, 부정을 저지른 자가 있으면 지위 고하나 반상班常을 가리지 안고 가차 없이 엄벌로 다스려 나갔지요.그는 조상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낸, 손꼽히는 양반이었지만 놀고먹는 양반이라는 자들을 몹시 혐오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무위도식食으로 애잔한 백성들의 등이나 쳐서 호의호식하는 지방토호들을 오장이 뒤틀리도록 미웠했지요. 도임 후 3개월 동안 수하 이속을 포함해 그런 자들을 잡아 족치고 물고를 냈습니다. 그동안 죽어서 효수梟首(목을 베어 나무 같은 데에 매닮)된 자의 수효만 해도 열 명을 넘겼던 것입니다.그 중에는 시정 무뢰배들과 어울려 투전판(도박판)이나 벌리고 부녀자를 희롱, 강간하는 행패를 일삼던 전직 고관의 자제가 두 사람이나 끼어 있었구요.정소죽을 상대로 밤늦도록 술잔을 나눈 조공은 아무리 마셔도 취기는 돌지 않고 얼굴은 더욱 창백해져만 갔지요. 조공은 "소죽 자네 눌재 박상 선생이 이곳 도사都事로 계실 때 나주 사는 우부리를 쳐 죽인 그 일화를 잘 알지?"라고 물었습니다. 정소죽이 "알구 말구요, 그런데요?"라고 대답했지요. 사실 조공은 눌재 선생을 구했다고 하는 그 고양이를 낮에 잠깐 조는 사이에 꿈속에 보게 됩니다. 그것도 장성 갈재에서요. 근데 그 고양이는 조공을 보자 바로 산위로 달아나버렸습니다. 조공은 그 오묘한 꿈 이야기를 한 뒤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습니다. 한동안 침묵하다가 "술맛이 쓰게 느껴지는 건 어쩔 때 그런 걸까? 의사인 자넨 그 이유를 알고 있지 않는가?"라고 묻자 정 소죽은 "술은 본래가 쓴 게 아닙니까, 그게 정상이죠, 반대로 달게 느낄 때는 미각기관에 이상이 있는 거구요, 우리 그리 되기 전에 그만 납배拉杯를 하시지요"라고 제안했지요. 조공은 "자네씨와 마지막 별배別杯(이별의 순간에 나누는 술잔)가 이렇게…좀 미련이 남지만 그만두지"라고 말했습니다. 손에 든 술잔을 비우고 섭섭한 눈빛으로 천장을 쳐다봤다 지그시 감은 조공의 눈에 배인 눈물이 양 볼을 적시고 방바닥에 굴러 떨어졌습니다.소죽은 그 같은 조공의 거동에서 중대하고 불길한 뭔가를 직감했지요. 굳세고 담대한 그에게 여간해서는 그 같은 거동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그 까닭을 물을 처지도 아니었어요.한참 후 조공은 결연한 말투로 "내일 서울에서 귀한 손님 한분이 날 찾아 내려오시네. 아마도 약사발을 들고 말일세. 내가 그동안 너무 많이 사람을 죽였거든…" 하고 호탕하게 웃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정색을 하며 "정공, 내 저승에 가서도 자네씨와의 깊은 정리만은 두고두고 잊지 않겠어! 그런데 한 가지 연옥이 그 아이를 곡 자네씨 힘으로 무사히 서울로 보내주시게. 이것만이 나의 간절한 부탁일세"라고 말했지요.순간 정소죽은 두 손을 모아 방바닥에 엎드리고, 옆방에서는 계집종 연옥이의 처절한 오열이 터져 나왔습니다.※청백리淸白吏는 관리 가운데 최고로 청렴한 관리를 말한다. 오직 백성과 나라를 위해 일할 뿐 사리사욕을 챙기거나 부정부패와는 담쌓고 사는 깨끗한 관리를 지칭한다. 하지만 청백리의 사표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간신배들로부터 모함을 당해 단죄에 처해진 청백리들이 있었다는 것은 그 시대가 얼마만큼 부패했고, 부조리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청백리의 실천은 모든 시대의 숙제다.
- 2018-05-28 | NO.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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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 광주 이한지 서(與光州李罕之書) - 동문선 제57권
- 여 광주 이한지 서(與光州李罕之書) - 동문선 제57권: 최치원(崔致遠)이한지(李罕之)에게 아룁니다. 성간(成覵)은 말하기를, “저도 장부요 나도 장부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공(功)을 이룩하고 절(節)을 세우는 것은 옛사람뿐 아니라, 순(順)함을 앞세워 충성을 바치는 것은 바로 오늘에도 마땅한 것입니다. 요즈음 칙서(勅書)와 수조(手詔)를 반드시 다 중심(衆心)을 격려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겸하여 왕영공(王令公)에게 도통(都統)을 제수하여 서문군용(西門軍容) 도감(都監)에 보충하였으니, 이렇게 한 것은 번진(藩鎭)이 공이 없어 조정에서 계책이 다하였으므로 늙은 선비에게 큰 책임을 맡겨 준 것이니, 비록 부질없이 소문이 전파하였으나 반드시 일을 이룩하기 어려울 것입니다.여기는 지난해에 용맹스럽고 날랜 군사를 거느리고 장차 완흉(頑兇)을 소탕하려 하다가 곧 왕명을 받들어 회해(淮海)를 안정하게 하였습니다.조서에 이르기를, “짐을 위하여 오ㆍ월(吳越)의 땅을 보존하되 짐에게 동남(東南)의 걱정이 없도록 하라.” 하시므로, 감히 명(命)을 어기지 못하여 드디어 군사를 돌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물의(物議)를 상심(詳審)하고 군기(軍期)를 참작하여 관중(關中)에 도끼를 잡은 무리가 있는데 곤외(閫外)에 창을 벼개 삼는 이가 없으니 누가 능히 힘을 다하겠습니까. 실로 분통할 일입니다. 내가 만약 행하지 않는다면 장차 중심(衆心)이 어디로 가겠습니까.지금 바로 변로(汴路)를 따라 문득 동관(潼關)에 들어가 봉성(鳳城)을 회복하고 난가(鑾駕)를 맞이하여, 길이 공명을 만대에 전하고 끝까지 사방을 숙청할 것입니다.한지(罕之)는 이미 임금의 근심을 나누는 처지에서 오랫동안 용맹을 길렀으니, 반드시 정예(精銳)를 가려 반적(叛賊)을 토벌(討伐)할 것을 기약하고 있을 것입니다.이제 칙서와 수조(手詔)를 기록해서 같이 보내드리니, 성지(聖旨)를 우러러 반드시 충성을 힘써 바로 토벌을 결행(決行)하여 함께 부귀(富貴)를 도모하여야할 것입니다.때는 놓칠 수 없고 그대가 이에 힘써 할 것이기 때문에 이제 고하여 알게 하니, 속히 회보(回報)를 보내십시오. 이를 살피시오.[주-D001] 임금의 근심 …… 처지 : 지방의 장관은 황제의 근심을 나누어서 그 지방을 다스리는 것이다.
- 2020-09-15 | NO.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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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 장사들이 임진란 초에 무너져 패한 기록- 상촌선생집 제56권
- 여러 장사들이 임진란 초에 무너져 패한 기록[諸將士難初陷敗志] - 상촌선생집 제56권 : 상촌(象村) 신흠(申欽 : 1566~1628)적병이 처음 부산에 이르렀을 때 망을 보던 관리가 대략 4백여 척쯤 된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다가 적이 부산을 함락하고 잇따라 그 지역 일대의 진보(鎭堡)를 함락하자 여러 고을에서 멀리 바라만 보고 저절로 무너져 그 뒤로는 망을 보며 정탐하는 일이 없게 되었다. 그래서 적의 대군이 계속 이르기를 밤낮으로 끊이지 않아 바다를 덮으며 왔는데도 변장(邊將)이 이를 깨닫지 못한 채 그저 처음 보고해 온 것에 의거하여 늘 적의 병력은 단지 4백 척에 불과하다고 말하였다. 우순찰사(右巡察使) 김성일(金誠一)은 말하기를 “적의 배가 4백 척이 채 되지 않는데 한 척에 수십 명밖에 싣지 못하는 실정이고 보면 다 합해도 1만 명을 넘지 않을 것이다.” 하였는데, 성일의 이러한 주장이 조정에 알려지자 조정에서도 그렇게만 여겼다.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이 출정할 때 단지 군관(軍官) 및 사수(射手) 60여 인을 이끌고 가면서 내려가는 도중에 군사 4천여 명을 거두워 모았다. 4월 24일 상주(尙州)에 도착했는데, 이일의 생각에 우리 군사가 오합지졸인 만큼 마땅히 습진(習陣)시켜 기다려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진을 미처 반도 펼치기 전에 적이 갑자기 이르렀으므로 별수없이 대진(對陣)하였으나, 교전하기도 전에 적이 먼저 포를 쏘아대 철환(鐵丸)이 비오듯 쏟아졌으므로 아군이 대적하지 못하였는데, 이에 적이 함성을 지르며 진을 무너뜨리자 우리 군사가 궤멸되면서 사상자가 무더기로 발생하였다. 이 와중에서 이일만 단기(單騎)로 몸을 빼어 달아나고 종사관(從事官) 윤섬(尹暹)ㆍ박호(朴箎) 등은 모두 죽었다.조정이 이일을 보낸 뒤 얼마 되지 않아 날로 급하게 변보(邊報)가 들어오기를 “적이 이미 내지(內地)로 쳐들어오고 있는데 장차 조령(鳥嶺)을 넘으려 한다.” 하자, 도성 인심이 어수선해지면서 피난갈 준비들을 하느라 부산하였다. 이에 또 신립(申砬)을 도순변사(都巡邊使)로 삼은 뒤, 더욱 도성 내의 무사와 재관(材官)을 동원하고 삼의사(三醫司 내의원(內醫院)ㆍ전의감(典醫監)ㆍ혜민서(惠民署)) 한량인(閑良人) 중에서 활을 쏠 줄 아는 자까지 뽑아 모두 그에게 소속시키는 한편, 조관(朝官)으로 하여금 각각 전마(戰馬) 1필씩을 내어 조력하게 하고, 무고(武庫)의 군기(軍器)를 꺼내 주어 그가 쓰게끔 하였다. 이때 징집된 제도(諸道)의 군사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나 신립이 급히 내려가면서 단지 인근 고을의 군사만 이끌고 갔다.4월 26일 충주(忠州)에 도착했을 때 병력이 겨우 수천 명밖에 안 되었는데 이 군사로 단월역(丹月驛) 근방의 언덕에 진을 쳤다. 이때 이일을 만났는데 이일로 선봉을 삼아 그로 하여금 공적을 세워 보답하게 하였다. 혹 말하기를 “적의 세력이 지극히 성대하니 그 예봉에 직접 맞서기는 어렵다. 조령에 나아가 협곡 안에 군사를 매복하고 적이 골짜기 입구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우리가 양 쪽 언덕에 의거하여 높은 곳에서 활을 쏘면 승리를 거둘 수 있다.” 하였으나, 신립은 말하기를 “그들은 보병이고 우리는 기병이니 넓은 들판으로 끌어들여 철기(鐵騎)로 짓밟아버리면 성공하지 못할 리가 없다.” 하였다.그러나 적은 이미 조령(鳥嶺)과 죽령(竹嶺) 두 고개를 거쳐 몰래 군사를 잠입시켜 충주 성중에 이르렀는데도 신립은 이를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28일에 적이 민가를 불태운 뒤에야 적이 이미 조령을 넘어왔다는 것을 우리 군사가 알고는 간담이 떨어지도록 모두 경악하며 두려워하였다. 이윽고 바라보니 왜적들이 조령의 큰 길을 통해 산을 뒤덮으며 내려오는데 칼빛이 번쩍번쩍하였다. 신립이 군사들을 지휘하여 차례로 진격시켰으나 마을 길이 비좁은데다 논밭이 많아 말을 치달리기에 불편하여 지체되는 사이에 적이 우리 군사의 좌측으로 돌아 나와 동쪽과 서쪽에서 끼고 공격해 오는 바람에 우리 군대가 크게 어지러워지면서 적에게 난도질을 당한 결과 시체가 산처럼 쌓였고 군자(軍資)와 군기(軍器)가 일시에 모두 결딴나고 말았다. 신립이 단신으로 말을 타고 강 언덕에 이르렀는데 적이 군대를 풀어 추격하자 신립이 물에 몸을 던져 죽었으며 김여물(金汝岉)도 물 속으로 투신하였다.신립의 군대가 패하자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파천(播遷)하였는데, 우상 이양원(李陽元)을 남겨두어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삼아 경성을 지키게 하였으며, 도원수(都元帥) 김명원(金命元)과 부원수(副元帥) 신각(申恪)으로 하여금 대군을 이끌고 한강에 나아가 진을 치게 하였다. 5월 2일 적의 선발 부대가 이르자 대군이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너졌다. 대가가 성을 빠져 나간 뒤 도성 백성들이 서로들 도적떼로 변해 궁실을 불태우고 재물을 노략질하는 등 도성 안이 크게 어지러워지자 이양원이 지키지 못할 줄을 알고 양주(楊州)로 달아났는데 성문도 폐쇄하지 않은 상태였다. 적이 처음 이르렀을 때 성문이 열려져 있고 사마(士馬)의 흔적이 전연 없이 조용한 것을 보고는 복병이 있을까 의심하여 감히 들어오지 못하다가 3일이 되어서야 성이 실제로 텅 빈 것을 알고는 마침내 도성에 들어왔다.남도 절도사(南道節度使) 신할(申硈)이 변란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대가가 머문 곳을 뒤따라 오다가 송경(松京)에서 배알하자, 상이 이를 인하여 신할을 방어사로 삼아 임진(臨津)에 머물러 진을 치게 하였다. 또 한응인(韓應寅)을 제도 도순찰사(諸道都巡察使)로 삼아 김명원을 대신해서 임진에 나아가 주둔하게 하고, 평안도 강변의 토병(土兵) 8백 명을 동원하여 성세(聲勢)를 돕게 하였다. 당시 이양원(李陽元)ㆍ이일(李鎰)ㆍ신각(申恪)ㆍ김우고(金友皐) 등은 대탄(大灘)에 있고, 한응인ㆍ권징(權徵)ㆍ신할ㆍ이천(李薦)ㆍ이빈(李薲)ㆍ유극량(劉克良)ㆍ변기(邊磯) 등은 임진에 있었는데, 5월 18일에 회전(會戰)하기로 약속하였다.이때 의논하는 이가 말하기를 “우리 군사가 많다고는 하나 거의 대부분이 약졸(弱卒)이고, 믿을 수 있는 것은 강변의 토병뿐인데 토병이 멀리서 오느라고 지쳐 있으니, 며칠쯤 늦추어 그들이 휴식을 취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거사한다면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하였으나, 여러 장수들이 듣지 않았다. 그리하여 17일 야음을 틈타 군사를 도하(渡河)시켰는데, 좌위장(左衛將) 이천이 상류 강 언덕에서 적군을 만나 급히 치다 패배를 당하였으며, 유극량도 죽고 신할도 패몰(敗沒)한 가운데 적이 마침내 임진을 건너오게 되었다.조정이 제도(諸道)의 군사를 동원하여 들어와 응원토록 하니, 전라 순찰사(全羅巡察使) 이광(李洸)이 그 도의 방어사(防禦使) 곽영(郭嶸) 및 조방장(助防將) 이지시(李之詩)ㆍ백광언(白光彦) 등과 함께 전라도 군사를 이끌고 오고, 충청 순찰사 윤국형(尹國馨)이 그 도의 방어사 이옥(李沃) 및 절도사(節度使) 신익(申翌) 등과 함께 충청도 군사를 이끌고 왔는데 무리가 수만이었으며, 경상 순찰사 김수(金睟)는 사졸을 잃고 단지 군관 30여 인만 이끌고 왔다. 이에 약속한 대로 6월 4일에 각자 길을 나누어 진격해 양천(陽川) 후포(後浦)에서 집결하였는데, 백광언이 선봉장으로 용인(龍仁)에서 적을 만나 창졸간에 교전하다가 패하여 전사하면서 대군이 한꺼번에 산이 무너지고 바닷물이 빠지듯 저절로 궤멸되어 어떻게 막을 도리가 없었으며, 그 결과 군기(軍器)와 치중(輜重)을 몽땅 적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그런데 뒤에 듣건대 처음에 왔던 적은 3명뿐이었고 그 뒤에 온 적도 겨우 1백 명에 불과했다고 하는데, 양도(兩道)의 수만 군사가 백 명의 적을 보고 혼비백산하여 마치 폭풍에 나뭇잎 떨어지듯 하였으니, 이는 옛날에 보지 못했던 일이었다.그런데 3도 군사가 모이게 된 것부터가 그러하였다. 김수는 이미 패망한 뒤끝이라서 겨우 자기 몸만 왔고, 윤국형은 원래 장재(將才)가 못 되었다. 그리고 이광은 변란 소식을 듣고서도 난을 구하러 달려갈 뜻이 없었는데, 본도에 있을 때 광주 목사(光州牧使) 정윤우(丁允祐)가 이광을 찾아가서 임금을 위해 충성을 다해야 하는 의리를 극력 말했어도 따르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군대를 동원하는 명이 내려오고 나서야 비로소 급히 서둘러 군사를 모은 뒤 공주(公州)까지 갔다가 경성을 지키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는 곧바로 군대를 해산시켰는데, 이때에 이르러 재차 기병(起兵)했다가 재차 무너졌으므로 조야(朝野)가 모두 이광을 죄인으로 여겼다.하여튼 이로부터는 나라에 방어하는 자가 없게 되어 적이 위세를 한껏 떨치면서 마치 무인지경을 달리듯 팔로(八路)를 석권하였다. 그리고 각 두목들을 제도(諸道)에 나누어 보내고 수가(秀家) 자신은 경성에 주둔하였는데, 부산에서 평양에 이르기까지 각 사(舍)마다 보루를 쌓아 방벽을 삼았다. 이때 거느린 적의 무리가 대략 25~26만쯤 되었다고 하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정탐을 잘하지 못해 실제로 몇만이 되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한편 청정(淸正)은 함경도에 들어가 왕자 임해군(臨海君)ㆍ순화군(順和君) 및 수행한 재신(宰臣) 김귀영(金貴榮)ㆍ황정욱(黃廷彧)ㆍ황혁(黃赫) 등을 사로잡아 구류시켰고, 기보(畿輔)의 적은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을 파헤치는 등 국세가 미약한 탓으로 신인(神人)에게 비통함을 안겨 주었는데, 다행히도 평양으로 진출한 적의 경우만은 순안(順安) 일보 직전에서 멈추고 진격하지 않았다.이 와중에서 이광(李洸)의 직책이 깎이고 권율(權慄)이 그를 대신한 뒤로 정기(旌旗)가 성벽 위에 힘차게 나부끼고 옛 모습이 일신되었는데, 권율이 군사를 이끌고 북상(北上)하다가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대첩을 거두었다. 초토사(招討使) 이정암(李廷馣)은 연안성(延安城)을 지키면서 성을 포위한 적을 격퇴하였다. 전라 수사(全羅水使) 이순신(李舜臣)ㆍ이억기(李億棋) 등은 여러 차례에 걸쳐 수군으로 적을 꺾으며 전승을 거두었다. 의병 역시 각처에서 다투어 일어나 관군에 호응하였다. 그 중에서도 경상도의 김면(金㴐)ㆍ곽재우(郭再佑)와 전라도의 고경명(高敬命)ㆍ김천일(金千鎰)과 충청도의 조헌(趙憲)ㆍ영규(靈圭)가 더욱 유명하였으며, 기타 각 고을에서 일어난 소규모의 의병들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는데, 나라의 명맥이 이들 덕분에 보존될 수가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는 중국 조정에서 원군을 내보냄으로써 위태로운 나라를 구하는 공적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었다.
- 2020-09-21 | NO.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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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남과 호남의 인물들, 도협총설 104조항 〔陶峽叢說 一百四則〕 -도곡집
- 도협총설 104조항 〔陶峽叢說 一百四則〕 -도곡집 제28권 / 잡저(雜著) : 이의현(李宜顯, 1669~1745)102. 조선조에서는 양남(兩南) 지방의 인물이 가장 현달하였으니, 경주(慶州)에는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이고, 안동(安東)에는 충정공(忠定公) 권벌(權橃)과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과 백담(栢潭) 구봉령(具鳳齡)과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이고, 상주(尙州)에는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과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와 창석(蒼石) 이준(李埈)이고, 성주(星州)에는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동강(東崗) 김우옹(金宇顒)이고, 진주(晉州)에는 남명(南冥) 조식(曺植), 보덕(輔德) 조지서(趙之瑞)이고, 대구(大丘)에는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이고, 밀양(密陽)에는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이고, 선산(善山)에는 하위지(河緯地) 선생과 경은(耕隱) 이맹전(李孟專)과 신당(新堂) 정붕(鄭鵬)과 송당(松堂) 박영(朴英)이고, 인동(仁同)에는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이고, 함양(咸陽)에는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과 옥계(玉溪) 노진(盧禛)이고, 청도(淸道)에는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과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이고, 합천(陜川)에는 야천(冶川) 박소(朴紹)이고, 영천(永川)에는 사간(司諫) 곽순(郭珣)이고, 함안(咸安)에는 의정(議政) 어세겸(魚世謙)이고, 금산(金山)에는 매계(梅溪) 조위(曺偉)이고, 영천(榮川)에는 화포(花浦) 홍 선생(洪先生 홍익한(洪翼漢))이고, 예천(醴泉)에는 수헌(睡軒) 권오복(權五福)과 의정(議政) 정탁(鄭琢)이고, 용궁(龍宮)에는 참판 문근(文瑾)이고, 함창(咸昌)에는 문광공(文匡公) 홍귀달(洪貴達)과 양정공(襄靖公) 채수(蔡壽)와 교리 권달수(權達手)이고, 고령(高靈)에는 읍취헌(挹翠軒) 박은(朴誾)이고, 현풍(玄風)에는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과 장군 곽재우(郭再祐)이고, 예안(禮安)에는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와 월천(月川) 조목(趙穆)이고, 안음(安陰)에는 갈천(葛川) 임훈(林薰)과 동계(桐溪) 정온(鄭蘊)이고, 칠원(漆原)에는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이고, 산음(山陰)에는 덕계(德溪) 오건(吳健)이고, 사천(泗川)에는 구암(龜巖) 이정(李楨)이 있다.전라도 나주(羅州)에는 금남(錦南) 최부(崔溥)와 눌재(訥齋) 박상(朴祥), 사암(思菴) 박순(朴淳)과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와 백호(白湖) 임제(林悌)이고, 광주(光州)에는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과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 장군 김덕령(金德齡)과 금남(錦南) 정충신(鄭忠信)이고, 남원(南原)에는 사인(舍人) 정황(丁熿)과 병사 황진(黃進)이고, 장성(長城)에는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이고, 익산(益山)에는 양곡(陽谷) 소세양(蘇世讓)이고, 김제(金堤)에는 찬성 이계맹(李繼孟)이고, 영암(靈巖)에는 소은(素隱) 신천익(愼天翊)이고, 영광(靈光)에는 수은(睡隱) 강항(姜沆)이고, 보성(寶城)에는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이고, 창평(昌平)에는 송강(松江) 정철(鄭澈)과 기옹(畸翁) 정홍명(鄭弘溟)이고, 태인(泰仁)에는 일재(一齋) 이항(李恒)이고, 강진(康津)에는 청련(靑蓮) 이후백(李後白)이고, 해남(海南)에는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과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과 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이니, 이상의 분들은 유현(儒賢)과 절개를 지킨 선비, 문인과 명신, 양장(良將) 아닌 이가 없다.기타 경재(卿宰)와 시종관과 훌륭한 행실을 닦으면서 스스로 삼간 선비가 매우 성대하게 함께 배출되어 조정에 나열된 자 중에 양남 지방 사람이 거의 절반을 넘었으니, 이 때문에 양남 지방을 칭하여 인재의 창고라고 하였다. 그런데 인조조 이후로는 점차 예전에 미치지 못하더니, 지금에는 더욱 쇠하여 말할 만한 것이 못 된다.
- 2020-12-11 | NO.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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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사정기 永思亭記 - 허백당문집 제4권
- 영사정기 永思亭記 - 허백당문집 제4권 : 용재(慵齋) 성현(成俔, 1439~1504)최후(崔侯)가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로 있다가 외직인 옥과 현감(玉果縣監)으로 나가게 되었다. 그가 출발할 때 우리 집으로 와서 나에게 말하였다.“나는 광주(光州) 사람입니다. 그래서 광주 경내에 세거(世居)하면서 양친을 받들어 모시고 있었는데 지금은 부모님이 돌아가시어 건지산(巾之山) 기슭에 장사 지냈는데, 건지산은 집에서 10리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정자를 지어 ‘영사(永思)’라 이름하고 아침저녁으로 바라보면서 사모하는 마음을 붙이고 있습니다. 운각(芸閣)에서 공을 종유한 지 하루 이틀이 아니니 한마디 말을 받아 돌아가고 싶습니다.”나는 ‘영원히 효심을 지닌다.〔永思〕’라는 뜻이 참으로 크다고 본다. 이는 《시경(詩經)》에서 ‘영원히 효도할 것을 생각하는지라, 그 효심이 법이 된다.〔永言孝思, 孝思維則.〕’라고 하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무릇 사람에게 생각이 일어나는 것은 반드시 이목을 통해 느끼는 바가 있어서인데, 마음이 맡은 일은 생각하는 것이니 생각하면 반드시 그 정성을 다하게 되고, 그 결과 반드시 자신의 직분에 마땅히 해야 할 바를 다하게 된다. 집 안에 들어가서는 부모에게 효도할 것을 생각하고 출사해서는 임금에게 충성할 것을 생각하는데, 그 마음은 매 한가지인 것이다.부모가 자식에 대해서 더할 나위 없는 지극정성으로 자애롭게 따뜻이 보살펴 주었으니, 자식 된 자가 그 망극한 은혜를 다 값을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오직 나의 마음과 힘을 다하여 부모의 뜻을 공경히 순종하여 어김이 없어야 할 것이다. 옷이 따뜻한지 추운지를 여쭈어 그 마땅하게 해 드릴 것을 생각하고, 음식을 달고 부드럽게 하여 부모의 구미에 맞도록 할 것을 생각하며, 병들어 아프거나 몸이 가려울 때는 공경히 안마하고 가려운 데를 긁어 드릴 것을 생각하고, 출입할 때는 앞서기도 하고 뒤에 따라가기도 하여 공경히 부축할 것을 생각하며, 기쁜 얼굴빛과 부드러운 태도를 지녀 그 효심을 일으킬 것을 생각해야 한다. 출세하여 세상에 이름을 드날려 부모의 영예를 현창할 것을 생각하되 혹 불행히도 부모가 죽게 되면 상사에는 슬픔을 생각할 뿐이고 제사에는 공경을 생각할 뿐이니, 마치 부모의 탄식하는 음성을 곁에서 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하고 국그릇이나 담장에서 부모의 모습을 뵙기라도 하는 것처럼 하여 언제 어디서라도 생각하지 않음이 없어야 하는데, 하물며 그 부모가 묻힌 선산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선인(先人)이 이곳에 혼백을 남긴 것을 생각한다면 나아가서는 부모의 묘소를 둘러보고서 그 봉축과 도랑을 수리할 것을 생각하고 그 잔디와 나무를 잘 기를 것을 생각하며, 물러나서는 잔디와 나무가 푸르게 잘 자란 것을 보고서 사모하는 마음을 가눌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자를 지은 까닭인 것이다.오래도록 이러한 마음을 생각하면 효심이 줄어들지 않을 것이고 효심이 줄어들지 않으면 능히 그 직분을 다하게 될 것이다. 최후가 능히 부모를 섬기는 정성을 임금을 섬기는 일에 옮기고, 또 능히 임금을 섬기고 남는 충성을 미루어 이 현(縣)에서 자신의 직분을 다한다면, 옥과의 백성들이 그 혜택을 받는 것이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최후는 문사(文詞)로 과거에 급제하여 명성이 조정에 자자하다. 이번에 이처럼 웅재(雄才)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지방으로 내려가 탄환 같은 소읍(小邑)을 다스리게 되어, 사람들이 모두들 난봉(鸞鳳)이 가시나무에 앉아 곤욕을 당한다고 애석해하지만, 부모에 대한 효심을 길이 간직하려는 최후의 마음에서 볼 때는 조금 위로가 되기도 할 것이다. 최후는 아무쪼록 노력할지어다.소양(昭陽) 단오(端午) 뒤 3일에 경숙(磬叔)은 기문을 쓴다.[주-D001] 영사정기(永思亭記) : 옥과 현감(玉果縣監)으로 부임하는 최형한(崔亨漢, 1460?~1504)을 위해 그의 양친 묘소가 바라보이는 곳에 위치한 정자에 붙인 기문으로, 1493년(성종24) 5월 8일에 지었다. 정자의 이름은 《시경》 〈대아(大雅) 하무(下武)〉에 “영원히 효도할 것을 생각하는지라, 그 효심이 법이 된다.〔永言孝思, 孝思維則.〕”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지은이는 이 ‘영원히 효심을 지니는 것〔永思〕’에 대하여 가정과 조정에서의 적절한 마음가짐을 언급한 다음, 효와 충은 한가지 마음이고 이 마음을 미루어 고을을 다스릴 것을 당부한 뒤, 유능한 인재가 지방관으로 내려가는 것을 위로하고 있다. 이 글은 사(思)의 의미를 《예기》 등의 구문을 인용하여 부모와 임금, 그리고 고을로 확장해 나간 것이 특징이다.[주-D002] 최후(崔侯) : 최형한을 말한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탁경(倬卿)이다. 1483년(성종14)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전교서 정자(典校署正字)가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연이어 양친의 상을 당하였고 복을 마친 뒤에 사헌부 감찰을 맡았다. 1493년 옥과 현감으로 나갔다가 내직으로 들어와 1498년(연산군4)에 사간원 헌납이 되고, 이해 4월에 장령이 되었다. 1503년 영암 군수(靈巖郡守)가 되었다. 다음 해 갑자사화 때 연산군의 폭정에 항의하여 궁궐 앞에서 대명(待命)하다가 굶어 죽었다.[주-D003]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 사헌부 감찰을 고려 시대 관직으로 표현한 것이다. 《企齋集 監察李侯墓碣銘》 전중시어사는 고려 시대 어사대(御史臺)의 벼슬 이름인데, 이 어사대의 기능을 한 것이 조선 시대의 사헌부여서 어사대는 사헌부의 별칭으로 쓰였다.[주-D004] 운각(芸閣)에서 …… 지 : 대본에는 ‘從公藝閣者’로 되어 있는데, 규장각본에 근거하여 ‘藝’를 ‘芸’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운각은 교서관(校書館)의 별칭이다. 운각은 운향각(芸香閣)의 준말로, 고려 시대에 경적(經籍)과 축문(祝文)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인 비서성(秘書省)의 별칭인데, 운초(芸草)가 본디 서적의 좀벌레를 없애는 효과가 있어 서고에는 반드시 운초를 비치했던 데서 유래한 말이다. 최형한(崔亨漢)이 1484년(성종15)에 전교서 정자(典校署正字)를 맡은 적이 있는데, 이 전교서는 1466년(세조12)에 교서관을 고친 이름으로, 1484년에 다시 교서관으로 고쳤다. 성현과 교서관의 관계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않으나, 성현이 1484년 《풍소궤범(風騷軌範)》 등의 서책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최형한과 교유하였을 가능성이 높다.[주-D005] 그 효심이 …… 말 : 대본에는 ‘孝思維則之思也’로 되어 있는데, 규장각본에 근거하여 ‘之’ 뒤의 ‘思’를 ‘辭’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주-D006] 무릇 …… 있어서인데 : 이 글의 취지와 관계가 깊은 진사도(陳師道)의 〈사정기(思亭記)〉에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에 따라 생각이 달라지니 …… 묘사를 보면 공경하는 마음이 일어난다.〔目之所視而思從之 …… 視廟社則思敬.〕”라고 한 구절을 연상하게 하는 표현이다.[주-D007] 마음이 …… 것이니 :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마음이 맡은 일은 생각하는 것이니, 생각하면 그 맡은 일을 잘 해내고 생각하지 않으면 맡은 일을 잘 해내지 못한다.〔心之官則思, 思則得之, 不思則不得也.〕”라고 하였다.[주-D008] 옷이 …… 지녀 : 《예기》 〈내칙(內則)〉에 “며느리가 시부모의 거처에 가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목소리를 부드럽게 해서 입고 있는 옷이 춥고 더운지를 묻고 아프고 가려운 데는 없는지 여쭈어 공경히 안마도 하고 긁어 드리기도 한다. 출입할 때는 앞서기도 하고 뒤서기도 하여 공경히 부축해 드린다.〔及所, 下氣怡聲, 問衣燠寒, 疾痛苛癢, 而敬抑搔之. 出入則或先或後, 而敬扶持之.〕”라고 하는 말이 있다.[주-D009] 혹 …… 되면 : 대본에는 ‘其惟不幸而死亡焉’으로 되어 있는데, 규장각본에 근거하여 ‘惟’를 ‘有’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주-D010] 상사에는 …… 뿐이니 : 《논어》 〈자장(子張)〉의 “선비가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바치며, 얻을 것을 보면 의로움을 생각하며, 제사에는 공경을 생각하고, 상사에는 슬픔을 생각한다면 괜찮을 것이다.〔士見危致命, 見得思義, 祭思敬, 喪思哀, 其可已矣.〕”라고 하는 구절에 나오는 말이다.[주-D011] 마치 …… 하고 : 《예기》 〈제의(祭儀)〉에 “제사 지내기에 앞서 재계한 지 3일이 되면 마침내 고인의 모습이 눈앞에 떠오르게 된다. 이리하여 제삿날, 사당 안으로 들어가면 고인의 영혼이 그 자리에 있는 것과 방불하게 느껴지며, 제사를 마치고 나가려고 하면 반드시 마음이 숙연해져서 고인의 음성을 듣는 것 같으며, 문밖으로 나가 들으면 반드시 방 안에서 뚜렷하게 고인의 탄식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齊三日, 乃見其所爲齊者. 祭之日, 入室, 僾然必有見乎其位, 周還出戶, 肅然必有聞乎其容聲, 出戶而聽, 愾然必有聞乎其歎息之聲.〕”라고 하였다.[주-D012] 국그릇이나 …… 하여 : 요(堯) 임금이 생전에 허름한 궁실에서 거처하고 음식도 조촐하였으므로, 요 임금이 죽은 뒤에 순(舜)이 3년 동안이나 사모하면서 “앉으면 담장에 요 임금이 나타나고, 밥상을 대하면 국그릇에 요 임금이 보였다.〔坐則見堯于墻, 食則覩堯于羹.〕”라는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53 李固列傳》[주-D013] 난봉(鸞鳳)이 …… 당한다 : 현사(賢士)가 낮은 지위에 있어 자신의 역량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후한 때 고성 영(考城令) 왕환(王渙)은 엄맹(嚴猛)한 정사를 숭상하였는데, 그 고을 포(蒲)의 정장(亭長)인 구람(仇覽)이 덕으로 사람을 교화시킨다는 말을 듣고 그를 주부(主簿)로 삼은 다음 그에게 말하기를 “주부는 진원(陳元)이란 사람의 죄과를 듣고도 처벌하지 않고 그를 교화하였다 하니, 응전(鷹鸇) 같은 맹렬한 뜻이 적은 게 아닌가?” 하니, 구람이 말하기를 “응전이라는 것이 난봉만 못합니다.” 하였다. 이에 왕환이 사과하고 그를 보내면서 말하기를 “가시나무는 난봉이 깃들 곳이 아니거니, 백 리의 작은 고을이 어찌 대현이 맡을 곳이리오.〔枳棘非鸞鳳所棲, 百里豈大賢之路?〕”라고 하고서 자신의 한 달 봉급을 그에게 주어 태학(太學)으로 보냈다고 한다. 《後漢書 卷76 循吏列傳》[주-D014] 소양(昭陽) : 고갑자(古甲子)로 천간(天干) 계(癸)를 의미하는데, 실록과 이재(李縡)의 《도암집(陶菴集)》 권31 〈장령최공묘갈(掌令崔公墓碣)〉을 상고하면, 최형한이 옥과 현감으로 나간 것은 1493년(성종24) 계축년에 해당한다.
- 2020-09-30 | NO.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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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준선 : 亭前種得澗松遲 뜰앞에 솔을 심어 그 빛이 더디)니
- 김용희(金容希, 1860~1927)가 처소로 지은 만취정에서 후석 오준선은 위험한 가지에서 학몽을 꾸는 처사를 걱정하는 시를 읊는다. 이는 자신이 면암 최익현의 항일의진에 직접 몸으로 차여하지 못한 죄책감이 베어있다.亭前種得澗松遲 뜰앞에 솔을 심어 그 빛이 더디(지지遲遲 )니爲愛貞姿善護待 그 모습 사랑하여 정성껏 돌봤도다.不受風霜全晩節 풍상을 능멸하여 만절(晩節)을 보존하고羞同桃李媚春時 도리(桃李)의 미춘시(媚春時)를 수치로 여겼도다.遙聞淸枝龍吟曲 고요한 맑은 밤에 용음(龍吟)이 들려오고ㅇ借危巢鶴夢枝 위험한 가지위에 학몽(鶴夢)이 외롭도다.獨有歲寒心事在 세한(歲寒)의 굳은 마음 혼자서 간직하니寧隨節物共推移 시절의 변화 따라 그 마음 옮길손가.
- 2023-07-19 | NO.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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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횡묵-光州府
- 無等山下州 무등산 아래 고을은 州大亦無等 고을 크기도 비할 데 없으니幅員與人戶 면적과 호구를 本與羅對稱 본래 나주와 대칭하였네內有宣惠郞 안에 선혜랑을 두고 外數光州幷 밖으로 광주병을 헤아려 보니城池圍地合 성지는 땅을 둘러 합하고結搆入雲逈 건물은 구름에 들어가 멀구나 葱葱無隙圡 빽빽하여 틈 없는 땅에 人家窄鍾鼎 인가는 비좁아 종과 솥 같고太守埒古侯 태수는 옛 제후와 비등하니 赫赫官不冷 관청이 번쩍번쩍하여 썰렁하지 않네今嵗陛爲府 금년에 부로 승격했으니 譬如錦尙褧 비유하면 비단옷에 홑옷을 껴입은 것 같고 南道歸專轄 남도가 오로지 관할함에 돌아가니 下風聽肯綮 아래서 긍경을 듣네百度與俱升 온갖 법도가 함께 올라가 仰望靑雲頂 청운의 끝을 우러러 보니節旄霜風凜 절모가 서리 바람처럼 늠름하고澄堂秋水瀅 징당은 가을 물처럼 맑도다野渡無時閑 들 나루는 한가할 때가 없으니 來去列郡艇 여러 고을의 배가 드나들고 元來畵裏煥 원래 그림 속의 빛남 又從天上挺 또한 천상 따라 빼어나도다甘棠何蔽芾 감당은 어찌 그리도 무성한고召伯憂民極 소백이 지극히 백성을 근심했다네儼共完營屹 엄연히 전주와 함께 우뚝하니氣數有除乘 운수에 득실이 있도다. -총쇄록선(叢鎖錄選)*지도군수로 있으면서 광주에 왔을 때 느낌을 적은 시이다.오횡묵(吳宖黙, 1834-미상)의 자는 성규(聖圭)이며 호는 채원(菜園)이다.
- 2018-07-27 | NO.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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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횡묵-光州皇華樓下有吟
- 皇華樓畔縟儀雍 황화루 가에 성대한 위의가 화락하니稽首微臣懍所鍾 미천한 신하 두려움으로 머리 조아리네榮寵忝叨新拜職 외람된 총애를 받아 새 직책 받았으나愚痴長似舊時容 어리석음은 늘 예전의 모습과 같구나計程麗郡三舂近 여수군 여정을 헤아리니 근 300리 길赴莅政堂八日庸 정당에 부임하여 8일의 공을 쌓았네位置成規如鑄器 위치 잡아 규모를 이룸은 주물과 같으니姸麤必也在陶鎔 아름답고 추함은 반드시 도야에 있다네 -여수군총쇄록(麗水郡叢瑣錄)오횡묵(吳宖黙, 1834-미상)의 자는 성규(聖圭)이며 호는 채원(菜園)이다.황화루는 지금의 광주광역시 중심부에 있었던 광주읍성내의 누각으로 임금의 칙사, 정부 고관, 기타 내외 귀빈을 맞이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는데, 칙사나 외국 사신을 맞이할 때 환영의 의미로 부르는 황화곡(皇華曲)에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한다. 또는 ‘황황자화(皇皇者華)’라는 시경(詩經) 소아편에서 연유한 것으로 조선시대에 중국의 천자나 천자의 사신을 높여 부르는 말이라고도 한다. 1751년 부임한 목사 김시영(金始煐)이 중수하였다. 광주시립민속박물관에서 간행한 ‘광주읍성’에 따르면, 황화루는 일제강점기 구 광주형무소 앞으로 옮겨졌다가 1971년 광주교도소를 문화동으로 이전하는 과정에서 없어졌다.
- 2018-07-12 | NO.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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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녀봉과 김덕령 장군의 사랑
- 풍암지구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금당산金塘山은 해발 304m로 옥녀봉과 황새봉을 거느리고 있지요. 금당산에서는 일찍부터 옥녀봉과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인 충장공忠壯公 김덕령金德齡(1567∼1596) 장군 사이에 얽힌 설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먼저 옥녀봉을 알면 이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요. 풍암지구가 조성되기 전부터 이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어른들로부터 김덕령 장군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전해 들었다고 합니다. 옥녀봉은 금당산의 한 봉우리예요. 산 정상이 있고, 양 옆으로 옥녀봉과 황새봉이 있습니다. 주민들은 산꼭대기가 옥녀봉일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아요. 산의 정상에 오르면 김덕령 장군의 기개를 볼 수 있는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금당산에는 유독 김덕령 장군의 흔적과 자취가 서린 공간들이 많아요. 산 정상 옥녀봉에는 김덕령 장군을 가리키는 장사바위와 장사농짝이 있고, 김덕령 장군이 백마를 타고 온 말 발자국과 김덕령 장군이 말에서 내릴 때의 발뒤꿈치 흔적, 그리고 옥녀와 나란히 앉아 무등산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던 물동이바위의 자국 등이 있지요. 옥녀봉에는 이처럼 김덕령 장군과 관련된 흔적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죠. 다만 지금은 많이 퇴색되고 닳아져 아쉬움을 더한다는 것이 주민들의 반응입니다. 옥녀봉이라 부르는 바위들을 눈여겨 살펴보면 예전의 모습이 완연하게 살아있는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김덕령 장군이 말을 타고 달려와 산 정상까지 단숨에 오르다보니 말 발자국이 생겼다고 합니다.김덕령 장군은 무등산에서 금당산으로 와서 나중에 옥녀를 만나게 되지요. 무등산에서 무술연습을 하다가 잠시 쉬고 있을 적에 멀리 보이는 금당산에서 가끔씩 어여쁜 아가씨의 모습이 스쳐 지나가는 듯한 환상을 보곤 했다고 해요. 김 장군은 이 환상이 꿈이 아니고, 현실이길 바라며 자주 금당산 쪽을 바라봤습니다. 이를 지켜본 휘하 장군이 금당산에 옥녀라는 아가씨가 있는데 이를 본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고 일러주자 김 장군은 옥녀에 대해 오매불망 연정을 품게 되었다는 것이지요.그러던 어느 날 옥녀의 환상이 너무 가깝게 느껴지자 김 장군은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는 백마를 타고 단숨에 무등산에서 금당산 봉우리 까지 건너 뛰어갔다고 합니다.이렇게 해서 김덕령 장군이 옥녀를 만나게 되는데 이 때 옥녀는 신암 마을에 살면서 금당산 절에 올라가 날마다 기도를 드리며 절집 물을 길러갔다고 합니다. 김 장군은 옥녀를 만나 그녀에게 매일같이 무등산에서 옥녀의 환상을 봤다며 무등산 쪽을 보고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고 합니다.옥녀는 김 장군을 만날 때마다 금당산 약수를 뜬 조그만 항아리를 통째로 드리곤 했지요. 물을 마신 김 장군은 그 항아리를 옆 자리에 놓았는데 어찌나 그 손의 힘과 기氣가 셌던지 바위에 물동이 자국이 나게 됐다는 것 아닙니까.옛날 쓴 책을 보면 평소에도 김덕령 장군은 용맹과 힘이 뛰어나 달아나는 개를 쫓아가 잡은 뒤 그 고기를 찢어서 다 먹기도 하고, 말을 타고 달려서 작은 창문으로 한 칸 방에 들어갔다가 곧 말을 돌려서 뛰어 나오기도 하며, 누각 지붕 위에 올라가 옆으로 누워 굴러서 처마를 타고 내려와 누각으로 들어가기도 할 정도로 힘도 세고 말 타기를 자유자재로 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또 활과 창을 늘 가지고 다녔던 김 장군이 대숲에 있던 사나운 범을 향해 박두樸頭(조선시대 무과 시험 때나 교습용으로 사용하던 화살)로 먼저 쏘니 범이 입을 벌리고 쏜살같이 앞으로 달려들었고 다시 창을 뽑아 대적하니 창날이 범의 턱 아래로 나와 땅에 박혀 꼬리만 흔들 뿐 더 이상은 움직이지 못했다고 합니다.이 같은 김 장군의 용맹스러움에 조선 중기의 문신 이귀李貴가 천거하는 글에는 "지혜는 공명孔明과 같고 용맹은 관우關羽보다 낫다"고 하자 이에 세자가 불러서 익호장군翼虎將軍에 임명했지요. 나중에 임금이 다시금 초승장군이라고 고쳐 불렀다고 합니다. 일찍이 철퇴 두 개를 허리 아래 좌우에 차고 다녔는데 그 무게가 각각 백 근이 되니 온 나라에서 그를 신장神將이라고 부를 만큼 힘이 셌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김 장군이 금당산으로 옥녀를 만나러 왔다가 돌아갈 때면 반드시 물통골에 들러 목욕을 하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물통골은 원광대학교 한방병원 방향으로 지금의 신암교회 뒤편에 있는 계곡을 가리키지요. 한편 임진왜란이 끝난 뒤 김덕령 장군이 용력이 있으면서도 출전하지 않았다고 하여 나라에서 역적으로 몰아 죽이려고 했으나 그를 쉽게 죽일 수가 없었지요. 이 때 김덕령 장군이 "나를 죽이려면 ‘만고충신 효자 김덕령’이라는 비를 써 달라"고 요구해 그대로 만들어주자 김 장군은 "내 다리 아래의 비늘을 뜯고 그곳을 세 번 때리면 죽는다"고 알려 주어 죽음을 당했다고 전해옵니다. 나중에 김 장군이 죽은 뒤 비문의 글자를 지우려고 해도 더욱 또렷해지자 그냥 그대로 두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죽은 김덕령 장군을 두고 옥녀는 그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산 정상에서 매일같이 무등산을 바라보며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옥녀봉과 김덕령 장군의 사랑은 여기 수록된 이 설화는 전국문화원연합회 광주시지회 향토사료조사 광주광역시 구전설화(2005)에 수록된 것을 재각색한 것으로, 실재하는 김덕령 장군을 설화 속의 김덕령 장군으로 만날 수 있다.
- 2018-05-28 | NO.211